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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5155 |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8A%A4%EB%A7%8C%EB%A0%B9%20%EC%8B%9C%EB%A6%AC%EC%95%84 | 오스만령 시리아 | 오스만 시리아는 레반트 내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말하며, 보통 지중해 동쪽, 유프라테스 강 서쪽, 아라비아 사막 북쪽, 토로스 산맥 남쪽 지역으로 정의된다.
오스만 시리아는 16세기 초 다마스쿠스 에야레트의 단일 에야레트(주)로 맘루크족으로부터 정복하면서 오스만족이 조직하게 되었다. 1534년 알레포 에야레트는 별도의 행정으로 분할되었다. 트리폴리 에야레트는 1579년 다마스쿠스 지방에서 형성되었고, 이후 아다나 에야레트는 알레포에서 분리되었다. 1660년 사페드의 에야레트가 설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돈 에야레트으로 개칭되었으며, 1667년 레바논 에미리트 산은 시돈 지방 내에서 특별 자치 지위를 부여받았으나 1841년 폐지되고 1861년 레바논 무타사리프 산으로 재구성되었다. 1864년 탄지마트 개혁 이후 시리아의 시아파인 빌라예트, 알레포 빌라예트, 베이루트 빌라예트로 탈바꿈하였다. 마침내 1872년 예루살렘의 무타사리프령(Mutasarrifate)가 시리아 빌라예트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 자치행정부로 분할되었다.
오스만 제국
유다이아 |
284937 |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A4%80 | 장준 | 장준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장준 (촉한)(張遵):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관료・장군. 장비의 손자. 장포의 아들.
장준 (전량)(張駿):중국 5호 16국 시대 전량의 제4대 국왕. 자는 공정(公庭).
장준 (만당)(張濬):중국 당나라 말기 희종・소종 때의 재상. 자는 우천(禹川).
장준 (후량)(張俊):중국 당나라 말기에서 5대 초기 후량 때까지의 관료.
장준 (백영)(張俊):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 장준 덕원(張浚德遠)과는 동시대의 인물. 자는 백영(伯英).
장준 (덕원)(張浚):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정치가. 장준 백영(張俊伯英)과는 동시대의 인물. 자는 덕원(德遠).
장준 (1895년)(張俊):중국 청나라 말기의 장군.
장준 (배드민턴 선수)
장준(2000년 4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태권도 선수이다.
같이 보기 |
898977 |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3%BC%EC%84%B1%20%28%EA%B5%90%EC%9C%A1%EC%9D%B8%29 | 김주성 (교육인) | 김주성(金周晟, 1952년 1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학력
1971년 : 경기고등학교 졸업
1976년 :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학 학사
1978년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1990년 : 텍사스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약력
한국교원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정치철학연구회 창립회장
한국정치사상학회 창립이사
한국정치학회 사상분과 위원장
한국교원대학교 제2대학 학장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
한국장학재단 명예홍보대사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세계시민교육자문위원
한국교원대학교 총장
195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전광역시 출신
경기고등학교 동문
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한국교원대학교 총장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
2784790 |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20%ED%94%84%EB%A0%88%EC%8A%A4%EC%BD%A7 | 로버트 프레스콧 | 로버트 프레스콧(Robert Prescott, 1957년 5월 17일 ~ )은 미국의 배우, 텔레비전 배우이다.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영화
본 레거시 (2012년) - 공군 요원 역
건 힐 로드 (2010년)
번 애프터 리딩 (2008년)
마이클 클레이튼 (2007년)
굿 셰퍼드 (2006년)
라버 앤 러버 (1999년)
법과 질서 (1990년)
스페이스볼 (1987년)
블루 데빌 (1986년)
21세기 두뇌 게임 (1985년)
총각 파티 (1984년)
외부 링크
살아있는 사람
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
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1957년 출생 |
2662 | https://ko.wikipedia.org/wiki/%EB%94%94%EC%9E%90%EC%9D%B8%20%ED%8C%A8%ED%84%B4%20%28%EC%B1%85%29 | 디자인 패턴 (책) | 《디자인 패턴》(Design Patterns, )은 소프트웨어 설계에 있어 공통된 문제들에 대한 표준적인 해법과 작명법을 제안한 책이다. 이 분야의 사인방(Gang of Four, 줄여 GoF)으로 불리는 에리히 감마(Erich Gamma), 리처드 헬름(Richard Helm), 랄프 존슨(Ralph Johnson), 존 블리시데스(John Vlissides)가 같이 썼고, 한국어 판은 김정아의 번역으로 피어슨 에듀케이션 코리아를 통해 출판되었다.
책의 첫 번째 반절은 다양한 디자인 패턴의 정의에 할애하고 있고, 나머지 반절은 실제적으로 유용한 디자인 패턴들을 나열하고 있다. 책의 예제들은 객체지향적인 언어인 C++과 스몰토크로 제시되고 있다. 다음은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패턴의 리스트이다.
생성 패턴(Creational Patterns)
추상 팩토리 패턴: 동일한 주제의 다른 팩토리를 묶어 준다.
빌더 패턴: 생성(construction)과 표기(representation)를 분리해 복잡한 객체를 생성한다.
팩토리 메서드 패턴: 생성할 객체의 클래스를 국한하지 않고 객체를 생성한다.
프로토타입 패턴: 기존 객체를 복제함으로써 객체를 생성한다.
싱글턴 패턴: 한 클래스에 한 객체만 존재하도록 제한한다.
구조 패턴(Structural Patterns)
어댑터 패턴: 인터페이스가 호환되지 않는 클래스들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타 클래스의 인터페이스를 기존 인터페이스에 덧씌운다.
브리지 패턴: 추상화와 구현을 분리해 둘을 각각 따로 발전시킬 수 있다.
합성 패턴: 0개, 1개 혹은 그 이상의 객체를 묶어 하나의 객체로 이용할 수 있다.
데코레이터 패턴: 기존 객체의 매서드에 새로운 행동을 추가하거나 오버라이드 할 수 있다.
파사드 패턴: 많은 분량의 코드에 접근할 수 있는 단순한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플라이웨이트 패턴: 다수의 유사한 객체를 생성·조작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프록시 패턴: 접근 조절, 비용 절감, 복잡도 감소를 위해 접근이 힘든 객체에 대한 대역을 제공한다.
행동 패턴(Behavioral Patterns)
책임연쇄 패턴(Chain of responsibility): 책임들이 연결되어 있어 내가 책임을 못 질 것 같으면 다음 책임자에게 자동으로 넘어가는 구조
커맨드 패턴(Command Pattern: 위의 명령어를 각각 구현하는 것보다는 위 그림처럼 하나의 추상 클래스에 메서드를 하나 만들고 각 명령이 들어오면 그에 맞는 서브 클래스가 선택되어 실행하는 것
해석자 패턴 (Interpreter Pattern): 문법 규칙을 클래스화한 구조를 갖는SQL 언어나 통신 프로토콜 같은 것을 개발할 때 사용
반복자 패턴 (Iterator Pattern): 반복이 필요한 자료구조를 모두 동일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접근할 수 있도록 메서드를 이용해 자료구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옵저버 패턴: 어떤 클래스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이를 감지하여 다른 클래스에 통보해주는 것
전략 패턴 (Strategy Pattern): 알고리즘 군을 정의하고 각각 하나의 클래스로 캡슐화한 다음, 필요할 때 서로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템플릿 메서드 패턴 (Template method pattern): §상위 클래스에서는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하위 클래스에서 결정되는 디자인 패턴
방문자 패턴 (visitor Pattern): 각 클래스의 데이터 구조로부터 처리 기능을 분리하여 별도의 visitor 클래스로 만들어놓고 해당 클래스의 메서드가 각 클래스를 돌아다니며 특정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
중재자 패턴 (Mediator Pattern): 클래스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캡슐화하여 한 클래스에 위임해서 처리 하는 디자인 패턴
상태 패턴 (State Pattern): 동일한 동작을 객체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처리해야 할 때 사용하는 디자인 패턴
기념품 패턴 (Memento Pattern): Ctrl + z 와 같은 undo 기능 개발할 때 유용한 디자인패턴. 클래스 설계 관점에서 객체의 정보를 저장
미국의 책
소프트웨어 공학 책
소프트웨어 디자인 패턴
1994년 책 |
35417 |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C%9B%90%EC%A0%84%20413%EB%85%84 | 기원전 413년 |
사건
시라쿠사 전투 - 아테네의 시실리 원정은 재앙으로 마감.
스파르타가 아티카에서 데켈리아(Decelea) 점령.
티사페르네스(Tissaphernes)가 소아시아의 총독에 임명됨.
아르켈라우스 1세(Archelaus I), 페르디카스(Perdiccas)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국 왕위 계승.
탄생
사망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 장군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페르디카스 2세 |
47288 | 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81%BC%EB%A6%AC%EA%B3%BC | 코끼리과 | {{생물 분류
|이름=코끼리과
|색=동물
|그림=Elephas maximus (Bandipur).jpg
|그림_설명=아시아코끼리(Elephas maximus) 수컷.
|계=동물계
|문=척삭동물문
|강=포유강
|목=장비목
|과=코끼리과(Elephantidae)
|과_명명 = Gray, 1821
|모식종=아프리카코끼리(Loxodonta.africana )
|모식종_명명=Linnaeus, 1758
|하위_링크=현존하는 종
|하위=
아프리카코끼리속 (Loxodonta)
아프리카코끼리 (L. africana)
둥근귀코끼리 (L. cyclotis)
아시아코끼리속 (Elephas)
아시아코끼리 (E. maximus)
}}
코끼리과(Elephantidae, )는 포유류의 한 과으로 코끼리와 매머드를 포함한다. 육상의 대형 포유류로, 큰 코와 엄니가 특징이다. 코끼리과의 속은 대부분 멸종했고, 아프리카코끼리속(Loxodonta)과 아시아코끼리속(Elephas)의 두 속만 생존해 있다.
코끼리과 분류는 존 에드워드 그레이가 1821년 처음 묘사했으며, 후에 장비목의 한 분류군으로 지정되었다. 여러 학자들이 코끼리과에 장비목의 멸종한 속을 넣거나 빼는 식으로 개정되었다.
분류
코끼리과는 마스토돈 등의 마스토돈과(Mammutidae)와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나왔다. 장비목의 분류 체계는 아직 안정적이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개정되고 있다. 코끼리과는 대략 다음처럼 정리될 수 있다.
장비목(Proboscidea)
Elephantida
코끼리과Elephantidae (elephants and mammoths)
†프리멜레파스속(Primelephas)
아프리카코끼리속(Loxodonta)
아시아코끼리속(Elephas)
†매머드속(Mammuthus)
†팔라에올록소돈속(Palaeoloxodon)
†스테고돈속(Stegodon)
†스테골로포돈속(Stegolophodon)
†스테고테트라벨로돈속(Stegotetrabelodon)
†스테고디벨로돈속(Stegodibelodon)
곰포테리움과(Gomphotheriidae)
†Mammutida
†마스토돈과(Mammutidae)
마스토돈속(Mammut)
지골로포돈(Zygolophodon)incertae sedis에리트레움속(Eritreum)
학자에 따라서는 †아난쿠스속(Anancus)과 †테트랄로포돈속(Tetralophodon), †스테고마스토돈속(Stegomastodon), †파라테트랄로포돈(Paratetralophodon, †쿠비에로니우스속(Cuvieronius)을 코끼리과로 분류하기도 하고, 별도의 곰포테리움과(Gomphotheriidae)로 분류하기도 한다. 비슷하게 스테고돈속(Stegodon)과 스테골로포돈속(Stegolophodon)을 스테고돈과(Stegodontidae)로 나누기도 한다.
현존하는 코끼리과의 분류 역시 여러 차례의 개정이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코끼리과 동물은 다음이 분류된다.
Elephantidae (코끼리과)Elephas (아시아코끼리속)E. maximus 아시아코끼리E. m. maximus 스리랑카코끼리E. m. borneensis 보르네오코끼리E. m. indicus 인도코끼리E. m. sumatranus 수마트라코끼리
†E. m. rubridens 중국코끼리Loxodonta (아프리카코끼리속)L. africana 아프리카코끼리
L. cyclotis'' 둥근귀코끼리
계통 분류
각주
같이 보기
코끼리
장비목
존 에드워드 그레이가 명명한 분류군 |
2589602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93%9C%EB%A1%9C%EC%9D%B4%EB%93%9C%2010 | 안드로이드 10 | 안드로이드 10 또는 안드로이드 Q(Android 10, Android Q)은 10번째 주요 릴리스이며 안드로이드 모바일 운영 체제의 17번째 버전이다. 2019년 9월 3일에 정식 출시되었다.
역사
2019년 3월 13일 구글은 안드로이드 10의 첫 베타 버전을 안드로이드 Q라는 예비 이름으로 출시하였다. 2018년 10월까지 업데이트가 보장된 1세대 픽셀 및 픽셀 XL 장치는 안드로이드 10 버전 업데이트를 받았다. 픽셀 2와 픽셀 2 XL은 구글 스토어에서 처음 출시되었을 때부터 최소 3년 동안 안드로이드 버전 업데이트를 보장하는 연장된 보증 기간을 부여받은 후 포함되었다. 최종 릴리스 이전에 총 6개의 베타 버전 또는 릴리스 후보 버전이 출시되었다.
베타 프로그램은 2019년 5월 7일 베타 3의 출시와 함께 확장되었으며 11개 OEM의 14개 파트너 장치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베타 액세스는 2019년 5월 21일 미국 정부의 제재로 인해 화웨이 메이트 20 프로에서 제거되었다가 5월 31일 복원되었다.
구글은 2019년 6월 5일 최종 안드로이드 Q API와 SDK를 포함한 베타 4를 출시하였다. 동적 시스템 업데이트(DSU)도 베타 4에 포함되어 있다. Dynamic System Update를 사용하면 Android Q 기기가 일시적으로 GSI(Generic System Image)를 설치하여 최신 버전의 Android를 현재 Android 버전 위에 설치할 수 있습니다. 일단 사용자가 선택된 GSI 이미지 테스트를 끝내기로 결정하면, 그들은 간단히 그들의 기기를 재부팅하고 그들의 일반 기기의 안드로이드 버전으로 재부팅할 수 있다.
구글은 2019년 7월 10일 최종 API 29 SDK와 최신 최적화 및 버그 수정을 포함한 베타 5를 출시하였다. 구글은 2019년 8월 7일 베타 6를 출시하였다.
2019년 8월 22일, 안드로이드 Q는 코드네임 없이 안드로이드 10으로 브랜드화 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구글은 디저트를 기반으로 한 주요 출시 타이틀을 부여하는 관행을 종료하였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음식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일부 언어로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 엔지니어링 부사장인 데이브 버크는 팟캐스트에서 Q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디저트는 이국적이었으며 개인적으로 퀸 케이크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내부 파일과 릴리스와 관련된 빌드 시스템 내에 모과 타르트(quince tart)의 약자인 "qt"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언급했다.
출시 예정인 동상도 숫자 10이며, 숫자 0 안에 안드로이드 로봇 로고(또한 머리로만 구성됨)가 있다.
기능
움직임
안드로이드 10에는 디스플레이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스와이프하여 뒤로 이동, 위로 스와이프하여 홈화면으로 이동, 개요에 액세스하기 위해 스와이프하고 하단 모서리에서 대각선으로 스와이프하는 등의 제스처가 포함된 개선된 전체 화면 제스처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구글 어시스턴트를 활성화하고 화면 하단의 제스처 표시선을 따라 스와이프하여 앱을 전환한다. "뒤로"명령으로 엣지 스와이프 제스처를 사용하면 사이드 바 메뉴를 사용하는 앱과 스와이프하여 액세스할 수 있는 기타 기능과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앱은 API를 사용하여 화면의 특정 영역 내에서 뒤로 제스처를 처리하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으며, 제스처를 활성화하기 위해 대상 영역의 크기를 조정하기 위해 감도 제어가 추가되었으며 구글은 나중에 서랍 위젯이 지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화면 가장자리 근처를 길게 눌러 "탐색"한 다음 열었다. 안드로이드 "허니콤"이후로 사용된 기존의 3키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옵션으로 지원된다.
구글 인증 요구 사항에 따라 OEM은 안드로이드 10의 기본 제스처 및 3 키 탐색을 지원해야한다. OEM은 그들 자신의 제스처를 자유롭게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용하도록 설정해서는 안되며 다른 탐색 설정보다 한 수준 더 깊은 별도의 영역에 나열되어야하며 알림을 사용하여 승격할 수 없다. 안드로이드 파이에서 사용되는 2키 제스처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파이에서 업그레이드 된 장치에서는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으로만 포함할 수 있다 (단, 지침에서 권장하는 방법).
사용자 경험
"버블"이라는 기능을 사용하여 지원되는 앱의 컨텐츠를 팝업 오버레이 (페이스북 메신저의 오버레이 기반 "채팅 헤드"기능과 유사)로 표시할 수 있다. 앱은 알림을 통해 버블을 생성할 수 있다. 이 기능의 사용 사례에는 채팅 및 메시징 응용 프로그램, 미리 알림 및 "실행중인 작업 및 업데이트"가 포함된다. 버블은 기존의 오버레이 권한을 대체하도록 설계되었다. 기존의 오버레이 권한은 보안 (클릭 재킹 악성 프로그램의 사용으로 인해) 및 성능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사이드로드 된 앱은 30 초 후에 자동으로 오버레이 권한을 잃고, 기기가 재부팅 될 때마다 플레이 스토어의 앱은 오버레이 권한을 잃는다. 안드로이드 10 Go는 오버레이 권한의 사용을 완전히 금지한다.
안드로이드 10에는 시스템 수준 다크 모드가 포함되어 있다. 타사 앱이 활성화되면 자동으로 다크 모드로 전환될 수 있다.
또한 앱은 오버레이 패널을 통해 특정 설정 (예 : 인터넷이 필요한 경우 인터넷 연결 및 Wi-Fi 설정 등)에 대한 "설정 패널"을 표시할 수 있다.
개인정보 및 보안
안드로이드 10에는 몇 가지 주요 보안 및 개인 정보 변경 사항이 있다. 사용자가 포그라운드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에만 위치 데이터에 액세스할 수 있도록 앱을 제한할 수 있다. 백그라운드 앱에 의한 활동 시작에 대한 새로운 제한 사항도 있다.
구글은 2019년 2월 로우 엔드 기기와 같은 AES (Advanced Encryption Standard)에 대한 하드웨어 가속 지원이 없는 기기에서 사용하도록 설계된 암호화 코드인 Adiantum을 발표했다. 구글은 이 암호가 ARM Cortex-A7 CPU에서 AES-256-XTS보다 5배 빠르다고 말했다. 따라서 CPU가 하드웨어 가속 AES를 지원할 수 없는 경우 Adiantum을 사용하여 사양에 관계없이 모든 안드로이드 10 디바이스에서 디바이스 암호화가 필수이다. 또한 모든 파일에 "파일 기반 암호화"(Android Nougat에 처음 도입된)의 구현도 필수적이다.
안드로이드 10과 함께 제공되는 기기에서는 선택한 시스템 구성 요소 (예 : ANGLE, Conscrypt, 미디어 프레임 워크, 네트워킹 구성 요소 등)에 대한 보안 패치를 전체 시스템 업데이트 ("프로젝트 메인 라인")없이 구글 플레이 스토어를 통해 서비스할 수 있다. 구글 모바일 서비스의 라이센스를 받으려면 제조업체는 특정 모듈에 대해 이러한 업데이트를 지원해야하며 나머지는 "권장"으로 표시되지만 선택 사항이다. 이 시스템에서 선택된 모듈은 새로운 APEX 패키지 형식을 사용하는데, 이는 저수준 시스템 구성 요소를 수용하고 서비스하기 위해 설계된 APK 파일의 변형이다.
"범위 스토리지"로 알려진 스토리지 액세스 권한의 주요 변경 사항은 안드로이드 10에서 지원되며 안드로이드 11로 시작하는 모든 앱에서 필수가 된다. 앱은 자신이 생성 한 외부 스토리지의 파일에만 액세스할 수 있다 (바람직하게는 앱별 디렉토리) 및 음악, 사진 또는 비디오 디렉토리에 포함된 오디오, 이미지 및 비디오 파일. 다른 파일은 Storage Access Framework를 통한 사용자 개입을 통해서만 액세스할 수 있다.
IMEI 번호와 같이 재설정 불가능한 장치 식별자를 읽으려면 앱에 새로운 "권한있는 전화 상태 읽기"권한이 있어야 한다.
또한 안드로이드 10은 기본적으로 TLS 1.3 지원을 활성화했다.
플랫폼
모드 변경시 앱 연속성, 다중 창 모드로 변경하여 모든 앱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도록 (현재 사용중인 앱만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애플리케이션이 "일시 중지 된"것으로 간주 됨), 접이식 스마트 폰에 대한 플랫폼 최적화가 이루어졌다. 다중 디스플레이에 대한 추가 지원.
"바로 가기 공유"로 "직접 공유"에 성공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유 메뉴 내에서 사용하기 위해 앱이 공유 할 직접 대상 목록 (예 : 앱과 특정 연락처의 조합)을 반환할 수 있다. Direct Share와 달리 앱은 대상을 미리 게시하고 런타임에 폴링 할 필요가 없으므로 성능이 향상된다.
MIDI 컨트롤러, AV1 비디오 코덱, Opus 오디오 코덱 및 HDR10 +에 대한 기본 지원이 추가되었다. 카메라 사진에서 깊이 정보를 검색하기위한 새로운 표준 API가 있으며,보다 고급 효과에 사용할 수 있다.
안드로이드 10은 WPA3 암호화 프로토콜과 Enhanced Open을 지원하여 Wi-Fi에 대한 기회 암호화를 제공한다. 안드로이드 10은 DSS (Dual-SIM dual-standby)에 대한 지원을 추가하지만 처음에는 Pixel 3a 및 Pixel 3a XL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구글 플레이 시스템 업데이트
안드로이드 10의 신기능이다. 안드로이드 10부터는 일부 보안 업데이트를 구글이 스마트폰에 전송한다.
기타
이스터 에그에서는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Android와 10이 표시되어 있다. 10의 1을 돌려 0 안에 맞춰 알파벳 Q(안드로이드 10의 별칭)를 만들었다면 네모네모 로직을 플레이할 수 있다.
이스터에그
안드로이드 10 로고에서 원 모양인 O 안에 1을 왼쪽으로 45도가량 돌려 맞추면 다음과 같이 Q가 나온다. 이때 배경의 줄무늬가 움직이는데 android 글자를 세 번 정도 누르면 로직 같은 게임이 나온다. 화면 회전 기능을 활성화하고 가로 세로를 돌리면서 맞추면 된다.
더 보기
윈도우가 애초에 설치되어 있던 컴퓨터에는 모든 버전의 안드로이드를 설치할 수 없다. 하는 경우에는 EULA를 위반하는 행위이다.
각주
외부 링크
10
2019년 소프트웨어 |
5919 | https://ko.wikipedia.org/wiki/883%EB%85%84 | 883년 |
연호
당(唐) 중화(中和) 3년
일본(日本) 간교() 7년
기년
당(唐) 희종(僖宗) 10년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9년
발해(渤海) 대현석(大玄錫) 13년
사건
탄생
사망 |
247747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A%B3%84%EC%9B%90 | 박계원 | 박계원(朴啓源, 1970년 2월 4일 ~ )은 전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내야수이자, 현재 부산고등학교의 야구부 감독이다.
선수 시절
롯데 자이언츠 시절
1992년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했으며 데뷔 첫 해에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이후 부상으로 2시즌간 공백기를 가졌다.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1998년에 입단하였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99년에 입단하였다.
SK 와이번스 시절
2000년에 입단하였다. 2000년과 2001년에는 백업 유격수를 맡았으며, 2002년에는 타석에 서지 못하고 대수비와 대주자로만 3경기 출전에 그친 뒤 은퇴했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04년부터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kt 위즈에서 코치로 활동하다가 2020년부터 부산고등학교의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한다.
출신 학교
대연초등학교
부산중학교
부산고등학교
고려대학교
통산 기록
외부 링크
197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부산광역시 출신
KBO 리그 내야수
KBO 리그 2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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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32 | https://ko.wikipedia.org/wiki/%EB%8B%AC%EB%A7%88%ED%8B%B0%EC%95%84 | 달마티아 | 달마티아(, , )는 아드리아 해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크로아티아의 지역으로, 북쪽의 라브섬부터 남쪽의 코토르만까지 뻗어 있다. 달마티아 내륙의 너비는 북쪽 50km, 남쪽 수 km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험준한 디나르알프스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79개의 섬과 500여 개의 작은 섬이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섬은 브라치섬, 파그섬, 흐바르섬이다. 최대 도시는 스플리트이며, 자다르, 시베니크, 두브로브니크 등이 관광지로 유명하다.
중앙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이스트라와 함께 크로아티아를 구성하는 4개의 역사적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 크로아티아의 자다르주, 시베니크크닌주, 스플리트달마티아주, 두브로브니크네레트바주의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역사
과거 로마 제국의 속주였으며,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000년 경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이 아드리아 해 연안을 통제했다. 18세기 말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 내부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같이 보기
달마티아 햄
달마티안: 달마티아가 원산지인 개 품종
각주
크로아티아의 지리
로마의 속주
크로아티아의 역사적 지역 |
305139 | 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D%81%AC%EB%B6%80%EB%8B%A4 | 메크부다 | 메크부다(Mekbuda) 또는 쌍둥이자리 제타는 쌍둥이자리 방향으로 지구에서 약 1,600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변광성이다. 메크부다는 밤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페이드 변광성이기도 하다. 세페이드 변광성은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까지의 거리를 재는 척도가 되며, 이 점 때문에 메크부다를 포함한 세페이드들은 천문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관측 역사
독일의 월면학자 율리우스 F. J. 슈미트는 1844년 메크부다의 밝기가 일정한 간격을 갖고 변하는 것을 간파했고 3년 뒤 1847년 본 대학교 재학 시절 자신이 메크부다가 변광성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했음을 검증받았다. 슈미트의 관측 기록은 현재 하버드 대학교의 AAVSO에 보관중이다. 문서에는 1844년 슈미트가 이 별의 밝기가 변하는 것을 발견한 뒤의 소감을 적은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3월 나는 제타별의 밝기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리적 특징
메크부다는 쌍둥이자리를 구성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바이어 기호가 붙은) 별들 중 지구에서 가장 멀다. 메크부다는 전형적인 세페이드 변광성이자 맥동 변광성으로, 10.150079일 주기로 밝기가 3.6 ~ 4.2 등급 사이에서 변한다.
메크부다는 주기-광도 관계를 확립시켜 준 천체이기도 하다(주기-광도 관계란 변광성의 광도가 높을수록 맥동 주기는 길어지는 것을 뜻한다).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은 몇 개 되지 않은데 이들은 겉으로 볼 때는 다들 비슷해 보이지만 밝기 변화 주기는 메크부다가 가장 길다. 주기-광도 관계에 따르면 메크부다는 넷 중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메크부다는 북반구 하늘의 세페이드 중 세 번째로 밝게 보인다. 그런데 밝기와는 달리 시직경은 북반구 하늘 세페이드 중 가장 크며, 이 점 때문에 메크부다는 이전부터 천문학자들이 그 크기를 직접 재고자 하는 대상이었다.
광도 변화의 형태 및 변광 주기-광도 관계로 미루어 보아 메크부다는 세페우스자리 델타형 변광성이다. 다만 전형적인 세페우스자리 델타형 변광성은 급격하게 광도가 높아졌다가 서서히 낮아지는 반면, 메크부다는 완만하게 밝아졌다가 비슷한 속도로 원래 밝기로 돌아가는 다소 대칭적인 구조의 밝기 변화를 보여준다.
메크부다의 크기 변화를 관측하는 것은 지구에서 달 표면에 있는 농구공 크기 물체가 커지고 작아지는 것을 감지하는 것과 같다. 기술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9 ~ 2000년 벤 레인 연구진은 이 별이 수축했을 때와 팽창했을 때의 시지름을 구할 수 있었다. 시지름에 근거하여 구한 지구와 이 별 사이의 간격은 약 1100광년이었다. 이후 2001년 커벨라 연구진은 애리조나주 홉킨스 산 IOTA 망원경을 이용하여 잰 메크부다의 평균 반지름이 1.48 ~ 1.78 밀리초각이라고 밝혔다.
유럽 우주국은 관측에 칠레 소재 파라날 천문대의 VLTI 망원경을 사용했는데, 2001년 5월 언론 보도를 통해 구체적 수치는 수축했을 때 약 1.5 밀리초각에서 팽창했을 때 약 1.8 밀리초각, 평균 1.78 ± 0.02 밀리초각이었으며, 이 값은 이전 연구진들의 결과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메크부다 근처에 8등급과 11등급 밝기의 별 두 개가 있으나 시선 방향에 우연히 걸쳐 있을 뿐 메크부다와 중력적으로 묶여 있지 않은, 아무 관계 없는 천체들이다. 메크부다가 아직 존재가 검증되지 않은 짝별을 거느리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관측
메크부다는 겨울 밤하늘 오리온자리의 북동쪽에서 맨눈으로 쉽게 볼 수 있다. 메크부다의 밝기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근처의 두 별 쌍둥이자리 람다(3.6등급)와 쌍둥이자리 누(4.2등급)를 기준별로 삼을 수 있다(두 별의 밝기는 각각 메크부다가 가장 밝을 때와 가장 어두워졌을 때의 밝기와 맞먹는다). 메크부다의 밝기가 두 별의 중간 정도로 보일 경우 메크부다의 밝기는 3.9등급임을 알 수 있다.
명칭
메크부다는 아랍어로 '사자의 발톱' 또는 '숨겨진 발톱'이라는 뜻이다. 후자의 경우 야수가 발톱을 드러냈다가 감추는 것처럼, 이미 과거 아랍인들은 이 별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함을 간파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 메크부다는 이전에는 쌍둥이자리 제타뿐 아니라 같은 별자리의 카스토르나 폴룩스를 가리키는 말로 더 자주 쓰였다.
참고 문헌
쌍둥이자리
F형 초거성
변광성
고전 세페이드 변광성
바이어 천체
플램스티드 천체
052973
2650
034088 |
2786996 | 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C%9D%B4%EC%95%88%20%EA%B2%8C%EC%9D%B4%EB%93%9C%EB%A6%AC | 다이안 게이드리 | 다이안 게이드리(Diane Gaidry, 1964년 10월 11일 ~ 2019년 1월 30일)는 미국의 배우, 영화 프로듀서, 영화배우이다.
래피드시티에서 태어났으며 버펄로에서 사망하였다.
영화
사랑하는 애너벨 (2006년) - 시몬 역
니드 (2005년)
거래 (2005년)
해변의 축제 (1990년)
외부 링크
1964년 출생
2019년 사망
미국의 여자 영화 배우
티시 예술대학 동문 |
2509138 | https://ko.wikipedia.org/wiki/%EC%9C%84%EC%8B%9C%EC%97%85 | 위시업 | 《위시업》(Status Update)은 미국에서 제작된 스콧 스피어 감독의 2018년 뮤지컬, 코미디, 멜로/로맨스 영화이다. 로스 린치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제니퍼 깁곳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 영화는 2018년 3월 23일 한정 개봉되었으며 2018년 3월 30일 버티컬 엔터테인먼트에 의해 주문형 비디오(VOD)를 통해 개봉되었다.
출연
주연
로스 린치
올리비아 홀트
조연
코트니 이튼
하비 길렌
그레그 설킨
브렉 베싱어
롭 리글
웬디 맥렌던 커비
존 마이클 히긴즈
앤드류 헤어
기타
미술: 리즈 케이
의상: 로레인 카슨
배역: 닐리 아이젠슈타인
배역: 모린 웹
외부 링크
2018년 영화
미국의 영화 작품
버티컬 엔터테인먼트 영화
미국의 십대 코미디 영화 |
1308970 |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2%85%EC%88%98%20%28%EB%B0%B0%EC%9A%B0%29 | 김종수 (배우) | 김종수(1964년 11월 30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로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 출연하며 영화에 데뷔하였다.
학력
울산대학교 화학과
배우 활동
1984년 극단 [고래]에 입단해 1985년 연극 [에쿠우스]를 시작으로 70여 편의 다양한 연극을 통해 탄탄한 연기력을 쌓아왔으며, 영화 〈밀양〉(2006)으로 스크린에 진출하였다. 이후 영화 〈풍산개〉(2011)에서 30년 연기 내공이 느껴지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폭발적인 감정 연기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 〈아부의 왕〉(2012), 〈전설의 주먹〉(2013), 〈스파이〉(2013), 〈스물〉(2015), 그리고 충무로의 신흥 대세로 떠오르게 한 〈소수의견〉(2015)으로 스크린에서의 입지를 단단하게 굳혔다.
출연 작품
영화
드라마
수상 및 후보
연기 외 활동
광고
각주
외부 링크
아티스트컴퍼니 김종수
김종수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1964년 출생
부산광역시 출신
살아있는 사람
울산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
대한민국의 연극 배우
부산광역시 출신 배우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300597 |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B%94%98%EC%84%B1%20%28%EA%B1%B4%EC%B6%95%EB%AC%BC%29 | 자딘성 (건축물) | 자딘성(, IPA: /tʰɐn˨˩ za dɪn˨/) 또는 사이공성()은 1790년에 축조되고 1859년 2월에 파괴된 베트남의 사이공(현재의 호찌민시)에 구축된 별 모양의 요새이다. 코친차이나의 식민지화 과정에 프랑스 해군의 포격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 요새에서 파괴 전 딱 한번 전쟁을 치렀는데, 1833년에 응우옌 왕조 2대 황제 민망 황제에 대항한 레반코이의 반란으로 함락되었다. 1835년 민망 황제는 레반코이의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자딘성의 파괴를 명하였고, 그 후 같은 장소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지만, 수로에서의 포격 종사에 여지가 있는 형태였다.
18세기 베트남에서는 후레왕조의 황제가 실권을 잃었고, 베트남 북부의 찐가문과 베트남 남부의 응우옌 가문(꾸엉남 응우옌씨)으로 정권이 대립된 상태였다. 응우옌 가문의 폭정에 의하여 1771년 빈딘에서 떠이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응우옌 가문이 효율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자 찐 가문은 좋은 기회라고 판단, 남하하여 수도를 함락시키고 사이공을 함락시켜 왕족 대부분이 살해당하였다. 그 후 꾸엉남 응우옌씨의 생존자 응우옌아인은 시암의 국왕과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떠이선 왕조에 항쟁하였고, 1789년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1790년 프랑스 장교의 지시 아래에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이공에 자딘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이후 떠이선 왕조는 남부 베트남을 다시 공격하지 못하였고, 응우옌아인(자롱 황제)은 이 지역의 군사상 보호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응우옌아인은 이곳을 통하여 정부를 구축하고 1802년 베트남 통일전쟁에 그의 권력을 강화하였으며, 결국 가륭제로써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축조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피뇨 드 비엔(Pigneau de Behaine)으로부터 발탁된 프랑스 장교들은 응우옌아인의 군사들을 훈련하고 그들의 전법을 소개하였다. 응우옌아인의 첫 번째로 한 행동 중의 하나는 프랑스 장교에게 사이공에 근대 유럽양식의 요새를 설계와 축조를 감독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요새는 테오도르 르브룅(Theodore Lebrun)에 의해 설계되었고 올리비에 드 퓌마넬(Olivier de Puymanel)은 축조를 담당하였다. 30,000명의 사람에 의해 1790년 축조가 완료되었는데, 마을 사람들과 중국 관리는 일을 위해 막대한 세금이 부가되었고, 지나친 노동으로 반란을 자극하였다.
구조
돌과 흙으로 축조된 능보식 요새의 최종적인 둘레는 4,176 m (13,700 ft)로 측정된다. 이 요새는 응우옌 왕조가 편찬한 대남실록(大南實錄)에는 중국 양식으로 연꽃의 8각형 형태와 8개의 문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글자 뜻대로보다는 비유적인 뜻이 강하게 적힌 것이다. 퓌마넬(Puymanel)과 장마리 다요(Jean-Marie Dayot)이 1799년과 1815년에 그린 사이공의 지도들은 각각 네모난 꼴의 구조와, 모서리에 있는 4개의 주된 능보와, 외부의 6개의 절반의 능보를 보여준다. 루이 마에레(Louis Malleret)는 "이러한 8각형의 디자인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인의 지도에서 제시한 구조는 각각의 국가에 대한 무역 거래를 위해 1820년대 사이공을 방문한 영국인과 미국인의 기록으로도 확증된다. 영국의 무역 특사 존 크로퍼드(John Crawfurd)는 "내 추측에는, 기다란 사각의 측면은 아마도 길이가 3분의 4마일의 겉모습으로 보아 사이공의 요새는 하나의 평행사변형 양식이다."라고 서술하였고, 남부 베트남에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무역 사절단의 일원으로 방문한 자연주의자이자 외과의사인 조지 핀레이슨(George Finlayson)은 요새를 "사각형 형태이고, 각각의 측면에서 반 마일 정도이다."라고 묘사하였다. 미국의 무역 특사로 방문한 미국군의 존 와이트(John White) 중위는 8개의 문에서 오직 4개의 문만 보았다고 주장하였으나 크로퍼드는 "4개의 주요 출입구를 제외한 것을 포함하여, 성문은 4개의 대문과 여러 개의 작은 문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서술하였다. 크로퍼드가 본 작은 성문 4개는 보방의 성채의 형태를 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침공과 파괴
베트남의 식민지화 과정은 1858년 프랑스- 스페인 군이 베트남 중부의 다낭에 상륙하여 수도인 후에로 진격하려고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발이 묶에게 이후, 그들은 방어가 덜 심한 사이공을 목표로 남쪽으로 항해해 갔다. 남부의 공세는 1859년 2월 10일 해군의 붕타우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6일 만에 연합군은 12개의 베트남 해군 방어진을 무력화시키고, 3개의 강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후 그들은 사이공강을 따라 사이공성 어귀로 항해하여 가까운 거리에서 해군의 대포로 포격을 시작했다. 요새에는 1,000명의 병력이 있었고, 1만 명의 방어병력이 1년동안 먹을 충분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1859년 2월 17일, 프랑스 군함은 대포로 성을 포격했다. 이 공격은 대부분의 베트남 대포가 설치되어 있는 요새의 남동쪽 구석에 집중되었다. 베트남 포수 지휘관은 잘못 계산하여 지나치게 높은 각도로 발사하여 대포를 제대로 쏘지 못했다. 대포는 쉽게 조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베트남 화력은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0시경, 데 팔리에레 대위가 300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보병 공격을 시작했다. 강에서 포병 지원 하에 그들은 대나무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벽을 올라갔다. 수비군들은 이런 전략에 경계를 놓쳤고, 많은 병사들이 혼란스럽게 도망을 갔다.
베트남 수비 병력 대부분은 성의 동문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프랑스와 완강히 싸웠다. 리고 드 주누이는 500명의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7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으며 요새를 너무뜨리는데 폭발물을 사용했다. 14:00에 프랑스는 요새를 장악했다. 2시간 후에, 드 지누이는 요새를 프랑스 군의 새로운 총 본부로 선언했다. 프랑스군은 큰 조병창을 탈취했다. 이곳에는 200개 이상의 대포, 총기, 권총과 검, 탄약 100톤, 쌀 8만 톤, 현금 130,000 프랑 등 2만개의 휴대 무기가 포함되었다. 탄산염, 탄과 유황도 탈취했다. 베트남의 물자 손실은 약 2천만 프랑으로 추산되었다. 요새 사령관은 다른 마을로 도망을 친 후에 자살했다.
베트남 측은 증원군을 보내 요새를 수복하려 했다. 빈롱과 미토가 각각 1,800명과 800명의 병력을 보냈지만, 프랑스 포격으로 인해 현장에 미치지 못했다. 이들은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5,800명의 강한 현지 자경대를 남겼다. 이들 자경대는 성 근처에서 잠복한 프랑스 순찰대와 교전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목표 가까이에 개활지를 만들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피난시켰다. 현지 자경대는 식량과 자원을 그들에게 공급한 부유한 남부 지주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성을 점거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곧 군대 전개에 게릴라 공격으로 나갔다. 드 지누이는 중부 베트남으로 군대 일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프랑스 군의 내륙 위치 설정은 기술적 우위를 약화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군을 대피시켰고 요새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시행된 것은 3월 8일이었고, 드룰레드 대위는 폭발물 32 상자를 썼다. 그는 또한 성을 방화하여 식량고와 무기류 그리고 탄약을 불태웠다. 그 결과 발생된 화재로 3년 동안 연기를 피웠다는 믿기지 않는 주장도 있다. 프랑스군은 베트남 중부로 복귀하기 전에 시외로 철수했다.
각주
베트남의 요새
베트남의 성 (건축물)
호찌민시의 건축물 |
50625 |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B9%98%EB%A1%9D | 민치록 | 민치록(閔致祿, 1799년 ~ 1858년 09월 17일)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척신으로 자는 원덕, 호는 서하이다.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아들인 민진후의 현손이다. 명성황후의 부친으로 고종의 장인이자 순종의 외할아버지이다. 음서로 벼슬에 올라 장악원과 사도시의 첨정을 지냈으며, 딸이 왕비로 간택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본관은 여흥, 시호는 효정공(孝貞公), 순간공(純簡公)이다.
생애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4대 장손(長孫)인 이조판서 민기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학자인 노주(老州) 오희상(吳熙常)에게서 수학하였으며, 그의 딸 오씨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오씨는 후사를 남기지 않고 1833년 36세로 요절하였다. 오씨 부인의 3년상을 마친 뒤에 좌찬성 이규년의 딸 한산 이씨와 재혼하여 1남 3녀를 두었으나, 명성황후를 제외한 다른 자식들은 일찍 죽었다.
민유중의 5대 장손(長孫)으로서 음안으로 여양부원군사손의입승전(呂陽府院君祀孫擬入承傳)이 되어 묘소를 지키는 일을 하다가 1826년 문음으로 장릉 참봉이 되고,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제용감(濟用監) 주부(主簿), 의금부 도사(都事), 사복시 주부, 충훈부 도사 등을 지내다가 과천현감·임피현령 등 지방 수령으로 활약했다. 그 뒤 내직에 임명, 다시 상경하여 조지서(造紙署) 별감, 사옹원 주부 등을 지내고 다시 외직인 덕천군수로 나갔으며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었다. 1855년 선혜청 낭청(郎廳), 1857년 영주 군수를 맡았다. 그 뒤 사도시 첨정을 지내던 중 1858년에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사후
미리 후사를 정해두지 않은 탓에 그의 사후에 딸 민자영이 이씨와 함께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철종 12년(1861년)에 민치록의 11촌 조카 뻘인 민승호가 양자로 입적되어 역시 음안으로 여양부원군사손의입승전(呂陽府院君祀孫擬入承傳)이 되었다. 1863년, 양자 민승호의 친조카인 고종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등극하여 민승호의 지위가 정3품 당상으로 급속 진급했으며, 고종 3년(1866년) 딸 민자영이 왕비로 책봉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으로 추서되었고 효정공의 시호가 내려졌다가 다시 순간공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비석은 김병학이 글을 짓고 민영목이 글씨를 썼다.
가족 관계
고조부 : 민진후(閔鎭厚)
증조부 : 민익수(閔翼洙)
할아버지 : 민백분(閔百奮)
아버지 : 민기현(閔耆顯)
첫째 아내 : 해령부부인 오씨(海寧府夫人, 해주 오씨, 오희상(吳熙常)의 딸, 1798년 ~ 1833년 03월 15일)
둘째 아내 : 한창부부인 이씨(韓昌府夫人, 한산 이씨, 이규년(李奎年)의 딸, 1818년 ~ 1874년 11월 30일)
장남 : 요절
장녀 : 요절
차녀 : 요절
양자 : 민승호(閔升鎬, 1830년 ~ 1874년, 민치구(閔致久)의 친자)
양손자 : 민영익(閔泳翊, 1860년 ~ 1914년, 민태호(閔台鎬)의 친자)
삼녀 :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년 11월 17일 ~ 1895년 10월 8일)
사위 : 조선 고종(朝鮮 高宗, 1852년 ~ 1919년)
외손자 : 순종(純宗, 1874년 ~ 1926년)
민치록을 연기한 배우
이도련 -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
같이 보기
민치구
민기현
민치상
명성황후
민승호
1799년 출생
1858년 사망
조선의 문신
여흥 민씨
음서
조선의 부원군
명성황후
대한제국 고종
대한제국 순종
18세기 한국 사람
19세기 한국 사람 |
1627223 |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B7%94%EB%93%9C%EB%8B%88%20%EC%86%8C%EB%A5%BC%EB%9D%BC%EC%8B%9C%EC%9C%84%EC%8A%A4%20%EC%9A%94%ED%95%9C%EB%84%A4%EC%86%90 | 그뷔드니 소를라시위스 요한네손 | 그뷔드니 소를라시위스 요한네손(, 1968년 6월 26일 ~ )은 아이슬란드의 대통령이다. 2016년 8월 1일부터 제6대 대통령으로 재직 중이다. 청년 정치인으로써 아이슬란드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수도인 레이캬비크에서 태어났으며, 청년시절에 영국 워릭 대학교와 아이슬란드 대학교에서 아이슬란드의 역사학을 공부하여, 그후 2016년 8월 아이슬란드의 대통령 선거에서 68.6%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또 그는 다섯 남매를 두고 있는 가장이기도 한다.
196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아이슬란드의 대통령
아이슬란드의 역사가
아이슬란드의 번역가
영어 출발어 번역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이탈한 사람
레이캬비크 출신
아이슬란드 대학교 동문
워릭 대학교 동문
런던 대학교 동문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앤터니스 칼리지 동문
20세기 아이슬란드 사람
21세기 아이슬란드 사람 |
2453523 | https://ko.wikipedia.org/wiki/%EC%8B%A4%EB%A6%AC%EC%95%84 | 실리아 | 실리아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실리아 존슨: 잉글랜드의 배우
실리아 임리: 잉글랜드의 배우
실리아 웨스턴: 미국의 배우
실리아 플로레스: 베네수엘라의 정치인, 법률가로 현재 베네수엘라의 법무장관
같이 보기 |
1017314 |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7%84%EC%9B%85%20%281992%EB%85%84%29 | 김진웅 (1992년) | 김진웅(1992년 2월 6일 ~ )은 KBO 리그 전 넥센 히어로즈의 내야수이다.
외부 링크
넥센 히어로즈 선수
KBO 리그 내야수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부천고등학교 동문
청주시 출신
199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
3201110 | https://ko.wikipedia.org/wiki/%EC%86%90%EC%A7%80%EC%9B%90 | 손지원 | 손지원(1977년 8월 29일~)은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연극배우이고 뮤지컬배우이다. 그녀의 어머니 김성녀도 배우이자 대학교수이다.
연극&뮤지컬
2009년 눈속을 걸어서
2009년 사카테요지 페스티벌 - 다락방
2009년 맘마미아 - 소피 역
2001년 스텔라 연극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2001년 뮤지컬미스 사이공
2001년 뮤지컬그리스
2001년 뮤지컬브로드웨이 42번가
2001년 뮤지컬사랑은 비를 타고
가족 관계
아버지: 손진책 (1947년 11월 18일~)
어머니: 김성녀 (1950년 9월 16일~)
외할머니: 박옥진 (1935년 ~ 2004년 9월 30일~)
외삼촌: 김성일 (1962년~)
197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
경상북도 출신
경상북도 출신 배우
경주시 출신
경주시 출신 배우
밀양 손씨
대한민국의 불교도 |
1892079 |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A6%AC%ED%95%A8 | 전리함 | 전리함(戰利艦)은 전쟁 기간 동안 노획, 탈취한 군함 또는 전쟁이 끝난 후 보상으로 획득한 군함이다. 전자를 노획함, 후자를 배상함이라고 한다.
개요
전시국제법에서 전리품(적국에서 빼앗아 자국 소유로 한 동산)은 적국의 국유 재산으로 제한된다. 전리품 · 노획 무기 중에서는 군함이 가장 크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영향이 컸다. 따라서 전리함의 처리는 전쟁 중 전투에서도 전쟁 이후 협상에서도 중시되었다.
전리함을 획득하는 행동은 고대에도 일반적인 행위였다. 범선 시대의 해전 시에는 노획한 적함을 팔아 수입을 함대 승무원에 나눠주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적함을 격파하여 침몰시키는 것만큼이나 중시되었다. 근대 이후 전쟁 기간 중에는 기밀 유지를 위해 자침시키거나 큰 손실을 입고 침몰하는 경우가 많아 함체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노획함을 얻을 수 있다면,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충분히 높았다.
또한 전리함을 자국 해군에 편입하여 직접적인 전력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사건은 전쟁 기간 동안, 전쟁이 끝난 후 두 경우로 볼 수 있다. 적함은 자국 해군의 각종 규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청일 전쟁 이후 일본 해군이 청나라에서 노획한 〈진원〉 등은 러일 전쟁에도 사용되었고,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노획한 〈웨이크〉(USS Wake, PR-3)는 일본을 거쳐 중화민국, 그리고 그 다음엔 중국도 사용하여 활용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후 패전국이 배상함으로서 내놓은 함정은 각종 규격이 달랐기 때문에, 대전이 끝난 뒤 전승국이 잉여 함선을 받아 표적함으로 처분하거나, 해체시킨 것도 많았다. 그러나 연합국이면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프랑스 해군 등 유럽 해군은 특히 독일 해군 함정이 운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노획함
전쟁 기간 동안 적함을 노획할 수 있다면 단순히 적국의 전력이 감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적국이 사용하는 암호책의 획득, 기술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아군의 사기 진작을 기대할 수 있는 등 큰 영향이 있다. 한편, 노획한 적함에 전쟁의 국면을 좌우할 중요한 정보를 발견했을 경우에도 암호를 비롯한 정보 유출이 탐지되지 않도록 노획한 것을 철저하게 은폐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 해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U보트) 〈U-505〉를 노획하였고, 그곳에서 암호를 비롯한 많은 정보를 추출할 수 있었다.
노획되어 군사상의 기밀 정보뿐만 아니라 탑재되어 있는 각종 무기 등을 적국에 넘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자침하는 경우도 많다. 제2차 세계 전쟁 중의 1942년에 일본군이 영국 식민지인 홍콩을 점령했을 때, 영국 해군은 일본군에 의한 노획을 방지하기 위해 방잠망 부설정 〈바라이트〉를 자침시켰다. 또한 1942년 8월에 벌어진 남태평양 해전에서 미국 해군의 정규 항공모함 〈호넷〉(USS Hornet, CV-8)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항해 불능 상태에 빠져 전 승무원이 퇴거했다. 미국 해군이 이 항공모함을 미쳐 자침을 시키지 못했는데, 일본 해군이 노획하려고 하자 이를 두려워 한 나머지 격침을 시도한 예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 해군의 격침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이 격침시도 덕분에 배의 파손이 심각해져서 일본 해군은 노획을 포기하고 격침시켰다.
근대 이후의 전쟁에서 노획되는 상황은 다양했다. 전투 중에 해상에서 노획되는 경우와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 해군이 수라바야에서 노획한 미국 해군의 구축함 〈스튜어트〉(USS Stewart, DD-224), 대전 말기에 독일의 항복으로 일본군이 페낭에서 노획하여 접수한 U보트 〈U-195〉와 같이 항만에서 정박 중에 노획되는 경우도 있었다.
배상함
전쟁 후 전리품 함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전쟁 이후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에서 진행되는 배상 협상 결과 배상의 일부로 전승국에 전달되는 것이다.
배상함이 전후 전승국의 해군에 편입되어 활용된 예도 적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제국 해군이 영국과 미국, 중화민국과 소련 등에 배상함으로서 다수의 선박을 인도했다. 소련은 구축함 6척, 어뢰정 1척, 해방함 17척, 수송함 2척, 소해정 1척, 소해특무정 3척 등 총 34척을 인도받은 후 대부분 특정 용도로 소련 해군에서 사용했다. 또한 구축함 〈유키카제〉는 중화민국에 인도되어, 중화민국 해군 기함으로 활약했다.
편입되지 않은 예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해군이 패전국 독일 해군으로부터 〈UC99〉 등 다수의 잠수함을 배상함으로서 획득했지만, 규격이 맞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대부분이 편입되지 못하고 실험함으로만 사용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 배상함으로서 인도된 〈전함 나가토〉와 순양함 〈사카와〉는 핵 실험 크로스로드 작전에서 표적함으로서 비키니 환초에서 침몰했다.
배상함으로서 전달되는 것은 패전 이후이기 때문에 노획함과 같이 자침을 시도 예는 적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후에서 패배한 독일 제국 해군 대양함대의 대형 함정이 영국의 스카파 플로우에 집결했지만, 배상함으로서 연합국에 인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으로 자침시킨 사건도 있었다.
관련 항목
전쟁 배상
군함
전시국제법 |
785330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98%84%20%28%EA%B0%80%EC%88%98%29 | 박현 (가수) | 박현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74년 11월 30일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91년 제12회 MBC 강변가요제로 가수로 데뷔하였다. 2010년 10월 27일 앨범 <The Album Vol. 다시시작>을 발매하였다.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가수
1974년 출생
부산광역시 출신
부산광역시 출신 가수
부산광역시 출신 음악가 |
1759797 |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C%9D%B4%EA%B7%B8%ED%88%AC%EC%BD%94%ED%88%AC%EC%BD%94 | 로이그투코투코 | 로이그투코투코(Ctenomys roigi)는 투코투코과에 속하는 설치류의 일종이다. 아르헨티나 북동부 코리엔테스주 파라나 강 근처의 작은 지역의 토착종이다. 모래 언덕과 강 근처에서 서식한다. 개발이 서식지의 질을 떨어 뜨리고 위축시키며 종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일반명과 학명은 아르헨티나 동물학자 로이그(Virgilio Germán Roig, 1936-)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핵형은 2n=48과 FN=80이다.
각주
투코투코과
아르헨티나의 고유종 동물
1988년 기재된 동물 |
124011 |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D%82%A4%EA%B5%B0 | 오키군 | 오키군()은 일본 시마네현에 있는 군 하나이다.
이하 3정 1촌으로 구성된다.
니시노시마정()
아마정()
오키노시마정()
지부촌()
역사
1969년 4월 1일 - 오키섬 4개의 군인 즈키군, 오치군, 아마군, 지부군이 한꺼번에 합병, 오키군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2004년 10월 1일 - 사이고정, 후세촌, 고카촌, 쓰마촌을 전부 합병, 통합 오키노시마정으로 개편되었다.
같이 보기
오키 제도
오키노쿠니
시마네현의 군 |
3261205 |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B9%B4%EB%8B%A4%EC%A0%95%20%28%EB%8F%84%EC%95%BC%EB%A7%88%ED%98%84%29 | 나카다정 (도야마현) | 나카다정(中田町)은 도야마현 히가시토나미군에 설치되었던 정이다.
지리
나카다 지역은 도나미 평야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쪽 및 북쪽은 이미즈시와 접하고 있다.
역사
나카다 정은 헤이안 시대부터 개척해 왔던 마을이다.
1889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과 함께 주변의 촌들을 합병해 정제 시행으로 나카다정이 탄생하였다.
1966년 2월 10일 - 다카오카시에 편입 합병해 다카오카시의 일부가 되었다.
신흥 주택단지
신흥 주택단지의 개발도 있어 지역 인구는 6,880명(2006년 기준) 나카타 정의 합병 전보다 증가하고 있다.
교통
도로
도야마 현도 9호
도야마 현도 11호
도야마현의 폐지된 시정촌
다카오카시의 역사
히가시토나미군
도나미군 |
1666061 | https://ko.wikipedia.org/wiki/Past%20Masters | Past Masters | 《Past Masters》는 비틀즈의 해산 후 발표된 컴필레이션 음반 세트이다. 《Past Masters》의 본래의 목적은 비틀즈 앨범의 CD 화가 끝난 후에 남은 미수록 싱글 등을 CD화 하기 위해 두 장의 앨범에 수록하고자 한 것으로 정규 앨범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본래 《Past Masters》는 《Past Masters Volume One》과 《Past Masters Volume Two》의 각각의 앨범으로서 1988년 3월 7일 동시 발매되었다. 그 후 《Past Masters Volume One & Past Masters Volume Two》, 또는 《Past Masters》라는 제목의 합본 2LP 세트로서 1988년 10월 24일 미국, 1988년 11월 10일 영국에서 다시 발매되었다. 2009년 9월 9일에는 처음으로 디지털 리마스터링이 되어 《Past Masters Volume One》과 《Past Masters Volume Two》의 합본 2CD 세트로서 《Past Masters》라는 제목으로 다시 전 세계 동시 발매되었다.
발매 과정
《Past Masters》는 비틀즈의 전 곡을 CD에 싣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1987년 EMI사는 CD 시대의 도래에 발맞춰 비틀즈의 정규 앨범들을 CD로 재발매 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정규 앨범만을 재발매할 경우 싱글 수록곡 중 상당수는 누락되는 문제가 생기는 관계로 정규 앨범에 실리지 않은 싱글 수록곡들과 EP 수록곡 등 다른 형태로 발표된 곡들을 모아 앨범을 재발매 하게 되는데, 이 앨범이 바로 《Past Masters》이다. 비틀즈 역사학자 마크 루이손은, 히트곡과 희귀곡이 수록된 이 음반 세트에 비틀즈의 12개 영국 음반 및 미국 LP 발매반 《Magical Mystery Tour》에서 볼 수 없었던 밴드의 출시곡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Past Masters》에는 정규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도 존재한다. 이는 싱글 수록 버전들이나 자선 앨범 수록 버전이 다른 형태로 정규 앨범에 수록됐었기 때문인데, 《Please Please Me》 앨범에 수록된 〈Love Me Do〉와 《Let It Be》 앨범에 실린 세 곡 〈Get Back〉, 〈Let It Be〉, 〈Across the Universe〉, 이 네 곡이 이에 해당된다. 〈Love Me Do〉의 경우 《Please Please Me》 앨범에서는 앤디 화이트라는 대타 드러머가 1962년 9월 11일 연주한 버전이 사용된 반면, 싱글에서는 링고 스타가 1962년 9월 4일 연주한 버전이 사용됐다. 따라서 싱글 버전과 앨범 버전 두 가지 버전이 공존하게 됐다. 〈Get Back〉, 〈Let It Be〉의 경우, 먼저 싱글로 발표되었지만, 훗날 필 스펙터의 수정을 거쳐 《Let It Be》 앨범에 수록됨으로써 싱글 버전과 앨범 버전 두 가지 버전이 공존하게 됐다. 〈Across the Universe〉의 경우에는 여러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1969년 자선 앨범 《No One's Gonna Change Our World》에 수록되면서 세계 야생 생물 기금 버전으로 발매되었지만, 훗날 필 스펙터의 수정을 거쳐 《Let It Be》 앨범에 수록됐다.
1964년 독일에서 싱글로 발매된 2곡(〈Komm, Gib Mir Deine Hand〉, 〈Sie Liebt Dich〉)도 영어 버전과 별개로 이 앨범에 포함되어 있다. 이 곡들은 영어보다는 독일어로 불러야 독일 내에서 더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독일 레코드사의 주장에 따라서 독일어로 불러졌다.
곡 목록
각주
1988년 컴필레이션 음반
비틀즈의 컴필레이션 음반
애플 레코드 음반
캐피틀 레코드 음반
팔로폰 음반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음반 |
3043717 | https://ko.wikipedia.org/wiki/%EC%83%89%EA%B9%94%20%EC%86%8D%EC%9D%98%20%ED%9D%91%EB%B0%B1 | 색깔 속의 흑백 | 색깔 속의 흑백(Noirs Et Blancs En Couleur, Black And White In Color)은 프랑스, 코트디부아르에서 제작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76년 영화이다. 장 카르메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아서 콘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1976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출연
주연
장 카르메
카트린 루벨
자크 스피에저
조연
모리스 베리어
피터 베링
각주
외부 링크
1976년 영화
프랑스의 영화 작품
프랑스어 영화 작품
프랑스의 블랙 코미디 영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수상작
장자크 아노 감독 영화
1915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
150629 | https://ko.wikipedia.org/wiki/X.400 | X.400 | X.400은 ITU-T가 권장한 항목들의 모임이다. 이 권장 항목들은 메시지 관리 시스템 (MHS, 다시 말해, 전자 우편)을 위한 데이터 통신 네트워크에 대한 표준을 정의하고 있다. X.400이 인터넷 전자 우편을 범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조직 안에서 사용하였고 전자 우편 제품의 일부이기도 하다.
주소 매김
X.400 주소는 다음의 요소를 이루고 있다:
C (국가 이름)
ADMD (관리 도메인) - 공용 메일 서비스 제공업체
PRMD (개인 관리 도메인)
O (조직 이름)
OU (조직 장치 이름)
G (제공된 이름)
I (이니셜)
S (성별)
같이 보기
X.500
표준화
표준화 조직
국제 전기 통신 연합
국제 전기 표준 회의
국제 표준화 기구
전자 데이터 교환
ISO 표준
ITU-T 권고
ITU-T X 시리즈 권고 |
655847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A%A9%ED%9B%88 | 정용훈 | 정용훈(鄭湧勳, 1979년 3월 11일 ~ 2003년 8월 31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다.
경력
클럽
동대부속중학교, 대신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98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해 그 해 K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후 1999년 팀과 재계약을 맺었으며, 2000년 군 문제로 경찰 축구단에 입단하였다. 그 뒤 2001년 전역해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복귀하였으며, 알힐랄과의 2002년 아시안 슈퍼컵 결승전 당시 벌어졌던 승부차기에서 팀의 1번째 골을 성공시키는 등 팀의 대회 2연패에 기여하였다.
국가대표팀
199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해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1년 동아시아 경기 대회에서 대한민국 U-23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해 몽골과의 조별 라운드 1차전에서 2골을 성공시켜 팀의 4-1 승리를 이끄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사망
2003년 8월 31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 앞 도로에서 자신이 타고 있던 승용차가 도로 경계석과 충돌한 뒤 도로변 방호벽을 들이받아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으며, 당일 있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광주 상무 불사조와의 리그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조의의 표시로 검은 리본을 유니폼에 착용한 채 경기를 했다.
또한 그 해 9월 3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대전 시티즌과의 리그 경기에서 정용훈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서포터인 그랑블루는 매년 정용훈의 기일인 8월 31일과 가까운 날에 열리는 경기에서 국화를 경기장 난간에 달고 정용훈의 응원 구호를 외치며 넋을 기리고 있다.
기록
클럽
2004년 1월 1일 기준
|-
| 1998 ||rowspan=2| 수원 삼성 블루윙즈 ||rowspan=2| K리그 || 10 || 1 || 2 || 0 || 16 || 2 || || || ||
|-
| 1999 || 2 || 0 || 0 || 0 || 4 || 0 || || || ||
|-
| 2000 ||rowspan=2| 경찰 축구단 ||rowspan=2| 전국실업축구연맹전 || || || 2 || 2 ||colspan="2"|-||colspan="2"|-|| ||
|-
| 2001 || || || 0 || 0 ||colspan="2"|-||colspan="2"|-|| ||
|-
| 2002 ||rowspan=2| 수원 삼성 블루윙즈 ||rowspan=2| K리그 || 13 || 0 || 0 || 0 || 3 || 0 || || || ||
|-
| 2003 || 20 || 2 || 0 || 0 ||colspan="2"|-||colspan="2"|-|| 20 || 0
|| || 4 || 2 || 23 || 2 || || || ||
|| || 4 || 2 || 23 || 2 || || || ||
|}
수상
클럽
수원 삼성 블루윙즈
K리그: 1998, 1999
FA컵: 2002
리그컵: 1999
슈퍼컵: 1999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001-02
아시안 슈퍼컵: 2002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1998년
각주
외부 링크
1979년 출생
2003년 사망
축구 미드필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축구 선수
경찰 축구단 (세미프로)의 축구 선수
K리그1의 축구 선수
서울특별시 출신
대신고등학교 (서울) 동문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서울특별시 출신 축구 선수 |
1443501 |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B%8B%89%20%EC%95%A0%ED%8B%B8%EB%A6%AD%EC%8A%A4 | 소닉 애틸릭스 | 《소닉 애틸릭스》는 세가의 도쿄 조이폴리스에 2013년 4월 25일 출시된 게임으로, 주 목적은 운동이다. 각 캐릭터는 러닝머신에 맞추어져 있는데, 플레이어는 하나의 러닝머신 위에 올라 100m, 110m 달리기와 멀리 뛰기가 나왔다.
캐릭터
레인 1에는 소닉 더 헤지호그, 2에는 마일즈 프라우어, 3에는 너클즈 디 에키드나, 4에는 에이미 로즈, 5에는 섀도 더 헤지호그, 6에는 메탈 소닉, 7에는 실버 더 헤지호그, 8에는 블레이즈 더 캣이 나온다.
2013년 비디오 게임
세가의 게임 |
2486130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D%B5 | 한익 | 한익(韓翊)은 조선전기 군기시판관을 지낸 문신이다.
생애
자(字) 군평(君平) 세조(世祖) 경진(庚辰:1460년)에 태어나 공조정랑(工曹正郞)과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역임했다.
성종(成宗) 무신( 戊申: 1488년)에 돌아가니 수가 29세이다. 보조공신(補祚功臣)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받고 서성군(西城君)을 봉했다.
祖는 韓確(한확)이고 父는 韓致禮(한치례)이다. 정부인(貞夫人) 순천 박씨(順天朴氏) 父는 판중추(判中樞)를 지낸 평양군(平陽君) 중선(仲善)이다.
월산대군과의 관계
한익은 월산대군(月山大君), 제안대군(齊安大君)과는 동서지간인데 박중선(朴仲善)의 첫째딸은 월산대군의 부인이고, 넷째 딸이 한익의 부인, 일곱째 딸이 제안대군의 부인이다.
또한 월산대군과는 외사촌 사이인데 월산대군의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는 한익에게는 고모가 된다. 따라서 월산대군과는 외사촌 사이면서 동서지간이된다.
가족관계
6대조 : 한방신(韓方信) - 첨의부찬성사, 서원군
5대조 : 한녕(韓寧) - 신호위녹사
증조할아버지 : 한영정(韓永矴) - 순창군수
증조할머니 : 의성 김씨(? - 1423년 3월 13일, 의성군 양소공 김영렬(金英烈)의 딸)
할아버지 : 한확(韓確)
할머니 : 남양부부인 홍씨 - 남양 홍씨 이조판서, 대제학 문양공 홍여방(洪汝方)의 딸
백부 : 한치인(韓致仁)
백부 : 한치의(韓致義)
고모 : 정선군부인 한씨
고모부 : 계양군
고모 : 인수대비(소혜왕후)
고모부 : 의경세자(덕종)
사촌 : 월산대군
사촌 : 성종
아버지 : 한치례(韓致禮) - 영돈녕부사, 서릉부원군,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 장간(莊簡)
어머니 : 죽산 안씨 - 안맹담(安孟聃)의 딸
부인 : 순천 박씨로 판중추부사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의 딸
아들 : 한세창(韓世昌) -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 영흥 대도호부사, 증 호조판서, 청원군
아들 : 한숙창(韓叔昌) -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 장례원 판결사, 증 공조판서, 서평군
손자 : 한자(韓慈), 현감, 증 이조참판
증손자 : 한경희 - 군자판관
증손자 : 한경우(韓景祐) - 오취도총부도총관, 청천위(淸川尉), 중종 부마(정신옹주)
손자 : 한혜(韓蕙), 신천군수
증손자 : 한경지(韓景祉) - 군기판관, 증 병조참판
손자 : 한온(韓蘊), 장흥부사,증 병조판서, 충의(忠毅)
증손자 : 한경유 - 청단찰방, 증 호조참판
각주
1460년 출생
1488년 사망
청주 한씨
조선의 공신
음서
조선의 문신 |
713670 | https://ko.wikipedia.org/wiki/%ED%83%9C%ED%92%8D%20%EB%82%A0%EA%B0%9C | 태풍 날개 | 다음은 날개(Nalgae)를 이름으로 하는 태풍들이다. 이름인 날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출하였으며, 날개를 의미한다.
태풍 날개 (2005년)는 2005년 7월 20일부터 7월 24일까지 활동했고 최저기압 990 hPa를 기록한 2005년의 제6호 태풍이다. 육지에서 먼 바다에서 발생해 이에 관련된 피해는 없었다.
태풍 날개 (2011년)는 2011년 9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활동했고 최저기압 935 hPa를 기록한 2011년의 제19호 태풍이다. 필리핀에 영향을 주었다.
태풍 날개 (2017년)2017년의 제11호 태풍이다. |
283010 | https://ko.wikipedia.org/wiki/Gee%20%28EP%29 | Gee (EP) | 《Gee》는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소녀시대의 첫 번째 미니 앨범이다. 2009년 1월 7일 발매되었다. 타이틀곡은 동명의 〈Gee〉이다. SM 엔터테인먼트가 기획과 배급을 담당하였다.
특징
2009년 1월 5일 여러 음악 사이트에서 미리 공개되었다.
타이틀곡은 1번 트랙의〈Gee〉로, 2009년 1월 10일 MBC 《쇼! 음악중심》에서 컴백 무대를 가졌고, 2집 정규앨범 Oh!에서 11번 트랙에 수록되었으며, 리패키지에서는 14번 트랙에 수록된다. 그리고,〈Gee〉뮤직비디오 국내판, 일본판 모두 샤이니 멤버 민호가 등장한다.
2번 트랙 〈힘내! (Way To Go) 〉는 애니콜 햅틱 광고 삽입곡인 〈햅틱모션〉의 원곡으로 펑크락 분위기를 띤 곡이다.
3번 트랙 `DEAR. MOM`은 아이비가 THE LIGHT HOUSE 라는 필명으로 가사를 쓴 곡이다.
SBS 《인기가요》에서 1위에 해당하는 뮤티즌 송을 3주 동안 차지했다. (인기가요에서는 한 곡당 최대 3주까지만 1위가 가능하다.)
엠넷미디어의 엠넷차트에서 8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한국방송공사의 가요 프로그램 《뮤직뱅크》에서 역대 최고 성적 K-차트 9주연속 1위를 차지하고, 상반기 결산과 연말 결산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Gee 이야기
Gee는 소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여운 상황을 담은 상큼발랄한 댄스곡이다. 노래와 더불어 컬러풀한 스키니 진과 게다리춤 이 화제가 되었다.
Gee 커버/패러디
타이틀곡 〈Gee〉가 많은 인기를 끌면서 각종 방송에서 여러 연예인들이 〈Gee〉를 커버/패러디하기도 하였다.
MBC 《무한도전》에서 멤버들(유재석,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 전진)이 Gee를 커버한 바 있다.
MBC 태희혜교지현이에서 박미선, 정선경, 홍지민, 최은경, 김희정이 Gee를 커버했다.
MBC 음악여행 라라라에서 윤하가 Gee를 R&B 버전으로 불렀다.
KBS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 한민관이 Gee를 패러디하여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KBS 스타 골든벨 - 서바이벌 슈퍼루키에서 가수 아이유가 Gee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불렀다.
SBS 골드미스가 간다에서 진재영, 장윤정, 신봉선이 Gee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했다.
배우 이수경이 CF서 소녀시대의 Gee를 개사한 노래를 불렀다.
배우 서우와 개그우먼 신봉선이 휴대폰 광고에서 소녀시대 Gee를 개사한 노래를 불렀다.
Gee에 대한 논란
백마스킹(노래를 거꾸로 청취)한 상태에서 80%속도(정상속도가 100%)로 들으면 선정적인 가사가 있다며 논란이 있었다.
트랙 리스트
참조
외부 링크
/ SM 공식 채널
소녀시대의 EP
SM 엔터테인먼트 음반
2009년 EP |
258732 | https://ko.wikipedia.org/wiki/%EB%9E%91%EC%B9%B4%EC%8A%A4 | 랑카스 | 《랑카스》()는 대한민국의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며, 제작자는 '후렛샤'이고 전체 8편이다.
각 편의 제목
제1화 - 랑카스의 비밀
제2화 - 그곳에 랑카스가 있다
제3화 - 랑카스가 시킨다
제4화 - 랑카스가 뒤에 있어(상)
제5화 - 랑카스가 뒤에 있어(하)
제6화 - 랑카스의 목격자
제7화 - 임진외전
제8화 - 밝혀지는 진실
등장 인물
'랑카스'
'남국장'
'말박사'
'후렛샤'
외부 링크
랑카스 플래시 모음
플래시 애니메이션 |
2549056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88%98%EB%A7%88%20%EB%9D%BC%ED%9D%90%EB%A7%8C%20%EB%82%98%EB%B9%8C%EB%9D%BC | 마수마 라흐만 나빌라 | 마수마 라흐만 나빌라(, 1985년 4월 8일 ~ )는 방글라데시의 배우, 사회자, 모델이다.
외부 링크
198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방글라데시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방글라데시의 여자 영화 배우
방글라데시의 여자 모델
지다 출신 |
2995895 | https://ko.wikipedia.org/wiki/%EC%82%B0%EB%8B%A4%EB%8B%88%EC%97%98%EB%A0%88%20%ED%96%84 | 산다니엘레 햄 | 산다니엘레 햄(+)은 이탈리아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도시인 산다니엘레델프리울리에서 만들어지는 건식 염지 생햄이다. 프로슈토의 일종이며, 프로슈토 디 산다니엘레()라는 이름은 1996년 6월 21일부터 유럽연합의 원산지 명칭 보호(PDO)를 받는다.
같이 보기
프로슈토
각주
생햄
이탈리아 요리 |
1484151 | https://ko.wikipedia.org/wiki/%EB%8B%B9%EC%8B%A0%EC%9D%98%20%EC%B2%9C%EA%B5%AD | 당신의 천국 | 《당신의 천국》은 2010년 9월 23일에 SBS에서 방영된 추석 특집드라마이다.
등장 인물
주요 인물
최불암 : 기수 역
정영숙 : 옥분 역
정애리 : 영숙 역
기수네
김진근 : 영호 역
이아현 : 미연 역
지현수 : 영민 역
연운경 : 기영 역
옥분이네
조형기 : 형주 역
이종남 : 형주 처 역
영숙이네
서승현 : 강자 역
정근 : 조상식 역
김민하 : 조민지 역
그외 인물
강남길 : 양사장 역
외부 링크
<당신의 천국> 공식 홈페이지
<당신의 천국> 전회차 무료보기
2010년 드라마
SBS 특집드라마 |
366224 | https://ko.wikipedia.org/wiki/1980 | 1980 | 1980(천구백팔십)은 1979보다 크고 1981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2, 3, 4, 5, 6, 9, 10, 11, 12, 15, 18, 20, 22, 30, 33, 36, 44, 45, 55, 60, 66, 90, 99, 110, 132, 165, 180, 198, 220, 330, 396, 495, 660, 990, 1980이다.
과학
기타
연도: 1980년, 기원전 1980년
1980 (영화): 일본의 코미디 영화.
1e03 1980 |
10501 | https://ko.wikipedia.org/wiki/%EC%BA%84%EB%B3%B4%EB%94%94%EC%95%84 | 캄보디아 | 캄보디아 왕국(, ) 또는 약칭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다. 태국,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서쪽에는 타이 만을 끼고 있다. 국토 면적은 18만 제곱킬로미터이다.
캄보디아의 공식 종교는 상좌부 불교로, 국민의 95%가 믿고 있다. 캄보디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프놈펜으로,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이다. 총리인 훈 센은 1985년부터 장기 집권 중이며, 국왕은 노로돔 시하모니이다. 크메르 제국의 유적인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 등으로 유명하다. 주요 도시로는 프놈펜, 시엠레아프, 바탐방, 캄퐁참 등이 있다.
이름
나라 이름 캄보디아는 크메르 제국의 다른 이름인 '캄부자'()에서 유래한 프랑스어 '캉보주'()가 영어화된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원래는 구한말에 이 나라의 국호를 '금변국(金邊國)'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발음인 '캄보쟈'()로 대체되어 들어왔었다. 1970년 이전 왕국시대에는 캄보디아로 불려오다가,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공화국이 성립되자 국명이 크메르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1975년 4월 크메르 루주에 의해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고 국명은 또다시 민주 캄푸치아로 바뀌었다. 4년 뒤인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이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으로 바꾸었다가, 이후인 1993년에 현재의 국명으로 되돌아왔다
역사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캄보디아에는 기원전 2000년~1000년대 사이에 신석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은 주로 중국 동남부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후 1세기경에는 메콩 강 하류와 하구에서 농경과 어로, 목축을 통해 생활하며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한 집단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인도와의 교류를 통해 종교 등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인도차이나 반도에 알려진 첫 번째 국가인 푸난을 세웠다. 푸난은 1세기에서 6세기 말 경까지 번영했으며, 이후에는 메콩 강 중류에서 일어난 쩐라의 공격을 받아 위축되다가 7세기 중엽 멸망하였다.
이 시기의 쩐라는 지방 분권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쩐라의 왕인 자야바르만 1세가 681년 사망한 후, 쩐라는 육진랍과 수진랍의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되었으며, 이후 말레이 민족과 자바인의 압박을 받아 현재의 캄보디아 지역의 국가들은 점차 속국화하였다.
이후 9세기에 자야바르만 2세가 등장하여, 자바인들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고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였으며, 종래에는 앙코르를 수도로 하는 왕조를 세웠다. 이것이 크메르 제국의 시작이다. 크메르 제국은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번영하였으며, 앙코르 와트와 같은 유적들도 이 시기의 군주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가 끝난 후 점차 약화되어 14세기에는 서쪽의 아유타야와 남쪽의 따웅우 왕조 (현재의 미얀마), 그리고 동쪽의 베트남 사이에서 약소국으로 연명했다. 1431년에는 아유타야의 침공으로 수도 앙코르를 함락당하고 현재의 프놈펜으로 천도하기도 했으며, 18세기 말에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떠이선의 난과 미얀마인의 아유타야 침공의 여파로 국토가 황폐화되기도 하였다.
1863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제2차 세계전쟁 때인 1940년부터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1954년 프랑스 공동체 내의 자치국으로 독립했지만, 베트남 전쟁 등의 영향으로 인해 크메르 루즈가 득세하는 등 계속해서 정권이 불안정했다. 크메르 루주 등의 준동과 베트남의 개입으로 인해 내전이 198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시기 중 킬링필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킬링필드
킬링필드는 2시기로 나뉜다.
1기 킬링필드는 1969년에서 1973년 베트남 전쟁중이던 미군이 퍼부은 폭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캄보디아에 쏟아 부은 포탄의 양은 무려 54만 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했던 16만 톤의 세 배가 넘고,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49만 5천 톤마저 능가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불법 폭격이었다. 죄 없는 수십만 민간인들이 숨지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평생 불구가 됐다.
2기 킬링필드는 1975년에서 1978년 사이, 민주 캄푸차시기에 캄보디아의 군벌 폴 포트(본명 살로트 사르)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 붉은 크메르)라는 무장 공산주의 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말한다. 원리주의적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 루즈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 중 1/3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강제노역을 하게 하거나 학살하였다.
1989년 이후 베트남군이 철군하였고, 1991년에는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유엔의 임시 관리안에서 놓이게 되었다. 1993년에는 망명해 있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불러오고 보통 선거를 통해 정체를 입헌rns주제로, 국명을 캄보디아왕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총리 훈 센에 의한 쿠데타가 한 차례 있었지만, 1993년 이후로 정치는 대체로 안정되어 왔다.
자연 환경
지리
캄보디아는 181,035 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태국과 800 킬로미터, 북동쪽으로는 라오스와 541 킬로미터를 접경하고, 1,228 킬로미터를 동쪽과 남동쪽으로 베트남과 맞닿아 있다. 타이 만을 따라서 443 킬로미터의 해안선이 있다.
기후
캄보디아의 기온은 10 °C~40 °C에 이르며, 열대 몬순 기후이다. 10월~1월은 30 °C 정도이며, 2월~5월은 32 °C ~ 35 °C에 이른다.
우기와 건기로 나눌 수 있는데 우기는 5월~10월 사이로 내륙으로 불어오는 남서 몬순이 타이 만과 인도양에서 습한 바람을 몰고온다. 이로 인해 연 강수량의 75%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7월~9월에 절정을 이룬다. 건기는 10월~4월 사이로 11월~1월 사이는 우리나라 초가을 정도로 매우 시원하지만 이때를 제외하면 매우 덥고 건조하다.
행정 구역
캄보디아는 25개 주(ខេត្ត, khaet)와 4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와 정부
캄보디아의 정치는 1993년에 제정된 헌법에 따라 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입헌군주제를 따르고 있다. 캄보디아의 총리는 의회의 수반이고, 국왕은 국가의 수반으로 다당제의 형태의 정당을 운영하고 있다. 총리는 국회의 승인을 받아 국왕이 임명하며, 총리는 집행부(행정부)의 권력을 행사한다. 입법권은 집행부와 상,하원 양 의회에 주어진다.
2004년 10월 14일, 1주일 전 갑작스런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퇴위로,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이 왕위 선발 위원회에 의해 선택되었다. 시아누크 국왕의 간택은 훈센 총리와 국회 의장인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승인함으로써 계승식은 마무리되었다. 왕위 계승식은 10월 29일 프놈펜에서 거행되었다. 군주는 상징적이며, 실제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노로돔 시하모니 현 국왕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예술에 정통하며, 캄보디아 전통춤에 조예가 깊고, 체코에서 오랫동안 체류를 했기 때문에 체코어도 능숙하다.
캄보디아는 2006년 국제 투명성 기구가 조사한 국가 투명도 지수에서 163개국 중 151위를 차지했다. 2007년에는 179개국 중 16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라오스, 미얀마에 이어 동남아 3대 부패국에 손꼽히는 것이다.
BBC에 의하면 캄보디아 정계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하며,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지원되는 국제 원조가 불법적으로 정치인들의 호주머니 속으로 새어나간다는 보도가 있었다.
캄보디아의 부정 부패는 광범위한 소득 불균형을 이루어 빈부의 격차가 뚜렷하다.
대외 관계
캄보디아는 UN 회원국이며, 세계은행과 IMF의 특별 회원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과 ASEAN 회원국이고, 2004년 WTO에 가입하였고, 2005년에는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에 참가하였다.
캄보디아는 많은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1973년 파리 협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유럽 연합, 일본, 러시아 등과 수교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캄보디아는 북한과 남한 모두와 수교 관계를 맺고 있다.
1970년과 80년의 격동이 지나가고, 몇 차례의 국경 분쟁을 이웃국들과 경험했는데, 여전히 일부 도서와 베트남에 인접한 국경 및 태국과 접한 바다의 경계는 아직도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3년 1월, 프놈펜에서 태국의 인기 여배우의 발언으로 촉발된 앙코르 와트와 관련하여 소요가 발생했는데, 캄보디아의 언론과 훈센 총리까지 곤욕을 치른 사건이었다. 당시 태국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경을 폐쇄하고 전투기를 출격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2003년 3월 21일, 캄보디아 정부에서 태국 대사관을 파괴한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국경이 다시 개방되었다.
2008년 태국과의 국경에 위치한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을 둘러싸고 태국과 군사 충돌이 일어났다.
경제
1993년 GDP 24억 달러에서,2006년 72억56백만 달러, 2008년 103억 달러로 증가하였고, 1인당 GDP는 1993년 229달러, 2006년 513달러, 2008년 739달러로 증가하였다. 2006년의 경제성장율은 10.8%이다. 2006년 인플레이션은 2.6% 수준이고, 2007년 추정치는 6.2%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지만, 주변 지역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아직도 낮은 수준이다. 대부분의 도시 주거는 농업에 의존해 있고, 그 관련 하부 구역도 마찬가지이다. 벼 농사, 어업, 목재, 의류, 고무는 캄보디아의 주요 수출 품목이다. 2,000년도에 이르러서야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면 생산이 유명하였으나, 폴 포트 이후에는 현재 면 생산이 없다.
1997~1998년에는 주변국의 경제 위기와 폭동, 정치문제로 인해 경제 회복이 급격하게 떨어졌는데, 외국 투자와 관광 또한 급격히 저하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성장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1999년 이후 경제 개혁과 성장이 5%대를 회복하였다. 혹독한 홍수 등의 자연 재해에도 불구하고, 2000년도에 GDP는 5% 성장하였고, 2001년에는 6.3%, 2002년에는 5.2%를 기록하였다.
캄보디아의 주요 산업은 농업, 어업, 임업이다.
관광산업은 가장 빨리 성장하는 산업 중의 하나로, 1997년 21만 9천명에서, 2004년에는 105만명을 돌파하였다. 2003~2004년의 성장율은 5%대로 꾸준하였다.
특히 학교 등의 기본적인 사회간접자본의 부족으로 시외의 중장년 층은 교육률이 아주 떨어지고 있다. 불안정한 정치와 부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외국의 투자는 꺼려지고 있고, 외국 원조도 연기되었다.
이 나라의 경제 구조는 후진적이고, 전기를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전기를 태국에서 수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입 비용도 비싸다. 농촌 지방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
교통
육상교통망은 수도 프놈펜에서 각지로 도로가 뻗어 있고, 철도도 프놈펜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태국과의 국경 도시인 포이펫(), 남부의 캄포트()를 거쳐, 캄퐁솜만(灣) 방향으로 가는 노선이 있는데 모두 단선이다. 또 메콩, 톤레사프, 바사크 등의 하천은 중요한 수상 교통로이다. 외항선은 프롬펜과 콤퐁솜에 기항한다.
사회
인구
주민
주민은 크메르족이 90%이며, 크메르어가 공식 언어이다. 나머지는 베트남계 5%, 중국계 1%, 기타 4%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메르어는 오스트로 아시아어군의 몽크메르 하위계보이다. 인도차이나계의 프랑스어가 한때는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부는 사용하고 있으며, 과거 식민지 유물로 대부분 오래된 캄보디아 사람들은 제2 외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아직도 일부 학교와 대학교에서는 프랑스 정부의 기금을 지원받아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캄보디아 프랑스어는 캄보디아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주로 정부기관에서 사용되는 방언이 섞인 프랑스어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은 많은 젊은 캄보디아인들과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용활용범위가 넓은 영어를 더 선호한다. 주요 도시와 여행자 센터에서는 영어가 폭넓게 사용되며, 대부분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기도 하다. 시골로 내려가도 불교 사원의 승려 등을 포함하여 많은 젊은 사람들이 영어를 구사한다.
주요 종교로는 크메르루즈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소승 불교가 95%, 이슬람교 3%, 기독교가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
1993년 9월 23일 헌법 5조에 의하면 "공식어와 공식문자는 크메르어와 크메르 문자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영어는 프랑스어를 대체하고 이 나라의 제2 언어로 각광받고 있다. 소수 언어로는 중국어, 태국어 등이 있다.
교육
인간개발지수는 중간이고 문맹률은 높은 편이다.
문화
캄보디아의 문화는 대표적으로 앙코르 시대(802년 ~ 1432년)에 만들어진 앙코르 와트 사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화려했던 유물들은 관리가 소홀한 탓에 파괴와 식민 시대의 약탈 등에 시달려 많은 손상을 입었다.
종교
종교는 95%가 소승 불교이다. 그외 이슬람교, 로마 가톨릭, 개신교, 힌두교순이다.
불교
출처
외부 링크
캄보디아
캄보디아 왕실 홈페이지
캄보디아 외무부
대한민국
주 캄보디아 대한민국 대사관
입헌군주국
유엔 회원국
프랑스어권
프랑코포니 회원국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회원국 |
2640067 |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93%9C%20%EB%A7%88%EC%9D%B4%EC%96%B4%EC%9D%98%20%EC%95%8C%ED%8C%8C%20%EC%84%BC%ED%83%80%EC%9A%B0%EB%A6%AC |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 |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Sid Meier's Alpha Centauri)는 문명 시리즈의 정신적 후속작으로 간주되는 4X 비디오 게임이다. 22세기 SF를 배경으로 한다.
이 게임은 문명 II와 견줄만큼 널리 찬사를 받았다. 비평가들은 (스탠리 큐브릭, 프랭크 허버트,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 줄거리를 비교하여) SF 스토리라인, 음성 연기, 사용자가 만드는 사용자 지정 부대, 테크놀로지 트리의 심도에 찬사를 보냈다. 알파 센타우리는 올해의 최고의 전략 게임, 올해의 최고의 게임 등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평가
같이 보기
2060년대
전장의 안개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사르가소해
각주
외부 링크
Official website mirrored by alphacentauri2.info.
Unofficial patches
1999년 비디오 게임
문명 (비디오 게임)
리눅스 게임
매킨토시 게임
MacOS 게임
SF 비디오 게임
턴제 전략 게임
미국의 비디오 게임
윈도우 게임
오리진스상 수상작
센타우루스자리 알파를 배경으로 한 작품
우주 비행을 소재로 한 작품 |
815461 |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9D%8C%EC%A0%95%EB%8F%99 | 가음정동 | 가음정동(加音丁洞)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의 행정동 및 법정동이다. 공단과 주거지가 조화를 이룬 전형적인 도시개발지구이며, 신도시 개발 계획에 의거 조성된 대단위 아파트지역이다. 다양한 체육·생태공원과 어우러진 도시형 주거지역이다.
역사
고대에는 가음정마을이 해변지역으로 해조류가 밀려와 쌓여 두엄이 형성되어 더음 정으로 불려왔고 이름을 한자화하면서 가음정으로 칭하게 되었다.
1973년 7월 1일 창원군 상남면이었다가, 마산시 남부출장소 설치
1976년 9월 1일 상남도 창원지구출장소 용지, 성주지소
1980년 4월 1일 창원시 가음정동, 남산동
1997년 7월 16일 창원시 가음정동(加音丁洞)-행정동 통합
법정동
가음동(加音洞)
가음정동(加音丁洞)
남양동(南陽洞)
대방동(大方洞)
교육
남산초등학교
남양초등학교
남정초등학교
성주초등학교
남산중학교
남산고등학교
경남천광학교
주거
아파트
가음동
한화건설 창원 가음 꿈에그린 : 2017년 8월 입주.
볼거리
불곡사
음정동 고분군 (도기념물제126호)
각주
외부 링크
성산구 가음정동 행정복지센터
성산구의 법정동
성산구의 행정동
1973년 설치
1980년 설치
대한민국의 동 |
958405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A%B4%ED%8B%B0%20%ED%97%8C%ED%84%B0%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 바운티 헌터 (동음이의) | 바운티 헌터(bounty hunter)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현상금 사냥꾼
《현상금 사냥꾼》 (Per il gusto di uccidere)은 1966년 영화이다.
《바운티 헌터》(The Bounty Hunter)는 2010년 영화이다.
《바운티 헌터》(Bail Enforcers)는 2011년 영화이다. |
358819 |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C%9D%B4%ED%94%BC%EB%A6%AC%EB%83%90 | 카이피리냐 | 카이피리냐(, )는 브라질의 칵테일이다. 카샤사(cachaça)와 설탕, 라임을 섞어 만든다. 여기서 카샤사는 브라질의 국민 증류주를 말한다. 럼 주와 비슷하게도 카샤사는 사탕수수를 가지고 만든다.
외부 링크
7x7 Magazine Mango Caipirinha Cocktail Recipe
How to Make A Caipirinha on Google Video
Making a Caipirinha on YouTube
How to Make A Caipirinha ScienceofDrink photo-guide
Caipirinha Recipe with step by step photos
귤열매 음료
라임
브라질의 술
찬 음료
칵테일 |
809368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C%8B%9C%20%EB%AA%A8%EC%8A%A4 | 제시 모스 | 제시 모스(Jesse Moss, 1983년 5월 4일 ~ )는 캐나다의 배우이다.
출연 작품
아빠의 효녀 조이 (2018)
저주받은 아이 (2017)
링 바이 스프링 (2014)
유에프오 (2014)
쉬 메이드 뎀 두 잇 (2013)
바이킹덤-신과의 전쟁 (2013)
슈퍼스톰 (2012)
뮤턴트 둠스데이 (2011)
디어 미스터 게이시 (2010)
터커 & 데일 Vs 이블 (2010)
멀린 앤드 더 북 오브 비스트 (2009)
스펙타큘라! (2009)
와일드 체리 (2009)
윌리엄 컨스틀러 (2009)
안나와 알렉스: 두 자매 이야기 (2009)
프리 스타일 (2008)
안드로메다의 위기 (2008)
파티션 (2007)
데스티네이션 3 -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2006)
미싱 인 아메리카 (2005)
데드존 시즌1 (2002)
도어 투 도어 (2002)
듀 이스트 (2002)
프로작 네이션 (2001)
라스트 서바이버 (2000)
진저 스냅 (2000)
온 더 로프 (1999)
빅스카이 마을의 악몽 (1998)
제3의 눈 (1995)
블랙 뷰티 (1995)
매직 기프트 오브 더 스노우맨 (1995)
베어 마운틴의 비밀 (1995)
분노의 질주 (1994)
외부 링크
198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캐나다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캐나다의 남자 영화 배우
캐나다의 남자 성우
밴쿠버 출신 배우
캐나다의 남자 어린이 배우 |
119176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D%86%A0%EB%85%B8%ED%94%84%20An-24 | 안토노프 An-24 | 안토노프 An-24(영어: Antonov An-24, 러시아어: Антонов Ан-24)는 구 소련 안토노프 사가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 개발한 기체이다. 이 항공기는 44~52개 좌석을 갖춘 단거리 쌍발 프로펠러 여객기로, 1960년에 처음 선보인 뒤 1963년부터 옛 소련과 중앙유럽, 아시아·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들에서 군용기와 민간 항공기로 사용되어 왔으며, 폭 29.2m, 길이 23., 높이 8.3m, 최대 무게는 2만1천kg, 최대 좌석 수는 52석이며, 최대 속도는 시속 500km, 항속거리는 2400km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이 기체에 대해 "코크"(Coke)라고 하는 코드네임을 부여했다. 1978년 단종되었다. 고려항공의 경우, 1965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5대가 운용 중이다. 주로 평양-심양간, 평양-블라디보스토크간 노선이나 국내선용으로 사용한다.
2007년 캄보디아 항공기 추락 사고의 사고기이기도 하며, 지난 2004년 1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여객기가 추락해 37명이 숨졌다. 2005년 7월, 적도기니 바니에서 추락해 탑승자 60명 전원이 사망했다. 2006년 1월에도 슬로바키아 소속의 군용 AN-24가 헝가리 상공에서 추락, 42명이 사망했다.
제원 (An-24)
더 보기
Y-7 - 중국산 An-24
안토노프 An-26
각주
안토노프 항공기
수송기
여객기
1959년 첫 비행한 항공기
고익기 |
257068 | https://ko.wikipedia.org/wiki/%EC%BC%80%ED%94%8C%EB%9F%AC%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 케플러 (동음이의) | 케플러는 다음을 가리킨다.
요하네스 케플러 : 과학 혁명의 중심 인물. 그의 이름을 따서 :
ideas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
케플러-푸앵소 입체
케플러 계획 : 지구와 비슷한 질량의 외계 행성을 발견, 연구할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케플러의 추측
천체
케플러 (월면 충돌구), 달 표면의 충돌구
케플러 (화성 충돌구), 화성의 충돌구
케플러 초신성
1134 케플러 : 소행성
케플러 초신성 :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한 초신성
그외
Kepler scientific workflow system
케플러 (소프트웨어)
케플러 트랙
케플러 (밴드)
케플러 우주망원경
Kep1er : 한국 엠넷 글로벌 오디션 프로젝트 아이돌 걸그룹
다른 인명
케플러 페페: 브라질 출신의 축구선수.
같이 보기
Kepler
요하네스 케플러 |
1200996 |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B%82%A8%EC%B4%88%EB%93%B1%ED%95%99%EA%B5%90 | 중남초등학교 | 중남초등학교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읍 신화리에 있는 초등학교다.
학교 연혁
1925년 6월 10일 중남공립보통학교(4년제) 개교
1928년 5월 31일 6년제로 개편
1938년 4월 1일 중남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월 1일 중남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81년 3월 1일 병설유치원 개원
1994년 3월 4일 교내 방송국 개국
1995년 3월 1일 특수학급 개설(1)
1995년 3월 6일 학교자체 급식 실시
1996년 3월 1일 중남초등학교로 명칭 변경
2016년 2월 19일 제87회 졸업(총 8,201명)
2017년 3월 1일 제36대 김종훈 교장 부임
2017년 3월 1일 14학급 편성(특수1학급 포함)
2017년 2월 10일 제88회 졸업(총 8,256명)
2018년 2월 13일 제89회 졸업(총 8,300명)
2018년 3월 1일 15학급 편성(특수1학급 포함)
학교 동문
외부 링크
참고 자료
1925년 개교
울주군의 초등학교 |
994914 |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20%EC%99%93%EC%8A%A8%20%28%EC%9E%90%EB%8F%99%EC%B0%A8%20%EA%B2%BD%EC%A3%BC%20%EC%84%A0%EC%88%98%29 | 존 왓슨 (자동차 경주 선수) | 존 왓슨(, MBE, 1946년 5월 4일 ~ )은 영국 북아일랜드의 자동차 경주 선수이다.
서훈
1983년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 수훈
각주
외부 링크
194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북아일랜드의 자동차 경주 선수
벨파스트 출신
대영제국 훈장 구성원 |
712297 | https://ko.wikipedia.org/wiki/%EC%98%A8%EC%96%91%20%EB%B0%A9%EC%94%A8 | 온양 방씨 | 온양 방씨(溫陽方氏)는 충청남도 아산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기원
방(方)씨는 중국 허난성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주나라 선왕 때 공신(功臣)으로 경사(卿士)를 지낸 방숙(方叔)의 후예이다. 염제 신농씨(神農氏)의 11세손이자 유망황제(楡罔皇帝)의 장남인 방뢰(方雷)가 하남성(河南省) 방산(方山) 지방을 봉토(封土)로 받으며 방(方) 성(姓)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방뢰(方雷)의 134세손인 방지(方智)가 당나라 한림학사로서 669년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로 신라에 동래하였다.
중시조 방운(方雲)이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좌복야(左僕射)에 올랐으며,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공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졌다.
비조(鼻祖) 방뢰(方雷)로부터 온양방씨 시조(始祖) 월봉(月峯) 방지(方智)까지 세계(世系)
역사
시조 방지(方智)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669년(당 총장 2년)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신라에 동래(東來)하여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 현 경상북도 상주시)에 정착하였다. 시조 방지의 묘(墓)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 있다.
중시조 방운(方雲)이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좌승지(左承旨), 지성사(知省事) 등을 역임한 후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으며,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공훈을 세워 배방산(拜方山) 일대를 봉토(封土)받고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졌다.
2세 방중탁(方仲鐸)이 목종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고, 3세 방휴(方休)가 현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6세 방유(方裕)는 숙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렀다. 7세 방재(方宰)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9세 방희진(方曦進)이 대제학(大提學)에 오르면서 고려조에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12세 방우선(方于宣)이 1269년(고려 원종 10년) 국자시(國子試)에 장원급제하고 1311년(충선왕 3년)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안정도존무사(安定道存撫使)를 겸하였다.
15세 방순(方恂)이 1362년(고려 공민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교시사 등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동료인 이집(李集)과 더불어 숯골에 은둔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방순의 손자 방강(方綱)이 1447년(세종 29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으며, 성종 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20세 방유령(方有寧)이 1489년(성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 이조참판(吏曹參議),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고, 1520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계림군(雞林君) 방윤(方輪)의 아들 방호의(方好義)는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손자 봉산군 이돈(鳳山君 李敦)의 딸과 혼인하여 1514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를 거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1554년(명종9년) 정2품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방호의의 손자 방덕룡(方德龍)은 1588년(선조 21년) 무과에 급제하고 낙안군수로 재직할 때 이순신의 선봉으로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여 형조참의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처가도 방(方)씨였으며,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한 방우정(方禹鼎)은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서정일기(西征日記)》를 저술하였다.
분파
12세손 방우선(方于宣)이 1269년(고려 원종 10년) 국자시(國子試)에 장원급제하였고, 1311년(충선왕 3년)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안정도존무사(安定道存撫使)를 겸하였다. 온양 방씨는 문정공(文定公) 방우선(方于宣)과 그의 아우 방우번(方于蕃), 목사(牧師) 방득세(方得世)의 아들 대(代)인 13세손에서 7파로 갈라진다.
12세 방우선(方于宣)
13세 장암공(莊岩公) 방서(方曙) - 판서공파(判書公派)
13세 간의대부(諫議大夫) 방현(方玄) - 간의공파(諫議公派)
13세 안렴사(按廉使) 방훤(方暄) -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13세 군위군(軍威君) 방적(方迪) -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 군위 방씨(軍威方氏)
12세 방우번(方于蕃)
13세 방가달(方可達) -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12세 방득세(方得世)
13세 평장사(平章事) 방신제(方臣悌) -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13세 방신우(方臣佑) - 상락부원군공파(上洛府院君派)
7파 중에서도 특히 고려 충렬왕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방서(方曙)를 파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가 온양 방씨의 대종으로서 주축을 이룬다. 상락부원군 방신우(臣祐)는 충렬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평장정사(平章政事) 등의 요직을 지내고, 그뒤에도 원나라를 왕래하며 외교에 공헌하였다. 광록대부파의 파조 방신제(方臣悌)도 원나라에 가서 금자광록대부평장사(金紫光祿大夫平章事)를 지내고 중국에 정착하였다. 명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방효유(方孝孺)는 방신제의 5대손이다. 중국의 방씨원류역사연구회, 방씨전족통보이사회(方氏全族統譜理事會)와 한국의 온양방씨중앙종친회는 인적·물적 교류를 해오고 있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溫陽)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온양으로 단일화되고 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서도 종전의 상주·신창·군위 방씨도 본관을 온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물
방휴(方休) : 방운(方雲)의 손자. 1010년(고려 현종(顯宗) 원년) 거란(契丹)의 2차 침입시 낭장(郎將)으로 공을 세워 평양성을 지켰으며,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시 강감찬(姜邯贊)의 지휘하에 지채문(智蔡文)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승리하고, 1019년에는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
방오계(方吳桂) : 1075년(고려 문종(文宗) 29년)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랐다.
방유(方裕) : 고려 숙종(肅宗)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종(睿宗)조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 안렴사(按廉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했다. 사위는 정습명(鄭襲明)이다.
방재(方宰) : 방유(裕)의 아들. 1135년(고려 인종(仁宗) 13년) 대호군으로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묘청의 난을 진압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방희진(方希進) : 호는 박재(博齋). 보명(譜名) 희진(曦進). 1175년(고려 명종 5년) 국자시에 급제하고 1177년에 빈공과(賓貢科)에 등과 후 양광도 관찰사를 거쳐 진현관대제학(大提學)과 상서령에 이르렀으며 숭록대부에 승품으로 올랐다.
방보(方甫, ? ~ 1271) : 밀성인(密城人)으로 1270년 고려의 원종이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강화(講和)하기로 함에 반발해 배중손(裵仲孫)이 이끄는 진도 삼별초(三別抄)에 호응하여 개국병마사(改國兵馬使)로 칭하며, 밀성군(密城郡)을 중심으로 영남민(嶺南民)들을 규합하여 대몽항쟁을 계속하기로 했으나, 배신자 일선(一善) 현령(縣令)에게 죽임을 당한다.
방우선(方于宣, 1253 ~ 1321) : 1269년(고려 원종 10년) 국자시에 장원급제하고, 1311년(충선왕 3년)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안정도존무사(安定道存撫使)를 겸하였다.
방우번(方于蕃) : 문정공(文定公) 우선(于宣)의 동생이다. 정순대부(正順大夫) 통례원사(判通禮院事)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지제교(知制敎)를 지냈다.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과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낸 김진(金轃,1339년생)이 외손자이다.
방우정(方于楨) : 충선왕 3년(서기 1311년) 산신(山神)을 숭상하여 공경(公卿) 사서(士庶)가 모두 친히 경기도 양주 감악산(紺岳山)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지중문하사(知中門下事) 민유(閔儒)와 전소윤(前少尹) 김서지(金瑞芝)등도 감악산에 제사를 지내려고 장단진(두지진)을 건너다가 익사하게 되자, 사헌부 장령으로 그 폐해를 지적하여 충선왕에게 상소(上疏)하여 이를 금지했다. 충숙왕 5년(서기 1318년) 왕명으로 한반도 남쪽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삼한통일을 위해 창건했던 3대 비보사찰(裨補寺刹)중의 하나인 경남 진해시 소재 용암사(龍巖寺) 중창(重創)을 시행하여 완공을 보았으며, 그해 11월 18일에 고려말 천태종의 원혜국사(圓慧國師)의 제자 무외국사(無畏國師) 정오(丁午)를 맞아 약 7일 동안 성대하게 낙성(落成) 법회(法會)를 열고 왕의 수(壽)와 복을 빌었다. 그러나 이 사찰은 지금 폐찰되여 부도와 석탑만이 있다. 용암사의 중창당시 왕명으로 대장경을 보수하여 새 전당과 새 창고 안에 안치하였다.
방신우(方臣祐, 1267 ~ 1350) : 추성돈신양절공신(推誠敦信亮節功臣)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경상도 관성현(管城縣, 현 충북 영동)의 대대로 내려오던 사족(士族) 출신. 아버지는 상주목사 휘 득세(得世)이다. 1298년 충선왕조에 안평공주를 수행 원나라에 들어가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를 섬기고 벼슬이 평장원사(平章院事)에 올랐으며, 1298년 벽상삼한정광(壁上三韓正匡)이 되고, 충선왕조에 홍중희(洪重喜)의 무고를 원나라 황제에게 간하여 물리쳤으며 금자장경을 완성한 공으로 1310년 중모군(中牟君)에 올랐다. 1332년 고려에 돌아와 선흥사(禪興寺)를 수리했으며, 1342년 원나라로 들어가 이듬해 병을 얻고 1345년 경인(庚寅)년에 죽었다.
방서(方曙, 1275 ∼ ? ) : 자(字)는 원명(源明) 시호(諡號)는 장헌(莊獻)으로 문정공(文定公) 휘 우선(于宣)의 아들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판도판서(版圖判書)직을 역임했다. 양녕대군(讓寧大君) 스승 경주(慶州)이씨 계림군(鷄林君) 이래(李來)의 부친 석탄공(石灘公) 이존오(李存吾)가 외손(外孫)이며,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와 강릉존무사(江陵存撫使)를 했던 순천(順天)김씨 김천호(金天晧)가 장인이다.
방현(方玄) : 생몰년미상. 고려 충선왕(忠宣王)시 명경업과(明經業科) 등과,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 간의공파 파조(派祖).
방훤(方暄) : 생몰년미상. 고려조 문과에 등과후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절손이 되었다.
방적(方迪) : 생몰년미상. 고려 충렬왕(忠烈王)시 태상경(太常卿)을 지냈다. 군공(軍功)으로 군위군(軍威君)을 봉(封) 받았다. 태상경파 파조
방언휘(方彦暉) : 아버지는 휘 서(曙). 자(字)는 달가(達可) 호는 국서(菊墅) 또는 독락정(獨樂亭). 고려 충혜왕조 1342년 명경업과에 등과한 후 사인(舍人)을 거쳐 밀직원직학사(密直院直學士)를 지냈으며, 충목왕(忠穆王)의 국구(國舅, 장인)로 온천부원군(溫泉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숙(敬肅)이다.
방천봉(方天奉) : 장헌(莊獻)공 휘 서(曙)의 아들이다. 공민왕 12년(1363년) 11월, 1359년(己亥년, 공민왕 8년) 대호군(大護軍)으로 정세운(鄭世雲)과 같이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한 공으로 2등 공신(功臣)으로 녹훈됐다.
방절(方節) : 1359년(공민왕8년) 기철(奇轍)을 제거한 공으로 2등 공신(功臣)으로 녹훈되고, 1363년(공민왕12년) 3월에는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경성수복공신 1등공신에 책봉되고,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11월에 1359년(공민왕8년)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2등 공신(功臣)으로 녹훈됐다.
방순(方恂) : 초명 방득주(方得珠). 호는 만송당(晩松堂) 시호(諡號)는 문의(文毅). 방언휘(彦暉)의 아들. 1362년(공민왕 31년)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문과에 등과하고, 1369년 좌랑(佐郞)을 거쳐, 1375년 7월에는 정몽주와 장인 윤호(尹虎) 등과 같이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어 1376년 중서사인(中書舍人) 1377년 성균관 좨주(祭酒)를 거쳐 판전교시사를 한다.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동료인 광주인(廣州人) 둔촌(遁村) 이집(李集)과 더불어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을 지켜 숯골에 은둔중 붙잡혀 황해도(黃海道) 금촌(金村)서 죽음을 당했다. 후손들이 시신을 찾지못해 현 성남의 수정구 태평동에 의장(衣葬)한 것을 1969년 성남시 개발로 광주시 오포면 양벌리(陽筏里)로 이장하였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순절(殉節)했으나, 아들 영화군(永華君) 휘 운실(芸實, 일휘 龍)과 손자 천(天)·용(龍)·언(彦)·택(澤)이 조선개국을 도우는 것은 막지 않았다. 부인은 조선 개국공신 파평인(坡平人) 윤호(尹虎)의 장녀와 경주인(慶州人) 문정공(文靖公) 이달충(李達衷)의 차녀이고, 딸은 숙녕택주(淑寧宅主)로 사위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의령인(宜寧人) 남재(南在)의 장남 남경문(南景文)이며, 외손자는 태종의 사위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다. 동방(同榜,1362년 문과 임인방)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문의공(文毅公)에게 보낸 시(詩) ‘방동년 생녀 희정(方同年 生女 戲呈)’이 도은집에 수록되어 있다.
방여권(方與權) : 호조의랑(戶曹議郞)을 지냈다. 배우자는 안동(安東) 권씨(1427년 3월 사망). 변계량(卞季良,1369년생) 시문집 춘정집에 '의랑 방여권에게 드림(呈方議郞 與權)'이라는 시가 있다. 1413년(태종 13년) 의관(衣冠,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신흥세력들이 견제하여 허물을 만들어 처단하라고 간언하지만, 태종은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
방효유(方孝孺, 1357 ~ 1402) : 자(字)는 희직(希直) 희고(希古), 호는 정학(正學) 또는 손지(遜志). 명(明)나라 때 대신이자 학자, 문학가, 사상가이다. 온양방씨 18세(世). 명조(明祖) 영락제(永樂帝)에게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을 지키다, 10족의 멸족을 당함.
방유신(方有信) : 서울출신이며, 1360년경 출생. 군기시(軍器寺) 소감(少監)을 지냈으며, 1443년 세종대왕이 마련한 원로중신들의 경로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
방운실(方芸實) : 초휘 태응(台應) 一云 춘응(春應), 자(字)는 신어당(愼語堂). 문의공(文毅公) 방순(方恂)의 아들이며, 숙녕택주(淑寧宅主)의 오빠(娚)이다. 고려조 진사시에 합격하고 별장(別將)을 했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
방천(方天) : 소윤(少尹) 방희우(方希佑)의 장남이다. 중랑장(中郎將) 승훈랑(承訓郎)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
방용(方龍) : 소윤(少尹) 방희우(方希佑)의 차남 회덕군(懷德君)이다. 군기시감(軍器寺監)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
방언(方彦) : 소윤(少尹) 방희우(方希佑)의 삼남이다. 검교내시부사(檢校內侍府事)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
방택(方澤) :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으로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방유량(方有良)의 아들로, 검교밀직사사(檢校密直司事)를 역임했다.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
방지신(方之信) : 중랑장(中郞將)으로 조선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된다.
방장수(方長守) : 산원(散員)으로 조선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된다.
방강(方綱, 1400 ~ ? ) : 방순의 손자. 자는 군필(君弼), 호는 경재(敬齎). 1447년(세종 29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사성(司成)·정언(正言)·흡곡현령 사간(司諫) 이천부사(伊川府使, 강원도 이천군)를 역임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계유정난 이후 부인 순천 김씨가 김종서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유배당하기도 했다. 성종 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방계산(方桂山) : 호군(護軍) 1455년 좌익원종3등공신(佐翼原從三等功臣)
방계충(方繼忠) : 주부(主簿) 1455년 좌익원종3등공신(佐翼原從三等功臣), 풍수학(風水學,1457년)
방서동(方瑞同) : 함경남도 출신 진무(鎭撫,軍官)로 이시애(李施愛)의 란을 평정한 공으로 세조조(世祖朝) 1467년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이 됨.
방유령(方有寧, 1460 ∼ 1529) : 자는 태화(太和), 호는 무기당(無期堂)·주탄(舟灘).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중랑장(中郞將) 방을상(乙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형조참의 방사우(方思友)이고,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방중지(方仲止)이다.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청환(淸宦)에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파직당했으나, 1505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등용되었고, 1512년(중종 7)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다. 1515년 대사헌(大司諫), 1516년 대사간(大司諫), 1517년 공조참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1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이조참판과 병조참판(參判)을 역임하고, 1520년(중종 15)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방윤(方輪, 1464 ∼ 1534) : 조선 중종 때 계림군(雞林君)에 봉군되고,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두 차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추증되었다.
방규(方規) : 경기도 강화(江華) 교동(喬桐)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치정(致正)이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끝낸 중동반정(中宗反正)에 내금위(內禁衛) 직으로 가담하여 1507년 정국원종2등공신(靖國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 됐다.
방순달(方順達) : 1465년경 출생, 자(字)는 백순(伯順). 종사랑(從仕郎). 개성(開城)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윤손(潤孫)이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끝낸 중종반정(中宗反正)에 학생(學生)으로 가담하여 1507년 정국원종3등공신(靖國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 됐다.
방응두(方應斗) : 개성(開城)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순달(順達), 응규(應奎, 보명 繼昌)의 형. 개성 거주. 부사과(副司果). 조선의 왕실(王室) 전주이씨 종계(宗系)를 바로잡은 공으로 1591년 광국원종3등공신(光國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 됐다.
방계창(方繼昌) : 1480년경 출생. 초휘(初諱) 응규(應圭). 자(字)는 문백(文伯). 아버지는 휘 순달(順達)이다. 아버지와 함께1507년 정국원종3등공신(靖國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 되고, 뒤늦게 1549년 생원(生員) 식년시에 합격해 개성에서 서울 경복궁 옆 장의동(壯義洞 : 現 종로구 경복궁 서쪽 효자동사무소 앞 창성동)으로 이거(移居) 하였다. 인의(引儀)를 지냈으며 예빈시(禮賓寺) 정(正)을 추증 받았다. - 창성(昌成) 방(方)씨의 개조(開祖).
방호의(方好義) : 방윤(方輪)의 아들.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현손녀와 혼인하고, 1511년(중종6) 경회루에서 활쏘기 장원을 하고, 1518년 부령부사가 되었다. 1525년 전라좌수군절도사 1540년 경상병마절도사를 거쳐 1542년 충주목사를 역임했다. 1544년 경상우수군절도사시 50년후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부산 가덕도(加德島)에 성을 축조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충청수군절도사, 1549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550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1554년(명종 9년) 정2품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1556년 청홍도병마절도사(淸洪道兵馬節度使)로서 왜구의 방어에 힘썼다.
방인(方寅, 1511 ~ 1573) : 경기도 강화 출신. 자(字) 원겸(元兼). 아버지는 영동(永同) 현감 휘 국형(國亨) 이고, 동생은 충무공 이순신 장인 보성군수(寶城郡守) 방진(方震)이다. 둘째 사위가 사촌 아래 동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 장수로 1598년 예교(曳橋:順天倭城)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성주인(星州人)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 충장공(忠壯公) 황세득(黃世得,1537년생)이다. 명종조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은일불사(隱逸不仕) 했다.
방진(方震, 1514 ~ ? ) : 22세손.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홍(方弘)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방중규(方中規)이다. 22세인 1535년 제주현감에 부임하였다가 이후 보성군수를 역임하였다. 사위는 이순신 장군이다. 병조판서였던 이준경이 중매를 섰다. 21세에 결혼한 이순신은 충청도 아산으로 이주하여 방씨 집안에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며, 충청도의 재력가 집안이었던 방씨와 혼인하면서 부자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方震)의 권유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방진(方震)으로부터 병학을 배워 32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충무공전서》의 ‘방부인전’에 방진의 활솜씨에 대한 내용이 있다.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火賊)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도둑들이 이미 계집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 나갔으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영특한 딸이 베 짜는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 양 다락에서 힘껏 내던지며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리쳤다. 방진의 활솜씨를 두려워했던 도둑들은 화살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곧 놀라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선조 24년 이순신 장군의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였다.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는 대한민국 보물 제1564-8호다. 난중일기에 방필순(方必淳), 방익순(益淳)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이 관직에 진출한 후에도 온양 방씨 문중들과 한 집에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방진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증직되었고, 부인 남양 홍씨는 숙인(淑人)으로 증직되었다.
방춘정(方春禎, 1523 ~ ? ) : 경기도 여주 출신. 아버지는 통덕랑 휘 순효(舜孝). 1605년 임란시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3등공신으로 녹훈(錄勳) 된다.
방우주(方佑周, 1549 ~ ? ) : 자는 원로(元老)와 윤숙(允淑)이고 호(號)는 안분당(安分堂)이다. 영동(永同) 현감(縣監) 휘 국형(國亨)의 손자이자 진사(進士)공 휘 인(寅,1511년생)의 아들로 온양방씨 23세이다. 선조(宣祖)조 서기 1561년 명종조 사마시(司馬試) 과장에서 장원(壯元) 다툼이 생겨 합격이 취소되었으나, 1579년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 19위로 등과하시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즉시 고향 강화 마니산지역에서 의병을 이르켜 남하하여, 이율곡의 문하생 의병장 조헌(趙憲)과 합세하여 왜적과 전투 하였다. 어유간만호(魚遊澗萬戶)시에는 정문부와 함께 국경인(鞠景仁)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임시 권지(權知) 동래부사를 역임하셨고 란이후 1605년 선무원종3등공신 녹권을 받고, 상부(尙州)목사를 제수 받았으나 신병을 이유로 부임치 않았다.
방덕공(方德恭) : 평안남도 맹산(孟山) 출신.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戶曹參判) 휘 원길(元吉)이다. 1605년 첨정(僉正)으로 임란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2등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사후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와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추증(追贈 받는다.
방승경(方承慶, 1547 ~ ? ) : 경기도 평택 출신이다. 아버지는 개천군수 휘 윤지(允祉)이다. 선조조 1572년 내금위(內禁衛)로 재직시 별시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 임란후 통훈대부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지냈다.
방수경(方守慶, 1548 ~ ? ) 경기도 평택(平澤) 출신이다. 자(字) 응길(應吉). 아버지는 충청도병마우후(忠淸道兵馬虞候) 어모장군 휘 윤행(允行)이다. 1583년 알성시 무과에 등과하여, 목포만호(임란당시) 판관(判官) 도총도사(都摠都事)를 지냈으며, 1605년 임란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1등공신(扈聖原從一等功臣) 훈호(勳號)를 받음.
방준호(方俊豪) :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조의 내관(內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서하군(西河君). 광국원종2등공신(1591년) 평난원종1등공신(1591년) 호성원종2등공신(1605년) 익사3등공신(1613년, 후에 취소) 형난원종1등공신(1614년, 후에 취소) 정운원종1등공신(1614년, 후에 취소)
방응원(方應元, 1553 ~ ? ) : 충청남도 온양(溫陽) 출신. 자(字)는 선중(善中). 아버지는 진위장군 휘 사열(思說). 1583년 정로위(定虜衛)로 별시 무과에 등과하고 임란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1605년 부정(副正)으로 선무원종2등공신으로 녹훈(錄勳)된다.
방희윤(方希尹, 1557 ~ ? ) :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 아버지는 가선대부 훈련원주부 휘 훤(萱)이다. 1599년 훈련원 정(正) 당시 무과 정시(庭試)에 합격했다. 1605년 임란시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3등공신으로 녹훈(錄勳) 된다.
방업(方業, 1558 ~ 1627)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증 판결사(判決事) 행 절충장군(折衝將軍) 휘 수인(壽仁, 守仁)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시 충무공 이순신을 도왔다. 딸은 중종 초상화를 그렸던 어모장군 행 호군(護軍) 증 공조판서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중순군(仲順君) 이흥효(李興孝: 1537년-1593년)의 둘째 아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장(李檣)에게 시집갔으나, 신병으로 남편이 세상을 하직하자, 따라죽어 나라에서 열녀(烈女)됨을 기려 정문(旌門)을 내린다.
방응상(方應祥, 1559 ~ ? ) : 충청남도 온양(溫陽) 출신이다. 아버지는 무과 훈련주부 휘 규(奎)이다. 1605년 내금위(內禁衛)로 임란시 선조를 호종했던 공으로 호성원종2등공신이 되었고, 1614년 형난원종2등공신이 되었으나 인조반정후 취소되었다. 1623년 전옥서주부(典獄署主簿)를 했다.
방수(方水) : 1550년대 출생. 이명 영(永). 보명 영(英). 서울 장의동(壯義洞. 현 창성동) 출신. 아버지는 절충장군 행 판결사(判決事) 휘 수인(壽仁)이다. 임란시 공을 세우고 1605년 선무원종3등공신으로 녹훈(錄勳) 되고, 인조반정시 부사과(副司果)로 공을 세우고 1625년 보사원종2등공신으로 녹훈 된다.
방덕룡(方德龍, 1561 ∼ 1598) : 자(字)는 운보(雲甫), 호는 낙천(樂天)이다. 방호의의 손자이며 여절교위(勵節校尉) 방헌침(方獻忱)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기도관찰사 정언각(鄭彦慤)의 셋째 딸이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樂安郡守)로 재직하던 중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부사(府使) 이영남(李英男), 만호(萬戶) 안여종(安汝棕)과 함께 절이도에서 복병을 하였다가 적을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 이듬해 통제사 이순신의 선봉이 되어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형조참의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방희민(方希閔, 1562 ~ 1609) :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호군 휘 웅(雄)이며 충무공 이순신이 사촌 자형이다. 1594년 무과 등과하고 1605년 훈련주부로 5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원종3등공신(淸難原從三等功臣) 되었다. 대포(大浦)만호와 임유진(臨溜鎭) 첨절제사를 지냈다. 부인 전주 이씨(덕림군 후손)는 임진왜란시 왜적(倭賊)이 몸을 더럽히려하자, 꾸짖고 반항하다, 처참히 살해당하며 절개를 지킨 열녀(烈女)이다.
방사호(方士豪) : 서하군(西河君) 방준호(方俊豪)의 동생. 주부(主簿). 수문장(1591년) 첨절제사(僉節制使)를 했다. 임란시 선조를 호종했던 공으로 1605년 호성원종1등공신이되고 1614년 익사원종3등공신에 책록 되었으나, 인조 반정후 후 취소되었다.
방효희(方孝禧) :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 보명 효희(孝僖). 무과를 급제하고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25년 진무원종3등공신에 책록 되었다. 아버지는 휘 예(禮)이며, 아들은 1627년 무과 장원 급제를 한 절충장군 두원(斗元)이다. 손자 가선대부 순경(順慶, 보명 時爀)은 1681년 보사원종3등공신에 책록 되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방림(方琳, 1570 ~ ? ) :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結城) 출신. 아버지는 통훈대부 판관 휘 승경(承慶)이다. 1615년 식년 무과에 급제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25년 진무원종1등공신이 되었다. 사과(司果) 만포(滿浦) 첨절제사(僉節制使)를 했다.
방응상(方應祥, 1571 ~ 1645) : 아버지는 황해도 문화(文化)사람 지사(進仕) 휘 유범(有範)이고 어머니는 노(盧)씨이다.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수제자로 법명은 송월당(松月堂)이다. 일찍이 양친(兩親)을 여의고 14세에 이름난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 구월산(九月山)에서 성행(性幸:性衍) 스님을 만나 머리를 자르고 계(戒)를 받았다. 사명대사는 스님의 법기(法器)를 이내 알아보고서 적통 제자로 삼았다. 1624년 조정에서 사문(沙門)에게 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게 하고 대사를 불러 공사를 감독케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않았다. 조정에서 그 기상을 높이 평가하여 대사에게 묘담국일도대선사(妙湛國一都大禪師)라는 호칭을 내려주었다. 부도(浮屠)는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있다.
방의남(方義男) : 서울 출신이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충추부사(知中樞府事) 휘 희(希)의 아들이다. 상통사(上通事)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광해군(光海君)조에 중국에 몰래 들어가 황기와(黃瓦) 제작기법을 배워왔다.
방식(方軾, ? ~ 1645) : 경기도 강화 출신. 아버지는 무과 증 참판(參判) 휘 승익(承翼)이다. 자(字) 평숙(平淑). 1605년 무과에 합격하여, 1618년 강화부 우사파총(右司把摠), 1625년 남해현령(南海縣令), 1629년 가산군수(嘉山郡守), 1636년 함종현령(咸從縣令), 1639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역임했다. 1645년 삼수군수(三水郡守)로 있을 때 유탁(柳濯)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고,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충신문이 세워졌다.
방대충(方大忠) : 1580년경 출생.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심천면(深川面) 출신. 아버지는 휘 희윤(熙倫)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25년 진무원종(振武原從)1등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훈련주부를 했다.
방승남(方承男) : 1580년경 출생. 서울 장의동(壯義洞. 현 창성동) 출신. 아버지는 증 판결사 휘 현(賢)이다. 임란시 공을 세우고 1605년 선무원종3등공신으로 녹훈(錄勳) 된다. 1614년 형난원종3등공신에도 책록 되지만 인조반정후 취소된다. 의과(醫科) 직장(直長), 판사(判事)를 했다. 방의남(方義男)의 사촌 동생이다.
방기천(方起天, 1581 ~ ? ) : 경기도 강화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헌(獻) 형은 익사원종3등공신 황주병마절도사(黃州兵馬節度使)를 했던 방천수(方天壽)이다. 1646년 수문장으로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하는데 가담한 공으로 영국원종3등공신을 녹훈 받는다.
방승남(方承南, 1588 ~ ? ) :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출신이다. 아버지는 여절교위(勵節校尉) 훈련원판관 휘 중량(仲良)이다. 무과를 합격하고,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25년 진무원종(振武原從)1등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방애남(方愛男, 1594 ~ 1667) : 평안남도 정주(定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휘 희상(希祥)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25년 진무원종3등공신으로 녹훈(錄勳) 되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방두원(方斗元)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휘 효희(孝僖)의 아들. 1627년(인조(仁祖) 7년) 상호군(上護軍)으로 식년시 무과 갑과(甲科) 장원(壯元)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가자(加資) 되었다.
방지남(方指男, 1597 ~ 1668) : 서울 출신. 보명 지남(智男). 아버지는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휘 희(希)이다. 전 어의(御醫)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1625년 보사원종3등공신이 되었으며, 1646년에는 영국원종1등공신이 되었다. 가선대부(가선대부)를 지냈다.
방식(方湜, 1598 ~ ? ) : 경기도 양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청난원종3등공신 휘 희민(希閔)이다. 무과 급제후 강동현령(江東縣令)을 했다. 1646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한 공으로 영국원종(寧國原從)2등공신으로 녹훈 되었다.
방사기(方士奇, 1598 ~ ? )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부호군 선무원종3등공신 휘 수(水, 이명 永, 英)이다. 1637년 소비포만호(所非浦萬戶)를 하고, 1644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고 1646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한 공으로 영국원종3등공신을 녹훈 받는다. 부호군을 지냈다.
방사룡(方士龍) : 1600년경 출생. 무과에 급제하고 한량(閑良)으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25년 진무원종3등공신에 책록 되었다. 아들 두완(斗浣, 1633년생)도 1672년 무과 별시에 급제하였다.
방귀생(方貴生, 1603 ~ 1643) : 온양(溫陽) 출신. 아버지는 휘 세영(世英)이다. 1681년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보사원종3등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아들 방이길(方履吉)은 보사원종2등공신이 되어 부자가 함께 원종공신이 되었다.
방지원(方智遠, 1604 ~ 1684) : 보명 지원(智圓). 충청남도 청양(靑陽) 출신. 1644년 포도군관(捕盜軍官), 1646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한 공으로 영국원종(寧國原從) 1등공신이 되었고, 1647년 창주첨절제사(昌洲僉節制使) 1648년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사후 자헌대부(資憲大夫)와 지중추부사를 추증 받는다.
방준(方峻, 1604 ~ ? ) : 서울 출신. 아버지는 휘 전(銓)이다. 1637년 별시 무과에 합격하고, 1646년 수문장일 당시 시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하는데 가담하여 영국원종3등공신의 훈호를 받았다.
방경창(方景昌, 1615 ~ ? ) : 부평(富平) 거주. 아버지는 휘 득천(得天)이다. 1637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고, 품계가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었다. 1646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한 공으로 영국원종1등공신을 녹훈 받고, 1649년 위장(衛將) 1658년 부사맹(副司猛)을 지냈다.
방시헌(方時憲, 1619 ~ 1694) : 양주출신 서울 거주. 아버지는 1624년 이괄(李适)의 난시 의병으로 참전하여 황해도 금천(金川) 청룡포(靑龍浦)에서 순절(殉節)한 휘 흡(潝)이다. 1646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영국원종3등공신에 녹훈되고, 1651년 별시 무과에 급제, 1674년 초관(哨官) 1676년 주부를 거쳐 1677년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역임했다.
방이원(方以遠, 1625 ~ 1702) : 자(字) 만리(萬里).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호군(護軍) 증 참판(參判) 휘 승검(承檢)이다. 1646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한 공으로 영국원종(寧國原從) 1등공신이 되었고, 1656년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1667년 찬의(贊儀) 1668년 사근찰방(沙斤察訪) 1673년 부호군(副護軍) 1674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1691년 송라찰방(松羅察訪) 등을 역임한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추증 받는다.
방이길(方履吉, 1628 ~ ? ) : 온양(溫陽) 출신. 아버지는 보사원종3등공신 증 군자감정(軍資監正) 휘 귀생(貴生). 권관(權管)으로 1681년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보사원종2등공신으로 책록되고, 1682년 사량만호(蛇梁萬戶) 1686년 평안북도 벽동군의 아이(阿耳) 첨절제사(僉節制使) 부호군(副護軍)의 직을 수행했다.
송암당(松巖堂, 1628 ~ 1699) : 조선의 승려. 속성은 방(方)씨로 평안남도 성도(成都) 사람이다. 13세에 출가하여 낙송(洛松) 모하(暮霞)의 제자가 되어 참선수행에에 전념하였으나 당오(堂奧)에 이르지 못하다가, 만년에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의심(義諶) 풍담(楓潭 1592년-1665년)대사의 문하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고 풍담의 선종 법맥을 이었고, 1699년 9월 23일 소양(昭陽)의 송곡사(松谷社)에서 입적하였다. 대사는 생전에 자신의 의지를 돈독히하고, 도의 경지가 깊었다 한다. 유언대로 묘향산 백운동(白雲洞)에서 다비식(茶毘式)을 거행후, 사리(舍利) 2과를 수습하여 1과는 고향(故鄕)인 순천군과 맹산군 근처인 능성(綾城) 구룡산(九龍山:평남 성천군)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고, 1과는 수도하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동쪽에 부도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추붕(秋鵬) 설암(雪巖, 1651-1706)대사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방필태(方必泰, 1629 ~ ? ) : 서울 출신이다. 자(字) 여종(汝宗). 보명 필대(必大). 아버지는 통훈대부 관상감직장 휘 이정(以正)이다. 사과(司果) 당시인 1651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고, 1681년 습독(習讀)으로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보사원종2등공신으로 책록되고, 그해 아오지만호(吾乙足萬戶)가 되었다.
방이관(方以寬, 1630 ~ 1706)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판관(判官) 증 군자감정(軍資監正) 정운원종3등공신(후에 취소) 휘 승철(承哲)이다. 무과에 등과하고, 1675년 송라만호(助羅萬戶)를 하고, 1681년 절충장군으로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보사원종3등공신이 되고, 1686년 어유간(魚游澗) 첨절제사(僉節制使) 1697년 백치(白峙) 첨절제사를 했다. 사후 참의(參議)로 추증 되었다.
방이준(方以準. 1632 ~ ? ) : 충청남도 청양(靑陽) 출신이다. 아버지는 증 자헌대부 부호군 휘 지원(智圓, 智遠)이다. 무과에 등과하고 1681년 만호로 재직시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용양위 부호군과 절충장군이 된다.
방운(方雲, 1638 ~ ? )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진위장군(振威將軍) 수문장 휘 응원(應元)이다. 1681년 부사맹(副司猛)으로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보사원종3등공신에 책록되고 아오지(阿吾地) 만호가 된다. 1686년 첨절제사, 1687년 감포(甘浦) 만호, 1690년 부사과(副司果)를 지낸다.
방준창(方俊昌, 1649 ~ 1721) : 강원도 춘천 출신. 자(字) 성보(聖甫). 아버지는 휘 유후(有後)이다. 숙종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1681년 초관(哨官)으로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보사원종2등공신으로 책록되고, 1697년 고군산(古群山)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방진기(方震夔, 1655 ~ 1729) : 서울 출신이다. 자(字) 일경(一卿). 아버지는 영국원종1등공신이며 부호군을 지낸 증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휘 이원(以遠)이다. 어의(御醫)를 했으며, 1706년 경안찰방(慶安察訪)을 거쳐 1710년 부호군이 되었다. 1725년 연천현감 재직시 백골징포(白骨徵布)와 둔아병(屯牙兵) 폐단 등을 보고하여 시정케 하였으며, 1726년 과천현감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현민(縣民)들의 어려움을 살펴 선정을 함으로 임기후 현민들이 공덕비를 세워주었다.(현재 금천구 과천에 있음) 172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아들 세겸(世謙) 손자 태여(泰與) 3대가 함께 양무원종1등공신(揚武原從一等功臣, 奮武原從一等功臣)이 된다. 승록대부를 했다.
방득신(方得信. 1661 ~ ? ) : 서울 출신이다. 자(字) 인보(仁輔). 아버지는 휘 운일(雲一)이다. 1681년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 재직시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보사원종3등공신(保社原從三等功臣)이 되고, 1686년 전력부위 당시 별시 무과에 급제한다.
방즙(方濈, 1661 ~ 1725) :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출신. 아버지는 통정대부 부호군 휘 수선(受善, 보명 愛善)이다, 자(字) 문화(文華). 숙종조 169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교서관(校書館) 부정(副正) 은계찰방(銀溪察訪) 조산대부(朝散大夫)를 지냈다.
방필량(方必亮) : 1670년경 출생. 보명 필량(必良).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 통훈대부 관상감직장(觀象監直長) 휘 이정(以正)의 막내 아들이다. 1681년 어모장군(禦侮將軍)시 허견(許堅)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보사원종3등공신이 되고, 1728년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방일상(方日尙, 1676 ~ ? ) : 보명 진웅(震雄). 충청남도 청양(靑陽) 출신이다. 자(字) 대이(大而). 아버지는 보사원종3등공신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휘 이준(以準)이다. 1714년 무과 증광시에 급제하고, 1720년 경복궁가위장, 1721년 차령(車嶺) 첨절제사(僉節制使)를 하고, 1728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揚武原從二等功臣, 奮武原從一等功臣)이 된다. 1734년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방진성(方震晟, 1677 ~ 1735) : 서울 출신이다. 자(字) 공보(公保). 아버지는 무과 절충장군 증 참의(參議) 휘 이관(以寬)이다. 무과를 급제하고 사정(司正)과 사과(司果)를 지내고, 1728년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고, 1733년 발포만호(鉢浦萬戶)가 되었다.
방세겸(方世謙, 1680 ~ 1752)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어의(御醫)를 지낸 숭록대부 부호군 휘 진기(震夔)이다. 전옥주부(典獄主簿) 찰방(察訪)을 지냈다. 1728년 인의(引儀) 당시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아버지와 아들 태여(泰與) 3대가 함께 양무원종1등공신(揚武原從一等功臣)이 된다.
방만규(方萬規, 1680 ~ 1725) :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출신. 아버지는 가선대부 휘 내길(乃吉)이다, 자(字) 여해(汝楷). 숙종조 171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수찬(修撰)조지서별제(朝紙暑別提) 등을 역임. 신축임인사화(辛丑壬寅士禍) 이후 영조가 등극하자 노론편에 들어 소론을 비판하자, 탕평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참형당해 순절 하였다. 증손 능원(能圓)이 상소하여 신원(伸冤) 되었다.
방대녕(方大寧, 1683 ~ ? ) : 서울 출신이다. 자(字) 이안(爾安). 아버지는 절충장군 휘 시석(時碩)이다. 부사맹(副司猛)을 지내고 1705년 무과 증광시에 급제하고, 1714년 목포만호(木浦萬戶), 1724년 부사과(副司果), 1724년 어유간첨절제사(魚游澗僉節制使)를 하고, 1728년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733년 허사첨절제사(許沙僉節制使)를 했다. 목포만호 시절인 1715년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여, 그 은덕을 기리기위해 백성들이 건립한 비석을 일제강점기 청사 뒤뜰에 묻어버린 것을, 후에 시민들이 발견해 목포진 청사 복원후 다시 세웠다.
방세중(方世重, 1686 ~ 1740) : 서울 출신이다. 자(字) 대이(大而). 생부는 휘 진기(震紀) 양부는 연일(延日) 현감과 토산(兔山) 현감을 지낸 휘 진설(震說,진열)이다. 1712년 무과에 급제하고, 1728년 금위군(禁衛軍)으로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738년 지도만호(智島萬戶)가 되었다.
방처유(方處裕, 1686 ~ 1740) : 서울 출신이다. 자(字) 성화(聖化). 아버지는 통정대부 휘 진익(震翊)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판관(判官)과 사과(司果)를 지냈고, 1728년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같은해 위라만호(位羅萬戶) 1738년 선적첨절제사(善積僉節制使)가 되었다.
방성규(方聖規, 1687 ~ ? ) :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출신. 아버지는 가선대부 휘 내길(乃吉)이다, 방만규(方萬規, 1690년생)의 동생이다. 자(字) 여상(汝常). 경종조 172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교서관(校書館) 정(正) 교서관(校書館) 박사(博士)를 지냈다.
방최일(方最一, 1691 ~ ? ) : 충청남도 온양 출신이다. 아버지는 증 군자감정(軍資監正) 휘 인길(仁吉)이다. 1716년 3월 숙종(肅宗)이 온양 온천 체류시 온양 배방산(排方山)의 명칭을 현재 배방산(拜芳山)으로 고쳤다 함. 1728년 사과(司果)로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3등공신에 녹훈되었다.
방유곤(方有坤, 1693 ~ ? ) : 서울 출신이다. 자(字) 유경(維卿). 아버지는 어모장군 휘 우구(禹矩)이다. 1725년 직부로 무과 증광시에 급제하고, 1728년 동생 방수곤(方守坤)과 함께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방수곤(方守坤)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휘 우구(禹矩)이다. 방유곤(方有坤)의 막내 동생이다. 1728년 큰형 방유곤(方有坤)과 함께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768년 절충장군으로 늦은 나이에 무과에 등과함으로 먼저 무과에 등과했던 형 유곤(有坤) 재곤(載坤)과 함께 3형제 모두가 무과에 등과 했다.
방태여(方泰與, 1705 ~ 1778) : 서울 출신이다. 자(字) 성득(聖得). 아버지는 증 판중추부사 휘 세겸(世謙)이다. 1728년 부봉사(副奉事)로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조부 휘 진기(震夔)와 아버지 휘 세겸(世謙) 3대가 함께 양무원종1등공신(揚武原從一等功臣, 奮武原從一等功臣)이 된다. 174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757년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 1768년 통진부사(通津府使)를 했으며, 수의(首醫)와 숭록대부를 지냈다.
방홍적(方弘迪, 1708 ~ ? ) : 서울 출신이다. 자(字) 도경(道卿). 아버지는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휘 필규(必規)이다. 1728년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방두방(方斗芳, 1709 ~ ? ) : 자(字) 춘우(春遇), 업무(業武) 흥적(興積)의 아들이다. 영조(英祖) 4년 서기1728년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양무원종3등공신(揚武原從三等功臣)이 되었으며, 영조 16년 서기 1740년 증광시(增廣試) 무과 갑과 장원(壯元)을 하였다. 그해 장원급제후인 11월 호위군관(扈衛軍官)을 거쳐 예빈시(禮賓寺) 별제(別提)가 되었으며, 영조 27년 서기 1751년 9월 9일 광양(廣梁)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방태삼(方泰三, 1717 ~ ) : 경상북도 포항 연일(延日) 출신. 아버지 휘 석호(碩豪,1694년생)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절충장군, 증 통정대부, 행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1774년 갑오년 동생 광삼(光三)과 같이 예조에서 발급해준 영조대왕수교문(英祖大王受敎文)을 받았다.
방광삼(方光三, 1719 ~ ) : 경상북도 포항 연일(延日) 출신. 일명 석삼(碩三). 아버지 휘 석호(碩豪,1694년생)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증 가의대부, 1774년 갑오년 형 태삼(泰三)과 같이 예조에서 발급해준 영조대왕수교문(英祖大王受敎文)을 받았다.
방우곤(方禹坤, 1724 ~ ? ) :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아버지는 휘 진섭(震燮). 자는 성천(聖天). 영조조 1756년 식년 문과 급제. 양현고주부(養賢庫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등을 역임했다.
방태곤(方泰坤, 1726 ~ ? ) :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아버지는 장사랑 휘 채(採). 자는 계천(繼天, 啓天). 영조조 1768년 식년 문과 급제. 가주서(假注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등을 역임했다.
방역(方易, 1729 ~ ? ) :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아버지는 휘 진석(震碩). 자(字)는 성직(聖直). 1792년(정조 16)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겸춘추(兼春秋),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고, 사성(司成)에 이르렀다.
방재악(方在岳, 1739 ~ ? ) : 평안남도 맹산(孟山) 출신. 아버지는 휘 세권(世權)이다. 자(字 )는 자천(子川). 정조조 1785년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 성균관학전(成均館學正)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등을 지냈다.
방종거(方宗擧, 1743 ~ ? ) : 평안남도 순천(順川) 출신. 아버지는 휘 만징(萬澄)이다. 자(字 )는 수백(售伯). 영조조 1768년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어천찰방(魚川察訪) 등을 지냈다.
방효언(方孝彦, 1749 ~ )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사과(司果) 휘 태원(泰元)이다. 자(字)는 미백(美伯). 몽학(蒙學)을 전공하고 훈도(訓導)로 재임시, 1771년 역과(譯科)에 등과한다. 1790년(정조 14)에 몽어유해를 다시 개정 간행한 것이 바로 현존하는 몽어유해(蒙語類解)이다. 이때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첩해몽어(捷解蒙語)도 함께 개간 편찬했다. 이 세가지 책에 대한 서문이 첩해몽어의 몽학삼서중간서(蒙學三書重刊序)이다. 이 책들은 조선 시대 몽고어 학습서인 동시에 과거시험용 도서로 유명하다. 지금으로 치면 외무고시를 볼 때 외국어 수험도서인 셈이다. 묘지가 2000년대 초, 1400년대 중반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온양방씨 교수공파 선영들이 토개공의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 주택단지 조성시 파묘될 시 멸실되었다.
방우정(方禹鼎, 1772 ~ 1820) : 조선 정조 때 무과 급제하고 서정군(西征軍) 좌초관(左哨官)으로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저서로 《서정일기(西征日記)》가 있다. 1816년 구례현감을 지냈으며, 철종 때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방유혁(方有赫, 1778 ~ 1843) : 충남 논산출신. 효행이 뛰어났으며, 태종조 개국원종공신으로 영화군(永華君)을 봉작받은 16世 운실(芸實, 초휘 台應, 一云 春應)공의 15대손으로 순조(純祖) 도광 33년(서기 1833년) 태종교서 계하사목(啟下事目)을 충훈부(忠勳府)에서 급사(給寫)받아 공신(功臣)후손임을 입증 받음.
방계영(方啓霙, 1789 ~ 1838) :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조부는 예조좌랑 휘 역(易), 아버지는 휘 치원(致元)이다. 자(字 )는 계령(啓靈, 보명). 순조조 183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좌랑(刑曹佐郎)을 지냈다.
방우서(方禹敘, 1789 ~ ? ) : 서울출신이다. 초명 우구(禹龜). 생부는 증 참의(參議) 휘 효직(孝直), 양부는 증 판서(判書) 휘 효의(孝懿)이다. 자(字) 낙서(洛瑞). 숭록대부(崇祿大夫) 통진부사(通津府使)를 지냈다. 1851년 사역원에서 동문고략(同文考略)을 대제학 조두순(趙斗淳)을 도와 간행시 당상(堂上) 교정역관(校正譯官)으로 참여했다.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 J. Oppert)가 강화 앞바다 침입시, 문정관(問情官)으로 파견되 엠퍼러(the Emperor)호에 승선 오페르트와 담판후 물러나게 함.
방우도(方禹度, 1790 ~ 1858) : 자(字)는 신백(身伯). 호는 우산(友山)이다. 건장한 체구였지만, 섬세한 예능적 기질이 있어 당대 산수화(山水畵)의 대가(大家)였다.
방희용(方羲鏞, 1805년 ~ ? ) : 자(字) 성중(聖仲).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제자였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여 이상적(李尙迪)은 그의 「임수독서도(臨水讀書圖)」를 보고 예찬(倪瓚)과 심주(沈周)의 옛 법이 배어 있다고 하였으며, 김석준(金奭準)은 그의 묘법(妙法)이 동원(蕫源)과 거연(巨然)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유작으로 「묵매도(墨梅圖)」 등이 전한다.
방기원(方夔源, ? ~ ? ) : 1867년 오위장(五衛將)을 했으며, 훈련원(訓鍊院)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했으며, 1880년 초명 방기원(方起圓)에서 개명하고 경상중군(慶尙中軍) 부호군(副護軍), 1881년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侯)를 했다.
방득원(方得圓, ? ~ ? ) : 1855년 만경현령(萬頃縣令) 1857년 양덕현감(陽德縣監)을 했다.
방종한(方宗翰, 1817 ~ 1867) :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아버지는 휘 계황(啓璜)이다. 자(字 )는 국균(國均). 철종조 185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경양찰방(景陽察訪) 예조좌랑( 禮曹佐郎)을 지냈다.
방익용(方益鏞, 1818 ~ 1866) : 자(字) 경초(景韶).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866년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무단(無斷)으로 대동강 상류로 침투하여 전투발발시 평양군영 소속으로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과 함께 선상에 올라 문정중(問情中) 상선 소유주 프레스턴과 선장 페이지 선교사 토마스등이 감금하려하자, 물에 뛰어들어 전몰(戰歿)했다.
방효임(方孝任, ? ~ ? ) : 1867년 운봉현감(雲峰縣監)을 했다.
방효함(方孝涵, 1822 ~ 1885) :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이다. 아버지 증 가선대부 휘 진국(鎭國)의 삼남(三男)이다. 1884년 방두형(方斗衡)으로 개명. 1858년 훈련주부 훈련판관 어영청초관 남양감목관을 거쳐 1864년 오위장 및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됨. 1867년에 운봉현감(雲峰縣監) 보령현감(保寧縣監)을 거쳐 1869년에 구례현감(求禮縣監) 1873년에 경상중군(慶尙中軍) 1874년 오위장(五衛將)이 되었으며, 1875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및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884년에 호군(護軍)이 되었다.
방만춘(方萬春, 1825 ~ ? ) : 충남 서산(瑞山) 해미(海美) 출신. 조선 철종(哲宗)조 판소리 명창.
방달주(方達周, 1826 ~ 1890) : 충남 논산출신. 선략장군(宣略將軍)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논산의 향토유적 제1호인 국궁 수련장 덕유정(德遊亭)의 제9대 사백(師伯)으로 1926년 덕유정 편액과 사계좌목(射契座目)을 썼다.
방건용(方建鏞, 1826 ~ ? ) : 자(字) 순오(順五). 호는 초동(初銅). 아버지는 사과(司果) 휘 우구(禹九)이다. 서예가(書藝家)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다. 1848년 역과에 장원을 하고, 사역원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봉래공 한익(漢翼)과 같이 아회도(雅會圖)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방윤명(方允明, 1827 ~ 1880) : 자(字)는 노천(老泉), 호는 운남(芸南) 혹은 노천(老泉)이다. 생부는 무과 맹산현감(孟山縣監)을 지냈던 휘 우성(禹聲)이며 양부는 산수화의 대가 휘 우도(禹度)이다. 무과에 등과하고, 1867년 수문장(守門將)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충장위장(忠壯衛將)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고 품계는 당상관(堂上官)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다. 1872년에는 오위장(五衛將)을 하고, 1873년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 1875년 기사장(騎士將)을 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 당대의 뛰어난 서예가(書藝家)로 글씨는 완당 김정희의 예서체를 따랐고 그림은 특히 매화와 난초를 즐겨 그렸다. 7살 위인 석파(石破)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에 난초를 그려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노천(老泉)이 대신 그려주었다고 한다. 노천공과 석파 이하응(李昰應)과는 그 필체와 화법이 서로 닮아서 세상사람들이 능히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집권을 하기 전 1851년 대원군이 직접 작성한 묵란첩(墨蘭帖)을 제작해 추사 문하(門下) 후배 노천에게 주며 첩의 마지막장에 ‘노천에게 소장하라고 준다’라는 뜻의 지증노천장(指贈老泉藏)이라고 기록하였다.
방한익(方漢翼, 1833 ~ ? ) : 양주(楊州) 출신이다. 자(字) 봉래(鳳來) 혹은 지수(芝叟), 호는 지산(芝山)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동추(同樞)공 휘 희용(羲鏞)이다. 추사의 제자로 서예가이다. 사역원 첨정(僉正)을 지냈다. 1856년 김흥근(金興根)과 조두순(趙斗淳)등이 결성한 우계(友契) “二十一客之契” 글씨를 예서체(隸書體)로 쓰기도 했다.
방한철(方漢喆, 1834 ~ 1887) : 양주(楊州) 출신이다. 자(字)는 중길(重吉), 아버지는 휘 윤중(允中) 조부는 무과출신 우교(禹敎)이다. 1860년 가인의(假引儀)를 거쳐, 1865년 부사과(副司果) 1871년 인의(引儀) 및 동부령(東部令) 1873년 부여현감(夫餘縣監)을 했다.
방천용(方天鏞, 1835 ~ 1893) : 자(字)는 인여(仁汝) 또는 인여(因汝) 호는 하상당(霞裳堂).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우부(禹敷)이며 어머니는 신평(新坪) 한씨이다. 188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882년 통진부사(通津府使) 및 대호군(大護軍)으로 품계가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 1884년 안산군수, 1888년 진위현령, 1890년 시흥현령, 1892년 영평군수, 1896년 과천현감을 했다. 산수화(山水畵)와 절지화(折枝畫)를 잘 그렸다.
방효린(方孝隣, 1843 ~ ? ) :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아버지는 휘 찬주(贊周)이다. 자(字 )는 사흠(四欽). 고종조 1865년 식년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禮曹佐郎) 병조좌랑(兵曹佐郎) 지평( 持平) 부호군(副護軍)등을 지냈다. 증 참의(參議).
방하진(方夏鎭, 1845 ~ 1918) :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 아버지는 예조좌랑 휘 종한(宗翰)이다. 자(字)는 내화(乃華), 호(號)는 하정(荷亭)이다. 고종조 187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1884년)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1884년) 경양찰방(景陽察訪) 전적(典籍,1888년) 지평(持平,1889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1889년)등을 역임했다.
방한덕(方漢德, 1846 ~ 1913) : 자(字)는 성함(聖咸), 초명은 한급(漢汲)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 휘 윤행(允行)이 생부로 이인찰방(利仁察訪)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휘 대용(大鏞)의 양자(養子)로 들어간다. 구 한말(韓末)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와 방한칠(方漢七) 방흥주(方興周)등과 함께 자주적 입헌군주공화제(立憲君主共和制)를 주창했으며, 사학(私學)진흥과 근대미술계에 공헌을 하였다. 1897년 정3품 품계와 중추원이등의관(中樞院二等議官), 1898년 농상공부(農商工部) 광산국장(鑛山局長) 및 종2품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 발기당시 임시서리(臨時署理) 부회장으로 회의를 주도하고, 의원(議員)으로 활약하였으나, 구 보수세력이 조직한 황국협회(皇國協會)의 의도적 방해로 구속까지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회원들과 민중들의 봉기로 이내 석방 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간부로 이승만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등과 같이 계속 개혁 정치활동을 하였다. 1899년 5월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주(義州) 군수로 재등용되었고, 동년 7월에는 어명을 받고 암행사(暗行使)로 민심을 파악하여 황제에게 보고 하기도 하였다. 1902년에 평안남북도 수수원검쇄관(水輸院檢刷官)을 거쳐, 1906년 종2품으로 승품(陞品)됨과 동시에 남양군수(南陽郡守)가 되었다. 남양군수 재직시 수원지역 삼일학교와 화성학원등 사학(私學) 재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한말(韓末)의 붕괴되어가던 사학진흥에도 힘썼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퇴위 당할 때 남양군수(南陽郡守)를 사임한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압으로 해산된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후신인 대한협회(大韓協會) 발족에 참가하고 발기 의원(議員)까지 되었으나, 이 마저도 1910년 경술국치후 또 다시 일제에 의해 해체를 당했다. 1911년 3월 한성 두석동(豆錫洞)에 국내 최초의 근대미술원인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을 윤기영(尹永基)과 함께 창설하여 우리나라 미술계 발전에 기여하였다.
방정빈(方正彬) : 의병부대인 제천의진(堤川義陣)에 소속되어 포군(砲軍)으로 활동한 독립유공자 방학연(方學連) 방인철(方仁喆)의 지휘자인 의병장 류인석(柳麟錫)과 같이 외국에서 장기전화하는 독립투쟁을 대비하기 위해 1908년 7월 원산(元山)항을 떠나 러시아령인 연해주로 간다.
방순기(方巡己, 1850 ~ 1868) : 충청남도 면천(沔川) 농바위 출신. 천주교도. 젊은 나이에 교수형을 당함으로 순교하였다.
방사일(方仕日, 1852 ~ 1920) : 이명(異名) 임일(任日) 사일(仕一) 화일(化日) 파일(化一). 평북 용천(龍川)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대표적인 한인자치기구 한족회(韓族會)의 지방 구의원(區議員) 및 암살대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0년 11월 4일 간도에 침입하여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킨 일본군에게 동년 동월 28일 피살 순국함. 1995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방한칠(方漢七, 1856 ~ 1928) : 자(字) 두경(斗卿) 가의대부(嘉義大夫) 내장원(內藏院) 경(卿)을 지냈다. 1899년 덕수궁(德壽宮)의 민비(閔妃)의 혼전(魂殿)의 제조(提調)를 맡기도 했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와 같이 입헌군주공화제(立憲君主共和制)를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1904년 모든직을 은둔(隱遁)하자, 고종황제가 자급을 올려주고 회유했으나 듣지 않았다. 1890년 8월 평창(平昌)군수에서 영평(永平:현 포천) 군수로 이임시, 평창군민들이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을 잡는등 재임시 선정(善政)으로 현(現)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내창마을내 느티나무 고목 아래에 불망비(不忘碑)를 세웠다 한다.
방이준(方理準, ? ~ 1894) : 전라도 지역 동학혁명(東學革命) 지도자. 1894년 11월 전라 병사(全羅兵使)에게 잡히여 죽임을 당했다.
방흥주(方興周, 186? ~ 191?) : 1895년 조선군(朝鮮軍) 순영사(巡營使), 1898년 육군부위(陸軍副尉)가 되었고 다음해,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905년 육군 정위(正尉), 1906년 잠시 휴직하고, 평양(平壤)에서 이봉주(李鳳柱), 김의강(金義康)등과 같이 민회(民會)를 조직하여 교육확장 주장하였다. 경주(慶州) 이씨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동생 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애국계몽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 가입하고,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이후 친일파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에 의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군을 참령(參領)으로 면직당한다. 서북학회(西北學會)에서도 애국계몽활동을 계속하였고, 1908년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주장한 방한덕(方漢德)이 발족했던 대한협회(大韓協會) 평양지회(平壤支會) 부회장(副會長)과 총무로도 활동하였던 민족적 독립운동가임. 평안남도 평양부에 사셨으며, 외손자가 대한민국 최초 4성장군 백선엽(白善燁)이다.
방치경(方致京, 1860 ~ ? ) : 전라북도 금산군 군내면 출신. 조석우(趙錫祐)등 11명과 함께 충북 영동(永同)에 모여 조선독립(朝鮮獨立)을 위한 폭력적 투쟁을 결의하고, 격문을 붙이는등 주민들을 선동함으로 내란죄(內亂罪)로 기소되어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재판받고 유형(流刑) 2년을 받았다. 2009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진관(方進寬, 1860 ~ ? ) : 본명 방응교(方應敎). 방만춘(方萬春)의 손자이다. 퉁소(洞簫) 연주가. 퉁소명인.
방기전(方基典, 1861년 ~ 1920년) : 보명(譜名) 기전(器典) 일명 기전(基甸). 아버지는 휘 덕철(德喆)이고 배우자는 연안(延安) 차씨이다. 독립운동가로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온양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육성에 공헌했다. 1911년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 등에서 동포의 생활안정과 항일독립정신 함양에 기여하였다. 1920년 서간도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총관(韓族會總管)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피살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방규석(方圭錫, 1862 ~ 1944) : 충청남도 논산 출신. (字) 일감(一鑑). 통정대부. 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휘 달주(達周)이다. 1885년 무과를 급제했으며, 논산군 강경면장(江景面長)과 성동면장(城東面長)을 했다. 1921년 성동면장 재직시 면민일동 이름으로 공렴비(公廉碑,청백리비)가 세워졌다. 총독부의 가시가 되어 1926년 1월 논산군수 후지이(藤井熊之助)에 의해 사직 권고까지 받았으나, 당시 면민들은 사직의 부당성을 격렬히 항의하며 면민대회를 개최하여 유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하였다. 장남 방한승(方漢昇)은 동아일보 창립 기자를 거쳐 매일신문, 경성일보 기자를 했으며, 차남 한민(漢旻,1900년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이며, 삼남 방한호(方漢昊)도 중외일보, 매일신보 기자를 했다.
방문식(方文植, 1864 ~ ? ) :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 출신 여성. 1921년 1월 27일 만주지역내 순천출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인향촌회(婦人鄕村會) 회원들이 검거되었다.
방사익(方士益, 1865 ~ ? ) : 경북 안동출신으로 만주 관전현(寬甸縣) 유하현(柳河縣)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2010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방시용(方時容, 1865 ~ 1907) :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이다. 초명 방시영(方時榮)이며 아버지는 증 가선대부 휘 수영(秀英)이다. 1881년 훈련원(訓鍊院) 능마아랑청(能麽兒郞廳), 1882년 부사용(副司勇), 1886년 전옥주부(典獄主簿), 1887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主事), 1887년 시흥현감(始興縣監), 1897년 통정대부(通政大夫) 1900년 정3품 통신사(通信司) 전화과기사(電話課技師), 1904년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 1905년 가선대부, 1906년 시종원(侍從院) 부경(副卿)이 되고, 방시용(方時容)으로 개명하였다. 1907년 사망시 재산이 5千石지기였다.
방영주(方英柱, 1867 ~ 1932) : 평안남도 맹산군(孟山郡) 동면(東面) 신중리(新中里) 출신 .이은거사(利隱居士). 아버지는 휘 도순(道淳,1838년생)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1920년 조직된 비밀결사 대한독립광복군(大韓獨立光復軍) 산하 맹산지방 청년단(靑年團) 단장 방기원(方基元,1874년생)이 이끄는 청년단 단원(團員)으로 가입 활동을 하였다. 대한독립진명단(大韓獨立盡命團)사건 관련으로 투옥도 되었다.
방병섭(方丙燮, 1869 ~ ) : 함경북도 종성(鍾城) 출신. 1912년 만주 훈춘 북쪽에 있었던 민족학교 신풍(新豊)학교가 화재가 발생해 폐교위기시, 서 성금을 희사하여 폐교의 위기를 넘겼다. 1914년에는 신풍학교 교감직을 수행했고, 당시 종인(宗人) 방재헌은 교사로 재직 하였다. 학생들에게 계속 배일(排日)교육을 하자, 일제(日帝)는 계속 감시하였다.
방춘식(方春植) : 1895년 이천(利川)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으로 휘하 포병 일백여명을 이끌고 김하락(金河洛) 등과 같이 한말 의병대인 利川首倡義所를 창설하여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방기후(方基厚, 1870 ~ ? ) :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 출신. 아버지 휘 선옥(善玉,1840년생)과 모친 경주(慶州) 김씨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천지역 3· 1독립투쟁은 3월 2일 은산부터 시작되었는바, 천도교인과 시민이 합세한 1천여 명 군중이 만세를 부른 후 해산했다. 일경(日警)에 의해 검거되어 징역 형을 살았다.
방기창(方基昌) : 평안남도 맹산군(孟山郡) 상리(上里) 출신. 1919년 3월 5일 맹산지역 독립만세운동 초기 천도교 순회교사(巡廻敎師) 효준(孝俊,1881년생,父 利弼), 이 지역 천도교 교구장(敎區長)을 역임한 방은준(方殷俊, 父 元弼), 순회교사 방환기(方煥驥, 일명 炳驥, 1892년생, 父 寅柱), 청년회장(靑年會長) 문병로(文炳魯), 방진원(方鎭垣)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 가두로 진출하여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했다.
방인철(方仁喆) : 1896년 7월 유인석(柳麟錫) 의병장 휘하 제천의진(堤川義陣) 포군(砲軍)으로 활동하다가 만주 서북지역으로 근거지를 이동할 목적으로 강계부(江界府)에 이르렀을 때 체포됨. 2000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관일(方觀一) : 이명(異名) 관일(寬一). 1907년 12월 의병장으로서 이인영(李麟榮), 정대일(鄭大一) 의병장과 함께 7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함.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필성(方必成) : 충북 청풍(淸風) 출신이다. 1907년 8월 평양진위대 해산 후 청풍으로 내려온 박여성(朴汝成) 조동교(趙東敎) 황대성(黃大成)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제천 영월 인제등지에서 의병 항쟁을 하였다.
방덕영(方德榮) : 1907년 전후, 광주(廣州) 춘전(春川) 홍천(洪川) 화천(華川)등 전국을 돌며, 의병장 권득수(權得壽)의 지휘하에 군자금(화약대금)을 모집하는등 의병활동을 했다.
방학연(方學連) : 1896년 7월 유인석(柳麟錫) 의병장 휘하 포군(砲軍)으로 활동하다가 만주 서북지역으로 근거지를 이동할 목적으로 강계부(江界府)에 이르렀을 때 체포됨. 2000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제천의진(堤川義陣)
방인수(方仁守, 1871 ~ 1920년) : 일명 인수(仁洙). 1920.10.22. 만주(滿洲) 혼춘현(琿春縣)에서 대한독립단(大漢獨立團)의 일원으로 양식의 공급 및 가옥건설에 종사하면서 첩보활동을 하다가 일군에 피체(被逮)되어 혼춘현 십리평(十里坪)에서 총살 순국함.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사필(方士必, 1873 ~ ? ) : 강원도 정선 사람으로, 1907年 6-8月 김중덕(金仲德) 의병진(義兵陣)에 소속되어 강원도 정선(旌善) 등지에서 군수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1908년 4월에는 박기성(朴基成) 의병진(義兵陣)에 소속되어 강원도 정선에서 일군(日軍)과 교전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유형(流刑) 3年 받았다.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인관(方仁寬) : 이명(異名) 인관(仁觀). 평북 운산군(雲山郡) 출신이다. 원주에서 거의(擧義)한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이 전국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어 1907년 11월 양주에 집결, 연합의 진을 결성할 것을 촉구하자 그는 격문미달지역인 평안도에서 활동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의에 호응, 80여 명의 휘하 의병을 이끌고 남하, 이인영 의병부대에 동참하였다. 이인영의 휘하 좌군장(左軍將)으로 활동하였으며, 13도 창의군(倡義軍)이 결성되자 관서(關西) 창의대장이 되어 평안도 의병(義兵)을 대표하여 이 연합의진에 동참하였다. 1909년경에는 충청도지역 충주 노은면과 원주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음죽·여주 일대에서도 의병항전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방치성(方致成, 1874 ~ 1919년) : 보명(譜名) 치석(致錫). 별명 성규(聖圭). 아버지 휘 효원(孝元)과 수원(水原) 백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를 역임했으며, 1919년 3월 1일 3.1 만세운동 당시인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장터에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운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고 시위할 때 일군(日軍)들의 야만적 기총난사로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1991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방기원(方基元, 1874 ~ ? ) : 평안남도 맹산군 수정리 출신. 1921년 3월 평남 맹산군에서 이수문(李守文)의 권유로 대한독립광복군 사령부(사령장 趙孟善) 예하의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독립청년단(大韓靑年獨立靑年團)에 가입해 단장(團長)으로 아들 방승현(方承鉉)과 함께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미결구류 90일)을 받았다. 2014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경진(方敬鎭, 1875 ~ 1950)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면 성외동(城外洞) 사람이다. 아버지 휘 종민(宗珉)과 어머니 연일(延日) 승(承)씨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광한단(光韓團)의 독립군 군자금(軍資金) 모금사건에 연루되어 검거 투옥되었다.
방병기(方炳起) : 일제 강점기 만주 간도지방 의병장.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민족의 자주권확립과 독립운동 목적으로 회장이 이수길(李秀吉)이었던 연근회(演勤會,演議會)라는 단체를 간도 연길에서 발의하였며, 겉으로는 교육 보급을 표방하며 중국인들과 연대하여 반일운동 및 친일인사 배척운동을 전개하였고 독립군 대장 이범윤(李範允)등과도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연근회는 회원이 약 1,000명 이상이 되었다. 종인(宗人) 방동규(方東奎,1875년생, 父 基云)와 같이 연근회의 의원(議員)으로 지도부를 이끌었다.
방동규(方東奎, 1875 ~ 1939) : 함경북도 종성(鍾城) 출신으로, 중국 연길(延吉)에 거주했다. 아버지는 기운(基云,1849년생, 묘 중국 연길) 어머니는 김해 김씨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민족의 자주권확립과 독립운동 목적으로 연근회(演勤會)라는 단체를 만들어 방병기(方炳起)와 같이 연근회의 의원(議員)으로 지도부를 이끌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했다.
방우룡(方雨龍, 1876 ~ ? ) : 천주교 신자이다. 1919년 8월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을 강구만(姜九萬)으로한 독립운동 단체인 재간도대한민회(在間島大韓民會)를 발기하고, 유예균(劉禮均) 조권식(曹權植) 장석함(張錫咸) 김준근(金準根)과 같이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4,5월경 만주 길림성 왕청현(王淸縣)에서 천주교신자를 중심으로한 대원 300여명으로 무장독립운동 단체 대한민국 의민단(義民團)을 조직하고, 스스로 단장(團長)이 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7월경 구춘선(具春先)이 회장으로 있는 국민회가 군사부산하 무관학교 설립시 그 위치를 명월구(明月溝)에 있는 자신의 집터로 확정하였으며, 자택 근처 천주교성당을 강당으로 활용도록 하였다. 1920년 10월 29일 자신이 이끌었던 대한의민회(大韓義民會)를 포함 대한신민단(新民團) 대한광복단(光復團) 대한국민회(國民會) 등 무장독립단체들이 병합하여 임시정부의 직접 지휘감독을 받는 간도북부 남부총판부와 북부총판부가 조직될 때, 연길 화룡 돈화 액목 등지를 관할하는 남부총판부 총판(總辦)은 구춘선(具春先)이 맡고, 부총판직을 직접 맡아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나이 45세인 1920년 11월 13일 가택(家宅)을 일군(日軍)들이 모두 불태워버려, 유랑을 계속하다 일본군들의 추격으로, 1922년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영토인 자유시(自由市)로 피난을 했으나 독립군내부 분열과 러시아군 공격을 받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을 겪고 이끌던 독립군이 해산되었다.
방사담(方士膽, 1876 ~ ? ) : 함북 부령군(富寧郡) 출신이다. 의사(醫師)였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현장인 할빈역에 하얼빈 한인회(韓人會)회장 김성백(金成伯)과 김성옥 김형재 탁공규등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로 10월 30일 체포되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16년 민족교육을 하던 만주 할빈에 있는 동흥학교(東興學校) 교장을 역임했다. 러시아 여성과 결혼했다.
방한암(方漢巖, 1876~1951) : 속명은 중원(重遠) 법명이 한암(漢巖)이다. 아버지는 휘 기순(箕淳)이고 어머니는 선산(善山) 길(吉)씨다. 1941년 조계종이 출범하자 초대종정(初代宗正)으로 추대되어 4년간 조계종 종단을 이끌었다. 1.4후퇴로 국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상원사를 불태우려 하자 법당에 앉은 채 그대로 불을 지를 것을 권하였다. 이에 감명 받은 국군은 문짝만 떼내어 불태운 뒤 절을 떠났다. 그래서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는 소실되었으나 상원사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의 부도(浮屠)와 비는 상원사 바로 밑에 있고 비문은 그의 문인으로 유불선(儒彿禪) 삼교에 통하는 동양학의 석학(碩學) 탄허선사(呑虛禪師)가 짓고 손수 써서 세웠다.
방돌이(方乭伊, 1879 ~ ? ) : 경상북도 진보군 하리면 의병으로 활동중, 피체되어 경상남북도 판결 융희 3년(1909년) 형상 제147호건으로 유죄판결.
방원길(方圓吉, 1879 ~ ? ) : 평안남도 대동면(大同郡) 대보면(大寶面) 출신 의생(醫生)이다. 1919년 3월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고하여 보안법위반 및 소요죄(騷擾罪)로 기소되어 1919년 9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징역 2년 6개월로 형이 확정되었다.
방주혁(方周赫, 1879 ~ 1969) : 보명(譜名)은 운호(雲浩). 호(號) 송운(松雲). 자(字)는 숙명(淑明). 의생면허 5번 한의사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웅천(熊川) 가문 출신으로 부친 휘 선곤(善坤)과 어머니 금녕(金寧) 김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흥친왕(興親王) 이희(李熹)의 시의(侍醫).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 선생의 요청으로 천도교와 시천교 통합에 노력을 하였고,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5년경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 고문을 지내는등 의가(醫家) 정치인이자 애국투사였다. 한의과대학의 설립과 한의사 제도 창립에 노력을 기우려 마침내 성사 시켰다. 한국동란후에는 서울 화동 경기중학 옆에 자도(慈渡,慈道)한의원을 운영했다. 대한한의사협회 고문과 1960년 온양방씨 대동보 발간시 고문역을 맡기도 했다.
방도순(方道順) : 1919년 10월 현재 만주 안도현의 한족회(韓族會)회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였음.
방덕형(方德亨) : 1909년 1월 상순 무산(茂山) 삼수 부근에서 거의하기 위해 약 5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간도로부터 무산으로 침입하여 일군헌병과 격전을 벌였고 기타 지방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방도현(方道賢) : 평안북도 정주(定州) 고읍면 출신. 만주 화룡현 제하사(霽霞社) 온둔(五屯)촌에 1915년 1월 개설한 기풍재(岐豊齋)라는 민족교육 학교에서 조선의 역사와 천자문등을 가르쳤으며, 1930년 3월에는 평북 정주군 고읍면의 관해(觀海) 학원설립시 성금.
방유영(方有榮, 1880 ~ 1932) : 자(字) 대중(大仲). 1900년 5년제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 2기로 졸업한 해 4월 고종황제 명(命)으로 대한제국의 최초 영국런던주재명예총영사(駐箚英國倫敦名譽總領事) 영국 하원의원 모건(摩賡,William Pritchard Morgan 1884-1924)과 함께 영국으로 출국. 영사관(領事館)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며 옥스퍼드(Oxford) 대학을 다니는 등 서양문물(西洋文物) 습득에 노력함. 1901년에는 빅토리아 영국여왕이 서거하자 조문사절단 이범진(李範晋) 일행과 함께 조문하였다. 다음해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명으로 국내로 다시 들어와 인천해관(仁川海關)의 탁지부(度支部) 관리로 근무하다가 ‘이범진’열사 사망후, 일본회사에 광업권이 넘어가기 이전인 1913년부터 1915년말까지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동창면(東倉面) 대유동(大楡洞) 소재 프랑스인 살타렐(薩泰來 : Saltarel, P.M.)이 경영하던 금광(金鑛)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 고종의 특명으로 금광의 수입금 일부를 각처의 독립자금을 보냈다고 하나, 현재까지 그 사실을 고증 하지 못함. 1905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 스승이자 영국영사관 근무 이한응(李漢應) 열사(烈士)가 일제에게 국권이 잠식(蠶食)당함에 분개하여 자살하고, 1911년에는 이범진 열사가 자살하며, 1919년 1월에는 고종 마저 서거(逝去)하자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1932년 자녀들에게 "나라 뺏긴 백성이 죽어서 황제폐하(皇帝陛下)를 어찌 보겠느냐?"하며 "산소를 쓰지말고 화장하라"고 했다.
방서일(方瑞一, 1880 ~ 1920) : 일명 서일(瑞日).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20년 11월 3일 만주(滿洲) 훈춘현(琿春縣)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하구동(河口洞)에서 일군(日軍)에 의해 총살당해 순국(殉國) 함. 1991년 애국장(愛國章)이 추서 됐다.
방주익(方周翼, 1880 ~ ) :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수하면(水下面)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1915년 전성익(全性翊) 박승혁(朴承赫) 안명환(安明煥) 등과 함께 단천에서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자립단(自立團:단천 군비단 경호대)을 조직함. 1916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단원인 전성익(全性翊)등과 함께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1년 6개월 ∼ 6개월 언도 받고 그해 4월 17일 복심법원에서 공소를 제기했으나 기각되었다. 1921년 또다시 단천서에 검거되 함흥지청 검사국에 송치된 사실이 있다.
방준규(方俊奎) :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의군단(義軍團) 중국 간도 화룡현 덕화사 유동(柳洞) 사무소 소장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방명기(方明基, ? ~ 1908) : 평남 맹산군(孟山郡) 인화면(仁化面) 남천(南泉) 출신. 1908년 평남 순천군(順川郡) 밀전면(密田面)에서 김용복(金龍福) 등과 의병활동을 하고 맹산군 인화면 가창(假倉)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동년 5월 29일 순천순사주재소(順川巡査駐在所)와의 전투 중 전사 순국(殉國)함.. 2005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방수연(方壽連) : 이명(異名) 방수연(方守連) 방대연(方大允). 천도교 신도로, 1907년 유길준이 조직한 한성부민회 회원이기도 하셨으며, 1909년에는 간도로 들어가 그해 8월에 간도 용지사 수칠구에 천도교계통의 보흥학교(普興學校)를 설립하고 公께서 교장직을 맡고 교사 김채영과 함께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1년 3월경에는 서일(徐一)이 이끄는 간도 독립군 대한군정서(大韓軍政暑)의 제25분국인 경신분국의 제1과장을 맡고,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다.
방효준(方孝俊, 1881 ~ ? ) : 1919년 3월 5일경 평남 덕천군(德川郡) 덕천읍내(德川邑內_에서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으며, 또다시 1921년 8월 평남 맹산(孟山) 원남면(元南面) 행산리(杏山里) 이관국(李官國)의 집에서 수십여 명 천도교 신도에게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을 전하고 동년 11월 맹산읍내에서 이에 호응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한 혐의로 체포되어 1심에서 징역 2년을 받았으나, 1922년 3월 23일 복심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음. 2011년 애족장에 추서됐다.
방경호(方敬鎬, 1881 ~ ? ) : 독립운동가. 평북 후창(厚昌) 출생.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만주로 망명, 조선혁명군 참사(參士)로 활약하다가 토민병(土民兵)에게 살해되었다.
방기용(方起容, 1881 ~ 1946) : 보명(譜名)은 두용(斗容)이고 자(字) 기용(起容)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龜項面) 내현리(內峴里) 출신이며, ,아버지는 휘 재춘(裁春,1844년생)이다. 부친이 돌아가신후 어렵게 공부를 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시느라 만혼이었다. 처(신평 李씨)의 고향인 홍성군 금마면(金馬面) 부평리(富平里)로 이주해 향리에 은거하시며 학동들을 가르치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후 독립운동의 뜻을 두고, 동지들과 교류를 하던중, 1919년 4월 2일 홍성의 장날을 기해 동지들과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조사받고 태형(笞刑) 90을 받았다.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방임주(方任柱, 1882 ~ ? ) : 일명 임주(壬柱).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면 수정리 출신. 맹산면장(孟山面長). 아버지는 휘 기찬(基讚) 어머니 봉산(鳳山) 이씨이다. 대한청년독립청년단(大韓靑年獨立靑年團) 부단장(副團長)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21년 체포됨.
방덕홍(方德泓, 1884 ~ ? ) :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출신. 1919년 4월 강원도 양양에서 3.1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되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8월을 언도받았다.
방계효(方季孝, 1884 ~ ? ) : 평안남도 순천군 오운면(梧雲面) 운봉리(雲峰里) 출신. 이명(異名) 단효(丹孝) 기호(基浩). 아버지 휘 기혁(基赫,1863년생)과 어머니 평산(平山) 申씨 사이 장남으로 태어남. 통화현(通化縣)에서 독립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소속 통신감독으로 활동하였다. 통신원인 막내동생 관효(寬孝,1899년생)와 함께 군자금모집중 일경에 의해 1922년 8월 12일 피체되었다.
방창희(方昌熙, 1884 ~ ? ) :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삼흥면(三興面) 일청리(一淸里) 출신. 1919년 3월 4일 평남 성천군 성천읍내에서 군민(郡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총상까지 입었다. 보안법위반 및 소요죄로 기소되어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 법정에서 당당히 조선은 4천년 역사를 갖고있는 국가로,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은 사기 내지 강제적으로 행해져 정당성이 없음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조선민족의 의무라 했으나, 징역 6개월이 확정되었다.
방재선(方在先,1884 ~ ? ) :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서원면(書院面) 출신으로, 서당(書堂) 선생이다. 1917년 음력 11월경부터 마을 서당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며 정태봉(鄭泰鳳)외 십수명의 아이들에게 "독립하라,독립하라 우리나라 독립하라,비참하기가 극에 달한 우리제국 대한국"이라는 불온한 가사를 가르쳐 보안법위반으로 기소되어 1918년 7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 받았다.
방인길(方仁吉, 1884 ~ ? ) : 함경북도 부령(富寧)지역 출신으로 함경도 경성(鏡城)지방의 의병장(義兵將, 1908년 당시 23세)이 되었다.
방찬경(方贊京, 1885 ~ ? ) : 평안북도 태천군(泰川郡) 강서면(江西面) 출신이다. 1922년 1월 봉천성 토화현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하셨다.
방경모(方敬模, 1885 ~ 1934) : 평안남도 순천(順川) 출신이다.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이자 독립운동가 휘 기전(基典, 1861년생) 어머니는 연안 차씨이다.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상룡(李相龍)의 지시로 관전현(寬甸縣)에서 행동대원 60명을 인솔하고 평안남도 순천을 근거지로 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동년 11월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총격전 끝에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18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2월 19일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김병희, 박승명, 박연세, 홍택기, 소병권 등과 함께 제18회 졸업 목사가되어 이천(利川) 교회에서 근무했으며, 1928년 황해도 황주(黃州)교회 목사로 피임되고 평양노회 노회장(현 평양남노회)을 역임했다. 당시 황주의 자선사업가 방애인(方愛仁)이 교인이었던 아버지의 구원을 애타게 바랄 때, 함께 기도하기도 하였다. 평양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창근(方昌根, 1885 ~ 1963) : 충남 아산 온양 출신 독립유공자이다. 1920년 서울에서 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결의단(結誼團)을 조직하여 비서장(秘書長)으로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1920년 3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처벌령위반 및 공갈미수로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있다. 2007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성묵(方聖黙, 1885 ~ 1995) : 경기도 개성 학령(鶴嶺) 출신이다. 아버지 휘 교식(敎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 개성군에서 허내삼(許迺三)이 지휘하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고 돌과 곤봉으로 일경(日警)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4년을 받았다. 2005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방효원(方孝元, 1886 ~ 1953) : 조부는 휘 상조(商祚이고 아버지는 만준(萬俊)이다. 호는 요산(樂山). 평안북도 철산 출신.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1898년 아버지를 따라 입교한 후 방씨 가문의 핍박으로 어려서부터 타향살이를 하였다. 1911년 선천 신성중학(信聖中學)을 마치고, 1915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초대 중국선교사로 선임되어 산둥성(山東省)내양(萊陽)에 부임, 남관교회(南關敎會)를 설립하였다. 중화기독교전국총회의 창립요원으로 기여하였으며, 1935년에는 상해 한인교회의 시무를 맡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조선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에 의하여 붙잡혀 옥고를 치루었으며, 다시 상해에서 목회하다가 1945년 귀국하여 선천 남교회를 시무하던 중 공산당의 박해를 받아 월남하였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40여 년 간의 전도생활을 마감하였다.
방정환(方正圜, 1886 ~ ? ) : 함경북도 부령군(富寧郡) 부거면(富居面) 전동리(田洞里)에서 아버지 휘 순악(舜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1904년 돌아가시고,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 되기 시작하자, 일제와 맞설 방법은 무장투쟁이라는 확신을 갖고 중국 간도지방 화룡현 명신사 충신장령(忠信塲嶺)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서당을 운영하여 젊은이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고 한편으로는 의원(醫員)을 하시며 가난한 이웃들을 보살피던중, 화룡현 덕화사 유동(柳洞)에 있는 종인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총재 李範允) 의군단(義軍團) 유동 사무소장 방준규(方俊奎)의 영향으로 의군단원이 되시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 8월 중국 화령현(和龍縣)에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서부지방 총리분국장(總理分局長)으로 의군부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함북 부령군에서 의군부 관련 문서를 배포하고 독립자금을 모집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10月을 받았음. 2016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방경수(方景洙, 1886 ~ ? ) : 평안남도 맹산군(孟山郡) 지덕면(智德面) 덕화리(德化里) 출신. 아버지는 휘 두헌(斗憲) 어머니는 순흥(順興) 김씨이다. 대한청년독립청년단(大韓靑年獨立靑年團)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21년 체포됨.
방제선(方濟善, 1886 ~ ? ) : 아버지 휘 인경(麟慶)이다. 배우자는 해주(海州) 이씨이다. 아들이 없이 딸 둘만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된 대한자강회 후신으로 1907년 발기된 대한협회의 평안북도 철산(鐵山)지회 회계겸 서기를 했다.
團長)으로 아들 방승현(方承鉉)과 함께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미결구류 90일)을 받았다. 2014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일진(方一鎭, 1888 ~ 1921) : 보명(譜名) 일진(壹鎭). 평북 정주(定州) 출신이다. 아버지 휘 종민(宗珉)과 어머니 수원(水原) 백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광한당(光韓團)에 가입하여 군자금모금등 독립운동을 하다, 1920년 12월에 피체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후 1921년 1월(양력) 순국함.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방계성(方繼聖, 1889 ~ 1949) : 일명 계성(啓聖). 평북 철산(鐵山) 출신이다. 아버지 휘 인홍(麟弘)과 어머니 영광(靈光) 김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3년 신천예수학원에 입학였고 가정형편으로 신성학교를 1년 만에 중퇴한 방계성은 철산군청 토지산림측량기사와 철산군 원세평동 동장으로 근무하다 부산으로 이주해 2살 연하 수산업체 사장 딸 경주인 박분옥과 결혼한다. 32세에 평양신학교를 입학했지만 이 또한 가정 사정으로 2년 만에 수료한다. 그리고는 1926년 만 37세에 부산 초량교회 장로에 취임하면서 약관 만 29세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주기철(朱基徹, 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 목사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1931년 경남노회 전도사 시취로 1931년부터 1933년에는 전남노회 소속 추자도 신양교회 담임 목회자를 역임하고 1934년부터 1936년에는 만주 안동현 육도구교회에서 3년간 전임 전도사로 활동하던 방계성 전도사는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의 요청으로 전도사로 부임한다.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 유계준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당회(교회집행부)를 구성한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이자 거점이었다. 일제가 교회를 폐쇄하자 지하교회를 조직하면서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거부 등의 신앙적 저항운동을 전개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확산시킨다. 하지만 산정현교회가 속한 평양노회를 비롯한 종교 권력자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신사를 참배한다. 그리고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핵심 인물인 주기철 목사를 파면하고 산정현교회 폐쇄를 일제와 공모하는 등 철저하게 훼절한다. 결국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는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한다. 주기철 목사와 같이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방계성 전도사는 6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45년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다. 1949년 5월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방계성 목사는 예배당에 인공기를 걸라는 요구와 공산당이 주도한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하다 1949년 12월 27일 공산당에 납치된다. 일제 군국주의와 북한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은 평신도 출신인 방 목사는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1949년 만 60세에 순교한다. 아들 방정원(方正元,1924-1997)과 손자 방인성(1954년생)도 목사이다.
방화용(方花容, 1889 ~ 1964) : 이명 화용(花用). 충남 홍성군 금마면 죽림리 출신이다. 1919年 4月 2日경 忠南 洪城郡 홍성시장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태형(笞刑) 90을 받았다.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방금손(方今孫) : 1919년 3·1운동 당시, 서간도 장백현 12도구(十二道溝)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방열경(方悅卿) : 평안북도 정주 출신. 천도교 신도. 1919년 3월 31일 정주 장날 독립만세 운동을 하였고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방응모(方應謨, 1890 ~ 1950) : 조선일보 사장으로 1933년 장학회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했다.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했다.
방신영(方信榮, 1890 ~ 1977) : 이화여자대학교 가정과 교수
방병찬(方炳贊, 1890 ~ 1926) : 이명(異名) 순찬. 만주지역 참의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1924년 7월 평북 강계군(江界郡) 어뢰면(漁雷面)에 출동하여 일제 관헌 밀정을 처단하였고 1926년에는 참의부원들과 함께 즙안현(輯安縣)에서 추격을 받고 산중에서 교전하다가 순국함.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애율(方哀律, ? ~ 1920) : 이명(異名) 동가(東佳). 1920년 11월 26일 만주 국자가(局子街)에서 국민회(國民會) 지회장(支會長)으로 활동하다가 국자가에서 일군(日軍)에 의해 피살 순국함.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윤격(方允格, ? ~ 1919) : 평남 맹산군 출신. 아버지는 휘 문선(文善)이다. 1919년 3월 10일 평남 맹산군에서 시위주동자(示威主動者)라하여 천도교인(天道敎人) 1명이 주재소(駐在所)에 갇히게 되자 그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주재소로 갔다가 잡히어 피살 순국(殉國) 함. 200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진원(方鎭垣, ? ~ 1919) : 평남 맹산군 출신. 1919년 3월 5일 맹산지역에 조선독립 만세운동이 있었고, 동년 3월 10일 시위주동자(示威主動者)라하여 천도교인(天道敎人) 1명이 주재소(駐在所)에 갇히게 되자 그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주재소로 갔다가 잡히어 방윤격(方允格)등과 함께 피살되 순국함.
방임일(方任日) : 서간도에서 한족의원 및 독립투사였다. 1920년 4월이후 1921년 2월 16일까지 사이 일경에 의해 사살되었다.
방응필(方應弼) :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방형순(方亨淳, 1891년생)과 이기봉(李起峰)등이 주도하여 1919년 3월 16일 해주군 청룡면 영양리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2백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가 체포되어 해주지법에서 징역 1년 3개월을 언도받았다.
방여선(方汝善, 1891 ~ ? ) : 이명 방해선(方海善). 아버지 휘 인경(麟慶)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된 대한자강회 후신으로 1907년 발기된 대한협회(大韓協會) 평안북도 철산(鐵山)지회에 형 제선(濟善)과 함께 회원이 되었고, 1909년경 경기도 마전(麻田) 장단(長湍) 삭녕(朔寧)에서 의병장을 하였다.
방진홍(方進弘, 1891 ~ ? ) : 함경남도 북청 출신.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요원으로 만주 장백현(長白縣)에서 독립운동을 함.
방형순(方亨淳, 1891 ~ 1944) : 황해도 해주 청룡면 출신이다. 1919년 3월 16일 해주군 청룡면 영양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하다 체포되어 보안법위반으로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3월을 언도받고 상고했으나, 그해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됨.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두환(方斗煥, 1892 ~ 1952 ) : 서울 출신이다. 조부는 행 남양군수 휘 한덕(漢德), 아버지는 대한제국 육군 부위(副尉) 휘 세영(世榮)이다. 경성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대 말 대전으로 이거하여, 동아일보 대전지국장, 대전부회의원(大田府會議員)을 역임하였고, 해방후 미군정하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제2·3대 충청남도 대전(부윤)시장을 역임했다.
방찬선(方贊善, ? ~ 1922) : 1922. 12月 의용대 대원으로 군무(軍務)를 띠고 평북 강계군(江界)郡 문옥면(文玉面)에 출동하였다가 귀로에 중국 집안현(輯安縣) 상화보(祥和堡)에서 일경(日警)의 습격을 받아 전사 순국(殉國) 함. 1999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형묵(方亨黙, 1893 ~ ? ) : 아버지 휘 승국(升國)과 어머니 順興 안씨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11일(음 2월 10일) 오전 11시 황해도 신천군 문화읍 동각리 장날을 기하여 앞장서, 대한의 독립을 선언한 다음, 태극기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꾼들이 모두 호응 가담하여 1천여 명의 만세 대열은 시가를 누비며 행진하게 되었다. 보안법위반으로 기소되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 형이 확정되었다. 법정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할 때, 왜 보안법 위반이 되는가 ? - 생략 –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을 허락한 이상 조선민족이 거사에 이름은 당연하것 아니겠는가 ?’ 하며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른 것은 정당하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방원국(方元國, 1893 ~ ? ) : 평남 맹산군 옥천면 잉포리 출신. 아버지는 휘 사항(士恒)이다. 1920년 조직된 비밀결사 대한독립광복군산하 청년단(靑年團) 단원으로 활동했다. 장학성(張學成) 조경복(趙京福) 변치순(邊致淳)등과 함께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펼치는 한편, 단원들과 함께 맹산군 옥천면 선유봉(仙遊峯)의 굴속에서, 항일관련 문서 인쇄, 배포・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체포되어 1925년 11월 18일 신의주지방법원(新義州地方法院)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았다.
방대덕(方大德, 1894 ~ ? ) : 평북 정주군 덕성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7일 정주군민들과 함께 아이포면(阿耳浦面) 면사무소 근처에서 독립만세를 불러 체포되어 보안법위반으로 기소되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징역 6개월 언도를 받았다.
방창덕(方昌德, 1894 ~ ? ) : 평안남도 성천군 삼흥면 일청리 출신. 1919년 3월 4일 평남 성천군 성천읍내에서 군민(郡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보안법위반 및 소요죄로 기소되어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 법정에서 당당히 일한합병에 반대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주창한 것은 천명(天命)이자 민족자결원칙의 세계적 조류이다고 했으나, 징역 6개월이 확정됐다.
방을남(方乙南, 1895 ~ ? ) : 함경남도 북청 이망지리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진경(進庚,1874년생) 어머니는 한양 조(趙)씨이다. 1921년 7월 10일 군비단(軍備團)소속 북청지단(北靑支團) 단원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臨時함경남도교통사무국의 국장으로 군자금모금활동과 대원모집활동을 하였다. 주덕기(朱悳基) 고양봉(高陽鳳) 정태(鄭泰) 한구(韓龜)등과 함께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려다 체포당함. 1921년 10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주덕기와 함께 재판을 받아 징역 1년을 언도 받았다.
방용묵(方用黙, 1895 ~ ? ) :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 구지면(區池面) 향목리(香木里) 출신. 평남 강동군 성천군 순천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모집(獨立運動資金募集)을 하다, 1920년 4월 9일 피체됨.
방열(方烈, 1895 ~ 1934) : 강화 길상면 길직리 출신. 아버지 휘 원표(圓杓) 어머니 제주(濟州) 고씨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읍내 장터에서 1만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강화경찰서 앞에서 구속자 석방요구 시위를 하고 조선독립선언서 및 국민회보라는 문서를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피체되 소요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으로 기소되어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개월에 벌금 20원을 언도 받았다. 1999년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이 추서됐다.
방준호(方準浩, 1895 ~ ? ) : 충청도 거주. 1919년 여름 4월에 남한 일대에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다리를 총에 맞아 경성(京城)의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방원성(方遠成, 1895 ~ 1924) : 이명 원성(遠聲) 달성(達成). 함북 성진(城津) 출신이다. 1919年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고오베신학교’를 중퇴하고 만주로 가,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맹호단(猛虎團)의 참모 등으로 활동 중 피체되어 정치에관한죄 및 협박죄로 기소되 1919년 12월 5일 경성복심법원 징역 8개월 형에 불복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되 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동경 유학생들이 워싱턴의 태평양회의를 기회로 결의문과 선언서를 발표할 때 조선청년독립단의 공동대표로 동참하고 이를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하여 상해로 파송된 후 1922년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개최를 촉구하고, 국민대표회가 개최되자 교육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후보 국민위원으로 당선되었으나 그해 6월 심장병으로 상해에서 병사함.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길(方吉, 1895 ~ 1920) : 1920년 11월 2일 만주 연길현(延吉縣)에서 독립군 조사역원(調査役員)으로 활동하다가 일군에 의해 사살되 순국(殉國)함.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됨.
방준(方俊, ? ~ 1927) : 1927년 11월 13일 만주 화룡현(和龍縣) 연길시외(延吉市外) 연집강(延集岡) 소석구(小石溝)에서 혁신단(革新團) 제1분대장 한익(韓益)과 제2분대장 김강(金江)이 인솔하는 7명과 일본 영사관(領事館) 경찰대(警察隊)와 3시간 30분 동안 교전하다가 탄환이 떨어져 한익(韓益) 등 5명과 함께 전사 순국(殉國) 함.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성도(方聖道, ? ~ 1932) : 독립운동가. 평북 강계(江界) 출생. 만주로 망명,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하고, 1932년 동지 맹성록(孟性祿) ·이진태(李震台) ·함창보(咸昌寶) ·최상선(崔相善) 등과 평북에 잠입해 활동 중 희천(熙川)에서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아, 혈전을 벌인 끝에 순국하였다.
방석범(方錫範) : 중국 북경에 거주했다. 1919년 4월 북경의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지도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동단의 서기로 근무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방승학(方昇鶴, 1896 ~ ? ) :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두성(斗星), 큰형은 운학(雲鶴, 運鶴)이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6월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후 1920년 7월 25일 출소한다.
방세창(方世昌, 1896 ~ ? ) :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문산면(文山面) 출신이다. 1919년 4월 1일 안악군 문산면 원성리에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는바, 1919년 6월 12일, 평양복심법원이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하였으나, 불복하여 상고를 한 최종심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조선의 독립이란 비단 조선인만의 행복이 아니라 아시아 전 민족의 영광인 까닭에 일본 국내에서도 조선독립을 각별히 협조하자는 여론이 많았을 뿐더러 서반구(西半球)의 백인들도 일치하여 이에 찬동하는 것이다. 이에 본인 역시 단군의 후예로서 어찌 조구의 자유회복을 기뻐하지 않으리요 ? 이번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인즉, 공정히 판단하여 처결 있기를 바란다’ 라며 뜻을 굽히지 않자, 상고가 기각되고 원심이 확정되었다.
방성룡(方成龍, 1897 ~ ? ) : 보명(譜名) 성용(成容). 충남 청양군 사양면(斜陽面) 온암리(溫岩里) 출신이다. 아버지 방일현(方馹鉉)과 어머니 제주(濟州) 고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아버지의 미곡상이 도산하자, 가산을 정리하여 길림성(吉林省)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가 독립운동을 했다...
방중선(方中宣, 1897 ~ ? ) : 평안남도 맹산군 갈전면(藒田面) 출신이다. 1921년 6월 20일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원으로 안국정(安國鼎)과 종인 방경수(方景洙)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피체되었다.
방원병(方元炳, 1898 ~ ? ) : 1919년 3월 31일 압록강 토문지역에서 3.1운동에 참여함.
방관효(方寬孝, 1899 ~ ? ) : 평안남도 순천군 오운면(梧雲面) 운봉리(雲峰里) 출신. 이명(異名) 단효(丹孝) 기호(基浩). 아버지 휘 기혁(基赫,1863년생)과 어머니 평산(平山) 申씨 사이 삼남으로 태어남. 통화현(通化縣)에서 독립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소속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통신감독인 큰형 계효(寬孝,1884년생)와 함께 군자금모집중 일경에 의해 1922년 8월 12일 피체되었다.
방금남(方金南, 1899 ~ ? ) :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의 결혼식이 예정되었다. 이 혼례식을 순조롭게 거행되게 함은 조국독립에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독립유공자 서상한(徐相漢)은 결혼식에 참석하는 친일매국노 이완용(李完用) 및 조선 총독 재등(齋藤實)을 처단하고 아울러 경시청 등을 폭파함으로써 우리 동포의 민심을 자극하여 조국 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나 배신자 신(申)모의 밀고로 거사는 무산되고, 1920년 4월 11일 준비단계에서 체포되었다. 서상한의 계획이 미수에 그친 지 2일 후인 4월 13일 일선(日鮮)상회를 경영하며 동지 6인을 포섭하고 일본국무원을 폭파하여 국무회의를 일거에 분쇄하려고 계획하고 폭탄을 운반중 발견되 체포되었다.
방준(方俊, ? ~ 1927) : 1927년 11월 13일 만주 화룡현(和龍縣) 연길시외(延吉市外) 연집강(延集岡) 소석구(小石溝)에서 혁신단(革新團) 제1분대장 한익(韓益)과 제2분대장 김강(金江)이 인솔하는 7명과 일본 영사관(領事館) 경찰대와 3시간 30분 동안 교전하다가 탄환이 떨어져 한익(韓益) 등 5명과 함께 전사 순국(殉國) 함.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성룡(方成龍, 1897 ~ ? ) : 보명(譜名) 성용(成容). 충남 청양군 사양면(斜陽面) 온암리(溫岩里) 출신이다. 아버지 방일현(方馹鉉)과 어머니 제주 고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아버지의 미곡상이 도산하자, 가산을 정리하여 길림성(吉林省)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가 독립운동을 했다...
방중선(方中宣, 1897 ~ ? ) : 평안남도 맹산군 갈전면 출신이다. 1921년 6월 20일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원으로 안국정(安國鼎)과 종인 방경수(方景洙)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피체되었다.
방학주(方學周, 1899 ~ 1974 ) : 순천군(順川郡) 오운면(梧雲面) 운봉리(雲峯里) 출신. 아버지는 휘 병석(炳錫) 어머니는 인동(仁同) 장씨이다. 1919년 국내에서 독립군 군자금모집활동을 하였고, 곧 만주로 넘어가 유하현(柳河縣) 중대구(中大構)의 삼광학교(三光學校) 교사로 재직하며 동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1921년 봄 일본 기병제20연대에 위장귀순해 국내로 잠입해 독립운동을 하다, 과거의 행적이 드러나 1921년 10월 25일경 순천경찰서에 검거되 평양지방법원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방병걸(方炳杰, 1899 ~ 1920) : 보명(譜名) 병걸(炳傑). 평남 순천군(順川郡) 자산면(慈山面) 풍덕리(豐德里)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광모(光謀)이다. 증조부의 묘는 자산면 청룡동(靑龍洞)에 있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 류서지방(柳西地方) 서기로 임명되어 활동하다 1920년 4월 일군(日軍)의 한인대학살 만행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일군(日軍)에 의해 피살돼 순국함.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성도(方聖道, ? ~ 1932) : 독립운동가. 평북 강계(江界) 출생. 만주로 망명,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하고, 1932년 동지 맹성록(孟性祿)·이진태(李震台)·함창보(咸昌寶)·최상선(崔相善) 등과 평북에 잠입해 활동 중 희천(熙川)에서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아, 혈전을 벌인 끝에 순국하였다.
방정환(方定煥, 1899 ~ 1931) :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방무길(方戊吉, 1899 ~ 1936) : 호(號)는 혜연(惠淵). 아버지 휘 효원(孝原)의 차녀이다. 서화가로서 서예와 사군자에 뛰어났다. 남편은 의학박사인 이갑수(李甲洙)이다.
방기만(方基萬, 1899 ~ ? ) :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의용단(大韓民國義勇團) 단원. 1921년 1월 17일 중화군 분단원으로 군자금을 모금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분단원 임두남(林斗南) 최관호(崔觀鎬) 등과 같이 평양에서 검거돼 관할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방인근(方仁根, 1899 ~ 1975 ) :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신. 호는 벽파(碧波)·춘해(春海). 소설가이자 시인.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거쳐 쥬오대학(中央大學) 독문과에서 수학했다. 기독교인으로 1920년대에 전영택(田榮澤) 임영빈(林英彬) 최상현(崔相鉉) 이은상(李殷相) 등과 함께 기독교(基督敎) 문학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1924년에는 당시 문학계에 유행했던 사회주의 색채 조류에 맞서, 사재를 털어 종합문예월간지 《조선문단》을 창간 발행해 민족문학의 순수성을 제창하였다. 1927년 평안북도 영변에 있는 숭덕중학교(崇德中學校) 교감을 맞기도 했다.
방홍주(方弘周) :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소속돼 연통제(聯通制) 평안북도 자성군(慈城郡) 군감(郡監) 선임돼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방문철(方文哲) :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소속돼 임시정부 함경북도 경성지방 조사원으로 임명됐고, 경성지방 유력인사들의 거취를 조사해 임시정부에 보고했다.
방두한(方斗翰) : 경남 사천 출신, 소아과 전문의. 1928년 니가타(新潟) 의대 졸업, 1936년 동대학 의학박사.
방승현(方承鉉, 1900 ~ 1979) :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면 수정리 출신. 이명 방영(方永). 청년단 단장 방기원(方基元)의 아들. 1919년 3월 숭실중학(崇實中學) 2년 재학중 만세시위에 가담하여다가 피체되어 1주 구류를 살고, 1921년 대한청년독립청년단(大韓靑年獨立靑年團)으로 활동하다 체포되 평양형무소(平壤刑務所)에서 3년 복역을 했다.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한민(方漢旻, 1900 ~ 1968) : 충남 논산 출신 독립운동가. 1920년 《조선일보》 창간을 주도했으며, 편집부 및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이후 동아일보에서도 민족정기를 함양하다가 일제의 감시로 해고당한 뒤 일본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을 한다. 1923년 간도에서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했다. 개산툰과 용정간 경편 철도개통식에 참석예정인 조선총독의 주살과 일본은행등에 폭탄을 투척하여 민족봉기의 계기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동지 23명과 함께 일본영사관 경찰에 피체되었다. 1923년 12월 24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취제령 위반등의 주모자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6월 2일 논산 유지 120여 명의 진정(陳情)으로 4년 6개월 만에 가석방됐지만, 출옥한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31년 일제에 체포당했다. 6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인하대학 설립위원으로 참여하였고 경제학교수로 활동하였다. 한국최초로 고구마 재배법을 전수하여 굶주린 주민들의 식생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방한상(方漢相, 1900 ~ 1970) : 자(字) 군보(君輔). 경남 함양(咸陽) 출신. 아버지는 휘 규진(圭鎭) 어머니는 인동(仁同) 장(張)씨이다. 1923년 10월 대구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925년 9월 30일 대구에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비밀결사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고 실천기관으로 파괴단을 결성하여 대구의 도청 경찰서 우편소 법원을 비롯한 일본인 점포를 파괴하는 한편 지사 경찰부장 등 일제 관아 수뇌부들을 처단할 것을 계획한 후 폭탄입수에 힘쓰던 중 피체되어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름. 해방후에는 경상도지역 반민특위(反民特委)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병하(方炳河, 1900 ~ ? ) : 별명 김덕윤(金德允). 평안북도 위원군(渭源郡) 대덕면(大德面) 유포동(杻浦洞) 출신. 참의부(參議府) 참사(參士)가 되어 동지 수 명과 함께 조선에 잠입, 강계군(江界郡)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함.
방유룡(方有龍, 1900 ~ 1984) : 신부. 수도명은 안드레아, 세례명은 레오이다. 호는 무아(無我). 14세에 정동관립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편입하여 1년만에 졸업하고, 2년제 미동공립간이농업학교를 마치고 예수성심신학교(6년제)와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조부는 블랑(Blanc) 7대주교와 뮤텔(Mutel) 8대주교 에게 한문을 가르친 프란치스코 휘 제원(濟遠)이며, 아버지는 관립 영어학교(2년제)를 졸업한 베드로 휘 경희(敬喜 1862년생)이며, 어머니는 손유희(孫柔嬉), 형은 방유린·방유봉이며, 누나는 천주교여자청년연합회회장과 수도여고교장을 역임한 방순경(方順京, 1898년생)이다. 1986년 1월 24일 성북동의 순교 복자 수도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여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방재구(方在矩, 1900 ~ 1925) :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魚上川面) 출신. 아버지는 휘 도형(道炯)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1919년 3월 5일 경성(京城) 고등보통학교 2년 在學 中 서울 남대문 역전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月, 집행유예 3년을 받고 8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여 고문 후유증으로 고향 어상천면 임현리(任縣里)에서 1925년 사망한다.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방훈(方薰, 1900 ~ ? ) : 함북 길주군(吉州郡) 양사면(暘社面) 신풍(新豊) 사람이다. 중국 간 연길현(延吉縣) 상의향(尙義鄕) 청년연합회(靑年聯合會) 집행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검거돼 1928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治安維持法違反)으로 징역2年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후 1930년 7월 31일 석방되었다.
방찬문(方贊汶) : 중국 봉천성(奉天省) 도화현(道化縣)에 살았다. 고려혁명단(高麗革命黨) 당원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3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고려혁명당사건 제판으로 징역 8년을 언도 받았다.
방재룡(方在龍) :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부속 공업전습소 2학년 재학중. 1919년 3월 7일경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3・1학생 만세시위의 주도자인 한위건(韓偉鍵)이 작성한 격문을 서울 관훈동의 동급생 김세룡(金世龍) 방에서 김한위(金漢偉)와 함께 약 800매를 등사하고 이를 배포하여 조사를 받았다. 이 격문의 내용은 민족대표 33인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을 쟁취하자는 취지였다.
방금신(方今信) :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출신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소속돼 연통제(聯通制)의 황해도 신천에서 도감(道監)으로 활약했다.
방원국(方元國, 1901 ~ ? ) : 평남 맹산군(孟山郡) 사람이다. 1925년 평북 선천(宣川) 삼봉(三峰)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의주지방법원에서 3년을 언도받았다.
방시원(方時元, 1901 ~ ? ) : 함남 갑산군(甲山郡) 운흥면(雲興面) 장성리(長城里) 출신. 아버지는휘 기주(基做,1877년생) 어머니는 전주(全州) 이씨다. 公은 대한광복단 갑산분단 제1분단으로 소속으로 독립군 군자금과 단원모집 활동중, 1921년 1월 혜산진경찰서(惠山鎭警察署)에 의해 피체됨.
방치규(方致規, 1902 ~ ? ) : 함남 함흥군(咸興郡) 함흥면(咸興面) 사포리(砂浦里) 사람이다. 함흥청년동맹집행위원장으로 1928년 6월 4일 함흥청년동맹회관에서 제 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함흥 각 학교 맹휴 진상조사보고서’라는 제목으로 문서를 만들어 각 청년동맹과 경성청년동맹 사무소에 각 1부씩 우송해, 1928년(소화3년) 10월 5일 출판법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벌금80원 형에 처해졌다.
방진성(方鎭星, 1902 ~ ? ) :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용천면(龍川面)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신천군 용문면 사창리(司倉里) 주재소앞에서 여러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러 기소되었다. 이때 평양의 고등법원 재판정에서 ‘동서양의 각 민족을 막론하고 사람은 모두 자유와 독립을 원함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금번 조선민족의 대호기(大好期)에 즈음하여 경성·평양·기타 각 도회처에 있어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는 바, 이 때 본 피고도 2천만 민족의 1분자로서 같은 심정을 표하기 위해 신천군 용문면 사창리에 있어서 만세를 부르는 음성을 듣고 그 장소로 가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당지 소관(所管) 헌병에게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 판결 및 평양복심법원 판결에 있어서 징역 10개월에 처해졌으니 심히 억울할 뿐만 아니라, 이같은 무리하고도 무도덕한 일이 또 있으랴? 공평하게 하려고 한다면 2천만 민족을 모두 징역에 처하여야만 당연한 법이라고 하지 않을까? 공평한 판사는 이 같은 양민을 의리(義理)로써 명백히 판결하실 것을 복망함’이라고 당당하게 변론 했으나, 상고가 기각되고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방성준(方成俊, 1902 ~ 1920) : 1920년 10월 17일 만주 혼춘현(琿春縣)에서 독립군에 가입하여 사도구(四道溝)에 설치된 한민회(韓民會)의 병영에서 교육을 받고 한인재향군인으로 활동하다가 일군에 의해 고가로(高家爐)에서 피살 슨국함.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방길선(方吉善) : 1920년 3월 10일 체포된 독립군들이 자성군 장토면 읍내를 통과할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1주간 악형을 당했다.(당시 17.8세)
방명준(方明俊, 1903 ~ ? ) : 함경북도 부령군 출신 독립운동가이며, 아버지는 휘 병환(炳煥) 어머니는 강릉 유(劉)씨이다. 간도(間島) 연길현(延吉縣) 지인향(志仁鄕)에 거주했다. 연길지역 청년연합회(靑年聯合會)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방훈(方薰)등과 함께 검거되 1928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치안유지법위반(治安維持法違反)으로 징역 1년6월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후 1930년 1월 29일 석방되었다.
방흥범(方興範, 1903 ~ ? ) : 이명 방중암(方中菴) 방시원(方時圓).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횡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후 경성기독교청년회중등과를 거쳐 1925년 개성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계 개성중앙학관의 교사생활을 시작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선민족혁명당 비밀당원으로 활동하다, 1936년 6월 4일 횡성서(橫城署)에 의해 검거되 그해 12월 30일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기소되 경성지방법원에서 1937년 1월 26일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후 1939년 1월 27일 출소하였다. 해방후 횡성군의 초대 군수(郡守)가 되었다.
방수원(方洙源, 1904 ~ ? ) : 평안남도 정주 출신. 사회사업가, 서울에 조선인 야학 설립(1930년), 1937년 고아원 향린원(香隣園) 설립. 1941년 2월 혜림원을 모델로 한 영화 ‘집없는 천사’ 가 개봉되었다. 향림원은 당시 경기도 고양시 은평면 홍제외리에 있었다. 1945년 8월15일 김구 선생의 건국실천원양성소 교수진으로 참여.
방순희(方順熙, 1904 ~ 1979) : 이명 방순이(方順伊).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다. 아버지 방도경(方道京)과 어머니 김복녀(金福女) 사이 맏딸로 태어났다. 함경남도 원산(元山) 사람이다.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당하자, 1911년 가족들과 함께 해삼위(海蔘威, 브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시어, 그곳에서 러시아(露國) 小學校를 다니다가 그곳의 한인(韓人)교회에서 운영하는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우기 시작했다. 삼일여학교를 졸업후, 조국에서 학문을 배워야한다는 아버님의 권고로 1918년 부모님을 떠나 서울 중구 회현동(會賢洞)에 기거하시면서,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9년 3·l운동이 일어나자, 여성계몽운동과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쓰면서 4년간 열심히 공부한 끝에 1923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시고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남동생(여사보다 10살 연하)이 있는 브라디보스토크 본가로 다시돌아가 얼마간 그곳의 백산(白山)소학교에서 어린 동포들에게 고국에서 배운 민족교육을 전수하였다. 그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1938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에 선임되어 1945년까지 입법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최초의 임시정부 여성의원으로 활약한 그녀는 의정원 회의에서 주미대표부 대표권을 둘러싼 김약산(金若山)파와의 대결에서 이를 압도하였다. 또 광복군 창설, 대일 대독 선전포고, 조소앙의 건국강령 등의 채택문제,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노력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1939년에는 임정 승인을 위해 소련에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1942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경구당(重慶區黨) 간부로 선임되어 독립정신 고취,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43년 10월에는 중경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여권운동도 겸하였으며 한국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한국어 방송을 하면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국내 연락원으로 임명되어 선발대로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방신근(方信根, 1904 ~ 1973) : 평안남도 맹산군 출신. 할아버지는 휘 건두(建斗) 아버지는 휘 철무(澈霧, 1867년생. 일명 운득)이다. 배우자는 원남면(元南面) 면장을 했던 풍천(豊川)인 김병두(金炳斗)이다. 장녀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과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김옥길(金玉吉, 1921∼1990) 박사, 장남은 김동길(金東吉, 1928년생) 교수이며, 친정 동생은 성악가 방혜근(方惠根, 1916년생) 이고, 그 아들인 친정 조카는 ‘땅이 꺼져라 한숨짓는 건 정말 싫다’의 저자 예비역 대령 방희영(方熙英, 1949년생. 호적명 李熙英)이다. 시골 벽지 출신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평양으로 이거하여 삯바느질을 해가며 자식들을 성공시킨 위대한 어머니이다.
방래봉(方來奉) :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 출신. 1919년 4월 7일 무산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과 면민들이 함께 독립만세 시위하는데 가담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방양식(方陽植, 1905 ~ 1988) :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 평북농장 대표. 중앙종친회 6대 회장 역임.
방준경(方俊卿, 1905 ~ 1970) : 서울 출신. 법조인 문학가. 대법관
방종현(方鍾鉉, 1905 ~ 1952)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학장
방효동(方孝銅, 1905 ~ ? ) :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난곡면(蘭谷面) 출신, 1930년 9월에서 1931년 3월까지 회양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했으며, 1930년대 초 난곡청년회가 시행했던 빈민층과 문맹자에게 야학의 강사를 맡기도 했다. 이후, 동경으로 출국 고물상을 운영하며 1939년 결성된 동경의 비밀결사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에 참여하여 일경에 의해 체포되 재판을 받았다.
방우하(方又河) : 독립운동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서상천(徐相天) 선생의 지도로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각지방 조직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하여 항일투쟁에 적극 동참하도록 계몽중 역도관에서 동지 이대성 서상천 조영환 정명택 이윤필 신태범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고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역도관 사건)
방택기(方宅基) : 천도교 교도이다. 1936년 8월 14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로부터 멸왜(滅倭)기도와 특별성금 모금운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시행중, 1938년 2월 17일 황해도 신천경찰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방휴남(方烋南, 1906 ~ ) :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 출신. 아버지는 휘 창근(昌根, 독립유공자). 아들은 승규(昇圭)이다. 1935년 연희전문학교 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37년 영국성서공회의 간사로도 근무했다.
방의석(方義錫, 1906 ~ 1976) : 영화제작자, 기획자, 감독. 해방 직후 이구영, 윤봉춘 등과 함께 계몽문화협회(啓蒙文化協會)를 설립하여 제작을 전담했다. 1961년 한국제작자협회 부회장, 1963년 프로듀서클럽 부위원장, 한국영화인협회 기획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방애인(方愛仁, 1909 ~ 1933) : 황해도 황주(黃州) 벽성리(碧城里) 출신. 할아버지 휘 흥복(興福) 아버지는 휘 중일(中日)이다. 자선사업가. 거리의 성자(聖者)로 불리었다. 그녀는 1926년 개성 호수돈 여학교를 졸업, 기독교인으로 1931년 전주 기전여학교(紀全全女學校) 교사가 되어 불우한 학생들을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8천여 가정을 방문하여 기부금을 모아 고아원을 설립하고, 나병환자를 돌보고, 1932년에는 전주 수재민을 위해 사재까지 털어 구호를 했다. 젊은나이에 장티부스에 걸려 요절 후 전주 시내의 여인들이 흰옷을 입고 상여를 맨 사실로도 유명하다.
방남준(方南俊 1910 ~ ? ) : 보명(譜名) 병원(炳元)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민순(敏順)이다. 부산상공회의소 감사 및 상역분과위원장, 혜광(惠光) 학원 이사장, 사학재단연합회 부산시회장(1999년), 중앙종친회 9대 종친회회장을 역임했다.
방지일(方之日, 1911 ~ 2014)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방하영(方夏永, 1911 ~ 1949) : 경북 칠곡군 인동면 출신이다. 1938年 청년동지회를 조직하여 농민계몽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던중 1942년 2월 23일 징역1年을 언도 받았다.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방효원(方孝原, 1913 ~ ) : 충청남도 당진 출신. 소방총경(消防總警). 영등포소방서장. 대구소방서장(1969년). 영등포 소방서장 재직시(1968년 12월) 제재소에 불이나자 직접 온몸에 물을 뿌리고 화재현장에 띄어들어, 어린 여아를 구해냈다.
방영두(方泳斗, 1913 ~ 1980 ) : 서울 출신 체육인이다. 공인 유도8단. 일제강점기 중앙기독교청년유도부에서 활약, 해방후 1954년에는 이제황(李濟晃) 석진경(石鎭慶)과 함께 제1회 전국유도순회강습회를 열어 유도 보급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1956년 한국유도원이 창립 되었을 당시 초대 감사로 활동했다. 1964년 제18회 동경 올림픽에 유도 국제심판을 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1959년 간행 구라파 유동기행 등이 있다.
방순원(方順元, 1914 ~ 2004) : 대법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방영헌(方永憲, 1915 ~ ) : 충남 논산 출신. 경성제대졸업, 의학박사. 인왕장학재단 이사장. 중앙종친회 4대회장 역임.
방문식(方文植, 1916 ~1974) : 경기도 평택 출신. 아버지는 휘 승찬(承贊)이다. 서울체신청장(이사관)을 역임했다.
방호봉(方昊鳳, 1918 ~ ? ) 중앙종친회 10대 회장.
방봉순(方鳳淳, 1918 ~ 1998) : 황해도 안악(安岳) 출신.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방재기(方在暣, 1918 ~ ? ) : 대구지검장. 변호사
방의묵(方義黙, 1918 ~ ? ) : 경기도 개성부 출신으로 정미업(精米業)을 했다. 부친은 휘 영식(榮植)이다. 개성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동교 제3학년 때 병으로 중도 퇴교하고 1939년(소화 14년) 4월 동경 사립일본대학 전문부 법률과 별과에 입학하여 1940년(소화 15년) 7월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 후 형 방인묵(方仁黙, 1911년생. 배추 方東圭의 父)과 함께 정미업을 경영했다. 평소 강압적 창씨개명에 불만이 있어, 주변사람들에게 일본 수상이 군국주의로 일왕을 뛰어넘는 독재를 할 것이라 했으며, 중국과 일본간의 전쟁은 무모한 행위라 했고, 내선일체는 허울뿐인 형식적인 것이라고 함으로, 1941년 11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일왕에 대한 불경죄와 군형법위반 보안법위반으로 재판을 받기 시작해 경성복심법원(1942.3.6.)과 고등법원(1942.7.16.)에서 징역 8월을 확정선고 받고 복역해 1942년 10월 9일 출소한다.
방만수(方萬洙, 1919 ~ 2005) : 경북 경산 출신. 만주 하얼빈대를 나와 대한식량경영단 부사장, 경산고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1950년 정계에 입문해 무소속으로 경산군 2대 국회의원을 했다.
방준영(方駿榮, 1919 ~ 1989) : 충남 논산출신, 보성전문졸, 교통부인사계장, 삼보문화사 대표, 대전일보 서울지사장, 중앙종친회 창립멤버, 총무이사, 부회장, 감사역임.
방현(方炫, 1919 ~ ) : 의학박사. 비뇨기과 전문의, 한국로타리클럽 전총재서울지사장,
방원철(方圓哲, 1920 ~ 1998) : 육군 대령. 만주(滿洲)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졸업
방경환(方慶煥, 1920 ~ 1996) : 경기도 개성(開城) 출신. 아버지는 휘 원식(源植)이다. 체신부 부평 전신전화국 국장(1976년), 채신부 인천 우체국장(1979년), 인천 화수회 초대회장(1968년)등을 역임했다.
방동석(方銅石, 1921 ~ ) : 서울시의회 부의장
방선기(方善基, 1921 ~ 2007) : 평안남도 맹산군(孟山郡) 출신. 평양법경전문학교 졸업. 맹산파 종친회장. 초등학교교장. 장학관, 명예 맹산군수(1972년), 철옹회 고문.
방병권(方秉權, 1921 ~ 2004) :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출신. 육군보병고등군사반 졸업. 육군소령 예편. 조선일보 관리부 부장
방순동(方順同, 1922 ~ 2006) : 서울 강남(옛 廣州郡) 출신. 아버지는 흥관(興寬) 어머니는 단양(丹陽) 우(禹)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희대 사범대학장을 지냈다.
방경한(方景漢, 1922 ~ ) :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구항면(龜項面) 공리(公里) 출신. 1940년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대종교에 입교하고 항산결사대(恒山決死隊) 및 최파결사대(崔坡決死隊) 에 입대하여 친일주구살해(親日走狗殺害)와 일군시설 등 파괴를 목적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 8월 소만국경지대(蘇滿國境地帶)에서 일군수송대와 조우하여 수송대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도 거두었다. 1990년 애족장을 수여 받았다.
방희(方熙, 1922 ~ ) : 육군중장(육사 특임7기) 출신. 외무공무원. 주영국공사(1961년), 주일공사겸 총영사(1963년), 우간다대사(1966년), 주스웨덴대사(1971년), 노르웨이 아이스랜드대사 겸임. 대한광업회(大韓鑛業會) 회장(1976년)등을 역임했다.
방병덕(方炳德, 1923 ~ 2005 ) : 독립운동가 방기전(方器典) 장로의 손자이자, 독립운동가 방경모(方敬模) 목사의 조카이자, 방현모(方鉉模)와 어머니 이(李)씨 사이 장남으로 태여났다. 평양장로회 신학교 예과 2년 수료 본과 2년 수학 단국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서울장로회 신학교 졸업(현 장신. 총신)하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및 미국 Fuller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1951년 6월 10일 경남노회에서 목사임직을 받았으며 47개년 근속목회생활을 하고 1992년 정년으로 은퇴했다. 사단법인 광복회 회원(순국선열 유족회 회원)으로 국위를 선양한 공로로 국무총리의 표창을 받있다. 2000년 3월 23일 한국 Logos학회 대표회장으로 추대되어 이스라엘의 성경공의회와 결연하고 성경회복운동과 Logos사관 확립과 이스라엘의 구원과 세계평화운동을 하였다. 2000년 7월 17일 처음사랑찾기 운동본부 명예총재로 잃어버린 처음사랑찾기 운동을 했다. 2000년 8월 15일 사단법인 새생활운동본부 고문으로 새나라의 새생활운동을 했다. 2005년 11월 8일 소천함.
방자명(方滋明, 1924 ~ 1999 )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 육사 8기. 방첩대 대장으로 육군 중령 예편. 6.25 참전용사. 충무, 화랑 무공훈장 수훈자. 오양물산대표, 1987년 반독재민주수호 군출신 동지회장과 1988년 서울국제교류센터 이사장 역임.
방숙(方埱, 1922 ~ ) : 서울 출신이다. 불문학자 방곤(方坤)의 형이다. 아버지는 휘 익환(翼煥)이다. 의학박사. 연세대의대교수(1968), 순천향대교수, 국제 장애어린이돕기단체 한국본부 총재를 역임했다.
방승옥(方承玉, 1922 ~ ) : 충남 홍성(洪城) 출신. 삼풍탄광 심원탄광 대표, 광일산업(주) 회장, 중앙종친회 5,7대 회장 역임.
방철주(方澈株, 1922 ~ ) : 서울 출생. 호 혁산(赫山). 고려청자 비색(翡色) 재현의 대표적 도예가. 1971년 이천군(利川郡)에 동국요(東國窯) 설립.
방기환(方基煥, 1923 ~ 1993)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의영(義榮) 부인은 소설가 평택인(平澤人) 임옥인(林玉仁)이다. 194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중등교원양성소를 수료했다. 아동 문학가이자 소설가이다.
방일영(方一榮, 1923 ~ 2003) : 조선일보 회장. 아시아신문재단 부이사장. 중앙종친회 3대 회장을 역임.
방인기(方仁基, 1923 ~ ) : 체신공무원 훈련소 교수.
방성출(方性出, 1924 ~ 1989) : 경남 함안 출신. 아버지는 휘 도세(道世)이다. 은성충무훈장. 육군준장 예편. 1963년 제6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방학수(方學洙, 1924 ~ 2010) : 육군 대령
방원기(方元基, 1926 ~ 1999) : 육군 대령. 육사 6기
방준모(方俊模, 1926 ~ 2014) : 육사8기.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정복(方貞福, 1926 ~ 1999) : 서울 출신. 아버지는 휘 관책(觀策) 어머니 배상명(裵祥明)이다.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 미국 조지프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상명여대 교육학 교수로 부임, 1987년 상명대 초대 총장 및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5대 총장을 연임 했다.
방승희(方承熹, 1927 ~ ? ) : 경기도 개성(開城) 출신. 아버지는 휘 근수(根壽,1902년생)이다. 세무사. 인천 동인천 부천지역 세정협의회 회장(1979년). 중부세무사회 초대 회장(1982년). 한국세무사회 윤리위원장. 온양방씨 인천화수회 회장(1984년~)을 역임했다.
방덕제(方德濟, 1927 ~ 2017) : 육사 8기. 육군 소장
방우영(方又榮, 1928 ~ ) : 조선일보 회장. 연세대학교 이사장.
방근택(方根澤, 1929-1992) : 미술평론가. 아버지 방길형(方吉亨), 어머니 김영아의 장남으로 제주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단천에서 자랐으며, 부산대 인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다 입대했다. 1955년 광주 미국공보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1950년대 후반 서울에서 전위적인 미술의 중요성을 알리며 '앙포르멜'과 추상미술 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왕성한 독서량으로 서구의 지식을 섭렵하며 스스로 미술평론가로 성장했으며 1959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조직 설립에 앞장섰다. 1960년 한국미술가연합 창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청년작가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1960년대 이후 중요한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다. 한국추상미술의 전개를 설명할 때 방근택을 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92년 사망직전까지 다수의 평론과 <세계미술대사전> 시리즈, <서양미술사>, <미술가가 되려면> 등의 저술을 남겼다. 3천권이 넘는 책은 그의 사후에 인천대학교에 기증되었고 '방근택문고'로 관리되고 있다.
방창우(方昌雨, 1929 ~ ? ) : 보은군(報恩郡) 의회 군의원, 1.2대 의장
방충수(方忠洙, 1929 ~ ) :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방순문(方舜文, 1929 ~ ) : 경기도 양평(陽平) 출신. 아버지는 휘 수환(秀煥)이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광화문 전신전화국장(1973년), 체신부 건설국장(1979년). 중앙종친회 12대 회장 역임.
방세균(方世均, 1930 ~ ) : 경희대학교 한의과 졸업. 한의사. 2014년 서울 한의사회 학술위원
방곤(方坤, 1931 ~ 2002) : 호는 일범(一凡). 번역문학가 불문학자 교수.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 방한덕(方漢德)의 증손이다. 1955년 서울대학 불문과 졸업. 파리 ‘브상농’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 전공. 서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한국외국어대 경희대학에서 교수를 했다. 사법고시(司法考試) 위원 등을 지냈다. 1958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實存主義)는 휴머니즘이다》를 번역한 이래 근 40편의 번역서를 간행했다.
방덕수(方德洙, 1930 ~ 1995) : 육군 중령
방동식(方東植, 1931 ~ ) : 공병장교 출신. 경부고속도로 건설담당관(1967년). 한국도로공사기술본부장(1987년), 7.7회 회장
방태영(方台瀛, 1931 ~ 2009) : 코리아타임스의 편집국장(1983년) 논설주간(1987년) 이사를 역임했다.
방학진(方學鎭, 1931 ~ 2010) :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 건국대 정치학과 졸업. 중앙종친회 11대 회장.
방승영(方陞榮, 1931 ~ 1999) : 공군 준장. 공군사관학교 4기. 1979년 공군대학 총장. 교통안전진흥공단 연구이사
방오섭(方午燮, 1932 ~ 1990) : 공군 준장. 공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중앙고속 사장.
방준필(方俊弼, 1932 ~ 2009) : 안기부서울분실장, 제6대 명예 황해도지사(1990년)
방효선(方孝善, 1932 ~ 2016) : 보명(譜名) 효선(孝宣). 경기도 평택(平澤) 출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서울 중부국세청장, 세무사회 회장(1993년), 중앙종친회 8대 회장 역임.
방교원(方喬遠, 1932 ~ ) : 자(字) 백원(白源). 호 단계(旦嵠). 부경대학교 교수.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부산종친회장.
방응선(方應善, 1933 ~ ) : 평안남도 맹산(孟山)출신. 父 휘 영석(永錫). 법학사, 경찰 경감(警監) 퇴직. 백마고지전투 용사. 화랑무공훈장. 민주평통자문위원. 명예 맹산군수.
방일홍(方一弘, 1933 ~ 2017) : 충남 서천 출신. 경향신문 기자. 제6대 국회의원(민중당). 대영문화(주) 대표이사.
방영길(方永吉, 1933 ~ ) : 평안남도 맹산군(孟山郡) 명예군수(1989년)
방서남(方瑞男, 1934 ~ ) : 육사 15기. 월남전에 참전했다. 연대장(1979년) 대령으로 예편.
방영구(方永求, 1934 ~ 2008) : 강원도 횡성 출신. 신부(神父) 세례명 실베스텔.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교황청 우르바노대학교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사제 서품을 다고, 춘천교구 천주교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성당 보좌, 육군본부 군종감실 행정실장, 성신여대 교목, 죽림동 주교좌성당 주임 17대(1969∼1974), 대건신학대 교수 및 대학원장(6대), 광주가톨릭대 교수·학장(9·10대) 대학원장(12대), 속초 동명동성당 주임(1999년)을 역임하고 2004년 원로사목사제가 되었다.
방준(方埈, 1935 ~ ) : 서울 출신이다. 불문학자 방곤(方坤)의 동생이다. 아버지는 휘 익환(翼煥)이다. 건축사.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건축학 석사를 취득후, 미국으로 건너가 UC Berkeley에서 도시디자인을 전공했다. 미국 보스톤에서 활동하고 있다. 범우재(凡友齋)를 기초 설계했다.
방영창(方永昌, 1935 ~ ) : 별명 ‘앙드레아 방’. 일본 나고야 태생. 군예술대원, 프랑스유학, 세계적 바이올린 복원 전문가인 악기 명장.
방동규(方東圭, 1935년 ~ ) : 경기도 개성 출신. 별명 ‘방배추’. 한국의 기업인, 사회운동가이다. 조부는 휘 영식(榮植), 아버지는 휘 인묵(仁黙,1911년생) 이고, 숙부는 독립운동을 했던. 휘 의묵(義黙,1918년생)이다. 홍익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저서로는 ‘배추가 돌아왔다’
방찬영(方燦榮, 1936 ~ ) : 황해도 옹진 출신 미국인이다. 국제적 경제학자이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제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콜로라도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카자흐스탄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한국사회문화연구원 이사장, 미국 캘리포니아대 아시아태평양문제연구소장, 카자흐스탄 키맵대학 총장
방동인(方東仁, 1935 ~ ) 사학자. 전 관동대학 문과대 인문학부 사학전공 교수. 한국 고지도분야 선구자. 1976년 ‘한국의 지도’ 편찬. 1997년 일조각의 한국의 국경획정연구(韓國의 國境劃定硏究) 등 다수 논문.
방윤용(方潤容, 1936 ~ ) : 경기도 평택 출신. 안성중학교 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국민훈장, 중앙종친회 13대 회장
방학길(方學吉, 1937 ~ ) : 신부(神父). 세례명 마르첼리노. 서울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976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울 가회동, 전농동, 세종로성당에서 사목을 했으며, 1981년에서 1993년까지 새남터 본당 주임을 했으며, 한국 순교복자성직 수도회 5.6대 총원장을 지냈다.
방동환(方東煥, 1937 ~ ) :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출신. 아버지는 온양방씨 인천화수회 고문을 했던 휘 평국(平國, 1911~2007)이다. 경영학 석사. 총경(總警) 안성경찰서장. 평택경찰서장 용산경찰서장(1983년), 치안본부공보관(治安本部公報官), 서울시경 교통과장(1988년)을 역임했다.
방제환(方濟煥, 1937 ~ ) : 제28대 김포군수. 12·13대 동두천시장.
방혜자(方惠子, 1937 ~ ) : 경기도 고양군 능동(陵洞) 출신. 현대미술가로 한국 추상화 1세대이며, 빛의 화가로 불린다. 아버지 휘 방용성(方龍成)은 독도(뚝섬)보통학교(纛島普通學校)와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경동심상소학교(京東尋常小學校)에서 교사를 했으며, 어머니 ‘김옥선’도 교사 출신이다. 1957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입학 1961년 동 대학을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감.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파리국립미술학교 르노르망 교수로부터 아뜨리에 벽화수학을 받고, 1983년에서 1987년까지 파리 헤이터 아뜨리에 17에서 판화 수학을 받았다. 모나코 현대미술제 聖예술상을 받았고, 현재 재불 화가로 활동. 동생은 바이올린니스이자 예술감독으로 활동중인 방훈(方薰)이다.
방우제(方旴濟, 1937 ~ 2002) : 평안남도 정 출신. 아버지는 휘 정현(正鉉). 인천제물포고와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충남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재임, 충남대 경상대학장, 기획실장, 경영경제연구소장 등을 역임.
방천섭(方千燮, 1938 ~ ) :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방의건(方義健, 1938 ~ ) : 이명 의걸(義傑). 자(字) 목정(木丁). 홍익대 회화과 졸업. 전남대학 예술대학 교수.
방영진(方泳軫, 1939 ~ 1999) : 만화가. 서울 종로 출생. 서울 영천에서 제화점을 하던 집안의 아홉남매 중 여섯 째로 태어났다. 교동 초등학교를 거쳐 양정고등학교를 나왔다. 1958년에 7천사라는 잡지에서 단편 ‘오복이’라는 작품이 처녀작이며 1959년 발표한 단편 ‘투명인간’으로 인기를 모으게 된다. 1960년대에는 ‘명탐정 약동이’와 ‘약동이와 영팔이’를 발표했다. 20세 초반에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다리가 아팠으나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방영용(方泳龍, 1939 ~ ) : 필명 방기훈(方基勳, 호 오성(悟性). 만화가. 일본 동경 출생. 경남중고 졸업.
방규식(方奎植, 1939 ~ 1998) : 1960년대 후반부터 영화사 제작부에서 일하며 영화계에 입문한다. 1986년 자신의 영화사인 ‘방 프로덕션’을 설립한다. 1990년 <천국의 땅>으로 제2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 했다.
방정항(方正恒, 1940 ~ ) : 함경남도 북청 출신. 1963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5년 동 대학 행정대학원 수료, 부산대학교 행정학 박사. 동아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동아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 동아대학교 정책과학대학원 원장, 동아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원장, 한국행정학회 부회장, 한국정책학회 부회장, 제13대 동아학숙 이사장.
방청평(方淸平, 1940 ~ ) : 김포 출신이다. 예명이 방일수(方一秀)인 연극배우겸 코메디언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사법행정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사단법인 한국연예예술인총연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딸이 1996년 제26회 애틀란타 하계 올림픽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방수현(方銖賢) 임.
방석종 (方錫淙, 1940 ~ ) :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구약학 연구회 전회장.
방열(方烈, 1941 ~ ) : 대한농구협회 회장. 이학박사
방영섭(方榮燮, 1940 ~ ) : 일성건설 회장,한진중공업 고문
방길남(方吉男, 1941 ~ ) :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 군산 세관장, 관세청 항공대교수. (사) 코리아녹색운동연합중앙회 상임고문.
방항석(方恒錫, 1941 ~ ) : 충북 청원군 출신. 약사로 1989년 태백시 약사화장을 지냈다. 1991년 강원도 도의회 도의원(태백시)으로 당선되었다.
방성제(方性濟, 1942 ~ ) : 체신청 이사관.
방영웅(方榮雄, 1942 ~ ) :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신. 작가. 휘문고를 졸업했다. 1969년 「달」로 제2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방재영(方宰榮, 1942 ~ ) : 건설교통부 해외건설과장(이사관). 해외건설협회 이사 역임. ‘해외건설 실무 영어’ 저자
방승양(方勝楊, 1942 ~ ) : 재일교포 2세로 일본 출생. 교토대학교 전기공학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전기공학 석사, 텍사스대학교 대학원 컴퓨터과학 박사. 미국 NCR과 벨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다 1981년 대한민국에 입국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컴퓨터 국산화를 추진했다. 1986년 포항공대 설립에 참여하고 컴퓨터공학과 교수 및 동대학의 학과장 및 대학원장을 역임. 국내 컴퓨터 인공지능분야의 개척자. 2007년 정년 퇴임후 포항공과대학교 명예교수를 하고 있다.
방종영(方鍾永, 1943 ~ ) : 경북 달성군(達城郡) 4.5대 의회 군의원. 4.5대 하반기 부의장
방효철(方孝哲, 1943 ~ ) : 충북 청원 출신. 청주대학 법하과 졸업, 성균관대학 경영대학원 졸업, 경남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삼우금속공업 대표이사, 한국무역협회 이사, 창원국가산업단지 경영자협의회 회장, 삼우금속공업 회장. 국무총리표창, 동탑산업훈장, 은탑산업훈장, 제24회 전국중소기업인대회 금탑산업훈장.
방병기(方秉基, 1943 ~ ) : 카톨릭대 의과대 의학과 내과학교실 교수
방춘웅(方春雄, 1943 ~ ) : 충남 서산시 운산 출생. 호는 금촌(錦村)이다. 4대째 가업을 잇고있는 홍성군 갈산면 동성리의 옹기장이다. 2008년 2월에 충남무형문화재 제38의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갈산토기의 대표. 둘째 딸 유정과 막내아들 유준이 가업을 잇기 위해 전통 옹기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방영진(方永鎭, 1943 ~ ) : 교육자,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태권도학 교수, 2008년 황조근정훈장 수훈.
방광자(方光子, 1944 ~ ) : 조경학(造景學) 교수. 숙명여고 재학시 농구선수. 농학박사. 상명대학교 산업대학 학장.
방용석(方鏞錫, 1945 ~ ) : 제15대 국회의원. 제19대 노동부 장관.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근로복지공단 이사장.
방태수(方泰守, 1945 ~ ) : 함경남도 북청 출신. 1964년 드라마센타 한국연극아카데미 졸업(1기), 건국대학 졸업, 1982년 동국대 대학원 연극과 졸업(석사). 문화예술인. 연출가. 1967년 극단 ‘에저또’ 창립, 1970년 서울 을지로에서 ‘제4집단’ 결성대회를 갖고 모순된 기성문화와 사회체제에 대한 반성의 출발점으로 문화의 주체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연출가그룹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부산예술대학 연극과 교수,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한성디지털대학 연극영화과 겸임교수를 했다.
방근석(方根錫, 1945 ~ ) : 자(字) 재근(在根). 경제학박사. 부산경상대학교 무역과 교수
방승복(方承福, 1945 ~ ) : 충청남도 홍성군 출신이다. 아버지 휘 기석(基錫)과 어머니 홍주(洪州) 李씨 사이 차남이다. 충청도 체신청 조직국장을 하고 퇴임후, 온양방씨 중앙회 총무이사와 2018년 인터넷족보 편찬위원회 부위원장.
방상길(方常吉, 1945 ~ ) : 연세대학 졸업. 전 고합상사 대표이사. 전 고합엠텍홀딩 고문. 전 오리온주식회사 대표. 연세체육회 수석부회장. 2009년에는 ‘함께나누는세상’의 발기인이기도 했다.
방효무(方孝武, 1946 ~ ) : 청주 출신. 아버지는 휘 준용(俊容)이다. 청주시 기획실장. 흥덕구 구청장을 역임했으며, 녹조근정훈장을 수여 받음.
방현수(方賢秀, 1946 ~ ) : 서울 강남(옛 廣州郡) 출신. 아버지는 휘 순동(順同, 1992년생)이다. 텍사스대학 졸업. 동국대학 수학과 교수
방판칠(方判七, 1946 ~ ) : 경상남도 창원 출신. 아버지는 휘 소몽(小夢)이다. 경상대학 학군 8기. 7사단장, 8군단장 육군 중장(2002년). 대한주택공사 감사(2009년)
방대현(方大鉉, 1946 ~ ) : 경기도 양평 출신.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수료. 전 연합뉴스 기획실 부실장, 서울미디어그룹 이사, Digital Contents Works 감사.
방병건(方炳健, 1946 ~ ) : 서울태생. 한양공대 대학원졸업, 건진사 대표, 중미출판사 대표, 국가보훈처 대상수상, 대한노인신문사 논설위원, (사)뿌리문화보존회 이사,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회장, 광복회 강서지회장, 광복회 의전복지국장, 중앙종친회 부회장. 온양방씨종보편찬 편찬위원장.
방옥균(方玉均, 1947 ~ ) : 보사부 식약청 서울청장(이사관, 2003년)
방재기(方在基, 1947 ~ ) 시각디자이너, 시각디자인과 교수
방연옥(方連玉, 1947 ~ )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 출신. 아버지는 휘 자순이다. 당진군 한산면으로 시집을 가 1980년부터 한산모시를 짜기 시작했다. 문정옥 (文貞玉)씨의 뒤를 이어 한산 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되었다. 국가 무형문화재 14호이다.
방훈(方薰, 1947 ~ ) : 경기도 고양군 능동(陵洞) 출신. 바이올린니스트. 아버지 휘 방용성(方龍成)은 독도(뚝섬)보통학교(纛島普通學校)와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경동심상소학교(京東尋常小學校)에서 교사를 했으며, 어머니 ‘김옥선’도 교사 출신이다. 화가 방혜자(方惠子)의 동생. 서울예고 2학년 재학중이던 1965년 프랑스로 유학가, 1967년 6월 벨사이유 국립음학학교바이올린과를 수석 졸업했다. 현재 예술감독으로 누나의 작품 출판 및 전시회마다 기획등을 도와주고 있다.
방인제(方仁濟, 1947 ~ 1996) : 육군 대령
방영민(方榮玟, 1948 ~ ) :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 행정고시 17회. 경제학박사. 관료출신 기업인 금융인. 재정경제부 경제정책심의관(이사관), 서울보증보험 사장. 홍조근정훈장.
방광업(方光業, 1948 ~ ) :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 아버지는 휘 영택(永宅) 어머니는 한양 조(趙씨)이다. 경기도 세정과장. 소사구청장(2005). 경기지방공사 관리본부장(2007)을 역임했다.
방상훈(方相勳, 1948 ~ ) : 조선일보 대표이사
방재욱(方在旭, 1948 ~ ) : 서울 출신. 서울대 생물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식물학 박사. 충남대학교 생명시스템과학대학 교수. 한국생물과학협회 회장. 제47대 한국생물과학협회 회장.
방남휴(方南烋, 1948 ~ ) : 전 중앙종친회 회장. 대영식품(大榮食品) 대표. 대한병과공업협동조합 이사장.
방유현(方裕鉉, 1949 ~ ) : 인하대 인하병원 성형외과 과장
방동식(方東植, 1949 ~ ) : 연세대 의과대 의학과 피부과학교실 교수
방익찬(方益璨, 1949 ~ ) : 물리학박사. 제주대학교 해양과학대학 지구해양과학과 명예교수.
방동식(方東植, 1949 ~ ) : 연세대학교 의대 졸업, 동 대학교 대학원 박사. 피부과 전문의, 대한피부연구학회 회장. 연세대 의과대 의학과 피부과학교실 교수.
방성석(方聖錫, 1949 ~ ) : 충청남도 아산 출신. 아버지는 휘 효정(孝正). 경제학 박사. 광운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가천대 무역학과 겸임교수, 사단법인 이순신 리더십 연구회 상임고문. 해사 충무공 연구회 자문위원.(주) 이글코리아 대표. 대통령표창. 철탑산업훈장(鐵塔産業勳章). 저서 ‘역사속의 이순신, 역사밖의 이순신’등 다수. 2017년 인터넷 족보 편찬위원회 위원장.
방효복(方孝福, 1949 ~ ) : 평택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선용(鮮容). 50 사단장, 11 군단장, 국방대학교 총장등을 역임했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 국민훈장 3.1장.
방몽숙(方蒙淑, 1950 ~ ) : 전남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치의학과 교수
방진석(方振錫, 1950 ~ ) : 1987년 대구직할시정책자문위원. 1995년 대양정밀 대표. 1995년 대구광역시 시의원(북구2선거구) 당선. 시의회 산업분과위원장 역임.
방윤석(方潤錫, 1950 ~ 2012) : 충청남도 논산(論山) 출신. 고조부는 서산 해미에서 1866년 순교한 휘 영창(永昌,안토니오) 그 아들인 증조는 휘 춘화(바오로, 1944년 卒)이며 아버지는 휘 재회(필립보, 1923 ~ 2009)이다. 신부(神父). 세례명 베르나르도. 성신고등학교와 서강대학 언론대학원을 졸업했다. 1975년 사제서품을 받고, 대흥동성당 보좌신부로 첫 사제생활을 시작했고, 군종신부(1976), 청양본당 주임(1980년), 대전교구 온양본당 14대 주임 신부(1999년), 대전 평화방송 초대 사장(2000년), 서산 석림동 본당 주임(2005년) 신부등을 역임했다. 만돌린 연주를 잘했다. 청양본당 주임 신부 당시인 1982년 순교자들의 다락골 줄무덤지를 성역화 시키기도 했다. 동생이 방경석(方京錫, 알로이시오) 신부이다.
방민준(方旼俊, 1950 ~ ) :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78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한 이후 경제부장, 편집국 부국장, 기획특집국 국장, 논설위원실 실장 등을 역임했다. 2010년 뉴데일리 부사장에 선임되었다.
방종득(方鍾得, 1951 ~ ) : 포항 연일(延日) 출신. 아버지 휘 명원(命遠)과 어머니 경주(慶州) 김씨 사이 4男으로 출생. 국립 부경대학교(釜慶大學校) 졸업 동대학원 수산학 석사 및 박사. 1993년 해양수산부 국립수산과학원(國立水産科學院) 연구관, 동해수산연구소 및 남해수산연구소 소장(이사관). 국립수산과학원 자원조성사업단 단장(團長), 국립강릉대학교와 여수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어병학회(韓國魚病學會) 회장등을 역임했다. 홍조근정훈장(紅條勤政勳章) 수훈.
방주연(方珠蓮, 1951 ~ ) : 경북 상주(尙州) 출신. 본명은 방일매(方一梅)이다. 아버지는 경찰출신 국가유공자 방동출(方東出, 1932년생)이며, 남자 형제로는 '방일우'와 '방일상'이 있다. 대한민국 가수이자, 미국에서 자연치유학 박사학위를 받고 자연치유 및 대체의학 전도사역할을 함.
방용규(方龍圭, 1952 ~ )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의환(義煥) 조부는 휘 유영(有榮)이다. 호 재경(載景). 별호 신 서주산인(新 西洲散人). 법학사, 온양방씨 중앙종친회 및 판서공파 종친회 부회장. 온양방씨 대종보 자유기고가. 전 (사)한국 교습소총연합회 경기지회 사무국장. 목은 이색(李穡)의 ‘봉정 국서 성 방 휘 언휘(奉呈 菊墅 姓 方 諱 彦暉)’시를포함. 선조들 관련 시(詩)와 문적(文蹟)등을 발굴하여 대종보 및 족보에 기고함.
방재홍(方在鴻, 1952 ~ ) : 서울 출신.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언론학과 졸업(석사). 독서신문 발행인, 한국자유총연맹 자문위원, 이뉴스투데이 발행인, 서울미디어그룹 대표이사, 서경대학교 겸임교수, 인터넷신문위원회 위원장. 국무총리 표창, 화관문화훈장 수상.
방태찬(方泰贊. 1953 ~ ) : 보명(譜名) 종식(鍾湜). 포항 연일(延日) 출신. 아버지 휘 기원(起遠)과 어머니 평산(平山) 신씨 사이 5남으로 출생. 부경대학교를 졸업 1996년 동대학원 석사.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하여 부산지역본부 울산전력처장을 역임함. 2002년 부산전력관리처 품질안전과장 재직시‘ 품질경영 혁신을 통한 지역사회 및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한 유공’으로 대통령표창을 수상함.
방유봉(方有鳳, 1954 ~ ) : 경상북도 울진군 출신. 울진군 2.3대 군의원. 울진군의회 의장. 경상북도의회 7.8대 도의원.
방영주(方英柱, 1954 ~ ) : 서울 출신. 서울 의대 졸업, 동 대학 대학원 의학 석사 및 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주임 교수, 대한암학회 이사장, 서울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 원장. 보건산업기술대상 대통령상, 제4회 지식창조대상 수상.
방비석(方飛錫, 1954 ~ ) : 충청도 출신. 아버지는 휘 재희(載喜)이다. 행정고시합격(1975년) 홍조근정훈장(2000년) 부천부시장(富川副市長,2003년)
방현(方鉉, 1954 ~ ) : 서울출신(맹산) 검사. 변호사(법무법인 광장)
방흥석(方興錫, 1954 ~ ) : 아산 폴리텍대학 자동차기계과 교수.
방대두(方大斗, 1954 ~ ) : 서울출생. 은퇴 레슬링선수.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 그레코로만형 동메달.
방희선(方熙宣, 1955 ~ ) : 충북 진천 출신. 서울대 법학과 졸업, 동 대학원 법학박사. 육군 법무장교, 인천 수원 광주지방법원 판사,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방명균(方明均, 1955 ~ ) : 강원도 강릉 출신. 강원대학 졸업. 강원일보 사회부 차장, 동 영동취재부장, 강원도민일보 취재부 국장, 동 편집국장, 동 전무 경영본부장
방문추(方文秋, 1955 ~ ) : 제주도 애월(涯月) 출신.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여성 도의원.
방인태(方仁泰, 1955 ~ ) : 자(字) 인식(仁植). 교육학 박사. 서울교대 교수
방효필(方孝弼, 1955 ~ ) : 경기도 평택 출신. 호 청암. 식품학 전공. 식품공학 박사. 전 국립한경대학교 교수. 청암문학관 관장. 시인.
방인성(方仁聲, 1956 ~ ) : 서울 용산 출신. 세무대학 졸업, 관세청 특채. 한국방송대학 행정학과 졸업. 1997년 사무관 광주세관 감시과장. 청주세관장. 2012년 김포세관장.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영업관리단장. 홍조근정훈장 수상.
방원팔(方元八, 1956 ~ ) : 경상북도 경주(慶州) 출신. 육사 35기. 육군중장으로 예편(2013년)
방선배(方善培, 1956 ~ ) : 자(字) 선욱(善郁). 교육학 박사. 제주대학교 교수
방형남(方炯南, 1957 ~ ) : 경기도 화성 출신.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파리제2대학교 대학원 신문연구DEA과정 수료.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소장,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국립419민주묘지관리소 소장.
방대욱(方大旭, 1957 ~ ) : 공학박사. 교수. 계명대 정보통신대학장
방승일(方承一, 1957 ~ ) : 강원도 화천 출신. 강원도 도의원(화천군)
방귀희(方貴嬉, 1957 ~ ) : 서울 출신. 호 청도. 동국대학 불교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불교 철학과 졸업. 숭실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졸업, 동 대학원 사회복지학 박사. 시인, 방송작가, 한국장애인문인협회 회장.
방성일 (方成日, 1957 ~ ) : 1984년 단국대학교 전자공학 학사, 1986년 동 대학원 전자공학석사, 1992년 동 대학원 전자공학 통신공학 박사. 박사학위 이후 이동통신업체의 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1994년부터 단국대학교 공과대학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로 재직중. 단국대학교 연구처 처장 겸 산학협력단장.
방기봉(方基奉, 1958 ~ ) : 충남고 졸업, 1987년 일본 구마모토대학 경영학과 졸업. 한국특수메탈공업(주) 대표이사. 2017년 대덕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 대통령 표창.
방용문(方龍文, 1958 ~ ) : 외국인 근로자들의 친구. 변호사
방영기(方榮基, 1958 ~ ) : 경기도 성남시 출신.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 전수교육조교(전수조교)가 됨. 3대 성남시의회 시의원. 8대 경기도의회 도의원.
방효길(方孝吉, 1958 ~ ) : 1991년 서울시의회 시의원(노원)으로 당선.
방대선(方大善, 1958 ~ 2008) :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 광역의원이다. 1998년 경북 경북 성주군 도의원 당선으로 정계에 입문해 2002년과 2006년 내리 3선의원으로 당선되 2006년 8대 전반기 도의회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방상원(方常源, 1958 ~ ) : 충남 천안 출신. 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 삼성전자 일본본사 상무, 삼성전자 사업전략그룹 그룹장, 삼성메디슨 대표이사, 삼성전자 일본법인 법인장(부사장).
방성근(方星根, 1958 ~ ) : 전 방송프로듀서, 전 문화방송 예능본부 본부장.
방의석(方義錫, 1958 ~ ) : 행정공무원. 국립생태원 기획경영본부 기획실 실장.
방성호(方成浩, 1959 ~ ) : 육군 준장. 학군 21기. 1군 사령부 인사차장. 공수특전여단장.
방선규(方宣圭, 1959 ~ ) : 충남 서천 출신.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시라큐스대 대학원 미디어정책학과 졸업, 청와대 행정관, 국정홍보 정책관(이사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당장 직무대리. 근정포장 수상.
방두원(方斗源. 1959 ~ ) : 군법무관 6회 출신. 변호사
방대영(方大榮, 1959 ~ ) : 전 광주광역시 3대 시의원 행정자치위원장 역임
방영민(方泳敏, 1959 ~ ) : 서울대 법학과 졸업, 동 행정대학원 졸업, 미국 밴더빌트대학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행정고시 25회(1982년). 재정경제부 경제홍보기획단 총괄기획과장(이사관). 삼성증권 부사장.
방순자(方順子, 1959 ~ ) : 충남 출신. 동덕여대 무역학과 졸업. 산업자원부 사무관, 지식경제부 서기관,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 무역조사실 덤핑조사과장. 전략물자관리원 원장.
방태규(方泰圭, 1959 ~ ) : 공학 박사. 한국산업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방효원(方孝元, 1959 ~ ) : 부산 출신. 중앙대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동 대학원 의학박사.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교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학장보, 중앙대학교 평의원회 의장.
방용석(方勇錫, 1959 ~ ) : 1981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 작곡전공 졸업. 1984년 동 대학원 음악학과 작곡전공 석사. 대한민국의 작곡가 겸 음악감독이다. 1988년 애니메이션 달려라 하니의 주제가를 작곡. 1997년 ~ 2014년 헐리우드매너 대표. 1998년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 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만화학과,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이화여자대학교 실용음악대학원 등 강사. 2009년~2011년 목원대학교 작곡 재즈학부 겸임교수 역임.
방창섭(方昌燮, 1960 ~ ) : 경북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영국 크랜필드대 대학원 기계공학과 졸업. 현대자동차 미국법인 기술연구소 이사, 현대자동차 품질본부장(전무), 동 부사장.
방철환(方哲煥, 1960 ~ ) : 검사츨신. 변호사.
방창훈(方昌勳, 1958 ~ ) : 서울 출신. 국립철도고등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 졸업. 철도청 고속철도사업본부 영업제도 팀장, 코레일 인재개발원 원장, 코레일 수도권서부본부 본부장, 코레일관광개발 대표이사. 산업포장, 국토해양부장관 표창 수상.
방영호(方泳昊, 1960 ~ ) : 전 재정경제원 근무 방영민(泳敏)의 동생. 바이올리니스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그네신 뮤직아카데미 지휘과를 졸업했다. 1984년 KBS교향악단에 입단해 활동하며 마스터즈 4중주단, 서울챔버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했고 현재 KBS교향악단 제2바이올린 부수석으로 활동하고 있다.
방승진(方昇珍, 1960 ~ ) : 이학박사. 아주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자연과학부 수학전공 교수.
방현석(方玄錫, 1961 ~ ) : 울산광역시 출신. 노동운동가, 소설가, 교수. 2003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 중앙대 안성 부총장.
방문석(方文奭, 1961 ~ ) : 서울 출신. 서울 의대 졸업. 동 대학원 의학 박사. 서울 의대 재활의학과 교수. 국립재활원 원장, 대한재활의학회 이사장.
방사익(方士翊, 1961 ~ ) : 서울 출신. 서울 의대 졸업. 동 대학원 의학 박사. 충북대학교 의과대학 성형외과 과장, 삼성서울병원 성형외과 과장,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성형외과 주임교수, 삼성서울병원 바이오의료중개지원센터장.
방승만(方承晩, 1961 ~ ) : 충남 아산 출신. 동국대 경영학과 졸업, 동 대학원 법학과 수료. 사법시험 합격,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2016),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방승철(方昇哲, 1961 ~ ) : 공학박사. 동서울대학교 정보통신과 교수.
방유석(方宥錫, 1961 ~ ) : 충남 홍성군 장곡면 출신 장승 조각가이다. 원래는 하회탈 조각가였다. 동생 영석(1966년생)도 장승 조각가이다. 충남 청양군 칠갑산 장승공원을 두형제가 주도해 만듬.
방명걸(方明杰, 1961 ~ ) : 서울 출신. 이스턴버지니아메디컬스쿨 내분비생식생리학 박사. 중앙대학 교수. 서울대 인구의학연구소 책임연구원 및 한국과학기술원 의과학연구센터 선임연구원 그리고 바이오벤쳐기업 ‘젠딕스’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00년에 포경수술 반대운동으로 미국 포경수술정보교육센터(NOCIRC)로부터 국제인권상을 수여 받았다.
방태진(方泰振, 1962 ~ ) : 부산 출신. 부산수산대 해양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해양정책학과 졸업, 부경대학 경영학 박사. 1991년 기슬고시합격. 해양수산부 근무. 마산지방해양수산청장.
방용훈(方勇勳, 1962 ~ ) : 경기도 의정부 출신이다. 미국 오하이오대 경영학과 졸업. 조선일보 미국 특파원. 조선일보 이사. 주식회사 코리아나 대표이사 사장.
방규식(方奎植, 1962 ~ ) : 충남 예산(禮山) 출신.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2000년 매일경제TV 산업부 기자, 2012년 한국경제TV 보도본부장, 2015년 동 마케팅 본부장.
방승찬(方承燦, 1962 ~ ) : 경기도 안성 출신.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동 대학원 공학박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동 본부장.
방문규(方文圭, 1962 ~ ) : 경기도 수원 출신.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행정고시 합격. 기획재정부 차관. 보건복지부 차관.
방성근(方聖根, 1962 ~ ) : 한림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 부교수.
방의석(方義錫, 1962 ~ ) : 신문인. 전 대전매일신문 광고국 부국장 대우.
방일석(方日錫, 1963 ~ ) : 삼성전자 일본 주재원. 올림푸스 대표이사.
방난석(方爛碩, 1963 ~ ) : 한림대학교 성형외과 교수. 더원성형외과 원장.
방영순(方英順, 1963 ~ ) : 가수 방실이
방효충(方孝忠, 1964 ~ ) : 충남 서산 출신. 서울대 항공학과 졸업, 동 대학원 항공학과 졸업, 미국 텍사스A&M대학 항공우주공학 박사. 미 해군대학원 연구조교수, 항공우주연구소 선임연구원, 충남대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공과대학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제5회 젊은과학자상 수상.
방효창(方孝昌, 1964 ~ ) : 한국항공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 무선통신공학 석사 박사 학위 취득. 두원공과대학 정보지원센터소장, 두원공대 파주행정지원처 처장, 두원공대 경기산업기술교육센터 센터장을 거쳐 2018년 1월 두원공대 파주캠퍼스 부총장에 취임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정보통신위원장도 맡고 있다.
방은진(方銀珍, 1965 ~ ) : 영화감독이자 영화배우
방효진(方孝進, 1965 ~ ) :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교 경제학과 졸업, 미국 멜론은행 근무, 스위스은행 한국사무소장, 미국 메릴린치 홍콩법인 서울디렉터, 골드만삭스 서울사무소장, 하나은행 부행장보 RUA 투자은행(IB) 사업본부장, 싱가포르개발은행(DBS) 서울지점 한국대표,
방세현(方世鉉, 1965 ~ ) : 서울 출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한일 학생회의 창립 초대 회장. 시사정책연구소 소장. 주식회사 GCN 대표이사.
방기선(方基善, 1965년 ~ ) : 제13대 기획재정부 제1차관
방성환(方成煥, 1966 ~ ) : 경기도 성남 출신, 성균관대학 행정학과 졸업, 공인노무사. 경기도 도의원(성남시), 자유한국당 정책위원장.
방정숙(方貞淑, 1967 ~ ) : 변호사. [前] 의정부지검 검사(2009)
방정균(方正均, 1967 ~ ) : 한의학 박사. 상지대 한의학 교수.
방상천(方相天, 1967 ~ ) : 광주 출신. 조선대 행정학과 졸업, 강원대 대학원 소방방재학과 졸업,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대학원 졸업. 나주소방서 방호과 방호팀장, 충청소방학교 교관단장, 충남 소방본부 방호팀장, 동 소방행정 과장, 충남 당진 소장서장, 내무부장관 표창, 대통령 표장.
방은희(方銀姬, 1967 ~ ) : 배우
방태호(方泰浩, 1968 ~ ) : 인천 강화 출신. 관동대학 졸업. 강원대 교육대학원 졸업. 2003년 경기 예술고 교감. 2005년 경기도교육청 장학사. 경기 이포고 교장, 여주중 교장, 세종고 교장, 여주여중 교장.
방성원(方聖媛, 1969 ~ ) : 국문학 박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창조대학원 글로벌한국학과 주임교수
방자경(方慈景, 1969 ~ ) : 아버지는 용석(龍錫, 1943년생) 어머니 청주인(淸州人) 楊씨(1948년생) 사이 장녀로 평택에서 태어났다. 불교아동문학상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고, 시집 1993년 ‘하늘도 이유를 모르는 눈물’등 여러 시집을 내고, 1995년 ‘시간이 가면 우리는’외 여러 에세이를 발표했다. 2016년 통일부장관상을 수상했고, 현재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이다.
방준석(方俊錫. 1970 ~ ) : 음악감독겸 가수.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캠퍼스 경영학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방준필(方俊弼, 1971 ~ ) : 서울 출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졸업. 템플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방선백(方善栢, 1972 ~ ) : 광주과학기술원 연구교수. 2003년 미국 스티븐스공대 공학박사 학위 취득
방수현(方銹賢, 1972 ~ ) : 김포 출신이다. 아버지는 월남참전용사이자 독실한 천주교신자 코메디안 방일수(方一秀, 본명 方淸平, 세례명 베네딕토)이며, 한국체육대학교 졸업한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이다. 1996년 제26회 애틀랜타 하계 올림픽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임.
방혜선(方惠善, 1972 ~ ) : 대구 달성 출신. 경북대 견섬유과 졸업, 동 농업생명대학원 견섬유학과 졸업, 서울대 곤충학 박사. 농업진흥청 잠업연구사, 농업진흥청 대변인.
방현하(方炫夏, 1973 ~ ) : 순천고 졸업. 서울대 대학원 자원공학과 졸업, 미국 렛거스대 공공행정학 박사. 대통령 비서관실 행정관, 서울지방국토관리청 도로시설국장, 국토교통부 공항안전환경과장.
방제한(方濟漢, 1973 ~ ) : 아산(牙山) 출신. 아버지 휘 광석(光錫, 1942년생) 어머니 전주(全州) 李씨(1944년생) 사이 삼남(三男)으로 태어났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인테리어업을 하는 ‘도배(塗褙)의 명인(名人)’. CJ헬로TV 방송 ‘명물인생(41회)’에도 소개됨.
방성훈(方聲勳, 1973 ~ ) : 서울 출신.미국 루이스앤드클라크대 국제정치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 대학원 정책미디어학과 졸업. 조선일보 기자. 스포츠조선 전무이사, 동 대표이사(부사장). 조선일보 이사. 스포츠조선 대표이사 발행인.
방웅환(方雄煥, 1973 ~ ) : 전주지방법원 부장판사(2017)
방윤섭(方允燮, 1975 ~ ) : 서울 출신. 서울대 사법학과 졸업. 군법무관, 수원지법 판사, 서울지방법원 판사, 대구지법 의성지원 판사, 서울가정법원 판사,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부장판사(2017)
방신봉(方信奉, 1975 ~ ) : 대전출신. 홍익대 졸업. 전 배구선수.
방준성(方俊盛, 1976 ~ ) : 서울남부지검 검사(2015)
방철환(方喆煥, 1976 ~ ) : 서울 출신. 동국대학교, 미국 뉴욕주립대 버팔로 석박사 졸업. 어번 대학교 몽고메리 캠퍼스 경영대학 교수.
방일수(方一洙, 1978 ~ ) : 대전가정법원 논산지원 판사(2016)
방정오(方正梧, 1978 ~ ) : 서울 출신. 미국 시키고대 동양사학과 졸업. TV조선 미래전략팀 팀장, TV조선 대표이사 전무.
방태경(方泰慶, 1979 ~ ) : 인천지방법원 판사(2016)
방명호(方明浩, 1979 ~ ) : 머니투데이미디어 기자, 주식회사 이도 PR팀장
방진형(方眞馨, 1981 ~ ) : 수원지법 안산지원 판사2014)
방성윤(方成允, 1982 ~ ) : 전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농구 선수. 연세대학교 졸업. 2000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상.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2011년 은퇴.
방혜미(方惠美, 1983 ~ ) : 수원지법 성남지원(2016)
방일민(方一民, 1986 ~ 2010) : 해군중사. 서울에서 태어나 2007년 해군에 임관하여 2009년 7월 20일 해군2함대 22전대 천안함 소속 조리장으로 복무함.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근해에서 해상 경비작전 중 21:20경 북한 소형잠수함정에서 발사된 북한제 어뢰에 의해 피격 전사하여, 하사에서 중사로 1계급 특진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 받음. 국립대전현충원 사병 제3묘역 308-35,187호에 안장됨.
방성훈 : 배우
방용국(方容國, 1990 ~ ) : 가수 B.A.P 리더
방성준(方成俊, 1990 ~ ) : 배우, 모델
방민아(方珉娥, 1993 ~ ) : 가수 걸스데이 멤버
방찬 (方燦, 1997 ~ ) : 가수 스트레이키즈 리더
과거 급제자
*. 시대별 등과자(登科者)
一 고려조(高麗朝) 문과(文科) 및 사마시(司馬試) 등과자
고려조 문과등과자는 방목(榜目) 일부만 현전(現傳)한다.(49명)
二. 조선조(朝鮮朝) 문과(文科) 방목
조선조 문과등과자 방목(榜目)전체가 현전(現傳)한다.(14명)
三. 조선조 사마시(司馬試) 등과자
조선조 사마방목은 일부만 현전한다.(60명)
四. 고려조(高麗朝) 무인(武人)
고려조는 무과시험이 별도로 없었다.(25명)
五. 조선조(朝鮮朝) 무과(武科) 등과자(444명)
현전하는 무과방목 및 족보와 무과총요 타방목 왕조실록 녹권등 참조
一) 세대와 계파가 분명한 등과자(337명)
二) 방목(榜目)은 있으나 세대나 계파가 불분명(54명)
三) 기타 세대나 계파가 불분명(53명)
六. 조선조(朝鮮朝) 잡과방목(雜科榜目)
一) 역과(譯科) : 52명
방순원(方舜元) 방예남(方禮男) 방호겸(方好謙) 방호정(方好正) 방이민(方以敏) 방효민(方孝敏) 방필규(方必規) 방필항(方必恒) 방홍기(方弘器) 방진량(方震亮) 방진호(方震灝) 방재주(方載宙) 방진양(方震壤) 방유양(方有壤) 방처조(方處祚) 방처겸(方處謙) 방처모(方處謨) 방도유(方道裕) 방태희(方泰禧) 방태수(方泰遂) 방재화(方載華) 방효언(方孝彦) 방효건(方孝騫) 방처구(方處矩) 방세홍(方世弘) 방우서(方禹叙) 방중숙(方重叔) 방희용(方羲鏞) 방익용(方益鏞) 방철용(方徹鏞) 방건용(方建鏞) 방문용(方文鏞) 방한익(方漢翼) 방한덕(方漢德) 방한일(方漢一) 방한성(方漢星) 방한승(方漢昇) 방한시(方漢始) 방한주(方漢周) 방한칠(方漢七) 방한찬(方漢璨) 방한유(方漢儒) 방한종(方漢宗) 방한준(方漢準) 방한필(方漢弼) 방한식(方漢式) 방원영(方元榮) 방진영(方鎭榮) 방세영(方世榮) 방춘영(方春榮) 방대영(方大榮) 방유영(方有榮)
二) 의과(醫科) : 41명
방충효(方忠孝) 방정(方貞) 방진기(方震夔) 방진석(方震奭) 방진강(方震綱) 방진기(方震紀) 방유강(方有綱) 방처화(方處和) 방세정(方世正) 방세완(方世完) 방세균(方世均) 방치령(方致齡) 방태여(方泰輿) 방태지(方泰智) 방태형(方泰逈) 방태규(方泰逵) 방태후(方泰厚) 방응진(方應辰) 방효민(方孝民) 방효직(方孝直) 방효덕(方孝悳) 방효본(方孝本) 방효술(方孝述) 방우주(方禹疇) 방우전(方禹甸) 방우규(方禹圭) 방우구(禹方九) 방우민(方禹敏) 방윤승(方允升) 방재용(方載鏞) 방원용(方遠鏞) 방유용(方惟鏞) 방기용(方夔鏞) 방대용(方大鏞) 방윤국(方允國) 방한주(方漢柱) 방한기(方漢箕) 방한장(方漢章) 방계영(方啓榮) 방은영(方殷榮) 방득영(方得榮)
三) 음양과(陰陽科) : 3명
방중국(方重國) 방현국(方顯國) 방경국(方慶國)
四) 율과(律科) : 7명
방세헌(方世憲) 방덕령(方德齡) 방응하(方應河) 방처의(方處毅) 방효익(方孝翼) 방언성(方彦城) 방재헌(方載憲)
五) 주과(籌科) - 취재(取才) : 3명
주과(籌科)는 취재(取才)형식으로 등용(登用)했다.
방우전(方禹典) 방윤학(方允學) 방원용(方遠鏞)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태종(太宗)의 딸 정선공주(貞善公主)가 문의공(文毅公) 방순(方恂)의 딸 숙녕택주(淑寧宅主)의 며느리(남휘(南暉)의 처)이다.
세종 9남 영해군 손자 벽계도정(碧溪都正, 휘 終叔 1508년생 : 황진이의 연인)의 형인 송계군(松溪君) 현부인(縣夫人) 온양 방씨(20세 병조판서 방유령(有寧)의 딸).
지돈녕공 방호의(方好義)의 배우자가 세종의 증손 봉산군(鳳山君) 이돈(李敦)의 딸.
훈도공 방준(方準)의 증손 무과 출신 증참판(贈參判) 방승익(承翼)의 배우자가 세종의 고손 명산도정(明山都正) 이손(李遜)의 딸
세조의 증손 연창군(延昌君:1509년-1566년) 이학수(李鶴壽)의 후배가 지돈녕(知敦寧) 방호의(方好義)의 딸.
성종(成宗)의 현손이자, 문성군(文成君)의 차자 한양수(漢陽守: 휘 世柱)의 배(配)가 온양방씨 25세 선무원종3등공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휘 승남(承男)의 딸.
철종 후궁 숙의 방씨(淑儀 方氏)
항렬자
본관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일대의 지명이다.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다.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탕정주(湯井州)로 승격되어 총관(摠管)이 파견되었다. 757년(경덕왕 16년)에는 탕정군으로 강등되었으나 음봉현(陰峰縣)·기량현(祈梁縣)·평택현(平澤縣)을 영현으로 관장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 온수현으로 강등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온수와 신창(新昌)을 온창현(溫昌縣)으로 병합하였다가 1416년에 다시 온수현을 분리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온양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6년에 충청남도 온양군이 되었다. 1914년 온양군·신창군을 아산군으로 통합하였다. 1973년 온양읍이 1986년에 온양시로 승격되어 아산군에서 분리되었다가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하여 아산시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방(方)씨는 충청도 온수(溫水; 아산) · 신창(新昌; 아산) · 니산(尼山; 논산) · 임천(林川; 부여) · 태안(泰安), 경기도 지평(砥平; 양평), 전라도 만경(萬頃; 김제), 경상도 상주(尙州) · 군위(軍威) 등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화재
평택 원정리 충효정문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
인구
1985년 17,933가구 75,290명
2000년 19,961가구 64,128명
2015년 80,445명
각주
외부 링크
온양 방씨 중앙종친회
성남향토문화백과 - 온양 방씨
영천향토문화백과 - 온양 방씨
온양
온양
충청남도 소재 성씨
아산시 출신
중국계 한국인의 성씨 |
157047 | https://ko.wikipedia.org/wiki/FV4201%20%EC%B9%98%ED%94%84%ED%8B%B4 | FV4201 치프틴 | FV4201 치프틴()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영국의 주력전차였다. 이는 당시에 가장 진보된 전차에 속했고, 주포와 장갑은 1970년대 후반까지는 가장 강력했다. 치프틴은 또한 뒷쪽으로 드러누운 조종사의 위치를 채택하여, 차체의 높이를 낮추고 경사를 크게 기울였다.
개관
치프틴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등장한 센츄리온 계열 전차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영국은 전쟁 기간 동안 그들의 전차가 적군에 비교하여 방어력과 화력이 충분하지 않아 당시의 우수한 독일 전차와 대면했을 때에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센츄리온 개발에 참여했던 레일랜드(Leyland)는 1956년 새로운 전차의 설계 원형을 만들어 내었고, 새 전차를 위한 국방성 설명서를 제작하게 되었다. 설계는 1960년대 초반에 받아들여졌다. 치프틴은 가능한 만큼 방어되도록 하였으며, 강력한 120 mm 강선포를 장착하였다. 무거운 장갑은 기동력을 감소시켰으며, 특히 엔진 출력은 제한되어 치프틴의 단점이 되었다. 선택된 엔진은 예상보다 출력이 좋지 않았다.
설계
치프틴의 설계는 크게 경사진 차체와 포탑을 포함한다. 현가장치는 ‘홀스트만 보기(Horstmann bogie)’형으로, 궤도를 보호하기 위해 측면에 스커트가 있었다. 엔진은 2행정의 서로 마주보는 대향 피스톤이었고, 가솔린과 디젤 모두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치프틴의 초기 개발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합작은 영국에 의해 취소되어 이스라엘이 독자적으로 메르카바 주력전차를 개발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운용
다른 유럽의 경쟁 전차들과 마찬가지로, 치프틴은 중동에 많은 수가 판매되었다. 이전의 센츄리언 전차와는 달리, 나토(NATO)나 연방국가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치프틴은 전투에서 그 수행 능력을 입증하였고, 전체적인 개선과 지역적인 요구에 맞추어 강화될 수 있었다. 치프틴 전차는 1990년대까지 꾸준히 개선되다가 치프틴의 영향을 받은 챌린저로 대체되었다. 영국 육군에서는 1995년까지 사용되었다.
치프틴의 첫 원형은 1967년에 도입되었다. 치프틴은 이란, 쿠웨이트, 오만, 요르단이 포함하여 최소한 6개국에 공급되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판매는 영국 정부에 의해 취소되었다(1969년). 영국 이외에 가장 많이 판매한 나라는 이란으로, 1979년 이란 혁명 전에 1,000대의 'Mk5(P)'를 구입하였다. 개량형인 4030 시리즈가 도입될 예정이었으나, 이에 취소되었다. 전차의 대표적 전투는 1980년 ~ 1988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개량형
치프틴 Mk 1 : 훈련용 차량, 1965 ~ 1966년.
치프틴 Mk 2 : 650 마력 엔진의 최초 모델
치프틴 Mk 3 : 장비 추가
치프틴 Mk.5 : 동력장치 개선, 화생방 방어 시스템
치프틴 Mk.6 ~ 9 : 성능 개선
치프틴 Mk.10 : 스틸 브류(Stillbrew)승조원 방호 증가장갑을 포탑 전면과 포탑링을 감싸는 형태로 장착한 모델
치프틴 Mk.11 : 탐조등이 제거되고 Thermal Observation and Gunnery System (TOGS)로 명명된 열상장비를 장착한 모델로 Barr and Stroud에서 제조되었다.
치프틴 Mk.12/13 : 성능 개선이 제안되었으나, 챌린저 2의 등장으로 취소되었다.
FV4205 AVLB: 교량 설치 차량
FV4204 ARV/ARRV : 무장 복구·수리 차량
치프틴 막스만: 막스만(Marksman) 포탑 장착
치프틴 지뢰제거차량 :
치프틴 AVRE : 치프틴 전투공병차량(공병전차)
치프틴 세이버 : 1쌍의 30 mm AA 포탑
칼리드 (Khalid)(4030P2J - P)/Shir 1 : 요르단/이란에서 사용
무기수송차량
셔2 (Shir 2) : 이란에서 주문하였으나, 이란 혁명으로 수출이 중단된 것이다. 이로 인해 방산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처하자 영국 육군이 급히 셔2를 챌린저1로 채용하게 된다.
외부 링크
FAS.org
영국의 전차
주력전차 |
1130221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A%B7%9C%EA%B5%B0 | 정규군 | 정규군(正規軍, regular army)은 국가의 공식적인 군대이다. 민병, 사병, 용병 등의 비정규군과는 대조된다.
상비군
예비역
군사 용어 |
1764496 | https://ko.wikipedia.org/wiki/%EC%B9%98%EB%A5%B8%ED%95%98%EC%9A%B0%EC%8A%A4%20%EB%B3%80%ED%98%95 | 치른하우스 변형 | 치른하우스 변형()은 독일의 수학자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s)에 의해 제안되고 증명된 방법이다. 2차 이상 다항식에서 포물선 또는 보다 복잡한 곡선을 결과적으로 가정했을 때 그 축과의 관계를 정리한 것이다.
2차식 이상에서의 다항 방정식 변형을 위한 과정에 응용된다.
2차방정식에서의 과정
우선,
따라서,
의 형태로 정리된다.
이러한 압축정리()를 위한 값 는 차함수의 곡선 꼭지점 및 축의 정보이다.
여기서 는 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절차로 정리하는 것은 차고차항이 압축되어 없어지게 함으로써 방정식을 보다 단순화시킬 수 있게 된다.
1786년에 브링(E.S. Bring)은 일반적인 5차 방정식이 이러한 형태로 축소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응용
다항 방정식에서 양변의 각 항들을 해당 방정식의 최고차 항( 차항)의 의 계수 로 나눈 다음 의 형태로 치환해서 차고차 항(최고차 항의 바로 아랫차항)의 정보를 변형된 다른 항들로 분산시키고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3차 방정식
은
에서 다음의 꼴로 정리되고,
의 형태로 정보가 압축된다.
그리고
같이 보기
3차방정식
포물선
참고 문헌
C. B. Boyer,수학의 역사. New York : Wiley, pp. 472-473, 1968
각주
다항식
방정식 |
2197051 | https://ko.wikipedia.org/wiki/2014%EB%85%84%20FIBA%20%EC%84%B8%EA%B3%84%20%EC%97%AC%EC%9E%90%20%EB%86%8D%EA%B5%AC%20%EC%84%A0%EC%88%98%EA%B6%8C%20%EB%8C%80%ED%9A%8C | 2014년 FIBA 세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 | 2014년 FIBA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는 2014년 9월 27일-10월 5일 터키 앙카라와 이스탄불에서 열렸다.
개최 도시 및 경기장
참가국
주최국 터키와 2012년 하계 올림픽 여자 농구 우승국인 미국 외에 유럽·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을 통과한 14개국 등 모두 16개 국가가 참가했다.
예선
A조
경기 시간은 모두 현지 시각
B조
경기 시간은 모두 현지 시각
C조
경기 시간은 모두 현지 시각
D조
경기 시간은 모두 현지 시각
결선 라운드
5–8위 결정전
최종 순위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FIBA 농구 월드컵
FIBA
2014년 튀르키예
FIBA
2014년 9월
튀르키예에서 개최된 농구 대회
2014년 여자 농구
2014년 세계 선수권 대회 |
310891 |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E%AC%EA%B4%80%EB%A6%AC | 자재관리 | 자재관리(資材管理)는 생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를 합리적으로 관리하여 생산을 지원하는 일이다. 자재관리의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생산관리의 한 분야이면서 원자재, 노동, 설비의 세 가지의 생산 요소 중 으뜸가는 것과 관계되는 중요한 관리 영역이란 점에서는 견해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매상고의 적지 않은 부분을 재료비가 차지하고 있으며, 기업간의 경쟁으로 인한 자재 관리의 중요성이 인식되도록 이루어져 있다. 자재관리의 목표는 먼저 낮은 가격과 높은 재고 회전율, 낮은 구입비와 재고비, 지속적인 공급과 품질의 안정화 그리고 인건비의 절감과 좋은 대업자 관계, 요원의 양성과 기록의 완비까지도 포함한다. 또한, 그것의 적극적인 목표로는 신자재, 신제품의 개발, 제조 또는 외주에 관한 경제적 결정 방식의 확립, 표준화 제품의 개량, 상호의존적 조화 등을 포함한다.
각주
경제 |
2278432 | https://ko.wikipedia.org/wiki/%EB%B0%B1%EC%84%9D%EB%8F%99%EA%B8%B8 | 백석동길 | 백석동길(白石洞길, Baekseokdong-gil)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255-2에서 부암동 129-33까지를 잇는 도로다. 도로명은 인근의 백석동천에서 인용하여 붙여졌다.
연혁
2010년 7월 2일 : 도로명 주소 고시
주요 경유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노선
부속도로
● : 전 구간 해당
▲ : 일부 구간 해당
✖ : 해당 없음
각주
외부 링크
(서울 종로구)
서울특별시의 도로
서울 종로구의 교통 |
3248381 | https://ko.wikipedia.org/wiki/%ED%8A%80%EB%8B%88%EC%A7%80%20%ED%95%B8%EB%93%9C%EB%B3%BC%20%EA%B5%AD%EA%B0%80%EB%8C%80%ED%91%9C%ED%8C%80 | 튀니지 핸드볼 국가대표팀 | 튀니지 핸드볼 국가대표팀()은 튀니지를 대표하여 국제 경기에 참가하는 핸드볼 국가대표팀이며, 튀니지 핸드볼 연맹이 운영하고 있다.
대회 기록
세계 선수권 대회
1967 - 15위
1995 - 15위
1997 - 16위
1999 - 12위
2001 - 10위
2003 - 14위
2005 - 4위
2007 - 11위
2009 - 17위
2011 - 20위
2013 - 11위
2015 - 15위
2017 - 19위
2019 - 12위
2021 - 25위
아프리카 선수권 대회
1974 - 1위
1976 - 1위
1979 - 1위
1981 - 3위
1983 - 3위
1985 - 2위
1987 - 3위
1989 - 3위
1991 - 3위
1992 - 2위
1994 - 1위
1996 - 2위
1998 - 1위
2000 - 3위
2002 - 1위
2004 - 2위
2006 - 1위
2008 - 2위
2010 - 1위
2012 - 1위
2014 - 2위
2016 - 2위
2018 - 1위
2020 - 2위
2022 - 4위
외부 링크
핸드볼 국가대표팀
핸드볼 |
852363 | https://ko.wikipedia.org/wiki/%EC%95%BC%EB%A7%88%EB%82%98%EC%B9%B4%20%EC%8B%A0%EC%95%BC | 야마나카 신야 | 야마나카 신야(, 1962년 9월 4일 ~ )는 일본의 의학자이며 줄기세포 연구자이다.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소 소장·교수,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 선임연구원, 일본 학사원 회원이다. 학위는 오사카 시립 대학 박사(의학).
2012년에 ‘성숙하고 특화된 세포들이 인체의 세포 조직에서 자라날 수 있는 미성숙 세포로 재프로그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공로로 존 거든과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으로서는 19번째 노벨상 수상자이자 일본의 두 번째 생리학·의학상 부문 수상자이다.
인물
유년 시절부터 학창 시절까지
오사카부 히라오카시(현: 히가시오사카시 히라오카 지구) 출신으로 초등학교는 당초 히라오카히가시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나라현 북서부에 위치한 나라시의 가쿠엔마에로 이사하여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나라 시립 세이와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 후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가쿠엔마에에서 거주했다.
중학교는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덴노지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중학교 3학년 때는 생도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 당시 생도회장은 긴키 대학 이사장과 경제산업대신을 지낸 세코 히로시게였다. 중학교 시절에 유도를 시작했으며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했는데 특히 고교 시절에는 유도 2단을 취득했다. 또한 야마나카와 세코는 자택도 가까워 중·고등학교 6년 간을 동급생이자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어서 같은 전차로 통학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세코도 유도부에 들어가 함께 유도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는 오사카 교육대학 교육학부 부속 고등학교 덴노지 교사(현: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고등학교 덴노지 교사)로 진학하여 아버지로부터 의사가 될 것을 권유받았지만 장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쿠다 도라오의 저서 《생명만은 평등하다》를 읽고 도쿠다의 삶에 감명을 받아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은 고베 대학 의학부 의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부터는 럭비를 시작했다.
임상의 지망으로부터 연구자로 지망하기까지
고베 대학 의학부 의학과를 졸업한 후 국립 오사카 병원 정형외과에서 임상연수의로서 근무했다. 학창 시절에 유도나 럭비를 하면서 10회 이상 골절상을 입는 등 부상이 일상다반사였기 때문인지라 정형외과의 길을 택했지만 다른 의사에 비해 의료 기술면에서 서투르는 등 담당 지도의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고 필요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는 자신을 향해 ‘자마나카’()라고 불리는 일도 있어서 ‘적성에 맞지않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중증으로 된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린 여성 환자를 담당하여 환자의 전신 관절이 변형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중증 환자를 구하는 수단을 연구하기 위해서 연구자의 길을 택하게 됐다.
iPS 세포의 연구
곧바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질리기 쉬운 성격이지만 정형외과에서 하는 일을 단조롭다고 느낀 적도 있어서 병원을 퇴직, 1989년에 오사카 시립 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야마모토 겐지로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약리학 교실에서 미우라 가쓰유키 강사의 지도 하에 연구를 시작했다. 애당초에는 언젠가 임상의로 돌아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지도 교관이었던 미우라는 훗날 “매우 우수하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적당한 시간이 되면 연구를 끝내고 집에 돌아갔다. 누구라도 좋아하게 되는 상쾌한 성격이었다”고 술회했다. 1993년, “Putative Mechanism of Hypotensive Action of Platelet-Activating Factor in Dogs”(‘마취된 개에 있어서 혈소판활성인자의 강압기서’)라는 제목의 논문 제출, 박사학위(의학)를 취득했다. 그러나 박사학위 취득한 후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의 3배 연구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 연구에만 몰두했는데 대부분 잠자리에 들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일이 많았고 고된 일에는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과학 잡지 공모에 닥치는데로 응모하여 채용된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에 박사연구원으로서 유학, 토머스 이넬라리티 교수의 지도 하에 iPS 세포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그 후 미국에서 귀국하여 일본 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PD)을 거친 후 일본 의학계에 복귀, 이와오 히로시 교수의 지도 하에 오사카 시립 대학 약리학 교실의 조수로 발탁됐다. 하지만 (취임 직후 당시의)연구 환경에서 미국과의 격차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고민했으며 악전고투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미국과는 달리 실험용 쥐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실험용 쥐의 관리에 쫓기기도 했다. 또한 당시로서는 iPS 세포의 유용성이 의학 연구 세계에 있어서 중시되지 않았고 바로 도움이 되는 신약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의 이해를 얻지 못하는 등 급기야 반우울증 상태에 몰리기도 했다. 기초 연구를 그만두고 연구의보다 급여가 좋은 정형외과 의사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던 찰나에 우연히 과학 잡지에서 찾아낸 나라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의 공모에 ‘어차피 그만 둘거니까 연구직을 그만두는 계기를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응모했는데 채용에 이르러, 미국 시절과 닮은 연구 환경 속에서 다시 기초 연구를 재개했다. 나라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에서는 매일 아침 캠퍼스에서 조깅하고 컨디션 관리에도 힘썼다.
2003년부터 과학기술진흥기구의 지원을 받아 5년 간 3억 엔의 연구비를 얻고 연구에 종사했다. 연구비 지급 심사 면접을 한 기시모토 다다미쓰는 “잘 될거라고 생각은 안했지만 박력에 감탄했다”라고 말했다. 나라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에서 iPS 세포 개발에 성공하고 2004년에 교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7년 8월부터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 상급연구원을 겸임, 같은 연구소에 마련된 연구실과 일본을 한 달에 한 번을 왕복하여 연구에 전념했다.
iPS 세포의 개발
2006년 8월 25일, 미국의 학술지 《셀》에 교토 대학 재생의과학연구소 교수인 야마나카와 특임조수였던 다카하시 가즈토시 등에 의한 논문이 발표됐다. 논문에 의하면 야마나카 등은 쥐의 배성섬유아세포에 4개의 인자(Oct3/4, Sox2, c-Myc, Klf4)를 도입하는 것으로 ES세포와 같은 분화 다능성을 가진 쥐인공다능성줄기세포(iPS 세포 : induced pluripotent stem cell)를 작성했다. 이 작성에는 다카하시 가즈토시와 함께 야마나카 연구실의 제1기 박사학위 취득자였던 도쿠자와 요시미가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에 있어서 야마나카 아래에서 작성한 Fbx15 노크 인 마우스의 존재가 같은 도쿠자와가 찾아내고 있던 Klf4의 식견과 함께 중요했다고 야마나카는 회고했다.
2007년 11월 21일, 야마나카 연구팀은 연구를 한층 더 진행하여 성인의 피부에 발암유전자 4가지 종류 등의 유전자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ES세포와 유사한 인간 인공다능성줄기(iPS)세포를 생성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그 결과를 논문으로 학술지 《셀》에 발표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같은 날, 세계 최초로 인간의 수정란에서 ES세포를 만든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인 제임스 톰슨도 야마나카의 쥐 iPS 세포 생성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인간 피부에 발암유전자 등 4종류의 유전자를 도입하는 방법을 통해서 인간 iPS 세포를 만드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러한 공적에 힘입어, 대한민국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인 황우석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주춤했던 줄기세포 연구가 단번에 진척을 보일 것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이 연구가 발표된 2007년 11월 21일에 곧바로 위스콘신 대학교의 연구에 지지를 표명하여 전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일본 정부도 그해 11월 23일, 5년에 70억 엔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11월 28일에는 종합 과학 기술 회의에서 당시 후쿠다 야스오 내각총리대신은 자금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표명했다.
iPS 세포의 연구 자금 모금 활동
마라톤을 취미로 삼아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 시절에는 매일 아침 캠퍼스를 누비며 조깅했고 교토 대학에 옮기고 난 이후에도 점심시간에 가모 강 주변을 30분 정도 뛰기도 한다. 일본에 기부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기부 모금을 위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2012년 3월 11일에 열린 교토 마라톤에서 야마나카는 자신의 완주를 조건으로 내걸고 소위 ‘크라우드 펀딩’으로 불리는 모금 방법에 의한 iPS 기금에 기부를 해달라고 호소했는데 금액은 무려 1,000만 엔 이상의 기부가 모였다. 마라톤에 출전한 야마나카는 4시간 29분 53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또한 2007년도부터 2011년도까지 6억 엔 이상의 연구 예산이 일본 학술진흥회로부터 야마나카 연구 그룹에 지급됐다. 2013년 10월 27일에 열린 제3회 오사카 마라톤에 야마나카는 재차 모금 활동을 지원하는 ‘자선 대사’로 출전하여 4시간 16분 38초 만에 완주했다.
2015년에 교토 마라톤에 출전하여 3시간 57분 31초 만에 완주했고 2017년 교토 마라톤에서는 54세 나이에 3시간 27분 45초, 이듬해 2018년 벳푸 오이타 마이니치 마라톤 대회에선 55세 나이에 3시간 25분 20초로 자신의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노벨상 시상식 후에 맡겨 뒀던 상장과 메달을 받아든 야마나카는 현장에 있던 기자 중 한 명이 “혹시 한 번 메달을 깨물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물음에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귀중한 것이라서요”라고 대답했다. 상장과 메달에 대해서는 “전시는 안 할 거다. 소중한 곳에 보관해 두겠다. 앞으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해 나갈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2013년 1월, 아베 신조 내각의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대신은 예방한 야마나카에게 유도만능줄기세포 연구에 대해서 향후 10년 동안 1,100억 엔 규모의 장기적인 지원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또한 노벨상 수상 기자 회견에서 “집에서 세탁기를 한창 수리하고 있을 때 수상 소식을 접했다”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2012년 10월 19일에 노다 요시히코 내각은 각료 간담회에서 노벨상 수상 축하금으로 야마나카에게 세탁기 구입비 16만 엔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2020년 3월 19일, 전세계에 급속히 퍼지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스스로 정보를 발신하기 위해서 ‘야마나카 신야에 의한 신형 코로나바이러스 정보 발신’()이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가족
아버지 야마나카 쇼자부로는 도시샤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조부인 야마나카 구마키치가 창업한 재봉틀 부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 ‘야마나카 제작소’를 운영했으나 향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외가 쪽인 스가이가()는 오사카에서 용접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소실됐다. 종전 후에는 오이타현 벳푸시로 이주하여 선물용 과자 제조·판매를 하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이자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교제했던 피부과 의사인 아내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야마나카는 81세를 맞은 어머니에게 수상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사건과 논란
iPS 세포 연구소의 부속 동물 실험 시설에서 2011 ~ 2013년 사육실 등에서 관리되고 있던 실험용 유전자 조작 쥐가 시설 내의 별도의 방에서 발견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2013년 연말에 문부과학성이 교토 대학에 대해 구두로 엄중주의 조치를 취했다. 이듬해 2014년 3월에 이 건과 관련해서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쥐가 시설 바깥으로 이탈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STAP 세포에 관한 논란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2014년 5월 1일에 신초샤가 주간 신초 골든위크 특대호의 주요 기사로 2000년에 《EMBO Journal》지에 발표된 논문에 대한 지적을 보도했다. 이 지적은 STAP 세포 논란이 일고 있는 와중에 지명도를 높여갔던 11jigen이 2013년에 자신의 블로그에서 ‘날조된 지적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기재돼 있던 것으로, 원문은 2채널에 투고된 ‘날조, 부정 논문 종합 스레네오 2’의 240번째 댓글(2013년 3월 30일)과 511번째의 댓글(2013년 4월 6일)이다. 홍보가 지적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조사를 마쳤던 iPS 세포 연구소는 신초샤로부터 연락을 받아 주간 신초가 발매되기 직전에 기자 회견을 열어 야마나카가 날조와 허위로 했다는 것을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다만 야마나카는 14년 전의 실험노트 일부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사과 기자회견 후 11jigen은 이러한 지적을 했던 것은 ‘익명 A씨’라고 트윗했고 2채널에서 지적했다던 익명 A는 웹사이트 ‘일본의 과학을 생각한다’ 중에서 ‘날조 문제에 대한 분노를’이라는 토픽에 있어서 왜 사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언급했다(이 발언은 2017년 1월 해당 웹사이트 관리자에 의해서 삭제됐다). 논문을 게재한 《EMBO Journal》지는 부정없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이 지적의 타당성이나 14년 전의 실험 노트를 보관하는 문제에 사죄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일부 연구자들이 의문을 제기하여 규슈 대학의 나카야마 게이이치 교수 등은 ‘트집 잡다’라고 비판했다. 한편, 디오반 사건이 발각된 계기를 만든 유이 요시키 조교수는 지적된 그림 7B의 우측 8개의 표준편차 일치는 매우 기묘하다고 《International Journal of Stem Cells》지를 통해서 주장했다. 다만 11jigen는 그림 7B에 대해서 엑셀 조작에 무심코 실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야마나카는 2014년 신경제연맹 이노베이션 대상 시상식과 2016년 긴키 대학 졸업식에서 이 사과 기자회견이 위에서 말한 쥐 관리의 미흡에 대한 기자회견과 함께 힘들었던 사실을 언급했다. iPS 세포 연구소의 연보나 뉴스레터에는 이 사과 기자회견의 보도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적나라하게 게재돼 있다.
공저자였던 2보의 논문에 연구 부정이 있었다는 인정이 2015년에 구마모토 대학에서 발표됐지만, 야마나카의 연구 부정에의 관여에는 인정되지 않았다.
iPS 세포 연구소의 특정 거점 조교가 연구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2018년 1월에 인정됐다. 이 건에 대한 감독 책임을 물어 처분을 받음과 동시에 급여를 자진 반납했다.
주요 경력
1975년 3월 : 나라 시립 세이와 초등학교 졸업
1978년 3월 :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덴노지 중학교 졸업
1981년 3월 : 오사카 교육대학 교육학부 부속 고등학교 덴노지 교사 졸업
1987년 3월 : 고베 대학 의학부 의학과 졸업
1987년 4월 : 오사카 시립 대학 의학부 정형외과학교실 입학
1987년 7월 : 국립 오사카 병원 임상연수의(1989년 6월까지)
1989년 4월 : 오사카 시립 대학 대학원 의학연구과 약리학 전공 박사 과정 입학
1993년 3월 : 오사카 시립 대학 대학원 의학연구과 약리학 전공 박사 과정 수료, 박사(의학)
1993년 4월 :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 박사연구원
1996년 1월 : 일본 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
1996년 10월 : 오사카 시립 대학 의학부 조수(약리학 교실)
1999년 12월 :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 유전자교육연구센터 조교수(동물분자공학 부문)
2003년 9월 :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 유전자교육연구센터 교수(동물분자공학 부문)
2004년 10월 : 교토 대학 재생의과학연구소 교수(재생유도연구 분야), 2005년 3월까지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 유전자교육연구센터 교수 겸임
2005년 4월 :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 대학원 바이오사이언스 연구과 객원교수(2007년 3월까지)
2007년 8월 :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 상급연구원(Senior Investigator)
2007년 9월 :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해부학 교수
2008년 1월 : 교토 대학 물질-세포 통합 시스템 거점 iPS 세포 연구 센터장
2010년 4월 :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소 소장
2010년 9월 :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 영예교수
2012년 6월 : 국제줄기세포학회(ISSCR) 이사장
2012년 10월 : ‘성숙하고 특화된 세포들이 인체의 세포 조직에서 자라날 수 있는 미성숙 세포로 재프로그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공로로 영국의 존 거든과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
2016년 3월 : 히로시마 대학 특별영예교수
2017년 9월 : 2025년 국제 박람회 유치 특사
2019년 8월 : ‘어린이 책의 숲 나카노시마’ 명예관장
2019년 9월 : 일반재단법인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 재단 대표이사
수상 경력
2004년 : 골드 메달(제10회) ‘도쿄 테크노 포럼 21상’ - 《초기배의 분화나 종양 형성을 조절하는 인자의 발견과 재생 의료에의 응용》
2006년 : 제3회 일본 학술진흥회상 - 《세포의 핵을 초기화하는 유전자의 해석과 다분화능을 가진 줄기세포의 수립》
2007년 : 제25회 오사카 과학상 - 《세포핵을 초기화하는 유전자의 분류와 다능성 줄기세포의 수립》
2007년 : 아사히상 - 《만능 세포 제작에 관한 새로운 방법의 개발과 실증》
2007년 : 이노우에 학술상
2007년 : 마이엔부르크상 - Meyenburg Award 2007 ‘Meyenburg Foundation / German Cancer Research Center (DKFZ)’
2008년 : 로베르트 코흐상
2008년 : 과학 기술 특별상
2008년 : 쇼상(생명과학·의학 부문) - 인공다능성줄기세포(iPS 세포)의 연구
2008년 : 우에하라상(다능성줄기세포의 유지와 유도에 대해)
2008년 : 야마자키 데이이치상(다능성줄기세포의 유지와 유도)
2008년 : 시마즈상(인공다능성줄기세포에 의한 생체 반응 예상에 대해 : 일본 생화학회 추천)
2008년 : 다케다 의학상(다능성줄기세포의 유지와 유도)
2008년 : 주니치 문화상 수상
2008년 : 마스리상
2008년 : 로젠스틸상
2009년 : 가드너 국제상
2009년 : 앨버트 래스커 기초 의학 연구상(존 거든과의 공동 수상)
2010년 : 은사상·일본 학사원상
2010년 : 발생생물학 마치 오브 다임스상
2010년 : 톰슨 로이터 선정 ‘노벨상 수상 예측 인물’
2010년 : 교토상 첨단기술 부문
2010년 : 발찬상
2011년 : 울프상 의학 부문 - ‘인공다능성줄기세포(iPS 세포) 연구에의 혁신적인 공헌’(MIT 교수인 루돌프 재니쉬와의 공동 수상)
2011년 : 킹 파이살 국제상
2011년 : 올버니 의료센터 상
2012년 : 밀레니엄 기술상
2012년 : 노벨 생리학·의학상(존 거든과의 공동 수상)
2013년 : 생명과학 돌파구 상(Breakthrough Prize in Life Sciences)
상훈·영예
2008년 : 자수포장
2008년 : The 2008 TIME 100 - The World's Most Influential People(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명)
2010년 : 문화공로자
2011년 : 미국 과학 아카데미 외국인 회원
2012년 : 문화훈장
2012년 : 교토부 특별영예상
저서
논문
2006년에 《셀》에 게재된 논문이며 쥐의 세포에서 다능성줄기세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음을 보고한 것으로 2012년에 노벨상 수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논문이다. 세포 분화 과정은 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고 역행도 가능하다는 점, 즉 세포의 만능성을 실질적으로 증명한 보고서였다. 《셀》은(지연형) 오픈 액세스 잡지이므로, 링크된 곳에서 논문 전체를 읽을 수 있다. 교토 대학의 학술 기관지 ‘KURENAI’에서도 해당 논문의 본문 사본이 공개돼 있다(hdl: 2433/159777).
2007년에 《셀》에 게재된 논문이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쥐로 성공을 거둔 방법을 인간에게 응용하여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고한 것으로 성인의 피부 세포에서 다능성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음을 알렸다. 이 논문은 인간에게 있어서 재생의료(자기 신체의 일부에서 이식용 장기를 만들어내는 것, 예를 들면 피부로 장기를 만드는 것 등)의 구체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논문으로 사회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2008년에 《사이언스》에 게재된 논문. 어른 쥐의 간과 위세포에서 다능성줄기세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음을 보고한 논문이다. 이 논문은 일본어 번역본을 열람할 수 있다.
인공다능성줄기세포 - 2008년에 사이언스에 게재된 야마나카의 논문과 2007년 《셀》에 게재된 제임스 톰슨이 작성한 논문의 일본어 번역
야마나카 신야, iPS 세포 연구의 진전 - 일본 소화기내시경학회잡지, 2012년 54권 Supplement2호 p.2604,
후나코시 슌스케, 야마나카 신야, 요시다 요시노리, 일본에서 개발된 세포: iPS 세포 - 순환기 전문의, 2015년 23권 2호 p.299-304,
2009년에 야마나카가 일본어로 쓴 iPS 세포에 대한 해설이다. 링크된 곳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국립 정보학 연구소 수록 논문 - 국립 정보학 연구소
서적
전문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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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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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서적
《새로운 발상의 비밀 - 노벨상을 수상한 두 과학자의 사고법과 인생 이야기》, 야마나카 신야·마스카와 도시히데 저, 김소연 옮김(해나무, 2013년)
《가능성의 발견 - 노벨상 수상자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자전 에세이, 놀림받던 의사에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기까지》, 야마나카 신야 저, 김소연 옮김(해나무, 2013년)
관련 항목
배아줄기세포(ES세포)
유도만능줄기세포(iPS 세포)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소
지식 재산권
각주
주해
출전
외부 링크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소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소 - 야마나카 신야 연구실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소 - 보도용 사진 소재
일반재단법인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 재단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 Shinya Yamanaka, MD, PhD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Gladstone Institutes - Shinya Yamanaka, MD, PhD
http://www.kyoto-u.ac.jp/notice/05_news/documents/071121_11.htm - 교토 대학
야마나카 신야 - KAKEN 과학 연구비 조성 사업 데이터베이스
야마나카 신야 - 연구자 Resolver
야마나카 신야 - 논문 일람(CiNii)
야마나카 신야 - J-GLOBAL
야마나카 신야 - Researchmap
야마나카 신야에 의한 신형 코로나바이러스 정보 발신()
- NHK
- NHK
노벨상 수상 관련
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2012 - Shinya Yamanaka - 노벨 재단 홈페이지
야마나카 신야 iPS 세포 연구소장·교수가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2012년 10월 8일) - 교토 대학
교토 대학 메일 매거진(호외) - 교토 대학
야마나카 신야 iPS 세포 연구소장·교수의 동정(2012년 12월 4일 ~ 14일) - 교토 대학
196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의사
일본의 의학자
일본의 생물학자
세포생물학자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문화훈장 수훈자
자수포장 수훈자
앨버트 래스커 기초 의학 연구상 수상자
울프상 의학 부문 수상자
일본 학사원상 수상자
교황청 과학원의 회원
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고베 대학 동문
오사카 시립 대학 동문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동문
교토 대학 교수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교수
히가시오사카시 출신 |
1700598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91%20%281879%EB%85%84%29 | 이광 (1879년) | 이광(李光, 1879년 ~ 1966년)은 대한민국의 항일독립운동가이다. 충북 청주 출생이다.
생애
충청북도 청주(靑州) 사람이다.
항일투쟁의 준비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고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열린 신민회 간부회의에서 국내에서는 광복운동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과 인접한 만주지방에 독립운동 기지를 확보하여, 민주정부와 군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김구(金九) 이승훈(李昇薰) 등은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로 하고 그를 비롯하여 이회영(李會榮) 이동녕(李東寧) 주진수(朱鎭壽) 장유순(張裕淳) 등은 독립운동에 적당한 지점을 매수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만주에 간 그들은 남만주(南滿洲)의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에 알맞은 기지를 선정하였다. 이 지방은 인가가 드문 황량한 미개지였으나, 땅이 기름지고 장래 발전성이 많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이리하여 그해 겨울에 제1차로 이철영(李哲榮) 이시영(李始榮) 이회영(李會榮) 형제와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 김형식(金衡植) 황만영(黃萬英) 이명세(李明世) 등과 함께 그도 만주로 떠났다. 그리하여 1911년 봄에 일찍이 신민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독립기지 설치, 군관 양성의 사업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경학사는 농사짓고 배워서 독립 국민의 자질을 갖추고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자는 의미요, 신흥강습소는 조국 광복의 핵심 인물인 청년 군관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는 잠시 신흥학교의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상해, 북경, 남경 생활
1912년에는 북경(北京)으로 가서 신규식(申圭植)이 영도하는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19년 2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 대표 39명 중 1인으로 참가하여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애국지사들은 상해(上海)로 집결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임시정부의 설립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1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위원으로 조성환(曺成煥) 한세량(韓世良)과 함께 북경주재(北京駐在) 특파원의 임무를 맡아 교민들의 거주권 확보와 생활안정 등, 교민의 생계를 보호하였다. 1930년에는 북경(北京)에서 박용태(朴龍泰) 등과 대한독립당주비회(大韓獨立黨籌備會)를 결성하고 기관지 한국지혈(韓國之血)을 순간(旬刊)으로 발행하였는데 그는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2년 9월에는 남경(南京)에 집결한 독립투사들과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하고 그 간부가 되어 홍진(洪震) 조완구(趙琬九) 조소앙(趙素昻) 현익철(玄益哲) 조경한(趙擎韓)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선전 활동에 전념하였다. 1938년에는 장사(長沙)에서 임시정부 호남성(湖南省) 외교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해방 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10월 15일 임시정부 환국에 앞서 교포 보호를 위해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하여 임시정부가 환국한 뒤의 중국정부와의 연락업무 및 교포 송환문제와 기타 처리할 일을 맡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화북(華北) 한교선무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중국 동북 일대에서 팔로군(八路軍)에 의해 포위 당하고 있는 교포들을 중국 정부 및 미군과 교섭하여 구출해 내었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각주
1879년 출생
1966년 사망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무오독립선언 연서자 |
1237567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93%9C%EB%A0%88%EC%9D%B4%20%EB%8F%8C%EA%B3%A0%EB%A3%A8%ED%82%A4 | 안드레이 돌고루키 | 안드레이 돌고루키(, 1111년경 ~ 1174년 6월 28일)는 유리 돌고루키와 메쇼라인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류리크 왕조 출신이며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시조이다. 나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안드레이"라는 뜻의 안드레이 보골륩스키()라고 불렸다.
1147년 영지를 수즈달에서 블라디미르로 옮겼는데, 이로써 블라디미르 대공국이 형성되었으며, 1169년에는 키예프를 점령하고 키예프 대공의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루스 대공위의 중심지를 키예프 대공에서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옮기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으나, 그의 세력 팽창을 경계하던 일부 보야르들에 의해 1174년 암살당했다.
외부 링크
1110년 출생
1174년 사망
살해된 12세기 군주
블라디미르 대공
류리크 왕조
유리가
러시아 정교회 성인
기독교 시성된 왕족 |
1744561 |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B%B3%B5 | 허복 | 허복(許福, ? ~ ?)는 전한 중기의 제후로, 승상 허창의 손자이다.
행적
원수 2년(기원전 121년), 아버지 허안여의 뒤를 이어 백지후(柏至侯)에 봉해졌다.
원정 2년(기원전 115년), 간음한 죄로 귀신에 처하고 봉국은 폐지되었다.
출전
사마천, 《사기》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
반고, 《한서》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
생몰년 미상
전한의 열후 |
874991 |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82%B0%EA%B3%A0%EB%93%B1%ED%95%99%EA%B5%90 | 나산고등학교 | 나산고등학교(羅山高等學校)는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삼축리에 있었던 공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61년 4월 20일 : 나산중학교 개교, 초대 교장 김동식 선생 취임
1966년 11월 19일 : 학교법인 실림학원 설립인가
1984년 11월 27일 : 나산고등학교 설립 인가
2011년 2월 3일 : 제7대 교장 서인규 선생 취임
2012년 2월 8일 : 제25회 졸업식 거행(총 2012명 배출)
2013년 2월 6일 : 제26회 졸업식 거행(총2074명 배출)
2014년 2월 6일 : 제27회 졸업식 거행(총2136명 배출)
2014년 3월 1일 : 나산고등학교 공립 전환
2016년 2월 29일 : 폐교
주요 동문
참고 자료
각주
함평군의 학교
1984년 개교
2016년 폐교
대한민국의 폐교된 고등학교 |
3150760 | https://ko.wikipedia.org/wiki/%EC%9A%B4%ED%84%B0%EC%A0%A0 | 운터젠 | 운터젠(Unterseen)은 스위스 베른주에 있는 인터라켄-오버하슬리에 속한 역사적 자치체이다.
운터젠은 글자그대로 하자면, 저지대 호수(Lower Lake)를 의미한다. 독일어로 ‘운터(unter)’는 ‘아래에’를 뜻하고, ‘젠(seen)’은 ‘호수’를 의미한다.(현대 독일어는 –제 see) 운터젠은 툰 호수의 동쪽 기슭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 치엔베르크강 아래의 롬바흐강, 남쪽으로는 아레강 사이의 두 수로 사이에 있고, 이 두 강 모두 툰 호수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마을은 주로 아레강의 북쪽 강 언덕에서 발견된다. 강은 브리엔츠호에서 툰호로 흐른다. 아레강 건너편에는 인터라켄 마을이 있다. 두 지방 자치체 모두 가파른 산들 사이에 있는 평평한 충적지에 위치해 있으며, 뵈델리(Bödeli)라고 불렸다.
2014년을 기준으로 23,300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소규모 복합체 인터라켄(Interlaken)에 속해 있다.
인터라켄과 함께 운터젠도 베른 고원의 중요한 관광지로, 소위 알프스 3대봉이라고 일컫는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역사
사람이 거주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신석기 시대로 신석기가 발견되고 있다. 2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묘지가 이 근처에 만들어졌다. 중세 전기의 무덤이 있기 때문에 그 무렵에는 거주자가 있었고, 중세 성기까지는 3개의 성채가 쌓여 있다. 1133년에 인터라켄 수도원이 아레강의 해안에 세워지기 전에 이 땅은 ‘인터라쿠스’(Interlacus)라고 불렸다. 인터라켄 마을은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1239년에는 ‘인더라펜 마을’(villa Inderlappen)이라 불렸으며, 1280년에는 ‘인터라켄 시’(civitas Inderlappen)로 표기했다.
운터젠의 도시는 1279년 6월 13일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에센바흐-오버호펜 가문의 벨토르트 3세 남작에게 두 호수 사이에 성채를 짓도록 허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운터젠’이라는 이름의 운터(unter)는 중세 독일어로 ‘사이에’, 젠(seen)은 ‘호수’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것이 도시명의 기원으로 유래했다. 이 허가 합의 속에서 요새는 도시행정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1281년경, 인터라켄과 운터젠은 모두 ‘인더라펜 혹은 운터제펜시’(stat ze Inderlappen oder Undersewen)로 불렸으며, 1291년에는 ‘운터제벤이라 불리는 인터라펜’(Inderlappen, genant Undersewen)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지어진 바이세나우성(Weissenau)과 후세의 노이하우스, 그리고 운터젠 자체가 알프스 각지를 잇는 요지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였다. 또한 바이세나우성과 인터라켄 수도원, 그리고 운슈푼넨성(Sunspunnen)에 거주하고 있는 운슈푼넨 삼자의 지배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래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오스트리아 방면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옛 스위스 연방 측 베른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운터젠의 성채는 현지 귀족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강대해지는 수도원의 세력을 억제하고, 또 아레강에 놓은 다리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암투가 일어났다. 인터라켄 수도원과의 분쟁 중에 건립된 신흥 도시 운터젠은 일찍부터 베른이 뒷배경이 되어주기를 요청했다.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구 스위스 연방이 승리하자 마을들은 베른의 통치하에 들어갔고, 베른의 관리관이 부임하였다.
종교 개혁기 동안 운터젠은 인터라켄 수도원에 맞서 베른에 붙었다. 베른은 1191년에 건설된 신흥 도시였지만, 로마 교황과 오랜 논의 후 로마 카톨릭에서 이탈하고 있어, 마침내 인터라켄 수도원을 지배하에 두었다. 그때 베른은 수도원이 남긴 영지에 세금을 쏟았기 때문에, 1528년 베른 고원의 불평분자들이 봉기했지만, 운터젠은 이 봉기에서 빠졌다. 봉기군은 하슬리탈과 운터발덴으로 나아갔고, 베른군은 운터젠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10월 29일 봉기군은 운터젠을 점령했지만, 베른군이 툰 호수에서 상륙했였고, 운터젠 주민도 비협조적이었다. 때문에 봉기군은 10월 30일 밤 운터젠과 베델리에서 철수했다. 베른에 대한 충성의 결과, 운터젠은 수도원이 남긴 영지 중 알프제피넨(Alp Sefinen)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1364년 수도원 물레방아에서 불길이 치솟아 운터젠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1470년에는 또다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베른 정부는 시청사를 중심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교회당이 최초 기록된 것은 1353년인데, 이 불로 소실되었다가 불이 난 뒤 같은 해에 재건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무너진 낡은 건물의 일부를 이용하여 1852년에 지은 것이다.
헬베티아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운터젠은 베른의 봉건제 부활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5년과 1808년에 기획된 운슈푼넨 축제는 도시 주민과 교외 주민과의 화해를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고, 정부는 이러한 축제를 금지했다. 1815년에 일어난 인터라켄 소요에는 많은 운터젠 시민이 가세했다. 19세기 초, 도시를 둘러싼 벽과 해자가 파괴되었고, 1855년에는 문이 철거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관광업의 급성장에 운터젠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나중에 그 역할 대부분이 인터라켄에 넘어갔다.
지리
운터젠의 면적은 13.99 km2이다. 이 중 전체 면적의 18.2%인 2.55km2가 농업용이며, 60.1%인 8.43km2가 산림용이다. 나머지 지역 중 2.15km2 (15.3%)는 건물이나 도로, 0.36km2 (2.6%)는 강이나 호수, 0.57km2 (4.1%)는 불모지이다.
건설 면적 중 주택과 건물이 5.8%, 교통 인프라가 3.2%를 차지했다. 공원, 그린벨트, 운동장이 5.5%를 차지했다. 전체 면적의 58.6%가 산림이고 1.5%는 과수원이나 작은 나무 군락으로 덮여 있다. 농경지 중 5.7%는 작물 재배에, 11.8%는 목초지에 사용된다. 시의 물 중 0.2%는 호수에, 2.4%는 강과 하천에 있다. 비생산적인 지역 중 2.7%는 비생산적인 식물이고 1.4%는 식물에게 너무 바위가 많다.
운터제인은 행정구역상 툰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 사이에 있는 뵈델리(Bödeli)라는 충적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인터라켄에서 북쪽으로 아레강 맞은편에 해당하는 위치이다. 툰 호수에 가까운 시골 지역, 강안, 운터레스 스타트펠트(Unteres Stadtfeld)의 골프 코스, 델레보데(Délebode), 치엔베르크(Chienberg), 하더(Harder)의 가파른 산허리에 흩어져 있는 정착지와 숲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9년 12월 31일 시할구였던 암츠베지르크 인터라켄이 해체되었다. 2010년 1월 1일, 새로 창설된 베르발퉁슈크레이스 인터라켄-오버하슬리에 편입되었다.
경제
2011년 기준 운터젠은 1.72%의 실업률을 기록했다. 2008년 기준으로 2,243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중 1차 경제 분야에 종사하는 인원은 63명, 이 부문에 종사하는 사업체는 21개 정도였다. 2차 부문에는 397명, 이 부문에는 50개 사업장이 있었으며 3차 부문에는 1,783명이, 이 부문에는 178개 사업장이 고용하고 있었다. 자치단체에는 2,725명의 주민이 고용되어 있으며, 이 중 여성이 전체 노동력의 47.2%를 차지하고 있다.
2008년에는 총 1,754개의 정규직이 있었다. 1차 부문의 일자리는 40개로 이 중 농업과 어업 분야가 39개로 가장 많았다. 2차 부문의 일자리는 355개로 이중 제조업은 240개(67.6%)가, 건설업은 108개(30.4%)가 가장 많았다. 3차 부문의 일자리 수는 1,359개였다. 3차 부문은 도소매 판매 또는 자동차 수리업 174명(12.8%), 호텔 또는 음식점업 237명(17.4%), 정보산업에는 28명(2.1%), 보험 또는 금융업에는 72명(5.3%), 기술 전문가 또는 과학자 55명(4%), 교육에는 588명(43.3%)이 건강 관리에 종사했다.
2000년을 기준으로 운터젠에는 1,125명의 시내 통근 근로자와 1,761명의 시외 통근근로자가 있었다. 지자체는 근로자 순수 전입으로 1명씩 들어올 때마다 약 1.6명의 근로자가 시군으로 전출한다. 근로인구 중 11.5%가 출근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35.2%는 자가용을 이용했다.
인구
2020년 12월을 기준으로 운터젠의 인구는 5,760명이다. 2010년 기준으로, 인구의 14.5%가 거주 외국인이다. 지난 10년(2000-2010) 동안, 인구는 11.1%의 비율로 변화했다. 이주가 11.1%를 차지했고 출생과 사망이 -0.9%를 차지했다.
인구의 대부분이 독일어(4,636명, 89.1%)를 사용하며, 포르투갈어가 두 번째(110명, 2.1%), 이탈리아어가 세 번째(105명, 2.0%)이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45명과 로만슈어를 사용하는 2명이 있다.
2008년 기준으로 인구는 남성 47.4%, 여성 52.6%이다. 인구는 2,199명의 스위스 남성(40.0%)과 406명의 비스위스계 남성(7.4%)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위스 여성은 2497명(45.5%), 비스위스계 여성은 390명(7.1%)이었다. 2000년에는 전체 인구 중 약 25.3%인 1,314명이 운터젠에서 태어났다. 2091명(40.2%)이 같은 주에서 태어났으며, 755명(14.5%)은 스위스 밖에서 태어났으며, 843명(16.2%)은 스위스 밖에서 태어났다.
2010년 기준으로 어린이와 청소년(0-19세)은 전체 인구의 18.2%, 성인(20-64세)은 61.4%, 노인(64세 이상)은 20.4%를 차지한다.
2000년 기준으로, 지자체에는 2,088명의 미혼자와 결혼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한 사람은 2,370명, 미망인 또는 미망인 419명, 이혼한 사람은 324명이었다.
2000년 현재 1인 가구 949가구, 5인 이상 가구 111가구가 있다. 2000년에는 총 2,306가구(전체의 85.7%)가 영구 입주했으며, 계절별 입주 아파트는 273가구(10.1%)가, 빈 아파트는 113가구(4.2%)였다. 2010년 기준 신규 주택 건설률은 주민 1000명당 9.7호이다. 2011년 시의 공실률은 0.06%였다.
역사적 인구는 다음의 도표와 같았다.
국가중요문화재
운터젠 옛 시가지와 바이세나우성(Weissenau Castle)의 유적지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스위스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운터젠 마을 전체가 스위스 문화유산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각주
외부 링크
운터젠 (공식)
베른주의 국가중요문화재
스위스의 도시
베른주의 지방 자치체 |
855230 | 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C%84%9D%20%EB%8B%AC%EB%A6%B0%20%EC%95%A8%EB%A6%AC%EC%8A%A4 | 주석 달린 앨리스 | 《주석 달린 앨리스(The Annotated Alice)》는 마틴 가드너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주석을 달아놓은 책이다. 1960년 처음 출간되었으며, 한국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현재 절판 되었다.
미국의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1369692 |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C%8B%9C%EC%B9%B4%EC%99%80%20%EB%AF%B8%ED%82%A4 | 요시카와 미키 | 요시카와 미키(吉河 美希, 1981년 10월 2일 - )는 일본의 여성 만화가이다. 혈액형은 A형이다.
내력
"야마토 태풍"으로 67회 주간 소년 매거진 신인 만화상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또, 같은 상으로 "글로리 데이즈"로 가작(佳作)을 수상 후, 2003년에 "매거진 SPECIAL"에서 같은 작품으로 데뷔했다. 그 후, 마시마 히로의 어시스턴트를 맡게 된다.
"매거진 원더"나 "주간 소년 매거진" 잡지에서 단편 연재를 거쳐, 2005년부터, 이 잡지에서 "건달군과 안경양"의 연재를 시작했다.
작품 리스트
건달군과 안경양 ("주간 소년 매거진" 2005년 - 2011년 연재)
괴물 이야기 (엔딩 카드 ‐ 제 4화)
야마다와 7명의 마녀 ("주간 소년 매거진" 2012년 12호 - 2017년 12호)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있다면
아르슬란 전기 (엔딩 카드 - 제 17화)
뻐꾸기 커플 ("주간 소년 매거진" 2020년 9호 - )
비고
같은 "주간 소년 매거진" 내에서 연재되고 있는 "더는, 하지 않으니까."에서는 미인 만화가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 과거의 자신이 자신의 만화 속의 히로인 같았던 것을 폭로하고 있다.
스승
마시마 히로
어시스턴트
키타노 에이이치
사회 공헌 활동 등
동일본 대지진의 이재민의 지원에도 참가했고, 다른 만화가와 공동으로 동일본 대지진 자선 동인지 "pray for Japan"을 집필했다.
각주
외부 링크
198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만화가 |
3281164 | https://ko.wikipedia.org/wiki/%EC%9A%A9%EC%A7%80%EC%9D%B8%EC%9E%90 | 용지인자 | 용지인자(Ninja Warriors, 龍之忍者: Ninja In The Dragon's Den)는 홍콩에서 제작된 원규 감독의 1982년 영화이다. 이원패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오사원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출연
주연
이원패
황정리
사나다 히로유키
조연
전중호
태보
진도요
황정리
오사원
전풍
Shiu Gau-San
권영문
위평오
팽강
제작진
무술감독: 맹해
무술감독: 원규
외부 링크
1982년 영화
윈콰이 감독 영화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영화
쿵후 영화
닌자 영화 |
668096 |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A0%8C%20%EB%8D%B0%EB%A5%B4%EB%94%94%EC%9A%94%ED%81%AC | 에렌 데르디요크 | 에렌 데르디요크(, 1988년 6월 12일 ~ )은 스위스의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세컨드 스트라이커다. 현재 터키의 클럽 앙카라귀쥐와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이다.
클럽 경력
BSC 올드 보이즈
191cm의 데르디요크는 센터백으로도 기용 가능한 강력한 스트라이커다. 그는 스위스 약체 BSC 올드 보이즈와 2005-06부터 프로선수로 활약하였고, 18경기 출장에 10골을 넣었다. 그는 1-6으로 패한 FC 바젤과의 2005년 10월 22일 스위스컵 경기에서도 골을 넣었다.
FC 바젤
FC 바젤은 그의 골감각을 알아보았고, 그가 18세가 된 2006년에 그를 영입하였다. 데르디요크는 2007년 3월 14일 FC 아라우전에서 교체선수로 출장하였다. 4일 뒤, 그는 리그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 또한 아라우와의 경기였다. 2006-07 시즌, 데르디요크는 주로 교체선수로 사용되었고, 단 한경기만 풀타임 출장하였다. 그리고, 1골당 220분의 출장시간 기록을 세웠다. 그는 그 시즌에 U-21 스위스 대표로 차출되었다. FC 바젤의 주 스쿼드원으로써, 데르디요크는 FC 툰과의 2008년 3월 2일 경기에서 첫 해트트릭을 하였다. 2008년 4월 6일, 그는 첫 타이틀로 스위스컵을 획득하였다.
2008년 6월 29일, 잉글랜드 언론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와의 협상을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적기간동안 아무런 협상도 없이 지났다. 2008년 8월 27일, 그는 빅토리아 SC와의 홈 경기에서 2-1로 승리하여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진출권을 획득하였다. 또한, 챔피언스리그 본선에서 데르디요크는 FC 바르셀로나와의 원정경기에서 82분에 1-1 동점골을 넣어 팀의 첫 승점을 획득하였다. 2007-08시즌 끝에, 데르디요크는 바젤의 더블에 기여하였다.
바이어 04 레버쿠젠
스위스 1부리그에서 지속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국가대표팀에서 주목을 끄는 활약을 펼친 뒤,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2009년 5월 28일, 그의 2013년 6월 30일까지 지속되는 4년 계약을 확정지었다. 그는 7월 31일, SV 바벨스베르크와의 DFB-포칼 경기에서 데뷔하였고, 데르디요크는 67분 1-0 결승골을 뽑았다.
국가대표팀 경력
데르디요크는 2008년 2월 6일, 런던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 후반 교체되어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첫 볼터치에 동점골을 넣었지만, 팀은 2-1로 패하였다. 그는 UEFA 유로 2008의 스위스 국가대표에도 포함되었고, 당시 19세로 토너먼트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그는 2회 출장한 2010년 FIFA 월드컵의 최종 23인 엔트리에도 포함되었었다.
수상
바젤
2007-08 스위스 슈퍼리그 우승
2007-08 스위스컵 우승
2008년 우어렌컵 우승
개인
2007-08 바젤 영스타
1988년 출생
스위스의 축구 선수
튀르키예계 스위스인
FC 바젤의 축구 선수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축구 선수
TSG 1899 호펜하임의 축구 선수
카슴파샤 SK의 축구 선수
갈라타사라이의 축구 선수
UEFA 유로 2008 참가 선수
201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유로 2016 참가 선수
살아있는 사람
독일의 외국인 축구 선수
튀르키예의 외국인 축구 선수
스위스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위스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위스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분데스리가의 축구 선수
쉬페르리그의 축구 선수
스위스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
바젤슈타트주 출신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FK의 축구 선수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
우즈베키스탄의 외국인 축구 선수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한 스위스인
튀르키예에 거주한 스위스인
독일에 거주한 스위스인
MKE 앙카라귀쥐의 축구 선수 |
3173248 |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C%99%80%EC%B4%8C%20%28%EC%9D%B4%EC%99%80%ED%85%8C%ED%98%84%29 | 시와촌 (이와테현) | 시와촌()은 이와테현 시와군에 설치되었던 촌이다. 현재의 시와정에 해당한다.
이와테현의 폐지된 시정촌
시와군
시와정 |
1062441 |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84%B1%20%EC%86%A1%ED%95%99%EB%8F%99%20%EA%B3%A0%EB%B6%84%EA%B5%B0 | 고성 송학동 고분군 | 고성 송학동 고분군(固城 松鶴洞 古墳群, )은 경상남도 고성군에 있는 가야의 고분군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19호 고성송학동고분군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고성읍 북쪽의 무기산 일대에 위치한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7기 가량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유적이다. 소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에는 겉모양이 일본이 전방후원분과 닮았다 하여 한일 양국 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있으켰던 제1호분도 위치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
각주
같이 보기
소가야
참고 문헌
경상남도의 사적
송학동 고분군
고성군 (경상남도)의 무덤
가야의 무덤 |
1116469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3%81%EC%9D%98%20%28%EC%B6%95%EA%B5%AC%EC%9D%B8%29 | 이상의 (축구인) | 이상의(1922년 ~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1954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각주
1922년 출생
몰년 미상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195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195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
1954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
623619 | 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B%A5%B4%EB%A7%88%EC%A0%A0%EC%8A%A4 | 피르마젠스 | 피르마젠스()는 독일 서남부 라인란트팔츠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 40,808명(2009).
카이저슬라우테른 남쪽, 프랑스 국경 근처에 위치한다. 츠바이브뤼켄·카이저슬라우테른 부근에 있으며, 자를란트주 경계와도 가깝다. 860년 경 문헌에 처음 언급되었다. 1763년 헤센다름슈타트에 귀속되었다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 사이의 혼란기에 프랑스에 점령되었다. 그 후, 1816년 바이에른 왕국에 속하는 팔츠의 일부가 되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이 도시는 여러 신발 공장이 들어섰고, 독일 제화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팔츠 지역이 바이에른 주에서 분리되어 이 곳은 새로 개편된 라인란트팔츠 주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도 국제적인 신발제조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이미지 갤러리
각주
외부 링크
Stadt Pirmasens 공식 홈페이지
독일의 도시
라인란트팔츠주 |
140493 |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C%9C%A1%EC%B2%A0%ED%95%99 | 교육철학 | 교육철학(敎育哲學, )은 교육학의 영역 중 교육을 왜 해야 하느냐, 교육을 왜 받아야 하느냐에 관한 영역으로 교육의 목적을 설명하는 영역이다. 교육철학에서는 교육의 개념이나 목적 등 교육에 관한 원리나 교육과 관련한 내용을 철학적으로 연구한다.
개요
교육철학의 성격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교육에 대한 철학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교육적 철학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교육철학을 철학의 한 종류로 보는 견해이고, 후자의 경우는 교육이 철학을 규정하는 성격의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미국 사람들은 '교육철학(philosophy of education)'이나 '교육적 철학(educational philosophy)'을 다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교육철학은 실천학으로서의 교육의 의미만으로 정의(定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론학으로서의 철학적 의미만으로 정의할 수도 없다. 또한 이름 그대로 '교육+철학'과 같이 복합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교육과 철학의 결합이 아니고 오히려 두 성격의 분리에서 오는 이점(利點)보다도 반대결과가 나타나기 쉽다. 또 어떤 사람은 교육철학은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이나 가치론적인 철학적 방법을 교육에 응용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서는 교육철학이란 일반철학의 한 시녀(侍女)격으로 떨어지므로 학(學)으로서의 독자성이 논의된다. 이리하여 교육철학은 그 학적인 지위에 대해서 대내·대외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 교육학 내부에서의 도전은 교육심리 및 교육측정 등의 교육 제과학의 발전으로 교육목적의 설정이나 정책수립에 있어서 교육철학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러나 교육과학의 사실적 지식의 단편적인 결과는 어떤 철학적 기준 아래 종합되고 일반성 있게 해석되어야 한다. 더욱이 심리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인류학과 같은 행동과학이 대상으로 하는 마음·사회·인간 등은 자연과학의 대상인 물질과는 달리 복잡하고 유동성 있는 반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철학적 입장에서 교육연구나 교육실천이 이루어졌는가에 따라 큰 차이가 나타난다. 교육 밖에서의 도전이란 교육학은 철학적 방법의 차용자(借用者)이기에 독자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현대의 학문상의 제 방법은 상호융통, 그리고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방법상의 근사성이나 동일성이 반드시 분야가 다른 학문현상의 독자성을 해친다는 생각은 독선적이다. 교육현상은 인간·사회·국가의 여러 현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격의 하나로서,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교육철학의 학적인 의의는 크다고 본다. 더 나아가 교육학의 깊은 원리적인 연구의 결과는 일반철학의 방법상의 발전을 오히려 도와줄 수 있다. 사실에 있어서 일반철학자들이 그들 철학의 이론적 발전을 위한 소재를 교육에서 많이 찾았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교육철학은 이런 뜻에서 앞서 언급된 어떤 견해와 같이 철학을 규정하는 교육적 철학이란 말에 해당한다. 듀이가 철학을 교육의 일반이론이라 하여 교육이론과 철학을 동일시하여 정의한 것은 이해가 간다.
역사
교육학은 이전까지 주로 철학적인 학문이었으므로 다양하게 분화하기 이전까지는 따로 교육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과학적 연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19세기 후반부터는 교육학이 다양한 분야(교육과정, 교육공학 등)로 분화되면서 교육과학과는 다른, 사변적(思辨的) 교육학이 따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교육철학은 교육을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교육의 본질적 의미와 기본적인 문제를 전체적 · 체계적으로 구명(究明)하려는 노력의 산물로써 나타난 것이다.
이전의 교육철학은 교육 전반에 걸친, 특히 교육의 본질이나 이념에 관한 철학적 규명뿐만 아니라 교육의 목적이나 목표, 교육방법, 조직과 제도에 관한 경험 과학적 연구에도 몰두하였으나 경험 과학적 연구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견해에 따라 교육철학의 연구 범위에 대한 입장이 다양하다.
역할
교육철학은 첫째, 교육현상의 본질적인 추구와 원리적 이해를 통해 문제의 해결방향 모색과 목표설정을 위해 심각하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노력이다. 이는 곧 인간과 사회 및 자연현상의 궁극적인 실재(實在)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식론적·가치론적인 노력이다. 현대교육이 교육기술에 과도하게 치중한 나머지 교육현상에 대한 지엽적이고 피상적인 이해만이 계속되고 원리적인 탐구에는 소홀하다. 교육본질에 대한 명상이나 서로 갈등하는 가치 또는 복잡한 사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교육현상에 대해 깊게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둘째, 교육철학은 가치선택의 기준을 제공해 준다. 현대교육에서 과학적인 정확성과 실용적인 능률을 무시할 수 없지만, 때로는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능률을 포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적군에게 포로가 된 한 우군을 구출하기 위해서 1개 중대병력의 생명을 걸고 진격하기로 결심하는 중대장의 의지와 선택 속에서는 실리적인 능률보다 한 전우의 생명과 그 존엄을 중시하는 가치선택의 기준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 교육철학은 일관성 있고 장기적이며 종합적인 판단을 하기 위한 노력이다. 현대교육은 단편적인 정확성을 파는 과학적 지식의 소매상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연속선상에 놓여 있고 여기에 교육의 역사성·현실성·규범성이 있다.
필요성
교육이 성급한 목전의 성과만을 노리고, 직접적 경험에 사로잡혀 원리적 추구도 않고 방향감각을 잃은 채 방황할 때 교육철학이 필요하다. 교육이 형이상학적·인식론적·가치론적인 이해를 결여한 채 한갓 피상적인 기교로 화하고, 깊이있는 사고가 없을 때 교육철학은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준다. 나아가서 교육이 양적으로 평가되고, 능률과 실용이 극단화하여 의미를 묻는 가치기준이 바로서지 못할 때, 교육철학은 그 가치기준을 설정해 주며, 교육이 자기 것에 대한 정립이나 체계를 세우지 못하고 모방에 의해서 맹목적인 실천을 행사하고 있을 때 교육철학이 요청된다. 한국교육은 그 성장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앞에서 말한 모든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의 한국교육은 교육철학의 빈곤 내지는 교육철학 부재의 상황 속에서 자라 왔다. 교육연구소도 교육철학 부재의 교육과학 일변도 연구소인 경우가 많았고, 교사양성을 위한 교직교육도 교육철학 부재의 교육과정을 운영해 왔다. 교육현실도 교육철학 부재의 즉흥 내지는 직접경험 등 교육과학 위주였다. 이러한 한국교육의 상황 속에서 교육의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교육철학이 요청된다. 과거 어떠한 교육방법·교육과정, 심지어는 교육심리까지도 그 당시의 교육철학사상의 주류나 입장이 반영되지 않은 예가 없다. 실용주의에 토대한 듀이의 교육철학 사상은 그 당시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지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한국 교육철학의 빈곤은 바로 한국교육과정이나 방법의 빈곤과 직결되는 것이다. 건전한 교육철학의 정립 없이는 건전한 교육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다.
같이 보기
교육학
교육 이론
참고 문헌
교육
철학의 분과 |
3088357 | https://ko.wikipedia.org/wiki/%ED%8E%98%ED%8A%B8%EB%A3%A8%EC%8B%9C%EC%B9%B4%20%28%EB%B0%9C%EB%A0%88%29 | 페트루시카 (발레) | 페트루시카 ()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및 오케스트라 콘서트 작품이다. 세르게이 댜길레프의 발레 뤼스의 1911년 파리 시즌을 위해 만들어졌다. 원래 안무는 미하일 포킨이, 무대 디자인과 의상은 스트라빈스키의 대본을 도운 Alexandre Benois가 맡았다.
페트루시카는 세 인형의 사랑과 질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페트루시카는 음악, 춤, 디자인을 하나로 통합한다. 그것은 발레 뤼스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원래의 디자인과 안무를 사용하여 일반적으로 수행된다.
구성
《불새》를 완성하는 동안 스트라빈스키는 엄숙한 이교도 의식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현인 장로들은 원 안에 앉아 어린 소녀가 스스로 춤을 추며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봄의 신을 달래기 위해 그녀를 희생하고 있었습니다. 《봄의 제전》의 주제였습니다 . 1910년 6월 《불새》의 놀라운 성공 직후 댜길레프는 새로운 발레에 대해 스트라빈스키에게 접근했다.
1910년 9월 말, 디아길레프는 당시 자신이 살고 있던 스위스 클라렌스의 스트라빈스키를 방문했다. 새로운 발레에 대해 논의하기를 기대하던 댜길레프는 완전히 다른 프로젝트에서 열심히 일하는 스트라빈스키를 보고 놀랐다.
1911년 6월 13일 파리 샤틀레 극장(Théâtre du Châtelet)에서 피에르 몽퇴의 지휘 아래 미하일 포킨의 안무와 알렉상드르 브누아(Alexandre Benois)의 세트로 초연되었다. 타이틀 롤은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맡아 춤을 추었다.
외부 링크
Trois mouvements de Petrouchka의 녹음, Alberto Cobo 2002(피아노)
Klavier-Festival Ruhr 의 Petrushka 교육 웹사이트
발레 루스 작품목록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
3130703 | 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C%9D%91%EC%95%84%EC%9D%B4%EA%BC%B4%EB%A1%9D%EA%B5%B0 | 수응아이꼴록군 | 수응아이꼴록군 는 나라티왓주의 행정 구역이다. 이 지역의 총 인구 수는 2005년 기준으로 69757명이다. 인구 밀도는 km2이다.
행정 구역
나라티왓주의 군 |
1070849 | https://ko.wikipedia.org/wiki/2006%EB%85%84%20%EB%8F%99%EA%B3%84%20%EC%98%AC%EB%A6%BC%ED%94%BD%20%EB%9F%AC%EC%8B%9C%EC%95%84%20%EC%84%A0%EC%88%98%EB%8B%A8 | 2006년 동계 올림픽 러시아 선수단 | 러시아는 2006년 2월 10일부터 26일까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제20회 동계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했다.
메달 집계
종목별 참가 선수 및 메달 수
종목별 성적
노르딕 복합
참고 자료
2006년 동계 올림픽 선수단
올림픽 러시아 선수단
올림픽 |
1251282 |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C%9A%B4%EC%B4%88%EB%93%B1%ED%95%99%EA%B5%90%20%28%EB%B6%80%EC%82%B0%29 | 송운초등학교 (부산) | 송운초등학교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96년 3월 1일: 개교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부산 해운대구의 초등학교
1996년 개교 |
1787381 |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B%B3%B4%EB%AF%BC | 최보민 | 최보민은 다음 사람 등을 가리킨다.
최보민: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
최보민: 대한민국의 가수. 골든차일드의 멤버
같이 보기 |
21218 | https://ko.wikipedia.org/wiki/GP | GP | GP, Gp, gp는 다음 뜻을 가지고 있다.
GP는 "Giant Penguin"의 약자로, 펭수의 사인이다.
GP는 한반도의 휴전선에 있는 휴전선 감시 초소(Guard Post)를 의미한다.
GP는 3-인산글리세르산(glycerate 3-phosphate)의 약자이다.
GP는 종종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화폐 단위로 쓰이기도 한다.
GP는 큰 상을 뜻하는 그랑프리의 약자이다.
G 단백질(G protein)
GP (음반)
중력 퍼텐셜(Gravitational potential)
큰 퍼텐셜(Grand potential)
기하학적 위상(Geometric phase) |
2453568 | https://ko.wikipedia.org/wiki/%EC%95%BC%EB%8B%88%EC%8A%A4 | 야니스 | 야니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야니스 구마스: 그리스의 전 축구 수비수
야니스 루시스: 라트비아의 육상 선수
야니스 착스테: 라트비아의 정치인
야니스 안데토쿤보: 그리스의 농구 선수이자, NBA 밀워키 벅스의 선수
야니스 아나스타시우: 전 그리스의 축구 선수이자 현 축구 감독
야니스 콘토에스: 슈퍼리그 그리스의아폴론 스미르니에서 활동하고있는 그리스의 수비수
야니스 피눕스: 라트비아의 군인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의 마르크스 경제학 계열 경제학자
야니스 달린슈: 라트비아의 육상 선수로 경보에서 활약했다
야니스 밀로노야니스: 미국 태생의 그리스 만화가
야니스 파욱슈텔로: 라트비아의 배우
야니스 페트라키스
같이 보기 |
44688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EC%9A%A9 | 이철용 | 이철용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이철용은 대한민국 문화방송의 성우이다.
이철용(李喆鎔, 1948 ~ )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소설가이며,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같이 보기 |
891751 | https://ko.wikipedia.org/wiki/%EA%B2%BD%EC%83%81%EB%8C%80%EB%A1%9C | 경상대로 | 경상대로(Gyeongsan-daero)는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어모 교차로와 상주시 함창읍 윤직 교차로를 잇는 경상북도의 도로이다.
전 구간 왕복 4~6차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상북도의 서북부를 남북으로 관통한다.
역사
2005년 12월 12일 : 김천시 어모면 남산리 ~ 상주시 청리면 원장리 24.28km 구간을 자동차 전용도로로 지정
2009년 11월 26일 : 2개 이상 시·군에 걸쳐 있는 도로로 경상대로를 고시
2010년 9월 17일 : 김천 ~ 어모간 도로(김천시 어모면 남산리 ~ 구례리) 7.5km 구간 부분 확장 개통 및 기존 8.2km 구간 폐지
2010년 12월 15일 : 김천 ~ 어모간 도로(김천시 어모면 구례리 구례 교차로 ~ 유점 교차로) 3.7km 구간 부분 확장 개통, 기존 3.9km 구간 폐지
2011년 4월 28일 : 김천 ~ 어모간 도로(김천시 어모면 구례리 ~ 상주시 공성면 거창리) 780m 구간 확장 개통
2013년 12월 27일 : 어모 ~ 상주간 도로(상주시 공성면 거창리 ~ 가장동) 15.76km 구간 확장 개통, 기존 15.1km 구간 폐지
주요 경유지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 상주시 (공성면 - 청리면 - 신흥동 - 남원동 - 북문동 - 사벌국면 - 외서면 - 공검면 - 이안면 - 함창읍)
노선
(■): 자동차 전용도로 구간
주의사항
어모 교차로부터 양촌 교차로까지 구간은 자동차 전용도로이므로 자전거, 보행자는 통행할 수 없다. 이륜자동차(모터사이클 혹은 오토바이)는 긴급자동차(싸이카 및 소방용 모터사이클 등)에 한해 통행이 가능하며, 그 밖의 이륜자동차는 통행할 수 없다. 우회도로로는 어모로, 남상주로가 있다.
주요 건물 및 시설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대로 2559)
한국전력공사 상주지사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대로 3051-17)
한국국토정보공사 상주시지사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대로 3053)
임란북천전적지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대로 3123)
이마트 상주점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대로 3141)
상주세무서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대로 3173-11)
각주
외부 링크
(경상북도 김천시)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북도의 도로
국도 제3호선
국도 제25호선
김천시의 교통
김천시의 도로
상주시의 교통
상주시의 도로
대한민국의 자동차 전용도로 |
2589106 | https://ko.wikipedia.org/wiki/%EB%B8%8C%EB%A0%88%EB%8B%A4%20%EC%A1%B0%EC%95%BD | 브레다 조약 | 브레다 조약은 다음을 의미한다.
브레다 조약 (1650년): 1650년 5월 1일 체결
브레다 조약 (1667년): 1667년 7월 31일 체결 |
1918715 | https://ko.wikipedia.org/wiki/%ED%92%8B%EA%B0%95%EB%82%AD%EC%BD%A9 | 풋강낭콩 | 풋강낭콩()은 아직 덜 익어 깍지 속에 들어 있는 강낭콩이다. 채소로 먹는다.
같이 보기
풋콩
각주
강낭콩 |
110277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5%A1 | 정액 | 정액(精液)은 인간을 포함하는 동물의 수컷이나 자웅 동체인 동물의 생식샘(gonad) 또는 기타 생식기에서 분비되는 체액으로서 정자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정액에 정자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이를 무정자증(無精子癥)이라고 한다. 정액을 체외로 분출하는 일을 사정(射精)이라고 하며, 이 액체는 암컷의 난자와 결합하여 수정체를 형성한다. 씨물, 또는 쫏물이라고도 한다.
정액의 체내 비율
정액은 체내에 다음과 같이 분포해 있다.
정액의 섭취
성행위 과정에서 여자가 남자의 정액을 먹는 까닭은 남성 몸의 일부를 '섭취'라는 행위를 통해 능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정액을 먹는 여성이 상대방 남성에 대한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되는 정복감하고 소유감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결과적으로 정서적, 정신적 유대감 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도 두터워진다. 정액의 섭취는 대부분 성행위에 개별적 혹은 부수적으로 행하여지는 펠라티오를 통해 이루어진다.
영양적 가치
칼륨, 마그네슘, 셀레늄과 같은 일반적으로 결핍되는 무기질들의 양이 조금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한 번 사정을 하면 150 밀리그램의 단백질, 11 밀리그램의 탄수화물, 6밀리그램의 지방, 3밀리그램의 콜레스테롤, 7% 미국 RDA 칼륨과 3% US RDA 구리와 아연이 배출된다. 물질 대사로 변화하면 단백질은 1그램 당 4 킬로칼로리를 생성하고 탄수화물 또한 1그램 당 4 킬로칼로리를 생산하며, 또 지방은 1그램 당 9 킬로칼로리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사정했을 때의 정액에서 나오는 음식 에너지는 0.7 킬로칼로리 (2.9 킬로줄)이다.
건강 상의 위험
건강한 남성의 정액은 인체에 전혀 무해하므로 먹어도 상관 없다. 펠라티오에 따른 기본적 위험성 외에 다른 위험성은 없다. 기본적 위험성이란 성병 감염의 가능성인데, 펠라티오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또는 단순 포진과 같은 성병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므로 잇몸에서 피가 나거나 염증이 있는 경우에는 주의해야 한다. 또 펠라치오를 받아들이는 남성의 입장에서도 상대방 여성이 성병에 감염되어 있을 경우 입에 의해서도 전염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 유두종바이러스에 걸린 사람과 무방비한 구강성교를 하게 되면 구강암이나 식도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맛과 양
정액의 냄새는 밤꽃, 오징어, 락스의 냄새와 거의 비슷하다. 이는 전립선액에 들어 있는 스퍼미딘(spermidine)과 스퍼민(spermine)이라는 공통되는 분자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맛은 약간 비릿하고 씁쓸하다.
한 번 사정할 때의 정액의 양은 다양하다. 30개의 연구에서는 평균적으로 약 3.4 밀리리터라고 하며 일부 연구에서는 많으면 4.99ml, 낮으면 2.3ml라고 한다. 스웨덴과 덴마크 사람과의 연구에서 한 번 사정할 때와 다음 사정할 때의 주기가 길어질수록 정액 안의 정자 수가 늘어난다는 보고가 있지만 그 수가 큰 것은 아니다.
같이 보기
사정
정자
쿠퍼액
질액
정액 먹기
몽정
각주
외부 링크
"Does Semen Have Antidepressant Properties?" By Gordon G. Gallup
simple article about sperm contents
Article about semen addiction
Lisa Jean Moore Ph.D., MPH. In Shining Armor: Representations of sperm in children's books American Sexuality Magazine. Accessed 3-27-07.
체액
생리학 |
2961241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5%ED%9A%8C%20%EC%A0%84%EA%B5%AD%EB%8F%99%EC%8B%9C%EC%A7%80%EB%B0%A9%EC%84%A0%EA%B1%B0%20%EB%8C%80%EA%B5%AC%EA%B4%91%EC%97%AD%EC%8B%9C%20%EC%A4%91%EA%B5%AC%EC%9D%98%ED%9A%8C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 중구의회 | 다음은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대구 중구의회의원 선거결과를 정리한 문서이다. 해당 선거에서 중구의회는 지역구의원 6명과 비례대표의원 1명을 선출했다.
지역구 선거구
지역구 선거 결과
비례대표 선거 결과
정당 투표 결과
본 선거에서 중구의회 비례대표 선거는 무투표 당선이 결정되었다.
비례대표 당선자
전체 결과
같이 보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대구 중구의 정치
중구 |
281159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5%EB%B0%B0%20%28%EC%95%BC%EA%B5%AC%EC%9D%B8%29 | 박정배 (야구인) | 박정배(朴正培, 1982년 4월 1일 ~ )는 전 호주 프로야구 리그 질롱 코리아의 투수이자, 현 KBO 리그 키움 히어로즈의 2군 불펜코치이다.
선수 시절
한국 프로야구 시절
두산 베어스 시절
2005년에 입단하였다. 팔꿈치와 어깨 부상으로 인해 2011년에 방출됐다.
SK 와이번스 시절
방출 후 당시 감독이었던 이만수의 부름을 받아 2012년에 이적해 불펜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2017년에 셋업맨을 맡았으나 팀의 불펜 투수들이 전체적으로 부진한 상황에서 마무리를 맡아 61경기에 등판해 16홀드, 7세이브,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분전했다. 2019년에는 10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부진해 시즌 후 방출됐다.
호주 프로야구 시절
2019년에 질롱 코리아에 입단하였다. 2020년 2월 14일에 은퇴했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21년부터 키움 히어로즈 2군 불펜코치로 활동한다.
별명
그와 생김새가 비슷한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캐릭터 중 하나인 '피콜로'라고 불린다.
출신 학교
공주중동초등학교
공주중학교
공주고등학교
한양대학교
통산 기록
각주
198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충청남도 출신
공주시 출신
KBO 리그 투수
두산 베어스 선수
SK 와이번스 선수
질롱 코리아 선수
공주중동초등학교 동문
공주중학교 동문
공주고등학교 동문
한양대학교 동문
충주 박씨 |
1320717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8B%A4%EB%82%98%EC%8A%A4%ED%8F%AC%EB%A5%B4 | 아다나스포르 | 아다나스포르()는 터키 아다나 주 아다나를 연고지로 한 축구 클럽이다.
아다나스포르는 1950년대에 아다나의 가장 인기있던 클럽은 노동자층이 지지하던 아다나 데미르스포르였는데 중산층이었던 상인과 장인들이 지주들의 자금 지원과 TCDD의 관리를 받고 있던 아다나 데미르스포르의 소외에 대응하여 1954년에 설립하였고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단이 되었다. 또한 2021년 2월에 새로 준공된 뉴 아다나 스타디움을 같이 쓰고 있다.
성적
쉬페르리그
준우승 1회 (1980-81)
1954년 설립된 축구단
튀르키예의 축구단 |
917821 | https://ko.wikipedia.org/wiki/%EC%B0%BD%EC%9B%90%20%EB%8F%84%EC%8B%9C%EC%B2%A0%EB%8F%84 | 창원 도시철도 | 창원 도시철도(昌原都市鐵道)는 경상남도 창원시 전역에서 운행될 예정이었던 도시철도 체계이다. 2015년 12월에 착공을 시작하여 2020년 12월에 1호선 가포 ~ 석동 구간을 개통할 예정이었으나 백지화되었다. 하지만, 2022년에 출범할 특례시 승격에 맞춰서 재추진되고 있다.
특징
창원시는 국비 6천억 여원을 지원받아 2020년까지 마산합포구 가포동~창원시청~진해구 석동~진해구청 등을 잇는 41.9km 길이의 도시철도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창원시는 지하철이나 경전철 등을 건설·운영하면서 막대한 재정부담을 지고 있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전처을 밟지 않기 위해서 노면전차를 설치하고, 민간자본의 투입 없이 총사업비의 60%는 국비, 20%는 도비를 지원 받아 재정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2012년 12월 28일에 창원시의 도시철도 건설 기본계획이 국토부의 승인을 받아 고시됐으며, 2014년 실시설계를 거쳐 2015년에 착공할 예정이었다.
2013년 5월 15일에 개최된 공청회에서는 노면전차가 창원 도시철도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였고, 기존의 마산합포구 가포동 ~ 진해구 석동 기본계획노선 33.9km에서 0.3km 늘어난 노선(34.2km)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 노선을 채택하면 2021년 기준으로 하루 탑승객 수가 기존안 보다 14.6%가 증가한 12만7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었다.
또한 2013년 8월 16일에는 창원 도시철도에는 노면전차(트램)가 적합하며 하루 11만 7630명이 이용할 것으로 전망됐다.
노선
창원 도시철도는 2025년까지 두 개의 노선을 착공 및 개통할 예정이었다. 창원광장과 성주동에서 각 노선이 접속할 예정이었다.
두 개 노선에 영업될 총 연장은 41.9km이고, 1호선에 38개 역, 2호선(남북 노선)에 10개 역을 놓을 예정이었다.
최근에, 다시 재추진되고 있음에 따라, 기존에 2개 노선에서 3개 노선으로 변경해, 경상남도 도시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된 상태다.
도시철도 구축계획망에 반영되면 모두 수소트램으로 놓여질 예정이다.
같이 보기
창원시
대한민국의 도시 철도
지하철 목록
각주
창원시의 교통 |
351699 |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4%B8%EC%A2%85 | 김세종 | 김세종(金世宗)은 조선시대의 판소리 명창이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서편제의 거장이다. 박유전의 직계로 성량이 거대하고 기법이 출중하여 당대 제1인자였으며, 《춘향가》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판소리 명창
담양군 출신
생몰년 미상
19세기 한국 사람 |
1307462 | https://ko.wikipedia.org/wiki/%27A%20CUBE%27%20FOR%20SEASON%20WHITE | 'A CUBE' FOR SEASON WHITE | 〈'A CUBE' FOR SEASON # WHITE〉은 4계절을 테마로 한 'A CUBE' FOR SEASON 프로젝트의 두 번째 싱글이며, 2013년 1월 13일에 발매된 싱글이며, 비스트의 장현승과 에이핑크의 정은지, 김남주가 컬래버레이션으로 불렀다.
개요
겨울을 테마로 한 음반이다.
수록곡
전체 작사 · 작곡: 신사동 호랭이, 라도
전체 편곡: 라도
일년전에
일년전에 (Inst.)
각주
큐브 엔터테인먼트
2012년 싱글
한국어 노래 |
976892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0%A8%20%EB%8C%80%EC%82%AC%EC%82%B0%EB%AC%BC | 이차 대사산물 | 이차 대사산물(二次代謝産物, )은 생명체에 있어 일반적인 성장, 발달 혹은 생식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유기 화합물을 말한다.. 1차 대사산물과 달리 2차 대사산물의 결핍은 즉각적인 생명체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명체의 생존율이나 생식율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차 대사산물은 생물의 계통수에 나타나는 종 가운데 특정 생물종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차 대사산물은 초식동물에 대한 식물의 화학 방어 기작이나 생물종 간의 상호 기작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차 대사산물은 향료나 마약, 의약품 등으로 사용된다.
분류
대부분의 2차 대사산물은 생합성 경로에 따라 분류된다. 2차 대사산물은 1차 대사산물 합성 과정과 유사하게 진행되며, 1차 대사산물 합성 과정의 구성 요소들을 차용하여 이루어지므로 이와 같은 분류가 생합성 경로에 있는 모든 대사 중간생성물들이 2차 대사산물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저분자
알칼로이드
테르페노이드
글리코사이드
천연 페놀
페나진
바이페닐과 다이벤조퓨란
큰 저분자
폴리케타이드
지방산
비리보솜 펩타이드
폴리페놀
상기항의 결합체
생체고분자
리보솜 단백질
마이크로신-J25
같이 보기
2차 대사
1차 대사
2차 대사산물
각주
식물생리학
물질대사
이차 대사 물질 |
1807053 | https://ko.wikipedia.org/wiki/%EC%B9%BC%ED%83%80%EC%A7%80%EB%A1%9C%EB%84%A4 | 칼타지로네 | 칼타지로네()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카타니아현에 위치한 코무네로 면적은 382km2, 높이는 608m, 인구는 38,828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인구 밀도는 100명/km2이다.
카타니아에서 남서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도자기 산업의 중심지이며 마욜리카, 테라코타로 유명한 곳이다.
칼타지로네는 무솔리니 정권에 반대한 성직자 루이지 스투르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자매 도시
리예카
샌프란시스코
아른스베르크
외부 링크
칼타지로네 공식 홈페이지
카타니아 광역시의 코무네
이탈리아의 세계유산 |
939656 | https://ko.wikipedia.org/wiki/%ED%9B%84%EB%A3%A8%EC%B9%B4%EC%99%80%20%EC%9C%A0%EC%9A%B0%ED%82%A4 | 후루카와 유우키 | 후루카와 유우키(, 1987년 12월 18일 ~ )는 일본의 배우이다. 애칭은 후루뽄(ふるぽん)이다.
내력
7살부터 캐나다에서 8년간 살았고, 고등학교 때부터 홀로 미국 뉴욕으로 옮겨 살았다.
게이오기주쿠 뉴욕 학원을 거쳐 일본에 귀국해, 게이오기주쿠 대학 이공학부에 진학해, 2009년, 미스터 게이오에 선출된다.
2010년, 호리프로 창업 5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개최된 신인 발굴 오디션 〈캠퍼스타★H50with 맨즈 논노〉에서 심사원 특별상을 수상해 연예계에 데뷔한다.
2013년, 영국·일본 공동 작품 《이에야스와 안진》으로 해외 데뷔. 그 해,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인 배우로는 처음으로 팬 미팅을 개최해, 약 1,200명을 동원했다. 공항에 1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마중을 나오고, 숙박 호텔에는 수백 명이 기다리고 있어 혼잡을 이루었다.
2014년, 중국판 트위터 Weibo의 팔로우가 100만 명을 돌파.
2018년, 곽재용 감독 작품 《바람의 색》의 주연을 맡았다.
출연
영화
고교 데뷔 (2011년, 아스믹 에이스) - 아사오카 유이 역
men's egg Drummers (2011년, 카도카와 콘텐츠 게이트) - 주연·케이타 역
토미오 (2011년, 제네온 유니버설 엔터테인먼트) - 주연·토미오 역
로보-G (2012년, 알타미라 픽쳐스) - 시미즈 마사히로 역
Miss Boys 우정의 행방편 (2012년, 제네온 유니버설 엔터테인먼트) - 히가시 슈이치 역
소름 -극장판- (2012년, 클록 워크스) - 주연·야마모토 타카시 역
깨끗하고 연약한 (2013년, 토호) - 코미네 기요마사 역
영원의 0 (2013년, 토호) - 단역
워아이니 in tokyo (2014년) - 주연·반도 타모츠 역
WOOD JOB!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2014년, 토호) - 하세가와 세이지 역
마호로 역 전 광조곡 (2014년, 도쿄 테아트르/리틀 모어) - 사와다 형사 역
뇌내 포이즌 베리 (2015년, 토호) - 사오토메 료이치 역
라이치☆히카리 클럽 (2015년, 닛카츠) - 제라 역
태양 (2016년, KADOKAWA) - 모리시게 역
L -엘- (2016년, 토호 영상 사업부) - 오베스 역
바람의 색 (2018년) - 주연· 청년 료, 마술사 류 역 (1인 2역)
흐린 하늘에 웃다 (2018년, 쇼치쿠) - 아베노 소세이 역
옆자리 괴물군 (2018년) - 요시다 유우잔 역
리스타트는 지금부터 (2020년,) - 주연· 코즈가 미츠오미 역
드라마
아스코마치~아스카 공업 고교 이야기~ (2011년 4월 ~ 6월, TV 아사히) - 키시 테츠로 역
옆의 악마 짱 (2011년 7월 16일, 후지 TV) - 히로키 역
나와 스타의 99일 (2011년 10월 ~ 12월, 후지 TV) - 나츠메 준키치 역
비터 슈가 (2011년 10월 ~ 12월, NHK) - 카와사키 준 역
리치 맨, 푸어 우먼 (2012년 7월 ~ 9월, 후지 TV) - 쿠가 유우키 역
하늘의 방주 (2012년 12월 ~ 2013년 1월, WOWOW) - 수사1과 형사 역
야에의 벚꽃 (2013년, NHK) - 코자키 히로미치 역
장난스런 Kiss~Love in TOKYO (2013년 3월 30일 ~ 7월 20일, 후지 TV TWO) - 주연·이리에 나오키 역
장난스런 Kiss 2~Love in OKINAWA (2014년 9월 12일, 후지 TV)
장난스런 Kiss 2~Love in TOKYO (2014년 11월 25일 ~ 2015년 4월 7일, 후지 TV)
남편의 그녀 (2013년 10월 ~ 12월, TBS) - 이시구로 야스시 역
안개의 별에서 (2014년 2월 15일, 후지 TV) - 구조대 1 역
비터 블러드 (2014년 4월 ~ 6월, 후지 TV) - 나메리카와 역
이상한 여름 (2014년, 후지 TV) - 주연·스토리텔러 역
살인 분석반 시리즈
돌의 고치 (2015년 8월 16일 ~ 9월 13일, WOWOW) - 요코이 역
수정의 고동 살인 분석반 (2016년 11월 13일 ~ 12월 11일, WOWOW) - 야기누마 마사토 역
악의 파동 살인 분석반 스핀 오프 (2019년 10월 6일 ~ 11월 3일, WOWOW ) - 주연 · 야기누마 마사토 / 노기 나오야 역
5→9~나를 사랑한 스님~ (2015년 10월 ~ 12월, 후지 TV) - 미시마 사토시 역
기묘한 이야기 '16 가을 특별편 〈열차에서 생긴 일〉 (2016년 10월 8일, 후지 TV) - 잘생긴 남자 역
중요 참고인 탐정 (2017년 10월 ~ 12월, 아사히 TV) - 시몬 토마 역
러브 리런 (2018년 4월 5일 ~6월 8일, 니혼 TV) 마치다 쇼헤이
60 오판 대책실(2018년 5월 6일 ~ 6월 3일) - 세라 쇼이치 역
텐 텐호의 길을 걷는 쾌남아 (2018년 10월 4일 ~ 12월 21일, TV 도쿄) - 이가와 히로유키 역
해러스먼트 게임 (2018년 10월 15일 ~ 12월 10일, TV 도쿄) - 야자와 코타로 역
해러스먼트 게임 VS 카토쿠의 여자 (2020년 1월 10일, TV 도쿄)
LINE에 답맞추기 ~ 남자와 여자의 착각 ~ (2020년 2월 2일 ~ 4월 5일, 요미우리 TV) - 주연· 야스이 츠카사 역
일하지 않는 자들 (2020년 8월 27일 ~ 10월 1일) - 닛타 케이타 역
거친 계절의 소녀들이여. (2020년 9월 9일 ~ 10월 28일, MBS・TBS) - 야마기시 토모아키 역
리스키 (2021년 3월 26일 ~ 5월 7일, MBS) - 사쿠라이 토오루 역
후쿠오카 연애백서 16 크리스마스 광상곡 (2021년 3월 27일, KBC) - 후지이 슌이치 역
시그널 장기 미제 사건 수사반 스페셜 (2021년 3월 30일, KTV・후지 TV) - 타게다 히사시 역
포상밥 (2021년 10월 2일 ~, BS TV 도쿄) - 이소가이 마코토 역
웹드라마
고교 데뷔~데뷔 직전 집중 강좌~ (2011년, LISOMO 드라마) - 아사오카 유이 역
나만이 없는 거리 (2017년 12월 15일, 넷플릭스) - 후지누마 사토루 역
1페이지의 사랑 (2019년 2월 18일 ~ 3월 25일, AbemaTV ) - 호시노 유리 역
거친 계절의 남자들이여. (2020년, TSUTAYA프리미엄) 주연·야마기시 토모아키 역
48일후에 결혼합니다 (2021년 5월 13일 ~ 6월 30일, Amazon Prime Video) - 주연·케이이치 역
도쿄, 좋아하던가, 사랑하던가 제1화 (2021년 9월 11일, Paravi) - 슈토 하루아키 역
신의 편애 (2022년 3월 19일 ~, Hulu) - 신 역
무대
사랑 할머니 14세 (2010년 8월)
풋내기 비너스 (2010년 9월)
12인의 상냥한 암살자~노림받은 호화 객선~ (2011년 8월 16일 ~ 24일) - 이카루가 코헤이 역
엔론 (2012년 4월 13일 ~ 29일) - 램지 역
이에야스와 안진(ANJIN) (2012년 12월 일본 공연, 2013년 1월 영국 공연) - 도메니코 역
우리의 내일 (2014년 1월) - 주연·후도 류 역
이니슈만섬의 빌리 (2016년) - 주연·빌리 역
라디오
후루카와 유키 unknown radio (2016년 3월 30일 ~ , 분카 방송)
PV
Crystal Kay 〈사쿠라〉 (2016년)
칸나 치세 〈Heaven's Door ~태양이 비치는 곳~〉 (2016년)
CM
ace. (2016년)
수상 내역
각주
외부 링크
호리프로에 의한 프로필
198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남자 배우
일본의 남자 영화 배우
일본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호리프로
도쿄도 출신
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
캐나다에 거주한 일본인
미국에 거주한 일본인 |
1371535 | https://ko.wikipedia.org/wiki/%EC%B6%94%EC%9E%90%EC%B4%88%EB%93%B1%ED%95%99%EA%B5%90%20%EC%8B%A0%EC%96%91%EB%B6%84%EA%B5%90 | 추자초등학교 신양분교 | 추자초등학교 신양분교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41년 6월 10일 신양공립국민학교 개교(설립인가 6월 6일)
1996년 3월 1일 신양초등학교로 개칭
1999년 9월 1일 추자초등학교 신양분교장으로 격하
학교 동문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제주시의 초등학교
1941년 개교
초등학교 분교 |
101584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9E%8D%EA%B6%8C | 아랍권 | 아랍권(, )는 아랍어를 주로 쓰는 지역을 뜻한다. 아프리카의 북서쪽 해안부터 아라비아 반도까지 이어진다. 좁은 개념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와 그 주변만을 부르는 아랍세계라는 표현도 쓰인다.
총 22개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인구는 약 3억2천5백만 명이고 경제규모는 1조달러를 능가하고 매해 5퍼센트씩 성장한다. 아랍 세계는 무슬림 세계의 5분의 2를 차지한다.
언어, 정치, 지역
아랍어는 아랍 세계를 통일된 특징으로 묶어준다. 몇몇 방언을 쓰는 지역이 있긴 하지만, 모두들 표준 고전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더 넓은 이슬람 세계와 대비되는 점이다.
같이 보기
아랍 연맹
무슬림 세계
이슬람교
나라 분류
문화권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중동 |
717581 | https://ko.wikipedia.org/wiki/ATC%20%EC%BD%94%EB%93%9C%20B03 | ATC 코드 B03 | ATC 코드B03은 ATC 코드의 항빈혈제로 작용하는 약물을 정리한 코드이다.
ATC 코드 B 혈액 및 조혈기관의 하위그룹을 이룬다.
동물용 의약품을 위한 코드(ATCvet 코드)의 경우 인체의약품 코드 앞에 Q가 들어가게 된다. 예 : QB03.
B03A 철분제제
B03AA 경구투여 2가 철분제제
B03AA01 Ferrous glycine sulfate
B03AA02 Ferrous fumarate
B03AA03 Ferrous gluconate
B03AA04 Ferrous carbonate
B03AA05 Ferrous chloride
B03AA06 Ferrous succinate
B03AA07 Ferrous sulfate
B03AA08 Ferrous tartrate
B03AA09 Ferrous aspartate
B03AA10 Ferrous ascorbate
B03AA11 Ferrous iodine
B03AB 경구투여 3가 철분제제
B03AB01 Ferric sodium citrate
B03AB02 Saccharated iron oxide
B03AB03 Sodium feredetate
B03AB04 Ferric hydroxide
B03AB05 Ferric oxide polymaltose complexes
B03AB06 Ferric citrate
B03AB07 Chondroitin sulfate-iron complex
B03AB08 Ferric acetyl transferrin
B03AB09 Ferric proteinsuccinylate
QB03AB90 Iron dextran
B03AC 비경구투여 3가 철분제제
B03AC01 Ferric oxide polymaltose complexes
B03AC02 Saccharated iron oxide
B03AC03 Iron-sorbitol-citric acid complex
B03AC05 Ferric sorbitol gluconic acid complex
B03AC06 Ferric oxide dextran complexes
B03AC07 Ferric sodium gluconate complex
QB03AC90 Iron dextran
QB03AC91 Gleptoferron
QB03AC92 Ferric hydroxide saccharose
B03AD 엽산과 철분의 조합
B03AD01 Ferrous amino acid complex
B03AD02 Ferrous fumarate
B03AD03 Ferrous sulfate
B03AD04 Ferric oxide polymaltose complexes
B03AE 철분의 조합
B03AE01 Iron, vitamin B12 and folic acid
B03AE02 Iron, multivitamins and folic acid
B03AE03 Iron and multivitamins
B03AE04 Iron, multivitamins and minerals
B03AE10 Various combinations
B03B 비타민 B12와 엽산
B03BA 비타민 B12(시아노코발라민과 유사체)
B03BA01 Cyanocobalamin
B03BA02 Cyanocobalamin tannin complex
B03BA03 Hydroxocobalamin
B03BA04 Cobamamide
B03BA05 Mecobalamin
B03BA51 Cyanocobalamin, combinations
B03BA53 Hydroxocobalamin, combinations
B03BB 엽산 계열
B03BB01 Folic acid
B03BB51 Folic acid, combinations
B03X 기타 항빈혈제
B03XA 기타 항빈혈제
B03XA01 Erythropoietin
B03XA02 Darbepoetin alfa
B03XA03 Methoxy polyethylene glycol-epoetin beta
각주
B |
739216 | https://ko.wikipedia.org/wiki/%EC%96%91%EC%A3%BC%EB%B0%B1%EC%84%9D%EA%B3%A0%EB%93%B1%ED%95%99%EA%B5%90 | 양주백석고등학교 | 양주백석고등학교(楊州白石高等學校)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오산리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2005년 12월 26일 : 설립 인가(개교 8학급, 특수 1학급)
2006년 3월 1일 : 초대 전경영 교장 취임
2006년 3월 2일 : 제1회 입학식(262명, 특수 2명 포함)
2009년 2월 12일 : 제1회 졸업식(241명)
2014년 3월 1일 : 제3대 원대식 교장 취임
2018년 1월 10일 : 제10회 졸업식(311명, 특수 3명 포함)
학교 동문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경기도의 공립 고등학교
양주시의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2006년 개교 |
1008215 |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B%A6%AC%20%28%EA%B0%80%EC%88%98%29 | 세리 (가수) | 세리(, 1990년 9월 16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로 걸그룹 달샤벳에서 리더, 메인래퍼, 리드보컬, 메인댄서를 맡았었다.
학력
동일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방송연예과
활동
2013년 SBS 《별에서 온 그대》 특별출연
외부 링크
서울특별시 출신 가수
서울특별시 출신 음악가
대한민국의 여자 가수
서울특별시 출신 배우
동덕여자대학교 동문
동일여자고등학교 동문
199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반남 박씨
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모델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더 유닛 참가자
대한민국의 아이돌 |
2821981 |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B8%8C%EA%B3%A0%EB%A1%9C%EB%93%9C%20%EB%A3%A8%EC%8A%A4 | 노브고로드 루스 | 노브고로드 루스() 또는 류리크국()은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가 노브고로드 공작이 된 862년부터 올레그 베시에 의해 키예프 루스가 성립된 882년까지의 루스인들의 정체를 일컫는다. 원초 연대기에 이에 관한 묘사가 있다.
러시아의 역사 |
427365 | https://ko.wikipedia.org/wiki/HD%209446%20b | HD 9446 b | HD 9446 b는 태양과 비슷한 주계열성 HD 9446을 돌고 있는 외계 행성이다. 이 행성은 지구로부터 약 172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
같이 보기
HD 9446 c
참고 문헌
외계 행성
2010년 발견한 외계 행성
삼각형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