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dict
1
dict
2
dict
3
dict
{ "from": "user", "value": "유엔이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유엔** 또는 **국제연합**은 국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고, 국제 협력 증진, 인권 개선 등의 활동을 통해 세계의 번영을 추구하는 국제 기구이다. 또한 UN은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를 아우르는 국제 기구이며, 1945년 10월 24일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출범했다. 설립 목적은 국제법, 국제적 안보 공조, 경제 개발 협력 증진, 인권 개선으로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데 있다. 현재 유엔 가입국가의 수는 총 193개국이다.\n\n동일 영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었으며, 마찬가지로 United Nations으로서 추축국에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또한 그 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족됐으며, 원칙적으로는 각국의 전쟁을 막고 대화 교섭을 찾자는 명분으로 국제 연맹의 역할을 사실상 대체하게 되었는데, 기존과는 달리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등 세계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주권국으로 인정되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유엔 회원국이다. UN의 본부는 미합중국 뉴욕에 있으며, 뉴욕에 있는 본부에서는 매년 총회를 열어 주요 안건을 상정 및 논의한다. 또한, 네덜란드 헤이그에 국제사법재판소을 두고 있다. UN의 사무국은 케냐 나이로비, 오스트리아 빈,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유엔산하기관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유엔산하기관은 정부 간 기구라는 점에서는 전문기구와 같으나 그 설립이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에 의하며, 회원국 구성이 국제연합 또는 국제연합전문기구 회원국들의 자발적 참여·선임의 방식에 의한다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주로 인권·환경·보건 분야와 저개발지역 원조에 관련된 사업·계획 추진을 목적으로 통상 시한적 성격에서 출발하지만 필요에 따라 개편·확대·통합의 방식으로 상설화되는데, 국제연합 총회의 의사에 지배되며 그에 책임을 진다. 물론 각 기관은 자체적인 의결·행정관리·집행기관 조직을 설치하여 운영되는데, 최종적인 의사결정·감독기관은 국제연합 총회의 주요 상설·특별위원회조직이나 사무총장 또는 그 보조기관이다." }
{ "from": "user", "value": "아달라이사금의 능묘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경주군 남쪽 15리 배일산의 세 왕릉 중 제일위의 왕릉이 아달라 이사금의 능이고 가운데는 신덕왕릉, 그아래는 경명왕의 능이라 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야마타이국이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야마타이국**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과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본의 고대 군장국가이다. 삼국사기에는 173년에 그 왕인 히미코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3세기의 삼국지에도 야마타이국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있다. 야마타이국의 현 위치는 긴키 지방 혹은 규슈 일대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n\n삼국지에는 239년 히미코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만요슈나 일본서기 등에서는 쓰시마국・이키국・마츠우시로국 등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실려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히미코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히미코**는 일본의 고대 국가인 야마타이국을 다스렸던 여왕이다. 봉호는 친위왜왕. 그가 죽은 후 친족인 도요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지 위지왜인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조에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의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
{ "from": "user", "value": "만세일계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혈통을 만세일계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히미코와 그의 일족에 의한 일본 통치 기록을 삭제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증거로 일본서기에서는 제10대 스진 천황에서부터 제16대 닌토쿠 천황까지 각각의 천황들이 모두 수십년의 치세와 100살이 넘는 수명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히미코 일족의 120년에서 200년 이상의 통치를 삭제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진 것이며 당시 고대 일본의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터무니없는 기록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 "from": "user", "value": "풍월주가 뭐야?" }
{ "from": "gpt", "value": "**풍월주**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화랑도의 수장이다. 후에 화랑도의 파가 갈라지며 국선과 풍월주가 각 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540년 처음 설치되어 681년 폐지되었으며, 32명의 화랑에게 승계되었다. 풍월주는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등의 사서에도 나타나지만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진흥왕은 원화 제도를 폐지하고 몇달 후 화랑을 신설하면서 화랑세기에 7대 풍월주로 기록된 설원랑을 초대 국선으로 삼았다하여 화랑세기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아테네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이며, 아티키 주의 중심 도시이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도시이며, 역사 시대가 개막한 지 3,400년에 이른다. 대략 기원전 11세기 ~ 7세기부터 인간이 정착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n\n고대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으며, 고대 아테네의 부는 기원전 5세기부터 아테네와 연합을 시작한 피레아스 항구를 통해서 유입됐다.\n\n아테네 행정 구역내 인구는 664,046명이며, 유럽연합 통계국에 따르면, 아테네 대도시권역은 유럽 연합 내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다고 한다.\n\n고전기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 예술, 학문, 철학의 중심지였던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도 아테네에 있었다.\n\n아테네에는 고전기의 유산이 아직 잘 남아있다. 수많은 고대 기념물과 예술 작품이 남아 있으며, 서양 초기 문명의 기념비적 건물인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도 있다. 그리고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다양한 유적이 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유적도 약간 남아있어 이 도시의 유구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 독립 국가가 세워진 18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근대에 들어선 랜드마크도 있는데, 그리스 의회 의사당, 그리스 국립 도서관, 아테네 대학교, 아테네 학회가 있다. 또 아테네에서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경기가 열렸으며, 108년 뒤에 다시 200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
{ "from": "user", "value": "정부는?" }
{ "from": "gpt", "value": "아테네는 아티키 주의 아테네현에 속해있다.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아티키 주의 주도이기도 하며 아테네 현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1834년 이래 아테네는 그리스의 공식 수도가 되었으며, 이는 1832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수도였던 나플리오를 계승한 것이었다.\n\n## 아티키 주\n아테네는 아티키 주에 속하였으며, 아티키 주는 그리스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아티키 주는 4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37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최밀집지역이지만 그리스의 행정 구획 상 가장 면적이 적은 곳이기도 하다.\n\n## 아테네 현\n아테네 현은 모든 그리스의 주를 통틀어 가장 인구가 많은 곳으로서 아티키 주의 370만 인구 중 260만 명이 살고 있다. 아테네 자체가 대도시이기도 하지만 아테네 지자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아테네 다음으로 가장 큰 지자체는 피레아스현, 키클라데스현이 있으며 이들 주는 자체적으로 선거구가 있어 시장을 선출한다.\n\n## 아테네 현의 지자체\n아테네 현은 7개의 개별 구획을 두고 있다. 아테네는 원래 개별적으로 고유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지만 대도시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그 구역이 점차적으로 통합되고 확대되었다. 현재 아테네 현 중앙 정부는 55개의 지자체로 구성되어있으며 전체 745,514명의 인구로 이루어져 있다." }
{ "from": "user", "value": "환단고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1979년에 출간한 책이다." }
{ "from": "user", "value": "평가 및 논란은?" }
{ "from": "gpt", "value": "## 사학계의 의견\n환단고기는 대한민국의 고대사학계에서 위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범례에는 1911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9년이 되어서야 등장한 이유가 불명확하고, 원본이 제시되지 않으며, 후대에 등장한 용어나 학설이 반영되어 있고, 기존의 역사와도 어긋나며, 내용이 모순된다는 이유로 후대의 위작으로 여기는 것이다. 대한민국 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n\n### 대한민국\n단기고사와 함께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한국고대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단지 저술시기에 대해서 1920년대 초반, 1949년, 1979년 부근이라는 등의 이견이 있을 뿐이다. 광대한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기록 등은 근거가 없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하며,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또한 환단고기의 내용에서 친일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지적되기도 한다.\n\n### 일본\n주류 학계는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 문헌이 불명확하다는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또한 고사고전등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n\n## 진위 논란\n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주장이나 위서라는 주장이 병존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주장을 먼저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하 내용은 고준환의 신명나는 한국사의 진서론과 문영의 만들어진 한국사의 반론을 정리한 것이다.\n\n### 위서론\n환단고기가 후대에 위조된 기록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n\n### 중도론\n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대한제국이나 일제강점기 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n\n이러한 견해는 변용된 정도를 잘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n박창범·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1993년, 95쪽, 도 있다.\n\n## 조작설\n환단고기는 출간 경위 자체에 모순이 많다. 이러한 모순을 추적하여 환단고기 자체가 이유립에 의해 조작된 창작물임을 주장하기도 한다.\n\n## 민족주의 성격에 대한 의문\n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n'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을 속칭 **환빠**라 부른다. 이는 환단고기 추종자를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다. 또한 반대로 환단고기를 비판하는 이들을 비하하여 **환까**라고 부르기도 한다." }
{ "from": "user", "value": "B형 간염의 B형 간염의 치료제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B형 간염 바이러스를 없앨 수 있는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다.\n\n급성B형간염은 증상에 따른 치료를 한다. 급성B형간염에서의 치료가 B형간염이 만성화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급성B형간염의 경우 증상이 심해서 입원치료가 요구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극히 소수의 환자에서 전격성 간염에 의한 간부전이 발생할 수도 있고 이때는 이식을 하지 않을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n\n만성B형간염의 치료 목적은 단기적으로는 HBV의 증식을 억제하여 간염을 완화하며 섬유화를 방지하는 것이다. 검사상의 지표로는 gpt의 정상화, 혈청 HBV DNA의 감소, HBeAg의 혈청소실 혹은 혈청전환, 조직소견의 호전이다. 장기적으로는 만성B형간염 단계에서 염증을 완화시켜 간경변증, 간부전 혹은 간암으로 진행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간질환에 의한 사망률을 낮추고\n\n만성 간염의 경우에는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고 간의 염증괴사를 막아 장기적으로 간경변증과 간암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인터페론, 페가시스이나 제픽스, 헵세라, 바라크루드, 레보비르, 세비보, 비리어드 등을 투여한다.\n\n만성B형간염의 치료 대상은 B형간염바이러스가 증식하고 지속적으로 간세포의 염증괴사가 있을 때이다. 그러나 간조직검사에서 염증이 있거나, 간경변증이 있을 때, 간암이 있을 때는 혈중 ALT가 상승하지 않아도 치료를 시작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아랍어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아랍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셈어파에 속하는 언어 중 하나로, 주로 서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의 아랍권에서 사용된다.\n\n같은 셈어족에 속하는 바빌로니아어, 아시리아어, 페니키아어는 사어가 되었으며 아람어는 시리아와 이라크, 몰타의 일부 지방에서 보존되고 있다. 이렇게 아랍어는 형태론적으로는 굴절어에 속한다.\n셈어족에 속한 아랍어는 남서셈어에서 발달되었다. 남서셈어는 아라비아 반도 히자즈 지역을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했던 유목민들의 북방어와 농경 생활을 하던 예멘의 남방어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마리브 댐이 유실되면서 예멘인들이 히자즈 등 아라비아반도 북부로 이동하게 되었고, 북방어인 히자즈어가 예멘인들을 비롯한 주변 부족들의 언어와 섞이게 되었다. 한편 쿠라이시족은 메카의 시장을 장악하였다. 아랍어의 모체인 쿠라이시족의 말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시를 쓰고, 후에 무함마드가 쿠란을 기록하는 데 주로 쓰이면서 표준어가 되었다. 아랍어는 튀르키예어,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말레이어, 스와힐리어, 하우사어 등의 언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랜 역사와 넓은 분포를 가진 언어이지만 다른 언어에 비하면 변화가 비교적 보수적이며 매우 점진적이다.\n\n아랍어는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의 아랍 세계에서 약 3억 명이 사용하며 UN 공용어 6개 중 하나이다. 아랍어의 통제기관으로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위치한 아랍어 아카데미,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카이로 아랍어학원을 비롯해서, 몇 국가에 설치된 아랍어 아카데미가 그 구실을 수행한다. 이 기관들은 과학 분야를 제외한 외국어의 차용을 가능한 한 제한해, 새로운 개념이 들어올 때 낱말의 의미를 확대해서 기존 아랍어 낱말로 대응하는 경향이 강하다." }
{ "from": "user", "value": "문법은?" }
{ "from": "gpt", "value": "## 명사와 형용사\n아랍어 명사는 남성형과 여성형이라는 두 가지 문법적 성이 존재하며 주로 여성형 어미인 타마르부타를 추가하여 여성형임을 나타내나, 일부 어휘의 경우엔 타마르부타 없이 여성형으로 사용된다.6 자연적 성 이외에도 타마르부타가 붙지 않고도 관습적으로 여성형으로 쓰이는 어휘가 존재하며44, 자연적 성과는 관계 없이 타마르부타를 추가하여 여성형으로 간주하는 어휘 또한 존재한다. \n\n정관사를 통해 한정형과 비한정 개념을 나누며, 비한정 집합 명사에는 타마르부타를 붙이는 방식으로 집합적 개념과 개별 개체를 구분한다.44 문법적 수는 단수와 복수 외에도 쌍수의 형태가 존재한다. 쌍수는 2를 뜻하는 수사를 사용하지 않고 어미 변화하여 쌍수의 의미를 나타낸다.61\n\n격은 주격과 대격, 속격의 세 가지 격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세 가지 격으로 변화하는 명사를 3격 명사라 하며 주격과 대격으로 변하며 대격에 속격의 의미를 함께 지니는 2격 명사로 나뉜다. 이 격은 어미의 모음 변화로 구분하며,52 전치사가 붙을 경우 속격 변화 한다.53 \n\n복수형은 기본이 되는 규칙 복수와 그 외 정해진 규칙으로 변화하는 불규칙 복수로 나뉜다. 아랍어 문법학자들은 8세기부터 아랍어의 기본 동사를 자음의 개수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 기준에 따라 'فعل'이라는 동사에 모음을 달리 하는 방식으로 불규칙 복수 어휘의 규칙성을 찾아 설명하려 했다.72\n\n인칭대명사는 접미사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명사에 붙을 경우 소유의 의미를 나타내며, 동사에 붙을 경우 목적어를 나타낸다.98 인칭대명사가 이러한 접미인칭사 대명사와 함께 쓰여서 강조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102\n\n일반적으로 아랍어 문법학자들은 어휘를 명사와 동사, 불변사로 분류하여 형용사와 명사를 같은 품사로 본다. 아랍어에서 형용사는 명사와 같은 어미 변화와 복수 변화를 거친다.119 비교급과 최상급은 우위 표시 명사라 부르는데, 전치사와 쓰이면 비교의 의미를 더하고 한정형으로 만들어 최상급의 의미를 더한다.\n\n## 동사\n아랍어의 동사는, 히브리어와 유사하게, '그이 …했다'라는 뜻을 지닌 3인칭 남성형 단수 능동태 완료형을 원형으로 갖는다.132 사전에서 동사를 찾을 때는, 이 형태를 찾는 식이 된다. 이 형태를 기본형 또는 제1형이라 한다. 여기에, 제2형에서부터 제15형까지의 파생형이 있으나, 현대 아랍어에서는 제10형까지만을 사용한다. 제11형부터는 드물게 사용되며,213 제9형은 원칙적으로 색채 또는 인체의 장애 등에 관련되는 의미의 단어이다.252 이 파생형은 유럽 문법학자에 의해 고안된 개념이다. 한스 베어의 현대 문어 아랍어 사전을 시작으로,? 여러 사전들이 어근 순으로 단어가 배열된 형태를 띤다." }
{ "from": "user", "value": "삼국지의 배송지주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삼국지주 또는 배송지주는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문제가 역사학자 배송지에게 명하여 삼국지에 주를 단 것으로 “배주”라고도 하고 원문과 함께 칭할 때는 “수지배주”라고도 한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책을 수집하여 주를 달게 한 것이다. 본래 주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는 것이나 배송지는 누락된 사료를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약 200여 권이 넘는 여러 사서를 인용하여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하였으며 본문의 몇 가지 오류나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진수의 인물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평을 넣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는 사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삼국지와 더불어 삼국지 평화, 삼국지 연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n\n한편 배송지주의 양과 관련하여 20세기 양익양이 삼국지의 글자수에 대해 정문이 20만 자, 주가 54만 자로 주가 세 배에 가깝다고 하여 삼국지의 주가 정문을 그 양에 있어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왕정흡과 오금화가 정확히 글자를 세어 본 결과 정문의 글자수가 약 36만 8천 자 주의 글자수가 약32만 2천 자로 본문의 글자가 약간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위서는 본문이 약 20만 7천 자 주가 약 21만 5천자, 촉서는 본문이 약 5만 7천 자 주가 약 4만 2천 자, 오서는 본문이 약 10만 3천 자 주가 약 6만 5천 자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계백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660년 당의 신구도대총관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과 신라의 상장군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 육군이 수륙 협공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계백은 충상의 지휘 하에 5천의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만났다. 이때 계백은 \"작은 나라의 병사로 당의 대군과 신라를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칼로 직접 처자를 죽였다. 황산벌에서 계백은 월나라 왕 구천이 5천의 군사만으로 오나라의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을 언급하며, 무서워하지 말자는 말로 병사를 독려했다. 이때 세 곳에 나뉘어 진을 친 백제군은 신라군과 네 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n이에 신라군은 대장군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1인 돌격 전술을 구사하며 전사했고, 다음으로 1인 돌격 선봉에 나선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데도 기품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워서 돌려보냈지만, 다시 진영으로 돌격해오자 결국 관창을 잡아 처형했다. 관창의 죽음으로 용기를 얻은 신라군은 백제군과 맹렬하게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충상, 상영 등 신라에 항복한 20인을 제외한 4980명이 사망하며 패했고 계백도 전사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요그소토스의 옛것들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요그소토스는 〈던위치의 공포〉에 언급된 신비스런 옛것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옛것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요그소토스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옛것들과 요그소토스가 일종의 협력관계라는 것은 요그소토스의 인간 아들 윌버 화틀리가 옛것들을 소환하여 윌버의 타락한 쌍둥이 동생을 지배하도록 시키려 했던 점에서 짐작된다.\n\n단편 〈찰스 덱스터 워드의 경우〉에서 요그소토스의 이름은 망자를 되살리는 주문의 일부로 등장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벌휴이사금의 치세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탈해이사금의 아들인 각간 석구추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 하니 이는 신라 사회에 2세기 말까지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시사한다.\n\n185년 음력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임명해 소문국을 치게 하였다. 188년 음력 2월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니, 파진찬 구도에게 명해 군사를 내 막게 하였다. 이듬해인 189년 음력 7월 구도가 백제군을 상대로 구양에서 싸워 이기고 5백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에 190년 음력 8월 백제가 다시 공격해 원산향을 습격하고 부곡성을 포위했다. 구도가 5백 기병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패배하니, 이사금은 구도의 벼슬을 깎고 설지를 그 자리에 앉혔다.\n\n193년 왜인 1천여 명이 기아를 피해 대규모로 신라에 도망왔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내해이사금이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내해이사금**은 신라의 제10대 왕이며, 이사금의 칭호를 사용한 8번째 왕이다. 다른 이름은 엽이다.\n\n벌휴이사금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내례부인이며, 비는 석씨로 조분이사금의 누이이다. 벌휴이사금의 태자인 석골정과 석이매가 먼저 죽고 석골정의 아들이 어려 이매의 아들 내해가 왕이 되었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성은 석씨 아버지는 벌휴이사금의 아들인 이매이고 어머니는 내례부인이다. 사후 아버지 이매를 헌성대왕에 추존하였다 한다. 벌휴이사금의 태자인 석골정과 둘째 아들 석이매가 일찍 죽고 적손인 석골정의 아들 조분이 어렸기 때문에 왕이 되었다. 비는 조분 이사금의 누이 석씨로서 사촌간에 근친결혼을 했다. 자녀로는 태자 우로와 조분이사금의 비가 된 딸 아이혜가 있다. 병마사를 관장했던 이벌찬 이음은 그의 이부형이다." }
{ "from": "user", "value": "미-고가 뭐야?" }
{ "from": "gpt", "value": "**미-고**, 혹은 \"유고스로부터의 균사체\"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후 신화에 등장하는 외계의 종족이다. 미-고는 인간 크기의 갑각류, 균사체 생명체로, 우주 멀리 항행이 가능한 날개를 갖고 있다. 이들은 태양계 외부에서 기원했으나 현재는 명왕성을 차지해 있다. 미-고는 지구에서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5피트 크기의 갑각류 몸통의 분절된 사지 외에 여러 촉수가 달려 있어 지느러미나 날개처럼 보인다. 이 외에 한 쌍의 박쥐 날개와 같은 것이 달려 있어 우주의 에테르를 따라 날 수 있다. 이 날개는 지구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n\n미-고는 자원의 채취를 위해 종종 지구에 들르며 인간을 채집하는데, 인간의 두개골에서 뇌를 꺼내 \"뇌 실린더\"라 불리는 장치에 담아 유고스까지 데려간다. 뇌는 이 장치를 통해 말하고, 보고, 들을 수 있게 된다.\n\n미-고는 요그-쇼토스, 니알랏호텝, 슙-니구라스 및 유고스의 구덩이에 거주하는 크샤크슈클루스 등을 숭배하나, 그들은 종교적인 열정보다는 과학적 탐구에 더 관심이 많다. 미-고의 도덕 체계는 인간의 것과 판이하게 달라 인간에게는 사악하게 비칠 수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명장이다. 서양 역사에서 손꼽히는 군사 지휘관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반달 왕국, 고트족, 게르만족을 상대로 제국의 고토를 회복한 전공으로 유명하다.\n\n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활동했다." }
{ "from": "user", "value": "말년은?" }
{ "from": "gpt", "value": "559년 벨리사리우스는 도나우강을 건넌 불가르족 전선에 투입되어 그의 장수로서 경력의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n\n562년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횡령 혐의로 고소되어 징역이 선고되었으나,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프로코피우스가 꾸며낸 모함이었다. 황제는 곧 벨리사리우스를 풀어주었다.\n\n565년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
{ "from": "user", "value": "갈사국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갈사국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소국으로 대소왕의 막내 동생인 갈사왕이 22년에 세운 나라이다. 22년 2월에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부여가 혼란에 빠지자 갈사왕은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하고 따르는 무리 100여 인과 함께 피신하였다. 4월 경에 압록곡에 이르렀을 때, 해두국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그를 죽인 뒤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 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n\n갈사왕의 손녀인 해씨부인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 되어 호동을 낳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는 친선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갈사국은 고구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 대신 안전을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n\n갈사왕의 아들의 이름이나 재위년은 전하지 않으며, 손자인 도두가 즉위한 뒤 68년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 태조대왕에게 바치고 우태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로써 갈사국은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향가의 오늘날 전하는 향가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삼국시대에 수많은 향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로, 도합 25수 뿐이며, 이 중 균여전에 수록된 향가는 고려 초기의 균여대사의 작품으로 10구체의 불교 예찬이다.\n\n##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n삼국유사에 실린 향가들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불교에 관련된 설화를 수집하고 기록한 여러 편에 실려 있다.\n\n### 서동요\n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 시기로 연대상 가장 오래된 향가에 해당한다. 설화에는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인연을 맺기 위해 일부러 퍼뜨린 노래라고 나와 있다.\n\n### 혜성가\n혜성가는 신라 진평왕 때 융천사가 지은 10구체 향가이며, 혜성이 심대성을 범하였으므로 이 노래로써 물리쳤다는 설화가 전한다.\n\n### 풍요\n풍요는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4구체 향가로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양지가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만들 때 부역 온 성내 남녀가 불렀다는 민요이며, 일명 양지사석가라고도 한다.\n\n來如來如來如 \n\n來如哀反多羅 \n\n哀反多矣徒良 \n\n功德修叱如良來如 \n\n### 원왕생가\n문무왕 때 또는 효소왕 때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광덕의 처가 지은 10구체 향가라고 하는데, 광덕이 죽자 그의 친구 엄장이 그 처에게 동침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했다는 설화만 전해 온다. 노래의 원문에 “願往生”이란 말이 겹쳐서 나와서 불교에서는 이를 “극락에 가고 싶다”라는 말로 풀이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극락노래”라고 한다.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며 명확한 제목은 전하지 않는다.\n\n月下伊底亦\n西方念丁去賜里遣\n無量壽佛前乃\n惱叱古音\n多可支白遣賜立\n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n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n慕人有如白遣賜立\n阿邪此身遺也置遣\n四十八大願成遣賜去}}\n\n달하 이제\n서방까지 가십니까?\n무량수불전에\n일러다가 사뢰고 싶습니다\n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우러러\n두 손 모두어 사뢰어\n원왕생 원왕생\n그릴 사람 있다 사뢰고 싶습니다\n야으, 이몸 남겨 두고\n사십팔대만 이루실까}}\n\n### 모죽지랑가\n신라 효소왕 때에 만들어진 8구체 향가로서, 화랑가이다. 화랑 죽지랑의 낭도였던 득오곡이, 그의 스승 죽지랑을 사모하고 찬양하여 지은 8구체 향가로서, 노래의 주인공은 화랑 죽지랑이므로 노래의 이름이 모죽지랑가이며, 일명 득오곡모랑가라고도 부른다.\n\n죽지랑은 김유신의 부원수로서 삼국 통일에 공이 컸다. 득오곡은 그의 낭도로서 풍류와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 노래는 이두문으로 되어 있다.\n\n### 헌화가\n신라 성덕왕 때에 지어진 4구체 향가이다. 삼국유사에는 “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수로부인에게 절벽의 철쭉꽃을 꺾어다 드릴 때에 부른 노래”라고 하여 “노인헌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헌화가라고 부른다고 한다.\n\n“수로부인”이 한국어로 지은 이름을 한자로 뜻을 옮겨 만든 것인지, 바다를 끼고 곧 물을 따라가는 부인이라는 뜻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n\n### 원가\n원가는 신라 효성왕 때 신충이 지은 8구체 향가로서, 연군가이다.\n\n효성왕이 등극 전 신충과 잣나무를 두고 후일을 언약하였으나, 등극 후 그 일을 잊으매 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그 나무가 말랐다.\n\n### 도솔가\n삼국유사 권5에 신라 경덕왕 때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4구체 향가이다.\n\n해 2개가 나란히 나타나매 왕이 월명사로 하여금 산화공덕을 지어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다는 설화가 전한다.\n\n### 안민가\n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스님, 표훈대덕 편”에 실려 있다. 경덕왕이 충담 스님에게 “나를 위하여 편안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노래를 지으라.”라고 명령을 내려서 지은 노래이다. 10구체 향가.\n**향찰표기**\n\n君隱父也\n臣隱愛賜尸母史也\n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n知民是愛尸知古如\n窟理叱大肹生\n以支所音物生此肹湌惡支治良羅\n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n爲尸知國惡支持以支知古如\n後句君如臣多支民隱如\n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n**중세국어**\n\n君은 어비여\n臣은 ᄃᆞᅀᆞ샬 어ᅀᅵ여\n民ᄋᆞᆫ 얼ᄒᆞᆫ아ᄒᆡ고 ᄒᆞ샬디\n民이 ᄃᆞᅀᆞᆯ 알고다\n구믈ㅅ다히 살손 物生\n이흘 머기 다ᄉᆞ라\n이ᄯᆞᄒᆞᆯ ᄇᆞ리곡 어듸갈뎌 ᄒᆞᆯ디\n나라악 디니디 알고다\n아으 君다이 臣다이 民다이 ᄒᆞᄂᆞᆯᄃᆞᆫ\n나라악 太平ᄒᆞ니잇다}}\n**현대어 풀이**\n\n임금은 아비요\n신하는 사랑하실 어미요\n백성은 어린아이라고 하실 때\n백성이 사랑을 알 것이로다\n구물거리며 살던 백성\n이를 먹어 다스려져\n'이 땅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느냐' 할 때\n나라가 유지될 줄 알 것이로다\n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 때\n나라가 태평할 것이니라}}\n\n### 제망매가\n제망매가는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에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천의 〈월명〉은 〈제망매가〉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작품으로, 나뭇잎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나무를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나뭇잎들을 통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n\n### 찬기파랑가\n찬기파랑가는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충담사가 화랑 기파랑의 인품을 흠모하여 쓴 10구체 향가이다. 제망매가와 함께 현전하는 향가 가운데, 문학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n\n### 도천수관음가\n도천수관음가는 경덕왕 때에 희명이 지은 향가로, 천수관음가·도천수대비가·맹아득안가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유사 권3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조에 수록되어 있다.\n\n### 우적가\n삼국유사의 권5 “도적을 만나다”에 이 노래를 짓게 된 이유 등이 실려 있으며, 이 노래의 내용을 칭송하여 지은 한시 한 편이 있다. 8세기 중엽에 지어진 노래이다.\n\n### 처용가\n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조”에 수록되어 있다.\n\n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란 인물이 지었다고 하며 역신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동침하고 같이 잠자리에 있는 것을 돌아와서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은 처용이 노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 앞에 나타나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n\n고려 가요 중에도 처용가가 악학궤범에도 전해져 후에 향가 해독에 도움을 주었다.\n\n東京明期月良\n夜入伊遊行如可\n入良沙寢矣見昆\n脚烏伊四是良羅\n二兮隱吾下於叱古\n二兮隱誰支下焉古\n本矣吾下是如馬於隱\n奪叱良乙何如爲理古}}\n\n서울 밝은 달밤에\n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n들어와 자리를 보니\n다리가 넷이로구나.\n둘은 내 것이지만\n둘은 누구의 것인고?\n본디 내 것이다만\n빼앗긴 것을 어찌하리.}}\n\n## 균여전에 실린 향가\n\n### 보현십원가\n보현십원가는 고려 초 균여대사가 지은 11수의 10구체 향가다. 균여대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화엄경의 보현보살 열 가지 행원에다 낱낱이 향가 한 수씩을 짓고, 11장은 그 결론으로 된 사뇌가이다. 고려 제4대 고려 광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은 해인사 장경판으로 전하는 균여전에 향찰로 기록되어 있다\n\n## 그 밖의 향가\n현존하는 화랑세기 필사본 중 6세 세종 장에 미실이 사다함이 출정할 때 지었다는 풍랑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은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위작으로 취급하는 견해가 우세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고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를 향가로 보는 이도 있다. 그 밖에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공사부지에서 발견된 목간에 기록된 내용을 향가로 보는 논문이 출간된 바 있다. 이 향가로 추정되는 글에는 '만신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알루미늄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알루미늄** 또는 **반소**는 전이후 금속에 속하는 화학 원소로 기호는 **Al**이고 원자 번호는 13이다." }
{ "from": "user", "value": "역사는?" }
{ "from": "gpt", "value": "알루미늄은 산소와 규소 다음으로 지구상에 많은 원소이다. 하지만 알루미늄의 비교적 큰 산화성 때문에 다른 금속에 비해 늦게 정제되었다. 금속의 반응성 나열표를 보면, 마그네슘>알루미늄>아연 순서에 있다. 이러한 비교적 큰 반응성 때문에, 고대에는 산화 알루미늄등의 산화물 형태로 존재했다가 전기 분해로 인한 정제 기술이 개발되면서 18세기 때 처음으로 순수하게 분리 되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원소 질량의 8.2%나 차지하는 알루미늄의 풍부함과 알루미늄의 순수 정제 가능으로 인해 이후 알루미늄의 사용은 급증하게 되었으며, 전성과 연성이 뛰어나고 전기 전도성이 좋아 고압 전선의 재료로 쓰이고, 광택의 우수함, 산화 피막 형성 등의 성질 등으로 인해 창틀 재료로 많이 쓰인다.\n\n## 나폴레옹 3세\n연회 때 계급에 따라 식기가 주여졌는데, 서열 3위가 은수저, 서열 2위가 금수저, 서열 1위가 알루미늄 수저였다." }
{ "from": "user", "value": "비행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비행기**는 동력으로 날개와 그에 의해 발생하는 양력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가진 항공기를 말한다. 최초의 비행기는 1903년 12월 17일에 미합중국의 라이트 형제가 발명하였다. 또한 비행기의 종류에는 여객기, 화물기, 전투기, 무인기, 방제기 등이 있다. 양력 발생에 필수적인 추진력을 얻기 위한 엔진으로는 프로펠러 엔진, 제트 엔진, 로켓 엔진 등이 사용된다. 세계적인 여객기 제작사로는 에어버스와 보잉이며, 비행기의 아랫면은 반대로 느리게 된다. 그 때문에 '베르누이의 정리'에 따라 윗면의 기압은 대기압보다도 낮으며, 즉 부압으로 되어 날개를 위쪽으로 빨아올리는 작용을 한다. 또 아랫면의 기압은 대기압보다도 높아져서, 즉 정압으로 되어 날개를 아래서부터 밀어올리는 작용을 한다. 이 부압과 정압으로 날개에는 위로 향하는 양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력은 날개면적 , 속도와 관계가 있다.\n의 정리' 만으로는 양력 발생 원리를 확실히 규명할 수 없다.)\n양력계수·날개면적이 일정하다면 양력은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속으로 날 때에는 받음각을 조절하여 양력계수를 작게 하고 저속으로 날 때에는 크게 맞추어 양력과 중력의 균형을 유지시킨다.\n\n비행기가 일정한 속도로서 수평으로 날고 있을 때에는 양력이 비행기 전체의 무게와 같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날개 뒤의 동체 가까이에는 플랩이 붙어 있다. 이것은 좌우 한꺼번에 내리게 되어\n있다. 그 작용으로 비행기는 느린 속도에도 안전하게 날게 된다. 이륙과 착륙시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즉 플랩을 내리면 양력계수가 크게 되므로 느린 속도에도 충분한 양력이 얻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 날개에서 중요한 것은 상반각인데, 이것은 옆기움을 복원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n\n만일 비행기가 오른편으로 기울어지면 오른쪽 날개의 에일러론이 아래로 처지고, 왼쪽 날개는 위로 들리게 된다. 그리고 기울어진 방향으로 옆미끄럼을 시작한다. 그러면 기류가 생겨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려는 힘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날개의 형은 음속에 가까운 속도 이상으로 나는 비행기는 모두가 뒤로 쏠린 후퇴날개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다음에 기술한 충격파의 영향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형이다." }
{ "from": "user", "value": "구조는?" }
{ "from": "gpt", "value": "## 프로펠러와 제트의 기능\n프로펠러가 돌고 있는 뒤에 서게 되면 굉장히 센 바람을 받는다. 이것은 프로펠러가 공기에게 뒤로 향하는 속도를 주어 힘차게 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단위시간에 어느 질량의 공기에 어느 속도를 주게 되면 공기에게 운동량의 변화를 주는 것이 되므로 그 반동으로 앞으로 향하는 추력이 얻어진다. 제트엔진에서\n수평꼬리날개의 양력이 작용하는 위치는 받음각에 따라 앞뒤로 이동한다. 한편 무게 중력은 비행기의 중심에 작용하므로 날개의 양력과 중력과는 언제나 같은 점에 작용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두 힘의 균형을 잡기 위하여 수평꼬리날개가 붙어 있다. 만일 양력이 중력보다 앞에서 작용하고 있을 경우에는 수평꼬리날개에는 위로 향하는 힘이, 또 양력이 중심보다 뒤에서 작용하고 있을 경우는 수평꼬리날개에는 아래로 힘이 작용하고 있어야 한다. 수평꼬리날개에 작용하는 힘의 방향과 크기를 가감하기에는 수평꼬리날개를 움직여 받음각을 바꾸거나 승강키의 각을 바꾸어야 한다. 수평꼬리날개의 뒷부분은 상하로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것을 승강키라고 한다. 승강키를 올리면 꼬리날개에 아래로 향하는 힘이 더해져서 비행기는 머리를 올린다. 반대로 승강키를 아래로 내리면 비행기는 머리를 숙인다.\n\n## 수직꼬리날개\n꼬리날개에는 하나의 수직꼬리날개가 있다. 이것은 비행기가 진로를 바로잡고 날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없으면 비행기는 비틀거리며 사행을 하게 된다. 수직꼬리날개의 뒷부분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이것을 방향키라고 한다. 방향키를 왼쪽으로 하면 왼쪽으로 향하고, 오른쪽으로 하면 비행기는 오른쪽으로 난다.\n\n## 보조날개\n비행기에는 위에서 기술한 승강키와 방향키 이외에 보조날개라고 하는 키가 있다. 이것은 날개의 뒷부분에 붙어 있으며, 왼쪽 보조날개를 내리면 오른쪽 보조날개가 올라가, 그로 인하여 비행기는 오른쪽으로 기운다. 그와 반대로 하게 되면 비행기는 왼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3개의 키를 사용하여 비행기는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기울게도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여러 가지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밖에 날개 뒷부분에는 보조날개와 나란히 동체와 가까운 곳에 플랩이 붙어 있다. 이것은 보조날개와는 달리 좌우 동시에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으며, 그 작용으로 비행기는 느린 속도에서도 안전하게 날 수 있다. 이륙이나 착륙할 때에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되어 있다.\n\n## 동체\n맨앞이 조종석으로 되어 있고 뒤에는 객실과 화물실로 되어 있다. 비행기를 비행시키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의 계기·유압장치·전기장치·라디오·레이더 등도 대부분 동체 안에 장치되어 있다. 동체부에는 사람이 타기 때문에 고공에서도 산소가 부족하지 않도록 여압장치에 의해 압축된 공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 많다. 고공에 오르면 기압도 떨어지고 산소가 부족하게 되며, 기온도 내려간다. 따라서 4,000∼5,000m 이상의 고공을 비행하는 비행기는 여압장치에 의하여 바깥의 공기를 압축하여 안으로 집어넣어 압력을 올리기도 하고, 냉난방도 하고 있다. 압력은 보통 지상 2400m 상당의 0.75기압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n\n## 랜딩기어\n비행기가 지면에 있을 때 이것을 지탱하는 장치로서 일반적으로 앞에 1개, 뒤에 2개가 있다. 비행기가 대형인 경우는 랜딩기어가 여러개인 경우도 있다. 각각 몇 개의 바퀴와 착륙할 때에 쇼크를 완충시키기 위한 올레오로 되어 있다. 날고 있을 때에는 필요가 없으므로 날개나 동체 속에 접어넣어 공기저항을 감소시키는 것이 접게들이바퀴이다. 바퀴 대신으로 플라우트를 달아 물 위에서 발착하는 것이 수상기이다. 동체가 보트형으로 되어 있고, 수상에서 발착하는 것을 비행정이라고 한다. 또 다른 착륙장치로는 플랩이 있는데,플랩은 착륙시 양력을 증가시킨다. 스피드 브레이크는 착륙하자마자 날개쪽에서 작동되는데,착륙 할때가 아닌 이륙 한후 상공에서 작동되는 에어브레이크등도 있다.\n\n## 강도\n비행기는 공기 속을 고속으로 운동하기 때문에 매우 심한 바람의 힘을 기체가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무작정 두꺼운 금속을 사용한다면 그만큼 무거워져서 성능이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될 수 있는 한 가볍고 견고한 구조로 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여러 가지의 비행기는 알루미늄합금의 얇은 판제로서 동체와 날개의 형태를 이루고 도리와 쇠오리를 안에 넣어 튼튼하게 하고 있다. 즉 기체가 받는 하중을 거의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외피에 의하여 지탱하고 있다. 이 구조를 모노코크 구조라고 한다. 비행기를 설계하는 데 있어서는 그 비행기가 부닥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상정하여, 그때그때 받을 힘에 견딜 만한 강도를 유지하도록 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비행기를 사용하여 철저한 강도시험을 행하여, 설계와 다름없는 결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
{ "from": "user", "value": "산해경의 목록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산해경은 「산경」 5권, 「해경」 13권으로 모두 18권이며, 목차는 다음과 같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에피쿠로스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에피쿠로스 학파라 불리는 학파의 창시자다. 에피쿠로스는 300여 권 저술 활동을 했는데, 그 가운데 몇 권만 전해진다.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 대부분은 후대 추종자나 해설자에서 유래한다.\n\n에피쿠로스에게서 철학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은 평정,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무통의 특징이 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지 않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는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
{ "from": "user", "value": "사상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그는 자연학에 있어서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윤리학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주장하여 쾌락주의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쾌락은 방탕자의 환락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던 퀴레네 학파와는 달리,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아타락시아'란 바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널리 퍼져서 종교처럼 되고 큰 영향을 끼쳤다.\n\n## 과학과 윤리 예견\n에피쿠로스는 직접적인 관찰과 이론적인 추론으로 시험된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과학과 과학적 방법의 발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의 자연과 물리에 대한 많은 생각들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학적 개념들을 예견했다. 그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의 중국, 인도, 이란, 근동, 고대 그리스에서 혁명적인 생각이 나오던 시대의 중요 인물이었다. 그의 상호관계에서의 윤리에 대한 주장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최초였으며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한 사람에게의 피해의 최소와 다른 사람에게의 최대의 행복을 강조함으로써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공식화와 구별되었다.\n\n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그와 동시대의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다른 사상이었으나,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이 가졌던 여러 원칙과 같은 원칙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처럼 그 또한 세상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조각들이 빈 공간을 떠다니는 것이라고 믿은 원자론자였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원자들이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 없이 충돌하고 되튀며, 서로 부착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입자들의 운동이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가끔 방향이 바뀐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는 달랐다. 이것은 이전의 원자론에서는 필연적이었던 결정론을 피하고 세상에 자유 의지를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n\n그는 정기적으로 여성들과 노예들을 그의 학파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인에게 근본적인 인간 평등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그는 당시에 흔하던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적 활동을 신을 생각하며 그들을 하나의 행복한 삶의 예시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전통적인 그리스 종교 활동에 참여했으나 신에 대해 거짓된 생각을 갖는 것은 잘못됐다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신들은 불사의 존재이며 축복받은 존재이고, 이 이외에 그 어떤 부가적인 가치를 신에 부과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이다. 신은 우리가 흔히 믿는 것처럼 나쁜 자를 벌하고 착한 자에게 상주지 않는다. 대중들은 신이 사악한 인간에게는 악을 주고, 신을 모델로 삼아 올바른 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는 축복을 준다고 믿지만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신들은 인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었다. 불경한 자는 대중이 숭배하는 신을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신에 대해 대중이 믿는 대로 단언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n\n## 쾌락은 고통의 부재\n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든 선하고 나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지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것은 기쁜 것이고, 나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선함과 악함의 궁극적인 도덕적 기준이다. 만약 고통이 쾌락보다 더 큰데도 그것이 선택되었다면 그것은 그것이 결국에는 더 큰 쾌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무분별한 쾌락의 추구를 지지했다고 흔히 오해받지만, 그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고통의 부재-죽음의 공포와 신의 응보로부터 자유로운 만족감과 고요함의 상태-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고통으로 괴롭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쾌락이 필요 없고, '완벽한 마음의 평화의 상태'가 된다.\n\n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에피쿠로스파 의사였던 아스클레피아데와 비티니아에 의해 의학에 접목되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의약품을 처음으로 로마에 들여온 인물들 중 하나다. 아스클레피아데는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기분좋고 고통 없는 치료 방법을 도입했다. 그는 정신 질환에 관해 인도적인 치료방법을 지지했고, 정신이 나간 사람들을 가두지 않고 식이요법과 마사지 같은 자연적 치료법으로 치료하려했다. 그의 가르침은 놀라우리만치 현대적이며, 따라서 마스클레피아데는 정신과치료, 물리치료에 선구자로 평가된다.\n\n에피쿠로스는 지나친 방임에 대하여 명료하게 경고했는데, 그것이 때때로 고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현대의 ‘숙취’에 대해 말 하는듯한 그의 한 이론에서 에피쿠로스는 너무 열정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한 사랑 대신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을 곁에 두는 것을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지켜나가는 데에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n\n에피쿠로스는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믿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죽음의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말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는 쾌락도 고통도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생겨난다.\n\n이와 같은 문맥에서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 ''Non fui, fui, non sum, non curo'' – 이 문장은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들을 비롯한 많은 로마제국 시대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인문주의 장례식에 종종 사용된다.\n\n\"에피쿠로스의 역설\"은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이 역설은 '신은 전능하며 신은 선한데 악은 존재한다'는 삼도논법이며 그 내용은 자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된다.\n\n''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n\n이 주장은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것과 비슷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에피쿠로스를 바라본 락탄티누스가 그를 무신론자로 평가하는데 잘못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레이놀드에 의하면 변신론은 그 학문적 기원이 에피쿠로스가 아니며, 반-에피쿠로스 학파에 있을 것으로 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삼도논법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회의론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기록에서 나타난다고 한다.\n\n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신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현생이나 내세에서 우리를 벌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n\n에피쿠로스는 그의 인식론에서 이성을 강조했으며, 그의 '다수 설명의 원칙'은 일찍이 과학철학에 기여했다.\n\n스토아 학파와 대조적으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당시 정치 참여에 흥미를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정치 참여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에피쿠로스는 은둔을 지지했다. 그의 이러한 원칙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lathe biōsas λάθε βιώσας'' 이는 \"비밀스럽게 살라\", \"너 자신이 주목받게 하지 말고 삶을 살아라\"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부와 영광을 추구하며 살지 말고 음식, 친구들 같은 소소한 것들을 즐기면서 이름 없이 살라는 것이다.\n\n에피쿠로스는 도덕적 지침으로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와 행복의 극대화를 강조했다." }
{ "from": "user", "value": "서왕모의 관련 기록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산해경에 서왕모에 관련된 기록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n\n\n\n목천자전에 주 목왕이 서쪽으로 가 곤륜산에 이르러 서왕모를 만나 사랑했다고 하고, 한무제내전에 한무제가 서왕모를 보고자 빌었더니 칠월 칠석에 서왕모가 아홉 빛깔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왔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서왕모가 불사약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불사수라고도 하고 천도복숭아라고도 한다. 예가 항아의 바가지에 비위를 맞춰주려고 곤륜산에 가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역시 한무제내전에 한무제가 불사약을 구했더니 서왕모가 동방삭이 자신의 궁궐에서 복숭아를 훔쳐갔다고 답했다 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동방 삭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동방 삭**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자는 **만천**이며 평원군 염차현 사람이다." }
{ "from": "user", "value": "사적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전한 무제 시기 태중대부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걸출한 외모, 익살스러운 언변과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동방삭은 생존할 당시부터 이미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특히 동방삭의 해학과 말재주를 좋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동방삭에 관련된 설화는 한국에서도 널리 유행하였다. 한서 권65 〈동방삭전〉에는 그의 저술로 〈답객난〉, 〈비유선생〉, 〈봉태산〉, 〈책화씨벽〉, 〈황태자생매〉, 〈병풍〉, 〈전상백주〉, 〈평락관부렵〉, 〈팔언칠언〉, 〈종공손홍차거〉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 외 신이경과 십주기 등 지괴소설의 저자가 동방삭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가탁된 것으로 추정된다." }
{ "from": "user", "value": "예의 신화 속의 예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이야기가 있다.\n일월조정 등의 천지창조신화 중, 영웅형 신화의 전형적 인물상과 하나라의 예란 인물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창세 무가에서 나타나는 인물과 같은 기원으로 추정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이아베투스가 뭐야?" }
{ "from": "gpt", "value": "**이아베투스**는 토성의 23번째 위성다. 토성으로부터 약 356 만 km 정도 떨어져 있고, 이심률은 0.028 정도이며 지름은 약 1494.8 km 정도이다. 이는 토성의 위성 중 3번째로 큰 것이며, 공전 주기는 약 80 일이고, 자전 주기 역시 동주기 자전으로 인하여 공전 주기와 같은 80일 정도이다. 적도에는 태양계 최대의 산맥이 존재하는데 높이는 4,509m 정도이고, 최대 높이는 13 km 일 것으로 보인다. 이아페투스의 한쪽 표면은 흰 눈으로 덮여있는데 반해, 한쪽 표면은 먼지로 시커멓게 뒤덮여있다. 이아페투스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모습은 최근 카시니호가 이아페투스에 여러 가지 물리적 작용이 일어남으로 인한 것임을 밝혀냈다. 이아페투스는 1671년 10월 25일,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가 발견하였다." }
{ "from": "user", "value": "발견은?" }
{ "from": "gpt", "value": "이아페투스는 1671년 10월 25일에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가 발견하였다. 당시 이 발견은 타이탄의 발견에 이어 두 번째 발견이었다" }
{ "from": "user", "value": "강희제의 생애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 초기 생애\n1654년 5월 4일 북경 자금성의 동쪽 후궁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강비 동가씨에게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는데, 인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다.\n\n7살 때인 1660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 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가 승은공 동도라의 딸로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순치제는 억지로 혼인한 효혜장황후를 멀리하였고 오히려 동악씨를 총애하여 현비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사는 승건궁을 찾았다.\n\n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며 다행히 얼마 안 되어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n\n동악씨는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닌데 황후에 봉해지고, 서출 출신의 죽은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가 매우 컸다. 반대가 심하고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 순치제는 1661년 1월 하순, 제위에서 물러나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에게서 행치라는 법명을 받았다.\n\n당시 대신들은 순치제에게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하였다.과 각지의 친왕·군왕들을 불러들였다. 그 중 미리 지어진 유조에 따라 조정의 수장인 정황기 출신의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 양황기 출신의 병부상서 오배, 정백기 출신의 형부상서 소극살합, 역시 양황기 출신의 호부상서 알필륭에게 일단 황궁을 봉쇄하고 궁인들에게 입단속을 하게 하였다.\n\n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라는 묘호와 장황제의 시호를 올리고 순치제의 시신을 효릉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니 현엽을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있었다. 유조의 내용은 이러하였다.\n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이다. 어머니 강비 동가씨를 황태후에,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가 순치에서 강희로 바뀌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 자는 안녕과 평화, ‘희’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n\n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n\n1662년에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한 남명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 및 평서왕 오삼계에게 버마에서 처참히 죽임을 당해,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고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이렇게 멸망하였다.\n\n## 친정과 오배의 난\n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1663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다른 황태후이며 강희제의 적모인 인헌황태후, 즉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는 황태후 서열로는 효강장황후보다 위였으나 엄연히 위에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서 수렴청정할 권한은 쥘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할 것이라 예상하던 효장태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하는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다. 그리하여 보정대신들이 그를 보필하였다.\n\n보정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훗날 환관들에게 농락될까 봐 순치제 때 설치된 명나라의 동창과 비슷한 기구인 십삼아문을 폐지하여 환관들을 정무에서 축출하고 원래 순치제 때 폐지된 내무부를 다시 설치하여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만주족 충복들로 하여금 환관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일단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잊지 않고 배웠다. 강희제의 그 스승이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에서 장원을 한 제세였다.\n\n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 혁사리씨다.\n\n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n\n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 등을 규합하여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이라는 이름의 친위병을 양성하였다. 1669년 5월 16일 오배가 궁정에 알현하려 오자 강희제는 기회를 틈타 선복영을 앞세워 오배를 체포하였다.\n\n## 삼번의 난\n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막강한 세력인 삼번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삼계는 삼번왕 가운데 품계가 가장 높았고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인 화석건녕공주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이어서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조정이 걷은 세금 가운데 백은 2천만냥이 오삼계에게 제공되었는데 이는 국가 총 수입의 절반이 넘는 양이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인 조정의 재정에 부담을 주는 원인이 되었다.\n\n평남왕 상가희는 아들 상지신과 불화를 겪자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고자 은퇴를 요청하며 자신의 작위를 아들에게 물려달라고 상소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은퇴는 허락하지만 작위의 세습은 불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삼번의 왕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오삼계와 경중명은 조정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은퇴를 요청하였다. 조정은 이들이 모반을 일이키려한다고 판단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강희제는 철번을 승인하여도 모반할 것이고 불허하여도 모반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모반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삼번의 철번을 명하였다. 1673년 7월 철번의 명이 내려지자 오삼계 등은 모반을 결정하였고 그 해 11월 오삼계는 명나라의 갑옷을 입고 영력제의 능에서 반청복명을 이유로 거병하였다. 그러나, 영력제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오삼계 자신이었기 때문에 모반의 명분은 공감을 얻지 못하여 명나라 황족을 옹립하지는 못하였다.\n\n강희제는 오삼계에게 조정에 진출해 있던 오삼계의 장남이자 평서왕세자 오응웅을 건네줄 테니 회군하라 권유하였으나 삼번 연합군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진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오응웅과 그 아들 오세림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한편, 평남왕 상가희는 오삼계의 호응 요청을 거절하고 이를 강희제에게 알려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고자 했으나, 이에 반발한 아들 상지신이 상가희를 연금시키고 오삼계와 합류하였다.\n\n3개월 내에 삼번 연합군은 중국 남부를 거의 점령하였고, 지금의 섬서성과 하남성까지 진군하였다.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는 녹영의 장군들은 거의 삼번에게 협조적이어서 삼번 연합군의 진군에 큰 저항은 없었다. 그 군세가 엄청나 몽골의 칸들이 반역자인 오삼계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을 해주겠다 하였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힘으로 국난을 헤쳐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삼계는 돌연 북경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진군 속도를 늦춘다. 청나라 조정의 군사를 너무 만만히 봐서 거만해졌기 때문이다.\n\n당시 섬서성, 감숙성을 관장하던 제독인 왕보신은 오삼계의 삼번 연합군을 잘 막았으나, 오삼계를 물리쳤다는 자신을 역시 너무 과신하여 조정에 반대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양기륭이란 사람이 자신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셋째 아들인 주자형, 즉 주삼태자로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북경을 몰래 기습하였고 강희제는 효장태황태후를 모시고 옛 수도 성경으로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양기륭이 북경에 쳐들어올 것이란 정보를 알아챈 청군이 양기륭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와해하였다. 삼번의 난 역시 곧 시간이 갈수록 물자가 많은 조정에 유리해져 갔고, 곳곳에서 도해·주배공 등 훌륭한 장수들과 팔기군의 활약으로 나태해진 삼번의 군사들을 대파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삼번의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한족 장수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들 한족 장수들은 만주족이 잘 모르는 삼번의 약점들을 잘 알아 더욱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1676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은 겁을 먹고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경정충은 곧 청군에게 끌려와 1681년에 반역에 공모한 죄로 사형당한다.\n\n1678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주, 연호를 소무라고 하였으나 노환으로 그 해 8월에 죽었다.\n\n한편,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았으나 역대 중국 왕조와 같이 사대관계에 의해 번국에 준하여 대하였고,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의 북벌론을 문제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숙종은 청나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인 정권을 물리치고 대표적인 북벌론자 윤휴를 처형하는 고육책을 써야 했다.\n흔히 군약신강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당시 조선의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크다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비웃는 말로도 사용되었다.\n\n## 대만 복속\n삼번의 난을 끝으로, 중국 본토는 일단 잠잠해졌다. 그러나 오직 대만, 팽호 제도, 금문, 하문 등 동남 36개 섬들이 아직 청나라의 소속이 아니고 대만 호족인 정성공이 통치하고 있었다. 정성공은 남명의 융무제에게서 연평군왕의 작위를 받고 명나라의 황실 성씨인 주씨의 성을 하사받고 국성야로 불렸다. 청나라 수군이 여러 차례 대만 수군과 해전에서 싸웠으나 바다에서 노련하고 네덜란드의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함선까지 빠른 대만 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n\n한편, 대만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정씨 왕조가 들어서자 청나라를 등진 많은 사람들이 대만으로 건너갔다. 대만은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여력을 갖고 있었다. 강희제는 대만의 반란을 우려하여 대만과 가까운 광동, 복건, 강소, 절강 등 동남 4성의 주민들을 해안에서 3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옮기며 동남 4성과 대만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상 금지령을 선포하여 대만을 고립시켰다. 하지만, 이 해상 금지령도 청나라 쪽에 피해가 컸다. 당시 해안가 주민들은 대만과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안가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길 때, 이들의 불만이 컸으나 강희제는 특별히 이들에게 세금을 3년간 전부 면제하고 내륙에서 살 돈까지 줘서 무마시킬 수 있었다.\n\n대만은 원래 정성공 사망 이후부터, 정경을 비롯한 정성공의 친족들이 후계자 쟁탈로 사정이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이 사이에 정경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인 정극장과 정극상이 연평군왕 자리를 놓고 싸워 결국 정극상이 왕위에 올랐다. 강희제는 과거 정경의 부하였던 시랑을 수군 총제독으로,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였던 당시의 복건 순무인 요계성을 병부상서 급의 권한을 가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아 대만을 점령할 작전을 세웠다. 강희제는 잘 훈련된 팔기 수군과 서양 선교사로부터 자문을 구해 만든 최신식 대포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대만을 공격하였다. 청군의 대대적인 공격과 그에 따른 대만 상륙에 결국 정극상은 1683년 7월에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청에 항복하여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n\n## 러시아와의 갈등\n청나라는 1639년부터 1643년에 걸쳐 아무르강 일대 원주민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실시하여 그들을 복속시켰다. 1643년 겨울에 바실리 콜랴코프의 코사크 기병대가 흑룡강 유역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650년대에는 예로페이 하바로프와 아무르 원주민들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다. 루스 차르국은 1655년 \"아무르 지역 군사총독\"을 임명했다. 이렇게 러시아와의 국지적 충돌이 계속되자 순치제 때 청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에 러시아와 싸울 군사를 요청하였다. 조선은 1654년과 1658년에 군사를 두 번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n\n이렇듯 강희제 치세 이전부터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로 내려오곤 했다. 나선정벌 이후 30여 년 뒤, 러시아는 계속 청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하였고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한다.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토착민에 대해 약탈과 부녀자 강간, 살인을 일삼곤 하였는데, 러시아 측에서는 이를 주변 야만인과의 싸움으로 여겼고\n\n그리하여 청군과 러시아군이 아무르강 부근에서 국지적으로 싸우고 휴전하기를 반복한 뒤에, 1689년에 강희제는 영시위내대신이자 자신의 처숙인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명하여 러시아와 협상을 보게 하였다.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헤이룽강의 지류인 고르비트사강과 스타노보이산맥을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으로 확정 지으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은 중국사 이래 처음으로 국가간의 평등한 위치에서 맺은 조약으로서 당시 동양 국가들이 맺는 대국-소국 간의 조약과는 다른 유럽식 조약이었다. 여기서 청나라의 제안이 대부분 수용되어 청나라는 동북쪽의 넓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와 러시아 간의 무역에도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러시아에는 그다지 득을 볼 만한 조항은 많지 않아 훗날 함풍제의 치세 때, 러시아가 애로호 전쟁에서 청나라의 원조를 빌미로 만주와 연해주의 많은 땅을 도로 가져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n\n## 몽골과 티베트 원정\n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n\n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중가르 부족의 칸인 갈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갈단은 1677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 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인이 아닌 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n\n또한 1688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n\n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사령관이었던 이복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고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1696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갈단은 이듬해인 1697년에 알타이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n\n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귀족 툴리센을 남러시아 볼가강 하류에 살던 투르구트족에게 사절로 보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갈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n\n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n\n##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n이미 팔기군에 관한 정책은 조부인 숭덕제가 만주족 팔기군, 한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으로 나누고 아버지 순치제 때 비로소 완성이 되어 있었으나, 강희제는 이를 다시 개편하였다.\n\n강희제는 전통적인 팔기군 체계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데 만약 장군이 병사들과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을 참하고, 병졸이 자신의 부대와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병졸 역시 참하도록 명하였다. 강희제는 장병이 모두 일심동체라 생각하여 책임 역시 같이 져야 한다 생각하였고 이런 엄격한 규율 덕분에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후대인 옹정, 건륭 시대의 팔기군보다 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용감하였다. 특히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강희제의 여러 전쟁 때 큰 활약을 하며 승리를 안겨주었다.\n\n후대에 가서는 팔기군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지는데, 강희 시대엔 통일을 위한 전쟁을 많이 하였으나, 후대에 들어가 전쟁이 별로 없고 군사들의 수도 갑자기 늘어나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자연히 흐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n\n## 문화 발전과 기독교 전례 문제\n\n### 학문\n강희제는 소년 시절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유학, 즉 성리학을 좋아하였으며 그 자신이 훌륭한 유학자로서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노력하였다. 서예 역시 매우 달필이어서 소림사의 현판을 바로 강희제가 썼다. 어린 시절 강희제가 쌓은 학식은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어 경연이나 조회 등에서 신료와 유학자들과 논의를 펼치고 난 뒤에, 이들은 강희제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한다. 심지어 강희제가 크게 병이 난 도중에도 결코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한다. 강희제는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았으나, 중국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보다 매우 월등한 것을 알고 그것을 만주족 대신들에게 융화시키려 하였다.\n\n### 예수회 선교사들과의 만남\n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신임하여 그들에게서 서양의 지리, 천문, 수학, 음악 등을 배웠고, 중국 황제 중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으나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다. 서양의 선교사 조아킴 부베·마테오 리파·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주세페 카스틸리오네·장 당빌 등이 계속 유럽에서 와서 새로운 학문을 강희제와 대소 신료들에게 전래하였다. 페르비스트는 아담 샬 폰 벨의 뒤를 이어 흠천감 장관을 역임하여 새로운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였고, 부베는 강희제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주었으며, 장 당빌은 정밀한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 또한, 마테오 리파는 12년간 궁정에 있으면서 강희제에게 서양화를 그려 주었다. 리파는 1723년에 그의 고향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 동부 대학에 ‘중국 학회’를 세웠다. 이 학회는 유럽 최초의 중국학 학회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양을 알려주는 총본산이 되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강희제의 통치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군주’라고 칭하였다.\n\n### 가톨릭 허용과 금지\n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다. 1692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선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성당을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가톨릭교회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를 제외한 근본주의 성향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의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라 비판하였고, 곧 이들 선교사들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n\n1704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나 천주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1706년 강희제는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선교는 불법화하였다.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오문으로 추방하였다.\n\n### 학문존중\n또한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의 일부분이었던 전시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은 한림원 학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명나라 시기의 실록인 명사를 편찬하여 초기의 명 태조와 명 성조 때 나라가 번창하였다는 점과 후에 여러 황제의 실정을 부각시켜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정통성을 확실히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또한, 박학홍유로 하여금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 연감유함, 패문운부,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하였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적 업적은 바로 1711년에 시작하여 5년 뒤인 1716년에 완성된 강희자전인데, 이것은 박학홍유 수십 명과 대신 진정경 등이 수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의 출판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강희 시대 문화 사업의 완성이었다.\n\n### 문자의 옥\n하지만,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많은 한족 학자들을 숙청한 문자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미 문자의 옥은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n\n## 내정\n\n### 검소한 살림\n1677년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을 개편하여 남서방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연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 내각대학사의 남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로 발전하게 된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려고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40분의 1로 줄였다. 강희제 스스로 옷이 완전히 낡지 않은 이상 그 옷을 기워서라도 입을만큼 크게 검소하였고 자신의 침전에도 10명 안팎의 환관과 궁녀밖에 두지 않았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근보를 그 책임자에 명하였으며 1684년에 완성해 황하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여 농민의 피해를 줄였다. 또한, 대운하 역시 보수·증축하여 많은 배가 물량을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써 황하가 안정되어 많은 물자가 장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를 타고 범람 걱정 없이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n\n### 토지개혁,농민감세\n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를 모두 몰수하고 그 땅을 모두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소작지와 소작농을 함께 매매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소작농들을 보호하였고, 백성들이 지주의 수탈 없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는 흉작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일부 감면, 또는 전원 감면하였다.\n\n### 백성들의 재산권 보호\n강희제는 황하의 치수 공사가 완성된 1684년을 시작으로 1689년, 1699년, 1703년, 1707년, 1712년 등 총 6번 남방으로 순행하여 장강 이남의 많은 지역 유지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이남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남방 순행 때, 정해놓은 예산을 제외한 별도의 비용은 가져온 내탕금으로 모두 지출하여 남쪽 백성들의 재산 착취를 막았다.\n\n### 세금감면\n강희제는 세수입을 전시에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1711년에는 성세자생인정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가 지정은제를 북경과 하북성 일대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강희제의 선정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한족 백성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한족을 융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피나는 노력에 자연히 한족 백성은 스스로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몽골의 소수 민족과의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1703년 성경과 가까운 곳인 승덕 지방에 피서산장이라는 큰 이궁을 지었고 그 곳에서 각기 다른 소수 민족의 족장 등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거나 부족의 의식도 행하게 허락하였다.\n\n### 재정정책\n재정 정책 역시 기존에 비해 수정하여, 세금을 적게 하였어도 무역 등으로 이미 은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국고도 그다지 별문제가 없었다. 1668년에 1,500만 냥, 1710년에 5천만 냥이 넘는 은자가 있었으나, 강희제의 말년인 1722년에는 은자가 7백만 냥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고의 거의 모든 은자가 군비로 들어갔으며, 강희제 역시 정무를 보기에는 이미 너무 늙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강희제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에 재능을 가진 4남 옹친왕 윤진에게 조언을 하고 새로운 정책을 찾으라 명하였으나, 강희제는 그 정책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n\n### 인구증가\n강희제의 정책을 바탕으로 인구도 크게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 기나긴 전쟁과 반란, 기근으로 중국의 인구는 1억 명 이하로 내려갔으나 전쟁을 끝내고 강희제의 강력한 내정에 백성들의 삶의 질이 나아지자 인구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강희제가 죽을 때에는 다시 1억 명에서 올라가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옹정제, 건륭제를 거쳐 계속 인구는 늘어났다.\n\n## 황태자 책봉 문제\n훌륭한 정치를 펼친 강희제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그다지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강희제는 황자들 모두를 자신의 경연 토론장인 남서방에서 교육시켜 유학의 사상이 몸에 밴 황자로 만들려 하였으나 대부분 그리 되지 못하였다. 제2황자이며 강희제의 유일한 적자이자 적장남인 윤잉은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효성인황후가 1674년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붕어하자 이를 슬퍼한 강희제가 이듬해인 1675년에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것은 본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한족의 전통을 도입하는 것이었기에 만주족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유학을 숭상한 강희제는 이런 논의를 단호히 일축하였다. 이에 서장자이고 제1황자의 작위를 받았으며 윤잉보다 두 살이 많은 윤시가 대신들 사이에서 윤잉의 경쟁 상대로 떠올랐으나 강희제는 여러 번 공식석상에서 윤잉을 후계자로 천명하여, 제위는 윤잉이 승계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갔다.\n\n강희제는 윤잉의 거처를 과거 명나라 때 황태자들이 머물던 동궁인 종수궁으로 선택하지 않고 역대 황제와 가문의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봉선전 옆에 새로 궁을 지어 육경궁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윤잉의 거처로 정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다른 어느 황자들보다 그 위상을 높였으며, 그리고 황제에게만 입히는 황포를 윤잉에게 특별히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황궁 어디서든 가마나 말을 탈 수 있게하였다. 또한 당시 어느 친왕들보다 더 많은 봉토와 식읍을 받는 등 큰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윤잉이 받았던 봉토와 식읍은 역대 청나라 친왕 중 가장 많은 봉토를 받은 도르곤보다도 더 많이 받았다. 강희제는 윤잉이 훗날 황자들에게 핍박받을지도 모를까봐 윤잉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의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려하였고 실제로 1700년대까지 윤잉을 제외한 황자들은 모두 친왕에 오르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강희제는 윤잉에게 다른 황자들이 받는 교육보다 더 수준높고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윤잉을 가르치는 사부 역시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왕섬을 임명하여 윤잉을 완벽한 차기 황제로 만들려 하였다. 머리가 총명하던 윤잉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이미 4살 때 한문을 쓰기 시작하여 7살에는 사서오경을 다 떼었다 한다.\n\n윤잉은 20대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였으나 30대가 넘어서부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색잡기를 좋아하였다. 속으로는 윤잉을 매우 아꼈으나 겉으로 내색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냉정함과 혹독함, 어머니를 태어나자마자 여읜 모정의 갈망, 그리고 형제들간의 암투 등으로 인해 점점 타락하기 시작한 윤잉에게 실망한 강희제는 3황자 윤지, 4황자 윤진, 8황자 윤사 등 다른 황자들에게 각기 부서를 책임지고 도맡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모두 육부를 관리하여 강희제의 신임을 얻고 군왕, 친왕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윤잉은 어떠한 부서도 맡지 않은 채, 부황의 눈밖에 나고 정신질환에 가까운 비행까지 일삼았다 한다. 그리고 이미 조정은 황자들과 신료들의 야심으로 인해 사분오열이 되었는데, 이 중 윤시는 자신이 장자인데 언제나 차남이며 황태자인 윤잉의 뒤에 서야 되고 윤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해야 했으며 자신이 아우들에게 “형님”이라 불리는 반면 윤잉은 이복 형인 윤시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황태자 전하”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것이 큰 불만이라 반윤잉 세력에 적극 가담하였다.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당시 윤잉을 포함한 9명의 황자가 파벌에 참여하였는데 그 계보와 파벌에 참가한 주요 대신들을 보면 이러하다.\n그중 이미 황태자 윤잉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윤잉의 작은외조부이자 이미 40여 년 전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는 자신을 위시로 한 태자당의 결성과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와 그 외숙부 납란명주를 위시로 한 황장자당의 결성으로 붕당이 시작되어 서로 조정의 주도권과 황위 후계권을 잡으려 하였고, 심지어는 태자당이 윤잉에게 알리지 않고 강희제를 암살하려 하자 진노한 강희제는 1703년에 색액도를 사사하고 그 일파를 척결해 처형하거나 유배보낸 뒤 윤잉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으나, 여전히 윤잉은 달라지지 않고 나태하였으며 조회에도 참석치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1708년에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삼아 종인부에 가두어 버렸다. 윤잉을 폐위하고 태묘에 고할 때, 강희제는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6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중풍에까지 들었다고 실록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본래 윤잉을 총애하였고 황태자를 자리에 두고 골육상쟁을 염려한 강희제는 이듬해인 1709년에 윤잉이 직접적으로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도리어 납란명주를 하옥시켰다. 색액도와 납란명주는 40년 동안 강희제의 곁에서 정치를 도와주던 조정의 수반들이자 영시위내대신이었으나 황위를 놓고 당쟁이 시작되자 강희제는 이들을 단호히 조정에서 혁파하여 당쟁의 불씨를 끄려 하였다. 하지만 윤잉이 복위되자 안심하였던 황장자당을 중심으로 황팔자당까지 합세한 반황태자파는 다시 윤잉을 폐위시킬 음모와 이간책을 꾸몄다. 황팔자당은 8황자 윤사가 주축이 되었고 이에 가담한 대신으로는 또다른 조정의 영수이며 강희제의 외삼촌이자 세 번째 장인인 동국유와 그 아들인 융과다가 윤사를 도왔다.\n\n그럼에도 윤잉이 반성을 하지 않고 다시 주색잡기를 좋아하였으나, 문제는 윤잉이 강희제의 후궁인 서비 정씨를 건드려 황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1712년에 강희제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떠났는데 아직도 윤잉을 못미더워한 강희제가 윤잉이 북경에서 딴 마음을 품지 않나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북경을 비운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궁을 비웠으니 황태자였던 윤잉이 임시로 정무를 돌보았다. 그러나 윤잉은 음모를 꾸며 강희제가 북경으로 환도하면 강희제에게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자신이 찬위하겠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 이 사건은 확실히 윤잉이 주도한 역모였다. 이것을 눈치챈 북경의 대신들은 순행 중인 강희제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고 강희제는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잉을 바로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냉궁인 함안궁에 가두고 폐서인하여 영원히 서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또한 두 번이나 폐태자시킨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할 것이라 엄중히 명하였다. 이 사건의 폐단을 계기로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죽은 황자를 황태자로 추서만 하였을 뿐, 생전에 어느 황자도 황태자로 지명받지 못했다. 강희제는 얼마 뒤 전위조서를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 뒤에 보관토록 하고 자신이 붕어한 뒤에 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저위비건법이다.\n\n이로 인해 형제들 간의 후계자 다툼이 발생하였다. 그중 4남 옹친왕 윤진, 8남 염친왕 윤사, 14남 순군왕 윤제가 가장 실력있는 아들들이었다. 장자인 직군왕 윤시는 과거 윤잉이 처음 폐위되었을 때 폐태자 윤잉을 저주하고 몰래 자객을 보냈으며, 윤잉의 방에다 칼이 꽂힌 윤잉의 인형을 숨겨놓기도 하였다. 심지어 윤시는 부황 강희제 앞에서 윤잉을 죽이겠다 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혼나고 윤잉처럼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8남 윤사가 인정이 많고 공명정대하여 가장 많은 신료의 신망을 받았으나 실제로 윤사는 간교하였고 이간질에 뛰어나 황자들간의 분란을 부추겼다. 심지어 윤사는 심복을 시켜 점쟁이를 매수하여 자신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이란 소문을 공공연히 내어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강희제 말기에 윤사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못하였다. 이들은 서로 공적을 다투고 부황인 강희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강희제는 만년에 14남인 윤제를 총애하여 그에게 북방의 만리장성을 수호하는 중책인 무원대장군의 작위와 병부의 지휘권을 내렸다. 병권을 내려주면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생각하던 황자들간의 암투는 더욱 격화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가 손을 잡고 파벌을 형성하자 4남 윤진 역시 파벌을 형성하여 조정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n\n## 천수연과 노황제의 붕어\n1722년 5월 4일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는 것을 기념하여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관리들 및 퇴직 관리들 1천여 명을 자금성 건청궁에 초대하여 큰 주연을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천수연이다. 천수연은 이미 1713년 강희제의 나이가 육순이 넘은 것을 기념하여 자신의 동년배인 대신들을 불러 축하를 해주었다. 그 이후 두 번째로 열린 이 천수연에선 3000명 정도의 각기 다른 민족 출신의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천수연에서 강희제는 이들 전직 재상들과 대신들, 원로 관리들과 함께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다. 이후, 천수연은 손자인 건륭제도 여러 번 베푸는 등 궁중의 주요 행사가 되었다.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황위를 노리는 황자들은 이를 호기로 삼아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얼마 뒤인 1722년 12월 20일에 이궁인 창춘원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9세였다.\n\n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 곤란이라 하나, 일설에 따르면 강희제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며칠 뒤에 돌연사했다 하여, 여전히 강희제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를 모신 신하가 야심 많은 4남 윤진의 휘하이자 자신의 외사촌동생이며 자신의 세 번째 황후인 효의인황후의 동생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라는 점으로 강희제가 윤진의 사주로 융과다에게 독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본래 융과다는 8남 윤사의 수하였으나 윤진의 설득과 매수로 결국 윤진의 수하로 들어갔다.\n\n능호는 경릉으로 부황 순치제의 황릉인 효릉 옆에 있으며, 청동릉의 하나이다. 묘호는 성인의 뜻으로 국가를 다스려 진정으로 통일시킨 큰 업적이 있는 황제라 하여 성조, 시호는 생전에 강희제가 인과 덕을 중시한 것을 따 인황제로 명명하였다. 정식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로 이 긴 시호에서도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합천’은 분열된 천하를 다시 통일시켰다는 뜻이고 ‘홍운’은 국운을 크게 넓혔다는 뜻이다. ‘문무’ 역시 나라의 기틀을 잡고 문과 무를 고루 이용하여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에게 올리는 시호로 나라를 세운 개국 황제에게 올려지는 ‘고’ 자와 더불어 황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이며 그리고 ‘중화’와 ‘대성’은 청나라를 중흥시켜서 나라를 더욱 번창시키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모아 크게 이루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n\n강희제 붕어 후, 8황자 패륵 윤사, 9황자 패자 윤당, 10황자 돈군왕 윤아 등은 훗날 목숨이 위태로울까 봐 그들의 넷째 형 윤진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절대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역시 ‘4’자가 붙어 있는 14황자 대장군왕 윤제를 후계자로 우겼으나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후계자가 4남 윤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당시 강희제의 유조의 내용 중 황위 승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n그리고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유조에 쓰여 있는대로 황위에 오를 명분을 세우고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13남 윤상에게 원래 윤사의 파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 근교의 풍대병영의 군사를 포섭·동원하도록 명령하고 이 군사들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 이유는 유조개위설, 개조찬위설, 무조탄위설 등 여러 설로 나뉘어 있는데, 일단 당시 강희제는 황위를 물려주려면 당사자인 옹정제를 직접 불러서 황위를 넘긴다는 얘기를 했어야 하나 옹정제나 다른 황자들 및 중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곁에 있던 융과다에게만 말을 하였다 한다. 또한 만약 옹정제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면 옹정제에게 황위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기는커녕 자신의 병세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였다. 다른 유명한 가설로는 옹정제의 명령으로 융과다가 강희제가 원래 점찍어 놓은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 대신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라고 교묘히 바꾸고 조작된 이 유조를 공포하여 황위에 올랐다는 설이다.\n\n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2013년 9월 4일 중국의 뉴스 포털사이트 텅쉰왕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문서보관소는 2일 역대 처음으로 강희제의 유조를 공개했는데 이 유조는 만주어와 몽골어로도 쓰여 있어 한자 몇 글자 고치는 유조 조작으로는 그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돼 있다고 한다. 이로써 옹정제가 무려 291년 만에 황위찬탈 혐의를 벗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이아페토스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이아페토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티탄으로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이다.\n\n오케아노스와 테튀스의 딸인 클리메네 혹은 아시아와 결혼하여 아틀라스,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 메노이티오스 등의 아들을 낳았다. 프로메테우스의 후손인 데우칼리온이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인류의 조상이 된다. 새벽별의 신인 헤스페로스 혹은 루키페르 역시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라 한다.\n\n헤시오도스의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아버지는 이아페투스라고 나오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또한 아이스킬로스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버지 이름은 나오지 않고, 어머니는 테미스라고 한다.\n\n기독교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세명 중 한 명인 야벳 이 바로 이 이아페토스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국제 표준화 기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국제 표준화 기구**) 또는 영어 약어로 **ISO**는 여러 나라의 표준 제정 단체들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표준화 기구이다. 1947년에 출범하였으며 나라마다 다른 산업, 통상 표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을 개발하고 보급한다.\n\nISO의 회원가입 현황은 2015년 기준으로 총 163개국이 가입, 활동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표준은?" }
{ "from": "gpt", "value": "ISO에서 정해지는 각 표준마다 번호가 매겨지며 그 형식은 \"ISO 표준번호:공표연도: 제목\"이다." }
{ "from": "user", "value": "카세그레인식 망원경이 뭐야?" }
{ "from": "gpt", "value": "**카세그레인식 망원경**, 또는 **카스그랭식 망원경**은 프랑스의 공작기술자 로랑 카스그랭이 뉴턴식 망원경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한 망원경이다.\n\n카세그레인식 망원경은 오목거울에 반사되어 들어 온 빛이 원초점 앞에 위치한 볼록거울에 의해 다시 오던 방향으로 다시 반사되는 원리에 착안하고 있다. 특히 볼록거울에 의해 반사된 빛의 초점이 대단히 멀리 잡히게 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른바 카스그랭 초점은 오목거울의 한가운데에 뚫어진 구멍을 통과하여 망원경 몸체의 뒷편에 맺히게 되며 그리고 초점 거리를 망원경의 노출구의 축소와 확대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경기도의 역사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 고대\n경기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의 구석기시대 유적지와 하남시 미사동의 신석기시대 유적지, 여주 흔암리의 청동기시대 유적 등 주요한 선사 취락지들이 분포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경에는 진국에 속하였으며 이후 삼한이 성립되었고 마한이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에 분포하였다.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10여 개가 경기도 지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n\n기원전 18년,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건국된 이래 백제의 중심지로 4세기 말까지 기능하였다. 396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475년에는 한강 이남 지역도 상실하여 경기도 대부분이 고구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551년에 백제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경기도 일대를 수복하였으나 553년에 신라가 연합을 파기하고 경기도 일대를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557년에는 북한산주로 개칭하였다. 신라는 경기도를 차지하여 중국과의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신라 시기에는 한산주가 설치되었는데 757년에 한주로 개칭되었다. 9세기 말에 신라가 혼란에 빠지자 경기도 각지에는 호족 세력이 난립하였는데 898년에 궁예의 세력이 경기도 일대를 평정하였다. 궁예의 후고구려는 송악에 도읍을 두기도 했다. 918년에 송악의 호족인 왕건이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n\n## 고려시대\n고려는 송악을 개경으로 개칭하고 도읍으로 삼았다. 고려 성종 14년에 지방행정구역을 십도로 개편할 때, 현재의 경기도는 관내도와 중원도 일부가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개경 주변에 적현 6개와 기현 7개를 설치하였고, 1018년에 현종이 적현과 기현을 묶어서 왕도의 외곽지역을 정식으로 '경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경기는 오늘날 경기도의 북부 일부만 포함하였고, 이를 뺀 경기도의 대부분 지역은 양광도에 속하였다. 1067년에 서울의 강북 지역에 남경이 설치되었다. 1069년에 양광도·교주도·서해도로부터 39현을 포함하면서 원래 경기 13현과 합하여 총 52현을 관할하는 규모로 확대되었으나, 얼마 후 경기의 영역은 현종 때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조선 개국 2년 전인 1390년, 총 44현을 통할해 1069년에 확대되었던 영역과 비슷한 규모로 재편되었고 처음으로 도 단위의 지방조직이 되었다. 당시의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통치되었다.\n\n## 조선 시대\n조선 시대에는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경기의 영역을 재조정하였다. 1402년에는 경기좌우도를 경기좌우도성으로 명명했고 1413년에는 지금과 비슷한 경기도의 경계선이 확립되었다.\n\n1414년 1월 18일에 경기좌도, 경기우도가 경기도로 통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안, 곡주, 연안 등 옛 경기도 북서부 지역이 풍해도)에 편입되었으며 양주, 광주, 수원, 여주, 안성을 비롯한 일부 옛 충청도 북부 지역이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세종 시기에는 경기도 철원, 안협이 강원도에 지우고 충청도 죽산이 경기도에 이관되었다.\n\n1895년에 종래의 행정구역을 개편한 23부제가 실시되었는데 이때 경기도는 대체로 한성부, 인천부, 충주부, 공주부, 개성부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1896년에 13개의 도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으며 경기도의 수부는 수원에 두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조지 1세가 뭐야?" }
{ "from": "gpt", "value": "**조지 1세**는 영국 하노버 왕가의 시조로 재위기간은 1714년 8월 1일부터 1727년 6월 11일까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인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팔츠의 조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외외증손자가 된다.\n\n23세 때 사촌 누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조피 도로테아와 결혼했고, 조지 2세와 조피 도로테아를 뒀다. 그러나 결혼 13년 만에 아내의 부정을 이유로 즉시 이혼하고 알든 성에 유폐한 후, 자신의 정부 멜루지네 폰 슐렌부르크와의 사이에서 세 딸 안나 루이즈 조피, 멜루시나, 그리고 마르가레테 게르투르트를 뒀다.\n\n1701년 제정된 영국 왕위계승법으로 제임스 1세의 손녀인 어머니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3순위가 됐다. 그보다 앤 여왕에 더 가까운 친척들도 50인 이상 있었으나 영국 왕위계승법은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원천 금지하고 있어, 조지 1세와 그 어머니가 앤 여왕의 가장 가까운 신교도 혈육으로서 왕위 계승자에 이름을 올렸다.\n\n1714년 7월 8일에 어머니가 향년 84세로 죽자 차기 계승자가 됐고, 앤 여왕이 같은 해 8월 1일 후사 없이 향년 49세에 비만으로 인한 당뇨 합병증 등의 원인으로 서거하자 54세의 나이에 영국 왕에 올랐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점차 각의를 주재하지 않게 됐고, 1721년 로버트 월폴에게 전권을 줘 각의를 주재하게 하면서, 이른바 '각의의 수석'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는 동시에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가 영국에서 뿌리내렸다.\n\n1727년 6월 11일 당뇨 합병증의 원인으로 서거 후 시신은 그가 태어난 하노버 라인 궁 헤렌하우젠 정원에 묻혔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조지 2세가 누구야?" }
{ "from": "gpt", "value": "**조지 2세**는 영국과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이다. 조지 1세와 조피 도로테아의 아들이며 프로이센 왕비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오빠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조지 2세의 어머니인 조피 도로테아는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남편인 조지 1세에 의해 감금되었는데, 이때 조지 1세는 아들이 어머니와 만나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조지 2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조지 1세와 공공연히 대립했고 자신이 머물던 레스터 하우스에서 월폴 등과 어울렸다.\n조지 2세는 건장한 체격에 왕으로서 위엄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으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고 오페라를 좋아했으며 독일 출신의 음악가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의 최대 후원자였다. 헨델은 조지 2세를 위해 그의 대관식 찬가인 사제 사독을 비롯해 왕궁의 불꽃놀이 등 많은 작품을 썼다. 조지 2세는 생애 전반에 걸쳐 군인처럼 규칙적인 일과를 보냈고 군사 방면에도 관심을 보여 1743년에 있었던 데팅겐 전투에서는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
{ "from": "user", "value": "둠스데이 알고리즘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둠스데이 알고리즘**은 존 호턴 콘웨이가 발명한 알고리즘으로, 임의의 날짜에 해당하는 요일을 쉽게 구하는 데에 쓰인다.\n\n한 해에서 다음 날짜는 언제나 요일이 같다.\n이것은 일과 월이 모두 4부터 12사이의 짝수로 되어 있으므로 외우기 쉽다. 한편, 다음과 같은 날들도 위의 날짜들과 요일이 같다.\n\n그리고 1월과 3월은 다음 날짜를 사용한다.\n\n이와 같이 한 해에서 요일이 같은 날들을 일컬어 둠스데이라고 한다. 이 날짜와 그 해의 둠스데이의 요일만 기억하고 있으면, 날짜에 따른 요일을 쉽게 구할 수 있다." }
{ "from": "user", "value": "연도별 둠스데이에 해당하는 요일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그레고리력으로 ****년의 둠스데이는 **" }
{ "from": "user", "value": "대한민국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대한민국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은 평화 유지와 아르빌의 경비 및 재건설을 겸하기 위해 이라크에 파병되어 2004년 2월 23일부터 2008년 12월 20일까지 활동했던 대한민국 육군의 민사부대이다.\n\n자이툰은 아랍어로 올리브를 뜻하며, 이는 평화를 상징한다." }
{ "from": "user", "value": "조직 구성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초기에는 사단 사령부와 사령부 직할대, 건설공병단 \"서희\"\n\n2007년 12월 28일, ''국군부대의 이라크 파견 연장 및 임무종결계획 동의안''에 따라 1년 더 파병이 연장되면서 사령부 부서인 민사처가 민사협조본부로, 재건지원대대에 경비대대가 통합되었다. 병력 감축에 의해 650여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독자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소장 계급의 지휘관의 지휘를 받았다.\n\n제58항공수송단 \"다이만\"에서 자이툰부대에 군수 및 병력을 공수하여 지원하였다." }
{ "from": "user", "value":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누구야?" }
{ "from": "gpt", "value":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그는 그의 계부, 제1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기원후 14년부터 기원후 37년까지 통치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 어린시절\n티베리우스는 기원전 42년 11월 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에서 태어났다.\n\n티베리우스는 반 아우구스투스파였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반란때 참여하자 1세때부터 로마를 떠나서 페르시아와 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로 도망치며 생활해야 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피 당시, 네아폴리스에서는 몰래 항구로 도망치던 중, 티베리우스가 2차례 울음을 터뜨려 일행이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이때 일행들에 의해 버려질뻔 했는 기록도 있다. 그 후로도 어딘가에서 어머니 리비아가 티베리우스를 대리고 야반도주를 할 때 숲에서 산불이 났고 티베리우스 모녀는 이 산불에 휩쓸려 죽을뻔 했다가 간신히 머리와 옷만 그슬리고 살아남았다. 그리스에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티스였던 스파르타인들의 공공 탁아소로 맡겨지기도 했다고, 이때의 고난들은 티베리우스에게도 가슴 깊이 남았는지 티베리우스는 시칠리아에서 어머니가 폼페이아에게 받았던 망토와 핀 금제 장식들을 보관했고 100여년 뒤인 오현제 시절인 수에토니우스도 바이아이에 남아있던 이 유물들을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n\n## 어머니의 재혼과 계부 아우구스투스\n티베리우스가 3살이었을 무렵에 사면령이 내려져 티베리우스 일가는 로마에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리비아의 미모에 반하여 티베리우스 네로에게 이혼하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부모는 이혼하고, 리비아는 티베리우스 네로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였다. 티베리우스는 리비아가 결혼 직후에 출산한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에게 거두어져 양육되었다. 티베리우스가 9살 때 아버지가 죽어 드루수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에게로 가서 같이 살게 되었다.\n\n청소년으로 성장한 티베리우스는 벌써 로마의 제일인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던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겨우 12세에 나이로 정무나 군무업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29년 8월,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한 개선식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조카 마르켈루스와 함께 개선식에 참가하였다. 그 후 드루수스와 함께 군단의 사령관으로서 각지에 파견되어 자신이 유능한 장군임을 계속 증명해보였다.\n\n기원전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으며 임페라토르로 등극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임페라토르을 세습시킴으로써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유지할 생각으로 후계자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조카 마르켈루스와 동지인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등이 후보로 생각해서 자신의 딸 율리아를 처음에는 마르켈루스에게, 마르켈루스가 요절한 후에는 아그리파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사이에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두 형제가 태어나자 두 명의 손자들을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보게 되었다.\n\n아우구스투스는 두 명의 손자들의 후견인으로서 아그리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율리아가 또다시 미망인이 되자 당시 자신의 친척 중에서 최연장 남자인 티베리우스를 후견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폰포니아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였으며,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셋이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빕사니아와 이혼시켜 율리아와 결혼하게 만들었다.\n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와의 이별을 슬퍼했지만 율리아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윽고 품행이 좋지 않던 율리아의 행실로 부부 사이가 악화되어, 티베리우스는 자진하여 로도스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율리아는 간통죄를 추궁받아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2년에 로마로 귀환하였지만, 후계자 후보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이미 요절한 상태라 소거법적으로 티베리우스가 임페라토르의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n\n기원전 4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다. 그 때, 티베리우스에게는 친아들 소드루수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게 된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며,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이 흐르는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해, 티베리우스에게 두 번째의 호민관 직권이 주어졌다. 한편 티베리우스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 아그리파의 아들 아그리파 포스트무스는 양아들 결연이 파기되어 추방되면서,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n\n## 임페라토르 즉위\n기원전 13년에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사실상 공동 임페라토르가 되었으며, 서기 14년부터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노환으로 실질적으로 단독 임페라토르가 된다. 이윽고,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그의 유언장에 따라 유산의 상속자로 지명되었고, 임페라토르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 금융 위기 대책, 변경 방위망 확립 등 뛰어난 행정 수완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임페라토르 주최의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재정 낭비 중단 정책을 단행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는 낮았다. 26년부터 37년 사망 시까지 카프리섬에 은거하여,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를 통해서 로마를 통치했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한층 더 떨어지게 되었다.\n또한, 29년에 이루어진 아그리피나 소탕작전은 더욱 티베리우스의 인기를 떨어뜨렸으며, 31년 10월 28일에는 권력욕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던 세야누스를 교묘한 전략을 사용해 처형하기도 했다. 37년, 79살에 병에 걸려 사망한다." }
{ "from": "user", "value": "칼리굴라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칼리굴라**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이며, 칼리굴라는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가 지휘하고 있었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귀여워하며 붙여준 '꼬마 장화'라는 뜻을 가진 별명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또한,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n\n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n\n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의 젊은 후계자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유서에 티베리우스 게메루스를 공동상속인으로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가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로 취임했다.\n\n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고열이 나 쓰러져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 그 후유증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미친듯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칼리쿨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마차를 끌어온 인부에게 거액을 주는 등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시키고 이로 인해 민심의 급속한 이탈을 불러왔다. 또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는 등 비정상적인 통치를 하였다. 특히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고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신들과 같은 복장을 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n\n41년 1월,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에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에 의해 아내, 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의 통치기간은 3년 10개월이었다.\n\n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원로원이 제정 대신 로마 공화정의 부흥을 기획했었지만,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된다." }
{ "from": "user", "value":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기도 하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임 칼리굴라 황제의 친삼촌이기도 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한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즉위 이전\n로마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안토니아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드루수스나 형 게르마니쿠스와는 달리 그는 원래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버릇 때문에 황실 안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형인 게르마니쿠스가 그를 배려해 주었고, 클라우디우스의 역사에 대한 재능과 흥미를 찾아낸 역사가 리비우스의 영향으로 에트루리아나 카르타고의 역사를 저술하여 역사가로서의 측면을 갖게 되었다.\n\n## 즉위\n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한 후, 원로원에 의해 칼리굴라와 함께 집정관으로 취임하는 명예를 안게 되었다.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1월 25일 황제가 되었다. 즉위에 임하기 전에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근위군단의 군사력에 의해 즉위한 것인지라, 이후 군사력이 로마 황제를 결정하는 군인황제 시대의 최초의 예가 되었다.\n\n교양을 갖춘 역사가였던 그는 지혜로운 정책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이 극렬했던 유대의 통치 문제 등을 해결하였지만,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는 낮았다.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인이나 아니우니족 출신의 해방 노예 등을 등용하여 다양한 행정 분야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것은 비원로원 의원의 정치 참여를 증대하여, 황제에게의 권력 집중이나 관료제의 발달로 이어졌다.\n\n45년에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는 반유대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약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코린토스로 이주하였다. 54년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하지만, 4번째 아내이자 다음 황제인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네로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재위 이전\n서기 37년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로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율리아 아그리피나이다. 그의 출생 당시 로마 제국은 외삼촌인 칼리굴라의 집권기였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서기 49년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숙부이자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n\n## 재위 시기\n\n### 취임 및 업적\n네로는 서기 54년 양부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세 살 차이의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였다. 집권 전반기 그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로마의 신이 황제에게 로마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을 했다.\"라는 신념에 따라 로마의 문화와 건축을 발전시켰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의 지도자로 생각하여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 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가 폭군으로 낙인 찍힌 것은 로마 대화재 당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 씌우고 기독교도를 학살하여 기독교의 뿌리 깊은 원한을 산 이유가 크다.\n\n### 친족 살해와 기독교도 탄압\n그러나 55년 의붓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였고, 59년에는 정치적으로 간섭해 온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하였다. \n\n서기 64년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이 되어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당시 로마 제국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워 기독교도를 학살함으로써 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되었다. \n\n65년에는 스승인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n\n## 죽음\n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2대 제전을 창시하였으나, 정치는 문란하여 68년 친위대까지 반란을 일으켰다.\n\n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내전이 일어나고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n\n## 외양\n눈은 유약해 보이는 파란색이었고, 목은 굵었다. 배가 나왔고, 다리는 매우 가늘었다.|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12황제 열전}}"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로마 제국의 여섯 번째 황제이다. 갈바가 69년 1월 15일에 사망함으로써 69년에 죽은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갈바는 기원전 3년 12월 24일,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20년, 23살의 나이로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33년에는 집정관에 임명되었고 39년에는 칼리굴라에 의해 라인강 방위군 지휘관에 임명되었다.\n\n45년 그는 북아프리카 총독에 임명되었다. 49년, 소 아그리피나가 그 당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는데 갈바는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10년 정도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 61년 이베리아반도 북동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n\n68년에는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빈덱스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68년 6월 8일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다. 10월에 로마에 돌아와 그가 국정에 관하여 내린 조치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중 하나가 네로의 선물을 몰수한 것으로 이 조치는 재정을 다시 확보하려고 그런 것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n\n거기다 수하들까지 탐욕적으로 재물을 긁어모아 갈바에 대한 사람들의 신임은 더욱 실추되기 시작한다. 69년 1월 2일에는 라인 강 방위군이 갈바가 황제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n\n1월 10일에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입양하여 자신의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렸는데 이는 자신이 갈바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오토를 분노케하여 오토의 쿠데타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n\n오토는 1월 15일에 황제를 수행하던 중 일행에서 빠져나와 근위대를 접수하고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이에 당황하여 반란군과 대항하려 했으나 오토 측 기병에게 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
{ "from": "user", "value":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는 로마 제국의 일곱 번째 황제이다. 그가 자신이 살해한 갈바에 이어 69년 4월 16일에 자살함으로써 69년에 죽은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오토는 32년 4월 28일 에트루리아 남부에 있는 페렌티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로원으로부터 에퀴스트리안의 직위를 임명받았으며 집정관까지 되었다.\n\n오토는 네로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네로가 그의 아내 사비나와 사랑에 빠짐에 따라 신임을 잃어 루시타니아의 총독으로 보내졌다. 오토의 사랑을 시기한 네로는 사비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n\n갈바가 네로정권을 뒤집고자 세력을 구축하자 그를 지지한 오토는 네로의 종말에 한 몫을 했다. 갈바가 황제가 된 뒤 예전부터 권력을 원했던 그는 자신이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음을 이용하여 갈바와 그의 후계자 피소를 죽이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곧 원로원의 투표에 의해 갈바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n\n황제가 된 지 3개월 후 비텔리우스가 다시 내란을 일으키고 초기 진압에 실패한 오토는 자결로 일생을 마쳤으며, 비텔리우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
{ "from": "user", "value": "비텔리우스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비텔리우스** 는 로마 제국의 여덟 번째 황제이다. 그가 69년 12월 22일에 죽음으로써 69년에 죽은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15년 9월 24일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48년 집정관에 임명되었고 61년에는 아프리카의 총독에, 68년에 하게르마니아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n\n이후 내란기를 거치며 69년 1월 2일에 하게르마니아군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으나 막상 군을 이끌고 오토를 공격하여 로마를 점령한 사람은 부하인 카이키나와 발렌스였다. 덕분에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쉽게 4월 16일에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승인되었다.\n\n로마로 가는 길에 그가 보여준 것은 환락, 축제, 그리고 무분별한 언동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경솔했던 것은 그가 내뱉은 무분별한 말로 “죽은 적의 냄새는 달콤하다”였는데, 이 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적개심을 샀다. 그 해 5월에는 자신의 게르마니아군을 근위대로 승격시키고 기존에 있던 수도의 근위대는 해체시켰다.\n\n7월 1일에 비텔리우스에 대항해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반기를 들게 된다. 비텔리우스는 7월 18일 휘하 병력과 함께 로마에 입성하였다. 입성한 비텔리우스는 부하들의 전횡 방치, 연이은 환락생활, 무분별한 군단관리 등 그야말로 정치에 관해서는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다. 10월에는 분노가 극에 달해 있던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며 카이키나가 이끄는 라인 군단과 충돌해 승리하고 자신들을 모욕하였던 크레모나의 주민을 무참히 학살한 뒤 로마로 쇄도하기 시작한다.\n\n12월 20일, 도나우 군단에 맞서 군사를 보내나 보낸 군사들이 쉽게 도나우 군단에 항복을 하게 되어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겁을 먹은 비텔리우스는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친위대에 의해 거부당하고 숨어 지내다 도나우 군단에 끌려나와 처형되고 만다. 죽기 직전에 군인들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고 살해되려 할 때, 군인들에게 \"나는 그래도 한때나마 너희들의 황제이었다.\"라고 외쳤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살아 생전에 그가 황제답게 행동한 유일한 모습이었다\"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비웃었다." }
{ "from": "user", "value": "베스파시아누스가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베스파시아누스**는 , 로마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이다. 그는 비텔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
{ "from": "user", "value": "생애는?" }
{ "from": "gpt", "value":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리 집안의 둘째 아들로서 로마 제국의 권부 최상층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으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의 신분을 끌어 올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n\n네로시대에는 뛰어난 장군으로 로마 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로마 황제의 그리스 별궁에서 네로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네로 황제의 시를 들으며 졸았다는 이유로유배되어 양봉을 하며 소일하게 된다.\n\n2년여의 세월이 지나자 유다 지역에서 유대교민족주의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이를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되는데 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래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다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의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다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양 쪽의 상생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다를 무리 없이 통치하였다. 물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정치를 도운 요세푸스를 보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n로마에서는 네로의 자살로 말미암아 큰 혼란이 야기되고 이를 수습할 적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인에게 선택되면서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내전 상태의 로마를 평정하고 국가의 질서를 회복시키면서 군인 출신이었던 세 명의 황제의 뒤를 이어 새로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n\n최초의 평민 출신 로마 황제이며 그 아들 티투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플라비우스 황조를 이루게 되었다." }
{ "from": "user", "value": "티투스의 경력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n기원후 39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티투스는 황궁에서 제국의 후계자들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제위 계승자 중 하나인 브리타니쿠스와 사이가 좋아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되었을 때, 티투스는 바로 옆에서 그를 죽인 독을 시험하느라 오랫동안 마루에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을 티투스는 평생 잊지 않고, 후에 황제가 되었을 때, 젊은 나이에 죽은 옛 친구의 상을 건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n\n기원후 61년부터 기원후 63년에 걸쳐 트리브누스·미리튬으로 취임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 등지에서 복무했다. 기원후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테르트라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고, 이듬해에 마르키아·프루니라와 재혼했다. 아내의 생가는 제위 후계자로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네로의 대항 세력에 속했지만, 결혼한 해인 기원후 65년에 원로원 의원 피소에 의한 네로의 암살 의혹 사건으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으며, 그 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n\n## 유대항쟁 진압\n67년에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유대인항쟁진압을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고, 아버지 밑에서 보병 레기온을 지휘했다. 쿠에스톨이있던 티투스는 동지로 군의 지휘관으로서 근무했다. 그러나 로마에서 68년에 네로가 자살로 내몰리고 갈바가 스스로 황제로 취임한다. 이 때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으로 갈바가 황제로 취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도중 갈바가 살해당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했던 오토가 자살했으며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서방의 정세가 혼란에 빠진 것을 알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다시 동방으로 돌아와 유대항쟁 진압에 전념했다. 이같이 1년에 황제가 네 명이나 교체되는 불안정한 '4황제의 해'에, 티투스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함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했다.\n\n기원후 69년에야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대한 선봉으로, 이듬해에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선언을 위해 차례로 로마로 향한 뒤, 예루살렘 공략의 사령관이 되어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을 2년동안의 전쟁 끝에 점령, 기원후 73년까지 혁명당원 들이 저항을 계속한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의 반란을 평정했다. 지금도 로마 광장 입구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후 81년에 세운 것이다. 이 때에 유대왕가의 일족인 베레니케와 사랑에 빠졌다. 기원후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 개선식의 모습은 포룸·로마눔의 동쪽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의 릴리프에 남아 있다. 그 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공동 통치하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은 그는 73년 아버지와 함께 감찰관을 지냈고 몇 차례 공동 집정관이 되기도 했다.\n\n## 황제로서의 치세\n집정관이 된지 7년 째 되는 기원후 79년에, 티투스는 제위 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역모를 진압하기도 했으며 그 해에 아버지가 죽자 아무 소란 없이 즉각 제위에 올랐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 사람들은 그가 다시 네로와 같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라고 훗날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쓰고 있다. 이유는 애인인 베레니케로, 로마 시민에게 있어서 그녀는 클레오파트라의 재래로 여겨졌고, 시민들의 두려움을 깨달은 티투스는 베레니케를 아내로 하는 것을 단념했으며 이를 계기로 시민의 동정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또한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어떤 심한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하고, 어떤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로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티투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좋은 것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하루를 잃어 버렸다'고 한탄했다고 한다.\n\n티투스가 즉위한 해 8월에 그 유명한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등의 도시가 멸망했는데 이때 그는 캄파니아에 지원을 보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기원후 80년로마에 사흘 동안에 걸친 대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때 로마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을 마무리지었고 준공 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축하행사를 벌였다.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와중인 기원후 81년 9월 13일, 티투스는 치세 불과 2년 만에 열병으로 죽었다.\n\n그가 죽자,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도미티아누스가 누구야?" }
{ "from": "gpt", "value": "**도미티아누스** 는 로마 제국의 열 한 번째 황제이다. 그는 전임 황제자들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이었으며,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재위 기간 그의 권위주의적 성격 방식의 통치는 도미티아누스로 인해 권력이 급격하게 제한당한 원로원과 극도의 불화에 빠트렸다.\n\n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형의 재위 기간에 크고 작은 형식적 역할을 맡았다. 형이 죽은 후, 도미티아누스는 친위대의 지지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의 15년간의 통치 기간은 티베리우스 재위 기간 이래로 가장 긴 기간이었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형제와의 경쟁\n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어머니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제9대 로마 황제이었다. 그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가졌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79년 6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훗날 형의 죽음에도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와 소 플리니우스에게서 받은 혹평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행정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 로마와 속주의 행정관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n\n## 군사정책\n그의 군사·외교 정책도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집권초 브리튼 섬과 게르만 지방으로의 진격을 시행했고 국경인 라인-도나우 강변에 리메스를 건설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미처 합병시키기도 전에 도나우 강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2개의 레기온과 많은 군사를 잃었다. 이것은 타키투스도 지적했듯이 당시 군지휘관들이 태만하고 성급했기 때문이었지만 로마에서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84년에 군인 봉급을 1/3 정도 올려주는 등 현명하게 처신해 군대 내에서 인기를 그대로 유지했다.\n\n## 우상화\n진짜 문제는 그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의전행사에서의 위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자주 콘술직을 맡았으며, 85년에는 종신 감찰관이 되어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원로원에서는 개선식 의상을 입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토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이라고 부르게 해서 심한 공격을 받았으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주님이자 하느님이라는 기독교의 케뤼그마에 반대되는 도미티아누스의 황제 우상화에 반대하여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았다.\n\n## 철권통치\n84년에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킨 것은 다른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87년에 일어난 일반적인 소요의 전초였다. 89년 1월 1일에는 상 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하 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년부터 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n\n## 암살\n결국 도미티아누스는 96년 9월 18일에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그 뒤 곧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생전에 남긴 모든 업적을 지워버리는 '기록말살형'에 처했음에도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
{ "from": "user", "value":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가 뭐야?" }
{ "from": "gpt", "value":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로마 제국의 제12대 황제이다. 네르바는 네로와 플라비우스 왕조의 통치자들 밑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낸 후, 거의 66세가 다 되어서야 황제가 되었다. 네로 밑에 있었을 때, 그는 네로의 측근이자 65년 피소 음모를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의 충신으로,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 재위 시절인 71년과 90년에 집정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n\n96년 9월 18일에 도미티아누스가 친위대 인원들과 그의 해방 노예가 연루된 궁전의 음모로 암살되었고, 같은 날에 로마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선포했으나, 이는 친위대가 내린 결정이었기에 원로원이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새로운 로마 황제로서, 그는 도미티아누스의 전제 정권 기간에 제한당했던 자유를 회복하기로 선포했다.\n\n네르바의 짧은 재위 기간은 재정적 어려움과 로마군에 대한 그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인해 힘든 시기를 겪었다. 특히나 97년 10월에 일어난 근위대의 반란은 그가 후계자로 양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신중을 기울여, 네르바는 인기있는 장군이던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입양했다. 재위에 오른 지 15개월 만에 그는 98년 1월 27일에 자연사했다. 그가 죽은 뒤 트라야누스가 재위를 이어받고 그를 신격화했다.\n\n생애 대부분은 불명확하지만, 네르바는 고대 역사가들에게 현명하고 온화한 황제로 평가받았다. 네르바의 가장 큰 성공은 그가 사망한 후에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택하여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이뤄낸 것은 그의 능력이었으며, 이에 따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를 세운 것이었다." }
{ "from": "user", "value": "사망과 유산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98년 1월 1일, 자신의 네 번째 집정관직을 시작하던 때에, 네르바는 접견 중에 뇌졸중을 겪었다 그는 그곳에 안치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n\n네르바의 뒤는 많은 열의를 로마 민중들에게 받았던, 그의 양자 트라야누스가 사고없이 계승했다. 소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트라야누스는 네르바를 기리며 신전을 헌신했으며,\n\n이 시기에 쓰여진 사료들의 부족으로 인해, 네르바의 생애 대부분은 불명확하게 남아있다. 네르바 집권기의 가장 상당하게 남아있는 기록은 3세기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가 쓴 것들이다. 이탈리아에 아이네이아스의 상륙부터 서기 229년까지 근 1천년을 다루는 그의 ''로마사''는 네르바가 죽은 지 100년이 더 된 후에 쓰였다. 더욱 자세한 사항들은 4세기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가 지필했다고 주장되는 ''황제전''이라는 간략화된 전기에 더해졌다.\n\n세세하게 네르바의 생애를 묘사했다고 여겨지고, 좀 더 포괄적인 문서는 동시대 역사가 타키투스가 지필한 ''역사''이다. ''역사''는 69년 네로의 자결부터 96년 도미티아누스의 사망까지 30년간을 다루는 로마 역사서이다. 하지만 네 명의 황제의 해를 다루는 처음 다섯 권만 남아있으며, 이 서적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타키투스가 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전기 도입 부분에, 타키투스는 그의 집권기를 \"네르바 카이사르가 한때 해소될 수 없는 것들인 군주권과 자유를 섞어내던, 가장 행복한 시기의 여명\"이라 묘사하며, 네르바를 높게 평가한다.\n\n비록 어떤 역사서들도 그의 정책에 대해 실질적인 주해를 제공하지는 않고 있으나, 남아있는 역사서들은 네르바의 짧은 통치기에 대하여 똑같이 긍정적으로 말한다. 카시우스 디오는 트라야누스를 그의 후계자로서 양자로 받아들인 네르바의 결정을 칭찬함과 동시에. 이런 관점들을 이후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자신의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대중화했다. 기번은 96년부터 180년까지 로마 제국을 \"지혜와 미덕이라는 지도하에, 절대 권력으로 다스렸던\" 다섯 명의 연속된 통치자들인 오현제의 시초를 네르바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기번이 언급하기도 했으나, 그의 후계자들과 비교했을 때, 네르바는 성공적인 통치를 위한 필수적인 요건들이 부족했었을 것이다:\n\n현대 역사학계는 이 평가를 확장하여, 네르바를 선의적인 인물이나 유약하고 무기력한 통치자로 특징짓는다. 로마 원로원은 그의 통치기에 부활한 자유를 누렸으나, 네르바의 국가 재정 및 군대에 대한 권위 부족이라는 실정은 로마를 거의 엄청난 위험 경계 쪽으로 궁극적으로 이끌었다. 트라야누스 입양은 후계자가 존경받으며, 믿을 수 있는 장군이라는 점으로 네르바의 권력 기반을 확대했다. 뮤리슨은 네르바의 진정한 재능들이 사실상 황제로서 부적합다고 결론지었다:\n\n따라서 로마사에서 그의 위치는 트라야누스-안토니누스 왕조 이전 떠들썩한 임시 절차라면 필요한 것이라 요약될 수 있다. 심지어는 그의 임기에 완성된 유일한 주요 공공사업인 네르바 포룸도 결국엔 ''포룸 트란시토리움'' 이라고 알려지게 됐다.\n\n네르바를 기념하는 현대의 조각상 두 개를 그와 관련된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네르바를 기념하며 건설된, 잉글랜드 글로스터에는 그의 기마상이 있으며, Southgate 거리로 향하는 입구에 설치되었다. 네르바의 출생지라고 주장되는 이탈리아의 나르니라는 도시에, Cocceio Nerva 거리에도 그의 조각상이 있다." }
{ "from": "user", "value": "트라야누스의 황제 즉위 이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는 서기 53년 9월 18일에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속주\n\n트라야누스는 로마 귀족이자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였던 티투스의 처형인 마르키아와 울피아 씨족 출신의 저명한 원로원 의원 겸 장군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기간 베스파시아누스 곁에서 복무했고, 프레텐시스 제10군단을 지휘했다. 아버지 트라야누스 본인은 그가 죽은 뒤에도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저명한 많은 울피아 씨족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누이는 울피아 마르키아나였고, 조카는 살로니나 마티디아였다. 울피아 씨족의 파트리아는 히스파니아 바이티카에 있는 이탈리카였다.\n\n젊은 시절에, 그는 로마 제국 국경 중 가장 치열한 곳들에서 복무하며, 로마군 내에서 계속 승진해 나갔다. 76년 혹은 77년경에,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시리아의 총독 이었고, 트라야누스 본인은 군사 호민관으로 있었다. 아버지의 임기가 끝난 후, 그곳에서 그는 불분명한 라인강 속주 지역으로 전근된 것으로 보이며,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가 두 번의 파병 기간에 전투 활동 임무에 참여한 것을 암시했다. 대략 86년에, 트라야누스의 친척 P.아일리우스 아페르가 그의 어린 자녀들인 하드리아누스와 파울리나를 고아로 둔 채 사망하였는데, 트라야누스와 그의 동료,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가 이 두 명의 공동 후견인이 되었다.\n\n91년에, 트라야누스는 30대 후반의 나이로 일반 집정관이 되었는데, 해당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최소 연령 바로 위였기에 이는 대단한 영예이었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통치 중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성장에 도움이 됐던, 아버지의 경력 덕분에, 집정관에 오르게 됐고 파트리키가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기 무렵에, 트라야누스는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루스와 같이 로마로 복귀했고 또한 님에 있는 로마 정착지 출신 귀족 여성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혼인했으며, 둘 사이에 끝내 자식은 없었다.\n\n트라야누스가 동성애 쪽 성향이 있다는 것이 율리아누스와 카시우스 디오 같은 작가들에게 언급되었다. 트라야누스의 추정상 연인들로는 하드리아누스, 궁정의 하인들, 배우 필라데스 , 아폴라우스투스 라는 무용수,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 등이 있었다.\n\n트라야누스의 상세한 군사 경력에 관한 정보는 불명확하다. 89년에 그가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게미나 제7군단의 레가투스로 있던 시절에 쿠데타 시도가 일어났을 때 도미티아누스를 지지한 것만 알려져 있다. 이후, 91년에 집정관직 을 마친 후, 그는 판노니아나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혹은 두 지역의 총독으로서 일부 행적이 불분명한 집정관직을 맡았다. 의도적으로 트라야누스와 \"폭군\" 도미티아누스 간 개인적 연관성을 강조할 수 있는 상세한 정보를 숨기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이는 플리니우스는 당시에 여러 가지 군사적 위업을 트라야누스에게 돌렸다.\n\n도미티아누스의 후임인 네르바는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친위대 사령관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에게 도미티아누스를 시해한 자들을 처형하도록 강요받자, 퇴위당하는 걸 피하기 위해서 군사적 지지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주장되는 바에 의하면 그는 97년 여름에 트라야누스의 두드러진 군사적 업적에만 의존하여, 트라야누스를 양자이자 후임자로 지명하면서 이를 이뤄낸다. 하지만 동시대 문헌 자료에서 트라야누스 입양이 네르바에게 부과된 것이라는 암시들이 존재한다. 플리니우스는 그가 기록을 남길 때, 황제가 억지로 하게끔 강요받을 수 없음에도, 만약 이 입양이 트라야누스가 권력을 얻기 위한 방식이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등의 많은 내용들을 암시했다. 앨리스 쾨니히는 네르바의 집권기와 트라야누스의 집권기 간의 자연스러운 연경이라는 개념은 타키투스와 플리니우스 같은 트라야누스 집권기 작가들의 기록물로 인해 만들어진 사후의 허구라고 주장하였다.\n\n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의하면, 트라야누스의 입양 소식을 전한 이가 미래의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당시에 트라야누스와 함께 라인강 국경에서 천부장으로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교제 범위와 관계에 깊숙이 관여되고 있었고, 그 관계에는 트라야누스의 최고 개인 참모이자 공식적인 친구가 된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의 총독이자 히스파니아 출신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가 있었다. 트라야누스의 영향력에 대한 표시로, 수라는 나중에 107년에 3선의 집정관이 되었다. 몇몇 고대 사료들은 그가 로마의 아벤티노 언덕에 트라야누스의 이름을 딴 목욕탕을 지었다거나 트라야누스의 명령으로 목욕탕을 짓고 그러고 나서 트라야누스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내용을 전하는데, 수도의 공공 시설물은 황제 일가만 헌정하는 것 가능하게 한 정해진 법의 유일한 예외 사항이었기에, 두 가지 경우 모두 엄청난 영광이었다.\n\n네르바가 집권할 때인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 시절, 트라야누스는 위기일발의 속주 지역을 능숙하게 통치하여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98년 1월 27일에 네르바가 사망하자, 트라야누스는 별 문제 없이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가 로마로 항하는 데 서두르지 않고 라인강과 다뉴브강 국경 지대로 장기간의 시찰을 갔기 때문에 로마에서 그의 권력 위치가 안정적이지 못했고, 그가 가장 먼저 국경 지대의 군대의 충성을 확실히 받아야만 했다. 트라야누스는 친위대 사령관 아일리아누스에게 자신이 있는 독일로 오라고 명령을 했고, 그곳에서 아티우스 수부라누스에게 직위를 빼앗긴 채 처형당했다. 따라서 트라야누스의 즉위는 성공적인 쿠데타로 볼 수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의 생애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 황제 즉위에서 로마 귀환까지\n76년 로마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원적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히스파니아 바이티카의 이탈리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아버지는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 어머니는 도미티아 파울리나로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촌 형제의 아들에 해당한다.\n\n85년 먼 친척인 트라야누스 황제가 후견인이 됨으로써 로마로 거주지를 옮긴다. 93년, 18살의 나이로 20인 위원직을 맡아 민생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고, 로마 제국 제2군단의 부관에 임명되면서 지휘관의 발판을 놓게 되었다. 나아가 96년에 제5마케도니카 군단의 지휘관, 97년 제12프리미게니아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판노니아, 하부 모이시아 및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각 속주에서 고급 장교의 임무를 수행해 공적을 세운다. 101년에 원수재무관에 취임하여 트라야누스 황제의 비서로서 활약, 황제의 연설을 원로원에서 대변하는 역할을 맡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105년 호민관에 취임하였고, 나아가 법무관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제1미네르바 군단의 사절, 군사령관으로서 제2차 다키아 전쟁에 참전하여 공적을 세웠고, 107년부터는 속주의 장관으로서 하부 판노니아를 다스렸다. 이때 쌓은 공적으로 이듬해 108년 명목상 황제 다음 가는 로마 제국의 관직인 보좌 집정관에 선출되었다.\n\n114년부터 시작된 파르티아 전쟁에서도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황제 트라야누스의 보좌역을 맡아 두터운 수완을 발휘한다. 117년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시리아 속주의 총독로 임명하였다.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대신 파르티아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로마로 돌아가지만, 도중에 킬리키아 속주의 셀리누스에서 사망하고 만다. 죽기 전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로 지명했는데, 이것은 황후 폼페이아 플로티나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n\n8월 9일에 안티오키아에 머무르고 있던 하드리아누스에게 트라야누스의 양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고 이틀 뒤 트라야누스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휘하 군대로부터 「임페라토르」라 불렸고, 이 날이 하드리아누스의 공식적인 「즉위날」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셀리누스로 가서 조문을 표한 뒤, 다시 시리아로 돌아갔다. 그 뒤 동부 변경의 안정을 위해 속주 메소포타미아 속주와 아르메니아 속주를 포기한다는 처리와 함께, 야만족의 침입으로 불온한 정세에 놓인 도나우강 유역에서 물러나 속주 다키아와 모이시아를 재편성하고 이듬해 7월에야 로마로 돌아왔다.\n\n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에 대해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견을 드러냈는데,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던 심복 근위장관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가 예방적 차원의 처치로서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집정관을 맡았던 유력한 원로원 의원 4명을 살해했다.\n\n##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업적\n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이루어진 특기할 만한 사실들은\n\n이 있다.\n\n그가 황제로 취임할 때, 선제 트라야누스의 적극적인 정책에 의해 제국의 판도는 최대에 이르렀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일찍이 다키아를 속주로 삼았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삼았으며, 치세 말기에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동방에 인접해 있던 파르티아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하드리아누스는 외교 기조를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고, 유프라테스강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 속주를 포기하는 대신 동방의 변경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n\n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국의 동부 이외에도 제국의 방어력을 정비하는데 힘썼다. 군사적인 요충지에는 방벽 구축으로 천연의 요새를 지어 제국을 방비했다. 그 중에서도 칼레도니아인과의 분쟁이 있었던 브리타니아 북부에도 방벽을 구축하였다. 보통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게르만인과의 경계였던 라인강이나 도나우강 지역, 북아프리카에도 방벽이 지어졌다. 그리고 황제 스스로가 군기를 철저하게 바로잡고자 하여 순찰 여행 도중에도 현장에서 병사 훈련을 사찰했고,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또한 군단에 현지 병사를 채용함으로써 군단의 규모를 안정시키고 군비를 절약하였다.\n\n파르티아 문제를 수습한 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우선 속주를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 속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탈리아와의 일체화에 노력을 기울여, 하드리아누스 자신도 두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순찰 여행에 나섰다. 여행 목적은 제국 방비의 재정비와 제국 행정의 조사, 통합의 상징으로서 황제 자신을 주지시키며 제국 각지의 순찰에 있었으며, 건설 관계자를 동반하는 등 공공 부분의 공사도 함께 행해졌다. 20년간 3차례에 걸친 제국 전역을 시찰하여 제국 영토의 방위나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대한 대처, 통치 기구 정비 등 제국 내부를 튼실하게 만드는 데 충실하게 노력하여 제국을 재구축한 황제로 불린다. 특히 통치 기구 정비가 매우 철저하여 그가 구축한 관료 기구는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고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n\n하드리아누스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지만, 군사면에서도 우수하였다. 군대의 규율 개정에 의한 군 내부를 개혁시켰으며, 용병술에 뛰어난 하드리아누스 덕분에 로마군은 연전 연승이었다. 또 전투 상황일 때는 앞장서서 지휘를 하였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n\n하드리아누스는 법 제도의 정비를 추진하여 사르비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명하여 『영구고시록』이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하게 한다. 이것은 법무관이 내리던 기존의 고시들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훗날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에 이들을 토대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편찬되었다.\n\n130년에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때에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을 로마풍의 도시로 건설하여, 자신의 씨족명 「아일리아」를 붙인 식민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 명명하였고, 132년에는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조직적인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하드리아누스는 다른 속주로부터 군단을 동원하여 3년 만인 135년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러한 반란의 결과로 유대 지방은 「속주 시리아 ・ 팔레스티나」라 명칭이 바뀌었고 유대라는 이름은 사라졌으며, 유대인들은 제국 각지로 대규모 이산되고 이후 예루살렘 시내에 거주하는 것이 제한되었다.\n\n##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n치세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국내, 외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지만, 로마 원로원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했다.\n\n일단 하드리아누스 치세 초기에 집정관 경력이 있었던 원로원 의원 네 명이 살해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드리아누스는 방위에 필요한 병력과 유지비 등의 부담이 늘어나 결국 제국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러한 판단 아래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한다는 현실 노선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당시 원로원에는 실제로 전장을 누비며 영토 확장에 공헌한 자들도 있어, 하드리아누스의 온건한 대외 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 원로원 일부의 거센 반발에 하드리아누스의 지지자들은 반대파 거물 네 명을 숙청하는 강경책으로 대처했다.\n\n치세 말기 후계자를 선출할 때에도 의견이 맞지 않아, 황제의 의형제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와 그 손자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를 자살로 몰아갔다. 황제의 치세 말기 하드리아누스와 원로원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있었다.\n\n말년에 그는 병상에 누워서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 황제가 서거한 뒤에는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하여 국가신의 반열에 올리는 것조차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 경우 신격화되지 못한 채 도미티아누스처럼 「기록 말살형」에 처해져 하드리아누스의 통치에 관련된 모든 기록이 말소될 수 있었다. 황제의 후계자가 된 안토니누스는 눈물을 흘려가며 필사적으로 원로원 설득에 힘썼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격화에 대한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안토니누스는 「경건한 안토니누스」라 불리게 되었다.\n\n로마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많이 세워졌던 로마에서 5현제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을 기리는 비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n\n## 기타\n문화적으로는 118년,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 대규모의 별장 빌라 하드리아누스의 건설을 시작하였고 동시에 후세의 신고전주의 건축에 큰 영향을 준, 로마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판테온 신전의 재건에 착수했다. 그 외에도 로마의 베누스와 로마 신전 등 각지에 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다.\n\n사생활의 면에서 비티니아의 미청년 애인 안티누스를 총애하여 속주 아이깁투스 시찰 중에 그 미청년이 나일강에서 사고사한 뒤에는 그를 신격화하여 신전을 세우고 도시 안티누폴리스를 지었으며, 제국 내에 안티누스의 상을 세우고 천공에 안티누스가 거할 자리를 짓게 했다고도 전한다.\n\n몸이 튼튼했지만 만년에는 컨디션 불량에 시달렸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후계자로 처음 지정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138년 1월에 사망하기도 했는데, 다음 달에 다시 안티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138년 7월에 바이아이의 별장에서 62세로 서거하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138년부터 161년까지 재위한 로마 제국의 제15대 황제이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5현제 중의 한 명이다.\n\n원로원 가문 출신에서 태어난,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다양한 공직들을 거쳤다.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조카인 파우스티나와 혼인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죽기 얼마 전에 그를 아들이자 후계자로서 입양하였다. 안토니누스는 황제 자리에 오른 뒤에 ‘피우스’라는 코그노멘을 얻었으며, 원로원에 그의 양부를 신격화하도록 했거나, 그의 치세는 대규모 반란이나 군사 공격이 없는 제국의 평화로운 상태와 그가 이탈리아를 단 한번도 떠나지 않고 제국을 다스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재위 초기에 스코틀랜드 남부에 대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은 안토니누스 방벽 건설로 이어졌다.\n\n안토니누스는 효율적인 행정가이기도 하였으며, 후임자들에게 막대한 국고 잉여금을 남겨주었고, 제국 전역에 식수에 대한 접근성을 행상시켰으며, 법적 일치성을 장려하였고, 해방노예의 설립을 촉진했다. 그는 161년에 지병으로 사망했고 양자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가 공동 황제로서 뒤를 이었다." }
{ "from": "user", "value": "법률 개혁은?" }
{ "from": "gpt", "value":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역량이 얼마나 과장되고 불확실한지는 상관없이, 자기자신을 ‘공화정’의 정무관으로 그려지도록 하였다. 그는 제국의 국고를 분할한 피스쿠스에 대해서 인정을 받고 있다. 이 분할은 국고를 두 개로 구분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일차적으로, 황제 권좌에 앉는 각 후계자의 세습재산인 황제의 자산을 뜻하는 피스쿠스 혹은 파트리모니움은 황제 가문에서 과거의 신분에 상관없이 공직에 오르는 후임자들에게 전해졌다.\n\n개인 토지는 매도되거나 양도될 수 있었고, 반면 ‘파트리모니움’ 자산은 공적인 것으로 여겨졌다.\n\n이 시기의 공무 처리에 있어서, 적은 정보만이 있을 뿐이지만, 남아있는 것으로만 판단해볼 때, 그의 치세 전후와 비교하여 22년간의 통치 기간은 현저하게 중대한 사건은 없었다. 그렇지만, 안토니누스는 로마 제국 전역에 법에 관한 개정과 절차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지방의 지역공동체들이 자신들의 법적 절차를 존재하는 로마의 기준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소아시아 지역의 지방 치안관들의 강도 행위의 억제 문제에 대해서, 안토니누스는 이들 관리들이 용의자들을 이미 유죄를 받은 것처럼 다루지 말 것이며, 또한 로마 총독들에게 상소에 쓰일 수 있는 심문 자료의 사본을 갖고 있도록 명하였다.\n\n이때, 안토니누스 황제는 법률서 저자인 루키우스 풀비우스 아부르니우스 발렌스,\n\n안토니누스는 노예 해방을 촉진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자유에 대한 주장이 명확하지 않을 때 의문의 자유인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려주며, ’친자유’ 원칙을 선호했다.\n\n안토니누스의 치세 기간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148년에 일어나는데, 로마 건국 900주년 행사가 대규모 경기 행사와 함께 거행되었다.\n\n학자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랍비 유다 하나시의 친구로 여겨지는 인물의 주요 후보로 거론하였다. 탈무드 에 따르면, 랍비 유다는 로마에서 아주 부유하였고 대단히 존경받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안토티누스 피우스로 추정되는 ‘안토니누스’와 아주 끈끈한 우정 관계를 맺었는데, 안토니누스는 다양한 세속적 및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랍비 유다에게 조언을 구하였다고 한다." }
{ "from": "user", "value":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 철학자이다. 그는 오현제 라고 알려진 통치자들 중 마지막 인물이자, 두 번째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 이전 로마 제국의 상대적 평화와 안정성의 시기인 팍스 로마나 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는 140년, 145년, 161년에 집정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n\n마르쿠스는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하드리아누스의 조카이자 법무관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칼빌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죽었고, 그의 어머니와 조부가 그를 길렀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138년에 사망한 뒤,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삼촌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와, 아일리우스의 아들인 베루스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하드리아누스는 그 해에 죽었고, 안토니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이제부터 황제 자리의 후계자인 마르쿠스는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같은 스승들 밑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수학했다. 그는 145년에 안토니누스의 딸인 파우스티나와 혼인했다.\n\n안토니누스가 161년에 죽은 뒤,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라는 이름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양형제와 같이 황제가 되었다. 마르쿠스의 치세에, 로마 제국은 막대한 군사 분쟁을 맞이했다. 동방 지역에서, 로마인들은 기세를 회복한 파르티아 제국과 로마에 저항한 아르메니아 왕국 등과 성공적으로 전쟁을 치렀다. 마르쿠스는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사르마티아족계의 야지게스족을 제압했으나, 이들 및 다른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에 문제의 실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 화폐인 데나리우스의 은 순도를 교정하였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기 마르쿠스 집권기에 커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상황에서 그의 개입에 대해선 알려진 것은 없다. 안토니누스 역병이 165년이나 166년에 발생하여 로마 제국의 인구를 휩쓸어, 인구 1,000만 명 중에 500만 명의 죽음을 야기하였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169년에 역병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n\n일부 이전 통치자들과 달리, 마르쿠스는 후계자에 양자를 쓰지 않기로 택하였다. 그의 자녀들에는 베루스와 결혼한 루킬라 그리고, 콤모두스가 있었는데, 마르쿠스 이후 콤모두스의 즉위는 동시대와 현대 역사가들 양쪽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와 기마상은 여전히 로마에 서 있으며, 이들 시설들은 마르쿠스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동시대 전기작가들이 마르쿠스를 칭했던 ‘철학자’가 쓴 명상록은 고대 스토아 철학을 오늘날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명상록은 그가 죽고 수 세기 뒤에 작가들, 철학자들, 군주들, 정치인들한테서 극찬을 받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사료는?" }
{ "from": "gpt", "value":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애와 통치를 묘사한 주요 사료들은 불완전하고 빈번하게 신뢰할만하지 못하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포함된 가장 중요한 자료들 그리고 전기 내용들은 서기 4세기 전환기에 한 작가 집단들을 통해 쓰여졌다고 주장되지만, 이 사료들은 실제로는 대략 서기 395년 무렵에 단일 작가 가 썼다고도 여겨진다.\n\n마르쿠스의 스승 프론토와 여러 안토니누스 시대의 관료들 간의 서한 본문이 138년경에서 166년 기간을 다루는 불완전한 필사본들 속에 남아있다." }
{ "from": "user", "value": "데모크리토스의 철학 사상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형이상학적 결정론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잘 표명되었다.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그리고 사물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치이론가이기도 하다.\n\n## 원자론\n그는 '고대 원자론'을 완성하였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많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는 이 원자와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원자가 합쳐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자연의 모든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 같은 입장에서 사물의 발달과 문화의 발달 등을 설명하였다. 이 원자론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학설은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초기 유물론의 완성인 동시에, 후기 에피쿠로스 및 근세 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조분이사금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조분이사금**은 신라의 제11대 임금이며, 벌휴이사금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골정, 혹은 홀쟁 갈문왕이며, 어머니는 구도 갈문왕의 딸 옥모부인이다. 내해이사금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이다. 조분은 키가 크고 태도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며, 일에 임할 때는 명쾌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를 경외하였다." }
{ "from": "user", "value": "치세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230년 즉위함과 함께 연충을 이찬에 임명, 군사를 정비한 뒤 이듬해 231년 음력 7월 이찬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해 감문국을 쳐 병합했다. 232년 음력 4월에는 왜가 금성을 포위하니, 이사금이 친정하여 적을 격퇴하고 1천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33년 음력 5월 왜가 다시 동쪽을 노략하니 음력 7월에 이찬 석우로가 사도에서 왜인과 싸우는데, 화공으로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n\n236년 음력 2월에는 골벌국의 아음부 왕이 무리를 이끌고 와 신라에 항복하였다. 저택과 사유 경작지를 하사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 주고, 그 땅은 군으로 삼았다.\n\n240년에 백제가 침공하였다. 244년, 이찬 우로를 서불한으로 삼고, 지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45년 음력 10월에 고구려가 침공하였다. 석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고구려군에 패하고 마두책을 지켰다. 이는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첫 번째 침공이다." }
{ "from": "user", "value": "아브디라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아브디라** 또는 **압데라**는 그리스 북부의 트라키에서 네스토스 강이 에게해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도시이다. 고대에 도시 국가가 있었으며, 오늘날 아브디라 시는 행정 구역상 크산티 현에 속한다.\n\n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클라조메네의 주민들에 의해 기원전 656년에 건설된 식민도시라고 한다. 상업 도시로서 빨리 번창하였으며 후에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여 아테나이와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압데라는 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일찍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기원전 4세기 중반 마케도니아의 흥기와 더불어 거의 자주권을 잃고 마케도니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두 명의 유명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프로타고라스를 배출하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첨해이사금이 뭐야?" }
{ "from": "gpt", "value": "**첨해이사금**은 신라의 12번째 임금이며, 조분이사금의 친동생이다.\n\n재위 원년에 사벌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우로를 파견해 이를 평정하고 사벌국을 폐지해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이는 신라 역사상 첫 주의 설치 사례이다. 재위 이듬해인 248년 고구려와 화친하였다. 249년에는 서불한 석우로의 실언으로 왜가 쳐들어와 우로를 죽였다.\n\n255년 음력 9월 백제가 쳐들어와 일벌찬 익종을 보내 괴곡 서쪽에서 맞아 싸우게 했으나 패배하였다. 그대로 음력 10월에 봉산성을 쳤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하였고, 그 후 약 6년간 왕위에서 있다가 261년 12월 28일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다음 왕이 조분이사금의 사위인 미추이사금이며, 능과 가족관계는 남아있지 않다.\n\n259년과 260년 연달아 가뭄과 홍수를 맞아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261년 음력 2월 달벌성을 쌓고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n\n이에 음력 3월에 백제가 화친을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니가타현의 지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니가타 현은 일본의 전통적인 지방 구분으로는 주부 지방에 속해 있다. 이 지방 구분은 메이지 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n\n지리적으로 니가타 현은 이 주부 지방에서 동해에 접하는 호쿠리쿠 지방에 속한다. 그러나 호쿠리쿠 지방의 도야마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긴키 지방의 영향력이 강한 반면, 니가타 현은 고속 교통망 정비에 따라 도쿄 및 간토 지방의 영향력이 강해졌다.\n\n이 때문에 현재는 나가노현, 야마나시현과 함께 고신에쓰 지방, 더욱 간토 지방과 합쳐서 \"간토 고신에쓰 지방\"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야마나시 현을 제외하고 \"신에쓰 지방\", 또한 이와 호쿠리쿠 지방을 합쳐서 \"호쿠신에쓰 지방\"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n\n또 니가타 현은 위치가 도호쿠 지방에도 가깝고, 특히 동부의 가에쓰 지방에서는 도호쿠 지방의 후쿠시마현에서 흘러온 강이 흐르고 있거나 방언과 기후 등이 후쿠시마 현, 야마가타현과 유사하기도 한다. 더욱 센다이시에 본사가 있는 도호쿠 전력이 도호쿠 지방의 여섯 현과 함께 니가타 현에도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따라서 도호쿠 지방의 경제인을 중심으로 니가타 현을 도호쿠 지방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산이 많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유명한 관광지가 많으며, 다설 지역이라 스키장이 많아서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지나 대도쿄권 지역의 대학생들이 MT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다.\n\n## 지세·지형\n북서쪽은 동해에 면한다. 북동쪽에서 남서쪽까지 아사히 산지, 에치고 산맥, 구비키 산괴 등의 산들에 둘러싸여 다른 현들과의 현경을 이루고 있다.\n\n에치고 산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시나노강과 아가노강의 유역에 에치고 평야가 펼쳐져 있다.\n\n또한 구비키 산괴의 야케야마산에서 흘러나오는 세키카와강의 유역에는 다카다 평야이 펼쳐져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이스의 위대한 종족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이스의 위대한 종족**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후 신화에 등장하는 지성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는 외계의 종족이다. 자신들의 행성이 파괴되면서 정신을 지구의 생명체로 옮겨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폴립들이 5천만 년 전 이스의 위대한 종족의 문명을 파괴할 때까지 약 2억년간 지구에 살았다.\n\n지구에서는 큰 원뿔 모양의 집게발이 달린 갑각류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 생명체에서 저 생명체로 정신을 옮기며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 고등한 종족은 다른 시대의 생물체와 몸을 바꾸면서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데. 이 방법으로 인간들의 문화, 과학, 비술 등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켰다.\n\n이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을 남겼다.\n\n이스의 위대한 종족은 러브크래프트의 에 기술되어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제위 계승을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성립 과정이 복잡하면서, 제위도 친자식에게 계승된 예가 없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후보로서 양아들로 맞이할 수 있었던 당초부터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후계자를 자기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혈통을 고집한 아우구스투스가 질녀를 통해 율리우스 씨족의 피가 흐르는 게르마니쿠스의 제위 계승을 바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티베리우스는 \"중계\"였다.\n\n그 게르마니쿠스가 죽어,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가 세 번째 황제가 되지만, 그도 치세 4년에 아내와 딸과 함께 암살되고 만다. 네 번째 황제로서 즉위한 숙부인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있었지만, 이것도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조카딸인 소아그리피나를 아내로 삼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제위에 오르게 했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이그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이그**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하급 신 중 하나로, \"뱀들의 아버지\" 혹은 \"나쁜 약\"로 알려져 있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끊임없이 달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n\n이그는 쉽게 진정시킬 수 있지만 화를 내는 것도 빠르다. 이그는 적들을 파괴하거나 변형시키기 위해 뱀 떼를 종종 보낸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에 묘사되었다.\n\n이그는 1990년대 코네티컷에서 십대 청소년들이 차창 밖으로 \"이그\"라고 소리치는 반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나타났다. \"이그질\"이라 이름붙은 이 의식적인 행위는 \"이그\"를 가능한 한 크게 소리질러 상대, 주로 골프 치는 사람들이나 교회 신도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거나 협박하는 데 있었다. 현재는 많이 줄어들어 연간 2-5건의 \"이그질\"이 보고된다.\n\n이그는 때로 네스 호의 괴물과도 연관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비잔티움이 뭐야?" }
{ "from": "gpt", "value": "**비잔티움**은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의 원래 이름이다. 기원전 667년 고대 그리스의 메가라의 주민들이 식민지 도시로 건설한 뒤, 이들의 왕 비자스 또는 뷔잔타스의 이름을 따 비잔티움이라 불렸다. 라틴식 표기인 “비잔티움”이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다. 후대에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으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 투르크들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정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
{ "from": "user", "value":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기원전~4세기\n기원전 667년 무렵에 메가라의 식민지 인들에 의해 건설된 그들의 왕 ‘비자스’를 따서 ‘비잔티온’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후에 로마의 영토가 되면서 라틴어 명칭 '비잔티움'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원주민 트라키아인의 도시가 있었다는 설도 있어 건설에 대해서는 전설의 영역을 넘지는 않았다.\n\n그 후 기원전 5세기 초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까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기원전 478년에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비잔티온 공성전 으로 함락을 당했다. 그 이후 아테네의 속국이 되었지만 다른 도시들과 함께 기원전 357년에 반란을 일으켜 승리하면서 자치를 회복했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트라키아 일대에 점령하여 기원전 340년에 비잔티움도 그의 의한 공격을 받았지만, 페르시아와 아테네로부터 원군을 지원 받아 마케도니아를 격퇴했다.\n\n196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시대에 그와 대립하던 황제를 끝까지 지지했기 때문에 징벌로 도시는 파괴되었지만 곧 재건되었다. 이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중요한 건축물이 될 경마장도 이때 건설된 것이 바탕이 되었다.\n\n## 4세기~15세기\n4세기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이 동서남북 교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천연의 양항 금각만을 가진 것에 착안하여 330년에 로마에서 이 도시로 천도했다. 그후 수도에 걸 맞는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노바 로마’로 개칭했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고, 콘스탄티노플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이 도시를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은 후세 이 도시의 옛 칭호를 따서 ‘비잔티움 제국’ 등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수도로 번영하였고, 중세 유럽의 주요 도시로 정치, 경제, 문화, 종교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여덟 이름을 가진 도시’로 알려졌다.\n\n## 15세기 이후\n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이후 제국의 수도로 다시 이 도시는 동부 지중해 지역을 커버하는 제국의 수도로 번성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점차 ‘이스탄불’이라는 도시 이름이 보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의 후신인 이스탄불은 속속 교외로 시가지를 확대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 후에도 터키 최대의 도시로서 번영을 계속하고 현재 전역에서 1000만 명에 가까운 인구를 가진 거대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한라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한라산** 또는 **한나산**은 대한민국 제주도 중앙부에 있는 해발 1,947.06m, 면적 약 1,820km의 화산으로, 제주도의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n\n정상에 백록담이라는 화산호가 있는데, 백록담이라는 이름은 흰 사슴이 물을 먹는 못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산자락 곳곳에 오름 또는 악이라 부르는 다양한 크기의 측화산이 분포해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한라산은 폭발 가능성이 거의 없는 휴화산으로 알려져 왔었지만 폭발할 수도 있는 활화산이라고 밝혀졌다.\n\n한국에서는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삼신산이라 불려왔다.\n\n한라산 일대는 천연보호구역으로서 천연기념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고," }
{ "from": "user", "value": "자연유산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1966년 10월 12일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n\n남한 최고봉이자, 역사적인 영산인 한라산은 1966년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에 등재되었으며,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8년에는 물장오리오름 산정화구호 습지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n\n## 지정 사유\n한라산은 해발 1,950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화산이다. 360개의 오름이 있으며, 지형은 용암의 분출에 의해 만들어졌다.\n\n한라산은 높이에 따라 다양한 식물 분포대를 이루는데 산 기슭에는 참식나무·굴거리나무·사스레피나무 등의 난대림이 형성되어 있고, 중간에는 졸참나무·서어나무·단풍나무·산벚나무 등이 자라는 온대림이 그 위로는 구상나무·고채목·향나무·시로미·암매·들쭉나무·털진달래 등의 아한대림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한라산의 정상부근에는 우리나라 특산종인 구상나무가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초원지대나 암벽지대에는 시로미·암매·복수초·구름떡쑥·참꽃나무 등 다양한 희귀식물이 자라고 있다.\n\n한대성과 열대성이 함께 섞여서 살고 있는 한라산의 동물은 곤충류 873종, 조류 198종, 파충류 8종, 포유류 17종 등이 있는데 이중 큰노루·삵·무당개구리는 멸종위기에 놓여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n\n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지형과 지질 및 식물·동물이 특이한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고, 특히 보호가 필요한 많은 학술적 자료를 가지고 있어서 한라산 전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n\n2007년 6월 27일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의 이름으로 한라산천연보호구역, 성산일출봉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3개 천연기념물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
{ "from": "user", "value": "국립공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1872년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설립되었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기도 하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원소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원소**는 화학적 방법으로 더 간단한 순물질로 분리할 수 없는 물질이다. 원소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로, 원자핵 내의 양성자 수와 원자 번호가 같다. 중성 원자의 양성자의 개수와 전자의 개수는 같다. 현재까지는 118종이 알려져 있다.\n\n순물질의 구성 입자를 원자라고 부른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진 원자핵, 그리고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n\n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이를테면 포도당은 물질의 기본적 구성요소인 탄소, 수소, 산소의 3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탄소는 현대문명의 근원이기도 하다.\n또한, 글루코스의 혐기성 분해 생성물인 메탄과 이산화탄소중 하나인 메탄은 탄소와 수소의 2개의 원소로 구성된다." }
{ "from": "user", "value": "원소 이름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원소 이름의 유래는 원소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황, 금 같이 고대부터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원소들은 각 나라와 언어 별로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원소의 영어 이름은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이 결정하며,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에서 유래한 이름이 서로 섞여 있다. 원소의 한국어 이름은 대한화학회가 결정하며, 2007년부터는 모든 원소의 명칭을 독일어가 아닌 IUPAC에서 정한 대로 부르고 있다.\n\n최근에 발견되어 새로 이름이 붙이는 원소의 경우 발견자에게 그 명명권이 주어지며, 지명이나 사람 이름으로부터 유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체로 학자적 양식을 지닌 과학자들은 원소 이름의 어원에 대한 몰지각한 관행에 반발하여 다른 명칭으로 부른다. 또한 20세기 후반 이후로는 반감기가 매우 짧아 극히 짧은 시간에만 존재하는 원소들이 실험실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어느 연구단이 해당 원소를 발견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 원소 이름이 결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n\n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으나 논쟁 등의 이유로 아직 이름이 결정되지 않은 원소의 경우 원자 번호를 기준으로 체계적 원소 이름이 붙여진다. 예를 들어 원자 번호가 123인 원소는 각 자리에 해당하는 토막인 -un-, -bi-, -tr-를 -ium에 붙여 unbitrium이 된다.\n\n한자어로 이루어진 원소들의 이름은 개화기 이후 한자 문화권에서 서양 과학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일본에서 명명된 것들이다. 일본은 주로 독일에서 원소이름들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수소, 산소, 탄소, 질소등은 각각 독일어 Wasserstoff, Sauerstoff, Kohlenstoff, Stickstoff에서 직역된 이름들이다. 가령 독일어 Wasserstoff는 Wasser와 Stoff의 합성어인데 각각 '물'과 '재료'를 뜻하며, 한자로 水素가 되었다." }
{ "from": "user", "value": "불의 불의 온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불의 온도는 산소가 많을수록 온도가 올라가기도 한다.\n\n## 눈에 보이는 불의 온도\n불꽃의 온도는 빛깔에 따라 다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조지 3세가 뭐야?" }
{ "from": "gpt", "value": "**조지 3세**는 1760년 10월 25일부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의 국왕이었고, 1800년 연합법이 제정된 이후 1801년 1월 1일부터 1820년 사망할 때까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왕이 되었다. 영국의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의 선제후이자 공작이었으며, 1814년 10월 12일 하노버 왕국이 수립되면서 하노버의 국왕을 겸임했다. 조지 3세는 하노버가의 3번째 영국 군주였지만, 이전의 국왕과는 달리 그는 제1언어로 영어를 썼으며, 영국에서 태어난 군주였고, 하노버를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n\n그의 일생과 재위 기간은 이전 영국 왕들에 비해 훨씬 길었으며, 그 대부분은 영국과 하노버가 개입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초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프랑스를 7년 전쟁에서 격파해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우위를 점하는 유럽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독립 전쟁을 겪고 난 이후,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독립했다. 이후 1793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개입한 영국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패배시켰다.\n\n재위 말기 조지 3세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고 양극성 장애 또는 포르피린증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의 질병에 대한 원인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n\n조지 3세의 삶에 대한 역사적 분석은 그의 자서전을 쓴 이의 편견들이나 역사학자들이 이용가능한 자료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
{ "from": "user", "value": "치세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조지 2세의 아들들이 모두 조지 2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조지 2세가 서거하자 프레더릭 루이스의 아들인 손자 조지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때의 나이 22살이었다. 그는 앞선 증조부, 조부, 그리고 아버지와는 달리 독일 악센트가 전혀 없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 탁월한 자질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항상 노력하는 학구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이었다. 역대 어느 왕보다도 독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하루 중 상당한 시간을 개인기도로 보낼 때가 많았다. 그가 왕으로 즉위한 후 제일 먼저 했던 일도, 종교적 배경 하에 조부 조지 2세의 비도덕적인 왕실의 관행들을 뜯어고치는 것이었다.\n\n조지 3세가 왕위에 오를 즈음 정치를 좌우하던 대피트가 1761년 10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문제로 사임하고 또 한 명의 정치가인 뉴캐슬 공작 펠럼 홀리스도 곧바로 재정 비리 의혹으로 사퇴했다. 조지 3세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였던 뷰트를 수상 자리에 올렸다.\n\n7년 전쟁이 끝난 후, 뷰트 내각은 정국 안정과 전쟁으로 인해 악화된 재정 회복이라는 2가지 당면 과제를 안게 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발전 과정에 놓여 있는 상태로 아직 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의회 지도자들은 정부에 협조하기보다는 정부의 정책에 트집을 잡는 것이 일과였으며, 심지어 이런 트집은 각료들 사이에서도 일상사였다.\n\n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조지 3세는 먼저 상원의 원로귀족들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생각하였다. 이 일은 조지 3세의 측근인 수상 뷰트가 담당했다. 정가에서는 이를 국왕이 수상의 손을 빌려 적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음모와 책략쯤으로 인식했다. 정국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재정 회복은 더욱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에 뷰트 내각은 조지 3세의 기대에 제대로 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급진파 의원인 존 윌크스가 언론을 동원하여 조지 3세에 대한 비방을 퍼부어 대고 대 피트와 뉴캐슬을 동정하는 일부 정객들이 “평화는 어설픈 사기극이며 국왕이 수상과 협잡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뷰트 내각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1763년 4월 뷰트는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지 3세는 어린 시절 자주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뷰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실제로 뷰트는 정치적으로는 무능했던 인물이었다.\n\n그러나 조지 3세는 측근을 통한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 친척인 조지 그렌빌과 숙부인 컴벌렌드의 윌리엄 오거스터스 공, 대 피트, 그리고 그래프턴 공작에게 자신의 의중을 보이면서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7년 전쟁으로 인해 타격을 입은 왕실의 재정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타개책도 강구되지 못하고 상황만 어려워졌다. 당시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해외 무역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었으나, 동인도회사는 민간 회사였기 때문에 그들의 막대한 수익은 본국 경제에 실제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n\n정가에서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운용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것을 비난하며 정책 강구를 촉구했다. 이에 내각은 식민지를 운용하기 위한 행정비용을 식민지 자체에 부담시키는 정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렌빌이 제의한 〈인지세법〉은 이듬해 로킹엄의 주도로 폐지되었고, 간접세 부과를 위한 〈타운센드법〉은 산출량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차세를 제외하고는 주민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것은 식민지의 본국에 대한 반감밖에 없었다. 마침내 ‘보스턴 차 사건’이 문제의 초점이 되면서 영국은 1775년 4월 ‘북아메리카와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n\n이에 조지 3세는 노스를 수상에 임명하여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전쟁 승부에 관계없이 그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조지 3세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란 잠재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조지 3세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어갔다. 사실 의회는 점점 깊이 빠져드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또 의회는 아메리카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가까운 아일랜드로 하여금 반기를 들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또한 1778년 이후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고 있으므로 세력 균형이란 국제 외교 분위기에서도 결코 영국에 이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었다. 결국 의회는 불리해져 가는 상황을 들어 조지 3세에게 전쟁을 끝내도록 요구했으나, 조지 3세는 특유의 필사적인 집착으로 전쟁을 2년 더 연장시켰다.\n\n그러다 보니 조국에 재앙을 안겨준 책임에 따른 의회의 공격은 노스 내각에 집중되었다. 또한 국민들조차 노스 내각의 전쟁 수행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노스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국내 여론에 못 이겨 1782년 조지 3세의 만류에도 스스로 사퇴하였다. 그리고 노스가 스스로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영국의 노스 내각의 붕괴로 충격을 받은 조지 3세는 급기야 셸번을 다음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그 내각마저도 단명하면서 왕의 위신은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늘 왕을 비판하던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와 노스 경이 만나 연립내각의 구성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n\n다행히 조지 3세는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런 형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얻었다. 북아메리카를 잃은 뒤 식민지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인도가 되었는데, 인도에는 일찍부터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많은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민간회사였으므로 정부로서는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 점을 부당하게 여긴 폭스와 노스는 동인도회사를 정부가 관장하는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여론은 회사의 개혁안을 통해 시행되는 공직임명권을 통하여 폭스와 노스가 권력을 영속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조지 3세는 상원에서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지지하는 의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적으로 간주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의 선언에 따라 법안은 무효화되고 폭스를 비롯한 관련 각료들은 줄줄이 사퇴했다.\n\n국왕으로서의 위신을 되찾기 위해 조지 3세는 자신의 뜻을 잘 진행시켜줄 새로운 수상으로 소 윌리엄 피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피트의 세력은 하원 내 소수파에 불과했기에 경질된 각료들은 당장에라도 헌법상의 정변을 단행하기라도 할 태세였다. 노스 내각 이후 왕이 직접 임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보니 모든 것은 1784년 3월의 총선 결과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결론은 소 피트 내각이 성립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소 피트가 수상이 되어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정책들을 제시했을 때, 조지 3세는 상당 부분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이들 정책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 피트도 조지 3세의 입장을 일부 묵인하는 조건으로 그로부터 막대한 통치 권력을 이양받았다.\n\n영국은 청나라와의 무역을 늘려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여러 번 특사를 파견하여 건륭제에게 진귀한 선물을 주어 이를 타개하려 하였고 또 공사를 상주시켜 청나라의 동정을 항시 살펴보려고 하였다. 1788년 영국은 전권 대사로 카스카트를 파견하였으나 카스카트가 청나라로 가는 도중 병사하여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1792년 9월 26일, 조지 3세의 영국 정부는 다시 특별 사절단을 편성, 건륭제의 82번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지 매카트니 백작을 특사로, 조지 스턴튼을 부사로 명하여 청나라에 파견하였다.\n\n매카트니는 건륭제의 탄신 만찬에서 삼궤구고두를 올리며 건륭제에게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친서와 영국에서 가져온 여러 진귀한 선물을 전달했다. 친서에서는 무역을 늘리고 공사를 상주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친서에서는 영국에게 주산 근처의 작은 섬을 할양해 영국인들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내용도 쓰여있자 건륭제는 진노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영국 사절단의 일체의 행동을 금하였다. 건륭제는 그 다음 달인 9월에 영국 사절단의 귀국을 강제 조처하였다. 그 후 영국과 청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어 영국이 ‘아편 전쟁’ 후 〈난징 조약〉을 통해 내정 간섭을 하는 빌미가 되었다." }
{ "from": "user", "value": "미추이사금의 설화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미추 이사금설화는 삼국유사 기이편과 삼국사기 김유신조에 수록되어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유례이사금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유례이사금**은 신라의 14대 임금이다. 아버지는 조분이사금이며, 어머니는 나음 갈문왕의 딸 박씨이다.\n\n286년 백제와 화친했다. 287년에는 왜인들이 일례부를 쳐 일천 명의 주민을 잡아갔다. 289년 음력 6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돌자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고 전쟁 준비를 했는데, 이 해 왜인이 쳐들어 오지는 않았다. 292년 음력 6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 사도성을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으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였다. 293년 음력 2월에는 사도성을 다시 개축하고, 주민 80여 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294년 여름 왜가 다시 쳐들어와 장봉성을 쳤으나 격퇴되었다.\n\n295년 이사금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왜인이 계속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다. 백제와 계획을 세워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자 서불한 홍권이 신라군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며 백제를 믿을 수 없다 하여 반대하여 왜 정벌 계획은 취소되었다.\n\n297년 이서고국, 혹은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이때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나 이서국군을 쳐부순 뒤 사라졌는데, 이후 미추 이사금이 묻힌 죽장릉에 수만개의 대나무 잎이 쌓인 것을 보고 백성들이 \"돌아가신 임금님이 하늘나라 병사들을 보내 도우셨다\" 라고 하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기림 이사금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림 이사금은 이찬 석걸숙의 아들이며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는 기림 이사금이 조분 이사금의 둘째 아들이며 아이혜부인의 아들이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걸숙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고 하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걸숙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설도 같이 수록하여, 제대로 된 세계를 알 수 없다.\n\n300년 정월 왜와 화친하고, 비열홀에 순행하여 가난한 자를 위문하였다. 그해 음력 3월 낙랑,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n\n307년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조지 4세의 외부 링크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전임자=게오르크 3세|\n후임자=빌헬름 3세|\n직책=하노버의 군주|\n임기=1820년 ~ 1830년"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노예제 폐지운동의 그밖에 유럽국가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노예 제도 반대 투쟁은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 향상, 주일학교 운동, 아동 노동 반대 등과 더불어 실천하던 기독교사상에 따른 사회개혁 중 하나였다. 기독교인들의 사회 개혁에 대한 열정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등장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사회 참여를 통해 드러내기보다는 개인에 한정지어서 이해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과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기존 질서가 아무런 변혁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종교적 보수주의인 탈정치, 사회적인 신앙을 갖게 되면서 침체되는 듯 하였으나 교황 레오 13세가 노동자 헌장을 반포하면서 부흥의 조짐도 나타났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1840년대 ~ 1850년대에 거의 대부분 노예 제도를 없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뉴잉글랜드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뉴잉글랜드**는 미국 북동부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구릉성 산지와 해안 지방에 있는 매사추세츠주, 코네티컷주, 로드아일랜드주, 버몬트주, 메인주, 뉴햄프셔주의 6개 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서쪽으로 뉴욕주, 북쪽으로 캐나다의 퀘벡주와 맞대어 있고 동쪽과 남쪽은 대서양이다. 남서쪽으로 롱아일랜드 해협이 있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가장 큰 대도시는 매사추세츠주의 주도인 보스턴으로 인근 지역을 묶어 형성된 대도시권인 보스턴 대도시권은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으로 뉴잉글랜드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많은 우스터, 뉴햄프셔주의 최대 도시인 맨체스터, 로드아일랜드의 주도인 프로비던스등이 포괄되어 있다.\n\n1620년 분리주의 성향의 청교도들이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하였다. 이 식민지는 영국이 북아메리카에 세운 정착지들 가운데 1607년에 세운 제임스타운에 이어 성공적으로 안착한 두번째 정착지였다. 10년 뒤 더 많은 청교도들이 플리머스 식민지 북쪽의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로 이주해 왔다. 1754년부터 7년간 이어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이들은 이로쿼이 연맹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군을 패퇴시켰다.\n\n뉴잉글랜드 초기 이주민들은 매우 엄격한 청교도였고 영국에서 살던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심지어 마녀 재판 마저 신대륙에 가져왔는데, 1692년의 세일럼 마녀재판은 초기 식민지의 대중적 히스테리를 보여준 어두운 역사를 대표하는 사례로 남아있다.\n\n18세기에 들어 뉴잉글랜드의 정치 지도자들은 영국 의회가 식민지 대표의 입회를 거부하자 대표 없이 과세 없다고 주장하며 영국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조세 저항 운동이었던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이 자치 요구를 묵살하고 인지세법과 같은 법률로 세금을 강화하자 뉴잉글랜드는 이와 같은 \"참을 수 없는 법\"에 맞서게 되어 참정권의 요구는 독립 요구로 발전하였다. 1775년 시작된 미국 독립전쟁의 결과 뉴잉글랜드를 포함한 13개 식민지가 새로운 공화국을 선포하여 미국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무렵 뉴잉랜드의 블랙스톤 밸리와 메리맥 밸리를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n\n뉴잉글랜드의 지형은 남서쪽에 좁게 형성된 대서양 해안평야와 북부와 서부의 애팔래치아산맥으로 이어지는 구릉지인 피드몬트 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급격한 경사를 이루며 고도가 낮아지는 폴 라인이 구릉지와 해안 평야의 자연스러운 경계가 되고, 뉴잉글랜드의 여러 도시는 폴 라인의 낙차를 이용한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n\n뉴잉글랜드의 각 주들은 다시 타운으로 불리는 자치체로 나뉜다. 북부의 버몬트, 메인, 뉴햄프셔에 속한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은 여러 타운을 묶은 통합 자치체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인구 통계 조사는 미국을 9개의 구역으로 구분하는데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를 묶어 1구역에 배정되어 있다.\n\n뉴잉글랜드는 청교도에 기반한 문화적 정체성이 매우 강한 지역으로 종종 미국 사회의 자유주의 성향과 갈등을 빚는다. 또한 넓게 산재한 농촌 문화는 다른 산업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보수적인 성향으로 신규 이민의 유입을 달가워하지 않는다.\n\n뉴욕 주와 뉴저지 주는 본래 뉴잉글랜드에 속하지 않지만 문화적으로는 뉴잉글랜드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
{ "from": "user", "value": "역사는?" }
{ "from": "gpt", "value": "뉴잉글랜드는 1776년 7월 4일, 영국 왕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나서 미국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독립전쟁을 일으킨 시발점인 이 지역은 주민의 교육 수준과 사회 경제적 지위가 매우 높아 미국의 고급문화를 주도하는 지역이다. 명문 사립 기숙학교들이 많고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는 고급문화들이 다른 지역들에 비해 많다.\n\n초기에 이 지방은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 많았던 곳으로, 충실한 청교도의 이주자가 많았고, 이들이 개척한 농업식민지였다. 자연 조건이 혹독하며, 당초는 독립한 자작농민에 의한 농·어업, 조선업, 무역업에 의존하였으나 그 후 수력을 이용하여 섬유공업이나 금속공업이 발전하고, 지금은 도시인구가 80%를 넘는다. 이들 중산계급은 독립심과 재능은 훌륭한 문화와 각종 산업을 발달시켜 문화적 수준이 높고, 미국 구민의 자질이라고 하는 개척자 정신·종교심·기업정신 등은 뉴잉글랜드의 주민에 의해서 대표되는데, 동시에 보수성도 강하고 전통·제도·사고 방식 등에서 다른 지방과 다르다.\n\n뉴잉글랜드는 일찍부터 자주적 연합을 형성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는 일종의 종교정치가 행해지고, 코네티컷과 로드아일랜드에는 국왕의 총독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도 참여도가 높은 이 지역은 롱펠로, 소로,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등의 출생지이기도 하며 유명한 정치인과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곳이다. 미국 문호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본국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고, 다른 지방과의 접촉도 그다지 없어 교육 제도·조합 교회제·타운 미팅제 등 독특한 뉴잉글랜드의 전통을 낳았다.\n\n이 지역에는 버지니아주에 있는 복원 도시 윌리엄스버그나 '자유의 종'이 있는 필라델피아의 독립 기념관 등, 식민지 시대를 회상시키는 역사적 건축 양식이 있는 오래된 도시들이 있다." }
{ "from": "user", "value": "내물마립간의 생애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내물 마립간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있다.\n\n## 출신\n성은 김씨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구도 갈문왕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13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김말구요,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다. 왕후는 보반부인이다. 삼국유사는 그가 구도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n\n## 즉위 초기\n356년, 전대 임금인 흘해 이사금에 아들이 없어 미추 이사금의 사위인 내물이 임금이 되었다. 내물은 임금이 된 이듬해 과부, 고아 등을 긍휼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n\n366년부터 백제와 동맹을 맺고, 예물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373년에 백제의 독산성주가 투항해온 일로 근초고왕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n\n381년에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의 일이 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다.\n又曰: 「符堅時, 新羅國王樓寒, 遣使衛頭朝貢, 堅曰: 『鄕言, 海東之事, 與古不同, 何也.』, 荅曰: 『亦猶中國時代變革, 名號改易.』」.|3=진서에, \"부견 건원18년에 신라국왕 누한樓寒이 위두衛頭를 보내 미녀를 바쳤다.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으며, 미인이 많고 머리카락이 장여에 달한다.\"라고 써있다.\n\n다시 이르기를, \"부견의 때에, 신라국왕 누한이 위두를 보내 조공하였다. 부견은 \"경이 말하는 해동海東의 일이 예전같지 않음은, 어찌된 까닭인가\" 묻자 \"중국과 같이 시대가 변혁하고,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라고 써있다.|4=태평어람 781권 사이부 2 동이 신라}}\n\n## 고구려의 남진\n고구려는 대방군이 위치한 영역이 힘의 공백상태에 놓이자 이 영역을 두고 백제와 신경전을 벌였으나,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패전을 거듭하여 해당 지역의 주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고구려는 내부를 안정시킨 뒤 다시금 백제를 향해 고삐를 돌렸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에 부담을 느끼고 신라, 왜, 가야와 동맹을 맺고자 하였으나 신라는 낙동강을 두고 가야와 경쟁하고 있던 까닭에 동맹을 맺지 않고 오히려 백제의 독산성을 취했다. 이런 까닭에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를 의지하고자 하였고, 392년에는 실성을 볼모로 보내기까지 하였다.\n\n광개토대왕은 396년에 백제를 공격해 58개성을 취하고 백제 아신왕이 노객이 되어 조공하겠다며 항복하자 물러갔다. 그러나 아신왕은 신라와 경쟁관계였던 가야를 부추기고, 가야와 왜로 하여금 신라를 치게 하였다.\n\n결국 내물은 고구려와 수평적 관계를 맺는데 실패하였다. 고구려는 신라에 병력을 주둔시켰고, 내물은 직접 광개토대왕에게 가 직접 노객으로써의 예를 표하였다.\n\n## 죽음\n고구려 덕에 신라는 오랜 숙적인 가야를 패퇴시키고 낙동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동안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내물 마립간은 402년 5월에 사망했다. 첨성대 서남쪽으로 그의 능이 조영되었다. 이후 401년에 고구려에서 돌아온 볼모인 실성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흘해이사금이 누구야?" }
{ "from": "gpt", "value": "**흘해이사금**은 신라의 16대 왕이다. 성은 석씨로 내해 이사금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각간 석우로, 어머니는 조분 이사금의 딸 명원부인부인이다. 석우로의 말에 따르면 외모가 매우 훌륭하고, 담력이 있으며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 처리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한다.\n\n그러나 우로의 사망 시 갓난아이였던 그가 310년에 즉위해서 356년까지 재위한 것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른 이름은 석욱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태어난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 의하면, 석우로가 죽은 249년 혹은 253년에 갓난아기였다 한다. 이덕일에 의하면 그와 석우로와의 연대 차이가 많이 나서 그의 아들이 아니라 후손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n\n석우로가 일본에서 죽을 당시 그가 갓난아기였다면 310년 즉위할 때 흘해의 나이는 61세 혹은 57세가 된다. 혹은 유복자로 보더라도 즉위 당시 나이는 60세 혹은 56세가 된다. 그러나 즉위한 해에 신하들이 논의해 말하기를, “흘해는 비록 어리지만 경험이 많고 나라를 잘 다스릴 덕이 있다\"는 말이 나와서 더욱 말이 안 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n\n311년 정월 급리를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다음해인 312년 왜왕이 혼례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314년 급리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n\n317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죄수들을 심사해 석방하였고, 이듬해 318년에는 지난해 가뭄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에 백성을 부려 노역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330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는데, 이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n\n337년 음력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 344년 음력 2월 왜왕이 다시 공주와의 혼례를 청하자 이미 결혼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345년 음력 2월 왜왕이 국교를 끊는다는 사신을 보내고, 346년 크게 군사를 내어 금성을 포위했다. 신라군은 금성에서 농성하며 왜군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왜군의 퇴각 시점에 맞춰 기병을 내어 격퇴하였다." }
{ "from": "user", "value":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기아문제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기아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정도이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에 따르면 2016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46.1점으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118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최악의 기아상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레오폴 1세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레오폴 1세**은 벨기에의 초대 국왕이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외삼촌이다." }
{ "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초기 생애\n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과 그의 아내인 아우구스테 로이스 추 에베르스도르프 백작부인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나 나폴레옹 전쟁 동안에 동맹군에 입대하여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였다. 1816년 웨일스 공녀 샬럿 오거스타와 결혼하지만, 이듬해에 그녀가 사망하고 만다. 레오폴은 계속 영국에 머물렀다가, 그리스 국왕으로 추대받았지만 거절하고 1831년 벨기에로 갔다.\n\n## 벨기에의 왕이 되다\n귀국 후에 벨기에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국왕에 오르자마자, 벨기에의 군대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보조와 함께 벨기에를 독립 왕국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던 네덜란드의 빌럼 1세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웠다.\n\n1839년까지 레오폴든 국가의 교육 제도를 넓히는 자유-가톨릭 연립 내각을 지속하는 도움을 주었다. 1836년 큰 도시들과 시골 지역들에 더욱 큰 정치적 자치제를 승인하였다. 1839년 연립 내각이 빌럼 1세의 벨기에 왕국의 독립 인정을 통하여 네덜란드의 압력을 퇴거시키면서 끝났다.\n\n레오폴은 프로이센과 프랑스과 함께 상업적 조약을 맺었고, 중립적 외교 정책을 지속하였다. 그의 왕좌는 1848년 혁명 동안에 심각히 기피되지 않았다.\n\n1852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 아래 적대 정권의 접근 후, 안트베르펜 지역의 방어 공사에 후원하였다.\n\n가끔 \"유럽의 네스토르\"로 주목된 그는 유럽의 외교술에서 높게 영향력 있었고, 자신의 결혼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와 제휴를 강화하는데 썼다고 한다.\n\n1865년 12월 10일 라에켄 왕궁에서 사망하였다." }
{ "from": "user", "value": "통신공학의 통신기술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 무선 전화 통신\n이동통신이란 자동차, 열차, 선박, 항공기 등의 이동하는 물체와 고정된 지점간 또는 이동하는 물체 상호간을 연결하는 통신방식으로, 통상 HF, VHF, UHF 및 SHF대의 전파가 사용되고 있다.\n\n이동통신은 다른 통신 수단에 비하여 여러 특징을 가지는데, 첫째 무선을 사용한다는 점, 둘째 사용가능한 무선주파수가 한정되어 주파수의 이용 효율을 높이는 기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n\n개인 이동 통신으로 셀 분할 방식의 셀룰러 시스템과 위성 이동 통신이 있다. 셀룰러 시스템은 아날로그 방식의 AMPS, TDMA를 거쳐 현재 디지털화된 기술로 현재 한국과 북미에서 주로 사용하는 CDMA 방식과, 그 외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는 유럽방식의 GSM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위성 이동 통신은 미국 모토롤라를 중심으로 한 이리듐 이 1990년대 상용 서비스를 하였으나,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국제 SIL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국제 SIL**은 세계 성경번역 선교회의 자매기관으로서, 원이름은 **하계 언어학 연구소**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언어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기록하여 언어학 발전과 문맹 퇴치, 소수 언어 발전 및 성서 번역을 통한 선교를 돕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 단체이다. 본부는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다.\n\n국제 SIL가 출판하는 에스놀로그는 전 세계의 알려진 언어에 대한 각종 통계치를 집대성한 것으로 언어학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 단행본 형태와 홈페이지를 통해 출판된다." }
{ "from": "user", "value": "SIL 부호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국제 SIL은 에스놀로그에 기록되는 모든 언어에 3자리 부호를 매기는데 그 부호 수는 ISO 639나 RFC 3066 등 기타 언어부호 체계의 부호 수보다 월등히 많으며, 2007년에 ISO 표준으로 인정되었다. 다음은 SIL 부호의 몇가지 예이다.\n\n전체 목록은 http://www.ethnologue.com/codes/#downloading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
{ "from": "user", "value": "유전자형이 뭐야?" }
{ "from": "gpt", "value": "**유전자형**은 세포, 생물, 개체 등에서 발현된 유전적 특성을 뜻하는 유전학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종의 특성을 나타내는 형질을 뜻한다. **유전형질**이라고도 한다.\n\n유전자형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표현형이 있다. 표현형은 생물체의 발생과 성장 과정에서 자연환경과 상호작용하여 나타나는 특징을 뜻하며 유전되지 않는다. 한편, 돌연변이 등으로 인해 부모 세대로부터 유전되지 않은 새로운 유전형질이 생길 수 있다. 후생유전학에서는 이러한 유전되지 않은 DNA의 발생을 비전형적인 유전형질로 파악한다. 이러한 후생적 유전형질 발생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암을 들 수 있다." }
{ "from": "user", "value": "유전자형과 유전자 서열은?" }
{ "from": "gpt", "value": "게놈은 한 개체에 있는 모든 유전자의 총 염기서열로 한 생물종의 거의 완전한 유전 정보의 총합이다. 게놈은 종 마다 다를뿐 아니라 집단, 개체 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게놈에 존재하는 염기서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집단의 유전자 풀에서 무작위 표집된 수많은 대립형질이 조합되어 한 개체의 게놈을 이룬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생물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n\n인간의 게놈은 약 30억 쌍의 염기 서열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이 아주 간단한 구조를 갖는 생물에서 조차 유전형질은 매우 다양한 대립형질로 이루어져 있다." }
{ "from": "user", "value": "디오메데스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디오메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으로 아르고스의 왕이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와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n\n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티데우스와 데이필레의 아들로서 고모 아이기알레이를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디오메네스는 물론 호메로스의 영웅 서열에서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 다음 가는 장수이지만, 일리아스의 제 5권은 그의 무공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특히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에게 상처를 입히고서도 벌을 받지 않은 유일한 속세 사람으로 자주 거론된다.\n\n하지만 디오메데스가 죽자 그의 자손들은 아레스의 벌을 받았으며, 아르고스는 그 이후 적군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쇠퇴한다. 그리고 제 6권에서는 글라우코스와 금과 동의 무기를 교환함으로써 후세에 유명한 속담의 장본인이 된다.\n\n일리아스 밖에서 전해지는 디오메데스에 관한 일화가 적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아르고스와 이탈리아 지방에서 숭배된 전설 속의 영웅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실성마립간이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실성마립간**은 신라의 제18대 임금이며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대서지와 이리부인 석씨의 아들이다. 다른 이름은 실주왕, 보주, 보금이다." }
{ "from": "user", "value": "가계는?" }
{ "from": "gpt", "value": "왕비인 아류부인 김씨는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 한다." }
{ "from": "user", "value": "별자리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별자리** 또는 **성좌**는 천구의 밝은 별을 중심으로 지구에서 보이는 모습에 따라 이어서 어떤 사물을 연상하도록 이름을 붙인 것이다. 별자리는 보통 비슷한 방향에 놓이지만, 실제로 같은 별자리에 속한 별들이 반드시 3차원 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n\n별자리는 문화권별로 다르며 시대마다 달라지기도 하지만, 현재는 1930년 국제 천문 연맹에서 정한 88개의 별자리가 공통으로 쓰이고 있다. 공인된 별자리는 아니지만 북두칠성이나 봄의 삼각형처럼 널리 쓰이는 것은 성군이라고 한다." }
{ "from": "user", "value": "천상열차분야지도는?" }
{ "from": "gpt", "value":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때 처음 만들어진 천문도이다. 하지만 이는 오랜세월 전쟁으로 소실되어서 1395년 조선 태조때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이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잊혀져서 지냈다. 그러다 숙종 13년 1687년에 이민철이 남아있던 복사본으로 다시 새로운 돌에 새겼다. 이후 영조때 천문을 맡은 관리가 불타버린 경복궁 터에서 태조본 돌 천문도를 발견하였고 흠경각을 지어 태조본 천문도와 숙종본 천문도를 같이 보관하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천문도는 등잔 밑에 있었다. 1991년 덕수궁 유물전시관에 태조본 천문도를 옮기다가 뒷면에 있던 천문도를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현재 3개의 천문도가 전해져오고 있다. 태조본은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있고 숙종본은 세종대왕기념본이 있다." }
{ "from": "user", "value": "트로이아의 호메로스의 트로이아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고대 그리스의 연대기 작가들은 트로이아 전쟁의 시기를 기원전 12,13,14세기로 다양하게 잡고 있다. 에라스토테네스는 기원전 1184년으로,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1250년으로, 사모스의 두리스는 기원전 1334년으로 잡고 있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아를 트로이아 7기 유적에 비정하고 있다.\n\n일리아스에서 아카이아인들은 그들의 캠프를 스카만더강 입구에 설치하고 타고온 배는 해변에 올려놓았다. 트로이아 시는 트로이아 전쟁의 전투가 일어난 스카만더강의 평원 건너편에 있는 언덕 위에 세워졌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신라의 관직 제도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신라의 관직 제도**는 법흥왕 때 완성된 경위 17 관등과 외위 11관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지방인에게 주는 11위는 통일신라 이후인 674년에 지방세력가들을 지배체제 속에 포섭하기 위해서 지방 출신에게도 일률적으로 경위를 주게 됨에 따라 자연히 폐지되었다." }
{ "from": "user", "value": "신라의 임시 관위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이 두 관위는 오늘날의 부통령에 해당되며 태대각간의 경우는 신라 역사상 김유신이 유일하게 오른 관직이다. 이후 김인문만이 태대각간으로 추증되었다." }
{ "from": "user", "value": "두품의 진골과 성씨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신라 왕성\n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성씨 중 신라 왕성이었던 박씨, 석씨, 김씨 등이 대표적인 진골 후손의 성씨이다. 신라 왕성의 분파를 상술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n\n**신라 박씨**\n모든 박씨는 신라 박씨로서 신라 제1대 왕 혁거세 거서간의 후손들이다.\n\n**신라 석씨**\n\n**신라 김씨**\n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들이다.\n\n## 신라 개국공신 세력\n박혁거세를 신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신라 6부 세력은 대체로 6두품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6부 중 세력이 컸던 급량부 대인 이알평의 집안과 사량부 대인 소벌도리의 집안은 진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알평의 후손인 경주 이씨와 소벌도리의 후손인 진주 소씨 측 자료는 당해 씨족이 진골 귀족임을 기록하고 있다.\n경주 이씨는 신라 개국좌명공신인 급량부 대인 이알평을 시조로 한다. 그는 535년 문선공의 시호를 받았고, 656년 은열왕으로 추봉되었다. 경주 이씨 족보에 의하면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지은 경주 이씨 파조 익재 이제현의 묘지명에 신라말 중시조 이거명이 진골만 얻을 수 있는 소판에 있는 이제현 무덤에서 길이 1.68m, 너비 63.2cm, 두께 20.5cm, 무게 500kg에 달하는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되기도 하였다. 송도사범대학의 전용철 교수는 “이 묘지석은 고려말 조선 초의 우수한 금석문 유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묘지석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고 내용도 풍부한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묘지석의 글은 고려시기 이름난 문장가이며 학자인 목은 이색이 지었는데 모두 34줄에 2,745자나 된다”며 “고려사에 없는 내용도 적지 않기 때문에 특히 14세기 고려사 연구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현 묘지석에는 전서체로 '문충공이씨묘지명'이라고 새겨져 있고 중시조 소판공 이거명과 병부령 이금현을 비롯한 그의 가계와 행적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편, 경주 이씨의 분적종도 진골 후손으로 볼 수 있다. 우계 이씨, 차성 이씨, 합천 이씨, 성주 이씨 등은 시조 이알평 후대에 분적하였고, 재령 이씨, 아산 이씨, 진주 이씨, 장수 이씨, 원주 이씨 등은 중시조 이거명 후대에 분적하였다. 평창 이씨는 경주 이씨의 분적종에서 제외되었으나 논란의 소지는 있다.\n알천은 신라 제8대 왕 아달라 이사금의 14세손이다. 진주 소씨 측은 알천이 신라 개국좌명공신 사량부 대인 소벌도리의 25세손이라고 하여 그 시조로 받들고 있다. 알천은 신라 1등 관위인 각간을 역임한 진골 귀족이었다.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 재임 중 왕위에 추대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고, 김유신 등 공신과 함께 뜻을 모아 김춘추를 왕위에 등극시키니 이 분이 태종 무열왕이다. 무열왕은 알천의 공로에 보답하여 656년 알천의 선조인 사량부 대인 소벌도리를 문열왕에 추봉하는 등 신라 6부의 시조를 왕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다만 알천은 학계에서는 대체로 김씨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논란이 있다.\n삼국사기 성덕왕 19년 정월 기록을 보면 대아찬 배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고 한다. 대아찬은 17관등 중 제5등으로 대아찬 이상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상대등은 귀족회의를 주재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관직으로 역시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n\n## 신라 외부 세력의 진골 편입\n532년 신라로 항복해 온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해 김씨가 진골로 편입되었다. 김유신 가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골에 편입되었음에도 신라 제29대 왕 태종 무열왕 이전까지는 비주류 취급을 당하였다.\n555년 비화가야가 신라에 복속되면서 그 왕족은 김씨를 사성받고 진골로 편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비화가야의 직계왕손인 옥결은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이예향과 혼인하여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을 낳았고 그를 선덕여왕의 남편인 음갈문왕 김인평과 동일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경주 김씨 족보에 의하면 조계룡은 김인평과 다른 인물로서 진평왕의 장녀인 선덕여왕이 아니라 3녀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주 이씨 35대 실전세계은 시조 이알평의 19대손으로 진평왕 때 한림학사를 지냈고 그 딸 이예향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화왕산 용지에서 목욕을 하던 중 용왕의 아들을 만나 조계룡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창성부원군으로 진평왕의 3녀와 혼인하였다고 한다.\n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보덕국왕 안승은 이후 신라에 투항하였고, 679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지역을 평정한 후, 나당전쟁에 참전하여 당나라 군을 격퇴하였으며, 680년 문무왕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683년에는 문무왕의 조카딸과 재혼하여 3등 관위 소판의 관위를 받고 김씨 성을 사성받은 후 진골로 편입되었다.\n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장에 따르면, 발해 고왕 대조영이 발해 건국 직후인 700년 신라와 수교를 맺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자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 효소왕이 발해를 번국으로 삼고 대조영에게 신라 5등 관위인 대아찬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이는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품계로 대조영을 진골로 대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조영 입장에서 5품에 불과한 관위는 다소 굴욕적인 일일 수 있다. 다만, 최치원의 기록 외에는 이를 증명할 만한 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발해의 국력과 외교적 상황을 고려할 때 사실일 가능성도 충분하다.\n\n## 기타\n대개의 최씨 집안이 경주 최씨에서 분파하였지만, 수성 최씨의 경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13세손인 시조 수성백 최영규가 고려 충렬왕 때 사성을 받아 창성한 것이므로 진골 후손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김씨라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귀화한 성씨는 골품제와 관련이 없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길가메시 서사시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수메르 왕 명부\"에 따르면 길가메시는 기원전 28세기경 우루크를 126년 동안 지배한 왕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이때 이미 길가메시의 일생이 신비스럽게 꾸며진 것을 알 수 있다. 길가메시의 일생에 관한 전설은 시로 만들어져 구전되었는데, 기원전 21세기경 우르 왕이었던 슐기 때, 특히 길가메시에 대한 많은 시들이 지어진 듯하다. 그때까지 구전되던 시 몇 편이 이 무렵에 설형문자로 처음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18세기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가메시에 관한 시 다섯 편의 일부가 현재 전해지는데 모두 슐기 왕 시대에 기록된 시들의 사본일 가능성이 있다.\n\n기원전 18세기에 함무라비 왕의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이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로 등장하며, 아카드어를 사용하는 바빌로니아인들도 길가메시에 대한 전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주요 아카드어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한 구절을 따서 \"모든 다른 왕들을 능가하는 왕\"으로 불리는데 함무라비 왕의 재위 기간에 기록되었다.\n\n기원전 1300년과 1000년 사이 신레케운니니라는 시인이 그때까지 전해지던 길가메시 전설을 하나의 서사시로 편집했다고 하는 아카드어 판본을 오늘날 표준판이라 한다. 이 판본은 첫 행을 따 \"깊은 곳을 본 이\"라고 불린다. 그 후에 발견되는 여러 판본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표준판을 기초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판본은 니네베에 있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서고에서 발견된 12개의 점토판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히 전하지 않아 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여러 판본으로 전체 모습을 복원하고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고구려의 관직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고구려의 관직**은 고구려에서의 관료 또는 관직이다. 관직은 총 14개의 관등에 따라 존재했다." }
{ "from": "user", "value": "관등은?" }
{ "from": "gpt", "value": "삼국사기 잡지는 수서, 신당서, 책부원귀 세 권으로부터 인용했다." }
{ "from": "user", "value": "우륵의 생애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삼국사기에 가야금과 노래, 춤을 배웠는데, 우륵이 전수한 12곡을 음란한 음악이라며 5곡으로 줄여버렸다. 우륵은 이에 분노했지만, 음악을 들어보고 나서 \"즐거우나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다\"고 평하며 그들이 바꾼 음악을 인정하였다.\n\n한편 신라의 대신들은 진흥왕에게 \"가야를 망친 망국의 음악 따위는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라고 가야악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간언하였지만, 진흥왕은 \"가야왕이 음란해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는가. 성인이 음악을 만드신 뜻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 법도를 따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고는 음악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라며, 결국 우륵이 전수한 가야악이 신라의 궁중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n\n## 우륵의 출생지에 대하여\n삼국사기에 \"악사 성열현 사람 우륵\" 이외 구체적인 지명을 명시하지 않으면서 음상사학적으로 해석하여 유사한 지명을 비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신라의 중앙 관제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신라의 중앙 관제**는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 "from": "user", "value": "남북국 시대는?" }
{ "from": "gpt", "value": "남북국 시대에는 집사성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13부를 두었다.\n\n이를 이·호·예·병·형·공의 체계에 따라 나누면 다음과 같다.\n\n그밖에도 국립 대학인 국학과 녹봉을 관장하는 사록관이 있다." }
{ "from": "user", "value": "왜국의 가야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n\n## 발해와의 관계\n당과 신라 연합에 따라 발해는 왜와 돌궐 등의 연합을 구축하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말갈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말갈**은 여진족과 동류, 전신이며 이전 여진을 부르던 명칭이다.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은 말갈을 통틀어 여진이라고 불렀다. 말갈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 그리고 한반도 남부 강원도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초기부터 고구려 한민족에 정복되어 오랜 시기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주나라 때에는 주로 숙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본래 쑹화강 유역은 말갈과 같은 어원인 물길이 지배하였으나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물길 부족들이 자립하였고,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불렸다. 이후 말갈은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되었고 고구려ㆍ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속말수말갈과 흑수말갈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n\n말갈의 최초 조상은 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나라 이전부터 불리던 명칭이고 이들이 한나라에는 읍루로 불렸으며 남북조 후위 시대에는 물길 그리고 이후 말갈이라고 불렸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거란은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여진이라고 불렀다. 이들 종족명의 공통점은 모두 기록자 중심으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거란한테는 여진으로 불렸지만 고구려민으로 살던 말갈임을 인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말갈인들에게 여진은 비칭이였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n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ㆍ 말갈이 신라, 백제와 교전한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들 국가와 교전한 \"말갈\"은 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강원도 지역에도 말갈이 다수 존재했다. 퉁구스계 말갈이 읍루, 숙신 등으로 불려왔던 것을 볼 때 말갈이라는 명칭이 옮겨갔을 것을 보기도 한다. 쑹화강, 흑룡강에 살던 말갈과 여진족은 대규모 이주하여 대부분이 평안북도나 함경도에 살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경우가 고려, 조선 초기까지 말갈의 후손인 여진족들이 평안북도와 함경도에 터를 잡고 살아왔으나 4군 6진 개척 이후 이 곳의 대부분의 말갈, 여진족들은 한민족에 동화되었고 일부는 압록강, 두만강 북쪽으로 도망쳐서 살다가 금나라와 청나라를 건국했다." }
{ "from": "user", "value": "말갈의 7부족은?" }
{ "from": "gpt", "value": "**말갈 7부** 중에 불열부, 백돌부, 호실부, 안거골부, 흑수부는 퉁구스계 부족이며, 옛 부여와 북옥저 지역에 있는 속말부, 백산부는 예맥계인 부여와 옥저에 숙신계가 혼합 되어 있었고, 점차 고구려화된 부족이다.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오랜 지배로 동화되게 된다. 이외에 사모말갈, 군리말갈, 굴열말갈, 막예개말갈 등도 있었다." }
{ "from": "user", "value": "남북국 시대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남북국 시대**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의 건국부터 후삼국 시대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한국사의 시대구분이다. 신라를 남국, 발해를 북국이라 칭한다." }
{ "from": "user", "value": "개요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과거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러왔으나, 이 당시에 신라뿐만 아니라 발해도 존재했으므로 한국사의 범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는 문제 의식이 제기되어 왔다. 이후 발해를 한국사에 넣기 위해 두 나라의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남북국 시대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현재는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한다.\n\n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부른 예는 최치원의 글과 삼국사기에 이미 나타난다. 최치원의 글 중에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가 있고, 삼국사기에도 신라가 북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북국은 발해를 가리킨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불렀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남북국이란 용어를 단순한 방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의 체계 속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조선시대 말기이다.\n\n발해는 고구려의 멸망 이후 민족구성과 정치체제에 있어 다소 변화가 생겼다. 고구려 시대에 비해 말갈인의 비중이 늘어난 점에서 이전과 다른 점이다. 다만 지배층의 고구려 계승의식, 초기 중심지인 동모산의 위치, 발해 왕족 무덤의 형태, 발해 멸망 이후 고려왕조로의 편입 등 여러 면에서 한국사와 연관성이 높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한국에서는 한국사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
{ "from": "user", "value": "어족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어족**은 언어학에서 하나의 공통된 조어에서 갈라나왔다고 추정되는 여러 언어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
{ "from": "user", "value": "어족의 구성과 분류는?" }
{ "from": "gpt", "value": "## 자연어\n대부분의 자연어는 여러 어족에 각기 속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어족은 계통적, 발생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언어 집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해당 어족의 모든 언어는 하나의 공통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족의 개념은 한 언어의 역사적이고 계통적인 조상이 있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남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언어가 급격하게 변화했거나 교체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학적인 조상의 개념은 생물학적인 조상의 개념보다 불분명한데, 혼성어와 같은 몇몇 극단적인 역사적 언어접촉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어족의 언어 간의 혼성어의 경우 여러 어족의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어느 어족에 속하는지 불분명하거나 잘못 추측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혼성어와 같은 경우는 실제론 상대적으로 상당히 드물며, 대부분의 언어의 경우에는 그다지 불분명하지 않게 개개의 어족들에 분류해 넣을 수 있다.\n\n어족에 속한 언어들의 공통 조상은 공통조어라고 한다. 이러한 조어들 중에서 대표적인 예가 가장 잘 알려진 어족 가운데 하나인 인도유럽어족의 조어인 인도유럽조어이다. 인도유럽조어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기의 언어이므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때로는 일련의 언어들의 조어가 역사상의 실제하는 언어로 판별되기도 한다. 라틴어의 각 지방의 방언들이 오늘날 로망스어군의 여러 언어들로 발달했기 때문에, 고전기 작가들의 문어 라틴어, 고전 라틴어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로망스조어는 라틴어와 거의 일치한다. 이와 비슷한 예가 고대 노르드어의 경우로, 다소 기록으로 남아있는 고대 노르드어는 각지로 퍼져서 여러 곳의 방언들이 각기 오늘날의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페로어, 아이슬란드어 등의 조상이 되었다.\n\n한 어족의 공통 조상으로 직접적으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몇몇 고전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언어들이 상대적으로 최근의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교언어학적 방법들을 적용함으로써 조어의 많은 특징들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복원 과정은 주로 여러 언어들의 낱말들 사이에 나타나는 말소리의 규칙적인 대응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지며, 이와 관련된 연구방법론은 비교 재구라고 불린다. 비교재구는 19세기 초기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라스크, 야콥 그림, 아우구스트 슐라이허, 젊은이 문법학파 등등의 일군의 비교언어학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발전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언어학적 방법은 아래에 제시된 수많은 어족들의 정당성을 입증한다.\n\n어족은 더 작은 계통적, 발생적 단위로 나뉠 수 있는데 관습적으로 어족의 하위 부류는 ‘어파’라고 불린다. 하지만, ‘어족’이라는 용어가 계통수에서 어떤 특정한 단계를 지칭하는 데 제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게르만어족은 인도유럽어족의 하위 부류이다. 일부 학자들은 ‘어족’이라는 용어를 특정 단계에만 사용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어떤 합의나 동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어파’의 하위부류를 ‘어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족’보다 큰 단위를 ‘대어족’이라는 용어로 지칭하기도 한다.\n\n### 고립된 언어\n언어들 중에서 확실히 어느 어군으로 분류할 수 없는 언어를 고립된 언어라 한다. 어족 내에서도 다른 어족 내의 언어들과 친족관계가 밝혀지지 않아 별개의 어파로 분류해야 하는 고립된 언어가 있다. 인도유럽어족의 경우에는 그리스어가 여기에 해당하며, 인도유럽어족 내에서 고립된 언어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보다 좀 더 극단적인 고립된 언어로 바스크어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바스크어는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고립된 언어이다. 바스크어의 경우, 어휘, 음성, 통사구조의 역사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을뿐더러, 현존하는 어떤 다른언어와도 친족어 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 이외에도 한국어, 수메르어 등이 고립된 언어에 포함된다. 이러한 고립된 언어들은 각각 하나의 작은 어족을 형성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례로, 바스크어를 바스크어·나바로라부르댕 바스크어·술탱 바스크어로 나누어 이들이 바스크어족을 형성한다고 보거나 한국어 중 제주어를 별개로 보아 한국어족으로 분류하는 등 언어를 나누는 기준에 따라 고립된 언어가 될 수도 있고 작은 어족이 될 수도 있다.\n\n### 크리올어·피진·통상어\n이들 언어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끼리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생겨난 혼합어로 어떤 언어를 토대로 했는지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또 이들이 분화되어 생겨진 언어들의 친족 관계도 살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영어를 기초로 한 크리올어인 비슬라마계 언어, 즉 비슬라마어·톡 피신어·솔로몬 제도 피진어 등은 서로의 유사성이 확연하며 어느 정도 상호 의사 소통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세 언어는 멜라네시아라는 한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피진이기 때문에 멜라네시아 외 지역에서 발생한 영어 피진, 즉 하와이 크레올 영어, 자메이카 크레올 영어등과는 상호 이해도가 아주 낮아 토대 언어가 같다고 해서 한 갈래로 나누기에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의견도 있다.\n\n## 수화\n수화는 손짓을 중심으로 몸의 움직임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언어이며 다른 자연어와는 독립된 발달을 하였다. 농아자들을 위한 수화가 대부분이지만 침묵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수도자들이 쓰는 수도원 수화, 서로 언어가 다른 부족끼리의 의사소통 등 여러 이유로 쓰이는 평원인디언 수화 등도 있다. 이들도 다른 자연어와 같이 변화·분화하기 때문에 계통 연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국 수화는 일본 수화 및 대만 수화와 관계가 있다. 미국 수화는 프랑스 수화에서 발달한 것으로, 영국의 수화와는 다른 형태를 지닌다.\n\n## 인공어\n에스페란토 등의 인공어도 이론상 자연어와 같이 변화·분화할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인공어는 역사가 짧기도 하고 성격상 언어 형태가 정립되어 있어 분화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에스페란토에 기초하여 이도가 만들어진 예와 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자연어의 분화와는 다르지만 인공어간의 친족 관계를 거론할 수도 있다.\n\n## 대어족\n여러 어족들에 대해 여러 학자들 간에 그 당위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더 나아가서 여러 어족들을 묶어 대어족을 제안하기도 한다. 일부 대어족은 가설로 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수준 재구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대어족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나 학파는 그 존재를 부정하거나, 보류하고 있는 상태이다." }
{ "from": "user", "value": "아프리카의 언어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아프리카에는 3천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하며, 이들 중 아프리카에서 파생된 언어들은 네 가지 어족으로 나뉜다.\n\n유럽의 언어 또한 널리 사용된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강세를 이루며 두 언어를 공용어로 지정한 국가가 많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중앙아시아의 경제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일 때에는 소련 공산주의로 인해 공산주의식 농장들과 군사 기지들도 존재하였다.\n\n이러한 상황에서 카자흐스탄은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 대외경제협력의 확대를 통한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외교 정책을 구사하여 많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동아시아의 기후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주로 온대성 기후를 띠며 러시아의 극동지방은 한대성 기후가 주로 나타난다. 베트남, 필리핀 등의 지역은 열대성 고온다습 기후가 나타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남아시아의 경제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높은 서비스업 비중은 이 지역 국가들의 특징으로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파키스탄 모두 GDP에서 차지하는 서비스업의 비중이 50% 이상을 차지한다.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베네수엘라 등 남아메리카의 대부분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서비스업 비중이 높다. 이들 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으며 공식 기업 부문에 속하지 않는 개인의 소매업, 자영업 등에 의한 비공식 부문이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수요편향가설과 생산성편향가설이 있는데, 수요편향가설은 소득이 증가할수록 상품 수요보다는 서비스 수요가 더 빨리 증가하여 산업구조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바뀐다는 가설인데 이들 국가들은 제조업이 산업구조에서 우위를 차지한 적이 없으므로 적용이 곤란하다. 생산성편향가설은 생산성이 단절적으로 증가하는 서비스업이 생산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제조업과 달리 제조업 부문 생산과 생산성을 부합시키기 위해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게 되고 결국 제조업보다 생산성은 뒤떨어지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서아시아의 자연 환경을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지형은 대부분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표적인 사막은 룹알할리 사막이 있다. 강으로는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등의 강이 있고 산맥은 술라이만산맥, 코페트산맥 등이 있다. 기후는 주로 건조기후이며 지중해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를 띤다. 대부분의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50mm이하이며 메소포타미아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강 근처에는 약 250mm~700mm가 이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동남아시아의 기후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주로 열대 기후를 띠며 적도 부근에 위치하여 연중 기온이 높은 열대 기후가 나타난다. 또한 계절풍 기후가 나타난다. 대부분 지역은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짧은 건기를 제외하고는 강수량이 많다.\n\n## 항공\n동남아시아를 여행하는데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 수단은 항공편이다. 섬 나라가 많은데다 열대우림 등으로 뒤덮인 지역이 대부분이어서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섬나라 현지 서민들은 값싼 배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나 배는 시간이 많이 걸려 여행자들이 이용할 만한 교통 수단은 아니다. 특히 대륙에 붙어 있는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등 일부 국가를 이동할 때는 철도나 도로 등을 이용할 수 있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화민국등 섬나라로 이동할 때는 항공기를 이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n\n인도네시아는 국영기업인 가루다 인도네시아가 국내선과 국제선을 운영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다카에 국제공항이 있다.\n\n## 도로\n인도네시아의 경우, 자바에는 포장도로망이 발달해 있으나 그 밖의 섬에서는 도로가 미개발상태에 있다.\n필리핀은 루손을 중심으로 자동차 도로가 발달해 있다.\n\n## 철도\n1893년에 시작된 태국의 철도는 그 뒤 국유화되어 타이국철이 운영하고 있다. 주요한 노선은 방콕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즉 치앙마이에 이르는 북선, 코라토를 거쳐 농카이 또는 우봉에 이르는 동북선, 아란야부라테이트를 지나 캄보디아 국유철도에 접속하는 동선, 하자이를 거쳐 말라야 철도에 통하는 남선 등 4개 노선이다. 1965년 무렵부터 디젤화가 추진되었다.\n\n인도네시아는 철도가 자바와 수마트라의 일부 지방에 부설되어 있다. 여러 가지 궤간의 철도가 있는데, 3/4은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에 부설되어 있다. 베트남에는 하노이에서 호치민 시까지 해안선을 남하하는 철도가 있는데, 프랑스와 싸운 인도차이나 전쟁과 이어진 베트남·미국 등과의 베트남 전쟁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특히 베트남 남부의 피해가 커서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통일 후인 1976년에는 30년 만에 개통하였다. 베트남전쟁중 북베트남 최대항구인 하이퐁과 수도 하노이를 연결하는 철도는 큰 역할을 하였다.\n\n캄보디아에는 수도 프놈펜으로부터 서쪽으로 보이베트에 이르는 노선과 남쪽으로 콤퐁솜만 방향으로 가는 노선이 있는데 모두 단선이다. 필리핀에도 루손섬, 파나이섬에서 철도가 경영되고 있다.\n\n동남아시아의 열차 여행은 문명의 때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미와 원주민들의 순박함과 친절함, 싼 물가, 이국적인 남국의 독특한 풍물 등 멋진 정취를 가져다 준다. 1993년에는 세계적인 철도회사가 이스턴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호화 유람 열차를 싱가포르-쿠알라룸푸르-방콕 노선에서 운항하기 시작하였다.\n\n## 수운\n미얀마는 하천수운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서 이라와디강이 교통의 대동맥이 되고 있어, 하구에서 1,500km 떨어진 바모까지 기선이 통행하고 있다. 시탕강, 땅륀강도 교통에 이용되고 있다.\n\n많은 섬으로 된 국가인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에서는 해운이 극히 중요하다.\n인도네시아는 전전에는 네덜란드의 업체가 연안항로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으나, 1957년에 이러한 권익은 모두 인도네시아에 의해 국유화되었다.\n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국제 교통 허브이다. 많은 항공 및 해운 노선이 이곳을 지난다. 싱가포르 항은 PSA 인터내셔널과 주롱 포트에 의해 운영되는데, 취급 선적 톤수 기준으로 세계 2위인 총중량 11.5억톤, 컨테이너 물동량 기준으로 2,320만 TEU를 기록했다.\n필리핀도 선박 통행으로 국토가 이어지게 되었다.\n미얀마는 대외무역이 주로 양곤 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태평양의 환태평양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을 환태평양 국가라고 하며 이들중 많은 국가가 경제 협력체인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에 가입되어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메구로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메구로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n\n메구로에는 15개국의 대사관과 총영사가 있다. 도쿄 최고의 상류층 거주 지역 중 하나인 가키노키자카가 메구로에 위치해있다." }
{ "from": "user", "value": "역사는?" }
{ "from": "gpt", "value": "히가시야마 패총에는 구석기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n\n‘메구로’라는 이름은 오색부동 중 하나인 목흑부동에서 온 것이다.\n\n메구로구는 1932년에 성립되었다." }
{ "from": "user", "value":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베네수엘라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15,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잎사귀 모양의 도구와 찍개, 평평하고 둥근 긁개 등의 도구가 베네수엘라 서부의 강변 높은 언덕에서 발견되었다.\n\n16세기에 스페인의 베네수엘라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자, 토착민들은 조직적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구아이카이푸로, 타마나코 같은 원주민들의 지도자들은 스페인의 습격에 저항하려 했지만, 결국 정복되었다. 타마나코는 카라카스의 설립자 디에고 드 로사다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베네수엘라는 1522년에 스페인에 의해 현재의 쿠마나에서 식민지가 되었다. 이들 베네수엘라 동부는 뉴 안달루시아에 통합되었다. 16세기 초부터는 산토 도밍고의 아우디엔시아로부터 관리되었고, 18세기 초에는 베네수엘라의 대부분이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에 속하게 되었고, 1776년 이후로는 도독령으로 개편되었다.\n\n잇따른 봉기의 실패 후, 베네수엘라는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장군의 지휘 하에 1811년 7월 5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로부터 베네수엘라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어쨌거나, 1812년 카라카스 지방의 파괴적인 지진과 야네로의 반란으로 베네수엘라의 첫 번째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1813년 8월 7일에 선언된 베네수엘라의 두 번째 공화국은 수개월 간 지속되었다.\n\n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쟁취했다. 1819년에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을 이루다가 1830년에 분리를 선언하였다. 콜롬비아로부터는 1845년에 승인을 받았다.\n\n안토니오 구스만은 정교 분리, 공교육 제도를 실시하는 등 베네수엘라를 국민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후안 비센테 고메스의 통치 기간 중에는 석유에 관한 이권이 외국 자본가들의 손에 넘어갔다. 외국 석유기업의 수익에 대한 세율을 50% 인상한 석유법이 제정된 것은 이사이아스 메디나 안하르티아에 이르러서였고, 선거를 제대로 치러본 해는 1948년이었다.\n\n하지만, 로물로 가예고스를 기반으로 한 정부는 1년이 못 가 군사 쿠데타로 폐지되고,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시기에는 국가치안대을 신설하여 수많은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히메네스 대통령은 80만 헥타르의 토지에 대한 석유 채굴권을 다시 외국 자본가들 손에 넘겼다.\n\n히메네스 정권은 1958년에 국민의 힘에 의해 타도되고, 민주행동당과 사회기독당의 양대정당 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비교적 안정된 정국을 유지해왔다. 1974년에 집권한 페레스 로드리게스는 반정부 세력에 정치활동을 보장하여 사회협조를 현실화하는 한편, 특히 천연자원에 대한 민족주권회복을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고 1976년에는 석유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n\n하지만, 1989년 2월 재취임한 페레스는 이전까지 거부해온 국제통화기금의 지도를 받아들여 금리자유화·공공요금 인상 등 긴축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에 시민들의 대규모 폭동이 야기되고 1992년 2월과 11월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독직사건을 계기로 불명예 퇴진하였다. 이 쿠데타에는 우고 차베스도 참가했다.\n\n1994년 2월 사회기독당 소속의 라파엘 칼데라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여소야대 정치구도하에서 민주행동당 및 사회주의운동당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국정을 운영해 왔으나 경제정책 실패 및 1995년 12월 지자제 선거참패로 인해 사회주의운동당이 이탈하면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이후 개각을 단행하였다. 1996년 4월 국내유가 467% 인상, 외환통제 전면철폐, 변동환율제로의 전환, 도매세 및 사치품세 인상 등 경제개혁을 단행하였다.\n\n칼데라가 물러나고 우고 차베스가 1999년에 대통령이 되었으며, 그는 1992년 쿠데타에 참가한 경력이 있었다. 2002년 4월 11일 카르모나의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차베스도 언론 통제, 반대파 억압 등으로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차베스는 2013년에 사망하였으며,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그러나, 니콜라스 마두로 임시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2013년 4월 14일에 치러진 새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통합 후보인 엔리케 카프릴레서 주지사를 누르고 승리하고 말았다.\n[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205104" }
null
nu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