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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자비마립간이 뭐야?" }
{ "from": "gpt", "value": "**자비마립간**, 재위 458년 음력 8월 ~ 479년 3월 12일)은 신라의 제20대 임금이다. 눌지 마립간의 맏아들이며, 실성 이사금의 외손자이다. 왕비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로, 재위 4년째인 461년 음력 2월에 부인으로 맞았다.\n\n459년 음력 4월 왜인들이 병선 백여 척으로 습격하고 월성을 에워쌌다. 신라군은 마립간의 지휘에 따라 성에서 지키다가 적이 퇴각하는 것을 기다려 추격, 바다 어귀로 몰아 물에 빠져 죽게 한 적병이 절반이 넘었다. 462년 음력 5월 다시 왜가 쳐들어와 활개성을 점령하고 백성 1천여를 생포했다. 이듬해인 463년 음력 2월 또다시 쳐들어와 삽량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립간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해 매복해 있다가 후퇴하는 왜병을 요격, 크게 이겼다. 이 해 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변경에 두 개의 성을 쌓고 음력 7월에 군을 사열하였으며,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했다.\n\n468년 봄,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을 습격하였다. 이해 음력 9월 하슬라 주민중 15세 이상 되는 자들을 징집해 이하에 성을 쌓았다. 마립간은 이후 방위체계 확립에 주력, 469년 음력 4월의 수해 복구를 위해 음력 7월에 신라 전역을 순행했으며, 470년 삼년산성을, 471년 모로성을 쌓고, 473년 명활성을 수리했으며, 474년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475년 음력 1월에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겻다. 그후 12년간 명활성은 왕의 거처로 사용됐다.\n\n475년 음력 9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자, 개로왕이 태자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마립간이 백제에 원군을 보냈으나, 신라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백제가 무너지고 개로왕은 이미 살해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신라본기에는 474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는 모두 475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본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n\n476년 음력 6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자, 마립간이 덕지에게 명해 격퇴하게 하여 2백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477년 음력 5월에 또다시 크게 군을 일으켜 다섯 갈래로 쳐 왔으나 소득 없이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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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미사흔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미사흔**, 또는 **미사흠**, **미해**는 신라 초기의 왕족이자 내물 이사금의 3남으로, 눌지 마립간의 동생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402년 음력 3월 실성 이사금과 왜가 우호를 맺으며 왜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실성 이사금이 죽고 눌지 마립간이 즉위한 뒤인 418년에 박제상의 도움으로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에 돌아온 뒤에는 서불한 벼슬을 지냈다.\n\n박제상의 미사흔 구출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 45 〈박제상전〉에 자세하며,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두 기록의 연대가 다르다. 이 문서에서는 삼국사기 기록을 따른다.\n\n박제상의 딸과 결혼했다. 자비 마립간의 왕비가 그의 딸이다.\n\n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미질기지파진간기이 미사흔으로 추정된다." }
{ "from": "user", "value": "개성시의 관광명소 및 유적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개성은 고려왕조 500년의 수도로서, 명승고적이 많다. 시내의 대표적인 역사적 유적 및 명승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n\n교외에도 왕건릉과 공민왕릉 같은 역사적 유적과 박연폭포 같은 명승지들이 많다.\n\n## 기타\n개성민속여관은 선죽동에 있으며, 조선시대 때 지어진 많은 전통한옥들과 봉사기관들이 많이 밀집해 있다. 이것은 한국 전쟁 전에는 개성 주민들의 주택이었던 것을 여관시설로 개조한 것이다. 1975년에 김일성이 \"우리의 문화와 풍습들을 잘 보존해야겠다.\"는 지시를 내리자, 이 곳을 \"보전거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여관으로 개조하였던 것이다. 기타 관광시설으로는 자남산려관과 개성민속려관이 있다. 개성의 주요 관광지는 한때 대한민국의 관광객에도 개방되기도 했으나, 2020년 현재 개성시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오는 관광을 중단한 상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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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숙종의 개요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성은 이, 휘는 순, 본관은 전주. 초명은 용상, 광, 자는 명보, 사후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이며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이다. \n\n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원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n\n1674년 8월에서 1720년 7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674년 8월에서 1674년 10월까지 영의정 허적이 섭정하였으며 1674년 10월에서 1717년 3월까지 친정하였고 1717년 3월에서 1720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아들 경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n\n재위기간 중 강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정치를 통해, 서인과 남인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n\n45년 10개월을 재위하여 조선 역대 임금들 중 영조 에 이어서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길며, 영조, 태조, 고종, 광해군, 정종에 이어 여섯 번째로 장수한 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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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에도 막부 제5대 쇼군이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4남으로 아명은 **도쿠마쓰**이다. 생모는 이에미쓰의 측실 오타마노가타)이다.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동생으로 고즈케 다테바야시번 25만 석의 번주로 임명되었으나 1680년 이에쓰나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5대 쇼군이 되었다. 키가 124cm으로 인류 역사상 키가 제일 작은 대장군이자 국가 원수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 번주 시절\n쇼호 3년 에도 성에서 3대 쇼군 이에미쓰의 4남으로 태어났다. 게이안 4년 4월 둘째 형인 나가마쓰와 함께 영지를 부여 받아 오미, 미노, 시나노, 스루가, 우에노 등지의 15만 석 영주가 되었으며 가신단 또한 구성하였다. 같은 달 부친 이에미쓰가 사망하여 같은 해 8월 형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4대 쇼군으로 취임, 쇼군 선지를 받았다.\n\n조오 2년 관례를 치르고 종 3위 주조에 임명된 뒤 이에쓰나로부터 편휘를 하사받아 「**도쿠마쓰**」에서 「**쓰나요시**」로 개명하였다.\n\n메이레키 3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다케바시의 저택이 소실되어 같은 해 9월 간다로 이주하였다. 간분 원년 8월 우에노 다테바야시의 지방 번주로서 25만 석의 영지와 성을 소유하게 되어 통칭 다테바야시 재상으로 불렸다. 간분 10년 마키노 나리사다를 3천 석 봉록의 다테바야시 중신으로 발탁하였다.\n\n## 쇼군 시절\n\n### 초기 치세\n엔포 8년 5월, 4대 쇼군인 형 이에쓰나가 후계자 없이 중태에 빠지자 그의 후사로 내정되어 에도 성 니노마루에 들었다. 같은 달 이에쓰나가 40세로 사망하면서 내대신 및 우근위대장의 직위를 받은 뒤 곧바로 쇼군에 취임하였다.\n\n취임 후 선대 시절의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를 파면하고 대신 자신의 쇼군 취임에 공이 컸던 홋타 마사토시를 새 다이로에 임명하였다. 이후 사카이 다다키요는 병으로 사망하였으나 사카이 우타노카미 가문을 개역하고자 결심한 쓰나요시는 측근 오메스케에게 사카이 다다키요가 정말 병사로 죽었는지 아니면 자신과 도쿠가와 쇼군가에 불충한 원한을 품고 자결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사카이 다다키요의 죽음에 유독 집착하였다고 한다.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쓰나요시는 이후 사카이 다다키요의 동생 사카이 다다요시에게 흠을 잡아 결국 개역시키는 데 머물렀다.\n\n마사토시의 등용 이후 쓰나요시는 당시 이미 처분이 확정되어 있던 에치고국 다카다번의 계승 문제의 결과를 뒤집고 각 번의 정치를 감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선대 쇼군인 이에쓰나가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리 하여라 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훼손시킨 쇼군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바쿠후의 회계 감사를 위해 간쇼긴미야쿠 제도를 도입하고 유능하지만 신분이 낮아 제대로 기용되지 못한 하타모토들의 등용에 힘썼다. 오기와라 시게히데 역시 이렇게 하여 등용되었다. 또한 바쿠후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된 도자마 다이묘 중에서도 일부가 바쿠후로부터 등용되어 중앙에 진출하였다.\n\n### 문치 정치로의 촉구\n또한 센고쿠 시대의 살벌했던 무단 정치의 기풍을 배제하고 덕을 강조하는 문치 정치를 더욱 강하게 추진하였다. 쓰나요시의 부친이자 3대 쇼군인 이에미쓰는 장남 이에쓰나의 후계자 지위를 확정하면서 다른 아들들이 쇼군의 지위를 넘보는 것을 막기 위해 차남 이하의 아들들에게는 유학을 공부할 것을 특히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쓰나요시는 당대의 유학자인 하야시 노부아쓰를 자주 초청하여 경서를 토론하고 사서와 주역을 바쿠후의 가신들에게 강의하였을 뿐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로 유시마 대성당을 건립하는 등 역대 쇼군들 중에도 가장 학문을 좋아한 쇼군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학의 영향으로 존왕심 또한 두터웠던 쓰나요시는 그때까지 1만 석에 불과하였던 황실 영지를 3만 석으로 늘렸고 야마토국 가와치국 일대의 황실 능을 조사하여 수리가 필요한 66개 능을 복구하였다. 구게의 영지 또한 대개 쓰나요시 시대에 증액되었다.\n\n그의 치세에 문화적으로 겐로쿠 시대가 열리고 경제도 번성하는 한편 아코번의 무사들이 하타모토 기라 요시히사의 처소를 습격한 사건도 일어나 전 일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n\n동물의 생명을 중시하는 살생금지령을 발표해 많은 빈축을 샀으며 특히 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누쿠보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
{ "from": "user", "value": "크시슈토프 에우게니우시 펜데레츠키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크시슈토프 에우게니우시 펜데레츠키**는 폴란드의 서양 현대음악 작곡가이다." }
{ "from": "user", "value": "일대기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그는 데비카에서 태어나 프란치셰크 스콜리셰프스키에게 개인 작곡 레슨을 받았다. 후에 크라코프 대학과 크라코프 음악 아카데미에서 아르투르 말라프스키와 스타니스와프 비에호비치를 사사했다. 1958년에 졸업하고 나서 아카데미에 남아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가 가르친 사람으로는 이안니스 크세나키스가 있다.\n\n펜데레츠키의 초기 작품은 그가 받은 안톤 베베른, 피에르 불레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은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로, 52개의 현악기를 위한 곡이다. 여기에서 펜데레츠키는 브리지의 반대편의 현을 연주하고 활끝으로 보잉을 하는 등 확장된 연주법을 써서 참신한 텍스처를 만들었다. 그는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광경을 묘사하기 위해서 톤 클러스터를 적절히 사용했다.\n\n그의 성 루카 수난곡도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서로 다른 여러 스타일로 쓰였다. …애가에서 보인 것과 같은 텍스처와 바로크 형식이 균형을 맞추고 있고, 더 고전적인 화성이 쓰였다. 〈Stabat Mater〉 부분은 단순한 장화음으로 끝난다. 이 작품에서 펜데레츠키는 음렬주의를 썼고, 주 음렬에서 BACH 주제를 전통적인 화성과 실험적인 작품을 잇는 다리로 사용했다.\n\n1970년대 중반에 펜데레츠키의 작풍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에서는 톤 클러스터를 쓰지 않고 두 개의 선율음정, 반음과 삼온음을 집중적으로 썼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방법을 안톤 부르크너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이 기법은 교향곡 제2번 크리스마스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곡가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화성과 선율이 너무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곡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인 〈고요한 밤〉의 선율을 자주 인용하였다.\n\n1980년에 펜데레츠키는 Solidarity로부터 1970년 반정부 혁명 때 희생된 사람을 기리기 위한 그단스크 조선소에 만들어진 조각 작품의 제막식을 위한 곡을 위탁받았다. 그는 Lacrimosa라는 곡을 썼고, 후에 이를 폴란드어 레퀴엠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그의 후기작품 중 유명한 곡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초기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화려한 화성이 쓰였다. 첼로 협주곡 제2번과 Credo에서 보이듯이 최근에는 그의 작품이 더욱더 보수적 낭만주의 경향으로 가고 있다.\n\n그의 교향곡 제5번 한국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단악장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민요 새야 새야의 선율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였다." }
{ "from": "user", "value": "파워 매킨토시의 모델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뉴 월드 롬\n아래에는 최근에 나온 뉴 월드 기반의 파워 맥 라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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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파워북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초기 파워북\n초기의 파워북은 모토로라의 68000 시리즈 프로세서를 사용하여 68k 파워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1년 10월 첫 파워북인 파워북 100, 140, 170이 소개되었다. 이 제품들은 컴팩트한 디자인을 갖추었고 처음으로 트랙볼, 트랙패드, 팜레스트를 도입하여 다른 노트북 컴퓨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68k 파워북은 일반적인 용도에 적합한 파워북과 이동성이 강조된 파워북 듀오 두가지 제품군으로 나뉘어 판매되었다.\n\n한편 파워북 100은 매킨토시 포터블의 설계를 바탕으로 소니가 디자인과 생산을 맡았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파워북 550c와 같이 일본에서만 출시된 제품도 있었다.\n\n## 파워피씨 파워북\n1994년 애플 컴퓨터는 매킨토시의 프로세서를 파워피씨로 변경하였고 이에 따라 1995년 8월 파워피씨 프로세서를 사용한 파워북 5300과 파워북 듀오 2300c가 출시되었다. 그러나 파워북 5300은 안정성이 좋지 않았고 초기에 사용한 리튬 이온 배터리는 안전 상의 문제로 리콜되는 등의 문제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후 1996년 10월 시디롬을 내장한 파워북 1400cs가 출시되었고 뒤이어 1997년 파워북 3400c, 서브 노트북인 파워북 2400c가 출시되었다.\n\n## 파워북 G3\n1997년 11월 발표된 파워북 G3 \"캉가\"는 파워북 3400c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캉가는 빠른 속도로 작동하는 백사이드 캐시를 갖고 있어 상당히 높은 성능을 보여주었다. 1998년에는 DVD 드라이브와 화면 크기를 선택할 수 있었던 파워북 G3 시리즈 \"월스트리트\", \"PDQ\" 가 출시되었고, 1999년에는 USB 포트를 장착하고 14인치 모델로 단일화된 파워북 G3 \"롬바르드\", 2000년에는 SCSI 포트를 제거하고 FireWire 포트를 장착한 파워북 \"피스모\"가 출시되었다.\n\n파워북 G3는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면서 기존에 매킨토시에서 사용하던 ADB와 SCSI를 USB와 FireWire로 대체하였고, 피스모는 아이북에서 먼저 소개된 AirPort를 사용할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 이후의 파워북 G3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단정한 디자인 때문에 '아르마니 파워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n\n## 파워북 G4\n2001년 1월 티타늄 재질 케이스와 15.2인치 와이드스크린 액정 모니터를 장착한 파워북 G4가 소개되었다. 티타늄 파워북 G4는 두께가 전 모델인 파워북 \"피스모\"의 절반 정도인 1인치로 슬림한 노트북이었고 슬롯로딩 드라이브를 장착하였다. 2003년 1월에는 알루미늄 재질 케이스를 갖춘 12인치와 17인치 알루미늄 파워북 G4가 발표되었고 9월에는 FireWire 800 포트가 장착된 15인치 알루미늄 파워북 G4가 출시되었다. 알루미늄 파워북 G4는 프로세서 속도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다가 2005년 10월 마지막 파워북 G4가 출시되었다. 이때 프로세서 속도는 12인치 모델이 1.5 GHz, 15인치와 17인치 모델이 1.67GHz였다.\n\n파워북 G4는 케이스의 재질에 따라 티타늄 파워북 G4는 '타이북', 알루미늄 파워북 G4는 '알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n\n## 단종\n파워북은 파워맥과 달리 파워피씨 G5 모델이 출시되지 않았다. 이는 파워피씨 G5의 발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파워피씨 G5의 성능은 상당히 높았지만 발열이 많아 G5 프로세서를 두개 장착한 파워맥 G5는 수냉식 냉각 장치와 대형 팬을 장착했고 아이맥 G5는 덕트를 설치해 공기 흐름을 조절하였다. 또한 소비 전력 대 성능 비율에서도 인텔 프로세서에 비해 좋지 않았다. 이와 같은 약점은 특히 노트북 컴퓨터인 파워북 G4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었다.\n\n애플 컴퓨터는 2005년 WWDC에서 인텔 프로세서로의 이전을 발표하고 2006년 4월에 맥북 프로를 발표하면서 파워북을 단종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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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아이맥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아이맥**은 미국 애플사의 일체형 데스크톱 PC 브랜드 및 시리즈이다. 과거 매우 다양한 종류의 매킨토시를 만들고 있던 애플은 스티브 잡스의 복귀 이후 소비자들의 혼란을 없애기 위해 제품군을 대폭 단순화시켰는데, 전문가용 제품군인 맥 프로, 일반 사용자용 제품군인 아이맥, 콤팩트 데스크탑 제품군인 맥 미니로 세 가지였다. 이 중 아이맥은 일반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컴퓨터에 비해 사양이 매우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역사는?" }
{ "from": "gpt", "value": "최초의 아이맥은 윈도우의 선전으로 인해 애플이 여러 출시 제품들에서 연달아 실패하고 있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업계의 많은 사람들은 애플이 기존 운영체제를 버리고 인텔과 같은 계열의 PC의 판매를 기대했으나, 애플은 맥 플랫폼의 유지를 위하여 자사의 플랫폼이 유지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때 설계는 조너선 아이브가 담당했다.\n\n당시 로스엔젤레스의 애플의 광고 매니저였던 Ken Segall은 이 새로운 컴퓨터의 이름을 'iMac'으로 부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스티브 잡스는 이를 수락했다. 처음에 잡스는 'MacMan'이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Ken의 제안을 수락했다.\n\n2005년, IBM이 PowerPC의 데스크탑 개발의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에 애플은 WWDC에서 x86 아키텍처로 구동되는 새로운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컴퓨터를 선보였다. 이 아이맥은 최초로 인텔 코어를 탑재한 매킨토시 컴퓨터이며, 2006년 1월 10일에 발표된 아이맥과 맥북 프로부터 본격적으로 인텔 코어가 탑재되기 시작했다.\n\n2010년 7월 27일, 애플은 아이맥의 인텔 코어 프로세서 라인업을 업데이트 했다. 21.5\" 모델은 인텔 코어 i3 듀얼 코어를 탑재했고, 추가 구매로 i5 듀얼 코어를 사용할 수 있음을 발표했다. 하이앤드 27\" 모델은 인텔 코어 i5 쿼드 코어를 탑재했고, 추가 구매로 i7 쿼드 코어를 사용할 수 있다. 애플은 이와 함께 맥북에서만 사용할 수 있던 트랙 패드를 외장형으로 개량한 애플 매직 트랙패드를 함께 공개했다. 또한 추가 구매를 통해 광학적 드라이브 대신 SSD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n\n2011년 5월 3일, 애플은 썬더볼트를 탑재한 아이맥을 발표하였다. 코어는 샌디브릿지 i5와 i7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맥북 프로와 함께 소개된 100만 화소급 iSight 웹캠을 탑재했다.\n\n2012년 10월 23일, 애플은 새로운 아이맥을 공개했으며, 보다 얇아진 디자인, 새로운 애플 퓨전 드라이브 탑재, 더 빨라진 아이비 브릿지 인텔 i5와 i7으로 변경되었다. 그래픽 카드 역시 각 라인업에 맞게 교체되었으며, 그럼에도 전체적인 사이즈는 유지하였다. 다만 슈퍼 드라이브는 아이맥에 더 이상 탑재하지 않게 되었다." }
{ "from": "user", "value": "비교언어학이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비교언어학**은 같은 기원을 가진 언어들의 관계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다. 역사언어학의 한 분야이다. 언어는 계속 변화하므로 역사언어학에서는 공통의 조어에서 갈라진 여러 언어의 계통을 연구하고 고대 조어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같은 조어에서 갈라진 여러 언어들을 통틀어 한 어족이라고 이른다. 또 같은 어족 내에도 여러 하위 관계가 있을 수 있어 한 어족은 또 여러 어파로 나뉜다. 영국의 법률가 윌리엄 존스에 의하여 본격적인 비교언어학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언어 계통의 연구는 19세기의 역사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가 개척하였다. 이러한 언어 계통을 정립하는데는 비교방법이 사용되는데 같은 계통의 언어를 비교하여 규칙적인 음운·어휘 등의 대응을 통해 어떻게 언어들이 갈라져 생겨났는지를 연구한다. 언어학은 역사언어학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
{ "from": "user", "value": "역사는?" }
{ "from": "gpt", "value": "## 초기: 프란츠 보프\n비교언어학은 독일의 프란츠 보프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16년 산스크리트어의 언어자료를 연구하고 다른 몇몇 인구어와의 문법 요소를 비교하여 언어학계에 공표하였고, 이것은 비교언어학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독립된 학과로서 언어학의 첫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n\n한편, 프란츠 보프의 연구가 주로 언어 간의 문법 요소 비교로 이루어져 있어 비교언어학 초기에는 비교문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n\n물론, 보프 이전에도 산스크리트어가 알려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인구어와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려져 있었다. 이미 18세기에 영국의 윌리엄 존스는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고트어, 켈트어 등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어떤 한 공통어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학문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고 보프에 와서야 인구제어의 상호 관련성이 독자적인 연구 대상으로 정립되었다.\n\n## 발전기: 아우구스트 슐라이허\n언어를 생물을 분류하는 것처럼 계통수에 따라 어족으로 묶고 진화한다고 생각하거나, 언어를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로 크게 구분하는 것은 아우구스트 슐라이허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18세기 중엽 찰스 다윈이 제기한 진화론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슐라이허도 이에 영향을 받아 언어가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며 일반적인 진화 법칙에 따라 발전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한 언어가 태어나 일정 기간 동안 생존하다가 다른 어린 언어를 낳고 이 언어가 이전 언어를 대신하는 방식으로 세대가 변하며, 따라서 인간에게 계보가 있는 것처럼 언어도 계통수를 가진다고 생각하였다.\n\n## 완성기: 헤르만 파울\n역사비교언어학을 엄밀화하고 완성시킨 것은 젊은이 문법학파이며, 이들 중에 헤르만 파울이 있었다. 1870년대에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을 중심으로한 젊은 세대의 학자들은 이전의 보수적인 사상에 도전하였으며, 구세대의 학자들이 이들을 폄하하기 위하여 사용한 \"젊은이\"라는 표현을 당사자들은 오히려 새로운 연구방법이라는 뜻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현재까지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n\n이들은 음운변화를 다루며 절대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규칙이 있음을 주장하고 음운변화는 예외 없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였다. 단, 예외가 있다는 그것은 유추에 의해 생긴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언어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의 일관성을 굳게 믿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 "from": "user", "value": "역사언어학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역사언어학**은 같은 기원을 가진 언어들의 관계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다. 때로는 비교언어학을 역사언어학의 한 분야로 간주하기도 한다. 언어는 계속 변화하므로 역사언어학에서는 공통의 조어에서 갈라진 여러 언어의 계통을 연구하고 고대 조어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같은 조어에서 갈라진 여러 언어들을 통틀어 한 어족이라고 이른다. 또 같은 어족 내에도 여러 하위 관계가 있을 수 있어 한 어족은 또 여러 어파로 나뉜다. 이러한 언어 계통의 연구는 19세기의 역사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가 개척하였다. 이러한 언어 계통을 정립하는 데는 비교방법이 사용되는데 같은 계통의 언어를 비교하여 규칙적인 음운·어휘 등의 대응을 통해 어떻게 언어들이 갈라져 생겨났는지를 연구한다. 언어학은 역사언어학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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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음성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음성학은 기원전 4세기경에 고대 인도에서 처음 연구하기 시작했다. 문법학자 파니니가 산스크리트어 닿소리의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을 분석했는데, 지금도 브라흐미 문자군에 속하는 여러 문자에서 파니니가 만든 체계에 따라 자음을 분류하고 배열한다.\n\n중세 아랍 세계에서도 비슷한 연구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세종이 1443년 음력 12월에 만들어 1446년 음력 9월에 공포한 훈민정음 창제에 음성학적 개념이 활용되었다. 훈민정음해례에 중세 한국어 닿소리와 홀소리 조음 위치와 방법 및 성조에 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n\n서양에서는 17세기경부터 여러 언어의 정서법 개정 제안에 음성학적 개념이 활용되었다. 근대 음성학은 말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시도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슈아 스틸의 운율론이나 알렉산더 멜빌 벨의 보이는 음성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n\n19세기에 축음기와 다른 음향기기들이 발명되면서 녹음된 말소리의 음향적 특성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음성학이 크게 발전했다. 루디마어 헤르만은 에디슨 축음기를 사용해 자음과 모음의 주파수 특성을 분석했으며, 로버트 윌리스와 찰스 휘트스톤의 모음 생성 이론을 시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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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성조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성조**는 말소리의 높이가 어휘 의미의 변별 기능을 수행하며, 음운론의 층위에서 낱말의 각 음절에 자질로서 부과되는 것을 말한다. 운율을 이루는 하나의 개념으로 보이기도 한다.\n\n어휘 의미의 변별 기능을 갖는 성조를 어휘적 성조라 하고, 문법 기능을 갖는 성조를 특징적 성조라고 한다. 중국어는 어휘적 성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간다에서 사용되는 간다어와 같은 많은 아프리카 성조 언어들은 특징적 성조를 가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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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알타이 제어의 알타이어족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퉁구스어족·몽골어족·투르크어족·한국어의 언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은 러시아 동부를 여행했던 스웨덴의 군장교 필립 요한 폰 슈트랄렌베르크가 1730년 쓴 책에서 처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콜라스 포페는 이를 “일부 알타이 제어에 속하는 많은 언어들을 분류하려고 했던 최초의 시도”라고 평했다.\n\n‘알타이’라는 말이 처음 붙은 것은 1844년으로, 우랄어족을 주로 연구했던 핀란드의 문헌학자 마티아스 카스트렌에 의해서였다. 카스트렌의 알타이 제어는 핀우그리아어와 사모예드어까지 포함하고 있었는데, 오늘날엔 두 언어군이 우랄어족에 속하므로, 카스트렌이 제안한 알타이 제어는 지금의 우랄알타이어족에 해당한다.\n\n퉁구스어·몽골어·튀르크어로 이루어진 알타이어족에는 다른 언어가 포함되기도 한다. 한국어가 알타이어라고 주장을 한 사람으로는 유명 언어학자인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와 예프게니 폴리바노프가 있다. 로이 앤드류 밀러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알타이어족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n\n마르티너 로베이츠는 알타이 제어를 '트랜스유라시아어족' 라 칭하며 그 중 한국어와 일본어를 제외한 몽골어족, 튀르크어족, 퉁구스어족을 아울러 '알타이어파'라 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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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젊은이 문법학파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젊은이 문법학파**, 소장문법학파, 신문법학파\n\n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을 중심으로 그 이전 시기의 언어 연구의 성향과 두드러진 차이점을 보이는 일군의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그 당시에 비교적 젊은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젊은이 문법학파**라고 불렸다. 레스킨, 브루크만, 오스토프, 델브뤽 등의 학자들과 이들의 연구방법론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헤르만 파울이 이들 젊은이 문법학파의 중심 멤버였으며, 베르너, 드 소쉬르, 휘트니 등도 이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n\n이들은 당시의 자연과학에서 발휘된 실증주의적 연구의 성과에 자극을 받아 언어학에서도 실증주의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언어학을 정밀과학으로 다듬고자 했다. 이들의 연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만이 과학의 유일한 연구대상'이라는 실증주의적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다." }
{ "from": "user", "value": "특징은?" }
{ "from": "gpt", "value": "그들의 연구방법론의 특성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n\n언어학은 역사과학으로 정의된다. 언어에 대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은 실증주의적 관점에 의해 거부된다. 대신 언어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구체적인 언어자료를 통해서 경험적으로 이루어질 때에만이 비로소 이론적인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언어가 역사과학일 때에만 경험과학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즉, 언어학에서 역사과학과 경험과학의 뜻이 동일시된 것이다.\n\n언어 연구에서 의미의 객관적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관찰가능한 형태가 언어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언어연구에서 형태, 특히 그중 가장 관찰이 쉬운 소리를 주요 관찰대상으로 하였다.\n\n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그들은 언어가 독자적인 유기체로 전제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개인적 언어사용만이 언어연구의 유일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언어가 개인적 언어사용과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유기체적 관점을 거부하고 음성변화를 물리적인 법칙과 같은 것으로 보고 필연적이고 인과적인 법칙을 찾아내려 하였다." }
{ "from": "user", "value": "후두음 이론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후두음 이론**은 인구 조어 모음 체계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 이전 단계인 원시 인구어 단계의 음운구조를 재구한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원시 인구어에 그 다음 단계인 인구 조어에서는 사라진 후두음 계열의 소리들이 있었고 이 후두음들이 주위의 모음의 음가를 변화시켜 인구어 모음 체계에 영향을 끼친 후 소멸하였다고 본다." }
{ "from": "user", "value": "묄러의 후두음 이론은?" }
{ "from": "gpt", "value": "묄러는 ē와 ā가 모두 A에서 변한 것이라는 드 소쉬르의 생각에 반대하고 A, O 이외에 장모음 ē가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 되는 E를 설정하여 3개의 장모음에 대응하는 3개의 향음적 요소가 존재했을 것이라며 드 소쉬르의 가설을 수정하였다. 또 그는 a와 o가 항상 eA와 eO의 영계제라는 드 소쉬르의 가설에 대해 인구조어 *agō의 경우처럼 a와 o가 완전계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함을 지적하면서 모음으로 시작하는 인구어 어근들은 원래 어두에 있던 E, A. O들이 후행하는 모음을 변화시킨 후 소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들 E, A. O의 향음들은 후두음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들을 각각 H1, H2, H3으로 나타내었다. 그래서 이후 Saussure와 Möller의 이 이론은 후두음 이론으로 불리게 된다.\n묄러에 의해 수정된 견해를 인구조어의 단어들에 적용해 보면*ed-‘먹다’, *aĝ-‘나르다’, *od-‘냄새맡다’, *dhē-, *stā-, dō- 등은 각각 *H1ed-, *H2eĝ-, *H3ed-,*dheH1-, *steH2-, *deH3-의 형태로 재구될 수 있다." }
{ "from": "user", "value": "탁명환이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탁명환**은 대한민국의 신흥종교, 이단 사이비종교 연구의 전문가이며 신학자였다. 기독교 계열의 이단 연구라는 이름으로 여러 종파를 지속으로 비판하여 소송, 테러, 살해 협박을 받았고 자신의 자택 근처에서 대성교회 광신자에게 살해당하였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생애 초반\n탁명환은 1937년 7월 8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리 179번지에서 부친 탁두섭과 모친 안삼례의 3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했다. 1960년 4월 26일 육군에 입대하여 대구 16헌병대에서 헌병으로서 복무하면서 1961년 9월 대구영남신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약 1년 3개월간 수학하였다. 69년 7월 음란문서 혐의로 구속되었다.\n\n## 활동·업적\n1960년대 중반부터 복음신보사, 기독신보사 등 개신교계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신흥종교 연구를 시작하여 신흥종교문제연구소와 국제종교문제연구소, 그리고 한국종교문제연구소에서 소장으로 일하면서 신흥종교 혹은 이단종교 연구자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개신교계 신흥종교 전문연구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신학대원대학, 서울신학대학, 고려신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월간 『성별』, 월간 『현대종교』 등의 잡지를 발행하여 연구 성과를 교계에 소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5년부터는 ‘사랑실천헌안장기사후시신기증운동본부’를 조직하여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생을 이른바 ‘사이비’ 종교들의 비리와 이단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하다가 기독교계 신흥종파인 대성교회 신자의 피습을 받고 사망하였다.\n아버지의 대를 이어 장남 탁지일, 차남 탁지원, 3남 탁지웅가 현대종교를 맡고 있다.\n\n## 테러와 사망\n차량 폭탄 테러 등의 신변의 위험을 겪었으며, 1994년 대성교회의 신도의 테러로 살해당했다. 2월 18일 신흥종교인 영생교에 대한 문제로 출장을 다녀오던 탁명환은 대성교회의 광신도 임홍천이 탁명환의 아파트 근처에 숨어있다가 칼로 탁명환을 찔렀다. 탁명환은 병원에 옮겨졌으나 곧 사망했다. 검찰에서 밝힌 대성교회 광신도 임홍천의 살해 동기는 탁명환이 1994년 1월에 쓴 목사 박윤식을 비판하는 글을 보고 증오감이 깊어져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밝혔다.\n\n## 사후\n사후 시신은 \"의학대학에 실습용으로 써달라\"는 유언에 따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기증되었고 각막 두 개는 당시 27세와 37세인 여성에게 각각 기증되었다. 그 뒤 2002년 9월 20일 사망한 탁명환의 아버지 탁두섭도 시신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하였다." }
{ "from": "user", "value": "촘스키 위계의 문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문법은 형식적으로 기호들의 집합에 그 기호들로부터 문장을 만드는 규칙이 부여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n\n형식문법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몇가지 기호 사용의 관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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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기본 모음이 뭐야?" }
{ "from": "gpt", "value": "**기본 모음**은 20세기 초 영국의 음성학자 대니얼 존스에 의해 세계 여러 언어와 여러 방언의 모음을 동일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기술하고 비교하기 위해 고안된 체계이다.\n\n기본 모음은 1차 기본 모음 여덟 개와 과 2차 기본 모음 여덟 개, 2개의 중설 고모음 으로 이루어져 있다. 1차 기본 모음은 인간이 낼 수 있는 모음을 조음 음성학적으로 양극단을 잡고 그 사이를 청취 음성학적으로 등거리로 구분하여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 모음들에서 원순성을 바꾸어 2차 기본 모음을 설정하였다.\n\n1차 기본 모음들 중에서 우선 입술을 양 옆으로 펴고 혀를 가장 높이, 가장 앞으로 내어 낼 수 있는 모음 와 입술을 둥글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혀를 가장 뒤로, 가장 아래로 내려 낼 수 있는 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와 사이를 청각적 등거리로 나누어 전설 모음 계열의 , , 를 설정하고, 후설 모음 계열의 , , 를 설정하였다.\n\n2차 기본 모음은 1차 기본 모음에서 원순성을 바꾼 것이다. 1차 기본 모음 중 전설 비원순 계열 , , , 를 발음할 때와 같은 위치에 혀를 둔 상태에서 입술만 둥글게 하여 얻어지는 모음이 2차 기본 모음인 전설 원순 계열 , , , 이다. 또한 1차 기본 모음 중 후설 원순 계열 , , 를 비원순으로 발음하여 얻어지는 모음이 후설 비원순 계열 , , 이다. 단 1차 기본 모음 중 후설 모음 는 비원순 모음이며, 이를 원순으로 발음하여 얻어지는 모음이 2차 기본 모음 이다. 아래 표에서 회색 배경 셀에 적힌 모음들이 1차 기본 모음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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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내적 재구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내적 재구**는 역사-비교언어학에서, 어느 한 언어의 특정한 시기의 공시적 자료를 이용하여 그 언어의 역사를 추정하는 연구 방법론이다." }
{ "from": "user", "value": "방언학에서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방언에 적용가능한 역사언어학적 재구 방법은 세 가지 있다. 비교언어학과 방언지리학과 내적 재구이다. 「내적 재구」라는 방법은 한 체계 내의 형태음운론적 변화를 실마리로 옛 음운상황을 재구하는 방법이다. 비교언어학의 진가는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은 시기에 대한 언어상황의 추정에 있다. 더욱이 비교 재구를 통해 내적 재구나 언어지리학과 더불어 변화의 상대년대에 대한 추정이 이주어질 수 있다." }
{ "from": "user", "value": "그림의 법칙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그림의 법칙**은 독일의 야코프 그림이 그의 저서 독일어 문법에서 지적한, 게르만어의 역사적인 변화 과정에서 파열음 계열의 소리들이 보이는 음운 변화의 규칙을 일컫는 용어다.\n\n그에 따르면, 인도유럽어족에서 게르만어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무성 파열음은 무성 마찰음으로, 유성 파열음는 무성 파열음으로, 유성 유기 파열음은 유성 무기 파열음으로 변화하게 된다.\n이러한 음운 변화는 고지 독일어에서 다시 한번 일어나게 된다. 그림은 인구조어에서 게르만어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제1차 음운 추이, 게르만어에서 고지 독일어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제2차 음운 추이라고 이름 붙였다. 제1차 음운 추이를 **그림의 법칙**이라고 한다.\n\n그림의 법칙의 예외를 칼 베르너가 베르너의 법칙으로 설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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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비교 재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비교 재구**란 공통의 언어로부터 분기되었다고 믿어지는 둘 이상의 언어들이 있을 때 이들 언어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해서 그 언어들이 분화되기 이전 상태의 언어인 공통조어를 재구하는 연구 방법론을 말한다.\n\n비교 재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층위를 포괄하는 전체적인 조어의 모습을 세밀한 부분까지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재구하는 것이나, 현재까지의 비교 재구에 연관된 연구들은 주로 말소리의 비교 재구에 집중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교 재구는 일반적으로 말소리의 비교 재구를 가리킨다." }
{ "from": "user", "value": "비교 재구의 한계는?" }
{ "from": "gpt", "value": "비교재구를 통해 재구된 형태들은 다음과 같은 한계들을 가지게 된다.\n\n첫째로, 비교 재구에 의해 재구된 조어형들은 순수한 이론적 산물이라서 어떤 특정시기의 조어의 형태를 직접 반영했다고 보기 어렵다. 비교재구는 부분과 부분의 비교이며 재구이지 전체 언어의 비교와 재구가 되지 못하므로 그 시간적, 공간적인 변화의 폭이 얼마나 되는지 한정짓기도 힘들며, 개개의 재구형의 각 부분이 시간상으로 동일 선상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n\n둘째, 재구된 형태는 이론적으로 도출된 추상적인 음가이기 때문에 그 음가의 정확성에 한계가 있다.\n\n셋째, 비교 재구를 통한 재구형의 의미를 추정하기가 힘들다. 언어의 의미변화는 형태변화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개별언어들의 의미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재구된 조어형의 의미를 추정하는 것도 힘들지만 재구형의 의미가 오늘날의 의미와 동일한지에 대해서도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재구형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형태적인 재구형에 불과하다." }
{ "from": "user", "value": "펌핑 보조정리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펌핑 보조정리**는 형식 언어 이론에서 특정 종류 언어의 속성을 나타내주는 보조정리이다. 대표적으로 정규 언어에 대한 것과 문맥 자유 언어에 관한 것 두 가지가 있다.\n\nL이 어떤 형식 언어에 속한다면 그 언어에 해당하는 보조정리가 성립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펌핑 보조정리는 어떤 L이 특정 형식 언어에 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주어진 언어가 특정 펌핑 보조정리를 성립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에 해당하는 형식 언어에 속하지 않음을 보일 수는 있다." }
{ "from": "user", "value": "문맥 자유 언어에 대한 펌핑 보조정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어떤 언어 ''L''이 문맥 자유 언어이고 무한하다고 하자. 그러면 자연수 ''p'' > 0이 존재하여, 길이가 ''p'' 이상인 임의의 문자열 ''w'' ∈ ''L''를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w'' = ''uvxyz''와 같이 분할할 수 있다.\n\n다시 말해, 길이가 충분히 큰 문자열이 문맥 자유 언어에 속하려면 반드시 ''uvxyz''의 형태로 표시되어서, v와 y를 i번 펌핑한 ''uv''''z''도 이 언어에 항상 속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n\n이를 엄밀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n\n\\begin\n \\\\\n\\quad \\Rightarrow \\\\\n\\quad \\Rightarrow \\\\\n\\quad\\quad ( (w=uvxyz \\land (|vy| > 0 \\land |vxy|\\leq p \\land\n)))))))\n\\end" }
{ "from": "user", "value": "단종의 복권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다. 사망한 지 224년 만인, 1681년 7월 숙종의 특명으로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11월 6일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단종의 묘소 역시 단종이 폐위되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노산군묘였으나, 시중에서는 노릉이라 불렀다. 단종이 노산군에서 노산대군으로, 노산대군에서 다시 단종으로 복권되면서 묘호 역시 정식으로 장릉으로 격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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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용모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혈액형은 O형이고 유골 조사를 해서 나온 신장은 당시의 일본인은 평균키보다 약간 높은 160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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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강제규의 생애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 어린 시절\n강제규는 1962년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태어났다.\n\n## 영화 감독\n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강제규는 1981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서울극장의 합동영화사에서 시행한 감독 공채에 합격하여 조감독이 되었으며, 1989년에는 대학교 동기 동창인 탤런트 박성미와 결혼하였다.\n\n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계속된 생활고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의 영화 산업의 실태에 대해서도 깊은 회의를 가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등의 각본을 쓰면서 감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n\n그의 감독 데뷔작은 1996년 설날에 개봉한 진희경과 한석규 주연의 은행나무 침대였다. 총 6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작품은 강제규에게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안겨 주었다.\n\n## 쉬리의 대성공\n첫 작품으로 대중의 주목을 끈 강제규의 2번째 작품은 바로 쉬리였다. 그는 북한의 식량난 문제를 접하고 이 작품을 기획하였다. 은행나무 침대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소재로 하였다면, 이 영화는 남·북 분단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다.\n\n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24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쉬리는 8개월 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999년 설 연휴에 개봉되었다. 종영일까지 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쉬리는 당시의 흥행 관념을 완전히 바꾸며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세계적인 대흥행작 타이타닉의 대한민국 흥행 기록 450만 명을 훨씬 상회하는 수치이기도 하다. 이 기록은 친구가 개봉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으며, 2009년 현재까지 통산 12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일본에 130만 달러로 수출을 한 것은 물론, 뉴욕 국제 영화제에서도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n\n이 영화는 강제규에게 부와 명성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가져다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영화사 강제규필름을 설립하게 된다. 이후 그는 강제규필름을 통해 시나리오 작가, 감독을 모집하고, 제작비를 지원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n\n## 태극기 휘날리며\n쉬리의 대성공 이후 많은 기업들이 '제2의 쉬리' 제작 시 거금의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강제규는 한 동안 강제규필름을 통한 후배 양성과 영화 각본 작업에만 집중하였으며, '제2의 쉬리'도 언제 제작될 지 알 수 없었다.\n\n그러던 2004년 초에 쉬리와 마찬가지로 남북 분단을 소재로 한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하였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얼마 전인 2003년 말, 실미도가 1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사상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였으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다시 한 번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개척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곧바로 이보다 많은 117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다시 한번 역대 최다 흥행 기록을 경신하였다. 흥행 뿐만 아니라, 대종상에서 미술상, 촬영상, 음향상을 수상하였다.\n\n이 외에도 강제규는 이 작품을 통해 제50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최고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이란의 유명 영화제인 파즈르 국제 영화제에도 초청작으로 상영되었다.\n\n박스 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세계적으로 687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이는 2004년의 전 세계 영화 중 75위, 대한민국 영화 중에서는 최고 기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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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파스 트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파스 트리**, **파싱 트리**, **어원 트리, 구체적인 구문 트리**는 올바른 문장에 대해 트리 구조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parse라는 단어는 주로 전산 언어학에서 사용된다. syntax tree가 더 종종 사용된다.\n\n파스 트리는 입력 언어의 문법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데 이것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쓰이는 추상 구문 트리와 확실하게 구분을 지어준다. 문법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되는 Reed-Kellogg의 문장 다이어그램과 달리 파스 트리는 다른 종류의 구성요소를 위해서 별개의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n\n파스 트리는 주로 구성 요소들의 constituency grammars 관계나 독립적인 문법의 독립 관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파스 트리는 컴퓨터 언어가 해석될 때와 같이 문장이나 자연어를 위해 생성된다.\n\n관련된 개념으로는 transformational generative 문법에서 사용되는 구문 마커나 P-marker가 있다. 구문 마커는 구문 구조로 표시된 언어 표현이다. 이것은 트리의 형식으로 표현되거나 대괄호로 묶인 표현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구문 마커는 구문 구조 규칙을 적용하여 생성되고 그 자체는 추가적인 변환 규칙의 적용 대상이다. 구문적으로 모호한 문장은 \"파스 포레스트\"라고 한다." }
{ "from": "user", "value": "의존성 기반 파스 트리는?" }
{ "from": "gpt", "value": "의존 문법의 의존성 기반트리는 모든 노드를 말단 노드로 본다. 이것은 그들은 단말 노드와 비단말 노드의 분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더 적은 수의 노드를 포함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구 구조 기반 파스 트리보다 간단하다. 위의 예문의 의존성 기반 파스 트리는 다음과 같다.\n\n이 파스 트리는 구 구조 기반 파스 트리에 존재하는 구 분류가 없다. 구 구조 기반 파스트리와 같이 구성 구조가 인정된다. 트리의 완전 하위 트리는 모두 구성 요소이다.\n\n따라서 이 의존성 기반 파스 트리는 구 구조 기반 파스 트리와 같이 주어 명사 ''John'' 과 목적어 명사구 ''the ball'' 을 구성 요소로 인정한다.\n\n구와 의존성을 구별하는 것은 광범위하다. 구 기반 파스 트리와 관련된 추가적인 구문 구조가 필요하거나 유익한 지의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
{ "from": "user", "value": "태양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태양**은 태양계의 중심에 있으며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다. 본래 한국어로 **해**라고 한다. 지구를 비롯한 여러 행성과 소행성, 유성, 혜성 등의 천체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지구는 태양을 일정한 궤도로 공전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구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연중 일정한 궤도를 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궤도를 황도라 하고 이 운동을 연주운동이라 한다. 지구는 태양을 공전하는 것 외에도 스스로 24시간에 1회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지구 표면에서 관측하는 사람의 눈에는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서 떠올라 일정 시간 동안 하늘을 서쪽으로 횡단한 뒤 서쪽 지평선 아래로 지는 것처럼 보인다.\n\n현재 태양의 나이는 약 45억 6721만년이고 핵우주 연대학에 따르면 45억 6720만년 전에 형성되었다. 분광형은 G2V이며 비공식적으로 \"노란색 별\"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태양이 지구에서 황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가시광 복사가 스펙트럼상 초록 부분에서 가장 강렬하다. 수소를 헬륨으로 융합하면서 0.7퍼센트의 융합된 질량을 에너지로 방출하므로, 태양은 초당 426만 메트릭 톤의 질량-에너지 전환율로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이는 384.6요타와트 또는 초당 9.192메가톤 TNT에 해당하는 위력이다. 이 질량은 에너지를 만들어내면서 소멸하지는 않으며 대신 복사 에너지 형태로 전환된다.\n\n중심핵에서 융합을 통해 생산되는 단위시간당 에너지 생산량은 태양 중심부에서 떨어진 거리에 따라 다양하다. 모형을 이용하여 측정한 태양 중심부에서 융합되는 힘은 약 276.5와트/m로, 태양이 막대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이유는 단위 부피당 일률이 높아서가 아니라 태양 자체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n\n중심핵에서의 융합 속도는 ‘자기 수정적 균형 상태’에 있다. 융합 속도가 약간 빨라지면 중심핵은 더 뜨겁게 가열되며 중심핵 위층의 무게에 거슬러 근소하게 팽창하고, 융합 속도는 감소하며 섭동 상태는 원래대로 복구된다. 융합 속도가 조금 줄어들면 중심핵은 차가워지면서 조금 쭈그러들고, 융합 속도는 상승하면서 원래 상태로 복귀한다.\n\n융합 작용으로 풀려나온 감마선은 수 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 태양 플라스마에 흡수되었다가 일정치 않은 방향으로 재방출된다. 따라서 감마선이 태양 표면까지 닿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양성자의 여행 시간’은 약 1만 ~ 1만 7천 년이다.\n\n광 스펙트럼 연구 태동기 때만 해도 일부 흡수선들은 그때까지 과학자들이 알고 있던 그 어떤 지구상 원소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1868년 노먼 로키어는 이 흡수선들이 있는 이유가 새로운 원소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이 원소에 그리스 신화 헬리오스 이름을 본따 ‘헬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25년 뒤 헬륨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드러났다.\n\n극저온층 위 2000킬로미터에 걸쳐 방출 및 흡수선들이 강하게 나타나는데\n\n채층 위로 약 200킬로미터 두께의 천이영역이 있는데, 천이영역 최하단에서 상단까지 온도는 2만 켈빈에서 100만 켈빈까지 급격히 치솟는다.\n\n코로나는 태양에서 확장되어 나온 바깥쪽 대기로 태양 본체보다 부피면에서 훨씬 더 크다. 코로나는 연속적으로 우주 공간으로 확장되어 태양풍을 형성하며 이는 태양계 전체를 채우고 있다.\n\n태양풍 플라스마로 가득 채워진 태양 주변의 태양권은 태양반경의 20배 정도 되는 곳부터 태양계 바깥 경계면까지 뻗어 있다. 태양권의 안쪽 경계는 태양풍이 흐르는 속도가 알페인파보다 빨라지는 곳이다." }
{ "from": "user", "value": "태양의 자기장은?" }
{ "from": "gpt", "value": "지구의 자기장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남·북 양극에 플러스·마이너스의 자기장같은 것이 보인다. 이것은 태양의 일반 자기장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자기장은 극 가까이에서 겨우 1가우스 정도인데, 이것도 일정한 값이 아니고 태양활동의 주기에 따라 변동한다. 즉, 태양활동 극소기에는 분명히 보이나 태양 활동기에는 소멸하고, 주기가 진행함에 따라 극성의 플러스·마이너스가 역전한다. 흑점 자기장의 극성도 11년 주기로 역전한다. 일반적으로 흑점군의 자기장은 동·서로 나란한 쌍극을 보이는데, 태양의 북반구에서 동쪽 흑점이 플러스, 서쪽이 마이너스인 시기에는, 남반구에 나타나는 흑점군에서는 이 반대가 되어 있다. 이 상태가 다음의 태양 활동기에서는 완전히 역전하여 나타난다. 백반에도 100가우스 정도의 자기장이 존재한다. 이 밖에 광구에는 군데군데 10가우스 정도의 단극성 자기장을 가지는 곳이 점재한다. 게다가 자세히 관측할수록 자기장이 아주 좁은 영역에 집중하여 점재하며, 강한 자기장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들이 분포하고 있는 자기장의 플러스·마이너스의 차를 잡아 보면, 어떤 영역에서는 플러스가 많고, 다른 영역에서는 마이너스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장소는 2, 3년에 걸쳐서 일정하며, 행성간 공간의 자기장까지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즉 태양의 자전에 따라 행성간 공간의 자기장도 회전하고 있으며, 지구 부근에서도 그 극성이 플러스가 되기도 하고 마이너스가 되기도 한다. 태양의 자기장은 현재도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하나로 남아 있다." }
{ "from": "user", "value": "베르너의 법칙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베르너의 법칙**은 칼 베르너가 1877년 ''Eine Ausnahme der ersten Lautverschiebung'' 라는 논문에서 그림의 법칙의 예외가 강세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설명한 것이다.\n\n인구조어의 무성 *p, *t, *k에 대응하는 게르만어의 어중 무성마찰음 ɸ, θ, χ은 바로 그 앞에 있는 모음에 강세가 있으면 무성음 그대로 유지되고, 강세가 없을 때는 유성음 β, ð, γ; b, d, g로 변한다.\n\n그림의 법칙에 따르면, 인구조어의 무성정지음 *p, *t, *k는 게르만조어에서 f, θ, χ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이 법칙에서 벗어나 b, d, g로 바뀌는 경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라틴어 pater와 고트어 fadar를 비교해 보면, p > f 변화는 그림의 법칙을 따르지만 t > d 변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의 법칙을 그대로 따른다면 pater가 faþer로 변화했어야 한다.\n\n베르너의 법칙은 그림의 법칙과 어긋나는 이러한 현상을 예외로 내버려 두지 않고 모두 음운 법칙이라는 틀 안에서 설명하고자 나온 것이다. 다음 두 예를 살펴 보면,\n\n그리스어의 phrater가 고트어의 broþar로 변한 것은 유기음이 유성무기음으로 변하고, 무성무기음이 유기음으로 변했다는 점에서 그림의 법칙에 잘 들어 맞는다. 하지만 그리스어의 pater 고트어의 fadar가 된 것은 그림의 법칙에 어긋난다. 그림의 법칙을 따른다면 faþar가 되었어야 한다.\n\n베르너는 이러한 예외들을 관찰하여 강세에 따라 변화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즉 φράτερ-의 경우와 같이 해당 자음 앞의 음절에 강세가 있는 경우에는 그림의 법칙을 따르고, πατέρ- 와 같이 해당 자음 앞 음절에 강세가 없는 경우에는 유성음화된다는 것이다.\n\n이러한 베르너의 발견으로 음운 변화는 예외가 없으며 자연의 물리 법칙과 같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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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한국의 선사 시대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한국의 선사 시대**는 인류가 한반도에 나타난 시대로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를 말한다. 한반도의 선사 시대는 유럽이나 지중해 지역과는 달리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정리했던 세 시대 체계로 구분하기 어려우며, 고고학적,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연구에 의존한다. 일반적인 역사 및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석기시대에 해당되며, 석기 시대는 발굴되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다시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로 나뉜다. 그 영역은 한반도를 위주로 하지만, 그 기원 및 전파와 관련이 있는 러시아, 만주, 랴오닝, 중국 동부의 문화도 함께 연구된다." }
{ "from": "user", "value": "한반도 인류의 선사시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중석기 시대\n중석기 시대는 1만여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져서,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구석기시대의 주요 사냥 대상물인 매머드, 쌍코뿔이, 물소 등의 큰 짐승이 사라져서 작은 짐승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짐승을 잡기 위한 무기인 활, 화살촉 등이 등장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플라이스토세의 종말기에서 이후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관련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중석기시대의 설정여부는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n\n## 빗살무늬토기 시대\n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약 1만 ~ 8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토기이다. 이들은 주로 물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했고,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초기 농경 단계로 들어간 곳도 있다. 또 돌쾡이와 돌보습으로 밭을 갈고,돌낫으로 곡물이나 이삭을 따 갈돌로 갈아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어 먹었다.\n\n## 민무늬토기 시대\n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구리와 주석 또는 아연을 조금씩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무문토기와 공열토기가 주로 쓰였다.\n신석기시대처럼 돌쾡이를 사용하여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반달 돌칼로 추수하였다." }
{ "from": "user", "value": "애국가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1945년 독립 이후에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한반도에 널리 퍼졌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7년 6월에 자신의 체제에 맞게 국가를 따로 만들었다.\n\n작사자 박세영은 일제강점기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활동을 하였으며, 당대의 저항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광복 후 북으로 건너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를 비롯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 시를 여러 편 지었다. 작곡자 김원균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2006년 평양음악대학의 이름을 김원균평양음악대학으로 개칭하였다.\n\n4/4박자, 내림 나 장조로 ‘약간 느리고 장중하게’ 부른다.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부터 ‘길이 받드세’까지는 본래 한 번만 부르도록 되어 있었으나, 김일성이 이 노래를 듣고 \"우리 나라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어떻게 한 번만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두 번 반복해 부를 것을 제안해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곡이 수정되었다. 2002년 아시안 게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식 국가의 자격으로 참가하면서 국기 게양식 때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이 곡이 연주되었다.\n\n2007년 5월 30일 조선중앙통신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인 애국가가 재편곡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새로운 국가 악보와 관련 문서를 세계 각국에 전송하였다고 밝혔다.\n\n2024년 2월 15일에는 가사 가운데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부분이 '이 세상 아름다운 내 조국'으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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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리스티안 카를 페르디난트 폰 훔볼트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리스티안 카를 페르디난트 폰 훔볼트**는 독일의 철학자, 교육학자, 정치가이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의 공동설립자이기도 하다.\n\n예나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저명한 문학가 실러와 평생 계속될 교분을 맺었다. 문학적 명성을 얻은 훔볼트는 1801년 교황령 주재 프로이센 공사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로마에서도 예술과 문학을 아낌없이 후원하여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1809년에는 본국으로 돌아와 교육장관을 맡게 되었다.\n\n이어 1812년에는 오스트리아 주재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되었다. 빈에 부임한 훔볼트는 1813년 열린 프라하 회의에서 당시 나폴레옹의 아내이며 합스부르크가의 일원인 마리 루이즈의 문제로 참전을 주저하고 있던 메테르니히를 설득하여 오스트리아를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빈 회의에 하르덴베르크 공작을 수행하여 프로이센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n\n언어학자로서 그의 명성은 외교관 생활 말년 바스크어에 대하여 연구하여 이 분야에 대한 학계의 주목을 환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와섬의 고대 카위어에 대한 그의 연구는 생전에 끝나지 못했는데, 그의 동생과 부슈만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척시켜 1836년 간행했다.\n\n그의 남동생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지질학자, 박물학자, 탐험가로 유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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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야코프 루트비히 카를 그림의 생애 및 업적을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하나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다.\n\n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고, 동생 빌헬름 그림과 함께 괴팅겐에 부임, 그곳 대학의 사서 겸 교수가 되었다. 1841년 동생과 함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초빙으로 학사원 회원이 되고, 대학에서 강의하였다.\n\n그는 위대한 게르만 언어학자로서 근대 언어학을 개척하였다. 그는 언어학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실시하여 음운 변이에 관한 '그림의 법칙'을 수립하여 이 방면에서 획기적인 공적을 올렸다. 또 '독일 문법'에 의해 게르만 어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n\n동생과 함께 게르만 민속 중에서 동화를 찾아내어 을 출간하였는데, 이 2개의 저서로, 세계 최초로 민족 설화를 문학의 형태로 끌어올렸다.\n\n이들 형제의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1852년에 시작하여 8년에 걸쳐 집필한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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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모음이 뭐야?" }
{ "from": "gpt", "value": "**모음** 또는 **홀소리**는 음성학에서 자음과 차별되는 음운으로, /a/, /e/, /i/,/o/, /u/와 같이 성문 위의 어떤 특정 지점에서 공기 압력이 형성될 때 열린 성도를 통해 특별한 장애를 받지 않고 발음되는 구어의 소리이다." }
{ "from": "user", "value": "단모음, 이중모음, 삼중모음은?" }
{ "from": "gpt", "value": "모음이 지속되는 동안 변화가 없는 모음의 소리를 **단모음**이라고 한다. 단모음은 종종 \"순수한\", \"안정된\" 모음으로 불린다. 하나의 특정 조음 장소에서 이동하여 소리가 다르게 나는 모음을 **이중모음**이라고 하며, 연속적으로 세 개의 조음 장소를 이동하여 내는 소리를 **삼중모음**이라고 한다.\n\n모든 언어에는 단모음이 있으며, 많은 언어가 이중모음도 있지만, 삼중모음까지 있는 언어는 비교적 희귀하다. 한국어에도 단모음과 이중모음은 흔하지만, 삼중모음은 사라졌으며 몇몇 사투리에만 남아있다. 영어는 이 모든 모음이 다 있는 언어이다." }
{ "from": "user", "value": "자음이 뭐야?" }
{ "from": "gpt", "value": "**자음** 또는 **닿소리**는 성문을 벗어나 조음된 소리가 목, 입, 혀 따위의 발음 기관에 의하여 방해를 받으면서 나는 소리이다. 모음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
{ "from": "user", "value": "자음의 기술 방법 : 조음 음성학은?" }
{ "from": "gpt", "value": "조음 음성학에서는 자음을 기술하기 위하여 모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먼저 자음 음소 목록과 각 자음 음소의 변이음 목록을 작성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특성을 관찰하여 기술한다.\n\n위와 같은 특성 중 한국어 또는 {{정리 필요 알림틀" }
{ "from": "user", "value": "돗토리현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돗토리현**, 또는 **톳토리현**은 일본 혼슈의 동해 연안에 있는 현이다. 현청소재지는 돗토리시이다.\n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현이기도 하며, 산요지방의 동쪽을 차지한다. 면적은 3,500km로 전국에서 7번째로 작다. 인구는 55만명이며 현재는 가장 적다. 기초 자치체는 4시 14정 1촌이고 시의 수는 가장 적다." }
{ "from": "user", "value": "인구는?" }
{ "from": "gpt", "value": "돗토리현은 도도부현에서 가장 인구가 적으며, 정령 지정 도시 이외로는 최대인 지바현의 후나바시시나 사이타마현의 가와구치시, 가고시마현의 현청 소재지인 가고시마시, 도쿄도에서 유일한 중핵시이기도 한 하치오지시보다도 적다. 2010년 인구조사에서 588,418명으로 35년 만에 60만 명을 밑돌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심각한 인구자출이 계속되고 있다.\n\n인구 감소는 계속되고 있으며 2019년 7월 돗토리현의 추계 인구는 556,386명이었다.\n\n현외로부터의 이주자는 연간 2,000명 정도. 휴가를 즐기기 쉬운 토지에서 일을 받는 「워크」를 내걸어 이주자 유치를 도모하고 있다.\n\n현재까지도 인구자출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이 뭐야?" }
{ "from": "gpt", "value":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줄여 **대한노총**은 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대항하여 등장한 대한민국 초기의 우파 노동조합 단체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이다." }
{ "from": "user", "value": "역사는?" }
{ "from": "gpt", "value": "대한민국에는 본래 1945년 10월 10일 허성택을 위원장으로 한 남로당 계열 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줄여 \"전평\"이 있었으나, 전평의 공산주의성격, 남·북한을 합한 인민공화국 수립 제창, 신탁통치 지지운동 등으로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반발을 사게 된다. 그래서 1946년 3월 10일 서울특별시 시천교회에서 우파계열 노동조합중 하나로 대한노총이 설립되게 되었다.\n\n대한노총은 1946년 9월에 이르러 전평과의 전면적인 대결구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평은 1946년 제1차 제네스트를 지령, 9월 23일 철도, 9월 24일 행정파업을 감행, 이를 저지하려는 대한노총과의 공방전이 벌어져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참고로 당시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은 좌익 선동자들이 파업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다. 파업 주동자들과 공산당 지도부는 북한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 사령부에 파업 방침을 문의했다. 9월 9일 박헌영의 문의에 대해 스티코프 사령관은 200만 엔을 지원하고,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이 정간한 좌익 신문들 속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의 요구 조건들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 투쟁할 것을 지시했다. \n\n중요한 것은 소련과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남로당과 좌익 세력들의 파업 투쟁을 진압할 경찰 병력이 현저하게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남로당 세력의 파업과 무장 투쟁이라는 정치적 혼란에 맞서기 위해서 미군정과 우익들은 연합해서 자율적인 방위조직을 만들어냈다. 이런 점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우익 청년단체를 어용 조직으로 바라 보는 것은 지나치게 좌편향된 시각이다. 이들의 방위 조직들의 충원에 힘 입어 10월 1일을 고비로 파업이 일단락되고, 10월 7일 철도노조의 운행이 재개됨에 따라 전평이 약화되고 대한노총은 대한민국 주요도시를 장악하게 되었다.\n\n전평은 이에 1947년 3월 22일 제2차 제네스트를 지령, 폭력을 불사하는 파괴적인 파업을 강행했다. 대한노총은 이에 전면대결로 들어가 유혈사태 끝에 전평을 저지하였고, 전평은 지하로 잠입하게 되었으나 곧 소멸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비합법화되었다. 대한노총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반공조직의 성격을 버리게 되었다.\n\n그러나 대한노총은 이승만 대통령과 제1공화국의 어용조직으로 전락, 1959년에 이르러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가 표면화되기 시작되었다. 대한노총은 자유당의 비호 아래 조직폭력배와 경찰을 투입, 노동자들의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10월, 대한노총의 비민주성에 반발한 민주화 세력들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줄여 ‘전국노협’을 건설하였다. 대한노총은 1960년 4·19 혁명과 함께 소멸 위기에 처했다.\n\n대한노총이 이미 노조로서의 성격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노협 또한 노동운동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전국노협은 대한노총의 ‘대통합’ 요구에 맞춰 한국노동조합연맹, 줄여 ‘한국노련’이 세워졌다." }
{ "from": "user", "value": "울산광역시의 교육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 고등교육\n울산에는 2개의 대학교와 3개의 전문대학이 있다. 울산은 도시 규모나 인구에 비해 대학교 및 전문대학 등 고등교육 기관이 부족한 편이다. 고교 졸업생 중 20%가 서울 지역으로, 25.6%가 부산 지역으로 지원하고 17.9%만이 울산 지역의 대학교에 지원하였다..\n\n울산광역시에는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이 없다. 따라서 타 지역의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울산광역시에서 교원 임용고사를 치러 교사로 임용되고 있다. 교원 임용고사를 치르기 위한 지역 초등 교원자격자의 가산점 혜택은 대구교육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같은 영남지역의 3개 교대를 졸업하거나, 울산광역시 내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를 졸업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n\n### 대학원대학교\n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 한전KNF, 한국전력기술, 한전KPS 등이 출연하여 설립된 한국전력공사 산하 학교법인이 운영하는 원자력전문 대학원대학교이다.\n\n### 대학교\n울산대학교는 울산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대학으로, 현대그룹의 故 정주영 회장이 1970년에 설립하였다. 당시에는 공과대학만 있던 울산공과대학이었으나 1985년에 공과대학, 자연과학대학,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을 가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88년에 조형대학이 설립되어 예술분야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1990년에는 의과대학이 설립되어 의사를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에는 경영대학을, 1997년에는 생활과학대학을 신설하였다. 또한 1998년에는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을 신설하였고 2004년에는 건축대학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故 정주영 회장 타계 후 정몽준이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아산스포츠센터와 아산도서관 등 지역을 위한 시설 건립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n\n울산과학기술원는 2009년 3월 2일 울산과학기술대학교로 개교한.대한민국 최초의 국립 법인화 대학이다. 광역시로 승격된 지 10년이 되도록 국립대학이 없는 지역이며, 4년제 대학이 단 하나 있었던 울산의 지역민은 국립대학 유치를 희망했고 이에 노무현 전 대통령 공약으로 국립대학 유치가 이루어졌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는 학부와 석사, 박사과정이 개교와 동시에 개설되었으며 학부에는 이공계열과 경영계열의 두 가지 계열만이 개설되어 있다. 이들 계열에는 다양한 트랙이 개설되어 있는데 1학년 때 기초과정을 이수한 뒤 계열구분이 없이 2개의 트랙을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다. 입학사정관제 선도대학으로 잠재력과 가능성을 선발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n과학기술의 역량 강화와 고급과학기술 인재 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산업계와의 협동연구 및 외국과의 교육ㆍ연구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국가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2015년 3월 3일 국회 본회의에서 과학기술원 전환 관련 법률이 통과되고 3월 27일 울산과학기술원법이 공포되어 2015년 9월 28일 울산과학기술대학교에서 울산과학기술원으로 전환하였다.\n\n## 중학교\n대현중학교 연암중학교 옥동중학교 신정중학교\n화봉중학교 학성중학교 울산강남중학교 무거중학교 삼호중학교 울산제일중학교 울산학성여자중학교 유곡중학교 무룡중학교 울산서여자중학교 방어진중학교 신일중학교 태화중학교 월평중학교 천곡중학교 호계중학교 농소중학교 화진중학교 화암중학교 대송중학교 명덕여자중학교 남외중학교 달천중학교 울산중앙중 울산동평중 울산성안중 장검중학교 일산중학교 온산중학교 남창중학교 서생중학교\n\n## 고등학교\n달천고등학교 울산과학고등학교 현대청운고등학교\n우신고등학교\n무룡고등학교\n화봉고등학교\n울산고등학교\n성신고등학교\n삼산고등학교 학성고등학교\n효정고등학교\n울산여자고등학교\n성신여자고등학교\n울산공업고등학교\n신선여자고등학교 대송고등학교\n현대공업고등학교\n대현고등학교\n울산강남고등학교\n성광여자고등학교\n현대고등학교\n방어진고등학교\n화암고등학교\n문현고등학교\n생활과학고등학교 다운고등학교\n온산고등학교 남창고등학교\n울산중앙고등학교 범서고등학교 천상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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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울주군의 정치·행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국회의원\n현재 울주군의 국회의원은 서범수이다.\n\n## 광역의원\n경상남도 울주군에서는 경상남도의원 3명을 선출했다.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한 이후에는 울산광역시의원 2명을 선출하다가 제3회 지방 선거부터 3명을 선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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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일제강점기의 시대상과 독립 운동의 전개, 사회상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1910년대의 국외와 국내의 민족운동과 계몽운동\n조선총독부는 안악 사건에서 시발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1911년 윤치호, 이동휘, 양기탁, 김구 등 신민회 간부들을 대량으로 검거, 검속하여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김규식, 이승만 등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해외로 망명한다. 그 후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비밀결사의 길을 걷게된다. 국권이 빼앗긴 이후 무단 통치가 강화되면서 기존의 항일 운동이었던 항일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의 무단 통치로 점차 쇠퇴하였다. 대부분의 의병계열들은 간도나 연해주 일대로 이동하였다. 또한 각종 공직자 채용 시험과 각종 산업시설의 인허가에서도 일본인에게 우대 혜택을 주게 되면서 한국인들의 반발은 계속되었다.\n\n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탄압과 차별 정책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항일 운동은 비밀 결사 형태로 변화하였는데, 교육과 종교 단체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와도 연결하여 독립 운동가들을 규합하였다. 대표적 단체로는 대한 광복회와 독립 의군부, 송죽회, 조선 국권 회복단 등이 존재한다. 특히 대한 광복회는 의병 출신과 애국 계몽 운동 계열로, 군대식 조직으로 구성되어 대구에서 활동하였는데 군자금을 모집하고 경상도 관찰사였던 친일파 장승원 등을 처단하는 등 친일 부호를 처단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n\n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 국권 반환 요구를 시도하고 의병 전쟁을 계획하였는데, 대부분 유생 출신자였다. 이들은 고종 황제의 복위의 복벽주의를 내세웠으며, 신민회 이후의 거의 모든 단체가 공화제를 내세운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송죽회는 평양의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독립 운동 단체 전달하였는데, 교회를 통한 민족 의식 고양과 여성 계몽운동에도 노력하였다.\n\n이 시기에는 개량 서당과 기독교 계열 학교들이 확산되었고,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이었던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교육운동도 존재하였다. 개신교 계열 학교들은 한성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천주교 계열 학교들은 1920년대부터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북도와 함경남도, 북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 종교계열 학교들은 영어, 라틴어, 서양식 기계기술, 수학, 물리학 및 세계사, 성서 구약과 신약 등을 가르쳤다.\n\n### 국외의 민족 한 운동\n일제의 헌병 통치에 의해 많은 의병 부대와 지식인층 등 애국 계몽운동 인사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에 만주의 서간도 삼원보에서는 경학사, 한족회, 부민단 등이 결성되었고,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학교가 만들어졌다. 북간도에서는 민족 학교인 서전서숙과 명동학교가 설립되었고, 대종교 인사들이 주도가 되어 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 등이 결성되어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조직이 꾸려졌다.\n\n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이 형성되어 민족 운동이 근거지가 되었다. 이에 13도 의군과 이상설, 이동휘가 주도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1914년에 수립되었고, 후에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와 대한 국민 의회 등이 수립되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n\n중국 관내의 상하이에서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신채호, 김구 등이 주축이 되어 신한 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이 단체는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반을 조성하는 도움이 되었다.\n\n미주 지역에서는 안창호가 주도한 대한인 국민회와 흥사단이 결성되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따로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박용만은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군인을 양성하였다.\n\n### 민족 자본 육성 운동\n김성수와 송진우 등은 식민 치하의 한국인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의 침투를 우려하였다. 김성수는 민족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운다. 우선 그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김성수 등은 무명옷을 교복으로 했을 때 인촌은 옷감의 국내 자체생산 및 조달을 생각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n\n일본의 방직회사들이 한반도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한국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한국인 인텔리들을 설득해 나가기 시작했다.\n\n1918년 봄 김성수는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n\n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 출발점은 아니었다.\n\n### 3·1 운동\n1918년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한국의 지식인들, 청년층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 해방 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대규모 해방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윤치호 등 일부 인사들은 이 만세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n\n1919년 3월 1일 낮 12시 서울의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은 수십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음으로써 3·1운동은 시작되었다. 만세 시위는 일제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간도·시베리아·연해주·미주지역까지 퍼져 나갔다.\n\n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여 약 2개월에 걸쳐 투쟁하는 동안에 232개의 부·군 가운데 229개의 부·군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1,491건의 시위를 벌였으며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 기관을 파괴했다. 그러나 4월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집단 학살·고문·심문·방화 등 무력 탄압으로 3·1운동은 차츰 사그라졌다.\n\n이 운동으로 정부 수립 운동이 활성화되었고, 항일 무장 투쟁을 촉진하였다. 또 독립 운동의 이념과 방법론에 변화가 일어나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어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이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또 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학생들이 민족 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농민, 노동자, 여성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윤치호 등은 한국인 민중의 희생자를 냈음에도 지도자들이 적극 앞장서지 않은 것을 비관적으로 보기도 했다.\n\n## 1920년대의 사회\n1920년대에 이르러 요리집과 백화점이 유행하였다. 음식점으로는 명월관, 국일관, 천리구 김동성과 근농 여운홍이 운영하던 백화원, 부민관, 백화점으로는 화신백화점 등이 유명하였다. 명월관은 경성, 부산, 도쿄에 지점이 있었는데 한국인이 운영하던 것이었다. 국일관이나 화신백화점 등은 8도를 중심으로 대도시에 지점을 두기도 했다. 화신백화점 외에도 미쓰코시 백화점 조선지점이 등장하여 1945년 9월까지 경성에 지점을 두었다. 백화점의 등장으로 송상, 만상, 유상 등의 상인들의 활동은 1930년대 이후로 크게 위축되었다.\n\n영화관은 군청소재지, 부청소재지나 읍소재지, 시장이 존재하는 규모가 큰 면에 존재하였다. 교육을 받지 못한 백성들도 말과 단어는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영화관에 출입하였다. 그러나 영화관을 가기 힘든 오지에는 각종 서커스단, 곡예단의 방문에 인파가 몰려들었다.\n\n텔레비전은 1920년 이후에 출현하였다. 라디오의 보급은 구한 말 이후 확산되었지만 얼굴과 화면이 등장하는 텔레비전의 구입은 쉽지 않아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마을의 공회당처럼 활용되기 시작했다. 손탁호텔 등 경성부내에 소수 존재하던 서양식 호텔이 경성부의 조선호텔, 신라호텔 등을 시작으로 1920년대 이후 각지의 지방 대도시로 호텔과 모텔이 확산되었다. 호텔, 모텔의 등장과 함께 여관과 여인숙, 민박 등도 확산되었다.\n\n### 일제 공무원, 헌병보조원의 인기\n1920년대에 가면 한국인들의 헌병보조원, 일제 관료에 많은 응시생들이 응시하였다. 1922년 순사직 경쟁률은 약 2.1대 1 수준에 불과했으나 문화정치가 본격화한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 경쟁률이 10대 1을 웃돌았다. 결국 한국인 공무원, 헌병보조원 수험생이 많아지자 경쟁률은 계속 높아졌다. 3.1 운동 직후에는 만세 운동의 여파로 응시생이 적었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 헌병보조원과 판임관 등의 응시자는 꾸준히 증가하였다.\n\n1926년의 헌병보조원 856명 모집에 9천193명이 지원, 약 10.7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1932년에는 854명 모집에 1만6천193명이 지원해 19대 1로 경쟁률이 수직 상승했다.\n\n### 1920년대의 민족 해방 운동\n3·1 운동 이후 각 지역의 정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민족의 독립 운동의 구심점의 역할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후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와 상하이 임시 정부가 해산한 뒤, 13도 국민 대표 회의로 수립된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중국의 프랑스 조계지였던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임시 정부는 초반에는 대통령제를 표방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외교론자로 외교로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임시 정부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나 1921년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했으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 활동에 소득이 없고, 이러한 외교론의 위기 속에 시도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이 상하이로 알려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에 모였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이 이탈하여 민족의 대표기관의 명맥을 잃게 되었다. 이후 김구의 활약으로 다시 살아나기까지 임시 정부는 긴 침체기를 갖게 된다.\n\n한편 간도와 만주, 연해주 등지를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 무장 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평안북도 갑산·함경남도 혜산 일대와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 투쟁을 벌였다.\n\n일제는 국경 지방의 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때 홍범도 부대는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 또 김좌진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 부대도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각 부대들은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독립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n\n이러한 시련을 겪은 무장 독립운동 세력들은 다시 결집하고자 민정 및 군정기관 형태인 3부를 조직해 재정비하고자 하였지만, 1925년 일본제국과 만주군벌 장작림간의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어 만주에서 활동하는 무장 독립운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1920년대 말에는 남만주 지역에 참의부, 정의부가 통합하여 국민부가 결성되어 훗날 조선혁명군으로 결성되었으며, 북만주에 신민부는 혁신의회로 통합되어 한국독립부으로 계승된다. 이들은 한중연합작전을 통해 대전자령 전투, 영릉가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n\n이와 같은 공황 속에서도 노동 쟁의·소작 쟁의·학생 운동·사상 운동 등 일련의 항일 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국내에서는 3 ·1 운동 이후 최대의 6·10 만세 사건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만주 지방에서는 유망민중이 교민회를 조직하여 자활을 모색하였으며, 많은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국내외에서 일본 요인의 암살, 파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 나갔다.\n\n### 연애 사조의 확산\n1920년대에는 서양의 문물이 확산되면서 소수 양반가에서만 입던 양복과 드레스, 원피스, 정장 등이 시중에 확산, 중소도시의 중산층과 평민층에게도 확산되었다. 일본식 옷에 반감을 품은 지식인층은 의도적으로 양복을 사서 입기도 한다.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은 유교적 규범이 수그러든 자리에 사랑과 연애를 적극 받아들였다. 1930년 7월 16일자 한 일간지의 기사에는 이것이 상세히 묘사되기도 했다.\n\n남녀간의 연애 풍조가 적극적으로 확산되고, 언론과 방송에도 보도되자 보수적인 유교사상가와 성리학자들은 일제가 탈선을 부추겨서 한국을 멸망시키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도포와 갓을 쓴 유림들이 방송사와 신문사에 집단으로 몰려가 항의를 하고, 언론사를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일본에 유학한 승려들은 결혼하고 귀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n\n외모와 능력을 따지는 계산적 연애를 앞세우는 21세기와 달리 당시 연애는 목숨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정사 사건이라 하였다. 1920년부터 1940년 무렵의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보면 '자살, 정사'로 분류되는 기사만 8000건이 넘을 정도로 당시 정사는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은 사랑에 미쳐 죽는 것을 '절대미의 극치'로 칭송했다.\n\n절세 기생 강명화의 음독자살은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경상북도의 부호의 아들 장병천을 사랑한 강명화는 기생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 당하자 자신의 사랑에 대한 순수성을 증명하려 단발에 단지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강명화는 장병천의 품에서 약을 먹고, 죽은 애인의 뒤를 이어 장병천도 쥐약을 입속에 털어 넣는다.\n\n또 돈 때문에 열일곱의 나이에 마흔이 넘은 남자에게 시집갔다가 이혼한 뒤 카페 여급이 된 김봉자와 경성제대를 졸업한 유부남 의사 노병운의 비극적 정사는 1934년 인기 가수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동성애는 극악한 범죄이거나 서양의 금수같은 습성으로 여겨져 심한 탄압을 받거나, 정신과에 입원되거나 쫓겨나기도 했다. 여자로 동성 연인 관계였던 김용주와 홍옥임의 동반 자살 등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n\n### 이혼율의 증가\n신 문물과 연애 사조의 확산과 함께 이혼도 등장하였다. 1920년대 도쿄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구시대 여성을 배우자로 둔 남자들이 신여성과 연애에 빠져 비롯된 현상이다. 1930년대에는 ‘제2 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학업을 마친 신여성들이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해 첩이나 후취로 들어감에 따라 이들을 ‘희생자’로 이해한 표현이다.\n\n1921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는 날로 늘어나는 이혼 소송의 대부분에 대해 “남편의 부족을 들어 여자 편에서 고소함이 다수”라며 경성지방법원에 제기된 사례들을 소개했다. 당시 이혼 사유의 상당수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경제적 곤궁을 해결하지 못한 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여자가 이혼을 청구한 것이다.\n\n이혼이 급증하자 동아일보는 1924년 신년 지상특집에는 각계 지식인과 저명인사 10명에게 ‘이혼 문제의 가부’를 묻는 기사가 10회 연재됐다. 이혼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마음에 아니 맛는 부부간에는 누가 반대를 하던지 단연히 리혼을 하야서 양양한 전도를 그르치지 않는 것이 가할 줄로 안다”거나 “실흔 사람과 엇지 백복의 원인이 된다하는 부부가 되겟슴닛가”라며 이혼 결행을 촉구했다.\n\n###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회\n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민족 지도자들은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한반도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n\n또한 일본 유학의 급증과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한 학교 설립에 자극을 받아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은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다가 실패하고 만다.\n일본 자본의 침투와 함께 신사상의 출현으로 서양 제품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1920년초부터 김성수, 안재홍, 윤치호, 이광수, 조만식 등은 강연, 계몽 활동을 다니며 국산 물건,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n\n1922년 이상재, 윤치호, 김성수, 이승훈, 김병로 등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등은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n\n### 국내 노동자·농민의 대중 운동\n한편 1919년의 3·1 운동 당시의 집단 시위의 효과를 보고 크게 각성한 노동자·농민들에 의해 노농 운동이 급격히 발전했다. 1921년 9월 부산의 부두 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 1923년 8월 평양의 양말 공장 노동자 2,000여 명의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전개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 쟁의, 192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원산 총파업, 그리고 1930년 1월 3,0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1개월 동안 전개했던 부산 조선 방직 파업 투쟁 등이 대표적인 투쟁이었다.\n\n이러한 경제적 생존권 투쟁이었던 노농 투쟁은 점차 항일 민족 운동화되어 1930년 5월 함경남도 신흥의 장풍 탄광 노동자 300여 명은 노동 조합의 설립을 방해하는 일본인 자본가와 경찰에 맞서 탄광 시설과 사택을 부수고, 총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게 도끼·망치·곤봉으로 맞서 육박전을 벌였다.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의 2,000여 명 농민들이 일제의 산림 정책을 반대하여 군청을 포위·습격했다가 여러 명이 일경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자·농민들의 대중 투쟁은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한 싸움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지배 구조를 반대하는 항일의 성격을 띤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이었다.\n\n### 신간회, 근우회의 결성과 활동\n1924년 김성수, 송진우 등의 주도로 자치화 운동을 목적으로 한 단체 '연정회'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n\n1920년대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국내에 널리 퍼져 서울청년회·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 사상 단체가 대거 조직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농 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공산당 건설에 힘을 기울여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으며, 1924년 4월 조선공산당을 지하에서 결성함으로써 공산주의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 사회주의 세력은 일제의 치안유지법 하에서 활동을 하기 힘들어지자 공개적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 해외에서 국공합작과 민족유일당 운동과 같은 좌우합작 분위기가 불어오고, 국내에서 천도교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의 계기가 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n\n이에 따라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통해 우경화되었고, 민족주의 세력은 조선 민흥회를 결성하여 좌파 세력과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줘, 민족 유일당의 전단계에 이르게 되었다.\n\n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나뉘게 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했다. 신간회 결성 후 각 지방에서 신간회 지회가 잇달아 결성되었는데, 1928년말에는 모두 143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 수는 2만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당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갖가지 대중 운동을 주도하거나 지원했다.\n\n특히 1929년 11월 광주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 대회를 준비하여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일제는 민중 대회 사건을 빌미로 삼아 신간회의 중앙의 핵심 간부 40여 명을 체포했다. 이때부터 신간회의 활동은 움츠러들었고, 1931년 5월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해소되었다.\n\n### 가부장제의 해체와 이혼의 공식화\n1920년-30년대에는 봉건과 근대의 가족 형태가 섞이기 시작하였다. 유교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과 반감으로 별거와 독신, 우애결혼 등 대안 가족의 이념과 형태가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중기 이후 남편이 부인을 집안에서 축출하는 소박 형태의 이혼만이 존재하던 한국 사회에 여성이 남편에게 이혼을 제기하는 이혼 형태가 점차 급증하였다.\n\n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등장한 과도기 현상의 하나가 이혼이었다. 근대의 제도가 이식되고 신여성, 자유연애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조가 유입되면서 이혼도 증가하였다.\n\n1920년대에는 부부간에 아이를 낳지 않고, 재산은 각자 재산을 갖고 있되 공동부담으로 처리하는 우애결혼이 등장하였다. 이후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고 서로 원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지금 봐도 파격적인 조건의 '우애결혼'은 193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나혜석, 김원주, 박인덕 등의 여성 운동가들은 가부장제를 봉건 사회와 전제정에 비유하여 비판하는 한편, 이혼을 할 자유를 요구하는 강연과 칼럼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20년대 초반 당시의 사회에서는 이혼을 범죄시, 터부시하였으나 이혼이 증가하면서 1930년대에 가서는 공식석상에서 이혼에 대한 비판은 사라지게 된다.\n\n## 1930년대 사회상\n\n### 자유 연애론의 확산\n1930년대 초에는 자유연애를 부르짖은 신여성들의 대담한 선언으로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다.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을 외친 시인 김원주를 비롯해 정조란 오직 취미에 불과한 것이라는 '정조취미론'을 내세운 나혜석, 성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적인 사랑 없이 육체적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 유희론'을 주장한 허정숙 등은 화제가 되었다.\n\n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항거를 넘어선, 여성도 육체적 행위의 주체가 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애욕의 순례자라는 비난을 여성들에게서 듣기도 했다.\n\n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박인덕의 이혼 사건과 파리에서 한 자유로운 연애와 염문이 화제가 된 나혜석 등은 연일 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윤치호 등 일부 사회 운동가들은 이혼녀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에 맞서 이들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애정없는 육체의 결합을 미화시킨 허정숙 등의 의견에 대해서는 연일 지탄과 비판 여론이 등장하였다.\n\n### 브나로드 운동과 문맹 퇴치 운동\n1931년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이는 농촌에도 소학교와 중등 학교를 세우고, 나이가 많은 고령자와 장년층을 위해 야학을 설치하여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대학생들과 대학 출신 인텔리들에게 이를 호소했고, 이들의 호소에 심훈, 최용신, 곽상훈, 박순천 등의 대졸 출신 인재들이 각지의 농촌으로 가서 봉사, 계몽활동을 하게 된다. 1931년 7월 동아일보에서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n\n19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하였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1931년 7월 학생들은 동아일보의 후원을 얻어 ‘브나로드 운동’라는 슬로건 아래 농촌계몽에 나섰다.\n\n이 운동은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강연대·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학생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산술을 가르쳤고, 학생강연대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시국강연·위생강연을 담당했으며, 학생기자대는 고교와 전문대학생으로 구성되며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도록 하였다.\n\n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각종 계몽과 칼럼을 통해 실력 양성이 한국인들의 살 길이고, 실력 양성을 위해서라면 일단 문자와 말과 글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들 자신이 앞장섰고 심훈, 나혜석, 허정숙, 최용신, 심대영 등의 청년 지식인들이 이에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수많은 청년 지사들의 동참으로 한국인의 언어, 문자 식자율은 1910년 10%에서 1936년 무렵에는 65%까지 상승했다.\n\n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했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김성수, 송진우와 동아일보 등을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하였지만 별다른 혐의접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운동으로 이어진다.\n\n### 혁명적 대중 조직 건설 운동\n1930년대에 들면서 혁명적 노동 조합·농민 조합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노동 조합 활동가들은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 조직을 결성하고 표면으로는 합법적인 노동 조합, 파업 본부, 노동자 친목회 등을 결성하여 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공장 신문·팜플렛·전단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최저 임금제, 동일 노동·동일 임금을 선전하고 나아가 민족 해방 운동을 선동했다. 혁명적 노동 조합 운동은 공업 시설이 집중된 흥남·함흥·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35년까지 혁명적 노동 조합 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전국에 걸쳐 1,759명이나 되었다.\n\n농민 조합 운동가들은 농촌 내의 기존 청년 동맹·여성 동맹·소년 동맹을 혁명적 농민 조합에 편입해 각각 농민 조합의 청년부·부녀부·소년부로 만들어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했다. 혁명적 농민 조합의 지도 하에 농민들은 격렬한 반일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함경북도 명천의 농민들은 동과 면마다 계엄대·동지 탈환대·규찰대·연락대 등을 조직하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등 투쟁을 대중적 폭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혁명적 농민 조합은 전국 70여 개 군에 조직되었고, 1931~35년에 경찰에 적발된 혁명적 농민 조합 사건은 43건, 검거된 사람은 4,121명에 이르렀다.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 더욱 엄혹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n\n### 참정권 획득 계획과 실패\n1936년에는 한규복 등의 인물이 참정권을 얻어낼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에 참정권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n\n한규복과 박춘금 등은 일본의 전쟁에 조선인들도 일본의 국민이니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본국 정부에서는 이들의 한국인 학병 참여 주장이 한국인 참정권 획득이 목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사전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병력이 부족해지자 일본은 한국인들의 자발적 학병 참여 운동을 막지 않게 되었다.\n\n### 장기간의 불황과 만혼, 독신자의 등장\n1930년대에는 한국 최초의 독신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와 사회, 유림들과 보수적 지식인들까지 나서서 이를 문제로 지적하며 해결하려 하였다. 독신자의 등장과 30세가 넘어서 결혼하는 만혼자의 증가에 유교성리학자들과 보수적인 지식인들은 사회의 붕괴를 우려했고 말세라는 여론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1933년 12월 잡지 '삼천리'가 개최한 '만혼타개좌담회'에서 나혜석과 이광수 등이 패널로 참여하여 이 문제를 토론하기도 했다.\n\n일제강점기 중반, 한국의 젊은이들은 미국과 유럽 등에게서 유입된 근대적 개인주의 사조의 유입과 여성의 자의식 확산, 경제적 궁핍, 민족적 시련을 경험하면서 가족과 결혼 제도에 대한 극심한 가치관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호응도는 낮았고 일시적으로 만혼과 이혼이 줄어드는 듯 하다가 다시 만혼, 이혼, 독신이 증가하게 된다.\n\n## 전시체제 무렵\n\n### 창씨개명 사태\n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한국에서도 일본식 씨명제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n\n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의 개인적인 정책에서 출발한 것으로 일본 제국 조정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라 일본인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42년 미나미가 조선총독에서 해임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나미 지로에 의해 발표된 이후 창씨개명령은 한국인의 집단 반발 외에도, 일본 내부의 반대와 비난, 조선총독부 내부에서도 총독부 직원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만 해도 창씨개명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 계획을 밀어붙여 논란을 일으켰다.\n\n그러나 창씨개명령 시행을 발표하면서 한국인 사회는 논란이 일어났고, 춘원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이라고 답하였다.\n\n창씨개명 시행은 한국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반발은 거셌고, 친일 인사들조차 혼란에 빠졌다. 창씨의 강압 속에서도 이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많았다.\n\n일본인들은 창씨개명을 시행함으로써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 분리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창씨개명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한국인들의 창씨개명 반대 만큼 일본인들의 반발도 거셌다. 일본인의 반대 여론이 의외로 높았던 것을 두고 후일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미즈노 나오키 교수는 다른 무엇보다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 약화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n\n총독부 내부에서도 창씨개명에 반발했는데, 특히 조선총독부 경찰은 한국인이 똑같이 일본식 이름을 쓰게 되면, 그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했으며, 내지측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우려가 높았다는 것이다.\n\n#### 창씨개명 사태 중재\n1940년 1월 초 총독부는 창씨개명이 한국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발표했다.\n\n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한국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한국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총독에게 아부하는 한국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고, 결국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n\n한편 한국의 정치 지도자 중 윤치호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로 1940년 5월 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5월 1일 오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소환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오전 11시 그는 총독부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을 면담했다. 미나미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n\n전 이 주장에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마감시한을 오는 8월 11일로부터 6~10개월 정도 늦추면 어떨까 싶습니다.}}\n\n#### 창씨개명 단행\n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 형식으로 창씨개명론을 발표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총독이 한국인을 배려한다며 총독의 뜻을 찬양하였다.\n\n그러나 1939년 12월부터 창씨개명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자고 권고한 이광수 조차 총독의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 창씨개명을 해도 좋다는 주장에 의혹을 제기한다. 이광수는 '당국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우리들 대부분이-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며 창씨개명 거부 이후의 불이익을 예상, 우려하였다.\n\n윤치호는 거듭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청했고, 그 뒤, 윤치호의 청을 받아들인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령 시한을 늦춰 1941년 1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창씨개명에 시종 부정적이었던 윤치호 역시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에 가해질 불이익을 염려하였다.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n\n한편, 이와 같은 창씨의 강압 속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고, 6개월간 신고하도록 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신청률이 7.6%에 불과하자 조선총독부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하도록 더욱 협박하고 강요해 신고 마감 시기까지 80%인 322만 가구가 창씨개명하였다.\n\n### 지방 행정\n출생 신고나 사망 신고는 읍사무소, 면사무소의 호적계에서 신고를 받았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글자를 모르는 문맹율이 높아 동네의 이장, 통장, 정장이 거둬서 읍, 면사무소에 신고하였다. 따라서 출생이나 사망 직후 일주일에서 1개월 이상이 지난 뒤에 출생 신고나 사망 신고 처리가 되었다.\n\n또한 당사자가 가서 출생 신고, 사망 신고를 하지 않고 이장, 통장, 정장이 일괄적으로 모아 일주일에 1~2회, 혹은 장날 읍사무소, 면사무소에 나가서 신고하였는데 종이나 필기구에 적어가거나 단순히 구술 암기로 외워서 신고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생년월일이 부정확하거나, 양력과 음력을 헷갈리거나, 사망 날짜가 정확하지 않거나, 출생, 사망신고 당시 이름글자가 바뀌어서 엉뚱한 이름으로 등록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이송이나 옮기던 중 개울 혹은 산사태 등의 사고로 지연되는 일도 존재하였다.\n\n대한제국이 멸망하던 1910년 8월까지만 해도 호적과 성씨가 없었던 한국인들 중에는 일제의 강요로 억지로 양반가문의 성씨나 주인집 성씨와 이름을 부여받아 호적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적 서류는 태평양 전쟁 기간과 해방 직후 1945년 8월~10월 사이 일제 관공서에 대한 분풀이성 약탈과 파괴, 6.25 전쟁 직후의 화재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n\n호적 서류들은 암기와 필기, 수기로 기록하였고 종이는 잘 찢어졌으며, 먹물로 쓰거나, 잉크도 저질이라 쉽게 번졌으므로 행정서류에는 거짓과 오류로 된 내용도 많았다. 이러한 혼선은 해방 뒤에도 1950년 한국 전쟁 직후까지도 계속되었다.\n\n### 사법 행정\n조선총독부는 1910년 6월 29일 공포한 「통감부경찰관서관제」를 그대로 계승하여 조선에 헌병경찰제를 시행하였다.\n\n## 언론\n당시 한국의 각 신문과 잡지, 광고 등의 발행에 제한은 없었으나 엄격한 검열이 진행되었다. 신문과 잡지, 광고는 한글 전용 또는 국한문 혼용체, 일본어와 한자를 섞은 일한자 병용체 등의 광고, 보도가 나갔다.\n\n1940년 태평양 전쟁 이후에도 한글 보도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또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는 한국인 독립운동, 자치 운동 등에 대한 기사들,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소식, 현황도 종종 보도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자치 운동에 대한 옹호 논조를 싣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여러 번 검열, 정간, 폐간, 휴간, 복간 등을 반복하다가 1940년 최종 폐간되었다. 이후 매일신보를 비롯한 소수의 친일 언론이 활동하였다.\n\n1924년부터는 조선방송공사이 경성에서 개통되어 방송 보도되었다. 라디오는 1930년대 이후 읍면 단위 일반 가정까지 보급되었지만, 텔레비전은 군단위 이하에는 거의 보편적으로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TV 시청률은 극히 저조하였다.\n\n## 교육\n조선에서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1906년 시점에서도 초등학교가 전국에서 40 개교 미만이며, 양반의 자제는 서당에서 사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n서당은 삼천 정도 있던 것 같지만, 내용은 한문 교육이 중심이었다. 수학이나 한글 등의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n\n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기에 한국인이 저술한 각급 학교용 교과서들을 몰수하여 사용을 금지시켰고, 그 대신 일본인 저작의 교과서로 대체시켰다. 총독부는 민족교육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교육령' 과 '사립학교규칙' 등을 제정하여 학교의 설치와 교육내용을 총독부가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고등교육 기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서당 들의 등록이 취소되었다.\n일본은 대신 전국에 보통 학교 를 설치했다.\n초등학교는 합병 직전에는 40 개 정도였던 것이 1943년에는 4271 개까지 증가했다.\n고등 교육의 측면에서,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은 30 ~ 40 % 정도에 머물렀다.\n\n조선총독부는 1930년대에 들어오자 일본어 보급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교육당국은 사립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그 사용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관청에서는 한국 농민의 민원도 공용어인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여 한국어 사용을 억제하였고, 또한 1935년부터는 한글을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학생들의 하기 계몽운동을 총독부령으로 제재하였으며, 1938년에는 '국어상용화' 정책으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한국어 사용을 금지,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1938년 한해 전국에 3,660여개의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국농민들에게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n\n또한 한국인을 위압하기 위해 일반관리나 교원에게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고 수업에 임하도록 하였다. 전시하의 일제는 중학생은 물론이고 국민학생까지‘근로보국‘이라는 미명아래 군사시설공사에 강제로 동원하기까지 하였다.\n\n일제는 일본어 전용 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아래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과 학자들을 체포, 투옥하기도 하였다. 함흥의 여학교 학생이 한국어로 대화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던 중, 사전 편찬을 담당하던 조선어학회 회원이 관련되었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를 빌미로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 관련자들을 구속하였던 것이다.\n\n1944년 일본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의 1700만 인구 중 773만 3000명이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이는 일본 지배 하에서 한국어 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으며, 한국인에 대한 교육적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전인 1944년 한국에 거주하는 인구 중 3 %만이 일본인이었으나 종합대학 졸업자의 50%, 단과대, 사범대, 기술전문대 졸업자의 47 %, 중등학교 졸업자의 44 %, 2년제 중학교 졸업자의 73 %가 일본인이었다.\n\n## 경제\n\n### 화폐\n화폐는 1911년부터 일본 엔화 동전이 사용되었다. 1921년 1월 1일부로 광무와 융희라는 연호가 새겨진 동전과 은화들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다.\n\n그러나 건양, 광무, 융희 연호가 새겨진 대한제국 시기의 동전들은 수량도 많아서 산골 오지에도 널리 분포된 상태였고, 일부 위조된 건양 동전, 광무 동전, 융희 동전이 대량으로 주조되어 유통된 상태였다. 총독부 경제국 당국에서는 1921년 1월 1일부로 대한제국 동전 유통 금지령을 내렸지만, 사실상 이들 건양, 광무, 융희 연호가 쓰인 동전은 1930년경까지 시중에 통용되었고, 당국이나 부청, 군청, 구청, 및 각 은행, 협동조합 등에서도 이를 사실상 묵인하였다.\n\n통용 화폐로는 중국 위안화, 미국 달러화, 센트화가 사용되었다. 유사 이후로 중국 엽전이 보급된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개성과 각지의 상인들이 중국 상인들과 무역하였으므로 1913년 이후에는 중화민국 은행에서 발행한 원화가 유입되었다. 미국의 센트화와 달러화는 1880년대부터 조선에 등장한 미국인 선교사와 의사들을 통해 한반도 각지에 유입되어 사용되었다.\n\n자체 화폐 발행이 불가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각종 독립운동 단체 등에서는 반쯤 세계 통용화로 쓰이던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 미국 센트화와 달러화나 금은과 패물들을 주로 거두어갔다.\n\n### 토지 정책\n일본은 한일병합 직후 새로운 토지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10년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 ‘토지조사령’을 발포하였다. 이 사업은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소유권, 가격 그리고 지적을 확정한다는 명분으로 실시한 것이었는데 까다로운 신고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들이 신고 절차를 밟지 않아 토지를 빼앗기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동중 혹은 문중의 공유지나 역둔토, 궁장토 등을 비롯한 국유지에 도지권이라는 토지를 영구히 경작할 수 있었고, 또한 토지소유주의 승낙 없이도 타인에게 자유로이 매매, 양도, 저당, 상속할 수 있는 물권적 권리가 토지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총독부나 유력한 인사들에게 넘어갔다.\n\n그 결과 13만 5천 정보의 역둔토와 4만 6천여 정보의 민유지가 총독부 소유로 되었다. 1930년까지 총독부가 소유한 토지는 전국토의 40%에 해당하였다. 그 과정에서 약 10만 건에 달하는 소유권분쟁이 있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묵살되었다. 토지조사사업과 병행하여 일본인의 농업이민이 10배로 급증하고, 그들의 소유농지는 4배로 증가하여 큰 지주로 성장해 갔다. 총독부의 지세수입도 1919년 기준으로 1911년의 두 배로 늘고 과세지는 10년 사이에 52% 증가하였다. 소수의 지주들은 이 사업으로 도지권을 갖고 있었던 자작농들은 대부분 몰락하여 소작농과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거나 화전민 혹은 만주 등지로 떠나가는 사례가 많았다. 1918년 당시 소작농과 자소작겸농은 전체 농민의 77%에 달하였으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는 식민지 지주제가 성립되었다. 원래 우리나라는 소작이라는 말이 없었고, 지주와 작인 사이에는 서로 대등한 협력관계라는 뜻의 병작이라는 말이 있었을 뿐이었다.이러한 병작이 소작으로 바뀐 것은 작인의 지위가 그만큼 격하되었음을 의미한다.\n\n### 농림 정책\n일본은 광산, 어장, 산림 등 자원에 대한 개발을 강화하였다. 조선광업령에 의해 한국인의 광산경영을 억제하고, 미쓰이, 고하 등 일본 광업자본이 들어와 인천, 갑산 등 주요 광산을 차지했다. 1920년 기준으로 일본의 소유 광산은 전체의 80%를 넘어서고 한국인 광산은 0.3%에 불과하였다. 어업분야에서는 조선어업령에 의해 구한국 황실 및 개인소유 어장이 일본인 소유로 재편성되었다. 일본인은 어업기술에 있어서 한발 앞섰기 때문에 어민 1인당 어획고에도 4배 이상의 차이가 나타났다.\n\n또한 산림에 대해서도 1908년의 ‘삼림법’과 1911년의 ‘삼림령’, 1918년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일본인에게 불하하였는데, 전체 삼림의 50% 이상이 총독부와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다. 특히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목재를 대대적으로 벌채하여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일본은 우리 민족기업을 억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다시 공포하여 회사를 설립할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구한말에 설립된 전기,철도,금융 등 큰 기업은 일본의 미쓰이,미쓰비시 등에게 넘어갔고, 인삼, 소금, 아편 등은 총독부에서 전매하였다. 한국인 기업가는 주로 정미업, 피혁업, 제분업, 요업, 방적업, 농수산물가공업 등 주로 경공업에 한정되었다. 1919년 기준으로 전체 공장의 자본금에서 일본인은 91%를 차지하고, 한국인은 6%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n\n### 산업\n2차 세계대전 후기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일본은 군수품에서 국산원료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는 기술자와 과학자를 총동원하여 갈탄으로 석유를 만드는 방법이나 아주까리씨나 소나무 뿌리를 이용해 윤활유를 만드는 방법 등을 책자로 기록한 기술총동원요강을 배포했다. 이런 자력갱생, 자급자족 경험의 유산은 북한 지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대로 계승하게 되었다.\n\n## 사회기반 산업\n교통 부문에서는 새로운 철도가 신설되고, 간선도로가 보수되었으며 전기와 전신망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은 한국인의 조세부담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일본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금융 부문도 일본이 장악하였다.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금융계를 장악하고, 지방에는 금융조합이 침투하여 서민금융을 통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경영을 위한 경비는 식민지에서 마련한다”는 원칙하에 재정수입을 높이기 위해 세금을 대폭 강화하였다. 소득세, 수익세, 소비세, 교통세, 부가세, 특별세 이외에 각종 잡부금이 부과되어, 이들 수입은 주로 한국인을 다스리고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비용으로 지출되었다.\n\n또한 공장이나 시설 설립에 대한 인허가에 대해서도 일본인에게는 우대혜택을 주거나 한국인 출신 인사들의 인가 심사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하는 등의 차별을 가하였다. 이를 두고 윤치호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양반의 나라'에서 '인허가의 나라'로 변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n\n식민지적 경제구조에서 무역 또한 일본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수출의 90%, 수입의 65%가 일본으로 집중되었는데, 쌀, 잡곡, 잎담배 등이 주요수출품이었고, 옷감, 경공업제품이 들어왔다. 이러한 무역구조가 일본 자본주의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물론이다. 결국 피지배 한국인들은 국권상실과 더불어 일본 자본주의의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 그리고 조세부담을 져야 했다.\n\n### 세금 징수 및 납부\n조선총독부는 당시 국민에게 주민세, 거주세금인 지방비, 면비, 교육세금인 학교조합비와 학교비를 거두었다.\n\n1919년 당시 전라남도에서 거둔 지방비 34만원, 면비 43만원, 학교조합비 7만 4천원, 학교비 2만 2천원 등 기본세금은 86만 6천원이었다.\n\n토지에 대한 세금도 있었다. 토지세금은 지세와 부가세를 거두었다. 토지에 부과하는 부가가치세는 건물, 논농사, 밭농사, 상가 등 목적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n\n1919년 윤치호의 아산군 둔포면 농지에 대한 지세는 1919년 지세 1기분 203원 58전, 부가세 1기분 18원 32전, 1919년 지세 2기분 97원 67전, 부가세 2기분 8원 14전이었다.\n\n그밖에 후생비와 국방비를 거두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는 국방비로도 부족해 각종 위문금과 성금을 거두었고, 강제적이지는 않았지만 국방헌납금이라는 기부금도 모집하였다.\n\n이러한 세금은 개인이 직접납부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극히 드물었다. 세금은 각지의 은행과 협동조합에서 거두었고, 은행과 협동조합이 있는 면내나 읍내까지 나가기 힘든 시골 벽촌이나 오지에서는 읍사무소, 면사무소에서 조달하거나 이장, 통장, 정장이 거둬서 읍, 면사무소 혹은 읍내, 면내, 시내의 은행과 협동조합에 납부하고, 손으로 필기한 영수증을 받아서 각 집에 전달하였다.\n\n## 사회\n\n### 종교\n1915년에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을 발표한다.\n\n#### 중일전쟁 시기 일본 본토\n중일전쟁 전시체제에서 1939년 일본 정부가 종교단체를 통제할 목적으로 종교단체법을 제정 공포한다.\n\n#### 태평양정쟁 시기\n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인력과 물자의 부족에 시달려서 조선총독부가 절에 있는 불상과 치과에서 쓰는 금을 제외한 모든 금속류를 공출하도록 명령한다.\n\n### 해외여행 자유화\n식민지 조선의 근대 관광은 일제의 조선 침략과 함께 시작되었다.\n그런데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는 순수 목적의 해외여행을 위한 여권은 아예 발급되지 않는다.\n\n### 조선왕실 요리 음식점의 개업\n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의 조리사나 기생들이 시중에 나오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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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gpt", "value":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이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으로 발족하면서 피상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1960년 11월 한국노총으로 개칭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에 창립회원으로 참가했다. 본부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35번지이다.\n\n노동자 대투쟁 직전인 1987년 6월 30일 당시에 2,449개 노조와 90만 6천여 명을 가졌던 한국노총은 12월 말에 각각 3,532개와 117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1988년에도 지속되어 당해 6월 30일엔 단위노조 5만 62개에 조합원 수 151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2022년 현재 조합원 수는 1,121,819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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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gpt", "value": "**수로왕**\n\n신라 유리왕 19년 가락국 북쪽 구지봉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6개의 금란이 모두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김수로도 그 가운데 하나이며, 변한에서는 왕을 간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9명의 간이라는 뜻인 구간들이 수로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가락국이라 하였다.\n\n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9척의 소년이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나, 신라의 최치원에 의하면 그가 천신 이비가지와 정견모주라는 여성의 아들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150세 이상을 생존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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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gpt", "value":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변한의 구야국에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42년 3월 변한의 구야국 왕들인 9명의 간들에게 하늘에서부터 \"너희들의 왕을 내려 보낸다\"라는 계시를 주고 왕을 내려보내기 위해선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의 계시를 들은 가락국 9명의 간들과 2백 3명의 백성들이 김해의 구지봉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말대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고 구지가를 불렀다.\n\n변한의 구야국 백성들이 모여들며 노랫소리가 커지자 하늘에서 빛이 나더니 곧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안에 둥근 여섯의 황금 알이 들어있었다. 12일 후 이들 금알에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수로였다. 9명의 간들은 그를 6가야 중 수도이자 영토가 넓은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여 주민들은 그를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또한 나머지 다섯 동생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n\n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기록들을 수집하여 쓴 석이정전의 내용에 따르면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가 하늘의 신인 이비가지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이름이 뇌질주일이었고, 다른 한 명은 뇌질청예라고 하였다.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청예는 여신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희고 갸름했으며 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주일은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n\n석탈해와 재주를 겨룬 뒤 이겨 가락국의 왕 자리를 지켰고, 102년, 파사 이사금의 요청으로 실직곡국과 음즙벌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였다. 이에 파사 이사금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다.\n\n부인은 허황옥이며, 189년까지 무려 158년 동안이나 살았다는 신화적 인물이다." }
{ "from": "user", "value": "거등왕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거등왕**은 금관가야의 제2대 국왕이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12남매 중 장남이다. 시호는 **도왕**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제 2대 국왕으로 재위기간은 199년~253년이다. \n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과 허황옥의 아들이다. 허황옥가 곰이 나타나는 해몽을 꾸고 거등왕을 낳았다고 전해진다.\n\n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부인이며 태자 마품을 낳았다. 한편으로 마품이 손자라고도 한다. 신보는 인도에서 온 허황후를 시종하던 신하였다\n\n재위한 그해 세상을 떠난 수로왕을 위해 편방을 설치하고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 부모의 은혜를 기리기위해 천태산에 아버지 수로왕을 위한 부은암 무척산에는 어머니 허황옥을 위한 모은암을 창건했다. 자암산에는 자신을 위한 자은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n\n## 감문국 정벌\n209년 포상팔국이 난을 일으켜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에서는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와서 포상팔국의 장군을 격살하고 포로 6천명을 가락국에 돌려주었다.\n\n231년 7월 가락국 군대가 신라 장수 석우로와 연합하여 감문국을 병합하였다.\n\n249년 왜가 신라를 침략하여 왕자 우로를 살해하였다. 이 때 거등왕이 군사를 보내 왜병 2백여 명의 목을 배였다.\n\n## 초선대\n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초선대에서 가락국의 거등왕이 칠점산의 선인을 초대해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n\n이곳에는 높이 5.1m의 거대한 암벽에 거등왕의 초상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의 웅장한 형상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
{ "from": "user", "value": "거질미왕의 생애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왕비는 아지부인이며 아간 아궁의 손녀이다. 아궁의 본명은 아도이며 수로왕이 탄강할 때 맞이한 구간 중 한명이다.\n\n즉위 6년 297년 이서고국이 금성에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패하자 거질미왕이 구원병을 보냈다.\n\n312년 왜가 가락국에 청혼하였지만 거질미왕은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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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이시품왕이 누구야?" }
{ "from": "gpt", "value": "**이시품왕**은 금관가야의 제5대 국왕이다. 시호는 **명왕**이다.\n\n영화 2년"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일본서기\n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목라근자로 하여금 탁순국에 모여 가야를 공격한 신라를 격파했다한다.\n\n신라가 왜에 보내는 사신을 끊자, 일본은 소츠히코를 파견하였으나 미인계에 속아서 뜬금없이 금관 가야를 침공했다. 이 결과 가야의 왕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백제로 도망갔고,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가 나서서 겨우 도성과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n\n## 광개토대왕릉비\n400년 가야와 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광개토대왕에게 원병을 청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편성해 남하해 왔다. 이때 왜군을 퇴각하고 가야까지 쫓아와 종발성이 함락되었다.\n\n## 칡꽃 전설\n불모산 아래에 사는 도공 조씨의 딸 설희와 도공 조씨의 수제자 쇠바우가 둘은 서로 사랑하여 약혼을하였는데 하지만 부바우가 신라와 고구려 연합군과의 전쟁에 끌려가 설희는 정혼 언약을 끝까지 지키며 기다리고, 전쟁 포로가 돼 왼팔 불구가 되어 돌아온 쇠바우와 밤 늦게 까지 도예작품을 만들며 살았던 부부를 마을 사람들이 ‘칡넝쿨 부부’라 불었다. 큰 부를 쌓아 나라에 흉년이 올 때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며 살았다. \n\n이 소식을 들은 이시품왕은 칡넝쿨 부부를 불러 위로하고 큰상을 내렸다. 이들 부부가 죽은 뒤 가야 사람들은 칡넝쿨 부부를 기리기 위해서 해마다 여름 칡꽃이 필 때면 여인네들은 머리에 칡꽃을 꽂고 술, 떡, 차를 차린 후에 제사 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고 한다." }
{ "from": "user", "value": "좌지왕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좌지왕** 혹은 **김질왕**, **김토왕**은 금관가야의 제6대 국왕이다. 시호는 **신왕**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삼국유사의〈가락국기〉에 따르면 용녀의 미색에 빠져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고 그녀의 친족들이 주요 관직을 차지해 국정이 어려워지자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신라가 가야를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종정경 박원도가 왕에게 간언하자 그제야 깨달은 좌지왕은 용녀를 하산도에 추방하고 국정을 바로 잡았다. 이후 대아간 도령의 딸 복수를 왕비로 맞았다. 복수와 사이에서 취희왕을 낳았다." }
{ "from": "user", "value": "취희왕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취희왕** 혹은 **김희왕**, **질가왕**, **취지왕**은 가야의 군주로, 금관가야의 제 7대 국왕이다. 시호는 **혜왕**이다.\n\n아버지는 좌지왕이며, 어머니는 대아간 도녕의 딸 복수이다. 비는 각간 진사의 딸 인덕이다. 질지왕의 아버지이다. 451년 2월 3일에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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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질지왕이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질지왕** 혹은 **금질왕**은 금관가야의 제8대 국왕이다. 시호는 **장왕**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452년 시조 수로왕과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허왕옥이 처음 만난 자리에 왕후사란 절을 짓고 밭 10결을 바쳤다. 왕후사는 김해시 보배산에 있었던 절로 임강사 또는 태장사라고도 했는데 터만 남아 있다.\n\n463년 왜구가 황산하를 건너 침략해오자 병사를 보내 방어했다. 481년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를 공격하여 미질부성까지 이르자, 신라왕이 원병을 요청해와 백제와 같이 3국이 연합하여 추격하여 니하까지 진격해 천여명을 죽였다. 487년 흰 꿩을 사로잡아 신라에 보냈다.\n\n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는 보국장군, 본국왕의 관작을 하사받은 하지왕과 같은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n\n## 화랑세기\n화랑세기에 의하면 질지왕이 미사흔의 딸 **통리**를 왕후로 삼았고 서로 매우 사랑하였지만 아들이 없어 통리의 조카인 백흔의 딸 **하희**를 후궁으로 삼게했다. 하희 역시 아들이 없었는데 얼마 안 있어 통리가 아들 **선통**을 낳았다. 질지왕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n\n선통은 말 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는데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비를 만나 사간 김상의 집에 들어갔다. 김상은 좌지왕의 외손이었다. 김상의 딸 방원은 교태에 능하고 아름다웠는데, 선통을 유혹하여 상통을 하였다. 1년 남짓하여 딸을 낳았다. 통리가 듣고 거두어 태자비로 삼았다. 얼마 안 있어 통리와 선통이 모두 죽었다. 질지가 이에 방원을 왕후로 삼았다. 이에 앞서 방원은 질지와 밀통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아들 겸지를 낳았다. 그러므로 질지는 크게 기뻐하여 왕후로 삼은 것이다." }
{ "from": "user", "value": "구형왕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532년 음력 9월 신라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오니 왕이 친히 맞서 싸우려 했으나, 군사적 열세로 대항하여 싸울 수 없어 동생 탈지이질금을 보내 본국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 졸지공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n\n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기 한 해 전인 구형왕 11년 531년 겨울, 밤마다 연자루라는 누각에서 큰 소리가 나 도성인 금관성을 진동시키자 왕이 누를 헐도록 명하였다. 시조대왕의 옥첩에 ‘연자는 임자이니 나라를 신라왕에게 전하여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명에 따라 구형왕은 왕위를 물려주고 산청 방장산에 들어가 버렸다.\n\n구형왕의 항복 연도는 532년이라고도 하고, 562년이라고도 하는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락국기〉편은 두 가지 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구형왕의 차남이 김무력으로서 신라의 장군으로 봉사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신라의 상대등을 지냈다.\n\n구충왕 또는 구해왕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 중남 무덕, 계남 무력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n\n가락국기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으나, 또한 개황력을 인용하며 법흥왕 19년에 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락국기에 따르면 왕비는 분질수이질의 딸 계화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 무도, 무득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n\n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김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자, 구형왕의 증손자이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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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각간의 각간에 임명된 인물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탈해 이사금은~:삼국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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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다이토구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다이토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에도 시대부터 번화가로서 발전한 아사쿠사, 도쿄의 터미널 역의 하나인 우에노역이 다이토 구에 있다." }
{ "from": "user", "value": "지리는?" }
{ "from": "gpt", "value": "도쿄 구부의 북동쪽에 위치한다. 분쿄구, 스미다구, 아라카와구, 주오구, 지요다구와 접한다. 스미다강이 구를 흐른다." }
{ "from": "user", "value":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사후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계통의 종가는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이래로 쇼군직을 이어받을 후계자의 고갈로 난항을 겪었다. 1713년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4남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뒤를 이었으나 병약하여 결국 요절, 쇼군 직위는 히데타다 동생들의 가문인 고산케에서 번갈아 이어받아 기슈 도쿠가와가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다음 쇼군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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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에도 막부의 제8대 쇼군이다.\n\n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남인 요리노부의 자손들로 구성된 고산케 중 하나인 기슈 도쿠가와 가의 당주로, 기이국 기슈번의 신판 다이묘였다. 1716년에 요절한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뒤를 요시무네가 쇼군직을 잇게 되었다. 요시무네는 막부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자 교호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치세에 코끼리가 일본 국내에 소개되었다. 산천, 공기, 자연 경관이 좋은 와카야마 출신으로서의 청백한 기질이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를 시작으로 도쿠가와 쇼군직은 요시무네의 방계 후손 즉, 고렌시 가문에서 이어받았다. 그의 묘소는 도쿄 다이토구의 간에이지에 있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유년기\n조쿄 원년 음력 10월 21일 기슈번 2대 번주인 도쿠가와 미쓰사다의 4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은 기슈 도쿠가와 가의 하인인 고세 로쿠자에몬의 딸 조엔인이다. 기슈 가의 욕실 담당 하녀라는 모친의 낮은 신분 때문에 한동안 가신에게 맡겨져 키워지다 후일 인정받고 입성하였다. 아명은 **겐로쿠**, **신노스케**이다.\n\n겐로쿠 10년 14세 때 로주 오쿠보 다다토모의 배려로 당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알현한 뒤 에치젠국 뉴우 군 3만 석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실제 이 영지를 다스린 것은 가신이었고 요시무네 본인은 여전히 기이의 기슈 도쿠가와 가의 거성에서 거처하였다.\n\n## 기슈 번주 시절\n호에이 2년 맏형이자 3대 기슈 번주인 쓰나노리가 후사 없이 요절하면서 둘째 형인 요리모토가 4대 기슈 번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부친인 미쓰사다, 반년 후 요리모토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22세의 나이에 기슈 번 5대 번주로 취임하였다. 이 때 쇼군 쓰나요시로부터 편휘를 하사받아 비로소 **요시무네**로 개명하였다. 호에이 3년에는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의 딸 사나노미야 마사코 여왕을 정실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호에이 7년 사망하였다.\n\n같은 해 4월 기슈에 입성한 요시무네는 악화된 번의 재정을 개선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번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스스로 무명옷을 입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절약에 앞장섰으며 통치 기구를 간소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두 형과 부친의 장례 비용, 바쿠후로부터 차용한 10만 냥 금의 부채, 재해 복구비, 번 지폐의 정지 등으로 악화되던 번의 재정이 상당 부문 개선되었다. 이외에도 거성인 와카야마 성 앞에 '소원 상자'를 설치해 백성들로부터 직접 청원과 호소를 들으며 문무를 장려하고 효행을 표창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두 아들들인 장남 나가토미마루, 차남 고지로(小次郎, 다야스 무네타케는 요시무네가 기슈 번주로 있던 시절 태어났다.\n\n## 쇼군 취임\n교호 원년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8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래로 내려 온 남자 후계자의 혈통이 끊기자, 히데타다 혈통 이후로 쇼군 계승권이 있던 고산케의 당주들 중 한 명인 요시무네가 방계 가문으로는 처음으로 쇼군직을 계승하였다.\n\n그러나 실제로 요시무네가 쇼군에 취임할 당시 히데타다의 증손이자 다테바야시 번주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가 살아 있어 아직 히데타다의 혈통은 끊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기요타케의 영지인 다테바야시 지방 내에서 무거운 조세 부담으로 잇키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번주로서의 기요타케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이미 고령에 남자 후계자도 없어 기요타케는 쇼군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요시무네의 기슈 도쿠가와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이에야스의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를 시조로 하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보다 계승 서열이 낮았으나 요시무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대상으로 더 가깝다는 명목 하에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은 정당화되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점들 때문에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에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 덴에이인과 이에쓰구의 생모 겟코인 사이를 둘러싼 모종의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n\n## 교호 개혁\n8대 쇼군으로 취임한 직후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 시대부터의 소바요닌인 마나베 아키후사, 아라이 하쿠세키 등을 파면하여 그때까지 내려오던 소바요닌 중심의 정치에서 쇼군 친정 정치를 확립하였다. 이후 미즈노 다다유키를 로주로 임명한 뒤 기슈 번주 시절의 재정 개선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정치를 본따 에도 3대 개혁 중 하나인 교호 개혁을 펼쳤다.\n\n당시까지의 문치 정치의 중요성을 축소시키고 무단 정치 중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으며 검소와 검약을 중시하며 무사들의 풍속 개선을 강조하였다. 조세 제도를 개혁, 정면법, 상미령 등을 시행하여 바쿠후의 재정을 안정시켰으며 토지 개발을 장려하였고 아시다카 제도를 통해 지출을 축소하고 관료제도를 개선하였다. 이 외에도 소송 기간을 축소하여 최대한 판결이 빠르게 이루어지도록 한 사법 제도의 개혁과 화재 대책 마련, 오오쿠의 재정비, 직소 상자 설치를 통한 백성들의 의견과 불만 반영, 고이시카와 요양소 설치를 통한 의료 정책 개선, 외국 서적 수입 기준 완화 등을 시행하여 사회 여러 부문에서 개혁과 변화가 이루어졌다.\n\n이 같은 교호 개혁은 에도 3대 개혁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 없었다면 재정 악화로 인한 에도 바쿠후의 붕괴가 더욱 빨리 도래했을 것이라는 의견 또한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공 오민으로 대표되는 세액 증대로 인해 농민들의 부담이 한층 커지면서 요시무네의 임기 말년에는 일본 전역에서 빈번하게 잇키가 발생하기도 하였다.\n\n## 오고쇼 시절\n엔쿄 2년 9월 25일 쇼군위를 장남 이에시게에게 물려주고 오고쇼로 물러났다. 실제로 이에시게는 언어 장애가 심한데다 병약하기까지 해서 이에시게보다 총명한 차남 무네타케나 4남 무네타다를 쇼군으로 세우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형제들 사이의 후계자 다툼을 염려한 요시무네는 또한 이에시게의 영명한 아들 이에하루에게 희망을 걸고 있어 장자 이에시게를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체적 결점으로 인해 이에시게가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바쿠후의 실권은 요시무네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장악하였다.\n\n또한 요시무네는 나머지 두 아들들을 관례대로 다른 도쿠가와 분가에 양자로 보내거나 영지를 주어 분가시키지 않고 에도성에서 봉급을 받으며 각각 별가를 이루도록 조치하였다. 이로써 차남 무네타케가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을, 사남 무네타다가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을 열었다. 여기에 요시무네 사후 개설된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이 합세하면서 이 세 가문은 고산쿄로 불리게 되었다.\n\n쇼군 은퇴 후 6년 뒤인 간엔 4년 음력 6월 20일 68세로 사망하였다.\n\n혈액형은 도쿠가와 이에쓰나처럼 O형이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
{ "from": "user", "value": "피타고라스가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피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철학자이자, 피타고라스 학파라 불린 컬트 종교 단체의 교주이다. 피타고라스 관해 알려진 정보가 대부분 그가 죽고 수세기 후에 쓰여진 것이라서,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드물다.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으며, 아마도 어린 시절 이집트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학식을 닦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530년 경, 피타고라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토네로 이동하여 종교적인 학파를 세웠다.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은 피타고라스가 개발한 종교적 의식과 훈련을 수행하고 그의 철학 이론을 공부했다. 학파는 크로톤의 정치에도 적극 간섭했는데, 이가 결국 그 자신들의 몰락을 불러왔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회합하던 건물은 방화로 소실되었고 피타고라스는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년을 메타폰툼에서 보냈다고 한다.\n\n기원전 6세기 말 피타고라스는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종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위대한 수학자나 신비주의자, 과학자로서 흔히 추앙받으며, 특히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정리인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뿐 아니라 그에 관한 전설과 혼란으로 그의 실제 공적이 흐려져서, 누가 그의 가르침에 관해 자신있게 답을 주기가 힘들고, 일부는 그가 수학과 자연철학에 기여를 남겼다는 사실에까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피타고라스에게 돌려진 많은 공적은 어쩌면 사실 그 동료나 제자의 공적이었을 것이다. 또 그의 제자들이 모든 것은 수이며 수야말로 궁극적인 본질이라고 믿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피타고라스는 최초로 스스로를 철학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 사람이라고 한다.피타고라스는 정수연구에 빠져서 모든 사물을 자신이 연구하는 정수의 규칙에 결부시키려 하였다." }
{ "from": "user", "value":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는?" }
{ "from": "gpt", "value": "피타고라스는 자기의 정통적 후계자를 피타고리오라고 부르고 그를 따르는 자를 피타고리스타이라고 불렀다. 피타고라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학생들에게는 공공 활동 참여가 권장되었다. 이 학교의 졸업생 중 유명한 자들은 다음과 같다." }
{ "from": "user", "value": "일본은행의 출자 증권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일본은행은 공적 자본과 민간 자본으로 존립하고 있는데 1억 엔의 자본금 중에서 일본 정부는 55%를 출자하고 있다. 「일본은행법」 규정에 따라 일본 정부는 자본금의 최소 55%를 반드시 보유해야 한다. 재무제표에 잉여금을 어떻게 처분했는지 기재되는데 1조 엔 정도의 잉여금이 발생하면 500만 엔을 배당하고 5%를 법정준비금으로 적립하며 95%를 국고납부금으로 한다.\n\n일본은행이 발행하는 출자 증권은 주식회사의 주식에 가까운데 도쿄 증권거래소의 JASDAQ 스탠더드 시장에 상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장 재편과 함께 2022년 4월 4일부터 시장 구분이 사라졌다.\n\n자본금 출자자에게는 출자구 수를 증명하는 출자 증권이 발행된다. 출자 증권은 도쿄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주식에 준해 거래되지만 증권보관진흥제도의 대상이 아니며 이 때문에 일본은행의 출자 증권을 취급하지 않는 증권회사도 있다.\n\n2018년 한 해 동안 도쿄 증권거래소에서 매매된 일본은행의 출자 증권 수는 46만 2,000구다. 100구권을 1구권 100매로 분할하는 것이 가능하며 100구 미만의 매매는 불가능하다.\n\n일본은행의 출자 증권은 유가증권의 탈물질화가 되어 있지 않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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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사성제의 십사무기와 사성제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고타마 붓다는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다운 길이 아니며, 반면 사성제는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제 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사성제에 대해 늘 말하고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사성제라는 실제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n\n이런 고타마 붓다 견해는 십사무기 줄거리가 들어 있는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 제10에 잘 나타나 있다.\n\n憂苦、懊惱,如是此淳大苦陰生。如是,\n世無常,世有底,世無底,命即是身,為命異身異,\n如來終,如來不終,如來終不終,\n如來亦非終亦非不終者,有生、有老、有病、有死,\n愁慼、啼哭、憂苦、懊惱,如是此淳大苦陰生。\n「世有常,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n我不一向說此?此非義相應,非法相應,\n非梵行本,不趣智、不趣覺、不趣涅槃,\n是故我不一向說此。如是,世無常,世有底,\n世無底,命即是身,為命異身異,如來終,\n如來不終,如來終不終,如來亦非終亦非不終,\n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n我不一向說此?此非義相應,非法相應,非梵行本,\n不趣智、不趣覺、不趣涅槃,\n是故我不一向說此也。\n何等法我一向說耶?此義我一向說,苦、苦習、苦滅、苦滅道跡,我一向說。\n以何等故,我一向說此?此是義相應,\n是法相應,是梵行本,趣智、趣覺、趣於涅槃,\n是故我一向說此。是為不可說者則不說,\n可說者則說,當如是持,當如是學。」}}\n\n\"세상 시간은 영원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이치에 맞지 않고 법에 맞지 않으며 또한 범행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느 따위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법에 맞지 않으며 범행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n\n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언제나 말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이치를 언제나 말하는데, 그 이치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나는 언제나 이것들을 말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을 말하는가? 이것들을 말하는 것은, 이것들은 이치에 합당하고 법에 합당하며 범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지혜로 나아가게 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며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러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와 같이 진정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진정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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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두산세계대백과사전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두산에서 서비스하는 백과사전이다." }
{ "from": "user", "value": "개요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1982년 동아출판사의 총30권으로 된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으로 시작되었는데 동아출판사는 백과사전 제작과 판매에 무리하게 매달린 탓인지{{뉴스 인용\n\n2010년 8월 1일자로 **doopedia 두산백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
{ "from": "user", "value":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은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하는 백과사전이다. 31권에 13만 개의 항목이 있다. 5만 개의 사진이 있고 3,000여 명의 석학에 의해 쓰였다.\n한편, 1999년 6월 20일 KBS 1TV 뉴스 9에서{{뉴스 인용\n게다가, KBS는 1999년 6월 21일 오전 8시 라디오뉴스에서 \"대백과사전 만들 형편도 안 되는 군소출판사가 무리하게 진행하여 93년 부도를 냈다. 재벌도 아닌 군소출판사가 만든 세계대백과사전이라 부실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는 거짓방송을 했는데{{뉴스 인용\n이렇게 되자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가 해당 전집 편집부원, 두산 세계대백과사전 편집부원과 함께 \" 정당한 해명을 해 달라\" \"정정보도를 내달라\"며 KBS 박권상 사장을 직접 만났는데{{뉴스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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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이승만이 누구야?" }
{ "from": "gpt", "value":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서훈되었다. 아명은 **승룡**, 호는 **우남**이다.\n\n황해도 평산군에서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독립신문과 협성회회보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계몽운동을 하였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 옥중 계몽활동을 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특별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며 실력양성운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운동가들 사이에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졌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 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중후반에는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의 패전을 확신하고 일제가 망하는 즉시 한국이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하였고,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으며, 임시 정부와 미군 OSS 간의 한미군사협력을 주선하였다.\n\n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공산진영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38선 이남에 민족진영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합법정부를 단독 수립한 뒤 38선 이북의 비합법정부와 공산진영 일체를 쫓아내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그 해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냉전시대에 발맞추어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안팎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사수하였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을 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4.19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 유년기·청소년기\n이승만은 황해도 봉천군 성가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이자,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이자,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 이순의 14대손이자, 장평도정의 손자 수주정 이윤인의 13대손이다. 이승만은 신분상 왕족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이승만의 13대조인 이윤인에서 끝이 났다.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이징하가 음직으로 현령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아갔다.\n\n이승만에겐 두 명의 형들이 있었으나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 모두 홍역으로 사망했다.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라며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승만은 \"나는 6대 독자였다. 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잡수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기 가슴에 뛰어드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된 태몽이었다. 내가 태어날 때 우리 집안이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하였다.\n\n이승만의 증조부 이황의 대는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해 있었는데, 이승만이 2세 때인 1877년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한성부에서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n\n이승만은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아버지 이경선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죽자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이경선은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교육을 잊지 않았다.\n\n이승만이 4세 때인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으로 이름을 고쳤다.\n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n\n이승만은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실에 비판적이었고 자신의 가계를 밝히기를 꺼려했지만, 정작 조선 왕실 족보라는 이유로 왕정복고를 꿈꾼다는 의혹에 종종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은 \"만일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은 고종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불명예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고 회고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의 간단한 일대기를 로버트 T. 올리버 선교사에게 부칠 때 \"나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정적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왕권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다.\n\n1890년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춘겸의 딸 음죽박씨와 결혼하여 1898년 6월 9일 외아들 이봉수를 가졌다. 그러나 1906년 이봉수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자 이경선은 격노해 이승만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결국 1912년 박씨 부인과 이혼했다. 박씨 부인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n\n## 청년기\n\n### 배재학당 수학 및 협성회 활동 \n이승만은 20세 때인 1895년 4월 2일 헨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n\n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n1896년 5월,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비가 내리는 날 볏짚으로 만든 모자와 짚으로 만든 비옷을 입고 서재필의 집에 찾아가 그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또 '박사님의 배재학당 강연을 대단히 감명깊게 들었습니다.'라며 찾아뵙고자 온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n\n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n\n### 언론활동 및 독립협회 사건 \n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열강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를 신문에 실었다. 이 고목가가 신체시의 효시라는 주장이 있다.\n\n1898년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위원으로 선발되었다.\n\n1898년 4월 9일 협성회회보를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발전시키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n\n1898년 8월 10일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n\n1898년 11월경 독립협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11월 5일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17인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한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 등 대중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1월 15일 고종은 내각을 개편하고 독립협회의 복설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것을 약속하고 조병식 일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n\n### 한성감옥 투옥 시절 \n\n#### 투옥, 탈옥미수, 고문 후유증\n1899년 1월 17일 주미국공사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서상대, 최정식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n\n1899년 3월 27일 이승만의 처 박씨는 덕수궁 인화문 밖에서 상소문을 들고 이승만에 대한 선처를 빌었으나 책임관 외에는 직접 상소할 수 없다는 이유로 퇴송되었다.\n\n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재판장 홍종우로부터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n\n허정의 진술에 의하면 이승만은 투옥 당시 고문을 당했다. 허정은 자신이 황성기독교회관 청년부 시절에 이승만이 안면 경련을 일으켰던 것을 진술했다. \"이 무렵의 이 박사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에도 이박사는 얼굴을 실룩거렸다. 그를 상징하다시피하는 이 안면 경련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서 그리 되었다 한다.\"\n\n#### 옥중 계몽운동과 석방\n그는 옥중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을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에서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n1900년 8월 한성감옥서에서 청일 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1917년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n\n1901년 2월부터 1904년 7월까지 옥중 생활 속에서도 가명으로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실었다.\n\n1902년 12월 설립된 감옥 내 학교에서 이승만·양의종이 교사로 선발되어 죄수를 교육하였다. 어린이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옥중도서실을 운영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하였다.\n\n1904년 6월 29일 국민계몽서인 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백성에게 호소한 책이었다.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n\n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건의한 끝에 7월 8일 조칙이 내려졌고, 이승만은 8월 4일 특별 사면령을 받아 8월 9일 석방되었다.\n\n### 미국 유학 및 외교 활동 \n1904년 8월 9일 석방된 이승만은 이후 민영환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하기로 하였다.\n\n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잠시 취임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n\n이승만은 고종을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이승만을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종이 왜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n\n1904년 11월 4일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의 밀사 자격이었다. 일본 고베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합류하였다.\n\n1904년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n\n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n\n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다.\n\n1905년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부 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존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존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n\n1905년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버넌트 장로교회의 루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n\n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 육군장관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윌리엄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n그러나 이승만은 포기하지않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워싱턴의 커버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햄린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는 '이런 공적 성격의 일은 정식 외교 경로를 통해야하며 1882년 조미조약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고 미국 정부와 대통령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이다.'는 답변을 해왔고 김윤정을 처음 주미 조선 공사관에 소개시켜준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인 찰스 W. 니드햄 박사 또한 '이런 중대한 문제는 김윤정 공사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고 본국에 먼저 물어보고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뿐이라며 자신은 김 공사를 신뢰한다'고 하며 이승만에게 단념할 것을 권하였다.\n\n1905년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하였다.\n\n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을 예방하였는데, 고종은 미국이 조선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그냥 가버렸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n\n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하면서 이승만은 방학 때면 선교사들을 후원하던 오션 그로브에 위치한 보이드 부인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그 때, 『Christian Advocate』지의 주필 A. B. 레오나드의 연설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일본이 한국을 영원히 통치할 것을 바란다'고 했는데 이에 격분한 이승만은 레오나드에게 장문의 항의서를 보냈다. 또 『에즈베리 파크』의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하였다.\n\n1907년 6월 5일 조지 워싱턴 대학교 콜럼비아 학부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n\n1907년 9월 하버드 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08년에 수료했으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전명운, 장인환의 더럼 W. 스티븐스 암살 사건으로 친일적인 미국인 교수들로부터 냉대를 받게 되어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웠고 1910년 2월에 가서야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n\n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과 장인환을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략은 미국 등에 의한 외교독립론이었는데 정작 미국인이 한국인에게 암살되었으니 난처한 입장이었다. 이승만은 미주의 한인들에게 전명운과 장인환의 변호비용으로 3,000달러의 거액을 요구해 사실상 변호를 거부하였다.\n\n그러나 미주 본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의 한인들이 기금을 마련해 7,390달러가 모았고, 미주 한인들은 3,000달러를 이승만에게 가져갔다. 이에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는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의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차 거절하고 같은날 8월 25일 동방으로 돌아갔다. 이후 신흥우가 변호 및 통역을 맡았다. 이승만은 공립신보에 ''는 장문의 칼럼을 통해 감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서구 국가를 적으로 돌리게되어 그들이 일본과 더더욱 밀착해 일본을 도우는 꼴이라며 독립에 도움은 커녕 해악이 된다고 호되게 질책하였다. 이 때부터 공립협회를 주도하던 안창호를 위시로한 서북인들이 주류인 가주 지역 한인들과 이승만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했다.\n\n한편 더럼 스티븐슨의 시신은 워싱턴으로 운구되었다가 기독교식 장례를 치른 후 워싱턴 D.C.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조화를 보냈으며 일본 정부는 메이지 천황의 조화와 조문 사절단을 워싱턴에 파견하였으며 훈1등의 훈장을 추서하고 더럼 스티븐슨의 유족에게는 위로금 및 조의금을 지급하였다. 이 사건 직후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미 본토 안창호의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가 탄생하였다. 1909년 재판에서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과 더럼 W. 스티븐스에게 받은 역피해를 명목으로 무죄를 선고받아 선행 석방되었다. 장인환은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으로 감형받고 1919년 가석방되었다.\n1908년 7월 10~15일 이승만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감리교회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이상설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였다. 덴버 리퍼블리칸지가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하였다.\n\n1908년 9월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지도교수인 우드로 윌슨 총장 가족과 친밀한 관계 유지하였다.섬네일|오른쪽|186x186px|]1909년 9월 8일 신한민보에 '戒髻상투를 없애야 되어'라는 사설을 실었다.\n\n1910년 3월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다.\n\n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다른 학교이지만 옆에 붙어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들었다.\n\n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n\n## 독립운동 시기\n\n### 귀국 및 교육 활동 \n1910년 9월 3일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항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1910년 10월 10일 한국에 귀국하였다.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이었다.\n\n1910년 10월 10일부터 1912년 3월 26일까지 종로 기독교청년회의 총무 겸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11년, 이승만은 황성기독청년회가 청년 선교를 위해 발행한 YMCA 국제위원회 총무 존 모트가 쓴 책 신입학생인도, 학생청년회회장, 학생청년회의 종교상회합을 번역해 출판하였다.\n\n1911년 5월 16일부터 6월 21일까지 37일 동안의 전국순회전도 여행 중에 개성에서 윤치호가 세운 한영서원에 들러 제2회 전국기독학생 하령회에 참석하였다.\n\n1911년, 105인 사건에 뒤이은 일제의 체포 위협이 있자,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국제기독교 감리회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도록 선교사들이 주선함으로써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n\n### 감리교 총회 참석을 위해 도미 \n1912년 3월 26일,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로써 1년 5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감하였다.\n\n망명길에 일본에 들러 1912년 4월 10일까지 도쿄 조선YMCA를 근거로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때에 도쿄 조선YMCA에 드나들던 유학생들은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최린, 조용은, 김병로, 현상윤, 이인, 전영택, 윤백남, 김필례 등을 포함하여 50~6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n\n1912년 4월 10일, 요코하마를 출발, 4월 25일 캐나다, 4월 26일 시애틀을 거쳐 1912년 5월 1일, 미니애폴리스에서 4년마다 열리는 '국제기독교감리회총회'에 참석하였다.\n\n1912년 4월 10일, 일본에서 배를 타고 미주로 갈 때 동행한 감리교 메리만 해리스 감독과 일본의 조선 통치에 관하여 논쟁을 벌였다.\n\n이처럼 이승만은 그 문제에 대하여 여러 기독교인들과 자주 토론하였으나, 그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이었다.\n\n그는 총회에서 한국의 독립과 한국 교회의 독립성을 호소하였으나\n\n총회가 끝나자 이승만은 약 6개월간 미주 각 지역을 순회하며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과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미국의 옛 친구들, 지인들을 방문하였고 또 만나는 사람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여러 자문을 구하였다. 1912년 6월 19일, 은사인 우드로 윌슨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뉴저지의 시거트 별장에서 만나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 후 두 차례 더 만났다. 윌슨의 추천서를 가지고 워싱턴 등지를 다니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2년 8월 14일,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에서 ‘소년병학교’를 운영하는 박용만을 만나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하였다. 한국인이 많은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삼기로 합의하였다. 1913년에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하였다.\n\n### 하와이 정착 시기 \n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 집필에 몰두하였고 1913년 3월, 이를 완성하여 출판하였다.\n1913년 8월,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의 원장도 겸하였다. 한인기숙학교를 곧 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했다.\n\n그러나 후에 이승만과 미국 감리교 선교부 사이에는 교육방침을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즉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한인학생들을 하와이사회에 완전히 동화시켜 미국인화 시키려고 했던 반면, 이승만은 한인 학생들에게 한국말, 한국역사, 한국관습을 가르쳐, 장차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공헌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기를 원했다. 1914년,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방침에 반발하여 한인중앙학원 원장직을 사임하였다.\n\n1913년 9월 20일, 태평양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n\n1914년 7월 29일, '한인여자 학원'을 설립하였다.\n\n1914년~1918년은 대한인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던 시기였다. 1915년 중순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 부회장은 박용만이었는데, 동아시아정세의 변화화와 더불어 연해주와 만주의 대한인국민회가 쇠약해졌으며 하와이에서는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갔으며 안창호의 영도역량에도 문제가 있어 3·1 운동 이전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실질적인 기반은 미국 서해안과 멕시코에 지나지 않았다. 1914년 6월 10일 박용만은 하와이 오아후섬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한인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은 무고한 백성의 피만 흘릴 뿐 실질적 소득이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인류 양심과 여론에 호소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가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갈리게 됐고 교회까지 분열하게 되었다.\n\n1915년 5월 1일부터 수 차례의 임시의회가 열리고 회계장부도 조사되었다. 그 결과 김규섭, 이동근, 안영칠의 보고서에 따르면 총재무 홍인표가 1544원 67전을 횡령하고, 양흥엽, 홍진표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와이지방총회장 김종학이 1345원 64전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김종학과 지도부 일동이 파면되었다.\n\n1915년 6월, 이승만은 교육방침의 차이로 미국 감리교 선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감리교 선교부에서 독립시켰다.\n\n1915년 6월 10일경 신규 하와이지방총회장 선거에 홍한식과 고석주가 후보로 출마하여 홍한식이 당선됐다. 이날 이홍기, 김규섭, 김윤배, 이정건은 대의원과 참의원 등에 당선됐다.\n\n1915년 6월 17일경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온 공소장을 본 즉시 의회에서 김종학을 사회법률로 처단하기로 작정하고서 의회 의원들을 한인중앙학원에 불러다 놓고 \"어찌하여 죄인 김종학을 징역시키지 않고 공회재판으로 처치한다 하는가? 그와 같이들 하려면 다 본디 방식으로 돌아가라\"라고 호통쳤다. 1915년 6월 25일경 김종학 등은 홍한식 등에게 선거무효 소송을 걸었다가 3개월만인 9월 29일 소송을 취하하였다.\n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 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소약국민동맹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n\n1918년 1월 15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제10차 대의회에서 하와이지방총회장 안현경 지도부에 재정 비리 의혹이 제기되었다. 2년 6개월전에 박용만파가 받았던 혐의를 이번에는 이승만파가 받았다. 박용만파 대의원들이 이승만에게 따지자, 이승만은 2월 6일과 2월 13일 국민보에 두 차례에 걸쳐 “소약국동맹회의와 재정”, “선동”이라는 표제로 박용만파가 제기한 사안에 대해 해명하는 글을 기고했다. 해명을 했음에도 2월 11일 재정문제를 토의하던 중 난투가 벌어졌다. 안현경은 호놀룰루 경무청에 신고해서 박용만파 유동면, 김성렬, 이찬숙, 김한경 4명을 지목해, 체포케 했다. 1918년 2월 15일 폭동 혐의로 유동면 등 4명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n\n그 직후에도 다툼은 계속됐다. 1918년 3월 11일 이승만파 안현경은 박용만파 유동면 등을 경찰에 체포시켰고, 3월 15일 안현경은 유동면 등을 고발하였다. 같은 날 안현경은 김순기를 경찰에 체포시켰다.\n\n이후 박용만파는 1918년 7월 1일 하와이지방총회에 대항하기 위해 '임시중앙연합회'를 결성하였는데, 이 단체를 흔히 '갈리히연합회'로 불렀다.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로 양분되어 중앙총회의 위상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중앙총회장 안창호까지 나서서 갈리히연합회의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갈리히연합회는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여 이승만의 태평양잡지와 여론전을 펼쳤다. 1920년 초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승만파 이종관 등과 박용만파손창희 등의 선거 불복에 관한 법정다툼도 이승만파가 승리하였다.\n\n이후로도 박용만파와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지만, 이승만파는 언론을 통해 비폭력 저항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는 태도로 한인사회의 평판을 얻기 시작했고, 점차 한인사회를 장악하였다. 한인사회로부터 YMCA 한인지부를 위한 대규모의 기부금을 성공적으로 모금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의 갈등도 해소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 파리 강화회담에 보낼 특사로서 이승만을 신뢰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하와이로 귀환했을 땐 한인사회의 광범위한 축복을 받았다. 중립적인 인사들은 그의 추종자가 되었고, 반이승만파 중 일부조차 이승만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대한인국민회는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n\n1918년 7월 29일 호놀룰루에 신립교회를 설립하였다.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으로 바꾸었다.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로 바꾸었다. 이로써 하와이 한인사회에 이승만이 이끄는 새로운 민족교회가 정식으로 탄생하였다. 한인기독교회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한국어 교육과 민족교육에 열중하였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동지회로 발전하게 되었다.\n\n### 파리 강화회담 및 3.1 운동 전후 \n1918년 10월 경, 하와이를 방문한 여운홍과 평북 선천의 미동병원 원장인 미국인 선교사 알프레드 샤록스 등을 통해 국내의 민족지도자들, 예컨대 송진우, 함태영, 양전백 등에게 알림으로써 그들이 적당한 시기에 자기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는 대중운동을 국내에서 펼쳐줄 것을 부탁했다.\n\n때마침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에서도 1918년 11월 25일,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강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하였다.\n\n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이탈리아 강화회담이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전세계의 공산 운동가들이 고무되었다.\n\n1918년 12월 1일 이승만은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이탈리아 강화회담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n\n1918년 12월경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갔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뜻이 있었던 송진우는 일단 밀서를 반송, 되돌려보냈다.\n\n1919년 1월 6일 이승만은 이탈리아 강화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장택상, 민규식 등을 만나 독립 추진 방략을 논의하였다.\n\n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n\n1919년 2월 중순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국내에는 그가 저격당한 사실이 바로 알려졌다.\n\n1919년 3월 3일 미국 국무성이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고 파리 강화회담에 기대할 것이 없어보이자, 이승만과 정한경은 안창호의 협조를 미리 받고 대한인국민회의 명의로 작성한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드로 윌슨과 미국 신문사에 송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9년 4월경 김규식은 상해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담에 제출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당국은 '정부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 대표단을 문전박대했다.\n\n1919년 3월 5일 미 국무부로부터 이탈리아행 여권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미국 국무부의 답변이었다.\n\n위임통치 청원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지만, 얼마 후 이 일이 임시 정부 내에 알려지자 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 무장독립론자들은 외교독립론자들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되었다. 외세에 의존하였다는 비난도 컸지만 청원을 실시한 시점, 즉 3.1 운동 이후에 실시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이 컸다.\n\n1919년 3월 10일 미국 현지에서 3.1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대한제국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n\n1919년 3월 21일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에서 국무경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이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 D.C.에서 통보받았다. 4월 7일 이승만은 대한국민의회 국무경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n\n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었고, 이승만은 이 사실을 4월 15일에 알게 되었다.\n\n1919년 4월 23일 경성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이 사실을 5월말에 알게 되었다. 이렇게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n\n###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n\n####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추대 \n1919년 4월 23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활동본부가 설치되었다. 6월 14일부터 6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강화회담 의장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6월 이후 미국 언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 ‘한국의 임시 대통령’, ‘임시정부의 대통령 등으로 불렸다.\n\n그리고 대통령 직함으로 각국에 한국이 독립되었다는 공문을 보냈는데 특별히 일본 천황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보내었다.\n\nㅡ 워싱턴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천황에게 전한 공문}}\n\n1919년 8월 15일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전기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n\n이승만의 '프레지던트' 칭호 사용이 상해 임시 정부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8월 25일 상해 임시 정부의 내무부 총장 안창호는 워싱턴 D.C.에 있는 이승만에게 \"상해 임시 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라고 전보를 발송하였다. 이에 8월 26일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라고 답신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한성, 상해, 연해주 중 한성정부만이 국내 대표자들의 헌법절차를 거친 정통 정부이자 이미 전세계에 통보된 대통령 정부이며, 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영어로 표현하면 '프레지던트' 밖에 없다는 자세를 고수하였다. 문제의 호칭 갈등은 임시 정부 헌법 개정으로 일단락되었다.\n\n1919년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 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 7개의 임시 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임시 헌법 제6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규범 내에서 임시 대통령에게 전임한다고 명시하였고, 제3장에서 임시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고 정무를 총감하며 법률을 공포한다고 명시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기존 국무총리였던 이승만이 1919년 9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n\n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 정부는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n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까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 활동을 하고 다녔다.\n\n#### 상해 임시정부 방문 \n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임시 정부에서는 이승만의 현지 취임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임시 정부 및 임시 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 D.C.에 발송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1920년 6월 12일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배를 타고 12월 5일 상하이 동부 푸둥에 밀입국 하였다.\n\n1921년 4월 21일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에 '한국인들은 스스로 통치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본은 우리 한반도에서 결코 독립운동을 꺾지 못했다. 만약 일본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분쇄시켰다면, 왜 이미 많은 수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한국에 다시 새로운 부대를 보내 병력을 증강하겠는가? 그러나 그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도 일본은 아직 2천만 명의 한국인들을 영원한 노예로 만들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경고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위험천만한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적 정책을 포기하고, 거의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원칙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n\n1921년 5월 29일 이승만은 워싱턴 회담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상하이를 떠나 다시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n\n#### 워싱턴 군축 회의 \n이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태평양회의' 외교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n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n\n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며, 회의가 미국 영토에서 열리기 때문에 파리 평화회의에서처럼 한국 대표들이 일본 외교관들에게 질식을 당하지는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n\n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하였다.\n\n이 신임장을 미국 대표단의 단장인 허그스 미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에 직접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이 이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렇다할 아무런 회답도 얻지 못하였다.이 회의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고, 마침 소련 주도로 공산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좌익과 우익 분화를 촉진하는 영향을 끼쳤다.\n\n####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 논란 \n1919년 9월 6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나, 상하이에 와서 자신의 직책을 직접 수행하지 않고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가 임시정부 각료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외교독립론자들이 독단적으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이 임시정부 각료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n\n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회장 안창호는 미주에서 한인 국민대회를 열고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을 대표로 선정하여 독립운동을 촉진시키고 2월 2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 대표 이승만, 정한경 2명의 이름으로 윌슨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청원서를 제출하였다.\n\n4월경, 3~4월에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등 외교독립론자들이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했던 일이 상해 임시 정부 내에 알려지자 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 무장독립론자들은 이승만 등을 맹비난하였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다. 1920년경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을 접견했을 때,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라고 건의하였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n\n신채호는 분명히 위임 통치안이 정한경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정식 결의를 얻었으며, 이승만 뿐 아니라 김규식도 같은 문서를 각국에 발송되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즉, 그는 거짓 모함을 한 것이거나 아니면 잘 모르면서 저런 발언을 한 셈이다. 그러나 현순의 자서전인 현순자사를 보면 대강 왜 신채호가 저런 발언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 임시정부에서 자신이 조소와 조롱거리로 놀림을 받은 것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있던걸로 보인다.국제 연맹 위임통치안은 3.1 운동이 일어난 줄 모른 채 구상하고 실천했던 것인데다가 이미 실패로 끝난 일이니 굳이 철회할 의사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깔끔하게 해명하지 않자 무장독립론자들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을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던가 국제 연맹이 아닌 미국에 청원한 것 등으로 오해하여 이승만을 끝까지 비난하였다.\n\n#### 국민대표회의 당시 \n1921년 이후 임시 정부는 상하이와 국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던 연통제·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 조직망이 파괴되고,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내부 계파 갈등,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거의 활동 불능 상태로 접어들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그러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거나 개조하자는 논의가 등장했다. 이 때 이승만과 김구 등은 창조파, 개조파에 모두 반대하고 임정고수파 입장에 섰다.\n\n1921년 4월 27일 박용만·신채호·신숙 등의 북경군사통일회의가 '상해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일체를 불승인하고 1919년 4월 23일 발포된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통첩을 보내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본격화되었다. 북경군사통일회의 결의문에는 한성정부를 계승한다 하였으나 국제 연맹 위임통치 건을 이유로 이승만과 안창호를 배제한다는 단서를 달았다.\n\n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개막되었다.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n\n1923년 4월 28일 창조파 조덕률·김두만 등 12명의 임시 의정원 의원은 대국쇄신안으로서 이승만의 탄핵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n\n1923년 6월 6일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선포하여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 \"이른바 국민대표회의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달리 정한 것은 국민에 대한 모반이기에 한두 차례 만나 타일러 귀순을 간곡히 권유했는데도 도무지 고집만 부려 방자하게 헌법을 제정한 것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했음이니라.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으로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遺業의 神器를 保衛해야 하는 직권에 의거 소수인이 집회한 6월 2일 이래 모든 不軌행사의 繳銷를 명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각적인 해산을 명한다.\"\n\n#### 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 \n1919년~1921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1923년 국민대표회의 등을 거치면서 임시정부 내 공산진영이 대부분 이탈하고, 비슷한 시기에 이승만이 위임통치 청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통령제 임시 정부 제2기, 제3기, 제4기까지 유임되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의 고질적인 재정난과 임시정부 내 개조파·임정고수파 간의 갈등 등 내부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으며 더 나아가 임시정부 외부의 3부 갈등에도 휘말려 민심마저 흉흉하였다. 그러더니 임시정부 내 기호파와 서북파의 갈등이 폭발하여, 서북파 및 흥사단 계열이 이승만의 탄핵안을 거론하기 시작했다.\n\n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서 직접 영도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자금난이 해결되지 않는 한 가봤자 소용없다며 거절하였다. 1924년 9월 29일 이승만이 이시영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형께서는 여러 번 나더러 동쪽으로 오라고 권하셨습니다. 만일 몇 만원이 있어 허리에 차고 간다면 모두가 나를 환영하고 감싸 줄 것입니다. 허나 돈이 다하고 주머니가 비면 뿔뿔이 헤어져 별안간 길을 가는 사람 보듯이 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누구와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겠습니까?\"\n\n1925년 2월 25일 이시영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정국이 처음에는 백성들의 촉망을 많이 받았으나 이제는 박은식을 교사하여 허수아비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불과 5, 6인이 논의를 주도하여 분열된 가운데 개헌을 주장하나 정신이 위원제에는 있지 아니하므로 재차 사표를 내게 되었고 혹자는 사직하고 떠난 자도 있습니다. 그런즉 순전히 서북인, 즉 흥사단의 내각이 된 셈입니다. 의회가 개원된 지는 이미 오래이나 의원은 자못 영성하여 모이는 것은 5, 6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기도에서는 최창식과 여운형만이 출석하고 충청도에서는 오직 하나 郭憲뿐이며,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희망이 없다 하여 관망하고 나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것이 대략의 실정입니다.\"\n\n1925년 3월 23일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의결해 대통령직에서 면직시키고,\n\n1925년 4월 1일 박은식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번에 정국이 변경된 것은 태좌께서 상해를 떠나 멀리 있으면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몸소 정무를 주간하고 친히 민정을 살피지 못하여 온갖 조치가 그 타당성을 얻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사람의 집에 주인이 없으면 그 집안 살림이 반드시 어지러워지는 법입니다. 하물며 나라의 정무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작년 남만주사변이 확대된 이후로 정부는 더욱 대중의 원망을 받게 되었고 인심은 갈수록 과격해져서 모두가 개혁이란 한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원인이고 다른 문제는 모두가 소소한 것들입니다.\"\n\n이시영, 조소앙, 김구 등은 이승만의 갑작스런 탄핵 면직은 임시 의정원의 횡포라며 반기를 들었다.\n\n이후 임시정부는 약 1년 간 서북파 흥사단 안창호 계열이 장악하였으나 아무런 영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임시정부를 식물 상태로 만들었다.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는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주석 국무위원 체제가 갖춰지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동녕과 이시영 등이 임시정부를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자 같은 기호파인 이동녕파와 이시영파끼리의 주도권 경쟁도 있었다. 이에 1927년 12월 10일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임시정부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n\n#### 구미위원부 활동 \n1919년 8월 25일 임시 집정관총재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n1919년 9월 12일 김규식과 함께 독립공채표를 발행하였다. 독립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원래 독립공채표는 한국의 건국 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84년 6월 28일 이 제정되어 채권에 명시된 액면가 금액에 소정의 이자를 합산하여 지불하기 시작하였다.\n\n1920년 9월 28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지 취임을 위해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가기 전에 현순에게 위원장대리를, 정한경에게 서기를 맡겼다.\n\n1921년 3월 9일 구미위원부 위원장서리 현순은 이승만에게 보낸 업무보고에서 워런 G. 하딩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일관계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이승만에게 알리면서 구미위원부를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개편하여 미국 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 후 현순은 독단적으로 '주미대사'라는 직함을 사용하였다. 4월 29일 김규식은 임시정부 학무총장직을 사퇴하였다.\n\n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 연맹 등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구미위원부는 대한제국 시기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나라들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에 새 임시정부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 미국에서 한국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아울러 의회에 한국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여 1920년 상원에 한국과 에이레의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n\n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기 직전에 그의 측면 지원세력으로 분류되던 구미위원부에 대한 철폐령을 내렸다.\n\n1925년 4월 15일 '구미위원부 통신 제9-5호'에는 구미위원부를 폐지하고 대한인국민회에 사무를 인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미주 동포들이 분개하였으며 뉴욕,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대한인교민단 등이 임시정부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실렸다.\n\n1925년 4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포문에서 이승만은 \"민국 원년에 한성에서 조직하여 세계에 공포한 아 임시정부는 해내외에 일반국민의 성복애대하는 바이어늘 단 상해에 일부 인사들이 파괴를 시도하여 정부 소재지로 일장난국을 성함은 세인이 공지하는 바라. 도금하여는 전부 전복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지하였스니 아 충애동포가 엇지 차를 용인하리오\"라고 한 다음, \"한성계통의 대표적 외교기관인 구미위원부를 유지하여 외교선전사업을 계속 진행함으로 부원의 문제가 정경으로 해결되기를 시사하라\"고 했다. 요컨대 한성정부의 '법통'을 고수하여 구미위원부를 계속 유지해 나가자는 당부였다.\n\n1925년 5월 11일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하였고, 그러나 공식적인 활동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n\n구미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허정·장택상 등이 나타나 업무를 보좌하였다. 이승만이 단독으로 운영하면서 구미위원부가 언제 문을 닫았는지는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다.\n\n1926년 김현구를 기용하여 구미위원부의 살림살이를 맡기기도 했다. 김현구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대소사를 총괄했는데, 1927년 1월부터 1928년 7월까지 1년 반 기간에 걸쳐 무려 131통의 간찰을 이승만에게 발송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답변을 접수받았다.\n\n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 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n\n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와 영국조계, 중국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시정부를 떠나거나 임시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김구는 재중 한인 동포들과 교민단체의 후원금과 성금 모금에 의존하는 한편 1928년 이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도 자금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자신도 처지가 어렵다고 거절하면서도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꾸준히 송금하였다.\n\n1926년 12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구미위원부에서는 삼만여원을 주고 뉴욕 '팍로도 1310호'의 새집으로 옮기고 새 활동에 착수하였는데 영문잡지 한국평론도 계속 발행키로 하였다.\n\n한편 1928년 10월 17일 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n\n1930년 3월 18일 구미위원부는 '한국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선전문건을 배포하였다.\n\n1930년 3월 22일 구미위원부가 朝鮮事情을 인쇄하여 조선의 최근 사정을 널리 각국에 소개코자 하고 있으며 윤치영이 2월 초순에 미국 국무원을 방문하였다는 등의 소식이 전해졌다.\n\n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킨 사건에 대해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n\n1932년 5월 4일, 안창호를 비롯한 무고한 한인 11명이 일제에 체포되자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이름으로 프랑스 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상해거류 한인 보호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n\n### 대한인동지회 활동 \n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 종신총재로 추대되었다.\n한편 1925년 12월 13일 대한인동지회는 동지식산회사를 창립하였다.\n\n1929년 10월 5일부터 1930년 1월 8일 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n\n### 임시 정부 복귀 및 외교활동 \n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 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한 후, 1933년 1월 4일에 국제 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n\n그는 세계 각국의 영향력 있는 언론들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널리알려 여론을 움직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는데, 프랑스어 일간 신문인 주르날 드 제네바의 1933년 1월 26일자 지면에는 일본인의 학정 밑에 가혹한 학대를 또다시 받게된 만주의 한국 망명 이주자들의 입장에 대한 그의 담화가 장문의 기사로서 게재되었고, 1933년 2월 26일에는 국제연맹이 서비스하는 방송에서 기회를 얻어 \n\n1933년 2월 8일,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을 국제 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고, 국제연맹 사무국장인 에릭 드러몬드 경에게 '한국의 독립 회복을 통하여 아시아에 있어서의 일본의 적극적인 군국주의 정책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n이 때 제네바에는 이승만과 같이 타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여러 민족의 독립 운동가들이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중동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의 길을 모색 중이던 아랍계 레바논 독립운동가들은 그들과 동병상련 처지인 처량한 약소국 대표 이승만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그와의 인터뷰를 그들이 운영하는 신문 라 트리뷴 도리앙지 2월 22일자 1면에 장문의 기사로 사진과 함께 실어주었다.\n1933년 2월 21일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n\n1933년 3월 6일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로서 임시정부에서 탄핵된지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였다.\n\n1933년 3월 서한발송 및 선전홍보 활동과는 별개로 이승만은 국제 연맹 리튼 조사단이 일본인의 만주침공을 조사한 리튼보고서의 내용을 발췌하고 여기에 자신의 논평을 가한 만주의 한국인들을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이러한 항일외교를 통해 이승만은 국제 연맹이 리튼보고서를 채택하고 이에 반발한 일본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n\n1933년 7월 9일 제네바를 출발하여 비엔나를 경유해 7월 20일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에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 즉시 쫓겨났다. 8월 10일부터 8월 16일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미국 뉴욕주에 도착했다. 10월 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왔다.\n\n### 임시 정부 국무위원 및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시절 \n1933년 6월 30일 이승만은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정부 일각의 반대에도 외교 활동을 위한 그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 등의 주장에 의해서였다.\n\n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n\n1934년 4월 15일 임시정부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n\n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에 게재되었다.\n1934년 9월 20일, 뉴욕 랙싱턴 가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 도너는 한인 지도자의 외국인 신부를 탐탁치 않게 여긴 한인 교포들에 의해 '호주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주댁이 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좋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호주댁의 호주는 오스트리아의 착오로, 오스트리아를 하와이에서 가까운 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한 것에서 유래되었다.\n1935년 1월 24일, 배우자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 도착, 호놀루루 스타 불레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n\n1936년 7월 6일 이승만은 개인사정을 이유로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을 사임하였다.\n\n1938년 4월 24일 하와이주 호놀룰루 릴리하가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다.\n\n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 D.C.에서 구미위원부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호놀룰루를 떠났다.\n\n1939년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를 임시정부의 김구에게 발송하였다.\n\n1939년 10월 3일부터 12월 5일까지 쓰촨성에서 열린 임시 의정원 제31회 정기회의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와이에 잇는 이승만씨도 외교의 필요를 느끼고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가서 각 주요인사와 교제하면서 본 정부에 향하야 구미위원부의 복설을 요구하엿으나 구미위원부는 이미 의회에서 그의 폐지를 결정한 것임으로 금일 급히 복설시킬 수 없다는 뜻으로써 답하엿음\"\n\n1939년 12월 10일 워싱턴 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다.\n\n1940년 9월 이승만은 한국 광복군 창설 소식을 통보받고 축전을 보냈다.\n\n###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시절 \n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 9개 단체가 모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n\n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워싱턴 D.C.에 위치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대미교섭의 전권을 위임하는 '신임장'을 교부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대미외교의 전면에 다시 나설 수 있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을 통해 조선이 왜 독립해야하는 미국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n\n#### 미국과의 군사협력 활동 \n1941년 9월, 중국을 통한 일본 침투 및 대일 정보수집 계획을 추진한 미 정보조정국 COI의 에손 게일과 접촉해 대일 무장 투쟁의 방안을 협의하였다.\n\n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코델 헐 국무장관의 극동 담당 비서 알저 히스와 스탠리 혼백 극동 국장을 만나서 한국이 사보타쥬와 게릴라 활동으로 대일 전쟁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현 시점에서 동북아의 커다란 이해 관계를 일으키는 정치적인 문제 제기는 시기 상조라고 거절하였다.\n\n1942년 3월, 미국 정보조정국은 COI 최초의 특수작전 부대인 101지대의 제1기 대원을 모집했고 이승만의 추천으로 한국인 COI 대원 제1호로 장석윤이 선발되었다. 하지만 COI부대 계획은 1942년 6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고 1942년 7월 11일, 미국 전략사무국으로 개편되었다. 장석윤은 OSS 소속으로 1942년 7월, 인도 뉴델리에 도착해 미얀마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중경 임시 정부와 이승만의 한국위원부를 연계시킬 계획으로 이승만과 김구 간의 비밀문서 연락 업무도 은밀히 수행하였다.\n\n1942년 7월 28일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부위원장 김병연에게 한인 적임자를 물색하여 지원서를 작성케 한 후 워싱턴 D.C.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50명의 명단을 받았다. 9월 30일 이승만은 OSS의 로센봄 중위, 미국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 등을 만나 중국 내 한국인 게릴라 부대 조직의 후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10월 10일 이승만은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의 프레스턴 굿펠로우에게 통보하였다. ‘FE-6 프로젝트’라고 불린 이 계획은 11월 17일 OSS 극동과 책임자인 찰스 레머의 승인을 받았다. 이승만은 한인 24명의 명단을 승인하고 OSS 특별 작전과로 발송하였다. 프랜시스 데블린 대위는 이들 가운데서 다시 12명을 선별하였는데, 이들이 ‘코리안 프로젝트의 핵’으로서 특수 작전 훈련을 받은 후 충칭 지역으로 배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미국과 한국 간의 역사적인 첫 군사 협력 활동이었다. 선발된 12명이 워싱턴 D.C.로 차출되어 12월 4일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들의 군사 훈련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섬에서 진행되었다. 12월 7일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이승만과 OSS가 추진한 첫 사업의 성과가 어떠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n\n1943년 2월 17일 미국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내,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미국에게 유리해지자 미국은 한인들을 이용한 직접 행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n\n1944년 7월 18일 이승만은 합동 참모 본부에 편지를 써서 태평양 근역 섬에서 포로가 된 한인 노무자나 군인들을 훈련하여 일본과 한국 침투 공작에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주미외교위원부가 포로 중에서 적당한 인원을 선별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OSS는 중국에서 직접 한인들을 훈련할 계획이라고 내부 문서를 돌렸다. 미국은 이승만과 한길수 계열이 아닌 재미 한인을 이용하여 한국 내에 침투시키려는 냅코 작전을 계획하였\n\n#### 한미우호협회 조직 \n그리고 오른 쪽에서 세 번째로 호머 헐버트 선교사가 보인다. 앞줄 왼쪽의 첫 번째 여성은 중국 선교사 핏치 부인이고, 한 사람 건너가 프란체스카 여사이다.]]\n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1 운동 기념일에 맞춰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전승 축원을 위한 '한인 자유대회'를 열었다.\n\n그는 이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n\n1942년 5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의 전쟁 활동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임시정부의 전문을 동봉한 다음과 같은 공한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n\n지금이야말로 미국이 과거 38년간 한국 인민과 한국에 대해서 저질러진 잘못과 부정의를 시정할 시기라는 사실에 각하의 주의를 환기하는 바입니다. 각하께서도 상기하실 것이지만 미국은 1882년의 한미조약에 위반하여 1905년에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각하께서 한 연설에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그 이래 한국 인민은 전세계의 모든 피정복 민족보다 더한 그리고 더 오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한국의 파괴는 일본의 정복 계획의 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동경의 군국주의자들의 손에 하나하나 먹혀 들어간 국가를 여기에 다시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n\n1941년 12월 7일 이래 일본 도국 민족의 폭력으로부터 문명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미국인의 피가 흘려졌고, 얼마나 많은 금전이 사용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서방 정치가들이 동양 평화의 보루로서의 독립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온 것입니다. 이 정치가들은 지난 여러 세기동안 일본의 침략을 몇 번씩이나 격파한 것이 한국인이었다는, 오직 한국민만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 현재의 전쟁 노력을 촉진하고 태평양 장래의 평화를 안전화하기 위하여 나는 각하에게 이제 간청하노니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우리의 공동의 적인 일본과의 싸움에 한국인이 정식 가입함으로서 미국에 실질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원조와 고무를 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n\nㅡ 한국위원회 위원장 이승만}}\n\n며칠 후, 루즈벨트 대통령 비서 왓슨 소장으로부터 \"세밀한 주의를 받았다.\"는 짧은 답신을 받았으나 실효를 거둘만한 것은 없었다.\n\n####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 \n미국 정부는 1942년 2월 24일 전 세계의 청취자를 대상으로 태평양 전쟁의 전쟁상황을 알리기 위한 방송인 미국의 소리를 개국하였다. 이승만은 1942년 6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n\n1942년 6월 13일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단파방송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다.\n\n1942년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이 개국하였다.\n\n#### 임시 정부 승인 운동 \n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일본 제국이 망하는 즉시 한국이 일본 제국에게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미국 등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하였다.\n\n1941년 12월 9일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연락을 받고,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뒤, 동 12월 9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등에게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을 전달하였다.\n\n소련의 한국 점령을 우려하던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표로 미국 국무부와 빈번히 접촉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n\n1942년 1월 2일, 미국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과 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n1942년 1월 16일,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함께 한미협회를 창설,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미 의회 상원 원목인 이사장 프레데릭 해리스, 회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 등을 중심인물로 선출했고,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였다.\n\n1942년 2월 27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 코델 헐 장관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하였다.\n\n1942년 3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승만과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인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 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n\n1942년 12월 31일부터 1943년 2월 16일까지 이승만은 계속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그가 만나 주지 않자 편지로 만약 미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경고하였다.\n\n1943년 3월 30일 미국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외국인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대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n\n1943년 5월 15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시정부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하였다.\n\n1943년 8월 23일, 캐나다에서 열린 제1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시정부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8월 이승만은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종교적 후원단체인 기독교인친한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한국 의료선교사 올리버 R. 에이비슨, 아메리칸 대학 총장 폴 더글러스 등을 중심인물로 내세웠으며, 이들의 주요 활동은 미국 정부 및 의회에의 청원과 대중집회 참여였다.\n\n1943년 초, 이승만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요구하였다.\n\n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12월 19일부터 12월 22일 가이 질레트 미국 상원의원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 방문하였다.\n\n1944년 7월,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문양이 들어있는 우표의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0월 18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은 중국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발송, 1944년 11월에 미국이 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1월 2일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하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렸고, 발행된 태극우표 3점을 동봉하여 중경 임시 정부로 발송해주었다.\n\n1944년 8월 21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거듭 촉구하였다.\n\n1944년 9월 11일 이승만은 제2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다시 카이로 선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의 독립 승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무부 내의 반대파와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루스벨트는 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해 합의하였다.\n\n1945년 2월 5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 차관 조지프 그루에게 전보를 발송,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시정부를 즉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3월 8일 미국 국무부 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창립총회에 임시정부 대표를 초청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3월 9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를 면담하였다.\n1945년 5월 유엔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 5월 14일,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 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일명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여 미 국무부와 충돌하게 되었다.\n\n1945년 8월 소련은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주하면서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지목, 그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이승만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기로 계획하였다.\n\n## 해방 전후 시기\n\n### 광복 직후 \n\n#### 귀국 직전\n천황 히로히토가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 정오는 워싱턴 시간으로 8월 14일 밤 11시였다. 이 뉴스를 들은 이승만은 그 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되도록 빨리 자신이 먼저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승만은 8월 15일 아침 워싱턴에 사는 한국 교포 30여명을 주미외교위원부로 불러 축하파티를 열었다.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쉽게 여권을 내주지 않아 2개월간 발이 묶여 있었다.\n\n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미군 인사들과 연락,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맥아더의 극동사령부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의 허가서에 '고급 집정관'이라는 표현이 있음을 문제삼아 정정을 요구했다. 이 문제가 생긴 것은 9월 23일이었다. 이 표현을 삭제한 뒤에야 여행문서를 재발급받았다.\n\n1945년 9월 5일 미국 국무성 여권과장 루드 쉬플레어 여사를 통해 여권발급허가를 받았고 국방성 스위니 대령의 주선으로 미군작전 지역인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도 일단 얻었다. 그러나 국무성은 곧 주미한국외교대표라는 이승만의 호칭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권발급허가를 취소해버렸다. 이승만은 즉각 호칭을 포기하겠다는 태도를 밝혔지만 국무성은 뚜렷한 이유를 대지 않은 채 계속 여권발급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더 이상 그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나왔다.\n\n1945년 9월 초, 하지 중장이 진주군 사령관으로서 인천에 상륙할 때쯤,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한국에 대한 소련의 야망에 신경과민이 되어 있는 이승만을 찾아가 친구로서 그가 추구하고 있는 **"극단적"** 침로에 대한 근심을 표명하였다.\n\n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이승만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n\n**이승만** :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조국을 위하여 일생 싸워 왔습니다. 그러한 내가 개인의 지위를 위하여 조국을 소련에 맡기도록 꾸며 나갈 수가 있습니까? 아내와 나는 오랫동안 고국에 돌아가 국민과 재회할 것을 꿈 꾸었습니다. 수백만의 동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국이 노예화되는데도 그들을 속이고 그들에게 독립을 주기 위해서 돌아왔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조국에 대한 나의 일은 끝입니다. 그러나 나는 될 수 있는 한 계속하여 그들의 잘못을 경고할 작정입니다. 파멸해가고 있는 것은 한국만이 아닙니다. 소련의 세계 정복에 대항할 수 있는 국민은 미국인 뿐이므로 미국은 타국보다 더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나의 임무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미국인에게 그대로 알리는 것 뿐입니다. 우리들은...\n\n그는 격한 감정을 누른 채 웃으며 부인을 돌아 보았다.\n\n**이승만** : 우리들은 언제든 시골에 은퇴하여 닭을 치며 조국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n\n#### 귀국 직후\n1945년 10월 4일 뉴욕을 출발해 하와이와 괌을 거쳐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태평양지구 미 육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 ‘바탄’호를 이용하여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33년만의 귀국이었다. 조선호텔에 투숙하였다.\n\n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국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섬네일|)]]\n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n\n1945년 10월 20일 경성시민주최 연합군환영회에서 이승만은 \"오냐 힘을 합치리라 한 깃발 아래로 목숨을 바치리라\"고 맹세를 하였다.섬네일|왼쪽|160픽셀|미군정청 사령장관 ]이승만이 귀국후에 벌인 첫 번째 대미교섭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문제였다. 이승만은 존 하지에게 임시정부를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지는 답변을 회피한다. 윤석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측근들에게 \"존 하지가 임시정부를 불한당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n\n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그가 귀국하자 국내의 후견인이자 독립협회 때부터의 동지였던 윤치호가 만나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윤치호를 만나지 않았다.\n\n#### 한국민주당 영수 및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 거절\n1945년 10월 16일 오후 허정은 미 군정 당국의 연락을 받고 이승만이 여장을 푼 조선호텔로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허정은 한국민주당의 창당을 알리고 그에게 영수 추대를 수락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수락을 거절했다. 허정은 여러번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한 정당 정파의 리더가 되기는 싫다고 답했다. 이승만의 성품을 알고 있던 허정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n\n1945년 9월 7일 이승만은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다. 10월 21일 허헌, 이강국 등 좌익인사들이 방문해서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 취임을 요청하였다.\n\n그러나 11월 7일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대동단결할 것을 역설하였다. \"내가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어 있고 나를 주석으로 선정하였다 하니 나를 이만치 생각해준 것은 감사하나 나는 그것을 정식으로나 비공식으로나 수락치 않았다. 나는 중경임시정부의 한 사람이다.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정식타협이 있기 전에는 아무런 데도 관계할 수가 없다. 군정청에서는 인민공화정당은 허락하되 공화국정부는 허락하지 않는다. 중앙협의회는 정부가 아니며 정부의 대표도 아니며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국권회복을 위하여 각정당이 대동단결하여 한 데 뭉친 단체다. 이와 같이하여 나가면 국권회복도 곧 될 것이다.\"\n\n###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n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군정 종료 후 정권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불인정하였다. 과거 임시정부 내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자유시 참변 등 극심한 좌우갈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이승만은 좌익, 우익, 임시정부 요인이 총망라된 단체를 만들어 미군정의 정권을 인수하고자 하였다.\n\n1945년 10월 21일 이승만은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일부 공산주의자에 한해서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함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과거 한인 공산당에 대하여 공산주의를 둘로 나누어 말하고 싶다. 공산주의가 경제방향에서 노동대중에 복리를 주자는 것과 둘째는 공산주의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격동하는 것이다. \"\n\n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초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공산당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n\n1945년 10월 24일 윤치영 등의 독지가들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하였다. 그가 미국에 체류했을 때 이미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허정, 장덕수가 돈암장에 출입했고, 윤치영, 이기붕 등은 그의 비서역을 자처했다.\n\n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건국기관으로 추대하기 위한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 이 날 이승만이 \"성스러운 건국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을 시인하며 그러나 지금은 바쁜 때이니 그들을 처단할 수는 없지 않나\"고 묻자 박헌영은 \"우리도 지금 그들을 처단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성스러운 건국기관에서 친일파만 제외하면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선생과 함께 손을 잡겠다\"고 답하였다.\n\n그러나 1945년 11월 3일 조선공산당은 금새 입장을 바꿔 '先친일청산'을 주장하면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한 비판성명을 발표하였다.\n\n1945년 11월 21일 이승만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해 극좌세력을 견제하였다. \"악독한 왜적의 압박하에서 지하공작으로 백절불굴하고 배일항전하던 공산당원들을 나는 공산당원으로 보지 않고 애국자로 인정한다. 공산주의자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공산주의가 경제방면으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것이니 이것을 채용하자는 목적으로 주장하는 인사들이다. 이러한 공산주의에 나는 얼마만큼 찬성한다. 둘째는 경제정책의 이해는 어찌되던지 공산정부만 수립하기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선동하는 중에서 분쟁이 생겨 국사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이니 이 분자가 참으로 염려되는 점이다. \"\n\n1945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일제에 의해 폐간된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문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하자 이승만은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김구, 김규식 등 환국 요인들을 영접하였다.\n\n1945년 12월 13일과 14일 극좌익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임시정부 세력 역시 임시정부 인사들을 독촉에 참여시킨 후 임시정부를 해산한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별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n\n1945년 12월 17일 이승만은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는 친소 반민족주의 극좌세력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였다.1945년 12월 19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정개선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15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11시 정각이 가까워오자 김구 이하 임정요인 일동의 입장에 뒤 이어서 각 정당대표 및 기타 인사의 입장이 있었고 장엄한 취주악에 맞추어 일동 총기립으로 환영대회가 개막되었다. 36년간 잊었던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일동의 애국가 제창, 이화여전의 환영가 제창, 홍명희의 환영사,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 후 김구의 답사와 이승만의 답사가 있었고, 만세삼창으로 환영회는 폐회되었다.\n\n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n\n###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n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논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리자 좌우파 가릴 것 없이 모두 강력한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도 반탁을 결의하였다.\n\n1945년 12월 30일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의견이 전부 일치하였었다.\n\n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정례기자단회견에서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한 공산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개최되자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서둘러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n\n반탁진영은 1946년 1월 20일 임시정부 중심의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개최하여 전국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소집하였다. 1월 21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하고 이승만·김구를 공동회장으로 추대하였다.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로부터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위임 받은 이승만·김구는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n\n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개편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에, 김구·김규식이 부의장에 추대되었다.\n\n1946년 2월 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 분모 하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합 결성하였다. 이승만은 총재, 김구는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중앙조직을 끝내고 전국의 시·도·군까지 지부조직을 확대하는 동시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대를 설치하여 전위부대로 활동하게 하는 등 정당 아닌 국민운동단체로서 방대한 조직이 형성되었다.\n\n1946년 3월 1일 기미독립기념회와 3·1기념회가 주관한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개회사를 하였다.\n\n###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n1946년 3월 19일 이승만은 시간적 여유와 신병을 이유로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표를 제출했으나 민주의원은 사표를 접수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승만의 건강이 회복될 기간 부의장 김규식이 의장직을 겸직하기로 하였다.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 3월 20일 이승만 집의 전화를 끊었다.\n\n1946년 3월 20일 민주의원 총리 김구와 부의장 김규식은 창덕궁 인정전에 있는 민주의원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미소공동위원회는 우리의 운명을 장악하느니만치 우리는 힘을 합하여 미소공위가 성공되게끔 협력해야 된다\"고 말했다.섬네일|270px|오른쪽|1946년 제1차 ]\n\n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n\n1946년 3월 25일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여러 가지 풍문에 대한 입장 정리를 하였다. \"민주의원은 처음부터 신탁을 반대하여 왔고 지금도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 민의로 하지 않고 미소공위의 자유로 조직하는 것은 한민족 전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음과 같은 1문1답을 하였다. \" 민주의원 사임표명은 신병관계인 줄 아나 일부에서는 종래 반소 반공 입장에 있는 관계로 취한 태도라고 보고 있는데 소감 어떤지? 신병관계로 부득이 그리 한 것이고 항간에 떠도는 말은 국제상, 정치상 아무런 관계도 없고 연관도 없다.\" \" 김구와 이박사는 최근에 이르러 정치상 어긋남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억측이오 또 논의된 아무런 일도 없다.\" \" 신병이 완치되면 민주의원 의장의 실무를 계속할 의사인가? 물론이다.\"\n\n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은 미국의 예상대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측은 “북한 주민도 모스크바 협정문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되었다.\n\n미소공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민족주의진영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1946년 3월 22일 국민당과의 통합을 선언하였다.\n\n이후 미소공동위원회는 난항을 거듭하다가, 4월 18일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 즉 '공동성명 제5호'가 발표되었고,\n\n1946년 5월 23일 이승만은 민규식등 경제보국회 소속 10명으로부터 1천만원을 '독립자금' 명목으로 제공받았다.\n\n###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 \n1946년 2월 8일 북한은 남한과의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사실상의 단독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입각한 농지개혁과 산업시설 국유화를 시작했고, 1946년 4월 중국에선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해 공산당과 국민당이 다투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 소련에 의해 좌우합작 정부를 세웠던 동유럽도 공산화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과 조선공산당이 극단적인 대립에 놓인 상태였다.\n\n이러한 가운데 1946년 4월 6일 언론을 통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이 처음 제기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지연되자 미군정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남한 단독 정부를 본국에 제의했다는 것이다.섬네일|230px|오른쪽|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n\n그런데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중단되고, 5월 11일 이승만이 지방순회 소감에서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나도 이 점에 대하여 생각한 적은 있으나 발표는 아직 못하겠다\"고 언질을 하고,\n\n1946년 5월 15일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경찰당국의 진상발표가 나오자 5월 16일 독촉국민회는 \"악질 공산당 일파의 집단을 삼천만 동포의 총의로 배격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공산진영을 맹비난했다.섬네일|300px|오른쪽|]\n\n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부터 남한단정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1946년 6월 5일 전라북도 이리에서는 \"일반민중이 초조해서 지금은 남조선만이라도 정부가 수립되기를 고대하며 혹은 선동하는 중이다\"라고 말했고,\n\n1946년 6월 10일 미소공동위원회의 무기휴회와 남한단정론으로 국내정계가 복잡미묘한 가운데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국대회가 열렸다. 이승만과 김구는 2일차인 6월 11일에 참석하였다.\n\n1946년 6월 12일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에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이날 '가까운 시일 내에 민족통일사령부를 중앙에 설치하고 국민운동의 최고영도로서 독립전취운동을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전개하겠다'고 하였다.\n\n1946년 6월 29일, 새로운 민족통일기관의 설치구상과 단독정부 수립 준비 및 지지기반 확보를 위하여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였다.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n\n1946년 7월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형태로든지, 선출된 실행위원회에서 임명된 형태로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도전했다. 그러한 정부의 지위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단순한 과도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이승만은 밝혔다. 그리고 여러 정치써클에서 논의된 정부구성에 관한 의견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손으로 신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소공위의 결과가 우리의 기대와 일치한다면 그때는 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n\n### 좌우합작운동과의 경쟁 \n1946년 7월 25일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을 외면하고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하였는데, 이는 좌익진영을 극좌익과 중도좌익으로 구분하여 조선공산당과 같은 극좌익을 고립시키고 여운형 중심의 중도좌익을 견인하여 우익 주도의 정국 구도를 짜기 위해서였다.\n\n1946년 8월 3일 이승만은 여운홍의 사회민주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n\n1946년 9월 10일 민주의원은 한반도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유엔으로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서 열릴 제2차 유엔 총회에 파견하였다. 임영신은 11월 1일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각국의 유엔 대표들에게 발송하였고 호응을 얻었다. 이후 유엔은 한국문제를 공식 토의에 상정하게 되었다.\n\n1946년 9월 12일 이승만은 차량 이동 중 돈화문 앞에서 김광명의 권총저격을 당했으나 총알이 차체를 뚫지는 못하였다.\n\n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 7원칙' 발표 등 좌우합작운동이 활발해지자 이승만은 \"좌우합작이 성립되어 38선이 철폐되고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그 정부가 어떠한 정부던 그 정부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던 나는 일시민으로 이를 무조건으로 지지하겠다\"고 말해 남한단정론과 좌우합작운동 간의 마찰을 피하고자 하였다.\n\n1946년 부산에서 9월 총파업이 일어나고, 이어서 대구 10.1 사건이 발생되었다. 대구 10.1 사건은 10월 3일부터 경상북도, 경상남도로, 10월 초순에 충청도로, 10월 하순에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로,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전라남도로, 12월 중순에 전라북도로 확산된 후에 끝났다. 이를 두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대구 10.1 사건을 '동학농민운동,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 평가했다. 김성수의 민주당은 '이번 파업투쟁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 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일제히 맹비난했다.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는 '10·1 폭동이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파괴분자들의 선동 탓에 일어났지만, 사태를 살육과 파괴로 몰고 간 책임은 과격한 투쟁 노선으로 기운 조선공산당에 있다'고 비판했다. 오늘날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의 근본원인은 미군정의 실정에 따른 국민적 반감 및 소군정의 명령에 따른 조선공산당의 선동이 종합된 것으로 평가된다.\n\n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극좌를 쫓아내야 된다'는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의 위상이 올라가고 '한반도에 극좌도 포함해야 된다'는 좌우합작운동의 위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북한과 조선공산당 등 극좌익이 우세한 한반도에 극좌부터 극우까지 아우르는 통일정부가 수립될 경우 우익은 결국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외면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정국이 극좌익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의 대중적 동력 또한 급속히 약화되었다.\n\n1946년 11월 30일 월남자 단체와 반공주의자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이승만, 김구, 한민당은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는데 대부분 일회성이었다. 서북청년단 본부는 한국민주당과 함께 동아일보사 건물에 있었다.\n\n### 도미 외교 및 임정법통론 일시보류 \n1946년 12월 1일 아침 김규식을 병문안 하고, 12월 2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유엔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출발하였다.\n\n1947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움직임에 따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다시 가열되기 시작했다. 1월 14일 미군정은 경향신문을 통해 1월 18일 전국학생총연맹 주도 하에 반탁데모가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n\n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김구가 위원장, 조소앙, 김성수가 부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월 26일에는 이승만이 최고 고문에, 조성환이 부위원장에 추가로 추대되었다.\n\n1947년 2월 7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6가지를 제안하였다. \"총선거에 의하여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조선의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이 과도정부는 미소 양국간의 교섭을 방해하는 바 없이 점령군과 기타 중요문제에 관하여 미소 양국과 교섭할 것\", \"조선의 경제재건을 위하여 일본에 대한 조선의 배상 요구를 속히 고려할 것\", \"평등한 지위에서 조선에 통상권을 행할 것\", \"국제 환제도를 설치하고 통화를 안정시킬 것\", \"미군을 미소 양군이 동시 철퇴할 때까지 주둔할 것.\"\n\n한편 이승만이 미국에 있는 동안 국내 임시정부 지지세력은 미군정을 인수하기 위한 운동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1947년 2월 17일 민족통일총본부·독촉국민회·비상국민회의를 통합하고 비상국민회의를 국민의회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미군정 브라운 소장에게 임시정부의 권능을 인정해달라 요구했으나 거부 당했다.\n\n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n\n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4월 13일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섬네일|1947년 4월 22일 김포공항에서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1947년 4월 21일 비행기편으로 경기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구는 김포공항에 나와 그를 친히 마중하였다.\n1947년 4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귀국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공산주의와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우리는 총선거법안을 빨리 만들어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하고 UN을 참가시켜 소련을 설득한 후 통일을 이뤄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단념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할 것'이라고 요구하였다.\n\n이승만이 임정법통론을 일시보류한데다가 4월 29일 임시정부 주석 취임까지 거부하자 급기야 5월 2일 경교장에서 이승만, 김구, 조소앙, 조완구, 이청천, 김창숙 등 국민의회 국무위원들과 독촉국민회 지방대표 여러 명이 모여 회담을 하였는데, 이승만의 '임정봉대가 필요할 시기가 올 때까지 보류하자'는 의견과 임시정부 일부요인의 '임정봉대가 필요하다'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n\n1947년 5월 9일 이승만은 \"대한임정법통관계는 지금 문제삼지 말고 아직 잠복상태로 계속하였다가 정식국회와 정식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 의정원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정당히 전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n\n###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n1947년 5월 20일 돈암장에서 이승만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문에서 신탁조항을 삭제할 것, 소련은 의사표시의 자유를 보장할 것, 과도정부는 민주주의로 하되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가 연립하는 과도정부는 반대함, 만약 그러한 과도정부가 수립되면 남조선 공산화를 방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정도에 따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하였다.\n\n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방문한 한국민주당 장덕수에게 참가보류를 강경히 주장하였다. 이렇게 우익진영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임정수립대책협의회 가입단체, 이승만·김구 계열, 유림 계열의 3파로 분립하였다.\n\n1947년 6월 23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주관 하에 전국 각지에서 반탁시위가 벌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많게는 수만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반탁시위를 하였다. 종로 군정청 앞에서는 마라톤 선수 서윤복 귀국환영회가 끝나자마자 전국학련 학생들의 주도로 반탁시위가 있었다.\n\n그러나 초기의 신탁 통치 반대 운동 때와는 달리 국민들은 좌우합작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었고 반탁시위에는 저조한 지지만을 보냈다. 1947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서울 2,4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6월 23일 반탁시위는 '독립의 길이다' 651표, '독립의 길이 아니다' 1,736표를 받았으며, 미소공위와의 협의에서 제외할 정당 사회단체로 한민당 1,227표, 한독당 922표, 독촉국민회 309표, 남로당 174표 등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된 이후로 미군정에게 소외된 상태였으며,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1947년 7월 19일에는 여운형이 암살되기까지 하면서 사실상 좌초되었다.\n\n1947년 6월 30일 하지는 이승만·김구 세력 내부의 고위관계자로부터 이승만·김구가 정치암살과 테러를 계획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면서 이승만을 추궁했다. 이애 이승만과 김구는 이를 반박하면서 하지와 주고 받은 서한을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이 고발을 하였다는 인사의 성명을 지체없이 내게 알려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내가 유죄한 경우에는 벌을 받아야 하겠고 그렇지 않으면 이런 중대한 죄명을 내게 씌우는 자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n\n1947년 7월 8일 소련은 제1차 미소공위 때와 마찬가지로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된다고 주장해서 미국과 이견을 보였다.\n\n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될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1947년 7월 10일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를 공동영수로 추대하였다. 한국독립당 선전부는 \"자율적 법통임시정부 수립\"과 \"미소공위도 유령상대를 버리고 이 진정한 3천만 총의의 자율적 민주주의임정수립 대업성취를 원조 승락하기 바란다\" 등의 대회의 요지를 발표하였다.\n\n1947년 8월 12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양진영의 반목으로 완전 결렬되어,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다.\n\n### 단선단정론 대 남북협상론 \n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파탄나자 1947년 8월 28일 미군정은 한국문제를 미·영·중·소 4개국 외상회의에 넘겨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38선 이북에서 확고한 정권기초를 마련한 소련은 4개국 외상회의를 거부하였다.\n\n1947년 9월 5일 이승만은 국민의회 제43차 임시대회에서 주석에 보선되었으나, 9월 16일 국민의회 주석 유임을 거절하고 \"**남한만으로라도 총선거를 행하자**\"며, \"**내가 총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오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상에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며 만일 이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지마는 아무 다른 방식이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니 전민족이 다 합심해서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n\n1947년 9월 17일 미국 국무부 장관 조지 마셜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고 발표했다. 즉 유엔 한국 위원회 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하고 그 정부의 권능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제2차 유엔 총회에 상정되었다.\n\n1947년 9월 21일 이청천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1947년 10월 18일 돈암장을 떠나고 윤치영 등 측근들과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 사저에 입주하였다.\n\n1947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 총회 결과 유엔 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총선거 실시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설치가 가결됐다는 소식을 접하였다.\n\n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 총선거는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이라고 발표했다가,\n\n1947년 12월 12일 수도경찰청 장택상은 '국민의회측의 간부 몇 사람이 장덕수 피살 사건에 관계된 사실이 있다'며 국민의회와 민대 합동회의에 대한 집회금지조치를 내렸다.\n\n1948년 1월 8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이들을 마중 나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였다. 1월 12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그러나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단장인 크리슈나 메논이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연설 중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하였다.\n\n이 무렵부터 이승만의 단선단정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 간 대립이 심화되고 국론도 분열되기 시작했다. 1948년 1월 16일 \"영도적 문제와 이념의 차이로 아직 원만한 합동을 보지 못하고,\" \"합동이 된다 하여도 국민의회측에서 임정법통을 고집하고 민대측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함이 부동한 쌍방의 근본 주장인만큼 장래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보도가 나왔다.\n\n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는 남한 단독 총선거를 통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를 수립한 뒤 압도적인 득표율을 근거로 소련을 쫓아내고 통일을 이루려던 이승만의 계획에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단체와 언론이 남북협상에 회의적이었다.\n\n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하였다.\n\n1948년 3월 1일 김구는 '초대 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나 남한 단독 총선거에는 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n\n1948년 3월 8일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북미합중국대통령 트루만의 명의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n\n1948년 4월 1일 김구와 김규식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가는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n\n1948년 4월 5일, 이승만은 그의 일기에서 남북 협상에 대해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n\n그러나 결국 공산당은 모스크바 결정인 신탁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든가, 아니면 북한의 '인민 정권이야말로 한국의 유일한 정권이며, 남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군사상의 준비는 이 때문이다.\n\n김규식 씨는 미군 철수를 요구할 것이 틀림 없다. 과거에도 요구한 것처럼 그리되면 소련군도 철수하겠지만, 미국의 반응을 주시할 것이며, **미군이 철수하고 보면 그 이후에는 말을 안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김규식 씨는 명석한 사람으로 자기로서는 소련 쯤은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n\n즉각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남한만이라도 우리의 계획을 추진하는 일이다.}}\n\n1948년 4월 25일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n\n김구와 김규식, 그리고 남북 협상에 참가했던 모든 대표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을 안고 5월 4일, 평양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n\n우리는 정식적으로 법리적으로 또 대규모적으로 이 선거를 시행해야 한다. 지금 남들은 우리를 40년간 정치를 못해본 국민이라 능력이 없다는 욕스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차 선거를 모범적으로 실시하여 우리의 면목을 회복시켜야 하겠다.\n\n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 실정을 보면 한편에서는 독립을 찾겠다고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을 반대하고 있다. 이 때 또 중간파에는 독립을 안 해도 좋고 해도 좋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일부에서는 남북 통일 선거가 아니면 대의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구실로 금차 선거를 반대하나, 그러면 **남한 선거만 원하는 사람은 누가 있단 말인가. 북한이 막혀 통일 선거를 할 수 없게 되었다해서 이것도 저것도 말고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이런 대의 명분은 공산화를 기도하는 방법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n\n⋯ 이번 선거에 실패한다면 방해하려는 자들에게 언질을 주게 되며, 우리 국운은 실로 한심스럽게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보자 난립을 주의해 주시오.}}\n\n한편 이승만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결별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를 입증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경빈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노선 차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피살로 인해 화해의 결실을 맺진 못하였다.\n\n### 제헌 국회의원 및 제헌 국회의장 당선 직후 \n1948년 5월 10일 이승만은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n\n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책임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n\n1948년 7월 17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에 제헌 헌법 전문이 게재되었다.\n\n1948년 7월 20일 실시된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n\n1948년 7월 24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n\n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직전인 8월 11일 파리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장면 등을 대표로 지목,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에 능한 몇 안되는 인사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을 특별히 채용하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삼기도 했다.\n\n### 초대 내각과 한민당과의 갈등 \n1948년 7월 27일, 국무총리 지명을 앞두고 국회의 3대 파벌인 독촉국민회, 한민당, 한독당계 무소속 의원들은 각각 신익희, 김성수, 조소앙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날 국회에서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을 국무총리 지명자로 발표하며 인준을 요청하였고, 이에 각 파벌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승만이 이윤영을 지명한 이유에는 통일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국무총리라도 이북 출신을 지명해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내 3대 파벌의 후보를 일부러 기피했기 때문이었다.\n\n한민당 측 인사를 지명할 경우 탄탄한 원내 기반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정 운영이 가능하지만 친일세력인 한민당계에 대한 비토 여론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심각한 국론 분열이 예견되고, 한국독립당 계열의 인사를 기용하면 다수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새 정부의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명분 및 국민 지지를 다질 수 있으나 임정계와 비임정계의 갈등이 격화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n\n이승만의 인준 요청 후 곧바로 이윤영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에 대한 무기명 표결을 진행한 결과 총 투표수 193표 중 찬성 59표, 반대 132표, 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이윤영의 총리인준이 실패하자 이승만은 이윤영을 지청천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에 입각시켰다. 내각 인선시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격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 등을 통해 농지개혁법을 추진하였다. 농지개혁을 통해 한민당과 토착 지주세력의 기반인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분배하여 한민당과 지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상공부 장관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임영신이 발탁되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n\n1948년 7월 28일 이화장에서 이승만은 국무총리인선 문제에 관해 \"이 국회에서는 두 정당이 각각 내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국회를 결박 부동하게 만들어 놓아...\"라고 비판 담화를 발표하였다.\n\n1948년 8월 2일 이승만은 이범석이 건의한 김성수 천거 8명 중 3명만을 기용하였고 나머지는 무산시켰다. 심지어 한민당계는 김도연 1명만을 입각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밀월관계를 갖던 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였음에도 이승만이 후하게 대해주지 않자 한민당은 이번 내각은 실패한 내각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n\n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n\n그러나 국회 내 친일 기득권 세력인 한민당의 횡포 뿐만 아니라,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등 좌우 동족상잔까지 빈번해지자 이승만도 한발 물러서, 1950년 11월 23일 개각 시 장면, 김준연 등 민주국민당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켰다.\n\n## 대통령 재임 시기\n이승만은 1948년 7월 24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 전까지의 시기의 대통령이었다.\n\n### 임기 내 각종 행적\n1948년 9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 시정방침을 연설하였다.\n\n1949년 1월 6일, 조선민족청년단이 이범석을 중심으로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그는 족청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은 족청을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일부 보존하였다.\n\n1949년 2월 18일, 유엔이 북한과 협상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엔-북한 협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n\n1949년 3월 23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 동맹안을 지지하였다.\n\n1949년 7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7월 20일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하였다.\n\n1949년 8월 8일, 장제스와 진해에서 회담하였다. 10월 18일 대통령관저 담벼락 근처에 폭발물 장치를 매설한 것을 터지기 전에 경관이 발견하였고, 이승만도 이를 확인하였다.\n\n1950년 1월 26일, 이승만 정부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했다.\n\n1952년, 이승만은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 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 이승만은 \"야당집 마누라를 판사 자리에 앉혀 놓았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라며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있던 정일형의 아내라는 점을 들어 임용을 거부하였다.\n\n### 정부 출범 초기 \n\n####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기념사 \n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 기념사'를 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n\n#### 반민처벌법 제정 \n1948년 8월 16일 국회 특별법기초위원회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때 제정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안'을 근거로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을 작성하여 국회본회의에 상정하였다. 8월 17일 김웅진 국회특별법기초위원장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대강을 국회본회의에 보고하였다.\n\n1948년 8월 20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국회에서 친일파에 대한 건의안을 정부에 보냈다는데?\"라는 질문에 \"**건의안은 바로 본 것으로 나도 동의한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친일자를 정부 요직에 두어서 동포들의 감정을 악화시킬 수 없다. 앞으로는 그런 인물을 등용 안 하겠다**\"고 답변하였다. 이어서 \"현정부 고관 중에도 친일자가 있다는데 개조할 의향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수 일 내로 교정될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n\n1948년 8월 20일 민주당 선전부장 김준연은 \"일제치하 36년 동안에 경제·산업·교육·행정·문예 등 각 방면에 있어서 그 세력과 접촉되는 부면이 너무도 광범하였기 때문에 그에 관련되지 아니한 편이 극히 적었던 것은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너무 심히 추궁하면 교각살우의 폐를 각출할 염려가 있을 것이니, 이 점에 있어서 국회의원 제씨의 특별한 주의를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들 중엔 친일파로 밝혀진 자들도 있었으나 비타협적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n\n1948년 8월 27일 신익희 국회의장이 반민족행위가 있는 정부위원들의 임명을 승인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민특위 전원이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n\n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찬성 103표, 반대 6표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n\n#### 여수·순천 사건과 국가보안법 제정 \n같은 시기 1948년 9월 9일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 전후로 각종 대남공작이 이뤄졌다. 4월 3일부터 이미 제주 4.3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5월 14일부터 남한으로의 송전을 끊어 남한 산업과 민생에 고통을 주었고,\n\n이러한 가운데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일으킨 소위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되었다. 여수·순천 사건은 발생 9일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되었지만, 공산진영이 같은 민족을 대상으로 전에 없던 대규모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n\n1948년 11월 6일 국회 제1당인 한국민주당은 여수·순천 사건과 관련하여 남로당을 패싱하고 이승만 정부만을 공격하였고, 정부가 요구하는 긴급한 법안의 통과도 지연시켜 세간의 원성을 샀다. 즉 이승만은 친일청산과 친공청산이 병행될 수 없다고 봤으며, 친일청산보다 친공청산이 더 시급하다고 봤다. 실제로 1950년 북한은 6.25 전쟁을 일으켜 민족을 배반하고 수백만명을 학살하는 반민족행위를 자행해 민족사를 넘어 세계사에 대서특필되었다.\n\n이후에도 '친일관료들이 자리잡은 건 미군정 탓인데다가 치안문제상 당장 갈아 엎을 수도 없다'는 친정부 인사들의 입장과, '민의를 따르지 않는 건 독재이니 당장 갈아 엎자'는 반정부 인사들의 대립이 계속되었다.\n\n이승만 정부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섰다.\n\n#### 경무대 폭파 음모 사건 \n1948년 10월 19일 오전 2시경 효자동 전차 종점 근방에서 정체모를 전기줄을 발견하여 근방을 조사해본 결과 약 70m 가량의 땅굴과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 6통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n\n1948년 11월 8일 수도관구 경찰청장 김태선은 경무대 앞에 폭발탄을 매장하여 이승만을 암살하려던 박춘석과 공범 김상기, 정우섭, 황보원, 황보경순의 암살음모사건 전모를 발표하였다. 박춘석 등 5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미명하에 이영으로부터 좌익정당 가담, 이승만과 정부 및 정계 요인 암살, 대한민국 정부 전복,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방해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며, 8월부터 10월 17일까지 경무대 앞과 장택상 사택 앞에 폭탄을 매장하고 여수·순천 사건에 호응하여 이승만과 정부 및 정계 요인을 일시에 암살하려던 것이었다.\n\n#### 유일합법정부 승인 및 민족진영 재결합의 노력 \n한편 1948년 초 단선단정론과 남북협상론 노선 차이로 인해 틀어졌던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거쳐 점차 회복되고 있었다. 1948년 5월 29일까지만 해도 김구는 \"당분간 이승만과의 합작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n\n1948년 12월 7일 장면 한국유엔대표는 유엔 총회에서 한국승인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후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총회 결의 195호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n\n1948년 12월 11일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승인됐으니 이제 북한에 총선거를 실시시켜 선출된 인원을 남한 국회에 참가시켜 남북통일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밝혔다.\n\n1949년 1월 7일 이승만은 기자의 \"유엔위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민족진영 단결, 특히 3영수 합작공작이 진행되고 있다 하는데 어느 정도 진척을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는 민족진영이 합작되지 못한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自初에 총선거와 정부수립에 이의를 부친 몇 단체들이 있어 안으로서는 민간에 의혹을 주고 밖으로서는 혼란한 상태를 표시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문제가 다 충분히 해결되니 만큼 아무리 장애를 부치려는 분들이 있을지라도 많은 손해를 끼칠 수 없을 것이요, 필경은 그분들의 입장만 곤란하여 질 것이다. 그리고 **3영수합작문제에 있어서는 전에도 말한 바 있었지만 나 한 사람의 사정으로는 두 분 인도자에게 조금도 간격이 없고** 다만 합작 여부는 그 주장하는 의도가 공개적으로 합의되어야 할 것이니 서로의 의도가 다 같은지 아닌지는 민중의 공정한 판단을 따라야 할 것이다. 새로 오는 유엔위원단에 대해서도 전과 같이 좌파니 중간이니 우익이니 혼돈해 놓고 다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정부가 서서 정당히 인정된 후에는 유엔대표단도 전과 같이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 없을 것이요, 그런 분이 있다면 유엔 공식결정과 모순되며 독립국가의 권위에 손실을 주는 것이니 그런 사람도 없으려니와 있다면 정부로서도 이에 대한 적당한 방법이 있을 것이며, 또 한인 중에서라도 누구나 정부에 반대되는 태도로 외국인과 연락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n\n#### 반민특위 활동 방해 \n1949년 1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사무를 개시하였다.\n\n1949년 1월 25일 친일경찰 노덕술이 특별경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n\n1949년 5월 노익환, 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구속되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들 다수가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반정부 성향의 소장파 의원들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25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n\n1949년 6월 2일 반민특위에 반대하는 관제 시위가 일어나자 특별경찰대는 주동자인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를 체포하였다. 이에 6월 6일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 소속 특별경찰대를 대대적으로 습격했다. 6월 7일 이승만은 특별경찰대 습격이 자신의 지시라고 밝혔다. \"**내가 특별경비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특별경찰대는 지난 주 국립경찰의 노련한 형사인 최운하씨와 조응선씨를 체포하였는데 이 양인은 6일 석방되었다. 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국회에 대하여 특위가 기소될 자의 비밀 명부를 작성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명부에 백 명의 이름이 오르든 천 명 혹은 만 명의 이름이 오르든간에 그것에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이와 같은 명부를 우리에게 제출해주면 우리는 기소자를 전부 체포하여 한꺼번에 사태를 청결할 것이다. \"\n\n#### 민족진영 재결합의 가시화 직후 김구 피살 \n1949년 5월 말 민족진영 3영수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 1949년 5월 19일 김구는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였다.\n\n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n\n이로 인해 이승만은 남북통일에 앞서서 민족진영을 재결합하는 데에 실패했고,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암살의 배후에 대한 서로 간의 추궁이 이어졌으며 민족진영은 끝내 재결합하지 못하였다. 김구 서거 후 한국독립당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김규식 세력은 1950년 6.25 전쟁 때 그가 납북 당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 즈음으로 하여 대한민국의 주류 세력으로는 개화파 및 임시정부 우익의 정통성을 잇는 계보와 한민당을 전신으로 하는 계보만이 남아 현대의 양당구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n\n김구가 피살된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은 저녁 9시가 넘어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을 통하여 애도방송을 하였다. \"...나와 백범 선생 사이의 사분으로 말하면 호형호제하고 의리는 실로 사생을 같이하자는 결심이 있던 터이며, 임시정부 주석으로 내가 절대 지지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가 귀국했을 때에 나는 무조건하고 지지하여 온 것입니다. 중간에 와서 정치상 관찰의 약간 차이로 말미암아 정계에 다소 의아하는 점이 없지 아니해서 우리 두 사람이 양편으로 시비를 듣고 있었으나 내가 믿고 바라기는 백범 선생이 조만간에 나의 주장하는 것이 아무 사심이 아니요 민국 대계에 유일한 방침으로 각오될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었으며, 근자에 와서는 이런 희망이 점점 표면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마음에 기뻐하는 중인데 졸지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어공어사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n\n#### 반민특위의 실패 \n1949년 7월 6일 이인은 반민특위법 공소시효를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말일까지로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이는 재석의원 136명 가운데 찬성 74표, 반대 9표로 가결되었다. 이에 위원장 김상덕을 비롯한 반민특위원들이 일제히 사임하였다. 1949년 7월 14일, 반민특위는 우여곡절 끝에 이인을 위원장, 송필만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여 활동을 재개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된 뒤 폐지될 때까지의 친일파의 처벌 상황을 보면, 처음엔 반민족행위자 7,000여명을 조사대상으로 파악해 놓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688명만을 조사하여 그 가운데 599명의 혐의자를 특별검찰부로 송치했고, 특별재판부는 송치된 599명 가운데 293명을 기소하고 306명을 불기소처분했다. 기소된 293명 가운데 특별재판부의 판결을 받은 사람은 78명이었다. 그리하여 임시특별부의 판결을 받은 1명을 합쳐 7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0명뿐이었다. 이인은 \"반민특위는 한마디로 해서 용두사미였다\"고 회고하였다. 1949년 10월 4일,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가 모두 해체되었다.\n\n오늘날 반민특위 실패의 일차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부 및 한국민주당 국회의 방해와 친일세력의 이념공세로 본다. 그러나 반민특위에도 문제가 있었다.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 내에 친일파가 일부 있어서 큰 방해가 되었고, 본인은 친일파가 아니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가까운 친일파를 봐주는 경우도 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와 무관한 사람들에 대해 주거침입, 감금, 폭행을 했다가 고소 당하기도 했다.\n\n훗날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을 때 보수계 정당은 친일파와 친공파의 후손이 친일진상규명위원이 될 수 없도록 \"본인의 부모 및 조부모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았고,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친공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소명해야 한다\"는 문구를 법안에 넣었다. 이는 한민당의 직접적인 후신이자 DJP연합의 파탄으로 NLPDR계열을 대거 흡수하기 시작한 민주당계 정당으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문구였다. 민주당계 정당은 해당 문구가 연좌제이자 위헌이라면서 삭제해버렸다. 이 밖에 상대 정당 인사들의 조상을 욕보이려고 조사대상과 범위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결국 친일청산은 재차 실패하였다.\n\n#### 대일배상요구와 영토 환수의 노력 \n이승만은 대통령 임기 내 초지일관 반일 외교를 하였다. 그래서 당시 제1당이었던 한민당과 함께 반민특위를 무력화한 일이나 친일 경력이 있는 인사를 등용한 일 때문에 막연히 친일적인 대통령이라고 호도 당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일본에서는 이승만을 역대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반일적인 대통령이라 인식하고 있다.\n\n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기획처·법무부 등 정부 일각에서는 장래의 한일관계에 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태동하였고, 이에 따른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n\n1948년 8월 19일 이승만은 일본에 대마도와 반출문화재 반환 등을 요구하였다.\n\n1948년 10월 19~20일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 주권 회복 후 제1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맥아더와 연합국 최고사령부와 교섭할 대한민국 외교사절단 파견에 대한 문제, 주한미군에 대한 문제, 재일동포 보호 및 귀국 문제 등을 논하였다.\n\n1949년 1월 7일 일본에 대해 배상금을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350여 년 전 임진왜란시까지 소급하고도 싶으나 우선 최소한도 과거 40년 간에 피해배상을 요구하겠고 대마도는 찾아야겠다.**\"\n\n1949년 2월 이승만 정부는 대일강화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기획처 기획국 산하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를 설치하여, 은밀하게 배상청구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기획처장인 이순탁의 총괄 하에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물이 대일배상요구조서였다. 1949년 4월 7일 정부는 이 조서를 동경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보냈으나, '이 문제는 장래 한일 간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회답을 받았다.\n\n1949년 6월 9일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10월 28일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11월 29일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을 매매할 것을 발표하였다.\n\n1949년 12월 중순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를 표했다.\n\n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6.25 전쟁 때까지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것이 60여차례나 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회피하다가 1950년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키자 \"김일성이 일본을 살려준다\"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n\n#### 농지개혁법 제정과 한국민주당과의 결별 \n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민들의 농지 및 토지개혁에 대한 목소리에 부응하여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법을 주도한 사람은 조봉암 농림부장관이었다.\n\n농지개혁법은 한민당의 재정적 기반이던 친일지주층을 한 방에 박살낼 결전병기였다. 1948년 내각 구성 당시 이승만이 김성수의 천거를 무시했던 일에 더하여 농지개혁법 제정으로 인해 친이승만이던 한민당의 정치노선은 반이승만으로 완전히 바뀌었다.\n\n농지개혁법은 일제강점기의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인 계기로 평가된다.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요소는 사라지고 지주 대신 자본가가 새로운 경제의 주역으로 급성장하였다. 자기 땅을 일구게 된 농가에서는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미래의 노동자들이 배출됐다.\n\n#### 6.25 전쟁 직전 \n1949년 6월 29일, 미군이 1948년 12월 12일에 이루어진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500여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완전 철수하였다.\n1949년 10월,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권은 북진을 할만한 군사적 능력이 없었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상황 하에서 국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매우 취약한 수준이었다. 자유통일은 늘 이승만 최대의 관심사였다.\n\n1949년 11월 25일, 이승만은 AP통신과의 회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괴뢰정부 해체 후 유엔 감시하 북한 총선거 실시'를 촉구하였다.\n\n1949년 12월 16일,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50년 1월 10일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여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밝혔다. 그 당시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한국 전쟁 발발 6일 전의 CIA 보고서에선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저평가되어 있었다.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라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n\n1950년 5월 11일 이승만은 5~6월이 위기이므로 미국의 방위원조가 필요하다고 외신기자회견을 하였다.\n\n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익희, 김성수의 민주당이 24석으로 제1당이 되었다. 210석 중 126석이 무소속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 이반, 반민특위 실패로 인한 친일세력 득세, 민족진영 재결합 실패로 인한 민족진영 약화 때문이었다.\n\n1950년 6월 7일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38선 인근에 병력을 집결한 첫째 단계가 완성된 이후 '평화통일 호소문'을 발표하여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8월 5~8일까지 실시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북제정당·사회단체협의회'를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해주나 개성에서 열자고 하였다. 유엔 한국 위원회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n\n1950년 6월 15일 북한은 남한에서 체포된 김삼룡, 이주하와 북한에 연금된 조만식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조만식을 먼저 보내라고 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n\n1950년 6월 17일 북한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 제안에 \"남한에서는 다시 선거할 필요도 없고 또 하지도 않을 터\"라고 말했다. 그리고 \"공산당과 중간당의 합작 운운은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다만 파괴 도배의 수괴인 김일성과 박헌영도 회개하고 우리 민족의 진정한 정부인 대한민국을 지지 육성하겠다는 실증을 보여준다면 포용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n\n1950년 6월 19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는 전조선 입법기관, 즉 국회통합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이 주장이 있은 1주일 뒤 북한의 남침이 시작됨으로써, 이 모든 제의가 위장평화공세였음이 드러났다.\n\n### 6.25 전쟁 당시\n\n#### 6.25 전쟁 발발 직후 \n6월 25일 새벽에 기습침략을 당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피신한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익산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고 부산으로 옮겨갔다.\n\n6월 27일 오후 1시, 중앙방송국 공보처는 특별방송을 하였다.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였고, 상황이 좋아졌으므로 수원 천도 결정을 취소하였고,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으며,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하였다, 국민은 국방군을 믿어야 한다.\" \n\n6월 27일 오후 4시,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은 특별발표를 하였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튿날부터는 공군을 위시하여 미군이 참전할 것이고, 국방군이 현 전선을 고수할 것...\" 헌데 직후 주민들은 육군사령부가 시흥으로 남하하고,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 방송을 직접 혹은 알음알음 전해듣고 두려움을 잠재웠다고 한다.\n\n6월 27일 밤 9시, 이승만의 육성 방송이 이루어졌다.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나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 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방송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 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는 흔히 와전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은 안전합니다' 등의 내용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후 1시, 4시에 방송된 공보처와 국방부 발표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후 방송과 연결해서 들은 당시 국민들로서는 서울이 안전하다거나 사수될 거라는 내용으로 이해되었다.\n그런데 그 직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고 서울이 점령되었다. 이 탓에 국민들은 대통령과 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였다.\n\n이승만 본인이 직접 '안심', '서울사수' 같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승만 정부가 맥락상 그러한 의미로 해석되는 방송을 송출해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을 기만한 것은 사실이고 최고통수권자로서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흔히 와전된 내용, 즉 이승만이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고 방송하고는 피신하면서 한강 인도교를 폭파를 지시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이승만은 그런 식의 방송을 하지 않았고 한강 인도교 폭파도 이승만의 지시가 아니다.\n\n훗날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 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n\n#### 북한의 인민의용군 징집과 국군의 보도연맹 학살 \n1950년 7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만 18세부터 36세까지의 주민을 동원 대상으로 하는 '전시동원령'을 선포하였다. 같은 날 인민의용군조직위원회를 설치하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훈련소를 설치, 인민의용군 입대자들에 대한 단기군사정치훈련을 시켜 북한군에 편입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북한 노동당도 7월 6일 ‘의용군 초모 사업에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각급 당조직에 하달하였다. 이 결정서에서는 “의용군은 18세 이상의 청년군으로 하되 빈농 출신의 청년을 많이 끌어 들일 것, 각도에 할당된 징모 수는 책임을 완수할 것, 전 남로당 당원으로서 변절자도 의무적으로 참가시킬 것” 등을 밝히고 있다.\n\n인민의용군 모집 대상과 모집 방식은 개전 초기에는 주로 출옥한 좌익사범, 지하활동가, 보도연맹원 등을 대상으로 ‘자원’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다가, 7월 2일부터는 일시에 다수의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군중대회, 궐기대회, 신문, 방송, 강연회, 가두연설 등 조직적인 선전과 홍보활동 등을 통한 집단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북한은 인민의용군 모집을 위해 복구된 당조직과 노동·청년·학생·여성단체들을 총동원했다. 북한 당국은 전시동원령이 내려진 지 한 달 보름만인 8월 15일까지 북한에서는 80여만 명의 의용군이 자원하였으며 남한에서는 40여만 명의 젊은이들이 인민의용군 모집에 참가했다고 발표하였다.\n\n이렇게 징집된 인원은 재교육을 위해 북한으로 보내지는 경우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최전방인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전투병 또는 노무자로 편성되었다\n\n이승만은 전쟁 발발 직후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실제로 정백 등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서울에서 대한민국 정부 인사, 국군 패잔병, 우익인사들을 상대로 인민재판을 하는 등 반민족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 지시하여 '북한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그런데 당시 보도연맹 가입자들 가운데에는 실제 공산주의자 외에도 공무원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 수령을 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6.25 전쟁 와중에도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은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됐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이승만은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살해된 상태였다. 이를 보도연맹 사건이라 한다.\n\n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의 유해나 유적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2009년 11월 26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6·25전쟁 기간에 정부 주도로 국민보도연맹원 4,934명을 학살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하였다.\n\n북한군은 곧 서울을 넘어 대구, 부산, 포항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피난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에 의해 소위 잔류파로 분류되어 처벌당했다.\n\n#### 9.28 서울 수복 당시 \n1950년 9월 15일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였다. 서울시와 경찰은 서울이 완전히 탈환된 28일 낮부터 시정을 재개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공공시설을 급속히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9월 29일 오전 10시 맥아더 사령관과 일행이 도쿄에서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잠시 후 이승만 대통령 일행도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함께 서울시내로 향하였다. 수도 서울 환도식은 9월 29일 12시를 기해 거행되었고, 이로써 3개월간 북한의 점령하에 있던 수도 서울은 탈환되었다.\n1950년 10월 30일,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시청 앞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참가하여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n\n#### 1·4 후퇴 당시 \n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 참전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200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38선 이북의 수복지역에서 부득이 후퇴하였다.\n\n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은 원산 등의 지역에 폭격을 가하였다.\n\n1951년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5일 38선은 공산군 남침으로 이미 없어졌으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북진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 진격 전에 정전은 안 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n\n1·4 후퇴 당시,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를 국민방위군 사건이라 한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가볍게 마무리하려다 국민여론이 거세게 일자 전면 재수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과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아사자를 목격한 윤보선 등의 진언을 거절하고 용공분자의 음해라는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주장을 믿었으며, 이에 윤보선은 이승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승만은 결국 국민방위군 총책임자 김윤근을 사형시켰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그리고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 규명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 정부에 거대한 회의감을 느끼고는 사표를 제출하여 스스로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n\n1951년 2월, 공비 소탕 명목으로 부락민 500여명을 박산에서 총살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되었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이승만 정부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켰다.\n\n#### 평화선 선포와 독도 사수 \n1951년 9월 3일 \"일본은 한국에 관하여 대마도·독도를 포함한 우리의 영토를 전부 반환하여야 된다\"고 말했다.\n\n1951년 9월 8일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서명국으로서 참가가 좌절되었다.\n\n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으로써 일본의 오래된 야심이 재발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또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 있는 한인 친일분자들은 일본인들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n\n1951년 10월 20일 미국의 주선으로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의 예비회담이 있었다.\n\n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n\n1952년 2월 15일 제1차 한일회담에서 이승만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4조 B항을 근거로 일본에게 8개 항목의 재산청구권 요구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미군정령 33호에 의거 귀속된 사유재산보상 청구및 대한청구액이 대일청구액보다 많음을 주장하여 회담이 결렬되었다.\n\n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일본의 군정기가 끝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다. 동시에 맥아더 라인이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 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 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하였다.\n\n#### 부산정치파동, 암살위기 모면, 대통령 직선제 도입 \n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었고, 6.25 전쟁 중인 1951년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국회는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기부터 주장하던 내각책임제 개헌을 다시금 강력히 밀어부쳤다. 1951년 3월 14일 내각제개헌안에 대한 국회 무기명 투표 결과 재석 179인 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표로 부결되었지만,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였기 때문에 재선가도에 차질이 생겼다.\n\n1951년 11월 19일 이승만은 자유당 창당과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1951년 12월 17일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때 자유당은 대중운동 단체들 중심의 '원외자유당'과 신당창당에 참여한 원내세력 중심의 '원내자유당'으로 시작부터 분열되어 있었다. 원외자유당은 이승만 권력의 극대화를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고, 원내자유당은 여당 국회의원 권력의 강화를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다.\n\n1951년 11월 30일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및 국회 양원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자 국회 권력 강화를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던 민주국민당 등은 강력히 반대하였다.\n\n1952년 1월 13일 이승만이 원외자유당 지지를 선언하자, 원내자유당은 원외자유당과 합동하려는 '자유당 합동파'와 이에 반대하고 민주국민당에 합세한 '자유당 잔류파'로 분열되었다.\n\n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찬성 14표, 반대 143표로 정부개헌안을 부결시켰다. 이로써 직선제측과 내각제측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정부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시위를 획책하기도 하였다.\n\n1952년 4월 25일과 5월 10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이승만 세력이 압승하여 직선제 및 양원제 개헌을 위한 동력을 얻었다.\n\n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국회조사단장으로 활동하던 민주국민당 서민호가 1952년 4월 25일 대위 서창선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구실로 1952년 5월 25일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날 서민호를 포함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야당 의원과 국제구락부 사건 연루 의원 등 총 50여 명이 헌병대에 의해 연행되었다.\n\n직선제측과 내각제측의 갈등이 극심하자 1952년 6월 12일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는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의원내각제와 국회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한 '발췌개헌안'을 제시하였다.\n1952년 6월 25일 이승만은 6.25 전쟁 2주년 기념식에서 유시태에게 암살 당할 뻔했으나 권총 불발로 모면하였다.\n\n1952년 7월 4일 오후 2시, 15명의 발췌개헌안 반대파가 국회에 불출석 하였다.\n\n1952년 7월 5일 이승만은 개헌안 통과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동안 정계에 다소 분규가 있었으나 지금은 국회에서 거의 全數로 통과되었으니 지나간 쟁론으로 분규상태를 이룬 것은 지나간 일에 부쳐서 잊어버리고 지금부터는 순서적으로 선후책을 강구해야 될 터... \"\n\n### 휴전 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n한국 전쟁이 2년 이상 장기화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 본토에서는 '무의미한 전쟁, 질질 끌지 말고 휴전협정 맺고 빨리 끝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소련 및 중공과 휴전을 논의한다.\n1952년 3월,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 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n\n이러한 이승만의 태도에 대해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세 가지 정책 대안을 수립했다. 첫째, 에버레디 작전을 통해 이승만을 축출하고 유엔군사령부하의 군사정부를 세우는 방안. 둘째, 유엔군사령부를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방안. 셋째, 한국 정부가 휴전협정을 준수한다는 조건을 걸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방안. 결국 미국 정부는 세번째 대안을 선택했다. 유엔이 합법 정부로 인정한 이승만 정권을 전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3년간 공산화를 막기 위해 크나큰 피해를 감수하며 지켜온 나라를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겨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인정하는 즉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n\n그러나 이승만은 휴전이 일단 성사되면 자신의 대미 협상력이 현저히 약화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휴전협정 체결 이후가 아닌 체결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의 내용을 구체화하려 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단독 북진 위협을 지속하는 한편, 미국 정부에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문서 형식으로 '한국이 공격당할 경우 미국이 도와주러 올 것'이라는 점을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약 25,000명의 반공 포로\n반공포로 석방 직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일련의 회의를 통해 이승만 제거, 미군철수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응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전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원하지만 한국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정책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적은 엄연히 공산주의자들이며 이승만은 반공의 선봉에 서 있다는 점에서 미국은 이승만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의 현실적 대안은 예정대로 특사를 파견해 이승만에게 그가 원하던 안보공약을 제공하는 대신 휴전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었다.\n\n미국은 부담스러운 한미상호방위조약 대신 향후 북한의 남침에 유엔 참전국들이 공동 대응하겠다는 ‘대제재선언’을 발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이승만은 \"그런 건 믿을 수 없으니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보장해달라\"고 했으며 이에 아이젠하워는 확답하지 않고, 이후 이승만은 백악관을 괴롭히는 '벼랑 끝 전술'을 택하였다.\n\n그리하여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1953년 8월 존 덜레스 국무장관이 직접 한미안보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1953년 10월 1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발판으로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훗날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n\n1953년 7월 28일, 이승만은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n⋯ 미국과 방위조약을 성립해서 어떤 나라이나 우리를 침략하게 될 때에는 미국이 전적으로 나서서 싸움이라도 피하지 않고 보호한다는 조약이 내년 미 의회에 통과된다는 것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래스 국무경이 미 의회의 모모 지휘자와 협의에서 완전한 담보가 되어 있으니 지금부터는 공산군의 침략만이 아니라 소련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어떤 강국의 침략을 우리가 외로이 방지할 우려가 다 없게 된 것이다.\n\n⋯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 의회에 특별히 요청해서 타스카 사절의 예산으로 오는 3년 안에 할 계획의 10억 불을 원조하자는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내년의 예산에 편입할 것인데, 그 전에 급히 재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2억 불을 미리 지불하게 하자는 요청이 미 의회에서 허락되어서 상원에도 명년 폐회 전에 통과되리라는 메시지가 왔으므로 우선 오는 6개월 이내로 2억 불로 공장 설립과 모든 재건에 부지런히 일하여야 할 것이다.\n\n⋯ 미 제8군 사령관 테일러 장군이 공표한 것과 같이 이 휴전 조약은 평화 조약이 아니고 잠시 싸움을 정지하고 담화로 처결하자는 것을 시험하자는 것으로 유엔군은 여전히 여기 있을 것이요 ⋯ 우리 국군이 애국성심으로 맹렬히 투쟁한 역사상 여영을 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우리 민족이 굶으나 먹으나 우리 민족이 다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나가서 이 신념이 애국심으로 우리가 이만큼 성공해서 우리나라가 세계 민주진영의 한 앞장이 될 만큼 된 것은 우리는 진실로 천우로 된 것으로 믿으며 감사한다. ⋯ 미국과 한국간의 우의가 더욱 공고해서 동양 평화를 유지하는 노력에 큰 보장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n\n결국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통해 **단지 휴전을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로 신생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2차 대전 승전국이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원조와 국군 20개 사단으로의 증원,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것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오늘날 북한의 소위 **벼랑 끝 전술**의 원조도 사실 이승만으로 비롯된다는 분석이 있다.\n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이후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이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경제적 원조를 확보하기 위해 단독 북진 위협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종결됐으며 미국이 이승만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함에 따라 이승만의 북진 위협은 점차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됐다.\n\n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민 100만명 이상, 국군 28만여 명이 학살 당했고, 국민 30만여 명, 국군 70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수많은 국민들이 납북 당했으며, 남한 내 공업 기반 절반과 국부의 1/4이 손실되었다. 유엔군 규모로 따지면 사상자 규모는 400만여 명에 달하였다.\n\n### 외교 활동\n\n#### 대미·대일 외교\n미국이 195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한일수교를 위한 협상을 제안하고 주선한 것은 안보와 경제 문제 때문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공산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각 공조가 필요했고, 미국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일본과 분담해야 했다.\n\n1952년 10월 초 이승만은 주미대사 양유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 등과는 안보조약을 맺으면서 왜 유독 대한민국과는 그러한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며, 미국 행정부 내 친일인사들은\n\n일본의 전통적 팽창주의 야욕에 대한 경계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일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심각한 우려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닉슨 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n\n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n\n1953년 2월 4일 일본 어선이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 이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 선장이 사망한 다이호마루 사건이 발생됐다. 이후에도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평화선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억류하였으며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n\n1953년 10월 15일 제3차 한일회담에서 일본의 구보타 간이치로는 '구보타 망언'을 내뱉으며 과거 한국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미군정령에 의해 소멸된 재한 일본재산에 대해 역청구권을 주장했다. 이에 회담이 결렬되었다.\n1953년 11월 27일, 대만을 방문하여 장개석 총통과 아시아 반공 동맹 구상에 대해 논의하였다.\n\n1954년 2월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건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민의 마음을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정부는 일본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한국의 우정어린 경고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입장은 옹호하지 않고 일본의 편만 들어왔다고 비판했다.\n\n1954년 3월 초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직후 양유찬 대사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미국이 언젠가는 일본을 위해 한국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n\n1954년 3월 5일 국제사회에 국제반공십자군 창설을 제의하였고, 3월 27일에는 일본산 상품의 몰수를 지시했다.\n\n1954년 3월 28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군의 증강을 미국이 보장하면 제네바 회담에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미국에 통고하였다. 4월 7일 미군 제315공수사단을 방문하여 직접 표창장을 수여하였다.\n\n1954년 4월 26일 제네바 회담에서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료,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한국 재통일 방안에 관해 논의가 됐는데, 미국 국무부 장관 존 덜레스가 논의조차 거부하여 협상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일부 참가국들과 비평가들은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감시·견제하고 미국의 패권을 지키기 위하여 한국의 재통일에 대해 고의적으로 회피하고 한반도 문제를 이용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비난하였다. 4월 28일 일본의 반공연맹 가입을 반대하였다.\n1954년 7월 30일 백악관에서 가진 한미정상회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존 덜레스 국무부 장관이 한미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한일관계 정상화에 있다며 한국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반일정책을 포기하고 한일회담을 가지라고 강요하자 이승만이 도중에 퇴장해버렸고, 이에 한일회담도 결렬되었다.\n1954년 8월 3일, 이승만은 유엔 총회에서 한국 통일에 대한 지원을 역설하고, 8월 9일에는 한일회담 재개용의를 표명하는 한편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8월 30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편파적 정책을 경고하고, 11월 4일 일본의 한국 재침략 망상을 비난했다. 11월 14일 미 국무부가 제안한 일본의 반공동맹 참가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12월 15일 적성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언명하였다. 12월 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n\n1956년 2월 13일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에 경고를 보냈다.\n\n1956년 3월 17일 존 덜레스 미국 국무부 장관이 한국을 방문, 이승만과 통일방안을 협의하였다.\n\n#### 대아시아 외교\n1954년 1월 28일 존 헐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에게 라오스에 국군 1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미 합참은 이승만의 제의를 즉각 검토했지만 정치적·심리적 실익은 있으나 군사적 실익이 크지 않다는 평가를 내리고 파병을 거절하였다.\n\n1954년 5월 21일, 외신과의 회견에서 한국군의 인도차이나 파병을 제안하였다. 6월 미 군사원조프로그램을 검토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밴 플리트 전 미8군 사령관에게 베트남에 국군 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7월 브릭스 주한 미 대사에게 2~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제안은 곧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의 휴전이 합의됨에 따라 백지화되었다.\n\n중화인민공화국의 영해침략에 대해서 강경대응을 했다. 1955년 12월 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경찰관 네 명이 중화인민공화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1960년 1월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어선단을 검문 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n\n### 불교 정화 유시 \n1954년 5월 20일 이승만은 전통불교사원에서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유시를 내려 불교정화운동이 발단되었다. 대처승이란 한국불교의 독신 전통과 달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승려들을 강제 결혼시키면서 나타나게 된 것으로, 불교정화운동은 우선 일본 불교의 대처승단 영향으로부터 한국 불교의 독신 승단 전통을 복원시키려는 운동이었다.\n\n이승만의 유시를 계기로 비구와 대처승 간의 심각한 대결양상이 나타났다. 1955년 8월 12~13일 전국승려대회를 계기로 종권과 사찰 주도권이 비구승에게 넘어왔고 이승만 정부도 이를 공인하였다. 그런데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1960년 11월 24일 대법원은 불교정화운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으며, 이에 비구들은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서 할복 사건을 일으켰다. 불교정화운동은 1961년 5.16 군사 정변 후 정권을 장악한 군부에 의해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을 출범하면서 외형적으로 막을 내렸다.\n\n### 사사오입 개헌 \n이승만과 자유당은 이승만의 대통령 3선을 노린 제2차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었다.\n1954년 5월 6일 제네바 회담에 참석한 6.25 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고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남한 측은 이미 1948년에 자유선거가 실시되었으며 나머지 과업은 정권을 참칭하고 있는 북한지역에서 동일한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5월 12일 미국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통해 이승만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승만은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맹렬히 반대했고 이에 유엔은 한반도 재선거안을 철회하였다.\n\n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3선개헌안에 찬성하는 사람을 후보로 추천하여 다수 당선시켰고, 무소속 의원들도 다수 유인하여 개헌 작업을 진행하였다.\n\n1954년 10월 26일 뉴델리 밀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민주국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이 '민주국민당 대표 신익희가 1953년 7월 26일 인도 뉴델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납북 당한 조소앙을 비밀리에 만나 영세중립화를 꾀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사건으로, 무혐의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내 반공 분위기를 고조시켜서, 개헌을 추진 중이었던 자유당에게 정치적 호재로 작용하였다.\n\n이승만과 자유당은 이러한 국내외 정세를 이용하여 3선개헌안을 작성하였다. 대통령 3선금지조항 폐지, 국무원의 연대 책임제 폐지, 개별 국무원 불신임 인정,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그리고 여기에 국민투표제 도입안을 더하여 개헌의 명분과 타당성을 선전하였다.\n\n1954년 11월 27일 국회 비밀투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 따라서 당시 사회자였던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수학의 4사5입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도 안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11월 29일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여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국회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 자리에서, 자유당 의원 125명 중 찬성 123명, 반대 2명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정부로 이송하여 개헌안을 공표·발효하였다.\n\n사실 사사오입이라는 논리 자체는 오늘날의 헌법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은 임신 22주 내외'라고 설정하고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그보다 어린 태아는 죽여도 합법이라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있다.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이승만의 압도적 권위 하에 자유당 정권의 독재적 행태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자유당은 집권 연장의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반대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n\n###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n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은 나재하 등 9명이 이종태를 사주해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이승만에 대한 수류탄 암살을 기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사건이다. 재판 결과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 김재호, 김익중, 유성연, 김동혁에게는 징역 15년형이 선고됐다. 수류탄을 구해준 김재호의 아들 김동훈과 이종태를 포섭했다는 혐의를 받은 이범륜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4.19 혁명 이후 출감되었다.\n\n1955년 10월 14일 대한민국 공보실은 이 사건은 월북한 조소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훗날 피고인들의 후손들은 이 사건이 육군특무대장 김창룡과 이종태의 함정수사였다고 주장하였다.\n\n### 제3대 대통령 선거 출마 당시 \n1956년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하자 이승만은 \"내 나이 이미 팔십이 넘어… 물러가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한다\"라며 불출마 서한을 전달했다.\n\n그러자 1956년 3월 6일 국민회·대한노총·부인회 등이 궐기대회를 갖고 민의를 전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측근들과 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 친위단체들 주최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렸다. 3월 11일부터 민의가 전국 각지에서 발동되었다. 영화인, 무대예술인, 댄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3월 13일 대한노총이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며 정치파업을 하였다. 3월 20일 이승만은 공보실을 통해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는 말을 다시 전달했다.\n\n1956년 3월 23일 이승만은 3백만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와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며 입후보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이 담화에서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3월 25일 공보실을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를 발표하였다.\n\n이후의 선거전은 정치공세와 정치음해가 심하였다. 1956년 3월 28일 민주당은 '이승만 대통령 3선지지 데모는 조작 민의'라는 성명을 냈다. 3년 29일 민주당은 정부통령후보 지명 전국대회에서 민의운동 진상규명을 추진하였다.\n\n1956년 4월 4일 민주당 대통령 입후보자 신익희는 한일회담을 제의하였다. 이에 4월 12일 이승만은 선거자금 외부유입 엄금 및 선거에서 대공협상과 친일 주장 불가를 언명하였다. 4월 6일 야당연합전선 구성이 추진되었다. 4월 13일 야당 연합구성 관련 민주당과 진보당의 성명이 있었다. 4월 16일 진보당의 민주당 공격으로 야당연합은 파국에 직면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4월 25일 야당계 연합전선을 위해 신익희·조봉암 비밀회담이 이루어졌다. 4월 27일 민주당과 진보당은 야당연합 결렬을 선언하였다. 4월 29일 민주당에 중국 통화를 동봉한 괴서한 발송되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 30일 서울시경은 민주당 괴서한 사건이 민주당의 중상모략으로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n\n1956년 5월 2일 이승만은 논산훈련소와 논산, 대선 등 7개 역 플랫폼에서 유세를 벌였다. 그는 역 구내에 가득 모인 군중 앞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고,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류의 언동이다.\"라고 역설했다. 같은 날 5월 2일 신익희는 한강 백사장에서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유세하였고,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라고 비난하였다.\n\n1956년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 유세를 다녀오던 중 열차 호남선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이승만은 경쟁자 없이 무난히 3선에 성공하였다.\n\n### 임기 내 각종 행적\n6.25 전쟁 중에도 부분적 지방 자치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n\n1954년부터 문해교육 정책, 문맹퇴치 5개년 사업 등을 진행하여 1945년 78%였던 우리나라 문맹률은 1958년 4.1%로 급감했다.\n\n1954년부터 '초등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교육예산 약 80%를 의무교육비에 배정할 정도로 주력했다. 그 결과 초등 의무교육 취학률이 1957년 90%를 넘겼고, 1959년에는 96% 목표를 달성하였다.\n\n1954년 4월 20일, 제1차 교육과정이 제정되었다.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가수준 교육과정 체제를 확립하였다.\n195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을 방문했고 모교 조지워싱턴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3월에는 자유수호에 힘쓴 공로로 미국 금영자유훈장을 받았다.\n\n1956년 2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자, 2월 5일 직접 헌병 총사령부내에 김창룡 중장 피살사건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하였다. 2월 21일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권행위에 유감을 표명했다.\n\n1956년 3월 29일, 서울 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정부 및 서울시 주최로 열렸다.\n\n1956년 7월 8일, 환율 고수 및 공무원 인력 감원을 단행하였다.\n\n### 임기 내 각종 행적\n1956년 5월 22일 선거 결과 대통령은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는 당선공고를 접하였다.\n\n1956년 9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했고, 9월 22일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11월 4일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n\n1957년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또한 열녀상을 부활시켜서 매년 열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n\n1958년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n\n1958년 6월 29일 AP 기자의 서면회견에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총선거를 주장했고, 8월 5일 외신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국군 감축에 반대하고 장비 현대화를 강조하였다.\n\n한편 미국은 중앙정보국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에게 요청했지만 CIA를 불신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었다. 1958년 국방부 장관 김정렬로부터 CIA의 요구에 따라 정보기관을 설치할 것을 건의받자 그는 당초 거절했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 산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n\n1959년 2월 4일자 경향신문 조간에는 무기명 컬럼 여적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에 대한 단평이 게재되었다. 이를 계기로 장면을 지지하였던 경향신문이 폐간되었다. 그해 4월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n\n1959년 6월 24일 UPI 기자를 면담하고, 기자의 서면질문에 북진통일을 강조했다.\n\n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n\n### 경제 정책\n1956년 8월 16일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3기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강조하였다.\n\n195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은 미국의 무상원조 위주로 이루어졌고, 그만큼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은 원조 공여국이었던 미국의 목표대로 추진되는 측면이 컸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 중공업 중심의 경제성장 정책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한국을 일본 공산품시장으로 위치지우기 위해 경제안정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1955년 말부터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고 미국 경제에 불황이 찾아오자 미국의 원조자금은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무상원조가 유상차관의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경제에 불황을 초래했지만 한편으론 대한민국 경제정책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 줄어들었다.\n\n1957년 미국은 개발차관기금을 설치하여 대한민국 정부, 기업과 개인 사업자가 미국으로부터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는 시장 경제 원칙 하에서도 국가가 개입하여 사회기반시설을 조성하고 중화학 공업 중심의 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의 초안을 완성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계획은 전면 중단되었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n\n1958년 10월 28일 이승만은 에너지를 발전을 위해 핵력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핵력 공학과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계획은 전면 중단되었다.\n\n### 외교 활동\n\n#### 대미·대일 외교\n한국전쟁을 통해 재정적자가 심각해진 미국은 1950년대 중반부터 국방비 감축 및 대외원조 축소 등을 통해 정부 지출을 줄이고자 했다. 195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지원 액수는 1년 평균 10억 달러 안팎이었다. 이 상황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는 한일관계 개선이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하면 일본이 미국 대신 대한민국에 원조할 수 있고 한미일 삼국조약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방안의 하나는 주한 미군 핵무기 배치 후 병력 감축이었다. 1950년대 중반 북한 병력은 약 35만 명이었는데 남한 병력은 두 배가 넘는 72만 명이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로 거대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이 재정 적자를 줄이려면 남한 병력을 감축해야 했다.\n\n1956년 6월 25일 이승만은 6.25동란은 미국의 오판에서 일어났고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하였고, 7월 26일 휴전협정은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강조했다. 9월 1일 미국의 극동정책은 패배주의와 유화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다. 9월 13일 유엔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임병직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으나 한국의 UN가입은 무산되었다.\n\n1956년 9월 30일 일본이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하자 그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역재산권 청구 철회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1957년 12월 구보타 망언을 정식으로 취소하였다.\n\n1957년 1월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다. 8월 31일 방한한 UP통신의 극동 총국장인 호브라이트씨 부자를 면담하였으며 미국 오클라호마 주지사가 증정한 명예 시민증을 전달받았다. 9월 13일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충돌 사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자, 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n\n1958년 3월 28일 계속된 미국의 한일회담 압력에 따라 이승만은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를 표하였다.\n\n1958년 4월 15일 제4차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다. 5월 19일 이승만은 일본 총리가 보낸 특사를 면담하였으나 협의점은 찾지 못하였다.\n이승만은 정부 재정의 70% 이상을 국방비로 쓰면서도 무력 북진통일을 이룰 때까지 병력을 조금도 감축할 수 없다며 미국의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며 남한 병력을 감축함으로써 미국의 군사 지원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 핵무기를 비롯한 주한미군 장비의 현대화였다. 이에 미국은 1958년 1월부터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1959년부터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급격히 줄이면서 이승만을 더욱 압박했다. 그래도 이승만은 여전히 한일협상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비타협적 자세를 취했다.\n\n1959년 1월 26일, 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에게 약탈한 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였다.\n\n1959년 1월 30일,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일본 외상이 기자회견에서 재일 조선인의 북송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려는 북한의 정책과 한국을 압박하려는 일본의 이해가 일치하여 생겨났다. 이승만은 북송은 추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n\n1959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일본을 규탄하면서 일본에 대항한 국내 안전보장이 필요하다 주장했다.\n\n1959년 3월 25일 미국에 서한을 보내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을 요구했다. 년 3월 29일에는 미국 언론에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4월 초부터 미국과 소련이 정상회담을 계획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의 정상회담이 쓸모없음을 강조했다.\n\n1959년 5월 미국은 평화선에 항의하는 각서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n\n1959년 6월 25일 미국 적십자사에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8월 이승만은 \"일본은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북한의 공산주의 건설을 도우려 하는 것 같다\"고 비난하며, 예정되어 있던 한일회담의 중지를 지시했다.\n\n1959년 8월, 인도 콜카타에서 한일 적십자사간에 송환 협정이 체결되었다. 한편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은 북송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8월 25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원들이 일본 적십자사 본사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n\n1959년 9월 10일 이승만은 국제 적십자 부위원장에게 재일교포 북송은 적십자정신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n\n이승만 정부는 일본에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을 비밀리에 파견하였고, 그 결과 1959년 12월 4일 재일교포 북송저지공작 사건이 발생하였다.\n\n1959년 12월 14일 최초의 북송선이 일본의 니가타항을 출발한 이래로 1968년 3월 북송업무에 일단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북한과 일본은 총 88,600명의 재일한국인을 불법적으로 북송하였고, 그 후에도 인도주의 명목 하에 재일교포 북송을 진행하였다. 북송자 대다수가 북측이 아닌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지의 한반도 남부 출신이었기에 진정한 의미의 귀향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n\n1960년 4월 15일에는 한일회담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4월 27일 이승만의 하야로 중단되었다.\n\n#### 대아시아 외교\n1956년 11월 7일 소련에 항거한 헝가리 국민들을 예찬하며, 헝가리 국민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n\n1958년 3월 31일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에 한국군 파견용의를 표명했고, 4월 26일 아드난 멘데레스 터키 총리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n\n1958년 8월 29일 아시아의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강조하고 중화민국에 유재흥 국군 연합참모총장을 특사로 파견했다.\n\n1958년 11월 5일 베트남 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전 참전 의사를 발표했다. 파병은 1964년에 가서야 첫 파병군이 지원된다. 12월 12일 CBS 방송국과의 기자회견에서 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하였다.\n\n미국이 한국군의 감군을 직접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1958년에 가서 이승만은 다시 한번 인도네시아 파병을 제안하고, 비밀리에 우익 반군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n\n1958년 라오스에서 좌익쿠데타가 일어나 내전이 벌어지자 이승만은 '국군을 파병, 라오스 우익정권을 돕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국방부에 지시하였다. 이에 연합참모본부는 1959년 9월 21일 국군을 파견하여 라오스 왕국 내 공산군을 격퇴한다는 내용의 '라오스 파병계획'을 작성하였다. 파견군 규모는 사단·여단·대대급이 모두 검토대상이었고, 군 수뇌부는 정글작전에 적합하게 파견군의 편제를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또 해상수송 기동전단과 수송비행대를 만들어 라오스 파견군을 지원토록 했다.\n\n1959년 6월 8일에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열리는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환영과 반공 메시지를 전달했다.\n\n### 측근들에 의한 고립\n1958년 1월 1일 자유당과 민주당은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를 앞두고 서로의 선거전략을 절충한 이른바 협상선거법이라고 불리는 선거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n\n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승만의 최측근인 장택상과 윤치영이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벌이는 이변이 발생한다.\n\n1958년 2월 16일 민간여객기가 김순기 등에 의해 공중납치되어 납북된 KNA 여객기 납북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유당 정부는 불온사상에 대한 내사와 반국가적 행동에 대한 단속요강을 발표했다. 3월 8일 이승만은 북한을 비난하며 북한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했다.\n\n한편 이승만의 4선을 원한다며 자유당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대통령 선거 출마를 원하는 관제 시위를 주도했다. 허정에 의하면 이승만은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측근들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지지 위에서 민의를 대표하고 있다고 믿었다. 국민과 이승만을 격리시킨 일부 측근들에 의해 그는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n\n1958년 5월 2일 협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의도한 대로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고, 무소속과 군소정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 삽입은 자유당이 본격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기획할 수 있도록 기초를 제공했으며, 언론과 국민의 기본권이 규제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n\n1958년 8월 11일 자유당은 국가보안법 개정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야당은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법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여당은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 의원들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 정문을 폐쇄시킨 채 여당인 자유당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해 1959년 예산안 등 10개 법안 27개 의안을 통과시켰다.\n\n자유당 일파의 속임수를 얄밉게 생각한 이승만의 최측근 윤치영은 일부러 4대 부통령 선거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기붕의 표를 갉아먹는다. 윤치영에 의하면 '내가 자유당 사람들의 미움을 산 것은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하여 이기붕과 맞서서 결국 장면으로 하여금 당선이 되도록 한 사실이며'라고 밝히기도 했다. 윤치영은 부통령 후보로 나서되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이기붕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호언하였다.\n\n이기붕 일파의 행동을 미워한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인 이윤영 역시 부통령에 출마한다. '이기붕을 떨구기 위해서\n\n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돈 1억원을 보내드릴 터이니 사퇴하고 자기를 밀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란 후에 되돌려보냈다.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그는 낙선하였다. 이후 이기붕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동안 경무대에 출입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이승만이 윤치영과 이윤영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3.15 부정 선거가 터진 직후였다.\n\n###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n1960년 3월 15일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한 개표조작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진행된 가운데 경남 마산에서는 조직적 저항으로 발전한 3·15 마산 의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관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태는 확대되었다.\n\n1960년 3월 28일 선거부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이승만은 자유당 간부들을 불러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하였다.\n\n1960년 4월 11일 3·15 부정선거 반대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한 낚시꾼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다. 시체의 왼쪽 눈에서 박힌 최루탄이 확인되었고, 이는 부정선거 비판여론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언론을 통해 3·15 마산 의거를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가 된 폭동이라고 밝히고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n\n1960년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수많은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한 시위와 이에 대한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사태는 동료들의 희생에 분노한 학생들이 집회를 여는 지경에 이르렀고, 계엄령은 서울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국군은 무력진압을 사실상 거부하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였다.\n\n1960년 4월 21일 이승만은 전직 각료들을 경무대로 불러 상의하였다. 4월 22일 변영태와 허정 등을 다시 경무대로 불러 사태수습을 위한 논의를 하였다. 4월 23일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에 따른 시민들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발표하였다. 4월 24일 4.19 유혈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n\n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 부정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n\n이승만은 4·19 의거 부상자들이 수용된 병원을 찾아 부상자들을 위문하였다. 그는 학생들의 궐기를 높이 평가하며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우리 선열들의 독립투쟁과 3.1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다.\"라고 하였다.\n\n### 대통령직 사퇴 \n1960년 4월 26일 새벽 6시경 허정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때 이승만은 구 비서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하야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25일 저녁에도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는 보고를 듣고 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느냐. 내가 물러 나야지 하며 하야를 결심했다. 이날 이승만은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하였다. 그 직후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 정부통령 재선거, 이기붕의 공직 사퇴, 국민이 원하면 본인이 책임지겠다'를 약속하였다.\n\n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즉시 수리되었다.한편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4월 28일 경무대에서 이기붕의 장자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에 의해서 가족들과 함께 타살되었다.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4·19 혁명은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n\n1960년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에 있을 때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으로부터 위로 편지가 왔다. 이승만은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청년학도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라고 답신하였다.\n\n## 말년\n\n### 미국 망명 \n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머무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n\n하와이에서 망명생활 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는다고 알려졌는데 실은 허락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당시 실제 외교문서 기록에 불허했던 것으로 나온다.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영어에 유창했던 이승만은 실어증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의 간호를 받으며 약간의 한글과 한문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n\n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 오중정,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n\n### 서거 \n1960년부터 심장병이 있던 그는 트리폴리 육군 병원에 자주 진료하였다.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현지 시간 0시 35분 하와이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서거하였다. 향년 90세였다. 이승만이 부인과 양자 이인수 박사를 통해 남긴 마지막 기도와 유언은 다음과 같다.\n\n### 장례 \n서거 직후 데스 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전 주한 미군 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이 마련한 특별비행기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였다. 1965년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그의 유해를 영접하였다.\n\n그밖에 내외 귀빈으로 윤보선, 허정, 장면,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이 김포 공항에 나와 이승만의 유해를 영접했다. 허정이 직접 지은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이승만의 유해가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제1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n\n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처음에는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그의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판단했다. 7월 22일 유해를 영접한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룰 것을 요구하였다.\n\n당시 한민당계 정당의 기관지였던 동아일보도 1965년 7월 23일자 사설에서 국장도, 국민장도 불가하다며 정부는 즉시 이승만의 장례에서 손을 떼라고 항의하였다. 양자 간의 합의가 되지 않으면서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룰것을 권유하였으나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으로 모시겠다고 밝히면서 결국 장례는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루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유해는 운구차량과 경찰의 호송을 받고 서울 이화장에 안치되었다가, 1965년 7월 27일 서울특별시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갖고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도착하였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를 대독하는 간단한 영결식을 갖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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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gpt", "value": "스파르타의 공격까지 이겨내며 기세가 오른 폴리크라테스는 그리스 전체를 지배할 야망을 가지고 세력을 키워나간다. 이런 사모스의 확장에 주변 세력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고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르디스 지방관이었던 오로이테스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폴리크라테스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오로이테스는 폴리크라테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캄비세스 2세가 자신을 죽이려해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폴리크라테스에게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직접 와줄것을 요청한다. 때마침 세력 확장을 위해 군자금이 절실했던 폴리크라테스는 오로이테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오로이테스의 함정이었다.\n\n기원전 515년 폴리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해군을 이끌고 막대한 재산을 수송하러 마그네시아지역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오로이테스에게 생포된 뒤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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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도쿠가와 이에하루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도쿠가와 이에하루**는 에도 막부의 제10대 쇼군이다.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맏아들이다.\n\n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아들로 일찍이 영특한 재능을 보여왔다. 할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이에시게를 후계자로 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n\n1760년 이에시게로부터 쇼군직을 물려받았다. 조선 통신사를 에도에서 영접한 마지막 쇼군이다. 아들 도쿠가와 이에모토가 있었으나 1779년 병사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에 다누마 오키쓰구가 로주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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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오사카부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오사카부**는 일본 긴키 지방 중부에 있는 행정 구역으로, 거주인구는 도쿄도, 가나가와현 다음으로 3번째로 많으나, 낮 인구는 여전히 도쿄도에 이어 일본 내에서 2위이다. 게이한신 지역의 핵심지역이다.\n\n동쪽으로 나라현, 북서쪽으로 효고현, 남쪽으로 와카야마현과 경계를 접하며 북동쪽으로 교토부와 인접한다. 부청소재지 오사카시 외에 여러 개의 위성 도시가 있다.\n\n오사카부는 일본 제2의 도시이자 긴키 지방의 중심지, 서일본 최대의 도시이다. 도쿄도 다음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수많은 철도 노선과 도로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연결하며, 일본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오사카부는 긴키 지방의 경제, 정치, 문화, 산업, 금융, 교육의 중심지이며, 오사카부를 중심으로 한 긴키 지방도 세계적으로 손에 꼽는 경제권역을 형성한다.\n\n국제 행사로, 아시아 최초의 세계 박람회인 1970년 세계 박람회를 열었으며, 1995년 APEC 회의, 2019년 G20 정상회의 등을 개최하였다. 2018년 11월에는 2025년 세계 박람회를 유치하였다." }
{ "from": "user", "value": "개요는?" }
{ "from": "gpt", "value": "부청 소재지는 오사카시이다. 율령국인 셋쓰국 동부 및 가와치국과 이즈미국의 각 전역으로 구성되어 삼국 문자를 따 섭하천이라고도 하는데, 교토부에서 가시타촌 전역과 가메오카시의 일부가 월경 편입된 1958년 이후에는 단바국 남동부도 포함하게 되어 있다. 사카이현 편입 1881년부터 나라현 을 재설치하여 1887년까지는 야마토국의 전역을 포함하고 있었다.\n\n긴키 지방의 경제·교통의 중심이며, 인구는 약 883만 9,000명으로 전국 3위, 주간 인구 및 인구밀도는 도쿄도에 이어 전국 2위이다. 2018년도의 명목 부내 총생산은 약 40조 엔이며, 도쿄도와 아이치현에 비교도 안되는 규모이며 부역 전체가 오사카 대도시권에 속해 있으며, 고도로 도시화된 지역이 많다.\n\n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가장 살기 좋은 도시' 랭킹에서 오사카는 빈, 멜버른, 시드니에 이어 세계 4위로 평가되었다." }
{ "from": "user", "value": "오사카시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오사카시**는 일본 오사카부에 있는 도시로 부청 소재지다. 혼슈 긴키 지방의 요도강 하구 오사카만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에서 도쿄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n\n4세기에 나니와궁이 놓여진 이후 약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상업과 해외여행 등이 활발하고 있으며\n주간 인구는 도쿄 23구 다음으로 일본 전국에서 2위, 야간 인구는 요코하마시 다음으로 3위이다. 1956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었다. 간토 지방이 아닌 지방에서는 제일 많으며,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다." }
{ "from": "user", "value": "인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2005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오사카의 주민은 2,628,811명으로 2000년에 비해 30,037명, 1.2% 증가하였다. 1,280,325세대가 있고 세대당 성원 수는 2.1명이었다. 인구밀도는 km당 11,836명이었다. 간토 대지진으로 1920년부터 1930년 사이에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와 1930년에 오사카시의 인구는 2,453,573명으로 2,070,913명의 도쿄를 제치고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인구는 1940년에 3,252,340명으로 절정에 달했고 전쟁 후에는 1965년에 3,156,222명으로 절정에 달했으나 이후 주민들이 교외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계속 감소하였다.\n\n99,755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가장 큰 집단은 한국인과 중국인이다. 이쿠노구의 쓰루바시 지구는 일본에서 가장 큰 한국인 거주지 중 하나로 재일 한국인 27,466명이 등록되어있다.\n\n## 방언\n이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언은 긴키 방언이다. 긴키 방언의 특징 중 하나는 동사의 부정의 접미사 nai 대신에 hen을 사용하는 것이다." }
{ "from": "user", "value": "주오구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주오구**는 일본 도쿄도의 심장부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n\n에도 시대에는 각 지방에 가는 길의 기점인 된 다리 \"니혼바시\"가 만들어지고 그 주변의 니혼바시 지역은 상업 지역으로서 발전되었다. 현재도 니혼바시 지역 일본은행 본점, 도쿄 증권거래소 등 일본 경제의 중추와 미쓰코시 본점, 다카시마야 도쿄점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이 집중하고 있다.\n\n또 일본을 대표하는 고급 상가인 \"긴자\", 전국에서 생선류가 모이는 \"쓰키지 시장\"도 주오 구에 있다." }
{ "from": "user", "value": "경제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리코의 본사 건물이 이곳에 있다. 본사 건물은 25층으로 긴자 지역에 있다. 스미모토 그룹의 본사가 주오 구의 하루미 아일랜드 트리톤 스퀘어 타워에 있다. 미쓰이 부동산의 본사 또한 이곳에 있다.\n\n도쿄팝의 일본 지사가 이곳에 있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지오시티의 일본 지사가 니혼바시의 니혼바시하코자키 빌딩에 있다." }
{ "from": "user", "value": "명종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명종**)은 조선의 제13대 국왕이다. 중종의 9남이자 막내아들이며, 모후는 문정왕후이다." }
{ "from": "user", "value": "개요는?" }
{ "from": "gpt", "value": "성은 이, 휘는 환, 아명은 춘령이며 본관은 전주, 자는 대양이다. 묘호는 **명종**이며, 시호는 **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이다.\n\n1534년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39년 **경원대군**에 책봉되었다.\n\n1545년 이복 형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인종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붕어하기 3일 전에 선위를 받았으나 명종의 나이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섭정하였다. 친정 이후에는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윤백원, 이량, 심연원, 심통원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였다." }
{ "from": "user", "value": "분쿄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분쿄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도쿄 구부의 중앙에 위치하며 주거와 교육 중심지이다. 메이지 시대에 학자와 정치가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문학가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출판, 인쇄, 첨단 의료 산업이 분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IT 산업이 번성하고 있다. 분쿄에는 대형 병원과 도쿄 돔, 유도의 고도칸, 도쿄 대학이 있다." }
{ "from": "user", "value": "경제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일본의 출판사 고단샤와 약국 체인 토모즈의 본사가 분쿄구에 있다." }
{ "from": "user", "value": "스미다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스미다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시타마치라고 불리는 전쟁 이전부터의 주택 지역이다. 또 프로 스모의 대회가 열리는 료고쿠 국기관이 있다.\n\n2019년 4월 1일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268,192명으로 집계됐고, 인구 밀도는 19,361km이다." }
{ "from": "user", "value": "지리는?" }
{ "from": "gpt", "value": "스미다 구는 도쿄의 본토 부분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주요 강으로 스미다강과 아라카와강이 있으며 구의 경계를 일부를 이룬다. 북쪽으로 아다치구, 북서쪽으로 아라카와구, 동쪽으로 가쓰시카구, 남동쪽으로 에도가와구, 서쪽으로 다이토구, 남서쪽으로 주오구, 남쪽으로 고토구와 접한다." }
{ "from": "user", "value": "중종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중종**은 조선의 제11대 국왕이다." }
{ "from": "user", "value":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중종의 상을 당했을 때 슬퍼함이 얼굴에까지 나타나니, 보는 이들이 칭찬하였다.\n\n여러 왕자 중에 가장 현명하였으므로, 을사년에 가장 참혹한 화를 만났다.\n\n처음에 울진으로 귀양갔었는데, 왕실의 지친이므로 목숨이 보존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밭을 사서 생활 대책을 세우며 장구한 계획을 마련했었다.\n\n자살하라는 명이 내리자, 사람들이 차마 알리지 못하고 치상의 준비를 마친 다음에 비로소 말해 주었는데, 즉시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 죽었다.\n\n곧바로 관에다 염을 하여 발인해서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n첫째는 금원군 영이고, 둘째는 봉성군 완이다." }
{ "from": "user", "value": "아라카와구의 역사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이 지역은 에도 시대에 주로 농경지였다. 1651년에 도쿠가와 막부의 가장 큰 사형장인 고주카파라가 현재의 미나미센주 역 옆에 세워졌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이 지역의 강 유역에 공장이 세워져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1932년에 아라카와는 도쿄시의 35개 구 중 하나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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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신주쿠구의 교통을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신주쿠 구는 도쿄 교통의 중심이다. 신주쿠역은 매일 약 364만 명의 승객이 통과하여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역이다. 이곳에서 몇 개의 JR 선과 세 개의 지하철 노선, 세 개의 민영 통근선이 교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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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백제 금동대향로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백제 금동대향로**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금동제 박산로다. 1993년 12월 12일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 절터의 목곽 수로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초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공예품이다. 또한 백제 금동대향로에 사용된 도금과 주조 기술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기술적 성과라는 평가가 있다. 진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똑같이 생긴 복제품이 있다." }
{ "from": "user", "value": "체계는?" }
{ "from": "gpt", "value": "중국에 서역의 향품이 전해져서 전국시대 말기부터 악취를 없애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길쭉한 하대에 알의 모양을 얹은 박산 향로의 형식에 있어서만 유효한 논증이다. 중국의 박산형 향로에 비하여 백제 금동 대향로는 그 심미성과 정밀함이 월등하기 때문이다.\n\n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이상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가 있어 그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하는 이상세계이다. 즉,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 위의 세계가 이상세계라는 설명이다.\n\n봉황을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해 온 천계로 보고, 5악사와 기러기를 백제의 5부로 보아 백제대향로에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다.\n\n한편 최근에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도교와 불교의 습합'을 반영했다는 기존 견해에 반론하기도 한다. 당시 불교계에서 전승되었을 문헌 가운데 '가루라 목 아래에 여의주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반열반경』 중 '신선이 기악을 연주한다'는 기록이 있고, 『묘법연화경』에도 '사람이 북, 퉁소, 거문고, 비파 등을 연주한다'라는 문구가 있다. 즉, 백제 금동대향로의 도상을 불전 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수당대에 걸쳐 불교 내에서는 『홍명집』 등을 저술해 도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격의불교로 당시의 불교상을 정의하기엔 문제가 있다. 향로의 도상에 대해 지나친 추정과 상상은 지양되어야 하고, 향후 구체적인 전거를 들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
{ "from": "user", "value": "시나가와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시나가와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
{ "from": "user", "value": "산업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몇몇 회사들이 시나가와 구에서 운영되고 있다. 시나가와 구에 본사를 둔 기업들로 이스즈 자동차, 일본 항공, JAL의 계열사인 JAL 익스프레스, JAL웨이즈가 있다. 한때 JAL의 계열사로 현재는 일본 항공에 인수되어 없어진 일본 아시아 항공이 JAL 빌딩에 본사를 두었다.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본사가 다이요 세이메이 시나가와 빌딩에 있다. 소니는 시나가와 구에서 고텐야마 테크놀로지 센터와 오사키 이스트 테크놀로지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것은 2006년 말에 소니의 본사가 미나토구로 이전하기까지 본사로 사용되었고 시나가와의 오사키 웨스트 테크놀로지 센터는 2007년에 문을 닫았다.\n\n어도비 시스템즈, 지멘스 AG, 피닉스 테크놀로지스의 일본 지사가 시나가와 구에 있다. 다른 회사들로 IMAGICA, JTB 주식회사, 필립스, 아쿠라, 폴라 코스메틱스, 일본 정공이 있다." }
{ "from": "user", "value": "쓰촨성의 문화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쓰촨에는 쓰촨분지의 지리적인 요소의 영향으로 분지의식이 존재한다. 쓰촨 문화는 그 외 지방문화와는 다르다.\n\n쓰촨 사람의 방언을 쓰촨어라고 부른다. 그 언어는 관화방언에 속한다. 대량의 발음은 보통화와 비슷하나 말투의 기본은 같지 않고 간혹 특별한 어휘를 가지고 있다. 한어방언에 비추어 볼 때 쓰촨 방언은 5개의 방언 편을 포함한다. 성유편, 관적편, 검북편, 곤귀편과 월북편이 이에 해당한다. 4가지 편은 관화 방언인 서남관화에 속하고, 월북편은 객가어에 속한다. 그중 성유편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성유편은 고대 중국어 4성 발음이 지금의 제2성으로 귀착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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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량강도 폭발 사고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량강도 폭발 사고** 또는 **김형직군 폭발 사고**는 2004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김형직군 월탄리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를 말한다.\n\n3.5km ~ 4km 정도의 먼지 구름이 발생했으며, 이 구름이 미국의 군사위성에 의해 촬영되었다고 하나, 진위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보통의 구름을 오인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n\n9월 13일 백남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은 이것이 수력발전소를 위한 댐 건설중에 벌어진 사고라고 발표했다. 이튿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사전 통보가 없었다며 사실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언론은 핵무기 실험 또는 북한의 반정부 단체와 관련된 폭발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n\n대한민국의 인공위성인 아리랑 1호가 폭발 현장의 인근 지대를 촬영했으나, 별다른 폭파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는 뚜렷한 분석이 나오지 않았다.\n\n9월 15일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북조선의 해명이 미국 정부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했다. 또한 평양 주재 각국 외교관들의 현장 사찰 후, 폭발의 크기가 과장되었으며, 위치도 처음 대한민국과 미국이 추정하였던 위치와는 떨어진 거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
{ "from": "user", "value": "영화는?" }
{ "from": "gpt", "value": "2006년 개봉한 미국 영화 에너미 라인스 2 - 악의 축에서, 2004년 북한 량강도의 대형 폭발사고로 인한 버섯 구름의 생성은, 미국 네이비 씰과 한국 특수부대 요원들이 지하 사일로에 저장되어 있던 북한의 3단 토폴급 ICBM 핵미사일을 비밀리에 폭파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픽션으로 토폴 미사일은 러시아제 ICBM으로서, RT-2PM Topol과 RT-2UTTH Topol M이 있는데, 이 중 지하 사일로 방식은 토폴-M이다. 토폴-M은 사거리 11,000 km인 고체 추진 3단 로켓의 핵미사일이다. 550킬로톤급의 핵미사일을 탑재한다.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팻 맨 핵폭탄의 27.5배 위력이다." }
{ "from": "user", "value": "장정진이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장정진**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1977년 TBC 9기 성우로 입사하며 데뷔했고, 3년 후인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폐국되면서 KBS 15기 성우로 소속이 바뀌었다. 1980년대까지는 주로 KBS 위주로 활동했으나, 1990년대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3사 지상파 방송에 모두 출연했다.\n\n달려라 하니의 ‘홍두깨’, 하록 선장의 '하록', 원피스의 '쥬라쿨 미호프' 역으로 유명하다. 또한 1997년부터 2004년까지 TV가요20과 SBS 인기가요에서 나레이션을 맡아, \"**네~ 이어서!\"** 등의 유행어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스타 집현전, 호기심 천국, 폭소클럽, 아침마당, 이홍렬쇼, 달려라 하니, 퀴즈천하통일 등 다양한 예능/교양 프로그램에서 내레이션을 맡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n\n2004년 9월 13일, KBS 2TV의 프로그램 일요일은 101% 〈골목의 제왕〉 코너를 녹화하면서 가래떡을 먹는 도중 질식, 저산소성 뇌경색으로 뇌사상태가 되었다가 10월 11일 오후 6시 23분경에 다발성 장기 부전에 의한 심정지로 별세하였다 . 결국 그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가을 개편 때 일요일은 101%는 폐지되었다.\n\n장례는 서울 이대목동병원 장례식장에서 KBS 성우극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성우 김환진이 장례위원장을 맡았으며, 충청남도 천안시 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n\n대책회의 당시, KBS 예능본부의 전진국 편성기획팀장의 인터뷰에서, “장정진 씨의 질식 사고를 계기로, KBS와 MBC 등 다른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모든 프로그램 역시, 출연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앞으로도 대형 프로그램 제작 시에 의료진과 안전 요원을 의무적으로 배치하겠다\"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이번 사고와 관련해 KBS 시청자 상담실에선, 가학성 프로그램을 방송한 KBS를 질타하고 프로그램을 만든 방송 PD와 작가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는 수 많은 시청자들의 항의성 글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었다." }
{ "from": "user", "value": "국가보안법의 사형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1968년부터 1990년까지 사형이 확정된 593명 가운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93명, 반공법 위반으로 29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긴급조치 위반 등의 혐의로 254명이 사형집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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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바이올린 협주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택된 목록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차이콥스키, 시벨리우스의 작품으로, 그것들은 바이올린 레퍼토리의 초점을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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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의 일대기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비에니아프스키는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당시, 루블린주 루블린 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1847년에대 환상 카프리치오 작품번호 1을 출판했다. 총 24개 작품이 출판되었다.\n\n비에니아프스키는 이사벨라 햄프턴과 약혼했지만, 이를 이사벨라의 부모가 반대하자 전설 작품번호 17을 썼고, 그것으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아 1860년 결혼했다.\n\n1860년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1872년까지 살았다. 그곳에 있는 Russian Musical Society에서 그는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오케스트라와 현악 사중주 활동을 했다.\n\n1872년부터 1874년까지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했다. 1875년에는 브뤼셀에 있는 콘소바토리에서 앙리 비외탕의 후임으로 바이올린 교수를 지냈다. 몇 해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콘서트를 몇 년간 가지지 못했다. 1879년 4월 오데사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갖고 이듬해에 사망했다.\n\n비에니아프스키는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여겨지고 있다.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해서 그의 작품은 어려운 기교를 가지고 있어 바이올린 레퍼토리로서 많이 연주되고 있다. 그는 사후에 얻은 명성이 많다. 1952년과 1957년, 폴란드 우편 직인에는 그의 얼굴이 도안되었다. 1979년 주화된 100 즈워티 동전에는 그의 얼굴이 있다. 체코브카 강에 있는 한 도시에는 비에니아프스카라는 이름이 붙었다.\n\n흔히 ‘Russian bow grip’이라고 불리는 기법은 ‘Wieniawski bow grip’이 더 올바른 이름이다. 이는 비에니아프스키가 그의 학생들에게 악마의 트릴을 연주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지도했던 기법이기 때문이다.\n\n비에니아프스키는 콘서트 순회 중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그의 시신은 바르샤바의 포와즈키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n\n첫회의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콩쿨이 1935년 바르샤바에서 열렸고, 1952년부터 5년마다 국제 콩쿨이 열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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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앙리 프랑수아 조제프 비외탕이 누구야?" }
{ "from": "gpt", "value": "**앙리 프랑수아 조제프 비외탕**은 벨기에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이른바 프랑코-벨기에파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브뤼셀에서 같은 벨기에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지금도 연습곡이나 교본으로 알려진 베리오에게 배우고, 작곡은 라이하에게 사사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이나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도 역임하였다. 그의 작품은 모두 바이올린곡인데, 남아 있는 7개의 협주곡 중에서는 제4번, 제5번이 자주 연주된다." }
{ "from": "user", "value": "음악적 특색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바이올린 주자로서도 당시 최고의 명성을 차지하고 있었던 비외탕의 작품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기교를 구사한 탁월한 가락과 음색이 풍려함이 그의 뚜렷한 특색이다." }
{ "from": "user", "value": "연개소문의 가계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현존하는 연개소문의 기록인 삼국사기 천개소문 열전은 모두 당서의 내용을 편집한 것으로, 중국 측에 의해 변조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연개소문의 성씨는 원래 연이지만 구당서와 신당서가 당 고조의 휘를 피해서 천으로 그의 성을 표기한 이후 연개소문의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후손이 천씨로 표기된 바 있다. 18세기 조선의 사학자 안정복은 저서 동사강목 고이편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고구려의 귀신 연정토가 내항하였다.\"고 한 기록과 통고에 \"정토는 소문의 아우이다.\"라고 한 점을 들어 「천개소문」이 아닌 「연개소문」이며, 중국인들이 도연명을 「천명」으로 표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 고조 이연의 휘를 피하여 천자로 썼음을 밝혔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스스로 '물 속에서 태어났다'며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천남생묘지명』에서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본래 샘에서 나왔으니, 신께 의지해 복을 받았고 태어난 곳을 따라 족속의 이름을 붙였다\"고 찬미조로 적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n\n『천남생묘지명』과 『천남산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로 모두 고구려에서 막리지를 역임하였으며, 묘지명은 그들의 임무를 중국 역사의 이윤과 곽광에 빗대어 찬미하고 있다. 형제로 이름이 확인된 것은 연정토가 유일하며, 민간전설에서 연개소정이라는 연개소문의 여동생이라는 인물이 지켰다는 청석관 유적이 중국의 요녕성 개주시에 남아있다. 중국의 당서와 한국의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에게 연남생과 연남건, 연남산의 세 아들이 있었다고 전하며, 연개소문 사후 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연남생은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쫓겨 국내성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당으로 도망쳐 고구려 공격에 앞장서는 등,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고구려에 남아있던 연남산은 보장왕 27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함락될 때 보장왕과 함께 항복했으며, 연남건은 평양성을 사수하다가 부하에게 배신당하여 성을 빼앗기고, 나당 연합군에게 붙잡혀 검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었다. 연남생은 고구려 멸망 뒤 당으로부터 우위대장군 변국공을 제수받았고 요동대도독 현도군공의 지위에 이르렀으며 의봉 2년 677년 12월에 46세로 졸하였다. 연남산은 사재소경의 벼슬을 받았으며 701년에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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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국가정보원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국가정보원** 또는 단순히 **국정원**은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 1999년 1월 21일 국가안전기획부를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원장은 장관급 정무직 공무원으로, 차장은 차관급 정무직 공무원으로 보한다.\n\n국가정보원의 조직, 소재지, 직원 수 등의 정보는 기밀사항에 해당되므로 공개되지 않는다., 본부 소재지는 언론을 통해 동 단위까지 공개되어 있다. 공개되는 조직이 있기도 하다." }
{ "from": "user", "value": "역사는?" }
{ "from": "gpt", "value": "1961년 5월 20일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1980년 12월 31일자로 확대·개편되어 발족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중앙정보부보다 대공, 대북, 방첩업무와 정보수집 업무가 보다 강화되었다. 1967년의 대통령 선거 이후 중앙정보부가 학생운동권, 친북한세력 외에 반 유신세력 및 재야시민단체, 여성주의, 해방신학, 통일운동 등 반정부 또는 체제 비판 세력을 적발, 단속하는 과정에서 인권 유린 문제와 도감청, 여론 조작 문제가 집중 부각, 대국민 이미지가 나빠지자 한때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역임했던 전두환은 부서 장악도 할 겸 1980년 12월 22일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하고 일부 기능을 조정하였다.1999년 1월 21일 국가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하였다." }
{ "from": "user", "value": "전두환의 사상과 신념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 박흥주 대령 복권 노력\n1987년 전두환은 박흥주의 유족에게 연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총무처와 국방부에서는 현행법을 고치지 못하는 이상 어렵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의리를 모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나중에 박흥주 대령에 대한 것을 다시 접하게 된 전두환은 박흥주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복권을 여러번 시도했다.\n\n재판 당시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던 박흥주는 사후 연금을 받지 못했다. 박흥주의 딸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다. 박흥주의 처는 국방부에 가서 연금청구를 했으나 현역군인으로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을 땐 연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급여제한 규정이 있어 불가능하다는 회신만 받았다.\n\n박흥주의 측근인 H모의 증언에 의하면 \"경기 안양 근처에 있는 자신의 사단을 방문해 달라고 해서 갔더니 배 사단장은 \"각하의 지시로 박대령의 유가족을 도와야겠다\"며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대령의 부인은 강남에서 조그만 분식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도움은 필요없다. 김재규가 연금이 나오는 등 실질적으로 예비역중장 신분이 회복된 상태인만큼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박대령도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했다. 배사단장은 그렇게 보고하겠다고 했다.\n\n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배사단장은 자신의 부인과 함께 분식점으로 찾아왔다. 그는 \"안실장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즉석에서 'OK'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안실장이 총무처와 국방부 등에 연금지급과 복권문제를 협의했으나 현행법을 고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며 몹시 서운해 했었다. 배 사단장은 청와대에서 보내준 것이라며 금일봉을 놓고 갔다. 전두환은 보훈처장이 자신의 부탁을 끝내 거절한 것을 서운해 하면서도 보훈처장은 자기 임무에 충실하였다며 경질하지 않았다. 예비역 중장인 김재규, 예비역 대령인 박선호와는 다르게 박흥주는 10.26 사태 이후 재판 당시 현역 대령 신분이었으므로 법의 적용을 받았다.\n\n## 대북 특사 파견\n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자신이 북조선에 특사로 다녀오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하였다.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북한이 일으킨 아웅산 테러 사건 등 남북관계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밀사교환을 통한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을 실현시킨 바 있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기여할 기회를 달라고 김대중 정부에 호소하였다.\n\n1999년 5월 \"우리 정부가 허락하고 북한이 받아준다면 북한의 이곳 저곳을 자유스럽게 방문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1999년 5월부터 김대중에게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노동당 총비서와 면담하려 했던 것은 그가 정부의 대북특사 역할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두환은 그동안에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북특사를 맡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임동원에 의해 거절당했다.\n\n전두환은 1999년 7월 당시 자신은 '남북 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다\n\n전두환은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85년 허담 노동당 비서와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서울-평양 교차방문을 통해 김일성주석과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며 남북간에 다양한 비정규 대화선을 가동할 것을 당시 국민의 정부에 제의하였다. 전두환은 자신도 지미 카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끝내 거절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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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촉한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촉한**은 중국 삼국 시대 때 유비가 지금의 쓰촨성 지역에 세운 나라로 정식 국호는 **한**이나 역사상 구분을 위하여 촉한이라고 부른다.\n\n한 황실의 후예가 세운 마지막 한나라이기에 **계한**이라고도 부르고, 나라가 위치한 지명을 따서 **서촉**, **촉** 등으로도 불린다. 연강 원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위왕 조비가 헌제를 내쫓고 조위를 건국하자, 당시 익주를 점거하고 있었던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221년에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이라 하고 연호를 장무라 하였다. 수도는 성도이다.\n\n선주 유비는 자신의 의동생인 관우를 죽인 오를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키는데, 이릉에서 육손에 계책에 크게 패하면서 백제성에 눌러앉게 되고, 결국 사망하였다. 유비 사후 후주 유선이 즉위하였고, 연호를 건흥으로 고쳤다. 승상 제갈량은 남만을 토벌해 맹획을 일곱번 사로잡고 놓아주었는데, 이에 맹획이 항복하고 남만은 평정되었다. 또 제갈량은 북벌에 나섰는데, 이 때 올려진 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이다. 하지만 진지 · 황호와 같은 간신의 전횡과 연이은 북벌 실패로 인해 촉한 궁중의 정치를 제대로 처리할 사람이 없고 많은 힘이 소모되어 점점 쇠망의 길을 걸었으며, 특히 황호가 정권을 장악한 경요, 염흥 연간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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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이두의 표기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이두문에서는 명사, 동사 어간 등 단어의 실질적 부분에서 주로 한자어가 사용되고, 조사나 어미 등 문법적 부분에서 주로 이두가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는 한자를 도입한 뒤에 한동안은 정규 한문만 사용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그 후 한국어 어순에 맞춰 글을 쓴 서기체와 같은 의사한문이 나타난다. 이두는 이와 같이 한국어 어순으로 쓰인 의사한문에 문법적 요소가 더 보완되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n\n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한자 독법은 옛날부터 있는 관습적인 독법이 내려와 있다. 그 중에는 중세 한국어와도 다른 독특한 것도 있다. 예) 처격 ‘良中’에 대해 중세국어 ‘-애/-에’\n\n아래는 양잠경험촬요에 나타나는 이두의 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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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형태소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형태소**는 언어학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는 가장 작은 말의 단위로 발화체 내에서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더 분석하면 뜻이 없어지는 말의 단위이다. 음소와 마찬가지로 형태소는 추상적인 실체이며 발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다." }
{ "from": "user", "value": "분류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형태소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 또는 기능에 따라 크게 문법형태소와 어휘형태소로 나눌 수 있다. \n\n형태소는 그것이 말에서 쓰일 때 의존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의존형태소와 자립형태소로 나눌 수 있다.\n\n형태소는 그것이 다른 형태소와 결합하여 하나의 낱말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경우 근원형태소라고 한다. \n\n어떤 형태소가 다른 형태소와 결합하는 관계가 제한적이면 불구형태소라고 한다.\n\n“한나가 책을 보았다.”을 예로 들어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from": "user", "value": "가가번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가가번**은 일본 에도 시대 가가・노토・엣츄 3국을 지배했던 초대형 번으로, 그 지배 영역은 지금의 이시카와현에서 도야마현에 이르는 대부분의 지역에 속해 있었다. 일반적으로 '가가 100만 석'로 불린다. 메이지 2년의 판적봉환으로 번의 명칭을 **가나자와 번**으로 공식화하였다. 가가국 이시카와군에 있던 가나자와 성에 본거지를 두었다.\n\n번주는 도자마 다이묘인 마에다씨이었으나, 도쿠가와 장군가과는 인척 관계가 강해 신판 다이묘에 가까운 지위가 주어졌고, 마쓰다이라성과 세 갈래 접시꽃 무늬의 가몬을 하사받았다. 3대 번주 마에다 미쓰타카의 대부터 이후 역대 번주들은 정이대장군의 편휘를 하사받았다. 또, 여러 다이묘들 중에서도 102만 5천 석의 최대 영지 규모를 자랑했고, 최종적인 관위도 종3위, 산기로, 그 가격도 고산케와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등의 고카몬이 속해 있던 오로가급 자리에 해당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고산케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
{ "from": "user", "value": "지번은?" }
{ "from": "gpt", "value": "가가 번의 지번에는 다음이 있다." }
{ "from": "user", "value": "을파소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을파소**는 고구려의 재상으로 고국천왕, 산상왕을 섬겼다. 유리왕 때 신하인 을소의 증손자고 입관 전에는 서압록곡 좌물촌의 가난한 농부였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남아 있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고국천왕 13년인 191년, 외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한 이후 이후 고국천왕이 4부에 영을 내려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4부에서는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고, 안류가 다시 유리왕 때 재상이었던 을소의 후손인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이에 왕은 그를 중외대부와 우태로 임명하였다.\n\n을파소는 이 관직이 자신이 뜻하는 바를 하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 “저로써는 감히 왕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는 현명하고 어진 이를 가려내 높은 관직을 주어 대업을 이루소서”라 하니, 왕이 그 뜻을 알고 국상으로 임명했다. 기존 대신들과 외척들이 을파소를 경계하자 왕은 국상에게 복종치 않는 자는 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냈다.\n\n이후 을파소가 지극정성으로 국사에 임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내정이 안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은 안류를 불러 을파소를 천거한 공을 치하하며 대사자에 임명하였다.\n\n3년 뒤인 194년, 7월에 서리가 내려 백성들이 굶주렸다. 이에 왕은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한편, 관리들을 시켜 봄~가을의 기간 동안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와 진대법의 관계가 분명히 나오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을파소가 진대법 실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n\n고국천왕이 죽은 이후 산상왕 대에도 을파소는 국상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산상왕 7년인 203년, 왕이 아들을 얻지 못해 근심하자 을파소는 \"하늘의 명은 헤아릴 수 없으니, 기다리십시요\"라고 진언하였다. 그 해 8월 을파소가 죽자 많은 이가 슬퍼하였다. 국상직은 고우루가 계승하였다." }
{ "from": "user", "value": "조선 국왕의 권력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조선은 이론적으로 국왕이 절대적 주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의 면모를 보이지만 실제에서는 신료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관료제 사회였다.\n\n유교적 이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국왕 역시 대학이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당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경연과 같은 활동을 통해 스스로 유교적 이상의 모범이 되어야 하였다. 실제로 국왕이 신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반정이 일어나거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와 타협하여야 하였다.\n\n조선 중기 이후 조정은 사림파가 장악하였고 붕당 정치가 발달하게 되었다. 중종시기 이미 조선은 군주의 권력이 약하고 신하의 발언권이 강하다는 군약신강이 언급된다.\n\n## 통치\n조선 초기에는 육조의 업무 감독 권한이 의정부에 있었으나 태종이 이를 혁파하여 육조 직계제를 시행하였다.\n\n실제 통치 업무는 육조 각 부처와 산하 기관에서 이루어졌고 이들의 조직은 경국대전에서 규정하였다.\n\n조선 후기가 되면 의정부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비변사가 최고위 정부 조직으로 부각된다. 여러 붕당의 소속으로 비변사에 참여하는 신료들은 삼사와 함께 비변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관철하고자 하였고 영조 등의 국왕 또한 비변사를 통해 탕평책과 같은 방법으로 붕당 간의 경쟁을 조정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였기 때문에 고종의 통치 제도 혁파가 이루어 질 때까지도 비변사는 조선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 기구로 작동하였다.\n\n조선 후기의 세도정치는 애초 정조가 신료의 붕당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시도한 것이었으나 이후 특정 가문에게 권력이 쏠리면서 오히려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n\n## 역모와 반란\n조선 시기는 수 많은 역모 사건과 반란이 있었다. 역모는 주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왕족을 내세워 반정을 시도한 것으로 실제 그런 시도가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기축옥사의 정여립 경우와 같이 붕당 정치에서 상대 당을 탄압하기 위한 구실로 작동하기도 하였다.\n\n## 민란\n조선 후기는 민란의 시기였다. 민란은 지배층의 역모와 달리 사람들이 기근, 전염병의 유행 등에 시달리는 가운데 가혹한 세금의 수취와 탐관오리의 전횡등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홍경래의 난의 경우 이에 더해 지역 차별이 문제가 되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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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홋카이도가 뭐야?" }
{ "from": "gpt", "value": "**홋카이도**는 일본의 홋카이도 지방에 있는 도이자 일본 열도를 이루는 4개 주요 섬 가운데 하나로서 일본 북단에 있는 큰 섬이다. 도청소재지는 삿포로시다. 동쪽과 북동쪽에는 러시아가 관할하는 사할린섬과 쿠릴 열도가 있다.\n\n16세기 이후 일본인들이 섬의 남쪽 끝에 정착지를 세우기 시작했는데, 당시까지도 홋카이도는 아이누족으로 알려진 섬 원주민이 거주하는 외국 영토로 여겼다. 에도 시대에 도쿠나이 모가미, 린조 마미야 등 지리학자가 섬을 탐험하기도 했으나 일본의 통치는 17세기까지 오시마반도에 국한했다. 17세기에 일본인 정착민이 홋카이도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로 말미암아 일본인과 아이누인 사이 종종 충돌과 반란이 일어났다. 1869년 메이지 유신 이후 에조는 일본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었고 홋카이도로 개칭했다. 이후 일본이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식민화하면서 아이누인들은 땅을 빼앗기고 순식간에 일본에 동화되어 사라져 갔다.\n\n47개 도도부현 가운데 유일한 도이자 하위 현이 존재하지 않으며 아시아에서 불곰이 서식하고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브랜드종합연구소에 의하면, 도도부현 매력도 순위에서 2019년 기준 11년 연속 1위를 차지하였으며, 관광산업, 상품구매 의욕도에서도 1위를 차지하고 거주 의욕도에서는 3위를 차지해 각 의욕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인구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홋카이도의 인구는 537만 7782명 1월 1일, 국세조사)이며, 도도부현 단위로 전국 8위이다. 그러나 인구밀도는 가장 낮으며 이것이 지역의 특색이 되기도 한다.\n\n**증가**\n**감소**\n\n## 주요 도시\n홋카이도는 다른 많은 도부현과 비교해서 주요 도시지역에 인구가 편재한다고 하는 성격이 강하고, 특히 2011년 시점에서 --> 근년은 삿포로시에의 인구 집중이 현저하고, 도내의 다른 자치체를 크게 압도한다.\n두 번째 인구 규모를 가진 아사히카와시조차 삿포로시 인구의 약 18%에 불과하다.\n도내의 179의 자치체 중 정령 지정 도시는 삿포로시의 1시이며 중핵시는 아사히카와시와하코다테시의 2시에서 시행시 특례시는 존재하지 않는다.\n인구의 도시집중은 다른 시정촌의 인구밀도가 더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가옥의 밀도가 현저하게 낮고, 대구획에서 거의 무인의 밭지와 목초지가 펼쳐진 대지를, 어디까지나 계속되는 직선 도로가 끊어져 가는 경관은, 인구밀도의 낮음으로 홋카이도에 이은 토호쿠 지방에서도 볼 수 없는, 홋카이도 독특한 것이다.。" }
{ "from": "user", "value": "고종이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고종** 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및 조선 26대 임금 ~ 1897년 10월 12일)이다." }
{ "from": "user", "value": "개요는?" }
{ "from": "gpt", "value":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국왕으로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받다가 1873년 친정을 시작했다. 1875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을 하고 내정개혁 및 개화운동을 전개했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유로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단행했다.\n\n이듬해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고종 황제는 광무개혁을 실시하여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였으며, 근대적 상공업을 진흥하고 공장과 은행 및 회사를 설립하였고, 발전소를 건설하여 전등을 켜고 전화를 개설하고 철도를 개통하여 전차를 운행했다. 또한 신교육을 보급하고 해외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전국의 토지 측량을 실시하고 모든 관리들에게 양복을 입도록 하고 단발령을 재개하는 등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였다.\n\n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을 뿐 아니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아들인 순종을 대한제국 2대 황제에 즉위하게 하였다. 곧이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고, 마침내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 제국에 흡수되었다.\n\n일제강점기를 맞아 고종은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 머물면서 대한독립의군부 등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갑자기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승하하였는데, 이빨이 모두 빠지고 혀가 닳아 없어지며 몸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에 고종 독살설이 퍼지며 3월 1일 고종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에 3·1 운동이 발발했다.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고종이 만든 '대한'을 국호로 사용하고 고종이 도안한 태극기를 국기로 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법에서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
{ "from": "user", "value": "흥선대원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흥선대원군** ~ 1898년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n\n본명은 **이하응**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부친이다. 영향력이 있었던 풍양 조씨 세도 집안과 양주 조씨 고급 관료 집안, 신 안동 김씨 세도 집안에게 각기 서예를 써서 바치고 서화 등을 그려다가 바쳐 보신책을 강구한 그는 1864년 1월 21일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n\n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정리해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 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 박해하였다.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 황후를 간택하였으나\n\n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완흥군, 이재선 등을 조선 군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을 주도한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n\n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 호는 석파·해동거사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으로 추봉되었고 헌의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이 되었다." }
{ "from": "user", "value": "평가와 비판은?" }
{ "from": "gpt", "value": "외모에 대해서는 '형형한 눈빛과 매섭고도 날카로운 하관 '이라 한다.\n\n## 긍정적 평가\n헐버트는 자신의 저서대한제국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묘사했다. \n \n헐버트에 의하면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아무리 그를 미워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항상 그를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거물이었던 것 같다. \n \n작가 김동인은 역사소설운현궁의 봄에서 대원군은 지배계급의 횡포로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대원군이 강제추방의 위기에 놓인 민중들을 보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김동인은 대원군을 호랑이같은 사내대장부이면서도,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딜줄을 아는 속깊은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원군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그를 존경하는 기녀밖에는 없다고 보았다.\n\n###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n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폐쇄정책'\n\n## 비판, 부정적 평가\n한편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을 통해 개항과 개방을 막고 발전의 기회를 차단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발전과 부흥의 계기를 막았다는 것이다.\n또한 '역사를 역행한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 는 것이다. 군주도 아니고 인사부서인 이조의 장이나 정승이 아닌 대원군에게는 인사 임명 권한은 없었다.\n\n### 선정비와 권력남용\n대원군 집권시 전국 각지에는 대원군에게 감사하는 선정비도 세워졌다. 여러 고을의 불합리한 관행이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n \n임용한은 선정비와 척화비를 보면 독재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재자로 변해갔다 고 평가했다.\n \n매천 황현은 그가 권력남용을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권력남용의 근거로 매천 황현은 대원군이 10년간 집정할 때의 위엄으로 '대원군분부'란 다섯 자가 곳곳에 퍼져 뇌정탕화같아 관리나 일반 백성들은 항상 관청의 법률에 저촉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이에 따라 대원군의 실각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n\n### 명성황후 암살 사주, 협력\n명성황후의 암살을 사주, 협력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는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일본 공사관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명성황후가 반일성향으로 변신하자 명성황후 제거작업에 착수한다.\n \n사학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고 하여 대원군의 개인적 욕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n \n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미 국가 외교관들은 명성황후시해와 관련해 일본측의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이 사건의 주범이 대원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n \n흥선대원군이 왕비 암살에 어느정도 영향을 행사했다고 본 윤치호는 대원군을 대완근이라 불렀다.\n\n## 기타\n민족주의 사가인 박은식은 \"대원군은 그 지위가 군주와 같아 대권이 손안에 들고 모든 관료가 그 지휘를 따르면 만백성이 그 위세를 우러러보고 명령하고 행하고 금하면 그쳐 후세의 이윤이나 주공과 같이 될수도 있다\"고 하였으며 그러나 박은식은 그를 명성황후 살해의 동조자로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황현 역시 매천야록에서 그를 명성황후의 암살 협력자로 지목했고, 유길준 역시 그를 명성황후 살해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지목했다.\n \n인재 채용에 있어서 폭넓게 지지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소극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소설가 장덕조는 그가 '오랫동안 불우한 환경에서 염량세태의 무정함과, 인간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껴온 대원군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좁은 범위 안의 복심인물과 골육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평하였다. 편협하고 용렬하다는 비판도 있다.\n\n### 권력욕에 대한 비판\n본심을 숨기고 안동 김씨 문중을 찾아가 굴욕을 자처한 뒤 권력을 획득한 점 등 권력욕의 화신으로도 평가된다.\n \n그는 일부러 김좌근에게 양아버지라 하면서 그에게도 용돈을 얻어 썼고, 김병기는 그를 심하게 무시했다 한다.\n \n쿠테타를 일으켜 아들 고종을 몰아내고 이재면을 추대하려 한 점, 1881년 8월의 이재선 역모 사건을 배후조종하여 이재선을 왕으로 앉히려다가 실패한 점,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한 점,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 명성황후를 제거하는데 협력해줄 것을 계속 요청한 점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집권 후 사적인 보복을 한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n\n### 서원 철폐에 대한 평가\n서원을 철폐하려고 7년여를 기다린 일에 대해서도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는 평가와 '완고하고 고루하다'는 평가가 엇갈린다.\n \n한편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령 당시 자신의 외6대조 노봉 민정중을 배향한 충주 누암서원, 장흥 연곡서원 역시 예외 없이 철폐하라 명하였다.\n\n## 논란과 의혹\n\n### 정치 테러 의혹\n고종의 친정 선언 직후인 1873년 12월 10일 명성황후의 침전에 폭약을 설치해 경복궁에 대화재를 일으킨 세력의 배후 인물로 흥선대원군이 의심받았다.\n \n한편 대원군은 1874년 민승호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1874년 11월 민승호가 정체불명의 불교 승려로부터 선물로 받은 꾸러미가 폭발, 민승호 부자와 감고당 이씨가 그자리에서 폭사한다. 소포 폭탄이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흥선대원군의 복수극이 분명했다. 한편 민영익 역시 폭사의 배후를 흥선대원군으로 보고,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임오군란을 전후해 발생한 이 사건은 당대에 그가 하수인을 사주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n \n1876년 이준용 추대 음모에서 그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그러나 1881년 이재선을 추대하려던 이재선의 역모 사건에는 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허욱, 권정호, 이철구, 이두영 등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의 사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친부이므로 흥선대원군은 처형하지 못했고, 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와 이두영, 이철구 등을 능지처참시키고, 고종의 이복 형인 이재선은 제주도 제주목으로 유배보냈다가 사사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지어졌다.\n \n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무능하면서 욕심 많은 흥인군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어머니와 둘째 형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어, 이는 감정대립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흥선대원군의 소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n\n### 친형 흥인군과의 갈등 및 살해 논란\n흥선대원군은 자신보다 무능력하면서 욕심이 많던 셋째 형 흥인군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n \n1867년 3월 경복궁 공사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대노하여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흥선대원군은 흥인군을 경복궁 중건 때 영선도감 제조로 임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당시 1년만에 전각과 재목이 방화로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형 흥인군을 책임을 물어 처형하려고 했다.\n \n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형을 못마땅히 여겨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0년 동안에도 한 발짝 내딛을 땅조차 빌려준 적이 없어 흥인군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불쾌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민승호는 흥인군을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의 동정을 엿볼 심사로 친밀감을 표했다. 그리고 명성황후에게도 그 속 뜻을 설명했다.\n \n \n흥인군과 흥선대원군의 감정대립을 이용, 민승호가 그를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을 이용하려 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다시 흥인군을 이용해 민씨 일파의 동정을 염탐하려 하였다.\n \n흥인군은 재물을 탐하는 나쁜 버릇이 심했다. 그는 이 한 때의 요행으로 작은 세도를 얻어 대부호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돈과 재물을 긁어모았다.\n \n1882년 6월 10일 임오군란 당시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임오군란 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난병이 흥인군 저택 을 포위하자 이최응은 담장을 넘으려다 떨어져 고환이 터져 결국 사망한다. 담에서 떨어진 그는 고환이 터져 신음하다가 난병의 창에 찔렸다.\n\n### 아들의 죽음과 권력욕 문제\n이재선 모역 사건의 배후가 흥선대원군이라는 의혹이 있다. 이재선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 흥선대원군이라는 말도 있었다. 운현이 화근이라는 얘기가 자자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이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재선을 부추겼고, 이윤용, 황현 등은 이를 간파했다.\n \n쿠데타 계획이 구체적으로 정해지면서 이재선 역시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했다.\n \n흥선대원군이 직접 계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81년 7월부터 유림들이 쿠데타를 계획한다는 것을 접한 대원군은 오히려 이재선을 독려했다. 흥선대원군은 “네가 벌왜를 주장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고 크게 쓰일 것”이라는 말로 이재선을 부추겼다.\n \n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그 결과 강달선 등은 정말로 쿠데타군을 거의 모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n \n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대원군은 실패를 예상하고 역모세력의 입막음을 시도했다. 9월 3일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광주산성의 장교들이 의금부에 자수했고, 이윤용은 입궐, 고종과 명성황후를 직접 찾아가 고변하였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달 외 30명이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자백했다.\n \n처음 이재선은 쿠데타에 관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고 잡아뗐다. 자신은 생긴 것도 변변치 못하고 정신도 변변치 못해 쿠데타를 도모할 만한 인물이 아닐뿐더러 집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n \n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고변한 이들 중에는 이윤용도 있었다. 이윤용의 첫 부인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였으며 계성월 소생이었다. 이재선의 동복 친누이였다고 한다. 이재선은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이 왜 자신을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하려는지 깨닫지 못했다.\n \n이윤용은 '운현궁이 안기영·권정호의 모의에 통하여 일이 이루어지면 대권이 다시 올 것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면 천하고 어리석은 내 자식을 죽게 만드는데 불과하다고 하여 드디어 우물쭈물 모호하게 자식 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 될 수 있으니, 이는 크게 인륜을 저버리고 도리에 어긋난 행위이다.'라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운현궁을 배반하고 마음을 털어 양전에 고해 바쳤다.\n\n### 개화파 암살 사주\n1894년 대원군은 4회의 서신을 직접 보내 개화파 암살 지령을 내렸다.\n \n1894년 9월의 개화파 제거 계획은 비록 법무협판 김학우 한 사람을 암살하는 데 그쳤지만, 이 사건이 대원군파에 의해 자행되었으리라는 의혹이 강하게 일면서 조희연, 안경수, 김가진 등 개화당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공포를 느끼고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여 직무에 전념하지 못한 채 안경수, 김가진 같은 사람은 지방관으로 전임하기를 원하였다.\n \n1895년 5월 23일 김학우 암살에 관여한 인사들 가운데 주동자였던 고종주, 전동석\n\n### 이하전 제거 개입 의혹\n흥선대원군은 집권 전 도정궁 이하전 제거에 가담하거나 조장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대원군의 작가 유주현에 의하면 그를 이하전 사사를 뒤에서 공작한 배후로 의심한 이상지가 1863년 무렵 운현궁에 자객으로 들어왔다가 천하장안에게 발각되었다는 설을 채록, 자신의 작품에 기술해 놓았다.\n \n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 의하면 남병철은 흥선군이 이하전 사사에 관해 의심했다 한다. 박제형에 의하면 \"안동 김씨 세도가와 의령 남씨 남병철은 흥선군을 깔보고 만나기만 하면 조롱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이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다. 하루는 흥선군이 남병철의 집에 갔는데 이날 남병철이 조용히 흥선군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이하전의 역모를 알고 있었지?”라고 했다. 흥선군은 깜짝 놀라서 일순간 얼굴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그대는 어찌해서 이러한 나쁜 연극을 꾸미는 것이오?\" 했다. 남병철은 크게 껄껄 웃으면서 \"시백은 어찌 그리 담이 작소.\"라고 했다.\" 한다. 박제형은 또 \"벌써 남병철은 슬기로운 눈총으로 흥선군의 속마음을 알아차려 한번 시험해 본 것이었다. 흥선군은 그만 진땀이 나서 등을 다 적셨다. 집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십년감수했다\"고 했다 한다.\n \n이하전이 사사된 것에 흥선군도 일부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n\n### 개인적 정치 보복\n파락호 시절 그가 가난한 종친으로서 안동 김씨 일문에 신세를 지러 드나들 때 심의면 등은 궁도령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그는 이 모욕을 잊지 않고 있다가 1863년 권력을 잡은 뒤 심의면 등을 처단하는 것으로 복수했다.\n \n1864년 섭정에 오른 뒤 심의면은 파면되었고, 심의면과 그의 아들들은 요직에 오르지 못했다. 어느 안동김씨 가문에서 자신을 궁도령이라고 조롱하고 비웃은 심의면에 대해 앙심을 품고 보복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n \n김병기에게는 고의로 바보행세를 했으나 김병기는 그를 의심했다. 섭정이 된 뒤 김병기의 연회에 방문, 국수를 먹더니 탈이 난 것처럼 연극을 했다. 김병기에게 독살을 기도했느냐는 눈총이 가해지자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대원군이 토한 음식을 맛보았다. 쓰러지는 시늉을 하던 대원군은 바로 일어나 장난이라 하며 되돌아갔다.\n \n즉위 직전에 화양동서원 만동묘의 묘지기들 중 일부를 장살시켰다는 의혹도 있다.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동 서원에 놀러 갔다가 서원지기와 시비를 벌였다. 의관도 정제하지 않고 서원내에서 부채질을 하자 서원지기들은 그를 발로 그를 차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대원군은 이 수모를 기억했다가 권력을 잡자, 아직 그때까지 살아있던 화양동 서원의 서원지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중 지금도 내가 똑같이 행동을 하면, 그렇게 행동하겠느냐는 질문에, 지금 오더라도 똑같이 대하겠다고 한 서원지기는 살려 돌려보냈다 한다.\n \n그는 자신이 양반집에 출입하지 말라고 한 이용은에 대해서도 원한을 품고 있었다.\n \n형 흥인군의 집에 불이 난 것이나, 임오군란 당시 흥인군이 도망치다가 고환이 터져서 도망치지 못하고 살해된 것도 흥선군의 짓이라는 설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n\n### 동학농민운동 배후 사주\n한편 그가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1894년 2월 21일자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에게 보낸 비밀 정보에 따르면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등이다.\"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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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gpt", "value": "**경복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n\n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문 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n\n'경복'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법궁의 역할을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n\n1910년 한일 병합 후 일제강점기에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와 1926년 조선총독부 건설로 많은 전각들이 철거 혹은 훼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과 잔디밭을 비롯한 정원이 들어섰다. 이러한 모습은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전각이 추가로 소실되었다.\n\n1968년 광화문 복원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 계획이 시작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2010년 광화문 목조 복원, 2023년 광화문 월대 복원을 비롯하여 각 권역별 주요 전각들을 오는 2045년까지 복원시킬 계획이다." }
{ "from": "user", "value": "현지 안내문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n\n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n\n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n\n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n\n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n\n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
{ "from": "user", "value": "순종의 개요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휘는 **척**, 본관은 전주, 자는 **군방**, 호는 **정헌**이다. 묘호는 **순종**, 시호는 **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에는 사실상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왕공족 중 이왕가의 수장인 **창덕궁** **이왕**으로 불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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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의친왕 이강의 일생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미국에 유학하고,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 , 대한적십자사 총재, 순종 황제 대리청정 등을 지냈다. 한국 병탄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1월 21일 아버지인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을 당하자 의암 손병희와 3.1만세운동을 기획한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모임을 사동궁과 담을 맞댄 태화관에서 주선하였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11월, 대동단의 김가진, 전협,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n\n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계속된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에로부터 형식적인 **공**의 지위에서 물려나게 되었다. 해방 후 김구와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으로 있었고,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고, 병고와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안동별궁에서 기거 중, 임종 직전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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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구리시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n\n## 고대\n삼한시대에는 마한의 고리국 또는 모수국으로 비정된다. 이병도는 진접읍 일대의 고구려대 지명인 골의노현 중 \"골의\"가 \"고리\"와 발음이 유사함과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벌한 백제의 성 목록에 아단성 다음에 위치한 점을 들어 고리국으로, 천관우는 양주지역의 고구려대 지명인 매성현 중 \"매성\"이 \"모수\"와 발음이 유사함을 들어 모수국으로 비정하였다.\n\n## 삼국 시대\n286년에 구리시는 백제의 영토로, 고구려와의 최전선 국경 지역이자 수도의 방위를 위해 아차산성을 축조하였다.\n\n또한 475년 이전에 구리 및 광진구 등 아차성 부근은 이미 백제의 땅이 되었으며 475년에 장수왕에 의해 구리시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n\n이후 평원왕 승하년인 590년에 아차산성 부근에 신라군이 주둔하였음을\n\n이후 경덕왕은 재위 16년에 고구려의 골의노현을 황양현으로 개명하였다.\n\n## 고려\n삼국사기 궁예전에 처음으로 양주와 견주의 기록 이후 고려의 사료에서 구리 지역에 대한 기록이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n\n## 조선\n임진왜란 당시에는 고언백이 동구릉이 위치한 검암산에 2개 보루를 설치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n\n규장각 출판의 호구총수에서는 18세기 중반 양주목 소속의 34개 면과 140개 리를 볼 수 있는데, 이때 구지면에 일패리, 창리, 이·삼·사패리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를 통해 당시 구지면에 488호 1,558구가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n\n승정원일기 숙종 28년 1월 11일 기록에서는 희빈 장씨의 묘소를 정하기 위한 계에서 인장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같은 장소가 숙종 26년 이전에는 인장리로, 영조대의 기록에도 인장리계로 묘사되었다. 순조 11년 5월 9일 기록에서는 망우현을 지나 인장리를 거쳐 동창에 이른다는 표현이 나타난다.\n\n고종 3년 9월 4일 기록에서는 동창리와 사노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지역이 고종 36년 4월 7일 기록에서는 사노리로 표기된다. 고종 11년 2월 11일 기록에서 구지면에 세교리의 존재를 볼 수 있고, 13년 5월 6일 기록에서는 대교리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1871년 간행된 경기읍지의 지도에서 구지면의 표기를 처음 확인할 수 있고, 고종 28년 5월 8일 승정원일기에서 역시 구지면의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구지였던 지명이 최소 1871년부터 구지와 혼용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n\n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에서는 벌리와 토막리의 존재가 나타난다. 이 벌리를 벌판의 가차로 해석하여 평촌리의 기원으로 본다. 1908년 1월 29일에 김규식이 이끄는 13도 연합의병진이 일본군과 전투한 기록에서 수택리를 확인할 수 있다.\n\n## 일제강점기\n\n\n\n\n\n\n\n\n\n\n\n\n\n\n\n\n\n조선총독부는 조선에 작은 마을이 불필요하게 많으며, 도시와 농촌을 행정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이유에서 1914년에 부군면 통폐합을 실시한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n\n따라서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하나로 합쳐졌는데, 이 둘은 아차산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뉘어 지리적으로 단절된 형상을 띠었다. 구리면 신설 당시 면사무소는 과거 구지면사무소가 있던 사노동으로 비정되었었는데, 이후 실제 면 폐합을 거친 후에는 경춘로의 신설에 따라 인창리에 면사무소가 세워진다. 당시의 면사무소는 해방 이후에 개축되어 계속 사용되다가 6.25전쟁으로 파괴되고, 1955년에 다시 지어진다.\n\n### 3·1 운동\n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구리면에서도 일제에 대항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미 3월 12일에는 뚝섬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n\n이후 3월 23일에는 청량리, 용두리, 안암리에서 약 400명이 만세 운동을 벌인다.\n\n만세 운동은 3월 30일에 망우리에서 100명이 모인 뒤로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n\n## 현대\n구리면은 해방 이후에도 일제 시대에 결정된 행정구역을 그대로 따랐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구리면 지역도 전쟁의 포화를 겪게 된다. 구리는 제1차 서울 전투 즈음하여 점령되고, 구리시 남성들은 양서면과 조안면을 이어주는 양수리다리와 퇴계원의 다리 복구 작업에 징발되고, 여성들은 식사를 제공하는 데 동원되었다.\n\n1950년 9월 15일의 인천 상륙 작전에 이어 한미 연합군은 25일에 한강을 따라 마포, 한남동을 재점령, 살곶이다리와 한양대학교 부지까지 진격한다. 다음날인 26일에는 아차산맥을 따라 육군 제17연대 1, 3대대가 북진하여 당일 용마봉까지 점령, 망우리고개를 장악하고 경춘가도를 차단한다.\n\n또 전쟁으로 인해 당시 구리면사무소가 파괴된다. 이에 따라 구리시는 임시로 아차산 영서 망우리에 있는 개인주택에서 행정 업무를 이어갔으나, 이에 대해 영서와 영동지역 주민들의 갈등이 발생한다. 이에 영동에서는 파괴된 구 면사무소를 수리하고, 영서에서도 새로 면사무소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결국 1955년 8월 10일에 영동의 기존 구리면사무소를 수리하고 영서의 신축 면사무소는 출장소의 입지를 인정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n\n이처럼 아차산을 중심으로 그 서편과 동편은 지리적 단절이 존재했는데, 1963년에 서편의 상봉, 망우, 신내 등 지역이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현재의 중랑구를 이룬다. 이어 1973년에는 양주군 **구리읍**으로 승격하고, 시 승격 이후 시청사는 기존의 읍사무소 뒤에 가건물을 지어 운영하다가,\n\n시 승격과 그린벨트 해제에 따른 택지 개발로 인해 인구도 꾸준히 증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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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8정도가 뭐야?" }
{ "from": "gpt", "value": "**8정도**, **8성도** 또는 **8지성도**는 사성제 가운데 마지막의 도제에서 가르치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원인이 되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 수단 또는 실천 덕목\"이다. 7과 37도품의 마지막 그룹인 제7과의 수행법이다. 8정도의 반대를 8사 또는 8사행이라 한다. 8정도를 청정한 수행 또는 실천이라는 뜻에서 **범행**이라고도 한다. 8정도를 구하는 것을 범행구라고 한다.\n\n팔리어에서 길은 막고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덟 개의 길이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길은 나머지 일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덟 개의 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일곱 개의 길이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는, 서로 포섭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팔정도의 영어 번역어도 '\n\n팔정도의 여덟 구성요소 또는 여덟 개의 길은 다음과 같다." }
{ "from": "user", "value": "팔정도는?" }
{ "from": "gpt", "value": "8정도는 고집멸도의 4성제 중 마지막 도제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설명된 것이다. 고집멸도의 4성제는 집과 고라는 연기하는 항목과 도와 멸이라는 연기하는 항목을 합하여 구성되어 있다.\n\n상좌부 불교에서는 8정도가 순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 즉 열반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구성요소들을 나열한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실천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8정도를 크게 계정혜의 3학으로 분류하여 보는데, 정견정사유가 혜에 속하며, 정어정업정명이 계에 속하며, 정정진정념정정이 정에 속한 것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계정혜는 서로를 도와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지만, 크게 보아 계에 의지하여 정을 득하고, 정에 의지하여 혜를 득한다고 본다.\n\n8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n\n## 정견\n**정견**은 **바른 견해**라는 뜻이며, 엄밀한 뜻으로는, 인과의 도리,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뜻한다. 이러한 뜻의 정견은 8사행 가운데 사견의 반대이며, 또한 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계금취의 5견 가운데 사견의 반대이며, 10악 가운데 사견의 반대이다. 이 경우, 정견은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12연기4성제3학6바라밀로 대표되는 인과의 법칙 즉 연기법이라는 이치 또는 진리를 체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모든 선법을 세간법과 출세간법으로 나눌 때, 12연기4성제3학6바라밀은 출세간법에 속한다. 즉 무루의 선법, 달리 말하면, 성인의 선법 즉 성인이 수행하는 선법 또는 완전한 성인 즉 부처가 되게 하는 선법에 속한다.\n\n정견은, 보다 넓은 뜻으로는, 5견을 멀리 떠난 상태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불교에서 인정하는 바른 세계관 또는 인생관 모두를 가리킨다. 즉 정견은 4성제와 연기법을 비롯한 모든 불교의 진리들에 대한 유루무루의 지혜들을 통칭한다. 이 경우의 정견은 부정견 또는 악견의 반대이다. 이 경우, 정견은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갖가지 부정견을 약화시키거나 멀리 떠난 상태를 득하는 것을 의미한다.\n\n대비바사론구사론 등에 따르면 이 후자의 보다 넓은 뜻으로서의 정견은 크게 **유루정견**과 **무루정견**으로 나뉜다.\n**유루정견**은 **세간정견** 또는 **세속정견**이라고도 하는데, 유루의 정견으로 유루혜에 속하며 다시 문혜사혜수혜의 3혜 또는 3혜에 생득혜를 더한 4혜로 나뉜다. 이들 유루혜는 범부의 지혜이며, 부정견 등의 번뇌를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번뇌를 끊지는 못하는 지혜이다.\n**무루정견**은 **출세간정견**이라고도 하며 유학정견무학정견으로 나뉘는데, 무루의 정견으로 무루혜에 속한다. 무루혜는 성인의 지혜이며, 부정견 등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 지혜이다. 계율을 바탕으로 하여 유루혜 즉 문혜사혜수혜의 3혜를 닦는 것은 무루혜를 증득하는 길이 되며, 따라서 범부가 닦아야 할 바이다.\n\n## 정사유\n**정사유** 또는 **정사**는 올바른 사고방식 또는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리킨다. 즉, 항상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바르게 사유하고 나 자신의 본분은 무엇인가, 나 자신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n\n## 정어\n**정어**는 올바른 언어적 행위를 가리킨다. 올바른 견해나 올바른 사고방식에 입각한 말은 올바른 말이 되며, 구체적으로는 행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거짓말, 욕설, 중상, 쓸데없는 말의 4가지를 행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으며, 행해야 할 것으로는 성실하고 정다운 말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들 수 있다.\n\n## 정업\n**정업**은 올바른 행위를 가리킨다. 신구의의 3업을 바르게 하여, 사성제연기의 법칙인과의 법칙 등의 이치와 진리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n\n## 정명\n**정명**은 올바른 생계수단을 가리킨다. 재가자는 살생, 인신 매매, 마약거래, 술,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고, \n\n출가자는 점을 치거나 관상, 천문, 풍수에 의존하여 생활하지 않는 것이 바른 생계수단이다.\n\n## 정정진\n**정정진** 또는 **정근**은 올바른 노력 또는 올바른 용기를 가리킨다. 용기와 노력을 가지고 길을 나아감으로써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n\n## 정념\n**정념** 즉 **바른 기억**은 세심한 염(念, ,\n\n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무착의 대승아비달마집론, 세친의 대승오온론, 호법 등의 성유식론 등에 따르면 정념의 반대는 망념이 아닌, 실념(,\n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이를 ‘忘念’이라는 술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번뇌와 상응하는 생각을 體로 하고, 어지러움에 의지가 되어주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n ‘失念’의 性用은 모든 所緣境에 대하여 기억하지 못하는 작용을 말하고, 그 業用은 正念을 장애하여 散亂을 일어나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즉, 失念은 기억력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집중력을 방해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n 大乘阿毘達磨集論 1.\n“何等忘念。謂諸煩惱相應念為體。散亂所依為業。”\"}}치 심소를 가리킨다.\"}}\n\n정념은 서양에서 마음챙김이란 명상법으로 유명하다.\n\n## 정정\n**정정**은 올바른 선정을 가리킨다. 선정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해짐에 따라 이에 의해 사물을 정확하게 보는 정견, 즉 올바른 견해 또는 지혜가 발현되며 이에 따라 정업정명 등의 올바른 행동과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괴로움공무아 등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것이다.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문다는 것은 여기에 오로지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지혜가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마음이 정에 있기 때문에 여실하게 요별하여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