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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8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7번째(윤년일 경우 228번째) 날이다.
398
19860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98
8월 16일
8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8번째(윤년일 경우 229번째) 날에 해당한다.
399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99
칸토어 집합
수학에서 칸토어 집합()은 0과 1 사이의 실수로 이루어진 집합으로, formula_1부터 시작하여 각 구간을 3등분하여 가운데 구간을 반복적으로 제외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정의. 칸토어 집합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진다. 또는, 앞 단계의 구간을 formula_9크기로 줄인 다음 두 개를 배치하는 방식으로도 같은 집합을 얻을 수 있다. 즉, 이 된다. 성질. 크기. 칸토어 집합에 포함되는 수는 삼진법 소수로 표기했을 때 모든 자릿수가 0 또는 2가 된다. 이것은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각 단계마다 자릿수에 1이 있는 수를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 번째 단계에는 formula_11가 빠지고, 두 번째 단계에는 formula_12과 formula_13가 빠지는 과정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또한 이것을 이용해 칸토어 집합의 수를 0과 1 사이의 모든 실수와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는데, 3진수 각 자릿수의 2를 2진수에서의 1로 대응한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칸토어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며, 크기가 formula_15이다. 측도 및 위상수학적 성질.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단계에서 빠지는 구간의 길이는 formula_16이 된다. 이 길이를 모두 합하면 이 된다. 즉, 칸토어 집합은 르베그 측도가 0이다. 또한, 칸토어 집합은 조밀한 곳이 없는 집합이며, 완전 집합이다. 칸토어 집합은 가산 무한 개의 두 원소 이산 공간의 곱공간과 위상동형이다. 프랙털 성질. 칸토어 집합은 자기닮음 성질을 가지고 있는 프랙털이다. 칸토어 집합을 ⅓ 크기로 줄이면 원래 칸토어 집합의 왼쪽 부분과 같다. 따라서 칸토어 집합의 하우스도르프 차원은 이다.
400
10476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00
만델브로트 집합
402
36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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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
수학에서 구간(區間, )은 원순서 집합의 주어진 두 원소 사이의 모든 원소들의 집합이다. 특히, 표준적인 전순서를 부여한 실수의 집합 위의 구간을 생각할 수 있다. 정의. 원순서 집합 formula_1이 주어졌다고 하자. 두 원소 formula_2에 대하여 formula_3를 formula_4 위의 열린구간(-區間, ) 또는 개구간(開區間)은 다음과 같은 꼴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formula_2). 마찬가지로, formula_8 위의 닫힌구간() 또는 폐구간(閉區間) formula_9은 다음과 같은 꼴의 집합이다 (formula_2). 마찬가지로, formula_8 위의 반열린구간(半-區間, ) 또는 반닫힌구간(半-區間, ) 또는 반개구간(半開區間) 또는 반폐구간(半閉區間)은 다음과 같은 꼴들의 집합이다 (formula_2). 표준적인 전순서를 갖춘 실수 formula_17 위의 구간은 가장 흔히 사용되는 구간이다. 이 경우 공집합과 한원소 집합을 제외한 구간, 다시 말해 끝점이 <math>-\infty\le a를 만족하는 경우만을 구간으로 삼기도 한다. 성질. 임의의 원순서 집합 formula_1에 대하여, formula_19와 formula_20 꼴의 구간들의 집합을 부분 기저로 하여 생성된 위상을 순서 위상이라고 한다. 임의의 원순서 집합 formula_1 및 formula_22에 대하여, formula_23의 상폐포·하폐포는 각각 formula_24와 formula_25이다. 실수 구간. (공집합이나 한원소 집합이 아닌) 실수 구간의 크기는 실수의 집합과 같은 formula_26이다. 실수선 formula_27의 부분 집합 formula_28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실수 구간 formula_28의 양 끝점이 formula_37라고 하자. 그렇다면 구간 formula_29의 길이()는 다음과 같다. 특히, 공집합이나 한원소 집합의 길이는 0이다. 구간의 길이는 formula_27 위의 보렐 측도로 유일하게 확장할 수 있으며, 이를 (보렐 집합에 국한된) formula_27 위의 르베그 측도라고 한다. 가산 개의 실수 구간들의 집합 formula_42 (formula_43) 및 실수 구간 formula_28이 주어졌을 때, 만약 formula_45가 formula_29의 덮개를 이룬다면, 이다. 우선, formula_48가 닫힌구간이며, formula_45가 열린구간들의 집합인 경우를 생각하자. 라고 하자. 만약 formula_51라면, formula_52이므로, formula_53인 formula_54가 존재하며, formula_55가 되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formula_56이며, 인 formula_59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다. 이제 일반적인 경우를 증명하자. 임의의 양의 실수 formula_61에 대하여, formula_62인 부분 닫힌구간 formula_63을 취하고, 각 formula_64에 대하여 formula_65인 열린구간 formula_66을 취하자. 그렇다면 formula_67는 formula_68의 덮개를 이루므로, 이다. 이에 formula_70을 취하면 를 얻는다.
403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03
부등식
수학에서 부등식(不等式, , )은 두 수 및 두 식에 대한 크기 비교를 나타내는 식이다. 부등식은 두 개의 수 및 두 개의 식 사이의 부등호(不等號, )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a" > "b"는 "a"가 "b"보다 크다는 뜻이다. 반대로, "a" < "b""는 "a"가 "b"보다 작다는 뜻이다. "≥"와 "≤"는 두 수가 같은 경우를 포함하는 부등호이다. 또한, ""a" > "b" > "c""는 "a" > "b"이며 "b" > "c"인 것을 줄여 쓴 것이며, 물론 이 경우 "a" > "c"이기도 하다. "부등식"은 한자나 영어나 문자 겉으로는 "같지 않음"을 뜻한다. 정의. 실수 집합 formula_1에서, 두 실수 formula_2에 대한 부등식은 다음과 같다. 절대 · 조건 부등식. 절대 부등식(絶對不等式)은 모든 변수의 값에 대하여 항상 성립하는, 변수 있는 부등식을 말한다. 반면, 조건 부등식(條件不等式)은 특정한 범위의 변수의 값아래에서만 성립하는, 변수 있는 부등식이다. 어떤 부등식이 절대 부등식인 것을 보이는 과정을 그 부등식에 대한 증명이라고 한다. 어떤 부등식이 성립할 조건을 구하는 과정을 그 부등식에 대한 풀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실수 부등식 이 성립할 필요 충분 조건은 이므로, 이는 조건 부등식이다. 실수 부등식 가 성립할 필요 충분 조건은 이므로, 이는 절대 부등식이다. 역사. 토마스 해리엇()이 기호 ‘>’ 및 ‘<’를 도입하였다.
405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05
8월 13일
8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5번째(윤년일 경우 226번째) 날에 해당한다.
406
3301118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06
마거릿 미첼
마거릿 머널린 미첼(, 1900년 11월 8일 ~ 1949년 8월 16일)은 1936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이다. 그녀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애틀랜타에서 보내며 남부의 역사와 남북 전쟁 시기의 일화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독서광이었던 그녀는 애틀랜타 워싱턴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북부에 있는 명문 여자 대학인 스미스 대학교(Smith College)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한다. 그곳에서 '헨리'라는 육군 장교와 연애를 하기도 하지만 헨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사망하고, 이후 스페인 독감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1918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고향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이 과정은 이후 그녀의 소설에 큰 영향을 준다) 그 후 애틀랜타의 언론사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던 중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남북 전쟁을 바탕으로 한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듣던 전쟁 시기의 일화와 치밀하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10년 간 집필하여 1936년 출판된 이 장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몰며 빠른 시간내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듬해 1937년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3년 뒤인 1939년 비비언 리 주연의 영화로 출시되게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미첼은 소설가로서 이 한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며, 1949년 8월 11일 저녁, 남편 존 마쉬(John Marsh)와 함께 영화 를 보러가는 도중에 애틀란타 13번가의 피치트리 거리(Peachtree Street)를 건너다가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에 치었다.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5일 후 그래디 병원(Grady Hospital)에서 48세로 사망했다. 애틀랜타의 에 묻혔다.
408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08
5월
5월(五月, Ma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5월이 가정의 달이다. 이 달과 다음 해의 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57번,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음력 3월과 음력 4월이 이 달에 있으며 5월에는 음력 3월 15~16일, 4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끼는 경우는 윤3월 혹은 윤4월인데 소만 이전은 윤3월, 소만 이후는 윤4월이다. 5월과 스포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등의 리그는 5월이 시즌 초에 해당한다.
411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11
음수
음수(陰數)는 -1, -2, - formula_1, -1.414처럼 음의 부호(-)를 붙인 수로 0보다 작은 실수다. 음수는 플러스 부호를 붙이는 양수와 반대로 마이너스 부호를 붙여 나타내므로 양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음수는 기상청에서 온도를 나타낼 때, 영상과 반대되는 개념인 영하를 나타낼 때 쓰이고, 고대 중국에서는 수입과 반대되는 개념 빚을 나타낼 때 쓰였으며, 산의 높이를 측정하는 해발과 반대되는 개념인 해저를 나타낼 때 쓰이는 등 음수는 현대에 이르러 수와 관련된 많은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역사.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인도인인 623년경의 브라마굽타로, 단순히 음수에 대한 사칙연산만을 기술하였다. 1650년대 이후로 음수가 자유로이 사용되었지만 그 개념이나 논리적 기초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정당성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그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1657년 존 허드(John Hudde, 1633년~1704년)가 음수와 양수 모두를 표시하는 문자를 사용한 이후부터 수학자들은 자유로이 그런 방식을 따랐다. 음수를 포함한 연산. 더하기. 두 음수의 더하기는 두 양수의 더하기와 매우 유사하다. 양수와 음수를 혼합하여 더할 때에는 음수를 차감되는 양의 값으로 생각할 수 있다. 빼기. 음수가 아닌 두 수의 빼기로 음수를 산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양수의 빼기는 같은 절대값의 음수의 더하기와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그리고 반면, 음수의 빼기는 같은 절대값의 양수의 더하기와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그리고 곱하기. 두 음수의 곱이 양수여야 한다는 관습은 곱셈이 분배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러한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이기 때문에, 곱셈 는 이어야 한다. 나누기. 음수가 포함된 나누기 또는 분수의 경우 따라서
412
59583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12
이디 아민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1923년 혹은 1925년 혹은 1928년 ~ 2003년 8월 16일)은 우간다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71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집권 하기 전. 우간다 북서부의 서나일 아루아의 소부족 카크와 출신. 이슬람교도이자 농부인 아버지와 주술을 통해 사람들을 치료하는 루그바라 부족 주술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공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문맹이었던 이디 아민은 193cm의 거구였으며, 권투 챔피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디 아민은 버마 전투에 참가하고, 1946년 영국 식민지 군에 입대하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대장으로 영국군으로 마우-마우 저항진압에 가담했다. 1961년 아민은 우간다 최초의 유색 장교가 되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하고, 1964년 대령이 된 이디 아민은 1966년 밀턴 오보테와 함께 대통령 무테사 2세를 제거하는데 동참한다. 1967년에는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가 콩고 반란군 원조 문제에 연루되어 좌천당했다. 쿠테타와 집권. 1971년 1월 25일 밀턴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무혈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서구 국가들에게 이 쿠테타는 안도를 주었으며,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오보테를 지지했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살해당했다. 그가 권력에 있던 8년간, 1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랍권의 국가들과 경제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1972년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시아인들을 내쫓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을 국영화하였는데, 그로 인해 우간다는 중산층과 상류층을 잃게 되었다. 1971년에 대통령과 군사령관, 1975년에는 육군원수, OAU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대통령으로 선언했다. 몰락. 1978년 군 내부의 반역음모를 무마하기 위해,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수많은 반 아민 단체와 반군들이 탄자니아군과 연합해 1979년 4월 11일 반격으로 수도 캄팔라가 탄자니아군과 망명 우간다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아민은 우선 리비아로 도망치고 나중엔 이라크로 향했다가 결국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다에 그가 살 빌라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생을 마쳤다.
414
11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14
페르마
415
71266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15
일본 문학
일본 문학(日本文學, )은 일본어로 적힌 문학 작품, 또는 그러한 작품이나 작가를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일본문학의 정의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서, 언어, 발표된 지역, 문학의 형식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고려된다(최근에는 외국 국적의 작가가 일본어 작품을 쓰는 사례와 같이, 국적이나 거주지가 언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어문학이라는 호칭이 사용되는 일도 있다). 시대구분에 의한 분류. 역사학과 같이 정권의 이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언제나 합당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대(上代)・중고(中古)・중세(中世)・근세(近世)・근현대(近現代)와 같은 구분에는 연구자에 따라 다른 의견도 있어서, 중고를 설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근대와 현대의 구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정해져 있지 않다. 마루야 사이이치는 《칙찬집》에 따라 일본문학사의 역사구분을 할 것을 제안했다. 상대문학. 약 나라 시대까지. 상대문학을 전기·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신화·전설·가요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문자가 없었던 시대이므로 입으로 전달되는 구송문학(口誦文學)이 발달하여 왔다. 그러다 후기에 들어와 문학 의식이 차츰 높아짐에 따라 여러 가지 장르로 나뉘어 발달하여 원시인의 소박한 모습으로부터 차츰 높은 문예적 성격을 나타내게 됨에 따라 한자 및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기재 문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를 경유하여 한자가 유입되어, 한문과, 자신들의 말에 한자를 끼워맞춘 만요가나가 사용되었다. 이 무렵 신화·전설·가요를 집대성하여 《고지키》(712년) 《니혼쇼키》(720년)와 같은 역사서가 성립되었는데 특히 와카만을 모아 엮은《만요슈》가 나와 순문학을 수립했다. 중고문학. 약 헤이안 시대에 해당한다. 한시・한문이 계속해서 번영을 누림과 함께, 첫 칙찬와카집인 고킨와카슈가 편찬되고, 와카가 한시와 대등한 위치를 점했다. 당시의 공식문서는 한자로 쓰여져 있었으나, 히라가나로 된 순수한 일본어에 의한 표현이 성행하기 시작하여, 기노 쓰라유키의 《도사 닛키》가 쓰여짐에 이어, 세이 쇼나곤의 수필 《마쿠라노소시》,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모노가타리》 등 고전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 나타나 일본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의 특징은 주관적이고 우미적 정취(優美的情趣)에 중심을 두었다는 데 있다. 또한 고유의 문자인 가나(假名)가 발달하여 특히 여성 작가에 의해 아름답고 고운 문학작품이 만들어졌다. 중세문학. 약 가마쿠라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헤이안 시대 문학의 영향으로 소설·수필 등이 성행하였고 무사계급의 전란을 반영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호겐모노가타리》(保元物語) 등의 군담소설과 《호조키》(方戈記) 같은 수필문학이 나왔다. 무사들간의 전란이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에 승려와 일부 은둔자들에 의해 씌어진 작품이 많아 불교사상과 염세적 사상이 깃들여 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등에 의한 화려한 기교에 특징이 있는 《신고킨와카슈》가 편찬되었다. 또한 현대일본어의 직계 선조라 할 수 있는 와칸콘코분을 사용한 많은 작품이 나타났다. 가모노 조메이의 《호죠키》, 요시다 겐코의 《츠레즈레구사》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자 미상의 것으로 《헤이케 모노가타리》를 들 수 있다. 또한 사루가쿠의 발달이 눈에 띈다. 근세문학. 약 에도 시대의 문학. 오토기조시의 흐름을 따라 가나조시나 이하라 사이카쿠 등의 우키요조시가 나타났다. 또한 이제까지의 문학이 주로 귀족·승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이 시대의 문학은 신흥 서민계급이 주체가 되었다. 이들은 낙천적 생활을 즐겼으므로 오락적인 문학이 발달하여 새로운 문학의 장르가 나타났다. 이 때 당시 가부키나 조루리가 흥하여 인기몰이를 했다. 하이카이가 유행하여 마쓰오 바쇼, 고바야시 잇사 등의 인물들이 활약했다. 근현대문학. 메이지 시대 이후. 개국과 함께 서양의 문명이 흘러들어와 문명개화가 일어나자 일본 문학도 큰 영향을 받았다. 서양 근대소설의 이념이 유입되어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 신수》,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소설 총론》《우키구모》 등에 의한 실질적 근대 일본문학이 출발했다. 흔히 말하는 '문학'이라는 개념은 이때 생겨났다. 메이지 20년 전후부터 근대문학이 싹트기 시작하여 사실주의에 이어 낭만주의가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자연주의가 들어와 문단의 주류가 되어 시단에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신이상주의문학이 일어났고, 다이쇼 말기로부터 쇼와 10년까지는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적 문학과 사회주의적 문학이 대립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에 협력하는 전쟁문학만이 허용되어 문학은 전쟁 일색으로 변하고 문학정신은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전후의 문학은 전전의 문학을 추구하여 전전(戰前)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의 왜곡된 점을 시정하고 자유정신을 회복하고 새 정치와 문학의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 점은 주로 근대문학에 의하여 비평가들이 정치의 우위성으로부터 문학을 탈환하여 문학의 자율성을 인정하고자 했다. 전전 일본의 지식인들이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저항운동을 조직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거기에 일본인의 근대적 인간의 자아의 미성숙을 인정하려고 새로운 시대의 인간의 밑바닥에 근대적 자아의 확충을 꾀하게 됨과 동시에 전후 세대의 자기 주장과 관련된 문예비평의 전개와 호응하여 소설 분야에서도 전전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문학작품이 등장하였다. 그러한 작품들 속에 담겨진 공통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416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16
거리 공간
수학에서 거리 공간(距離空間, )은 두 점 사이의 거리가 정의된 공간이다. 거리의 정의에 따라 표준적인 위상을 갖는다. 정의. 집합 formula_1 위의 거리 함수(距離函數, )는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마지막 두 공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리로 대체시킬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10로 잡으면 formula_11가 되어, 대칭 공리를 얻는다. 거리 함수의 정의에서, 첫째 조건을 formula_12로 약화시키면 유사 거리 함수의 개념을 얻는다. 거리 공간 formula_13은 거리 함수가 주어진 집합이다. 거리 공간의 특별한 집합. 거리 공간 formula_1에서, 점 formula_15를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formula_16인 열린 공 formula_17는 다음과 같다. 점 formula_15를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formula_16인 닫힌 공 formula_21는 다음과 같다. 거리 공간 formula_1의 유계 집합 formula_24는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이다. 거리 위상. 거리 공간 formula_13의 거리 위상(距離位相, )은 열린 공들을 기저로 하는 위상이다. 즉, 거리 위상에서의 열린집합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 formula_28이다. 거리 위상은 거리 함수 formula_32를 연속 함수로 만드는 가장 엉성한 위상이자, 함수 집합 formula_33의 시작 위상이다. 모든 거리 공간은 거리 위상을 통해 표준적으로 위상 공간을 이룬다. 완비 거리 공간. 모든 코시 수열이 극한을 갖는 거리 공간을 완비 거리 공간이라고 한다. 지름. 거리 공간 formula_13의 지름() formula_35는 그 속의 두 점 사이의 가능한 거리들의 상한이다. 마찬가지로, 거리 공간의 부분 공간은 거리 공간을 이루므로 그 지름을 정의할 수 있다. 지름이 유한한 거리 공간을 유계 공간이라고 한다. 성질. 거리 공간 formula_13의 임의의 부분 집합 formula_38에 대하여, formula_39는 거리 공간을 이룬다. 위상수학적 성질. 모든 거리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거리 공간 formula_13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예. 노름 공간 formula_54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formula_56는 거리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노름 공간 formula_54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formula_59는 거리 공간이다. 이 거리 함수를 우체국 거리()라고 한다. 임의의 연결 리만 다양체 formula_60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formula_62는 거리 공간이다. 임의의 집합 formula_1 및 양의 실수 formula_64에 대하여, 는 초거리 함수를 이룬다. 이를 이산 거리 함수라고 한다. 임의의 연결 그래프 formula_66에 대하여, 두 꼭짓점 사이의 거리를 이 두 점을 잇는 경로들의 길이의 최솟값으로 정의한다면, 이는 꼭짓점들의 집합 위의 거리 함수를 이룬다.
417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17
위상 공간
위상 공간은 다음을 가리킨다.
418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18
위상 공간 (수학)
일반위상수학에서 위상 공간(位相空間, )은 어떤 점의 근처(근방)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점 사이의 거리나 넓이·부피 따위의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를 사용하여, 함수의 연속성이나 수열의 극한, 집합의 연결성 등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위상수학 및 이를 기초로 하는 기하학 · 해석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된다. 위상 공간의 일반적인 성질을 연구하는 분야를 일반위상수학이라고 한다. 정의. 집합 formula_1 위의 위상(位相, )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들은 서로 동치이다. 즉, 근방 · 열린집합 · 닫힌집합 · 폐포 · 내부 가운데 하나를 기본 무정의 개념으로 삼고, 이로부터 나머지 개념들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 formula_65은 위상을 갖춘 집합이다. 위상의 비교. 같은 집합 formula_1 위의 두 위상 formula_67, formula_68에 대하여, 다음 세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만약 이 조건이 성립한다면 formula_67이 formula_68보다 더 섬세하다(-纖細-, )고 하며, 반대로 formula_68가 formula_67보다 더 거칠다()고 한다. 성질. 격자론적 성질. 주어진 위상 공간 formula_65의 열린집합들은 완비 헤이팅 대수를 이룬다. 즉, 위상 공간은 직관 논리의 모형으로 여길 수 있다. 또한, 위상 공간은 양상 논리 S4의 모형으로 여길 수 있다. 이 경우 양상 기호 formula_87(필연 기호)는 집합의 내부에, 양상 기호 formula_88(개연 기호)는 집합의 폐포에 대응한다. 주어진 집합 formula_1 위의 위상들은 섬세성 관계에 따라서 완비 유계 격자를 이룬다. 이 격자의 최대 원소(즉, 가장 섬세한 위상)는 이산 위상이며, 최소 원소(즉, 가장 거친 위상)는 비이산 위상이다. 주어진 집합 formula_1 위의 위상들의 족 formula_91의 하한(만남)은 이다. 주어진 집합 formula_1 위의 위상들의 족 formula_91의 상한(이음)은 formula_95를 기저로 하는 위상이다. 범주론적 성질. 위상 공간과 연속 함수들은 범주를 이루며, 이 범주를 formula_96이라고 한다. 이 경우, 망각 함자 를 통해, formula_96은 구체적 범주를 이룬다. 이 망각 함자는 좌 · 우 수반 함자를 갖는다. 여기서 은 집합을 이산 공간으로 대응시키고, 는 집합을 비이산 공간으로 대응시킨다. formula_96은 완비 범주이며 쌍대 완비 범주이다. 즉, 모든 작은 (= 고유 모임 크기가 아닌) 극한과 쌍대극한이 존재한다. 시작 대상은 (유일한 위상을 갖춘) 공집합 formula_106이며, 끝 대상은 한원소 공간 formula_107이다. 예. 유한 집합 위의 위상의 경우, 열린집합들을 그대로 나열할 수 있다. 예들 들어, 집합 "X" = {1,2,3} 위에서, 다음은 위상을 이룬다. 그러나 다음은 위상을 이루지 않는다. 좀 더 복잡한 위상 공간의 경우, 다양한 구조로서 위상들을 정의할 수 있다. 관련 개념. 특별한 위상 공간. 위상 공간의 개념은 매우 일반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들을 고려한다.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추가 구조. 위상 공간은 근방의 개념 밖에는 다른 정보를 추가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하여 여러 다른 정보를 추가하여, 다음과 같은 구조들을 정의할 수 있다. 일반화. 위상 공간의 개념은 매우 일반적인 개념이지만, 대수기하학에서는 이보다 더 일반적인 개념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 경우, 열린집합들의 포함 관계에 대한 부분 순서 집합을 범주로 추상화하여, 덮개의 개념을 공리화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범주 위의 그로텐디크 위상의 개념을 얻는다. 또한, 이를 한 단계 더 추상화하여, 공간의 열린집합들 대신 공간 위의 모든 층들의 범주의 성질을 공리화하면 토포스의 개념을 얻는다. 범주론 대신, 위상 공간의 열린집합들의 격자론적 성질(완비 헤이팅 대수)을 공리화하면 장소()라는 개념을 얻는다. 역사. 1910년대 이전까지는 위상 공간의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열린집합은 거리 공간에 대해서만 정의되었다. 1908년에 리스 프리제시는 거리 함수를 사용하지 않고, 수열의 극한을 사용하여 위상 공간의 개념을 공리화하였고, 1914년에 펠릭스 하우스도르프는 근방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를 재정의하였다. 하우스도르프의 정의에는 오늘날 하우스도르프 공간의 정의에 들어가는 조건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이후 정의에서 제거되었다.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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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공유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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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P
P2P(peer-to-peer network) 혹은 동등 계층간 통신망(同等階層間通信網)은 비교적 소수의 서버에 집중하기보다는 망구성에 참여하는 기계들의 계산과 대역폭 성능에 의존하여 구성되는 통신망이다. P2P 통신망은 일반적으로 노드들을 규모가 큰 애드혹으로 서로 연결하는 경우 이용된다. 이런 통신망은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는데, 오디오나 비디오, 데이터 등 임의의 디지털 형식 파일의 공유는 매우 보편적이다. 또한, 인터넷 전화(VoIP)같은 실시간 데이터 등도 P2P 기술을 통해 서로 전달될 수 있다. 순수 P2P 파일 전송 네트워크는 클라이언트나 서버란 개념 없이, 오로지 동등한 계층 노드들(peer nodes)이 서로 클라이언트와 서버 역할을 동시에 네트워크 위에서 하게 된다. 이 네트워크 구성 모델은 보통 중앙 서버를 통하는 통신 형태의 클라이언트-서버 모델과는 구별된다. FTP 서버야 말로 P2P 파일 전송 형식이 아닌, 대표적 반례로 꼽을 수 있다. 어떤 사용자가 FTP 서버에 어떤 파일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내려 받는데, 올리는 쪽과 내려받는 쪽 모두 동시에 접속하지 않아도 된다. 냅스터, 오픈냅, IRC @find) 등과 같은 네트워크와 채널은 클라이언트-서버 구조를 검색 등과 같은 일부 기능에 쓰고, 다른 기능은 P2P 구조를 쓴다. 누텔라나 프리넷 같은 네트워크는 모든 기능에 P2P 구조를 가지는데, 비록 그 네트워크가 다른 같은 계층의 사용자들(peers)의 네트워크 주소를 알려 주는 데 디렉터리(directory) 서버에 크게 의존하긴 하지만, 때때로 진정한 P2P 네트워크으로 인용된다. P2P 네트워크 구조는 최근에 인터넷 상에서 멀티미디어 파일을 공유하는 용도로 많이 부각되긴 했지만, 1969년 4월 7일에 제정된 RFC(Request for Comments)란 인터넷 규약의 초기 버전부터 핵심적인 기술로 내제되어 있어 유래가 깊다. 최근의 P2P 서비스는 순수 파일 전송 네트워크에서 발달하여 그리드 컴퓨팅 기술로 진화해 웹하드 형태로 서비스되고 있다. 외부적으로 웹하드 형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 유저들의 저장장치에 화일이 직접 전송되어 순수 초기 P2P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유저들의 시스템에 부하를 유발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웹하드 형태의 그리드 컴퓨팅 P2P 서비스로는 피디박스, 화일아이, 아이팝 등이 있다. 리소스 기반의 어드레싱. P2P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리소스 (저장 공간, 씨피유 파워, 콘텐츠, 그리고 연결된 컴퓨터를 쓰고 있는 사람 그 자체)를 이용하는 일종의 응용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들은 고정된 ip 주소도 없고, 연결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불안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분산된 리소스이다. 따라서 P2P 노드는 종래의 DNS '바깥에서' 운용될 수밖에 없으며 강력한 중앙의 서버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P2P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P2P 디자이너들은 그런 특징을 활용해서 CPU 싸이클들을 모을 수 있는 방법, 파일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 채팅하는 방법 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느냐이다. 냅스터나 ICQ, Popular Power, Freenet 등은 모두 기존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던 리소스를 발굴해서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러한 서비스는 다양한 형태로 인터넷에 물려 있는 수천, 수만가지의 장치들을 잘 조합하고 연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혹자는 P2P 디자이너들이 해결하는 이러한 '연결 문제'(connectivity problem)가 단지 하나의 해프닝적인 것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방법을 개선하겠다'는 모토가 그 유명한 IP 주소나 DNS, 또는 그전의 TCP, 심지어는 인터넷 그 자체를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 인터넷은 결국 위에서 말한 기술이 탄생한 순간 순간이 모여서 이뤄진 것이다. DNS를 우회하는 P2P. 1996년 나온 ICQ는 항상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서버와는 다른, 접속하다 끊을 수도 있는 개인용 컴퓨터들끼리 서로 접속할 수 있는 길을 처음으로 터 주었다. 모든 것이 점차 휴대화되어 가는 추세를 맞아, ICQ는 DNS를 우회해서 저만의 독자적인 프로토콜 주소 디렉터리(protocol-specific address directory)를 창조해 냈던 것이다. 이를 통해 IP 주소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될 수 있었다. Groove, Napster, Netmeeting 등이 ICQ를 따라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물론 모든 P2P 시스템이 이 트릭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누텔라 (Gnutella) 나 Freenet의 경우, DNS를 우회하는 것은 이전 방식과 똑같지만 숫자로 표시되는 IP 주소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Popular Power와 SETI@Home은 각 노드가 고정된 주소에 접속할 수 있는 스케줄을 제공해서, 접속 당시의 IP 주소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Whois에 따르면 IP 주소가 처음 뿌리를 내린 1984년 이후 16년 동안 2천3백만 개의 도메인 이름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냅스터는 혼자서 16개월 만에 2천 3백만 개의 비 DNS 주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만약 사용자가 모든 비 DNS 인스턴트 메시징 주소에 가입한다고 하면 동적인 IP 주소에 접근할 수 있는 P2P 주소의 개수는 모두 2억 개를 넘어선다. 평균 DNS 호스트가 10개의 second.first.com 같은 형태의 2차 주소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아도, 현재의 P2P 주소의 모든 개수는 불과 4년 뒤엔 DNS 주소의 모든 개수와 같아지게 될 것이며, 오늘날의 DNS 세계보다 훨씬 더 광대한 세계로 성장해 가게 된다는 셈이 된다. 무선 PDA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인터넷 접속 장치나 TiVo, Replay 같은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가 보급됨에 따라 이들 역시 인터넷의 중요한 일부가 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현재로는 피씨 그 자체야말로 개척되지 않은 리소스의 절대 다수를 갖고 있다. 피씨는 인터넷의 다크호스이다. 그리고 그 피씨가 갖고 있는 '덜' 사용된 리소스는 P2P 혁명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네트워크, 프로토콜, 응용 프로그램. 알파벳순 표시 - 매우 비슷한 응용 프로그램 예외 P2P 시스템의 이전 세대는 메타컴퓨팅(metacomputing)이라 불리거나 미들웨어(middleware)로 분류됨. Legion, Globus, Condor, ByteTorn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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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메신저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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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공리
집합론에서 선택 공리(選擇公理, , 약자 AC)는 공집합이 아닌 집합에서 한 원소를 고를 수 있으며, 또한 이를 무한 번 반복할 수 있다는 공리이다. 직관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비직관적인 결과를 함의한다. 정의. 집합족 formula_1 위의 선택 함수(選擇函數, )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함수 formula_2이다. 만약 formula_5라면, formula_1는 물론 선택 함수를 가질 수 없다. 선택 공리 formula_7에 의하면,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족은 선택 함수를 갖는다. 약화된 형태. 임의의 기수 formula_8에 대하여, formula_9는 "크기가 formula_8 이하인,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족은 선택 함수를 갖는다"는 명제이다. 특히, formula_11일 때 formula_12를 가산 선택 공리(可算選擇公理, )라고 한다. 임의의 집합 formula_13 및 이항 관계 formula_14가 주어졌고, 또한 이들이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고 하자. 그렇다면, 의존적 선택 공리(依存的選擇公理, ) formula_19에 따르면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열 이 존재한다. 대역적 선택 공리. 집합론의 언어 formula_24에 1항 연산 formula_25를 추가하자. 그렇다면, 이 언어 formula_26에서, 대역적 선택 공리(大域的選擇公理, )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이 경우, formula_25를 선택 연산()이라고 한다. 대역적 선택 공리는 선택 공리를 함의하며, ZF + 대역적 선택 공리는 ZFC의 보존적 확장이다. 성질. 집합족 formula_29가 주어졌으며, 각 formula_30 위에 정렬 순서 formula_31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선택 함수 를 다음과 같이 자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특히, 만약 formula_34 위에 정렬 순서가 주어졌다면, 이는 각 formula_30에 대하여 제한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선택 함수를 정의할 수 있다. 함의 관계.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임의의 자연수 formula_36에 대하여 formula_37을 증명할 수 있다. 즉,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는 유한 개의 선택을 할 수 있지만, 무한 개의 선택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이 무모순적이라면) 불가능하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선택 공리는 의존적 선택 공리를 함의하며, 의존적 선택 공리는 가산 선택 공리를 함의한다. 증명 (formula_40): 집합족 formula_41이 주어졌다고 하자. 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이항 관계 formula_43를 정의한다. 그렇다면, formula_45에 의하여 열 가 존재한다. 따라서 formula_48를 사용하여 를 고른 뒤 이라고 정의하면, formula_51이다. 따라서 formula_52는 가산 무한 집합족 formula_41의 선택 함수이다. 증명 (formula_54): 집합 formula_55 위의 이항 관계 formula_43가 주어졌다고 하고, 또한 가 성립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선택 공리에 의하여 집합족 의 선택 함수 가 존재한다. 임의의 원소 formula_61를 고르고 을 정의하면, 이는 의존적 선택 공리에 등장하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증명 이론적 성질. 만약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ZF)이 일관적이라면, 선택 공리는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독립적이다. 즉, 다음을 보일 수 있다. 모형 이론적 성질. 구성 가능 전체에서는 선택 공리가 성립한다. 즉,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모형 formula_66이 주어졌을 때, formula_66 속의 구성 가능 전체 formula_68은 ZFC의 모형을 이룬다. 반면, 강제법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가 실패하는 모형들을 구성할 수 있다. 선택 공리를 함의하는 명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다음 명제들은 선택 공리를 함의한다. 선택 공리와 동치인 명제. 집합족 formula_70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면, 유한 지표 집합족(有限指標集合族, )이라고 한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을 가정하면, 선택 공리는 수많은 동치 명제들을 가지며, 다음과 같다. 즉, 인 명제 formula_79의 예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선택 공리로부터 함의되는 명제. 만약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이 일관적이라면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으로 다음 정리들을 증명할 수 없지만, 선택 공리를 추가하면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 공리를 의존적 선택 공리(또는 가산 선택 공리)로 약화시킨다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증명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의존적 선택 공리는 르베그 가측 집합이 아닌 실수 집합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가산 선택 공리만으로 대부분의 해석학을 전개할 수 있다. 역사. 공식적인 형식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까지 선택 공리는 암묵적으로 수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집합 formula_55가 공집합이 아닌 집합만을 포함한다고 했을 때, 수학자들은 종종 “모든 formula_55에 포함된 (집합) formula_95에 대해, formula_96를 formula_95의 원소라고 하자” 라고 기술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함수) formula_98 가 선택 공리 없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했고, 그로 인해 체르멜로 이전까지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한편, 모든 함수가 선택 공리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유한 집합 formula_55의 경우, 선택 공리는 다른 집합론의 공리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각각에 적어도 하나의 물건이 담긴 (유한한) 여러 개의 상자들을 상상 해 보자. 이때 우리는 각 상자에서 정확히 하나의 물건을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상자에서 물건 한 개를 선택하고, 두 번째 상자로 옮겨 여기서도 물건 한 개를 선택한다. 그 후 세 번째 상자에서도 물건을 하나 선택하고, 이런 방식을 유한한 횟수로 반복해서, 마지막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 선택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마칠 수 있다. 이 때, 각 상자에서 하나 씩의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보여지는 상자-물건의 관계를 선택 함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공집합이 아닌 집합의 모든 가산 집합족에 대해서도 선택 함수가 존재한다는, 가산 선택 공리를 증명하는 데에는 사용될 수 없다. 같은 방법이 공집합이 아닌 집합들의 무한열에 적용될 경우, 각각의 유한한 단계에서는 함수가 정의되나 전체 집합족에 대한 함수가 정의되는 단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체계 아래서 선택 공리 없이는 어떤 “극한” 선택 함수도 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게오르크 칸토어는 선택 공리와 동치인 정렬 정리가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고 법칙"()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다른 수학자들은 이 "사고 법칙"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1904년에 헝가리의 수학자 쾨니그 줄러()는 정렬 정리를 반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몇 주 뒤 펠릭스 하우스도르프가 이 "반증"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1904년에 에른스트 체르멜로는 정렬 정리를 보다 더 자명한 원리로부터 유도하기 위하여 선택 공리를 도입하였고, 이를 통해 정렬 정리를 증명하였다. 1923년에 다비트 힐베르트는 일종의 선택 연산을 포함한 논리 체계를 제시하였다. 힐베르트는 이 기호를 formula_100이라고 표기하였다. 예를 들어, 술어 formula_101에 대하여 formula_102는 (만약 formula_103라면) formula_104를 만족시키는 집합이다. 이와 유사하게, 니콜라 부르바키는 1954년에 집합론 교재에서 선택 연산 formula_25를 사용하였다. 1924년에 알프레트 타르스키는 타르스키 정리(선택 공리가 모든 무한 집합 formula_55에 대하여 formula_107인 것과 동치)를 프랑스의 한 유명 저널에 출판하려 하였는데, 이때 원고를 심사한 모리스 르네 프레셰는 "자명하게 참인 두 명제의 동치는 출판될 가치가 없다"고 답변하였고, 반면 같은 원고를 심사한 앙리 르베그는 "자명하게 거짓인 두 명제의 동치는 출판될 가치가 없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타르스키는 결국 논문을 타 저널에 출판하였다. 1938년에 쿠르트 괴델은 내부 모형 이론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일관적임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구성 가능 전체 formula_108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모형이며, 이 모형에서는 선택 공리가 성립한다. 폴 코언은 강제법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의 부정이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일관적임을 보였다. 의존적 선택 공리는 1942년에 파울 베르나이스가 도입하였다. 현재까지도, 많은 수학자들은 선택 공리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미국의 수학자 제리 로이드 보나(, 1945~)는 1977년에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농담하였다. 이는 위 세 명제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서로 동치이지만 직관적으로는 그 참·거짓 여부가 모순되게 보인다는 것에 대한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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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불교(佛敎, , )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창시된 인도 계통의 종교이다. 불교는 그가 펼친 가르침이자 또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깨우친 사람)가 될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구체적으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고통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르침의 목적인데 이는 노자가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건 도가 아니라고 한 가르침과 다르다.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눌 수 있다. 오늘날까지 2,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교는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일반적으로 개조(開祖)로서의 부처, 가르침으로서의 법, 그리고 이를 따르는 공동체인 승의 삼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반야 또는 보리와 혼동하는 주장이 있다. 해탈 또는 열반은 위 설명과 같이 벗어나는 것을 뜻하고 반야 등은 지혜를 뜻하므로 이들은 다르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열반에 도달하는 것과 동일하다. 불교경전인 《열반경》에는 이러한 견해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다. 중국의 불교는 후한 때에 전래되어 이후 불교의 경전이 개인 혹은 국가적 사업으로 한문번역되었다. 아함경 뿐만 아니라 반야, 대승경전이 다량 동시대에 번역되어 유통되었다. 한역된 경전을 기본으로 한 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불교(북방불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은 전통적으로 한역된 경전, 즉 대장경을 수지독송해 왔다. 근래에 남방에 전래된 초기의 불교경전의 한글번역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미 영국에서는 약 한 세기 전부터 괄목할 만한 수준의 니카야 번역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불교의 역사. 역사적 관점의 기원. 역사적으로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현 네팔과 인도 북동부 지방에 있던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싯다르타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그의 성장지는 가비라 성(迦毘羅城, Kapilavastu)이었으나 그의 종교 활동인 수도(修道), 정각(正覺), 포교(布敎)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마가다 왕국이 불교 발생의 중심지로 생각된다. 싯다르타는 갠지스 강 주변의 나라였던 슈라바스티(Srāvastī) 왕국의 기원정사와 마가다 왕국의 죽림정사 같은 곳에서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석가모니 생전의 주요 제자로는 사리불, 목건련, 가섭, 아난과 같은 십대제자가 알려져 있다. 싯다르타의 인생과 관련된 주요한 장소는 팔대성지라고 부른다. 불교의 전파. 인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4세기 - 2세기)의 3대 왕이었던 아소카왕은 정복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으나 전쟁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고 불교로 귀의하였다. 이에 의해 인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인도 이외의 지역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간다라를 거쳐 티베트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타클라마칸 지역으로 전파 되었다. 이들 지역은 중국에서 서역이라 불리던 곳으로 대월씨(大月氏)안식(安息)강거(康居) 등의 이 지역 승려들에 의해 불경과 불상이 전래되고 경전이 한역되었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중국 고유의 도교 사상과 많은 융합이 일어났다. 한국과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의 한역 불경이 근간을 이루었으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 역시 지속적으로 전파되었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거쳐 라마교라 불리게 되었으며 몽골에 전파되었고 원나라 시기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나라 멸망 후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쇠퇴하였으나 이후 청나라 시기에 황궁의 종교가 되기도 하였다. 서쪽으로 전파된 불교는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칼미크 공화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기도 한다. 북방 경로를 거쳐 전파된 불교는 북방불교 또는 대승불교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스리랑카태국캄보디아미얀마베트남 지역의 절대다수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부처님 당대의 구어인 빠알리어 경전을 갖춘 상좌부 불교가 있는데, 상좌란 곧 장로라는 뜻이다. 또는, 남방불교라고 부르기도 하며, 원래 명칭 그대로 테라와다 또는 테라바다(Theravada) 불교라고도 부른다. 상좌부 불교 지역에서는 상좌부 불교를 '테라바다'로, 대승불교를 '마하야나'라고 부른다. 불교의 사상. 불교는 교조인 고타마 싯타르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며, 깨달음을 얻어 궁극적으로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도에서 불교는 원시 불교, 부파 불교, 대승 불교, 밀교의 순으로 전개되었는데 불교의 사상도 이러한 전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싯다르타는 당시 인도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던 형이상학적 문제가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답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법(다르마)을 인정하였으나, 그 안에서의 총합적인 나(아트만)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아) 오히려 영원한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가 따른다고 하였다. (일체개고) 싯다르타는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열반(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에는 여러 개의 천국이 있으며, 모두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이다. 좋은 업을 쌓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효도나 인연처럼 사적인 것을 중시하며 속세나 공적인 것에 관심을 덜 갖는다. 업설에서는 백성들이 천하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귀족들의 탓이 아닌 자업자득에 사필귀정이라 주장하기도 해서 귀족들에게 유교보다 환영받기도 했다. 또한 귀족들은 불교를 이용하여 왕즉불 사상과 함께 세계정복에 대한 의지와 정당성을 주장한 불탑 따위를 건설하기도 했다. 국가별 불교의 특징. 20세기에 들어서부터 불교가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지역으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 인도. 인도에는 현재 8,000명 정도의 승려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승려 교육 기관은 없다고 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망명 정부를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세워서, 티베트 승려가 많아짐에 따라 인도인들에게도 불교가 전파되고 있다고 한다. 보통, 인도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불교를 믿으면, 불가촉천민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미국에서 지식인들과 유명인사들 사이에 참선수행과 불교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 불교를 널리 전한 인물로는 일본인 스즈키 다이세츠, 한국인 숭산 행원 선사 등이 손꼽힌다. 유럽. 쇼펜하우어 등 불교를 이해하고 수용한 철학자, 사상가들이 있었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정치 지도자이자 세계적 불교 지도자인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가 널리 알려져 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해 온 베트남 출신의 불교지도자 틱낫한(釋一行, Thich Nhat Hanh) 스님이 이끄는 수행공동체인 Plum Village가 프랑스 보르도에 소재하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 베트남 등지의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주로 모여 있다. 대도시에는 한국 사찰이 운영하는 포교당이 있는데 교민 중심의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러시아.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 중 칼미키야 공화국과 투바 공화국이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다. 그 밖에 부랴트 공화국도 불교를 믿는다. 불교 문화. 건축. 한국 사찰 건축 주요 사찰. 한국. 강원, 찰을 총림이라고 하며, 해인사 해인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수덕사 덕숭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백양사 고불총림의 5대 총림이 있다. 주요 경전. 반야심경화엄경묘법연화경부모은중경금강경법구경아함경숫타니파타공덕경관음경능엄경목련경무량수경밀란다왕문경미륵상생경미륵하생경백유경불유교경사십이장경아미타경약사경열반경원각경천수경잡아함경유마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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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살리에리
안토니오 살리에리(, 1750년 8월 18일 - 1825년 5월 7일)는 이탈리아 레가노 태생의 음악가이다. 살리에리는 당시 세간의 찬사를 얻었던 음악가였다. 유년기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766년에는 빈 궁정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그 후 빈에 머무르며, 1788년에는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며, 사망 직전인 1824년까지 그 지위에 있는다. 빈에서 작곡가로, 특히 오페라, 실내악, 종교음악에서 높은 명성을 쌓는다. 그의 43편의 오페라 중에 가장 성공한 것으론, 《Danaides》(1784)과 《Tarare》(1787)을 꼽을 수 있다. 살리에리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여, 하이든등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과 교류가 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는 모두 어렸을 때,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의 열등감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1790년대 빈에는 살리에리의 도작설, 독살설등의 소문이 돌았으나, 이들 중 사실로 입증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는 여러 연극, 영화의 소재가 된다. 이들 중 유명한 것이 1984년작 영화 《아마데우스》이며, 이 안에서 살리에리는 질투심이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주변 인물(1인자)로 인하여 2인자로서 열등감과 시기를 보이는 심리적 증상으로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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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
공학(工學) 또는 엔지니어링()은 공업 분야의 응용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 또는 과학적, 경제학적, 사회적 원리와 실용적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운 제품, 도구, 건축물조형물, 시설 등을 만드는 것에 관한 학문이다. 공학의 영역은 넓고, 여러 가지 분야로 세분화되어 있다. 개요. 공학이라 하면 수학과 자연과학을 기초로 해서, 가끔은 인문, 사회과학의 지식을 이용해서, 공동의 안전, 건설 복지를 위해서 유용한 사물이나 환경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공학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의 자연과학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공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점은 있다. 어떤 현상을 눈앞에 두고 자연과학도는, “이 현상은 어떻게 된 것 일까?”나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라고 하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에 반해, 공학은 '어떻게 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나 물건을 현실에 만들 수 있을까'를 추구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어떻게 하면 목표로 하는 성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공학은 안전성, 경제성, 보안성 등 실용적인 관점에서 평가 및 판단을 한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인원, 예산의 제약 속에서 공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검토와 그 평가를 공학적 타당성이라고 하며, 공학적인 성질의 분석에는 환경 적합성, 사용성, 정비성(整備性, ), 수명주기비용 등 (질량, 속도같이 즉물적으로 단순하게 측정 가능한 성질과는 다르게, 인간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한다.) 평가 방법이 필요한 것이 많다. 그렇게 해서 평가방법의 개발도 공학의 중요한 분야이다. 또한 공학은 다른 학문의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기술의 개발이라고 하는 면에서 공동의 복지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며, 공학 각 분야의 학회에 이론적인 내용을 쌓아 놓은 신조()가 정해져 있다. 현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의미로서의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라고 하는 용법은 18세기에 돼서 생겨난 것이지만 ‘엔지니어링’의 개념에 합치하는 행위는 고대부터 행해져왔다고 생각되고 있다. 공학을 실천하는 것을 엔지니어(engineer) 또는 기술자라고 부른다. 역사. ‘엔지니어링’이라고 하는 단어는 꽤 최근에 생겨난 것이지만, 그 단어가 있기 전에 엔지니어(engineer, 기술자) 라고 하는 단어는 존재해 있었다. 기관을 조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engineer’가 군용 병기 제작자의 의미로 쓰인 문헌이 1325년 경에 있었다. 동시에 ‘engine’은 ‘전쟁에 사용되는 기계장치’, 즉, 무기라는 의미가 있었다. ‘engine’의 어원은 1250년 경 라틴어의 잉게니움()으로부터 생긴 말로, 잉게니움은 천성, 성질 특히 재능을 뜻하고, 거기서부터 파생된 기발한 발명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에 민간의 다리나 건축물의 건설법이 공학 분야로서 발전함에 따라 'civil engineering(토목공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애초에 'engine'이 무기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군사와는 관련이 없는 분야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civil(시민)'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8세기 이전에 군사기술만을 의미하던 'engineering‘이라는 단어가 'civil engineering(=군사이외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에너지 등을 이용해서 편의를 얻는 기술 전반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근대적인 공학의 개념은 상기한 경위로 형성된 것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밝혀내서 찾아본다면 고대에도 근대공학과 일치하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고대 로마의 수도와 도로나 콜로세움, 마야문명, 잉카제국, 아스테카의 테오티우아칸 등의 도시나 피라미드, 만리장성 등은 고대의 공학의 정교함과 기능을 보여준다. 최초로 토목기술자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는 임호테프가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인 조세르왕을 섬기면서, 기원전 2630년부터 기원전 2611년쯤 사카라에서 조세르왕의 피라미드(계단식 피라미드)의 설계와 건설 감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에는 민간용과 군사용 양쪽의 분야에서 기계가 개발되었다. 안티키테라 섬의 안티키테라 기계가 알려진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하며,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기계는 초기 기계공학의 한 예이다. 그 후로 기계에 차동기어 또는 유성기어의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그 두 가지 기계이론의 중요한 원리가 산업혁명의 기어 트레인의 설계를 도와주었으며 지금까지도 로봇공학이나 자동차공학 등 여러 가지 분야에 넓게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엔 그리스에 투석기가 개발되었고, 중국과 그리스, 로마의 삼단범선은 물론, 바리스타나 캐터펄트라고 하는 복잡한 기계식 병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중세에는 트레뷰셋이 개발되었다. 르네상스기(期). 월리엄 길버트는 1600년에 "De Magnete"을 저술하고, electricity(전기)라고 하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전기공학자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기계공학에서는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들었다.이 증기기관의 개발이 산업혁명을 이끌어 대량 생산의 시대를 열었다. 18세기에는 공학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직이 확립되고, 공학은 수학이나 과학을 응용하는 분야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군사와 토목으로 나뉘어 있던 공학에 단순한 기술로 간주되었던 기계제작까지 공학의 한 부분으로 추가되었다. 근현대. 1800년대의 알렉산드로 볼타의 실험이 있고 그 후 마이클 패러데이나 게오르크 옴 등의 선구자의 실험을 거쳐 1872년에 전동기가 발명된 것이 전기공학의 발단이다.19세기 후반에는 제임스 와트, 제임스 맥스웰과 하인리히 헤르츠의 성과에 따라 전자공학이 시작되었다. 그 후,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의 발명에 의해 전자공학의 발전이 가속되어 지금은 전자공학이 공학 중에도 특히 기술자가 많은 영역이 되었다. 토마스 세이버리와 제임스 와트의 발명에 의해 기계공학의 발전이 가속되었다. 산업혁명기(期)에 각종 기계나 그 수리와 보수를 위한 도구가 발달하고, 그런 도구들은 영국으로부터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다. 화학공학도 산업혁명기(期)였던 19세기에 기계공학과 같이 발전했다. 대량 생산은 신소재나 새로운 제조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화학물질의 대량 생산이 필수적이었고 결국 그것이 1880년 경까지 새로운 산업으로 확립되었다. 화학공학은 그러한 화학공장이나 제조법의 설계를 맡았다. 항공공학은 항공기의 설계를 취급하는 분야로 항공우주공학은 우주선의 설계까지 확장된 비교적 최근의 학문분야이다. 그 기원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걸쳐진 항공기의 선구적 발전이지만, 최근엔 18세기 말의 조지 케일리의 업적이 기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초기의 항공기는 다른 공학 분야의 개념이나 기법을 도입해서 대부분 경험론적으로 발전해갔다.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해서 약 10년 후에는 항공공학이 크게 발전해, 제 1차 세계대전에 군용 항공기가 발전되기까지 했다. 반면, 과학적 기초를 닦는 연구는 이론 물리학과 실험을 결합하는 것으로 행해졌다. 컴퓨터의 이용. 공학에서 컴퓨터의 역할은 커지고 있다. 공학에 관해서 컴퓨터가 지원을 하는 각종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수리모델의 구축이나, 그것을 기본으로 하는 수치해석도 컴퓨터를 사용해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CAD소프트웨어는 3차원 모델링이나 2차원의 설계도의 작성을 쉽게 한다. CAD를 응용한 DMU(Digital Mock Up)나 유한요소법 등을 적용한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를 사용하면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물리적인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않아도 모델을 작성해서 해석할 수 있다. 컴퓨터를 이용해 제품이나 상품의 결함을 알아내거나, 부품끼리의 맞물림을 조사하거나, 인체공학적인 면을 연구하거나, 압력, 온도, 전자파, 전류와 전압, 유체의 흐름, 운동이나 시스템의 정적 및 동적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정 공학 분야를 위한 소프트웨어도 있다. 예를 들어, CAM소프트웨어는 CNC공작기계에 주어지는 명령렬을 생성한다. 생산 공정을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로 공정관리 시스템(MPM)이 있다.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는 반도체 집적 회로나 프린트 기반이나 전자 회로의 설계를 지원한다.간접재 조달을 관리하는 MRO소프트웨어도 있다. 최근엔, 제품 개발에 관련된 소프트웨어의 집합체로 제품 수명 주기 관리(PLM)소프트웨어가 사용되고 있다. 사회적 상황. 공학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행동에 좌우된다. 현대의 제품이나 건설은 반드시 공학설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공학 설계는 환경, 사회, 경제에 변화를 미치는 도구이며, 그 응용에는 큰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많은 공학계의 학회는 행동규약을 제정하고, 회원이나 사회에 그것을 알리려고 하고 있다. 공학 프로젝트 중에는 논쟁이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핵무기개발, 중유 추출 등이 있다. 이것에 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엄한 방침을 설정해놓은 기업도 있다. 공학은 인간개발의 중요한 원동력 중 한 가지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부근의 공학적 능력은 매우 낮고, 그 때문에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대개 자력으로 중요한 기반시설을 개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밀레니엄 개발 목표의 상당부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반시설의 개발과 지속가능한 기술적 개발이 가능하기 위한 충분한 공학적 역량을 필요로 한다. 해외의 개발이나 재해 구조를 실행하는 NGO는 기술자를 다수 모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자선단체가 인류를 위해 공학으로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학문분야와의 관계. 과학. 카르만은 고전적인 공학교과서 Foundation of Solid Mechanics의 개정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학은 과학과 완전히 다르다. 과학자는 자연을 이해하려고 한다. 기술자는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려고 한다. 기술자는 발명을 강조한다. 발명을 실현화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실체화해서,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형체로 설계해야 한다. 그것은 장치, 도구, 재질, 기법, 컴퓨터 프로그램, 혁신적인 실험,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 기존의 무언가를 개량하는 것이다. 설계는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되며, 형태나 수법이나 수치가 설정되어야한다. 새로운 설계에 착수하려면 기술자는 필요한 정보가 모두 준비되어 있을 리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많은 경우 과학지식의 부족에 따라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기술자는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이나 역학을 공부한다. 그러고 나서 공학에 있어서의 필요성에 따라 관련 과학의 지식을 추가하는 경우도 많다. 과학적 방법과 공학적 방법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공학적 방법은 과학적으로는 엄밀히 해명돼있지 않은 과거의 여러 사례에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경험론적 법칙을 짜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은 현상의 정확한 관찰이다. 관찰 결과를 분석해서 전달하기 위해, 공학적 방법이든 과학적 방법이든 수학과 같은 분류기준을 사용한다. Walter Vincenti의 저서 "What Engineers Know and How They Know it"에 따르면, 공학의 연구는 과학의 연구와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공학은 대체로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분야지만, 문제 자체는 정확한 방법으로 풀기엔 너무 복잡하다. 예를 들어 항공기에 관해 공기역학적 흐름을 나비어-스톡스 방정식의 근삿값으로 나타내거나 재료의 피로(疲勞, 영어: fatigue) 손상의 계산에 마이너 법칙을 사용한다. 또한, 공학에서는 태반은 경험론적인 수업도 자주 채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공학은 자연과학과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발달해 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의 효율이 관한 연구로부터 열에 관한 인식이 깊어졌다.열에 관해 자연과학에서의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에 따라 냉각기술 또한 개발될 수 있었다. 의학과 생물학. 목적이나 방향성은 다르지만, 의학과 공학의 일부 분야의 공통분모로 인체의 연구가 있다. 의학에 관해선 필요하면 기술을 사용해서도 인체의 기능을 유지, 강화해서 경우에 따라 인체의 일부를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있다. 현대의학은 이미 일부의 장기의 기능을 인공의 것으로 치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고, 심장 박동기 등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의용생체공학은 생체에의 인공물을 채워 넣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영역이다. 역으로 인체를 생물학적 기계로 취급해 연구대상으로 하는 공학 분야도 있으며, 기술로 그 기능을 진화시키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뉴런 네트워크, 퍼지 논리, 로봇 등이 있다. 공학과 의학의 학제적인 영역 또한 존재한다. 의학과 공학은 실세계에 관한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때문에 현상을 좀 더 엄밀하고 과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두 분야 모두 실험이나 경험적 지식이 필수로 되어있다. 의학은 인체의 기능도 연구한다. 인체는 생체 기계로 인식했을 경우에 공학적 수법으로 모델화 가능한 다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심장은 펌프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골격은 지렛대와 연결된 듯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또한 뇌는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있다.이런 유사성이나 의학에 관한 공학의 응용의 중요성의 증대에 따라, 공학과 의학의 지식을 응용한 의용생체공학이 태어났다. 시스템 생물학 같은 새로운 과학 분야는 시스템의 모델링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해석 등 공학에서 사용되어 왔던 해석 수법을 채용해서 생명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공학과 예술의 사이에도 관련이 있다. 건축, 조원,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은 마치, 공학과 예술의 접점을 교환하는 분야이다. 다른 부분에도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야가 있다. 시카고 미술관은 NASA의 항공우주 관련 디자인에 관한 전람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로베르 마야르가 설계한 다리는 예술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남 플로리다 주립대에서는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공학부에 예술과 공학을 맞추는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기의 예술가 겸 기술자로 유명하다. 그 외. 정치학에 '공학'이라고 하는 말을 도입한 사회공학이나 정치공학은, 공학의 방법론이나 정치학의 지식을 이용해서, 정치구조나 사회구조의 형성을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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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스 폴링
라이너스 칼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년 2월 28일 - 1994년 8월 19일)은 노벨 화학상(1954년)과 노벨 평화상(1962년)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이다.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이 자신이 쓴 《이중 나선(Double Helix)》에서 라이너스 폴링을 "당시 생화학 분야의 권위자였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62년에는 지표 핵실험을 반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혼자서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마리 퀴리는 물리학상을 남편과 함께 받았고 존 바딘은 두 번의 물리학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으며 프레데릭 생어도 1980년에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다.) 또한 현재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벨 과학상과 평화상을 모두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초기 생애와 교육. 폴링은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헤만 헨리 윌리엄 폴링(Herman Henry William Pauling, 1876년 - 1910년)과 루시 이사벨 벨레 달링(Lucy Isabelle Belle Darling, 1881년- 1926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외할아버지 칼(Carl)과 친할아버지(Linus)를 기념하여 라이너스 칼(Linus Carl)을 따라 지어졌다. 아버지 헤만과 어머니 루시는 각각 23살, 18살에 오레건주 콘돈의 한 디너파티에서 만났고 6개월 후 그들은 결혼했다. 헤만 폴링은 미주리 주의 콘코디아에서 독일계 이주 농민으로부터의 후손이다. 칼 폴링은 가족과 함께 오레건주의 오스웨고에 정착하기전 캘리포니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주조공장의 철물상으로 일했다. 중등학교를 마친 다음 헤만 폴링은 약사가 되기 위해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의 견습생 수행이 끝난다음, 그는 제과점 도매상인이 되었다. 폴링의 어머니 루시는 영국, 스코틀랜드계 후손이며 교사, 농민, 측량사, 우체국장, 변호사로 일한 라이너스 윌슨 달링의 딸이다. 라이너스 달링은 11세에 고아가 되었으며 학교선생이 되기 전에 제빵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는 오레건주 터너에서 온 엘리스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으며 결국 그들은 결혼했다. 1888년 7월 17일 엘리스는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으나 유산되었다. 그리고 한달이 채 가기도 전에 네명의 딸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앨리스는 사망했다. 라이너스 폴링 태어난 후 1년을 포틀랜드에서 그의 부모님과 함께 단칸방 아파트에서 보냈다. 1902년 그의 여동생 파울린이 태어난 후 폴링의 부모님은 도시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포틀랜드에서 살면서 아파트는 매우 붐볐고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루시는 헤만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동안 오스웨고의 헤만의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렀다. 헤만은 Skidemore 제약회사의 외판원으로 일하게 된 살렘(Salem) 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1904년 루실의 출생과 함께 헤만 폴링은 오스웨고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개인 약국을 개업했다. 그러나 오스웨고의 경기는 안 좋았으며 그와 그의 가족들은 1905년 콘돈으로 다시 이주했다. 1909년 폴링의 친할아버지 라이너스는 그의 두 번째 부인과 이혼했으며 그의 딸 루시(폴링의 어머니)와 나이가 거의 같은 어린 학교선생과 재혼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신장염으로 비롯되어 합병증으로 야기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동안에, 헤만 폴링은 복부의 주기적인 심한통증과 약한 체력으로 매우 고통받고 있었다. 루시의 여형제 애비(Abbie)는 헤만의 목숨이 위태롭도록 아픈 것을 보고 즉시 가정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의사는 통증을 완화시키기위해 헤만에게 진정제를 투여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경감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건강은 다가오는 몇 달동안 매우 악화되었으며, 1910년 6월 11일 그는 라이너스, 루실, 파울린을 혼자 짊어지게 된 루시를 남기고 위궤양으로 결국 사망했다. 폴링은 어린 시절 대단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폴링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아버지 헤르만 폴링은 지방신문 더 오리가니안(The Oregonian)의 편집장에게 아홉 살 아들이 더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묻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폴링의 초등학교 친구인 로이드 제프레스는 자기 방에 작은 화학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프레스의 실험실에서 했던 실험은 폴링이 화학공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폴링은 할아버지가 수위로 근무했던 제철 공장에서 많은 실험 기구와 재료를 몰래 운반하여 화학 실험을 계속했다. 고등학생이 된 폴링은 책과 화학실험으로 쌓아온 엄청난 양의 화학지식으로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고 화학 담당 선생님의 방과후 실험을 돕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폴링은 보수도 많이 받을 수 있는 화학공학자가 되고 싶어하였고 대학에 가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어머니 벨은 아들이 생계를 꾸리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돕길 원했고 폴링이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에 화를 내었고 철물점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고민하던 폴링은 친구 제프리스 가족의 충고를 듣고 당시 오리건농업대학 (현 오리건 주립 대학) 화학공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고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폴링은 15세의 3학년 1학기 이미 오리건농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점을 다 채워놓은 상태여서 대학에 진학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으나 당시 오리건주 고등학교 3학년 1년동안 필수 학점이었던 미국사 듣지 못하였다. 폴링은 학교장에게 1학기에 일년 과정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폴링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폴링의 모교 워싱턴고등학교는 45년 뒤, 이미 폴링이 두 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후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 해 여름에 폴링은 식료품 잡화점에서 1주일에 8달러를 벌어가면서 아르바이트일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포틀랜드의 제조공장 다수를 운영하는 Schwietzerhoff와 면담을 하여 취직하도록 시켰다. 폴링은 견습공으로 한 달에 40달러를 받으며 고용되었다. 폴링은 그의 일에 매우 능숙해서 월급이 인상되어 한 달에 50달러를 받으며 일했다. 그는 여가시간에 그의 친구 둘과 함께 사진실험실을 세우고 작은 사진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이 비즈니스를 함으로써 후에 그가 대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돈을 벌수있도록 소망했다. 폴링은 오레건주 농업대학에서 입학허가 편지를 1917년 9월에 받았고 그의 어머니와 직장 사장에게 그의 대학입학계획을 알렸다. 고등교육과정. 1917년 10월, 폴링은 그가 대학생활비용으로 모아두었던 200여달러를 사용하면서 그의 사촌 Mervyn과 함께 Corvallis 캠퍼스 주변 하숙집에서 살았다. 첫 번째 학기에서 폴링은 화학과에서 두 과목, 수학에서 두 과목, 기계 제도, 현대영어산문, 체육 그리고 군 훈련을 수강신청했다. 폴링은 그의 학교 생활 초기에 1학년 여학생 이린(Irene)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폴링은 그가 저축한 150달러정도로 그녀를 위해 쓰기도 했다. 그는 곧 여학생기숙사의 주방을 정리하는 업무와 고기를 자르고 난로의 장작을 패는 일을 한달에 100시간 정도하는 그러한 일을 했다. 시간당 25센트의 보수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재정적으로 곤란함을 겪었다.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캠퍼스의 식당에서 하루에 한끼 식사하는 걸로 때웠다. 폴링은 매우 대학생활을 활발히 했기 때문에, Delta Upsilon이라는 비영리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2학년 이후에 어머니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포틀랜드에서 돈을 벌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는 그를 정량분석을 가르치는 위치를 그에게 권했고, 그는 마침 정량분석이라는 과목을 막 이수한 상태였다. 그는 일주일에 40시간을 실험실과 교실에서 일하여 한 달에 100달러정도 벌었다. 그리고 이러한 돈은 그가 대학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2년간의 대학생활에서 폴링은 원자와 분자의 전자구조에 대한 일을 했던 Gilbert N. Lewis와 Irving Langmuir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그의 연구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물질의 성질을 이용하여 어떻게 그것들이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의 구조와 관련되어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자화학이라는 새로운과학분야의 창시자가 되었다. 폴링은 인류학 사회학에 대한 공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게다가 물리, 수학부의 필수과목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다루었다. Samuel Graf교수는 폴링을 높은 수준의 수학과정에서 그의 조교로서 선발했다. 4학년 겨울 무렵, 폴링은 가정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화학부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제안받았다. 그곳에서는 폴링의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인 Ava Helen Miller가 있었다. 1922년 폴링은 오레건주 주립대학을 졸업했으며 화학공학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원을 캘리포니아 주의 패서디나의 칼텍으로 지도교수인 Roscoe G. Dickinson 지휘 아래로 갔다. 그는 결정의 구조를 결정짓는 X선 회절분광법의 사용을 포함하는 연구로서 졸업을 했고 그가 칼텍에 있는동안 광물질, 무기질들의 결정구조에 관한 7장짜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에서 phD를 받았으며, 1925년에 수리물리학분야의 최고 영예와 함께 졸업했다. 1917년 폴링은 코발리스(Corvallis)에 위치한 현재 오리건 주립 대학의 전신인 오리건 농업 대학(the Oregon Agricultural College)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는 full-time으로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장작을 쪼개고, 청소를 하고, 여학생 회관의 주방에서 고기를 써는 등의 일을 하였다. 또한 2학년 여름방학에는 아스팔트 성분을 시험하는 일자리를 구했고 쓰고 남은 돈을 집에 보냈다. 그러나 2년의 학업을 마치고 어머니 벨은 아들 폴링에게 1년동안 휴학을 하고 일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폴링은 화학교수로부터 1년동안 정량화학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받게 되고 학교에 계속 남아 돈도 벌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된다. 폴링은 강의 준비에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고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점차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았다. 1922년 겨울학기 가정경제학과의 화학수업을 맞게 된 폴링은 수업에서 아바 헬렌 밀러를 만나게 되고, 둘은 1923년 6월 17일에 결혼하게 된다. OAC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에,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화학과장 길버트 루이스와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공업화학자 어빙 랭뮤어의 원자의 전자구조와 분자를 이루는 화학결합에 대한 성과를 접하게 된다. 그는 두 원자 사이에 공유 전자를 가진 화학 결합이 생긴다는 그들의 이론에 매혹되었고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원자들의 결합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자신의 주 연구분야로 하기로 하고, 양자 화학의 기초를 세운다. 1922년 폴링은 OAC를 졸업하고, 칼텍의 아더왕이라고 불리는 저명한 화학자 아더 아모스 노이즈에게 발탁되어 칼텍(California Institue of Technology, Caltech)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한다. 그는 로스코 G. 디킨슨의 지도 아래 X선 구조결정학을 연구하였고 몰리브덴광을 비롯한 다섯 가지 결정의 원자구조를 밝혀냈다. 그는 1925년 물리화학과 수리물리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화학 결합의 본질에 관한 연구. 1920년대 말에 폴링은 화학결합의 본질에 관한 논문을 내기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1939년에 출판한 화학결합에 관련된 그의 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폴링이 1954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인 '화학결합의 본질과 그것을 이용한 복잡한 물질들의 구조규명에 관한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 폴링은 그의 화학결합에 관한 연구들을 '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에 집약시켜서 출판하였고 이 책은 가장 영향력이 큰 화학책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1939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를 때까지 이 책은 16000 번 이상 인용되었다. 심지어 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분야에 관련된 논문들은 종종 그의 책을 인용하고는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련된 업적 중 하나는 혼성오비탈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자에 있는 전자는 s 혹은 p 오비탈등의 오비탈의 모양의 확률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원자간의 결합을 설명할 때에는 다른 종류의 오비탈의 성질을 섞은 새로운 함수를 정의하면 훨씬 설명이 편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탄소원자의 경우 한 개의 2s 오비탈과 3개의 2p 오비탈을 가지고 있는데 이 4개의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4개의 동일한 오비탈(sp3 혼성오비탈)을 만드는 것으로 메탄과 같은 탄소화합물에서 탄소가 4개의 결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탄소의 4개 오비탈 중 1개의 2s 오비탈과 2개의 2p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3개의 동일한 오비탈(sp2 혼성오비탈)을 형성하고 2p 오비탈 한 개는 혼성화를 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불포화 탄소화합물인 에틸렌과 같은 화합물의 결합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탄소는 다른 화합물에서 다른 형태의 혼성화를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대한 업적 중 또 하나는 이온결합과 공유결합간의 관계를 규명한 것이였다. 이온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원자간에 전자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고 공유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전자의 균일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폴링은 이 두 종류의 결합이 상극을 이루면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원자간의 결합의 성격은 이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폴링 자신이 제창한 '폴링의 전기음성도'의 개념이 쓰이게 된다. 결합을 이루는 두 원자의 전기음성도 차이가 결합의 이온성 즉 원자간의 결합이 이온결합과 공유결합중 어느 결합과 더 비슷하게 존재할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한 업적 중 세 번째 것은 방향족 탄화수소의 구조를 규명하는 것이였다. 이 이전까지 벤젠의 구조에 대한 가장 나은 설명은 독일의 화학자인 케쿨레의 설명이였다. 케쿨레는 벤젠이 두 가지의 구조사이를 빠르게 왔다갔다 하면서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때 첫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이중결합으로 이중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으로서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폴링은 양자역학에 기초하여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벤젠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이중결합과 단일결합의 중간쯤 되는 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벤젠의 구조는 케쿨레가 제시한 두 가지 구조의 사이의 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두 가지 구조가 존재하여 그 두 가지 구조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였다. 후에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공명(resonance)'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폴링의 벤젠구조에 대한 설명은 앞서 그가 제시한 오비탈의 혼성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두 가지 설명 모두 여러 개의 전자구조가 합쳐저서 그러한 구조들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원자핵의 구조에 관한 연구. 1952년 9월 16일에 폴링은 '나는 원자핵 모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라는 문장으로 새로운 연구노트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10월 15일 폴링은 Science 지와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지에 그의 원자핵 모델인 Close-Packed Spheron Model 을 발표하였다. 이후 거의 30년동안 폴링은 1994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spheron cluster model 에 관련된 여러개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폴링의 spheron model 에 깔린 기본적인 생각은 원자핵은 중성미자 무리의 집단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은 중성미자 무리에는 중양자, 알파입자, 3중양자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짝수의 원자번호를 갖는 원자핵의 경우 알파입자의 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폴링은 원자핵의 구 구조를 platonic solid 와 같은 기하적 구조로부터 도출 해내었는데 이는 이 당시의 독립 입자 모델로부터 이를 도출해내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랐다. 또한 1990년에 폴링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모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최근에 나는 실험적으로 측정된 들뜬 상태와 바닥상태의 진동에너지를 분석함으로써 원자핵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Physical Review Letter' 나 다른 물리학 출판물을 보면서 나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원자핵의 구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학자 중 여태까지는 어느 누구도 내가 밝혀놓은 것까지 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밝힌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연구를 앞으로도 나의 속도에 맞추어 진행할 것이다.' 생물 분자. 1930년대 중반, 폴링은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비록 그가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던 것은 무기 분자 구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분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록펠러 재단의 자연과학자금 책임자였던 위버는 폴링에게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대어 주었다. 따라서 그 돈으로 연구 건물을 새로 짓고 직원을 뽑고 장비를 구축하여 분자생물학 분야로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분야로의 연구를 위해 토마스 헌트 모건,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캘빈 브리지스, 알프레드 스터트반트와 같은 생물학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얻어나갔다. 그 당시 폴링은 생명이 없는 화학물질이 생명체로 변환되는 데에 단백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힌다면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X-ray 회절 분석을 통해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분석하려고 하였지만 단백질은 그 방법에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백질은 크기가 너무 크고 다양한 거대 분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단백질은 조금만 가열해도 변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정제, 분리도 어려웠다. 따라서 1930년대 영국의 결정학자 윌리엄 아스트버리가 찍은 가장 좋은 X-ray 사진에 대해 폴링은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11년이 걸렸다. 그의 수학적인 분석은 옳았지만, 아스트버리의 사진에서 단백질 분자는 예상 위치보다 기울어져 있었다. 폴링은 단백질의 변성 실험을 통해 단백질은 가역적인 약한 결합과 비가역적인 강한 결합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약한 결합을 수소결합, 강한 결합을 공유결합이라고 추정하였다. 이후 그는 미르스키와 함께 아미노산들이 공유결합의 일종인 펩티드 결합을 통해 사슬을 형성하고 이들이 약한 수소결합을 통해 특별한 모양을 가진 단백질이 형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아미노산의 구조를 밝혀 펩티드 결합의 길이와 각도를 결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단백질의 가능한 구조의 수를 대폭으로 줄일 수 있었고 단백질의 성질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폴링은 이 연구를 통해 헤모글로빈 구조 모델에서는 원자들이 나선형 구조로 배열되어있다고 밝혔고, 이 아이디어를 일반화하여 단백질에 적용시켰다. 1951년, 아미노산과 펩티드의 구조, 그리고 펩티드 결합의 평면 성질을 기반으로 하여 폴링과 로버트 코리, 그리고 헤르만 브랜손은 단백질 2차 구조에서 1차적인 구조적 특징으로서 알파 나선과 베타 병풍 구조를 제안하였다. 1936년 폴링은 오스트리아 출신 과학자 랜스타이너를 만났고 항체에 대한 의문점을 듣게 되었다. 항체들은 모두 비슷한 크기의 단백질인데 어떻게 특정한 항원을 정확히 구별하고 결합할 수 있는가? 폴링은 이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특정한 항원만을 구별하는 항체의 특이성이 분자의 구조와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1940년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항체의 한쪽 끝이 항원에 닿으면 주위에서 모양을 형성하여 수소결합이나 정전기적 인력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항체와 항원이 상보적 형태를 가지게 되어 잘 들어맞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이 이론으로 폴링은 이 분야를 이끌어갔고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단백질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낸 폴링이었지만 여전히 생명의 비밀은 해결하지 못하였다. 1952년 허쉬와 체이스의 실험 결과로 유전자는 DNA로 구성되어있다는 결론이 나오고 나자 폴링은 DNA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는 DNA의 구조를 연구한 끝에 DNA는 삼중나선 구조라고 제안하였고, 1952년 DNA의 구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의 모델은 기본적인 실수가 있었다. 폴링은 DNA의 염기를 중심으로부터 바깥쪽에 배치시켰고 인산기를 안쪽에 배치시켜 서로 결합한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폴링이 DNA의 구조의 분자적 모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캐번디시 연구소에 전해졌을 때, 왓슨과 크릭은 DNA의 분자적 모델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가 아직 출판하지 않은 데이터에서 도움을 얻었는데 그들의 데이터는 나선과 그 축을 따라 평면의 염기가 있음을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1953년 초,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올바른 구조로서 DNA 이중 나선을 제안하였다. 사실 왓슨과 크릭도 DNA는 삼중나선 구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생각에 대해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그들이 건넨 모형을 찢어버렸다. 그 모델의 문제점으로 음전하를 가진 인산기들이 DNA 분자 중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분자가 너무 촘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왓슨과 크릭에게 자신이 찍어낸 DNA의 X선 회절사진을 제시하였고 이 때문에 왓슨과 크릭은 바른 길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폴링은 밀도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였고 좋은 품질의 X-ray 회절 사진을 얻지 못하는 등 DNA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들을 인정했다. 폴링이 그 문제를 조사하는 동안, 영국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X-ray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사진은 왓슨과 크릭의 성공에 대한 열쇠였다. 폴링은 자신의 동료 로베르트 코레이가 프랭클린의 사진 몇 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DNA 구조를 고안하기 전에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의 연구소에 방문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폴링이 [[DNA 삼중나선]_ 이론을 급하게 논문을 통해 발표한 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얻은 최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자유전학. 1949년 11월, 라이너스 폴링, 하베이 이타노, S.J. 싱어, 그리고 이베르트 웰스는 <겸형 적혈구 빈혈증, 분자병>이라는 논문을 사이언스 지에 출판하였다. 이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에 의한 인간 질병의 첫 증거물이었고, 분자 수준에서 이해된 첫 번째 질병이었다. 전기영동을 통해 그들은 겸형 적혈구 빈혈증에 걸린 환자 각각은 적혈구에서 변형된 형태의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겸형 적혈구 형질을 가진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 형태의 헤모글로빈 모두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멘델 유전이 단순히 단백질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의 특정한 물리적 특성까지 결정함을 보여주는 첫 증거였다. 즉, 분자유전학이 도래했음을 나타내었다. 분자의학, 의학적 연구, 그리고 비타민 C 고취. 1951년, 폴링은 “분자의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 1950년대 후반, 폴링은 정신병이 효소의 기능장애로 발생한다는 믿음에 뇌의 기능에서 효소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였다. 1965년, 폴링은 아브라함 호퍼의 <정신의학에서의 니아신 치료요법>이라는 논문을 읽고, 비타민이 그와 관련된 결핍증의 예방과 무관하게 생화학적으로 중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1968년 폴링은 <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 정신의학>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사이언스 지에 투고하였다. 하지만 이 논문은 1970년대에 다소 논쟁이 있는 비타민 대량 투여 요법 운동을 야기했다. 폴링은 몸 속에 존재하는 물질의 농도를 변화시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실행을 언급하기 위해 “orthomolecular(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의 생각은 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 의학의 기초를 형성했으나 통상적인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실행되지 않고 강경하게 논쟁해왔다. 비타민 C에 대한 폴링의 연구는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66년 생화학자 어윈 스톤의 비타민 C 복용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가져, 폴링은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매일 비타민 C 3 g을 복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영향이 있음을 인지하고 1970년 <비타민 C와 감기>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그는 1971년 영국의 암 외과의사 카메론과 함께 말기 환자들에게 암 치료요법으로 비타민 C를 복용시키거나 정맥 주사를 통해 주입하는 장기 임상 실험을 공동으로 시작하였다. 카메론과 폴링은 그들의 관찰 결과를 담고 있는 많은 전문 논문과 «암과 비타민 C»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하였다. 폴링은 비타민 C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결국 비타민 C를 투여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생존 확률이 4배나 더 높다는 결과를 담고 있는, 다소 진위가 의심스러운 말기 환자들 100명 그룹에 대한 두 연구를 출판하였다. 이후 메이오 클리닉에 의해 수행된 임상 시도에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10,000 mg)은 암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플라시보 효과보다 좋지 못했고 비타민 C를 많이 복용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이는 비타민 C가 암 치료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의학 협회 역시 비타민 C가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엉터리라고 결론지었다. 폴링은 그 연구 결과들을 비난하였고 최종 연구를 “사기와 계획적인 잘못된 설명”으로 간주하였으며, 비타민 C를 정맥주사를 통해 주입하지 않고 구강 복용을 시킨 연구에 대해 비판하였다. 또한 실험에서 조작 변인은 비타민 C를 복용하는 것이었고, 비타민 C 복용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메이오 클리닉을 비판하였다. 폴링은 암 환자들은 지속적으로 비타민 C를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시도에서 메이오 클리닉 환자들은 두 달 반 동안만 비타민 C를 복용하였다. 그 결과는 공개적으로 오랫동안 폴링과 카메론, 그리고 메이오 클리닉 사이에서 상당히 신랄한 논쟁이 일었다. 특히 서로 간에 위법 행위와 과학적 무능력함에 대해 비난이 일었다. 최종적으로 메이오 클리닉 연구의 결과들이 암 치료제로서의 비타민 C에 대한 관심을 종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비타민 C를 암과 감기 치료제로 진척시키기를 지속하였는데, 비타민 C를 뇌가 손상된 아이들에게 치료제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능력계발연구소 (The Institutes for the Achievement of Human Potential)와 함께 연구하였다. 그는 이후 캐나다의 내과의사 아브람 호퍼와 함께 부가적인 암 치료법으로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을 비롯한 미량 영양소 식이요법을 공동연구를 하였다. 아서 B. 로빈슨, 그리고 다른 동료와 함께 폴링은 1973년에 캘리포니아 먼로 파크에 분자교정의학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곧 라이너스 폴링 과학의학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폴링은 비타민 C에 대한 연구를 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을 때까지 이론 화학과 물리 연구를 계속하였다. 말년에 그는 동맥경화증 예방에 대한 비타민 C의 역할의 가능성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리신과 비타민 C를 이용해 협심증을 경감시키는 사례보고 3편을 발표하였다. 1996년에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오리건주 Corvallis로 이전하여 오리건 주립 대학교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에서 미량영양소, 피토케미컬 (식물에 있는 화학 물질), 그리고 다른 물질들을 식이요법에 적용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를 지속하였다.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가 Palo Alto에 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연구 조감독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은 연구소가 이전한 뒤에 유전 정보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정치활동. 폴링은 2차 세계대전까지는 정치에 무관심하였으나, 전쟁의 여파와 아내 아바 헬렌의 평화주의는 폴링 역시 평화주의자의 길을 걷게 해주었다. 그는 대부분이 유태인인 독일의 동료과학자들이 보내는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여행에 필요한 사증을 발급받아 나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때부터 폴링은 히틀러의 독재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하였고, 1939년 유니언 나우라는 단체에 가입한다. 이 단체는 전 세계의 모든 민주국가들이 미국의 연방제를 모형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로, 폴링은 이 단체에 가입을 하게 된 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나치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폴링은 또한 미 해군 잠수함의 산소측정기, 폭약, 로켓 추진체 등 미국의 군수 관련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맨허튼 프로젝트 초기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주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폴링을 화학분야 담당으로 초청하나 폴링은 가족과 멀리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여 거절한다. 전쟁 중 미국 정부가 서부해안에서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하는 일이 발생하자 아바 헬렌은 이것에 항의하여 미국시민 자유연맹의 감금반대 투쟁을 돕는다.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폴링을 포함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원자과학자연맹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면서 원자력기술의 공유와 원자력을 민간 통제 하에 둘 것을 요구하였다. 1946년에 아인슈타인은 대중에게 핵무기 개발의 위험을 알리는 것이 목적인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를(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 조직하였고 폴링도 이에 가입한다. 그는 그의 정치적 지지자인 아내 아바 헬렌과 함께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였다. 그러나 1946년 가을 스탈린의 동유럽 봉쇄와 중국의 공산반군 등 공산주의의 세력이 강해지자 미국인들은 반공주의로 돌아섰으며 원자기술공유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냉전체제가 강화되고 국가적으로 반공주의가 대세였던 1950년대에도 그는 반핵연설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FBI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 미 정부로부터 여권발급을 거절당하기도 아였다. 그의 여권은 1954년 그의 첫 노벨상 수상에 앞서 잠시 재발급되었다. 칼텍의 많은 친구들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총장 두브리지는 폴링에게 정치적 연설을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1951년 논란이 되는 단체들을 탈퇴하고 연설들을 중지하였으며 연구에만 전념하였으나, 언론의 비난과 국회의 의심은 계속되었다.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후에는 대중과 지인의 의심이 많이 풀렸고 폴링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폴링은 다시 원자폭탄으로 인한 방사능 피폭과 낙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58년 폴링은 배리 커머너 등과 함께 방사성 동위원소 Sr-90의 유아 치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하였고 1962년에는 루이스 라이스 등과 함께 낙진으로 떨어진 Sr-90을 젖소가 먹고 젖소로부터 우유를 먹는 사람의 뼈에 축적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물리학자이자 반공주의자인 텔러와 방사능 낙진의 위험에 대한 TV토론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폴링은 1958년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중지를 청원하는 서명을 받아 서명목록을 UN에 제출하였다. 대중의 압박과 낙진의 위험에 관한 연구결과는 1963년 미국과 소련이 지하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서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조약은 그해 10월 10일부터 효력이 발생했고 바로 그날 폴링은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폴링의 화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한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논객들은 폴링의 정치적 행보에 비판적이었으며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1960년 폴링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낙인 찍은 상원의 한 조사 소위원회에 출두를 명령받아 그토록 많은 서명들을 모은 과정에 대해 해명을 요구받았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비판적인 여론은 계속되었다. 그가 1962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자 미국 라이프 잡지사는 “노르웨이에서 온 수상한 모욕”이란 헤드라인을 냈다. 칼텍 총장 두브리지 역시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보였다. 폴링은 노벨상 상금을 가지고 평화에 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3년 10월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칼텍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1962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노벨의 유언에 적합한 평화상 후보를 찾지 못하였다. 노벨상 규정에 따라, 이 경우 1962년 노벨상 후보를 다음 년도로 미룰 수 있었다. 이 노벨평화상을 폴링이 받게 됨으로써 폴링은 1962년 노벨평화상을 1963년에 받게 된 것이다. 말년. 폴링은 1994년 8월 19일 [[캘리포니아주]] [[빅서]]의 자택에서 7시 20분경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외부 링크. [[분류:1901년 출생]] [[분류:1994년 사망]] [[분류:미국의 무신론자]] [[분류:미국의 생화학자]] [[분류:미국의 의학자]] [[분류:미국의 평화주의자]] [[분류:미국의 반전 운동가]] [[분류:미국의 반핵무기 운동가]] [[분류:물리화학자]] [[분류:이론화학자]] [[분류:무기화학자]] [[분류:생물물리학자]] [[분류:포틀랜드 (오리건주) 출신]]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오리건 주립 대학교 동문]] [[분류:스탠퍼드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고]] [[분류:노벨 평화상 수상자]] [[분류:노벨 화학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레닌 평화상 수상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20세기 화학자]] [[분류:미국 물리학회 석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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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본명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 , 1946년 8월 19일 ~ )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한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다.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된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냉전이 끝난 시대에 대통령이 되었고, 첫 번째 베이비 붐 세대 대통령이었다. 미국 대통령 재임시절 유능한 경제정책으로 3000만개 일자리를 창출했고 3500억 달러의 국가부채도 갚으며 그외의 분야에도 유능하여 대통령 재직 시절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클린턴은 새로운 민주당(New Democrat) 계열로 묘사된다. 그의 정책 중 일부인 북미자유무역협정과 복지 개혁은 중도주의 제3의 길 통치 철학 때문에 추진한 것으로 추정되며, 반면에 그는 다른 정책에 대해서 중도 좌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클린턴은 나중에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평화로운 경제적 확장 기간이 된 경제적 확장의 지속을 이끌었다. 의회 예산국은 2000년에 클린턴의 재임기간의 예산이 흑자라고 보고했다. 보건 보험 개혁의 실패 이후에 공화당은 1994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40년만에 처음으로 승리했다. 3년 뒤 1997년에 클린턴은 재선되었고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래 처음으로 두 번의 임기를 채운 대통령이 되었다. 초기 생애. 아칸소주 호프에서 태어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은 5번째 세대의 아칸소주민이었다. 그의 모친 버지니아 켈리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한 그의 부친의 이름을 따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로 이름을 지었다. 모친이 간호원으로서 훈련받는 동안 빌이 4세 때 그녀는 그를 그녀의 부모와 함께 두었다. 빌이 8세가 될 때 그의 모친은 로저 클린턴에게 결혼하였다. 가족은 핫스프링스로 이주하여 실내 수도가 없이 작은 집에서 살았다. 빌의 계부는 알콜 중독자였고, 가족 생활은 가정 폭력에 의하여 자주 혼란을 일으켰다. 그가 15세 때 빌은 자신의 계부에게 자신의 모친 혹은 이복 형을 절대 때리지 말라고 다시 경고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클린턴은 타임 잡지와 인터뷰에서 "그 일은 극적인 것이었다"고 상기하였다. 클린턴이 17세 때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결과로서 클린턴은 자신이 정치에서 경력을 원했던 것을 결정하였다. 그는 1964년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생으로서 그는 흑인 민권 운동 투쟁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헌신했다. 클린턴은 국제학에서 학위와 함께 1968년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을 지속하는 다음 2년을 보내는 데 자신을 허용한 로즈 장학금을 수상하였다. 1970년 그는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클린턴은 아칸소주 파예트빌에서 변호사로서 개인 실습으로 들어갔다. 그는 또한 아칸소 로스쿨에서 강의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아칸소 정치. 1974년 클린턴은 자신의 10대 시절 이래 자신이 원했던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의회를 위하여 나갔으나 매우 가까운 투표에서 선거를 패하였다. 1975년 10월 11일 클린턴은 예일 로스쿨에서 만났던 동료 법학생 힐러리 로덤에게 결혼하였다. 1976년 그는 아칸소주의 법무장관으로 선출되어 1977년부터 1979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978년 클린턴은 아칸소주지사의 직위를 위하여 나갔다. 그의 선거는 그를 그 주에서 최연소 주지사로 만들었다. 자신의 첫 기간에서 클린턴은 차량 라이센스의 비용을 올리는 시도를 포함하여 많은 것이 극단적으로 인기가 없던 다수의 변화들을 이루는 데 노력하였다. 1980년 그는 주지사로서 재선을 위하여 나갔으나 공화당의 프랭크 D. 화이트에게 패하였다. 클린턴이 화이트를 상대로 1982년 선거를 위한 운동을 벌였을 때 그는 자신이 적응성과 타협의 중요성을 배웠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투표의 55 퍼센트를 받아 다시 한번 아칸소주지사가 되었다. 클린턴이 아칸소주지사였던 동안 그는 학교, 보건과 보장을 위한 개혁을 위하여 밀고 나갔다. 그는 또한 민주당의 국내 정치에서 활동적이 되는 데 지속하였다. 1991년 그는 자신의 동배들에 의하여 가장 효과적인 주지사로 투표되어 민주당 리더십 회의를 사회보는 데 선택되었다. 동년에 클린턴은 대통령직을 위한 1992년 경주에 들어가고 있었다고 공고하였다. 1992년 대통령 선거. 클린턴은 대통령을 위한 민주당 후보 지명을 위하여 거의 경쟁을 가졌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섞인 것 없고 미개발로 생각한 작은 주에서 왔다. 비판들은 국가 정부에서 그의 부족한 경험이 그에게 외교 정책의 작은 이해를 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자신이 정부에게 가져오는 데 신선한 관점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클린턴의 선거 운동은 또한 개인적 스캔들에 의하여 특정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동안 자신의 군사 복무의 기피에 관한 의문들과 혼외 관계들의 책임들을 향하였다. 클린턴은 경주에 남아있었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어 자신의 러닝메이트로서 테네시주 상원 앨 고어를 골랐다. 클린턴은 경제적 문제들, 특히 실업과 보건에 자신의 선거 운동을 전념하였다. 1992년 11월 클린턴은 당시 현직 대통령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와 무소속 후보 로스 페로를 꺾어 4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선거 운동 본부의 캠페인 문구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였다. 42대 대통령 (1993 ~ 2001). 1993년 1월 20일 취임식을 올린 클린턴은 대통령 직에서 한번 경제적 문제들에 지속적으로 일하였으며, 이자율과 실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인 힐러리 여사를 국내적 보건 개혁을 탐구하는 데 대책 본부의 지배인으로 임명하게도 하였다. 그는 미국, 캐나다와 멕시코의 단일 무역 단위를 만든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성원하였다. 클린턴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로 두번의 임기를 모두 채운 첫 번째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그의 당선으로 인해 12년 간(1981.1~1993.1)의 연속된 공화당 정권(레이건(1981.1~1989.1), 부시(1989.1~1993.1))이 막을 내렸다. 그 선거 이후 민주당은 지미 카터의 통치 이래 최초로 의회 및 행정부를 포함한 연방정부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재임 초기 계속된 실책으로 인기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크나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특히 하원에서는 40년 만에 공화당에 다수당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업적. 즉각적으로 정권을 인수받은 후 클린턴은 1993년 가족 의료 법안에 관한 대선 공약에 즉각 서명하게 된다. 본 법안은 고용인에게 종업원의 의료 문제 발생 상황시 의료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근로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보호 법안이었다. 이 정책이 대중적이었던 반면, 클린턴이 대선 초기에 공약했던 군대 내 성소수자 권리 정책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태도는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진보 진영은 정책이 다소 실험적이라고 주장했고 보수진영은 군생활에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많은 토의가 있던 후 클린턴과 펜타곤은 일명 ‘묻지도 말고 대답도 하지 말라’는 정책에 합의하게 되며 그것은 오바마 대통령 때까지 유효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공약대로 연방공무원 10만명 감축 지시를 내렸고, 고어 부통령에게 정부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고어 부통령의 주도 아래 국정성과평가팀(NPR)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미국의 행정 개혁은 '정보기술을 통한 정부 재구축' 프로그램을 통해 공무원을 30만명 이상 감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미국 행정 개혁의 성공은 정보기술을 활용한 전자정부의 구현을 통해 이룬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빌 클린턴은 3000억 달러 부채도 갚았고 일자리도 3000만개 창출하였기도했다. 미국인들은 빌 클린턴이 대통령 으로선 좋지만 사생활만 빼면 다 좋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재선, 스캔들과 탄핵. 클린턴의 첫 기간의 말기가 접근하면서 새로운 스캔들이 일어났다. 스캔들은 클린턴과 힐러리 여사가 아칸소주에 있는 화이트워터강을 따라 놓인 대지를 매입한 것에 의심스러운 거래가 있던 후 화이트워터 사건으로 불렸다. 1996년 클린턴은 대통령으로서 2번째 기간으로 재선되었다. 그는 인기있는 투표의 49 퍼센트와 279개의 선거인단과 함께 자신의 공화당 상대 후보 밥 돌을 꺾어 압도적 대승리에 의하여 선거를 이겼다. 클린턴의 2번째 기간은 변호사 케네스 스타의 화이트워터 사건으로 들어간 조사에 의하여 그늘지게 되었다. 조사는 백악관 수련생 모니카 르윈스키와 함께 클린턴의 정사의 고발들이 공개될 때 더욱 심각해졌다. 처음에 클린턴은 정세를 부인하였으나 후에 그는 르윈스키와 부적당한 관계에 있어왔다고 진술하였다. 1998년 12월 19일 하원은 클린턴을 탄핵하거나 르윈스키와 자신의 관계에 관한 서언 아래 거짓말을 한 고발들로 그를 의회에서 재판을 내리는 데 지배하였다. 상원은 그러고나서 탄핵 재판을 지휘하였다. 클린턴은 상원의 탄핵 도청을 향하는 데 미국 역사상 두번째 만의 대통령이었다. 1999년 2월 12일 상원은 클린턴이 무죄였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것에 국민과 의회에 사죄하였다. 2번째 임기 기간. 2000년 6월 5일 러시아의 두마에서 연설하는 첫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자신의 연설에서 그는 러시아인들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미래가 20세기로 치명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해 후순에 그는 자필 서명으로서 온라인 전자 서명을 준 대망의 전자 서명법의 법률로 서명하였다. 화이트워터 사건 조사는 클린턴이나 힐러리 여사가 아무 범죄 행위에 참여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데 충분한 증거가 없던 진술과 함께 9월 20일에 끝났다. 10월 16일 클린턴은 자신들의 국가들에서 진행되는 푝력을 끝내는 데 협정으로 오기를 원했던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와 캠프데이비드에서 긴급 회의에 참석하였다. 바라크와 아라파트는 폭력을 끝내는 데 의도의 문과 함께 회의를 떠났으나 아무 쪽도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같은 달에 클린턴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영구적, 보통의 무역 지위를 준 법안을 서명하면서 자신의 행정부의 주요 성취를 굳게 하였다. 이 일은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의 통과 이래 가장 중요한 미국의 무역 입법으로 숙고되었다. 그해 후순, 클린턴은 0.08 퍼센트에서 만취를 위하여 혈중알콜 한도를 세운 법안을 법률로 서명하였다. 이 것은 이전에 대부분의 주들이 이용한 것보다 엄격한 수준이었다. 법안의 성원자들은 법적으로 술취한 운전자 여부를 결심시키는 데 이용된 이 국가 표준이 매년 수백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클린턴은 자신이 북동부를 위하여 난방유의 별도 준비금을 영구적으로 설립한 2000년 법률에 들어가는 또다른 법안을 서명하였다. 법률은 응급 상황에서 준비금들로부터 기름을 빼는 데 백악관을 위하여 더욱 쉽게 만들었다. 결국 11월 13일 클린턴은 아시아로 역사적 여행을 시작하여 베트남 전쟁 이래 베트남을 방문하는 데 첫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방문의 목적은 하노이와 워싱턴 D. C. 사이의 관계들에 일하는 것이었다. 퇴임 후. 2001년 1월 19일 대통령으로서 클린턴의 마지막 날, 그는 르윈스키 스캔들 조사에서 자신이 오도하는 간증을 주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아무 범죄 고발들을 향하지 않았으나 법률을 실습하는 데 이 라이센스가 정지되었다. 클린턴은 또한 2만 5천 달러의 벌금을 내는 데 명령이 내려졌고, 자신이 아칸소주 법정의 행동 규칙 중의 하나를 어겼다고 인정하였다. 클린턴은 많은 문제들을 대표하여 지속적으로 연설하고 모금하였다. 그가 시간과 돈을 바치는 많은 경우들은 작은 비지니스들, 시티 이어 (젊은이들을 위한 국내적 서비스 프로그램)과 후천성 면역 결핍 (에이즈) 연구와 교육의 경제적 개발을 포함한다. 자신의 대통령직의 후반을 괴롭힌 스캔들과 어려움들에 불구하고, 클린턴은 지속적으로 활발한 공공 인물로 세계에 중요한 많은 문제와 원인들을 후원하였다. 존 F. 케네디 이래 최연소 대통령인 그는 아칸소주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집으로부터 먼 길을 갔다. 2009년 8월 4일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미국 여기자 억류사태 해결 협상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여기자들을 대동하여 귀국했다. 특히 그는 핵문제 해법에 대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뜻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의 방북은 단순한 여기자 2명을 석방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북미 관계와 북핵 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이 일어난 동안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성원하였고, 4년 후에 힐러리 여사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선거 운동을 벌일 때 부인을 성원하기도 하였다. 가족관계. 빌 클린턴과 전 국무장관인 힐러리 여사 사이에 1980년생의 외동딸 첼시 클린턴이 있다. 백악관에서 사춘기를 보낸 첼시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옥스포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NBC 뉴스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현재 클린턴 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첼시의 결혼 후, 클린턴 부부는 현재 3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다. 기타. 나이에 비해 상당한 동안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둘의 외모를 비교해보자면 트럼프 쪽이 훨씬 나이들어 보이지만 사실 둘 다 1946년 생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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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비에이라 데 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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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 오일러
레온하르트 오일러(, , 1707년 4월 15일 ~ 1783년 9월 18일)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논리학자, 공학자이다. 그는 미적분학, 그래프 이론, 위상수학, 해석적 수론 등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함수 기호 formula_1(1734년에 처음으로 사용)을 처음 도입하였다. 고전역학, 유체역학, 광학, 천문학 및 음악 이론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다. 오일러는 18세기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이 분야에서 다른 어떤 수학자보다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는데, 약 92권의 전집과 866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일생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보냈다. 생애. 성장기.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개신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6명의 아이들 중 첫째로 태어났으며, 두 여동생과 한 남동생이 있었다. 오일러가 바젤에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스의 리헨으로 옮겨 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후 베르누이는 어린 오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후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에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그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오일러는 1726년에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참가해 2등을 하였으며, 이후 매년 열리는 이 상을 12번 수상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이즈음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수학/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이 제의를 수락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하였지만, 탈락하였다. 1727년 5월 17일에 오일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고, 그는 곧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공동 연구 작업도 활발하게 했다. 오일러는 러시아어를 익히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제공했다.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 1734년 1월 7일, 오일러는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의 화가 게오르크 젤(Georg Gsell)의 딸인 카타리나 젤(Katharina Gsell)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네바강 옆의 집을 샀으며, 13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5명만이 살아남았다. 베를린 시절. 1741년 6월 19일, 오일러는 러시아에서의 혼란을 피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으로 베를린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였다. 그는 베를린에서 25년 동안 살면서 약 380편의 논문을 썼다. 1755년에 오일러는 왕립 스웨덴 과학한림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오일러는 또한 프리드리히의 조카이자 안할트 공국의 공주인 프리데리케 샤를로테(Friederike Charlotte)를 가르쳤다. 1760년대 초 오일러는 그녀에게 2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썼으며, 후에 이 편지들은 묶여 '독일 공주에게 보내는 오일러의 편지()'라는 저서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오일러의 인격과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수학 및 물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설명이 나타나 있다. 오일러의 많은 업적이 아카데미의 명성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결국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궁정에 많은 지식인 집단이 있었으며, 수학자가 수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정교하지 않고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일러는 기존의 사회 질서나 관습적인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단순하고 경건한 종교인이었는데, 이는 당시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던 볼테르과는 여러 면에서 정반대였다. 오일러는 숙련된 토론자가 아니었고, 그가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주 볼테르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시력 악화. 러시아에서 수학을 연구하는 동안 오일러의 시력은 점차 악화되었다. 고열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 3년이 지난 1738년에 그의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시력은 독일에 있는 동안 더 악화되었고, 그런 오일러를 프리드리히 대왕은 키클롭스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하였다. 1766년에는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하였고, 수술이 실패하여 왼쪽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오일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뛰어난 암산 및 암기 실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는데, 일례로 그는 약 1만 3천 행에 달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여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775년에는 매주 평균 한 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묻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사망. 1783년 9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오일러의 마지막 모습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오전에도 오일러는 팽창하는 풍선의 속도를 계산하고 있었으며 오후에는 동료와 함께 새로 발견된 천왕성의 궤도에 관해서 대화를 나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파이프를 물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린 손자들과 놀아 주던 그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몇 시간 후 사망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오일러에게 바치는 추도사에서 이 장면을 묘사하며 "그는 계산하는 것과 사는 것을 멈췄다."라고 썼다. 이 일화는 훗날, 헝가리의 저명한 수학자가 되는 에르되시 팔이 신발을 신고 죽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오일러가 뇌출혈로 쓰러질 때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을 석판에 썼다거나 말로 남겼다는 설이 있다. 업적. 오일러는 기하학, 미적분학, 삼각법, 대수학, 정수론 등 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뿐만 아니라 연속체 역학, 천문학 등 여러 물리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많은 수학 개념에 오일러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상수가 두 개인(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와 오일러 상수) 유일한 수학자이기도 하다. 수학 기호. 오일러는 현재 사용하는 많은 수학 기호들을 도입하거나 대중화하였다. 그는 함수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변수 x에 대한 함수 f를 formula_1로 표기하였다. 또한 현대의 삼각함수 표기법을 도입했으며, 자연로그의 밑을 formula_3(오일러 수라고도 함.)로 표기하였다. 수열의 합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 문자 Σ를 사용하였고, 허수 단위를 formula_4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원주율을 formula_5로 표기하는 것을 대중화시켰다.(formula_5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웨일스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이다.) 해석학. 18세기에 베르누이 일가는 아직 기초 단계에 머무르던 미적분학이 발전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오일러는 미적분학을 주로 연구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오일러가 남긴 몇 가지 증명은 현대 수학에 비추었을 때 엄밀한 증명은 아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미적분학이 발전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오일러는 멱급수를 연구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아래와 같은 여러 함수들을 멱급수 꼴로 나타내었다. formula_7 오일러는 formula_3와 역탄젠트함수가 멱급수 꼴로 표현됨을 증명하였으며(간접적인 증명은 1670년과 1680년 사이에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제시하였다.), 1735년에는 멱급수를 이용하여 바젤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1741년에 바젤 문제의 더 정교한 증명을 제시하였다. 오일러는 지수함수와 로그함수를 해석적으로 정의하였다. 그는 로그함수를 멱급수 꼴로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음수와 복소수 영역으로 로그함수의 정의역을 확장시켰다. 또한 지수함수의 정의역도 복소수까지 넓혔으며,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의 관계를 나타내는 오일러 공식을 발견하였다. 다음의 오일러 공식은 실수 formula_9에 대해 허수지수 formula_10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formula_11 formula_12일 때는 다음의 오일러 항등식을 얻을 수 있으며, 오일러 항등식은 기본 연산인 덧셈, 곱셈, 지수와 수학에서 중요한 상수인 0, 1, formula_3, formula_4, formula_5가 한 번씩 들어간다는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불린다. formula_16 이 외에도 오일러는 감마함수를 도입하여 초월함수를 정교화하였고, 사차방정식의 새로운 풀이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복소수 극한의 적분을 계산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이는 복소해석학으로 발전하였다. 또 오일러는 미적분학의 한 분야인 변분법을 창시하였으며,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일러는 정수론 분야의 문제를 해석적으로 접근하였는데, 이로써 수학의 서로 다른 분야였던 해석학과 정수론을 합친 해석적 수론이 탄생하였다. 오일러는 초기하함수, 쌍곡선 함수에 대한 이론 및 연분수에 대한 해석적 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조화급수가 발산함을 이용하여 소수의 무한성을 증명하였으며, 소수의 분포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해석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오일러의 업적은 이후 소수 정리로 발전하였다. 정수론. 오일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동료였던 크리스티안 골드바흐에게 영향을 받아 정수론에 흥미를 가졌다. 정수론에서 오일러의 많은 초기 업적들은 피에르 드 페르마가 한 일에 기반을 두었으며, 오일러는 페르마의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키거나 반증하였다. 오일러는 소수의 분포에 대해 해석적으로 접근하였으며, 소수의 역수의 합의 발산성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그는 리만 제타 함수와 소수의 관계를 발견하였고, 이는 리만 제타 함수에서의 오일러 곱으로 알려져 있다. 오일러는 뉴턴 항등식, 페르마 소정리, 페르마 두 제곱수 정리를 증명하였고, 라그랑주 네 제곱수 정리를 증명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또 양의 정수 "n"에 대해 "n"과 서로소인 1부터 "n"까지의 정수의 개수를 나타내는 오일러 피 함수 φ("n")를 만들었다. 그는 이 함수를 사용하여, 페르마 소정리를 일반화한 오일러의 정리를 증명하였다. 오일러는 완전수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짝수 완전수와 메르센 소수가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오일러는 이차 상호 법칙을 추측하였으며, 이 법칙은 이후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증명하였다. 1772년에 오일러는 231 − 1 = 2,147,483,647이 메르센 소수임을 증명하였고, 이는 1867년까지 알려진 가장 큰 소수로 남아있었다. 그래프 이론. 1735년에 오일러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로 알려진 다음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는 프레겔 강이 흐르는데, 이 강에는 두 개의 큰 섬과 각 섬을 연결하는 총 7개의 다리가 있었다. 이때 7개의 다리들을 한 번씩만 건너면서 처음 시작한 위치로 돌아오는 길이 존재하는가가 문제였고, 오일러는 그러한 길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이 문제는 평면 그래프에서의 한붓그리기 문제로, 그래프 이론의 시초로 여겨진다. 오일러는 또한 1752년에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로 불리는 식 formula_17를 발견하였다. formula_18는 다면체의 꼭짓점 개수, formula_19는 다면체의 모서리 개수, formula_20는 다면체의 면의 개수이며, 상수는 3차원에서의 오일러 지표로 곡면 종수와 관련된 값이다. 이 식은 이후 오귀스탱 루이 코시와 시몽 앙투안 장 륄리에에 의해 발전하였으며, 위상수학의 시초로 여겨진다. 응용 수학. 오일러는 실제 세계에서의 문제를 분석적으로 해결하는 것과, 베르누이 수, 푸리에 급수, 오일러 수, 자연로그의 밑, 원주율, 연분수와 적분 등을 응용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물리 문제에 미분을 쉽게 적용하도록 발전시켰고, 오일러 근사으로 알려진 적분의 수치근사를 개선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잘 알려진 오일러 근사로는 오일러 방법과 오일러-매클로린 공식이 있다. 오일러는 또한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를 도입하여 미분방정식의 사용을 용이하게 하였다. 오일러는 수학적 아이디어를 음악에 응용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1739년에 음악 이론이 수학의 한 분야로 통합되기를 바라면서 《Tentamen novae theoriae musicae》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음악가에게는 너무 수학적이라는 이유로, 수학자에게는 너무 음악적이라는 이유로 폭넓은 관심을 받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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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방
중국어 방 혹은 중국인 방()은 존 설(John Searle)이 튜링 테스트로 기계의 인공지능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실험이다. 사고 실험.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모르는 중국인이 보면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중국어 질문을 이해하지 않고 주어진 표에 따라 대답할 뿐이다. 이로부터 중국어로 질문과 답변을 완벽히 한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진짜로 이해하는지 어떤지 판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능이 있어서 질문 답변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도 그것이 지능을 가졌는지는 튜링 테스트로는 판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정형화된 논증. 1984년 설은 좀 더 정식적인 버전으로 ‘중국어 방’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리해서 발표했다. 그의 전제는 네 명제로 이뤄져 있다. 두 번째 전제는 중국어 방을 통한 논변으로 뒷받침되었고, 때문에 존 설은 오직 형식적인 통사론적 규칙에 따르는 방을 유지시켰으며 또한 이 방 안의 존재는 중국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 설은 곧바로 세 가지의 결론을 도출했다. 설은 이 논증을 “과도하게 조야한(excessively crude)” 것으로서 기술한다. 이 논증이 실제로 타당한지에 대한 고려할 만한 논박이 존재한다. 그 논의들은 전제를 분석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집중되어있다. 어떤 이는 전제 3이 컴퓨터 프로그램은 통사론적 내용을 포함할 수 있지만 의미론적 내용은 포함할 수 없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전제 2, 3, 4는 타당하게 결론 1을 도출해 낸 것으로 결론낼 수도 있다. 이것은 논쟁을 컴퓨터 프로그램의 의미론적 내용의 기원으로 이끌고 간다. 반론. 이와 같은 논리를 뇌 안의 뉴런과 언어이해력에 대해 적용해 보면, 인간조차 언어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해지고 만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안의 사람과 중국어 방을 더한 총체는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실제로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방법이 중국인 방 이론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예로 애플사의 시리는 본질적으로는 미리 저장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입력된 문장을 분석하고 적당한 문장을 출력하는 '중국인 방 이론'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리가 아주 훌륭한 인공지능의 예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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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파일
컴퓨터 파일(, 순화어: 기록철)은 컴퓨터 등의 기기에서 의미가 있는 정보를 담는 논리적인 단위이다. 하드디스크, CD, DVD 등 저장매체에 대하여 추상화된 정보 단위이다. 운영체제는 파일 조작에 관련된 기능을 API로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파일의 이름과 확장자로 식별하며, 운영 체제에 따라 대소문자를 구별하거나 구별하지는 않는다. 역사. "파일"이라는 낱말은 1952년 일찍이 천공 카드에 저장된 정보를 가리키는 뜻으로 컴퓨터 기억 장치 환경에 나타났다. 이용 초기에 사람들은 콘텐츠라기 보다는 뒷받침하는 하드웨어 자체를 가리키는 개념에서 파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IBM 350 디스크 드라이브는 "디스크 파일"이라고 불렸다. 1962년의 CTSS(호환 시분할 시스템)와 같은 시스템은 여러 개의 파일들을 하나의 기억 장치에 제공하였던 파일 시스템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현대의 용어로 자리잡게 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CTSS에서의 파일 이름은 사용자가 인지할 수 있는 기본 이름(primary name)과 파일 형태를 가리키는 두 번째 이름(secondary name),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비롯한 여러 운영 체제에서 이러한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용어 레지스터 파일이 파일의 초기 개념을 보여주고 있으나 점차 이러한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이용. 운영 체제와 그에 수반되는 파일 시스템에 따라 프로그램이 파일을 이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지만 다음의 기능이 일반적으로 활용된다: 종류. 파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텍스트 파일은 ASCII나 유니코드로 이루어진다. 보통, 텍스트 파일들은 메모장 (소프트웨어) 로 읽을 수 있다. 이진 파일은 0 또는 1의 데이터의 연속을 저장한 파일이다. 대부분의 문서 편집기에서는 파일이 열리지 않거나 글자가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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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단말기
개인 정보 단말기()는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사용하는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고 가벼운 컴퓨터이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계산장치라는 의미의 휴대용 소형 컴퓨터에 개인의 일정관리와 검색, 관리 기능이 있는 주소록의 기능을 추가한 것을 말한다. 또,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의 자료를 서로 주고 받기 쉽다. 현재는 PDA와 휴대 전화의 기능을 합친 스마트폰이 대중화됨에 따라서 PDA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슈퍼마켓 또는 편의점에서는 정보 누출 우려로 인해 PDA를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개요. 이 용어는 1992년 라스베이거스 전자 전시회(CES;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선보인 애플사의 뉴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6년 Psion 3 와 팜 파일럿이 최초로 PDA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하였다. 현재 PDA의 주요 운영 체제로는 팜소스사의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CE, 리눅스, 심비안 등이 사용되고 있다. 초기에서는 개인 일정 관리 위주의 수첩 대용이었으나, PDA폰으로 대중화된 이후, 이동통신 기능뿐 아니라, 카메라, 무선랜, GPS 등의 여러 기능을 쓸 수 있게 발전하고 있다. 역사. 만약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PDA의 정의에 맞는 기기를 추적해 볼 때 현재로서 발견된 최초의 PDA는 영국의 Psion plc.가 출시한 포켓 컴퓨터 Psion Organiser이다. 이때는 PDA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Psion사는 이 제품을 "최초로 쓸만한 포켓 컴퓨터"로 정의하였다. 첫번째 모델은 현재의 공학용 계산기의 기능과 형태에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부가되어 있었으며, 개발자가 만든 프로그램의 구동이 가능하고 저장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 모델은 다른 장치와 연결할 수 있었다. 1991년 HP사에서 로터스 1-2-3을 휴대하기 편리하게 쓰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만든 HP95LX은 비록 팜탑 컴퓨터였고 팜탑 컴퓨터로서 판매되었지만, 마찬가지로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역시 PDA의 정의에 부합한다. 이 제품은 모바일 OS가 아닌 MS-DOS를 사용하였고, 로터스 1-2-3과 PIMS를 롬에 내장시켰으며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비표준 디스플레이 및 카드 슬롯과 제한된 메모리 용량으로 인해 일반적인 도스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HP는 1994년에 후계작 HP200LX를 출시했다. HP200LX는 640*240 해상도의 CGA 디스플레이와, 2 메가바이트 메모리, 표준 PCMCIA 슬롯을 사용했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것을 한국에서 보험설계사 공급용으로 대량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8년에 단종되었다. 키보드 입력과 텍스트 응용 프로그램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PDA의 대중화에 한 몫 하였다. 최초의 PDA와 관련한 내용은 누군가 잘못된 정보로 작성된 글이 일반화되는 오류가 거듭되고 있다. 1992년 애플이 PD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는 PDA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따라서 Psion 제품을 최초의 PDA 제품이라고 할 수 없으며, HP 95LX, 200LX 제품군은 PDA가 아니라 팜탑(노트북)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반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모두 PDA라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PDA들은 범용성을 위해 모바일 OS와 더불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SDK를 제공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최근 스마트폰이란 용어로 통일 되었으나 1990년대 2000년대 초에는 의미가 달랐다. 과거 PDA폰은 핸드폰과 PDA 기능이 결합된 제품, 스마트폰은 핸드폰과 PDA의 기능이 결합 되었으나 기능적으로 부족한 제품들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PDA폰에는 터치 스크린이 적용된 반면 스마트폰에는 일반 스크린이 적용되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사용된 포켓 PC는 각 모뎀별로 호환이 서로 되지 않았으나, 2003년 Windows Mobile 2003이 출시되며 이 문제가 해결되었고 윈도우는 스마트폰 대중화 이전인 2000년대 후반까지 PDA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였다. 쓰임새. 일정관리. 하루의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알람 기능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입력 자료를 동기화시킬 수 있다. 또한 작업 스케줄을 조정하는 기능도 제공한다. 주소록. 가나다/A to Z 순으로 조회를 할 수 있는 주소록은 데스크톱과 연동하여 관리할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과 연동할 수 있다. 기타 응용. 개념이 애매 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PDA는 개인 정보 관리에서 시작하여 개인용 컴퓨터를 대체 하기 위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용량의 한계 때문에 UMPC 등이 출시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 일반 대중에게 흥미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어 단종의 길로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기타 응용에서는 운영 체제마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원하는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산기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계산기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게임을 설치하여 휴대용 게임기로도 활용이 가능한 등, 본래 기능 이외에 부가적으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있는 것이 PDA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산업용. 산업용 PDA는 산업시장에서 요구되는 휴대성·컴퓨팅 성능·높은 확장성·견고함을 충족하여 일반 PDA 및 스마트폰과 구별되는 PDA이다. IP rate (방진,방수)과 낙하충격에 대응하는 견고함과 바코드 스캐너, 내장프린터, RFID reader, 마그네틱카드리더, GPS등을 내장 혹은 외장형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업무용도로 적용될 수 있다. 현재는 다양한 vertical market에서 요구되는 제품들로 인해 굳이 산업용 (industrial PDA)라고 명명하기 어려우나 대표적으로는 industrial & enterprise PDA 또는 Rugged Mobile computer로 불리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TOP3 제조사로는 모토톨라(구 Symbol), Intermec, Honeywell(HHP를 인수)사가 있고 모두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중 모토롤라가 전 세계 약 4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메이저 업체로는 Psion Teklogix, DataLogic, Casio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산업용 PDA 제조사가 존재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용 PDA 제조사로는 블루버드 (Bluebird)가 있고, 그 외 캐치웰(구:이노텔리텍), M3 Mobile(구: 모바일컴피아), 대신정보통신, 포인트모바일, 웅진ST, 모비트론, ITwell, 비인터렉티브 등 여러 업체가 있다. 전 세계 Mobile Computer Manufacturer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개인용 스마트폰 대형 제조사 중 하나인 대만 HTC에서도 바코드 스캐너를 내장한 PDA를 런칭하였고, 중국과 인도의 중소규모 전자업체에서도 산업용 PDA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추세이나 영향력이 높지않다. PDA의 운영 체제. PDA의 운영 체제는 크게 4가지가 있다.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의 포켓 PC, 애플의 iOS 그리고 심비안의 EPOC 등 크게 3가지가 있다. 또 리눅스와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셀빅도 있다. 팜 OS. 1996년에 처음으로 출시하였다. 팜은 세계 PDA의 약 60%를 차지한다.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많고 배터리 소비가 적으며 많은 반MS 기업과 제휴를 맺었다. (삼성, 소니 등) 윈도우 기반.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PDA의 운영 체제는 윈도우 CE, 포켓 PC와 윈도우 모바일이 있다. 윈도우 CE는 PMP와 같은 기기에 주로 사용되며, 포켓 PC는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운영 체제로 구형 PDA에, 윈도우 모바일은 최근의 PDA에 사용된다. 윈도우 CE. 개인용 컴퓨터용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비슷하며 대개 배터리 소모가 많다. 초기 윈도우 CE 1.0의 경우는 엄청나게 많은 전력 소모와 느린 처리 시간 때문에 외면 받았지만 많은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개선되었다. 포켓 PC. 윈도우 CE 코어를 기반으로 하는 운영 체제이다. 320x240, 640x480, 320x320의 해상도를 지원하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승인을 거친 기기만 포켓 PC 라이선스를 취득할 수 있다. 2007년에 윈도우 모바일 6이 공개되면서 포켓 PC라는 명칭이 더 이상 자사 제품에 사용되지 않는다. iOS. 애플의 iOS는 맥 OS XPC판과 비슷하며, 아이폰, 아이폰 4, 아이팟터치 및 아이패드에 채용되었다. 셀빅. 대한민국 기업인 제이텔이 만든 PDA이자 운영 체제의 이름이다. 셀빅 OS라는 독립적인 운영 체제를 자체 개발하였는데 한글 지원이 내장되어 있어 사용하기 편하다. 셀빅 OS는 팜 OS와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이 있으나 응용 프로그램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컬러를 지원하는 2.0까지 개발되었으나, 경영난으로 인해 현재는 사실상 회사가 없어진 상태로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리눅스 기반. 리눅스를 기본 운영 체제로 탑재한 PDA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샤프(Sharp) 사에서 만든 자우루스(Zaurus)는 가장 많은 소프트웨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우루스의 운영 체제는 큐토피아(Qtopia)로 리눅스 커널 2.4.20을 기반으로 한다. 오픈 자우루스(open zaurus)로 샤프(Sharp) 사와는 별도로 만들어진 리눅스도 있다. 또한 대한민국 벤처기업인 지메이트사에서 만든 요피(YOPY) 시리즈가 있으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 현재는 제품이 단종되고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참고로 요피의 운영 체제인 리누피(Linupy)는 커널 2.4 기반의 엑스 윈도우(X-Window) 시스템을 사용한다. 현재 HP iPaq, 팜 및 다른 여러 기기에 리눅스를 탑재하려는 노력이 개인 또는 회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는 구글이 리눅스 커널 기반으로 개발한 운영 체제로서, 스마트폰, PDA, 스마트북 등에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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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용 컴퓨터
개인용 컴퓨터()는 기업이나 가정에서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말한다. 보통 책상 위에 놓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 PC라는 이름은 1970년대 초 미국의 IBM사와 휴렛 팩커드사가 발매한 기종에 처음 사용되었다. 이 때는 트랜지스터 방식이었으나 그 후 마이크로컴퓨터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PC 시대를 맞게 되었다. 역사. PC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IBM에서 생산한 개인용 컴퓨터의 상품명인 IBM PC에서 유래하고부터이다. 한국에는 1980년대에 도입되어 1990년대 이후 인터넷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각종 디지털 정보의 저장·관리·통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음악 감상, 게임, 채팅 등에 쓰이기도 한다. 최초로 상업적으로 판매된 개인용 컴퓨터는 MITs사의 이었으며, 이를 본따 많은 개인용 컴퓨터가 출시되었다. 이후 애플 II컴퓨터, 코모도어 VIC-20 등이 상업화에 성공하였다. 1980년대 이후, MS와 인텔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MS-DOS와 윈텔 플랫폼으로 대부분 지배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PC가 16비트에서 32비트로 개편될 조짐을 보였고, 그 후 32비트로 전환되었다. 현재는 컴퓨터 성능이 발전하여, 64비트 컴퓨터가 보급되고, 코어가 여러 개인 CPU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1970년대 8비트 시대. AIM - 65 1974년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등장하면서, 개인도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소형 컴퓨터가 등장했다. 개인용 컴퓨터는 1974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는 Altair 8800(앨테어 8800)이었다. 애초에 개인용 컴퓨터 (personal computer라는 말부터 Altair 8800의 설계자인 에드 로버츠가 최초로 언급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 후 애플 컴퓨터, 탠디 라디오셱, 코모도, 아타리 등 8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탑재한 제품이 등장했다. 특히 애플 II는 스프레드시트의 VisiCalc가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어서 큰 성공을 하였다. 8 비트 시대의 개인용 컴퓨터는 CP/M이나 OS-9 또는 DISK-BASIC을 운영 체제로 사용하였다. 또한 ROM-BASIC를 표준으로 탑재한 컴퓨터가 가장 많았고, OS 부팅 디스크가 없는 경우는 ROM-BASIC이 자동으로 시작되었다. 1980년대 16비트 시대 사무실에 보급. IBM PC(IBM 5150) 1981년 16 비트 IBM PC가 등장하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IBM PC에서 사용되는 인텔의 x86 계열의 CPU와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 프로그램이 주류(사실상 표준)가 되었다. 또한 컴팩 등으로 구성된 IBM PC 호환기종 시장이 형성되고, "개인용 컴퓨터"의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스프레드시트는 로터스 1-2-3, 워드 프로세서는 워드 퍼팩트(일본에서는 이치타로)가 보급되었다. 1984년에 등장한 매킨토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념을 크게 보급시키는 데 성공하여, 다음 세대 컴퓨터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5년 매킨토시에서 동작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이 등장했고, 그 인터페이스는 다음 윈도 응용 프로그램의 원형이 되었다. 1990년대 32비트 시대 인터넷의 보급. 1990년대 초반까지 아미가와 코모도어 64, 아르키메데스 같은 취미용의 컴퓨터는 여전히 일정한 점유율을 유지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에서 IBM PC 호환기종 및 매킨토시가 PC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91년에 윈도 3.0이, 1995년에 윈도 95가 출시되어 기존의 "16비트 DOS"에서 점차 "32비트 윈도"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파워 유저는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에 맞먹는 기능을 가진 OS/2나 윈도우 NT, 더욱 강력한 OPENSTEP를 사용 PC에서 PC - UNIX 이용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인터넷이 급격히 발전하여, 개인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넷스케이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 등의 사이에서 웹 표준을 놓고 브라우저 전쟁이 발생했다. 1998년 "인터넷을 위한 차세대 PC"라고 이름을 붙인 iMac이 등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새로운 신기술이 사용되어 1990년경 16 - 20MHz 정도였던 PC용 CPU의 클럭은 2000년 1GHz에 도달했다. 2000년대 64비트 시대 상품화 및 이용 형태의 다변화. 2001년 매킨토시 OS가 OPENSTEP 기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맥 OS X가 세상에 등장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는 윈도 NT를 기반으로 하는 윈도 XP가 출시되면 윈도 NT와 윈도 9x 계열의 제품 라인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2003년 최초의 64 비트 PC인 파워맥 G5 (PowerPC 970 포함)이 발매되고, 이어 x86의 64비트 확장 버전인 AMD64 (x86 - 64)가 등장했다. OS는 윈도가 여전히 주류이지만, 오픈 소스 GNU / 리눅스 시스템도 일부 보급되고있다. 2000년대에는 개인용 컴퓨터 (PC / AT 호환 기종)의 상용화가 진행되었다. 독자 플랫폼을 견지하고있는 애플을 제외한 PC 제조 업체들은 가격 경쟁 격화로 인한 곤경에 몰리고 개편도 잇따랐다. 2002년 휴렛 팩커드의 컴팩 인수, 2004년 IBM의 개인용 컴퓨터 사업 레노버에 매각, 2007년 에이서의 팩커드 벨 인수 등 주요 제조 업체의 재편이나 과점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세이코, 샤프, 미쓰비시 전기, 산요전기 등 개인용 컴퓨터 사업의 축소나 철수가 진행되었다. 한편, 2000년대에는 많은 개인 PC가 보급되었다 하여 PC에 연결하여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정보 기기와 가전 제품이 보급되었다.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은 컴퓨터 사용의 확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필름 카메라와 미니 디스크 (MD)의 수요의 대부분을 대체했다. 2001년, 애플은 PC를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연결하는 허브 (중심)를 담당하는 "디지털 허브"에 자리잡는 비전을 제시하고 iPod을 윈도에 대응함으로써이 개념을 보급시켜 갔다. 다른 PC 메이커도이 기기의 정보를 저장하고 가공하는 기기로 PC를 입지 수요를 환기하고있다. 2007년부터는 최소 성능을 가진 저렴한 가격의 컴팩트한 노트북이 보급되어 후에 넷북라는 장르를 형성했다. 이 배경에는 클라이언트에서 처리는 최소화하여 네트워크 대상 서버 측에서 처리의 대부분을 클라우드 컴퓨팅 등의 보급을들 수있다. 또한 AJAX 등을 기반으로 한 클라우드 컴퓨팅의 보급을 배경으로 다시 브라우저 전쟁이 발발, 사파리, 구글 크롬을 중심으로하는 웹키트 계열 브라우저와 모질라 파이어폭스가 나타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독점하는 상황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2011년대에 들어서, 쿼드코어 CPU가 널리 보급되게 된다. 판매율은 2010년 하반기 30%에서 2011년 2월에는 46%까지 상승하였다.. 종류. 개인용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소프트웨어. 컴퓨터 소프트웨어란, 컴퓨터 프로그램과 절차 및 컴퓨터에 대한 지시사항울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다. 소프트웨어는 워드프로세서같은 응용 소프트웨어, 운영 체제같은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미들웨어로 나뉜다. 시장 경쟁.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IBM의 PC와 애플의 매킨토시가 경쟁했다. 그러다 다른 회사에서 IBM 제품과 호환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됨으로써 PC의 기술은 많은 업체들의 경쟁으로 빠르고 폭넓게 발전해 나갔다. IBM이 PC를 개발할 때 자사의 기술은 바이오스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곧 컴팩이 특허법의 헛점을 이용하여 IBM의 바이오스를 합법적으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하여 복제해 내었다. 그로 인해 PC는 고속의 발전을 이룬다. 초기의 PC는 매킨토시보다 성능이 훨씬 떨어졌고 컬러도 아닌 흑백화면이었으나 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싼 매킨토시 대신 PC를 사용하였다. IBM은 PC의 후속기종으로 PS/2를 만들었고 PS/2에 대해서는 로열티를 받으려 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과 업체들은 로열티를 주지 않아도 되는 PC를 계속 사용하였고 결국 PS/2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애플의 매킨토시는 잠시 사용 허가서를 다른 기업에게 넘겼지만 이내 회수했다. 이에 따라 PC는 확장이 자유로운, 매킨토시는 구성이 일관된 특징이 드러난다. 관련 박람회. 해마다 독일의 하노버에서 열리는 세빗에서는 최신 컴퓨터 모델과 미래형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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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스크린
터치스크린(, )은 사용자가 화면의 특정 부분을 손가락 또는 스타일러스 같은 특수 장치로 터치하여 일정한 명령이 실행되도록 만든 접촉식 디스플레이, 입력 장치, 포인팅 장치이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손가락이나 손으로 기기의 화면에 접촉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를테면 모니터에 특수 직물을 씌워 이 위를 손으로 눌렀을 때 감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터치스크린은 스타일러스와 같은 다른 수동적인 물체를 감지해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키오스크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직접 손으로 짚고, PDA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스타일러스 펜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트펜과 같이 감지된 물체가 능동적이라면 터치스크린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이에 적용되지 않는다. 역사. E.A. 존슨은 1965년에 출간한 짧은 논문에서 정전식 터치스크린에 대한 그의 작업을 기술하였고, 그 뒤 1967년 출간한 논문에서 사진과 다이어그램과 함께 더 자세히 기술하였다. 멀티터치 기술은 1982년 시작하였고 당시 토론토 대학교의 입력 연구 그룹이 최초의 인간 입력 멀티 터치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종류. 광학식. 광학식 터치스크린은 터치스크린의 꼭짓점에 장착된 적외선 카메라와 적외선 조명이 화면을 터치하려는 물체의 그림자로 좌표를 측정하여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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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백과사전(百科事典, , )은 학문, 기술, 예술 등 자연과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한 다방면의 지식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항목마다 풀이한 책으로 주로 참고서로서 활용한다. 백과사전의 영어명 ‘encyclopedia’는 그리스어의 ‘ἐγκύκλιος’와 ‘παιδεία’의 결합을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데, 온갖 종류의 지식을 가르쳐 기른다는 뜻이다. 즉, 백과사전의 원래 목적은 '교육'이었다. 한편 백과사전의 또 다른 목적으로는 '참고'가 있다. 현대의 백과사전들은 '교육'과 '참고' 모두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백과사전에서 내용 분류의 단위이자,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을 '표제어'라고 한다. 표제어의 범위에 따라 백과사전의 종류가 나뉘는데, 넓은 범위를 갖는 표제어들로 백과사전을 구성하는 것을 대항목주의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표제어를 이용하는 것을 소항목주의라고 한다. 대항목주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고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교육 목적의 백과사전이 유명한 학자의 논문을 모아서 엮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소항목주의를 채택한 백과사전은 표제어별로 간결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대항목주의에 비해 다양한 표제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장점이 있어서 참고 목적의 백과사전에 많이 쓰인다. 오늘날의 백과사전은 절충한 방식이 많으며, 내용에서도 문장 서술뿐만 아니라, 사진, 삽화, 도표 등 다양한 참고자료가 함께 제공되는 형태가 되었다. 현대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서적의 형태가 아니라 CD-ROM, DVD-ROM의 형태로 된 것도 있으며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것도 등장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온라인으로 서비스해주고 있는 한국어 백과사전으로는 한국어 위키백과,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등이 있다. 백과사전의 역사. 백과사전의 기원은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가 편찬한 박물지이다. 편찬방식이 중국에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책을 항목별로 분류하여 엮은 동양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유집(類集)과 같았다. 이 유집과 같이 편찬하는 것은 17세기까지 편찬하였다. 최초의 알파벳 배열 백과사전은 1674년 모레리가 역사대사전에서 시도하였고, 그 이후 알스티드가 "Encyclopaedia Septem Tomisdistincta"에도 이용하였다. 참고로 항목별로 종류에 따라 모았다는 의미에서 유집은 유서(類書) 및 유취(類聚), 휘집(彙集) 등으로도 불린다. 백과전서 이후. 1728년 체임버스가 편찬한 백과사전이 현대적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백과사전은 알파벳순으로 배열하고 상호참조표시를 하고 논문을 수록하였다. 이후 체임버스는 증보판을 출간하였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프랑스에서는 백과전서파 시대가 있었다. 백과전서는 디드로가 중심이 되어 루소, 케네, 볼테르 등 계몽주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2권이 1751년 발간되었는데, 발행금치처분을 받았다. 이후 디드로가 더욱 만들어 1772년 28권을 완성시키고, 보유5권과 색인을 참가시켜 모두 35권으로 완성시켰다. 또한 이와 비슷한 해에 19세기 세계대사전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후 이 책은 라루스 백과사전이 된다. 같은 세기 영국에서는 세계적인 백과사전 브리태니커를 1768년부터 매주 분책으로 발행하여 71년에 3권으로 만들었다. 백과사전은 더욱 발전하여 현재 대한민국에는 두산백과사전 등이 있다. 현대의 백과사전. 동양의 백과사전. 일본의 백과사전. 현대적인 백과사전은 1972년에 전32권으로 완간된 고단샤(講談社)의 《휴먼라이프 엔사이클로페디아》을 시작으로, , 1980년 가쿠슈겐큐사(學習硏究社)의 전32권 《그랜드 현대백과사전》, 헤이본샤(平凡社)에서 1988년 완간한 전35권의 《세계대백과사전》, 1988년 쇼가쿠칸(小學館)에서 전25권으로 간행한 《대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등이 있다. 중국의 백과사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80년부터 《중국대백과전서》가 발행되기 시작하였고, 타이완에서는 1981년에 중국문화대학 중화학술원이 편찬한 전20권의 《중화백과전서》가 발간되었다. 한국의 백과사전. 한국의 현대적 백과사전은 1958년 문학과 교양서적을 전문출판하던 학원사(學園社)에서 간행한 《대백과사전》을 시초로 한다. 4·6배판 전체 6권으로 1958년 9월 25일 제1권을 출판한 후 8년에 걸쳐 완성했다. 4 명의 편집진과 435명의 집필진이 참여하였고, 원고는 10만 매가 넘었다. 그 후 증보판 2권이 출간되었으며, 1967년에는 전12권의 《세계백과대사전》으로 개정되어 1970년에 전15권, 1973년에 전20권으로 증보된 신판이 발간되었다. 사전류 전문출판사인 동아출판사에서는 1959년 한권으로 발간한 《새백과사전》, 1964년 전2권의 《국민생활백과사전》을 거쳐, 전30권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을 1978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982년 9월부터 2권씩 출간, 1984년 완간하였다. 여기에는 13만여 항목이 수록되고 4만여 컬러 사진 및 8천여 흑백 사진이 삽입됐으며, 1986년과 1990년에 각각 보유편이 발간되었다. 이것은 후에 1996년 8월에 두산동아(주)에서 출간된 전 30권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으로 이어졌는데, 128167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으며 5개의 CD-ROM이 포함되었다. 1974년 태극출판사(太極出版社)에서 전16권으로 간행한 《대세계백과사전》에서는 다른 백과사전들과는 달리 가나다순의 사전식 배열이 아니라 주제별로 항목을 분류하였다. 동서문화사에서는 《한국세계대백과사전》을 1992년부터 시작하여 1995년에 전30권으로 간행하고, 1997년 8월 8일에 총 31권으로 완간하여 1999년에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으로 개편하였는데, 총13만 항목과 15만 색인이 수록되었고 기존의 백과사전에서 누락되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항목과 공산주의 이념까지 포함되었다. 학원출판공사에서는 전 32권의 《학원세계대백과사전》을 간행하는데, 3년의 준비 기간과 5년의 편집 기간을 거쳐 1993년 1월부터 출간하여 1994년에 완간되었다. 이것에는 14만 5천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고 기존 백과사전과 달리 30여개의 기본 동사가 표제어로 포함되었다. 한편, 외국의 백과사전이 번역된 것으로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이 1989년부터 발간되어 1994년 3월에 전 27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총 11만여 항목이 수록되었으며 제26권은 참고 문헌, 제27권은 색인으로 되어 있다. 1972년에 계몽사에서 만든 컬러학습대백과사전은 모두 8권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최초로 만든 컬러판 대백과사전이다. 동아출판사(두산동아의 전신)에서 나온 15권으로 구성된 동아학습대백과, 16권으로 구성된 삼성당에서 나온 삼성학생대백과는 컬러 사진과 흑백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또한, 삼성당에 있는 삼성학생대백과사전은 국어사전과 영어사전, 지리사전이 같이 편집되어 있어서 청소년 학생들에게 새로운 독서습관을 키우게 되었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흑백사진으로 편집되어 있는 중앙출판사의 세계대백과사전(전 5권)은 총 5만여 개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고, 초등학생을 위하여 편집된 어린이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전 30권), 그리고, 웅진21세기학습대백과사전(학습별), 중앙대백과사전(20권)과 신21세기 학습대백과사전(3만여 항목)이 한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백과사전이다. 영상매체를 이용한 백과사전으로는 중앙 과학 백과사전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07년에 발행된 광명대백과사전(전20권), 조선대백과사전(전 30권, 10만여 항목), 그리고 백과사전(전3권, 3만 항목)이 있다. 그중에서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가장 먼저 발행된 백과사전은 정치 사전, 경제 사전, 역사 사전을 통합하여 편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인터넷이 보급된 90년대 중반 이후 출판형태의 백과사전들은 종이책 출간을 중지하고 CD롬이나 인터넷으로 변화해나갔는데, 2012년 기준으로 두산세계대백과의 후신인 두피디아가 지속적으로 개정되고 있다. 한국의 옛 백과사전. 물명류도 초기형태의 어휘모음이며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띠지만 최초의 백과사전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을 들 수 있다.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의봉의 고금석림 등이 있었고 가장 방대한 것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백과사전 평가요소. 박준식과 김문영은 A. B. Kroeger의 Guide to Reference Books (1902년)와 James I. Wyer의 Reference Work (1930년), Louis Shores의 평가 기준 (1950년대 중반), Kenneth Kister의 저서 (1978년)와 그의 후속 연구, Bopp와 Smith의 백과사전 평가에 관한 조언 (1994년), Sader와 Lewis의 평가기준 (1995년), William A. Katz의 저서 (1997년)을 참고로 하여 백과사전의 평가요소를 다음의 6 가지로 범주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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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
자연과학(自然科學, )은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이며, 과학의 한 분야이다. 개요. 자연과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일반 원리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과학은 결론도 중요하지만,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과학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는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추론된 것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은 조건에 따라 자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 역학의 실험 방법은 여전히 자연 과학의 한 분야이며 특정 조건 아래에서라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충실하게 과학적 방법을 따른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체계도 다른 증거에 의해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언제나 반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열어두어야 한다. 자연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과학의 이러한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는 선사 시대부터 이미 여러 가지 자연 법칙에 기반한 생활을 해 왔다. 도구를 만들고 기계를 사용하며 불을 이용한 것 등이 그것이다. 고대 시대에는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각종 기술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근대 과학은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정신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기계"로서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파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출발한 근대 자연과학은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론과 아이작 뉴턴의 운동법칙 발견에 의한 고전 역학의 성립으로 현재와 같은 학문 체계를 이루는 기반을 수립하였다. 즉 경험적인 실험을 통하여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과학적 방법. 과학적 방법이란 실험적인 증명에 기초를 두는 연구 방법이다. 즉, 믿음에 기초하여 이론적인 추측을 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논증과 증거를 통해 증명하는 방법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연구 분야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나 다음과 같은 방법이 일반적이다. 역사.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많은 유적들을 통해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톤 헨지와 고인돌 같은 석조물의 건축을 위해서는 지레, 빗면, 쐐기, 도르래와 같은 단순 기계들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고대의 과학.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한 초기 고대 사회 문명에서 이미 천체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달력을 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혜의 여신 이난나가 사람들에게 시간을 재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이야기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시간을 재기 위해 해시계의 일종인 그노몬을 사용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를 관찰하여 1년을 계산하였다. 시리우스가 해뜨기 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5월이 되면 나일 강의 범람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의 범람은 고대 이집트 농업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계절의 계산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월을 30일로 하고 12개월을 1년으로 하였다. 마지막달에는 우수리로 5일을 더해 1년은 365일로 계산되었다. 이집트 달력에는 윤년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달력과 실제 계절이 차이를 보이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나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석조 건축에는 다양한 단순 기계가 사용과 함께 역학 지식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고대의 거대 건축물들은 동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단순 기계의 원리를 바탕으로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 세워진 것들이다.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 공법은 아치이며 이 역시 무게를 분산하여 지탱하는 역학 지식이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해부학적 구조를 직접 연구하는 등 생물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동물의 역사와 같은 다양한 생물 관련 저서를 남겼다. 최초의 화약과 로켓은 중국에서 사용되었다. 화약의 발명은 다양한 화학 지식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최초의 화약은 한나라 시기에 발명되었으나 폭발력이 크지 않아 주로 전쟁터에서 불을 붙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화약의 원료인 초석의 비율이 커지게 되고 폭발력이 강하게 되자 총과 대포가 제작되게 되었다. 중국의 화약 기술은 13세기 무렵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고대의 다양한 문화에서 지도가 제작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미 점토판에 그린 지도가 제작되었다. 본격적인 지도의 제작은 고대 그리스 때 이루어졌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서구 최초의 지도 제작자로 평가받는다. 고대 로마는 자신의 영토안에 있는 속주를 잇는 도로를 표시한 지도를 제작하였다. 아그리파가 제작한 지도에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라인 강까지의 모든 속주의 위치와 면적, 주민들이 기록되었으며 각 속주를 잇는 도로망이 표기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천년 무렵 청동 정(鼎)에 새겨진 지도가 발견되었다. 한나라 후기에는 축척을 이용한 지도가 제작되었으며 3세기의 지도 제작자 배수는 직교하는 기준선과 축척을 이용한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학문은 논증을 통해 진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논증을 통해 입증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철학의 개념 뿐만 아니라 수학의 법칙, 정치적 주장 등에 대한 논증 체계가 수립되었다. 고대 그리스 학문의 이러한 특징은 논리학의 발달과 다양한 논증 방법의 개발로 이어져 후일 과학적 방법의 근간이 되었다. 중세·근세의 과학. 고대 로마의 붕괴 이후 서부 유럽에서는 한 동안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문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신학을 우선시 한 당시 상황에서 학문은 경험적인 지식보다는 종교에 기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였다. 한편, 세속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점성술과 연금술은 그 동기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고대 로마의 몰락 후 중세 서부 유럽에서는 한 동안 고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학문적 성취가 지체되었다. 고대의 학문은 동로마 제국과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계승되었다. 특히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의학, 화학, 천문학 등 여러 학문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중세 이슬람의 통치자들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의학과 관련한 서적들이 번역되었으며 점차 천문학, 점성술, 연금술, 자연사 분야의 지식들을 수용하였다. 처음에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인도의 서적들을 번역하여 도입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이슬람 과학은 점차 독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갈레노스의 의학서를 바탕으로 발달한 의학은 이븐 시나의 《의학 정전》에 이르러 당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를 기반으로 발달한 천문학은 각종 관측기구의 고안과 함께 정교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사마르칸트에는 반지름 40미터, 3층건물 높이의 육분의를 쓰기도 했다. 알바타니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구면삼각법과 같은 기하학적 방법으로 개량·보완해서 태양과 달의 운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1년과 사계절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다. 이슬람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관측소를 설립하였고 알마문은 바그다드에 828년경에 세계 최초의 관측소를 세운다. 관측소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이 딸려 있고 정부의 지원 하에 과학 교육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육은 점성술의 예언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후기에는 고대 천문학을 능가하는 비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을 만들어 행성 운동을 설명하였고 이를 고도로 정확한 관측으로 검증했다. 그러나 이 모형 역시 지구를 중심으로 한 모형이다. 이슬람의 수학은 이론적인 기하학보다 실용적인 산술, 대수학을 중시하였다. 인도로부터 쓰기 편한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하였고 사실상 고차방정식을 해결했으나 이슬람 수학은 순수 수학적 목적에 의한 발전이라기보다 세금, 유산 분배와 같은 실용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은 광학의 발전에서도 크게 기여하였다. 사막 기후로 인해 눈에 무리가 가기 쉬운 이집트에서 안과학 문헌이 많이 쓰여졌으며 이슬람의 의사들은 눈 치료법과 시각(눈)의 해부학, 생리학의 전문가였다. 이슬람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의사가 아님에도 눈병에 관한 글을 썼으며 그의 광학에는 시각, 굴절, 암실, 불을 붙이는 거울, 렌즈, 무지개 등 다양한 광학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중세 이슬람의 과학은 후일 유럽으로 전파되어 유럽 과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알코올, 알고리듬과 같은 낱말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15세기 명나라의 정화는 쑤저우에서 몸바사에 이르는 인도양을 항해하여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정화의 항해는 고대 인도의 무역로를 이루어졌다. 한편, 유럽에서도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항해는 모두 지리적인 인식을 크게 확장시켰으며 지리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다시 경험적인 지식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중력, 마찰, 관성과 같은 과학적 현상을 관찰하였으며 망원경을 사용하여 천체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에서도 고대에서부터 중대한 조짐을 미리 살피기 위해 천체를 관찰하였다. 혼천의는 이슬람의 천문 관측기구를 참조하여 중국 원나라에서 제작되어 조선에 도입되었다. 한편, 조선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강우량 등의 기상 기록은 500여년 간 빠짐 없이 기상 현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근대의 과학.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경험주의와 자연주의의 확산은 증거로서 논증된 지식만을 인정하는 풍토를 조성하였고 이로써 과학적 방법론이 수립되었다. 이후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 정립,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산소발견, 요하네스 케플러의 지구 공전 궤도 계산과 같은 업적에 힘입어 물리학, 화학, 천문학과 같은 학문들이 수립되게 되며 가히 폭발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학의 발전 양상을 과학 혁명이라 한다. 과학 혁명은 산업 혁명과 맞물리면서 근대의 특성을 낳았다. 18세기에는 고생물학의 화석 연구 성과를 기준으로 지질 시대를 분류하는 지질학 연구가 이루어졌고, 여러 생물 종의 특징을 조사하고 분류한 분류학 등이 활발히 연구되었다. 칼 폰 린네가 생물의 학명 분류로 제시한 이명법은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19세기에는 전자기파의 예언과 발견, 진화 이론의 성립, 멘델의 유전법칙 발표와 유전학의 수립 등 다양한 분야가 새롭게 학문으로 수립되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당시 서로 다른 힘으로 여겼던 전기와 자기가 같은 종류인 전자기력임을 증명하고 전자기파의 존재를 예언하였다. 그가 제시한 맥스웰 방정식은 후대의 전파 연구에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무선 통신과 방송 등 전파의 이용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찰스 다윈은 진화의 요인을 자연선택에 의한 종분화로 보는 진화 이론을 발표하였다. 다윈의 진화 이론은 당대에서부터 기독교 등에 의한 극심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현대 진화 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레고어 멘델은 완두콩을 이용한 실험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유전법칙은 발표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20세기 초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재발견 되면서 고전 유전학의 핵심 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근대 초기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복리 증진에 이바지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과학의 결과물은 무기로 이용되어 더 큰 파괴와 살상을 불러왔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발명품이 무기로 사용되어 비난받자 자신이 번 자산을 인류의 복리 증진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데 사용하고자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노벨상은 오늘날까지도 과학과 평화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그러나, 노벨 이후에도 원자 폭탄과 같은 더 강력한 무기가 만들어져 더 많은 파괴를 가져왔다. 한편, 근대 과학과 산업 혁명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대량 생산과 교통의 발달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시켰다. 이로써 인류는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고 더 빠르게 더 많은 물자를 거래하게 되었으나 소위 열강이라 불리던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러한 발전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을 식민지로 삼는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근대 과학의 결과물인 물자와 기술로서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억압하였다. 현대의 과학. 20세기에 들어 과학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과학은 매우 세분화되어 보다 전문적인 하위 학문들을 구성하게 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이루어진 물리학의 가장 큰 발전은 양자역학이 성립되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양자역학의 성립은 곧 고전역학이 더이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고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우주와 자연 현상이 실상은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의지한다는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유명한 사고실험으로 양자 역학의 확률성을 잘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 길이와 같은 물리량이 고전 역학의 관점과는 달리 더 이상 고정적인 상수로서 취급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장에 의한 공간의 변형을 예언하였으며 이는 훗날 태양의 중력장에 의한 빛의 굴절을 관측함으로써 증명되었다. 입자물리학의 발달은 기본입자의 발견을 가져 왔으며 양자 역학의 성과와 결합하여 표준 모형을 수립하게 되었다. 표준모형에서는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힘을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으로 정리하였으며, 20세기 후반부터 이들 힘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설명하려는 대통일이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0세기 말 스티븐 호킹은 그 동안의 이론물리학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현대 우주론을 종합하였다.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X선 회절로 DNA의 구조를 밝혔다. 이들이 밝힌 DNA의 구조는 두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사슬이 이중 나선의 형태로 꼬여 있는 모습이었다. DNA의 이러한 구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서열이 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과 DNA의 복제가 유전형질의 전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이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DNA 구조가 알려진 후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유전자 발현의 기제가 알려지고 유전성 질환에서 유전자의 역할이 하나 둘 밝혀지게 되었다.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인간의 전체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 또한 진화 현상이 직접 관측이 가능해지고,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으며, 살아있는 화석들의 유전체 연구를 통해 진화이론은 증명되었고, 이는 진화학 혹은 집단 유전학으로 발달했다. 입자물리학의 발전은 19세기 이후 연구되던 여러 방사능 물질들의 핵분열과 핵융합의 조작을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플루토늄과 같이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합성하였다. 핵물리학의 지식은 핵발전소와 같이 평화적인 분야에 이용되기도 하나 핵폭탄과 같이 재래식 무기를 초월하는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되기도 한다. 20세기 이후 현대는 무엇보다도 우주 탐사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인류는 달을 탐험하였고 태양계 외부로 보이저 2호와 같은 탐사선을 보냈으며 허블 우주 망원경을 지구 궤도에 띄워 외계를 관찰하고 있다. 분야. 물리학. 물리학은 물체사이의 상호작용과 물체의 운동 물질의 구성과 성질과 변화 에너지의 변화 등을 연구하여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화학 생물학등과 더불어 자연과학을 이루며, 자연과학 중에서 제일 기본적이고 가장 먼저 체계화 된 학문이다. 물질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서, 힘이나 에너지와 같은 개념을 포함한 시공간에서 물질의 운동을 연구하며, 더 나아가 우주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물리학이 연구하는 대상은 아원자 입자에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물리학이 다루는 물질에 대한 연구는 다른 모든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때문에 물리학은 흔히 "기초 과학"이라고 불린다. 현대의 물리학은 입자물리학, 핵물리학, 열역학, 양자역학과 같은 여러 하위 학문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생물학. 생물학은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생물의 종류에 따라 동물학, 식물학, 미생물학으로 나누며 대상현상이나 연구방법에 따라 분류학, 형태학, 해부학, 발생학, 생리학, 생화학, 세포학, 유전학, 생태학, 생물지리학, 진화학 따위로 나뉜다. 현대 생물학은 카를 프리드리히 부르다흐, 고트프리드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독립적인 학문으로서 자리잡았다. 생물학은 많은 하위 학문을 포괄하는 광대한 주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 가운데 현대 생물학의 주요한 핵심 연구 분야는 세포 이론, 진화, 유전자, 에너지, 항상성 등을 들 수 있다. 생물학의 하위분야는 연구의 방법과 목적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생물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생화학,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탐구하는 분자생물학, 생명의 진화 과정과 다양성 증가를 연구하는 진화생물학, 세포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다루는 세포생물학, 기관이나 조직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생리학, 환경에서 다양한 생물 개체들이 맺는 관계를 탐구하는 생태학 등이 있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의 특성과 분류에 따른 학명을 명명하는데 동물은 동물 학명 국제 코드에 따르며, 식물과 균류는 각각 식물 학명 국제 코드와 균류 학명 국제 코드를 따른다. 이외에 바이러스, 바이로이드, 프리온과 같은 바이러스성 유기체는 바이러스 분류 및 명명 국제 코드를 따르고 있다. 한편, 여전히 분류되지 않은 바이러스 종들이 존재한다. 화학. 화학은 물질의 성질, 조성, 구조, 변화 및 그에 수반하는 에너지의 변화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학 역시도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물리학이 원소와 화합물을 모두 포함한 물체의 운동과 에너지, 열적·전기적·광학적·기계적 속성을 다루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통일된 이론을 구축하려는 것과는 달리 화학에서는 물질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화학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목적에 맞는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길을 제공하며, 이는 농작물의 증산, 질병의 치료 및 예방, 에너지 효율 증대, 환경오염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우주과학. 하위분야로 천문학이 포함된다. 지구과학. 지구과학은 지구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지구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은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기상학, 지구 표면의 물질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지질학, 바다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해양학, 지구의 깊은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지구물리학 등이 있다. 메타 과학. 자연과학은 오랫동안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 기술로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토머스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의 전환 이론에 따르면 자연 과학의 과학적 방법 역시 시대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는 지식 체계의 일부이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과거의 지식을 토대로 쌓아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지식 체계의 주도권 싸움의 결과로 보았다. 쿤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방법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으며 과학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연과학의 지식체계와 과학적 방법 자체에 대해 고찰하고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메타 과학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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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륨
헬륨(, )은 화학 원소로, He()이고 원자번호는 2이다. 질량수가 3인 3He과 4인 4He이 있다. 헬륨은 화학 원소 중 끓는점이 가장 낮으며, 상압에서는 영점에너지로 인하여 절대영도에서도 액체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단, 액체 헬륨의 동위원소는 일정한 온도 및 압력 하에서 고체로 존재할 수 있다. 기체, 액체, 고체가 공존하는 3중점이 없는 유일한 원소이다. 헬륨은 1868년 프랑스 천문학자 피에르 장센이 발견하였다. 그는 1868년 8월 18일 일식의 관측에서 특정 대역의 노란 빛, 즉 587.6 나노미터 부분에 새로운 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고 헬륨의 존재를 밝혔다. 헬륨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태양을 뜻하는 말 헬리오스(Helios)에서 유래하였다. 수소 다음으로 가벼운 원소이며, 다른 원소와 잘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상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의 헬륨은 대부분은 방사성 원소의 핵붕괴로 생성된 알파 입자가 천연 가스에 포획된 상태로 있다가 발굴된다. 1903년, 미국의 천연 가스전에서 다량의 헬륨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헬륨은 우주에서 수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흔한 원소로서, 은하계 전체 원소의 24%를 차지한다. 태양과 가스 행성(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들도 수소와 헬륨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항성이 주계열성으로 빛나면서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수소 핵융합 반응으로도 일부 생성된다. 알려진 특성. 비활성 기체. 헬륨은 가장 반응성이 적은 비활성 기체이다. 그뿐만 아니라 알려진 모든 화학 원소 중에서 가장 반응성이 적다. 거의 모든 조건에서 헬륨은 단원자 분자로 존재하며 반응하지 않는다. 상 변화. 헬륨은 매우 높은 압력하에서 고체나 액체의 상태가 될 따라 30% 정도 부피가 감소될 수 있다. 5×107 Pa의 압력에서 헬륨의 용적율은 물의 50배에 달한다. 압력 1기압에서 헬륨은 절대 영도에 도달하여도 고체가 되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양자 역학으로 설명되는데, 즉 헬륨의 영점 에너지가 너무 높아 절대 영도에 이르러도 분자 운동이 활발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헬륨을 고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1~1.5 K(약 −272 °C)에서 약 2.5 MPa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헬륨의 고체 상태와 액체 상태는 굴절률이 같아 분간이 매우 어렵다. 헬륨은 1기압의 압력에서 약 2.3K에서 초유체로 상변이한다. 고압에서 만들어지는 고체 헬륨도 초유체와 비슷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액체 헬륨. 저온의 액체 헬륨에는 이상한 성질이 많다. 그중 여러가지가 헬륨이 원자가 보즈 입자라는 사실 때문에 일어난다. 한 가지는 액체 헬륨이 점성 저항(viscous resistance) 없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속도가 작은 경우의 '마른 물(dry water)'의 이상적인 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액체가 점성을 가지려면 내부 에너지의 손실이 있어야 한다. 즉 액체의 한 부분이 나머지와는 다른 운동을 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자 몇 개를 나머지 원자들과는 다른 상태로 때려서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서는 열운동이 아주 작아지고 모든 원자는 같은 상태로 가려 한다. 몇 개의 원자가 움직이고 있다면 다른 모든 원자들도 따라서 같은 상태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운동에는 어떤 경직성(rigidity)이 있어서 독립적인 입자의 경우에 생기는 불규칙한 난류이 형태로 움직임을 깨뜨릴 수가 없다. 보즈 입자로 이루어진 액체는 모든 입자들이 같은 상태로 가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고온에서는 많은 원자들을 여러 다른 상태들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열에너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 같은 협력적인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선 헬륨 원자들이 모두 같은 상태로 가려 하는 순간이 갑자기 찾아온다. 헬륨이 초유동체(superfluid)가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현상은 헬륨의 동위 원소 중 원자량이 4인 것들에서만 볼 수 있다. 원자량이 3인 동위 원소는 개개의 원자가 페르미 입자이기 때문에 액체 상태에서 보통의 유체가 된다. 초유동체 현상은 4He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이는 분명히 보즈 입자인 알파 입자의 성질에 의한 양자역학적 효과이다. 용도. 공기보다 가볍고 비활성 기체임을 이용해 폭발하기 쉬운 수소 대신에 비행선, 풍선, 애드벌룬에 이용된다. 또, 심해 잠수부의 산소통의 질소 대체로 이용된다. 그 이유는 질소보다 헬륨이 혈액에 대한 용해도가 작아 잠수병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륨의 끓는점이 매우 낮은 것을 이용해 초저온 냉각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헬륨은 산화흔적이 남으면 안 되는 용접을 할 때 산소의 접근을 막기 위한 용도로 헬륨 환경을 조성한다. 반도체 등의 제작을 위해 플라즈마를 생성시킬 때 플라즈마의 균일한 정착을 위해 헬륨을 적정량 사용한다. 또한 목소리 변조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헬륨 가스에서는 공기 중에 비해 약 3배정도 전송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약 10~20초정도 목소리의 음이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단 많은 양을 마실 경우 질식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헬륨은 트리믹스에 사용되는데, 트리믹스는 압축 공기에서 질소의 비율을 줄이고 그만큼을 헬륨으로 채운 것이다. 헬륨은 용해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압축 공기를 사용했을 때(30~40m)보다 더욱 깊이 잠수할 수 있다. 그러나 70m~80m 정도까지 내려가면 헬륨이 용해되어 헬륨 마취 현상이 일어난다. 핵융합. 1H→3He→6Be→방사성 붕괴→4He→12C→16O→ 20Ne→24Mg→28Si→56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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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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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햇
레드햇(Red Hat,)은 1993년에 창립된 리눅스 배포판 제작회사로, 레드햇 리눅스를 제작했다. 레드햇은 오픈 소스를 비즈니스로 전개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공급하고 지원을 유료로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최근에는 고도화된 소프트웨어를 유료로 판매하는 비즈니스도 시작하고 있다. 리눅스가 등장하고 초기에는 일반적인 사용자가 사용하기 쉽게 리눅스 커널을 중심으로 GNU 프로젝트, BSD, X11 등의 소프트웨어를 조합하여 공급하는 형태로 리눅스 초기의 확산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레드햇의 리눅스 배포판(이후, 레드햇 리눅스)은 GPL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자체 제작 소프트웨어도 GPL로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래드햇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타 기업의 배포판도 많이 존재한다. (예, 수세 리눅스) 2003년 레드햇 리눅스 9을 마지막으로 일반 사용자용 레드햇 배포판의 판매 및 지원을 중지하고, 일반 사용자를 위한 리눅스 배포판의 개발은 오픈 소스인 페도라 프로젝트에 이양했다. 현재는 기업용 배포판인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지원 및 교육 등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06년에는 미들웨어 오픈 소스 업체인 제이보스를 인수하여, OS 뿐 아니라 미들웨어까지 사업영역을 넓혔다. 덧붙여 지금까지 레드햇은 주식을 나스닥(RHAT)에 상장하고 있었으나, 2006년 12월 12일에 뉴욕 증권거래소(RHT)로 거래소를 변경하였다. 2018년 10월 28일 IBM에 인수되었다. 2022년 레드햇의 주요 제품은 플랫폼, 클라우드 컴퓨팅, 애플리케이션 개발, 자동화와 관리, 애플리케이션 서비스, 데이터 서비스, 보안 솔루션 등이다. 역사. 1993년  Bob Young 이 리눅스와 유닉스 소프트웨어 악세사리를 판매하는 ACC Corporation을 설립하였다. 1994년,  Marc Ewing 은 자신의 리눅스 배포판을 만들어  Red Hat Linux[7] (Ewing은 카네기 멜른 대학에 다닐 때 할아버지가 준 빨간 라크로스 모자를 쓰고 다녔다)라고 이름붙였다. Ewing은 이를 10월에 릴리즈했고, 이에 따라 핼러윈 릴리즈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Young은 1995년 Ewing의 사업을 인수했고, 자신의 사업과 통합하여 Red Hat Software를 설립하여 CEO가 되었다. Red Hat은 1999년 8월 11일 기업을 상장했고, 이날 월 가 역사상 8번째로 높은 상장일 주가 상승이 있었다. 1999년 12월  Matthew Szulik 이 Bob Young의 뒤를 이어 CEO가 되었다. 1999년 11월 15일, Red Hat은  Cygnus Solutions를 인수했다. Cygnus는  free software 에 대한 상업적인 지원을 제공했고  GNU Debugger 나  GNU Binutils와 같은 GNU 소프트웨어 제품에 대한 유지관리를 제공했다. Cygnus의 창립자 중 한명인  Michael Tiemann은 Red Hat의 CTO가 되었고 2008년까지 오픈 소스 부서의 부사장 역할을 맡았다. 그 후 Red Hat은 WireSpeed, C2Net  Hell's Kitchen Systems를 인수했다. 레드햇은 현재 오픈소스 방식으로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는 고객, 기여자, 파트너 커뮤니티의 촉매 역할을 하겠다는 미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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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약칭 SF는 과학적 사실이나 가설을 바탕으로 외삽한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문학 장르인 과학소설(科學小說) 또는 SF 소설을 가리키며, 나아가서는 그런 요소를 가진 영화 등의 다른 매체들의 장르를 포괄하는 단어다. 정의. SF 문학은 개론적으로는 과학적인 혁신과 그것이 인간 생활에 끼치는 영향을 즐겨 다루는 "개념(idea)의 문학"으로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1세기가 넘는 역사를 통해 세분화된 광범위한 하위장르와 주제를 가지고 있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작가이자 편집자인 나이트는 이러한 어려움을 요약하기 위해, "우리가 손을 들어 가리키면 그것이 바로 SF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작가 글래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SF의 정의는 포르노그래피의 정의와 같다. 당신은 그게 뭔지 모르지만, 보는 순간 알게 된다." 나보코프는 엄밀하게 정의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는 SF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는 《프랑켄슈타인》 1818년판 서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작가인 하인라인에 의하면, "거의 대부분의 SF에 대한 간편하고 짧은 정의는 아마도 이것이다: 과학적 방법의 의미와 자연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고 미래와 과거의 현실 세계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기반한, 가능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현실적인 추측." 셜링의 정의는 이렇다. "판타지는 개연성 있게 만들어진 불가능한 것. SF는 가능하게 만들어진 개연성 없는 것." 델레이는 "헌신적인 애호가나 팬이라 해도, SF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들어 한다"라고 적었다. 그 이유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정의"란 없고, "SF의 윤곽에 한계"란 없기 때문이다. SF는 주로 합리적으로 그리는 대안적인 가능 세계와 미래에 기반해있다. 이 장르는 그런 면에서 판타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이야기의 맥락내에서, SF의 상상적 요소는 과학적으로 정립됐거나 과학적으로 가정된 물리 법칙으로 대부분이 가능해진다.(그렇지만 이야기 속 몇몇 요소는 여전히 순수하게 상상된 사변일 수 있다) SF의 배경은 종종 합의된 현실과 반대이지만, 대부분의 SF는 다양한 가상의 요소로 가능성 있는 과학적 가설이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촉진된 상당한 정도의 불신의 유예에 의존하고 있다. SF의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공상과학이라는 표현. 20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주로 '공상과학소설'로 지칭되었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공상과학영화'라든지 '공상과학만화'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장르 전체를 가리키는 형용사로 자리잡았는데, 이것은 서구의 사이언스 픽션을 직접적인 번역이 아니라 일본 출판물의 중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입했던 과정의 부산물이다. 1959년 일본의 하야카와(早川) 출판사는, 미국의 과학소설 잡지인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 약칭 F&SF)과 제휴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SF 월간지였던 S-F 매거진(S-F マガジン)을 창간하면서 잡지 표지에 『공상과학소설지()』라는 오역에 가까운 부제(副題)를 붙였다. 여기서 '공상과학'이라는 용어는 본래 잡지 이름 중 'Fantasy'를 문학 장르인 '판타지'가 아닌 '공상'으로 오인하고 만들어낸 편의적인 조어였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 '공상과학소설'은 1960년대 중반까지 'science fiction'의 역어로 곧잘 쓰였다. 당시 일본에서도 SF라는 약어는 아직 생소했던 탓에 '공상과학소설'뿐만 아니라 '과학소설', '환상과학소설', '미래과학소설'이라는 역어들이 함께 쓰였는데, 1970년대 중반의 애니메이션 인기로 인한 SF 붐이 사회 현상으로까지 격상되면서 'SF 소설', 'SF 영화', 'SF 애니메이션' 하는 식으로 SF라는 약어가 완전히 자리잡았고, 그 결과 위의 한자어들은 1980년대에는 장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는 완전히 사어화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의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의 아동용 소설 전집이나 외국어 사전류를 통째로 중역(重譯)하거나 참고해서 출간하는 일이 잦았기에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이 사이언스 픽션에 대한 역어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21세기 들어서도 업데이트가 미비한 사전류나 언론 기사 등에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공상과학'은 상술했듯이 애당초 졸역과 무비판적인 일본 문화 수용에서 비롯된 용어이고, 특히 '공상'이라는 한자 단어가 장르의 올바른 이해와 수용을 심각하게 저해하므로 가치 중립적이며 국제 기준에 맞는 'SF'로 완전히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있어왔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은 이유로 국내 SF 팬덤과 출판계와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공상과학소설'을 '과학소설'로 바꿔부르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고, SF 문학과 SF 영화가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 2020년대 이후에는 언론계에서도 영화, 만화, 게임 등 여타 매체를 포함한 광범위한 장르의 이름으로서 '공상과학'이 아닌 'SF'가 점점 우위를 점하는 중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SF장르를 과학환상() 또는 간단히 과환이라고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과학환상작품'이라는 유사용어를 사용한다. 사이파이(Sci-fi)라는 표현. Sci-Fi(사이-파이)라는 약어는 1954년에 과학소설 연구가인 애커먼에 의해 공식 문헌에 사용되었다. 하인라인은 이보다 6년 먼저 사적인 글에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SF가 대중문화로 확산되면서 과거에 비해 더 오락 지향적인 SF물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고, 일부 영화 비평가들이 저급한 'B급 SF 영화'를 'Sci-Fi'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부 평론가 등은 이 약어를 멸칭(蔑稱)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SF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간주된다. 역사. SF를 사색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파악해보면, 이 장르의 기원은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흐릿하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2세기 루시안의 진짜 역사, 아라비안 나이츠 설화, 10세기의 다케토리 이야기, 13세기 이븐 알 나피스의 독학 신학(Theologus Autodidactus)을 비롯한 SF의 선구자격 문학들을 만나게 된다. 막 싹트기 시작한 이성의 시대의 생산물들과 근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나타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는 볼테르의 〈마이크로메가스〉(1752)와 케플러의 〈솜니움〉(1620~1630)과 더불어 최초의 사이언스 판타지 작품들 중 하나이다. 아시모프와 세이건은 〈솜니움〉을 최초의 SF로 여긴다. 《솜니움》에서는 달 여행과 달에서 바라본 지구의 움직임이 묘사됐다. 영국인 귀족 여성 마거릿 캐번디시의 〈빛나는 세계〉(1666) 역시 초기 SF의 전조로 여겨진다. 또다른 예시는 홀버그의 소설 〈닐스 클림의 지하 여행〉(1741)이다. 18세기 문학 양식으로서 소설의 발달에 뒤따라, 19세기엔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과 〈최후의 인간〉이 SF소설의 정의를 내리는데 도움을 주며, 올디스는 〈프랑켄슈타인〉이 최초의 과학소설이라고 주장했다. 이보다 나중에 포는 달 여행을 그린 이야기 한 편을 썼다. 이밖에도 더 많은 예시들이 19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전기, 전보와 같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교통시설의 출현에 따라 웰스와 베른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서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웰스의 〈우주 전쟁〉(1898)은 발달된 무기를 장착한 세 발 달린 전투 기계를 탄 화성인들이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침략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것은 외계 침공을 실감나게 묘사한 소설이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 픽션을 기술하기 위해 "과학적 로망스(scientific romance)"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이것은 1884년 애벗의 노벨라 《플랫랜드: 다차원의 이야기》를 비롯한 작품을 파생시켰다. 이 용어는 20세기 초반 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20세기 초반,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창간인 건스백에 영향받아 나타난 펄프 매거진들을 통해 주로 미국인 SF 작가들로 이뤄진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다. 1912년 버로스는 화성을 배경으로 존 카터가 영웅으로 활약하는 장기 시리즈인 바숨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 《화성의 프린세스》를 출간한다. 1928년, 필립 놀란이 어메이징 스토리즈에 벅 로저스의 원작 소설 아마겟돈 2419를 실은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는 벅 로저스(1929), 브릭 브래드퍼드(1933), 플래시 고든(1934)으로 이어지는 연재 만화의 바탕이 됐다. 이 연재 만화와 연속된 영화 시리즈는 SF를 대중화시켰다. 1930년대, 캠벨이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의 편집장을 맡게 되고, 아시모프, 나이트, 울하임, 폴, 블리시, 메릴 등을 비롯해 퓨처리안이라 불리게 되는 일군의 신진 작가들이 뉴욕시에서 나타난다. 이 시기의 다른 중요한 작가들로 스미스, 하인라인, 클라크, 스테이플던, 밴보트 등이 있다. 캠벨의 영향력 바깥에서 활동한 작가로 브래드버리와 렘이 있다. 캠벨이 《어스타운딩》지의 편집장으로 지낸 기간은 보통 과학소설의 황금기가 시작된 시기로 여겨지며, 과학적 발견과 성취를 찬양하는 하드 SF 소설로 특징지어 진다. 이 시기는 전후 기술적 발전, 골드가 편집한 잡지 《갤럭시》의 출현, 그리고 하드 사이언스보다 사회 과학을 더 강조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1950년대 비트 세대는 버로스 같은 사변적 작가들을 포괄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문학적"이거나 예술적 감성의 지식인적 자의식으로 가득찬 일련의 작가들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높은 강도의 실험적 시도를 벌인 뉴웨이브가 영국을 중심으로 발흥했고, 동시기 미국에서는 허버트, 덜레이니, 젤라즈니, 엘리슨 등의 작가들이 새로운 경향, 사상, 스타일을 탐구한다. 르귄과 다른 작가들은 소프트 SF 분야를 개척했다. 1980년대, 깁슨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은 전통적인 SF의 낙관론과 발전에 대한 지지에서 방향을 돌렸다. 근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은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 묘사되었다. 《스타 워즈》 프랜차이즈는 과학적 엄밀함보다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더 신경을 쓰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C. J. 체리의 외계인의 삶과 복잡한 과학적 도전에 대한 자세한 탐구는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엔 환경 문제, 글로벌 인터넷과 확장된 정보의 우주의 의미, 바이오테크놀러지, 나노테크놀러지, 포스트 냉전, 포스트 자원고갈 사회에 대한 관심을 비롯한 주제들이 급부상했다. 스티븐슨의 《다이아몬드 시대》는 이러한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탐구했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캐릭터 중심 서사를 되돌려왔다. 텔레비전 시리즈 《》(1987)이 SF쇼의 범람을 예고했고, 이는 세 편의 《스타 트렉》 스핀오프 쇼(, , )와 《바빌론 5》로 이어진다. 고대 포털과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게이트들에 대한 영화 《스타게이트》가 1994년 개봉했다. TV 시리즈 《스타게이트 SG-1》이 1997년 7월 27일 첫 방영 되고, 이후 10시즌이 이어져 214개의 에피소드를 남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스타게이트 인피니티》와 TV 시리즈 《스타게이트 아틀란티스》, 《스타게이트 유니버스》, DVD 직배급 영화 《》, 《》 등의 스핀오프도 나왔다. 《스타게이트 SG-1》은 《엑스 파일》의 최장기 북미 SF TV 시리즈 방영 기록을 돌파했고, 이 기록은 후에 《스몰빌》에게 깨졌다. 기술적 변화의 급격한 속도에 대한 우려는 빈저의 소설 《실시간으로 버려지다》(Marooned in Realtime)로 대중화된 기술적 특이점이란 개념으로 구체화되고,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도 채택된다. SF는 발전과 미래 기술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혁신과 새로운 기술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 주제는 SF 포럼보다는 문학과 사회학에서 더 많이 논의되어왔다. 영화와 미디어 이론가인 비비안 소브책은 SF영화와 기술적 상상력 간의 영향관계를 검토했다. 기술은 예술가들과 그들이 허구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가상 세계는 과학의 상상력을 확장시켰다. 《윌리엄 섀트너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How William Shatner Changed the World)는 현실에서 실현된 상상 속 기술의 다양한 예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새로운 작가들은 클라크 같은 초창기 SF작가들처럼 현재로선 불가능한 기술들을 곧 실현될 것처럼 보이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다. SF의 범주. 하드 SF. 하드 과학소설, 혹은 "하드 SF"는,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 천체 물리학, 화학의 정확한 세부사항에 대한 엄격한 관심, 혹은 더 발전한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세계에 대한 정밀한 묘사로 특징지워진다. 과학 분야의 석박사 학위를 가진 작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그레고리 벤퍼드, 제프리 A. 랜디스, 데이비드 브린,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L. 포워드, 프레드 호일 등의 하드 SF 작가들은 현직 과학자 출신이며, 루디 루커, 버너 빈지, 찰스 셰필드, 래리 니븐 같은 수학자들도 있다. 21세기의 가장 주요한 하드 SF 작가들로는 테드 창, 그레그 이건, 그레그 베어, 로버트 J. 소여, 스티븐 백스터, 얼레이스터 레널즈 등이 있다. 소프트 SF. "소프트" SF는 아마도 사회 과학, 이를테면 심리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에 기반한 작품들이라고 넓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에서 유명한 작가로 르귄, 딕 등이 있다. 소프트 SF라는 용어는 하드 SF에 비해 엄밀한 범주는 아니며, 과학 및 과학기술의 묘사에 많은 힘을 쏟는 하드 SF에 비해 인물 조형과 문장의 완성도에도 같은 정도 또는 그 이상으로 주의를 기울인 SF 소설들을 지칭하는 두리뭉실한 용어이다. SFWA 그랜드 마스터 브래드버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프트 SF의 거장이다. 동구권은 폴란드 작가 렘, 자이델과 소련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 불리초프, 자먀틴, 예프레모프 등을 비롯한 방대한 분량의 사회과학적 SF 소설을 생산해냈다. 어떤 작가들은 하드 SF와 소프트 SF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회과학 소설과 소프트 SF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이야기와 연관된다; 오웰의 《1984》,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가 그 모범적인 사례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같은 풍자 소설 또한 과학소설이나 사변소설로 간주된다. 하위 장르. SF를 고정된 하위장르로 분류하는 것은 각각의 하위장르들이 간단히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시간여행물이나 초인물처럼 전통적인 주제나 소재로 이루어진 분류가 있는가 하면, 뉴웨이브나 사이버펑크처럼 장르 내부의 역동적인 문학적 사조가 하위장르 내지는 그에 준하는 범주로 정착한 사례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연구들은 일반적인 하위장르들을 서로 중복된 것으로 파악하며, 동시에 장르 밖이나 그 사이에서 장르의 경계에 포섭되지 않는 공간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대중 시장과 문학 비평 사이에도 장르와 분류를 설정하는데 상당한 시각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사이버펑크. 사이버펑크 장르는 198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 이 용어는 사이버네틱스와 펑크의 합성어 로서, 베트케의 1980년 단편 《사이버펑크》를 통해 처음 만들어졌다. 시간적 배경은 주로 근미래이며, 설정은 대개 디스토피아적이고, 특유의 고통으로 형상화된다. 사이버펑크의 일반적인 주제는 정보 기술, 특히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시각적으로 추상화된 인터넷의 발전, 인공 지능, 보철학, 기업이 정부보다 강한 영향력을 지닌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적 제어 등이다. 니힐리즘, 포스트 모더니즘, 필름 느와르 기법이 일반적인 요소이며, 주인공은 반항적인 안티 히어로일 때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깁슨, 스털링, 스티븐슨, 캐디건이 있다. 제임스 오흘레이는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사이버펑크 비주얼 스타일의 결정적인 예시라고 말했다. 이것은 후에 오시이의 《공각 기동대》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의 영상물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시간 여행. 시간여행물은 18세기나 19세기에 그 전신이 나타난다. 최초의 중요한 시간여행 소설은 트웨인의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이다. 가장 유명한 소설은 웰스의 1895년작 《타임 머신》이다. 트웨인의 소설과 비교했을 때 웰스의 소설에선 시간여행 장치가 조종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차이가 있다. "타임 머신"이라는 용어는 웰스가 만들어낸 것이며, 이젠 시간여행 장치를 부르는데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백 투 더 퓨처》는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중 하나이다. 시간여행물은 조부모 패러독스 같은 논리적 문제로 인해 복잡해진다. 시간 여행은 현대 SF에서도 계속해서 인기있는 주제이며, 이를테면 《스타게이트 SG-1》이나 BBC의 텔레비전 드라마 《닥터 후》가 이것을 다루고 있다. 대체 역사. 대체 역사는 역사적 사건이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분야의 소설들은 종종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간 여행을 동원하거나, 간단하게 우리의 역사와는 다른 우주를 설정한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무어의 《희년을 선포하라》(Bring the Jubilee)나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가 이 분야의 고전이다. 횡향 상은 최고의 대체역사물에 수여된다. 이 이름은 라인스터의 1934년 작품 《시간의 횡향》에서 가져왔다. 터틀도브는 이 분야의 가장 눈에 띄는 작가이며, 종종 "대체 역사 마스터"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상술한《높은 성의 사나이》에 촉발받고 쓴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이 분야의 효시로 손꼽힌다. 밀리터리 SF. 밀리터리 SF는 국가, 행성, 항성간의 군사 분쟁을 배경으로 삼은 하위장르이며,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대개 군인이다. 밀리터리 SF는 군사 기술, 절차, 의식, 역사의 세부 사항을 포함하며, 종종 실제 일어난 역사적 분쟁을 거울처럼 비춘다. 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스》는 고든 딕슨의 《도사이》와 함께 이 분야 초기의 예시이다. 초기 작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은 베트남 전쟁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스타일로 창작된 이 장르에 대한 비판이다. 존 링고, 데이비드 드레이크, 데이비드 웨버, 톰 크래트먼, 마이클 Z. 윌리엄슨, S. M. 스털링, 존 F. 칼, 돈 호스론 등이 이 분야에서 눈에 띄는 작가이다. 배인 북스 출판사는 이 소설가들 여럿을 육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인물. 초인물은 평범한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의 등장을 주제로 다룬다. 스테이플던의 소설 《이상한 존》과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 와일리의 《검투사》에서처럼 자연적 발생을 기원으로 삼거나, 아니면 밴보트의 소설 《슬랜》에서처럼 과학적 진보를 통한 의도적인 개조를 기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초인물이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초인들을 보는 사회의 반응과 초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다. 초인물은 현실 사회에서도 인간 개조에 대한 토론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폴의 《맨 플러스》 역시 이 카테고리에 포함된다. 아포칼립스, 포스트-아포칼립스물. 아포칼립스물은 전쟁을 통한 문명의 종말(해변에서), 전염병(최후의 인간), 운석 충돌(세계가 충돌할 때), 생태학적 재해(미지에서 불어온 바람), 그리고 기타 일반적 재해나 재해 발생 이후의 세계와 문명에 대해 다루는 하위장르이다. 스튜어트의 소설 《견디는 지구》(Earth Abides)와 팻 프랭크의 아아, 바빌론 등이 이 분야의 전형이다.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이 근미래(매카시의 《로드》)닥친 재앙의 여파부터 375년 후의 미래(바빌론의 물로 인해), 수백 수천년 후의 미래(러셀 호반의 리들리 워커, 월터 M. 밀러 2세의 레보위츠를 위한 송가)까지 광범위하게 다루는 데 비해, 아포칼립스물은 일반적으로 재앙 그 자체와 그 직후의 여파를 다룬다. 아포칼립스 SF는 비디오 게임에서 인기있는 장르이다.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은 폴아웃 시리즈는 핵전쟁의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면서 점차 회복되어 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 스페이스 오페라는 작중 일부, 혹은 작중 전체를 외우주나 여러 개의 (때로 멀리 떨어진) 행성들을 배경으로 삼는 SF 모험물이다. 갈등은 대개 영웅적이고, 대규모로 발생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는 때로 황당한 플롯, 터무니없는 과학, 골판지 같은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로써 경멸적으로 쓰인다. 하지만 이 용어는 동시에 노스탤지어적으로도 쓰이며, 현대 스페이스 오페라는 SF의 황금기 시절의 경이감을 재탈환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서브장르의 선구자는 종달새와 렌즈맨 시리즈를 쓴 에드워드 E. (닥) 스미스이다. 조지 루커스의 스타 워즈 시리즈는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 프랜차이즈 중 가장 유명하다. 이 시리즈는 온우주를 가로질러 펼쳐지는 선과 악의 장엄한 대결을 다룬다. 알래스터 레이놀즈의 묵시론 우주(Revelation Space) 시리즈, 피터 F. 해밀턴의 보이드 삼부작, 밤의 새벽, 판도라의 별 시리즈, 버너 빈저의 심연 위의 불길, 하늘의 깊이는 이 장르의 새로운 견본이다. 비디오 게임계에서 나타나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좋은 예로 매스 이펙트 시리즈가 있다. 사회 과학 소설. 사회 과학 소설은 인간 사회와 SF적 설정에 배치된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SF 하위장르이다. 대부분 인류에 대한 사변에 집중하는 대신 과학적 엄밀함엔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보통은 소프트 SF로 분류된다. 팬덤과 커뮤니티. SF 팬덤은 "아이디어 문학의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사회에 출시되기 전에 나타나 길러지는 문화이다."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인 "팬"들은 컨벤션이나 클럽, 종이나 온라인 팬진, 웹사이트, 메일링 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통로를 통해 서로 접촉한다. 미국의 SF 팬덤은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서한 칼럼을 통해 등장했다. 곧 팬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후에 팬진으로 알려질 비공식 출판물을 통해 자신들의 논평을 모았다. 정기적인 연락이 이어지자 팬들은 서로를 만나고 싶어했고, 지역 클럽을 조직했다. 1930년대, 최초의 SF 컨벤션은 팬들을 더 넓은 공간에서 만나게 했다. 컨벤션, 클럽, 팬진은 인터넷이 더 많은 사람들 간의 통신을 용이하게 만들기 전까지 수십년간 팬 활동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유의미한 형태로 조직된 팬덤은 나우누리, 천리안 등의 PC 통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인터넷 시대가 개막하며 보다 개인적인 성향의 팬덤층이 나타났다. 2017년에 이르러 SF작가들만으로 구성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SFWUK)와 넓은 범위의 팬 중심 단체인 한국SF협회가 만들어졌다. 상. 일반적으로 세계 SF 학회(World Science Fiction Society)의 월드콘에서 수여되는 휴고상, SFWA와 작가 커뮤니티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는 네뷸라 상, 최고의 과학소설을 위한 존 W. 캠벨 기념상, 테오도어 스터전 기념상(단편) 등이 가장 권위있는 SF상으로 취급된다. SF영화 분야에서 유명한 상으로 SF, 판타지, 호러 영화 아카데미가 매년 수여하는 토성 상이 있다. 그밖에 캐나다의 프릭스 오로라 상(Prix Aurora Awards)이나 일본의 성운상 같은 국가별 상, 태평양 북서부 오리콘에서 수여되는 엔데버 상 같은 지역별 상, 판타지 분야의 세계 판타지 상이나 미술 분야의 첼시 상처럼 하위장르에 수여되는 상들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과학기술 창작문예가 있었으나 곧 폐지됐고, 2014년 과천SF영화제의 일환으로서 SF 어워드가 시작됐다. 같은 해 한낙원과학소설상이 제정됐다. 2016년에는 한국과학문학상이 생겼다. 2021년에는 작가 문윤성을 기리는 문윤성 SF 문학상이 시작됐다. 컨벤션, 클럽, 단체. 컨벤션(팬덤에서는 주로 "콘"으로 줄여부름)은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열리는 지방, 지역, 국가, 국제 행사이다. 일반적인 컨벤션은 SF의 모든 측면을 다루지만, 미디어 팬덤이나 펄킹을 비롯한 몇몇은 특정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대부분 NGO의 자원봉사자들로 조직되지만, 미디어 지향적 이벤트들은 주로 상업적인 프로모터들로 조직된다. 컨벤션의 행사들은 "프로그램"으로 불리며, 이는 패널 토론회, 독서회, 사인회, 코스튬 무도회 등을 포함한다. 프로그램의 일환이 아닌 컨벤션 내내 지속되는 행사들로는 딜러의 방, 아트 쇼, 환영 라운지("콘 스위트룸") 등이 있다. 컨벤션엔 수상식이 포함될 수도 있다. 월드콘은 매년 휴고상을 수여한다. 형식적인 맥락에 집착하지 않는 "클럽"이라 불리는 SF 조직들은 SF팬들을 위한 연중 행사를 연다. 이것은 SF 컨벤션이나 정기 클럽 미팅과 연계될 때도 있다. 대부분의 모임은 도서관, 학교, 대학교, 커뮤니티 센터, 술집, 식당, 조직원의 집에서 열린다. 전통 있는 모임인 뉴잉글랜드 SF 협회, 로스 앤젤레스 SF 협회 등은 모임을 위한 클럽하우스와 컨벤션 자료와 연구 자료들이 보관된 창고를 보유하고 있다. 전문 SF 작가들을 위한 미국 SF&판타지 작가 모임(SFWA)는 1965년 데이먼 나이트에 의해 비영리 단체로 설립됐다. 24년 후 데이먼 나이트의 에세이 "단결 또는 저런!"은 국립 판타지 팬 연합에 인계됐다. 팬덤은 미디어 팬덤, 창조적인 시대착오를 위한 모임, 게이머, 플리커, 퍼리 팬덤 등의 관련 그룹이 탄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1999년 SF컨벤션협회가 출범해 한국SF컨벤션을 목표로 했고, 2018년 SF&판타지 도서관과 한국SF협회가 이를 이어받아 행사를 진행 중이다. 팬진, 온라인 팬덤. 최초의 SF 팬진 《혜성》은 1930년에 출간됐다. 팬진의 출판 방식은 젤라틴판, 둥사판, 저두 기계에서 현대적인 복사 방식에 이르기까지 수십년에 걸쳐 변화했다. 유통과 배급은 가끔씩 상업 인쇄물의 가격을 결정한다. 현대 팬진은 컴퓨터 프린터나 지역 인쇄소, 혹은 이메일을 통해서 발행된다. 현재 가장 유명한 팬진은 데이빗 랭포드가 편집하는 《앤서블》이며, 해당 팬진은 여러 차례 휴고상을 수상했다. 최근 상을 받은 다른 팬진들로 《파일 770》, 《미모사》, 《플록타》가 있다. 브래드 W. 포스터, 테디 할비아, 조 메이휴처럼 팬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업계에서 주목 받고 있으며, 휴고상은 최고의 팬 아티스트 항목을 신설했다. 가장 초창기에 조직된 온라인 팬덤은 SF Lovers 커뮤니티이며, 이것은 본래 1970년대 후반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아카이브 파일을 받던 메일링 리스트에 기반한 것이다. 1980년대, 유즈넷 그룹이 온라인상에서 크게 확장했다. 1990년대, 월드 와이드 웹의 개발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말그대로 수천 수만개의 SF와 관련 장르, 매체를 다루는 웹사이트가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이트는 소규모에 짧게 지속됐으며, 좁은 분야에 집중했지만, SF 사이트처럼 광범위한 SF 관련 레퍼런스와 리뷰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있었다. 팬 픽션. 애호가들 사이에선 주로 "팬픽"으로 불리는 팬 픽션은 기존의 책, 영화, 비디오 게임, TV 시리즈(드라마) 등의 설정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비영리적 픽션을 일컫는다. 이 현대적인 의미의 용어는 (1970년대 이전의) 전통적인 "팬 픽션"의 의미와 헷갈리기 쉽다. 본래 팬덤 커뮤니티내에서 팬 픽션이란 팬들이 창작해 팬진에 실은 (종종 팬들 자신을 작중 인물로 활용한) 오리지널, 패러디 픽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예로 1956년 아일랜드 팬 존 베리가 그와 아서 톰슨의 팬진인 《징벌》(Retribution)에 실은 군 디펙티브 에이전시(Goon Defective Agency) 이야기가 있다. 최근 몇년간, SF 우주간의 콜라보레이션을 지향하는 오리온의 팔, 갤럭시키 등의 사이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 어떤 경우엔 책, 영화, TV 시리즈의 저작권자가 그들의 변호사를 통해 팬들에게 "중단 및 단념" 권고를 통지하기도 한다. SF 연구. 진지한 문학으로서. 중요한 로망스 작가로 여겨지는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SF소설을 여럿 썼다. 《유년기의 끝》를 비롯한 많은 SF소설들이 비평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오웰의 《1984》,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등 주류 문학에서 존경받는 여러 작가들이 SF를 썼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레싱은 SF 시리즈 《아르고스의 카노푸스》를 썼고, 보니것이 쓴 대부분의 작품은 SF의 소재나 테마를 포함하고 있다. 학자 시피는 SF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SF와 판타지의 관계란 무엇인가? SF 독자는 여전히 남자 청소년들이 지배적인가? SF는 성숙하지만 괴벽하지 않은 문학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취향인가?" SF 작가 르귄은 그녀의 여러 차례 재판된 에세이 "과학소설과 브라운 부인(Science Fiction and Mrs Brown)"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영국 작가 울프의 에세이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르귄은 이러한 기준이 SF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에세이 초입부에 수사적으로 던진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시피는 그의 에세이에서 르귄의 주장에 반론하지는 않으나, SF 소설과 SF 분야 밖에서 쓰인 소설 간에 놓인 본질적 차이를 논의하고 확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오웰의 《숨쉬러 나가다》와 폴과 C. M. 콘블루스의 《우주 상인》을 비교하고, SF 소설의 기반과 특성은 노붐(다코 수빈이 블로흐에게서 가져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사실과 다르지 않은, (현재의 지식으로는) 확실하게 불가능하지 않은 정보의 개별 조각" 이라고 정의한 용어)의 존재라고 결론짓는다. 한편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창자라 불리는 피들러는 1970년대부터 주류 문학과 SF를 구분하기가 "황금기" 시절 작가들이 주장하던 때처럼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에서나 적절한 불모의 언어"를 통해 "학문적 해석"을 하는 아카데미 학자들이 "부적절하게도 엘리트 비평이론을 빌어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테면 하인라인, 아시모프, 특히 밴보트, 닥 스미스, 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이 영문학계에서 종종 SF소설에 애착을 가진 학자들에게조차 부당하게 무시당하는 현실은 과학소설의 실패가 아니라 윤리적, 심미적인 엘리트비평이 평가의 잣대로 삼는 전통적 기준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고 논한다. SF는 고전적 문학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직설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SF와 비SF 소설을 모두 쓰는 작가 카드는, SF에서 작품의 메시지와 지적 의미는 이야기 내부에 포함되며, 따라서 문체의 기믹이나 문학적 게임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언어의 명확성을 예술성의 부족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카드의 말을 인용하면, 판타지 작가 줄리엣 E. 매케나는 비슷한 견지에서 말하길, SF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벤퍼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SF는 아마도, 비록 SF의 점령군이 여전히 문학의 성채, 로마 바깥에 야영하고 있더라도,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이다." 이러한 배제의 의미는 책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조나단 레뎀의 에세이 "근접 조우: 과학소설의 낭비된 약속"을 통해 뚜렷이 지적됐다. 레뎀은 1973년, 네뷸러상에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가 노미네이트되고,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가 수상했을 때, "SF가 주류와 융합될 수 있다는 희망의 죽음을 선언하는 숨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레뎀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SF&판타지 매거진》의 편집자는 "언제쯤 돼야 SF 장르는 메인스트림을 감동시키려는 시도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 라고 되물었다. 이 시점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버넷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베넷은 그의 최근 에세이에서 이 "끝없는 전쟁"의 새로운 전개를 지적했다:
466
71266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66
원자
원자(原子, atom)는 일상적인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다. 일상적인 물질들이 원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화학 반응을 통해 더 쪼갤 수 없는 단위와 동의어이다. 모든 고체, 액체, 기체, 플라즈마가 전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 또 핵반응을 통해서는 더 작은 단위로 나뉜다. 원자와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원소'를 들 수 있는데,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라고 한다면, 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성분의 종류라고 하겠다. 한편, 여러 원자의 화학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분자는 물질의 성질을 가지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어원. 원자(原子)라는 용어는 우다가와 요안이 독일어 atom을 번역한 것이다. 이 독일어 atom은 고대 그리스어 "a-tomos"에서 온 것으로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a-": 부정, "tomos": 쪼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뜻과는 약간 달리 동양에서 쓰이는 원자(原子)라는 한자어는 물체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는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준용하여 atom을 번역한 것이다. atom이라는 낱말은 언어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 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추상적 개념은 이미 기원전 5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쓴 것이다. 이러한 어원대로라면 당대에 알고 있는 가장 작은 기본 단위(현재는 쿼크와 렙톤)가 원자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물리학과 화학에서는 이 항목의 정의에 따른다. 역사. 원자설. 세상의 물질들이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상은 고대 그리스와 인도에서부터 발견된다. 물론 이는 과학적 방법에 따른 결과가 아닌, 사상적 철학적 논증의 결과 나타난 사상의 한 갈래이다. 돌턴의 배수 비례의 법칙. 존 돌턴은 1803년에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분석하여 화합물이 만들어질 때 필요한 원소의 질량비가 간단한 정수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배수 비례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이에 따라 물질들이 기본적인 질량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돌턴은 논문에서 세 종류의 화학반응을 예로 들었다. 첫 번째 예시는 산화 주석이다. 검은 가루(SnO)는 주석 88.1%와 산소 11.9%로 이루어져 있고, 흰 가루(SnO2)는 주석 78.7%와 산소 21.3%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질량비로 나타내면 검은 가루는 주석 100g에 산소 13.5g이고, 흰 가루는 주석 100g에 산소 27g이다. 이 때 필요한 산소의 질량인 13.5와 27은 1:2의 정수비를 가진다. 실제로 각 산화물은 주석 1개당 산소 1개 혹은 2개를 가져간다. 두 번째 예시는 산화 철이다. 검은 가루는 78.1%의 철과 21.9%의 산소, 빨간 가루는 70.4%의 철과 29.6%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질량비로 나타내면 검은 가루는 철 100g에 산소 28g이고, 붉은 가루는 철 100g에 산소 42g이다. 이 때 필요한 산소의 질량인 28과 42은 2:3의 정수비를 가진다. 실제로 각 산화물은 철 2개당 산소 2개 혹은 3개를 가져간다. 마지막으로 돌턴은 질소 산화물을 예시로 든다. 아산화 질소는 63.3%의 질소와 36.7%의 산소로, 일산화 질소는 44.05%의 질소와 55.95%의 산소로, 이산화 질소는 29.5%의 질소와 70.5%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곧 각각 140g의 질소마다 80g의 산소, 160g의 산소, 320g의 산소가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 필요한 산소의 질량비는 1:2:4의 비율을 이룬다. 기체 분자 운동론. 18세기 후반에 기체가 작은 입자들의 집합체로 해석함으로써 통계학과 확률론 등을 통해 실제 기체의 운동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돌턴의 원자론이 기체의 화학반응을 통해 물질의 구성성분이 입자임을 밝혔다면, 기체 분자 운동론은 물리적 성질을 통해 밝혔다는 의의가 있다. 브라운 운동. 1827년에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은 현미경을 통해 물 위에 뜬 티끌들이 변덕스럽게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하고, 브라운 운동이라 이름붙인다. 사람들은 여기 원자론을 적용하여 물 분자들이 티끌과 무작위적으로 충돌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추측했다. 이후 1905년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통계물리학을 통해 브라운 운동의 원인이 실제로 분자의 자발적 운동이라는 것을 밝힌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장 페랭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여 192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톰슨의 전자 발견. 1897년 영국의 과학자 조지프 존 톰슨은 음극선이 전자기파의 일종이 아닌, 수소보다 1,800배나 가벼운 입자로 이루어진 빔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즉 원자보다 가벼운 입자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이 입자는 처음으로 발견된 아원자 입자로 처음에는 소체(小體)라는 의미의 "corpuscle"라 불렸으나, 이후 전자로 다시 명명된다. 톰슨은 전자가 방사성 물질에서 방출된다는 사실을 밝혔고, 이후 광전 효과에서 튀어나오는 입자도 전자임을 보였다. 금속 내부에서 흐르는 전류의 원인이 전자라는 사실도 곧 밝혀졌다. 원자로 이루어진 음극 판에서 음극선이 방출되므로, 원자가 쪼개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07년에 톰슨은 양전하를 가지는 물체에 음전하를 가지는 전자가 빵 속의 건포도처럼 박혀있는 원자모형을 제시한다. 러더퍼드의 원자핵 발견. 위의 음극선 실험으로 톰슨은 음전하를 띄는 전자라는 입자가 양전하를 띄는 푸딩 안에 박혀있는 형태의 원자를 제안하게 된다. 이 모형은 푸딩 모형이라고도 불린다. 영국의 과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그 제자인 한스 가이거, 어니스트 마즈든은 알파 입자의 비전하를 측정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자가 측정기구 내부의 공기중에서 산란되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고, 결국 실험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차가 쌓인다. 톰슨도 음극선을 사용해 실험을 계속 진행하며 같은 현상을 마주했는데, 톰슨은 실험기구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이를 해결했다. 그러나 러더퍼드는 전자보다 수천배 이상 더 무거운 알파 입자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톰슨처럼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톰슨의 원자 모형에 의하면, 양전하는 원자 내부 어딘가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원자 전체에 균질하게 퍼져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충분한 크기의 전기장을 형성하지 못할 텐데, 알파 입자가 산란되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러더퍼드와 제자들은 이 산란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한다. 러더퍼드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무려 5년의 시간동안 알파입자를 얇은 금박에 쏘는 실험을 진행한다. 대부분의 알파입자는 금박을 통과했지만, 90° 이상 산란되어 튕겨 나오는 알파입자도 관측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러더퍼드는 원자 내에 양전하가 한 군데 모여있으며, 그 위치는 원자의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 때 제안된 원자모형은 행성모형이라고도 불린다. 닐스 보어의 원자구조. 하지만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원자의 흡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없었고, 전자가 가속운동할 때 전자기파를 방사하는 싱크로트론 방사로 인해 운동에너지를 잃어버려야 하지만, 실제 원자가 물리적으로 안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13년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는 전자가 각기 다른 에너지를 가지는 층에 존재한다는 양자화된 궤도 개념을 도입하여 가설을 세우고 이에 근거한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이 모형에서 전자는 광자를 흡수 또는 방출하면서 각 궤도 사이를 오갈 수 있다. 이처럼 양자화된 궤도 개념을 통해 전자궤도의 안정성, 불연속적인 흡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말엽, 헨리 모즐리는 보어 모형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실험 결과를 얻는다. 또한 이 실험은 어니스트 러더포드와 안토니우스 반 덴 브룩의 가설, 즉 원자는 원자번호 갯수만큼의 핵전하를 띌 것이라는 가설을 검증한다. 이로써 원자 번호가 물리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원자간 화학 결합은 1916년에 길버트 뉴턴 루이스에 의해 설명된다. 루이스는 이 원자들이 전자를 공유함으로써 화학 결합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또 1919년에는 미국의 화학자 어빙 랭뮤어는 원소의 화학적 성질이 주기율표를 따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한 원자 안에 있는 전자들이 물리적으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기 때문임을 논증한다. 보어의 모형은 전자껍질이라는 개념을 통해 랭뮤어의 전자집단론이 맞았음을 보이고 있다. 이후 슈뢰딩거에 의해 더 완벽하고 정확한 원자모형이 제시되긴 하지만, 보어 모형은 당시까지 밝혀진 원자의 성질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최초의 완전한 원자모형이었다. 다만 수소가 아닌 다른 원자들의 선스펙트럼을 설명하지 못하고, 등속 원운동을 할 때 라모 공식을 따르자면 광자가 방출되어야 한다는 오류를 검증되지 않는 가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등의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더 나은 모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슈뢰딩거의 원자 모형. 1922년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통해 원자의 속성들이 양자화되어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은 원자 빔이 불균질한 자기장 내부를 통과하면서 경로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자의 자기 모멘트가 두 개로 양자화되어있어야만 했다. 스핀의 방향은 처음에는 무작위하게 분포되어 있다가, 빔이 자기장을 통과하면서 위 혹은 아래로 정렬되기 때문에 빔이 두 가닥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화된 성질을 다루는데 유용한 행렬 역학을 처음으로 제안한다. 그 작년인 1924년에는 루이 드 브로이가 모든 입자는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는 가설인 물질파를 제안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이 가설을 정식으로 채택해 슈뢰딩거 방정식을 유도한다. 여기서 원자는 기존에는 입자로만 해석되었던 것과는 달리, 삼차원 파형을 가진 파동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입자를 파동으로 해석함으로써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자연스레 유도되었다. 이처럼 원자를 파동으로 해석함으로써 기존의 보어 모형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었던 원소들의 선 스펙트럼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실제 관측결과도 잘 부합하는 터라 행성모형은 폐기되고, 원자 오비탈의 개념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에 독일의 과학자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이 전자의 파동함수가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확률함수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확률적 해석을 바탕으로 원자 주위에서 전자를 발견할 확률을 계산하여 확률의 분포를 점으로 찍어 구름처럼 표시하는 현대의 원자모형이 탄생하였다. 중성자의 발견. 질량 분석기의 발달로 인해 원자의 질량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랜시스 윌리엄 애스턴은 이 기구를 통해 동위원소들이 서로 다른 질량을 가지며, 원자 질량이 일정 정수비를 가진다는 정수율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은 1932년에 제임스 채드윅이 양성자와 비슷한 질량을 가지지만 전하를 띄지 않는 입자인 중성자를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로써 동위원소란 같은 수의 양성자를 가지나 다른 수의 중성자를 가지는 종류의 입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핵분열, 고에너지 및 응집물리학. 러더퍼드의 제자이자 독일의 화학자인 오토 한은 초우라늄 원소를 만들고자 중성자를 우라늄 원자에 충돌시켰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우라늄보다 더 가벼운 원소인 바륨이 생성되었다. 이듬해 리제 마이트너와 그녀의 조카인 오토 프리슈는 한이 수행한 실험이 핵분열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아낸다. 1944년, 한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한은 마이트너와 프리슈에게도 공을 돌리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오직 한만이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1950년대에 고성능의 입자 가속기와 입자 검출기가 만들어짐에 따라 과학자들은 고에너지 상태에서의 원자의 행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연구결과가 이어지며 중성자와 양성자가 강입자에 속하며, 쿼크라는 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원자 입자들로 구성된 원자핵의 성질, 아원자 입자들의 상호작용 등을 설명하기 위해 표준 모형도 만들어졌다. 구조. 아원자 입자.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원자의 어원이 무색하게, 현대 물리학에서는 원자도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아원자 입자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전자는 음의 전하를 띄며, 매우 작아 현대의 기술로 형태를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로 위의 세 아원자 입자들 중 가장 가벼워서 모든 입자들 중 가장 가벼울 것으로 여겨졌으나, 더 가벼운 중성미자가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양의 전하를 띄는 원자핵 주변에 전자기력으로 포착되어 존재한다. 만일 원자가 가지고 있는 전자의 갯수가 원자번호와 다르다면 원자 자체가 전하를 띄게 되는데 이를 이온이라고 부른다. 조지프 존 톰슨이 1897년에 처음을 발견하였다. 양성자는 양의 전하를 띄며, 전자보다 1,836배 더 무거운 의 질량을 가진다. 원자가 가지고 있는 양성자의 갯수는 원자 번호와 동일하다.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1919년에 질소 원자를 알파 입자와 충돌시키는 실험에서 처음으로 관측하였다. 1886년에 수소의 원자핵으로 처음 발견되었으나 이 실험으로 인해 원자의 일반적인 구성성분임이 널리 인정받아 러더퍼드가 양성자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게 된다. 중성자는 전하를 띄지 않고 전자보다 1,839배 더 무거운의 질량을 가진다. 이 세 종류의 입자들 중 가장 무겁지만 핵결합에너지 때문에 실제 질량은 이보다 작다. 양성자와 함께 핵자라고도 불리는데, 둘 다 의 비슷한 크기를 가지지만 둘 다 어떤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1932년에 제임스 채드윅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표준 모형에서는 전자를 기본 입자로 보는 반면,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진 합성 입자로 본다. 원자에는 두 종류의 쿼크가 있는데, 양성자는 + 전하를 가지는 위 쿼크 2개와 − 전하를 가지는 아래 쿼크로 한 개로 이루어진다. 중성자는 두 개의 아래 쿼크와 하나의 위 쿼크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전하와 질량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쿼크들은 글루온이 매개하는 강한 상호작용으로 서로 묶여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서로 핵력으로 붙잡고 있는 형태이다. 글루온은 게이지 보손중 하나로 쿼크와 마찬가지로 기본 입자이고, 힘의 매개자로 작용한다. 원자핵.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강한 상호작용으로 결합해 있다. 이들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에 따라 원자를 주기율표로 분류할 수 있으며 화학적인 성질이 결정된다. 이 결합을 바꾸면 아주 강한 힘이 나온다. 원자 내의 양성자와 중성자들은 결합하여 원자핵을 만들고, 이러한 성질로 인해 핵자라는 명칭으로 따로 구분되기도 한다. 원자핵의 반지름은 formula_1를 원자의 핵자 수라고 했을 때 대략 formula_2 펨토미터로 근사된다. 핵자들은 굉장히 짧은 거리에 작용하는 힘인 핵력으로 서로 결합되어있는데, 2.5 펨토미터까지는 이 힘이 정전기력보다 강하기 때문에 양성자들이 서로 밀어내는 힘보다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하여 서로 결합될 수 있다. 같은 원소에 속하는 원자들은 같은 갯수의 양성자를 가지는데, 이 갯수를 원자 번호라 한다. 양성자와는 달리 같은 종류의 원자끼리도 서로 다른 갯수의 중성자를 지닐 수 있다. 이처럼 양성자의 수는 같으나 중성자의 수는 다른 원자들의 관계를 동위원소라 하고, 더 세분화하여 핵종을 여러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양성자 수와 중성자 수가 다른 원자들은 쉽게 방사성 붕괴를 일으킨다. 그러나 원자 번호가 커져서 양성자의 갯수가 많아질수록 원자핵의 안정에 필요한 중성자의 갯수가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양성자 수에 대한 중성자 수의 비율은 방사성 동위 원소 원자핵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는 모두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는 페르미온이다. 그러므로 양자적으로 동일한 상태의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매우 높은 에너지를 통해 원자핵의 양성자나 중성자 갯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기술로 여러개의 원자를 강하게 충돌시켜 무거운 원자핵을 합성하는 핵융합이 가장 대표적이다. 핵융합을 위해서는 쿨롱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 높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태양의 중심에서 충분한 에너지의 공급을 통해 핵융합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와는 반대로 큰 원자핵을 두 개 이상의 작은 원자핵으로 나누는 과정인 핵분열도 있다. 이 핵분열은 고에너지의 아원자 입자나 광자를 원자핵에 충돌시킴으로써 유도할 수 있다. 핵융합 후의 원자핵은 그 재료들의 원자핵의 질량의 합보다 더 작은 질량을 가진다. 이 질량의 차이만큼의 에너지는 감마선과 베타 입자로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공식 formula_3를 따라 감소한 질량 formula_4이 빛의 속력 formula_5를 두 번 곱한 만큼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전자 구름. 원자 내의 전자들은 핵의 양성자에 의해 전자기력으로 포섭되어 있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자는 원자핵을 둘러싼 정전기적 퍼텐셜 우물에 둘러쌓여 있어서, 이를 탈출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에너지가 추가로 필요한 상태이다. 핵에 더 가까이 위치한 전자일수록 더 강한 인력이 작용하게 되고, 결국 원자 중심에 가까울 수록 전자가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전자는 다른 입자들과 마찬가지로 파동-입자 이중성을 가진다. 전자 구름이란 퍼텐셜 우물 내에 형성된 정상파로서 전자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는 전자가 각 위치에 존재할 확률을 계산함으로써 유추할 수 있는데, 이를 원자 궤도 또는 오비탈이라고 부른다. 오비탈들은 크기나 형태, 방향에 있어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또한 각각 다른 에너지 준위를 가지고 있고 양자화되어있어서,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광자를 흡수한다면 더 높은 에너지 준위의 오비탈로 전자가 이동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너무 높은 에너지의 광자가 조사된다면 자연방출을 통해 광자를 방출하면서 오히려 더 낮은 에너지의 오비탈로 전자가 이동할 수도 있다. 각 오비탈간 에너지 차이는 선스펙트럼을 관찰하여 알아낼 수 있다. 전자를 떼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인 이온화 에너지는 핵자를 뗄 때 필요한 에너지보다 많이 작다. 일례로, 정상상태의 수소 원자에서 전자를 떼어내려면 13.6 eV가 필요하지만, 중수소의 원자핵을 쪼개기 위해서는 2.23 MeV가 필요하다. 원자핵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전자는 근처의 원자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여러 개의 원자핵에 동시에 포섭될 수 있다. 분자가 바로 이러한 형태의 화학 결합으로 형성된다. 공유 결합으로 형성된 결정이나 이온 결정같은 경우는 이처럼 단순하게 분석할 수 없다. 원자론의 과학자와 현대 원자와 관련된 이론. 원자 단위의 물리학은 원자 광학과 나노 과학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실험은 원자를 옮기고 운동 속도를 조정하며 이루어진다. 원자보다 더 작은 원자핵의 물리학은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의 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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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표계
극좌표계(極座標系, )는 평면 위의 위치를 각도와 거리를 써서 나타내는 2차원 좌표계이다. 극좌표계는 두 점 사이의 관계가 각이나 거리로 쉽게 표현되는 경우에 가장 유용하다. 직교 좌표계에서는 삼각함수로 복잡하게 나타나는 관계가 극좌표계에서는 간단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2차원 좌표계이기 때문에 극좌표는 반지름 성분과 각 성분의 두 성분으로 결정되며 주로 formula_1로 나타내는 반지름 성분은 극(데카르트 좌표에서 원점)에서의 거리를 나타낸다. 주로 formula_2로 나타내는 각 성분은 0°(직교 좌표계에서 x축의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잰 각의 크기를 나타낸다. 역사. 각과 반지름의 개념은 이미 기원전에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기원전 190 ~ 120년)가 여러 각마다 현의 길이를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는데, 그가 항성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묘사한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반지름 성분이 각에 따라 변하는 함수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완성된 좌표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극좌표를 정식 좌표계로 도입한 예는 여러 번 있었다. 이에 대한 역사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줄리언 로웰 쿨리지의 《극좌표의 근원》에 서술되어 있다. 17세기 중반에 그레구아르 생뱅상과 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는 독립적으로 극좌표의 개념을 발표하였다. 생뱅상은 1625년에 작성해 1647년에 출판하였으며, 카발리에리는 1635년에 출판하였으며, 개정판은 1653년에 나왔다. 카발리에리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극좌표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블레즈 파스칼은 포물선의 길이를 계산하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 아이작 뉴턴은 《유율법》(Method of Fluxions, 1671년 작성, 1736년 출판)에서 “일곱 번째 방법: 나선에 대하여”로 표현한 극좌표와 다른 아홉 가지 좌표계 사이의 변환을 분석하였다. 야코프 베르누이는 학술지 《"Acta Eruditorum"》(1691년)에서 점과 선을 이용한 좌표계를 사용하고 각각을 극과 극축이라 불렀다. 좌표는 극에서의 거리와 극축에서의 각으로 정의하였다. 베르누이의 연구는 곡선의 곡률반지름을 찾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극좌표”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오 폰타나가 처음 정하였으며, 18세기의 이탈리아 학자들이 사용하였다. 영어로는 조지 피콕이 1816년 라크루아의 《미적분학》(Differencial and Intergral Calculus)을 번역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알렉시 클로드 클레로는 극좌표를 처음으로 3차원으로 확장하였으며, 오일러가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극좌표를 이용한 점의 표시. 극좌표계의 점은 반지름("r")과 각("θ")로 표현된다. "r"은 극에서의 거리를 의미하고, "θ"는 0°(직교 좌표계의 x축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의 각도를 의미한다. 만약 "r"이 음의 값을 갖는다면, "θ"가 가리키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거리 |"r"|만큼 떨어진 점을 뜻한다. 예를 들어, 극좌표 (3, 60°)는 극에서 60° 방향으로 3단위만큼 떨어진 곳을 나타낸다. 극좌표 (3, -300°)도 같은 위치에 그려진다. 데카르트 좌표와는 달리 극좌표에서는 하나의 점을 나타내는 방법이 무한히 많다. 여러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돌아와도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r, θ")는 로 표현될 수 있다(n은 임의의 정수). (0, "θ")는 일반적으로 극을 뜻하며, 반지름이 0이기 때문에 어떠한 각이든 상관이 없다. 점을 나타내는 방법을 하나로 제한할 때에는 "r"은 양수로, "θ"는 구간 [0, 360°) 또는 (−180°, 180°](라디안으로는 [0, 2π) 또는 (−π, π])의 수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극좌표의 각은 라디안을 이용한 호도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으며(2π rad = 360°),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항행에서는 60분법으로 각을 나타내며, 물리 분야(특히 회전 역학)와 거의 모든 미적분에서는 호도법이 쓰인다. 극좌표와 데카르트 좌표 사이의 변환. "r"와 "θ"는 삼각함수를 이용해 데카르트 좌표의 "x"와 "y"로 변환할 수 있다. 데카르트 좌표의 "x"와 "y"는 극좌표의 "r"로 변환할 수 있다. "θ"를 정의할 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0, 2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formula_6는 formula_7의 역함수이다.) (−π, 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극좌표 방정식. 극좌표를 이용하여 곡선을 나타내는 방정식을 극좌표 방정식 또는 극방정식이라고 한다. 보통은 "r "를 "θ "에 관한 함수로 정의한다. 곡선 위의 점은 formula_10로 정의되며 함수 "r "의 그래프로 생각할 수 있다. 극좌표 방정식 "r"("θ")의 형태로부터 대칭성을 추론할 수 있다. 만약 "r"(−"θ") = "r"("θ") 이라면 곡선은 수평 반경(0° / 18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π−"θ") = "r"("θ")이라면 수직 반경(90° / 27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α"−"θ") = "r"("θ")일 때는 "α/2"만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린 곳에서 대칭이 된다. 극좌표계의 성질 덕에 많은 곡선이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에 반해 데카르트 좌표로 표현되려면 난해한 곡선이 많이 있다.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곡선은 극좌 장미 곡선, 아르키메데스 나선, 달팽이꼴 곡선, 심장형 등이 있다. 아래에 서술된 내용에는 정의역과 치역의 범위의 제한은 없다. 원의 극좌표 방정식. 원의 중심이 ("r "0, "φ")이며 반지름이 "a"인 원의 일반적인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위의 방정식은 상황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 직선의 극좌표 방정식. 극을 통과하는 선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된다. 위의 방정식에서 "φ"는 극을 통과하는 선의 기울기를 각도로 표현한 것이며("φ" = arctan "m"), "m"은 데카르트 좌표에서의 기울기이다. 직선 "θ" = "φ"에 수직이면서 점 ("r "0,"φ")를 지나는 직선은 formula_12로 나타낼 수 있다. 극좌표 장미 곡선. 수학에서 장미 곡선은 꽃잎을 지닌 꽃처럼 보이는 유명한 곡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k"가 홀수일 때는 "k"개의 꽃잎을 지니며, "k"가 짝수일 때는 2"k"개의 꽃잎을 지닌다. "k"가 정수가 아닐 때에는 꽃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이때는 꽃잎이 겹쳐 보이게 된다. 즉, 4"n" + 2개의 꽃잎을 지닌 장미 곡선을 그릴 수는 없다. 변수 "a"는 꽃잎의 길이를 의미한다. 아르키메데스 나선.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나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매개변수 "a"는 나선의 위치를 돌려 놓으며, "b"는 나선 사이의 폭을 조정한다. "r"("θ") = "bθ"일 경우, 각이 "θ" > 0일 때와 "θ" < 0일 때, 각각의 아르키메데스 소용돌이는 두 가지의 곡선을 그리며 이들은 극에서 매끄럽게 만난다. 90°/270°선(직교 좌표계의 y축과 같음)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상을 그리면 다른 쪽 곡선이 나온다. 이 곡선은 수학 관련 저술에서 원뿔 곡선 다음으로 등장하는 곡선이며 극좌표로 가장 잘 표현되는 예로 거론된다. 원뿔 곡선. 초점 중 하나가 극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0°의 어딘가에 있는(원뿔 곡선의 주축이 극축에 있도록) 원뿔 곡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e"는 이심률이며 formula_16은 극이 아닌 초점에서 주축(major axis)에 수직이 되게 곡선까지 잰 거리(semi-latus rectum)이다. "e" > 1일 때 이 방정식은 쌍곡선이 되며, "e" = 1일 때는 포물선이 되고, "e" < 1일 때는 타원이 된다. "e" = 0일 때는 반지름 formula_16인 원이 그려진다. 복소수 체계. 모든 복소수는 복소평면 위의 점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직교 좌표계와 극좌표계의 방식으로 모두 표현 가능하다. 복소수 "z"는 다음과 같이 직교 좌표계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formula_19는 허수 단위이다. 이 식은 아래와 같이 극좌표계로 나타낼 수 있다. 이를 복소수의 극형식이라 한다. 자연로그의 밑 e를 이용하면 다음처럼 나타낼 수 있다. 이는 오일러의 공식으로 표현된 것과 같다(이러한 공식은 각 "θ"의 단위가 라디안일 때에만 성립된다). 복소수의 직교 형식과 극형식 사이의 변환은 위에서 서술한 변환 공식을 사용하면 된다. 복소수의 곱셈, 나눗셈, 거듭제곱 연산을 할 때에는 직교 좌표계보다는 극좌표계로 표현하는 것이 계산이 더 간편하다. 지수 법칙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성질이 성립한다. 미적분. 극좌표 공식은 미적분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각 "θ"의 측정 단위로는 라디안을 사용한다. 미분. 극좌표계와 직교좌표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미분 공식이 성립한다. 극좌표 곡선인 "r"("θ")의 직교 좌표계에서의 기울기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곡선을 매개변수 연립방정식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두개의 등식을 "θ"에 대하여 미분하면 두 번째 등식을 첫 번째 등식으로 나누면 ("r", "θ")에 접하는 접선의 기울기가 된다. 적분. 곡선 "r"("θ"), "θ" = "a", "θ" = "b"에 의해 둘러싸인 부분을 "R" 라 하자.(0 < "b" − "a" < 2π) 이때 "R"의 넓이는 다음과 같다.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이를 유도할 수 있다. 먼저 구간 ["a", "b"]를 "n" 개의 구간으로 나눈다("n"은 자연수). 각 구간 "i" = 1, 2, …, "n"에서 "θ""i"이 각 구간의 중점이라 하고 극에 중심을 두는 부채꼴을 만든다("r"(θ"i"), 중심각 : "Δθ", 호의 길이 : "r"("θ""i")"Δθ"). 이때 만들어진 각 부분의 넓이는 formula_33이다. 따라서 총 넓이는 다음과 같은 리만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구간의 개수 "n"이 증가함에 따라 그 극한값은 "R "의 넓이에 가까워진다. 일반화. 데카르트 좌표를 이용해서 무한소 넓이는 formula_35와 같이 계산된다. 치환 적분법으로 좌표계를 바꾸어 중적분할 때에는 야코비 행렬식을 이용해야 한다. 따라서 극좌표계의 좌표에 따른 넓이는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이제 극좌표계로 주어진 함수는 다음과 같이 적분할 수 있다. 여기서 "R "는 곡선 "r"("θ"), "θ"= "a", "θ" = "b"에 둘러싸인 영역이다. "R "의 넓이는 함수 "f "를 1과 같다고 하면 된다. 야코비 행렬식을 이용한 놀라운 결과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가우스 적분이다. 벡터 미적분. 벡터 미적분은 극좌표에도 적용할 수 있다. formula_40를 위치 벡터 formula_41, ("r"과 "θ"는 시간 "t"에 의해 좌우된다.) formula_40의 방향을 나타내는 단위 벡터 formula_43를 다음과 같이 두고, formula_40에 수직인 단위 벡터를 다음과 같이 두자. 이때 "r"의 1계 미분, 2계 미분은 다음과 같다. 3차원. 극좌표계는 원통좌표계와 구면좌표계로 확장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는 2차원의 극좌표계를 포함한다. 원통좌표계는 거리 좌표를 더해 극좌표계를 확장시키며, 구면좌표계는 각 좌표를 더해 확장한다. 원통 좌표계. 원통 좌표계는 평면 극좌표로 (0,0)을 제외한 "xy" 평면 전체를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으므로, 여기에 "z"축을 더하여, 3차원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평면 극좌표계의 "r, θ," 그리고 "z"로 이루어지는 이 좌표계를 원통 좌표계라고 한다. 원통 좌표계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세 좌표 중 "r"이 고정되고, "θ, z"가 임의의 값을 취할 수 있을 때의 자취가 원통이기 때문이다. 원통 좌표계의 특이점은 "z"축 위의 점들이다. 세 가지 원통 좌표계의 좌표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써서 데카르트 좌표로 변환할 수 있다. 구면좌표계. 구면좌표계는 원점에서의 거리 "r", "z"축 양의 방향과 이루는 각 'θ', "xy" 평면으로의 사영이 "x"축 양의 방향과 이루는 각 "φ," 이 세 가지 변수 "r,θ,φ"로 이루어지는 좌표계이다. 특이점은 "r"="0" 이거나, "θ"="nπ"(단, "n"은 자연수)를 만족하는 모든 ("r,θ,φ")이며, 직교 좌표계에선 각각 ("x,y,z")=(0,0,0), "z"축에 해당한다. 구면 좌표계는 "r"을 고정시켰을 때의 자취가 원점을 중심으로 하는 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면좌표계의 "r"은 원점과의 거리인 반면 원통 좌표계의 "r"은 "z"축과의 거리이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원통 좌표계의 반지름을 "r"대신 "ρ"를 써서 표기하기도 한다. 원통 좌표계의 "θ"는 구면좌표계의 "θ"가 아닌, "φ"와 일치한다. 또한 이 좌표계는 지구의 지도에 사용되는 위도, 경도와 비슷하다. 위도 "δ"는 'θ'의 여각이며("δ" = 90° − 'θ'), 경도 formula_16은 formula_16 = 'φ' − 180°와 같이 정의된다. 세 가지 구면좌표계의 좌표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직교 좌표로 변환될 수 있다. 일상에서의 적용. 극좌표계는 2차원이기 때문에 점이 2차원 면에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다. 극좌표계가 가장 널리 쓰이는 곳은 어떤 현상이 중앙에서의 거리와 방향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이다. 위의 예시는 기본적인 극좌표를 사용한 식이 곡선을 정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아르키메데스 소용돌이처럼 직교 좌표계로는 표현했을 때 복잡한 식이 한 예이다). 또한, 물체가 중심에서 돌거나 중심을 두고 발생하는 현상이 자주 관찰되는 물리 체계에서는 극좌표계를 적용하는 것이 보다 간단하고 직관적으로도 이해하기 쉽다. 극좌표계를 도입하고자 한 계기는 등속 원운동이나 궤도 운동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치와 항행. 극좌표계는 항행에 자주 쓰이며, 각과 거리로 목적지나 여행 방향을 정해준다. 예를 들어 항공기는 항행을 위해 약간 변형된 극좌표를 사용한다. 0°는 주로 360°로 주로 일컬어지며, 각도는 반시계 방향이 아닌 시계 방향으로 돈다. 360°는 자북극을 가리키며, 90°, 180°, 270°는 각각 동쪽, 남쪽, 서쪽을 일컫는다. 따라서 동향으로 5해리를 이동하는 항공기는 90°로 5단위를 이동하는 것이 된다(항공 교통 관제에서는 90(niner-zero)라고 읽는다). 모형화. 중앙점이 대칭의 기준이 되는 시스템이면 자연스럽게 극좌표계를 사용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지하수 공식이며, 방사적으로 대칭되는 우물에 곧잘 쓰인다. 또한 중심력이 있는 시스템도 극좌표가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력장(거꿀제곱법칙을 따른다), 안테나와 같이 점광원이 쓰이는 체계 등이다. 방사적으로 비대칭되는 시스템에도 극좌표계가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폰의 지향특성은 음원의 방향에 따라 비례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러한 패턴은 극좌표 곡선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마이크인 카디오이드 마이크의 곡선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된다. 패턴은 낮은 주파수에 전방향성으로 바뀐다. 확성기의 출력을 3차원으로 모형화한 것은 확성기의 성능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패턴이 주파수에 따라 많이 변하기 때문에 여러 주파수에서 그린 그래프가 필요하다. 극좌표계 그래프는 많은 확성기가 낮은 주파수에서 전방향성으로 향하는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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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덩샤오핑(, 1904년 8월 22일~1997년 2월 1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이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소위 중국공산당 당료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고 1981년 6월 28일부터 1989년 11월 7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권력자로 군림하는 한편, 1982년 6월 28일부터 1983년 3월 15일까지는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직에 있었으며 1983년 3월 15일부터 1983년 6월 18일까지 후야오방(胡耀邦)이 마지막 후임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직(당시 중공 국가부주석: 우란푸)을 수행하였고 1983년 6월 18일을 기하여 8년 5개월 남짓의 중공 과도정부 체제(1975년 1월 17일~1983년 6월 18일)가 종식되었으며 1983년 6월 18일, 리셴녠(李先念)이 정식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취임하였다. 1983년 이후 국가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 주석직의 교체에 관여하고,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의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다.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생애. 출생과 생애 초반. 태어남. 1904년(광서 30년) 청나라 쓰촨성 광안의 한 마을에서 덩원밍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덩원밍은 아들의 이름을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는 뜻의 선성(先聖)으로 지어주었고, 다섯 살때에 서당 훈장이 희현으로 고쳐주었다.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당원이 된 후에 만들어낸 별명이다. 아버지가 지주였기 때문에 먹고 살 걱정이 없었으므로, 덩샤오핑은 낙관주의 곧 모든 일을 좋게 생각하기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낙관주의는 정치가로서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주었고, 원만한 성격덕분에 공산당에서 적이 없었다. 유학하다. 프랑스 유학. 덩샤오핑은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충칭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다 근공검학(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 곧 해외유학을 만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와 서구문물을 배우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500명의 중국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중국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도 1920년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에 갔다. 유학생일 때에 덩샤오핑은 파리의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들어갔으며, 기관지인 적광(赤光,붉은 태양)을 만들었다. 저우언라이를 만난 때이기도 한데, 저우언라이는 자신보다 여섯살 어린 덩샤오핑을 아꼈으며, 덩샤오핑도 저우언라이를 큰형님으로 따랐다. 소련 유학. 1926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탄압때문이었다. 소련 유학시절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에 돌아왔다. 마오쩌둥과 만나다. 덩샤오핑은 유학을 마치고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에 참여했다. 1933년 중국공산당에서는 소련파와 마오파의 당권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쩌둥이 지면서 덩샤오핑도 실각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은 중국에 맞지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으나,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1935년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마오이즘)이 인정되었다. 국공내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덩샤오핑은 류보청이 사단장인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일했다. 화이하이 대전에서 덩샤오핑이 이끈 60만명의 군대는 100만명의 국민당 군대를 크게 이겼다. 1946년부터 1949년 국공내전시기에 화중, 화남, 서남지방이 정복됐으며 서남지방(쓰촨,꾸이저우,윈난,티베트)등 서남지방 4개성을 다스리는 제1서기가 됐다. 결혼.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아내는 장 시유안으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의 첫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죽었다. 그 아이 또한 아기 때에 죽었다. 두 번째 아내인 진웨이잉은 그가 1933년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된 직후 그를 떠났다. 세 번째 아내인 줘린은 윈난성의 한 실업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38년에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야난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굴 앞에서 덩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5명의 자식을 두었다(2남 3녀). 젊은 시절. 학창 시절. 덩샤오핑 서기장은 젊은 시절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으며, 르노에서 트랙터를 만드는 금속 노동자로 살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금속 노동 경험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학생시절 중국공산당(CCP)에 가입한다. 그는 장정의 베테랑이었으며 마오쩌둥(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다. 마오쩌둥은 혁명 직후 그를 공산당의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공산당 입당과 대약진 운동.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후 정무원 부총리·재정 부장·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부총리,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실권하였으나, 1973년 부총리로 다시 복권되었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아사사태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 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개혁.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공산주의 사상을 존중하되 중국의 현실에 맞게 해석하는 합리적인 생각에 근거한 경제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될까 염려하고 있었다. 박해와 복귀. 권력의 누수를 걱정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유발시켰고, 이 시기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 1974년 복귀하고 1975년에는 중화인민지원군의 총참모장에 내정되지만 재차 1976년에 고초를 겪었다. 당시 그가 겪은 가장 큰 슬픔은 홍위병에 쫓겨다니던 큰아들 덩푸팡(1944년-)이 베이징대학교에서의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 된 것이었다. 덩푸팡은 1984년 장애인복지기금,1988년 장애인연합회,1999년엔 지적장애인의 자활을 돕는 단체등의 장애인 인권단체들을 만드는 등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다. 그 해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복직한다. 여러번 숙청당했다가 기적적으로 복귀를 반복하여 그에게는 오뚜기 또는 부도옹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후 마오쩌둥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지 않고 그에게는 '공이 7이요 과는 3이다'라고 냉정한 평가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마오쩌둥의 직계는 물론 자신에게 잠재적인 정적이 될 만한 세력의 숙청을 감행한다. 혁명 활동. 농민출신 혁명가.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구가 극히 작고 늙어가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거대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사실 그는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둥과 한나라의 고조와 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점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당내 권력투쟁. 중국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다. 덩샤오핑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권력 변동 때와는 달리, 아직도 화궈펑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으로부터 물러나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두 가지 결정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한 가지는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였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하나는 출신성분제도를 혁파한 것이었다. 그 출신성분제도는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버렸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 계급은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가 중국공산당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재장악하면서 화궈펑은 수상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조자양)이 그 자리에 교체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이 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비록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중국의 지도자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실제 권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손에 있지만, 주석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별도의 사람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의 계획에는 당에서는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는 수행하도록 하여,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정치 활동. 1975년 당 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1976년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였으나 1978년 복권되었고 1982년까지 당 부주석·총참모장·부총리·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을 지냈다. 1978년부터는 중국 중앙인민협상회의 주석직을 겸하였으며,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은 1983년까지 유지하였다. 1982년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정치국 상무위원·공산당 중앙 고문위원회 주임을 겸직하여 중공의 최고 정치 실력자로 군림했으나, 1993년 사실상 은퇴하여 노환과 숙환에 시달리다 사망하였다. 집권 기간. 개방 정책.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 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공인했다. 그 뒤 1983년 국가 주석직이 부활하여 리셴녠에게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직책을 본격적으로 넘겼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위원회와 당 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을 그가 차지하므로써 1983년 6월 18일을 기하여 실권을 회복하는 등 아직도 실권은 그가 쥐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 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 재통일의 근거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중국식 사회주의. 덩샤오핑의 개혁의 목표는 4대 현대화에 요약되어 있는데, 농업의 현대화, 공업의 현대화, 국방의 현대화, 과학기술의 현대화이다. 현대화되고 산업화된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이 전략이 공산주의 시장경제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공산주의의 초기단계에 있고 당의 의무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가치관의 우선 순위를 하향 조정하여 덩샤오핑은 어떤 정책이 단순히 마오쩌둥이나 더 보수적인 진연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개혁 정책 지원. 덩샤오핑이 경제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론적인 배경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덩샤오핑 본인으로부터 나온 경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은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들여왔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중앙 정부의 지도방향과 충돌하곤 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적이었고 유망하다고 밝혀지면 대규모로 여러 분야에 채택되었고 종국에는 국가 전체에 도입되었다. 많은 개혁들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이 경험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패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개혁들이 고르바초프 자신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하향식 접근과 대조되는 덩샤오핑의 개혁은 상향식 개혁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이야기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개혁은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에 의하여 계획된 중앙 집중적 대규모 경제 제도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대중 선동적인 경제 건설 방식을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모델이나 마오쩌둥의 모델과 다르게 시장 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이었고, 이 방법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경제 계획과 조정 매커니즘을 본 딴 것이었다. 절차의 제도화.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주석은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주석의 명의로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당의 다른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받는 후계자였고, 당 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인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톈안먼 사건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텐안문 사건 이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 놓은 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93세. 유산. 언론인 짐 로워는 덩샤오핑의 1979년에서부터 1994년의 개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 복지 향상의 가장 큰 향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덩샤오핑의 정책은 공산주의 틀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였고 시장을 개방하였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유언과 같이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유언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유해는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화장 정책을 추진한 중국 정부답게, 시민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유언했다. 죽고 난 뒤 장쩌민의 지도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 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 일으켰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개혁 절차가 제도화되고 농민혁명가에서 교육을 잘 받은 전문기술인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서 정치 제도는 안정되었다. 사회문제도 중국본토가 매년 빠르게 현대화되고 번영하게 됨에 따라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은 몇 가지의 남겨진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시장개혁의 결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중앙정부소유의 국영기업들이 부실화되었고, 그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들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산당의 지배를 유지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적 가치보다 실용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확증시키는 덩샤오핑주의는 서양에 많은 질문들을 생겨나게 했다. 중국과 그 밖의 여러 관찰자들은 더 역동적이고 풍성해지는 중국 사회를 하나의 당이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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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수
연분수(連分數)는 다음과 같은 꼴의 분수를 말한다. 이 식에서 formula_2 은 정수, 나머지 formula_3 은 양의 정수이다. 위 분수꼴의 수를 formula_4로 쓰기도 한다. 같은 방법으로 일반적인 연분수를 formula_5 로 쓴다. 이를 유한에만 한정하지 않고, 무한까지 확장하여, 무한 연분수를 다음과 같이 극한을 이용하여 정의할 수도 있다. 위 극한은 어떤 양의 정수 formula_7 들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모든 유한 연분수는 유리수이며, 모든 유리수는 formula_8의 경우와 같이 정확히 두 가지 유한 연분수로 나타내어진다. 모든 무한 연분수는 무리수이며, 모든 무리수는 무한 연분수로 표현가능하며 그 표현은 유일하다. 무한 연분수 중 꼬리들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순환 연분수라고 한다. 어떤 무리수가 순환 연분수로 표현가능할 필요충분조건은 그것이 어떤 이차방정식의 해가 되는 것이다. 즉, 이차 무리수()인 것이다. 근사분수. 무리수를 무한 연분수로 나타내는 방법은, 처음 몇 항까지의 연분수가 좋은 유리수 근삿값을 주기 때문에 특히 유용하다. 이런 근사 유리수값을 연분수의 "근사분수(convergents)"라 부른다. 짝수 근사분수는 실제값보다 작은데 비하여, 홀수 근사분수는 실제값보다 크다. 예를 들어, 원주율 파이(formula_9)의 근사분수들을 계산해 보자.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 이를 반복하면, 무한 연분수 를 얻는다. formula_9의 세 번째 근사분수는 formula_15이며,이는 실제 formula_9 값에 매우 가까운 값이다. 오차의 한계. 어떤 무리수의 formula_17번째 근사분수는, 그것을 분모와 분자가 서로소인 분수로 나타내었을 때의 분모보다 작은 분모를 가진 어떠한 유리수보다 주어진 무리수에 가까이 근접해 있다. 이 때의 오차의 한계는 formula_18을 주어진 무리수, 각각 formula_19과 formula_20을 formula_17번째 근사분수의 서로소인 분자와 분모라 할 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주어진다. 또한, 다음 식 을 만족하는 가장 작은 정수 formula_24에 대하여, 적당한 자연수 formula_25가 존재하여 formula_26와 formula_27를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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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월(十月시월, October)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며 2월하고도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그 다음 해가 평년일 경우에는 그 다음 해 4월과 7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9월과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화요일과 수요일에 57번, 금요일과 일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04년, 2032년) 및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2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일 경우에는 10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및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1년, 1987년, 2015년, 2026년, 2037년)일 경우에는 한글날만 공휴일이며,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1988년, 2016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3년,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개천절만 공휴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추석이 있는 해도 있다. 이런 경우는 모두 음력 7월 이전에 윤달을 끼고, 이 가운데에는 9월 30일이 추석 당일인 경우 혹은 대체휴일이 적용된 경우도 포함한다. (예: 2001년, 2006년, 2009년, 2012년 (10월 1일), 2017년, 2020년, 2025년 등) 북한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노동당 창건일이 주말과 겹쳐 10월에 공휴일이 사실상 없는 해가 된다.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16년, 2044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체육의 날과 겹쳐지며,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8년, 2056년) 및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06년, 2017년, 2023년, 2034년, 2045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경찰의 날과 겹쳐진다. 음력 8월과 음력 9월이 이 달에 있으며 10월에는 음력 8월 15~16일, 9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8월이나 윤9월이 양력 10월에 낀다. 유래. 영어의 October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서 유래되었다. 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eight(8)을 의미하는 octo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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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월(一月, January)은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첫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 중 하나다. 1월의 첫 번째 날은 중국에서 원단이라고 하며 대한민국의 양력설이다. 이 달과 작년의 5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며, 윤년일 경우에는 이 달과 그 해의 4월, 7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북반구의 대부분 지역은 1월에 가장 추우며(겨울의 두 번째 달이다.), 남반구의 대부분 지역은 1월에 가장 덥다(여름의 두 번째 달이다.). 북반구에서 1월은 남반구의 7월과 기후적으로 동일하며, 반대로 남반구의 1월은 북반구의 7월 기후와 동일하다. 대한민국에서 생일이 가장 많은 달이며,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57번,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음력 11월과 음력 12월이 이 달에 있으며 1월에는 음력 11월 15~16일, 1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유래. 영어 'January'(라틴어 Mensis Ianuarius, "month of Janus")는 문(door)을 뜻하는 라틴어 ianua에서 유래했다. 문의 신인 야누스(Janus)에서 따왔으며, 야누스는 하늘의 문지기로서 한해를 여는 신이기도 하다.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문은 시작과 전환(beginnings and transitions)을 나타내는 데서 모든 사물의 출발점의 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원래 고대 로마 달력은 10개월 (304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겨울은 달로서 생각되지 않았었다. 기원전 713년경, 로물루스의 계승자였던 누마 폼필리우스가 1월과 2월을 추가해 태음년(354일)과 같은 길이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비록 원래의 고대 로마 달력에서는 3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지만, 누마 통치기, 혹은 기원전 450년경 데켐비리에 의해 1월이 한 해의 첫 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유럽에서는 3월 25일(성모 영보), 12월 25일(크리스마스) 등을 포함한 다양한 기독교적 축일들이 새해의 첫 날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6세기 초에 공식적으로 다시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이는 1월 1일이 그리스도 할례축일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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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월(二月, Februar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두 번째 달이며, 평년일 때에는 28일, 윤년일 때에는 29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이 달과 작년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3월 및 1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8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올해의 2월 28일과 작년의 3월 1일은 요일이 항상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58번, 토요일과 일요일에 57번,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그리고 북반구에서는 겨울의 마지막 달이며 남반구에서는 여름의 마지막 달이다. 2월은 한중일월 모두 공휴일이 있을 수도 있고 일본에만 공휴일이 있을 수도 있는 달이다. 대한민국에서 2월의 공휴일은 설날이 2월이거나 설 당일이 1월 31일인 경우에만 있다. 그마저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음력설이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예 없었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광명성절이 기본적으로 공휴일이며 정월 대보름도 공휴일이기 때문에 2월에 최대 3개의 공휴일이 잡히기도 한다. 880년의 2월에 리베몽에서 독일의 루트비히 3세와 프랑스의 루이 3세, 샤를로망 3세 간에 로렌의 영유권을 독일의 루트비히 3세에게 양도하는 리베몽 조약을 체결하였다. 날짜는 미상이다. 음력 12월과 음력 1월이 이 달에 있으며 2월에는 음력 12월 15~16일, 1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1년, 1987년, 1998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93년, 2099년 등)일 경우 달력에서 나머지 한 주일의 칸이 비게 된다. 유래. 로마의 달인 2월(Februarius)은 고대 로마 달력에서 음력 2월 15일(만월)에 개최된 정화 의식인 Februa에서 비롯된, 정화(purification)를 의미하는 라틴어 februum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월과 2월은 로마 달력에 추가된 마지막 두 달이었는데, 로마인은 원래 겨울을 달력에 없는 기간(monthless period)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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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월(三月, March)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세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북반구에서는 3월이 되면서 날씨가 풀리기 때문에, 대체로 이 달을 봄의 시작으로 본다. 남반구는 가을이 된다. 이 달과 그 해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평년인 경우 그 해의 2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윤년의 경우에는 작년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끝난다. 올해의 3월 1일과 내년의 2월 28일은 요일이 항상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58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57번,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08년, 2036년, 2064년, 2092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2003년, 2014년, 2020년, 2025년, 2031년, 2042년, 2048년, 2053년, 2059년, 2070년, 2076년, 2081년, 2087년, 2098년)일 경우에는 3월의 공휴일이 대통령 선거일이 3월 초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경우 정월 대보름이 3월 초가 아닌 경우에는 3월에 공휴일이 없다.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24년, 2052년, 2080년)과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2002년, 2013년, 2019년, 2030년, 2041년, 2047년, 2058년, 2069년, 2075년, 2086년, 2097년)일 경우 3월 2일이 토요일, 3월 3일이 일요일이 되어 3월 4일 월요일에 시업/입학식(대학교의 경우 개강)을 시행하고,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08년, 2036년, 2064년, 2092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2003년, 2014년, 2025년, 2031년, 2042년, 2053년, 2059년, 2070년, 2081년, 2087년, 2098년)일 경우 3월 2일이 일요일이 되어 3월 3일 월요일에 시업/입학식(대학교의 경우 개강)을 시행한다. 음력 1월과 음력 2월이 이 달에 있으며 3월에는 음력 1월 15~16일, 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낄 경우 춘분 이전은 윤1월, 춘분 이후는 윤2월이 된다. 유래. 3월(March)은 가장 오래된 고대 로마 달력의 첫 번째 달인 마르티우스()에서 유래되었다. 마르티우스는 기원전 153년까지 첫 번째 달이었으나 그 이후로 세 번째 달이 되었다. 마르티우스라는 명칭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손으로부터 이어지는 로마인들의 선조 그리고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마르스의 달인 마르티우스는 전쟁을 위한 절기의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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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월(四月, April)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네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4월이 과학의 달이다. 이 달과 그 해의 1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7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그 해의 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동안 이 달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로 58번, 월요일, 화요일로 57번, 목요일, 토요일로 56번 시작한다. 중국은 청명절, 일본은 쇼와의 날, 베트남은 기일로 인해 4월에는 반드시 공휴일이 있으나 대한민국에서 4월의 공휴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 4월 말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2006년 식목일 이후로 없으나, 4년에 한 번씩 하는 총선의 선거일이 4월로 잡히기 때문에 4년에 한 번씩 공휴일이 생긴다. 또한 식목일이 공휴일이던 2006년 이전에도 식목일이 주말과 겹쳐 공휴일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인 예로 1981년, 1987년, 1992년, 1998년 등) 반면 북한은 청명절과 태양절, 인민군 창건일 중 어느 하나가 주말에 겹치더라도 반드시 공휴일이 있다. 음력 2월과 음력 3월이 이 달에 있으며 4월에는 음력 2월 15~16일, 3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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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월(六月유월, June)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여섯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는 네 개의 달 중 하나이다. 이 달과 다음 해의 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이름의 유래는 오비디우스의 "Fasti"라는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와 동격이자 쥬피터의 아내 로마 여신 유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젊은이"를 뜻하는 라틴어 "juniores"인데, 이는 5월을 뜻하는 "May"가 "노인"을 뜻하는 라틴어 "maiore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Fasti"VI.1–88). 어느 해건 6월이 시작하는 요일은 그 해의 다른 달이 시작하는 요일들과는 항상 다르며, 이는 5월과 6월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또한, 6월이 끝나는 요일은 그 해의 3월이 끝나는 요일과 항상 같으며, 6월이 시작되는 요일은 내년 2월이 시작되는 요일과 항상 같다. 또한, 전년도 9월,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단, 평년의 경우에만 해당).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3월, 1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8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58번, 토요일, 일요일에 57번, 화요일, 목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6월에는 북반구에서 낮이 가장 긴 날이 있고, 남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짧은 날이 있다. 또한 북반구에서 6월의 계절은 남반구에서의 12월의 계절과 같다. 북반구에서 기상학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날은 6월 1일이며, 반대로 남반구에선 6월 1일에 겨울이 시작된다. 6월엔 특히 결혼식이 많이 치러지는데, 그 유래중 하나로는 6월이 유노(헤라)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유노는 결혼의 여신이었고, 그로 인해 6월에 결혼을 하면 운이 따른다는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서는 여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남반구에는 겨울이 된다. 대한민국에서는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위대한 김정일의 날만,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소년단 창립기념일만 공휴일이다. 일본에는 이 달에 공휴일이 아예 없다. 과거에는 8월과 12월에도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생일인 12월 23일이 천황절, 2016년 8월 11일이 산의 날로 지정되면서 6월만 일본에서 유일하게 주말을 제외한 휴일이 하루도 없는 달로 남게 되었다. 음력 4월과 음력 5월이 이 달에 있으며 6월에는 음력 4월 15~16일, 5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6월에 윤달이 들 경우 하지 이전이면 윤4월, 하지 이후이면 윤5월이 들게 된다.
478
65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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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월(七月, Jul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일곱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4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그 해의 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월요일과 화요일에 57번,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7월의 기온은 북반구에서는 가장 높고, 남반구에서는 가장 낮아, 북반구의 1월 기온과 같다. 11월과 함께 한중일월 4국의 공휴일이 빈약한 달이기도 하다.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7월에 공휴일이 없고, 대한민국에서는 7월에 공휴일이 2008년 제헌절이후로 아예 없다. 2007년 이전에도 1983년, 1988년, 1994년, 2005년과 같이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나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인 경우 사실상 7월에 공휴일이 없는 해가 있었다. 반면 북한은 7월 27일이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로 공휴일이며 월요일,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화요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이 주말에 겹쳐서 북한도 7월에는 사실상 공휴일이 없는 해가 된다. 일본의 경우는 7월에 공휴일이 반드시 있다. (바다의 날) 국내에서는 7월부터 휴가철이 시작된다. 음력 5월과 음력 6월이 이 달에 있으며 7월에는 음력 5월 15~16일, 6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끼는 경우는 대서 이전은 윤5월, 대서 이후는 윤6월이다. 유래. 영어로 7월을 의미하는 July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전에는 5번째(fifth)를 의미하는 퀸틸리스 (Quintilis 또는 Qinctilis)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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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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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월(八月, August)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여덟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이 달부터 연말까지는 2의 배수가 오는 달마다 31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2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되며, 다음 해도 평년인 경우 다음 해 5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해 10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58번, 목요일, 금요일은 57번, 화요일, 일요일은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개국에서 공휴일이 빈약한 달 중 하나로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8월에는 공휴일이 없고 일본은 2015년까지 8월에 공휴일이 하나도 없었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8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휴가철이 끝나는 달이며 대학교의 신학기(2학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2015년까지는 일본에서 6월과 함께 공휴일이 없는 달이었으나 산의 날이 8월 11일로 지정되면서 빠졌다. 음력 6월과 음력 7월이 이 달에 있으며 8월에는 음력 6월 15~16일, 7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들 경우 처서 이전은 윤6월, 처서 이후는 윤7월이다. 유래. 8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August는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하였다. 그 전에는 섹스틸리스 (Sextilli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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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월(九月, September)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아홉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는 가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남반구에는 봄이 된다. 이 달과 그 해의 1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다음 해가 윤년인 경우에는 다음 해 3월, 11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6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일요일과 월요일에 57번,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국의 공휴일이 모두 있을 가능성이 높은 달로 일본과 베트남, 북한은 건국 이래 9월에 공휴일이 최소 하나는 무조건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9월의 공휴일은 추석이 9월 내에 들거나 늦어도 10월 1일이 추석 당일이어야만 있으나 추석이 9월에 들 확률이 10월에 들 확률보다 높기 때문에 9월에 공휴일이 있을 확률은 높은 편이다. 중화인민공화국도 이와 같다. 미국에서는 이 달에 새 학기를 시작한다. 음력 7월과 음력 8월이 이 달에 있으며 9월에는 음력 7월 15~16일, 8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7월 (추분 이전) 윤8월 (추분 이후)이 양력 9월에 있다. 유래. 9월을 뜻하는 영어단어 September는 seven(7)을 의미하는 라틴어 'septem'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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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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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월(November)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한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8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그 다음 해가 윤년인 경우 2월과 마지막 요일이 같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3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평년인 경우 그 해의 2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해 5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다음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8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58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57번,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국에서 공휴일이 가장 빈약한 달로, 중국과 베트남은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건국 이래로 11월에 법정공휴일이 아예 없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1월 16일이 어머니날로 공휴일이며 대한민국에는 4번의 임시공휴일이 11월에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은 11월에 공휴일이 2개 있다. 음력 9월과 음력 10월이 이 달에 있으며 11월에는 음력 9월 15~16일, 10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9월이나 윤10월이 양력 11월에 든다. 유래. 11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vember는 "nine"을 의미하는 라틴어 novem에서 유래하였다. 11월은 고대 로마 달력의 9번째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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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월(十二月, December)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 중 마지막 달이다. 중국, 한국, 일본, 미국에서는 이 달을 겨울의 시작으로 본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등 남반구의 나라들은 여름이 된다. "구랍"이라고도 부르나, 이는 "지난해 음력 12월"을 뜻하므로, 양력 12월과는 관련이 없다. 이 달과 그 해의 9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이 달과 그 해의 4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일 경우 그 다음 해 3월, 11월과 같은 요일이 되며, 다음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6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이 달에 있는 크리스마스와 내년의 첫날은 항상 같은 요일이다. 또한 한 해의 첫날 1월 1일과 마지막날 12월 31일은 평년일 경우만 요일이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일요일과 월요일에 57번,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대한민국에서 12월의 공휴일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04년, 2032년 등)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 1982년, 1988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16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4년, 2049년 등) 그리고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3년,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 2050년 등)일 경우에는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금요일,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토요일,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절만 공휴일이고 화요일,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수요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김정숙 생일만 공휴일이 된다. 1988년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12월에 휴일이라곤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와 함께 12월 23일이 천황탄생일로 지정되면서 일본에도 12월에 휴일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에는 12월에 휴일이 없다. 북한은 12월에 휴일이 2개 (김정숙 생일, 사회주의헌법절) 있다. 음력 10월과 음력 11월이 이 달에 있으며 12월에는 음력 10월 15~16일, 11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12월에 윤달이 낄 경우는 동지 이전에는 윤10월이, 동지 이후는 윤11월이 든다. 유래. 12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December는 ten(10)을 의미하는 라틴어 'decem'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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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좌표계
원통좌표계 (cylindrical coordinate system)는 3차원 공간을 나타내기 위해, 평면 극좌표계에 평면에서부터의 높이 formula_1 (혹은 formula_2)를 더해, formula_3 로 이루어지는 좌표계이다. 원통좌표계는 한 축을 중심으로 대칭성을 갖는 경우에 유용하다. 예를 들면, 반지름이 formula_4인 무한히 긴 원통의 직교좌표계에서의 식은 formula_5이지만, 원통좌표계에서는 간단히 formula_6가 된다. 이런 이유로 원통좌표계(cylinder-ical coordinate)란 이름이 붙어있다. 정의. 3차원 공간의 점 P는 formula_3로 표시된다. 이를 직교좌표계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formula_1에 높이(height)란 의미를 주어 formula_1대신 formula_2를 사용한 formula_19란 표기도 자주 쓰인다. 원통좌표계의 경우는 좌표값에 따라 한 점을 여러 좌표가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 변수의 범위를 보통 아래와 같이 제한한다. 단위벡터. 각 단위벡터의 직교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유용한 공식들. 부피 요소 라플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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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활성 기체
비활성 기체(非活性氣體) 혹은 불활성 기체(不活性氣體), 희가스(稀gas), 귀족 기체(noble gas)는 화학 계열로 주기율표의 18족 원소를 말한다. 최외각 전자가 모두 차 있는 이러한 원소들은 전자를 주고 받기 힘들기 때문에 화학결합을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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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면좌표계
구면좌표계(球面座標係, spherical coordinate system)는 3차원 공간 상의 점들을 나타내는 좌표계의 하나로, 보통 formula_1로 나타낸다. 원점에서의 거리 formula_2은 0부터 formula_3까지, 양의 방향의 z축과 이루는 각도 formula_4는 0부터 formula_5까지, z축을 축으로 양의 방향의 x축과 이루는 각 formula_6는 0부터 formula_7 까지의 값을 갖는다. formula_4는 위도로, formula_6는 경도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기도 한다. 이 세 수치를 보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공간의 점을 찾을 수 있다.: 원점 formula_10에서 formula_2만큼 z축을 따라 간다. 그 지점에서 x z 평면 안에 있으면서 z축에서부터 formula_4만큼 회전한다. 이 xz 평면 전체를 z축을 축으로 formula_6만큼 반 시계방향(+x축에서 +y축 방향으로)으로 돌린다. 구면좌표계라는 이름은 이 좌표계에서 'formula_14'이 단위구(單位球)를 표현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한 이 좌표계가 구대칭을 기치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면좌표계와 원통좌표계는 평면 극좌표계를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며, 구면좌표계는 구대칭이 나타나는 문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와 같이 구대칭이 있는 경우에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 때 구면좌표계를 사용한다. 아래 변환식을 통해 직교좌표계와 변환할 수 있지만, 변환식에서 사용하는 역삼각함수는 일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공간상의 각 점마다 하나의 좌표만 대응하는 직교좌표계와는 달리, 구면좌표계는 한 점을 나타내는 표현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 0°, 0°), (1, 0°, 45°), 과 (-1, 180°, 270°)는 모두 같은 점을 나타낼 수 있다. 표시 문자. 세 좌표의 표시를 위한 여러 가지 다른 약속이 존재한다. 국제 표준 기구의 지침(ISO 31-11)에 따라 물리학에서는 ("r", "θ", "φ")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점에서의 거리, 천정과 이루는 각도(천정거리), 방위각 등을 표시하고, (미국의) 수학에서는 고도와 방위각이 바뀌어 'φ'와 'θ'로 표시된다. 정의. 좌표 formula_15는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주어진 점을 P라 하자. 구면좌표계의 경우는 좌표값에 따라 한 점을 여러 좌표가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 변수의 범위를 보통 아래와 같이 제한한다. 좌표 변환. 다른 3차원 좌표계로 변환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단위벡터. 각 단위벡터의 직교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유용한 공식들. 면적 요소 부피 요소 기울기 발산 회전 라플라시안
486
7133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486
줄리아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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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5
잭슨 5()는 1964년에 결성하고, 잭슨 형제들로 이루어진 미국 인디애나주 출신의 대중음악 그룹이다. 아버지 조지프 잭슨이 매니저를 맡았으며, 멤버는 재키(1951년생), 티토(1953년생), 저메인(1954년생), 말론(1957년생), 마이클(1958년생)이며, 이 중 막내가 나중에 팝의 황제로 불리게 되는 마이클 잭슨이다.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여 "버블검 소울"이란 스타일의 음악을 유행시켰다. 1972년엔 에픽 레코드으로 계약사를 바꾸었으며, 모타운이 잭슨 파이브란 이름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잭슨스(The Jacksons)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했다. 현재까지 약 3천만 장의 앨범을 팔았으며 1989년에 해체했다. 2001년에 잠시 재결성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도로 해체하고 2012년에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역사. 초기. 잭슨 파이브의 구성원은 모두 시카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개리의 작은 집에서 자라났다. 레비, 티토, 재키, 저메인, 라토야, 말론, 마이클, 랜디, 자넷으로 이어지는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를 키운 어머니 캐서린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고, 아버지 조셉은 블루스에 심취한 금속공장 직원이었다. 부부는 아이들을 아주 엄격하게 키우는 반면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어머니 캐서린은 젊었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클라리넷도 연주했다. 조셉은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과 함께 결성한 그룹 팔콘스로 활동하며 마을의 바와 클럽, 시카고와 인디애나 북부 지방의 대학 행사들을 휩쓸다가, 결국은 몇 달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다 그룹을 해체한다. 밤마다 아이들 모두가 아버지 곁에 모여 위대한 고전 팝송을 연주하는 일이 허다했다. 아버지 조는 자식들이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진짜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아주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맨 위의 세 형제 재키, 티토, 저메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그룹 더 잭슨 브라더스가 결성되었다. 세 아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을 군소리 없이 받아야 했다. 그러다 말론과 특히 마이클이 합류하면서 그룹은 완전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어느날 꼬마 마이클이 꼭 제임스 브라운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고 놀란 어머니의 제안으로 그룹에 합류하게 된 마이클은 한동안은 봉고를 연주하다가 그룹의 싱어가 된다.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었는데도 몸과 목소리를 다루는 그의 재능은 이미 집안에서 가장 뛰어났다. 1963년 말엽, 마이클은 다니던 학교의 연말 축제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다. 마이클은 검은 바지와 힌 셔츠를 차려입고 1959년에 브로드웨이에서 막이 오른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중에서 〈Climb Ev'ry Mountain〉을 부른다. 어린 꼬마의 매끄러운 목소리에 학부모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내가 터져 나갈 듯이 박수를 쳤다. 훗날 마이클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어요. 기가 막힌 느낌이었죠." 아버지 조셉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아들의 모습과 아들이 장내에 일으킨 여파를 지켜보았다. 그때부터 조셉은 개리 시와 주변 도시에서 열리는 온갖 콘테스트에 자녀들의 이름을 등록한다. 이들 그룹은 연령도 스타일도 다양한 사람들과 경합을 벌여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그 세계에서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도전자들이 된 잭슨 일행은 무엇 하나 거저 되는 일이 없는 만큼 의상이며 헤어스타일이며 액세서리며 이것저것 신경쓰기 시작했고, 조셉은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랐다. 그래서 주말마다 시카고로 가서는 흥행하는 공연들을 찾아냈다. 관중이 좋아하는 제스처며 음악이며 몸동작을 기억해두었다가 자식들이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해내도록 만들었다. 콘테스트를 거듭할수록 잭슨 형제는 하루가 다르게 노련해졌고 창의력 역시 견줄 데 없을 정도로 발달했다. 공연마다 따라다니는 일부 극성팬들이 싫증 내지 않도록 연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꾸준히 신곡을 만들어내야 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우승해서 상을 받는 만큼 그 대가도 따르는 법이었다. 집에서 연습이 끝나는 시간은 갈수록 늦어졌고, 조셉은 아들들의 명성에 어울리는 마이크며 악기들을 갖추어가느라 가산을 탕진했다. 어쨌든 그런 희생이 다음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잭슨 파이브는 아마추어 콘테스트 순회를 계속해 나갔다. 로열 시어터 상에 심취한 잭슨 파이브는 경쟁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쳐가며 매주 새로운 곡을 들고 나왔다. 로열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것도 좋긴 했지만, 아버지 조는 음악의 신전이랄 수 있는 뉴욕의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편이 훨씬 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인디애나 주와 미시간 주에서 잭슨 파이브가 워낙 대단한 성공을 거둔 덕에 아폴로 시어터에서 예선 없이 곧장 본선에 진출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잭슨 형제는 두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전국 최고 가수들의 얼굴로 도배가 된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잭슨 파이브는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했다. 공연비로 당시 600달러를 받았고, 무엇보다 그룹 최초의 음반을 녹음할 수 있게 해준 값진 우승이었다. 아폴로에서 성공을 거둔 다음에 잭슨 일행은 아버지의 동료인 고든 키스 덕분에 처음으로 앨범을 취입할 기회를 얻었다. 고든 키스는 그 역시 음악에 심취한 사람이자 개리의 스틸타운 녹음 스튜디오 사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조는 집에 올 때 고든 키스에게 들려주기 위해 연습해야 할 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손에 들고 왔다. 아이들은 그 곡의 멜로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실망스런 마음을 애써 감추고 연습을 시작했다. 조는 데모 테이프를 제작자에게 넘기러 갔다가는 저녁 무렵이 되면 새로 연습할 노래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몇 주 후, 잭슨 일가는 최초의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키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코러스며 금관악기 연주자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악기를 연결하고 첫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녹음 작업은 주로 일요일에 진행되어서 앨범 전체 녹음을 끝내기까지는 일요일이 여러 번 지나야 했다. 조는 주중에 내내 쉬지 않고 아들들을 연습시켰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그룹은 마침내 그들의 첫 노래 〈Big Boy〉의 녹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첫눈에 반한 소녀와 사귀고 싶은 소년의 마음을 노래하는 발라드 곡이었지만, 정작 그런 가사를 읊조리는 마이클은 자신이 노래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렸다. 서둘러 음반을 준비하고 나자 이제 잭슨 가족이 거머쥔 각종 콘테스트의 막간이나 끝났을 때를 이용해서 싱글을 파는 일만 남았다. 그 첫 번째 싱글은 지방 라디오 방송곡에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모타운 소속 시기. 1968년, 잭슨 파이브는 프로가 되어 돌아온 아폴로 무대에서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스타를 발굴하는 일이 맡겨진 모타운 실무자들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신동들에게 아무것도 제안하지는 않았다. 모타운의 스타인 바비 테일러가 시카고 공연을 기회로 잭슨 파이브의 실력을 떠벌려 오디션 제안을 받은 건 그로부터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잭슨 일행은 처음 모타운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황량한 건물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 게다가 그들을 맞는 분위기는 다소 시큰둥하기까지 했다. 베리 고디는 자리를 옮기면서도 전혀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마이클은 한 치도 양보도 없는 냉정한 시선을 받으며 〈I Got The Feeling〉, 〈Tobacoo Road〉, 〈Who's Loving You〉 세 곡을 불렀다. 잭슨 파이브는 일이 성공적이었는지 어쩐지도 모른 채 개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틀 후인 7월 26일, 그 유명한 음반 회사에서 첫 계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모타운에서 보낸 처음 몇 달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잭슨 형제는 앨범 취입을 위해 개러와 디트로이트 사이에서 끝없는 줄타기를 했다. 마이클의 목소리는 채 변성기를 맞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잭슨 파이브의 레퍼토리라는 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어린 소년들에게 걸맞는 스타일과 노래를 찾아내야 했다. 여러 주가 훌쩍 지나갔어도 잭슨 파이브에게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그러자 고디는 다섯 소년을 그때부터 모타운의 본거지가 된 캘리포니아로 보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한동안 묵게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해서 다섯 형제는 유명한 가수의 집에서 지내게 되어 살짝 주눅이 들었다. 고디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는 이제 히트 퍼레이드에서 상위권에게 들어가게 될 싱글을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곡을 연달아 내놓게 될 거다." 다이애나 로스가 아이들에게 불쑥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어느 저녁 파티에 잭슨 파이브가 등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마이클의 나이는 11살이었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실력에 감탄한다는 상업적 전략에 따라 그의 나이는 8살로 표기되었고 잭슨 파이브 모두의 나이가 두 살씩 내려갔다. 1969년 8월 음악 저널계와 상류층 인사들과 기자들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도착했고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Who's Loving You〉와 〈Zip-a-Dee-Doo-Dah〉를 감칠맛 나게 부르는 마이클의 목소리에 다들 넋을 잃었다. 이내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그 공연이 끝나고 채 며칠도 되지 않아 고디는 작곡가 다크 리처드로부처 원해 글래디스 나이트에게 줄 작정이었던 곡 〈I Wanna Be Free〉를 다이애나 로스의 무대에서 직접 보았던 잭슨 파이브를 위해 다시 손을 보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그 곡은 머지않아 잭슨 파이브가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는 곡 〈I Want You Back〉이 된다. 그 뒤로는 내놓은 노래마다 연달아 성공을 거두었다. 잭슨 파이브는 4년 동안 11개의 앨범을 취입하고 순회공연과 텔레비전 방송을 오가며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살게 된다. 더 잭슨스. 1979년, 잭슨 형제는 그 전해에 발매된 음반 《Destiny》가 거둔 선풍적인 성공에 이어 월드투어를 준비한다. 잭슨 파이브가 전곡을 작곡한 그 음반은 어린 형제들의 독립성과 예술적인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데스티니 월드투어를 준비하면서 조는 론 와이즈너와 프레디 테먼을 매니저로 고용한다. 잭슨 형제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공연을 펼치게 된다. 투어는 대성공이었다. 가장 높은 고음부를 처리할 때 목소리가 끊어지는 걸 감추기 위해 형들 중 한 명과 짜놓은 작은 전략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이클이 노래하는 첫 입만 방긋거리면 그 소절은 말론이 대신 불렀다. 1984년, 조셉 잭슨은 잭슨 파이브가 새로운 순회공연을 하게 될 거라고 언론에 발표한다. 하지만 데스티니 투어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지 5년이 지난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마이클은 《Thriller》 앨범을 발매한 뒤 스타가 되어 새로이 맞게 된 자유를 맘껏 누릴 셈이었다. 마이클이 그 투어에 참여하기로 한 건 마지못해서였다. 첫 번째 난점은 바로 빅토리 투어라는 공연 제목이었다. 그 제목은 애초에 예정했던 것처럼 잭슨 파이브 활동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수투표로 빅토리 투어 쪽으로 결정되면서 논쟁은 끝나버렸다. 두 번째로 의견 충돌을 빚게 된 건 부유한 계층보다는 평범한 중산층 출신이 더 많은 팬들을 위한 티켓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40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라는 점이다. 언론이 나서서 잭슨 일가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지적하고 나서야 마이클의 의견을 따라 티켓 판매가를 절반으로 낮추었다. 투어는 1984년 7월에 시작되었다. 공연이 거듭될수록 다섯 형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리무진으로 제각기 이동했다. 한편, 여동생 자넷이 당시에 사귀던 남자 친구와 비밀리에 결혼해버리는 일까지 일어나 마이클은 벅찬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가 유럽 투어를 연장하려 한다는 사실을 마이클이 우연히 알게 되면서 가족 관계는 부쩍 더 나빠졌다.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을 마이클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그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 소식이 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기 전에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12월 9일, 미국 투어 마지막 날, 마이클은 결국 공연 마지막에 마이크를 잡고 그룹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자신은 이제 전격적으로 솔로 활동에 매진할 작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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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세르 아라파트
야세르 아라파트(, , 1929년 8월 24일 ~ 2004년 11월 11일)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 (1996년 ~ 2004년)이었다. 또한 쿤야 아부 아마르 (أبو عمار)로도 알려진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 (1969년 ~ 2004년)이었다. 아라파트는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결과를 가져온 성공적인 협상들로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와 이츠하크 라빈과 더불어 1994년 노벨 평화상의 공동 수상자였다. 아라파트는 자신의 장기적 경력을 통하여 논쟁적이며 양극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 활동으로 들어가는 팔레스타인의 국민들의 꿈과 열정을 구체화한 운동으로서 1957년 자신이 창설한 파타 (Fatah)를 지도한 것으로 넓게 인정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국가 열망을 상징한 영웅적인 자유 투사로서 그를 간주하였다. 많은 그의 이스라엘의 반대자들은 폭력을 흥행하는 장기적 유산과 함께 완고한 테러리스트로 그를 여겼다. 비판자들은 오슬로 협정이 있던 동안 그가 이스라엘 정부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는다. 다른 이들은 그를 부패하거나 약하거나 혹은 솔직하지 않았던 것으로 비난하였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이든 아라파트는 국가의 민족 자결권에 관한 팔레스타인의 꿈을 위하여 싸우고 바친 시작부터 종말까지 애국자였다. 팔레스타인 정치가로서 많은 일을 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재산 관리, 아내의 사치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초기 생애. 본명은 모하메드 압델-라우프 아라파트 알쿠드와 알후세이니 (محمد ياسر عبد الرحمن عبد الرؤوف عرفات القدوة الحسيني)로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직물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어떤 이집트의 계통과 함께한 팔레스타인인이었다. 그의 모친은 예루살렘에 있는 옛 팔레스타인인 가족으로부터 왔다. 자신이 야시르로 불리면서 5세 때 모친이 사망하였다. 그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외삼촌과 사는 데 보내졌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 약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일찍이 추억들 중의 하나는 한밤 중 후에 영국의 군인들이 자신의 삼촌의 집으로 침입하여 가족의 일원들을 패고 가구를 부수어 버렸던 것에 관해서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통곡의 벽 혹은 유대인,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에 의하여 신성한 곳으로 숙고된 현장 알아크사 모스크 혹은 성전산 근처에 있던 집에서 살았다. 8세가 되었을 때 그의 부친은 두번째로 결혼하여 가족은 카이로로 다시 배치되었다.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의 부친이 세번째로 결혼했을 때 아라파트의 누이 이남은 자신의 형제·자매를 키우는 임무에 남겨졌다. 아라파트는 이후에 카이로 대학교로 이름이 다시 붙은 파우드 2세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후에 유대인들과 토론에 참여하면서 유대교와 시온주의의 더욱 나은 이해와 테오도르 헤르츨과 다른 시온주의자들에 의한 출판물들을 읽는 것을 추구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6년까지 그는 아랍의 국수주의자가 되었고, 아랍의 원인을 위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밀수될 무기들을 획득하고 있었다. 1948년 ~ 1949년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일어난 동안 아라파트는 대학을 떠났다. 다른 아랍인들과 더불어 그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의 이름에 이스라엘군을 공격하는 데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추구를 하였다. 그는 무장 해제되었고 교전 지역으로 들어가는 데 자신을 허용하는 것을 거부한 이집트 군대에 의하여 돌아갔다. 아라파트는 자신이 "이 아랍의 정권들에 의하여 배신을 당한" 것으로 느껴졌다. 대학으로 돌아온 후, 아라파트는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여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팔레스타인 학생 연합의 회장을 지냈다. 1956년까지 아라파트는 토목 공학에서 학사 학위와 함께 졸업하였다. 그는 후에 수에즈 위기가 일어난 동안 이집트 육군에서 소위로 복무하였다. 또한 1956년 프라하에서 열린 회의에서 자신의 상징이 된 전통적 체크 무늬 머리 장식 쿠피야를 입었다. 아라파트의 동생 파티 아라파트 박사는 아랍의 붉은 초승달을 창설한 것으로 소문이 났고, 분쟁의 인도주의적 측면에 연루되었다. 1959년 아라파트는 인구들 야히아 가바니와 할릴 알와지르 (아부 지하드)와 가자 지구에서 온 난민들의 단체의 도움과 함께 쿠웨이트에서 파타 (Fatah)가 된 단체들 중의 하나를 창립하였다.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위하여 정복 혹은 승리를 의미한다. 파타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의 설립으로 그 자신을 헌신하였다. 아라파트는 쿠웨이트에서 일을 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기부를 통한 파타의 미래 재정적 성원을 위한 기초를 설립하는 데 거기서 열심히 일하였다. 그들은 석유 산업에서 자신들의 높은 봉급에서 아낌없이 주었다. 1968년 파타는 요르단의 알카라메 마을에서 이스라엘 국방군 작전의 목표물이었다. 155명의 팔레스타인인과 29명의 이스라엘군이 살해되었다. 높은 아랍의 사망자 수에 불구하고 파타는 이스라엘군의 결국적 철수 때문에 자신들을 승리로 숙고하였다. 전투는 타임 잡지에 의하여 자세히 다루어졌다. 아라파트의 얼굴이 표지에 나와 자신들의 남성의 첫 이미지를 더욱 넓은 세계에 가져왔다. 전쟁 이후의 환경 속에서 아라파트와 파타의 인물 소개들은 이 중요한 전환점에 의하여 자라났다. 아라파트는 감히 이스라엘과 마주한 문화적 영웅으로서 여겨지는 데 왔다. 많은 젊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파타의 계급들에 가입하였고, 장비는 향상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지배하였다. 1969년 2월 3일 카이로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전국 의회에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7년 12월 아흐마드 슈케이리가 사임한 이래 임시 대행 지도자로 지낸 야히야 하무다를 대체하였다. 2년 후에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73년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치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요르단. 1960년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온 아랍인들과 요르단 정부 사이의 긴장들이 거대하게 증가하였다. 중무장을 한 아랍 저항 집단 (페다인)은 요르단에서 사실상의 "국가 안의 국가"를 창조하여 결국적으로 아즈자르크 근처의 석유 정제소를 포함한 요르단에서 몇몇의 전략 위치들을 통제하였다. 요르단은 이것을 그 주권과 안정으로 자라는 위협으로 숙고하였고, 민병대를 무장 해제하는 데 시도하였다. 1970년의 6월 열린 싸움이 터졌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요르단의 야망들로 위협이었다. 다른 아랍 정부들은 평화로운 해결을 협상하는 데 시도하였으나 9월 12일 3개의 팔레스타인 해방대중전선에 의하여 납치되어 자르카에서 잡힌 3개의 국제 항공기들의 파괴 같은 요르단에서 지속된 파이딘 활동들은 그 영토에 통치를 다시 얻는 활동들을 취하는 데 구실로서 요르단 정부에 의하여 이용되었다. 9월 16일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같은 날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규 군대 팔레스타인 해방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이어지는 내전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국는 그들을 원조하는 데 요르단으로 대략 200대의 탱크로 구성된 군대를 보낸 시리아의 활동적 성원을 가졌다. 싸움은 주로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해방군 사이였다. 미국 해군은 동부 지중해로 제6함대를 급파하였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스라엘은 후세인 1세를 원조하는 데 군대를 전개시켰다. 9월 24일까지 요르단군은 권세를 이루었고, 팔레스타인 해방군은 일련의 휴전으로 동의하였다. 1970년대 동안 레바논에서 본부들. 검은 9월 사건과 요르단으로부터 제명에 이어 아라파트는 레바논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다시 배치하였다. 레바논의 약한 중앙 정부 때문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사실상으로 독립 국가로서 운영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시민들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목표물들에 대항하는 레바논으로부터 간헐적인 국경간 공격들을 가하였다. 1972년 9월 검은 9월 테러단이 뮌헨 올림픽에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하였다. 모하메드 다우드와 베니 모리스를 포함한 다수의 출처들은 검은 9월 사건은 테러리스트 작전들을 위하여 이용된 파타의 권력이었던 것을 진술하였다. 살해 사건들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아라파트는 공격들로부터 자신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공개적으로 분리하였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는 유럽에서 운영되는 파타의 세포들을 무너뜨리는 데 "바요네트 작전"으로 불린 캠페인을 정식으로 허가하였다. 1973년 ~ 1974년 아라파트는 해외 공격들이 너무 나쁜 홍보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외부에 폭력 행위들로부터 철수하는 데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명령하였다. 파타 운동은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시민과 보안군들에 공격을 가하였다. 1974년 아라파트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는 데 비정부 기구의 첫 대표가 되었다. 아랍 국가의 정상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유일한 합법적인 대변인"으로 승인하였다. 자신의 유엔 총회 연설에서 아라파트는 시온주의를 비난하였으나 "오늘날 나는 올리브 가지와 자유 투사의 무기를 품으러 왔다. 나의 손으로부터 올리브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의 연설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국제정 성원을 증가시켰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1976년 아랍 연맹의 완전한 회원으로 인정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 다수의 좌익 팔레스타인의 기구들이 나타나 이스라엘의 내부와 외부 둘다 시민들의 목표들을 향한 공객들을 수행하였다. 이스라엘은 아라파트가 이 기구들에 최후적 통치에 있었으며 그러므로 테러리즘을 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아라파트는 이 단체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테러리스트의 활동들을 위한 책임을 부인하였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레바논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베이루트 서부를 장악하고 이스라엘군에 의한 포위 후에 아라파트는 베이루트가 "두번째 스탈린그라드"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베이루트는 이어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포병과 공중 폭격의 결과로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17,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살해되었다. 내전이 있어난 동안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레바논의 무슬림 단체들과 제휴시켰다. 하지만 권력을 잃을 것에 두려워한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는 편을 바꾸어 급진파 우익의 기독교 팔랑헤당을 돕는 데 자신의 군대를 보냈다. 내전의 첫 단계는 아라파트를 위하여 탈알자타르의 난민 캠프의 포획과 몰락과 함께 끝났다. 아라파트는 좁게 탈출하였으며 그의 탈출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하여 원조되었다. 1982년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포획이 있던 동안 미국과 유럽의 강국들이 튀니스에서 망명하는 데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위한 안전한 통로를 보증하는 거래를 중개하였다. 아라파트는 실제로 베이루트로부터 자신이 퇴거된 1년 후에 레바논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트리폴리에서 자신을 설립하였다. 이스라엘에 의하여 쫓겨난 대신 이번에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를 위하여 일을 한 동료 팔레스타인인에 의하여 쫓겨났다. 많은 파타 투사들이 그렇게 했어도 두번째 제명 후에 아라파트는 직접 레바논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980년대 튀니지에서 망명. 1982년 9월 레바논으로 이스라엘의 공격이 있던 동안 미국과 유럽은 휴전 거래를 중개하였다.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미국 해군의 착륙선에 의하여 후원된 800명의 미국 해병대를 포함한 다국적 군대의 보호 아래 레바논을 떠나는 데 허용되었다. 아라파트와 그의 리더십은 결국적으로 1993년까지 자신의 운영들의 중심지로 남아있던 튀니지에 도착하였다. 1985년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좁게 살아남았다. 대각 작전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F-15 전투기들이 튀니스에 있는 그의 본부를 폭탄 투하를 내려 73명의 사망으로 남겼는 데 아라파트는 그날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갔다고 한다. 1980년대 동안 아라파트는 심각하게 폭행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재건하는 데 자신을 허용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이 일은 1987년 12월 첫 "인티파다" (봉기)를 위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게 강화를 주었다. 인티파다가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항하는 자발적인 봉기였어도 몇주 안에 아라파트는 반란을 지시하는 데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것이 주로 시민의 불안이 그랬던 만큼 지속될 수 있었던 요단강 서안 지구에서 파타의 군대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믿는다. 1988년 11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에 의하여 정의가 내려지면서 팔레스타인의 전체에 권리를 주장한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위한 망명 정부인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언하여 분할의 아이디어를 거절하였다. 12월 13일 연설에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미래 승인을 약속하고, "국가의 테러리즘을 포함한 그 전체의 형성들에서 테러리즘"을 폐지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 242를 받아들였다. 아라파트의 12월 13일 진술은 캠프데이비드 협정에서 필요한 시작 포인트로서 이스라엘의 승인에 주장한 미국의 행정부에 의하여 용기를 얻었다. 아라파트의 진술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주요 목표들 중의 하나인 2개의 갈라진 자주 독립체들 -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아랍 국가와 1949년 휴전선들 안의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향한 이스라엘의 파괴로부터 교대를 나타냈다. 1989년 4월 2일 아라파트는 선언된 팔레스타인 국가의 정부 수반이 되는 데 팔레스타인 전국 의회의 중앙 위원회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1990년 아라파트는 튀니스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위하여 일하면서 자신에게 결혼하기 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팔레스타인의 정교회 기독교인 수하 타윌과 결혼하였다. 1991년 마드리드 회의가 열린 동안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함께 공개 협상들을 지도하였다. 그해 걸프 전쟁에 앞서 아라파트는 많은 아랍 국가들을 양도하고 미국을 아라파트의 평화를 위한 파트너로 지낸 것에 관한 주장들을 의심하는 데 이끈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였다. 모래 폭풍이 일어난 동안 자신의 비행기가 리비아의 사막에 부딪치면서 착륙했을 때 1992년 4월 7일 다시 죽음을 좁게 탈출하였다. 아라파트는 몇몇의 뼈가 부러지고 다른 부상들을 겪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평화 협상. 1990년대 초반에 아라파트는 일련의 비밀적 교섭과 협상들에 이스라엘을 종속시켰다. 교섭들은 5년 기간에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자기 통치의 이행을 요구한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이끌었다. 그해 9월 9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과 그 공식적 대표로서 아라파트는 폭력을 폐기하고, 이스라일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2개의 문서들을 서명하였다. 답례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승인하였다. 이어진 해 아라파트는 라빈과 시몬 페레스와 더불어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아라파트는 어떤이들에게 영웅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으나 그러나 다른이들에게는 배신자로 여겨졌다. 1994년 아라파트는 오슬로 협정에 의하여 창조된 잠정적 본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통치된 영토로 이동하였다. 1995년 7월 24일 아라파트의 부인 수하 여사는 그의 사망한 모친의 이름을 딴 "자흐와"로 불린 딸을 낳았다. 1996년 1월 20일 아라파트는 압도적인 88.2 퍼센트의 다수와 함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단 한명의 다른 후보는 사미하 할릴이었다. 독립적인 국제 업저버들은 선거들이 자유롭고 공형했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하마스와 다른 운동들이 수반 선거에서 참가하지 않는 데 선택했기 때문에 선택들은 제한되었다. 2002년 1월을 위하여 예정된 다음 선거들은 연기되었다. 진술된 이유는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운동의 자유에 제한들은 물론 알아크사 인티파다와 이스라엘 국방군의 습격들에 의하여 부과된 긴급 상태들의 이유로 캠페인으로 무능이었다. 1996년 후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지도자로서 아라파트의 칭호는 "원수"였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유엔이 칭호를 "수반"으로 번역한 동안 이스라엘과 미국은 칭호를 "의장"으로 번역하였다. 대중매체는 둘다의 용어들을 썼다. 1996년 중순에 베냐민 네타냐후가 좁은 차이들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들은 지속된 투쟁의 결과들로서 더욱 적대적으로 자라났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협정에 불구하고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의 국가로서 지위의 아이디어를 반대하였다.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명의 지도자들을 만나는 데 설득시켰다. 1998년 10월 23일의 결과를 가져온 와이리버 각서는 평화 과정을 완성하는 데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택할 단계들을 상술하였다. 아라파트는 2000년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서 네타냐후의 후임자 에후드 바라크와 협상들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네타냐후가 우익의 리쿠드당 소속인 동안 바라크는 좌익의 노동당 소속이었다. 이 변화는 협상의 활력들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클린턴은 타협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바라크는 아라파트에게 그 수도로서 예루살렘 동부의 외부에 놓인 외곽과 함께 요단강 서안 지구의 다수와 가자 지구의 전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국가를 제공하였다. 이스라엘은 네게브에서 대지를 위한 교환에서 큰 정착권들을 에워 싼 요단강 서안 지구의 남은 9 ~ 10 퍼센트를 병합하려고 하였다. 추가로 이스라엘의 제안 아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국경, 관세들과 국방의 어떤 통치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한 제공에서 포함된 것은 작은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과 나머지를 위한 배상이었다. 바라크는 또한 2개의 수도들 -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옆에 팔레스타인 통치의 알쿠드스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진술하였다. 넓게 비판을 받은 운동에서 아라파트는 바라크의 제공을 거절하였고, 반대 제안을 만드는 데 거부하였다. 그는 아마 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과 난민들을 여기는 불충분한 이스라엘의 제안들로 마지못해 동의하는 데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추정하였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2001년 타바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서 협상들은 지속되었다. 이번에 바라크는 이스라엘 총선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데 교섭에서 철수하였다. 2001년을 통하여 알아스크 인티파다 혹은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는 맹렬히 자라났다. 아리엘 샤론의 선거에 이어 평화 과정은 완전히 쇠약해졌다. 이스라엘의 새롭게 선출된 총리 샤론은 라말라에 있는 모카타 본부로 아라파트를 감금하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아라파트가 "평화의 장애물"이었다고 단언하였다. 다른 방면에 유럽 연합은 이 힘든 자세를 반대하였다. 2004년 11월 11일 아라파트의 사망에 이어 마흐무드 압바스가 2005년 1월 수반 선거를 이겨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지도자로서 아라파트를 대체하였다. 정치적 생존, 사회에서 소외와 논쟁. 중동에서 정치의 가장 위험한 자연과 자주 일어나는 암살 사건들이 주어진 아라파트의 장기적인 개인적과 정치적 생존은 비대칭 전쟁의 숙달로서 징후와 전술가로서 그의 실력으로서 대부분의 서방 주석자들에 의하여 취해졌다. 어떤이들은 그의 생존은 만약 자신이 암살되거나 이스라엘에 의하여 체포마저 된다면 팔레스타인의 원인을 위하여 그가 순교자가 될 수 있던 이스라엘의 위협의 두려움에 큰 이유였다고 믿는다. 다른이들은 하마스와 아라파트의 세속 조직에 후원을 얻는 다른 이슬람주의 운동들보다 적게 아라파트를 두려워하는 데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라파트를 살려둔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에 관계들의 복잡하고 깨지기 쉬운 방송망도 또한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로서 아라파트의 장수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전술적과 정치적 상황들로 적응시키는 아라파트의 능력은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지하드 조직들이 상승하는 가운데 예시되었다. 이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거부파를 지지하였고, 자살 폭격 같은 새로운 전술들을 고용하여 심리적 손해들을 증가시키는 데 쇼핑몰과 극장들 같은 비군사적 목표물들에 고의적으로 목표를 삼았다. 1990년대에 이 단체들은 국가로서 지위의 목표와 함께 통일한 비종교적 국수주의 단체를 함께 소유하는 아라파트의 수용력을 위협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아라파트의 영향력과 통치로부터 나온 것으로 나타났으며 아라파트의 파타 단체와 활동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어떤이들은 이 단체들의 활동들이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하는 의미들로서 아라파트에 의하여 동석되었다는 것을 단언한다. 어떤 이스라엘 정부의 공무원들은 2002년 파타의 당파 알아크사 마르티르의 여단들이 하마스와 함께 완료하는 데 이스라엘에 공격들을 시작하였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2002년 5월 6일 이스라엘 정부는 아라파트의 라말라 본부의 이스라엘군 점령이 있던 동안 알아스카 마르티르 여단들의 활동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데 아라파트에 의하여 서명된 문서들의 사본들과 함께 획득된 서류들에 부분적으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그해 3월 아랍 연맹은 6일 전쟁에 포획된 전체의 영토들로부터 이스라엘군의 후퇴와 팔레스타인의 국가로서 지위와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위한 교환에서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데 제공을 만들었다. 후원자들은 이 제공을 지방에서 포괄적인 평화를 위한 역사적 기회로서 보았다. 제공의 비평가들은 자살 폭발 공격들의 중단을 보증하지 않은 동안 그것이 이스라엘의 안정에 큰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은 피상적으로 간주된 이 제공을 무시하였다. 곧 후에 공격들은 135명 이상의 이스라엘 시민들을 살해한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이전에 아라파트가 자살 폭발에 대항하는 데 아랍어에 강하게 용기를 내어 말해버리는 것을 요구했던 샤론은 아라파트가 "테러리스트들을 원조하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적으로 만들어 아무 평화 협상들에 부적절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고나서 이스라엘은 요단 서안 지구로 들어가는 주요 군사 공격을 발포하였다. 팔레스타인의 국민들을 대표하는 데 또다른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완고한 시도들은 실패하였다. 아라파트는 자신과 다루거나자신을 성원하는 것에 보통 꽤 조심스러워 왔던 자신 소유의 역사를 준 단체들의 성워을 즐기고 있었다. 알아크사 인티파다가 일어난 동안 마르완 바르구티가 지도자로서 나타났으나 이스라엘은 그를 체포하여 4개의 무기 징역 선고를 내렸다. 격렬한 협상들 후에 5월 3일 아라파트는 결국 자신의 울안을 떠나는 데 허용되었다. 아라파트와 함께 숨어 온 이스라엘에 의하여 원해진 6명의 무장 단체들이 이스라엘에 넘겨지거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구금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의 합쳐진 보안 요원은 원해진 남자들이 여리고에서 투옥되어 남아있던 것을 확실히 하였다. 추가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인들에 공격들을 멈추는 데 아랍어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부탁을 발표할 것을 약속하였다. 아라파트는 석방되어 5월 8일 부탁을 발표하였으나 크게 무시되었다. 많은이들은 이것은 그가 비밀적으로 공격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느낀다. 이 믿음은 심각하게 아라파트의 부탁을 응하지 않은 전체의 팔레스타인의 무장 조직들 중에 넓게 퍼졌다. 2004년 7월 18일 르 피가로에 인터뷰에서 부시 대통령은 아라파트를 협상 파트너로서 퇴거시켜 "현실의 문제는 '우리에게 국가를 설립하는 도움을 주고, 우리는 테러를 싸우고 팔레스타인인들의 필요성을 응답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리더십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 결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사이에 지도적인 4인조 협상들의 일부들이었던 유럽 연합과 러시아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기껏해야 아라파트는 다른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섞인 관계들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일반인 중에 가장 인기있던 아랍 지도자로 남아있어 많은 세월 동안 단 하나의 선출된 아랍 지도자였다. 서방과 이스라엘의 매체에 의하여 아라파트의 가장 빈번한 비판은 그가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손해에 타락했다는 것이었다. 아랍 지도자들로부터 아라파트의 성원은 그가 이스라엘에 의하여 압력을 받았던 때마다 자라난 것으로 이바지하였다. 이 전부의 다른 사정들과 아라파트의 그것들을 다루는 것을 합친 것은 더욱 큰 그림을 보는 데 퍼즐의 조각들을 연결한 것 같다. 나타나는 것은 아라파트가 이용할 수 있단 이해이며 자신 만의 생존이 아닌 또한 자신이 계획한 정치적 종말들에 이익을 준 상황들마저 교묘하게 다룬 것이다. 금융 거래. 이스라엘과 미국의 매체에서 2002년의 시작에 재정적 부패의 지속되지 않는 진술들이 드러났다. 2003년 국제 통화 기금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감사를 실시하고 아라파트과 자신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최고 경제 금융 고문에 의하여 통제된 특별 은행 계좌로 공공 기금에 미국돈 9억 달러를 전환한 것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국제 통화 기금은 아무 부적당한 일들이 없었다는 것을 단언하지 않았고, 기금들이 국내 및 해외 모두 팔레스타인의 자산들에 투자하는 데 이용되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진술하였다. 2003년 아라파트 소유의 금융 봉사에 의하여 기용된 미국 회계사들의 팀이 아라파트의 금융들을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팀은 팔레스타인 지도자의 부의 일부는 라말라에 있는 코카콜라 병입 공장, 튀니지의 핸드폰 회사 같은 회사들에서 투자들과 미국과 케이먼 군도에서 투하 자본과 함께 1조 달러 가까운 가치에 비밀 서류첩에 있었다는 것을 단언하였다. 아라파트 자신이 항상 겸손하게 살았어도 부시와 클린턴 대통령들을 위한 전 중동 협상자 데니스 로스는 아라파트의 "주의를 걷는 돈"이 신가산주의로 알려진 막대한 보호 시스템에 융자했다는 것을 진술하였다. 다른 말에 그는 자신과 자신의 협의 사항에 다른이들의 충성을 산출하는 데 국가 기금을 썼다. 아라파트 정부의 전직 내각 일원들은 자신을 위하여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부를 몰수한 것으로 아라파트를 고발하였다. 2002년 아라파트가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던 전 세계은행의 공무원 살람 파이야드는 아라파트의 필수품 독점권이 "특히 더욱 가난하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부도덕한 가자 지구에서" 자신의 국민들에 속임수를 썼다고 말하였다. 전 내각 일원 하난 아슈라위에 의하면 "아라파트를 보유물들을 넘기는 데 하는 것은 이빨을 뽑는 것 같았다. 아라파트 씨는 유럽 연합 같은 원조 기증자와 자신의 재무 장관이자 영토들에서 국제 통화 기금의 전 대표 살람 파이야드로부터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아라파트 씨가 더욱 나가서의 원조의 상태로서 투자들을 넘기는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유럽 연합의 기금들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의하여 잘못 쓰이고 있었다는 단언들로 유럽 연합에 의한 조사는 기금들이 영토의 활동들로 전환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않았다. 유럽 연합은 "그 재정적 관리를 향상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에서 깊은 개혁을 납득시킨 것으로 남아있고, 감사 능력은 기금의 잘못된 사용과 부패에 대항하는 최고의 예방적인 전략이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재정적 관리의 개혁은 유럽 연합의 재정적 원조로 접착된 몇몇의 주요 상태들의 목적이다."라고 말해졌다. 아라파트에게 전 재정 측근 파우드 슈바키는 보고적으로 아라파트가 무기들을 사고 무장 단체들을 성원하는 데 원조금의 몇백만 달러를 이용했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신베트에게 말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재무부에서 무명의 출처들에 의한 단언들은 아라파트의 부인 수하 여사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예산안으로부터 한달에 10만 달러의 연금을 받는 것을 진술하였다. 런던에 기지를 둔 신문 알하야트와 인터뷰에서 수하 여사는 샤론 총리가 향하고 있던 부패 변증들로부터 매체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목적으로 자신에게 기금의 옮기는 것을 연루한 돈 세탁에 관한 퍼지는 소문들로 그를 고발하였다. 프랑스의 검사들에 의한 2003년 철저한 조사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질병과 사망. 아라파트의 대변인이 말한 것에 그의 의사들에 의한 그의 치료의 첫 보고들이 말한 "감기"의 소식이 그가 회의 도중에 구토를 한 후 2004년 10월 25일에 나왔다. 그의 상태는 이어진 날들에 악화되었다. 그는 10월 27일 10분 동안 의식을 잃게 되었다. 튀니지, 요르단과 이집트에서 온 팀들을 포함한 다른 의사들에 의한 방문들과 그의 복귀를 막지 않는 데 이스라엘에 의한 동의에 이어 아라파트는 프랑스 정부의 제트기에 실려 10월 29일 파리 근처 클라마르에 있는 페르시 군사 병원으로 모셔졌다. 11월 3일 그는 차차 깊은 혼수상태로 빠졌다. 아라파트의 건강은 그가 중독 혹은 에이즈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었던 의심과 함께 사색의 주제였다. 아라파트가 식물인간 혹은 뇌사에서 혼수상태였던 사색들은 아라파트의 요르단인 의사에 의하여 맹렬히 부인되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공무원들과 수하 여사 사이에 더욱 많은 논쟁들이 터졌다. 아라파트는 11월 11일 새벽 3시 30분 75세의 나이로 사망이 선언되었다. 그의 질병의 정확한 원인은 전혀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아라파트의 사후, 프랑스 국방부는 아라파트의 의료 서류들이 그의 가까운 친척에게 전해져야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라파트의 조카 나세르 알키드와는 수하 아라파트의 남편의 질병에 관한 그녀의 침묵을 주위로 일을 했던 충분히 가까운 친척으로 결심되었다. 11월 22일 나세르 알키드와는 프랑스 국방부에 의한 아라파트의 558 페이지 의료 서류의 사본이 주어졌다. 유산. 아라파트는 교활한 정치인이자 헌신된 애국자였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리더십의 그의 10년 세월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위한 합법적인 옹호와 쉽게 그에게 더듬어 올라가지 않아온 군사 작전 행동과 전술들 사이에 불확실한 균형을 지켰으나 그의 협의 사항을 반대한 자들에 격동을 지켰다. 그 전체를 통하여 그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에 국내적 대망으로 세계적으로 넓은 인정을 가져왔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데 거의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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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게이오 3년(1867년) 1월 11일 ~ 다이쇼 5년(1916년) 1월 9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영문학자이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이다.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모리 오가이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꼽힌다. 소설,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상과 윤리관 등은 후대 일본의 많은 근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은 일본 지폐 천엔(千円)권에 담겨 있었으나, 현재 천엔(千円)권에는 노구치 히데요로 바뀌었다. 현재는 해외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서 중국, 미국, 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본의 근대작가 중에서 가장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생애. 어린 시절. 게이오 3년(1867년) 1월 11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세 살 때쯤 걸린 천연두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 에도 막부가 붕괴한 이후 혼란기였고,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려왔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 대립으로 말미암아 나쓰메가로 복적한 게 21세 때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 관계는 이후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메이지 12년(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正則科, 훗날 부립 1중, 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했다. 메이지 16년(1883년)에 대학 예비문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메이지 17년(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메이지 19년(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시키와의 만남.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가 돌고 있을 때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의 아내 도세()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영국 유학.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난 게 이때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의 주선으로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1900년 5월에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메리디스나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아사히 신문사 입사와 문호의 길.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데뷔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슈젠지의 큰 병.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8세로 요절하였다. 소세키가 요절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하고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이다. 1000엔 지폐. 나쓰메 소세키는 원래 지폐의 인물은 아니였다. 일본 정부는 맨 처음 쇼토쿠 태자를, 그 다음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1000엔 지폐의 인물로 선정해서 인쇄를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대한민국을 비롯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대만 등의 주변국들과 심각한 외교 마찰을 빚는 바람에 일본 정부에서는 1000엔 지폐의 인물을 1984년(쇼와 59년)에 이토 히로부미에서 그 자리에 나쓰메 소세키로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헤이세이 16년(2004년) 이후로는 노구치 히데요로 초상이 바뀌었다. 명언.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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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약칭 북한(北韓), 북조선(北朝鮮), 조선(朝鮮)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의 북부를 통치하고 있는 국가이다. UN이 추정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약 2,550만 명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평양말을 중심으로 이룩됨을 내세운 문화어를 표준어로 삼는다. 수도는 평양시이며, 이밖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광역지자체로는 남포시, 개성시, 라선시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 형태는 정당이 조선로동당이 있으며 사실상 일당제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6.25 전쟁, 8월 종파 사건 등을 거쳐 정적을 제거하여 수령 중심 정치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의 자손인 김정일, 김정은은 차례로 집권을 하며 선대의 수령주의를 이어받은 정치를 펼쳤다. 이 체제는 '주체사상'이라는, 김일성 일가와 그들의 당인 조선로동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대표된다. 분단 이후부터 현재까지 김일성 일가의 의지에 따라, '조선이 없는 지구는 깨버려야 한다'는 김정일의 언급, '수령결사옹위정신', '자력갱생'으로 대표되는 강경한 수령 중심의 체제의 성립과 유지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보여왔다. 이를 위해 경제 개방을 포함한 외부와의 전면적 교류를 꺼려 외부에서 이 국가의 상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국호.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동국가 내에서는 자국에 대한 약칭, 혹은 조선반도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조선'이 사용되며, 중화인민공화국 등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단지 조선이라고 하면 대개 1392년에 건국된 왕조 국가 시대를 가리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와 자국에 대한 호칭의 구별을 위해 ‘리조조선(李朝朝鮮/리조)'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킬 때 대개 북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쓰임은 동 단어의 한국어 사전상 의미와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어 사전상 남한, 북한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한국어 사전상 남한은 대한민국의 남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 북한은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남한과 북한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는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이라는 용어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자국을 이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남측'(대한민국) 에 대비하여 '북측'(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을 양국간의 외교 혹은 문화 교류 등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 '조국' 등으로 부르고,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반부', 혹은 북조선이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북한"()이라는 명칭을 쓰고, 일본에서는 "기타초센"()이라는 명칭을 쓴다. 역사. 1945년 9월 2일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5년 9월 2일 이전 한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간주한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 조선은 모두 이 국가가 통치하는 지역의 일정 부분을 통치한 국가다.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있는 단군릉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고조선의 지도자였던 단군(과 그의 부인)의 능이라고 주장한다. 함경남도 금야군 비단리에 있는 소라리토성도 대표적인 고조선 유적이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명성왕의 묘라 추정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36호 동명왕릉과 고구려의 궁이었던 국보 2호 안학궁터와 국보 8호 대성산성 복원물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공동 2호 보통문, 국보 4호 대동문, 국보 19호 을밀대 등의 고구려 장안성에 관련된 유적도 남아있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에 의해 평안도와 황해도일대의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발해의 수도인 5경중 남해부는 남경이라 불렸으며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하였다. 황해도는 신라에 귀속되었다. 고려시대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개성역사유적지구는 2013년 6월 23일, 제3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프놈펜 회의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동북면”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며, 지금의 함경도 일원이다. 8도제가 도입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가 설치되었다. 김종서와 최윤덕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쪽으로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경계를 만들었다. 조선의 중심권역이었던 경기도, 충청도 출신을 가리키는 기호인과 평안도, 황해도, 개성을 출신은 가리키는 서북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11년(순조 11년)에 평안도의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관서 지방에서는 외래사상이 일찍 유입되어 선천·정주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개신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적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의 대표격인 평양에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근대 한국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1862년 고종의 즉위식을 시작으로 구분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등 여러 이견이 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본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를 맞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9월 2일 이후.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과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군정통치했다. 이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우자 평안남북도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조선반도 적화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10월 조선반도 북부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세워지고나서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 뒤 47년 2월 최고의결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와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군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 9일 사회주의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 날을 인민정권 창건일, 다른 말로 9.9절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6.25 전쟁. 건국 이래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6.25 전쟁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후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6.25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조선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개성시(개풍군), 한강&임진강 하구, 옹진반도, 함박도, 연백군를 상실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속초시, 설악산, 화진포, 대붕호 (파로호), 철원평야, 양양 낙산사를 상실하게 되었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의 시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계열, 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했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사회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학자 김당택은 주체사상 채택을 비판하였다. 그는 본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 김일성은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김정일 정권. 1980년대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되어갔다. 1991년에는 대한민국과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헌법 개정을 한번 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정일의 유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1994년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한다고 했을 때 전쟁 위기가 최고조였다.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미군과 맞설 수 있는 전쟁수행능력이 없고 비축물자도 없고, 전투 의욕도 상실한 상태였다.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한편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6년 7월 미사일 시험발사가 있었으며 10월 13일 핵 실험을 실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시에서 만나 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한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수립된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대한민국 국적의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가 관광 도중 총살되었고,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에는 이른바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고, 5월에는 핵실험을 강행했다. 또한 2010년 3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천안함 침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연이어 11월에는 휴전협정 이후 최초의 영토 도발인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여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김정은 정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4개월 뒤인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을 신설해 김정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2012년 7월 1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회의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김정은에게 기존 대장 계급에서 2단계 높은 원수 칭호를 부여할 것을 결정했다. 원수 칭호는 이미 사망한 김일성·김정일에게만 부여된 대원수의 바로 아래 계급으로, 이전까지는 리을설이 유일했었다. 원수 바로 아래 계급인 차수는 보직 해임된 리영호를 포함하여 현재 총 8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12월 1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은하 3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2013년 2월 12일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리히터 규모 4.9 (미국 지질조사국은 리히터 규모 5.1)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동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했다.). 12월 3일, 김정은은 정권 내 제 2인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에게 정치적 숙청을 단행해 축출했다. 이어 12일, 사형을 선고하고 즉결 집행으로 장성택을 제거했다. 그러나 고모 김경희에 대한 처분은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2017년 9월 3일에 12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6차 핵실험에 감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합중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를 시작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핵화를 촉구를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대북 제재와 함께 포용정책을 병행하면서 김정은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혔고 이후 아이스하키팀 등에서 단일팀과 예술단 공연 등을 하면서 2018년 4월 27일에 대한민국과 정상회담을 하여 비핵화 의지를 밝히며, 풍계리 핵 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기지를 폭파 및 폐쇄하였다. 2018년 6월 12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미국 CIA조사에서 풍계리와 동창리 이외 미사일기지와 핵 실험 장소를 비밀리에 더 보유 및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고체 연료를 사용한 미사일 시험 발사도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에만 5월 4일에 1발 (고도 60여km, 사거리 240여km), 5월 9일에 2발 (고도 45~60여km, 사거리 420여km 및 270여km), 7월 25일에 2발 (고도 50여km, 사거리 600여km), 7월 31일에 2발 (고도 30여km, 사거리 250여km), 8월 2일에 2발 (고도 25여km, 사거리 220여km), 8월 16일에 2발 (고도는 30여㎞, 사거리 230여㎞)등을 발사하였다. 대한민국의 킬체인체계 하의 미사일방어체계와 사드는 액체연료는 잘 감시, 탐지, 타격 할 수 있지만, 고체연료는 감지가 매우 어렵고, 고도를 낮추면, 방어체계에 노출되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특정지역을 타격 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군은 이를 노리고 미사일 개발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정치.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시에는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직을 겸직하게 하고, 그 아래 내각 총리를 두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인 김두봉, 최용건이 국가원수직을 겸했으며,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제정과 동시에 국가주석직을 신설해 초대 총리인 김일성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일성은 주체를 명분으로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하였고 우상화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주체사상을 통치 이념화하였다. 일성은 1990년 국가주석에 재선되었으나 1994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규정해 국가주석직은 사실상 폐지된 상태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도입한 주석제를 폐지하고 국방 위원장 자격으로 통치하였으며 선군 사상을 표방하여 선군 정치를 하였다. 김정은은 북한만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더욱 강조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국가나 민족의 사유화를 시도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수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당 독재 체제다.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며, 권력을 부계 세습하는 점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의 소멸을 시사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배계급이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사람의 지도자가 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조선로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조선로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은 조선로동당 규약과 헌법이 뒷받침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선군정치라는 적색파시즘적 이념이 추가되었다. 또한 국가원수이자 국방 전반의 최고 지도자는 국방위원장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입법부 수장이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최룡해다. 2010년 김정일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고 김정일의 후계로 추대되고 있었으며, 2011년 김정일이 죽자 김정은이 실권을 장악했다. 최고인민회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본 국가 운영 원칙은 국가는 당(黨, 조선로동당)이 “령도(領導)”하고 당은 수령이 “령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 전반의 체제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당은 전인민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회의체, 즉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정강정책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국가 최고권력기관은 최고인민회의며 헌법에 이러한 권리가 따로 기술되어 있을 정도다. 다만 이러한 정치체계는 대통령 중심제도 의원내각제도 아니므로 "회의제"라 할 수 있다. 과거 소련의 최고 소비에트나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등도 동일한 체제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내각의 조직 및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위원장 1인, 부위원장 2인, 명예부위원장 2인, 서기장 1인)과 국방위원회위원을 선거로 선출한다. 산하 위원회로 법제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와 예산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를 설치한다. 국방위원회. 국방위원회는 국방사업 전반을 관장하는 위원회로 행정상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 다만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를 겸직해 국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권력 우위를 점했다. 실제로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 추대연설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 력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여 공산주의 조국의 국가체제와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며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령도하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며 우리 조국의 영예와 민족의 존엄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성스러운 중책이라 함으로써 사실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국방위원회는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의 지도, 국방부문의 중앙기관 신설 및 폐지, 중요 군사 간부의 임명 및 해임, 군사칭호 제정 및 장령 이상의 군사 칭호 수여, 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의 선포와 같은 결정과 명령을 내며 자기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을 진다. 위원회 구성은 위원장 1인, 제1부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 위원 5인이며 산하기관으로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성을 둔다. 내각. 내각은 과거에는 정무원으로 불린 기관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직 및 인사권을 통해 구성되며 헌법에 의해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다.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의 헌법개정을 통해 내각으로 그 조직이 변경되었다. 내각은 내각총리 1인과 부총리 3명으로 구성된다. 2005년 5월 30일 금속기계공업성을 금속공업성과 기계공업성으로 분리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산하에 3위원회, 29성, 1원, 1은행, 2국을 두고 있다. 그 외에 필요에 따라 임명되는 무임소상도 임의로 구성되기도 한다. 정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당제를 택하고 있다. 현재 여당은 조선로동당이며, 수십 년 간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로동당은 이름일 뿐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 국가를 관리하며 야당으로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있으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한 형식적인 야당이며,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는다. 사실상 정치적 권한은 전무하다. 그 중 천도교청우당은 종교적 성격을 가진 유일한 당이다. 대외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통적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동독, 베트남, 쿠바, 라오스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990년 독일의 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하여 국제 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립과 동시에 지금까지 “혈맹”까지는 아니지만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소련 붕괴 이후 소원해졌으며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때 조선인민군 일부를 파견받는 등 우호적이었으나 미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가 개선되고 1992년 대한민국과 수교한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괄목하게 증가하였다. 아프리카, 인도, 파키스탄 등 제3세계 국가들과도 활발한 대사급 관계를 맺어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반미 국가인 쿠바, 시리아와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했었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독 수교국이지만, 대한민국과의 수교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수교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무기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우호적이다. 대한민국이 하나의 한국을 폐기한 이후 스웨덴, 스위스, 영국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이 조선을 승인하였다. 스웨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서방 국가다. 중화민국과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교류가 드물었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는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대한민국과 미국과는 건국 이래로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인해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를 괴뢰정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적대관계이다. 1983년 아웅 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이후 미얀마는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의 묘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킨 결례에 대해 분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즉시 단절하였고, 이 사건으로 비동맹국 회의에서 발언권이 약화되었으며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때는 유고슬라비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폭파범들의 당시 종적을 조사해서 미국 측에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 방화사건이 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단교하였다. 루마니아의 경우 한때 김일성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의 친분으로 인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989년 말 차우셰스쿠가 유혈 혁명으로 총살되고 1990년 3월 루마니아가 대한민국과 수교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 영토는 조선반도와 부속영토로 하므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반국가단체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현 실효지역은 미수복영토이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자국을 조선(朝鮮), 공화국, 조국, 혹은 북조선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때부터 국무원 고시에 의하여 확연한 구분을 위해 조선이란 명칭을 금지하고 북한(北韓)이라는 명칭만 쓴다. 양측의 관계는 70년대 이전에는 6.25 전쟁 등의 여파로 적대적이었고, 70년대 이후 5년 이내의 주기로 화해와 대립을 반복하였다. 한국 정치권에서 이 정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큰 상황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 자국이 조선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권이란 미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의하여 꾸며진 괴뢰정권으로서 미국상전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 내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남조선혁명"을 통해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적화통일론을 고수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화를 통해 통일을 하자는 주장, 이 정부가 없어져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주장,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 등이 대립하고 있다. 남북은 대화를 하며 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와 같은 방안이 논의된 적도 있으나, 이것이 다시 무산되다가 대화가 추진되기도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남북 관계에서 일어난, 기존의 남북 관계를 바꾼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측의 주장. 대한민국 헌법의 제1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며, 국가보안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반(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조항이 평화 통일 원칙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4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주장도 있으며, 2000년의 6·15 남북 공동선언과 2007년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직시하였으므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는다.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大韓民國政府,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조선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1949년 10월 21일 293(IV)호 결의 또한 이를 확인했다. 중국과의 관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6일 수교하였다. 6.25 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했으며 이들 군대는 1958년 10월 26일에 철수했다. 196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1990년대 초 최악이었던 조중 관계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수교로 훼손된 관계 회복에 나서 지금껏 모두 7차례에 걸친 김정일의 방중과 장쩌민·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거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함께 조선반도 정세의 핵심적 변수가 됐다. 천안함 사건으로 대북 경제협력을 단절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처로 경협 분야에서 북-중 경협이 남북경협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2010년 12월 26일 중국은 나진항 4, 5, 6호 부두를 5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베이징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역상이 1000명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김정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8년 3월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시진핑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로써 조중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다롄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가졌고, 김정은과 시진핑은 또한 북미정상회담 직후인 6월 19일 베이징에서 3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일본과의 관계. 일본은 수교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에 나서려 했으나, 일본인 납북자 문제과거사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일 병합 조약에 대한 평가나, 배상문제·청구권문제 등에 대하여도 결말이 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62년부터 일본은 조선반도에 "두 개의 정권"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고 시인해 왔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이후에 "한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휴전선 이남에 한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면서, 일본은 정경분리 원칙을 적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실체를 따로 취급하여 왔다. 한편, 배상 문제도 한국과의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나눈 적이 있다. 2002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배상권을 상호 포기하고 일본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경제 협력을 얻는 방법에 합의했다고 발표되었으나, 이후 수교 협상은 정지되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괴선박 사건으로 대표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동에 대한 일본 여론의 반발과 핵 문제 등으로 고립이 심화된 데에 있다. 일본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 1956년경, 박영빈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소련은 미국과 평화 공존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평화 공존 정책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격분하여 "소련은 미국과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과 직접 전쟁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 빩은이들렇게 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눈치를 본 탓인지 그를 단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에는 소련과의 상호 협력 원조 조약을 체결했지만 1996년에 효력이 상실되었다. 2000년에는 러시아와의 우호 선린 협력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서는 군사 동맹 관련 조항이 삭제되었다. 독일과의 관계. 1990년 독일의 통일로 인해 평양 주재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이 폐쇄되었다. 폐쇄된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의 권리는 국제법상 공식적으로는 스웨덴 대사관에 귀속되었다. 1만6천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공관이었다. 2000년 대한민국 김대중 정부의 요청으로 다시 평양 주재 독일대사관이 세워졌다. 2002년 1월 서방국가로는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상주 대사를 파견했다. 스웨덴과 영국은 평양에 대사관을 개설했지만 대리대사가 이끌고 있다. 군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조직인 조선인민군은 제도상 노동당의 '당군'이며, 선군정치 하에서 권력의 기반이다. 최고사령관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다. 조선인민군은 징집병이며 2002년 병력은 약 110만 명이상으로 추정된다. 부문별로는 육군 120만명, 해군 4만 6000명, 공군 8만 6000명으로, 병력만 보면 세계 4위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비가 노후되었기에 실질적인 전투 능력에 일정한 제한이 따른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주적인 대한민국 국군의 장비들이 질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사시 장비들이 전력으로서 큰 기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평양-원산선 이남에 총전력의 70%를 배치하고 있으며, 170mm 자행포 및 240mm 방사포는 대한민국의 수도권 지역을 기습 선제 타격할 수 있다. 현재 이라크 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특수전 전력의 확충과 갱도 건설과 기만기 개발로 후방지역의 생존성 확보에 노력하고 있다. 백령도 인근 장산곶과 옹진반도, 연평도 근처 강령반도의 해안가를 비롯한 장재도, 무도, 대수압도 등에는 해안포 900여문이 배치돼 있다. 군항인 해주항 일원에만 100여문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해안포는 사정거리 27km의 130mm,사정거리 12km의 76.2mm가 대표적이며 일부 지역에는 사정거리 27Km의 152mm 지상곡사포(평곡사포)가 배치되어 있다. 또 사정거리 83~95Km에 이르는 샘릿,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도 NLL 북쪽 해안가에 다수 설치됐다. 조선 인민군은 로동 1호,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등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대포동 2호는 미국의 영토인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2012년 12월 12일 인공위성 은하 3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대기권 재진입 기술도 확보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10,000 ~ 13,000 km 이상의 ICBM 사정거리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만 km는 미국 서부 지역까지, 13,000 km는 미국 대부분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KN-08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엔진 성능개량 시험을 실시했다. 몇 기를 개발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TEL에 탑재되어 있는데 TEL은 정찰 위성이나 레이다 탐지 사각지역에 숨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위협적인 무기체계다. 150~250여 기가 실전배치된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 탄도 미사일의 TEL도 27~40대로 파악되고 있다. 괌을 사정권에 둔 무수단 탄도 미사일 운용부대는 14대의 TEL을 보유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 등을 통해 무인 정찰기(UAV) 도입을 해서 서해상에서 운용 중이다. 또한 세계 3위에 준하는 생화학 무기 보유국이기도 하다. 조선인민군은 전시에 대비해 군 보관시설에만 150만t의 전시용 유류를 비축해 놓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대량살상무기 문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스스로 세계에서 9번째 핵무기 보유국임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각국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 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기정 사실로 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80년대 후반 핵개발 의혹이 있는 시설에 대한 핵사찰 요구에 반발하여 NPT 탈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지만,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이후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맺어, NPT 잔류와 핵시설 동결을 선언하였다. 2003년 초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제기하면서 제네바합의를 파기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6년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몇 개의 플루토늄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의 핵폐기 요구에 대응하여 미·일·러·중·남·북 6자회담을 진행하였으며, 2007년 초기 단계를 합의하였다. 절차가 예정대로 진행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만간 핵시설을 불능화하게 된다. 기존의 핵무기에 대한 처리는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은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처음 핵을 보유한 국가로 지정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9년 3월 24일에 6자회담의 폐기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7월 16일 김영남(金永南)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이라고 하며 6자회담의 종료선언을 했으나, 9월 18일 김정일은 양자 및 다자회담의 틀에 대해 재언급하였다.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였고 판문점 전화를 차단하였다. 또한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105, 2016년 1월 6일' 수소탄 실험을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며 그 진위 여부는 현재 밝혀지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으로 밝혀질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소탄 보유국이 된다.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1직할시, 3특별시, 9도, 2지구, 1특구로 나뉜다. 수도는 평양시이며, 면적 상으로 국토의 1%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해당 부분은 6과에서 관리한다. 지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아시아대륙 동부 중앙에 있다. 국토의 9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시간대를 평양시간이라고 부르며, 현재 동경 135˚ 기준 자오선 표준시(UTC+09:00)를 사용하고 있다. 위치와 면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경계는 1948년 9월 9일부터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38선(북위 38˚선)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로는 군사분계선이다. 북으로는 대략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인접한다. 국토 북단은 북위 43˚ 00' 36˝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남단은 북위 37˚ 41' 00˝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서단은 동경 124˚ 18' 41˝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동단은 동경 130˚ 41' 32˝ 라선시 우암리이다. 면적은 123,138 km2로, 한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영역과 거의 같다. 이를 따르자면 영토의 남단은 북위 33˚ 6' 3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동단은 동경 131˚ 52' 40˝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바뀌게 된다. 이 영토의 면적은 222,209.231 km2이며 한반도 본토를 제외한 섬은 5,974.655 km2이다. 섬을 포함한 남북의 최장 거리는 1,127.16 km, 동서의 최장 거리는 645.25 km이다. 지형. 한반도는 긴 지질 시대의 거듭되는 지각운동, 침식, 퇴적작용 등에 의해, 산지, 평지, 계곡, 해안, 고원 등 변화가 많은 지형이 되었다. 국토의 약 90%를 산지가 차지하여, 육지의 평균 표고는 440m이다. 많은 국토가 산지 속에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형은 백두대간인 낭림산맥(狼林山脈)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서쪽으로 강남산맥(江南山脈),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 묘향산맥(妙香山脈), 언진산맥(彦眞山脈), 멸악산맥(滅惡山脈) 등이 펼쳐져 있고, 함경북도에서 함경남도에 걸쳐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 등이 낭림산맥과 이어져 북부와 동부가 높고 서부와 남부로 오면서 점차 낮아진다. 이들 산맥으로부터 발원한 여러 개의 큰 강들은 서해 및 동해로 흐르고 있으며 이들 강을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큰 산맥은 북부에 위치하는 랑림산맥, 최고봉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에 위치하는 백두산(2744m)이다. 평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영토 면적의 약 5분의 1로, 서해안 연안이나 서해안에 도달하는 하천의 유역에 집중하고 있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토양이 있지만, 산지의 토양은 유기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개 불모지이다. 주요 하천은 대개 산지의 수원지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간다. 가장 긴 압록강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이다. 다른 주요 하천은 대동강, 예성강, 청천강, 재령강 등이 있다. 두만강만은 동쪽으로 흘러서 동해로 간다. 기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부분 대륙성 냉대 기후로 일부 지역에서는 온대 기후가 나타난다. 냉대 지역에서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 냉대 습윤 기후가 나타나고 온대 지역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 온대 하우 기후가 나타난다. 그 외에도 고지대에서는 기후가 Dwc를 띈 아극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도 있고, 백두산 근처의 높은 지대에서는 툰드라 기후를 띈다. 식생. 현재 한반도 전역에 10만여 종의 동식물이 분포하며, 식물계에서는 북쪽 함경북도 백두산의 경우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북방 침엽수림이나 북방계 식물류가 자생하고 있다. 지하자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에서 광물 자원이 풍족한 국가 중의 하나이며, 종류로는 철, 은, 납, 아연, 구리, 니켈, 코발트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은 금속광물 19종, 비금속 광물 20종, 에너지 3종을 합한 40여 종에 달하며, 이 중에서 마그네사이트, 중석, 몰리브덴, 흑연, 중정석, 금, 운모 등의 광물은 세계 10위권 내의 매장량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근거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석유의 경우 서한만(서조선만)에서 하루 약 700배럴 정도의 경미한 양은 생산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과거의 다국적 석유 기업들의 탐사 결과에 따르면, 한때 의문시되었던 수십조원 규모의 대량의 원유의 매장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경제. 부분적인 시장화 정책이 도입되었으나, 전반적인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인당 GDP는 구 공산권 국가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경제상황이 어떠한지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인당 명목상 GDP는 2012년 기준 583달러, 인구는 약 2500만명이며 수도 평양의 인구는 약 300만, 국내 총생산은 약 123억 달러로 추계되고, 이것은 남한 1인당 국민소득의 40분의 1, 국내 총생산이 남한의 80분의 1에 해당하며 2012년 UN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80위인 개발도상국이다. 곽인옥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북한 내부 현금보유액은 총 1,000억달러 정도인 것으로 조사되었음을 알수가 있고 그 중 민간 부문에서는 430억달러, 정부 부문이 700억달러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평양 주민의 100만 명이 부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3만 달러 이상인 경우가 많으며 평양 외곽 지역까지 따지면 100만 명 보다도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GDP 규모로 따지면 평양만 2,700달러가 넘는다. 평양시는 상류층인 왕돈주와 대돈주와 중돈주가 합하여 5%이고 중류층인 소돈주가 15%가 있고 중산층인 돈주급은 20%가 존재하고 있다. 그 반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체 지방에는 대돈주 2부류와 중돈주를 합한 상류층은 1.7%가 존재하고 중류층인 소돈주는 4.5%가 존재하며 특히 돈주급은 전체 지방의 2%가 존재한다. 즉 지방은 대돈주와 중돈주 그리고 소돈주를 포함한 상류층 5%, 돈주급과 중간층을 포함한 중류층 25%, 150달러를 버는 하류층 70%로 구성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모든 산업은 국유화되고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그 후의 통제경제는 일관해서 중공업의 발전과 농업의 기계화를 중시해 왔다. 1954년 전후복구 3개년 계획, 1957년 5개년 계획, 1961년 7개년 계획, 1971년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력을 보였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폐쇄적이고 선전선동을 앞세운 공산권 국가들이 경제성과를 대외에 과도하게 과장한 사례가 많은데 소련만해도 경제성과를 5배이상 허위로 대외에 알렸던 걸 감안할 때 60~7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개한 경제성과는 신뢰하기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일제시대 건설된 산업시설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에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60~70년대까지 공업부분의 경제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의 성과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력을 뛰어넘었다.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을 시행했고, 1980년대 동구권과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노선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우호가로 거래하던 호혜가 사라졌고 소련과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원조와 지원이 줄어들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당시 주요 1차 자원을 동구권에 의존해왔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다. 이는 1차 자원 생산지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 중공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큰 경제적 위기였다. 그리하여 1987년 제3차 7개년 계획과 여러 발전 운동-천리마 운동-자력갱생 등으로 계획경제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2003년의 국내총생산(GDP)은 228억 5,000만 달러로 추계된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혁개방과 변화를 통해 경제위기상황을 이겨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을 유지하면서 경제난은 계속해서 가중되고 있고, 이러한 경제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은 1993년 공식적으로 계획경제의 실패를 자인했다. 2002년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식량난과 경제난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2002년 7월 1일에 7.1 경제개혁조치를 실시하여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경제 관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정부 관리들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에 파견하여 이른바 자본주의 학습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러나 이 조치의 실시 결과로 계획 메커니즘을 제외한 시장형 메커니즘을 전부 무효화 시키면서 경제가 다시 악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장마당과 시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2004년부터 시장을 개장하여 시민들이 생활 소비품들을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시장은 락랑구역에 있는 통일 거리 시장과 만경대 구역에 있는 칠골시장이 있다. 통일 거리 시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품 및 남한과 미국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진품이 아닌 것들도 있다. 하지만 200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으로 인하여 결국 물가가 폭등을 하면서 결국 2010년 2월부터 다시 시장이 개방이 되었고 5월 26일에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에서 5.26 지시를 발표하여 부분적인 경제 개혁안들이 실행을 하여 시장경제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였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임수호 책임연구위원의 의견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생산수단 사유화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으며 특히 기업들의 의무 달성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기업소 지표도 확대했으며 특히 농지의 돈을 주고 1년 임대도 가능하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초입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향후 개혁 성과에 따라 중국식이나 베트남식 개혁 모델을 따라 사회주의 시장경제 개혁을 심화시켜나갈 것으로 전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시장 경제의 도입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으며 김정은이 단행한 각종 경제개혁조치가 더해진 결과라는 게 많은 탈북자와 전문가의 분석이 더해졌으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사실상 공산주의가 붕괴가 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고 전세계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기아문제. 이 국가의 식량난이 어느 정도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난의 행군 시기의 식량난은 심각하다는 평가를 받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는 식량난이 과장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량난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 죽었다. 1998년을 기점으로 대량아사 사태는 사라졌으나, 만성적인 식량 부족은 200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내각하에 있던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을 폐지하고, 민경협 산하에 있던 민족경제련합회(민경련)를 개편해 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로 옮기는 등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하거나 개편했다. 하지만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 개편한다는 설에 대해서 남한 정부나 전문가는 가능성이 낮거나 남북관계 차단의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북은 라면 대량생산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발표했다. 201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중단한 대한민국과 미국 탓이라고 발언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의 월스트릿저널은 원조의 대가로 어뢰와 방사포공격으로 돌려받은 한국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2011년 10월, 유엔 산하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OCHA) 발레리 아모스 국장은 "현재 북에 필요한 식량 530만t 가운데 100만t 정도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북 어린이 3분의 1이 만성적인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일일 식량 배급량이 600g에서 200g으로, 북에 대한 외부 사회의 지원도 10년 동안 10분의 1로 줄었다"고 주장하였다. 유럽연합(EU)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은 17일 세계 식량의 날(10월 16일)에 즈음해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등이 최근 발표한 '글로벌 기아 지수(GLOBAL HUNGER INDEX·GHI)' 보고서를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이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5세 미만 아동의 발달장애율이나 사망률은 많이 줄었지만 전반적인 기아지수는 여전히 28.6점으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2015년 이후 북한에 결식자가 거의 없다는 응답도 나왔음을 알수가 있는데 하루 식사를 몇회 했느냐는 질문에 거의 90%는 하루 세끼 이상이라고 답했음을 알수가 있고 주식으로는 백미를 먹었다는 응답이 70%로 지난해 45.3%에 비해 크게 올랐으며 고기에 대한 섭취율은 50%가 일주일에 한두번이라고도 하였으며 특히 매일이라고 답한 비율도 상당히 높았다. 전력문제. 대한민국 통계청 등에 따르면 201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량은 216억 kWh로, 한국의 70년대 후반 1인당 발전량 수준에 불과하고 같은 해 한국의 발전량은 5220억 kWh로, 북한의 24배에 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설비용량은 2007년 795만kW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들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희천발전소를 비롯한 발전소 잇단 준공으로 2014년 725만kW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이는 북한이 1987년에 발표한 제3차 7개년 계획의 발전 설비 용량 목표치인 1천700만kW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고 대한민국 통일부가 지난 2013년 탈북자 1,07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 조사를 실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장기업소의 하루 평균 전력 공급 시간은 거의 12시간으로 조사되었다. 전력 공급 중단 시 자체 발전을 통해 전력 공급을 한 곳은 14.9%에 불과하고 2011년 이후 공장 내 생산라인 평균 개수는 거의 19개로, 이 가운데 가동된 라인은 절반 미만에 그쳤다.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력 수급의 60%를 담당하는 수력 발전이 가뭄과 겨울철 갈수기 등 기상 여건에 따라 전력 생산이 불안정하다는 데 있고 지난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2014년에 이어 지난해 6월까지 이어진 가뭄으로 수력발전소의 가동률이 떨어졌음을 한국 산업연구원 이석기 선임 연구 위원이 말했다. 하지만 이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정책적으로 태양열 이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김정은은 2010년대 중반부터 태양열 등을 활용한 자연 에너지를 더 많이 생산해 이용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양열 패널 가격은 2 - 3년 전에 비해 많이 내렸고 태양열 발전 시설은 제재 대상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이 자유로워 열 효율이 개선돼 패널의 크기나 무게도 줄었으며 웬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가정에서는 대부분 태양광 설치가 끝나 수요도 감소세로 보이고 있고 대신 공장과 기업소, 협동농장에서 사용하는 대용량 태양열 시설은 늘고 있다. 데일리 NK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이나 원산 등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평북 염천 등 내륙 산간 도시를 촬영한 사진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세대별 태양광 발전 보급률은 50%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밥은 먹고 살 만한 주민은 거의 모두 태양광 패널을 달며 크기가 작은 건 150W 태양광 패널이고 큰 것은 200 - 250W라고 밝히고 있음을 알수가 있고 사용 시간은 최소 8시간에서 최대 13시간까지 사용을 할 수 있으며 예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전기가 일정하게 안 와서 인버터도 따로 해야 했는데 요즘에는 태양광 패널에 축전지와 인버터가 함께 나온다고 밝히고 중국에서 파는 태양광 패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실정에 맞게 인버터가 같이 나와서 이제는 인버터를 잘 안 산다고 밝혔다. 직업. 1992년 개정된 공산주의 헌법 70조에 따르면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다’라고 규정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직업선택의 자유를 법적으로는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나 국가기관에서 배치한 데 따라 일해야 하며 그 기준이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성분, 노동력 배치계획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2010년대 경제 개혁 이후 사적 고용의 확대를 지적하는 사례가 몇 존재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적 고용의 확대는 아직까지 대부분 비공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돈주는 물론 평범한 장사꾼들과 가정주부들도 일공을 채용해 구멍탄을 빚는 것이 시간과 돈을 절약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종전에는 자신이 석탄을 구입해 구멍탄을 직접 만들어 온 주민들이 최근에는 구멍탄을 만들어 주는 일공을 고용하고 있다. 주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아파트 또는 문화 주택으로 부르며, 이는 크게 3층에서 4층까지 있는 콘크리트 고밀도 건축물을 말한다. 이 또한 공산주의 국가의 법에 따라 주택을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달 사용료를 내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남한 주택제도와 달리 가정 총노동 월급에서 전기료, 수도료 등을 충당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직업에 따라 주택의 구성이 달라진다. 조선로동당, 내각, 조선인민군 간부들은 독립식 다층 주택으로 정원과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되어있는 곳에서 거주하는 반면, 말단 노동자 등은 방 1~2개와 주방이 딸린 공영주택에서 거주한다. 또한 상위계층은 주택보급률이 굉장히 높은데 일반 주민들은 주택을 배정받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입사증"을 받고 이동허가를 받아 이사하는데 이를 받기 위해서 몇 년이 소요된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은 서류수정작업을 통해 거주지를 변경한다. 대표적인 주택지구는 평양시 중구역 아파트단지와 천리마 거리 아파트 단지, 함경남도 단천시 신단천동 주택단지와 황해북도 개성시 청년거리 아파트 단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흔히 경제문제에 비유했기 때문에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주택건설에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요즘 정부에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식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택건설도 부진한 면이 없지 않다. 2000년대 들어 평양에서는 집 다음에 계급투쟁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부동산 열풍이 지속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부동산 투자로 100만 달러 이상 부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이 등장하기도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들은 30평대 아파트를 3 ~ 4만 달러에 분양받아 인테리어를 한 뒤 최고 10만 달러에 되팔아 2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들 브로커는 국내 돈주뿐만 아니라 화교 상인이나 조선족의 자본을 유치하는 역할을 하며 이들 민간 사업자는 자금력을 가진 국내외 개인일 수 있고 여러 명의 컨소시엄 형태나 단체일 수도 있다. 이들은 건설 자금 - 자재 - 장비 등에 필요한 일체의 자금과 현물을 제공하고 대개 자재는 중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달러로 거래되고 수입권도 수도건설총국이나 제2경제, 인민보안성 등과 같은 극히 일부 기관이 독점하고 있다. 화폐개혁. 2009년 11월 30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년 만에 구 1000원을 신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하였다. 이는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한 2002년 7·1 경제개혁조치 이후 화폐 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주민들이 보유해 암거래 시장에서 유통되는 지하 자금을 끌어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가구당 구화페 100,000원을 신화폐 1,000원으로 교환해주고 그 외에는 교환해주지 않았다. 다만, 정부에서 한 사람당 신화폐 500원(구화폐 50,000원)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즉 4인가구인 경우 정부으로부터 지급 받은 2,000원과 1,000원(구화폐가 100,000원 이상이 있었을 경우임)을 합한 3,000원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은 모두가 비슷한 조건으로 다시 출발한다는 점과 구화폐가 단 10,000원도 없던 하위층의 경우엔 공짜돈이 생겼다는 점, 또 2-3,000원정도의 월급이 생활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하, 중상위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화폐 교환조건을 제대로 정해놓지 못하여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화폐개혁을 주도한 김정일의 실정을 숨기기 위해 박남기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초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박남기 조선로동당 전 계획재정부장이 '남조선 간첩' 혐의를 받아 숙청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실제는 충언을 하다가 결국 김정일의 분노를 사서 숙청되었다는 설이 있음을 알수가 있다. 하지만 2013년 이후 2019년 북한연구학회 추계학술회의에서 반론이 나왔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2013년 이후 극심한 물가 상승을 잡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당국의 통화 정책이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왔다. 정연욱 박사에 따르면 쌀 가격 등으로 추정한 북한의 물가 상승률은 2011년 229%까지 폭등했지만, 2014년에 마이너스를 기록한 이후 5% 이내로 안정됐음을 알수가 있고 계속 안정중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북한의 환율 추이를 보면 불안정하던 환율은 2013년부터 8천원 선을 굳게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그가 가능하던 이유로는 통화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와 악화일로로만 걷지 않는다면 악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하였음을 알수가 있다. 북한 해커가 쓰는 용어를 한국식으로 바꾸어서 해킹을 시도하고 있다. 출처: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였던 김정은은 새로운 중국식 경제개혁 준비를 2011년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와 대외 경제 부서의 과장급 혹은 부원들을 파견보내어 중국식 경제개혁 사업을 지시하였다. 이때 12월 14일 연구 결론은 생산 공장 및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 임대정책을 기본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하기로 결론내리고 2012년 4월에 경제개혁을 시행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때부터 상무조가 편성이 되려고 하는 시점에 결국 김정일이 사망하였는데 결국 김정은의 지시로 중단없이 계속 4월로 확정이 되어 추진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한마디 때문에 4월의 경제 개혁 지시가 6월로 미루어져 있었으나 간신히 무마되어 6월에 내각 상무조가 편성이 되어 12.1 경제개혁조치로 시행이 되어 독립채산제 및 포전 담당 책임제 시범 실시를 한 끝에 3월 1일 3.1 경제개혁조치가 실시됨으로 북한 전역에 독립채산제가 실시가 되었다. 2014년 5월 30일에는 김정은이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군, 내각 기관의 관리들을 모아놓고 5.30 담화를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고 이때 담화는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는 공장, 기업소, 협동조합이 생산 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에 기초해 실제적인 경영권을 갖고 기업 활동을 창의적으로 해 조선로동당과 국가에 지닌 임무를 수행하며, 근로자가 생산과 관리에 주인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게 하는 기업 관리 방법이라고 규정했다. 기업소는 제품 개발권과 품질 관리권, 인재 관리권을 행사해 지식 경제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기술, 새제품을 적극 개발하고 제품의 품질을 개선해 기업소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했다. 더불어 과학자와 기술자가 근로자들과 함께 첨단 돌파의 주인으로 내세워 기업소가 새 기술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족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그리고 차등 임금제를 수립하여 월급을 일한만큼 많이 주어야 하고 공정하게 받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였음을 김정은이 담화로 발표를 하였다. 현재 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의 말에 의거하면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대 월급 인상률은 일반 공업인에게는 25배의 월급 인상률이 올라 15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고 일반 편의 서비스 업종에 대하여서는 100달러의 월급 인상률이 올랐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환산하면 현재 계획형 기업에도 상당한 액수가 인상이 되었으며 현재 가동률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에 60% 가까이 가동률이 올라갔다. 은행에 자금을 예치함으로써 은행이 기업에게 넘겨줌으로 특히 영향력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기반을 담은 규정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위험 요소도 크게 감소할 수 있는 투자방식이다. 차후 채무 상환 불응시 현금 계좌 선 압류 및 현금 수입이 들어오는 즉시 선입금되는 조치로 인한 강제 집행을 통한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 조항들도 수록이 되어 있다. 특히 고정 자산을 임대하거나 혹은 내각에 관할하에 소규모 기업에게 이관할 수 있음을 차후인 2015년에 공식화하였으며 이를 2015년 기업소법에 명확히 하였다. 주민. 한반도 지역은 세계적으로 비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편에 속한다. 한반도 북부에는 과거 퉁구스계 민족(말갈족·여진족 등)의 유입이 잦았으나, 한국 전쟁 이후 외부 민족 유입이 사실상 차단되었다. 현재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한민족이며, 매우 소수의 외국인 거주자(주로 중국인, 그 밖에 러시아인, 몽골인 등)가 있다. 그리고 1950년대~1970년대에 월북한 대한민국 주민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인구와 분포. 2012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458만 9,122명(출처:CIA The World Factbook)으로 추산되며, 인구밀도는 약 200명/km2이다. 인구는 대개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해안가 등에 집중되어 있다. 2004년 인구 증가율은 약 1%이다. 1950년대 이후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가속화되어 2002년 기준으로 총인구의 61%가 도시지역에 산다. 최대 도시는 수도인 평양으로, 2010년 인구는 251만4,692 명이다. 그 밖에 주요 도시로는 함흥, 청진이 이렇게 평양과 3대 대도시를 이루며 그 외 남포, 개성, 신의주, 원산 등이 있다. 2000년 8월에는 동해안의 경제 무역 도시인 라진과 선봉이 합쳐 인구 40만 명 규모의 라선시가 되었으며, 이 도시는 2010년 1월 특별시로 승격되었다. UN이 추정하는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2550만명이지만,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 이 있다. 언어.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대한민국과 동일하게 한글로 표기된다. 표준어는 문화어라고 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방언에 바탕을 둔 언어를 표방한다. 표기상 한자의 사용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두음법칙(예: 북-녀자, 남-여자)과 사이시옷(예: 북-시내물, 남-시냇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모의 사전 배열 등에서도 대한민국과 차이가 있다. 어휘는 외래어 대신 고유어를 활용한 어휘를 많이 만들어 쓰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 외래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어, 러시아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다. 일상 생활,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표준어와 통역 없이 소통이 가능하나 의학 용어와 같은 기술적 어휘에는 차이가 커 이 부분은 의사소통이 어렵다.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으나 중국과의 경제교류 등의 교류강화로 중국어를 많이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어는 소련 해체 이후 인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지역 방언으로 방언연구회(2001)의 구분에 따르면 서북 방언, 동북 방언, 중부 방언이 통용된다고 알려져 있다. 사회. 인권. 세계 유수의 인권단체들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태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파악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6곳에는 인구의 0.85% 정도인 15만 4천여 명의 주민이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들과 그 가족이 재판 없이 이들 수용소로 보내지며, 이곳에서는 심문, 강간, 고문, 강제노동, 의료 서비스 배제, 강제낙태, 생체실험 등이 행해진다. 또한 이곳에서 그들은 결혼의 자유도 박탈당하며 턱없이 낮은 식량배급을 받고,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된다.. 또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농촌지원을 명분으로 아편 재배에 어린이를 동원하고 있는 실태를 지적하였으며, 同 위원회에 출석한 북측 대표단은 유사시 미성년 아동들을 소년병으로 활용할 의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평안남도 개천(14호 관리소)과 북창(18호 관리소), 함경남도 요덕(15호관리소), 함경북도 화성(16호 관리소), 청진(25호 관리소), 회령(22호 관리소) 등 6곳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 종교.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은 대한민국보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먼저 전파된 지역으로 교회의 수가 남한보다 더 많았으며 종교 활동도 더욱 활발했다.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천도교도 약 150만 명, 불교도 약 37만 5000명, 개신교도 약 20만 명, 천주교도 약 5만 7000명 등 총계 약 200만 명의 종교인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구의 22.2% 수준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많은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탄압을 단행했던 이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종교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으로서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 인간의 의식이 환상적으로 왜곡 반영된 ‘허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종교를 완전히 억제할 수 없었지만, 분단 이후 북한에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억압 정책을 추진했다. 이 사회주의의 이념적 배경을 제공했던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했다. 종교는 사람들을 사후세계의 행복에 몰두하게 만들고 현실세계의 불평등과 비인간적인 사회질서를 허용하게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군정과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를 반동주의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국가차원에서 기존의 민간종교조직을 흡수하고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1월 조선기독교연맹과 조선불교도연맹을 세워 이러한 정책을 반영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허용되었다.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은 사회주의 체제의 정착과 개혁을 위한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해방 이전 대부분의 조직들은 일제의 이익을 위해 설립되고 운영된 조직으로서 해방 이후 급속히 힘을 잃고 없어졌다. 신속한 개혁의 차원에서 북한의 혁명주체세력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세력 중 하나이자 지식인들의 집결지인 종교조직을 용인했다. 명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은 민속명절과 국가명절로 나뉜다. 민속명절은 설,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을 말하며 시기는 대한민국과 대체적으로 동일하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2일까지로 대한민국의 신정(1월 1일)보다 오래 휴식을 취한다. 국가명절은 대표적으로 8개를 기념하는데 태양절(김일성 생일, 4월 15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2월16일),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 노동절(5월 1일), 조국 해방일(8월 15일), 공화국 창건일(건국일,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10월 10일), 사회주의헌법절(12월 27일)이 있다. 이 가운데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까지는 연속적인 축제기간이며 특히 김일성의 생일을 가장 크게 기념하고 있다. 기념일으로는 노동자들의 의무 휴식을 위한 농업근로자절(3월 5일), 어부절(3월 22일), 탄부절(7월 7일)이 있고, 조선광복회 창건일(5월 5일), 철도절(5월 11일), 국제아동절(6월 1일), 김일성 서거일(7월 8일),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일(10월 17일), 학생독립기념일(11월 3일)이 있다. 문화. 문화 활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보호되고 장려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역사 박물관이나 영화관, 도서관이 정비되고 있다. 정부는 국립의 교향악단, 극장, 무용단 등을 갖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군사문화와 연관 짓고 있으며 농사나 공장에서의 물자 생산을 "농업전투", "공업전투", "생산전투" 등의 단어로 표현할 만큼 아주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군인뿐만 아니라 철도공무원도 군대식 계급을 부여(역장 – 대위, 차장 – 소위, 개찰담당 – 상등병, 기관사 – 중사 등)할 정도이다. 예술. 문예활동은 당책 구현, 공산주의 선전, 공산주의적 인간개조, 노동의욕 제고와 주체사상 강화 등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문예정책 또한 선전과 선동의 일환으로서 문학이나 예술을 이용하고 있다. 창작활동은 이른바 공산주의헌법 45조에 규정되어 있는 `민족적 형식에 공산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공산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묘사방법이 그 기조가 된다. 체육.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육정책은 주민들을 공산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한 투사형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우상화와 국방력 강화의 수단으로, 대외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정치외교수단으로서 이용하고자 하며, 반미사상, 대남전략수단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다. 체육정책의 기준은 공산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들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1958년 9월 1일 개교한 평양체육대학과 1977년에 설립한 중앙체육학원, 그리고 73년부터 각 도에 1개교씩 설치한 고등전문학교를 두고 있으며, 교원대학과 사범대학에 체육학부가 있다. 최대의 체육시설은 김일성경기장이며, 그 밖에 지방도시인 혜산· 함흥· 사리원· 원산· 신의주 등지에 경기장을 두고 있다. 실내체육관으로는 배구· 농구· 탁구· 체조 등 11개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는 원산· 남포· 함흥· 강서 체육관 등이 있다. 문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이며, 일제강점기 1920년대 활동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통칭 카프)이라는 문단이 전신이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 사실문화를 한국에 전파하면서 지식인들을 개몽하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60년대에 숙청당한 한설야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이 가입했다. 한설야의 작품은 오늘날 청소년들이 읽을 정도로 해금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저서 문학예술론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고쳐서라도 읽게 하면 좋다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문학 2003년 5월호는 한설야의 작품 《승냥이》가 발표되었다.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행적을 찬양하는 문화를 "수령형상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문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졌다. 이 문화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한편, 역사 문학이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문학, 외국 문학이 있는데, 역사 문학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홍명희와 그의 손자 홍석중이다. 홍명희의 작품인 "림꺽정"은 조선 전기의 도적인 임꺽정을 그린 역사적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갑오농민전쟁"도 제국주의에 맞써 투쟁한 전봉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도 역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홍석중은 홍명희의 손자로써, 그도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학의 자랑거리이다. 외국소설로는 중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이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시인으로는 조기천과 백하와 신흥국 등 이 있는데, 조기천은 시 "백두산"과 "휘파람"으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흥시인 신흥국은 얼마 전 음력설에 풍경을 묘사한 시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소련의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본따 만든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은 당과 깊이 연관되어 당의 통제를 받으며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예정책은 당정책을 반영하는 것인데 한설야는 1953년 9월 26일 전국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진술한 보고에서 "우리의 문학예술은 당적인 문학예술"이라고 천명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조선문학> 1953년 10호, 125쪽). 음악. 악단으로는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경음악단,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조선인민군군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등이 있다. 근래 들어서는 삼지연악단, 모란봉악단 그리고 청봉악단 등이 창단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러 대학생이 대한민국의 가수 안재욱의 노래를 부르다가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다. 평양시에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윤이상 (尹伊桑)의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있다.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래는 혁명가요와 선전가요들이 많지만, 꽤 서정적인 노래도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다시 만납시다〉, 〈우리 민족 제일일세〉, 〈반갑습니다〉는 보천보전자악단의 단원인 여성가수 리경숙이 부른 노래로 조선민족제일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이며, 〈 기러기떼 날으네〉,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의 주제곡이다. 이밖에 혁명가요로 〈적기가〉, 〈총동원가〉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실미도》라는 영화를 만들 때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쓰다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소동이 있었다.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이미 부른 노래를 전자악기로 연주한 경음악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격대 말파리 달리네〉, 〈통일아리랑〉, 민요 〈바다의 노래〉가 있다. 영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데 애를 써서, 자신이 직접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할 정도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술영화는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일제강점기 때 생애를 그린 《조선의 별》, 1992년에 해외동포들의 행적을 그린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예술영화 《온달전》, 스포츠를 장려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책을 바탕으로 만든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 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 때 도적, 임꺽정을 배경으로 하는 예술영화 《림꺽정》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에서는 정책을 따르도록 선동하거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상향시키려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과학영화가 방송되고 있는데, 관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의 20시 보도가 끝나기 전에 과학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방송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천연기념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 〈평양의 4계절〉, 〈강냉이오사리종이〉, 〈우리 생활에 필요한 콤퓨터상식〉, 〈우리나라의 최초의 철갑선-거북선〉, 〈좋은 나무를 많이 심자〉, 〈3·26전선공장이 어떻게 모범기업이 되었는가〉, 〈조선의 천연기념물 클락새〉, 〈룡정어를 많이 기르자〉, 〈우리나라의 저작권소유법〉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조선중앙텔레비죤의 17시 보도 이후 방영되는 아동영화가 인기가 많다. 아동영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어린이가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로 그림을 그려서 만들거나, 인형극을 통해 만드는 경우가 있다. 2019년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동영화는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최근 컴퓨터를 이용해서 새로운 아동영화를 제작하는 중이며, 이 촬영소에 대해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직접 기자들이 취재하기도 했다. 아동영화의 문학은 촬영소의 영화문학가가 담당하지만,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을 기념하여 전국 아동영화문학현상모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당선된 문학작품이 아동영화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아동영화의 대사는 방송연극단에서 담당한다. 아동영화의 내용은 도덕, 예절, 과학기술에 관해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아동영화는 다부작 아동영화인, 《령리한 너구리》와 《소년장수》가 있다. 그 중 《령리한 너구리》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과학의 원리로 쉽게 풀이해 과학 교양을 어린이들에게 함양시키는 아동영화이며, 《소년장수》는 "간약한 호비와 착한 쇠매의 결전"이 내용으로, 권선징악을 주요 내용으로 삼은 아동영화이다. 이외에도 친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딸이 인삼을 찾아 험난한 일을 하는 《산삼꽃》과 교통질서에 대한 캠페인 만화인 《교통질서를 잘 지켜요》, 그리고 온갖 나쁜 일을 저질러 동물을 괴롭히다가 고슴도치에게 혼줄이 나는 《호랑이와 고슴도치》, 분도기()를 이용해 적을 물리치는 《연필포탄》, 늑대에게 잡아먹힐 뻔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꾀로 늑대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승냥이를 이긴 너구리》, 돌고래를 훈련하여 경제활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려는 《곱등어를 기르는 소년》 등이 있다. 2008년,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의 부총장 김관선은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하는 아동영화를 창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각종 영화 음악은 영화 및 방송음악단이 제작하고 있다. 음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음식은 평양냉면 (平壤冷麵)이나 조선인삼 (朝鮮人參)이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식당은 옥류관과 청류관, 평양메기탕집, 평양숭어국집 등이 있는데, 평양냉면과 평양온반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옥류관이다. 옥류관은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6.15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저녁만찬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주 개를 잡아먹지 않으나,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락랑구역의 평양단고기집과 중구역의 고려단고기집이 있다. (보신탕을 단고기로 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요리사에게 단고기로 부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난을 타파하고, 외화를 모으기 위해 해외에서 소수의 식당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중국계가 제일 많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식당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해외의 식당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온 유학생이나 국내의 요리사들이 직접 그 식당에 가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식당들은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이주한 재중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손님들이 적은 편이다(대표적인 해외 식당은 "해당화"와 "목란관"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심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만든 김치를 파는 "평양김치대리소"라는 가게가 있다.). 의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부의 배급제도가 의생활에도 적용되었다. 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되던 때에는 대다수 주민들이 인민반에서 공급카드를 발급받은 뒤 각자 상점에 가서 카드를 제시해 자신에게 돌아올 옷감과 의복을 국정 가격으로 구매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의복 배급은 식량 배급보다 먼저 중단되었고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옷감을 구한다. 작업복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과의 교류를 진행하면서 여성은 양복이나 치마같은 것들이 많이 발전했고 머리모양도 파마를 하는 등 외국 문화를 따라갔다. 최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경공업분야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최근시기 질좋은 경공업제품을 만들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갖추어졌다”며 평양양말공장, 신의주방직공장, 보통강신발공장, 평양방직공장 등을 예시했다. 또한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나서는 모습까지 포착되면서 직물생산은 더욱 활기를 띄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급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 유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유네스코 (UNESCO)의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록된 고구려 고분군이 평양시와 남포시에 있다. 이 유적은,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 (WHC)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세계 유산으로서 등록되었다. 고구려 고분군은, 선명한 벽화 고분을 포함하는 63기의 고분에서, 벽화는, 일본의 다카마쓰쓰가 (高松塚) 고분 이나 키토라 고분 벽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덧붙여,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 도 동시에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문화 개방 과정. 2013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류경 스마트폰을 판매를 하기 시작하여 광명망으로 서비스를 하기 시작을 하였고 특히 데이터 서비스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하여 놓았으며 특히 만방 동영상 서비스로 인하여 방송을 시청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였다. 특히 서비스 문물 개방 과정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 2016년부터 만수대 TV를 케이블 TV로 전격 송출하여 UEFA 유로파리그나 혹은 동구권 영화들을 시청할 수 있도록 전격 조치를 하였다. 만수대 TV에서 직접 운영하는 사이트인 목란비디오에서 판권을 사들여서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나 혹은 동구권 영화들을 DVD로 발매하여 판매를 하고 있다. 2016년에는 아예 스마트폰으로 목란비디오로 들어가서 안드로이드로 설치하여 위의 영화들을 볼 수 있도록 전격적으로 허용을 하였음을 알수가 있고 이를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고 단, 역시 그외의 영화들을 볼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다. 2018년에는 많은 주민들이 최근 살기 힘들다고 말은 하면서 적지 않은 돈이 드는 만수대 TV 설치에 극성이다면서 지역 우체국에서는 핀잔을 주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외국 영화에 대한 인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당국도 알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결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의도와는 달리 주민들의 외부 정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더군다나 나의 길동무 앱 스토어를 통하여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금지되었던 외국 도서들까지 대부분 허용하여 구매할 시 구독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었고 이를 김흥광 대표가 밝혔다. 2015년 1월 들어서는 광명망의 개인 이용이 다시 허용되었다고 알려졌음을 알수가 있고 특히 그리하여 북한은 가정집에도 ADSL 모뎀 사용을 다시 허용했다. 아예 2017년 8월에는 김정은의 재가 하에 HSPA 모바일 인트라넷 서비스를 허용하여 HSPA USB Stick 판매를 허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에게 판매를 하였음을 알수가 있었고 이를 고려링크에서 인트라넷 서비스 이용자로 개통을 하였다.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바일 FPS 게임이 유명하여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게임을 즐기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는 것이고 특히 카운터 스트라이크와 같은 게임을 즐기고 있다. 더군다나 스포츠 게임이 유명하여 유로파리그 선수나 혹은 국가 대표팀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특히 그래픽도 상당히 좋다. 2015년에는 온라인 쇼핑 사이트인 옥류가 처음으로 개관하여 처음으로 결제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수가 있고 대략 30개의 온라인 쇼핑 사이트가 생겼다. 교육. 유치원, 탁아소, 학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년간의 취학전 교육인 탁아소와 유치원이 있으며, 한국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소학교 5년, 고등중학교 6년, 합계 12년간의 의무교육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유치원은 높은 반과 낮은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높은 반부터는 12년제 의무교육과정에 포함된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0~35,000개의 유치원과 탁아소가 있고, 약 2,500개의 고급중학교, 2,500여개 초급중학교와 5,000여 개의 소학교가 운영된다. 또한 도서지방과 산간지방에서 약 100개의 분교가 운영하고 있다. 12년제 의무교육 체제에 따라 교육기관은 모두 정부가 운영한다. 그러나 유치원과 탁아소의 경우는 학교와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 있다. 탁아소의 경우 미혼모가 낳은 사생아도 관리되는데 이러한 사생아들은 국가에서 그 목숨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들을 혁명전사로서 활용한다. 고등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 반면 대학의 경우 상위 25~30%의 인원만 입학이 가능하며 교육비는 모두 국가가 지원한다. 교과 내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토플 응시자 평균점수는 2006년의 경우 120점 만점에 평균 69점으로, 대한민국의 72점, 일본의 65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다. 학생 소조 활동. 학생들의 지능 선발 및 교육을 위해 과외 교육 기관인 학생소년궁전과 학생소년회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기관은 민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운영되며, 평양시와 지방을 통틀어 약 2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학교 수업 시간이 끝나면 대부분 이곳에 가서 오후 5시까지 과외 학습을 받고 하교한다. 평양시의 학생소년궁전은 대표적으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있다. 그중에서 평양학생소년궁전은 김일성 주석에 의하여 1965년에 세워지고, 평양시 중구역에 있다. 두 번째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1988년에 세워져 현재 만경대구역에 있다. 평양학생소년궁전은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탑식으로 건설되어 있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해 곡선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 외에 평양시 승호구역에 승호학생소년회관이 있고, 자강도에는 배움의 천리길 학생소년궁전과 평안북도 정주시에 정주학생소년회관, 그리고 황해북도 개성시에 개성학생소년궁전과 량강도 삼지연지구에 삼지연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고등교육기관. 고등교육의 중심 기관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이며, 이 외에도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있다. 또한, 라디오와 인터넷으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김일성방송대학이 마련되어 있다. 대학교는 약 280여 곳이 있으며 30만 명 이상이 배우고 있다. 과학. 주체 과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한때 주체과학으로 3대 과학으로 지정을 하였고 특히 주체철과 비날론, 무연탄 가스화 혹은 갈탄 가스화가 있다. 비닐론 혹은 비날론은 1936년 리승기 박사가 개발한 섬유로써 이때 일본에서 개발하여 직접적으로 관련이 깊고 특히 섬유의 품질이 최상이라 면에 버금가는 화학섬유로 인정을 받고 있다. 특히 필라멘트 섬유로 만들면 비단과 같아지고 양모와 같은 스테이플 섬유로 만들면 양모보다 성질이 좋고 면직물과 거의 비슷한 품질을 자랑하여 항상 리승기 박사가 항상 입고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리승기 박사가 월북한 뒤 섬유 과정을 생략하고 원료 공정을 개발하여 무연탄으로 전용하는 과정과 카바이드 공정, 아세트 알데히드를 아세트산으로 변경하여 원료과정을 개발하여 1957년 개발에 성공하여 김일성으로부터 축전을 받았다. 주체철은 원래 입철이라는 구단광을 청진 제강소에서 만들었으나 36만 톤의 규모로는 부족하여 개건 공사를 거쳤고 특히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도 공사를 거쳐서 입철을 더욱 강화하여 삼화철이라는 구단광을 새로 만들어 제강과정과 함께 사용하였으나 결국 노폐물이 자주 회전로에 끼며 특히 코크스도 상당부분 많이 넣어야 하여 결국 경제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1998년부터 주체철 사업이 시작하여 회전로 부문과 산소열법 용광로 부문 그리고 갈탄 제철 용광로 부문을 나누어 회전로 부문은 성진제강련합기업소가 산소열법용광로 부문은 황해제철련합기업소가 갈탄 제철 용광로 부문은 김책제철련합기업소가 나누어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회전로 부문에서는 결국 이사업이 10년을 끌동안 이 공법은 실패를 연속으로 하였으며 국내 기술로 활용할 수 없는 인식이 쌓여갔고 특히 결국 젖은 물가마니를 쓰고 특히 불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거기서 문제점을 발견을 하였다. 실패를 통한 학습으로 2004년 50%의 코크스 배합 사용 공법을 달성을 하여 산화 배소 구단광을 만들게 되었으며 하지만 결국 60%로 실수율이 떨어지고 특수강을 생산하여 수출을 하여야 하는데 품질이 떨어지는 등 결국 원점으로 돌려서 개발을 다시 하였다. 결국 산소 용융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고 특히 실험 공장에서 6kg의 산소를 주입하여 2kg의 용선을 출선하는데 성공하자 결국 공업로 도입을 추구하였다.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서도 특히 공장이 책임지겠다는 각오와 함께 실험을 계속하자고 하였고 특히 점결제 무사용과 함께 저질 석탄으로 기술 경제 지표를 개선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회전로가 계속 폭발하자 방법이 없던 한 박사가 결국 용융로 안에 들어가서 결국 폭발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문제점을 해결해 품질이 좋은 용선이 출선이 되어 김정일이 극찬하고 이를 치하하였다.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서는 결국 2003년에는 국가 과학원 5월 28일 금속 연구소에서 발명 특허를 내어 결국 갈탄 제철에 의한 용선 생산법을 완비를 하는데 성공을 하여 이것을 통하여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김책 제철 연합 기업소가 주도하여 시험 공장을 차려서 실험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오류가 나기 쉬웠고 특히 불량이 많았으며 가는 곳곳마다 실패를 하여 결국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컸으며 특히 이것에 대한 포기론도 있었으나 결국 김정일은 한발짝이 아니라 반발짝도 후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때 1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를 하면서 힘을 내기 시작을 하였다. 결국 갈탄 용광로가 개발이 완료되고 실험을 계속한 결과 1차 실험에서는 결국 지표 달성에 실패를 하였는데 반하여 2차 실험에서는 부분적인 달성에만 하였을 뿐 그리하여 결국 성과가 없자 결국 3차 실험에서 정상적인 지표 달성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공을 시키고 특히 2010년에 출선을 하는데 성공을 하여 김정일이 치하를 하면서 기뻐하였고 특히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 버금가는 주체철 개발이라면서 좋아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 결국 김정일은 현지지도를 가면서 결국 김책 제철 연합 기업소 갈탄 용광로를 보면서 흐뭇하였고 출선 장면을 봤다. 2016년에는 이때부터 황해제철련합기업소가 추진하여 성공을 시킨 산소열법 용광로를 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 활용을 하기 시작하여 2017년부터 공사에 들어갔었고 이때 황해제철련합기업소에 사용하던 설비들을 대부분 활용하여 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 활용을 하였다. 2018년 1월 1일 완공이 되어 첫 출선이 되는데 성공을 하고 출선을 한 용선이 품질이 좋은 용선이 되어 나오자 모두가 기뻐하였고 품질이 좋은 용선으로 변했으며 연산 규모는 30만 톤의 수준으로 추정을 할 수 있고 특히 황해제철련합기업소의 1.6배 더 많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전자 공학.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가장 야심차게 준비하는 게 전자 공학 부문 특히 반도체 사업이며 특히 반도체 공학은 1983년부터 준비하여 평양과 성천 그리고 은정지구를 기준으로 반도체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특히 김정일과 김정은이 가장 투자를 많이 하는 것도 반도체 장비에 투자를 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을 알아본다면 리철호가 사업하는 기계 공장과 89호 집적회로 공장, 평양 집적회로 공장, 평양 집적회로 시험 공장, Glocom, 111호 마스크 제작소에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특히 제프리 루이스 박사와 통일연구원에서도 연구보고서가 나와 현재 반도체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 특히 리철호가 사업하는 기계 공장과 89호 집적회로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대부분 군수 공장에 납품이 되고 있다. 그리고 하태경 의원도 현재 일본이 조총련을 통하여 북한으로 불화수소와 그외의 장비를 납품하고 있고 특히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스스로도 전자빔 리소그래피 장비를 공급받았다고 인정을 하였다. 현재 조선중앙통신과 내나라에서도 SoC 제작에 성공하였다고 보도 하였으며 한술더떠 로동신문에서는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저전력 LP형 HKMG 개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공하였다고 보도하였고 이를 김정은이 축하문을 111호 마스크 제작소 과학자들에게 직접 송부하였다고 밝혔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도체 개발 공정 과정을 거치자면 2014년에는 20nm 공정을 개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2017년에는 LP형 HKMG를 개발하는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19년에는 10nm FinFET 공정을 개발하여 역시 파운드리하여 입증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자체 네트워크 개발. 1997년 EC계열의 통신망을 자체 개발하여 광명이라는 명칭의 인터넷 프로토콜 통신망을 개발하여 점대점 프로토콜 방식으로 추진을 하였다. 하지만 전화 통신망의 포화로 인하여 2000년대 전국적인 광케이블 부설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독자적인 인트라넷 망을 갖게 되었으며 2000년 기준으로 도 - 시 - 군까지 광케이블 공사가 부설이 완료가 되었고 특히 리 기준과 가정집에는 56Kbps 수준의 모뎀 통신망이 부설이 되어 있었고, 2010년 기준으로 도 - 시 - 군 - 면 - 리 기준으로 광케이블 부설 공사가 완료가 되었고 가정집에서는 ADSL 모뎀 통신망이 부설이 완료가 되었다. 현재 광명망 서비스 중에서는 메일 서비스와 전자 게시판 서비스, 채팅 서비스,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추진을 하여 평양 주민들에게 유흥을 즐기기 위한 서비스를 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었고 한때는 자체로 게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2008년 중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집트의 오라스콤과 이동통신 계약을 하게 되면서 오라스콤이 광명망을 활용하며 디지털 이동통신망을 구축하였고 지방 지사를 연결해 관리하게 되었다. 오라스콤에서 휴대폰을 이용한 WAP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광명망을 개인이 이용하도록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광명망 내에 개설된 게시판에 글을 쓰게 되면 홈페이지의 관리자나 감독 기관에서 글을 검열한 후에 게시하는 방식의 제한이 생기게 되었다. 2017년 8월에는 김정은의 재가 하에 HSPA 모바일 인트라넷 서비스를 허용하여 HSPA USB Stick 판매를 허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에게 판매를 하였고 이를 고려링크에서 인트라넷 서비스 이용자로 개통을 하였다. 현재 여기에 저장되어 있는 과학기술문헌 중 총 8,600여만 건이 광명망에 수록이 되어 있으며 발명특허는 3,600만 건이 광명에 수록된 과학기술문헌은 4,500만 건이 수록이 되어 있다. 이중에 10% 이상은 반도체와 컴퓨터 과학 문헌이며 이 기술 문헌들을 유료화 하여 반도체 연구와 소프트웨어 연구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설정을 하였다. 특히 이 과학기술문헌의 대부분은 조선컴퓨터센터에서 대부분 외국 사이트에 자체 자산으로 구입하여 대부분 소장을 한 것으로 그만큼 과학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기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년대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이미 전폭적으로 시작하여 하드웨어는 군수 전용 개발 부문으로 소프트웨어는 민수 전용 개발로 돌려 개발을 하였다. 특히 자체 네트워크 개발은 물론 특히 스마트폰의 게임이나 혹은 애니메이션 같은 것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개발하거나 혹은 복제하여 평양타치 스마트폰이나 아리랑 121 스마트폰에 설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래서 현재는 자체 앱 스토어인 나의 길동무 4,1이나 혹은 자료봉사 2,0을 개발하여 미국의 애니메이션 영화나 혹은 UEFA 유로파리그 혹은 게임 엔진 계열인 카운터 스트라이크 계열도 개발하여 평양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하였다. 현재는 많은 국가 특히 중국이나 혹은 미국 등지에서도 소프트웨어 기술을 합작 개발하여 많은 수익 사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작품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합작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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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8도
북위 38도(北緯三十八度)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38도를 지나는 위선이다.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 태평양, 북아메리카, 대서양을 지난다. 특히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나며,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8선. 38선(삼팔선, 三八線)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그은 군사분계선이다. 삼팔선과 한반도의 분할. 1945년 7월에 미국 육군부(현재의 미국 국방부) 작전국(OPD)에서 처음으로 연합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계획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미국이 경기도 · 강원도(함경남도 원산, 안변 포함) · 충청북도 · 경상남북도를, 소련이 함경남북도(원산·안변 제외)를, 영국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중화민국이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미국 합동참모본부 내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는 '일본 주요 열도와 한국에 대한 연합국 관리 및 점령군 계획(JWPC385/1)'에서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대한 4국 분할점령 계획을 작성했다. 미국, 소련, 영국, 중화민국 4개국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서울, 청진, 원산, 평양, 군산, 제주 등 주요 전략지점에 연합군을 주둔시키고, 이후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한반도를 분할관리한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하지만 9월 22일 작성된 수정안 'JWPC385/5'에서는 38도선 분할이 확실시되어 영국과 중화민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소련 양국의 분할점령안으로 바뀌었다. 'JWPC385/1'은 현실적으로 군사적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미국 군부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38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미국과 소련은 1945년 9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해주항이 위치한 해주시의 룡당포(龍塘浦)는 38도선 이남이지만, 미·소군정은 이를 38선 이북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연천군을 파주군에, 양구군을 춘천군에, 인제군을 홍천군에, 양양군을 강릉군에 편입하고, 벽성군은 해주시의 서쪽 지역을 옹진군에, 동쪽 지역을 연백군에 편입시켰다. 소련군정은 38도선 이북의 춘천군 사내면(가평군 포함)을 김화군에,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고, 개풍군과 장단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장풍군으로 통합하였으며, 옹진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벽성군에 편입하였다. 또, 포천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영평군으로 개칭하여 관리하다가 1946년 12월에 철원군에 편입하였다. 정전협정에 따른 군사분계선으로 대체.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한국 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은 위도상 북위 38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38선과 비교해 서쪽 경계가 남하하였고 동쪽 경계가 북상하였다. 이에 따라 38선 남서쪽의 황해도 옹진군·연백군과 경기도 개성시·개풍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38선 북동쪽의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양양군·고성군은 대한민국에 속하게 되었다. 38선(1945.9.2 - 1950.6.25)과 현재의 군사분계선(1953.7.27 - )은 다르지만,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고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군사분계선을 '38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도 38선은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홍천군 내면은 38선 분단에 따라 변경된 행정 구역이 유지되고 있고, 북위 38도선 이북인 화천군 사내면과 연천군 미산면 삼화리는 38선 분단 전과는 다른 행정 구역에 속해 있다. 지리. 본초 자오선에서 동쪽 방향으로 다음 지역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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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뎀
모뎀(, )은 정보 전달(주로 디지털 정보)을 위해 신호를 변조하여 송신하고 수신측에서 원래의 신호로 복구하기 위해 복조하는 장치를 말한다. 주로 컴퓨터 정보통신을 위한 주변기기로 많이 사용한다. 변조를 하는 이유는 전송선에 디지털 신호를 바로 보내면 신호 전달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같은 비트로 연속되면 전송특성상 신호 전달에 문제가 발생하므로 전송선의 특성에 맞추어 변조한다. 모뎀은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의 일종으로 컴퓨터의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어 전송하고, 아날로그 신호를 받아 디지털 신호로 읽어낸다. 좁은 의미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와 전화선을 이어주는 주변기기이다. 초기 모뎀은 주로 전화선을 통한 데이터 전송을 위해 사용하였다. 개인이 사용하는 인터넷망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개인이 통신망에 접속하는 것이 비용측면에서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망을 통해 개인컴퓨터와 서버와의 통신을 하게 되었다. 개인 컴퓨터와 서버 간에, 개인 인증과 망 접속을 위해 PPP프로토콜을 통해 접속한다. 하이텔 같은 망이 대표적이다. 초기 모뎀이 전화망을 통해 전송되기 때문에 주파수가 제한된다. 따라서 전송 속도에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망은 음성을 전달하는 망이긴 하나, 가청 주파수 전체를 전달하지 않고 음성의 일부 주파수만 전송한다. 모뎀의 속도는 BPS로 나타내고 초당 비트 수를 의미한다. 한글 한 문자가 2바이트(16비트)로 되어 있으므로, 16BPS는 초당 한 글자를 전송하는 속도이다. 초기 전화선 시대의 모뎀. 일반 음성 회선으로는 1990년대에 PC통신용으로 널리 쓰였다. 속도는 300, 600, 1200, 2400, 4800, 9600, 14400, 19200, 28800, 33600, 38400, 56000 bps가 있었다. 무선 모뎀. 초기에는 컴퓨터와 아마추어 무선의 무전기(RIG)를 연결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무선 모뎀이 있었다. 여기에는 간단한 저장 장치가 있어,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편지 등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1990년대 말에 들어와서는 휴대전화를 통한 자료 전송이 가능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무선 인터넷이 도입되어 무선 모뎀을 사용하면 액세스 포인트 근처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이는 FM 진동수 대역의 신호를 주고받는다. 고속 인터넷 시대의 모뎀. DSL용 모뎀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의 회선을 이용하는 HFC 방식의 동축 케이블, 광 섬유 케이블 방식의 FTTH 모뎀도 개발되어, 2000년대에 기존의 전화선을 통해서 초고속 인터넷을 값싸게 공급하는 주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재 인터넷의 속도는 수 Mbps에서 수십 Mbps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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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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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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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소스
오픈 소스() 제품에는 소스 코드, 디자인 문서, 또는 제품의 내용을 사용할 권한이 포함된다. 대체적으로 이를 오픈 소스 모델이라고 부르며 여기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나 기타 제품들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의 일부로서 오픈 소스 사용권으로 출시된다. 이 용어의 사용은 소프트웨어와 함께 기원되었으나 소프트웨어 부문을 넘어서 다른 오픈 콘텐츠 및 개방형 협업의 형태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기원. 소프트웨어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오픈 소스"라는 용어는 "자유 소프트웨어"(free software)라는 용어에 암시된 정치적 선전과 도덕적 철학을 비판했던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처음 제안한 것이다. 게다가 "프리 소프트웨어"(free software)라는 용어의 모호성(자유 소프트웨어, 무료 소프트웨어)은 비즈니스 채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그룹에는 크리스틴 피터슨, 토드 앤더슨, 래리 어거스틴, 존 홀, 샘 오크먼, 마이클 타이먼, 에릭 레이먼드가 포함되었다. 피터슨은 팰로앨토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서 넷스케이프의 1998년 1월 내비게이터의 소스 코드 출시에 반응하면서 "오픈 소스"를 제안하였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다음날 그를 지지하였고 필 휴즈는 리눅스 저널에서 이 용어를 지지하였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창립자 리처드 스톨먼은 처음에 이 용어를 채택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었다. 넷스케이프는 넷스케이프 퍼블릭 라이선스로 소스 코드를 출시하였다가 이후 모질라 공용 허가서로 출시하였다. 레이먼드는 특히 이 새로운 용어를 보급하는 시도에 활동적이었다. 그는 1998년 2월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에 이 용어의 채택을 최초로 호소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브루스 페런스와 협업하여 오픈 소스 이니셔티브를 창립하였다. 이 용어는 1998년 4월 기술 출판사 팀 오라일리에 의해 조직된 행사를 통해 더 가시화되었다. 원래 제목은 "프리웨어 서밋"(Freeware Summit)이었으나 나중에 "오픈 소스 서밋"(Open Source Summit)으로 변경된 이 행사는 가장 중요한 자유 및 오픈 소스 프로젝트 다수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는데 여기에는 리누스 토르발스, 래리 월, 브라이언 벨렌도르프, 에릭 올먼, 귀도 반 로섬, 마이클 타이먼, 폴 빅시, 제이미 자윈스키, 에릭 레이먼드가 포함된다. 이 회의에서 "자유 소프트웨어"라는 용어의 대안이 논의되었다. 타이먼은 "소스웨어"를 새로운 용어로 찬성하였으나 레이먼드는 "오픈 소스"를 찬성하였다. 이렇게 모인 개발자들은 투표를 거쳤고 가장 우세한 용어가 그 날 저녁 언론 콘퍼런스에서 발표되었다. 이전의 수많은 대형 기관들이 등장하여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의 발전을 지지하였으며, 여기에는 오픈 소스 프레임워크 아파치 하둡과 오픈 소스 HTTP 서버 아파치 HTTP 등 커뮤니티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포함되어 있다. 오픈 소스 모델과 개방형 협업. 오픈 소스 모델은 개방형 협업을 장려하는 탈중앙식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인데, 이는 "기여자와 비기여자들에게 이용이 가능할 경제적 가치의 산물(또는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소통하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참여자들에 의존하는 혁신 또는 생산 시스템"을 의미한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개발의 주된 원칙은 일반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소스 코드, 청사진, 문서 등 제품의 동료 생산(peer producdtion)이다. 소프트웨어의 오픈 소스 운동은 사유 코드의 제한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다. 이 모델은 (open-source appropriate technology), 오픈 소스 신약 개발(drug discovery) 등의 프로젝트에 사용된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오픈 소스 모델은 인터넷 포럼, 메일링 리스트,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처럼 다른 형태의 개방형 협업을 가리키는 용어 사용에 영감을 주었다. 개방형 협업은 또한 비트코인, TED, 위키백과 등 전반적인 다양한 벤처 기업들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운영 원칙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방형 협업은 동료 생산, 집단적 협업, 위키노믹스의 기저를 이루는 원칙이다. 이는 처음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로 관찰되었으나 인터넷 포럼, 메일링 리스트, 인터넷 공동체,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와 같은 수많은 오픈 콘텐츠 등의 예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또, 이는 크라우드소싱, 공동 구매, 의 일부 예를 설명하기도 한다. Riehle 등은 개방형 협업을 평등주의, 능력주의, 자기조직화라는 세 가지 원칙에 기반한 협업으로 정의한다. Levine과 Prietula는 개방형 협업을 "기여자와 비기여자들에게 이용이 가능할 경제적 가치의 산물(또는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소통하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참여자들에 의존하는 혁신 또는 생산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여러 예시를 포착하며 이 예시들은 모두 유사한 원칙에 의해 결합된다. 예를 들어, 목적의식은 있으나 느슨한 공동 작용을 하는 작품에 기여하고 소비하고 소통할 권한이 개방된 경제 가치 상품인 요소들 전반이 위키백과와 같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나 사용자 포럼, 공동체에서 관찰된다. UCC 기반 상업용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방형 협업의 예시에서는 누구든지 느슨히 공동 작용을 하는 소통하는 참여자들이 생산한 공유의 산물에 자유로이 기여하고 참여할 수 있다. 개방형 협업의 연구와 실천에 헌신하는 연례 콘퍼런스는 OpenSym(과거 이름: WikiSym)이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단체는 개방형 협업을 "평등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이며 자기조직화적인 협업"으로 정의한다. 오픈 소스 라이선스. 오픈 소스는 오픈 소스나 자유 라이선스를 통해 제품의 설계나 청사진의 보편적인 접근, 그리고 해당 설계나 청사진의 보편적인 재배포를 촉진한다. "오픈 소스"라는 용어가 널리 채택되기 전까지 개발자들과 생산자들은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오픈 소스"는 인터넷의 성장과 함께 대중화되었다. 저작권, 라이선스, 도메인, 소비자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이 발생하였다. 오픈 소스 라이선스는 소스 코드, 청사진, 설계를 정의된 조항에 의거하여 사용, 수정, 공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소프트웨어와 기타 제품을 위한 라이선스의 일종이다. 이 경우 최종 사용자와 상업 기업들은 자신들의 맞춤식 수정, 호기심, 또는 문제 해결 요구를 위해 소스 코드, 청사진, 설계를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다. 오픈 소스 라이선스를 받은 소프트웨어는 대부분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지만 꼭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 목적으로만 소스 코드의 비상업용 재배포와 수정을 허가하는 라이선스는 일반적으로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픈 소스 라이선스는 일부 제약이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코드 안에 개발자 이름과 저작권 문구를 보존할 것을 요구하거나 라이선스를 받은 소프트웨어를 동일한 라이선스(예: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에서처럼)로 재배포할 것을 요구하는 등 소프트웨어의 기원의 관점에 대한 표현에 관련해서 그러하다.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들은 오픈 소스의 정의(OSD)에 기반한 오픈 소스 이니셔티브(OSI)의 승인을 받은 것들이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코드. 일반적으로 오픈 소스는 (상업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목적을 위해, 또 원래의 디자인으로부터 수정을 할 수 있도록 소스 코드를 일반에 공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말한다. 오픈 소스 코드는 프로그래머들이 소스 코드를 개선시키고 공동체 내의 변경사항을 공유하는 협업적인 노력의 산물을 의미한다. 코드는 소프트웨어 사용권 조항에 의거하여 출시된다. 해당 사용권 조항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버전(포크/fork)을 다운로드, 수정 후 공동체에 게시할 수 있다. "오픈" VS "자유" VS "자유-오픈".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Free and open-source software, FOSS) 또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Free/libre and open-source software, FLOSS)는 사용, 수정, 배포에 어떠한 제한도 없이 라이선스된, 공개적으로 공유되는 소스 코드를 말한다. 이 완전히 제한이 없다는 정의에 관한 혼동이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자유로운"으로 알려진 프리(free)라는 용어가 "무료의"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being free to speak"의 free는 "자유로운"인데, 이는 "free beer"의 free(무료)와 동의어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리처드 스톨먼은 "오픈 소스"라는 용어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용어의 지지자들이 오픈 소스의 정의의 조항을 충족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꼭 다른 권한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조사를 위해 소스 코드가 공개되고 접근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자유-오픈"은 공용 소유(국유재산), 탈사사화(국유화), 사유화 반대, 투명한 행위(transparent behavior)와는 구별된다. 컨트리뷰션.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을 컨트리뷰션(contribution) 또는 기여라고 한다. 버그 수정, 기능 추가, 소스 코드 수정, 코드 테스트와 같은 중요한 활동 이외에도, 오타 수정, 번역, 가이드 문서 작성, 디자인 작업, 의견 제시와 같은 사소한 활동도 컨트리뷰션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컨트리뷰션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사용하던 오픈 소스를 개선한 경우 자신만 사용하면 버전 업이 될 때마다 추가로 패치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컨트리뷰션을 한다. 둘째로 개인의 개발 실력 향상과 영어능력 향상을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오픈 소스 커뮤니티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 특히 개발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셋째로 오픈 소스 활동은 공개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구직 활동 시 자신의 이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명성을 높이려고 기여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기여에 참여한다. 오픈 소스 프로젝트 구성원. 대부분 오픈 소스 프로젝트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소스가 공개되는 이유. 소스가 공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편 웹 브라우저를 예로 들어보면 과거 웹 브라우저의 전설처럼 여겨졌던 1994년 당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였던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를 MS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시장에서 밀어내고 2004년을 전후로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전체 사용량의 90%를 점유하기도 했었으며 약 20년 간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또한 인터넷 익스플로러(IE) 웹 브라우저는 독과점 문제로 이슈가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2013년을 기점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구글 크롬 웹 브라우저에 의해 우월적 자리를 내주고 나서는 윈도우 그룹의 부사장 존 벨피오레는 2018년 12월 6일 회사 블로그에서 "우리는 고객들을 위해 웹 호환성을 높이고 모든 웹 개발자들을 위해 웹 분열화를 줄이고자 크롬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도입하려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로써 지난 지속적인 익스플로러 버전별 지원 중단에 따른 사용자들의 불편과 관련해서 향후 웹 브라우저의 시장 점유율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후 현재 웹 브라우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구글 크롬 웹 브라우저는 적어도 넷스케이프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전철을 밟지않을 가능성이 높다. 크롬은 크로미움이라는 오픈 소스를 기반하고 있어서 독과점에 의해 소스 공개나 신생 상용 브라우저에 의한 경제적인 경쟁 부담이 이미 오픈 소스에 의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픈 소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대기업의 사례는 기업과 사용자와의 긍정적인 관계형성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얻은 교훈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장단점. 장점. 장점은 다음과 같다. 단점. 단점은 다음과 같다. 과학, 의학. 오픈 사이언스. 오픈 사이언스는 확인 가능한 공유된 지식의 열린 발견 과정으로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이는 프로세스와 연구가 공개적으로 공유되지 않는 회사 소유 과학, 그리고 논문이 유로화 벽 뒤에 감춰졌거나 사적 저널로 출판되는 클로드즈 사이언스와는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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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러 피 함수
수론에서 오일러 파이 함수(-函數, )는 정수환의 몫환의 가역원을 세는 함수이다. 즉, "n"이 양의 정수일 때, ϕ("n")은 "n"과 서로소인 1부터 "n"까지의 정수의 개수와 같다. 예를 들어, 1부터 6까지의 정수 가운데 1, 5 둘만 6과 서로소이므로, ϕ(6) = 2이다. 1부터 10까지의 정수는 모두 11과 서로소이며, 1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가 아니므로, ϕ(11) = 10이다. 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이므로, ϕ(1) = 1이다. 정의. 양의 정수 formula_1의 오일러 피 함수 formula_2은 정수환의 몫환 formula_3의 가역원군의 원소 개수이다. 즉, 1부터 formula_1까지의 정수 가운데 formula_1과 서로소인 것들의 개수이다. 성질. 값. 1부터 80까지의 정수의 오일러 피 함수 값은 다음과 같다. 항등식. 오일러 피 함수는 곱셈적 함수다. 즉, 만약 두 정수 formula_7이 서로소라면, 다음이 성립한다. 오일러 피 함수 값은 소인수를 통해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이를 오일러 곱 공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20의 소인수는 2, 5이므로 formula_10은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소수 formula_12의 거듭제곱 formula_13의 오일러 피 함수 값은 이다. 특히 소수 formula_12의 경우 이다. 오일러 피 함수를 통해 항등 함수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이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증명하였다. 또한,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19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만약 양의 정수 formula_20이 서로소라면, 다음과 같은 합동식이 성립한다. 이를 오일러의 정리라고 한다. 응용. 오일러 피 함수는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군론에서는 순환군 formula_22의 가능한 생성원(generator)의 수는 formula_2이다. 이는 formula_1과 서로소인 임의의 수를 사용하여 formula_22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n"각형이 작도 가능한 다각형인지, 즉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할 수 있는지는 formula_2이 2의 거듭제곱수인지와 동치이다. 즉, 이라면 이므로 정"n"각형을 작도할 수 있지만, 다른 값의 경우에는 작도할 수 없다. 특히, "n"이 소수인 경우를 페르마 소수라고 한다. 오일러 피 함수는 암호학의 RSA 암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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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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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녀
테레사 수녀(,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는 주로 인도에서 활동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다. 1950년에 인도의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라는 천주교 계통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45년간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다른 나라에서 헌신하였다. 본명은 아녜저 곤제 보()이다. 2016년 9월 4일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70년대를 통해 세계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 인도의 가장 높은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확장하여 그녀가 사망하기까지 나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과 거처, 무료 급식소, 상담소, 고아원, 학교 등을 포함해 123개 국가에 610개의 선교 단체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사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어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녀의 공인 전기는 나빈 차와가 작성하고 1992년에 출판했으며 영화와 기타 책의 주제로 활동했다. 2017년 9월 6일, 테레사 수녀와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콜카타의 로마 가톨릭 대교구의 공동 후원자로 지명되었다.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라고 불리기도 한다. 생애. 1910년에 오스만 제국령 북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 보야지우는 1919년 시 의원 자격으로 정치 행사에도 참가했다가 의문사 하였다. 1928년에 아일랜드의 라스판햄으로 이주해서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 하였다. 이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되고 테레사로 개명하였다. 그 이후 인도로 선교 활동과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로 이주하였다. 1947년, 인도 자치령이 독립하고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국호를 결정하자, 인도에 귀화해 로마 가톨릭 계열의 선교 단체인 사랑의 선 교회를 설립하였다. 1952년에 8월 22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또는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 의 번역)이라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지었다. 이때 테레사 수녀는 콜카타 시청에서 제공한 건물을 썼는데, 칼리 신전 뒤에 있었고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였다. 건물이 사용하기 편리해서 기꺼이 쓰려고 마음먹었다. 당시 힌두교도들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건물을 쓸 것을 의심해서 시위를 벌였으나, 사랑의 선 교회 수녀들이 종교에 구애 없이 복지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받아들였다. 1955년에는 9월 23일 "때의 집"(시슈 브하반)이라는 어린이 보호 시설을 개설하였고, 1958년에는 여기에 90명의 어린이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이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들을 보냈으며, 어린이들의 집에서는 이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다. 어린이들은 교육도 받고 해외로 입양되었다. 갓 난 아기는 로마 가톨릭 교도인 것을 알 수 있을 때만 세례를 주었다. 1968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커뮤니티인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개설하고, 1975년에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물"(Prem Dan)이란 이름의 장기 요양소를 만들었다. 이런 여러 사회봉사 활동 덕분에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 캘커타에서 87세의 나이로 선종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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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호서 지역의 대한제국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나왔다. 영국은 국왕이 있는 내각책임제 국가인 관계로, 그는 자신이 1960년 8월 13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에 취임할때까지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가 배출한 전세계 각 공화 국가 두 명의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와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친일파인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아무리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배경. 해위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부락(현, 아산시 둔포면 신항1리 143-1)에서 중추원의관 동야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씨 이재룡(李載龍, 다른 이름은 이봉하(李鳳夏))의 장녀인 이범숙(李範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유아기를 잠시 한성부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선조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였고,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은 당대의 고관이었다. 대한제국 시대 말기 개혁자 윤치호는 윤웅렬의 아들로 그의 당숙이었다. 윤보선의 10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선조 때의 형제 재상이었다. 9대조 윤흔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로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8대조 윤취지는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7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6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가계가 몰락하여 5대조 윤발(尹潑, 1728~1798)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고 사후에 증직으로 증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통정대부 비서원승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이 최종 관직이었고 사후에 증 이조참의와 증 의정부공찬에 거듭 추증된다. 그러나 윤득실이 일찍 사망하여 형제들은 일찍 고아가 되었지만,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윤보선의 증조부였던 윤취동의 대에 농토를 마련해 부농이 되고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종조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조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고, 당숙 윤치호가 다시 대한제국에서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다시 가계를 일으킨 조부 대에 100칸의 집을 마련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윤치영이 태어났는데,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다.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다. 외가 역시 부유하였는데 어머니 이범숙 역시 아산의 만석꾼의 딸이었다. 유년기.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先代)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 그가 어려서 자란 안국동의 자택 안동장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윤보선은 3백 석 이상을 걷는 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한 윤보선의 집은 증조할아버지 윤취동 이후 다시 아버지 윤치소가 이재와 수완에 밝아 대농토를 꾸렸다. 큰아버지 윤치오가 친구들의 빚보증을 섰다가 막대한 빚을 졌지만, 아버지 윤치소의 재력으로 그의 집안은 거지가 되는 것을 면하였다. 그의 조부 윤영렬은 삼도 토포사를 지낸 고관으로, 윤영렬이 삼남 토포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충남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하였던 그는 유아기 때 '조부가 토포사로 직인을 찍거나 먹찰 하는 것, 집안에서 사무를 보며 죄수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기억하였다. 그 뒤 집안에서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틈틈이 그들 형제를 불러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때 그는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의 전공치적과 그의 충의에 감동받았다 한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그의 고조부 대에 약주가 과하여 가세를 기울게 하였다 하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훈계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때문에 윤보선은 여행지에서나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총명하고 명석했던 그는 한편으로 아쉬울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성격적으로 다소 고집이 센 측면도 갖게 되었다. 학창 시절. 청소년기. 충청남도 아산 향리에서 지내던 윤보선은 을사늑약 체결 사건 직후 한성부로 본격 이사하였는데, 10세 때 집 근처에 있었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이 일어났을 때는 스스로 작은 용돈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이 때 그는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국이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나 조선 조정의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바란다는 것이 보도된 이후, 국민 전체가 그 헌금을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들었다. 어린 그는 헌금운동에 참여하고자 점심을 절식하고 그 값을 돈으로 타낼 작정을 하였다가 할머니와 어머니가 염려하게 하였다.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한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한일 합방 후 귀국해서 1년간 경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고 철학박사라는 점에 이끌려 그를 존경하기도 했으나 1950년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그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선조들은 당색으로는 서인과 노론 계열이었는데, 서얼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윤치소나 조부 윤영렬로부터 가계와 선조들의 이야기를 훈육받고 자란 그는, 양반가의 후예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출소학교 5학년에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 시절의 윤보선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 1913년 윤보선은 소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東京)로 건너가 중학교이던 스키치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 그는 게이오 의숙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2학기를 배우고 그만두었다. 모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토 히로유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던 그는 신념적으로 반일주의자, 반사회진화론 주장자가 되었다. 또한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사상은 비인간적인 견해라며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또한 군주나 통치자가 아버지이고 백성, 국민은 자녀라는 주장에도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1913년 일본 정칙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그해 말 일본 게이오 의숙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기도 하다가,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드러내놓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학창시절의 그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915년 일시 귀국하여 민영환과 6촌인 민영철의 딸 여흥 민씨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915년말 게이오 의숙 2학년을 중퇴하고 부산항을 통해 되돌아왔다. 귀국과 망명 결심. 그는 어렵지 않은 유학생활을 하였다. 집에서 월 25원의 학비를 부쳐오므로 학업에 별다른 곤란은 없었으나 당시 그의 관심사는 중국의 신해혁명에 쏠려, 학업에 정진하기 힘들어서 귀국하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 고 한다. 귀국이후 한동안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는 신문에서 신해혁명 관련 기사를 찾아서 읽곤 했다. 그는 여운형을 만났는데, 당시 여운형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려 하는 청년들을 중국으로 비밀리에 망명시키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집안에서 안다면 반대를 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며 자금을 모았다. 바로 상하이로 가서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면 집안에서 반대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그는 아버지 윤치소에게 미국으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근처에 사는 어느 양반가의 자제도 기독교 집안이 된 뒤,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목사가 된 것을 그의 부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그에게 상하이로 갈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청년기. 중국 망명 초기.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가 중국 대륙으로 건너 가고자 희망할 때 중화민국에 있던 여운형이 귀국하였다. 그는 청년회관을 통해 여운형의 소재지를 파악, 그가 머무르고 있던 한성은행 사무원의 집을 찾아가 중국으로 갈 의향을 밝혔다. 그의 뜻을 들은 여운형은 윤보선의 망명을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혁명을 하러 상하이로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 윤치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신학을 한다는 핑계를 댔다. 아버지 윤치소의 친구들 중에는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목사가 된 이들이 있었고, 그는 아들이 같은 과정으로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여권을 얻기 위해 상해를 경유해 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아들의 출국을 허락해 주었다. 이후 윤보선은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는 배편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가 출국한 뒤에야 그의 집안에서는 윤보선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승만이 궤변으로 그를 현혹하여 버려놓았다며 원망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당숙 윤치호, 아버지 윤치소, 백부 윤치오 등은 이승만과 인연이 있었는데, 그가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한 뒤에야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게 된다. 독립운동과 상해 생활. 1917년봄 상하이 도착 후 며칠뒤 항주에 요양중인 신규식을 찾아 갔다. 이후 신석우, 박찬익, 이시영, 이동녕 등 임정 요인들을 찾아가 다시 이들의 소개로 중국혁명의 중진들을 소개받았다. 상하이의 중국인 강도와 조선인 강도들의 존재를 염려한 신규식은 자신의 집, 상하이 시 어양리 5호에 있는 집 2층 다락방을 마련하여 그의 거처로 주었다. 1921년 영국으로 유학 갈 때까지 어양리 다락방에서 생활하였다. 1917년 신규식이 1912년에 설립한 신아동제사의 회원이 되었다. 이어 신규식, 김규식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淸年黨)에도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3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에 특별 선출되었다. 당시 의정원 규약에는 '만 23세 이상의 한국인 남녀는 의정원 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는 것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규식, 김규식, 여운형 등은 나이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그의 의정원 의원 피선거권을 관철시켰고, 심사 끝에 그는 경기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21세로 임시의정원 의원들 중 최연소자였다. 임시정부 활동. 임시정부 거사자금 운반책.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19년 여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모금해오라는 임정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지시를 받고 국내 잠입을 계획한다. 이승만과 이시영, 김규식은 국내에 있던 이상재, 윤치호, 윤치소 등에게 자금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띄웠고, 이들은 윤보선의 동생 윤완선 등에게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서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으나, 노선을 바꾸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하기 직전 그는 중국 법무장관 서겸(徐謙)이 주일 중국대사 앞으로 쓴 소개장을 받고 서겸의 조카이자 일본으로 유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으로 가장하여, 변장 후 일본 경찰들을 피해 배편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 갔다. 국내에 잠입하면 신분노출을 우려해 비밀리에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재일본 중국 기독교 청년회 간부 집에 은신하며 동생 윤완선과 접촉,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활동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국내로 잠입한 윤완선은 집안의 사재 3천원의 자금을 마련해 왔고 윤보선은 이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 후 윤보선은 중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자금 조달 중책을 맡고 일단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차림새가 너무도 말쑥한 신사였다'고 한다. 윤치영이 도쿄 YMCA 회관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데 누가 찾는다고 해서 나가 보니 해위가 정말 말쑥하게 영국신사처럼 쏙 빼입고 거기 섰더라는 것이다. 그때 윤치영은 그곳에 있던 몇 사람과 2.8 동지회를 구성 해서 활동하였다. 2.8 독립 선언에 가담한 일로 윤치영은 일본 경시청의 감시를 받던 때인데 그렇게 정정당당히 나타나 너무나 놀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 걱정 마시라는 표정으로 빙끗 웃으며 들어와서는 포켓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주는데 그 때 중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서겸(徐謙)의 서한이었다고 한다. 서겸은 당시 중국 혁명정부의 법무부장관을 지냈는데 주일중국대사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사람은 내 조카인데 볼 일이 있어 일본으로 보내니 모든 여행길에 편리를 도와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그곳에서 공부하던 집안 사람들은 모두 떨었다고 한다. 윤일선 박사, 동생 윤완선 등도 교토에서 올라왔는데 일단 윤보선이 오라 해서 왔지만 그들도 떨었다고 한다. 그 때 윤완선은 형의 전갈을 들고 한국으로 들어가 부모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그때 돈 삼천원을 마련해 와 윤보선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해위는 동생에게서 돈 삼천원을 받아 들고 다시 상해로 가서 이승만 박사에게 전했다고 한다.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경에 있는 백관수, 유억겸, 김준연, 김도연 등을 만나고 윤치영과도 만났다. 이들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의정원 의원 재선 및 언론활동 보조. 자금을 싣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19년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다시 피선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연령 미달로 의정원 의원 피선거자 자격 이 없었으나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승인으로 20대 초반에 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래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신규식, 이시영, 신익희 등의 충고로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상하이 체류 중 신규식은 그에게 해위 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신규식이 그에게 해위(海葦)라는 호를 준 것은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 1920년 10월부터는 신규식이 1917년부터 창간하던 주간잡지 《진단》지의 편집을 도와주었다. 진단에는 장졔스, 쑨원, 천두슈 등 중국 명사들의 칼럼과 논문, 기행문 등도 수시로 발표되었다. 영국 출국 전까지 신규식의 진단지 발간과 편집일도 도와주었다. 1921년 6월 고국에 들러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영국으로 간다. 뒤에 그는 스승 신규식과 인척이 되는데, 이는 신규식의 아들 신준호와 그의 둘째 딸 윤완희의 결혼으로 사돈이 된다. 신규식의 딸 신명호는 다시 독립운동가인 민필호와 결혼하여 후일 민필호, 김준엽 등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영국 유학 생활.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1921년 6월 경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학생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 배로 출항하였다. 이때 선상에서 임정 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인들의 승선을 눈치챈 일본 관헌들이 호출해 중국언어로 대화하라고 시켰고. 윤보선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하여 중국인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이동휘의 정체가 탄로나 하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3등 선실에 숨어서 42일만에 마르세유에서 하선, 프랑스로 가는 열차를 탑승했다. 이후 정기 여객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는 의학공부 중인 그의 당숙 윤치왕이 와 있었다. 영국에 도착하여 화물을 취급하는 하물표를 발급받으려다가 거절당하고, 당숙 윤치왕(尹致旺)을 만나 영국에 도착했다. 당숙인 윤치왕이 공부하던 영국에서 체류하며 우드블록 대학에서 약 1년동안 영문학을 공부하고 중퇴하였다. 그 뒤 영국 글래스고의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버밍엄으로 건너가 퀘이커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후 다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3개월간 수학하다가 다시 에든버러 대학교로 옮겼다. 에든버러 대학 재학 시절.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선택·전공하였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로는 인간으로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은 정치학이나 신학 보다는 순수과학일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재학 중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로 신경쇠약에 걸려 2년간 병중에 있었다. 의사는 절대휴양을 위해 귀국을 처방하였으나, 학업을 마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으로 귀국권유를 사양했다. 이후 병으로 2년간 휴학하였다. 병으로 2년간 휴학한 기간을 합쳐 6년 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이후에도 에든버러를 근거지로 하여 구주를 순방하였다. 대학재학 중 3년간 한반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수학하였으나 일본인 학생들의 접근을 피하고 멀리하였다. 영국 체류 중 그는 꾸준히 기금을 마련하여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구미위원부로 100불씩 송금했다가 일본 경찰의 첩보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외 유학생 신분이었고 일본 조계나 일본 영사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으므로, 일본 경찰 역시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없었다. 윤보선은 신앙이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해야 하느냐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를 구원해야 하느냐를 두고 오래 고민하였다. 결론은 신앙이 사회를 구원하여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는 적극 참여해서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윤보선은 영국의 대학과 석사학위 과정을 배우면서 정치인들과도 어울려서 지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거나 맡겨진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를 밥먹듯 했다. 에든버러 대학 유학 시절 6~7명의 일본인 유학생들과는 졸업할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인들과는 대화 한마디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 졸업과 귀국. 윤보선은 1930년 12월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에서 고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이후 독립운동의 장소로 미국과 중화민국 상하이를 고민하던 중 졸업했으니 집에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집에는 졸업사실을 전하지 않았으나,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 2년간 머물렀던 장덕수가 귀국후 윤보선 댁에 들러 아버지 윤치소에게 그의 졸업사실을 전했던 것이다. 아버지 윤치소를 비롯하여 문중에서는 그에게 귀국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후 조선총독부 왜경으로부터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집에서는 여비를 보내며 귀국을 독촉하였고, 귀국하기 싫어했던 그는 귀국 대신 구주 여행을 떠났다. 두 번째 여비를 발송했을 때도 유럽여행을 하다가 세 번째 여비와 함께 '부자지정을 생각해 다시 여비를 보내나 다음에는 여비를 차라리 보내지 않는다'는 최후통첩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지내던 그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1932년에 귀국했다. 유학 6년 만인 1932년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부산역에 도착한 후, 안내원의 소개로 여관을 잡게 되었으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은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안내원의 집안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묵게 되었다. 당일 서울로 도착전보를 보내자, 아버지 윤치소와 어머니 이범숙, 딸 완구(玩求), 완희(玩姬) 등이 부산까지 내려왔다. 귀국 직후. 귀국 이후 그는 조용히 지냈다. 그의 생활은 대부분 조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러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았고, 안국동 집밖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분류된 그는 일본경찰이 찾아와 그의 동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한시간, 두시간, 일본경찰이 자리를 뜰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일본인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다. 한동안 몇몇 신뢰 가능한 지인들을 통해 이승만의 은신처로 방문, 이승만을 간간히 만나곤 했다 한다. 1937년 아내 여흥 민씨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10년 이상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1936년 어머니 이범숙의 환갑연을 기념하여 당숙 윤치호가 세운 신항리 감리교회에 특별히 1500원을 헌금하여 교회를 개축하게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감리교 신자임을 들어 참배를 거부했다. 1938년 5월에는 월성소학교에 평당 시가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1938년부터 그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에 칼럼, 기고문 발표 등으로 소일하였다. 태평양 전쟁, 은둔생활. 1940년대 이후 그는 외부출입을 줄이고 가택에 칩거생활하였다. 때로는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별장에 내려가서 지내기도 했다. 미니 골프장을 갖추고 석왕사(釋王寺)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이 별장은 은둔하기에 너무나 좋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1940년 1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는 성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부친과 숙부들의 설득에도 고집을 부렸던 그는, 당시 그는 아내와도 사별한 상태였고 딸만 두 명 있었으므로 자녀들에게 가해질 불이익 같은 것에 쉽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1943년 2월 폐렴(肺炎)을 앓았다. 부친상 직전 아버지 윤치소가 있는 사랑방이 추운가 하는 걱정으로 야밤에 일어나 부엌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오한을 느낀 것이 그대로 폐렴으로 발전하였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에는 엽권연을 입에 물고 있다시피 할 정도로 애연가였다. 그러나 폐렴을 계기로 담배를 꼭 피워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뒤 담배를 꼭 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자 그는 금연을 하였다. 1942년 이후 숙부 윤치영이나 송진우, 김성수 등으로부터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접하였으나 그는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문중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거절했던 그는 바깥 출입으로는 기독교 선교 활동과 강연, 문중 종친회 관련 행사 이외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철원군 어운면 월성리의 월성소학교에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후반 그는 집안에 칩거하면서 함경남도 안변군 사기리에 있는 문중의 별장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광복 직후. 한민당 창당과 임시정부 환영회. 1945년 8월 16일 그는 이인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한국국민당은 다시 원세훈의 고려민주당과 통합해 조선민족당이 되고 9월에 조직된 한국민주당에 흡수된다. 한편 그는 상하이에서 본 천두슈계의 중국 공산당을 목격한 적이 있어 평등주의와 폭력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1945년 8월 8·15 해방이 되자 윤보선은 숙부 윤치영이나 부친 윤치소, 당숙 윤치호 등과는 달리 그는 친일경력도 없고 영어에 능통한데다가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정치에 투신하기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후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신사 참배령에 불응하는 등의 행동으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 1945년 9월 송진우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어 임시정부 환영대회 개최 및 장소, 비용 부담 등에 참여하였다. 이에 1945년 9월 16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윤보선은 집과 기타 비용을 제공했고, 한민당의 회합은 윤보선의 집에서 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회합장소였던 그의 안국동 사저는 안동궁(安東宮) 또는 안동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한민당 총무 선출에서 떨어지자 한민당은 그를 한민당 서울시지구당을 맡겼다. 이후 그는 한민당 중앙집행위원과 한민당 서울시당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45년 10월 미군의 한반도 상륙 뒤에는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직을 지냈다. 동시에 미군정청 행정자문위원과 미군정청 금융경제위원회의 고문도 겸직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정계 입문. 9월 송진우가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개설하자, 그는 국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0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하였다. 1945년 12월 9일 그의 5촌 당숙 좌옹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려 심한 비판 끝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도 아니었고 문중에서 창씨개명 할 당시 창씨개명하지 않았으며, 임시의정원과 임정에도 참여하였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12월 30일 송진우 피살 소식을 듣고, 그는 아침 6시경 제일 먼저 송진우의 원서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그 뒤 김구, 김성수 등의 주도로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소극적으로나마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였다. 5월 27일에는 한민당 지역유세대 조직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아산군 일대를 다녔다. 1946년 6월 15일 저녁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을 맡았고, 미군정청에서 임명한 경기도지사 고문직에 피선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본부 협의원에 지명되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지도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2월 4일에는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정부로 개편되자 남조선과도정부 농림부, 상공부 고문이 되었다. 1947년에는 우남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서정주 등과 함께 이승만 일대기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그에게 어떤 직위로든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윤보선은 사회단체 활동과 민중일보 사장직으로 만족하겠다며 번번이 사양하였다. 7월 4일 이용설 등과 함께 외국의 정세를 연구하는 국제정세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부터 1948년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영국 유학 경력을 인정받아 10월 8일에는 영국과의 친선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영협회(韓英協會)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1948년까지 재직하였다. 1947년 12월 장덕수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바로 빈소로 찾아갔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12월 13일에는 유엔 한국파견위원단(UN한위) 환영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어 유엔의 한국위원회 위원들의 영접을 준비하였다. 정부수립과 제헌의원 낙선.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 김구, 프란체스카 도너, 김병로, 엄항섭 등과 함께 회의에 참관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노선을 줄곧 지지해왔다. 1948년 4월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타났을 때 그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했다. 그 해 2월에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사실상의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단체를 조직한 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출마를 위해 서울시당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충청남도로 내려갔다. 1948년 5월 10일 5·10총선거 때 고향인 충남 아산시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총선 낙선 이후 한동안 칩거하였다. 그러나 칩거 20일만인 5월 30일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비서관이 되어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되었으나, 7월 국회의장 비서실장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그는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복귀하여 신문사 경영 활동을 하고 있었다. 7월 22일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그에게 장관직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민중일보사의 사주로 있겠다며 입각제의를 사양하였다. 초대 내각 구성을 놓고, 내각을 조직한 사람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자 그의 숙부였던 윤치영이었기 때문에 시중의 험담과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입각 제의를 모두 사양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호의를 거부한다며 서운한 의사를 나타냈으나 그는 향후 다른 직책으로 그를 도와주겠다며 안심시켰다. 1948년 8월 15일 윤보선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주중국 대사 권유를 받자 그는 가정 사정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기붕을 통해 다시 주일본공사직을 요청했고, 윤보선은 자리를 회피하며 주일본공사직 요청은 불응하였다. 세 번째로 상공장관 임영신을 통해 미국 대사직을 권하며 국무회의에서 이미 결의되었다고 하였으나, 민중일보를 통해 할일이 많다며 이 역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 그의 외교관 파견을 종용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허정과 이기붕을 보내와 주 중화민국 대사, 주 일본 대사, 주 미국 대사직을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1948년 12월 8일 서울에서 조직된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정치 활동. 서울시장 재직. 서울시장 취임. 48년 12월 윤보선은 서울 시장에 임명되었다. 허정(許政)이 각의에 의해 서울시장 임명을 전해오자, 그는 서울시장직을 피하려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별장에 은둔하였으며, 이를 피하려 했으나 신문을 보고 서울시장 발령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 삼촌 윤치영(尹致暎)과의 관계를 고려, 시장직을 피하려 하였으나 숙질간일지라도 공과 사는 구별되는 것이니 구애받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서울시장으로 부임하였다. 신문기사에 서울시장 임명 기사를 보고 마지못해 내려와 서울시장직에 취임하였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2대 서울 시장을 지낼 때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 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 각 자치구 단위로 쓰레기를 수거하여 성과가 좋은 구에 포상을 내렸다. 동시에 시내 방역 소독 활동 역시 적극 추진하고 일일이 보고받고, 위생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청소상태 등을 직접 점검하여 청소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또한 동사무소에도 국문 보급반을 설치하게 하여 성인들에게 한글 정도는 동서기들이 직접 가르치게 했다. 또한 매점매석을 단속하고, 식량 배급을 1가구별로 받도록 정리, 기록케 하였다. 서울시의 청소 시장. 그가 서울시장으로 부임할 무렵의 서울특별시는 거리에 쓰레기와 인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자동차나 열차, 전차에서 혹은 도보로 길에 투척한 쓰레기와 인분, 주취후 구토물로 몸살을 앓았다. 윤보선은 시장이 된 뒤 공무원과 단속요원, 경찰들을 통해 이들을 단속, 정리 및 정리를 시도하였다. 그는 '당시 시장으로서 제일의 당면과제는 다름 아닌 청소문제였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런데 시청에 가서 보니 그때까지는 청소가 큰 이권으로 화해서 각구에서 청소기재와 도구를 개인에게 청부를 주고 있었다. 이 청부를 맡은 개인들이란 꽤 유력자들이었고 그중에는 그와 친분이 매우 두터운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책임수행은 않고 국고금만 축내며 이권화시키고 있었는데 모든 원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이 청소권을 모두 회수해서 서울시의 직영으로한 후에 시장인 그가 직접 감독하여 전 시청직원이 총출동하고 각 구마다 책임제로 경쟁을 붙여 쓰레기 반출작업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버스 승강장과 철도역, 공원 등에 공중 쓰레기통을 설치하여 보급하였다. 당시 윤보선이 보급한 공중 쓰레기통이란, 말뚝을 박고 큰 양동이를 걸어둔 것이었지만, 이는 공중 휴지통 설치의 시발점이 된다. 후일 그는 '이 청소작업은 단시일 내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반출되는 쓰레기는 마치 폭풍에 씻겨 내려가는 형국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서울이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서의 나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만들어 한 때 청소시장이란 별명을 듣게까지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청소문제를 수습한 후 그는 시민에게 다시 호소하여 재래의 자기 집 문전을 알뜰히 하는 미풍을 되살리도록 촉구하였다. 시민들의 호응은 말할 것도 없고 각 학교와 각 부인회 그리고 경찰관들마저 비를 들고 나서게 되어 청소작업은 명실공히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시청 행정의 투명화. 그는 시정의 투명성을 선언하고, 서울시 시정사항을 일체 공개하고 공고문을 붙였다. 서울시 시정 공개는 이후 지방행정 사항을 공고, 공시하는 것의 모범 사례가 되었다. 역사 이래로 신라, 고려, 조선왕조시대 이후에도 일부 교서만이 반포되었고 지방 수령의 행정사항은 대부분 공포되지 않았다. 청소 문제를 일단락 짓자 그는 그 다음 착수한 것은 서울시청이 복마전이라는 악명을 일소하는 것과 민원서류의 속결문제였다. 그는 이러한 지방 수령과 이속들의 독단적인 결정이 부정부패와 담합, 암투를 불러오는 요인이라 지적하고 모든 행정사항을 관보 또는 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의 게시판에 공개할 것을 지시, 시행하였다. 시정 사항이 공개되면서 복마전이라는 비아냥은 사라지게 되었다. 신생활 운동. 서울시정이 복마전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자 그는 신생활운동을 본격 전개하였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신생활 운동이라고 하였다.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꼭 실현을 보고자 했던 것인데, 그 실천단계에 들어설 때 상공부장관으로 발령이 나게 되어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라고 했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취임 초기부터 양복을 보급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취임 초 직원들과 구청, 동사무소 서기들을 통해 양복과 미국에서 반입된 의류들을 보급하였다. 이때 활동하기 편한 운동화도 시중에 보급하였다. 윤보선은 생활의 개량, 의복 개량, 위생상태 점검 등의 시정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재래의 가정생활에서 모순되고 불편한 여러 면을 의식주 전반에 걸쳐 개혁해 보려 했던 것인데 특히 한복의 개량과 주택의 개량이다.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한다는 것이 주안점이었다.'고 하였다. 양변기 보급.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 하겠다고 공포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재직 당시 관공서와 기타 공중화장실을 대부분 푸세식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교체, 개조하였다. 따라서 흉한 대소변 얼룩과 여름철 파리, 모기 등의 번식을 차단하고 주변에 대소변 악취를 대부분 제거하였다. 사람들은 버튼만 누르면 물이 나와서 변기가 흘러가는 것을 희한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또한 악취가 사라진 것을 놀라워했다. 윤보선은 자신이 1920년대, 30년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수세식 변기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것이 종전 이후 유럽에 보편화되었음을 설명했다. 서울시장 재직 때 보급한 수세식 양변기들은 6.25 전쟁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그의 수세식 양변기 보급은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비록 서울시에 한한 것이었지만 수세식 양변기는 그 후 윤보선이 대통령이 된 뒤 1960년에는 경기도로 확대 시행시켰다. 그리고 1982년 이후에 와서는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시장 재직 후반. 윤보선은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에서 서울특별시장으로 지낸 기간은 나의 역대 관직생활 중 가장 보람있고 만족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장직도 내가 선뜻 응해서 취임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서울시장은 당시 나로써는 퍽 떠나기 싫은 자리였다 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서울시장 재직 중 공덕귀(孔德貴)와 재혼하게 되었다. 어머니 윤명사(尹明師) 가 덕수교회 목사 최거덕(崔巨德)에게 아들의 혼사를 부탁하자, 최거덕 목사는 다시 한국신학대학장 송창근(宋昌根)을 통해 공덕귀와 중매를 섰다. 안동교회는 윤치소 등이 주도로 설립한 교회였다. 공덕귀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의 만류로 중단하고, 윤보선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혼수는 최 목사 사저에서 마련했고, 결혼식은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하에 간소하게 했다. 박사 과정을 밟으려 유학하려던 공덕귀는 최거덕 등의 권고로 그와 결혼하였다. 공덕귀는 세 아이를 낳았는데, 곧 장남 윤상구를 낳고, 뒤이어 둘째 아이는 6.25 전쟁 중 대포 소리에 놀라 유산하였고 셋째 아들 윤동구를 연이어 낳아 주었다. 아들을 바라던 그의 어머니 이범숙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1949년 2월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이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는 민주국민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민국당원이 되었다. 민주국민당 창당 직후 그는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6월 상공부장관이 되면서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직은 사퇴하고 평당원이 되었다. 1949년 3월 12일 제9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3월 18일 고려역도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한국 전쟁 직후. 상공부 장관 시절. 1949년 6월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전임 임영신 장관이 상공부내의 유력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일로 뇌물수수의 누명을 쓰고 물러났으므로 윤보선은 상공부장관직을 거듭 고사하였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임영신이 독직, 뇌물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아무도 상공부장관직에 쉽게 앉으려 하지 않았고, 윤보선 역시 누차 사양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상공부장관직을 임명하고 허정을 통해 통보하였다. 부인 공덕귀는 '나는 어디 갔다 오다가 벽보를 보게 되었는데 "상공장관 윤보선"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하였다. 거듭된 정부의 요청에 공석으로 둘수 없다고 본 그는 상공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상공장관이 되던 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누구든 이권 운동을 한다면 나는 이 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장관직에 임했다. 그는 상공부 장관으로 출근하던 날부터 도시락과 함께 손 씻을 비누까지 싸들고 갔다. 그는 아내 공덕귀에게 부탁하여 손수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고, 누구에게도 식사 대접 한번 받지 않는 고집을 보였다. 전임 장관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는데도 정권 실세 유력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뇌물수수 누명을 쓴 것을 그는 늘 신경쓰고 각별히 염두에 두었다. 그는 사소한 종이 한장도 사적으로 쓰지 않았고, 비품과 치약 등도 손수 준비해서 다녔다. 또한 저녁식사나 선물 등도 일체 거절하였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라고 밝혔으며, 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라고 회상했다. 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 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상공부 장관 재직 중 두 가지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다.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이태환 경질문제였다. 그 동안 외자청을 거쳐 상공부로 와서 고무조합에 배정되어 오던 생고무를 금융조합 연합회가 이승만 대통령을 움직여 상공부 장관 재가 없이 임의로 처리했고, 그 명분은 짚신을 신는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신기겠다는 명분으로 처리되었다. 각료 사퇴와 야당화. 그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며 이권이 집약된 상공부장관직을 바르게 수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공부 일을 놓고 이승만과 의견이 엇갈리면서 고집센 이승만 대통령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사사로운 대접 한번 받아본 일이 없었으므로 이승만의 부당한 인사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1950년 2월 25일 대한축구협회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3월 23일 UN한국위원회의 초청으로 출국, 유엔을 방문하고 4월초에 귀국했다. 1950년 초부터 경전사장으로 있던 이태환을 미워한 대통령 이승만은 그를 해임하려 하였으나, 윤보선이 볼때 해임이유가 없어서 취체역 회장으로 전임시켰다. 이에 이승만이 진노하여 그 후 책상에는 윤보선은 내말을 안듣는 사람이라고 메모를 해 두었다 한다. 또한 이승만이 한민당계 정당을 멀리하고 배척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그는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 것을 촉구했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윤보선이 그의 숙부인 윤치영이 자신에게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청탁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멀리했다. 실망한 그는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결별 선언을 계기로, 1920년대부터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숙부 윤치영과 멀어지게 된다. 그는 그 대로 한민당을 탈당한 윤치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윤치영은 윤치영 대로 그가 이승만 박사에게 대든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던 그는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무회의가 공전하자 흥미를 잃어오던 그는 1950년 5월 9일 상공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장관직은 5월 10일 국회에서 사직처리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를 거쳐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에 선출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충청남도 아산에서 민주국민당 공천으로 입후보,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그가 한민당 당원이고 이조 양반가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반감을 가진 유권자들이 존재하였다. 6월 한국 전쟁 직후 그는 관용차량으로 대전까지 내려갔다가 대구로 따라 이동했다. 그는 가족들을 두고 홀로 대전을 경유해서 피난지까지 내려갔고, 그의 가족들은 아내 공덕귀 등의 인솔로 그의 집안에 있던 자동차로 아산을 거쳐서 부산까지 피난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 1950년 6월 5일 허정, 이윤영, 김도연 등과 함께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1월에는 정부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정위원의 1인으로에 피선되었다. 그해 1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되었다. 12월 17일 부산에서 사회부장관 허정을 중심으로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가 결성에 참여,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고, 바로 협의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51년 상이군인신생회의 회장으로 초빙되었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당시 정부와 국군의 과잉진압과 학살을 무조건 공비와 내통한 자들을 사살한 것이라며 합리화하는 이승만의 태도를 보고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이승만이 우익 단체들을 비호하느라, 사건을 비판하는 자들을 불순한 의도를 가진 공산주의자로 몰자, 윤보선은 억울하게 죽기만 하면 공산주의자로 환생하느냐며 이를 비판, 언쟁끝에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 대한적십자사 총재 시절.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윤보선에게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으라고 했다. 1950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한 그는 전쟁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심하여 주로 상이군경과 일반 전재민의 구호물자 공급,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관계 일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고 가는 곳마다 정부 비난의 소리가 높아만 갔다. 어느날 그는 장덕수의 미망인 박은혜와 함께 수영비행장에 갈 일이 있어 동행했다가 도중에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걸인 군상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은 국민방위군들이었다. 옷은 다 해지고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얼굴은 모두 부어 있는 상태였다. 많은 청년들을 그토록 떼거지로 만들어 병들고 죽어가게 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들은 다수가 목숨을 잃고 살아 남은 사람들조차 굶주림과 병고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그는 즉시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이승만에게 목격한 대로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아! 윤 총재도 세상 사람들 모략에 걸렸군."하더니 장장 한 시간에 걸쳐 변명만 늘어놓았다. 나는 내심으로 이 박사도 이제 큰일났구나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 그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발생이 가능한 일을, 그것도 직접 목격하고 보고하는 내용을 믿으려 하지 않다니 원망하기에 앞서 불쾌감 마저 들었다."고 회상하였다. 1951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 자격으로 일본을 답방하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그해 2월 한정(덴마크) 문화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재야정치인이 되었다. 7월 18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퇴했다. 1954년 5월 10일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 종로갑구에 출마, 당선되었다. 그해 9월 국회에 '농림업진흥의 긴급성에 관하여'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과의 결별.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윤보선에 의하면 '이 대통령의 독재가 강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한다. 그는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개정이란 당치도 않은 억지를 써서 독재의 뿌리를 내리려 하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라는 평을 내리기로 했다. 이박사와는 정치적으로 하관 노릇을 했고 지난 날 혁명 선배로 애국하는데 도와 왔으나,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사태에서는 그와 일할 수 없다고 절실히 느껴 정치적인 결별을 하기로 작정했다. 1952년 9월 1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직했다. 윤보선에 의하면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4.19 혁명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 윤보선은 '회고하면 내가 이 박사와 결별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이승만과의 오랜 감정대립 끝에 결국 그와 결별하였다. 그는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는 것도 내심 불만이었다. 이승만과 친위 세력의 한민당계열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도 그가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의 독단에 의해 국무회의는 공전하기 일쑤라 흥미를 잃어오던 나로써는 사임해야 할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50년 5월 사임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윤보선은 이승만이 한민당을 팽하고 독립촉성중앙회를 설립한 것, 그밖에 윤치영, 이인(李仁) 등을 중심으로 친위정당인 민주국민당을 조직되자 국민당을 편애한 것, 1951년에는 이범석, 이기붕 등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사상은 올바른 민주주의 사상이 아니라고 봤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대종교 신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불만이었다. 이승만이 당숙 윤치호의 문하생이라는 점과 아버지 윤치소, 삼촌 윤치성과의 친분관계, 당시 삼촌 윤치영이 이승만의 최측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갈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일민주의 사상, 국민 방위군 사건에 대한 편협한 대답과 부산정치파동에 반감을 가진 그는 공개적으로 이승만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1952년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4년 5월 서울 종로구 갑구에서 민의원 후보에 출마하였다. 그는 종로 갑구에서 처음 출마했기 때문에 무척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박순천씨가 여성이어서 전 유권자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동정표를 몰아줄 것인데 남자는 12명이나 되니 절대 불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일찌감치 당선자를 예상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선거를 하려면 같은 조건에서 공정하게 상대해야지 여자라는 이유로 특혜가 가당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종로 갑구에는 박순천, 주요한, 장후영, 유석현 등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13명이나 출마하여 전국에서 최대의 격전지로 꼽혔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박순천과 주요한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3대 민의원의원 시절. 3대 민의원의원이 된 윤보선은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와 민의원 외교분과위원을 맡았다. 당초 그는 원내총무 지명을 극구 사양하였는데, 당에서는 그의 거부의사에 상관없이 원내총무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원내총무에 지명되고도 요양을 핑계로 부산으로 내려가 끝내 사퇴하고 만다. 그는 민주당 서울시 종로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신익희, 장택상, 조병옥 등이 술자리에 갈 때면 자신은 기독교 신앙인임을 들어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부하였고, 증조부 윤득실이 술을 즐겨서 가산을 탕진, 할아버지 윤영렬이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훈계한 것을 이유로 들어 술자리 참여를 거부했다. 회식과 술자리 불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술자리에서 회자화되고 언급되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성 의원들과 기독교도 의원들도 회식이나 술자리에 참여하여 술을 마셨으므로 그의 술자리 참석 거부, 회식 거부는 독특한 취향으로 취급되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서 그는 김도연 등과 함께 국회 경제분과 위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1954년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자 호헌동지회에도 참여하였다. 1955년 2월 김성수가 사망하자 그의 국민장 장례식을 지켰다. 6월 김형근(金亨根) 내무부 장관의 서울시내 판자집 철거 정책에 반대하여 김도연, 민관식(閔寬植), 임흥순(任興淳) 등과 상의한 뒤 판자촌 철거는 민생을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이 창당된 후, 그는 민주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이어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조병옥, 김도연,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5년 11월 민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뚜렷하게 색채를 나타내지 않고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당내 신구파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내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1956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출되고, 1월 24일에는 신병을 이유로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직을 사퇴하고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 간사가 되었다. 5월 30일 민주당 중앙당 간사직을 사퇴했다. 1956년 9월 7일 서울 재동국민학교에서 특별 강연을 하였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어 경찰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당내 활동을 하면서 그는 민주당 구파였지만 특정 파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색채나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당무에만 전념했는데, 조병옥은 그에게도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번은 조병옥이 '언젠가는 윤보선이 전면에 나서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4대 민의원의원 시절. 1957년 10월 19일 서울 중앙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중앙의 회의에서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다시 유임되었다. 이후 그는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종로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이래 그는 민주당 서울시 지구당과 종로구 지구당을 맡아보았다. 그런데 종로구 지구당은 그의 표현대로 지구당 모임 한 번을 제대로 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자발적인 후원자들의 존재로 당을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두고 "조직도 당원도 없는 그에게 언제나 선거 때면 몰표가 쏟아져 나오고, 그렇다고 당선시킨 후에는 무슨 이권 운동이나 폐를 끼치려는 사람도 일체 없고 하다 못해 '적은 돈이나마 보태 쓰라'고 금일봉을 보내오는 사람이 많았으니 어찌 평생을 두고 감사해 마지 않으리요."고 회상하였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신익희, 조병옥이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일약 민주당 구파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1959년에는 민주당 상임위원에 추대되었고, 9월 8일 민의원 각분야 상임위원을 선출할 때 민의원 외교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초반 당시 조병옥 대표의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장면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에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자 민주당 신파에서는 윤보선에게 장면의 러닝메이트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차례에 걸친 제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양하였으며, 이후 조병옥 대표가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조병옥 대표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 부통령이 부통령 후보에 선출되면서 신파의 윤보선 러닝메이트 영입 시도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11월 2일 서울 중앙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당 중앙위 의장에 재선출되었다. 4대 민의원에서 그는 주로 세무, 재정 등에 대한 분야에 대한 질의, 안건을 제출하였다. 그러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1월 2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 선출과 함께 이뤄진 최고위원 개선에서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과 함께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초 최고위원회는 조병옥과 백남훈 등 구파 2명, 장면, 박순천, 곽상훈 등 신파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파의 강력한 요구로 구파 위원을 한 명 추가하기로 하면서 그 자리가 윤보선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당초 구파 내에서는 김도연과 유진산이 새 최고위원에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별로 야심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 받지 않아 신파의 견제를 가장 덜 받던 윤보선이 최종 낙점된 것이었다.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 1959년 11월 27일 서울 시공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구파 몫의 최고위원을 선출할 때 추가로 보선되었다. 12월 23일 민주당 원내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59년 정부로부터 서울시장직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하였다. 1960년 곽상훈 등과 함께 김구(金九)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 직접 커튼을 벗겼다.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던 조병옥이 사망하자 민주당 구파의 대부였던 유진산의 추천으로 조병옥(趙炳玉) 사후 구파 리더로 추대되었다. 유진산의 양보로 그는 구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윤보선은 당시 민주당 구파의 얼굴마담격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후에 민주당 구파의 주도권을 놓고 유진산, 유진오 등과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 3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였다. 4월 학생 시위의 진상조사단이 각 정당별로 꾸려질 때 그는 민주당측 부정선거 규탄사태 진상조사단장이 되어 마산과 부산, 창원 등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이어 정부의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관련자 색출 처벌을 요청하였다. 3.15 부정선거 진상조사단장. 1960년 4월 11일 그는 민주당의 마산시위 진상조사단장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마산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최고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우선 현지에 내려가 사태의 진상을 조사, 파악하고 자유당 정권에 강력한 대응책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 그가 조사단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급히 조사단을 구성, 야당의원 세 사람을 동반하고 마산 현지로 내려갔다. 마산에 도착해 보니 온 시가지가 극히 혼란한 상태였다. 그것은 데모가 아니라 완전히 혁명이었다. 법에 의한 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마산은 지배되어 있었다. 도착한 즉시 김주열이 안치된 병원에 가 보니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그대로 있었다. 그를 단장으로 한 민주당 진상조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 시민들은 데모를 중지하고 몰려와 사태를 빨리 해결해 시민들을 희생시킨 경찰으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며 즉석 연설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마산시장과 경남도지사, 마산경찰국장, 그리고 법원 사람들을 만나 회의를 열고 군중에 대한 발포금지와 감금된 시민들을 석방할 것 등을 골자로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회의장을 에워싸고 기다리던 시민들이 회의 결과가 빨리 발표되지 않자 무차별 투석을 가하고 전기를 끊는가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그를 비롯한 민주당 조사단은 다시 경찰서장과 지방법원 관계자들을 만나 해결책을 협의했으나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당시 내무부차관은 마산 시민의 1차 봉기 배후에 공산당 조직과 민주당이 개입돼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2차 봉기 역시 공산당 조직의 조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윤보선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마산 현지에서 조사를 마치고 국회발언을 통해 그는 마산 시민 봉기는 공산당의 폭동이 아니라 애국시민의 의거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윤보선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4.19 혁명 전후. 4월 19일 그는 자유당 의원들을 방문했다. 데모가 한참 서울 시내를 누비고 있을 때 그는 국회에 나가니 이재학(李在鶴) 부의장실에 자유당 의원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있었다. 불청객이었던 윤보선은 들어가서 거기서 한마디 했다. 그는 자유당 회의장에 이 말을 남기고 거리로 나와 시내를 둘러보았다. 이를 두고 자유당 의원들은 윤보선이 돌아다니며 데모대를 선동했다고 비난하였다. 자유당은 그가 불순한 목적으로 시위대를 선전 선동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나는 누군가에게) 데모를 선동한 일이 없다. 다만 상황을 살펴본 결과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더라.'고 응수하였다. 5대 민의원 당선. 1960년 제4대 민의원은 의원내각제 및 양원제를 골자로 한 제2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다. 윤보선은 새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7월 29일에 실시된 제5대 민의원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를 두고 '원내활동도 적고 또 야당 의원이라 선거구를 위해 해준 일도 별로 없는데 구민들의 지지와 동정이 컸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 해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재적의원 263명 중 208명의 지지를 얻어 29표를 받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각책임제 개헌 뒤 실권자가 국무총리라는 점에서 그는 한때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구파 내 다른 국무총리 후보 희망자였던 김도연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상징적 지위인 대통령을 택했다. 대통령 재직 시절. 윤보선 정부와 장면 내각 (1960 ~ 1961). 취임 직후. 민주당 구파는 대통령에 윤보선을,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선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신파는 국무총리로는 신파의 장면을 지지하되 대통령은 구파에 내주자는 전략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가장 선호하고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구파와 신파 모두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8월 16일 윤보선은 구파의 당론에 따라 구파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였으나, 김도연 총리 임명 동의안은 8월 17일 재적의원 227명의 과반인 114표에서 3표가 모자란 111표만의 찬성을 얻어 부결되었다. 반대표는 112표, 무효표는 1표, 그리고 표결 불참자는 3명이었다. 8월 18일, 윤보선은 2차로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였다. 당초 구파는 이마저 부결시킬 계획이었으나, 8월 19일 표결에서 재적의원 228명의 과반인 115표를 2표 넘는 117표의 찬성표가 나와 장면 총리 임명 동의안은 가결되었다. 반대표는 107표, 무효표는 1표, 불참자는 3명이었다. 장면은 훗날 이 일을 놓고 도의상 신파인 자신을 지명하는 것이 옳은 태도가 아니었냐고 비판하였다. 8월 26일 경무대에서 장면 국무총리 등 3부 요인과 각료들로부터 제63회 탄신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당적 보유를 금하였으므로, 윤보선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8월 13일 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내각출범 20일 뒤, 국무총리 장면은 개각을 단행하여 5명의 장관직을 구파로 교체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내각책임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나, 내각인사에 개입 구파에게 준 자리는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한편 그는 자신의 얼굴이 든 우표나 화폐 발행을 반대했다. 우표나 화폐 등은 죽은 사람이거나 공적이 뚜렷한 인물만 등재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반대 이유였다. 8월 경무대에서 특별히 그의 생일 기념 축하를 주관하였다. 그는 성대한 축하식 대신 간단한 파티와 주변 친지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하였다. 파티에는 장면 총리와 각료들 외에 어머니 이범숙,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윤일선, 윤영선 등 일족들과 김도연, 유진산 등의 당직자, 몇몇 친한 친구 등 소수만이 초청되어 간략히 하였다. 집권 1년차.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를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하였다. 1960년 8월 29일 이른 아침, 휴가 겸 민정시찰을 나갔다. 비서실을 통해 전갈을 전달하자 총리 장면을 비롯한 각료들이 서울역에 집결하였다. 관 1호차를 탄 윤보선 부부는 서울역에 도착, 8시에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역을 출발하여 전국을 순회했다. 이 일이 정치권에 알려지자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 나오라고 지시한 것은 무엇이며, 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장면은 뭐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는 윤보선은 대통령직에서 월권을 한 것이고, 장면은 자기 밥그릇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이었다. 그는 민주당 구파의 의원들을 모아 그들과 각종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간 정치다툼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대립을 외면하였다. 민주당 구파에서는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대하는 윤보선을 두고 아군은 맞느냐며 공격했다. 장면 내각 출범 20일 마인 9월 12일 국방 권중돈, 부흥부 김우평, 교통부 박해정, 체신부 조한백, 보사부 나용균 등 구파 5명을 받아들인 개각이 단행되었다. 구파로서 처음부터 입각한 정헌주는 교통장관에서 국무원 사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구파의 불만은 여전했다 윤보선은 구파에게 준 자리가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10월 10일 장면 국무총리는 허정 과도수반 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경질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구파 입장을 대변하는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장면 내각에서 정치에 왜 관여하느냐며 비판하자, 윤보선은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 60년 10월 12일 신정부수립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동안 윤보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난한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에 신파도 대통령직에는 윤보선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였다.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거나 장면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는 했다. 장면은 청와대를 갖은 정략을 꾸미는 구파들의 참모본부로 여겼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그는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한편 그는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1960년 6월 15일에 제정된 제2공화국 헌법 61조 1항에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되어 있었으나 장면 내각 출범 후에도 내각은 법률을 정하지 않았다. 1960년 가을 윤보선은 비밀리에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비밀리에 국방부장관실에서 의논하였다. 윤보선은 자유당 정권 때의 관료라고 해서 무조건 파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재가 있다면 가려서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결점, 단점을 찾기 보다 그 사람의 좋은 점과 재능을 살리는 것이 정치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당 시절의 인사나 과도 내각의 인사까지 해임시키는 장면 총리와 갈등하였다. 장면 총리의 내각 운영 태도를 답답하다고 여긴 그는 장면에게 그럴 것이면 총리 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장면은 어이없어 하면서 그 영감이 나더러 총리 직을 내려놓으란다 며 성토하였다.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집권 2년차.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윤보선은 전국 각지의 유적지 보존, 보호 사업에도 후원하고 기금을 마련하였다. 1961년 1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 참석하여 신년치사를 하였다. 그런데 윤보선은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한 개인, 한 당파가 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 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장면 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장면 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하였다. 2월 27일 국토건설단 창단식에 국무총리 장면과 함께 참석하였다. 1961년 3월 윤보선은 장면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3월 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을 하였다. 3월 23일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에게 사퇴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나의 총리직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책이므로 사퇴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장면 내각에서 민주당 신파 인사들만 채용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자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권한이던 인사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구파 인사들은 주로 그가 머무르고 있던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모였고, 신파 인사들은 국무총리 장면의 관저인 반도 호텔을 중심으로 모여서 각자 자파의 정책을 의논하였다. 4월 19일 4·19 혁명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장면내각은 그의 참견이 지나친 간섭이라 비판했고 그는 이를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충고라며 맞받아쳤다. 군사혁명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 ~ 1963). 5.16 군사 정변 직후.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윤보선은 장도영으로부터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속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러나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수녀원에 숨어버렸다. 이제 그의 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선택권이 쥐어졌다. 하나는 그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도력을 상실한 장면 정부를 포기하고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은 윤보선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가족들만 피신시키고 나는 대통령이니 죽더라도 청와대를 지키겠다고 하고는 가족들만 피신시켰다.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과 린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군사 정변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아닌가'하고 힐책하였다. 박정희, 장도영 등이 각료들을 체포하고 청와대에 등장하자 체념한 그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자탄하였다. 그러나 그가 놀라거나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현석호 등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마디'라며 그를 원망하였다. 한편 그는 군사 정변 직후 청와대에 나타나 위스키와 소주를 찾는 군인들의 무례함을 질책하였다. 이때 바로 계엄군 사령관 장도영 중장이 사과를 하여 넘어갔다. 5·16 군사정변 후 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을 우려해 거절했다.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그는 여러 비판 중에도, 자신이 사퇴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적인 정부의 대표자로 나설 사람이 없으므로 국가전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대통령직 사퇴를 번복했다고 하였다. 군정기간 중. 1961년 5월 19일 햐야선언을 하였으나 5월 20일 번복하였다. 1961년 5월 19일 윤보선은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그의 사퇴 성명은 저녁 8시 30분 방송을 통해 공표되었다.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 밤 9시,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 윤보선은 5월 20일 하야 번복 성명을 발표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낮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와 장도영도 가세했고,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저녁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경제정책의 틀을 수립하고 정책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그를 명목상의 대통령에 앉히고 실권을 쥐려는 5.16 군부와 수시로 충돌하게 되었다. 대통령직 사퇴.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치정화법이 제정되자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윤보선이 아무리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하야의 배경에 관련되어서는 박정희의 구정치인 활동금지법에 반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퇴임후에는 안국동 사저인 안동장에 칩거하였다. 4·19 혁명으로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이 마땅치 않다면서 박정희가 나오게 해서 나왔어도 감시와 연금이 되풀이 되는 불행한 나날을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윤보선은 대통령을 사퇴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 공격의 선봉에 선 윤보선은 대통령(권한대행)과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군정 세력의 민정이양은 허구이며 군정 세력의 정권 연장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1962년 6월 29일 반공유격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안을 발표하자, 윤보선과 허정은 각각 측근들을 데리고 서울시내에서 산책데모를 하였다. 1963년 3월 16일 낮 2시 5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초대로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함께 박정희와 면담하였다.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 이에 그는 '3.16 성명이 박의장의 깊은 사려에서 나온 줄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세상 만사가 그렇게 박의장이 제안한 것처럼 척척 될는지도 의문이고 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은 바로 이승만 박사의 사고방식과 같다. 인간 개조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20년이고 30년이고 점진적으로 이룩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이어 군인의 사명은 국방에 있으니 만큼 군인들은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윤보선의 말을 듣던 박정희는 노하며 오죽 당신네들의 과오를 못 참았으면 군인들이 일선에서 돌아 왔겠느냐 며 응수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장택상이 화제를 돌려 논쟁을 막았다. 야당 활동과 민주화 투쟁. 하야 직후. 1963년 3월 박정희가 구 정치인 정치활동법 제한(정치정화법)을 강행하고 군정을 연장시키자 윤보선은 이윤영, 장택상 등과 군정연장 반대투쟁을 진행해 나갔다. 장면이 병으로 정당활동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야당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러나 허정 등 일부는 그의 지도력에 반발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발표하자, 3월 19일 윤보선·김도연·장택상·김준연·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였다. 한편 야당 인사들 중에는 그가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정일형 등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군사쿠테타를 방조하였다며 그의 리더십을 거절하거나 비판하는 인사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군정 반대와 박정희 퇴진 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므로 반대파들의 음해와 공격은 일시적으로 누그러졌다. 3월 20일 허정 등과 함께 서울시청과 을지로 주변, 주한미국 대사관 주변 등을 활보하며, 박정희의 군정연장에 반대하는 '산책시위'를 했다. 3월 30일부터 윤보선과 함께 3차례 박정희와 조야영수회담을 개최하여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철회시켰다. 이후 그는 박정희를 군정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며 박정희의 퇴진을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야당이 난립하게 되니까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통합야당으로 국민의당을 만들게 되지만 바로 깨져버렸고,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 통합야당 국민의당 붕괴에는 민주당 구파의 실력자 유진산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이 당시 유진산은 윤보선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 1963년 초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1963년 5·16 군사 정변 이후 해체되었던 신민당 및 민주당 구파 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세력이 참여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후보 단일화 과정. 63년 7월 그는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본래 야당 단일후보로 김병로가 지목되면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해위(윤보선)라면 양보할 용의가 없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고,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후보는 허정과 김도연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지만 사전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김도연이 포기를 선언해 후보경쟁은 다시 윤보선과 허정의 대결로 전환되었다. 허정은 5·16 군사 정변 당시의 그의 묵인을 지적하며 처신문제를 질타했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미국 대사 및 미국무성 관리들로부터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 허정은 그가 장면에 대한 적대심 때문에 정변을 묵인했다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고, 윤보선은 자신이 군사 정변을 추인하지 않은 점과, 장면 내각 당시 데모와 부정 부패가 심했음을 들어 반박, 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허정은 1963년 9월 24일 "혁명을 합법화시키고 정치정화법에 도장을 찍어놓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다, 출마한다고 하는 윤보선씨야말로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허정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상 자신이라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 뒤 허정은 그가 5.16 군사 정변에 호응한 점과 혁신 세력의 반발을 들어 김병로에게 후보자리를 양보하라고 종용하였으나 윤보선은 양보할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고, 허정은 그가 독단적이고 고집에 세다며 질타했다.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허정은 양보할 수 없음을 들어 끝까지 경선에 나서 경합하였으나, 결국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허정이 자진 용퇴하면서 윤보선은 야당의 범야권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5대 대선과 사상 논쟁. 그 뒤 최종 지명되어 출마, 유세 도중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적, 비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3년 9월 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지방 유세에서 그는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상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 윤보선의 유세는 언론에 의해 사상 논쟁으로 묘사되었다. 공화당은 윤보선을 미국 상원의원을 역임한 존 매카시 의원의 사상에 사로잡힌 과격분자로 규정하고, 그의 주장은 얄팍한 술책이며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하였다. 박정희는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이라며 맞받아쳤고, 윤보선은 그가 친일파, 공산주의자라며 조국을 두 번이나 배신했으며 검증이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5대 대선 유세에서 그는 빈익빈이 민주화냐, 썩은 정치 뿌리뽑자고 호소하였다. 한편 유세중 기자들이 경제정책에 대한 공약을 집요하게 물어오자,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그는 당선된 뒤에 밝히겠다고 하고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였다. 선거 운동이 한고비에 이르렀을 무렵, 9월 28일 윤보선 후보는 다시 전라북도 전주에서 "여순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는 연설을 통해 박정희 후보가 여순 사건에 관련됐다는 시사를 했다. 이로써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라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단 말인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는 그럼 공산주의를 가리킨 것이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의로 공산주의 의혹을 부풀려 올리려고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격을 금치 못했다. 김형욱을 필두로 하는 충성파와 민주공화당의 추종자들은 윤보선에게 강경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서둘러 즉각 고발조치를 취했다.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속히 윤치영 등이 그를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김준연은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하자고 하였다. 공화당 측에서는 윤보선이 김준연을 사주하여 흑색선전을 한다고 맞받아쳤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고 윤보선과 신민당을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무리들이라며 공격하고 나섰다. 박정희와의 이념 대결. 1963년 9월 23일 윤보선은 전라남도 여수, 순천, 광양 지역을 돌며 선거 유세를 하였다. 그런데 9월 23일 박정희는 KBS 방송을 통해 윤보선을 공격,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하였다. 63년 9월 24일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 도착하였다. "기아·부패·실업·분열 등 군정의 5악을 몰아내고 민정으로 새 질서를 수립하자 "고 외치던 윤보선은 9월 24일 전주 유세에서 정면으로 반박했다. 윤보선은 "내가 할 말 그사람이 했다."라고 서두를 꺼내고, "지금은 민주주의와 가장된 민주주의, 즉 이질적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이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인데, 윤보선은 이어서 "9월 23일의 여수 강연에서 특별히 느낀 것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여순 사건 관계자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 사상이나 민주주의 사상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윤보선의 삼촌인 윤치영은 윤보선의 경쟁자인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이기도 했다. 9월 30일 윤치영은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일각에서는 윤보선의 의혹을 사상공세라고 비난하였고, 숙질간의 싸움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자 김준연은 차라리 고소를 할테면 해보라며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응수한다. 윤보선은 김준연과 함께 박정희에게 과거 전력에 대해 속시원히 털어놓으라고 공세를 펼쳤다.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악수를 거절한다. 제3공화국 시절. 대선 출마와 낙선.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10월 2일 국민의당 허정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고, 10월 8일에는 자민당의 대통령 후보 송요찬이 사퇴함으로써 윤보선은 사실상의 야당의 단일 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논쟁은 윤보선 후보에게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매카시스트로 몰아붙였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를 극우적인 정치가의 전형으로 간주하여 그의 정견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도시민은 그의 사상 논쟁을 과거 보수 정치가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스파이로 매도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야당인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인 윤보선은 박순천, 이범석, 김병로, 장면의 자택을 각각 방문하였다. 허정과 변영태의 집 역시 방문하였으나,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10월 9일 안동 유세를 다녀왔다. 윤보선은 이 날 8천 청중 앞에서 "민주공화당은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북괴의 무역성 부상 황태성이가 20만 달러를 가지고 왔는데, 김종필씨가 조선호텔에 모셔다가 황태성이 안에 따라 서울에 밀봉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놓고 공산당 식으로 점조직을 한 민주공화당이 어떻게 민주주의 정당이냐"하고 반문하면서, "공화당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윤보선의 안동 발언은 막바지에 이른 선거 정국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러나 사상 논쟁에서 윤보선이 손해를 본 것으로 분석한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경상도 · 전라도 쪽이 좌익이 강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그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7월~8월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선거 13년 전 일이어서 그때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좌익으로 몰려 많이 죽고, 또 살아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서 몹쓸 고생을 하고 있던 터라, "윤보선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되면 큰일 나겠다. 여순 관계로 저렇게 몰아세우는 사람이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이 때문에 막판에 박정희 지지로 돌아섰다. 윤보선이 6·25 전쟁 당시 양민학살을 반대하여 이승만과 틀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감옥소에 들어가 있는 혁신계 일부도 한민당 간부였던 윤보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혁신계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민당을 굉장히 미워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민당에 대한 혁신세력의 혐오는 지속되어 차라리 윤보선이나 민주당 구파 계열을 지지하느니 박정희를 지지하겠다는 여론이 지속되었다. 6대 대통령 선거 때에도 그는 박정희의 전력과 사상이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고 공세를 했다. 이 때에도 박정희의 공산주의 경력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에 해당하는 4,702,640표를 받았고 민정당의 윤보선은 45.1%에 해당되는 4,546,614표를 받아 불과 15만 표차로 윤보선이 패배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공화당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위협을 받기도 하여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고,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 윤보선 내외를 위한 차량을 비밀리에 마련하기도 했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12월 17일 다시 국회로 복귀했다. 한편 그의 숙부인 윤치영은 박정희를 지지하고 그의 선거사무장을 지냈는데, 그는 끝내 수인사 조차 나누지 않았다. 윤치영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윤보선 암살 미수 사건. 5대 대통령 선거당일 저녁 선거 결과가 중개될 때, 초반전에는 윤보선 표가 많이 나왔다. 서중석은 서울쪽을 먼저 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봤다. 10월 15일 선거 다음날인 10월 16일 새벽 3시경까지만 해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박정희가 추격해서 이겼다. 이 뒤부터는 박정희는 개표할 때 박정희 표가 많이 나올 쪽을 먼저 하고, 야당 표가 많은 데는 나중에 했다는 말도 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702,640표, 윤보선은 4,546,614표로 15만여 표 차이였다.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충청 남북도와 서울, 경기도, 강원도에서는 윤보선이 이겨서 남북선거 양상을 띄게 되었다. 서중석은 이를 두고 경상북도는 이때만 해도 몰표가 아니어서 박정희가 83만여 표였고, 윤보선 표도 54만 표나 나왔다. 충청북도도 그렇고, 두 지역은 여당 표가 많이 나오는 곳 이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윤보선은 스스로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다. 사상 논쟁은 얘기할 것이 없었고, 윤보선 측에서는 막판에 개표 부정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서중석에 의하면 그 당시 선거에서 공무원 가족, 경찰관을 포함해 관권에 의해 좌우되는 표를 10퍼센트 내지 20퍼센트로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윤보선이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 라고 하였다. 대선 기간 중 윤보선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67년 5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육군 중령 방준모를 직접 불러 놓고는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윤보선씨를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 방준모는 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씨 집 안방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층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 결과 박 대통령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한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 박정희와 대결, 월남 파병 반대.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사상 경력에 대한 공세가 있었다.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순 사건에 대해 변명하였다. 윤보선은 경상남도 진해에서 "대통령 선거 때 나는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조봉암과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63년 11월 윤보선은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64년초 한동안 칩거하였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을 굴욕, 매국외교로 규정, 장택상·박순천·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후일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구파를 함께 이끌어오던 유진산과의 갈등 끝에 1964년 8월 유진산과 결별했다. 1964년 8월 윤보선과 유진산이 결별한 이후 민주당 구파는 양분되었다. 신언론법안 제정을 쟁점으로 야당 내에서도 윤보선과 유진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가 민주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수뢰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의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된 그는 '대통령 박정희와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 이후 그의 주변에는 중앙정보부의 감시요원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윤보선의 안동장 건너편에는 망루를 설치하고 그의 집 출입자에 대한 감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수 없다며 고집하였다. 또한 미국의 월남전 파병에 박정희가 호응할 것이라는 설이 정가에 돌자 그는 월남 파병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박정희 자신이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이후 장준하와 함께 월남 파병 반대 운동도 준비한다. 1965년 초부터는 한일협정 반대를 위한 야당 인사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위해 자신이 만든 민정당을 민주당과 통합하고,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이 출범하자 총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박순천에게 패하여 당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낙선원인은 그에게 축출당했던 유진산이 복수차원에서 박순천을 당수후보로 밀었고 여기에 여당인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일부 대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등 복합적인 정치공작의 결과였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그의 강경노선을 누그러뜨릴수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것은 그들의 계산착오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자신의 약화된 입지를 만회하기 위하여 더욱 더 강경한 투쟁의 칼날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에 대해 대부분 야당인사들의 생각은 원내외투쟁을 병행해야한다는 것이었는데 윤보선은 다가오는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자신과 박정희의 양자대결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일회담 반대투쟁에서 초강경투쟁을 주도하면서 선명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라야한다는 의도에서 야당의원들의 전원총사퇴로 배수의 진을 칠것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대다수 야당의원들로부터 "우리가 해위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들러리냐"하는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그의 강경노선에 동조하는 윤제술,김도연,김재광,정성태,정일형,정해영,서민호 등 7명의 의원들과 더불어 의원직사퇴후 그들과 함께 초강경 선명야당 신한당의 창당을 선언하였으나 여기서도 자신의 당수직과 대통령후보직을 위협할 수 있는 서민호와 김도연의 합류를 거부하는 옹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한동안 비록 의원직은 내놨을지라도 민중당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대선후보를 내지 못할 것이라 보고 느긋한 태도를 나타냈다. 한동안 그랬지만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났다. 민중당이 대선후보로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를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67년 대선이 박정희와 윤보선 그리고 유진오의 3자대결구도로 간다면 윤보선은 당선은 고사하고 참신성 등에 있어서 유진오에 밀려 3등으로 밀릴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윤보선은 민중당 측에 합당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유진오와의 회동을 제안하였고 민중당이 이를 받아들여 윤보선ᆞ유진오 간 회동결과 신한당과 민중당은 신민당으로 통합하고 당 대표에는 유진오,대선후보는 윤보선으로 하기로 극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정책은 박 대통령의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윤보선과 장준하만 베트남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후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 역시 국민을 쥐어짜는 경제 정책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파병 역시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 집권에 이익을 주려는 행위라며 월남 참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6·3 항쟁. 정부가 한일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조속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64년 벽두부터 표면화되었다. 곧 도쿄에서 정치협상을 하겠다고 서둘렀고 2월이 되자 정부와 여당은 3월 중 대일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 하였다. 64년 2월 22일 민정당에서는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에 관한 대안(代案)을 발표했다. 박정권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불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우리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윤보선은 학생 대표자들과 면담,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시위 준비 작업을 독려하였다.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 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회장인 김덕룡(金德龍, 후일 국회의원)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윤보선은 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현장을 돌며 학생들을 위문했다. 단식하다 지쳐 쓰러진 학생들은 들것에 실려 서울대 문리대 앞에 있는 서울대 의대로 옮겨졌다.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은 교대로 철여하면서 단식학생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목격한 윤보선은 그들 의대생, 간호학과 학생들도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 보았다. 사건을 주동한 이명박 등은 피신했고 주동자를 찾지 못하고 학생들 348명을 기소한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로 윤보선, 장택상 등을 지목했다.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윤보선과 장택상은 정부가 보낸 사복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감시를 당했다. 한일회담 직전. 윤보선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의로운 학생들이라며 손수 부인 공덕귀, 비서관, 함석헌 등을 대동하고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1965년 4월 30일 오후 방한 중인 마셜 그린 미 국무부 극동담당 부차관보는 서울 중구 정동의 미 대사관저에 윤보선 민정당 총재를 초대하여 한일회담과 관련한 요담을 했다. 그린 副차관보는 5·16 군사 혁명 때는 대리대사로서 당시 윤 대통령을 찾아가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軍(군)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동원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한 인연이 있었다. 윤보선은 김준연 등을 대동하고 마셜 그린 부차관보를 면담했다. 이날 민정당의 김준연 의원은 그린 副차관보를 ‘각하’라고 호칭하면서 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는데 요지는 박정희의 방미(訪美) 정상회담 계획을 중단시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린 부차관보는 '한일 국교회담의 조속한 정상하를 바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고 윤보선과 야당에게 적극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한잃회담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마셜 그린은 '본국에 돌아가면 한국의 이익을 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힘쓰겠다.'고 약속하였다. 윤보선과 마셜 그린의 회담을 불쾌하게 여긴 박정희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 사실을 보고한 박상길 청와대 대변인에게 "그 X버선인지 헌 버선(편집자 註-윤보선을 지칭)인지 하는 자가 하는 말을 나는 다 알고 있지. 새카만 일본 헤이타이(兵隊) 출신인 째그마한 내가 … 제까짓 게 뭘 알겠느냐, 이런 말 아니오?"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윤보선은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며 그것이 박정희 씨의 인격이고 수준이라고 응수하였다. 한일회담 반대 운동. 1965년 6월 22일 윤보선의 민정당과 박순천의 민주당이 민중당으로 통합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통합 민중당의 당대표로 경선에 나왔으나 유진산은 박순천 쪽을 밀어서 박순천이 당수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당수가 출현한 것이었는데, 이는 전에 민주당 구파였던 유진산이 신파와 손을 잡은 결과였다. 한·일 협정 비준 반대투쟁에 나섰는데, 박순천은 한·일 협정 반대 투쟁에 적극적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한 뒤로는 이상하게 돼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 민중당 내에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구별되는 뚜렷한 대립 노선이 노정되었다.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강경 노선은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희 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월남 전쟁 파병 정책은 박정희가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윤보선은 다시 1963년의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불법선거라며 비판했다. 윤보선은 1963년 대통령 선거를 공화당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65년 7월 22일 윤보선은 민중당 탈당을 선언했다. 7월 28일 윤보선은 정당생활을 청산할 뜻을 비치면서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게 탈당계를 제출했다. 윤보선의 탈당계 제출로 민중당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원외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강경파와 원내투쟁이 국회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박순천 중심의 온건파의 대립으로 대여투쟁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박순천은 윤보선의 탈당계를 반려했고, 윤보선은 자신의 탈당계가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 의해 반려되자 정당법에 따라 소속 지구당인 종로구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9월 장택상, 함석헌, 이범석, 장준하, 박순천 등과 함께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집회에 참석하였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 1965년 8월 14일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국회를 떠나고 민중당을 떠났다. 윤보선 파는 민중당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고 비난했고, 당내에서 배척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내 온건파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한·일 협정 비준에 초강경투쟁을 벌이던 윤보선은 따로 나가서 당 하나를 만든다. 신한당이다. 유진산과의 갈등. 1965년 한일 비준 파동이 발생한다. 이때 윤보선과 유진산은 갈등하게 된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진솔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하였다. 윤보선이 유진산과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강원용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지적을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지 않고 타인의 말만 듣는 것은 편견이라며 일단 유진산과 함께 움직였다. 한민당 때부터 함께 정치를 해왔고 같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지만 그러나 계속 노선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민정당에서 윤보선과 유진산이 심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갈등을 벌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윤보선 측은 유진산을 박정희 정권과 모종의 흑막이 있다고 해서 벚꽃의 일본말인 '사쿠라'라고 하면서 권력과 내통하고 있는 사쿠라를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다. 유진산은 한편 그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이라며 몰아붙였다. 윤보선과 유진산의 난타전은 계속되었고, 민주당 구파는 1965년말 6대 대선 준비기간 직전까지 양분된다. 민중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순천으로는 안되겠으니까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를 당수로 영입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민중당은 유진오를 당수로 모셔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고 해봤는데 실패하였다. 서중석은 '유진오를 국민들이 잘 알지도 못했'고, 당시는 '어두웠던 시대라 유진오를 알 만한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는 단점을 지적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에 나올 것은 확실해졌다. 장준하는 주선을 해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4자 회담을 주선했다. 회담 결과 당수에는 새로 통합야당을 만들어서 유진오가 차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생긴 당이 신민당이다. 1960년대에 윤보선이 신민당을 할 때 유진산과 손을 잡자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그 사람과 손잡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윤보선은 원칙론을 고수했고 유진산은 타협을 하면서 어느 정도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고 유진산은 오히려 윤보선이 1963년 3월과 4월 박정희와 면담 때 박정희의 구정치인 배격을 비판하고 잡토도 섞어야 된다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며 조롱하였다. 6대 대선 출마와 낙선. 민중당을 탈당하고 1966년 2월 28일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운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으며 3월 30일 신한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그해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5월 26일 전라북도 남원에서 신한당 지구당 창당 및 대선 예비주자로 유세를 개회하려 하였으나, 유세장소허가가 취소되고 강연은 좌절되었다. 윤보선은 정부의 야당탄압이라며 비판, 윤보선 총재를 비롯한 100여 명의 당원은 침묵시위를 벌였다. 한편 윤보선은 6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사상이 민주주의인가 이질적인 사상인가 의혹을 제기하였다. 1966년 5월 26일 오후 윤보선 총재는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박정희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 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월남증파가 미국의 뜻을 승인한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한 때문도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라고 하여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 주장의 허구성 및 국군의 월남파병을 청장년의 피를 파는 행위라며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기자들이 기록을 주저하자 윤보선은 반복해서 재발언하였다. 윤보선의 발언은 화제가 되었고 국회와 검찰에서 다같이 문제가 되었다. 국회에서는 내무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집회불허사건에 대한 야당측의 비판이 제기됐고, 국회는 여야간 갈등으로 번졌으며 검찰은 윤보선 총재의 발언에 대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수사하고 검찰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그는 군사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이라며 바로 항의하였다. 윤보선의 비판 발언은 국회의 1966년 6월 7일에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와 1966년 6월 15일 열린 본회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윤보선은 국회에 출두하였고, 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은 북괴찬양이나 이적의 목적이 없는 정치적 발언에 법률적 추궁을 하는 것은 야당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정치집회나 정당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하고 있는데 대한 시정대책, 반공법 적용의 남용문제 등에 관하여 질의가 있었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구속, 처벌하라고 비난하였으나 처벌받지는 않고 비난은 곧 가라앉았다. 1966년 여름부터 윤보선과 여러 야당 지도자들은 야당 성향의 도시 지식인과 중소상공인들로부터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서한과 요청을 수시로 받았다. 이후 야당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압력으로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범 야당 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다. 한편 허정은 그의 대통령 후보자 선정에 불만을 품고, 5.16 군사정변의 원인제공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신민당 공천으로 6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로 추대되어 출마하였다. 1967년 3월 그는 장준하 등이 주선한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4자회담(백낙준-윤보선-유진오-이범석)에 참여하였으나 의견차이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1967년 5월의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로 나왔다. 박정희와의 대결과 갈등.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은 박정희가 나왔고 야당은 윤보선이 대표주자를 하게 되었다. 윤보선이 출마하자 그의 주변에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그의 선거를 도왔다. 강원용은 5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어 박정희의 재집권을 막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그를 돕는 일에 간접적으로 나마 나섰 다. 강원룡은 윤보선 후보에게 직접 자금을 전해 주지 못하는 기업인들을 대신해서 자금을 받아 전달해 주는 일을 몇 차례 맡아 했다. 따라서 강원룡 자신의 회고로도 국민들에게는 '겉으로는 강원룡이 윤보선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1967년 5·3 대통령 선거의 유세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테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 신민당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 경력을 집중 부각, 지적하였다. 윤보선은 이때는 사상논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박 정권이 부정부패가 심하니까 "부정부패 바로잡겠다", "썩은 정치 바로잡겠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당 일각에서는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전력이 다시 불거졌고, 박정희가 배신자임을 들어 신의없음을 지적하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를 서중석은 '윤보선 하면 낡은 정치인, 늙은 정치인이 연상되어서 신선한 맛을 느낄수 없었'다고 평했다. 6대 대선 유세기간 중 야당의 후보였던 그는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보자'며 여당 후보 박정희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윤보선의 집안을 친일파 가문이라 공격하였고, 윤보선은 박정희와 공화당으로부터 친일파로 공격받은 것에 분노하였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일본군에서 근무한 경력을 들어 다시 공격했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선거기간 중 박정희의 일본군 경력을 예를 들며 공격했다. 윤보선과 민주당은 박정희를 향해 친일파에 공산주의자 경력까지 있으며, 히틀러 등도 긍정적으로 보는 박정희의 사상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며 공격하였다. 6·3 세대로, 저명한 교수 한 분은 "유세기간 중 경제 정책을 발표할 때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면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원조를 더 받아와 나라살림을 펴겠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라고 말했다. (한일회담 때문에) 박정희는 미웠지만 그의 말은 전율할 만큼 감동으로 다가 왔어. 박정희를 지지하게 되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자립책이 비현실적임을 지적, 미국, 일본과 교류 없이 문을 닫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반론을 제기했다. 6대 대선에서도 박정희의 공산주의사상과 남로당 경력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의혹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선거는 윤보선에게 유리해 보였으나 그해 5월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116만 표의 근소한 표차이로 패하여 낙선했다. 박정희는 농어민과 영세민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윤보선의 지지 지역은 수도권과 도심지역이었고, 박정희의 지지 지역은 농촌과 산촌 지역으로 나타났다. 이후 장준하와 함께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였다. 당시에 다른 이들도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과 장준하는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보선과 장준하는 박정희의 월남파병 강행은 국익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매국행위이며, 국민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기만술이라며 비판을 가한다. 제4공화국 시절. 유신 이후 야당 지도자.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정권 치하에서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예장통합측의 장로교회. 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하고 총재직에 취임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장준하와 함께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당을 만들고 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 게 되었다. 71년의 대선에서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하는 대신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당시 범야권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은 그에게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보자 용퇴를 계속 요청하였다.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지지하였고 지원 유세를 다녔다. 한편 국민당의 총재였던 윤보선은 장준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한때 진보당에 참여했던 박기출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 하였다. 장준하가 한때 김구의 비서였다가 이범석의 족청을 거쳐 장면에 의해 발탁된 인사였다는 점 역시 윤보선이 장준하를 탐탁치 않게 보는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부정적인 시각에 관계없이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도왔다. 한편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후보 사퇴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김대중을 대단히 불신하였다. 강원용이 윤보선을 찾아가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윤보선은 "강 목사가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라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리고는 윤보선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지도 모른다면서 "김대중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원용은 다시 윤보선을 설득하였다. 다음날 오후에 박기출이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났고 윤보선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윤보선은 신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유신에 의해 1972년 강제 해산당했다.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하자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며 규탄성명을 발표하였고, 그가 발표한 긴급조치는 모두 무표라고 주장했다. 1973년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 사형 집행자 추모예배가 문제되어 목요기도회는 중단되고 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목사 등이 연행되었다. 모임 참가자들은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강요에 동아일보에 목요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그들에게 회의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 주었다. 73년 3월 23일 윤보선은 정구영, 지학순 주교 등 10명과 함께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민청학련 사건과 체포.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약칭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윤보선은 비상군법회의로부터 민청학련사건 관련혐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당하였다. 다른 연루자들은 구속·기소되었으나 윤보선은 전직 대통령인 관계로 가택수사를 받았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1974년 11월 27일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을 선언하고, 함께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었을 때, 일부 야당지도자는 박정희의 독재를 들어 육영수 암살을 조롱하였으나 윤보선은 재판중임에도 육영수 피격사건에 대한 애도와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 1974년말 윤보선은 민청학련 배후 지원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결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의 대량 기자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3월 14일 동아일보 사태를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 또한 그날 방송에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탄압한다며 공격하였다. 이어 같은날 3월 14일 단독으로 '3ㆍ1정신으로 구국대열에 서자 -3천 5백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김상진 사건과 명동 구국선언.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대생 김상진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했다. 윤보선은 김상진을 김상진군은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이 논리정연하고 위정자의 오류와 잘못을 세련된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결코 감정을 앞세운 글이 아니라 사려깊은 논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으로 가득찬 애국적 충고문이었다 라고 평가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75년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 4월 22일 윤보선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제지당하였다. 윤보선은 명동성당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주학생의 명복을 빌어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그의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더니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윤보선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1976년 봄 제2공화국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정일형의 부인 이태영이 윤보선을 방문했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일어서 행동을 할 때라는 의견을 듣고, 그로부터 이태영, 정일형, 김대중 셋이 정일형, 이태영 부부의 사저에서 3·1절에 구국선언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김대중이 초안한 선언문을 입수 하였으나, 선언문이 ‘온건하긴 했으나 독재를 비판하는 강도면에서는 약한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윤보선은 아내 공덕귀를 시켜 이태영을 만나, 서명문이 온건하다 하여 서명을 거절하였다. 며칠 뒤 문익환이 서명을 작성하여 그를 찾아왔다. 문익환으로부터 봉투를 건네받은 윤보선은 내용을 읽은 뒤 ‘강도가 높고 할말을 별로 빠뜨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며 문익환이 초안한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1976년 3월 1일 새벽 윤보선은 명동성당에 도착, 앞자리에 앉아 700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 김지하를 비롯한 구속 정치범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고,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석하였다. 윤보선의 주변에는 감시인이 따라붙었고, 정부 당국자와 박정희의 측근들은 계속 박정희에게 윤보선을 위험한 인물이라며 구속, 처벌해야 된다는 강경론을 펼쳤으나, 박정희도 그가 전직 대통령이자 야당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파급효과를 두려워하여 그를 처벌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법정에 출두했다. 당시 삼복더위에도 단추 셋 달린 양복을 입고 젊은 판검사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깍듯한 존댓말로 응했다. 77세 노령에 전 대통령으로서 구태여 법정에 나가지 않아도 끌어갈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박정희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하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법정에 출두한 것이다. 재판정 앞에 선 그의 당당함과 깎듯함에 군정 관계자들은 당황하였고, 박정희가 무리하게 고령자를 법정에 세웠다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발 여론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 후반. 윤보선은 이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독재행위라며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1976년 3월 1일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문익환, 함세운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700여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가 가택수사를 당하였고, 뒤이어 '사실 왜곡 전파', '헌법 왜곡 비방 및 폐지 선동'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최고 징역·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형량은 징역 8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법정구속되지 않았다. 5월 김대중은 3.1 민주구국선언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고, 윤보선은 공덕귀 및 이희호, 김홍일 등과 함께 김대중 석방 농성을 벌였다. 1977년 이후 그는 일본의 후쿠다 수상에게 유신체제를 비난하며 독재 정권에 협조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 화제가 되었다. 이는 방송에 보도되었고, 정부와 여당에서는 다시 그를 친일파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한편 그는 계속 김대중 석방구명운동에 동참했고, 1978년 김대중은 석방된다. 1977년 3월 22일 3.1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윤보선은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1977년,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일본 후쿠다 수상에게 박정희 유신정권과 유착한 일본 정부를 비판하면서, 일본이 대한 정책을 시정할 것을 촉구하는 긴 글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오랫동안 윤보선의 서신발송을 묵살하던 한국 언론은 뒤늦게 편지의 내용을 입수,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윤보선이 일본에 내정간섭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 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1977년 강희남, 문익환 목사 등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인사들을 면회하러 공덕귀, 양일동, 이희호 등을 대동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갔다가 거절당하고 되돌아왔다. 1977년 9월 광주 고법의 강희남 목사 첫 공판일에 방청객으로 참관하였으나, 재판을 연기하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9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과 공동으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청계피복지부 노동조합 탄압에 붙여)'를 발표하였다. 1977년 12월 성명서 '학생탄압을 중지하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최근 학원 사태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발표하다. 1978년 1월 6일 재야인사들과 곧동으로 옥중에 수감중인 민주인사를 위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민주국민선언과 10.26 전후. 이때 반유신 운동의 해외홍보를 위해 해외인사들과의 연대를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8년 윤보선은 일본에 체류중인 정경모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문익환은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며 반대해버렸다. 스승 김재준 목사가 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도 문익환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문익환의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 해 10월 17일 윤보선은 함석헌, 문익환 등 야당 및 재야인사 402명과 12개의 시민 사회단체와 함께 10·17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1978년 12월 7일 민주주의 국민연합과 함께 성명서 '12ㆍ12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다.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국민연합이 체제를 개편하여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의 개편되었을 때 윤보선은 함석헌, 김대중과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3월 4일 안국동 사저에서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였고, 3. 1절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이 됐다. 이후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 김영삼 제명 파동 소식을 듣자 그는 독재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며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10월 26일 그는 안국동 사저에서 박정희의 피격 운명소식을 접하였다. 생애 후반. 최규하 정부 시절. 1979년 10·26 사태로 현직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피살되자 그는 인과응보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이후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를 예상하고 야당 후보의 단일화를 김영삼, 김대중에게 요구하였으나 결렬되었다.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서신을 보내 유신 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인 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대의원 간선제로 최규하 총리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재야인사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양심수 석방을 골자로 한 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기로 한다. 윤보선은 최규하의 대통령직 승계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적인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묵살당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함석헌, 박종태, 임채정 등의 재야인사 및 학생운동가들과 면담, 군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대회장을 실내에서 결혼식 형태로 하기로 정하고 연세대 복학생인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타계한 윤형중 신부의 성씨에 민주주의 정부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가상의 여성)의 결혼식으로 위장해 정부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 종료 후 계엄군에 의해 140명은 불구속 입건,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1979년 11월 YMCA위장결혼사건으로 피체, 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벌써 80이 넘었다. 주목되는 점은 유신체제에서 민주화 투쟁과 관련된 윤보선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미국의 국무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논평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11월 24일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함석헌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윤보선 등은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는 대신 위장결혼식 참석자들의 형량을 낮추어줄 것을 탄원하여, 전원 형량이 감경되었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함석헌과 불구속되었던 윤보선은 법정구속되지는 않았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직 3부 요인과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할 때, 국정자문회의 의원에 위촉되었고, 바로 국정자문회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2월 28일 최규하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윤보선, 김대중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가 단행되어, 복권되었다. 9월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서울의 봄 당시 윤보선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불러 화합하고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이 모두 호응하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양김 후보단일화 촉구와 실패. 1980년 2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의 복권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1980년 3월에 이르는 시기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정국을 관망만 했다. 그리고 4월 들어 정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63년 민정 이양 이후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각자 대권 행보에 나섰다. 또한 김영삼은 기타 야당 인사와 시민단체들에게 딱히 손을 내밀지도 않고 독자적인 행보에 나섰다.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월 7일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을 거부했다. 윤보선은 다시 중재에 섰다. 4월 7일 윤보선의 중재로 두 사람은 4월 12일 윤보선과 함께 3자 회동을 했지만 대권을 향한 두 사람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윤보선은 다시 한번 힘을 합치라고 권고했지만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4월 28일 김영삼이 신민당 당직자와 함께 대권과 관련해 현충사를 참배하자 같은 날 김대중은 신민당 내 동교동 의원들을 데리고 현충사 부근 윤봉길 생가를 방문한다. 두 김씨에게 다시 한번 단일화를 추진시키려고 자리를 주선했지만 실패하자 윤보선도 더이상 이들과의 접촉을 단념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해 8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한다. 그가 물러나자 민주당 구파는 장택상과 조병옥이 발탁한 김영삼이 영도하게 된다. 제5공화국 시기.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시절과는 달리 정부에 적극협력하여 국정자문회의등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줄곧 국정자문회의 의원을 지냈다. 1980년 초 전두환과 신군부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을 직접 방문, 면담하였다. 전두환 등은 윤보선에게 박정희정권의 부패상 등을 지적 자신들은 박정희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할테니 도와 달라 고 했다.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아온 데다가 기약 없는 민주화 운동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강원룡과 천관우, 지학순 등과 함께 국정자문회의 의원 직을 수락하는데 세간에서는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룡을 가리켜 '변절자 윤천지강'이라는 비아냥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부인 공덕귀는 두 아들과 함께 "제발 가만히 있으라"며 남편을 말렸다. 그러나 말리는 공덕귀와 남편 윤보선 간에 고성이 오갔다. 윤보선은 아니 공덕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가 전두환의 독재에 협력하였다며 학생운동가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그는 학생운동가들의 반미주의적인 활동은 야당 운동, 학생 운동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후 줄곧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야당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윤보선은 공산주의 혁명론과 민족 해방론, 반미주의 사상을 가진 운동권을 극도로 불신하였다. 강원용은 이를 두고 '윤보선씨는 그처럼 위험한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바에는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만 안 한다면 당분간 군인들에게 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해요.'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민청학련 관련자 구명운동. 1981년 4월 23일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4년, 이전에 민청학련에 연루되었던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하였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가 있었다. 전두환은 윤보선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그래서 윤보선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사면, 복권시키는데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 역시 관련자 사면복권에 활약을 하였다. 한편 1980년대 중반 일부 학생운동가들의 반미 시위에,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며 반미주의적인 경향에는 반대하였다. 학생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이 남북협상으로 태어날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생겨난 부산물로 여기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재야, 학생운동가들의 입장을 옹호하였지만 정부수립을 분단의 원흉으로 보는 시각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곧 극우 세력과 학생운동가들의 날선 비난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방관하였다. 1985년 6월 제4회 전국사회복지대회준비위원회에서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에 선임되었다. 1985년 3월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12월 미국 US 국제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5공 정권 붕괴와 만년. 1987년 6월 22일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6.10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작은 메모를 보냈다. 또한 강원룡, 신현확 등의 개신교 인사와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을 추천, 이들의 말을 듣고 시위대에 대응하라는 주문을 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를 지지하기도 했고, 1987년 12월 14일에는 대통령 선거에 즈음한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후 줄곧 노태우 정부를 지지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노태우 공개 지지 선언은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 실패,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과 함께 학생운동가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해 숙부 윤치영의 구순기념논문 봉헌 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밖에 강원룡, 김수환 등의 강연회와 기독교단체의 운동에 적극 후원, 참여하기도 했다. 사망. 만년의 윤보선은 양복 한 벌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 양복은 어려운 중에 있던 자신을 찾아준 것을 감사히 여긴 디자이너 이정송이 재단해준 양복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는데 조카 윤남경에 의하면 1975년경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다 한다.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 1988년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88년 5월 잠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병세가 악화, 1989년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나, 동년 1989년 5월 14일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에 폐렴까지 겹쳐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 안정을 되찾아 자택에 요양했으나 급성 신부전증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1990년 3월 말 다시 노환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한 뒤 투병하다가, 7월초 병환에 차도가 없자 퇴원, 임종을 위해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1990년 7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가족장(家族葬)으로 진행되었으며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34-2에 위치한 가족묘에 5대조·부모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국립묘지 안장 의견에 대해 독재자와 함께 누울수 없다고 반대했다 한다. 상훈으로 '인촌문화상'을 수여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92세였다. 사후. 사후 부인 공덕귀는 앞서 간 남편을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집안에 상청을 차려두고, 거기에 남편의 사진과 촛대와 꽃을 두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매주 교회에 예배보러 나갈 때는 남편이 늘 앉았던 자리에 꽃을 갖다 놓곤 했다. 안동교회에 아버지 윤치소와 그의 사후 윤보선이 앉아있던 좌측 맨 앞줄의 왼쪽 끝 좌석은 윤보선이 앉던 자리라는 표석이 붙여졌다. 그의 사후에도 1997년까지 부인 공덕귀가 살던 그의 서울 안국동 사저는 서울특별시 사적 제438호로 지정되었다. 윤보선의 생가 역시 1984년 12월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12월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의 생가에 아산시와 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등의 주최로 윤보선 기념전시관이 열린 뒤, 바로 윤보선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1998년 한때 건국훈장 추서 대상자로 한때 논의되었으나 곧 흐지부지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내각에 반발하여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점 등으로 외면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다가, 2000년 이후 박정희 19년에 맞선 야당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안국동 사저. 그의 서울특별시 안국동 사저는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으로 후에 100칸을 넘게 되었다. 그의 안국동 사저는 한민당때부터 정계 거물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48년 9월 윤보선이 스스로 자신의 안국동 사저 별채를 한국민주당의 회합장소로 제공한 이래 계속 한민당과 민국당, 민주당의 주요 회합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저를 이승만의 이화장이나 김구의 경교장, 김규식의 삼청장, 박헌영의 혜화장에 비교하여 '안동궁'(安東宮)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사상과 신념.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았다. 민주주의 보편타당론과 상식주의. 윤보선은 항상 비서관과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물과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든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 우리식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일민주의 등을 거짓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역설했다. 다만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민주주의라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적이고 타당하다면 그것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매사에 상식을 강조하였다. 비서관 김준하에 의하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을 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마음가짐을 꼼꼼히 설명했다. 그때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상식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헌법이 따로 없다. 그들은 '상식'을 헌법으로 대치한다. 사고와 행동의 잣대를 상식으로 삼으면 나라의 일이나 개인 생활이나 정상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준하 비서관은 이를 그의 '첫 가르침'이라 회상하였다. 국익을 위한 초당적 협력. 그는 국익을 위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2년 군사 정권 집권 초, 미국의 잉여농수산물 무상 지원을 시도하면서 야당인사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자 김병로 등은 반대했지만 윤보선과 장택상은 적극 동조하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군사 정권에서 도움을 요청한 밀사가 장택상을 방문하였다. 밀사는 장택상에게 정부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비밀리에 미국을 설득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장택상 가인 김병로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김병로는 장택상과 군사정권 인사 사이에 오고 간 말을 듣고 나더니 난색을 보였다. 그는 "비록 국민의 식량 문제라고 할지라도 미국 잉여 농산물이 한국에 때맞춰 들어오고 보면 이 군사정권이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좀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그자리에서 나와 즉시 안국동 윤보선댁을 찾아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장택상이 김병로가 '나의 도미하는 문제에 대하여 난색을 표하더라'고 덧붙였더니 윤보선은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면서 김병로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으로 문제가 국민의 식량 문제인만큼 누구 심부름이든 가릴 것 없이 하루빨리 미국에 가서 힘닿는대로 해결지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장택상이 정부대표 자격이 아니면 받아줄수 없다고 했고 결국 실패했다. 장택상이 기자회견까지 마치자 윤보선은 직접 환송한다고 자택까지 불러서 저녁 대접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에서는 장택상에게 취소됐다고 연락했고, 장택상과 윤보선은 분개했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일단 정당을 초월해서 협력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군사정권 기간 내내 그는 당리당략보다는 국민의 생존권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특히 식량이나 약품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싸움보다는 일단 협력할 것을 역설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 윤보선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대단하였다. 강원룡에 의하면 '윤보선 씨는 박정희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뿌리깊은 반공입니다. 박정희가 무너질 때까지 재야 인사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힘을 합했지만, 내심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소위 운동권이 성공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이것이 전두환 정권을 멀리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라고 지적했다. 강원용은 오히려 박정희가 좌익이며 위험 인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강원용에 의하면 그는 한때 이범석과 가깝게 지냈던 김정례와도 가까이 지냈다고 하였다. 서구 사회에 대한 충격. 그는 영국 생활과 유럽 생활 중 영수증을 잘 주고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은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바가지를 씌운다는 점과 적당히 바가지를 씌우는 상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내 딴에는 중요한 물건과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가방에 넣어 수하물로 부쳤는데, 내 수하물을 취급하는 사람이 어찌된 일인지 하물표(영수증)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짐표를 요구했더니 하물취급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당신 짐은 글래스고에 가서 찾으면 되지 않소? 표는 무슨 표요?"하고 주지 않았다. 그는 잔뜩 의심하고 경계하였다. 글래스고 시에 도착해서는 마중나와 있는 윤치왕에게 이를 걱정해서 말했더니, 윤치왕은 그를 이끌고 따라오라며 화물차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 윤치왕은 그에게 짐을 가지고 가자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각자 자기 짐만 집어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남의 짐도 좋은 것이 있다 싶으면 가져가는 조선인들의 습성을 봐온 그는 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는 이 허술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였다.'고 한다. '그때 영국은 이만큼 탄탄한 사회구조에 이미 서 있었으니 10전어치 물건을 사고도 반드시 영수증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온 이 동양인에게 그 사회가 어떻게 보였을까.'하며 이를 오래도록 부끄럽게 여겼다. 정신혁명론. 그는 한국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정신적인 혁명부터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부도덕성과 비정직성으로 들었다. 윤보선은 '조국의 근대화'가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와 '정신적 근대화' 역시 병행되거나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의의 원칙에 기반한 의회주의, 보통선거, 정당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한 정부 구성을 이행할 것을 여러번 촉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박정희와 그의 유신을 반민족, 반민주, 반민생, 빈민권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원칙을 강조하되, 그 원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상식을 제시했다. 윤보선은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의 후유증이 한국 사회의 비윤리적이고 그릇된 사고와 의식, 타성과 풍조를 심었다고 진단했고, 국민들 스스로 씻어내고 정신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부패와 퇴폐의식을 조장했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를 남기는 등 한국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형사들의 교회에서의 감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이다. 3.1 구국 선언, 민주화 운동 단체 가입, 크리스찬아카데미, 민주화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날조한 사법살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인혁당 사건,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지원하거나 민주화운동 탄압에 연루되어 때문에, 그가 출석하던 안동교회는 중앙정보부와 형사들의 감시, 사찰대상이 되었다. 안동교회는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설립하여 헌당에 참여한 예장통합측 장로교회이다. 그의 집인 안동장 앞에도 중앙정보부는 3층 높이의 초소를 세워두고 그의 집 출입자들을 감시하였다 한다. 윤보선은 이를 대단히 불쾌히 여기면서도 박정희가 사망한 후에도 이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기념 거부. 윤보선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취임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1960년 8월 대통령 취임 후 취임기념우표 발행 건의가 들어왔으나 그는 살아있는 인물을 도안할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하였다 기념 주화의 발행에 대한 건의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취임 후 각료에게 각하라는 명칭은 자제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얼굴이 도안된 주화 발행 역시 거부했다. 그는 우표와 화폐에는 나라에서 기념할 만한 인물을 넣는 것이 상식이라며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 다만 1960년 8월 27일과 1961년 8월 27일의 청와대에서의 대통령 탄신일 기념행사(의전에 의한 행사)는 수용하였다. 기타. 청와대. 대통령 재직 중 청와대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꿨다. 취미. 정원의 화단 가꾸기와 독서를 즐겨하였다. 그는 밥은 꼭 잡곡밥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흰 쌀밥으로만 식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콩, 보리, 팥, 조 등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식사를 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장수의 비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박정희 집권 16년간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대선 경쟁자이자 박정희의 제3공화국, 제4공화국 16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대학교수 겸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한다. 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로도 평가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것 역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운동을 벌인 점은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그가 추진하려던 경제개발 계획에 관련하여 '경제정책 프레임은 비록 미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꽃을 피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반박정희 투쟁에 있어서의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반면에 융통성이나 타협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비서관이었던 김준하는 평하기를 '그분이 1960년 제2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변인을 맡게 되어 5·16군사정변을 함께 맞게 되고 그 이후 반독재 투쟁에도 뒤따르게 됐다. 그분은 영국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셨다. “관습법 국가인 영국에서는 상식이 곧 헌법”이라면서 매사를 보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상식을 내세웠다. 또 무슨 일이든지 한번 결정하실 때는 오래 심사숙고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고 일단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강직하게 밀고 나가셨다.' 한다. 이어 김준하는 그가 지극한 효자였다고 평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 5·16 아침 비서들이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피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 혼자만 피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부정적 평가. 5.16 관련과 친일파 행적.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던 나약한 정치인으로도 그려진다. 한영우는 5.16 군사정변 당시 그의 묵인적 행동을 지적, '이 사건(5·16군사 정변) 중심으로 그를 이해한다면, 그는 한국민주당에서 민주국민당, 그리고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보수 야당에서 구파 계열을 대표하는, 한 파벌의 정치인일 뿐이다.'라고 보았다. 더한 지적도 많다. 친일파 집안의 덕으로 학창시절을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수학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그가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으나 그가 직접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친일파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윤보선은 자유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칙론만 되풀이했다는 비판도 있다. 정대철은 '그가 내심 5·16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지지성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의 처세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의 한 신문은, 쿠데타 주체의 한 사람이었던 유원식의 말을 인용해 윤보선은 이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군인들과 교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폭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장면과의 갈등 관련. 서중석은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던 장면 국무총리가 일을 못하게 된 큰 이유가 윤보선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비판했고 박정희와 제3공화국 유신 체제에 정면도전하였으며, 1970년대 내내 인혁당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김상진 할복 사건, 명동구국민주선언,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수시로 내사를 당하고 감시인이 따라붙는 등의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에는 협력적으로 변하면서 재야인사 및 신민당계 인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4.19 혁명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UN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나는 윤 대통령이 적어도 장면 정부와 운명을 같이할 정도의 양식은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그대로 대통령의 자리에 눌러 앉아 있었다.'고 비판했다. 기타 비판. 허정은 그가 야당 대열에 복귀할 자격이 있느냐며 수시로 공격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에도 '1963년 1월 초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63년 1월 2일 김병로, 윤보선 등이 모여 민정당의 발기에 합의했다. 허정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윤보선 씨의 성급한 정치활동 재개는 나로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윤보선은 혁명정권과 한 동안 같이 일한 사람인 만큼, 혁명 세력과 대결하는 야당 대열에 복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다.'고 기술하였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매카시즘 공세를 일으키다가 되려 역공세당했다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 한국 전쟁 당시 이른바 '빨갱이 파문'과 '연좌제'로 심한 상처를 안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윤보선의 '매카시즘 대선 전략'은 과거의 상처만 되살린 꼴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도리어 '박정희가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다'는 동정심을 가져 박정희에 지지표를 쏟았다. 결국 [[박정희]는 15만표차로 당선 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6대 대선 당시 윤보선은 민중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고집하여 또다시 야당의 분열을 일으켰다 고 보는 시각도 있다. 7대 대선에서도 출마하였으나 후보사퇴를 피하려고 [[박기출]]에게 양보한 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박정희]]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숙부 [[윤치영]]에게 수인사나 목례도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 점도 비판받고 있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권위주의, 전체주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윤보선도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강준만은 "권위주의적인 윤보선과 다툼을 싫어하는 장면의 대조적인 성격"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강준만]]은 그를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고 평하였다. 인물평. 그는 쉽게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자기 사람이 되면 각별하게 챙기고, 그의 가족의 생일, 기일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러나 김남 비서관의 결혼식에 장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가지 않으려다가 [[선우종원]]이 만류하는 바람에 참석하였다. 이것이 사람들 뒤에 들어가면서 그가 [[김남]] 비서의 결혼식을 기피하더라는 말들만 돌고 돌았다.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는 인물평이 있다. 한편 그가 권위주의적이고 [[조선]]시대의 양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도 있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1960년]] [[8월 29일]] 민정시찰 시 각료들을 불렀다가 월권행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명사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전까지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신사다.", "대부호 명문집 아들이다" 이렇게만 알았는데, 이주 잘못 안 것이었다 한다. [[서중석 (대학교수)|서중석]]은 그가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대통령]]이 된 직후 내각 책임제하의 수반이었던 [[장면]] [[국무총리]]와 싸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서중석 (대학교수)|서중석]]은 윤보선이 [[1960년]] [[4·19 혁명]]이 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잘 몰랐는데 [[대통령]]이 되었다고 봤다. [[서중석 (대학교수)|서중석]]은 '윤보선처럼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사람은 없다'며 '그것을 보면 사람은 겉보기하도 다르'다고 평가했다. 깔끔하고 말쑥한 신사였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랫배가 나오지 않았고, 피부결이 늘어지지도 않았다. 눈가 주변에 약간의 주름과 검버섯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어보이는 편이었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들 탓에 그는 자신의 외모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195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윤보선은 [[최기일]]을 면담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윤보선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나는 그이를 싫어했지만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그와 가까워졌다. 내가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는 미장 그릴에서 점심 대접을 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후덕한 사람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을 내렸다. 의혹과 반론. [[5·16 군사정변]] 추인에 대한 의혹. 윤보선 본인은 [[5·16 군사정변]]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의 국가원수임에도 [[5·16 군사정변]]을 추인 내지는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더 나가 학생혁명만 혁명이고 군사혁명은 혁명이 아니냐고 항의했다고도 한다.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 외에 지지는 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5월 16일]] 윤보선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샬 그린]] 주한미대리대사를 만났다. 그들은 이미 "[[장면]] [[총리]]가 영도하는 합법적인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조선인민군|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미국대사관|주한미국대사]] [[마샬 그린|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윤보선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5.16 군사 정변]]이 터지자 그는 1군사령관 이한림 1군단장 임부택 등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국군 끼리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안 된다"면서 진압하지 말라고 했다는 의혹도 있다. [[장면]]은 윤보선이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자신의 비서관들을 보내 진압을 만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군사정변 당시 [[장면]]의 포기로 사실상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 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 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 한다. 5.16 군사정변 방조 의혹.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 (군인)|유원식]]이 제기하였다. [[유원식 (군인)|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자신의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 회고록》에서 [[유원식 (군인)|유원식]]과는 만난 적이 없으며, [[유원식 (군인)|유원식]]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윤보선은 [[내각책임제]] 하에 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의의 실권을 부러워하여 [[5·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는 묵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도연 (1894년)|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 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 (1894년)|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국무총리]] [[장면]]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장면]]은 윤보선이 비서관들을 보내 쿠데타 진압을 저지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장면]]은 윤보선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보내서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눈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장면의 주장이다.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을 진압하러 온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윤보선이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을 진압할 생각을 포기했다. [[1961년]] [[5월 17일]] 낮 11시 두 사람은 쿠데타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듣고자 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대통령은 그의 견해가 매그루더 장군과 나의 견해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현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국민들은 더 이상 장면 내각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매그루더 미8군사령부 사령관은 [[미국]] 합참의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 [[장면]]의 비서관이었던 [[박종률]]은 후일 그의 태도가 애매했다고 봤다. [[박종률]]에 의하면 ‘윤 대통령이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박종률]]에 의하면 당시 국방차관인 [[우희창]]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 윤보선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인정하고 진압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우희창]] 역시 [[매그루더]] [[4성 장군|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올 것이 왔구나. 접견실에서 [[박정희]] 일행을 만난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 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 [[현석호]]는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왔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올 것이 왔다"는 발언에 대하여 [[유원식 (군인)|유원식]]도 같은 진술을 했다. 후에 [[유원식 (군인)|유원식]]이 5·16 군사정변 직전에 대통령 윤보선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 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허정]]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사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문 조차도 했다는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를 둘러싼 논쟁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윤보선이 죽을 때까지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 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반론. 그의 비서관을 지냈던 [[김준하]]에 의하면 그는 [[5·16 군사 정변]]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김준하]]에 의하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 미 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고 덧붙였다. 김씨는“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고 증언하였다. 또 그는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의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나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그를 협력자라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일화. 대학시절 고고학을 택한 이유로 그는 고고학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그는 "인간으로서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는 학문"으로 순수과학을 할 생각이었으며, 그 가운데 [[고고학]]을 택했다고 한다. 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윤보선과 [[장택상]]은 [[박정희]]가 자신의 가계와 가난한 가정 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것을 간파하고 이를 경멸하였다. [[1961년]] [[1월 1일]] [[신정]]때 [[한국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의 [[세배]]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은 [[우표]] 두 장을 가져와 도안을 문제삼았다. 소가 도안된 우표는 61년은 신축년으로 소의 해였고, 색실로 꽃버선이 도안된 우표를 들고 와, 소(丑)을 내세워 윤씨인 자신을 모독하고 버선을 인쇄해 보선이라는 이름을 놀리는 저의가 어디 있느냐며 항의하였다. [[선우종원]]은 [[우표]] [[샘플]]을 올리는 방법과 절차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1961년]] 자신의 비서관 [[김남]]의 동생 [[김상협]]의 결혼식이 있었다. [[김상협]]은 [[조폐공사]] 직원이기도 했는데,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으로부터 결혼식 참석 부탁을 받자 그는 '[[장면|국무총리]] 참석하나요'라고 되물었다. 온다는 답변을 받자 그는 '나는 안 가겠소'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선우종원은 저와 한직장에 근무하는 데다가 [[김성수 (언론인)|인촌 선생]]의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며 항의하여 가까스로 달래자 참석하였다. [[1960년]]대 중반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쿠라 라고 공격했고 이는 [[유진산]]의 별명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계에서 여당과의 타협론을 벌이는 정치인에게는 사쿠라라는 별명이 붙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윤보선은 [[풍수설]]을 맹신하였다. 윤보선이 [[1990년]]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충남]] [[아산시|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즉 신후지지를 미리 만들어놓고 즐겨 찾았다.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보선은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보선 외에도 [[이승만]], 그의 당숙 [[윤치호]]도 단골이기도 했다. 사망 직전까지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에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초대되는 것이었으나 전직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그는 독립운동가 자격으로 초대될 수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 최초로 최면시술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 당시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건강문제로 [[류한평]] [[박사]] 등의 상담을 받고 최면시술을 받기도 했다. 가족 관계. [[파일:Yunchiho1945.jpg|섬네일|오른쪽|180px|윤보선의 당숙 친일파 [[윤치호]]]] 그의 둘째딸은 그의 스승이자 [[독립운동가]]인 [[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하여, 스승 신규식과는 사돈간이 된다. 또한 독립운동가 [[민필호]], 신명호, [[김준엽]]은 사위 신준호를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음악가]] 겸 [[방송인]] [[남궁연]]은 그의 동생 윤완선의 외손자였다. 그 이외에 [[윤원선]] 또한 동생이었으며 조부는 [[윤영렬]], 종조부로는 [[윤웅렬]], 백부는 [[윤치오]], 배다른 숙부로는 [[윤치영]], 사촌 형제로는 [[윤일선]], 5촌 당숙으로는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 육촌 형제로는 [[윤영선 (1896년)|윤영선]], 5촌 조카로는 [[윤인구 (아나운서)|윤인구]] 등이 있다. 외부 링크. [[분류:윤보선| ]]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분류:1897년 출생]] [[분류:1990년 사망]] [[분류:아산시 출신]] [[분류:호헌동지회]] [[분류:대한적십자사 대표]] [[분류: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후보]] [[분류: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분류:조선귀족 거부자]] [[분류:한국의 군정기]]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 [[분류:대한민국의 상공부 장관]] [[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 [[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 [[분류:한국민주당 당원]] [[분류: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 [[분류:민정당]] [[분류:신한당]] [[분류:신민당]] [[분류:국민당 (대한민국, 1971년) 당원]] [[분류: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자]] [[분류: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 [[분류:해평 윤씨]] [[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 [[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분류: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동문]] [[분류:에든버러 대학교 동문]] [[분류:반파시스트]] [[분류:대한민국의 테러 피해자]] [[분류:대한민국의 범죄 피해자]] [[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분류: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운동가]] [[분류:19세기 한국 사람]]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서울특별시의 국회의원]] [[분류:대한민국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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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향
나도향(, 1902년 3월 30일 ~ 1926년 8월 26일)은 일제강점기의 한국 소설가이다.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이며 필명은 나빈(羅彬)이다. 호는 도향(稻香)이다. 한성부 용산방 청파계(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영문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그러나 학비 부족으로 귀국하여 1920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2년 《백조》의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백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다. 같은 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했고, 이어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를 발표했다. 여기서 장편 《환희》를 통해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작품 경향을 바꾸어 자연주의적 수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1923년에 <은화 백동화>, <17원 50전>, <행랑자식>을, 1924년에는 <자기를 찾기 전>, 1925년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하였는데, 한국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필치로 많은 작품을 써서 천재 작가로 알려졌으나 폐병으로 인해 2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초기에는 주로 작가의 자전적 측면에 연관된 내용을 소설로 썼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감정 토로, 감상적인 예술가형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곧 습작기의 이런 서툰 창작 형태를 벗어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후의 작품은 빈곤, 사회적 계급 관계 등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낭만주의를 벗어난 사실주의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장편 소설 ≪환희≫는 ≪동아일보≫의 청탁에 의한 것인데, 작자 자신도 “사색과 구상에 들어서 조금도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붓이 내려가는 대로” 썼다고 고백했듯이, 통속 소설의 취향을 따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사건을 자세히 묘사하기보다는 모호한 내면, 환상, 영탄을 사용하는 등 비극적 운명에 대한 감상주의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러한 나도향의 낭만적 감상주의풍은 <여이발사>를 발표하면서 소설적인 간결함과 냉정한 시선, 객관성을 확보한 문체와 구성으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초기 소설의 단점을 극복해 낸 이런 소설적 성취는 나도향의 작품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한다. 즉, 낭만주의적인 감상성, 미학주의와 현실 비판의 냉정한 관찰력이 결합된 그의 소설은 인간의 욕망, 내면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적인 것과 그런 욕망이 사회 속에서 드러내는 행태에 대한 객관적 묘사와 관찰을 동시에 보여준다. 생에 대한 원초적 의지와 욕망이 사회적인 제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현상에 대한 그의 고찰은 낭만적 열정과 사실주의적인 ‘관계성의 냉정한 분석’을 포함한 것이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의 토속성과 원시적 건강성, 생명력이 낭만주의적인 것이라면, 이 세 작품이 암시하는 욕망의 실패와 좌절은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가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낭만적 이상이 지닌 건강성은 현실의 타락한 관계, 환경에 의해서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나도향의 소설은 이런 일그러진 원초성, 문명 이전의 건강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특징과 가치를 지닌다. 주요작품으로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등이 있는데, 민중들의 슬프고 비참한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작품들 중 《벙어리 삼룡이》,《뽕》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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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아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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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리
문소리(1974년 7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영화 감독이다. 생애. 1974년 7월 2일 부산광역시에서 아버지 문창준 어머니 이향란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으로 상경했다.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시절에는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입학을 준비하던 무렵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오디션에서 여자 주인공인 윤순임 역으로 발탁되어 스크린에 데뷔했으며 이에 앞서 MBC 공채 26기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으나 탈락하기도 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하고 영화에 집중하였다. 문소리라는 이름을 대중에 알린 것은 《박하사탕》에 이어 2번째로 설경구와 호흡을 맞춘 2002년작 《오아시스》에서였다. 문소리는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에 걸려 자기 방 안에 갇혀 사는 여주인공 역할을 맡아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자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바람난 가족》에서는 옆집 고등학생을 유혹하는 변호사 부인 역을, 《효자동 이발사》에서는 이발사 부인을 연기한다.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영상예술학 영화제작 전공 과정)에서 《여배우는 오늘도》를 연출하고, 석사 학위 논문 「단편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제작보고서-연출을 중심으로-」를 썼다. 2003년 정재일의 뮤직비디오 〈눈물꽃〉에 출연했고, 이를 연출한 영화 감독 장준환과 2006년 12월 24일 결혼했다. 문소리는 진보신당의 당원으로2008년 총선에서 진보신당 심상정 덕양구 갑 국회의원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하였으며 2011년에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 단일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멘토로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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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지털(, )은 아날로그를 연속적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離散的)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용어는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digit에서 나온 것으로, 숫자를 세는 데 쓰인다. 디지털 컴퓨터, 노트북, 데스크톱 컴퓨터, 프린터, 태블릿 PC에서는 모든 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한다. 문서와 통계 자료뿐만이 아니라 음성 자료도, 영상 자료도 이산적인 값으로 처리한다. 디지털 자료는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음악이나 화상과 같은 아날로그 자료 샘플을 일정한 주기로 채집하여 디지털로 변환하는 과정을 샘플링이라 한다. 이 때, 초당 샘플링 회수는 아날로그 주파수보다 2배 더 높아야 앨리어싱 현상(계단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품질은 필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이어주는 대표적인 기계로는 모뎀이 있다. 90년대에 PC가 처음 대중화되었으며 이를 시점으로 90년대 중반부터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1997년 삐삐를 제치고 등장한 시티폰으로 이동통신 업계도 급변했으며 1999년 국민PC가 첫 도입되어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리게 된다. 200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DVD와 디지털 카메라도 이 시기에 등장했지만, 90년대에는 크게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인 2000년대까지 디지털 시장은 전자시장 별로 세분화되어 나뉜 구조였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디지털 시장에는 MP3, PMP, PDA, 전자사전, 디지털 카메라 등이 각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며 사용되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시티폰은 피쳐폰으로 대체되었고 피쳐폰은 세분화되어 있는 디지털 시장의 기능을 흡수하려 여러 시도를 했으나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날로그 매체는 2000년대가 지나가는 동안 디지털 기술로 대체되어 조금씩 사양길을 걸었지만 완전히 몰락하진 않고 2000년대 후반까지 디지털 기술과 공존했다. 2007년, Apple의 아이폰 출시를 시작으로 2010년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며 디지털 시장은 엄청난 격변을 맞는다. 수많은 분야로 세분화되어 있던 디지털 전자시장의 기능이 작은 모바일 기기에 하나에 전부 들어간다는 스마트폰의 특징은 디지털 기술의 집합체로 여겨졌다. 결국 기존에 존재하던 전자시장은 스마트폰에 흡수되어 완전 소멸되었으며 기존 PC 시장도 큰 타격을 받았다. 아날로그 매체 역시 스마트폰의 대중화 이후 인류의 삶에서 자동 소멸되었다. 기존의 디지털 시장마저도 스마트폰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밀리고 있던 아날로그가 설 자리가 없었고, 기술의 발달로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비디오테이프 등의 아날로그 방식을 더 이상 대중들이 이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디지털 매체의 선두주자로 자리잡은 지 10년이 넘은 2020년대에도 다양한 미래 디지털 기술 개발이 진행되고 있으며 스마트폰 역시 초기 버전과는 차이점이 분명할 정도로 발달하였다. 디지털 세대. 1990년대 중반 디지털 매체의 태동 이후, 2010년대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한 디지털 시장의 발달과 함께 기존의 아날로그 매체가 아닌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인류학자들은 디지털 매체를 처음 접한 시점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하고 있으며 X세대, Y세대, Z세대, 알파세대 등 여러 세대가 구분되었다. 보통 1980년대생이 주축인 밀레니얼 세대부터 디지털 매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시작하는데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까지 포함하는 Y세대의 경우 디지털 매체가 태동하기 전에 출생해, 기존의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의 영향을 동시에 받으며 스마트폰의 발전까지 목격하였다. 이들 세대의 경우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 모두를 익숙하게 사용하며, 2010년대 이후 스마트폰 대중화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Z세대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 인터넷 등 디지털 매체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디지털 네이티브 1세대로 분류되고 있으며, 동시에 학창시절부터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한 첫 세대이다. 이들 세대는 디지털 매체가 태동하여 아날로그 매체와 비등한 점유율을 보이던 시기에 출생하여 유년기부터 디지털 매체의 영향을 받으며, 청소년기부터 스마트폰과 모바일 문화에 노출되었다. 또한 이들 세대는 스마트폰 대중화 이전의 디지털 시장과 아날로그 매체에도 어느 정도 익숙함을 보이며, 아날로그 매체의 영향을 받은 마지막 세대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의 뒷 세대인 200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태어난 세대는 유년기부터 스마트폰을 접한 세대로, 이전 디지털 시장과 아날로그 매체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알파 세대는 2010년대부터 출생한 세대를 일컫는 새로운 세대구분으로, 이들부터는 스마트폰과 모바일 문화에 유년기부터 노출되어 메타버스,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 기계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컴퓨터과학에 익숙한 세대이다. 알파 세대의 구성원들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에 출생했기에 스마트폰 이전의 시대상과 세대적으로 무관하며, 기성 세대와 완벽한 차이점을 보이는 알파세대의 등장은 2020년대에 들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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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민코프스키
헤르만 민코프스키(, 1864년 6월 22일 - 1909년 1월 12일)는 러시아 제국 태생 독일 수학자이다. 수론의 문제를 기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푸는 기하학적 수론, 수리물리학, 상대성 이론 등에 업적을 남겼다. 생애. 러시아 제국 카우나스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5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이후 본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다. 취리히 시절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민코프스키는 "n"개의 변수를 갖는 2차 형식(quadratic forms)을 연구하는 과정에 "n"차원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과 관련된 것을 알아차렸다. 1896년 출판한 저서 《수의 기하학》()에서 수론의 문제들을 기하학적인 방법과 연관시켰다. 1902년 당시 수학의 중심지였던 괴팅겐 대학교에 오랜 친구였던 다비트 힐베르트의 도움으로 수학 교수직을 얻어 연구하였다. 민코프스키는 또한 최초로 시공간을 통일된 기하학으로 다룬 사람이다. 1907년에 민코프스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 민코프스키 공간이라 불리는 비유클리드 공간을 이용해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관없는 두 개체가 아니라, 합쳐져 4차원 시공간을 이루며, 그를 통해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대칭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이 기하학적인 방법은 나아가 일반 상대성 이론이 만들어지는데 핵심적인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민코프스키 공간을 일반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고 실제로 그 방향으로 연구되었다. 1908년 9월 21일 민코프스키는 제80회 독일 자연과학자 모임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는데, 이 연설은 지금도 유명하다. 1909년 괴팅겐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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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화성(火星, )은 태양계의 4번째 행성이며, 4개의 지구형 행성 중 하나이다. 표면의 철의 산화로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동양권에서는 불을 뜻하는 화(火)를 써서 화성 또는 형혹성(熒惑星)이라 부르고, 서양권에서는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따 Mars라 부른다. 오늘날 영어에서 3월을 뜻하는 March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지구와의 평균 거리는 7,800만 km이다. 화성의 지름은 지구의 1/2 정도이다. 자전 주기는 지구보다 24시간 37분 22초로 더 길다. 매리너 4호가 1965년에 화성을 처음으로 근접 비행을 하기 전까지 과학계 안팎의 사람들은 화성에 대량의 물이 존재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이러한 기대의 근거는 화성의 극지방에서 밝고 어두운 무늬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 사람들은 농업을 위한 관개수로가 화성에 있으리라 기대하기까지 했다. 이는 사실 20세기 초·중반의 공상과학 작가들의 상상에 영향받은 것으로, 1950년대 이후의 탐사선에 의한 관측으로 화성 운하는 존재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물과 생명체의 발견에 대한 기대로 많은 탐사선들에 미생물을 찾기 위한 센서들이 탑재되어 화성에 보내졌다. 화성에서는 다량의 얼음이 발견되었고,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화성 표면에서의 액체상태의 물은 낮은 대기압으로 인하여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화성의 극관은 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극관에 존재하는 물은 화성의 표면을 11m의 깊이로 뒤덮기에 충분히 많은 양이 존재한다. 2016년 나사는 화성 표면 안에 얼음이 존재할 것이라고 새로운 발표를 하였다. 화성의 자전 주기와 계절의 변화 주기는 지구와 비슷하다. 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올림푸스 화산이 있으며, 역시 태양계에서 가장 큰 계곡인 매리너스 협곡과 극관을 가지고 있다. 화성은 밤하늘에서 붉은 빛을 띄며 맨눈으로도 쉽게 관측이 된다. 겉보기 등급은 1.6 ~ 3.0등급이며 태양, 달, 금성, 목성 다음으로 하늘에서 가장 밝은 태양계의 천체이다. 물리적인 특성. 화성은 붉게 타는 듯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화성의 표면적은 지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부피는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은 두 개의 작은 위성인 포보스와 데이모스를 가지고 있다. 화성의 대기권은 매우 얇으며, 표면의 기압은 7.5밀리바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 대기의 95%는 이산화탄소로 덮여 있으며, 이 밖에 3%의 질소, 1.6%의 아르곤과 약간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지질. 궤도선의 관측과 화성 기원의 운석에 대한 분석 결과에 의하면, 화성의 표면은 기본적으로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화성 표면의 일부는 지구의 안산암과 같이 좀 더 이산화규소가 풍부하다는 증거가 있으나 이러한 관측은 규산염과 같은 유리의 존재를 통해서 설명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표면의 대부분은 산화철의 먼지로 덮여있다. 화성의 표면에 일시적이나마 물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화성 표면에서 발견된 암염이나 침철석과 같이 대체로 물이 존재할 때 생성되는 광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화성 자체의 자기장은 없지만, 과거 행성 표면의 일부는 자화된 적이 있음이 관측을 통해 밝혀졌다. 화성에서 발견된 자화의 흔적(고지자기)은 지구의 해양지각에서 발견되는 교대하는 띠 모양의 고지자기와 비교되어 왔다. 1999년에 발표되고 2005년에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로부터의 관측 결과의 도움으로 재검토된 이론에 따르면, 이들 지자기의 띠들은 과거에 있었던 화성의 판구조 활동의 증거일 수 있다. 극 이동(polar wandering)으로도 화성에서 발견된 고지자기를 설명할 수 있었다. 화성의 내부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화성은 밀도가 낮은 물질로 중첩된 고밀도 금속 중심부로 분화했다. 현재 내부 모델은 반경이 약 1,794 ± 65km(1,115 ± 40 mi)인 코어를 의미하며, 주로 유황 16–17%의 철과 니켈로 구성된다. 이 황화 철(II) 황화핵 지구의 핵보다 가벼운 원소가 두 배더 풍부하다고 추측된다. 중심부는 행성에서 많은 지각과 화산 형상을 형성한 규산염 맨틀에 둘러싸여 있지만, 휴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리콘과 산소 외에 화성 지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철, 마그네슘, 알루미늄, 칼슘, 칼륨이다 노아키안 시대는 노아키스 테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성의 형성으로부터 38억~35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노아키안 시대의 표면은 많은 거대한 크레이터로 덮여 있다. 타르시스 벌지는 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후기에는 엄청난 양의 액체 물에 의한 홍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헤스퍼리안 시대는 헤스퍼리안 평원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졌다. 35억 년 전부터 18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헤스퍼리안 시대의 화성에서는 넓은 용암대지가 형성되었다. 아마조니안 시대는 아마조니스 평원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18억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대이다. 아마조니안 지역은 크레이터가 거의 없으나 상당한 변화가 있는 지형이다. 올림푸스 화산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고, 다른 지역에서 용암류가 형성되었다. 마스 익스프레스 오비터의 OMEGA 가시광-적외선 광물학 매핑 스팩트로메터 자료를 기초로 또 다른 시대 구분이 제시되고 있다. 지형. 화성의 좌표를 설정하기 위하여서는 자오선과 0점 고도가 정해져야 한다. 화성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해수면'이 없어서, 0점 고도면이나 평균 중력 표면이 임의의 지점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적도와는 달리 경도의 기준점은 임의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통된 규약을 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임의적으로 사이너스 메리디아니(Sinus Meridiani, 적도만('Equatorial Gulf')) 안의 분화구가 0점 자오선을 나타내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화성 지형의 몇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화성은 극 지방이 얼음과 이산화탄소를 포함하는 얼음 지대로 덮여 있다. 또한 화성에는 발레스 매리너리스(Valles Marineris) 또는 "화성의 흉터"라고 불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협곡 지대]가 있다. 이 협곡 지대는 4000km의 길이에 깊이는 7km에 이른다. 화성은 밀도가 낮은 물질로 중첩된 고밀도 금속 중심부로 분화했다. 현재 핵의 반지름이 약 1,794 ± 65km(1,115 ± 40 mi)이며, 유황 16–17%의 철과 니켈로 구성된다. 이 황하 철 핵은 지구의 핵보다 가벼운 원소가 두 배더 많다고 추측된다. 중심부는 규산염 맨틀로 둘러싸여 있어 많은 지각과 화산 형상을 형성했지만, 휴면상태로 보인다. 실리콘과 산소 외에 화성 지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철, 마그네슘, 알루미늄, 칼슘, 칼륨이다. 화성 지각의 평균 두께는 약 50km(31mi)이며, 최대 두께는 125km(78mi)이다. 참고로 지구의 지각은 평균 40km(25mi)이다. 화성 북반구와 남반구 지형의 비대칭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북쪽 부분은 용암층이 흘러내림으로 인해 평평하고, 남쪽은 고지대에 오래전의 충격으로 인해 구멍이 파이고 분화구가 생겨나 있다. 지구에서 본 화성의 표면은 확실히 두 부분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먼지와 산화철이 섞인 모래로 뒤덮인 좀 더 창백한 부분은 한때 '아라비아의 땅'이라 불리며 화성의 대륙으로 여겨졌고, 어두운 부분은 바다로 여겨졌다. 지구에서 보이는 가장 어두운 부분은 시르티스 메이저(Syrtis Major)이다. 화성에서 가장 큰 분화구는 헬라스 분지(Hellas impact basin)인데, 가벼운 붉은 모래로 덮여 있다. 화성 표면 지역의 이름을 짓는 작업은 국제 천문 연맹의 '행성계 명명법 워킹 그룹'이 담당하고 있다. 대기. 화성의 대기압은 0.6에서 1.0kPa로, 지구의 대기 밀도와 비교하면 1/100 정도로 매우 낮다. 대기가 적으므로 기압이 매우 낮고 물이 있더라도 기압 때문에 빨리 증발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과거의 화성은 물이 풍부하고 대기도 지금보다 컸으리라고 추측한다. 대기의 주성분인 이산화탄소가 얼어 거대한 극관을 형성하는 과정이 양극에서 교대로 일어나고 이산화탄소는 눈층을 형성하고 봄이 되면 증발한다. 자기권. 아주 오래전 화성은 태양풍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자기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40억 년 전 화성의 다이나모가 멈추고 난 뒤에는 투자율이 높은 광물에 잔류자기가 남아있는 정도밖에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광물은 풍화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남반구의 고지의 일부에서만 고지자기를 관측할 수 있다. 태양풍은 화성의 전리층에 직접 닿기 때문에 화성의 대기는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있다고 여겨지나 그 양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와 마스 익스프레스는 화성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이온화된 대기의 입자를 탐지하였다. 공전과 자전. 화성의 궤도 이심률은 약 7%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태양계에서 이보다 더 이심률이 큰 궤도를 가지는 행성은 수성밖에 없다. 태양까지의 평균거리는 약 2억 2천만 km(1.5 천문단위)이며, 공전 주기는 686.971일이다. 화성의 태양일(솔; sol)은 지구보다 약간 길어서 24시간 37분 22초 정도이다. 화성의 자전축은 25.19도만큼 기울어져 있어서 지구의 기울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 결과 화성에서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계절이 나타난다. 하지만 공전 각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계절의 길이는 지구에 비해 약 2배정도 된다. 위성. 포보스(Phobos)와 데이모스(Deimos)가 화성의 위성이다. 이들은 늘 달 쪽으로 같은 면을 향하고 있다. 포보스의 화성 주위 궤도가 화성 자체가 자전하는 속도보다 빠르며 아주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언젠가 미래에는 포보스가 화성 표면에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반면에 데이모스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고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두 위성은 모두 1877년 미국인 천문학자 아사프 홀(Asaph Hall)이 발견했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르스의 두 아들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생명체. 액체상태의 물의 존재를 가지고 생명가능성을 논의한다. 이러한 생명가능성을 논하는 곳은 생명가능지대의 안에 존재하는 곳이다. 태양의 생명가능지대는 금성을 넘은 곳부터 시작하여 화성 부근까지 존재한다. 화성은 근일점에 도착하였을때, 이 지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화성의 옅은 대기가 액체상태의 물이 화성의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막는다. 화성의 과거 물의 흐름은 생명거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최근 연구는 화성에 존재하는 물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산도가 높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화성에는 자기권이 없기 때문에 강렬한 태양풍을 막을 수 없다. 또한 화성의 옅은 대기로 인한 낮은 대기압으로 화성의 표면에 액체상태의 물의 형태가 유지 될 수 없다. 지질학적으로 화성의 화산 활동은 종결되어 화성의 내부 화학물질이 화성의 표면으로 순환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화성의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증거로부터 미루어 볼 때 화성이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지금까지는, 실제 화성에 생명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바이킹 탐사선은 70년대 중반에 화성 표면에서 미생물을 탐지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하여, 과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되고 있다. 존슨 우주센터 연구소는 화성에서 날아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운석 AL 빨리 분해되기 때문에 소량의 이들 분자는 화성에 생물이 사는 증거로 여겨질 수 있으나, 이들 원소는 화산이나 사문함화작용 같은 지질학적 작용에 의해서도 공급될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물이 흘렀던 적이 있기는 하다. 화성에는 또한 자기권이 없으며 대기가 희박하며, 지각 열류량은 매우 적으며, 외부의 운석 또는 소행성들과의 충돌~ 또는 태양풍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지질활동이 멈춘 화성의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생명활동에 의해서만 공급되므로, 안면석이나 화성 피라미드와 같은 음모론적인 가설도 있으나 과학적인 의미로 주목받지는 못하다. 화성 탐사. 무인 탐사선. 지금까지 인류는 다수의 로봇 탐사선을 화성에 보냈고, 그중 몇몇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탐사의 실패율은 매우 높았다. 실패 사례 중 몇은 명백한 기술적 결함에 따른 것이었지만, 많은 경우 연구자들은 확실한 실패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사례는 지구-화성 "버뮤다 삼각지대" 혹은 화성탐사선을 먹고 사는 은하귀신(Ghoul)라는 농담을 낳았다. 화성 로봇 탐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사 시간대가 약 2년 남짓(화성의 공전 주기)의 기간을 주기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1960년 소련은 두 기의 탐사선을 화성궤도를 지나쳐 돌아오는 계획으로 발사하였으나, 지구궤도에 도달하는 데에 실패한다. 1962년 소련은 세 기를 더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두 기는 지구 궤도에 머물렀고, 나머지 하나는 화성을 돌아오는 동안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졌다. 1964년에 또 한번의 시도가 실패한다. 1962년에서 1973년 사이에, NASA(나사)의 제트 추진 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는 내태양계(inner solar system)를 탐험할 10개의 매리너 우주선을 설계·제작하였다. 이 우주선은 금성, 화성, 수성을 최초로 탐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매리너 우주선은 비교적 작은 로봇 탐사선으로 아틀라스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각 우주선의 무게는 500 kg를 넘지 않았다. 매리너 3호와 4호는 동일한 기체로, 최초로 화성을 지나치며 관찰하도록 설계되었다. 매리너 3호는 1964년 11월 5일 발사되었으나, 우주선의 윗부분을 덮은 뚜껑이 적당히 열리지 않았고, 화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3주 후 1964년 11월 28일 매리너 4호는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8개월의 항해를 시작한다. 매리너 4호는 1965년 6월 14일 화성을 지나며, 다른 행성의 근접 사진을 최초로 찍어냈다. 오랜 기간 동안 작은 테이프 레코더에 기록된 그 사진들은 달 모양의 분화구들을 보여 주었다. 그 분화구 들 중 몇몇은 서리가 덮여 추운 화성의 밤을 보여주었다. NASA는 계속해서 매리너 계획을 수행했다. 그들은 다음 발사 시간대에 근접 비행 시험을 또다시 수행하였다. 이 비행선들은 1969년에 화성에 도달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매리너 6호와 7호를 참조하라. 다음 발사 때 매리너 계획은 두 대의 비행선 중 한 대를 잃는 사고를 겪었다. 살아남은 매리너 9호는 성공적으로 화성 궤도에 진입하였다. 매리너 9호가 화성에 도달했을 때, 그것과 두 대의 소련 인공위성은 행성 전영역에 걸쳐 먼지 폭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폭풍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화성 표면의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매리너 9호는 포보스의 사진을 찍었다. 폭풍이 화성의 표면 사진을 찍기에 충분할 만큼 가라앉았을 때, 전송된 사진은 이전 임무의 결과로 온 사진보다 더 높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화성에 한때 액체 형태의 물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증거하는 첫 번째 사진이었다. 1976년에 두 대의 바이킹 호가 화성 궤도에 들어가 각각 착륙 모듈을 내려 화성 표면에 내려 앉았다. 이 임무를 통해 인류는 첫 번째 컬러 사진과 더욱 확장된 과학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화성 탐사 계획에서 발사한 우주선들은 바이킹보다 몇 년 일찍 수많은 착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매리너 계획이 수행했던 것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마스 패스파인더는 1997년 7월 4일에 화성에 착륙하여, 소저너라는 매우 작은 원격 조정체를 움직여 착륙 지점 주위의 몇 미터를 여행하고, 화성의 환경 조건을 탐색하고 표면의 돌들을 수집해왔다. 다음 탐사는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Mars Global Surveyor)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임무는 20여 년간의 화성 탐사역사에서 첫 번째로 성공적인 것이었고, 1996년 11월 7일에 발사되어 1997년 9월 12일에 화성 궤도에 도달하였다. 1년 반 정도가 흐른 후, 회전 궤도가 타원형에서 원형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주선은 1999년 3월부터 기초적인 매핑 임무에 돌입했다. 우주선은 화성을 화성력으로 1년, 지구력으로는 거의 2년간 저고도에서 관찰했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호는 최근인 2001년 1월 31일 그 기초적인 임무를 완료하고 현재는 2단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탐사는 화성 표면, 대기권, 그리고 내부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지난 탐사 계획에서 거둬들인 모든 결과물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가져왔다. 이 가치있는 데이터들은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 MOLA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7월 31일 미국 국립항공우주국은 화성탐사선 피닉스가 화성에 물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했다. 피닉스는 2008년 11월 10일 임무가 종료되었다. 2021년 2월 퍼서비어런스 화성 탐사차가 화성착륙에 성공하였다. 퍼서비어런스는 화성 탐사차로 2020년 7월 30일 지구를 떠나 2021년 2월 18일 화성에 착륙하였다. 이로써 인간이 어떤 조건으로 착륙해야 되는지 등을 탐색하는등 유인 탐사선 계획등에 주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관측의 역사. 기원전 1600년경에 화성에 대한 관측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화성은 불과 같이 붉게 빛나고 다른 천체와 달리 하늘에서 이상하게 움직인다고 알려졌다. ※ 동양의 고대기록에는 낮에 화성을 본 것이 있으나, 검증결과 금성의 착오였으며, 화성을 낮에 맨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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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힐베르트
다비트 힐베르트(, , 1862년 1월 23일 ~ 1943년 2월 14일)는 독일의 수학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약한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형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학을 공리화하였으며, 힐베르트 공간을 정의하여 함수해석학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전 수학계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사후에도 힐베르트 문제를 통해 수학계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생애. 유년. 1862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오토 힐베르트()와 마리아 테레제 힐베르트(, 에르트만·)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판사였다. 김나지움(독일의 고등학교)까지는 수학 이외의 과목에 흥미가 없어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지만, 좀 더 개방적인 학교로 옮긴 후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수학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1880년 힐베르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힐베르트는 하인리히 베버에게서 수론과 함수론 강의를 듣고, 와중에 당시 유행하던 불변식론을 접하였다. 힐베르트의 2년 연하인 헤르만 민코프스키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의 청강을 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고, 베버의 후임으로 원주율의 초월성을 증명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오고, 그와 같이 아돌프 후르비츠가 사강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후르비츠 세 사람은 평생 친구로 남았다. 힐베르트는 대수적 형식의 불변성에 대한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1884년 12월 구두시험을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성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힐베르트는 1885년 여름 후르비츠의 권유로 펠릭스 클라인이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다. 1886년 펠릭스 클라인의 권유로 파리 유학을 떠나, 당시 최고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등과 교우하고, 귀국길에 레오폴트 크로네커도 만났다.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변식에 관한 논문과 《가장 일반적인 주기함수》라는 제목의 강의시험을 통과하여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였다. 1888년 초에 힐베르트는 파울 고르단()을 만나 소위 "고르단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후 라차루스 푹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레오폴트 크로네커 등을 방문하고, 1888년 9월 귀향하여 고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힐베르트는 1892년 30세의 나이로 혼인하였고, 취리히로 간 후르비츠의 후임자로 부교수 자리에 오른다. 1893년에는 e와 원주율의 초월성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발표하였다. 곧 뮌헨으로 떠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의 뒤를 이어 정교수가 되었다. 1893년 독일 수학회에서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당시까지의 대수적 수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1895년 괴팅겐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수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래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공저로 계획되었는데, 민코프스키는 자신의 몫을 작성하지 못하였고, 1897년 4월 힐베르트는 자신이 작성한 부분만을 출판하였다. 이는 정수론에 대한 교재로서 수학계의 명성을 얻었다. 1898년 ~1899년 겨울 학기에는 기하학의 기초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그 강의록을 정리하여 《기하학의 기초》()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리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공리체계는 완비적이고, 서로 독립적이고,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성질을 제시하였다. 그 뒤 힐베르트는 기하학의 연구를 계속하였고, 또한 디리클레 원리의 결점을 보완하며, 변분법에 대한 연구도 계속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세계 수학자 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힐베르트는 20세기 수학의 가장 큰 과제들을 선별한 23개의 힐베르트의 문제들을 발표하였다. 이 문제들은 20세기 수학의 주된 흐름을 예견하였고, 새로운 수학적 분야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1901년 힐베르트는 에리크 이바르 프레드홀름의 논문을 접하고, 적분방정식론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 내용은 1912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1902년 베를린으로부터 푹스의 후임자리를 제안받으나 거절하고, 그 대신 괴팅겐 대학교에 민코프스키의 자리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1908년 오랜 미제였던 웨어링의 문제를 증명하였다. 1909년에는 오랜 친구였던 민코프스키가 맹장염으로 사망하였다. 수학뿐만 아니라, 힐베르트는 물리학의 공리화를 꿈꾸었다. 물리학의 공리화는 힐베르트의 6번 문제였고, 이 문제의 일환으로 힐베르트는 중력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15년 11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물리학의 기초》()라는 논문으로 같은 결론을 출판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뒤 라위트전 브라우어르 등은 직관주의를 주장하였고, 고전적 수학의 귀류법 등 여러 증명법들을 배척하였다. 힐베르트는 직관주의에 대응하여 수학은 공리계를 통한 수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식주의를 주장하였다. 1925년 악성빈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미국에 있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음 해 쾌유하였다. 192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세계 수학자 대회에 독일의 수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의 수학자들을 이끌고 참석하였다. 말년. 힐베르트는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고, 같은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1931년에 쿠르트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여, 힐베르트가 꿈꾸었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공리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힐베르트는 불완전성 정리를 피하기 위하여,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80세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은퇴하면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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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사용 허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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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하이퍼 텍스트 마크업 언어(, )는 웹 페이지 표시를 위해 개발된 지배적인 마크업 언어다. 또한, HTML은 제목, 단락, 목록 등과 같은 본문을 위한 구조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링크, 인용과 그 밖의 항목으로 구조적 문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미지와 객체를 내장하여 대화형 양식을 생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HTML은 웹 페이지 콘텐츠 안의 꺾쇠 괄호에 둘러싸인 "태그"로 되어있는 HTML 요소 형태로 작성한다. HTML은 웹 브라우저와 같은 HTML 처리 장치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자바스크립트, 본문과 그 밖의 항목의 외관과 배치를 정의하는 CSS 같은 스크립트를 포함하거나 불러올 수 있다. HTML과 CSS 표준의 공동 책임자인 W3C는 명확하고 표상적인 마크업을 위하여 CSS의 사용을 권장한다. 역사. 개발. 1980년,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의 계약자였었던 물리학자 팀 버너스리가 HTML의 원형인 인콰이어를 제안하였다. 인콰이어는 CERN의 연구원들이 문서를 이용하고 공유하기 위한 체계였다. 1989년에 팀 버너스리는 인터넷 기반 하이퍼텍스트 체계를 제안하는 메모를 작성했다. 버너스 리는 1990년 말에 HTML을 명시하고, 브라우저와 서버 소프트웨어를 작성했다. 그 해에 버너스리와 CERN 데이터 시스템 엔지니어 로버트 카일리아우와 함께 CERN측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 프로젝트는 CERN으로부터 정식으로 채택 받지 못했다. 버너스리의 개인적인 기록에 1990년부터 "하이퍼텍스트가 사용되는 여러 분야의 일부"를 열거했고 백과사전을 그 목록의 첫 번째로 두었다. 최초 규격. HTML 최초의 일반 공개 설명은 1991년 말에 버너스리가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문서를 "HTML 태그"("HTML tag")로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머릿글자로 이루어진 20개의 요소를 기술하였고, 상대적으로 HTML의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하이퍼링크를 제외한 HTML 태그들은 CERN 자체의 SGML 기반 문서화 포맷인 SGML GUID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이 요소 중 13개는 HTML 4 버전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HTML은 동적인 웹 페이지의 웹 브라우저를 통한 문자와 이미지 양식이다. 문자 요소의 대부분은 1988년 ISO 기술 보고서 9537 "SGML을 이용한 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SGML 개념의 일반적인 마크업은 단지 개별 효과 보다는 요소 기반이고 또한 구조와 처리의 분리(?)(HTML은 CSS와 함께 이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해 왔다.) 버너스리는 SGML 응용 프로그램이 되는 HTML을 고안해야 했고 그것은 공식적으로 IETF(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에 의하여 1993년 중반, HTML 규격에 대한 최초의 제안을 간행물로 정의했다. (버너스리와 덴 콘놀리에 의한 문법을 규정하는 SGML 문서 형식 정의(SGML DTD)가 포함된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HTML)" 인터넷 초안) 이 초안은 6개월 후 만료된다. 하지만 NCSA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인라인 이미지를 내장하는 사용자 정의 태그의 사례는 주목할 만 했고, 성공적인 프로토타입에 대한 표준을 기반한 IETF의 철학을. 마찬가지로 데이브 라그렛의 경쟁 인터넷 초안인 "HTML+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포맷)"은 1993년 말에 테이블과 기입양식 같은 요소들을 이미 구현하여 표준화 제안을 했다. 이후 1994년 초 HTML과 HTML+ 초안은 만료되었고, IETF는 HTML 작업 그룹을 설립해 1995년에 HTML 2.0을 완성한다. 최초의 HTML의 규격은 미래에 수행될 HTML 표준을 기반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RFC 1996년에 HTML 2.0은 HTML과 HTML+ 초안의 아이디어가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HTML 2.0 지정은 이전의 초안들로부터 새로운 버전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IETF의 후원하에 개발은 상충하는 이해 관계 때문에 지연되었다. 1996년부터 HTML 규격은 상용 소프트웨어 제작사의 투입으로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W3C)에서 유지해 왔다. 하지만 2000년부터 HTML 또한 국제 표준(ISO/IEC 15445:2000)이 되었다. 현재 W3C에 의해 발표된 최신 규격은 1999년 말에 발표된 HTML 4.01 권고안이며 2001년에 문제와 오류들이 수정되어 발표된 안이 최종 승인되었다. 표준 버전의 역사. HTML 버전 스케줄.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은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이 버전이 증가되지 않고 조금 수정되어 재발표되었다.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그리고 2001년 5월 12일에 그것에 대한 최종 오류 수정 사항 이 발표되었다. ("ISO HTML", HTML 4.01 Strict 기반)이 ISO/IEC 국제 표준과 함께 출시되었다. ISO에서 이 표준안은 ISO/IEC JTC1/SC34 (ISO/IEC 공동 기술 위원회 1, 소위원회 34 - 문서 표현과 처리 언어)의 범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XHTML 버전. XHTML은 XML 1.0을 이용하여 HTML 4.01을 새로 만든 독립된 언어다. 마크업. HTML 마크업은 HTML 요소(엘리먼트, )와 그들의 속성()과 문자 기반 데이터 형태와 문자 참조와 엔티티 참조를 포함하는 몇 가지 핵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또 다른 중요한 구성 요소로는 문서 형식 정의(DTD, )를 명시하는 문서 형식 선언()이다. 차기 HTML 5에서는 DTD를 지정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레이아웃 모드로 지정된다 . Hello world 프로그램은 프로그래밍 언어와 스크립트 언어 그리고 마크업 언어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HTML에서의 Hello world 프로그램은 단 9줄에 불과하다: <!doctype html> <html> <head> <title>Hello HTML</title> </head> <body> <p>Hello World!</p> </body> </html> (<html>과 </html>사이의 문자는 웹 페이지를 표현한다. <body>와 </body>사이의 문자는 표시되는 페이지의 내용이며, <head>와 </head>사이의 문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웹 페이지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해더 정보를 담고 있다.<title>과 </title>사이의 문자는 웹 브라우저의 페이지 제목을 정의하는데 사용된다.)Hello world 프로그램을 최대로 짧게 만들고 싶다면: Hello world 이라고 해도 되지만, 웹 표준에 위배된다.이 문서 형식 정의는 HTML 5이다. 만약 codice_1로 선언하지 않은 경우 대다수의 브라우저는 "쿽스 모드"로 렌더링한다. HTML 요소. HTML 문서는 완전한 HTML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HTML 요소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다: "시작 태그"(Start Tag)와 "종료 태그"(End Tag) 와 같은 태그 한 쌍; 몇 가지 요소 속성은 그 태그들 내에서 특성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문자와 그래픽 정보 "콘텐츠"를 화면에 표현한다. HTML 요소는 태그의 사이와 포함되는 모든 것이다. 태그는 꺾쇠괄호(<>)로 둘러싸인 키워드이다. HTML 요소의 일반적인 형태. <tag>"보이는 내용"</tag> HTML 요소의 이름은 태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종료 태그의 이름은 슬래시 문자 ("/")로 시작된다. HTML 요소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 <tag attribute1="value1" attribute2="value2">"보이는 내용"</tag> 속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시작 태그의 기본값을 사용하게 된다. 태그의 기본적인 형태. HTML의 머리부분 (<head>...</head>), 보통 제목은 <head>의 안에 포함된다. 예제: <head> <title>제목</title> </head> 단락 구획. <p>단락 1</p> <p>단락 2</p> 새 줄(<br>), <br> 와 간의 차이점은 'br'은 페이지의 의미론적 구조를 변경하지 않는 줄바꿈(breaks a line)인 반면 'p'는 단락으로 페이지를 구분한다. codice_2 주석 사용. <!--..설명!..--> 주석은 코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웹 페이지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속성. 대부분의 요소 속성들은 이름-값 형태이고, "="로 구분하고, 요소의 시작 태그 안에서 요소의 이름 다음에 쓰인다. 값은 외따옴표 또는 쌍따옴표로 둘러쌀 수 있다. 비록 어떤 문자로 구성된 값들이 HTML에서 인용부호 없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XHTML에서는 허용되지 않음), 그 값은 따옴표나 쌍따옴표 또는 쌍 인용부호로 둘러쌀 수 있다. 인용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속성값을 사용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이름값 쌍 속성과 대조하여, 요소 태그의 시작에 단순히 그 존재만으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태그가 있다. 대부분의 요소는 몇 가지 일반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단축 요소(codice_32)는 아래와 같이 다양한 속성을 설명하는데 쓰일 수 있다: 이 예제는 대부분의 브라우저에서 HTML처럼 보인다. 이 단축에 커서를 가리키면 그 제목인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가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요소 또한 언어와 관련된 속성인 codice_33과 codice_34을 취한다. 데이터 형식. HTML은 스크립트 데이터와 스타일시트 데이터, 그리고 ID, 이름, URI, 숫자 길이의 단위, 언어, 미디어 기술자, 색상, 문자 인코딩, 날짜와 시간 등을 포함하는 속성 값의 종류를 위한 몇 가지 데이터 형태를 정의 내린다. 이러한 모든 데이터 형식은 문자 데이터를 최적화하기 위하여 분리되었다. 문서 형식 선언. HTML 문서는 문서 형식 선언 (비공식적으로, "doctype")으로 시작해야 한다. 브라우저에서 doctype의 기능은 렌더링 모드를 지시하는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쿼크 모드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doctype의 원래의 목적은 문서 형식 정의 (DTD)에 기반한 SGML 도구를 통하여 HTML 문서의 파싱과 유효 여부 확인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DOCTYPE에 대한 DTD는 DTD에 순응하는 문서를 가진 허용 또는 금지된 내용을 지정하고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문법을 포함하도록 지시한다. 반면 브라우저는 HTML을 SGML의 애플리케이션으로 수행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DTD를 읽지 않는다. HTML 5는 기술적인 제한으로 인해 DTD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HTML5에서 doctype 선언 codice_1는 DTD를 참조하지 않는다. HTML 4 doctype의 예제는 다음과 같다. <!DOCTYPE HTML PUBLIC "-//W3C//DTD HTML 4.01//EN" "http://www.w3.org/TR/html4/strict.dtd"> 이런 선언은 엄격한 HTML 4.01을 만들기 위해 DTD를 참조한다. 이것은 선언적인 요소인 codice_36 같은 요소는 포함하지 않으며, CSS나 codice_37, codice_38 요소는 유지한다. SGML 기반의 유효 확인자(validator)들은 문서를 적절히 해석하거나, 유효 여부 확인을 실행하기 위해 DTD를 읽는다.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이 doctype은 쿼크 모드에 반대되는 표준 모드를 활성화한다. 게다가 HTML 4.01은 임시적이고 프레임 단위의 DTD를 제공한다. 전송. HTML 문서를 다른 컴퓨터 파일과 같은 방법으로 전송할 수 있다. 하지만 HTML 문서들은 대부분 웹 서버에 의한 HTTP나 또는 이메일을 통하여 전송된다. HTTP. 월드 와이드 웹은 주로 웹 서버에서 하이퍼텍스트 전송 프로토콜 (HTTP)을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로 전송되는 HTML 문서를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HTTP는 HTML 이외에도 이미지나 소리, 그리고 기타 내용물을 서비스하는 데 사용된다. 브라우저가 받는 각 문서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게 하기 위해, 다른 정보가 문서와 함께 전송된다. 이 메타데이터는 보통 MIME 타입 (예, codice_39 or codice_40)과 문자 인코딩을 포함한다. (HTML에서 문자 인코팅 참조)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HTML 문서와 함께 전송되는 MIN 타입은 문서가 초기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에 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X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문서는 잘 구성된 XML로 기대되며, 문법 오류는 브라우저가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동일 문서가 HTML에 관대한 브라우저에서는 성공적으로 출력될 것이다. W3C 권고안에서는 권고안 부록 C에 나오는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XHTML 1.0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다. 현재의 XHTML 1.1 작업 초안은 또한 XHTML 1.1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HTML 전자 우편. 대부분의 그래픽 이메일 클라이언트는 단순 텍스트로는 불가능한 어휘적 마크업과 형식을 제공하기 위해 종종 정의되지 않는 HTML 부분집합 사용을 허용한다. 이것은 색상 제목, 강조, 인용문, 인라인 이미지와 도표와 같은 인쇄정보를 포함한다. 그러한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HTML 이메일 메시지를 작성하는 GUI 편집기와 그것을 해석하여 보여주기 위한 렌더링 엔진을 포함한다. 그러나 전자 메일에서 HTML를 포함시키는 것은 호환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피싱 공격의 은닉을 도와줄 수 있고, 스팸 필터를 혼동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단순 텍스트보다 크기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명명 규칙. 웹 문서의 가장 일반적인 파일 확장자는 codice_41이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codice_42라고도 하며, DOS나 FAT와 같은 초기 운영 체제와 파일 시스템이 파일 확장자를 3자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HTML 애플리케이션. HTML 애플리케이션 (HTA; 파일 확장자 ".hta")는 애플리케이션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기 위해 브라우저에서 HTML과 DHTML을 사용하는 윈도우용 애플리케이션이다. 정상적인 HTML 파일은 웹 서버와 통신하면서, 웹페이지 객체와 HTTP 쿠키만 다루는 웹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에 제한된다. HTA는 완벽히 신뢰된 애플리케이션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파일의 생성/편집/제거와 윈도우 레지스트리 엔트리에 보다 더 많은 특권을 가진다. 그 까닭은 그것은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 외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HTA는 HTTP를 경유하여 실행되지 않지만, 실행 파일과 같이 다운로드가 될 수 있으며, 로컬 파일 시스템에서 실행된다. 위지위그 편집기. 몇 가지 위지위그(What You See Is What You Get, WYSIWYG) 편집기는 HTML 문서를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직관적으로 나타내고 편집기가 HTML 문서로 생성하여 더 이상 사용자가 HTML에 대한 광대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웹 페이지 편집은 위지위그 편집 방식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생성된 코드의 질이 낮았고 위지윔(What Your See IS What You Mean, WYSIWIM)방식으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목소리 늘어났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었다. 위지위그 편집기는 다음과 같은 결함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지위그 편집기가 페이지를 작성하는데 편리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저자들의 HTML에 대한 상세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위지위그 방식이 웹 저작을 지배하고 있다. 예제. <!DOCTYPE html> <html> <head> <title> Hello World</title> </head> <body> <p> Hello World </p> </body> </html> Hello World를 타이틀, 메인페이지에 출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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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브라우저
웹 브라우저(), 인터넷 브라우저() 또는 웹 탐색기(web探索機, )는 웹 서버에서 이동하며(navigate) 쌍방향으로 통신하고 HTML 문서나 파일을 출력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기반의 응용 소프트웨어이다. 웹 브라우저는 대표적인 HTTP 사용자 에이전트의 하나이기도 하다. 주요 웹 브라우저로는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인터넷 익스플로러/마이크로소프트 엣지, 오페라, 삼성 인터넷, 사파리가 있다. 역사.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1990년에 팀 버너스 리가 발명하였다. 버너스 리는 W3C의 감독자로서 웹의 지속적인 발전을 감독하며, 월드 와이드 웹 재단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의 브라우저는 월드와이드웹으로 불리다가 넥서스(Nexus)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면서 대중이 사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Erwise이다. Erwise의 개발은 로버트 카이유가 시작하였다. 프로토콜과 표준. 웹 브라우저는 웹 페이지를 가져오기 위해(웹 문서를 열기 위해) 대부분의 웹 서버가 사용하는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로 통신한다. HTTP를 이용해 웹 페이지를 가져올 뿐 아니라 웹 서버에 정보를 송신하기도 한다. 작성한 시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HTTP는 HTTP/1.1로 RFC 2616에 정의되어 있다. HTTP/1.1은 현 세대의 다른 브라우저와는 달리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완벽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 페이지들은 주소처럼 이용되는 URL(uniform resource locator)을 통해 장소가 정해지고, HTTP 접근을 위해 "http:"로 시작된다. 많은 브라우저가 FTP를 위한 "ftp:", HTTPS(암호화된 HTTP)를 위한 "https:"와 같은 다양한 URL 종류와 대응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웹 페이지의 파일 포맷은 보통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이 쓰이고 HTTP 프로토콜의 MIME "content type"에 의해 확인된다. 대부분의 브라우저는 HTML 외에 JPEG, PNG, GIF 이미지 포맷들을 지원하고, 그밖에도 플러그인을 통해 확장할 수 있다. HTTP의 "content type"과 URL 프로토콜 명세의 조합으로 웹 페이지 설계자들은 이미지, 애니메이션, 동영상, 소리, 스트리밍 미디어 등을 웹 페이지에 덧붙이거나 웹 페이지를 통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초기의 웹 브라우저는 단순한 HTML만을 지원했다. 독점적인 웹 브라우저의 빠른 개발로 HTML의 비표준 확장이 많이 이루어졌고, 웹 호환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현대의 웹 브라우저들은 모든 브라우저에서 동일하게 표시되어야 할 표준 기반의 HTML과 XHTML(HTML 4.01에서 출발한)을 지원한다. 부가적으로 유즈넷 뉴스나 IRC(Internet relay chat), 이메일 등을 지원하는 브라우저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NNTP, SMTP, IMAP 등의 프로토콜 지원이 포함된다. 기능. 브라우저 간의 차이는 그들이 지원하는 기능에 따라 구별된다. 오늘날 브라우저와 웹 페이지는 웹 초기에는 없었던 기능과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브라우저 전쟁 때 브라우저와 월드 와이드 웹에는 확장 기능이 급속도로 무질서하게 생겨났다. 아래는 특징이 있는 기능에 대한 목록이다.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008년 말까지는 7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파이어폭스, 사파리, 구글 크롬 등 새로운 웹 브라우저들이 나오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계속해서 떨어져 2011년 12월, 38%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음으로 크롬 27%, 파이어폭스 25%로 뒤따랐다. 그 후, 2013년 8월 18일 시점으로 크롬의 점유율이 43.17%로 1위이며,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5.03%, 파이어폭스가 19.31%, 사파리 8.65% 오페라 1.14%의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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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익스플로러
인터넷 익스플로러(, )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웹 브라우저이다. 1995년에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 체제에 이 소프트웨어를 기본으로 포함하기 시작하며 사용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1999년 이후로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웹 브라우저가 되었고, 2002년과 2003년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5, 6 버전의 사용률이 정점에 이르러 95%에 달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 이외의 플랫폼에서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지원을 중단하고,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 대체 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후기 버전의 출시에도 불구하고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11에서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지원을 중단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엣지의 사용을 권고하였다. 2022년 6월 15일,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역사.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공개되지 않은 윈도우 97의 주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개념이 자리잡혀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윈도우 95의 연장선으로 그려나갔다. 이 프로젝트는 1994년 여름에 토머스 레던(Thomas Reardon)이 시작하여 벤자민 슬리브카(Benjamin Slivka)가 주도하였다. 소스 코드는 스파이글래스사에서 도입했다. 이 소스는 초기 상용 웹 브라우저였던 모자이크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때 맥 OS, 유닉스 등에 사용할 수 있는 버전을 개발해 배포했지만 오래전부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를 위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개발하지 않았다. 맥 OS용도 2006년 1월 31일부터 개발하지 않고 있고 다운로드 또한 중지되었다. 또한 윈도우 11에서는 지원이 되지 않으며, 윈도우 11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엣지로 바뀌어 열린다. 단, IE지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실행이 가능하다. 버전 1. 인터넷 익스플로러 1은 1995년 8월에 공개되었으며, 스파이글래스 모자이크의 수정판이였다. 버전 2. 인터넷 익스플로러 2는 윈도우 95 OSR1, 윈도우 NT 4.0 영어판 두 곳에 포함되었으며. SSL 프로토콜 등의 기능을 지원했으며. 맥 OS도 지원했던 브라우저다. 윈도우 1.0, 윈도우 2.0, 윈도우 2.1x, 윈도우 3.0,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 윈도우 95, 인터넷 익스플로러 1과 같이 지원이 2001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버전 3. 인터넷 익스플로러 3은 1996년 8월 13일에 공개되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최초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되었다. 윈도우 95 OSR2, 2.1, 윈도우 NT 4.0 한글판에 기본 내장되어있고, 버전 3에서는 HTML 3.2 및 액티브엑스 제어와 자바 애플릿의 실행 환경을 갖추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에 견줄 만한 기능까지 만들었다.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 RTM과 같이 지원이 2004년 6월 30일 종료되었다. 버전 4. 인터넷 익스플로러 4는 1997년 9월에 공개되었으며, 윈도우 95 OSR2.5, 윈도우 98에 기본 내장되어 있다. 버전 4부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윈도우 NT 4.0 서버, 윈도우 NT 4.0 워크스테이션, 윈도우 2000 서비스팩 1과 같이 지원이 2004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버전 5. 인터넷 익스플로러 5는 1999년 3월 18일에 공개되었으며 5.0은 윈도우 98 SE에 5.01은 윈도우 2000에 포함되어 있다. 이 버전은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2000년 7월에 나온 인터넷 익스플로러 5.5는 인쇄 미리 보기, CSS, HTML 표준 지원, 개발자 API가 개선되었으며 128 비트 암호화를 지원한다. 이 버전은 윈도우 Me에 기본 포함되어 있었고, 윈도우 95에서 지원했던 마지막 버전이었다. 버전 6.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윈도우 XP 출시 몇 개월 전인 2001년 8월 27일에 공개되었다. 이 버전은 DHTML 향상, 콘텐츠 제한 인라인 프레임, CSS 수준 1, DOM 수준 1, SMIL 2.0의 부분 지원을 포함하고 있다. 2001년에 출시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이 포함되어 있다. 그 뒤에 버전 6.0 서비스 팩 1이 배포 되었으며, 이 버전은 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Me,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0 서비스 팩 2가 포함되었고, 이는 다른 운영 체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사용이 쉬었으나 웹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보안상의 문제로 2006년 PC월드 '전대 미문의 최악의 기술' 25위 중 8위에 선정된 바가 있으며, IE6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또는 8로 업그레이드 하거나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애플 사파리 등 다른 브라우저 사용을 권고하였다. 버전 7.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은 오랜 공백을 깨고 2006년 10월 18일에 공개되었다.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에는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다. 버전 6에까지 제공되지 않던 탭 기능과 피싱 필터 등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었다.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버전 8.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2009년 3월 19일 (한국시간)에 정식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 표준 모드"로 알려진 새로운 렌더링 모드를 포함하고 있다. 2008년 2월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의 개인 베타 버전의 공개에 대한 초대장을 제공하였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액티브X 기능을 최소화시키기로 했으므로 액티브X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한국 사이트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며,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버전 9. 인터넷 익스플로러 9는 2011년 3월 14일에 정식 출시되었다. 웹 표준을 보다 준수하여 Acid 3에서는 95/100으로 이는 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8보다 높은 수치이다. 일부는 한국에서 호환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사이트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있다. 그리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9부터는 GPU 가속의 지원으로 CPU 뿐만 아니라 GPU도 함께 쓰고 이 기술이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서는 지원하기 힘들다는 문제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는 지원 대상에는 제외되었다.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만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을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비스타와 같이 지원이 2017년 4월 11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08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종료되었다. 버전 10. 마이크로소프트는 라스베이거스의 MIX 11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을 발표하면서 최초의 플랫폼 프리뷰를 공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이 개발에 3주 정도 걸린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번 출시는 CSS3 그라디언트를 포함한 표준 지원을 더 개선한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스크톱 모드에서는 액티브X를 지원하지만 모던 UI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은 9와 달리 한국의 대부분의 웹에서 호환성 문제를 일으키며 급기야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으로의 업데이트를 막는 킷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기도 했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1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종료될 예정이다. 버전 11. 인터넷 익스플로러 11 빌드가 2013년 3월 유출된 윈도우 8.1 업데이트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빌드에는 탭 동기화를 위한 불완전한 매커니즘을 포함하며 자체 사용자 에이전트에서 "Gecko"와 비슷한 것으로 식별한다. 나중에 나온 빌드들에는 SPDY, 확장된 개발 도구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며 웹GL 지원도 제공할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인터넷 익스플로러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1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종료될 예정이며, 윈도우 서버 2016용은 윈도우 서버 2016과 같이 지원이 2027년 1월 12일 종료될 예정이다. 그러나 윈도우 10용과 윈도우 서버 2019용은 2022년 6월 15일에 종료되었다. 운영 체제 호환. 모든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일부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붙는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Internet Explorer Mobile)은 윈도우 모바일을 위한 웹 브라우저이다. 윈도우 모바일 5.0 이전에는 포켓 인터넷 익스플로러(PIE)라고도 불렸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윈도우 폰에서도 쓰인다. 다만 윈도우 10 모바일에서 보조프로그램으로 격하되고, 모바일에선 CPU 미지원으로 액티브X를 쓸 수 없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고급 보안 설정. 윈도우 서버 2003 이후부터 제공되는 보안 설정이 강화된 서버용 한정판이다. 시장 점유율.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과거에는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브라우저였다. 그러나 파이어폭스, 오페라, 구글 크롬 등 다른 웹 브라우저들의 시장 점유율이 오름에 따라 2004년 90%에 육박하던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점차 떨어져서 2008년에는 모든 버전을 합쳐서 60% 후반대를 유지하였다. 2011년 3월 14일 인터넷 익스플로러 9가 정식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의 시장 점유율은 반등하지 못하고 계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날 스탯카운터 통계 기준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은 30% 후반대를 머물고 있다. 2016년이후부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10%이하로 내려갔다. 대한민국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스탯카운터의 통계에 따르면 2011년 1월부터 8월까지 대한민국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 점유율은 매달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 9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처음으로 90% 아래로 떨어졌다. 2011년 12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버전별 점유율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이 46.48%로 가장 높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7 13.43%, 인터넷 익스플로러 9 13.06%, 인터넷 익스플로러 6 7.99% 순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전 세계에 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 한 브라우저의 점유율이 매우 높고, 구 버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점유율도 높기에 웹 표준 문제가 지적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국내에서도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2019년 4월기준 점유율은 24.6%대로 구글 크롬(63.6%)에 이어서 아직까지는 2위로 사용빈도가 있다. 보안 문제. 중대한 크로스 버전 취약점. 2014년 4월 26일, 마이크로스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6부터 11까지 버전에서 "원격 코드 실행" 취약점을 발표했다. 2014년 4월 28일, 미 행정 부처인 국토안보부의 산하 컴퓨터 긴급 대응팀인, 미국 컴퓨터 긴급 대응팀 (이하, US-CERT)은 성명을 통해 주의보를 내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외부의 프로그램이나 사용자가 "시스템에 접근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취약하다라고 전했다. US-CERT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보안의 취약점으로부터의 공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이 사안을 검토하고, 버그를 고칠때까지 다른 브라우저를 사용하라고 권고하였다. 영국 국립 컴퓨터 비상상황 대응 팀 (The UK National Computer Emergency Response Team) (이하, CERT-UK)는 자문 발행물을 통해, 예상되었던 우려이며,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추가적인 단계의 백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백신을 최신상태로 유지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이버 보안 회사인 노턴라이프록은 "Windows XP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업데이트 지원이 종료되었다. 유용성. 대한민국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이는 온라인 뱅킹 호환성 문제와 더불어 한국의 대다수 웹사이트 개발자들이 여러 웹 브라우저와 운영 체제들의 호환성을 고려하지 않고 ActiveX를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를 사용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게 만든 것도 그 까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를 참고.) 다만 현재는 여러 대체 브라우저를 지원하는 웹사이트가 많아지고 어떤경우에는 아예 익스플로러만 지원하지 않게 하는 웹사이트도 늘어나면서 지금은 그런 문제가 많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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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932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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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라 파이어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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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000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며, 20세기와 제2천년기의 마지막 해이다. 탄생. 1월. 1월20일 대한민국의 장삐쭈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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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는 컴퓨팅 파워를 지원해주는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을 중심으로, 기업들의 사업을 디지털 전환과 함께 지원하는 Dynamics 365와 파워포인트, 워드와 엑셀, 원노트, 아웃룩, 팀즈 등의 오피스 365(Office 365), 링크드인, 그리고 Xbox 게임, 컴퓨터 운영체제 소프트웨어인 윈도우(Windows), 검색과 뉴스 등의 사업을 하는 미국의 기업이다. 2014년부터 사티아 나델라가 CEO를 맡고 있다. 역사.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양한 컴퓨터 기기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제품들을 개발, 생산, 판매, 관리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장 유명한 제품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라는 운영 체제이다. 1975년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위해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Micro-soft라는 이름으로 이 회사를 세웠다. 2006년 6월 15일 빌 게이츠는 2008년 7월 31일에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후 직접 세운 자선 단체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전력하겠다고 밝혔으며,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빌 게이츠의 대학 시절 친구인 스티브 발머가 사장직을 담당했다. 2009년경, 빌 게이츠가 그의 오른팔인 스티브 발머에게 회사의 최고 리더십을 양하는 과정에서 바통을 정확히 넘기는 방법에 관한 교본을 마련하기도 했다. 게이츠는 2000년 발머에게 CEO직을 넘겼다. 그러나 게이츠는 2008년 6월에야 회사의 일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그 2년 전에 미리 이 사실을 알려 대비토록 한 바 있다. 그렇지만 게이츠는 여전히 워싱턴주 레이먼드에 있는 회장실의 주인이다. MS는 발머의 인도 아래 세계 최고 수익성을 갖는 강력한 IT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2008년 여름 게이츠 퇴장 이후 주가가 30%나 떨어졌는데 발머에게 갖는 불안감 보다는 세계 경제의 어려움 탓으로 그 원인을 돌리기도 한다. 직원은 2013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0만 여 명이며, 인도, 중국, 영국 등에 컴퓨터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5월 10일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전자회사 스카이프를 85억 달러(약 10조 원)에 인수하였다. 더불어 2013년 9월 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핀란드의 휴대전화 생산 업체인 노키아의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54억 4,000만 유로(약 7조 8,654억 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13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가 12개월 안에 은퇴한다고 밝혔다. 2014년 2월 4일, 사티아 나델라를 CEO로, 존 W. 톰슨을 회장으로 임명했다. 2015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HPE와 클라우드 사업부문에서 협력을 한다고 밝혔다. 특히 프라이빗 클라우드에 집중하고 퍼블릭 클라우드 서비스는 MS와 같은 파트너 솔루션을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업 부문. 2015년 당시, 마이크로소프트가 참여하는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비판. IBM 호환 개인용 컴퓨터(PC)에 MS-DOS를 납품하였고, 때마침 PC의 성공에 힘입어 도스 시장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1995년, 윈도우 95라는 GUI 운영 체제를 출시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수많은 개인용 컴퓨터 주변기기 업체들로 하여금 윈도 전용 드라이버를 중심으로 개발하도록 유도했다. 자사의 MS-DOS 이외의 다른 도스와의 호환성도 인위적으로 버렸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또한 경쟁 업체들이 인터넷에서 앞서나감에 따라, 윈도 95용으로 별도 판매된 PLUS! 팩에 처음 제공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 98부터는 운영 체제에 포함하여 끼워팔기를 하여 비판을 받았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지나친 시장 장악으로 경쟁사들을 시장에서 도태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익스플로러는 점유율 95%의 독점 상태에까지 이르러서,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의 대체 브라우저가 등장하기까지 5년여동안 업그레이드가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것을 포함하여 말 그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들은 'Micro$oft'라고 비꼬기도 한다. 원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사용하던 말이었지만 밸브 코퍼레이션이 레프트 4 데드 관련 포럼에서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로고와 슬로건의 변천사.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연도별로 크게 아래와 같은 로고를 사용했다. 맨 처음 사용된 초기의 로고는 1987년 9월까지 사용되었고, 로고의 이름은 blibbet이라고 불렸다. 그 뒤 1987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스캇 베이커(Scott Baker)라는 사람이 현재와 같은 모양과 형태를 갖춘 팩맨(Pac-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고를 만들었다. 1994년부터 "Where do you want to go today? (오늘은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라는 광고 캠페인이 진행되면서부터 1987년 디자인된 팩맨 로고 아래에 추가적으로 캠페인 문구가 삽입되었고 이 캠페인 문구가 삽입된 버전의 로고는 2002년까지 각종 인쇄매체, TV 광고, 웹사이트 로고 등에 쓰인다. 2003년부터는 "Your potential, Our passion (당신의 가능성, 우리의 열정)"이란 슬로건 문자가 삽입된 버전의 로고가 다양한 장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슬로건이 삽입된 버전의 로고는 2010년까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2010년에 열린 비공개 MGX (Microsoft Global Exchange) 컨퍼런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새로운 슬로건인 "Be What's Next (다음의 무언가가 되자)"를 공개했다. 이 슬로건은 2011년부터 2012년 8월 22일까지 사용되었다. 이후 2012년 8월 23일 새로운 로고를 선보였다. 이 로고는 물결치는 4색깃발이 사각형 모양으로 바뀐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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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웹사이트(, )는 인터넷 프로토콜 기반의 네트워크에서 도메인 이름이나 IP 주소, 루트 경로만으로 이루어진 일반 URL을 통하여 보이는 웹 페이지 (Web Page)들의 의미 있는 묶음이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홈페이지는 엄밀히 말해 웹사이트를 지칭한다. 최초의 웹사이트는 팀 버너스리가 1990년에 CERN에서 만든 info.cern.ch이다.(지금도 CERN사이트 안에 존재함.) 웹사이트는 인터넷이나 랜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적어도 하나의 웹 서버 상에서 호스팅된다. 웹 페이지는 HTML/XHTML의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일반적으로 순수 문자열로 쓰여진 문서이다. 웹 페이지는 HTTP를 통하여 접속되며 가끔씩은 HTTPS를 통한 암호화를 사용하여 웹 페이지 콘텐츠를 이용한 사람들에게 보안과 개인 정보 보호를 제공한다. 사용자가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는 HTML 마크업 명령을 모니터에 표시하는 그대로 페이지 내용을 표현한다. 공식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웹사이트는 총체적으로 월드 와이드 웹을 이루고 있다. 역사. 월드 와이드 웹(WWW)는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리가 만들었다. 1993년 4월 30일에 CERN은 월드 와이드 웹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HTML과 HTTP가 도입되기 전에 파일 전송 프로토콜과 고퍼 프로토콜과 같은 다른 프로토콜들이 서버로부터 개별 파일을 내려받는 데 쓰였다. 이러한 프로토콜들은 사용자가 탐색하고 파일을 내려받는 단순한 디렉터리 구조를 제공한다. 문서는 워드 프로세서 형식 등으로 형식화되지 않은 순수 문자로만 된 글자로 표현되었다. info.cern.ch.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리가 만든 세계 최초의 웹 사이트로 CERN 홈페이지 안에 Welcome to info.cern.ch!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개발자인 팀 버너스리의 소개와 생애, 연구자료, 스크린샷 등 여러 CERN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 후로, 약 24년 동안 전 세계 수억 개의 사이트가 새로 생겼으며,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능별 분류. 기능으로 분류하면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인트로 페이지. 각각의 모든 웹사이트 또는 홈페이지는 특수한 단하나의 예약된 'index.html'이라는 페이지를 갖고있다. 이는 최초 인트로 웹페이지이며 웹브라우저는 디폴트로 브라우저가 방문한 사이트(디렉토리)의 'index.html'의 이름을 갖는 HTML파일을 우선적으로 읽어들이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index.html 파일은 일반적으로 <frameset> 태그와 하위의 <frame>태그로 영역 구획 및 여기에 콘텐츠를 넘겨주는 기능을 하는 간단한 구조의 그릇 역할처럼 설정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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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텍스트
하이퍼텍스트(Hypertext, )는 참조(하이퍼링크)를 통해 독자가 한 문서에서 다른 문서로 즉시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주로 컴퓨터나 다른 전자기기들을 통해 표시된다. 하이퍼텍스트라는 낱말은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이자 철학자인 테드 넬슨이 처음 고안하여 쓰이게 되었다.'hyper(건너편의, 초월, 과도한)'와 'text'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 용어로서, 파생텍스트라고도 한다. 인터넷과 결합하여 HTML의 주된 구성요소가 되었다. 기존의 문서가 순차적이면서 서열형 구조라면,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 따라 그 차례가 바뀌는 임의적이면서 나열형인 구조를 가진다. 즉, 출판된 책처럼 작가의 의도대로 사용자가 따라가는 것이 아닌,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문서들을 어떠한 행위(클릭)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등장은 검색엔진과 더불어 정보습득의 새로운 장을 인류에게 가져다 주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특히 하이퍼서사(하이퍼픽션)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탄생케 하였다. 웹이라는 것은 컨텐츠들이 하이퍼텍스트로 묶인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가 쓰인 기술들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HTML과 HTTP이다. HTTP는 하나의 프로토콜으로서, 이 통신규약을 이용해서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와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이 HTTP로 HTML 문서가 전달될 수 있다. 역사. 1941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에 영감을 준 것으로 간주되는, 갈림길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945년, 버니바 부시는 애틀랜틱 먼슬리에 "As we may think"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여기에서 제시한 메멕스라는 개념은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의 시초로 일컬어진다. 1989년, 당시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의 과학자였던 팀 버너스 리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정보 공유 기능이 CERN 및 기타 학술 기관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들 간에 사용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 부응하여 새로운 하이퍼텍스트 프로젝트를 제안하였고 나중에 원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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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인코딩
문자 인코딩() 또는 텍스트 인코딩(text encoding) 또는 줄여서 인코딩은 사용자가 입력한 문자나 기호들을 컴퓨터가 이용할 수 있는 신호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의 컴퓨터는 이러한 신호를 입력받고 처리하는 기계를 뜻하며, 신호 처리 시스템을 통해 이렇게 처리된 정보를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신호를 입력하는 인코딩과 문자를 해독하는 디코딩을 하기 위해선 미리 정해진 기준을 바탕으로 입력과 해독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를 문자열 세트 또는 문자셋이라고 한다. 초기 보급형 컴퓨터의 문자열 세트는 아스키나 EBCDIC이 표준이었으나, 이러한 문자열 세트는 세계 곳곳에 인터넷이 보급되며 표현해야 할 문자가 증가하면서 이러한 문자셋들을 표준화하기 위해 많은 대체 방식이 개발되었다. 표준 문자셋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후에는 유니코드가 등장하게 되었다. 문자 인코딩의 구성. 문자 정보는 정보를 표현하기 위한 글자들의 집합을 정의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한 문자 집합을 여러 문자 인코딩에서 쓸 수도 있다. 특히 집합 안의 문자들에 음수가 아닌 정수들을 배정한 것을 부호화된 문자 집합(coded character set, CCS)라 한다. 문자 집합은 ASCII와 같이 더 이상의 문자가 추가될 수 없기도 하고, 유니코드와 같이 문자가 계속 추가될 수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과 문자 인코딩은 어떤 문자를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나타낸다는 데서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한다. 역사적인 이유로 MIME이나 그에 기반한 시스템은 문자 집합("charset")을 문자 인코딩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문자 인코딩 형태(character encoding form, CEF)는 특정한 문자 집합 안의 문자들을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일정한 범위 안의 정수(코드값)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유니코드 코드 포인트를 8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8이나, 16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16,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적인 문자 인코딩들이 포함된다. 문자 인코딩 구조(character encoding scheme, CES)는 문자 인코딩 형태로 변환된 코드값을 옥텟 기반의 시스템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옥텟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문자 인코딩 형태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으며, 8비트 이상의 숫자를 사용하는 UTF-16과 같은 문자 인코딩 형태의 경우 엔디안을 지정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는 ISO 2022와 같은 복합 인코딩이나, SCSU와 같은 압축 방법 등이 속한다. 퍼센트 인코딩. 퍼센트 인코딩(percent-encoding)은 URL에 문자를 표현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알파벳이나 숫자 등 몇몇 문자를 제외한 값은 옥텟 단위로 묶어서, 16진수 값으로 인코딩한다. 문자깨짐 현상. utf-8이나 euc-kr같은 서로 다른 문자 인코딩 방식은 텍스트나 문자의 깨짐 현상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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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버
서버(, )는 클라이언트에게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컴퓨터 프로그램(server program) 또는 장치(device)를 의미한다. 특히, 서버에서 동작하는 소프트웨어를 서버 소프트웨어(server software)라 한다. 주로 리눅스 등의 운영 체제를 설치한 대형 컴퓨터를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버는 프린터 제어나 파일 관리 등 네트워크 전체를 감시·제어하거나, 메인프레임이나 공중망을 통한 다른 네트워크과의 연결, 데이터·프로그램·파일 같은 소프트웨어 자원이나 모뎀·팩스·프린터 공유, 기타 장비 등 하드웨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서버는 사용자(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의하여 서비스를 하는데 이와 같이 구성된 시스템을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라고 하며, 이는 하나 이상의 응용 프로그램을 상호 협력적인 환경에서 운용하는 분산처리 형태를 의미한다. 즉, 서비스를 요청하는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처리하는 서버와의 협동작업을 통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처리방식이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다. 클라이언트의 수가 5~20대 정도인 소규모 LAN의 경우에는 한 대의 서버로 충분히 모든 서비스를 소화할 수 있으나, 대규모 LAN의 경우에는 여러 대의 서버를 배치하고, 파일 관리는 파일 서버, 프린터 제어는 프린터 서버, 인터넷 등의 외부와의 교환은 통신 서버가 담당하는 등 각각 역할을 세분하게 된다. 역사. 컴퓨팅에서의 "서버"(server)라는 용어의 이용은 대기행렬이론에서 비롯한 것으로,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켄들의 기호를 선보인 논문 에서 "서비스'와 함께 눈에 띄게 사용되었다. 와 같은 초기의 논문들의 경우 "전화 교환원"과 같은 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된다. 컴퓨팅에서 "서버"는 적어도 RFC 5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RFC는 ARPANET(인터넷의 선구자)을 기술하는 최초의 문서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용자"와 대비되고 있고 두 가지 종류의 호스트와는 구별하고 있다: "서버 호스트", "사용자 호스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뜻하는 서빙(serving)이라는 용어 또한 RFC 4와 같은 초기 문서들로 거슬러 올라가며, "serving-host"와 "using-host"를 대조하고 있다. 서버 운영 체제. 잘 알려진 서버 운영 체제로는 이를테면 FreeBSD, 솔라리스, 리눅스 등이 있다. 유닉스는 본래 미니컴퓨터 운영 체제였으며 전통적인 미니컴퓨터를 서버가 대체해감에 따라 서버는 효율적인 유닉스 기반의 운영 체제가 되었다. 서버 지향 운영 체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서버 환경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 상의 서버. 인터넷의 전반적인 구조는 클라이언트 서버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동작하고 있으면서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서버는 수백만 대에 이른다. 인터넷 서버가 제공하는 수많은 서비스 가운데 다음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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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기 유도
전자기 유도(電磁氣誘導)는 자기장이 변하는 곳에 있는 도체에 전위차(전압)가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처음으로 수학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발생한 전압은 자기 선속의 변화율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법칙은 자속밀도가 변화하거나, 도체가 일정하지 않은 자속밀도가 퍼져있는 공간을 움직일 때 적용할 수 있다. 전자기유도는 발전기와 전동기 등의 전기 구동기의 바탕에 있는 법칙이다.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은 전자기 유도에 의한 유도 기전력의 크기는 단위 시간당 자기 선속의 변화율과 코일의 감긴 횟수에 비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는 로렌츠 힘을 나타낸다. 이는 직선이나 원형 전류 또는 솔레노이드에 의한 자기장에서 알아볼 수 있다. 참고: 맥스웰 방정식 발전기. 발전기는 전동기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석 연료나 수력, 원자력 등으로 얻은 높은 열은 물을 끓이는데 사용되고 여기서 얻은 증기는 터빈을 돌리게 되는데, 이 때 회전하는 터빈에 코일을 연결시키고 그 주위에 자석으로 코일 내부를 통과하는 자속을 매 시간 변화시킨다. 이로부터 코일에는 유도 전류가 흐르고 기전력을 얻을 수 있다. 영구 자석이 도체 또는 그 반대로 이동하는 경우, 기전력이 생성된다. 와이어가 전기 부하를 통해 연결되는 경우, 전류는 흐르고 전기 에너지가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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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분할다중접속
코드분할다중접속(, CDMA)은 이동 통신에서 코드를 이용한 다중접속 기술의 하나이다. 1996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에서 최초로 상용화되었다. 역사.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은 1996년에 세계 최초로 CDMA를 기반으로 한 이동통신 서비스를 상용화하였다. CDMA는 미국의 퀄컴에서 기술규격을 개발하여, 1989년 샌디에이고에서 최초로 CDMA 기술을 이용한 통화시험에 성공하였다. 1993년 CDMA 기술 규격인 IS-95A가 정립되었으며, 1995년 9월 홍콩에서 허치슨텔레콤에 의해 상용화하였다. 1997년에 이르러 전 세계 가입자 수는 700 ~800백만이었다. 1998년 LG텔레콤(현.LG유플러스)은 CDMA 데이터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999년 전 세계 가입자는 5000만명으로 늘었다. 2000년 CDMA 2000 1x EV/가 3세대 이동통신 규격으로 국제시장에 출시되었지만, KT의 경우, 4G LTE 주파수 재배치의 일환으로, 2012년 3월초에 2G PCS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일제히 종료하였다. 더욱이, SK텔레콤의 경우, 2020년 7월 27일에 2G 서비스를 최종적으로 종료하였다. 이는, 시스템 노후화가 심해 통신망 장애 문제가 우려되고, 핵심부품의 단종으로 인한 유지보수의 불가로, 정상적인 서비스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전제 조건으로, 2G 서비스 종료를 단행하여, LG유플러스도 이듬해인 2021년 6월 말에 최종적으로 종료한 바 있다. 기술 개요. 코드분할다중접속은 코드를 이용하여 하나의 셀에 다중의 사용자가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동통신은 제한된 주파수 대역을 활용하여 다수가 통신을 하므로 다중접속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코드분할다중접속 이외의 기술 중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기술로는 GSM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분할다중접속(TDMA)가 있다. 코드분할다중접속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도록 코드화한 신호를 대역 확산하여 전송한다. 단말기는 확산된 신호를 디코드하여 복조함으로써 사용자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다중접속의 종류와 CDMA. 다중접속(Multiple Access)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 다수의 사용자가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다중접속은 기술 규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기술 별 다중 접속의 대략적 개념은 오른쪽 그림에서 참조할 수 있다. TDMA는 GSM의 기반기술로 상용화되었다. CDMA는 대한민국 등에서 사용된다. 주파수 사용의 효율성이 낮은 FDMA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대역확산과 코드화. 대역 확산 기술은 일반적으로 전송할 정보신호의 대역폭보다 훨씬 큰 대역폭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보의 다중화와 고속처리가 가능해진다. 대역확산에는 주파수를 변조하는 주파수 도약과 동일 주파수 내에서 변조되는 직접 확산의 방식이 있다. CDMA는 직접확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s(t)Acos(ωet+Φ) 위 수학적 표현의 통신상 의미는 결국 비교적 큰 신호인 통신 신호를 아주 작고 무작위적인 코드신호로 곱하여 변조시킨다는 것이다. 신호 변조의 개념도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아래의 그림에서 제일 위는 전달하고자 하는 신호를 가운데는 코드를 나타낸다. 제일 아래는 두 신호를 XOR시킨 결과 변조된 신호이다. 이렇게 변조된 신호가 송출되게 된다. 변조에 사용되는 코드가 다르면 변조된 결과도 다르게 되므로, 사용자마다 다른 확산용 코드를 부여하여 하나의 주파수 대역 내에서 여러 명의 사용자가 통신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다중화라 한다. 다중화에 사용되는 코드는 되도록 백색잡음과 같이 무작위적이어야 한다. 코드가 일정한 경향을 가질 경우 충분히 많은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하면 혼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CDMA에서는 상호상관(Cross-Correlation)이 거의 없는 일종의 무작위 신호를 코드로 사용한다. 이 코드를 생성하는 기술의 특허는 퀄컴이 소유하고 있다. 기술 특징. CDMA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실제적으로는 몇 개의 채널(파일럿, 동기, 통화 등)로 구분되어 있어서, 파일럿 채널을 통해 단말기와 기지국 사이에 기본적인 확인을 하고 동기 채널에서 코드 동기화를 하여 통화채널로 음성 데이터를 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술 진화. 기존의 IS-95 방식에서 현재는 CDMA2000과 같은 보다 고속의 데이터 통신을 위한 방식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근본 기술에 대한 칩셋 설계와 관련 기술 특허는 퀄컴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이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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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투스
블루투스()는 1994년에 에릭슨이 최초로 개발한 디지털 통신 기기를 위한 개인 근거리 무선 통신 산업 표준이다. ISM 대역에 포함되는 2.4~2.485GHz의 단파 UHF 전파를 이용하여 전자 장비 간의 짧은 거리의 데이터 통신 방식을 규정하는 블루투스는, 개인용 컴퓨터에 이용되는 마우스, 키보드를 비롯해, 휴대전화 및 스마트폰, 태블릿, 스피커 등에서 문자 정보 및 음성 정보를 비교적 낮은 속도로 디지털 정보를 무선 통신을 통해 주고 받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개요. 블루투스는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정보기기 사이에, 전파를 이용해서 간단한 정보를 교환하는데 사용된다. 당초에는 에릭슨을 필두로, 인텔, IBM, 노키아, 도시바 등의 5개 회사가 프로모토로서 규격의 책정에 참가했으며,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 모토로라, 3COM, 루센트 테크놀로지 등의 4개 회사가 추가 참여했다. 현재는 3COM과 루센트 테크놀로지 대신, 애플, Nordic Semiconductor가 추가되어, 총 9개 회사가 프로모터 기업으로 참가했다. IEEE에서는 규격명 IEEE 802.15.1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현재 블루투스는 (SIG)을 통해 관리되고 있다. 이 그룹에는 전기통신, 컴퓨터, 네트워크, 가전 등의 분야의 30,000사 이상의 기업들이 멤버에 가입되어 있다. 블루투스 SIG는 규격의 개발을 감시, 규격의 인증 프로그램의 관리 및 트레이드마크의 보호를 관장하고 있다. 장비 제조사가 블루투스 장비로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SIG에서 제정한 표준 규격을 만족해야 한다. 이름의 유래. '블루투스'라는 이름은 10세기 경 처음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통합한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별칭이 '파란 이빨의 왕'으로 불렸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블라톤()을 영어식으로 번역한 단어가 블루투스()이다. 블루투스 이름의 아이디어는, 1997년 인텔 출신의 짐 카다크()라는 시스템 엔지니어가 제안하였다. 제안했을 당시에, 그는 스웨덴의 작가 프란스 G. 벵트손()의 역사 소설 《붉은 뱀》(, )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바이킹과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하랄드 블라톤 왕이 스칸디나비아를 통일했던 것처럼, '난립하는 여러 무선 통신 규격을 통합하자'는 염원이 담겼다고 한다. 블루투스의 로고는, 북유럽의 룬 문자(옐링 거석의 비석에서 찾을 수 있는)로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름의 앞글자 (H)와 (B)를 결합한 모양에서 유래한다. 사양과 특징. PANs의 산업 표준중 하나인 블루투스는 ISM 대역인 2.45GHz를 사용한다. 버전 1.1과 1.2의 경우 속도가 723.1kbps에 달하며, 버전 2.0의 경우 EDR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를 통해 2.1Mbps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블루투스는 RS-232, 유선 USB를 대체하는 개념이며 이는 와이파이가 이더넷을 대체하는 개념과 유사하다. 암호화에는 SAFER을 사용한다. 장치끼리 믿음직한 연결을 성립하려면 키워드를 이용한 페어링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이 없는 경우도 있다. 블루투스 1.0과 1.0B. 1.0과 1.0B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제조사들이 그들의 제품 간의 상호 호환성을 가지게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과 1.0B는 또한 핸드셰이킹 과정에서 블루투스 하드웨어 장치 주소(BD_ADDR)를 반드시 전송해야 하므로 프로토콜 수준에서의 익명(IP와 같은 주소 없이)의 연결(rendering anonymity)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블루투스 환경에서 제공 되도록 계획한 소비확대정책(Consumerium)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큰 제한사항이었다. 블루투스는 2.4Ghz의 주파수를 사용하고 무선 랜(802.11b/g/n)도 2.4Ghz대의 주파수를 사용한다. 같은 주파수를 사용하므로 동시사용에 따른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양 제품의 초기 보급 시에는 그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블루투스의 버전업과 연결 특성 상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블루투스는 해당 주파수 대역에서 비어있는 채널을 찾아 데이터를 전송하기 때문에 간섭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즉시 다른 빈 곳으로 전송하게 된다. 음성기기의 사용 시 아주 잠깐의 지연현상이 발생하지만 체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기기의 거리가 1cm 이하로 근접해 있을 경우 간섭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무선랜과 블루투스 두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기기의 경우에는 두 장비가 하나의 안테나를 사용하게 되는데, 서로 번갈아가며 데이터를 전송하는 사용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애초부터 그 간섭을 최대한 줄이게끔 되어 있다. 블루투스 1.1. 2002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고, 1.0B의 많은 문제점들을 수정하였다. 이 외에 비 암호화 채널(non-encrypted channels)을 지원하였고, Signal Strength Indicator (RSSI)를 수신 받을 수 있게된다. 블루투스 1.2. 이 버전은 1.1 버전과 호환되며 주요 향상 점은 다음과 같다: 빠른 접속과 가까운 거리에서의 주파수 간섭 및, 먼 거리에서의 분산스펙트럼(frequency-hopping spread spectrum)에 대비하였다. 실제 전송 속도는 1.1과 같은 723kbit/s이다. 패킷의 오류나 재전송에 따른 음성이나 음원신호의 quality손실을 막는 Extended Synchronous Connections (eSCO)를 지원하게 되었고, three-wire UART를 위한 Host Controller Interface (HCI)를 지원하게 되었다. 2005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다. 블루투스 2.0 + EDR. 2004년 10월에 표준화가 된 이 버전은 1.1과 호환되게 하였다. 주된 향상 점은 3.0Mbit/s의 향상된 데이터 속도(Enhanced Data Rate, EDR)를 지원하게 된 점이다. 이로써 다음의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 평균 3배, 최대 10배의 데이터 전송 속도(Data Transfer Rate) 향상(실제 전송 속도 2.1Mbit/s)과 Duty Cycle감소에 의한 저 전력 소비, 또한 multi-link scenarios의 단순화로 사용할 수 있는 대역폭이 늘어났다. 이론상의 전송 속도는 3.0Mbit/s이고, 실제 data전송 속도는 2.1Mbit/s이다. Special Interest Group (SIG)에 표준화가 된 "블루투스 2.0 + EDR"은 많은 업체들이 사용하는 EDR과 표준화되지 않은 "블루투스 2.0"를 포함한다. 앞에 명시된 기술을 보여주는 HTC TyTN pocket PC phone과 다른 블루투스 2.0 without EDR의 기술은 추가적인 문제점들을 수정한 버전 1.2와 거의 같다. 많은 제품들이블루투스 2.0을 지원한다고 명시하지만 실제로 EDR을 지원하는지는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블루투스 2.1 + EDR. 1.2버전과 완벽하게 호환이 되는 핵심 표준화 버전인 블루투스 2.1은 블루투스 SIG에 의해 2007년 7월26일 채택되었다. 이 기술은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블루투스 3.0 + HS. 블루투스 3.0은 2009년 4월 21일에 발표되었다. 블루투스 3.0의 큰 특징은 802.11 PAL(Protocol Adaptation Layer)를 채용해서 속도를 최대 24Mbps로 향상시켰다. (+HS 가 붙어있지 않은 제품에서는 이와 같은 High Speed 연결을 지원하지 않으며 3.0에서 추가된 기능만을 지원한다.) 그리고 블루투스 기기간에 대용량 그림, 동영상, 파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PC를 모바일 기기와 동기화를 할 수 있고 프린터나 PC로 많은 사진을 내려받을 수 있다. 추가된 점으로 내장된 전력 관리 기능을 통해 전력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 블루투스 4.0 + LE. Bluetooth SIG는 블루투스 사양서 버전 4.0(Bluetooth Smart)을 2010년 6월 30일에 채택하였다. 이 사양에는 클래식 블루투스(Classic Bluetooth), Bluetooth high speed 와 Bluetooth low energy 프로토콜이 포함되었다. Bluetooth high speed는 Wi-Fi를 바탕으로, 클래식 블루투스는 기존의 레거시 블루투스 프로토콜을 바탕으로 한다. 한편, 종래의 버전과 비교해 대폭적으로 소비전력을 낮춘 Bluetooth Low Energy 는, Bluetooth SIG 공개자료에 의하면, 버튼형 전지 1개만으로도 수년간 구동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전송 속도는 1Mbps로, 데이터 패킷 사이즈가 8 - 27옥테드로 매우 작아졌다. 가전제품 등에 탑재된 센서와의 데이터 통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양으로, 기존 3.0+HS과 방향성을 달리하여, 제품 제작자는 3.0+HS 및 4.0을 별도로 목적에 맞춰 채용하는 식이 되었다. 블루투스 4.1. 블루투스 SIG는 2013년 12월 블루투스 4.1의 새로운 기능을 발표했다. 블루투스 4.1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블루투스 4.2. 4.2 버전은 2014년 12월 2일 발표되었다. 이 판에는 사물인터넷 지원을 위한 특징을 도입했다. 주요한 개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오래된 블루투스 하드웨어는 4.2를 데이터 패킷 Length Extension으로 받아들이고, 펌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보안을 개선했다. 블루투스 5. 2016년 6월 16일 런던에서 개최한 미디어 이벤트를 통해 블루투스 5가 블루투스 SIG에 의해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은 주로 부상하는 사물인터넷 기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2017년 4월에 블루투스5가 지원되는 삼성 갤럭시 S8을 출시했다. 마켓팅을 위해 소숫점 이하의 숫자는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용자 편의를 위한 마켓팅을 단순화시키기 위함이다. 주요 개선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데이터 전송 속도가 2Mbps, 1Mbps, 125kbps가 되었고, 2M와 1Mbps는 예전처럼 도달 거리가 100m, 125kbps는 도달 거리가 400m가 되었다. 블루투스 5.1. 2019년 발표. 블루투스 5.2. 2020년 1월 소개 프로파일. 블루투스는, 여러 종류의 장비로의 통신에 사용되는 규격인 이유로, 장비의 종류에 따라 규정되는 각각의 별도의 프로토콜이 존재한다. 이들 프로토콜의 사용법을 프로파일이라는 용어로 표준화하고 있다. 통신하고자 하는 장비와 장비 간에, 동일한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그 프로파일을 이용한 통신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프로파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클래스. 블루투스는, 통신에 이용되는 전파의 강도를 클래스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블루투스 지원 장비는, 어떤 장비든 한 클래스로 분류된다. 쌍방이 같은 클래스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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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947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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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歷史, )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 또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또한 역사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들 중 후대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며 명예와는 미래에서 잊히지 않고 이어 전해진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에드워드 핼릿 카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 연구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연속된 사건들을 검증하고 분석하며 종종 인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역사학은 고고학, 사회학 등의 주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역사라는 개념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한고,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역사적 자료를 탐색한다. 이 자료들은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되는데, 1차 사료는 어떤 사건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남긴 문서, 기록 등이다. 어원.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wid-tor-"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어근은 영어의 "wit", "wise", "wisdom", "vision", "idea", 산스크리트어의 "베다"("veda"), 슬라브어의 "videti", "vedati" 등에 남아있다. (wid-tor-와 weid 앞에 붙은 별표는 이것이 확정된 정설이 아닌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어 ἱστορία(historia)는 “조사와 탐문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Περί Τά Ζωα Ιστορία》(Peri Ta Zoa Istória, 라틴어 역어: Historia Animalium)에서 사용하였다. 이 낱말은 현자(賢者), 증언자, 혹은 판관을 뜻하는 ἵστωρ("hístōr")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호메로스의 시, 헤라클레이토스, 아테네 젊은이들의 선서, 보이오티아의 비문(법적인 의미로 "판관", "증인" 혹은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있다. "조사하다"는 뜻의 "historeîn"은 이오니아 그리스어의 파생어로서, 고전기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퍼져서 나중에는 헬레니즘 문명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맥락은 16세기 말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사"에 대해 쓸 때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는 "historia"를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썼다.(반면 과학은 추론, 시는 환상에 따른 것이다) 1390년 영어에도 이 낱말이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중세 영어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뜻했다. 그러다가 15세기 말에 이르면 "과거 사건의 기록"으로 의미가 좁아진다. 독일어, 프랑스어, 다른 게르만어나 로망스어에서도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의미하는 데 같은 낱말이 쓰인다. 형용사 'historical'은 1661년에, 'historic'은 1669년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연구자"를 뜻하는 'historian'은 1531년에 등장한다. 모든 유럽 언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명사들은 용례상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과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둘 다 의미하고 있다. 영어에서 후자의 의미로는 대문자를 써서 "History"라고 쓰거나, "역사서술 (historiography)"라고 쓰기도 한다. 한자어 역사(歷史)는 근대 이후의 'history'에 대한 번역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의미하는 '史(사)'는 원래는 '기록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하였다. 역사 서술.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된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 된다.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참 과거"를 참칭하는 가짜 주장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역사 연구는 인문학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과학으로 보기도 한다. 역사는 두 학문 영역의 방법론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를 두 범주 중 한 곳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 학계에서 역사는 점차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20세기에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세계사 연구에서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거나 말로 전하며,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연구하여 역사적 의문에 해답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 역사가들은 기념물, 비문, 그림 같은 자료들도 이용했다. 일반적으로 사료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글로 쓴 기록, 구전(口傳),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들(유물, 유적). 역사가는 대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참고한다. 그러나 글로 쓴 기록은 선사와 역사의 구분이 된다. 고고학은 땅에 묻힌 유적지나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역사 연구에 유용한 분야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혼자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고고학적 발견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 자료가 쓰인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사학과는 별개의 방법론과 접근법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고고학은 텍스트 사료의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역사 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은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종종 현존하는 텍스트 사료와는 상반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의 역사상의 아나폴리스(18세기 동부 해안의 한 마을)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마크 리오니(Mark Leone)는 당시 기록 자료에서 보이는 "자유" 이데올로기 불구하고, 이때의 모든 역사적 환경의 연구를 통해 노예 소유와 부의 불평등을 밝혀서 텍스트 자료와 발굴 자료 사이에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연대기, 문화, 지역, 주제 등 다양한 기준이 있다. 이런 구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가령 "1800~1945년 과도기 시대의 국제 여성 운동"같은 경우처럼 서로 겹치기도 한다. 현대 학문이 전문화 추세를 보이기는 하나, 역사가들은 매우 특정한 것과 매우 일반적인 것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역사 연구 분야의 하나인 "큰 역사"(Big history)는 이러한 전문화에 반대하여 보편적인 양상이나 추세를 탐구한다. 역사는 종종 어떤 실용적인 혹은 이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며, 단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하기도 한다. 고대의 인류 문명사.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많은 사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류 역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로 여겨진다. 고대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판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기원전 4000년 전후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고대 문명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 예컨대 세계의 7대 기적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경이심을 자아내고 있다. 역사의 시대적 구분. 선사 시대. 일반적으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 즉 역사가 글로써 기록되지 않고 그 역사를 유물로써 알 수 있는 시대다. 역사 시대. 문자가 발명된 후 인류가 역사를 글로 기록하여 남긴 시대를 일컫는다. 밑의 시기 구분은 서양 역사관에 입각하여 구분한 것이다. 지리학과의 관계. 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종종 지리학의 도움을 받는다. 날씨의 패턴, 물의 공급, 그리고 지표면의 생태 등은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성공적인 문명화를 이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의 지리학을 참고해야 한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 세워졌다. 강물은 매년 범람하였고, 그 강둑에 흙이 쌓였다. 비옥한 토양은 농부들이 도시 사람들이 먹기에 충분한 곡식을 기를 수 있게 하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문명화를 돕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 중에는 지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일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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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는 인터넷에서 컴퓨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쓰이는 통신규약(프로토콜)의 모음이다.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 중 TCP와 IP가 가장 많이 쓰이기 때문에 TCP/IP 프로토콜 슈트라고도 불린다. 역사.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는 1960년대 말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수행한 연구개발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TCP와 IP. TCP/IP는 패킷 통신 방식의 인터넷 프로토콜인 IP (인터넷 프로토콜)와 전송 조절 프로토콜인 TCP (전송 제어 프로토콜)로 이루어져 있다. IP는 패킷 전달 여부를 보증하지 않고, 패킷을 보낸 순서와 받는 순서가 다를 수 있다.(unreliable datagram service) TCP는 IP 위에서 동작하는 프로토콜로, 데이터의 전달을 보증하고 보낸 순서대로 받게 해준다. HTTP, FTP, SMTP 등 TCP를 기반으로 한 많은 수의 애플리케이션 프로토콜들이 IP 위에서 동작하기 때문에, 묶어서 TCP/IP로 부르기도 한다. 인터넷 프로토콜 스택의 계층 구조. 인터넷 프로토콜 스택은 보통 네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OSI 모델과 비교. 두 모델은 관련은 있으나 서로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가장 큰 차이는 계층의 수이다. 앞의 모델은 네 계층, 혹은 (링크 계층을 물리 계층과 데이터 링크 계층으로 나눈다면) 다섯 계층 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OSI 모델은 일곱 계층을 사용한다. OSI 모델이 더 잘 맞는 경우는 SSL이나 TLS를 설명할 때이다. 보통 SSL이나 TLS는 TCP의 상위에, 그리고 HTTP나 SFTP, 그 밖에 stunnel이나 VPN 위에서 동작하는 애플리케이션보다는 하위에 있는 세션 계층 프로토콜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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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라넷
인트라넷(intranet)은 단체의 직원만 접근이 가능한 사설망이다. 인터넷 프로토콜을 쓰는 폐쇄적 근거리 통신망으로 간주된다. 인터넷을 조직 내 네트워크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인트라넷은 근거리 통신망(LAN)을 기반으로 데이터 저장장치인 서버를 연결하고 PC에 설치된 인터넷 검색 프로그램을 통해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방화벽을 설치하여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거나 일부 제한하여 보안을 유지한다. 인트라넷은 1994년 수많은 단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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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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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 본명은 파로크 불싸라 또는 프레드릭 불싸라(), 1946년 9월 5일 ~ 1991년 11월 24일)는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영국의 음악가이자 음악 프로듀서이다. 퀸의 리드 보컬로서 4옥타브를 넘나드는 화려한 보컬이 압권이며 특유의 무대 장악력과 퍼포먼스로 록 역사상 최고의 보컬워크(Vocal Work)를 남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곡들로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Don't Stop Me Now〉 등이 있다. 생애. 유년시절. 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파로크 불싸라'()였다. 가계나 이름, 외모 등의 면에서 일반적인 영국인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적을 가졌으며 8세기에 무슬림들에게 쫓겨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 교도의 후손이었다. 학창시절.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의 뭄바이로 보내져 10년간 기숙학교에 다녔으며, 이 시기부터 프레디(Freddy; Frederick의 애칭)라는 별칭을 사용하였다. 학창시절 프레디는 '헥틱스(Hectics)'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는데, 그 때는 리드 보컬을 맡지 않고 키보드를 연주했다. 1964년에 잔지바르에서 아랍인과 인도인을 규탄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영국으로 완전히 이주하였고, 프레디는 1969년에 런던의 일링 칼리지(Ealing College, 현 웨스트 런던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본명을 인도식 이름인 '파로크 불사라'에서 영어식으로 '프레드릭 불사라'로 개명했다. 그후 1970년 '프레디 머큐리' 로 개명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히드로 공항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는데, 후에 후배 직원들이 Queen의 I want to break free에 맞추어 춤춘 영상이 공개되어 화제가 된 적 있다. 음악 활동. 프레디는 1960년대 후반 아마추어 밴드 (Ibex)에서 리드 보컬로 활약했는데, 후에 퀸의 앨범에 수록되는 〈Stone Cold Crazy〉와 〈Liar〉의 기본이 되는 곡을 이 시기에 작곡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팀 스태플(Tim Staffell), 로저 테일러, 브라이언 메이는 밴드 스마일에서 활동하였는데, 보컬 팀 스태플이 (Humpy Bong)으로 이적하기 위해 스마일에서 탈퇴하자, 프레디는 브라이언과 로저와 함께 퀸을 결성하였으며, 베이시스트로 존 디콘을 직접 선발하였다. 당시 멤버들이 Queen이라는 이름을 반대한 이유는 퀸이라는 단어가 주로 여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게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의 고집으로 퀸이라는 이름이 탄생하였다. 1970년대 중후반, 감히 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4집과 5집의 성공, 그리고 6집 News of the world는 퀸의 인기에 정점을 찍는다. we will rock you, 프레디가 작곡한 we are the champion이 앨범에서 나왔다. 7집과 8집은 특히 미국에서 성공을 하였고 미국 진출의 큰 기여를 한다. 프레디는 뉴욕에 집 2채를 사는 등 미국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다. 1980년대 10집의 실패로 1980년 초에는 퀸 활동을 잠시 쉬면서 프로듀서 리처드 울프(Richard Wolf)의 작업에 참여하고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재개봉 사운드트랙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혔다. 1985년에는 솔로 앨범 《Mr. Bad Guy》를 발매하였고, 영국 음반 차트 6위에 올랐다. 싱글 발매된 〈I Was Born to Love You〉는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1집 The works를 발매하고 해체설에 시달리던 퀸은 Live aid에서 보여준 단 20분간의 공연으로 해체설을 일단락 시켰다. 1986년에 발매한 12번째 앨범 A kind of magic이 최후의 하이랜더 ost가 되었고 이는 크게 성공한다. 1988년에는 오페라 가수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é)와 협업하여 솔로 2집 《Barcelona》를 발매한다. 프레디와 몽셰리 카바예가 스페인 국왕을 위해 바친 How can i go on과 The golden boy는 아직도 회자되는 곡들이다. 동명의 앨범 수록곡인 〈Barcelona〉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선택되었으나, 프레디의 사망 이후 주제가 선정이 취소되고 호세 카레라스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Amigos para Siempre〉로 대체되었다. 올림픽 주제가 선정 과정에 힘입어 《Barcelona》는 1992년 재발매되었고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6위를 기록했으며, 특히 수록곡 〈Barcelona〉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2위까지 올랐다. 1989년 13집 The miracle을 발매하며 음악성을 인정 받았고 이때부터 작곡명의를 퀸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프레디는 점점 야위었고 투어도 취소하고 언론의 무차별 의혹 기사로 큰 곤혹에 시달렸다. 사망과 추모. 1990년 퀸과 함께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되어버린《Innuendo》레코딩을 시작한 후 공적인 자리에서 사라진 듯 했던 그는 I'm going slightly mad와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에서 너무 야윈 모습으로 등장했다. 결국 1991년 11월 22일 자신이 에이즈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였고, 에이즈와의 투쟁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지 하루 뒤 11월 24일 자신의 집에서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45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1992년 4월 20일 부활절, 그를 추모하기 위한 거대한 공연이 영국 런던 웸블리 경기장에서 거행되었으며 퀸의 나머지 멤버들과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조지 마이클, 익스트림, 건즈 앤 로지스, 메탈리카, 밥 겔도프, 로버트 플랜트 등 최정상급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콘서트는 전세계 TV로 생중계되어 약 1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청하였다. 1995년에 《Made in Heaven》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에는 〈A Winter's Tale〉 뿐 아니라 퀸의 미발표 곡들, 1991년 《Innuendo》 발매 이후에 녹음한 곡들, 프레디 머큐리 사망 2주전 녹음한 곡 〈Mother Love〉, 그의 솔로곡들을 나머지 퀸 멤버들이 편곡한 곡들 등이 담겨졌다. 2011년 프레디 머큐리 출생 65주년을 기념하여 구글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스페셜로고와 모션그래픽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2012년 8월 13일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1986년 웸블리 콘서트 당시 실황 중계 영상의 홀로그램으로 등장하여 세상을 떠난지 20년 만에 이루지 못했던 올림픽 공연을 이루었다. 그리고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We will rock you를 연주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 탄생 70주년을 기념해 17473 프레디머큐리라는 소행성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현재 퀸의 활동을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으로 다시금 큰 인기를 얻고있다. 그리고 이 인기에 더불어 퀸은 2020년 1월 18일과 19일에 고척돔에서 내한 공연을 진행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앨범. Mr. Bad Guy(1985) The great pretender(1987) Barcelona(1988 with 몽셰리 카바예) Living on my own .remix(1993) Time waits for no one(2019) Love me like there's no tomorrow(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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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볼츠만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1844년 2월 20일 - 1906년 9월 5일)은 통계역학과 통계열역학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과학적 모델에 대해 대단히 논쟁이 심할 시기에 원자론을 주창한 가장 중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생애. 어린 시절과 학생 시절. 볼츠만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1844년에 빈에서 태어났다. 볼츠만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George Boltzmann)은 세무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베를린에서 이주한 시계공이었다. 어머니인 카테리나 파우에른파인트(Katharina Pauernfeind)는 잘츠부르크 출신이었다. 볼츠만은 양친으로부터 가정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15세에 린츠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에 볼츠만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863년 빈 대학교에 입학해 물리학을 공부해 1867년 기체운동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요제프 슈테판의 조수가 되어 2년간 일했다. 볼츠만에게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업적을 소개한 것은 슈테판이었다. 학문적 경력. 볼츠만은 그의 나이 25세가 되는 1869년에 그라츠 대학의 이론물리학(수리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1869년의 몇 달간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로베르트 분젠과 레오 쾨니히스베르거와, 1871년에는 베를린에서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공동 연구를 했다. 1873년 볼츠만은 빈 대학의 수학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876년까지 일했다. 1873년에 볼츠만은 그라츠의 교사 양성 대학의 여학생이었던 헨리에테 폰 아이겐틀러를 처음 만났고, 1876년 7월에 헨리에테와 결혼해 슬하에 세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볼츠만은 다시 그라츠로 돌아와 실험물리학과의 학장을 맡았다. 그의 제자 중에는 아레니우스 방정식으로 유명한 스반테 아레니우스와 열역학 제3법칙으로 유명한 발터 네른스트가 있었다. 볼츠만은 그라츠에서 14년간을 일했으며, 이 당시에 통계 물리학의 기본 개념을 발전시켰다. 1887년에는 그라츠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볼츠만은 1890년 독일에 있는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894년에는 다시 빈 대학으로 돌아와 요세프 슈테판의 자리를 이어 이론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말년. 볼츠만은 빈 대학의 여러 동료들과 친해지지 못했는데, 특히 당시 빈 대학의 철학 교수이자 과학사 교수였던 에른스트 마흐와 원자론을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곧 빌헬름 오스트발트의 초청으로 1900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이직했다. 마흐의 퇴임 이후에 볼츠만은 1902년에 다시 빈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칼 프르지브람(Karl Przibram),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같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빈에서 볼츠만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가르쳤다. 볼츠만의 자연철학에 관한 강의는 매우 인기가 많아서 그 시대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강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가장 큰 강의실도 모자라서 사람들은 계단사이에 서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볼츠만의 철학 강의 때문에 황제들이 궁전으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린츠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있었다. 1906년 9월 5일, 볼츠만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근방의 두이노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우울증이 원인이었다고 추측되지만, 명확한 자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철학. 볼츠만의 기체분자운동론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들과 에른스트 마흐와 물리화학자인 오스발트같은 과학자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반대했다. 1890년대 동안 볼츠만은 원자론자들과 비원자론자 모두가 원자에 대한 논의 없이 물리학을 할 수 있도록 타협안을 만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해결 방법은 원자는 곧 "Builder"라고 하는 헤르츠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원자론자들은 그 그림이 실제 원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원자론자들은 그림 자체가 실제 원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각 집단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오스발트나 순수 열역학의 옹호자들은 볼츠만의 원자와 분자에 관한 가정과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 해석 때문에 기체분자운동론과 통계역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백여년에 걸쳐 볼츠만의 과학은 다른 철학적 반대에 계속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마흐의 학생과 구스타프 야우만 등을 포함한 물리학자들은 헤르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그것은 모든 물리적 운동은 궁극적으로 전자기적 운동이며, 전자기적 운동은 원자와 분자 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1900년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것이 볼츠만의 운동론과 열역학 2법칙의 통계적 해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볼츠만을 깊게 우울하게 만들었다. 1901년 빈 대학의 마흐가 사직을 한 후, 볼츠만은 다시 빈으로 돌아가 그의 물리학의 철학적 반대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한번 낙담하게 된다. 1904년에 세인트 루이스의 국제 물리학 회의에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볼츠만은 물리학 부문에 초청받지 못하고 "응용수학" 분과에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다른 물리학자들의 철학적 입장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의 관점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가까운 것으로,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된 철학사상을 계속 이어받고 그래서 그러한 인습을 과학자들이 극복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1905년에 볼츠만은 오스트리아계 독일 철학자 브렌타노와 광범위하게 뜻을 같이했다. 그는 과학에서 좀 더 철학의 실재를 반박하기 위해서 좀 더 명확하게 철학에 정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접근에 있어 또 다시 낙담했다. 이듬해 1906년 그의 정신 상태는 매우 나빠졌고, 그는 은퇴하고 말았다. 그는 같은해 9월에 자살했다. 물리학. 볼츠만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기체의 분자 속도에 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포함한 기체분자운동론에 관한 것이다. 맥스웰-볼츠만 통계역학과 에너지에 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는 고전 통계 역학의 기초로 남아있다. 그것들은 양자 역학에 맞지 않는 여러 현상에 적용가능하며, 온도의 의미에 대해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의 확립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에 대한 그의 믿음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미국의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 그리고 1808년 존 돌턴의 원자 발견의 이후로 대부분의 화학자와 공유되었다. 그는 분자와 원자에 관해서 독일 물리학지 편집자와 긴 논쟁을 벌였다. 볼츠만이 죽고 2~3년 뒤에 페랭의 브라운 운동 연구에서 아보가드로 수와 볼츠만 상수가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작은 물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에 납득시켰다. 그의 업적으로는 볼츠만 인자라고 불리는 분배법칙을 들 수 있다. 이 법칙은 종래의 분자들의 속도에 관한 맥스웰 분배법칙을 확장시켜 외적인 힘의 작용을 외적인 힘의 작용을 함께 고려하여 얻은 것으로 분자들의 에너지가 주로 절대온도가 플랑크상수의 곱으로 주어지는 열적인 에너지 근처에 분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또 슈테판-볼츠만 공식을 유도해냈다. 흑체의 단위표면적에서 방출되는 모든 파장의 빛에너지의 총합이 흑체의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1879년에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하고, 이를 1884년에 이론적으로 유도해내었다. 이것은 20세기 양자론이 등장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플랑크의 말을 인용하면 "엔트로피와 확률이 로그로 연결된다는 것을 처음 진술된 것은 볼츠만의 기체분자이론에서였다." 그 유명한 엔트로피 S에 관한 식은 여기서 formula_2 = 1.3806505(24) × 10−23  J K−1는 볼츠만 상수이다. W는 거시상태의 기회의 빈도,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계의 거시적인 상태에 상응하는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를 말한다. W는 아래의 식을 이용하여 구해낼 수 있다. 이는 열적인 평형상태에 있는 계에 대하여 열역학적인 성질을 구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엔트로피는 계의 주어진 거시적인 상태에 해당하는 가능한 모든 미시적인 상태의 수의 대수를 취한 양에 비례함을 나태낸 것이다. 이 관계식은 모든 미시적인 상태들의 사전확률이 같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이 가정을 보완하기 위하여 볼츠만은 에르고드 가정을 도입하였다. 이 가정에 의하면 하나의 계가 궁극적으로 모든 가능한 미시적인 상태를 두루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볼츠만 운송 방정식. 볼츠만 방정식은 이상기체의 동역학을 묘사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이전에는 기체분자들이 평형상태에 도달해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풀었으나, 볼츠만은 그러한 가정을 배제하고, 비평형상태에 있을 경우 어떻게 평형상태로 변화해 나갈 지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볼츠만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는 주어진 시간에 따른 물질의 위치와 운동량의 분포 함수이며, F는 힘, m은 물질의 질량, T는 시간이며, v는 물질의 평균속도를 의미한다. 이 방정식은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확률 분포의 시공간 미분을 나타내고 있다. 좌변의 첫항은 분포 함수의 시간 미분을 나타내고, 두 번째 항은 위치 미분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세 번째 항은 물질에 주어지는 어떠한 힘의 효과를 나태내고 있다. 우변은 충돌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원칙적으로, 위 방정식은 적절한 경계조건이 주어진다면 완벽하게 기체들의 총제적인 동역학을 보여준다. 1차 미분 방정식은 믿을 수 없게 간단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f는 멋대로인 물질의 분포함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에 주어지는 힘 또한 본포함수의 속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볼츠만 방정식은 적분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그것을 풀기 위해 몇 년을 노력했다고 한다. 충돌항에 관한 모양은 얼추 맞다. 그러나 이상기체에 관한 볼츠만 방정식의 Chapman-Enskog 확장이 더욱 더 정확하다. 볼츠만은 여러 해 동안 그의 방정식을 이용하여 열역학 제 2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H정리이다. 그의 충돌항에서 그가 만든 핵심 가정은 "분자 혼돈"()이다. 가역성을 깨버린 그의 가정은 제 2법칙을 함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개연론적인 가정이었고, 볼츠만의 겉보기 성공에 불과했다. 결국 요한 요제프 로슈미트와의 로슈미트의 역설에 관한 긴 논쟁은 결국 그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1970년대에 코헨과 도르프만은 높은 밀도에서 볼츠만 방정식의 체계적 확장이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따라서 밀집된 기체와 액체의 비평형 통계역학은 그린-구보 관계(Green-kubo relations), 파동이론 그리고 다른 접근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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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지시 사항들이 나열된 순서를 프로그램(, , )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