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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아프간:의 역사를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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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 기원\n알카에다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항한 이슬람 의용군이 연대한 조직이 기원이다. 그 후에 오사마 빈라덴은 걸프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군대를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이슬람교 제2대 성지 메카와 메디나에 상주하게 하자 \"신성한 땅을 더럽힌 것\"이라고 분노하여 반미국 투쟁으로서 무자헤딘을 결집시켰다.\n\n## 테러\n1990년대에 시작된 투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과격해져서 2001년에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 국방부 건물 테러 사건, 같은 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소재한, 미국 군대 기지 폭파 사건,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 대사관 폭파 사건, 예멘 근해에 체류한, 미국 군함인 콜을 습격한 사건에 관여했다고 간주되며 2000년에는 미국 뉴욕에 소재한 세계무역센터 비행기 테러 사건을 단행하면서 마침내 2001년 미국을 동시다발 테러한 외에서 동남아시아 각국의 반정부 이슬람 과격파 조직과도 연락하였다고 의심받는다. 2003년 말 이후에는 이라크에 알카에다계 활동 인원이 다수 잠입하였으며, 2004년의 미국인 닉버그와 김선일의 처형에 간접적으로 연관됐다고 추정된다.\n\n계속되는 테러와의 전쟁 끝에 2011년 파키스탄에 은둔하던 빈 라덴이 미군에 의해 사살되고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이라크 지부는 시아파 세속 정부에 반대하는 수니파 극단주의 민병으로 변질되어 2014년 등장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통합되었다. 2022년 7월 31일 알자와히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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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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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위나라는 220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고 건국되어 265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5년간에 걸친 왕조로, 공식적인 건국은 실질적 창업자인 조조가 죽은 뒤의 일이었다.\n\n189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들이 그를 따른다. 191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n\n이후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재능제일’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리더십과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n\n후한 왕조는 이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퇴한 상태였으나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에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낙양, 허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n\n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 216년에 위왕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 않았다. 220년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을 받고 황제가 되어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였다.\n\n위나라를 건국한 조비는 낙양으로 천도하고, 허를 허창으로 고쳐 불렀다. 낙양은 중국 삼국 시대 중 규모·인구 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조비는 유가를 부흥하여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고, 구품관인법을 실시하여 인재를 선발하였다. 하지만 조비 스스로 예를 따르지 않고, 오 정벌의 실패로 인하여 위신이 실추되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한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 사마의는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n\n254년에는 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5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위나라는 멸망하고 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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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가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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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로마 시대의 정치가, 장군이었다. 뛰어난 술수와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두 번이나 진격하였고 독재관이 되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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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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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 초기의 생애\n술라는 로마 공화정의 영향력 높은 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 씨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몰락하여 정치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로마의 하층민들과 보냈으며 메트로비우스라는 당대의 배우를 만나 평생 함께했다고 한다. 술라는 파트리키이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주택에 거주했고 재산 수준은 같은 공동주택에 살던 해방노예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비록 젊은 시절을 방탕하고 가난하게 보내긴 했지만 술라는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n\n기원전 107년 당시의 집정관이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사 재무관으로 누미디아왕 유구르타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보쿠스와 유구르타를 격파하였다.\n\n그 후 그는 마우레타니아 왕 보쿠스를 설득해 계략을 꾸며서 로마를 괴롭히던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n\n마리우스의 사절로 만리우스와 함께 마우레타니아에 파견된 그는 보쿠스 왕에게 로마에 투항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보쿠스는 유구르타와의 관계를 들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n\n이후 보쿠스는 사절단을 술라에게 보냈고, 술라는 이를 마리우스에게 알렸다. 술라에게 융숭한 접대를 받은 사절들은 보쿠스에게 돌아가 술라가 너그럽고 자비로운 인물이라고 보고했다. 사절단의 일부는 마리우스를 통해 로마에 갔고, 로마 원로원은 정식으로 보쿠스가 로마의 동맹자임을 선언했다.\n\n보쿠스는 아들 볼룩스를 보내 술라를 모셔오게 했다. 볼룩스는 유구르타가 아군과 가까이 있음을 알리자 술라는 유구르타의 진영을 급습한 뒤 그들을 따돌렸다. 보쿠스는 이후 술라와 비밀회담을 열었다. 술라는 보쿠스에게 로마의 강한 힘을 설명하고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것이 양국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보쿠스는 속임수를 써 유구르타를 술라에게 보냈고 술라는 누미디아왕을 데리고 키르타로 돌아왔다. 이때의 공으로 술라는 대중에게 처음 알려졌으며 마리우스는 그에 대한 질투를 조금씩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리우스와 사이가 나쁜 메텔루스 가의 사람들은 유구르타 전쟁은 오로지 술라의 공이라고 말하고 다녔다.\n\n기원전 104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침입하자 술라는 역시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참전하였고 나중에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휘하에서 싸웠는데 이때 그의 군사적 재능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n\n## 승승장구\n로마로 돌아온 기원전 97년 술라는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법무관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로마의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르티아 제국의 대사를 만나 외교협상을 벌였고 훌륭한 외교력으로 로마의 이익을 가져왔다. 동방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귀족파에 가담하여 마리우스의 반대편에 섰다.\n\n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자 술라는 남부전선에서 속전속결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특히 당시 로마 군단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풀잎관\"을 받을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마리우스와 함께 마르시족을 격파하고 폼페야니족의 클루엔티우스를 공격했다. 클루엔티우스의 군대는 전투에서 술라에게 패한 뒤, 놀라로 달아났으나 술라에게 추격당해 그를 포함한 20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섬멸되었다. 이후 술라는 히르피니족의 아이쿨라눔을 점령하고, 삼니테스족의 가이우스 파피우스를 격파했다.\n\n## 첫 번째 내전 및 쿠데타\n동맹시 전쟁이 종결되자 기원전 88년 술라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로마 공화정의 최고의 직위인 집정관에 선출된다. 이와 함께 술라는 세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하여 당시 유력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후원을 얻었다. 집정관으로서 술라는 때마침 벌어진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지휘권을 부여 받는다.\n\n그러나 당시 호민관인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마리우스와 협력하여 민회를 소집하여 술라가 부여받은 미트라데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으로 집정관 폼페이우스 루푸스의 아들이 죽고 루푸스도 도망쳤다.\n\n술라는 잠시 피신했다가 놀라에 주둔한 군사를 규합하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술라가 쿠데타를 일으킬지 꿈에도 몰랐으며, 술라가 로마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저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로마에서 탈출했다. 술라는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술피키우스-마리우스 일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주했고 술피키우스는 참수되어 술라에게 보내졌다. 로마가 안정을 되찾자 술라는 집정관인 옥타비우스와 킨나에게 로마를 맡기고는 미트라다테스 정복전쟁에 나섰다.\n\n## 미트라다테스 전쟁\n기원전 87년 술라는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하고 아테네를 공격했다. 당시 아테네는 피레우스에서 주둔한 아르켈라오스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아테네의 농성군과 로마군은 투석전을 벌이며 매우 치열하게 싸웠다. 술라가 아르켈라오스가 판 땅굴에 황과 역청을 집어넣고 불태우자 많은 아테네군이 죽었다. 술라의 공격에 질린 아테네에서 강화사절을 술라에게 보냈고, 그 사절은 술라에게 아테네인들의 위대한 조상들의 업적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술라는\n\n\"그런 시시한 역사강의는 그대의 동포들에게나 들려주시구려. 나는 그대들의 강의를 들으러온 학생이 아니라 아테네를 함락시키라고 보내진 장군이오\"\n\n라고 답변했다. 곧 포위공격을 받아 식량이 떨어진 아테네는 술라에게 항복했다. 이어 술라는 보이오티아로 달아난 폰토스-그리스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86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술라의 15000명의 보병과 1500명의 기병은 아르켈라오스의 12만명의 대군과 싸웠다.\n\n술라가 폰토스군에 접근하자 아르켈라오스는 기병을 출동시켜 로마군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어 80대의 낫을 단 폰투스 전차가 출격했으나 로마군은 전차를 피하듯 대열을 벌렸다. 전차가 통과하자 로마군은 측면에서 전차를 격퇴했다. 15000명의 폰투스 밀집보병 역시 격파되었다. 공격이 여러번 실패하자 아르켈라오스는 보병을 총출동시키면서 정예기병으로 술라군의 중앙을 돌파해 로마군 좌우익을 포위하였다. 술라는 그때 우익에 있었는데 로마군 좌익이 불리해지는듯 하자 좌익으로 갔다. 술라의 지원으로도 로마군 좌익은 여전히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술라가 로마군 우익으로 돌아오자 힘을 얻은 로마군 우익은 폰투스군 좌익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좌익에서도 적을 궤멸시켰다. 결국 아르켈라오스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고 결국 술라의 압승으로 카이네로이아 전투는 막을 내렸다.\n\n아피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폰투스군은 10만이나 죽은 반면 술라군의 손실은 12명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는 전근대적 한계와 과장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전근대인들은 신화적인 이야기나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하여 숫자를 추정했기 때문에 승전만이 아니라 패전도 과장될 수 있었다.\n\n같은 해, 오르코메누스에서 아르켈라오스의 공격을 받은 로마군이 달아나려 하자 이를 말리다 뜻대로 되지않아 격분한 술라는 병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n\n\"시민들이여 훗날 누군가가 그대들에게 총사령관을 버린 곳이 어디였냐고 물으면 오르코메누스였다고 답하라!\"\n\n이 말을 들은 로마군은 다시 전투의지를 다지고 다수의 적을 척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85년 술라와 미트라다테스 6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강화를 체결했는데 이 때도 술라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미트라다테스를 굴복시켰다. 술라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대한 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n\n## 두 번째 내전 및 로마 진격\n한편 술라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을 때 로마는 다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민중파가 집권하여 술라를 반역자로 만들었다. 마리우스는 곧 죽었으나 뒤를 이은 킨나는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기원전 86년 술라에 맞서는 정규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플라쿠스는 곧이어 일어난 군대의 폭동으로 살해당하고 부사령관 핌브리아가 그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n\n핌브리아는 미트라다테스를 격파하고 술라의 부하 루쿨루스를 자기편으로 포섭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술라는 그의 병력을 적군 가까이에 포진시켰다. 술라군과 핌브리아군은 가까운 곳에서 지내다 보니 친밀감이 생겼고 곧이어 적병들은 모두 진영을 탈주했다.\n\n결국 핌브리아의 병력은 고스란히 술라에게 흡수되었다. 이후 핌브리아는 병사들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하여 자살했다. 술라는 킨나를 격동시키는 글을 써 킨나에게 보냈고, 이탈리아를 술라로부터 방위하려던 킨나는 그리스에 있는 술라를 정벌하려고 군대를 편성하다가 군단 폭동으로 죽고 말았다.\n\n기원전 83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술라는 귀족파를 규합하였다.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등이 술라를 지지했다. 노르바누스와 소 마리우스가 술라를 급습했으나 오히려 술라에게 대패하며 6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술라와 교섭을 하던 중에 병사들이 그를 버리고 술라에게 항복했다. 스키피오는 술라에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났다.\n\n기원전 82년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소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었는데 카르보는 기원전 85년과 84년에 킨나와 집정관을 지낸적이 있는 2선 집정관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르보는 메텔루스 공격을 멈추고 철수했으나 폼페이우스의 기습공격으로 큰 손실을 봤다. 술라의 적인 카리나스는 여러차례 술라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그때마다 도망쳐 살아남았다.\n\n이후 술라는 카르보가 출동시킨 군대를 모조리 무찔렀고 , 메텔루스 역시 파벤티아에서 카르보의 공격을 막아내고 10000명을 척살하였다. 폼페이우스는 클루시움에서 카르보군을 2만명이나 죽였다. 한편, 삼니테스족의 폰티우스 텔레시누스는 로마로 진격하였고 술라는 소 마리우스에 대한 포위를 멈추고 콜리네 성문에서 텔레시누스와 크게 싸웠다.\n\n기원전 82년 11월 1일 콜리네 문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술라의 우익은 크게 적군을 격파하였으나 술라 자신이 이끄는 좌익은 적군의 우익과 두 군대가 괴멸되기 전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이 전투 도중에 술라는 적진에서 날아오는 창을 고개를 숙여 피해 전장에서의 죽음을 면했다. 결국 적의 좌익을 섬멸한 술라가 승리하였고, 로마에는 다시 술라의 정권이 세워졌다. 전투 후 소 마리우스와 텔레시누스는 동반 자살했고, 다른 집정관 카르보는 시칠리아로 달아나다 후에 폼페이우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n\n콜리네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로마로 입성한 술라는 대대적이고 철저한 반대파 학살에 착수했다. 우선 삼니테스족 패잔병 8000명을 원로원에서 회의하는 도중에 병사들을 시켜 학살했다.\n\n한편 마리우스군 잔당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에게 격파되었으며 오직 히스파니아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만이 남아 술라에 대항했다.\n\n## 독재관 취임과 은퇴\n기원전 81년 로마는 집정관이 모두 공석이었다. 술라는 10만의 병력을 배경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에 취임했다. 원래 로마 공화정에서 독재관은 임기가 6개월이었지만 술라는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의 제안으로 민회는 이를 승인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후 그는 대대적인 국정 개혁에 나섰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n독재관으로 이러한 개혁을 2년동안 정력적으로 실시한 술라는 기원전 80년 말, 돌연 사임을 발표하고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였고 나폴리 근처의 바닷가의 소박한 별장에서 은둔하였다. 술라는 1년여 한가한 은퇴생활을 한 후 기원전 78년 시골에서 세상을 떠났다. 술라의 장례식은 그의 부하들이 참가한 가운데 로마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유해는 나중에 반대파에게 시신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유언과는 다르게 화장되었다.\n\n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비문이 쓰였다고 전한다.\n''\"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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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투키디데스가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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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투키디데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역사가이며, 기원전 5세기경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기원전 411년까지 싸운 전쟁을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다.\n\n아테네 명문출신이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자신도 장군으로 선발되어 트라케에 파견되었으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죄로 추방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중대성을 예견하고 자료를 수집했던 그로서는 불행했던 추방도 적의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직접 체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주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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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생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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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투키디데스의 생애에 관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간혹 언급된 개인적인 기록이 거의 전부이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의 북부 지방 트라케 출신인 올로로스의 아들로서 기원전 465년을 전후로 하여 아테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20대 중반에 페리클레스 정책에 동조하여 기원전 425년 또는 기원전 424년 군사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22년에 그가 지휘하는 아테나이군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이 시기에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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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앙리 마티스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
"from": "gpt",
"value": "**앙리 마티스**는 20세기 야수파 프랑스 화가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1893년 파리 국립 미술 학교에 들어가 귀스타브 모로에게서 배웠다.\n\n1904년 무렵에 전부터 친분이 있는 피카소·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다, 1954년 11월 3일에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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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화풍의 발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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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 인상파 연구\n1892년에는 양친을 설득하여 다시 파리에 나와 아카데미 줄리앙의 부그로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이어서 미술학교의 모로에게 배웠다. 동문인 마르케와 루오와의 교우는 이 때에 시작하였다. 루브르에서 고인을 배웠고 인상파·신인상파를 한 발짝씩 연구해 갔다. 화상 볼라르의 점포에서 세잔, 고흐, 고갱의 데생을 구입하였고, 런던으로 여행, 터너를 보았으며, 더욱이 인상파의 유산을 계승하여 우키요에에 열중한 것도 초기 마티스에 있어서는 필요한 영양이 되었다.\n\n## 포비즘\n1896 ~ 1897년경부터는 원색의 대비에 의하여 선명한 표현을 시도하였고, 앙데팡당 미술전의 출품을 통하여 젊은 드랭과 블라맹크와 깊이 사귀게 되어 색채는 더욱 선명해졌다. 이렇게 그는 젊은 화가들의 선두에 서서 포비슴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다. 마티스에 의하면 포비슴의 운동은 무엇보다 먼저 표현수단의 순수함을 재발견하는 용기를 고취하고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회화에서 구한 또 하나는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표현이란 얼굴을 찡그린다든지 강렬한 동작을 과시한다든지 하는 격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화가가 주체적으로 화면에 만들어 내는 색과 모양의 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긴밀한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질서 있는 조형을 탐구하였는데, 예를 들면, 실내화와 정물화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의장, 장신구, 가구 꽃, 꽃병, 융단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인물이 의장보다 중요하다든가 융단의 색채가 다른 형태보다 뛰어난다든가 하는 관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면은 모든 구성 요소의 균등한 비중에서 또 그 비중의 하모니에서 성립되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단일한 것, 질서·조화의 창조가 그의 과제였다. 그는 '동비중·순일·절도'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했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최상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길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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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폴 세잔의 세잔의 유산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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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1906년 세잔이 죽은 이후, 1907년 9월에, 파리에서 그의 작품들을 모아 큰 박물관 같은 회고전이 열렸다. 1907년 Salon d'Automne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은 파리에 있는 아방가르드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위치를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격상되었고, 입체파의 아버지로 평가받았다.\n\n세잔의 기하학적인 명료화와 광학 현상에 대한 탐구는 피카소, 브라크, 메챙제, 글레이즈, 그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쳐 같은 물체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형상을 재구성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세잔은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미술 영역에 큰 영감을 주어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뜻을 기려 Aix en Provence시에서는 프랑스에서 미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 세잔 메달을 수여한다.\n\n세잔의 작품인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는 2008년 스위스 박물관에서 도난당하였으나 2012년 세르비아 경찰에 의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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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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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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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생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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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호라티우스의 출신 가문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신분으로서 로마 자유시민권을 가진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호라티우스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세심한 교육을 받았으며, 기원전 45년에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인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유학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다. 이 시기에 그는 역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친교를 맺게되어 그를 따라 소아시아 지방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한다. 기원전 약 40년을 전후로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젊은 문학자와 사귀면서,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주선으로 당시의 로마의 문학 애호가이자 부호인 가이우스 마이케나스에게 소개된다. 이 만남은 호라티우스가 사망할 때까지 깊은 우정관계로 발전한다. 특히 마이케나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기원전 32년 사비나 농장을 선물함으로써,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시 창작에 열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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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헤이안 시대의 개요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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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헤이안 전기는 전 시대부터 중앙집권적인 율령정치를 기본적으로는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인 수정을 하였다. 하지만, 율령제와 현실 괴리가 커지면서 9세기말 ~ 10세기초에 정부는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율령제 기본이었던 개인별 지배체제를 고쳐, 토지를 대상으로 과세하는 지배체제로 크게 방침을 전환하였다. 이 방침의 전환은 민간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이를 현지에 부임하는 필두 고쿠시)가 총괄하게 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왕조국가체제라고 한다. 왕조국가체제기는 보통 고대 말기에 해당하지만, 분권적 성격을 띠는 중세 시작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므로, 고대에서 중세로 과도기라고 생각하고 있다.라는 표현도 쓴다.) 모노노케, 음양사를 비롯한 미신이 크게 성행하였다.\n\n왕조국가 체제하에서는 국가에서 토지경영이나 백성을 지배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유력한 백성, 묘슈) 층의 성장이 나타나며, 그들의 통제하기 위한 이 권력위임과 병행하여, 국가에서 군사경찰권을 위임받은 군사귀족층과 무예전문 하급관리 층도 또한 무사로서 성장하였다. 국가권한의 위임과 이에 의한 중앙집권의 지나친 부담의 경감에 의해 중앙정계에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관직이 특정 가업을 담당하는 가계에 세습되는 현상이 진행되어 귀족의 최상위에서는 셋칸케가 확립되었고, 중류귀족에 고정된 계층은 중앙에서는 가업의 전문기능 에 따라 공무를 담당하는 기능관인으로서 행정 실무를, 지방에서는 수령이 되어 지방행정을 담당했다. 이 시기는 셋칸케에 의한 셋칸 정치가 전개되었고, 특정 권문이 독점적으로 징세권을 얻는 장원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단계적으로 증가하여 수령이 징세권을 담당하는 공령과 함께 세력이 둘로 나뉘었다.\n\n11세기 후반부터는 태상천황이 지텐노키미가 되어 정무를 돌보는 인세이가 시작되었다. 인세이의 시작이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인세이 시기에는 장원의 일원영역적인 집적과 고쿠가료의 징세 단위화가 진행되어, 장원공령제라고 불리는 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12세기 중반엔 귀족사회 내부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게 되어, 이에 동원된 무사의 지위가 급속히 상승하였다. 이러는 중에 최초의 무가정권인 다이라씨 정권이 등장하지만, 이 시기의 사회적 모순을 혼자 도맡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확대된 내란에 의해 붕괴되고 만다. 다이라씨 정권의 붕괴와 함께 중앙정부인 조정과는 별개로 내란을 수습하여 도호쿠의 지배권을 얻은 가마쿠라 막부가 등장하여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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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미생물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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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미생물**은 맨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작은 생물이다. 또한 미생물은 영어로 \"microorganism\"이라고 하는데, \"micro\"는 '작다'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파생되었다. 미생물에 대한 관찰과 연구는 1673년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을 발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진균, 원생동물, 세균, 바이러스, 조류 등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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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관련된 법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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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미생물은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기 때문에 인간의 육안으로는 식별이 곤란한 생물을 말하나, 특허법상의 미생물이란 유전자, 벡터, 재조합벡터, 형질전환체, 융합세포, 재조합단백질, 모노클로날항체, 바이러스, 세균, 효모, 곰팡이, 버섯, 방선균, 단세포조류, 원생동물, 동식물의 세포, 조직배양물 등 특허 절차상 기탁 가능한 생물학적 물질을 의미한다.\n\n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을 특허출원하기 위해서는 그 미생물을 특허청장이 정하는 기탁기관 또는 특허절차상 미생물 기탁의 국제적인 승인에 관한 부다페스트 조약에 따른 국제기탁기관에 기탁하고 그 수탁증을 출원서에 첨부하여야 한다.\n\n## 특허법 시행령 제2조\n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에 대하여 특허출원을 하고자 하는 자는 특허청장이 정하는 기탁기관 또는 특허절차상 미생물기탁의 국제적 승인에 관한 부다페스트조약 제7조의 규정에 의하여 국제기탁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취득한 기관에 그 미생물을 기탁하고 특허출원서에 그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첨부하여야 한다.\n\n다만, 당해 발명이 속하는 기술분야에서 통상의 지식을 가진 자가 그 미생물을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이를 기탁하지 아니할 수 있다. 특허출원인 또는 특허권자는 제1항의 미생물의 기탁에 대하여 특허출원 후 새로운 수탁번호가 부여된 때에는 지체없이 그 사실을 특허청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n\n## 특허법 시행령 제3조 \n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에 대하여 특허출원을 하고자 하는 법 '제42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한 명세서를 기재함에 있어서 제2조 제1항 본문의 규정에 의하여 미생물을 기탁한 때에는 그 기탁기관 또는 국제기탁기관의 명칭·수탁번호 및 수탁연월일을, 제2조 제1항 단서의 규정에 의하여 그 미생물을 기탁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미생물의 입수방법을 기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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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죽도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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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죽도**는 울릉도의 동북부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면적은 독도 전체 넓이보다 약간 큰 0.208km이고 울릉군에서 울릉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행정상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 산 1-1번지이고, 저동항에서 동북쪽 뱃길로 약 4.8km 떨어져 있다. 독도를 제외하면 한국 최동단에 위치한 섬이다.\n\n죽도의 지형은 해안으로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절벽이 있고 그 위에 평평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이 섬은 산림청 소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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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주민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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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2018년 기준으로 인구는 단 3명으로, 1가구가 산림청에 1년 약 100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더덕 농사를 지으며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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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마사초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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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마사초**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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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생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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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마사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산조반니발다르노에서 1401년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는 늙은 약방 주인과 재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의 마사초의 성장 과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남아 있는 문서상의 기록으로는 1422년 마사초는 당시 피렌체 화풍을 이끄는 메디치 화가조합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술에 대한 정열이 지나쳐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저분한 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아무튼 1423년에서 1425년 사이에 마사초는 많은 인물화와 프레스코, 그리고 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n\n마사초의 프레스코, 특히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기도소에 마솔리노와 함께 구약 및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한 프레스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라고 미술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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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에드문트 후설이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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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에드문트 후설**은 현대철학의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의 체계를 놓은 철학자이다. 그는 심리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을 통해 실증주의와 결별하였다. 그가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유대인은 인종적 분류가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종교적 분류일 뿐이다.\n\n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독일에서 태어나 할레 대학교의 강사, 괴팅겐 대학교의 강사와 교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거쳐 은퇴 후 오히려 더욱 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각오로 연구와 강연에 매진하면서 죽는 날까지,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는 자신의 유언 그대로,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한 말 그대로 ‘철학자’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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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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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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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천황의 지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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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천황의 지위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제국 헌법의 제정으로 일본에서 헌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제국 헌법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서 언급되어 있는 천황의 지위와 권한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전자의 경우에는 천황이 통치권자이자 신성한 존재로 규정되었음에 비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다”고 규정된 것이다.\n\n일본제국 헌법 체제에서 천황의 지위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의사에 기초한 만세일계의 지위이다. 따라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으며, 천황의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는 불경죄로 의율하여 중하게 처벌한다. 또한 천황은 천황대권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모든 통치권을 총람하는 존재였다. 즉 국가의 모든 작용을 통괄하는 권한을 가진다.\n\n그에 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일본국 헌법의 천황의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 것으로, 국민주권의 원리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천황제는 절대적인 것이라거나 불가변의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국민의 총의에 기하여 가변될 수 있는 것이다. 니시다 쇼지는 이것이 이상하다면서 반대하기도 했다.\n\n## 천황의 국가원수 여부\n일본국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 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해, 천황이 일반적인 ‘국가원수’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n\n천황을 국가원수로 보는 견해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각각 국회와 내각의 지명에 근거하여 행정부의 수장인 내각총리대신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장관을 임명한다는 내용에 근거한다. 또한 “국권의 최고 기관이며,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인 국회를 소집·해산하는 등, 국정의 중요한 행위를 ‘국사행위’로 수행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또한 “전권위임장 및 대사, 공사의 신임장을 인증”하고,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 문서를 인증”하며,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 일반적으로 국가원수가 수행하는 외교상의 주요 행위를 천황이 실시하다고 정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천황이 국가원수라고 본다.\n\n일본국 정부의 공식 견해로는, ‘천황은 국가원수’라고 한 1990년 5월 14일 참의원의 내각법제국 장관 답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을 ‘나라의 상징이며, 또 일정 부분의 외교 관계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한정된 의미의 국가원수로 표현했다. 천황 플래카드 사건에서 도쿄 지방재판소는 ‘국가원수인 천황’이라고 표현하여 천황을 국가원수로 표현했다.\n\n천황을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일본국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되어,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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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의 기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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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금욕적인 모습과 달리 취미가 도박이었다. 당시 로마는 도박에 부정적이라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열리는 12월에만 도박을 허용해줬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기간에 상관없이 도박을 매우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인이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되는데 주로 주사위나 홀짝 도박을 즐겨했다고 쓰고 있다. 돈을 따려고 도박을 했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면모도 강해서 일부러 돈을 잃어주거나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n\n## 아우구스투스의 유산\n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시기에 수립된 정책들은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지속하였다. 양부로부터 이어받은 성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1400여 년간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카이사르는 여러 언어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며\n\n터키의 앙카라에서 발견된 사본의 경우, 라틴어로 되어 있는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공건물에 부착하였다. 테오도어 몸젠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금석문의 여왕”이라고 하였다.\n\n아우구스투스의 작품은 여러 편이 알려졌다. 이 중에는 시칠리아에 대한 시집 시칠리아, 〈브루투스의 카토론 반박〉, 13권에 걸쳐 기술한 자서전 등이 있다.\n\n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정책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였던 기간에 계속 사용되었고 “로마에 의한 평화”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라 칭송받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셋째 아내인 리비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지혜와 결단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게다가 그의 정책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많은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도인 로마 시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만들었으며, 지방 자치 단체들에 상주하는 장관들을 파견하였다.\n\n내전이 끝난 후, 아우구스투스는 28개 군단, 총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한다.\n\n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의 경호를 목적으로 '친위대'를 창설하였다.\n\n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언제나 공화주의자로서의 미덕과 규범을 실천하려 애썼다. 언제나 서민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보았던 그는 관대한 정책들과 과다한 지출 삭감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기원전 29년에는 25만 명의 시민에게 개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씩 지급하였고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12만 명의 퇴역병에게는 1,000세스테리우스씩을 지급하였으며, 약 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들여 자신의 병사들이 땅을 사서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n\n아우구스투스의 긴 통치 기간과, 이 기간에 로마 제국에 남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산들도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14년 당시의 젊은이들은 원수정 외의 정치 체제는 알지 못하였다.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었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동안 사실상 군주정이었던 로마에서 옛 공화정 지지자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추종자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경험과 인내심, 치밀한 전략과 정치적 통찰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조율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잘 훈련된 군대가 전선에서 주둔하는 것, 제위 계승에 대한 원칙, 황제의 자비를 털어 수도를 꾸미는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로마 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최고의 업적은 이후 2세기간 이어진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에게 매우 좋게 남았고, 이는 제국 시대의 정치적 풍조 아래 좋은 황제의 패러다임으로 남게 된다. 이후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사용하였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점차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칭호로 더 많이 사용된다.\n\n동시대인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의 수호자, 도덕 규율을 바로잡은 자, 제국을 짊어지고 갈 의무를 기꺼이 진 자로 묘사하였다.\n\n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Discourse on the Contests and Dissentions in Athens and Rome''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에 전제군주제를 도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였고 대영제국의 입헌군주정을 기원전 2세기경의 로마 공화정에 비유하였다.\n\n## 세제 확립\n아우구스투스의 세제 개혁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전 시대에는 널리 행해졌던 속주민에 대한 특별 징세를 하지 않았으며, 새로 정복한 지역의 기반을 닦고 고정 세율로 직접세를 징수하였다.\n\n또한, 세금도 민간 징수원이 징수하던 기존 방식에서, 세금 담당 공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공화정 시대의 민간 징수원들은 세금을 과다하게 걷어가며 힘을 불려나가, 점점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많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세금을 추가로 더 걷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었다. 이들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세금 납부자들에게서 부당 징수를 일삼았고, 이는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n\n직접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점과 로마 정부 형태의 변화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의 비옥한 땅을 재정원으로 쓸 수 있었다. 이집트는 원로원 계급 출신이 통치하는 대신에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 기사 계급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다. 아우구스투스와 이후의 황제는 이집트의 농경지에서 벌어들인 많은 수입을 복지 정책, 공공 정책과 군사 원정의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n\n## 8월 \n이전에는 로마의 역법에서 “여섯 번째 달”로 불리었던 달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이후부터 8월이라는 지금의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8월이 31일이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8월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7월이 똑같은 날짜 수를 가지길 원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13세기의 학자였던 사크로보스코의 요한네스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8월은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뀌기 전부터 31일이었다. 마크로비우스에 따르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뀐 것은 로마 원로원의 결정이라고 한다.\n\n## 건축\n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았고,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줬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 발언이 황제의 권력에 대한 은유라고 분석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 따르면 평화의 제단에 새겨져 있는 돋을새김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를 이룩한 것을 경축하고, 앞으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n\n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에 죽은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개인 재산까지 기부해 가며 책임지던 수도 유지·보수 업무를 정비하여야 했다.\n\n## 외모\n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n\n## 성경에서의 언급\n성경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를 실시했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n\n누가복음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 다른 복음서보다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호적령으로 인해 요셉과 마리아가 출산을 앞두고 베들레헴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신학자 정승우 선생에 의하면, 예수가 역사적 인물임을 서술하기 위한 누가복음 서술자의 역사배경 서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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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의 역사 기술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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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40년경에 쓴 역사는 서양 최초의 역사책으로 여겨진다. 전 9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항쟁 유래로부터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저술되어 있는데, 제 9권은 미완성이다.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다. 좁게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을 다루었지만 헤로도토스가 여행한 여러 지역의 문화, 풍습, 역사도 폭넓게 다루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자들의 여러 증언을 토대로 하였는데 확인할 수 없는 증언은 적으면서 사실인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썼다. 그러나 그의 역사 기술이 사실과 다르고 내용에 편향적인 시각이 들어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일례로 2세기의 작가 루키아노스는 풍자적인 요소가 강한 그의 작품 실화에서 헤로도토스를 거짓말쟁이로 비난하고 있다. 근대의 학자들 여러 명은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여행한 범위를 과장했고 정보 출처를 지어냈다고 주장하였다.\n\n그러나 새로운 고고학적, 문헌학적 발견으로 잘못이라 생각되었던 헤로도토스의 기술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여러 차례 드러나면서 역사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는 20세기 중반 이후 더 높아졌다. 이제 헤로도토스는 역사뿐만이 아니라 민족지, 인류학의 아버지로도 평가된다.\n\n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내용에는 나일강이 매년 범람하는 것이 남쪽 멀리 눈이 녹아서라는 증언이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더운 곳에 눈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또 이집트에서 만난 페니키아 뱃사람들은 아프리카를 돌아 항해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할 때 태양이 오른쪽에 떠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믿지 않은 증언들도 전달하면서 당시 지리학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이와 같이 들은 그대로의 기술이 이루어졌고, 이 기술을 제외한 여행의 범위는 북으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방인 스키타이, 동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거쳐 바빌론까지, 남으로는 오늘날의 이집트 아스완 지방인 엘레판티네, 서로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키레네 산맥까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n\n과거의 위업을 후세의 기억 속에 남긴다는 지극히 서사시적 발상하에 지리, 풍속, 역사, 삽화, 종교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항이 수록되어 있어 이것이 때때로 주제에서 이탈함으로써 보기에 따라 전체의 통일성이 결여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항을 동서간의 항쟁이라는 일관된 역사적 전체 속에 집어넣고 페르시아 전쟁도 그 한 부분으로서 파악한 데에 역사의 구성상 통일이 있고 그의 역사적 달관이 담겨 있다. 역사의 문체가 지니는 매력은 다양성과 유연성에 있다. 직설적인 묘사와 과학적 산문이라고 할 건조한 문체, 그리고 극적인 긴장감을 주는 표현 등 변화가 풍부하다. 또한 줄거리의 교묘함, 서사시적 웅대함, 줄거움을 주면서 가르치는 수완, 낭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점 등이 헤로도토스가 '산문의 호메로스'로 불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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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논리학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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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논리학**은 '논리' 및 그것과 관련한 구성과 원리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타당한 논증, 곧 추론과 증명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일반적으로 논증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판단·추리·개념 등과 관련하여 올바른 명제를 전제로 하는 '타당한 추론의 형식'에 관한 인문 과학이라 한다. 흔히 철학 한 분과로 분류하나, 형식 논리학은 수학기초론과 관련이 깊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모든 과학들이 공리들을 규명할 때 그러한 사용에서 그리고 그러한 원칙에서의 논리학의 당위적인 역할'이라는 맥락으로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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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비형식 논리학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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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형식 체계를 중심에 두지 않는 논리학을 흔히 비형식 논리학으로 부르는데, 여기서는 추리 형식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이 진리인 것 같은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의 경로나 그 형태를 연구한다. 예로부터 뛰어난 철학자들은 자기의 철학적 인식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논리학 대신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특징 있는 인식론적 논리학을 설정했다. 베이컨의 귀납적 논리학, 칸트의 선험적 논리학,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리학, 듀이의 실험적 논리학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n\n사리에 맞는 합리적인 사고로 그 내용을 올바르게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 하는 사고의 규범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데, 심리학은 사고과정 자체를 연구하고 논리학은 '올바른' 사고과정에 대해 연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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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유피테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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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유피테르**, **주피터** 또는 **요베**는 고대 로마의 종교와 로마 신화에서 하늘과 천둥의 신이다. 유피테르는 공화정과 제정 시기를 거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우세 종교가 될 때까지 로마 국교의 최고신이었다. 로마 신화에서 제2대 로마의 왕 누마 폼필리우스와 공물, 제물 같은 로마 종교의 원칙들을 세우는 걸 논의했다고 한다.\n\n유피테르의 기원은 천공신으로 추정된다. 이는 벼락이 그의 상징이며 그의 상징으로 신성시된 동물이 독수리라는것에 그 근거를 둔다. 후기 카피톨리움 3신에서는 유노, 미네르바와 함께 로마의 수호신이었다. 상징하는 나무는 참나무였다.\n\n로마인들은 유피테르를 그리스 신 제우스와 동일하게 여겼고, 라틴 문학, 로마 미술, 신화, 도상학에서의 제우스는 유피테르라는 이름으로 각색되었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로마 전승에서는 넵투누스, 플루톤의 형제로 등장하는데 각각 포세이돈과 하데스에 대응되며 각각 하늘, 바다, 지하세계라는 3개의 왕국에 거주했다. 에트루리아 신화에서는 티니아가 대응된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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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로마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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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로마인들은 유피테르가 그들에게 우월성을 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피테르를 숭배하는 데 다른 민족들보다 열심이었다. 유피테르는 \"쉬고 있는 신들과 로마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새점의 원천\"이었다.\n\n집정관들은 유피테르의 이름으로 그들의 지위에 대한 서약을 했고, 9월 유피테르 신전에서 열리는 연례 행사에서 그를 숭배했다. 유피테르의 도움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 집정관들은 금박을 입힌 뿔을 지닌 하얀 소를 그에게 제물로 바쳤다.\n\n유피테르에 대한 군주제, 주권의 연관성은 로마의 정부 체제가 바뀜에 따라 재해석되었다. 본래 로마는 왕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세워지면서, 종교적 특권도 통치 귀족 가문들인 파트리키들에게 이전됐다. 군주제에 대한 향수, affectatio regni)는 반역 행위로 여겨졌다. 군주제에 대한 열망을 품는다는 혐의를 받으면, 어떠한 자리에 있든 간에 처벌되었다. 기원전 5세기 ''개선 장군'' 카밀루스는 유피테르가 몰고 다닌다고 여겨지던 4필의 흰색 말로 이뤄진 전차 를 몰고 나서 추방을 당하였다. 침공해오는 갈리아인들에 맞서 유피테르 신전에서 방어전을 펼쳐 ''카피톨리누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르쿠스 만리우스가 왕처럼 행세한다는 혐의를 받아, 반역 혐의로 타르페이아의 바위에서 던져지며 쳐형당하였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그의 저택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어떤 귀족도 거기서 살도록 허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칙령이 내려졌다.\n\n계층 갈등 시기에 로마의 플레브스들은 정치, 종교 공직 자리를 요구하였다. 그들 최초의 농성 기간 동안에 그들은 로마에서 물러나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위협을 하였다. 그들이 로마로 돌아오기로 동의할때, 그들은 로마 국가 공동체 의 통합에 대한 상징과 보증인으로서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언덕으로 가서 언덕에 대고 맹세하였다.\n\n## 플라멘과 플라미니카 디알리스\n유피테르는 로마의 공식 대중 종교에서 각자 특정한 신들을 모셔던 15개 사제들의 콜레기움의 고위 사제들인 플라멘들 중에서 파트리키들로 이뤄진 플라멘 디알리스들이 다루었다. 이 사제들의 아내인 플라미니카 디알리카스 는 그들만의 의무를 갖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비슷하게 열리는 \"장날\"인 ''눈디나이''에 유피테르에게 숫양을 제물로 바쳤다.\n\n플라멘 디알리스는 일부 독특한 금지된 규정들의 제한을 받았으며, 그 중 몇몇은 신의 절대적 본질을에 비춰지는 것이었다.\n\n유피테르의 플라멘들의 일부 특권은 유피테르의 절대적 본질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크러슬 의자에 앉았고,\n\n## 아우구르\n''아우구레스 푸블리키'' , 아우구르들은 모든 창업식 행사에 참여한 사케르도스 무리이며, ''아우구리아'' 라고 알려진 의식 행위를 행했다. 이들은 로물루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피테르의 의지를 유일하게 해석하는 자들로 여겨지며, 로마인들이 국가 권위의 원천을 유피테르로 보았기에, 아우구르들은 로마 정부에 그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n\n## 페티알\n페티알들은 로마의 국제 문제에 대한 종교적 행정을 다루는 20명의 단체이다.\n\n페티알들의 조치는 선의의 전능한 수호자인 유피테르의 권한에 해당했다. 페티알 지위의 일부 상징들은 유피테르가 존재했다. 규석은 페티알 의식에 사용된 돌로, 그들의 성소인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 신전에 위치했다. 가끔식은 버베나로 확인됐던 성스러운 허브 는 그들의 의식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인근 성채 에서 채취됐다.\n\n## 플레브스들의 철수에서 유피테르와 종교\n계층 갈등에서 유피테르의 역할은 종교적인 로마인들에게 반영되었다. 파트리키들은 로마의 새점을 보유함으로써 꽤나 자연스럽게 전능한 신의 지지를 주장할 수 있었고, 플레브스들은 유피테르가 정의의 원천이며, 그들의 대의 명분이 정당하기에 그가 자신들의 편이라 논쟁했다.\n\n플레브스들의 첫 철수는 그들에게 짊어진 막대한 빚에 의한 것이었다. 법률 제도 넥숨 때문에 채무자들은 채권자들의 노예가 되었다. 플레브스들은 빚이 귀족들이 원한 전쟁의 비용 때문에 채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논쟁했다. 원로원이 전체 빚을 감행해달라는 독재관이자 아우구르인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재기한 제안에 응하지 않자, 플레브스들은 아니에네강에 있는 노벤툼 다리를 건너 로마에서 북북동쪽 3마일 거리에 위치한 언덕인 성산 으로 올라갔다.\n\n두 번째 철수는 귀족 행정관들과 사케르도스들에 의해 비밀을 유지되던 법률을 기록하기 위해 로마 시민들에게 임명된 데켐비리들의 횡포와 오만한 행위로 인해 발생하였다. 플레브스들의 모든 행정관들과 호민관은 자리에서 사임하였다. 이에 대한 결과로 12표법이 생겼지만, 민간 법률만 다루고 있었다. 플레브스들은 다시 한번 성산으로 올라갔다: 이 행위는 첫 번째 철수를 상기시키는 것 외에도 최고의 신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이 철수는 데벰비리들의 사임과 볼스키인과의 전쟁 중에서 그들의 지휘관을 버리고 알기두스 산 인근 그들의 야영지에서 탈영한 반란 병사들에 대한 사면으로 끝이 났다. 이 사면은 원로원에 의해 부여된 것이고 플레브스들의 새로운 호민관 후보로 여겨지던 ''폰티펙스 막시무스'' 인 퀸투스 푸리우스 또는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가 보장하였으며, 그는 아벤티노 언덕에서 지지자들을 모았다. 권력 공백기 상황에서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역할은 종교적 배경과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적 성격을 바탕으로 엄청난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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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행성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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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행성**은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가 쓴,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이다. 작곡자에게 점성술을 가르쳐 준 클리포드 백스의 제안으로 1914년에 착상하여 1916년에 작곡을 마쳤으며 1920년 10월 10일 버밍엄에서 애플비 매슈스의 지휘로 초연되었다.\n\n도미타 이사오의 신시사이저 편곡이 있다.\n\n이 중 〈화성〉은 넥스트의 Lazenca - A Space Rock Opera 앨범에 편곡돼 수록되어 있고,〈목성〉의 도입부는 MBC 뉴스데스크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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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다른 작곡가에 의한 추가 악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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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명왕성\n명왕성이 미국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에 의해 발견된 것은 홀스트의 생전이던 1930년 2월 18일이었다. 하지만 점성술에만 관심이 있었고 천문학에 대해선 딱히 관심이 없던 홀스트는 단순히 무시했고, 곡을 추가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아마도 명왕성을 작곡할 시 곡의 원래 의도가 왜곡될 염려가 있어 그렇게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명왕성'을 추가하는 작업은 홀스트가 죽고 한참 지난 1970년대부터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 시작했다. 2000년 할레 오케스트라의 위촉으로 콜린 매슈스가 〈명왕성, 새롭게 하는 자〉를 써서 이모겐 홀스트에게 헌정했다. 매슈스는 해왕성의 종결 부분을 명왕성으로 넘어가도록 고쳤다. 명왕성이 포함된 행성은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2000년 5월 11일 맨체스터에서 초연했다.\n2006년 8월 국제천문연맹이 명왕성의 분류를 행성에서 왜행성으로 바꾸면서 행성은 다시 지구를 제외한 모든 태양계의 행성을 다루는 곡이 되었다. 하지만 곡의 완성도가 어느 정도가 있어서 포함시켜 연주하거나 아니면 독립적으로 연주되는 곡이 되었다.\n\n플루트 4, 오보에 3,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4, 바순 3, 콘트라바순, 호른 6, 트럼펫 4, 트롬본 3, 튜바, 유포니움, 팀파니 2, 트라이앵글, 작은북, 탬버린, 심벌즈, 큰북, 탐탐,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실로폰, 하프 2, 오르간, 2부 여성 합창\n\n## 이외\n하우메아, 지구, 생명을 가져오는 자 세레스, 이리스, 토워드 오시리스, 마케마케, 소행성4719, 코마로브'스 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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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LaTeX의 라이선스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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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LaTeX 소프트웨어는 레이텍 프로젝트 공중 사용 허가서로 제공되는 자유 소프트웨어이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LPPL은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현재, macOS와 솔라리스 등의 유닉스, 리눅스, BSD 계열 운영체제 같은 UNIX 호환 운영 체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등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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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도널드 어빈 커누스의 어록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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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문제는 주로 매커시가 출제하였지요. 한 해는 커누스가 그 대회에 참가해서 가장 빠른 시간에 프로그래밍을 실행시킨 사람에게 주는 상과 알고리즘을 가장 빨리 실행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을 모두 휩쓸었습니다. 그는 윌버 시스템이라는 원격 일괄 시스템을 이용해 최악의 시스템에서 그것을 해 내었지요. 그는 간단하게 모든 참가자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n\n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지요.\n\n그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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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로버트 어빈 하워드가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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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로버트 어빈 하워드**는 판타지 작가이다. ‘야만인 코난’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으며, 소드 앤 소서리와 그 하위 장르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n\n하워드는 텍사스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크로스 플레인즈에서 보냈고, 얼마 동안은 인근의 브라운우드에서 살았다. 책을 좋아하는 영리한 꼬마였던 그는 권투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10대 후반에는 보디빌딩 활동을 하다 결국 아마추어 복싱을 시작했다. 그는 9살 때부터 모험 소설의 작가가 되는 것을 꿈꿨지만 23살이 될 때까지 직접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후, 나이 서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하워드는 다양한 잡지와 저널, 신문 등에 글을 게재하며 여러 장르에 능숙한 작가로 성장했다. 로버트 E. 하워드의 가장 큰 성공은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n\n1934년에 코난 소설이 거의 출판될 뻔하긴 했지만, 하워드의 이야기는 그의 생전에 정리되지 못했다. 이야기의 주된 창구는 야만인 코난이 탄생한 위어드 테일즈였다. 코난과 다른 영웅들을 바탕으로 하워드는 현재 ‘소드 앤 소서리'라 불리는 검과 마법 장르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수많은 모방자를 양산하고 또한 판타지 장르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워드는 여전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가로, 그의 대표작들은 여전히 출간되고 있으며 역대 베스트셀러 판타지 소설의 작가 중 한 명이다.\n\n로버트 E. 하워드의 자살과 이를 둘러싼 정황은 그의 정신건강에 대한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동안 결핵을 앓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어머니가 깨어날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자 부엌 창문 바깥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걸어가 운전석에 앉은 채 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다. 그는 8시간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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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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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 초기\n하워드는 1906년 1월 22일 텍사스 주 피스터에서 순회 시골 의사 아이작 모데카이 하워드 박사와 그의 아내 헤스터 제인 어빈 하워드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텍사스의 다양한 소도시와 신흥 도시를 돌아다니며 보냈다: 다크 밸리, 세미놀, 브론테, 포티트, 오런, 위치타 폴스, 배그웰, 크로스 컷, 버켓.\n로버트 E. 하워드가 어렸을 때, 부모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하워드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는 아이작 하워드가 일확천금을 좇는 투자에 손을 댐으로써 더욱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헤스터 하워드는 자신이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과 결혼했다고 믿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다투기 시작했다. 헤스터는 아이작이 자신의 아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특히 아들의 정신적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어린 시절 여러 아픈 친척들을 도우며 살았고 그 과정에서 결핵에 감염되었지만,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시와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심어주었고 매일 시를 낭송하며 아들의 집필 활동을 끊임없이 지지했다.\n\n하워드의 인생의 또 다른 경험들은 이후 그의 산문 속에 스며들게 된다. 그는 독서와 학습을 매우 좋아했지만, 학교를 답답한 곳으로 여겼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권위를 가지고 행사하는 것을 싫어했다. 불량배들과 맞서는 경험은 그에게 세상에 악과 적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육체적인 강함과 폭력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지역 의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농장과 유전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사고와 석유 호황에 따른 범죄율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수많은 부상과 폭력의 영향에 자주 노출되었다. 총격전, 린치, 불화, 인디언의 습격 등의 직접적인 이야기는 그만의 독특한 텍사스식 하드보일드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또한 스포츠, 특히 권투는 그의 가장 열정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당시 권투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고, 문화적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J. 제프리스**, 잭 존슨, 밥 피츠시몬스, 그리고 이후의 잭 뎀시는 당시 그에게 영감을 준 이름들이었고, 하워드는 폭력적이고 남성적인 투쟁의 모든 경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랐다.\n\n## 첫 글쓰기\n글쓰기에 타고난 재능, 선생님들의 격려, 그리고 왕성한 독서 활동이 하워드에게 프로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9살 때부터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바이킹이나 아랍인, 전투나 유혈사태를 중심으로 한 역사 소설이었다. 또 하워드는 훗날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미칠 작가들을 잇달아 발견했다. 잭 런던의 환생과 전생을 다룬 이야기, 특히 『별 방랑자의 『아대륙 모험 이야기』, 토머스 불핀치가 수집한 고전 신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하워드는 친구들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긴 시를 한두 번 읽은 것만으로도 쉽게 외워버리는 능력으로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n하워드가 열세 살이던 1919년, 아이작 하워드 박사는 가족을 텍사스 중부의 작은 마을 크로스 플레인즈로 이주시켰고 어린 하워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하워드의 아버지는 현금으로 집을 매수하여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같은 해, 아버지가 근처 대학에서 의학 수업을 듣는 동안 뉴올리언스의 도서관에 앉아 있던 하워드는 ‘픽트인’이라 불리는 고대 스코틀랜드의 토착 문화에 대한 얼마 없는 역사적 진실과 풍부한 전설을 다룬 책을 발견한다.\n1920년, 크로스 플레인즈 내의 베스탈 유정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크로스 플레인즈는 석유 호황을 맞이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부를 찾기 위해 마을로 몰려들었다. 새로운 사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에 따라 범죄율도 증가했다. 순식간에 크로스 플레인즈의 인구는 1,500명에서 10,000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났고, 과잉 상태에 다다랐다. 혼잡한 교통으로 비포장도로가 파괴되고, 범죄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크로스 플레인즈는 새롭게 얻은 부를 새로운 학교, 얼음 공장, 새로운 호텔 등의 공공시설을 개선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하워드는 이러한 호황을 싫어했고,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는 어린 시절 잦은 이사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 호황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은 석유 호황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서 더욱 악화되었다.열다섯 살에 하워드는 처음으로 펄프 잡지를 접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어드벤처' 잡지와 그곳의 인기 작가였던 탈버트 먼디, 해럴드 램의 글을 접한 하워드는 이후 몇 년 동안 자신의 작품에 등장할 다양한 캐릭터들을 창작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워드는 곧 어드벤처, '아르고시' 같은 잡지사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절당하는 일이 잦았고,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스승이나 이렇게 글을 써야 한다는 어떤 지침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독학하며 체계적으로 시장을 조사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이야기와 스타일을 조정했다.\n\n1922년 가을, 하워드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는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마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인근 도시 브라운우드의 하숙집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하워드는 처음으로 스포츠와 역사뿐만 아니라, 작문이나 시에도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인 테비스 클라이드 스미스와 트루엣 빈슨은 하워드만의 보헤미안적이고 문학적인 인생관을 공유했으며, 함께 아마추어 논문이나 잡지를 쓰고, 시, 또는 철학과 삶에 대한 실존주의적 사고가 담긴 긴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집필 활동을 격려했다. 또한 빈슨을 통해 하워드는 브라운우드 고등학교의 신문인 '더 태틀러'를 소개받았는데, 그곳에서 하워드의 글이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1922년 12월호에는 하워드의 **「**황금빛 희망 크리스마스**」,** **「**서쪽은 서쪽이다**」** 라는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각각 금상과 은상을 수상했다.\n\n1923년 5월, 하워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크로스 플레인즈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매일 참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고, 역기를 들고, 샌드백을 치거나 뛰는 등 자신이 계획한 운동 프로그램에 꾸준히 착수했고, 마침내 10대 시절의 마른 모습에서 근육질의 건장한 체격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n\n## 전문 작가\n하워드는 크로스 플레인즈 부근에서 온갖 잡일을 하며 10대 후반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그런 비정규적인 생산 활동의 모든 것을 싫어했다. 그는 1924년에 하워드 페인 대학교에서 속기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브라운우드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대신 친구 린지 타이슨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하워드가 대학에서 듣고 싶었던 것은 문학 수업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럴 수 없었고, 그 이유에 대해 전기 작가인 마크 핀은 그의 아버지가 비직업적이고 비생산적인 교육에 학비를 부담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그해 추수감사절 주간, 몇 년간의 거절과 수락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창과 송곳니**」**라는 원시인에 관한 짧은 소설을 팔아 16달러의 수입을 얻고, 자신을 ‘위어드 테일즈’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데 성공한다.\n\n작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 하워드는 학기 말에 대학을 중퇴하고 크로스 플레인즈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또 다른 단편소설 **「**하이에나**」**가 다시 한 번 위어드 테일즈에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시기에 하워드는 자신의 첫 저서를 집필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었는데, 잭 런던의 『마틴 에덴』을 모티브로 한 소설 『참나무와 거친 모래』는 자신이 모방한 것만큼이나 자유롭고 자전적인 형식의 책이었다. 소설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그마저도 저자의 사후에 출판되었지만, 그 속에 담긴 하워드 개인에 대한 사적인 정보로 인해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페르소나는 '스티브 코스티건'이라는 인물로, 로버트 E. 하워드는 훗날 이 이름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소설 『참나무와 거친 모래』 는 이미 1928년에 완성되었지만, 로버트 E. 하워드의 죽음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출간되었다.\n\n이 시기 하워드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위어드 테일즈가 대신 원고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지역 신문인 크로스 플레인즈 리뷰에서 칼럼당 5달러를 받고 석유 관련 기사를 쓰는 일을 맡게 되었다. 1925년 7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인쇄된 자신의 기사에 대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해 신문사에서 해고되었다. 하워드는 다시 한 달간 우체국에서 일한 뒤 저임금을 사유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음 직장인 ‘크로스 플레인즈 천연가스 회사’ 역시 하워드가 상사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석유 회사에서 속기 일을 하기 전까지 한동안 측량사 밑에서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n\n하워드는 친구 테비스 클라이드 스미스와 함께 시 쓰기에 몰두하여 적어도 수백 편의 시를 썼고, 또 수십 편의 시를 위어드 테일즈와 시와 관련된 여러 저널에 발표했다. 그러나 부진한 성적과 더불어 상당수의 출판사가 자신의 작품을 꺼려하자, 결국 시를 쓰는 것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치라고 판단, 1930년 이후에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고 그 대신 단편소설이나 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시장에 전념했다. 그러나 이 시절의 수련 덕분에 하워드의 이야기는 점점 더 최면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산문시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이는 당시 대부분의 펄프 픽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n\n이후 위어드 테일즈에 하워드의 글이 실리는 일은 간헐적이었지만 동시에 고무적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워드는 이 잡지의 단골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표지를 장식한 작품은 늑대인간에 관한 단편소설 **「**늑대머리**」**로, 그가 겨우 스무 살이었을 때 출판된 작품이다. 그러나 위어드 테일즈에 게재된 이 소설을 읽고 스스로의 글에 실망한 하워드는, 속기사 일을 그만두고 로버트슨의 약국에서 일하게 된다. 하워드는 이곳에서 주급 80달러를 받으며 탄산음료 판매 책임자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성격상 그 직업 자체를 싫어했고, 매일 장시간 근무를 소화해야했던 탓에 결국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워드는 약국에서 친해진 유전 노동자가 소개해 준 ‘니브 얼음집’이라는 곳에서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고, 종종 권투 경기에 참가했다. 이 경기들은 곧 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권투와 글쓰기는 그의 좌절감과 분노를 해소하는 출구로써 작용했다.\n\n## 소드 앤 소서리\n1926년 8월, 하워드는 고된 약국 일을 그만두고 9월에 브라운우드로 돌아와 회계 전공을 이수했다. 사실 8월부터 하워드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그림자 왕국**」**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탄생하는 〈코난 사가〉의 전신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또 대학에 있는 동안 하워드는 '더 옐로우 재킷'이라는 학교 신문에 글을 올리기도 했는데, 이 신문에 실린 단편소설 중 하나는 **「**큐피드 vs. 폴룩스**」**라는 코미디로, 현존하는 하워드의 권투 소설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 유쾌한 단편소설은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며, 하워드와 그의 친구인 린지 타이슨이 시합을 위해 훈련하는 과정을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담고 있는 전형적인 허풍담이다. 이 소설과 그에 사용된 여러가지 요소들은 향후 그의 문학적인 미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n\n1927년 5월, 홍역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하워드는 재수강 후 시험에 합격했다. 8월에 있을 졸업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기타 사정으로 인해 미루고 있던 작문 활동을 재개한다. 개중에는 **「**그림자 왕국**」**의 재집필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고, 8월에 글을 완성한 하워드는 9월이 되자 위어드 테일즈에 원고를 제출한다. 이 소설은 애드거 앨런 포, A. 메리트, H. P. 러브크래프트 등의 유명 작가들이 정의한 기묘한 이야기’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을 아우르는 실험작으로, 판타지와 공포, 신화 등의 요소를 사극 로맨스, 액션, 검술 등의 장르와 혼합하여 결과적으론 ‘검과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결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야만인 코난의 전신인 쿨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단편소설은 1929년 8월에 위어드 테일즈에 게재되어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찬사를 받았다. 편집자 팬스워드 라이트는 100달러를 주고 **「**그림자 왕국**」**의 판권을 사들였는데, 이는 당시 하워드가 작품 하나로 번 가장 많은 금액이었다. 이후 몇 편의 쿨 관련 작품이 더 발표되었지만, 단 두 편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가 거절당했고 결국 하워드는 이 시리즈를 계속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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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야만인 코난의 영화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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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최초로 영화화된 것은 1982년에 만들어진 ''야만인 코난''이다. 올리버 스톤과 존 밀리어스가 각본을 썼으며, 존 밀리어스가 감독을 맡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코난 사가의 여러 이야기를 조합했고,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주인공 코난의 역할을 맡았다. 1984년에는 속편격인 ''파괴자 코난''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슈왈츠제너가가 마찬가지로 주인공 코난 역을 했다. 슈왈츠제너거는 1985년에 로버트 하워드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레드 소냐''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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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TeX의 구조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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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텍과 주변 패키지들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조의 밑에서부터 엔진-포맷-클래스 순으로 생각하면 쉽다.\n우선, 커누스 교수가 개발한 TeX 엔진은 그 자체로 사용하기에는 TeX은 단순한 명령어들을 자주 사용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에 이를 보완하여 레슬리 램포트가 TeX 위에서 구동하는 매크로방식의 포맷 LaTeX을 만들었다.\n\n이러한 포맷 중 수식편집에 강력한 기능을 가진 것에는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가 수학 논문 조판에 필요한 기능을 담아 만든 AMSTeX이 있다.\n\n이런 포맷을 사용하여 텍 문서를 작성할 경우 각 포맷마다 요구하는 형식이나 조건들을 선언해 주어야 하는데, 이를 간편하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클래스\"이다. 이중 한글사용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Memoir 클래스, 그리고 Memoir 위에서 구동하며 이를 더 편하게 쓸 수 있게 해주는 클래스 위의 클래스로서 Oblivoir 클래스가 있다. 또한,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쉽게 만들어 주는 beamer 클래스도 널리 사용된다.\n\n이러한 것들을 이용해 문서를 만들려면 먼저 텍스트 파일 에디터를 이용, 텍스트 문서에다 위에 열거한 포맷과 클래스를 선언하여 이를 쓸 것이라고 지정해 주고, 그의 규칙에 맞게 텍 코드에 따라 문서를 작성해서 컴파일 하면 pdf 등 최종출력본 문서를 얻게 된다.\n\n그리고 이런 도구들과 이런 도구의 추가 설치 및 업데이트 한데 묶어서 배포하는 것이 ko.TeX 패키지 들이다.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 2012년까지는 한글 TeX 사용자그룹 단순히 TeXlive를 다운받아 사용하더라도 한글 텍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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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경부고속도로의 옛 경부고속도로 구간을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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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1990년대 대대적으로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대전 ~ 대구 구간의 선형 개량 및 일부 확장 공사로 인해 대전 ~ 영동 구간에는 옛 경부고속도로 구간들이 많이 남아있으며, 대전광역시와 옥천군 구간에 있는 도로들은 일반도로로 활용 중이다. 구 경부고속도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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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울릉군의 행정 구역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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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울릉군의 행정 구역은 1읍, 2면, 1출장소가 설치되어 있고, 면적은 73.33㎢이다. 2022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8,996 명, 5,479 가구이고, 전체 인구의 70.8%가 울릉읍에 거주하고 있다. 남녀의 성비는 1.24:1인데, 인천광역시 옹진군 다음으로 남초 현상이 심하다. 울릉군의 주민등록 인구는 1974년에 2만9810 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후 계속 감소하여 2017년 11월 이후로는 1만 명 아래로 줄어든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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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울릉도의 지리를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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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울릉도는 독도와 함께 신생대 제3기에서 제4기 사이에 해저로부터 솟아난 해산이며, 섬 부분은 산의 봉우리 부근이다. 신생대 제3기와 제4기에 있었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종상화산의 정상부로, 조면암·안산암·현무암으로구성되어 있다.\n\n섬 중앙에는 성인봉이 있다. 섬의 북부에는 유일한 평지인 나리 분지가 있다. 나리 분지는 화산의 분화구에 생긴 칼데라로 천지나 백록담처럼 호수가 만들어졌으나 이후 물은 모두 배수되고 호수 바닥에 돌덩이과 흙먼지가 차곡차곡 쌓인 토양이 나리 분지를 형성하였다. 울릉군은 주도인 울릉도 외에도 부속 도인 관음도, 죽도 및 여러 개의 암도를 동반하고 있다.\n식물군으로는 너도밤나무·섬잣나무·솔송나무 등 650여 종이, 동물군으로는 흑비둘기 등 50여 종의 조류, 340여 종의 곤충류가 서식하고 있다.\n\n2002년 경상북도는 환경부에 ‘울릉도·독도 해상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n\n## 산지\n백두화 산맥이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동해상에 울릉도를 솟게 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동남 해상에 독도를 비롯한 많은 화산을 분출시켰다. 울릉도 중앙부에는 주봉인 성인봉이 솟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미륵산·초봉·형제봉·향목령, 동쪽으로는 관모봉·망향봉 등이 잇따라 있어 지붕을 이룬다.\n\n성인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가두봉, 동북으로 두루봉에 이르는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고, 산맥 사이에는 깊은 침식곡이 발달하여 자연적인 행정 경계를 이룬다. 섬의 북서부 사면에 있는 나리분지는 동남부·서남부가 높이 500 m 안팎의 단애에 둘러싸이고 북부가 200 m 이하의 낮은 산지로 막혀 있는 울릉도의 유일한 평야이다.\n\n이 분지는 성인봉의 칼데라 화구가 삼각형 모양으로 함몰해 형성된 것이다. 그 화구에는 2차로 분출된 화산이 중앙화구인 알봉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이중화산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성인봉을 비롯한 동남부와 서남부의 높은 단애들은 이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한다.\n\n## 해안선\n울릉군의 근해는 동한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조경수역이므로 회유성 어족이 모여들어 좋은 어장을 이룬다. 그러나 길이 56.5 km의 해안선은 대부분 단조롭고 높은 절벽을 이루며, 특히 서남과 동남 해안은 90m 높이의 절벽으로 천연의 양항 발달이 어렵다.\n\n## 기후\n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연평균 강수량이 1480 mm 정도이며, 연 평균 기온은 12.7°C, 8월 평균 기온은 23.8°C, 1월 평균 기온은 1.7°C이다. 연평균 풍속은 4.0m/s로 동해상에 고기압이 발달하는 늦봄과 장마전선이 형성되는 초여름에 북동풍이 우세하고,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주로 발생한다. 특히 울릉도는 대한민국의 다설지역으로 연평균 강설 일수가 55.9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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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그리스 신화의 신화 역사의 개괄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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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그리스 신화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문화의 발전에 적응하고 변화해왔으며, 이러한 변화에는 전체적인 것과 더불어 무언의 가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그리스 신화의 문학 형태는 대부분이 점진적인 변화를 거친 것으로, 길버트 커스버트슨의 주장처럼 그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다.\n\n농업에 종사하였던 발칸반도의 초기 거주자들은 애니미즘 사상을 통해 자연의 모든 것에 영혼을 부여하였고, 사람의 형태로 가정된 이러한 영혼들은 지역 신화에서 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n\n고대 중반 이후에는 남신과 남성 영웅 간의 관계에 대한 신화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기원전 630년 경에 확산되었다고 여겨지는 교육적 동성애의 동시적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기원전 5세기가 끝날 무렵, 시인들은 아레스를 제외한 모든 중요한 신과 많은 전설적 인물에게 적어도 한 명의 에로메노스를 정해두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유행에 맞추어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의 이야기를 각색하였으며, 초기 로마 제국의 문학 신화 수집가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n\n일련의 역사적 이야기를 만들어낸 서사시의 업적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감각의 신화적 연대기로 발전하였고, 그리스 신화는 세계와 인간의 발전 모습 또한 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내용에서 드러나는 자기 모순적 서술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 구성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연대는 파악할 수 있다. 신화에서 설명하는 \"세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세 시대, 또는 네 시대로 나눌 수 있다.\n\n신들의 시대가 동시대의 신화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온 반면에, 고대와 고전 고대의 그리스 작가들은 영웅의 시대를 더 선호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설명한 후,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업적에 대한 기록과 연대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서, 영웅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신통기와 호메로스 찬가의 규모와 유행을 위축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영향으로 \"영웅 숭배\" 문화는 종교 생활의 개혁을 가져왔고, 죽음의 세계에서 신들의 세계를, 올림피안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분리하여 표현하였다.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인간의 시대를 금, 은, 청동, 철의 네 시대로 설명하였다.\n\n## 신들의 시대\n\n### 우주 생성론과 우주론\n\"근원 신화\" 또는 \"창조 신화\"는 인간의 용어로 우주를 이해하며,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를 말한다.)는 우라노스를 거세시키고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누이 레아를 자신의 배우자로 삼고, 다른 형제 티탄들을 지배층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n\n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립 주제는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들 제우스에게 적대를 받으며 되풀이되었다. 아버지를 배반하였던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 또한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레아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빼앗아 삼켜버렸다. 이것을 증오하던 레아는 마지막으로 낳았던 아들 제우스를 숨기고 강보에 싼 바위를 대신 주어 크로노스가 삼키도록 하였다. 성장한 제우스는 크로노스에게 약이 든 음료를 마시게 하여 구토를 하게 만들었고, 크로노스의 위장에 있던 레아의 다른 자녀들과 바위가 모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위를 차지하고자 크로노스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벌였다. 막바지에 이르러 키클롭스의 도움으로 제우스와 형제들은 승리하게 되었고, 패배한 크로노스와 티탄들은 내쫓겨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었다.\n\n초기 그리스인들은 시에 대하여 신통기를 원형적인 시 장르—원형적 미토스—로 여겼으며, 내용 대부분에 마법적인 힘이 깃들여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원형 시인 오르페우스 또한 신통기를 읊는 원형적 가수였는데,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카에서는 바다를 잠재우거나 폭풍을 일으켰으며, 하데스로 하강하여 지하세계 신들의 냉혹한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였다. 〈헤르메스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 헤르메스가 서정시를 고안해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부른 노래도 신들의 탄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 의식과 신앙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되었기 때문에, 종교의 신앙은 유지된 반면,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한 이러한 문화의 종류의 보고는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후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면서, 일부만이 종교 의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문헌에서 이러한 의식에 대한 언급을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양상은 소실된 직접적인 문헌과 달리 글의 방향이 너무 명료하고 의도적인 것에 불과하다.\n\n도기와 종교적 예술품에 묘사된 장면들은 다양한 신화와 전설로 해석되었으며, 잘못 해석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러한 작품의 일부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의 인용과 최근에 발견된 파피루스 조각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파피루스 조각 중의 하나인 데르베니 파피루스는 오르페우스 신앙의 천지 창조 시가 최소 기원전 5세기부터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었다.\n\n그리스 세계에서는 최초의 철학적 우주론자들이 반대하거나 성립해온 대중적인 신화적 개념들이 한동안 존재했었다. 이러한 개념들의 일부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시에서는 대지가 오케아노스의 강 위에 떠있는 평평한 원판이며, 태양, 달, 별이 있는 반구형의 하늘에 둘러싸여 있다고 설명하였다. 태양은 전차를 몰면서 하늘을 가로질렀고, 밤에는 황금 사발을 타고 대지 주위를 항해하였다. 태양, 대지, 하늘, 강, 바람은 발원의 대상이 되거나 입증 선언에서 이름이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자연의 균열은 보통 하데스의 지하 세계이자 그의 전신인 죽음의 세계로 가는 입구로 생각하였다. 다른 문화권의 영향은 언제나 새로운 주제를 창출해내었다.\n\n### 그리스 판테온\n고전 시대 신화에서는 티탄들의 패배 이후, 신들의 새로운 판테온이 세워졌다고 설명한다. 주요한 그리스 신들 중에서 올림피안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제우스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신들을 말한다. 이들의 인원이 열두 명으로 제한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개념으로 보인다.\n\n그리스 신화를 구성하는 방대한 신화와 전설에서 그리스인들이 생각해낸 신들은 본질로 봤을 때는 물질적이지만 이상적인 신체를 가졌다고 묘사된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그리스의 신인 동형론의 특징에 대하여 \"그리스 신들은 인간이며,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라는 정의를 내렸다.\n\n각 신들은 서로 다른 관심사를 추구하며 자신의 계보를 이어가며, 특유의 개성에 의해 좌우되는 전문적인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묘사들은 다른 것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 고대 지역 전승의 다양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시나 기원, 의식에서는 신들을 호명할 때 이름과 수식어를 결합하여 부르며, 다른 명시와는 다른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들을 식별한다. 수식어만을 사용하여 부르는 것은 신의 특정하고 부분적인 모습만을 식별하는 것으로 보이며,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고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n\n대부분의 신들은 삶의 특정한 모습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하데스는 죽음의 신, 아테나는 지혜와 용기의 여신이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같은 일부 신들은 복잡한 특성을 가지며 다양한 영역을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반면 헤스티아와 헬리오스처럼 좀 더 전형적인 화신의 성향을 가진 신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주요 신전들은 거대 범그리스 신앙의 중점이 되는 제한된 숫자의 신들만을 헌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개별 종교와 마을에서는 비주류 신들을 숭배하며 의식을 치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많은 도시에서 또한 잘 알려진 신들을 독특한 지역 의식과 함께 찬양하였으며, 다른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화를 그들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 숭배가 부가되기도 하였다.\n\n## 신들과 인간의 시대\n신들만이 살아갈 때의 시대와 인간의 문제에 신성한 간섭이 제한된 시대를 이어주는 것은 신과 인간이 함께 활동하였던 과도기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세계의 초기 시절로, 신과 인간의 무리들이 나중의 시대와 비교할 때 서로 더 자유롭게 어울렸던 시대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이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려졌으며, 여기서는 주로 사랑 이야기와 징벌 이야기의 두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n\n사랑 이야기는 주로 근친 상간, 또는 남자 신이 인간 여자를 유혹하거나 강간하여 영웅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는 피해야할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데, 상호 합의의 관계에서도 해피 엔딩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는 드물다. 여자 신이 인간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경우도 드물게 있는데,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는 여신이 안키세스와 동침하여 아이네이아스를 낳았다고 이야기한다.\n\n두 번째 유형은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쳤을 때, 탄탈로스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제우스의 식탁에서 훔쳐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신들의 비밀을 누설할 때, 프로메테우스나 리카온이 제물을 날조할 때, 데메테르가 트립톨레모스에게 농업을 전수할 때, 마르시아스가 아울로스를 만들어 아폴론과 음악 경연을 펼칠 때와 같이 어떤 의미 있는 문화적 아티팩트의 전유나 발명을 포함하고 있다. 이안 모리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신들과 인간의 역사 사이의 장소\"로 간주하였다.\n\n비슷한 주제가 반영된 오래된 설화를 모티브로 한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n\n## 영웅의 시대\n그리스 신화에서는 영웅들이 살았던 시대를 영웅 시대로 부른다.\n\n영웅 숭배가 등장한 이후, 영웅은 신만이 차지하였던 신성한 영역에 가세하며 맹세와 기원의 대상으로서 그 이름이 신과 함께 언급되었다.\n\n영웅 시대의 서막은 헤라클레스의 기념비적인 모험들을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또한, 영웅 시대에는 장대한 군사 사건인 아르고나우타이의 원정, 테바이권과 트로이아 전쟁도 포함된다.\n\n### 헤라클레스와 헤라클레이다이\n일부 철학자들은 헤라클레스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신화가 아르고스 왕국의 종속 국가 지도자와 같은 실존 인물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n\n헤라클레스는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신화 및 숭배에도 등장하며, 로마인이 쓰던 라틴어 감탄사 \"mehercule\"은 그리스어인 \"Herakleis\"에서 유래한 것이었다.\n\n헤라클레스는 도리스 왕의 시조로 공식 지정되어 높은 사회적 위신을 이루었다. 이것은 도리스인이 펠로폰네소스로 이주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스 부족의 이름이기도 한 영웅 힐로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이자 헤라클레이다이의 한 명이 되었다. 헤라클레이다이는 미케네와 스파르타, 아르고스의 펠로폰네소스 왕국을 정복하였으며, 전설에 입각한 주장에 따르면 조상 대대로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의 지배가 시작된 것을 종종 \"도리스인의 침입\"이라고도 부른다. 리디아인과 후기 마케도니아 왕들 또한 같은 계급의 지배자로서 헤라클레이다이가 되었다.\n\n초기 세대의 다른 영웅들은 페르세우스, 데우칼리온, 테세우스, 벨레로폰 등이 있으며, 이들은 헤라클레스와 공통적으로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행적은 헤라클레스처럼 혼자서 해낸, 환상적인 것들로, 동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키마이라와 메두사같은 괴물을 처치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벨레로폰의 모험은 평범한 형태로,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모험과 유사하다. 상상으로 빚어낸 영웅의 최후는 초기 영웅 전설에서 반복되는 주제였으며, 페르세우스와 벨레로폰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n\n### 아르고나우타이\n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의 아르고나우티카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헬레니즘 서사시로써, 이아손과 아르고나우타이가 황금 양모를 찾기 위해 신화 상의 지역인 콜키스로 항해를 떠나는 신화를 다루고 있다.\n\n아르고나우타이는 아폴로니우스가 기원전 3세기가 되어서야 쓴 서사시지만, 그 이야기 구성은 오디세이아보다 먼저 존재하였으며, 이아손의 공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n\n### 아트레우스 왕가와 테바이권\n아르고 원정과 트로이아 전쟁 사이에는 주로 잔혹한 범죄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세대가 있다. 여기에는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가 아르고스에서 벌인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아트레우스 가문의 신화 뒤에는 권력 이양과 주권을 계승하는 방법에 얽힌 문제가 드러나있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형제는 미케네의 권력 이양의 비극의 주역으로 출연하며, 그들의 자손들도 이것을 반복한다.\n\n테바이권은 주로 도시의 창설자인 카드모스와 연관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후반에는 테바이에서 일어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사건을 중점으로 다룬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결국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와 에피고노이의 손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며 끝을 맺게 된다.\n\n### 트로이아 전쟁과 여파\n그리스 신화는 그리스와 트로이아 간의 트로이아 전쟁과 그 결과에서 절정을 이룬다. 호메로스 작품에서는 주된 줄거리가 이미 충분한 형태와 요지를 갖추었으며, 개별적인 주제의 경우에는 그 후에 그리스 연극과 같은 매체에서 더욱 자세해졌다. 트로이아 전쟁은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로 로마 문화에서 굉장한 관심을 이끌어내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트로이아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아를 떠나 방랑하던 중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가 된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고 전하는데, 베르길리우스가 이후에 아이네이스라는 책으로 자세히 다루었다. 마지막에 와서는 딕티스 크레텐시스, 다레스 프리기누스라는 이름의 저자가 썼다는 허위 연대기 두 권이 라틴어로 쓰여져 전해 내려온다.\n\n서사시 모음인 트로이아권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에리스와 칼리스티의 황금 사과, 파리스의 심판, 헬레네 납치, 아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이피게니아 이야기로 시작한다. 헬레네를 되찾고자 그리스는 메넬라오스의 형제이자 미케네, 또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의 지휘 아래 거대한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트로이아는 헬레네를 돌려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전쟁이 일어난지 10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일리아스에서는 아가멤논과 그리스의 뛰어난 전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반목,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와 프리아모스의 장남 헥토르의 전투에서 빚어지는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다. 헥토르의 죽음 이후 트로이아 진영에는 동맹 관계인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 에피오티아의 왕이자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이 가세하였다.\n\n트로이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주제를 제공하였으며, 그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 트로이아권에서 유래한 주제가 이같은 예술적 선호를 받은 사실은 이것이 고대 그리스 문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동일한 신화적 연대기 또한 후대 유럽 문학 작품의 일련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서,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트로이아 중세 유럽 작가는 트로이아 전설에서 영웅과 낭만적 이야기의 풍부한 원천과 함께, 이것이 그 시대에 맞게 궁정풍의 기사적인 전형으로 각색하기 쉬운 구조를 갖췄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누아 드 셍트 모르, 엑세터의 조셉과 같은 12세기 작가들은 전쟁을 묘사하면서 딕티스와 다레스의 이야기를 각색하였다. 이들은 호라티우스의 조언과 베르길리우스의 전례를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말하는 대신에 트로이아의 시를 다시 쓴 것이다.\n\n트로이아 전쟁에 등장하는 유명한 영웅들은 다음과 같다.\n\n''트로이아 진영:''\n\n''그리스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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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1452년 4월15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n\n2007년 11월에 네이처 지가 선정한 인류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차지했다. 네이처는 과학 전문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과학자를 1위에 뽑을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으며 2위는 세익스피어였고,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간신히 6위를 차지했다. 르네상스형 만능인 다빈치가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융합형 인재로 평가된 것이다. 그는 평생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을 끓임없이 시도하였다.\n\n그의 여러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이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매우 유명한 그림이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세기의 명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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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예술 세계 입문\n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n\n## 화가 조합 등록\n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n\n## 제1 피렌체 시대\n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n\n## 제1 밀라노 시대\n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n\n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와 〈최후의 만찬〉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이라고도 불렸다.\n\n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n\n## 제2 피렌체 시대\n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n\n## 앙부아즈 시대\n16세기 초, 왕위에 오른 ‘프랑스와 1세’는 선대의 프랑스 왕들 처럼 이탈리아 정복을 꿈꾸며 밀라노를 침공한다.야만 수준의 프랑스 생활을 하다가, 밀라노를 중심으로 발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는단다. 당시,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팽 당하여, 실업자 수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국빈으로 초청하였다.\n\n### 3년간의 로마 체류\n1513년 10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간 피렌체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한해전인 1512년 9월에 교황 율리오 2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 가문이 공화정 정부를 와해 시키고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한 상태였다.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맡았고 그의 형인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어 로마에 있었다.\n\n다빈치는 새로운 통치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교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면서 1513년 10월에 함께 로마로 이주하였다. 로마에서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계속 받으며 생활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꼬여만 갔다. 1515년에 들어서면서 다빈치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로마를 떠나길 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n\n### 새로운 후원자 물색\n1515년 1월,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그해 9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한후 밀라노를 점령하였다. 이후 7년 넘게 지속되어온 캉브레 동맹전쟁을 종식 시키기 위해서 교황을 만나려고 이탈리아 볼로냐로 향했다. 같은해 12월 19일, 종전협약을 위해 교황 레오 10세와 회동한 자리에서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다. 선왕 루이 12세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 1세는 그곳에서 그를 프랑스로 초청하였다.\n\n### 프랑스 이주\n1516년 3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망하였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인 레오 10세와의 사이가 소원하던차에 후원자마저 사망하자 더 이상 로마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다빈치는 프랑스 이주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던것으로 보인다. 그는 1516년 여름, 제자 프란세스코 멜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향했다.\n\n프랑수아 1세는 가끔 찾아왔고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빈치는 왕을 위해 호화로운 연회를 준비하기도 했다. 또한 로모랑탱에 큰 성을 건축한후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다빈치는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를 설계하였으며 수학 실험과 해부학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n\n## 사망\n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지자 소일거리를 하는 시간이 증가하였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듯, 유언장을 작성하였다.\n\n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에 프랑스 클로 뤼세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n\n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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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율리우스력**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해 기원전 45년부터 시행한 양력 역법이다. 율리우스력 1년은 365일 또는 366일이다.\n\n기원전 46년 이전까지 고대 로마에서는 태음력을 사용하였으며, 점차 계절 변화를 고려해 태음력과 태양력을 섞어서 년과 월을 계산하였다. 이에 따라 특히 달을 계산하는 데 적지 않은 혼란과 계산 착오가 생겼으며, 이러한 착오는 제사장이 임의로 수정하였다.\n\n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채택한 달력은 태양력을 기준으로 2월을 제외한 달은 모두 30일 또는 31일로 정함으로써 이전에 있던 번거로움을 한꺼번에 해소하였다.\n\n율리우스력은 4년마다 2월 29일을 추가하는 윤년을 두어 율리우스력에서 평균 한 해 길이는 365.25일이다. 이는 365.2422일인 평균 태양년보다 0.0078일이 길어서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났기 때문에, 1582년부터 더 정확한 그레고리력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현재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 차이는 13일, 그레고리력 1월 14일은 율리우스력으로 1월 1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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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동방 정교회의 교회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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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그레고리력을 교회력으로 채택하고 있는 서방 교회와 달리 동방 교회 계열 특히 동방정교회는 일상 활동에서는 국가에서 정한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나, 예배와 예전을 명시한 교회력에서는 보편교회 시절부터 사용한 율리우스력을 따른다. 동방 정교회의 성탄절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로, 이는 그레고리력으로 1월 7일이다. 동방 정교회는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로 취급되는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키며, 그레고리력의 12월 25일은 성탄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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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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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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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작품 세계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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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n\n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 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n\n1887년에 쓰여진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n\n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을 확립했다.\n\n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n\n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n\n체호프의 희곡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된 해석이다. 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n\n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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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미토콘드리아의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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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미토콘드리아의 기본적인 기능은 유기물질을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 형태인 ATP로 전환하는 것이다.\n\n미토콘드리아의 일부 기능은 특정한 세포에서만 수행된다. 예를 들어 간세포의 미토콘드리아는 단백질 대사의 부산물인 암모니아를 해독하는 효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의 변이는 여러 가지 미토콘드리아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n\n## 에너지 전환\n미토콘드리아의 주 기능은 ATP의 생산으로 해당과정의 주생산물인 피루브산과 NADH 대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거나 또는 지방산의 베타산화 과정에서 얻어진다. ATP의 생성은 세포의 유형이나 산소의 존재유무에 따라 2 가지 방법이 있다.\n\n### TCA회로\n해당과정에서 생성된 피루브산 분자는 능동수송에 의해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거쳐 기질로 들어간다. 기질에 들어간 피루브산은 coenzyme A에 결합해 acetyl CoA를 생성하고 생성된 acetyl CoA는 TCA회로로 들어가게 된다. 1개의 피루브산에 의해 3개의 NADH와 1개의 FADH2가 생성되어 전자전달계에 관여하게 된다. 미토콘드리아 내막에 붙어있는 숙신산 탈수소효소를 제외하고 TCA회로에 관여하는 모든 효소는 미토콘드리아 기질에 녹아 있다.\n한편 지방산은 베타산화를 통해 지방산이 미토콘드리아에서 연속적으로 산화하는 현상으로 이러한 단계를 거쳐 에너지를 획득할 수 있다.\n\n### 화학삼투와 산화적 인산화\nTCA회로에서 반응후 생성된 NADH와 FADH을 ATP로 합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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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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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란 문자 그대로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를 한데 묶어서 쓰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처음 독일의 고전 문헌학자 헤르만 딜스가 이들 철학자의 단편들을 한데 모아 엮은 책의 제목에서 비롯된다. 그 뒤,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독일어를 직역하여 그대로 쓰고 있으며, 오늘날 서양 철학사에서 굳어진 낱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흔히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하며, 또는 그들이 태어난 지방의 이름을 따서 이오니아, 엘레아 철학자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n\n소크라테스 이전 사상에 대한 중요한 분석들은 그레고리 블라스토스, 조너선 번스, 고든 클라크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에 의해 다루어졌다.\n\n그들 대부분은 중요한 문헌들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그 문헌들이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후대의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의해 인용되었던 것들과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들뿐이다.\n\n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그들 주위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신화적 해석들을 거부했으며, 대신 좀 더 이성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n\n일부는 나중에 수학적, 과학적 그리고 철학적 연구의 기초가 되는 문제들과 역설들을 정의하는 데 집중했다. 물론, 초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우주론은 근대 과학에서 기초된 관점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내놓은 대답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물었던 질문들은 이후 철학자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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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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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헤라클레이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이른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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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중심 사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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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하다. 그 어떤 것도 안정되거나 머물러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성, 변화\"를 중요시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n\n그는 \"이 세계는 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인간이 만든 것 또한 아니다. 언제나 살아 있는 불로서 정해진 만큼 연소되고 정해진 만큼 꺼지면서 언제나 있었고 또 있으며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라면서 세계의 원질을 불에 비유하였다. 또한 \"만물은 움직이고 있어서 무릇 모든 것이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도 두번 다시 같은 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만물이 유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도 악도 하나인 것이다. 위로 향하는 길이나 아래로 가는 길도 다 같이 하나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생과 사, 각성과 수면, 젊음과 늙음의 양상도 모두 같은 것이다. 이것이 전화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전화하여 이것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생성의 원리로서 \"대립\" 또는 \"다툼\"을 제시하였다. 그는 \"여기에 말해 둔 것은 항상 그대로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비로소 그것이 들려와도 들리지 않던 전과 다름이 없다. 만물의 생성이 여기에 말해 둔 대로 행해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런 범례를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말에도 행동에도 그런 범례는 마땅히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로고스의 개념을 제시하여 감관의 지위를 약화시켰다.\n\n헤겔 이후 재조명 받았고 흔히 '존재에서 생성으로'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철학의 전회에 따라 영향권이 확장되고 있다. 니체, 베르그송, 들뢰즈 등 현대의 거장들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현저하다. 또한 운동/생성에 대한 고찰이 유사한, 노장철학과 중국철학과의 연관성으로 동양철학에서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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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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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20세기 영문학과 아일랜드 문학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n\n아일랜드의 영국계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비롯하여 오컬트나 아일랜드 신화 등 초월적 주제에 관심을 품었고 이는 그의 문학적 성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89년 서완하고 탐미적인 첫 시집을 발간한 이후로 그의 시는 특유의 사실주의적 묘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예술가인 잭 버틀러 예이츠의 형이며 존 버틀러 예이츠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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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문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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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예이츠는 20세기 영시 작가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상징시를 즐겨 지었는데 작품 속에서 사물을 암시적으로 형상화시키거나 상징적 구조를 주로 사용했다. 그는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에서 표면적 의미 이상의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공명을 불러일으켰다.\n\n다른 모더니즘 작가들이 자유시 창작을 시도한 것에 반해 예이츠는 기존 문학 양식의 대가로서 문학 양식을 지켜나갔다. 서커스 동물들의 탈주이라는 시에서 예이츠는 후기 작품 창작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한다:\n\nNow that my ladder's gone\n\nI must lie down where all the ladders start\n\nIn the foul rag and bone shop of the heart.\n이제 나의 사다리가 사라졌으니\n\n모든 사다리가 시작하는 곳에 누워야하겠다\n\n마음 속 낡은 중고가게 안에\n\n예이츠는 1919년 이래로 골웨이주 고트 인근의 투르 발릴리 탑 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다가 1929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그 여름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이츠는 1932년 더블린 근교 래스파에서 리버스데일 휴양지를 임대해 머물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발자취는 주로 아일랜드 외부에 남겨져 있다. 그는 말년에 창작활동에 주력하면서 많은 운문, 연극, 산문시 등을 발표했다. 1938년, 예이츠는 그의 희곡 연옥의 첫 공연을 감상했다. 같은 해에 그는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자서전 을 완성했다.\n\n예이츠의 초기 작품 중 대부분이 아일랜드 전설과 민담을 소재로 삼은데 반해 그의 후기 작품은 보다 현실과 관련된 사항을 다루고 있는 만큼 예이츠의 초기 문체와 후기 문체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이츠의 작품은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 작품은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어조와 함께 화려한 수식을 특징으로 삼으며, 인정없는 비평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격식을 갖추고 있다. 예이츠의 초기 시에는 서사시인 오이진의 방랑기이나 아일랜드의 위상 이 있다. 오이진의 방랑기는 예이츠가 남긴 유일한 장편시이다.\n\n어떤 비평가들은 미술 분야의 파블로 피카소와 비슷하게 시 분야에서는 버틀러 예이츠가 19세기에서 20세기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평가하지만, 예이츠가 정말로 T. S. 엘리엇이나 에즈라 파운드와 더불어 모더니즘 작가로 인정받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n\n예이츠가 1920년 쓴 재림은 20세기 창작된 시 가운데 시적 형상화가 무척 두드러지는 시이다.\n\nThings fall apart; the centre cannot hold;\n\nMere anarchy is loosed upon the world,\n\n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n\n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n\n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n\n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n모든 것이 파괴되고 그 중심은 무너진다\n\n오직 혼돈만이 지상에 만연하다\n\n온 누리에 핏빛으로 얼룩진 조수가 퍼지고\n\n순결한 의식은 물에 잠긴다\n\n선인은 주저하고 악인의 열정은 가득하다\n\n이 시에서 “선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물질주의의 바람 앞에서 전통 문화를 지키는데 무능력했던 기존의 기득권층이다.\n시의 마지막 구절은 역사는 반복되고 당시 사회는 순환하던 역사가 마무리되고 새롭게 기독교가 성장하는 시대였다는 예이츠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준다.\n\nAnd what rough beast, its hour come round at last,\n\nSlouches towards Bethlehem to be born?\n그런데 마침내 때를 맞이하여 태어나고자 베들레헴으로\n\n뚜벅뚜벅 걷고 있는 저 거친 짐승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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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마이클 하틀리 프리드먼의 생애를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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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으며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를 중퇴한 후 1968년 프린스턴 대학교에 들어가 1973년에 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졸업 후 1975년까지 UC 버클리 수학과의 강사로 재직했다. 1975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일원이 되었으며, 1976년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수학과 부교수가 된다. 1980년과 1981년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보내고, UC 샌디에이고로 돌아가 1982년에는 정교수로 승진한다. 1985년에는 UC 샌디에이고 수학과 학장을 지낸다.\n\n수많은 수상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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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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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연구소는 1930년 당시의 뉴아크 백화점 주 루이 뱀버거와 그의 남매 캐롤린 뱀버거 풀드의 자금으로 설립되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대공황 직전에 주식을 팔아 연구소를 건립할 수 있었다. 원래 그들의 계획은 백화점의 성공에 대해 뉴저지 주민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이자 초대 소장 플렉스너가 그들을 설득해 순수과학 연구소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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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이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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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을 다룬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철학자이다.\n\n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n\n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이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 탐구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다.\n\n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이 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 데 집중된 반면, 후기 사상은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데 중심이 놓여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주어진 언어-놀이 안에서 그 단어들이 사용될 때 가장 잘 이해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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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생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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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에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어머니는 이다. 루트비히는 8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헤르만 크리스티안과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대인이었으나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1850년대에 작센에서 빈으로 이주하였다. 할머니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요제프 요아힘의 사촌이다.\n\n## 성장기\n예술가와 지식인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음악 같은 예술을 사랑하였다. 제철 사업가로서뿐만 아니라 예술 애호자로서도 유명했던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귀스트 로댕,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였고 빈 분리파 전시관을 설립하려는 재정을 책임졌다.\n\n비트겐슈타인의 집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같은 예술가가 늘 초대되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비트겐슈타인보다 두 살 위의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요하네스 브람스의 주요한 작품 가운데 몇몇을 비트겐슈타인 집의 음악실에서 초연하였다.\n\n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우울증에 따른 자살 경향을 보였다. 장남인 한스는 네 살 때 작곡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나 1902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자살했다. 뒤를 이어 삼남 루돌프가 1904년 베를린에서 자살하였고 차남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군의 총 퇴각이 결정되자 자신이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하였다.\n\n1903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후 린츠에 있는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비트겐슈타인보다 6일 생일이 빠른 아돌프 히틀러가 1년간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서로 알던 사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양측 모두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회고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리라 추정된다.\n\n학교 생활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높은 톤의 어투에 약간 말더듬이가 있었고 우아한 옷을 입은 민감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심중으로만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동급생 거의 대부분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선생\", \"헤어 루트비히\"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n\n비트겐슈타인은 1905년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한 영웅과 천재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선집을 읽고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으나 볼츠만은 1906년 생을 자살로 마감하였다.\n\n1906년 베를린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우스토 베란치오 같은 사람들이 남긴 르네상스 시기 작업에 흥미를 느꼈다. 1911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를 방문한 후부터 연락을 자주 교환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로 하였다.\n\n##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n비트겐슈타인은 1911년 8월부터 버트런드 러셀의 강의실에 출석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러셀과 웃음꽃을 피우면서 철학을 주제로 토론하는 사이가 되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알게 되어 수리 논리학의 원리를 대상으로 한 작업을 시작하였다.\n\n이 시기 러셀은 수학 기초론과 철학을 확장하고자 연구하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n\n이 시기 동안,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고전음악과 여행이었다. 1912년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비트겐슈타인은 여로에 종종 애인이었던 데이비드 핀센트와 동행하였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무어가 이끌던 비밀 모임인 케임브리지 어포슬스에 가입하였다.\n\n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가 죽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유산을 상속받아 유럽에서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볼츠만에 이어 트라클까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자살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n\n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자신이 일하기에 이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겐 대학연구자들이 심오한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자신들이 영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의 끝에 있는 숄덴 인근의 오지에서 독거에 들어갔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의 한 집 이층을 빌려 겨우내 지내면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가장 정열 있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흔히 \"논고\"라고 불리는 논리 철학 논고로 정리되었다.\n\n## 제1차 세계대전\n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1년째 은둔 생활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크게 충격받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에 자원하였다. 입대 초기에는 함선에서 근무하였으나 얼마 후 포병대로 전근하였다. 1916년 3월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7군에 자원하여 브루실로프 공세를 방어하는 최전방 조종사로 참전하였다.\n\n전쟁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의 눈으로 목격한 천박을 대상으로 한 경멸을 노트에 기록하였다. 종전 뒤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철학과 종교를 대상으로 한 단상을 적어나갔다. 노트에 적힌 단상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종교를 향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대상으로 해 불가지론다운 태도를 견지했는데 전쟁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레프 톨스토이의 믿음 안의 찬송을 갈리치아 루마니아 왕국에 있던 한 서점에서 구입한 후 어디나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므로 후일 비트겐슈타인의 지휘에 있던 부대원들은 “찬송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얻었으며,\n\n### 논고\n윤리, 종교에 딸린 기호를 가지고 \"논리\"에 부합한 연구를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관심했던 논리 분석을 윤리 개념에 접합하면서 전쟁 기간에 발전하게 한 소위 \"그림 이론\"을 적용하였다. 여기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과 노르웨이에서 은둔 생활한 시기에 한 작업이 \"논고\"의 바탕이 되었다. 1918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다를 무렵 비트겐슈타인이 이탈리아 북부의 포병 연대에서 중위로 복무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거기에는 데이비드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의 삼촌 폴에게 찾아가 완성된 논고를 핀센트에게 헌정하였다. 논고는 출판사에 보내졌으나 출판되지 않았다.\n\n1918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 중부의 카치노에 수감된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키네스 같은 영국 친구의 도움으로 책의 반입이 허락되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여러 원고가 영국으로 보내졌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고가 철학상 뛰어난 성과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1919년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프랭크 램지와 찰스 케이 오그던이 비트겐슈타인의 원고를 영역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이 영역물을 검토하였다. 책의 제목 논리 철학 논고는 원제바뤼흐 스피노자의 정치학 논고를 기려 조지 에드워드 무어가 지은 것이다. 서문은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논리 철학 논고는 중요한 철학 서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포로로서 수감된 가운데 버트런드 러셀의 서문을 받아 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기본 사항을 러셀이 오해한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작업 출판을 대상으로 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출판사는 서문을 쓴 러셀만을 부각하게 할 뿐이었다. 논고는 1921년 빌헬름 오스트발트가 운영하던 독일의 출판사인 자연철학 분석에서 독일어로서 마침내 출간되었다. 러셀의 서문과 램지와 오그던이 영역한 판본은 1922년에 출간되었다.\n\n## 1920년대: 오스트리아 교직 생활\n1920년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끔찍한 전투를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견고해진 비트겐슈타인의 지성과 감성은 \"논고\"로 집약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작업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답을 구했다고 생각했기에 철학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형제들에게 나눠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하스바흐, 오테르탈, 트라텐바흐와 같은 곳의 산골 초등학교를 돌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보수적인 농촌 학부모들 및 동료 교사들과 불화를 일으켜 교사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n\n논고를 번역한 프랭크 램지가 1923년 가을 비트겐슈타인의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좁다란 텅 빈 방에 침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작은 테이블과 난로가 고작이었다. 프랭크 램지는 저녁 식사로 질긴 빵 하나와 버터와 코코아 한 잔을 건네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침 여덟 시에서 정오나 오후 한 시까지 수업하였고 오후 시간은 자유롭게 보냈다.\n\n비트겐슈타인은 교직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이롭게 하려고 42쪽으로 된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을 만들었다. 어린이를 위한 사전은 논고를 제외하면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유일한 책이다. 이 사전은 1926년 빈에서 출판되었고 횔더 피흘러 템프스키의 간단한 서문이 들어 있다.\n\n## 1926년: 스턴버러 하우스\n1926년 비트겐슈타인은 누나인 그레틀을 위해 새 집을 구상하였다. 건축은 전쟁 중에 친구가 된 파울 엥겔만이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과 파울 엥겔만은 참호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파울 엥겔만은 새 집이 아돌프 루스 이후 현대 건축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랐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을 짓는 일에 온통 매달렸고 창틀, 문, 난방기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다. 문 손잡이와 난방기는 직접 설계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요구로 모든 창문에 150Kg에 이르는 금속 차양막을 달았다. 비트겐슈타인의 건축을 쓴 버나드 라이트너는 이 건축물이 건축사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것이라 평가하면서 \"이 집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로 매우 정교하게 지어졌다. 모든 철제는 바닥에 숨겨져 있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집이 거의 완공되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정의 높이를 30mm 더 높이라고 하였고, 그가 원한대로 천정을 높이고서야 마침내 완공되었다.\n\n비트겐슈타인의 누나 헤르미네는 이 집을 두고 \"나는 언제나 내가 그 집 안에서 살아도 되는 걸까 자문하곤 하였다. 그 집은 신의 거처처럼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집을 좋게 말하면 너무 소박하게 지었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이 건축의 기본이 되는 생활이나 건강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고 여겼다.\n\n## 빈 학파\n비트겐슈타인은 건축 작업을 마치고 모리츠 슐리크와 만났다. 슐리크는 빈 학파를 이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슐리크 자신은 빈 학파의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한 적이 없으나 프리드리히 바이스만과 같은 빈 학파의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에 기초한 주제를 화제로 하여 자주 대화했다. 슐리크와 빈 학파의 회원들이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자주 좌절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에 딸린 생활과 신비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논리실증주의는 이러한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비하한다고 간주했다. 한 모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를 돌아가면서 낭송하는 사이 자신의 책 언급을 거부하여 좌중을 짜증 나게 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철학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모임이 이어지는 동안 프랭크 램지가 논고와 관련해 토론하려고 빈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토론을 통해 프랭크 램지가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n\n##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복귀하다\n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프랭크 램지와 다른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복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한 기차역에는 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n\n이런 환대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위를 받지 못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집필하여 이미 철학 박사의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기록하였고 무어와 함께 박사학위 심사를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심사관이 된 두 오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얻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절대로 이해 못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n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에 부임한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의 집에서 만나게 된 마르게리테 레스핑거와 혼인을 고려하였으나 1931년 파혼한 후 독신으로 지냈다. 비트겐슈타인은 양성애자였고 빈의 프라테르 공원에서 젊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윌리엄 워렌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쓰면서 1973년 발견된 비트겐슈타인의 노트에는 프라테르에서의 만남을 \"친구의 격려\"와 같이 표기하였다고 밝혔다.\n\n일각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치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자신이 \"심장에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고 많은 방면에서 노동자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1930년대 초반 기록된 MS 154와 같은 노트에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자책하는 여러 문구가 적혀 있다.\n\n1934년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인 케인스가 쓴 러시아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 서술된 소비에트 생활에 매료되어 스키너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이민을 고려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어를 배웠고 1935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안전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여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당국에 교사 자리가 있는지 문의하였으나 이에 대답은 3주가 지나서야 돌아왔다.\n\n1936년부터 37년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스키너와 함께 노르웨이에 다시 머물렀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에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이것을 철학적 “조사”라고 불렀다. 1936년과 37년 사이의 겨울에 가까운 친구에게 보내는 “고백”을 썼다. 이 글들은 대부분 선의의 거짓말과 같은 것을 밝히는 소소한 내용이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자 하였다. 1938년 비트겐슈타인은 모리스 드루어리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를 여행하였다. 드루어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정신 의학을 소개한 제자이자 의사였다. 드루어리를 만난 자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마침 드루어리를 찾아온 아일랜드 대통령 이몬 데 발레라를 만났다. 자신도 수학 교사 출신이었던 발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이 수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n\n## 나치의 부상과 가족의 위험\n비트겐슈타인은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독일 국적을 갖게 되었고 나치의 인종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고 케인스와 같은 친구들의 힘을 빌어 영국이나 아일랜드 국적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에는 곧바로 오스트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n\n## 철학 교수가 되다\n1939년 무어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직을 사임하자 비트겐슈타인이 후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교수직을 갖게 된 얼마 후 영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39년 7월 비트겐슈타인은 빈을 방문하여 그레틀과 다른 누나들을 만났고, 하루는 라이히스방크의 직원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들렀다. 이후, 그는 가족이 처한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던 형 파울을 설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1939년 8월 가족에 대한 해방 요청이 접수되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1주일 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승인으로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재산 금 1.7톤이 나치에게 인도되었다.\n\n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비트겐슈타인은 영화관 제일 앞자리에서 영화를 보는가 하면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편안히 서방세계를 관망하였다. 노먼 맬콤은 비트겐슈타인이 강의를 마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다고 회고하였다.\n\n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수학기초론에 대한 자신의 기존 견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에서 논리는 단단한 기호였으며, 그는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개론에 대해서도 이러한 사고를 기초로 비평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에 이르러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글과 강의를 통해서 과거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였다.\n\n## 2차 세계대전\n몽크의 전기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도 철학 강의나 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하였다고 한다. 1941년 9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형제였던 존 라일 교수에게 요청하여 런던에 있는 가이스 병원에서 봉사하겠노라고 요청하였다. 존 라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학 교수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가이스 병원에서 약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n\n병원의 직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간혹 비트겐슈타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부탁하였고, 자신을 비트겐슈타인 교수님이라 부르지 말고 여느 의사들과 같이 박사님이라 불러 주기를 바랐다.\n\n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몹시 외로웠다.\n\n비트겐슈타인은 프란시스 스키너의 연구 수업에 참여한 십대였던 케이스 커크와 우정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관계는 스키너가 죽은 1941년까지 지속되었다. 스키너는 비트겐슈타인과 커크의 관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문 연구에 비트겐슈타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최소화된 점을 고마워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커크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일기에 종종 커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적곤 하였다.\n\n비트겐슈타인이 이 편지를 쓸 무렵 커크는 혼인하였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n\n## 만년기\n1947년 비트겐슈타인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교수직은 친구인 게오르크 헨리크 폰 브리흐트가 물려받았다. 1947년에서 48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더블린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로즈 호텔에서 머물렀다.\n\n1949년 비트겐슈타인의 학생이었던 노먼 맬콤이 더블린으로 찾아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병들어 있었다. 맬콤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하여 비트겐슈타인을 미국으로 데려갔으나 그의 증세는 악화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맬콤에게 \"난 미국에서 죽고 싶지 않아. 난 유럽인이라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라고 요청하였다.\n\n비트겐슈타인은 런던으로 돌아왔으며 암이 골수에까지 옮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1950년 2월 11일 빈을 방문하여 죽음이 임박한 누나 헤르미네를 만났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을 간신히 알아보는 처지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와 우리 모두에게 크나 큰 손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심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누나의 임종을 지켜본 뒤 비트겐슈타인은 1950년 4월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를 한 번 더 가보고 싶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Cambridge Wittgenstein archive, accessed 8 September 2010.\n\n1951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였다. 그는 노먼 맬콤에게 \"내 마음은 이미 죽었어. 더이상은 고통일 뿐이지. 내 알기로 삶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그 다음엔 정신적인 삶만이 남게 되는 거야\"라고 말하였다.\n\n62번째 생일이던 1951년 4월 26일 의사가 생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좋군요,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4월 29일 사망하였고 천주교식 장례의식을 거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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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페넬로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으로, 말 그대로 풀이하면 '원앙' 또는 '오리'라는 뜻이다. 오디세우스의 아내이며, 스파르타의 이카리오스와 물의 요정 페리보이아 사이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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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페넬로페는 이타카의 왕인 오디세우스와 결혼하였으며 그와 외동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낳았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싸우기 바로 전에 태어났다.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오기를 20년 동안 기다렸는 데, 그 와중에 108명의 청원인들과의 결혼을 늦추기 위해 여러 계략을 고안해 내었다. \n\n오디세우스가 돌아오자, 그는 고령의 거렁뱅이로 분장하여, 페넬로페가 배신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재혼을 미룬것에 대한 노고는 그녀의 남편인 오디세우스에 대한 결혼의 충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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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프레스코**는 '' 'a fresco' '' 를 칠한 위에)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낱말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를 일컫는다. 석회·석고 등으로 만든 석회벽의 건조가 채 되지 않은 벽면에 수용성 그림물감으로 채화하는 기법이다. 프레스코란 벽이 깨끗하게 도식되어 있어서 신선하다는 뜻으로, 영어의 프레시도 그에 유래한다.\n\n그림물감의 종류는 토질·광물질의 것으로 색수는 적다. 그림물감은 벽에 흡수되어, 벽이 마를 때 표면에 고착하므로 빛깔이 변색되지 않고 내구력이 있다. 다만 말라감에 따라 광택을 잃고 발색이 둔화되는데 거기에서 프레스코 특유의 차분한 색조를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벽면이나 천장화에 많이 쓰인다. 15세기-16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발달했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나 벽화, 라파엘로의 바티칸궁의 벽화 등이 프레스코 기법에 의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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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유재하**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n\n1962년 출생.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재학하던 중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발탁되었다. 대학 졸업 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 1986년 김현식 3집 수록곡 〈가리워진 길〉을 작곡하여 김현식의 초기 명반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하였다. 이듬해 1987년 자신의 1집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 같은 해 11월 1일 25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하였다.\n\n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음에도 그의 음악은 당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 그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 장학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재정적 문제로 열리지 못했던 2005년을 제외하고 1989년부터 매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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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김기덕**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프로듀서, 배우이다.\n\n1960년 12월 20일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1968년에 경기도 고양으로 이주하였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기술을 배우라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전수 학교와 전자 공장을 다니며 20세까지 성장한 김기덕은 해병대에 부사관으로 임관하여 5년 간 복무했다. 제대한 후 1986년부터 화가로 활동하였고 남산의 장애인 보호 시설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동시에 신학교를 다니며 30세까지 서울에서 지냈다.\n\n평소 그림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던 김기덕은 백남준과 관련된 기사가 동기가 되어 31세가 되던 1990년에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 프랑스와 유럽 각지를 다니며 스스로 회화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들른 영화관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 양들의 침묵, 퐁네프의 연인들 등을 보고 영화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n\n1992년에 귀국한 뒤 화가와 사형수로 1993년 영상작가교육원 창작 대상, 무단 횡단으로 1995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대상을 받는 등 각본가로 활동하다가 1996년작인 악어를 통해 자신이 직접 감독하여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잔인하고 어두운 영상과 내용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2004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사마리아로,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빈 집으로 연이어 감독상을 수상했다.\n\n2020년 12월 11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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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논란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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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성폭력 사건\n\n### 폭행과 강요\n2017년 동아일보 보도에서 \"2013년 에서 당초 주연을 맡았었지만, 촬영장에서 감정이입을 핑계로 폭력을 당하고, 당초에 없었던 베드신 촬영도 강요받았다\" 라고 폭로하며, 김기덕을 폭행·강요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서울중앙지검은 형사6부에 배당하여 직접 수사하였다.\n\n지인은 \"피해자는 영화에서 하차한 뒤 변호사를 찾아가 법률 상담을 받았지만, 영화계 불이익이 두려워 고소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피해자 정신적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결국 배우를 그만두고 2017년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에 찾아가 폭로하여 법적대응을 나서기로 하였다\" 라고 밝혔다. 김기덕은 \"뺨은 때렸지만, 폭행 장면 연기 지도를 위하여서였고, 대본에 없는 베드신을 강요한 적 없다\"며 부인하였다.\n\n피해자 지인에 따르면, \"피해자는 영화에서 하차한 뒤 변호사를 찾아가 법률 상담을 받았지만, 영화계에서 불이익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고소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김 감독 폭행과 모욕으로 입은 피해자 정신적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결국 배우를 그만둔 뒤인 17년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을 찾아가서 자신이 당한 일을 알렸고, 김 감독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기로 하였다\" 라고 밝혔다. 이후 \"뺨을 때린 것은 맞지만, 폭행 장면 연기 지도를 하려고하였던 것이다. 대본에 없는 베드신 강요한 일 없다\" 라고 해명하였다.\n\n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사무국장은 \"영화인 신문고에 접수된 사건으로 조사하였다. 폭행 부분에서는 제3자인 직원 다수 증언이 있었다. 피해자가 음경을 잡는 장면을 사전 협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찍어 강요에 의한 장면이 영상물로 남아있다. 김기덕 감독 혐의가 확인됐고, 혐의 최종은 검찰 조사 결과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피해자 변호인이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라고 밝혔다.\n\n그러다 2018년, 서울중앙지법 형사29단독 박진숙 판사는 폭향죄 강제추행 치상 명예훼손 혐의에 대하여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처분을 하였다. 모욕죄는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폭행 혐의에 벌금 500만원으로 약식기소하였다.\n\n이후 2018년 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성적 이야기를 2시간 가까이 들었고,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뛰쳐나왔다\", \"김기덕과 조재현에게 성폭행을 당하였다. 합숙하였던 촬영 현장에서 대본 이야기를 한다며 여성 배우들을 방으로 불렀다. 촬영 내내 성폭행에 시달렸다. 김기덕은 다음 작품 출연을 제안하며 관계 유지를 종용하였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5~6년동안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승승장구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온몸이 떨렸디\"는 피해자들 폭로를 집중 취재하였다.\n\n이에 \"영화감독이라는 개인적 욕구를 채운적 없다. 상대 마음을 얻기 위하여 일방적인 감정으로 입맞춤을 한 적은 있지만, 그 이상 행위를 한 적이 없다.\" 라고 밝혔다. 성폭행 혐의에서는,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만나 동의하에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적은 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써 부끄럽게 생각하고 후회한다.\" 라고 논란을 부인하였다.\n\n이후 2019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3억 손해배상 청구 소송 첫 변론에서 한국여성민우회는 \" 당시 김 감독은 폭력화 성폭력 의혹을 꾸준히 받았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 2013년 개봉한 뫼비우스 촬영 중 피해 여성 배우 뺨을 때린 사실이 있어, 공익 차원에서 성명서를 보낸 것은 불법 행위가 아니다.\" 라고 밝혔다.\n\n김기덕은 \"강제 추행 치상 피해 여성이 주장한 나머지 혐의에 대하여서는 검찰이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는데도, 민우회가 자신을 성폭행범으로 몰았다\" 라고 주장하였다. 김기덕은 보도한 사실에 MBC를 상대로 10억 손해배상 소송을 추가로내었다. PD수첩에 관하여서는 \"피해자 폭로를 허위로 단정할 수 없고, 제작진 역시 김 씨에 대한 의혹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라며 2018년 12월 불기소 처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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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부처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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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불교에서 모든 생물은 전생의 업보를 안고 살며 그 업보가 사라질 때까지 윤회한다고 하는데, 해탈에 이르러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를 벗어난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하였으며 이 부처가 됨을 성불이라 한다. 깨달은 자는 누구든 부처라고 할 수 있지만, 보통은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불 이외에도 과거불이 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현재까지 출현한 부처가 총 28명이라고 한다. 미래에는 미륵불이 출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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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어원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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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부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에서 한문 불체를 거쳐서 들어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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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대기 굴절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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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대기 굴절**은 빛이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밀도 차에 의해 굴절되는 현상을 말한다. 천문학에서 별을 관측할 때, 대기 굴절에 의해 발생하는 관측의 오차를 **대기차**라고 한다.\n\n이와 같은 굴절 현상은 천체 관측에서 역시 항상 고려해야 해야 할 사항이다. 왜냐하면 허블 망원경 같은 대기권 밖에서의 천체 관측을 제외하고 우리의 관측장소는 언제나 지구 안에 한정되어 있으며, 별이 발산한 빛은 밀도가 서로 다른 여러 층으로 된 지구 대기권을 통과하여 관측자에게 다다르기 때문이다. 천문학에서 문제로 삼는 굴절차란 위에서 설명한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빛의 굴절 현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굴절된 빛의 각도를 잡아 빛의 출처인 별의 위치를 밝히는 데에 있다. 쉽게 알아보기 위하여 과장하여 그린 위의 그림에서 우리가 관측하기엔 별은 흰색의 별 위치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별의 실제의 위치는 이와 약간 다른 지점에 있다. 고도가 낮은 천체일수록 굴절의 효과가 심하며, 천정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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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귀스타브 모로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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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귀스타브 모로는 1826년 파리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22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n\n1848년 이후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들라크루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모로는 그림의 주제를 역사와 신화에서 찾기 시작하며 이는 후에 모로의 화풍을 대변하게 된다. 1857년에서 1859년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신화적 주제를 모음과 동시에 그림기술을 향상시켰다. 파리로 돌아와 당시의 미술계에 유행하던 살롱 초대전에 약 20년간에 걸쳐 수시로 작품을 출품한다. 1864년 외디푸스와 스핑크스를 그려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에 그려지는 대다수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과 일화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모로는 의식적으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인간의 번민과 고통, 이상적인 영웅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나는 표현주의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게 된다.\n\n1892년 파리의 예술학교의 미술과 교수로 초빙되어 마티스, 루오, 마르케 등의 화가들을 길러낸다. 특히 모로는 자상함과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교수 방법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n\n1898년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후 유언에 따라 모로가 살던 파리의 9구 로슈푸코 거리 14번지의 집은 현재 모로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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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국화문장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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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국화문장** 또는 **십육엽팔중표국**은 일본 황실의 가몬으로, '국화문' 이나 '국문'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n\n가마쿠라 시대의 고토바 천황이 국화를 좋아해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로 사용했다. 이후 고후카쿠사 천황, 가메야마 천황, 고우다 천황이 이를 자신들의 징표로 계속 사용해 황실의 문장으로 정착되었다.\n\n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문장이 된 것은 1869년의 태정관포령에 의해서이다. 이때, 천황의 문장으로서 \"십육변팔중표국문\"이, 천황 이외의 황족의 문장으로서 **십사변일중이국문**이 각각 정해졌다. 1871년에는 황족인 아닌 자가 국화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그 후 완화되었다.\n\n야마토 전함 등 일본 제국 해군 군함의 뱃머리에 붙여져 있었으며, 현재도 일본 여권의 표지에 이 문장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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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엔의 지폐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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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엔화 지폐의 발행은 통화가 도입된 지 2년 후인 1872년에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액면가는 10엔에서 10,000엔까지 다양했다. 1984년 이래로, 가장 낮은 가치의 지폐는 1000엔 지폐이다.\n\n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전쟁 중에, 일본 재무성과 일본 제국 국립 은행과 같은 다양한 기관들이 엔화로 지폐를 발행했다. 연합군도 전쟁 직후 지폐를 발행했다. 이때부터, 일본은행이 지폐 발행 전담기관으로 활동해 왔다. 이 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개의 시리즈를 발행했다.\n\n## 시리즈 E 지폐\n시리즈 E 지폐는 ¥1000, ¥5000, 그리고 ¥10,000 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리온 별자리 패턴은 디자인에 존재한다.\n\n2022년11월 5일부터 발행이 중단되었다.\n\n시리즈 F 지폐\n\n일본은 일반적으로 현금 기반 사회로 간주되며, 2014년 일본 내 지불액의 38%가 현금으로 지불된다. 현금 결제가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상인들이 결제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신용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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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기미가요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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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기미가요**는 일본의 국가이다.\n\n이 노래의 유래는 고금 단가집의 \"\"이다. 이 단가의 \"\"를 \"\"로 바꿔 현재의 가사가 되었다. 기미가요에서 '기미'는 그 대상이 일본 천황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n\n메이지 시대에 하야시 히로모리가 이 가사에 선율을 붙였다. 하지만 현재의 기미가요를 완성한 사람은 독일인 출신의 음악가이자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이다. 과거에는 일본 제국 지배하의 식민지였던 조선, 타이완,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였던 만주국, 왕징웨이 정권, 몽강국 등에서도 불렸다.\n\n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공식 국가는 없었으나 사실상 국가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99년에 제정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에 의해 법적으로 기미가요가 다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기미가요 법제화에 반대한 좌익 성향 일본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지방교육의원회가 입학식이나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지지하면서 이에 대해 거부하는 어느 학교장이 곤욕을 치르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방송에서도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나 민영 닛폰방송 라디오와 공영방송인 NHK 방송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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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가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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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일본어 가사\n君が代は\n千代に八千代に\n細石の\n巌となりて\n苔の生すまで\nきみがよは\nちよにやちよに\nさざれいしの\nいわおとなりて\nこけのむすまで\n기미가요와\n치요니야치요니\n사자레이시노\n이와오토나리테\n고케노무스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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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핵자기 공명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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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핵자기 공명**은 자기장 속에 놓인 원자핵이 특정 주파수의 전자기파와 공명하는 현상이다.\n\n핵자기 공명은 분자의 물리·화학·전기적 성질을 알아내기 위한 분자 분광법의 일종으로 사용되고, 또한 의학에서 인체 내의 조직을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관찰하기 위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핵자기 공명은 미래의 양자 컴퓨터의 개발 과정에도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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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2차원 NMR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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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화학, 그 중에서도 유기화학에서는 이른 시기에 NMR 기술을 받아들여 유기분자의 구조를 결정하는데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유기화학에서는 일반적으로는 1차원 NMR을 이용하지만, 분석하려는 분자의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지면,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2차원 NMR을 사용하기도 한다. 2차원 NMR에는 COSY, NOESY, HMBC, HSQC와 같은 다양한 종류가 있어, 상황에 따라 필요한 방법을 골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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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페루 공화국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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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페루 공화국**은 남아메리카 서부에 있는 공화국이다. 지리적으로 북쪽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동쪽의 브라질, 남동쪽의 볼리비아, 남쪽의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태평양 해안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리마이며, 리마는 리마 주의 주도이면서 페루 최대의 도시이다. 페루는 면적 상으로 세계에서 19번째로 큰 국가이며,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국가이다. 페루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는 스페인어이나, 케추아어와 아이마라어 등도 공용어로 함께 지정되어 사용되고 있다.\n\n하였다. 에스파냐의 지배 시대에 이 땅은 페루 부왕령이었고, 페루 독립전쟁 이후 페루 공화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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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문화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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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페루 문화는 주로 아메리카 토착민과 에스파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n\n페루 문학은 콜롬부스 이전 문명의 구전 전승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 에스파냐 사람들은 글 쓰기를 도입하여, 식민지 시대 문학으로는 연대기나 종교 문학이 있다. 독립 이후 풍속주의와 낭만주의가 주된 흐름을 이루었느며, 리카르도 팔마의 작품이 그 예이다.\n\n페루 요리는 아메리카 토착민과 에스파냐의 요리가 섞인 것으로, 아프리카, 아랍, 이탈리아, 중국, 일본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n\n페루 음악은 안데스, 에스파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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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여권의 도안 및 서식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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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국제 민간 항공 기구 표준\n국제 민간 항공 기구가 각국 정부에게 권고하는 여권 표준을 공표한다. 여권 책자의 크기는 보통 ISO/IEC 7810 ID-3 표준을 따르는데, 125 × 88 mm 의 B7 크기로 명시한다.\n\n## 공통 도안\n대부분 나라들의 여권 책자는 앞 표지에 발행국의 문장을 표시한다.\n국제 연합은 나라별 문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문장을 나타내는 것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여권의 요구사항은 아니다.\n\n## 언어\n1920년에 국제 연맹에서 개최된 국제 회의에서 여권을 프랑스어로 발행하도록 권고하였다. 현재는, 국제 민간 항공 기구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또는 발행국 언어와 영어 또는 프랑스어 중 하나의 언어로 발행하도록 권고한다. 많은 유럽 국가들은 영어 및 프랑스어와 함께 자국 언어를 사용한다.\n\n## 출입국 도장\n출입국 관리를 위해서, 많은 나라의 관계 당국은 입국 및 출국 도장을 사용한다. 나라에 따라, 도장은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는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여권의 출입국 도장이 입국 통제 대상자에게 주어지는 공식적인 입국 허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출입국 도장이 여권 소지자의 입국 절차상 계속적인 허가를 활성화하거나 유효함을 인정한다.\n어떤 나라들은 위조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가 포함된 스티커를 사용하지만, 비자는 흔히 잉크로 찍힌 도장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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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독일어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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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독일어**는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언어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서유럽에서 사용된다.\n\n독일어는 학술어로서 그 중요성이 크며 세계 출판업계에서 영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다. 모국어로서의 사용자수는 약 1억 2천만 여명으로 세계 10위 수준이며, 유럽 연합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이다. 전 세계에서 제2언어로 배우는 사용자의 수가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프랑스어 다음으로 많아, 세계의 주요언어 중 하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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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계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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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독일어는 서게르만어계의 언어이며,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일부이다. 참고로 독일어와 영어는 같은 계통인 게르만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발달과정을 겪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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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위례성의 명칭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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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위례성이라는 명칭이 어디에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한강을 뜻하는 옛 이름 아리수·욱리하의‘아리’·‘욱리’에서 왔다고도 하고,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어라하에서 왔다는 의견과, 울타리를 말하는 순우리말 '우리'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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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강금실이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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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강금실**은 대한민국 제55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법조인이다.\n\n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서울 지역 첫 여성 형사 단독판사였다.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하였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003년 2월에 노무현 정부 첫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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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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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1957년 2월 12일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학사 학위했다. 1984년 결혼했고 2000년 이혼했다.\n\n강금실의 아버지 강계돈은 용공조작 사건으로 유명한 '유지 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알려져 있다. 유지 사건은 1950년 8월 초순 제주지역 법원장, 검사장, 변호사, 사업가, 교육자, 제주읍장 등 16명의 지역유지급 인사들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제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연행된 대표적 사건이다. 당시 제주농업고등학교 교감이었던 강계돈은 무고 혐의로 구속되어 1951년 4월에 열린 부산지방법원 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가 1951년 11월 대구고등법원에 항소한 끝에 1952년 1월 15일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훗날 계엄사령부가 용공조작한 사건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강금실의 가족은 제주도를 떠나 육지에 나가게 되었다.\n\n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1993년 제3차 사법파동에 참여하여 소장 판사들과 함께 사법부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법원장에게 전달하였다.\n\n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 변호사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n\n2003년 참여정부에서 제55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당시 40대중반인 46세에 입각하며 화제가 되었다.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개혁적인 업무 추진과 발랄한 언사로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또 꼭짓점 댄스를 잘 춰 '강효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측의 출마 권유가 있었으나 물리치고 장관직을 계속 수행했다.\n\n법무부 장관 사직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6년 제4회 지방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서울 시장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의 오세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n\n서울 시장 낙선 후 정계를 잠시 떠나 법무법인 의 고문 변호사 겸 외교통상부 여성인권대사로 활동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및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각각 통합신당과 통합민주당의 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법무법인 원의 구성원 변호사로, 한국인권재단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최문순이 제37대 강원도지사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n\n법무법인 원 고문 변호사로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해당 로펌이 제주도에서 공익적 법률서비스를 펼치고자 제주 분사무소를 개소하면서 활동 영역을 제주도로 확장하였다. 강금실은 제주도변호사회 회장을 맡고 있는 문성윤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원 제주 분사무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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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유기화학의 구조 분석 및 구조 결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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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주어진 화합물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유기화학에서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분석 기법들이 동원되는데, 기본적으로 NMR, IR, Mass Spectrometry Data 등이 필요하며 기타 특성으로 고체 화합물의 경우 녹는점을 측정하며 UV-vis data를 통해 분자 내 발색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광학 활성인 화합물의 경우 비선광도나 CD spectrum 등의 자료가 필요하다. 추가적인 구조 분석 자료로 고체 시료의 경우 X-ray crystallography data가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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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금속공학의 개요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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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역사적으로 금속공학은 인류가 구리를 제련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금속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많다. 금속공학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분야로 파생되고 또 물리학이나 화학 등과 같은 다른 학문 분야와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개념들을 사용하게 되어 엄밀히 따지면 재료공학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반대로 재료공학에서 사용하는 상당수의 논리 체계는 전통적인 금속공학에서 차용한 것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흔히 금속·재료공학이라고 많이 표현한다.\n\n재료를 구분하는 방법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지만, 크게 무기 재료와 유기 재료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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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천명제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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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천명제** ~ 1626년 9월 30일)는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초대 칸으로, 청나라의 실질적인 창업 군주로 간주된다.\n\n건주여진 출신으로 여진 종족들간의 패권투쟁에서 승리하여 1616년 자신을 칸으로 선포하고 이후 후금을 건국했다. 휘는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묘호는 태조이고, 연호는 **천명**이라고 부른다. 첫번째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무황제**\n으로, 줄여서 **타이주 호롱고 한**, 네번째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으로, 줄여서 **고황제**이다. 별호로는 **태조한조종**이 있다. 생전 도장에 새겨진 칭호는 **압카이 풀링가 아이신 구룬 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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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외부 링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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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전임자=|\n후임자=숭덕제|\n대수=1|\n직책=청나라의 황제|\n임기=1616년 ~ 1626년\n전임자=|\n후임자=천총 가한|\n대수=1|\n직책=후금의 가한|\n임기=1616년 ~ 16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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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한산 이씨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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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시조 이윤경은 고려 숙종 때 호장을 지냈다.\n\n6세손 **이곡**이 1320년 과거에 급제하여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하고, 한산군에 봉해졌다.\n\n이곡의 아들인 이색도 1353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판문하부사에 이르렀고, 1391년 한산부원군에 책봉되었다.\n\n한산 이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95명, 상신 4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2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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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고사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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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고사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그 서문에 따르면 와도 5년에 겐메이 천황의 부름을 받아 오호노아소미 야스마로가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고지키라는 제목은 음독이며, 훈독으로는 **후루코토후미**라고도 읽지만 일반적으로 음독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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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개요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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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필사본 형태로 몇 가지 사본이 전하고 있다. 내용은 일본에서 신대라 불리는 신화 시대의 아메쓰치의 창조에서 시작해 스이코 천황의 시대에 이르는 여러 가지 사건과 함께, 고대 일본의 수많은 노래들을 수록하고 있다. 덧붙여 「다카마노하라」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점도 고사기의 특징이다.\n\n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와 전설을 기록한 역사서로 알려져 일본서기와 함께 고전으로 중시되나,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더 후대를 기술한 책인 일본서기로 간주된다. 일본서기처럼 율령국가의 정사로서 황명으로 편찬된 책은 아니지만, 서문에 \"제기를 찬록하여 구사를 토핵하고, 거짓을 깎아내고 사실을 가려 후세에 전해주려 한다\"는 덴무 천황의 발언이 실려있는 것에서 미루어 일본서기와 같은 황명으로 편찬된 사서로 간주하기도 한다. 당시 천황을 제신과 연결시켜 천황이 가진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주장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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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설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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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일본서기의 연대표기에 관하여 이주갑인상설이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이 일본의 역사년대를 끌어 올리기 위하여, 역사 기록을 120년 앞당겼다는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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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메르쿠리우스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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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메르쿠리우스**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과 이익 추구, 교역의 신이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의 메르크스 또는 메르카토르에서 유래한 듯하다.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에트루리아 신화의 투름스와 매우 유사하다. 영어 이름 **머큐리**라도 부른다.\n\n로마의 아벤티누스와 팔라티누스 두 언덕의 사이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 위치한 메르쿠리우스의 신전은 기원전 495년 지어졌다. 경기장인 동시에 상업의 중심지였으니 상업의 신을 숭배하는 신전의 자리로 알맞은 곳이었다. 평민들의 거점인 아벤티누스 언덕과 귀족들의 중심지인 팔라티누스 언덕 사이에 있는 것은 메르쿠리우스가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신이라는 것을 강조했다.\n\n매년 5월 15일에는 메르쿠리우스를 기리는 축제인 메르쿠랄리아가 열렸다. 상인들은 로마 근교의 포르타 카페나 근처에 있는 메르쿠리우스의 신성한 우물의 물을 머리에 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n\n메르쿠리우스는 로마 제국이 정복한 여러 민족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켈트 인들은 메르쿠리우스를 그들의 주신 루구스와 동일시하였고 게르만 인들은 오딘과 동일시하였다.\n\n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을 신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메르쿠리우스의 다른 이름은 \"날개 달린 발을 가진\"이란 뜻의 **알리페스** 이다.\n\n유럽의 많은 언어에서 그의 이름은 수성의 이름에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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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조영관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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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조영관** 또는 **안찰관**은 고대 로마의 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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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기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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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조영관은 원래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는 케레스 신전의 관리인들이었는데, 케레스 신전은 장터이자 무역 전초지였을 뿐 아니라, 초기에 평민들의 정치 유세 중심지였다. 이들의 기능은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이들은 평민들의 기금과 문서보관소의 관리인들이었고,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449년부터는 원로원의 결의들을 관리했다. 훗날에는 경찰로서 활동했고, 시장터, 계량, 공공 사업, 음식과 물 공급, 공공 오락을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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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소포클레스의 읽어 보기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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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원전**\n\n**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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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무기화학의 역사를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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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연금술의 성과가 서적으로서 중세 유럽에 전해져, 그 박물학적 지식의 집합이 근대 화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무기 화합물에 관한 지식이었고, 화학 자체가 그 연구 대상에 의해 분류하고 구별할 만큼 넓은 영역을 다루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이전의 화학은 무기화학과 같은 의미였다.\n\n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발견된 유기 화합물의 종류가 증가함에 따라, 기원에 의한 물질의 분류와 연구대상에 의한 연구 영역의 구분이 시도되게 되었다. 1806년 경 스웨덴의 옌스 베르셀리우스는 유기체를 의미하는 \"organ\"에서 유기화학이나 유기 화합물이라고 하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것이 학술 용어나 학문 영역으로서 정착함에 따라, 유기화학 및 유기 화합물에 대응하는 학문 영역으로서 무기화학과 무기 화합물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났다.\n\n근대 무기화학은 주기율을 시작으로 하는 조성론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가 되었다. 무기화학의 경우 그 구조론의 기원이 되는 것은 1883년에 독일의 알프레드 베르너가 제창한 배위자 이론이다. 그 후 무기화학은 금속 착화합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착화합물에 대한 연구에 이어서는 무기구조화학이 확립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전자현미경이나 X선 구조분석 등 서브 마이크로 사이즈의 물리 계측이 가능해지면서 구조론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오늘날의 무기화학에 있어서는 고온 초전도 물질의 페로브스카이트상과 같은 구조론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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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집적 회로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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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집적 회로** 또는 모놀리식 집적 회로, IC칩, 컴퓨터 칩, 마이크로칩, IC는 반도체로 만든 전자회로의 집합을 말한다. 집적 회로는 여러 독립된 요소를 집적해서 하나의 칩으로 만든 것인데 각각의 트랜지스터 칩을 이용해서 회로로 만들 때보다 훨씬 작게 만들 수 있다. 집적 회로는 손톱 수준의 크기에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나 다른 전자부품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조밀하게 만들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회로선폭은 점점 더 세밀해진다. 2008년에는 100나노미터 미만으로 떨어졌고.\n\n반도체 소자가 진공관처럼 증폭기 및 스위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반도체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집적 회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매우 많은 수의 작은 트랜지스터를 작은 칩에 합치는 것은 전자 부품을 이용하여 손으로 회로를 조립하는 것을 넘어서는 굉장한 발전이었다. 집적 회로의 대량생산 능력, 신뢰성, 회로 설계에 대한 빌딩블록 방식 접근은 이산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던 산업이 빠르게 집적 회로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n\n집적 회로는 이산회로에 비교해서 비용과 성능이라는 두 가지 주요한 장점이 있다. 한 번에 하나의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는 방식과는 달리 사진석판술을 이용하여 모든 부품을 한꺼번에 찍어내기 때문에 비용이 낮아진다. 또한 크기가 작고 부품들이 조밀하게 설계되어 동작 속도가 빨라지고, 전력 소모는 줄어들게 된다. 2012년에 전형적인 집적 회로의 크기는 수 제곱 밀리미터에서 약 450㎟였고, 제곱 밀리미터당 약 900만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었다.\n\n집적 회로는 전자공학에 혁명을 일으켰고 오늘날 거의 모든 전자장비에 사용된다.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컴퓨터, 휴대폰 그리고 다른 모든 가전기기들은 싼 가격의 집적 회로 덕분에 가능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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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세대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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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초기 집적 회로는 트랜지스터 몇 개만 포함되었고, 설계 과정도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제조 분야 또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꽤 미흡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수십억 개의.\n\n## SSI, MSI, LSI\n처음 개발된 집적 회로는 트랜지스터 몇 개만 들어가 있었다. 소규모 집적이라는 뜻의 SSI라고 불리는 디지털 회로는 수십 개의 트랜지스터만을 포함할 수 있었고 소수의 논리게이트를 구현했다. 예를 들어 초기 리니어 IC는 2개의 트랜지스터밖에 없었다. 대규모 집적이라는 말은 IBM의 연구원인 롤프 란다우어가 이론적인 개념을 설명할 때 처음 사용했고 그것에서 SSI나 MSI, VLSI, ULSI가 유래했다.\n\n집적 회로의 다음 단계의 발전은 1960년대 후반, 중간 규모의 집적이라는 뜻의 MSI라고 불리는 한 칩에 수백 개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하는 기기가 소개되면서 일어났다. MSI는 100~1000개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하고, 좀더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는 인코더, 디코더, 카운터, 레지스터, 멀티플렉서 및 디멀티플렉서, 소형 기억 장치 등의 기능을 포함하는 부류다. MSI소자는 SSI소자보다 생산하는데 비용이 조금 더 들지만, 작은 회로기판과 적은 조립 작업으로 더 복잡한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력적이었다.\n\n1970년대 중반, 한 칩에 수만 개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하는 LSI가 MSI와 같은 이유로 개발되었다. LSI는 메모리 등과 같이 하나의 칩에 1,000~10,000개에 이르는 등가 게이트를 포함하는 부류이다.\n\n1Kb 램이나 계산기 칩,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같은 1970년대 꽤 많이 생산되었던 집적 회로들은 4천개 이하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했다. 만개에 가까운 트랜지스터를 포함한 LSI회로는 1974년쯤에 컴퓨터의 메인메모리와 2세대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쓰이기 위해 생산되기 시작했다.\n\n## VLSI\n발전과정의 마지막단계는 1980년대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VLSI이다. VLSI는 10,000~1,000,000개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하는 대규모 칩이다, 대형 마이크로프로세서, 단일 칩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을 포함한다. 이 발전은 1980년대 초기 수십만 개의 트랜지스터로 시작해서 2009년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넘어서 발전하고 있다.\n\n이 정도로 조밀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발전이 필요하다. 생산 기업들은 수율을 유지하면서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포함하는 칩을 만들 수 있도록 세밀한 설계와 깨끗한 생산시설을 추구했다. 공정 향상은 ITRS로 요약할 수 있다. 설계 툴은 이런 설계를 합리적인 시간에 끝낼 수 있도록 발전했다. CMOS는 에너지 면에서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전력소비의 증가를 피하면서 NMOS와 PMOS를 대체했다. 1986년에 백만 개가 넘는 트랜지스터를 포함하는 최초의 1Mb 크기의 랩이 소개되었다. 1989년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에는 백만 개가 넘는 트랜지스터가 들어갔고, 2005년에는 십억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갔다\n\n## ULSI, WSI, SOC, 3D-IC\n복잡성이 더욱 커진 것을 반영하는 ULSI는 백만 개가 넘는 트랜지스터를 포함하는 초대규모 집적을 의미한다. 트랜지스터를 1,000,000개 이상 포함하고, 인텔의 486이나 펜티엄이 ULSI에 해당한다. VLSI와 ULSI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n\n웨이퍼 규모 집적은 한 개의 \"슈퍼칩\"을 만들기 위해 전체 실리콘 웨이퍼를 사용하는 매우 큰 집적회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WSI는 큰 규모와 줄어든 패키징을 통해 특히 병렬 슈퍼컴퓨터 같은 일부 시스템에서 매우 급격히 비용을 줄였다. WSI라는 이름은 WSI가 개발되었을 때의 기술의 발전 단계인 VLSI에서 유래되었다.\n\n3차원 집적 회로는 한 개의 회로에 수직과 수평으로 집적된 2개 이상의 활성 전자 소자의 층이 있다. 층간의 통신은 한 개의 실리콘에서 일어나는 신호를 이용하며 결과적으로 전력 소모가 분리된 동일한 회로보다 더 적게 든다. 짧은 수직 회로 선을 이용하는 것은 더 빠른 작동을 위해 전체 회로 선의 길이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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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알렉상드르 쿠아레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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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알렉상드르 쿠아레**는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과학사학자, 철학자이다. 근대 과학 혁명기에 대한 탁월한 연구로 유명하다.\n\n젊어서는 독일 철학의 세례를 받았고, 후에 프랑스로 이주해 활동을 했지만 뒤에는 미국을 중요한 지적 배경으로 선택했다. 르네상스 신비주의에서 낭만주의 철학 시기까지, 혹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서 뉴튼의 종합까지, 그의 가장 주요한 업적은 근대 우주론을 \"정신적\" 혁명의 기원이자 결과로 해석한 르네상스 및 근대 과학사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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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생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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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그는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과 랄랑드, 브렁슈빅 등의 신칸트주의자 밑에서 배웠으며, 독일에서는 훗설과 힐베르트 아래 있었다. 그의 최초의 연구는 제논의 역설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때 다루어진 운동 개념의 문제는 훗날 과학사학자로서의 그의 연구의 주요한 주제로 계속 남아있었다. 1919년 파리로 이주한 그는 계속 철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경향은 러시아 신비주의, 스피노자 철학, 그리고 현상학적으로 해석된 헤겔 철학이었고,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프랑스에서 현상학과 실존주의가 결합된 데는 그의 현상학 연구와 소개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현상학을 하이데거와 같이 형이상학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일종의 본질 탐구를 위한 방법론으로 받아들였다.\n\n일찍이 자콥 뵈메와 러시아 낭만주의 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르네상스 영성이나 러시아 민족주의와 같은 문화적 맥락을 \"개념적 분석\"을 통해 형이상학적 직관과 결합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르네상스 시기와 근대 초를 배경으로 한 과학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과학적 신조들이 마치 신학적인 신조와 마찬가지로, 그가 딜타이의 \"세계관\"이나 호프딩의 \"세계의 개념\"이라고 부른 \"사유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에 존재한 \"서로 다른 사유 구조\"를 찾아내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쿠자의 니콜라스, 파라켈수스, 코페르니쿠스 등을 연구하며 그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사유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가장 어렵고 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레비 브륄의 \"망딸리떼\" 개념을 받아들여 과학사 연구에 적용시켰다.\n\n쿠아레의 대표적인 저작물은 프랑스어로 쓴 \"갈릴레오 연구와 영어로 쓴 \"닫힌 세계에서 열린 우주로\"와 같은 르네상스-근세 시기의 물리학과 우주론에 대한 과학사 연구이다. 하나의 과학 이론을 당시의 문화적 맥락과 형이상학적 직관을 결합시켜 해석한 그의 과학사 연구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이나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을 가능케 해준 토양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n\n\"과학적 사유는 진공 속에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는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질 관념의 틀, 기본적인 원칙,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공리들 속에서 발생한다.\" 과학을 다른 종류의 집합적 표상에 연결시키고, 과거의 언어를 재구성함으로써 쿠아레는 과학사 연구를 인류학적 연구의 기초 위에 세워놓았고 과학을 분석하는 새로운 역사적 방법론을 개발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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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노회찬이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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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노회찬**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정계 입문 이전에는 인천 지역 노동자들의 연맹을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후 정계에 입문해 제17·19·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강화이며 부산 출생이다.\n\n1982년 용접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3년 수감되었다. 이후로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독수독과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당했다가 2016년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창원시 성산구에서 당선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 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n\n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던 중 7월 23일 오전 9시 38분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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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생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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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 어린 시절\n어머니 원태순의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이며, 교사를 하던 중 전쟁이 터져 1.4 후퇴 때 거제도로 피난한 후 함경남도가 고향인 아버지 노인모를 만났다. 노회찬은 1956년 부산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생 시절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고교시절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축제에 초청을 받고 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한 해 개봉영화를 모두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었다고 한다.\n\n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시험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여 1973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삶을 보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3년,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씨알의 소리, 다리와 같은 잡지를 읽게 되었고, 함석헌, 백기완, 선우휘 등 저항적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을 했던 동기들이 정광필, 이종걸 등이다.\n\n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입시에 떨어졌다. 노회찬은 재수를 하지 않고 바로 군대를 지원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n\n## 청년기\n\n### 노동운동\n대학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노회찬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 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한다. 이때부터 노회찬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n\n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1982년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 했다. 그 뒤 서울, 부천,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하게 된다. 첫 직장은 기아자동차였으나, 대학생 신분인 것이 탄로나 해고 당한다. 그 뒤 여러 공장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노동자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은 정치적인 서클로 발전하게 된다.\n\n대학생 노회찬은 이렇게 노동운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회찬은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었다. 긴 수배 생활이 시작되었다.\n\n###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n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터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전쟁 이후 억눌려왔던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시민권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 출범했다.\n\n인민노련은 80년대 운동의 유행이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즉, 정치적 신념을 현실변화에 대한 성찰이 없이 맹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인천 부평에서 창립을 선포했다. 결성 직후 내부 논쟁을 통해 NL진영이 이탈하면서,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의 운동 방향과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민노련은 민중 민주파로 분류되기도 한다.\n\n인민노련은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즉, 진보정당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대선후보로 추대했으나, 백기완이 야권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게 된다. 이후 인민노련은 등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거듭났다. 인민노련은 당시 존재했던 진보적인 사회운동 조직 중 현장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가장 큰 전위조직이었다.\n\n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격주간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하던 중 1989년 12월 24일에 체포된다. 노회찬은 법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1992년 만기 출소한다. 옥중에서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원고를 구상하기도 했다.\n\n체포 1년 전인 1988년 12월,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김지선과 결혼했다.\n\n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송영길 민주당 국회의원, 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국회의원 등이 있다.\n\n## 초기 정치활동\n노회찬의 복역 도중 인민노련은 1991년 7월 이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합법정당으로 조직을 전환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신노선은 논란 끝에 통과되고 한사노당 창준위는 기존의 지하정당 노선을 탈피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1992년에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민중당과 통합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민중당은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하고 해산당한다.\n\n민중당 당권파였던 김문수, 이재오 등은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김영삼의 영입을 받아들여 민주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1992년 4월 15일 를 결성한다. 진정추는 진보정당을 당장 건설하기에 역량이 부족하다는 내부 평가를 내린 뒤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대응하기로 한다.\n\n### 진보정당 추진위원회\n1992년 초 감옥에서 만기 출소한 노회찬은 진정추의 결정에 따라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백기완은 23만표, 1%정도의 지지를 얻고 패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실망하고 다른 길을 갔지만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을 계속하기로 한다.\n\n노회찬은 진정추 1기 사무총장을 거쳐 2~4기 대표를 역임한다. 노회찬은 진정추를 \"창당에 이르는 안정된 중간단계로서 준정당적 조직\"으로 위상을 규정하고 민중정치연합과의 통합을 추진한다. 1995년 9월 25일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으로 거듭났다. 노회찬은 진보정치연합의 창립이후 진정련이 국민승리 21에 통합되기까지 대표를 역임했다.\n\n진정추 활동을 하던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을 역임했다.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 발행으로 부채를 많이 지게 되었다. IMF 외환위기때는 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n\n노회찬 진정련 대표는 1996년 보수야당 소수파였던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추진한다. 1992년 민중당과 백기완 선거운동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섣부르게 창당했다가 조직적으로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n\n개혁신당은 총선을 앞두고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되었다. 노회찬은 이때 진보정당 추진세력의 대표 자격으로 통합민주당의 당무위원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적인 보수야당과의 제휴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n\n###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참여\n96-97 총파업 이후 민주노총은 보수 야당에 의존적인 기존의 노동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역시 독자적 진보정당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진정련은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논의 끝에 1997년 대선 기구로서 국민승리21이 출범하게 된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한다.\n\n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우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306,026표를 득표하였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이 받았던 238,648표 보다는 높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n\n민주노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승리21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전국연합은 공식적으로 국민승리21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1987년, 1992년과 달리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을 건설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국민승리21은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23명의 당선자를 내며 반전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국민승리21은 충분히 준비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대응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이후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조직이다.\n\n### 민주노동당 활동\n국민승리21은 1999년 8월 29일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창당준비위원회는 권영길, 양연수, 이갑용을 공동대표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창당 작업을 시작했다. 노회찬은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월 30일 창당했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초대 부대표를 맡았다. 노회찬은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민주노동당의 대부분의 선거를 지휘했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18%의 저조한 득표를 기록했지만, 울산 등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 2, 광역의원 11명 당선, 정당득표에서 8.13% 득표를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노회찬은 2002년 3월 민주노동당 정기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까지 당의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n\n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회찬은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비례대표 순위를 뽑는 당내 선거에서 노회찬은 일반명부 4위를 기록해 8번째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 노회찬은 비례대표로 출마한 제17대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이 지역구에서 4석에 그치고 정당득표율이 3%에 미달해 비례대표를 배정받지 못하면서 10선에 도전한 김종필을 물리치고 국회의원이 되어 3김시대의 막을 내렸다.\n\n노회찬은 2004년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선대본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로 유명세를 얻었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졌다. 힘내라 진달래는 2004년 11월 3일 제 13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n\n## 정치 활동\n\n### 17대 국회의원\n노회찬은 17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배치되었다. 노회찬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에 선정되었다.\n이외에도 2005년 여성이 뽑은 여성친화적인 남성의원 1위, 2005년 시민운동가가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2005년 PD들이 뽑은 베스트 의원 1위에 뽑혔다. 여성단체 호주제폐지 감사패, 한글을 빛낸 큰 별, 무지개 인권상, 장애인 차별금지법 감사패, 동남아 쓰나미 국회의원 우수외교상,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으로 불교계 감사패 등을 수상했다.\n\n노회찬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아온 검사 7인을 공개한 이른바 \"삼성 X파일\"을 폭로했다. 또한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운동,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 학교급식 직영화, 일반병원까지 6세미만 어린이의 예방접종 무료, 아토피걱정 제로 프로젝트, 지역복지재정 확충을 위한 법 개정 추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추진,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 전월세 세입자 보호법 추진등을 했다.\n\n제 17대 국회 4년 임기동안 총 467건의 의안을 발의하였다. 이중 1인발의한 의안은 총 0건이며 본회의에서 가결된 의안은 총 31건이다.\n\n#### 삼성 X파일 사건\nMBC 이상호 기자가 2005년 7월 22일 방송을 통해 삼성 X파일을 공개했다. X파일은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당시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테잎과 이를 분석한 안기부의 보고서를 말한다. X파일에는 1997년 4월부터 10월까지 시시각각 변해가는 당시 정국을 반영한 삼성측의 전방위 로비실태가 담겨있던 것으로 전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X파일에는 삼성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엄청난 뇌물을 건냈으며, 최고위급 검찰 간부들에게 명절대마다 1천만원에서 5백만원의 떡값을 뿌리며 검찰 인맥을 관리했다는 내용등이 포함되어있었다.\n\n그러나 방송에서 뇌물을 받은 검찰들의 실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노회찬은 안기부 X파일을 입수 한 뒤, 2005년 8월 18일 국회 법사위 회의에 앞서 배포한 '안기부 X파일' 관련 보도자료를 통해 옛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에서 삼성그룹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그러나 검찰은 불법으로 금품을 수수한 고위 검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노회찬의원과 MBC 이상호 기자를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n\n노회찬은 1심에서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2009년 12월 4일 열린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8부 2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난 느낌\"이라며 \"사필귀정\"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오늘 판결은 삼성 X파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며 \"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삼성 관계자, 중앙일보 관계자, 전 현직 검찰, 검경언권 모든 주체들이 삼성 X파일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의 나머지 300여개 녹취 테잎이 아직 서울중앙지검에 남아 있다\"면서 \"이 문제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n\n### 대선과 진보신당 창당\n노회찬은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 출마를 결정하고 대선 레이스에 참가했다. 노회찬은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주제로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다. 노회찬은 경선 패배후 심상정 후보를 지지했다. 대선 전부터 민주노동당이 가지고 있었던 정파간의 갈등은 대선후보 경선을 거치며 더욱 첨예하게 드러났다. 결국 권영길 후보가 2002년 대선 보다 낮은 3.0%의 지지를 얻고 대선을 참패했다. 대선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이 시작되었다. 당 지도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심상정 비대위를 출범 시켰다. 그러나 2008년 2월 3일 열린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가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동거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을 준비했다.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 이덕우, 박김영희, 김석준과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n\n노회찬은 진보신당 창당 직후인 2008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노원구 병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노회찬은 여론조사에서 줄곧 한나라당의 홍정욱 후보에게 앞서, 지역구 당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 김성환 후보가 13,036표를 들고 가는 바람에 결국 3.05% 차이로 석패한다. 하지만 노회찬의 선전은 진보 정당의 후보로서 서울에서 상당한 득표를 했다는 점에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의석이 없는 다른 소규모 정당과는 달리 정당 지지율 2%를 넘겼기에 정당등록취소를 면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정당보조금도 일부분 받을 수 있었다.\n\n18대 총선 이후 노회찬의 패배를 아쉬워 하는, 이른바 지못미 당원의 증가가 크게 이어졌다. 노회찬은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더 많은 지지자와 당세를 확보하게 되었다.\n\n### 촛불시위\n총선 이후 진보신당은 내부적으로는 총선용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재창당하여 본격적인 틀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앙당 측은 당 홈페이지를 통해 재창당에 대한 일반당원들의 의견을 물었으며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8년 5월 16일에는 재창당에 대한 평당원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해 광장에 나간 시민들을 당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재창당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노회찬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활발하게 참여했다. '진보신당 칼라TV'에 리포터로 자주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촛불시위 초기 시위 배후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이 이어지자 \"촛불시위의 배후가 있다면 이명박 정부\"라며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협상 때문에 건강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순수하게 모여서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n\n진보신당은 촛불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진보신당 칼라TV' 방송 이외에도 연행자 면회 및 경찰서 항의 방문, 연행 과정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에 대한 법률적 자문, 중간에 참여하고자 하는 시민들을 위한 중앙당 상황실 개설 등의 활동을 했다. 진보신당의 촛불시위는 총선 이후 지못미 효과와 이어져 당원수의 증가로 이어졌다.\n\n### 제2창당과 진보신당 대표 취임\n촛불시위가 사그라들며 당 내부에서는 미뤄둔 '제2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자는 의견이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2008년 9월부터 당내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지역별 순회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토론회에서는 현재 진보신당이 내걸고 있는 '4대 가치'인 평등, 생태, 평화, 연대로는 이념지향을 드러내기 힘들며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통합, 생태주의, 여성주의의 복수의 이념 등을 가치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n\n이를 바탕으로 2009년 3월 1일에 용산 구민회관에서 열린 첫 정기당대회 1차 대회에서는 현행 공동대표 체제를 임기 2년의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하는 조직개편과 당명변경, 당 강령 개정, 재보궐선거 예비후보 선출 등이 결의되었다. 정기당대회 1차 대회의 결의에 따라 3월 23일부터 3월 27일까지 닷새간 당원투표를 실시했고, 그 결과가 3월 29일에 송파 구민회관에서 열린 정기당대회 2차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심상정과 당 대표 경선이 예상됐지만 심상정의 불출마로 단독 출마해서 29일 열린 2차 당대회에서 전 당원을 대상으로 한 직접투표에서 투표율 58.7%에 97.9%의 찬성을 받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n\n노회찬은 진보신당 대표로 취임하여 \"서민복지동맹\"을 제안하고, 진보신당의 정책 상품을 개발하여 정책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n\n2009년 4월 29일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에서 울산 북구의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면서 진보신당은 원외정당에서 원내정당으로 진입하게 되었다.\n\n### 서울시장 출마\n노회찬은 2009년 11월 29일 진보신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고. 2010년 1월 31일 2010년 지방선거 출마후보를 결정하는 서울시당 후보선출 대회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서울\"을 모토로 콘크리트 서울이 아닌, 보편적 복지정책을 펼치는 도시를 만들것을 주장했다.\n\n선거가 끝난 후 3.3%를 득표하는 데 그쳐 서울시장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회찬이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하였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제18회 국회의원 선거 시절 노회찬은 홍정욱과 벌였던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갈린 표 때문에 졌어도 민주당 후보를 탓한 적이 없었다. 6월 3일부터 6월 5일까지 선거 과정에서 국민참여당-민주노동당 연합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엉뚱하게 노회찬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려지기도 했다. 선거가 끝나고 화살을 맞을대로 다 맞은 한참 후에 노회찬은 나꼼수 팟캐스트에서 한명숙쪽에서 단일화에 대한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고 밝혔다.\n\n### 대표직 사퇴와 탈당\n노회찬 전 대표는 2010년 진보신당 대의원 회의의 결정으로 진행된 새로운 당 대표단 선거에서 조승수 의원이 3대 대표로 선출되면서 진보신당 대표에서 물러났다.당시 노회찬 전 대표는 모든 당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어 진보신당 대표로서의 마지막 감사인사를 하였다.\n\n2011년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른바 종북주의 문제로 인하여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논의가 결렬이 되었다. 또한 진보신당 대의원 대회에서 통합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에 노회찬은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당을 탈당해 '새진보정치연대'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새진보연대와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이 3당 합당을 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노회찬은 당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n\n### 총선 승리와 의원직 상실\n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노원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57% 득표율로 당선되었다.\n\n2013년 2월 14일 대법원은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을 입수해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노회찬 공동대표에 대해 상고를 기각, 징역 4월과 자격정지 1년을 형을 확정했다. 노회찬 전 의원은 2005년 8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검사 7인의 이름이 담긴 이른바 '삼성 X파일'을 인터넷에 올렸다. 대법원의 유죄 선고 논리는, 'X파일'에 실린 검사들의 이름을 보도자료를 통해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면책 특권에 해당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 알게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규정하는 통신비밀보호법에 근거하여 판결했다.\n\n불법 도청·감청 행위와 이를 공개한 행위를 동일하게 처벌하도록 한 통신비밀법 위반의 경우 벌금형 없이 무조건 실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는데 현역 의원의 경우 통비법 위반 유죄가 인정되면 무조건 의원직을 박탈당하므로 지나치게 과도한 처벌이란 비판이다. 2013년 2월 4일 여야 의원 159명이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는 통비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대법원에 선고연기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과반수의 국회의원들이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입법 통과가 분명한데 판결을 강행한 것은 오히려 법이 바뀔까봐 한사람을 표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서둘러 재판했다는 의혹이 있다. 또한, 도청된 대화 내용에는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노회찬은 \"유죄판결 받은 통신비밀보호법은 불법 도청된 내용을 공개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은 도청된 내용에 안 나와 있다\"며 \"다른 언론에서 공개한 이니셜로 추론한 것인데 사실이 아니라면 그 점을 처벌해야지 도청된 내용 공개로 처벌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판사 출신인 서기호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의 취지는 국민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것이지 재벌이 검사들에게 떡값을 주는 범죄까지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고 비난했고,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도 \"대법원 판결을 접하고 참으로 답답하다. 국회의원이 권력형 비리를 고발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권력형 부패를 어떻게 청산할까\"라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민변은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것은 삼성이라는 거대 재벌이 검찰을 돈으로 관리하려고 모의하는 대화내용이었으며, 그 대화에 거론된 검사들의 명단이었다. 공개한 내용에 보호돼야 할 사생활은 전혀 없으며, 오로지 재벌이 돈으로 검찰을 관리하려는 내용뿐이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공적 영역에서조차 표현의 자유, 국민의 알 권리가 아닌 권력집단의 손을 들어 주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며 규탄했다.\n\n황교안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대해서 그는 \"과거 안기부 X파일 사건을 덮는 걸 주도한 사람이 지금 검찰 개혁을 지휘해야 할 법무부 수장으로 지명이 됐다. 같은 시각, 검찰 개혁을 촉구하면서 검찰을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한 나는 국회를 떠나게 됐다\"며 부당한 현실을 꼬집었다.\n\n### 노회찬 '안철수 노원병 출마' 반대의사 표명\n2013년 3월 4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2013. 4·24 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노원병에 출마하기로 한 데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n\n### 보궐선거와 20대 총선\n노회찬은 2014년 7월 30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선거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와 단일화하여 사실상 야권단일후보로 선거에 나섰다. 출마한 선거구는 서울시 동작구 을이였다. 하지만 48.69%의 득표율을 올렸으나 2위에 그쳐 패배하였다. 1위는 나경원이었고, 노회찬과 표차이는 928표였다.\n\n2016년에 있었던 제20대 총선에서는 서울 노원구 병과 경남 창원 성산 중 어느 지역구에 출마할지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노원병은 자신의 옛 지역구이자 안철수 의원의 지역구이며, 경남 창원 성산은 제조업이 발달해 있고 노조 조직률이 높은 지역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창원 성산 출마를 권유하였고, 노 후보는 성산 출마를 결정했다. 노 후보는 당선되어 3선에 성공하였다.\n\n2016년부터 계속 원내대표를 하였다. 2018년 6월 재선출되어 3연임을 하게 되었다.\n\n20대 국회에서 노 의원은 특수활동비 폐지를 주장했다. \"내년 예산 편성 때 국회 특수활동비를 제외해야 하고, 올해 예산에서 남은 특수활동비는 각 정당이 매달 사용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고 발언하였고,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n\n2018년 7월부터는 JTBC 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n\n## 사망\n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n\n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노회찬 전 원내대표가 정의당에 보낸 유서}}\n\n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의혹을 받았고, 2018년 7월 23일 노 의원은 동생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8분쯤 서울 중구 신당동 N아파트 1층 현관 앞에서 노 원내대표가 쓰러져 있는 것을 아파트 경비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투신장소로 보이는 아파트 17~18층 사이 계단에는 노 원내대표 외투, 신분증이 든 지갑, 정의당 명함, 유서 3통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유서에는 \"드루킹 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있다. 하지만 청탁과는 관련이 없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n\n같은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늘 노동현장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의 애환과 고충을 대변하고자 했던 진정성이 어떻게 비통한 죽음으로 고하는지 말문을 잇지 못하겠다\"라며 애도를 표했다.\n\n정의당은 노 원내대표의 유가족과 상의하여, 장례 형식은 정의당장으로 5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장례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이정미 대표가 맡기로 했다. 이후 문희상 국회의장의 제안으로 7월 23~25일 3일간은 정의당장으로 치르고, 26~27일 이틀간은 국회장으로 승격해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n\n7월 27일 오전 9시 세브란스병원에서 발인이 치러졌다. 발인에는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심상정 의원, 유시민 작가, 강기갑, 천호선 전 의원 등이 참석하였다. 발인식에서 이정미 대표와 심상정 의원은 오열했고, 유시민 작가는 마지막 목례를 올리며 예의를 표했다. 영정은 이 후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져 10시부터 영결식이 진행되었으며, 개식-묵념-약력보고-국회의장 추도사-이정미 대표 추도사- 심상정 의원 추도사-유가족 인사-헌화- 퇴장의 순이었다. 이정미 대표는 \"노회찬의 정신은 정의당의 정신이 될 것이다\" 라며 당의 미래를 결의했고 심상정 의원은 \"노회찬 나의 사랑하는 동지, 영원한 동지여\" 라고 부르짖으며 오열하였다. 노 전 의원의 조카 노선덕 씨는 유족 인사말에서 \"무슨 길을 선택해야 할 지 모른다면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라는 큰아버지의 뜻을 받들겠다고 밝혔다. 영결식 이 후 영정은 노회찬 의원의 사무실인 국회의원회관 510호와 정의당 당사, 국회 건물 등을 둘러본 뒤 오전 11시 30분 국회의사당을 떠났다. 국회의원회관 밖에는 시민들이 모여 \"잘가세요\" 라고 외치며 노란 꽃과 비행기를 던졌다. 이 날 국회는 조기를 계양하였다.\n\n오후 1시 노 의원의 영정은 서울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 도착하였고 화장은 예정보다 5분 늦게 진행되었다. 운구는 여영국 창원 시의원 등이 진행했고 이정미 대표와 심상정 의원 및 조문객들은 오열하였고, 부인 김지선 전 정의당 고문은 부축을 받으며 나가기도 했다. 2시 30분 화장이 종료된 후 유골은 노 의원의 사위 손에 들려 서울추모공원을 빠져나왔다. 오후 4시부터 장지인 마석모란공원에서 하관식이 진행되었고 하관과 헌화 등의 순서가 이어진 뒤 참석자 전체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며 국회장의 모든 일정이 끝났고, 노 의원은 영면에 들어갔다.\n\n한국갤럽 8월 1주차 여론조사에 의하면, 노 의원의 사망 이후 정의당의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올라가 15%로 최고치를 기록하였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을 넘어선 적이 있다.\n\n이후 2019년 4월 3일 그의 지역구인 창원 성산구에서 보궐선거가 치뤄졌고,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선거 다음날 여영국 당선인은 당선증을 가지고 노회찬 의원의 묘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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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설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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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일본 서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을 임신한 채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왕은 일본군이 도착하자 스스로 결박하고 항복하였고 말과 마구를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배에 돌을 대어 아이의 출산을 늦추었고, 일본에 돌아가 치쿠시에서 오진 천황을 출산했다고 전하고 있다.\n\n그러나 삼한 정벌설은 왜곡된 것이라는 논란이 많다. 메이지 시대에 그려진 삼한정벌도 속 신라왕은 파사 이사금인데, 진구 황후와 파사 이사금은 살던 시대를 비교했을 때 서로 만날 수 없는 인물이었단 점을 보아도 삼한 정벌설은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삼한 정벌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이유로 삼았던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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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진무 천황의 개요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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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에 따르면 진무 천황은 기원전 711년? 아마쓰히코 히코나기사타케 우가야후키아에즈노 미코토의 4남으로 태어나 기원전 585년에 127세로 죽은 것으로 전한다. 일향국에서부터 같이 동진을 한 이쓰세노미코토, 이나히노미코토가 있으며 이나히노미코토는 신라왕의 조상이라고 쓰여있다.\n\n지금의 진무 천황이라는 시호는 나라 시대의 762년경에 오우미노 미후네가 찬진한 시호이다. 그는 45세 때 규슈 휴가국를 떠나 4년 후 가와치국에 입성한 이후 야마토국을 거점으로 삼던 나가스네히코와 충돌했다. 잠시 퇴각해 쿠마노 등을 경유한 후 다시 야마토국에 들어가 나가스네히코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야마토국을 정복하였고 기원전 660년 가시하라노미야에서 천황으로 즉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n\n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2월 11일이 일본의 건국일로 간주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의 건국 기념일로 정해졌다. 1889년에는 우네비 가시하라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현 가시하라시 우네비야마 근교에 진무 천황을 제신으로 섬기는 가시하라 신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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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일본의 국기의 역대 깃발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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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1952년 - 1999년\n제2차 세계 대전 패망 이후부터 다시쓰는 현 일본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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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독일 민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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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1949년부터 1952년까지는 5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n\n1952년 7월 25일에 실시된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5개 주가 폐지되었으며 14개 구가 신설되었다. 이 때에 신설된 14개 구는 게라 구, 노이브란덴부르크 구, 드레스덴 구, 라이프치히 구, 로스토크 구, 마그데부르크 구, 슈베린 구, 에르푸르트 구, 줄 구, 카를마르크스슈타트 구, 콧부스 구, 포츠담 구, 프랑크푸르트 구, 할레 구였다. 이들 구는 하위 행정 구역인 군과 시로 나뉘었으며 구의 이름은 각 구의 구청 소재지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수도 동베를린은 1961년에 구와 동등한 행정 구역으로 승격되었다.\n\n1990년 7월 22일 인민의회가 채택한 법률에 따라 14개 구가 폐지되었으며 5개 주가 신설되었다. 이 법률은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재통일과 함께 시행되었으며 1990년 10월 14일을 기해 주 정부가 신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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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종속형 시트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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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종속형 시트** 또는 **캐스케이딩 스타일 시트**는 마크업 언어가 실제 표시되는 방법을 기술하는 스타일 언어로은 style.css이다.\n\n마크업 언어가 웹사이트의 몸체를 담당한다면 **CSS**는 옷과 액세서리처럼 꾸미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HTML 구조는 그대로 두고 CSS 파일만 변경해도 전혀 다른 웹사이트처럼 꾸밀 수 있다.\n\n현재 개발 중인 CSS3의 경우 그림자 효과, 그라데이션, 변형 등 그래픽 편집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이미지를 대체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또한 다양한 애니메이션 기능이 추가되어 어도비 플래시를 어느 정도 대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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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CSS는 1994년 10월 10일, 하콤 비움 리가 처음 제안하였다.\n\n## 버전의 변화\nCSS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버전이 나오고 있다. 1996년에 도입된 은 CSS의 바탕이 되었다. CSS의 표준으로는 이 있으며 이전 버전에 비하여 새로운 기능과 도구가 추가되었다. 대다수의 웹 브라우저는 CSS 3를 잘 지원한다. 현재 W3C에서는 CSS 3를 표준으로 만들고 있다.\n\nCSS는 여러 수준과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다. 각 수준의 CSS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능을 담고 있으며 CSS1, CSS2, CSS3, CSS4로 나뉜다. 프로파일들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장치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위해 만들어진 하나 이상 수준의 CSS의 하부 집합이다. 현재 휴대용 장치, 프린터, 텔레비전 수상기를 위한 프로파일들이 있다.\n\n### CSS1\n첫 CSS 규격은 공식 W3C 권고안이 되었으며 그 이름은 CSS1이다. 1996년 12월에 발표되었다.\n\n### CSS2\nCSS2는 W3C가 개발하였으며 1998년 5월에 권고안으로 발표되었다.\n\n### CSS3\nCSS3는 2005년 12월 5일 이후 개발 중에 있다. 전체가 모듈화되어 사용자 에이전트가 모듈에 대한 모든 모듈을 지원하지 않거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다른 세로 글쓰기와 HTML 이외의 규격에까지 관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현재 어떤 모듈도 권고안까지 이른 것은 없다.\n\n### CSS4\n하나의 통합된 CSS4 사양은 없는데,"
} |
{
"from": "user",
"value": "에르되시 수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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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에르되시 수**는 공동연구 네트워크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단계를 나타내는 수로 베이컨의 수와 같은 개념으로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 팔과 몇 단계를 거쳐 연결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이다."
} | {
"from": "user",
"value": "영향은?"
} | {
"from": "gpt",
"value": "에르되시는 엄청난 양의 공동연구를 했기 때문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수학자일수록 에르되시 수가 작은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장난처럼 얼마나 뛰어난 수학자인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2000년경에 활동중인 모든 수학자들의 에르되시 수는 최고 15 정도이지만 평균은 5 이하이며 거의 모든 사람이 8 이하의 에르되시 수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날이 갈수록 서로 다른 학문간에 공동 연구가 많아짐에 따라 현재 활동중인 모든 과학자들이 수학과 크게 관계없는 분야에서조차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는 어떤 통계학자가 임상실험에 관해 어떤 약학자와 공동 논문을 저술했다면 그 약학자 역시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약학계의 많은 사람들이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게 될 것이다.\n\n알렉스 로페스-오르티스에 의하면 1986년부터 1994년까지 필즈상과 네반리나상 수상자들의 에르되시 수는 9를 넘지 않는다.\n\n같은 개념을 영화계에 적용한 것으로 '케빈 베이컨의 여섯 단계'라고도 알려진 베이컨 수가 있다. 베이컨 수는 케빈 베이컨과 영화를 같이 찍은 배우들에게 숫자를 매긴다.\n\n2004년 4월 20일 에르되시 수 4인 연구원 는 이베이에 자신과 공동연구를 통해 에르되시 수 5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경매로 내걸었다. 1,031달러에 낙찰받은 낙찰자는 이미 에르되시 수 3을 갖고 있었다. 그는 “논문은 연구를 통해 스스로 쓰는 것이지 경매를 통해 사고 파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n\n옛날 수학자들은 현대에 비해 논문을 적게 썼고, 공동 저술은 더욱이 적었기 때문에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는 사람이 많지 않다.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는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수학자로는 공동 저술의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리하르트 데데킨트와 게오르크 프로베니우스가 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같은 그 이전 수학자들은 유한한 에르되시 수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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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삼한의 변한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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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변한은 고대 삼한 중의 하나인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지역과 종족명으로 마한의 동쪽,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여 12개의 작은 부족 국가로 형성되어 있었다. 인구는 진한의 12나라와 합쳐서 4~5만 호이며, 지금의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동부 일부와 경상북도 남부 일부에 이르는 범위에 위치했다. 12국은 미리미동국·접도국·고자미동국·고순시국·반로국·낙노국·미오야마국·감로국·구야국·주조마국·안야국·독로국으로 서쪽은 지리산, 북쪽은 가야산, 동쪽은 낙동정맥을 경계로 하였다. 각국에는 군장이 있어서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 등으로 불리었다.\n\n삼국유사에서는 변한을 백제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명칭은 백제 땅에 변산이 있었던 것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하였다.\n\n언어·주택·풍속·의복은 진한과 비슷하였으나 제사는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었으며, 농업과 양잠을 주요산업으로 하였다. 뒤에 가야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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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한국의 역사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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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한국의 역사** 또는 **한국사**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동아시아의 한반도, 만주, 연해주 지역을 바탕으로 전개된 한국의 역사이다. 이 문서는 광복 이전의 한국에 대한 역사를 주로 기술한다.\n\n한국사의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되는 선사시대와 고조선의 성립 이후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까지의 고대, 고려 시대인 중세, 조선 시대인 근세,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 등으로 구분된다.\n\n한국의 역사는 고찰하고자 하는 영역에 따라 한국의 경제사와 같이 분야별 역사로 나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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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고대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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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한국의 고대는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900년까지의 시기로, 원삼국시대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으로 합쳐진 삼국시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시기 까지다\n\n## 삼국시대\n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은 각자 고유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들 나라는 이렇듯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시간적 선후를 지니며 각자 독자적으로 성립했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해 나갔다.\n\n일부 사학자들은 실질적으로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 시대가 전개된 것은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이므로 사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n\n### 고구려\n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훈강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n\n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 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n\n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의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과 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n\n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 등 새외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까지 지배하였다.\n\n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n\n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곧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의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에게 대패하였다.\n\n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n\n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해서 지방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가 되었다.\n\n해서 지방을 근거지로 670년년부터 검모잠은 군사를 일으키고 왕족인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신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검모잠과 안승이 싸우게 되고, 670년 8월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면서 검모잠의 부흥운동은 끝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671년, 당나라 장수 고간이 요동지역에 남아 있던 검모잠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전멸하였다.\n\n고안승이 이끄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은 호남 지방으로 이동하여 신라의 힘을 빌려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웠다. 신라의 괴뢰국으로 활동하며 나당 전쟁에 참여하고 일본과 견고려사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받았다.\n\n요동반도에서는 보장왕의 손자 보원왕고보원이 측천무후의 힘을 빌려 당나라의 괴뢰국인 소고구려등을 건국하였다. 소고구려는 당나라의 괴뢰국으로 있다가 발해에 편입되었다. 그후 고구려의 공백은 발해가 계승하였다가 망하자 왕자 대광현이 유민을 이끌고 왕건에게 귀순하며 고려로 이어졌으며 고려의 국호가 변형되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문 **코리아**가 되었다.\n\n### 백제\n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n\n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에 진출하고 전라도 지역의 마한 잔존 세력을 병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연이은 압박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맞았다.\n\n침체에 빠진 백제는 무령왕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부여를 계승해 국호를 **남부여**라하고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는등 중흥 노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본인도 관산성에서 전사했다.\n\n그 후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n\n### 신라\n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n\n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이사부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n\n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n\n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n\n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n\n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기벌포 등등에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n\n### 가야 연맹\n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이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n\n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532년 수도인 금관가야 등이 신라에 정벌, 투항하였고, 결국 대가야가 562년 최종적으로 항복함으로써 가야는 멸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가야의 패망 원인으로는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 |
{
"from": "user",
"value": "vi의 조작법을 알려주세요."
} | {
"from": "gpt",
"value": "Vi는 명령모드와 편집모드가 있으며 일단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일반적으로 명령모드로 시작하게 된다. 이때 키보드에서 키를 누르게 되면 편집모드로 들어갈 수 있다. 편집모드에서 문서 내용을 추가, 삭제 등 편집 작업을 할 수 있다. 여기서 키를 눌러 편집모드를 빠져나와 다시 명령모드로 되돌아 올 수 있다. 따라서 vi에서는 편집모드에서만 내용을 넣거나 수정할 것을 권장한다. 명령모드에서 vi를 종료하기 위해서는 또는 키를 눌러 명령행을 활성화한다. 여기서 또는 등을 사용할 수 있다.\n\n## Vi의 여러 가지 명령어\nvi 편집기는 입력, 명령, 비주얼 등의 모드가 있어 같은 키 입력이라도 현재 모드에 따라 다른 동작을 한다. 입력과 명령모드를 주로 왔다갔다 하면서 편집하게 된다. 입력모드에서는 말 그대로 입력하는 문자가 그대로 문서에 입력된다. 입력상태에서 키를 누르면 명령모드로 바뀌게 된다. 명령어 모드에서는 나 키 등을 사용하지 않고도 키를 두드려서 커서의 움직임이나 복사하기, 종료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는 커서를 아래로, 는 위로 움직이게 하며, 는 입력상태로 들어가게 한다. 명령어 모드에서 키를 누른 후 등을 누르면 선택영역반전 기능이 순간 활성화되어 영역 선택을 설정할 수 있게 된다. vi 실행 초기의 모드는 명령모드이기 때문에 vi를 처음 사용하는 사용자들은 아무리 키를 눌러도 누른 키가 입력이 되지 않아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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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애덤 스미스가 누구인가요?"
} | {
"from": "gpt",
"value":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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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그의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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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스미스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적 사상은 영미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가진 시장중심의 철학은 시장경제라는 형태의 산업혁명의 기초를 낳았고 가격이 생산의 동기를 주는 가격은 시장이 결정한다라는 보이지 않는 손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n\n그의 국부론이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과,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도 어떤 형태로든 노동의 결과물을 보수로 받는것에 대한 설명에는 일관성을 잃는 점이 있다는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n\n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은, 노동자 또는 노동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면 ,초과된 잉여가치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의 결과물은 100% 자본가에게 귀속 된다는 점을 간과하였다.\n\n혹자들은 애덤 스미스를 보수 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애덤스미스는 위에도 서술 되어있듯, 독점과, 제3의 존재 개입을 철저히 배척하였다.\n\n일정 부분의 자유는 사회와 국가의 존립을 위해 일정 부분 통제되어야 하며 반드시 자정 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n\n또한 사회적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선순환적 작용으로서 군주국이나, 계급사회에서 일반적인 사람들도 경제적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표현하였다.\n\n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마저도 신분이나 출생, 성별, 인종, 연령, 계급 등의 이유로 박탈하는 사회구조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n\n일정부분 사실로서 증명되었고, 일정 부분은 부정적 요소 즉 자본 만능주의가 잘못 사용되었을 경우 특정 집단의 대다수가 자본 잠식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n\n특정 권력층에 권력과 자본이 몰려 있을 경우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설명하는 부분이 없다.\n\n또한 자본시장을 통제하는 자들과 정치의 결탁을 일정 수준 이상 견제하지 않으면 기형적이고 더욱더 계급화된 사회상을 갖게 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이론은 일정 부분은 오류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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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user",
"value": "대만의 여행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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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 기후\n대만의 기후는 온난 습윤 기후다. 섬 전체 연평균 기온은 23 °C로 온난하다. 여름은 5월부터 9월까지로 평균 기온은 28 °C이나, 겨울은 12월부터 2월까지로 짧고 매우 따뜻하여 북부도 평균 기온은 10 °C를 넘는다. 높고 험한 타이완 산맥과 계절풍은 대만 기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대만 북동부 지룽 및 이란의 많은 강우량과 건조한 남서부 요인이 있다. 섬 전체 연간 강수량은 2,540 mm로, 평지보다 산지가, 서해안보다 동해안 쪽이 많다. 또 6월부터 10월에는 태풍이 많이 거쳐가 매년 큰 피해를 준다.\n\n대만의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따뜻한 기후로 생성된 비옥한 풍토다. 광물자원으로는 석탄, 대리석, 유황, 석유, 천연가스 등을 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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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흑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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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흑체**란 진동수와 입사각에 관계없이 입사하는 모든 전자기 복사를 흡수하는 이상적인 물체이다.\n\n열평형 상태에 있는 흑체는 \"흑체복사\"라는 전자기 복사를 방출한다. 이 복사는 플랑크 법칙에 따라 방출되며, 그것인즉 물체의 모양이나 구성요소가 아닌 온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n\n열평형 상태의 흑체는 두 가지의 주요한 성질을 나타낸다.\n\n대략적인 흑체면의 사례로는 단단히 둘러싸인 벽의 구멍을 들 수 있다. 구멍 속으로 들어간 빛은 영원히 반사를 반복하거나 구멍 내부에 흡수되어 다시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구멍은 거의 완벽한 흡수체이다. 이렇게 둘러싸여 사방이 막힌 복사체는 벽의 성질과 구멍을 둘러싼 다른 성분들에 따라 열평형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n\n실제의 물질은 흑체 에너지 수준의 극히 일부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정의에 따르면, 열평형 상태의 흑체는 방사율이 ''ε'' = 1.0이다. 진동수와 관계없이 방사율이 이것보다 낮은 물질은 보통 **회체**라 한다.\n방사율을 최대한 1에 가깝게 하여 흑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재까지도 주요한 관심대상으로 남아 있다. 한편 **백체**란 \"모든 입사광선을 완벽히, 모든 방향으로 균일하게 반사하는 거친 면\"이다.\n\n천문학에서, 항성과 행성의 복사를 유효온도에 관하여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유효온도란 똑같은 양의 전자기 에너지 선속을 방출하는 흑체의 온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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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흑체 복사는?"
} | {
"from": "gpt",
"value": "## 키르히호프의 복사법칙\n**\"복사파의 분포가 물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 않고, 오직 온도에만 의존한다.\"**\n\n한 물체가 뜨거워지면 열을 내게 되는데, 이를 복사라고 부른다. 고체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조사하면 여러 가지 파장 또는 진동수를 가진 빛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물체나 그 표면에 부딪히는 복사열의 일부는 흡수하고 나머지는 반사한다. 특히 표면에 부딪히는 모든 복사를 흡수하는 경우 이런 물체를 흑체라고 부른다. 물론 흑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 즉 복사열을 방출도 한다.\n19세기말에 물리학자들은 흑체에서 어떻게 여러 가지 진동수를 가진 복사가 나오며 이들은 표면의 온도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많이 연구하였고 복사의 연구로부터 양자론이 시작되었다.\n\n이런 흑체에 대한 연구의 시작은 1850년대부터로 생각할 수 있다. 1859년말에서 1860년초에 키르히호프는 '흑체복사강도의 분포는 벽의 물질이나 빈구멍의 모양, 크기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온도와 빛의 파장에만 관계된다는 것이다'는 것을 밝혔다. 즉, 같은 온도로 달구어진 물체는 돌이든 쇠든 방출하는 빛의 분포가 똑같다는 것이다.\n\n하지만 당시의 실험이나 이론물리학 수준으로는 다양한 온도와 파장에 걸쳐 키르히호프가 정의한 열복사의 강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n\n## 슈테판 - 볼츠만 법칙\n키르히호프가 복사법칙을 발견하였지만, 열복사 문제를 맥스웰의 전자기학과는 별개로 취급되는 등 당시의 이론물리학 수준으로는 키르히호프의 복사 법칙을 정확하게 기술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n\n1879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요제프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전체 복사 에너지가 절대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884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슈테판의 공식을 맥스웰 방정식을 사용하여 유도하였다. 이 법칙을 오늘날 **슈테판-볼츠만 법칙**으로 부른다.\n\n1886년 미국의 천문학자인 랭글리는 적외선의 강도를 잴 수 있는 볼로미터를 개발해서 흑체구리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태양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정량적인 흑체 복사 법칙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볼로미터를 이용한 랭글리의 실험은 여러면에서 정성적이고 상당히 엉성한 것이었지만, 곧 여러사람들에 의하여, 실험적 차원에서 더욱 정교한 정량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1888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전자기파의 존재를 발견한 뒤에야 많은 사람들은 가시 광선이나 열복사에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을 적용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n\n### 슈테판-볼츠만 법칙의 유도\n동공 속의 에너지 밀도 u는 에너지 밀도를 모든 진동수에 대해 적분하여 얻을 수 있다.\n\n여기서 에 비례한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슈테판-볼츠만 법칙이라고 한다.\n\n## 빈 변위 법칙\n빈 변위 법칙은 흑체 복사의 파장 가운데 에너지 밀도가 가장 큰 파장과 흑체의 온도가 반비례한다는 것을 말하는 법칙이다.\n\n## 레일리-진스 법칙\n1900년 6월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는 위에서 주어진 빈의 미지함수 F가 상수임으로 보였는데, 고전물리학적 개념을 사용한 이 공식의 완전한 유도는 1905년 레일리와 진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흑체복사 스펙트럼을 설명하기 위해, 레일리와 진스는 흑체복사를 온도 T에서 복사가 채워진 공동 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전적인 계산을 하였다.\n\n### 레일리-진스 법칙의 유도\n\n#### 방식의 수\n흑체 내부의 밀폐된 빈 공간을 한 변의 길이가 A, B, C인 직육면체로 한다. 그리고 흑체 내부의 빈 공간과 그 벽면은 온도 T의 평형상태에 있다고 가정한다.\n공동의 벽을 완전 반사체로 가정하였기 때문에 복사는 전자기파의 정상파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각 벽 위에서 정상파의 마디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방향이야 어떻든 간에 벽과 벽 사이의 경로가 반 파장의 정수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은 정상파의 x,y,z방향에 대한 가능한 파수들은 각각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시킨다.\n\n그리고 총 파수는 다음과 같은 식을 만족한다.\n\n위의 식은 타원체의 방정식에 해당된다. 주어진 보다 작은 값을 갖는 방식의 수를 구하자.\n\n이 값은 n,m,l으로 구성된 공간에서의 타원체의 제 1상한 부분의 부피에 해당한다. 빛은 두 개의 자유도를 가지므로, 그 부피에 2배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므로\n\n를 얻는다. 한편 직육면체의 부피는 V = ABC 이므로 단위 체적당 진동수가 사이에 있는 방식의 수는\n가 된다.\n가 된다.\n\n#### 에너지 밀도\n다음 단계는 각 정상파당의 평균 에너지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양자 물리와 고전물리 사이에 차이가 벌어진다. 이미 언급했던 고전적인 에너지의 등분배 법칙을 따르면 온도 T에서 열적 평형을 이루고 있는 어떤 개체로 이루어진 계에서 각 자유도에 배당되는 평균 에너지는 1/2kT이다. 복사로 가득 찬 공동 내에서의 정상파는 평균 총 에너지로 E=kT를 주는 두 개의 자유도를 가진다. 왜냐하면, 각 파는 공동의 벽안에 있는 한 진동자로부터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동자는 두 개의 자유도를 가지는데, 하나는 진동자의 운동 에너지에, 나머지 하나는 진동자의 위치 에너지에 해당된다.\n\n여러 개의 단진자가 온도 T에서 열적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면 단위 부피 안에 에너지 E를 갖는 진동자의 수는 볼츠만 분포를 따른다고 생각하여 에너지가 E~E+dE사이에 있는 경우\n진동자의 수 \n이다. 따라서 만일 에너지가 연속적으로 변하는 경우 한 진동자가 가지는 평균 에너지는\n이다. 여기서 1/kT = 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자.\n그렇다면 한 진동자가 가지는 평균 에너지를 분배 함수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n\n레일리와 진스는 각 모드가 kT의 에너지를 갖기 때문에 구하려는 복사에너지의 밀도는 주어진 모-드의 수에 kT를 곱하여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진동수 사이에 있는 복사에너지 밀도는\n\n의 결과를 얻는다. 이 식은 진동수가 작은 영역에서는 잘 맞으나 진동수가 큰 영역에서는 맞지 않는다. 만약 진동수가 가 된다. 이 경우를 자외선 파탄라 부르며 막스 플랑크는 이것의 보완을 고려하였다.\n\n## 플랑크의 복사 법칙\n1900년 12월, 플랑크는 흑체 복사의 측정 자료와 일치하는 결과를 얻기 위하여 방출된 빛의 에너지가 특정한 상수와 진동수를 곱한 값의 정수배로만 주어진다고 가정하였다.\n여기서 방출된 빛의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어떤 기본 에너지 양자 의 정수배로만 주어진다는 가정은 빛이 파동으로서 그 에너지가 연속적 값을 갖는다는 고전적 개념과 배치되며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플랑크의 양자가설이라고 한다. 이 경우 방출된 빛의 평균 에너지는 다음과 같다\n\n여기서, 로 치환하고, 분배 함수 Z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n\n빛의 평균 에너지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n\n따라서 진동자 당 평균에너지는 레일리-진스 공식에서 사용하였던 에너지 등분배 평균인 kT 대신에 아래와 같이 된다.\n\n여기에 단위 체적당 방식 밀도를 곱하면 전자파의 에너지 밀도에 대한 **플랑크 법칙**\n을 얻는다.\n\n플랑크가 올바른 공식을 얻기는 하였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의 공식 유도에는 심각한 결함이 내포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공동 벽에 있는 진동자는 그 에너지로 에 있는 평균 광자수는 아래 식의 보스-아인슈타인 분포에 의해 주어진다.\n\n막스플랑크가 자신의 생애에서 보여주었던 양자 불연속성 개념에 대한 태도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작용 양자에 대한 개념을 제창해서 양자물리학의 포문을 열었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이런 변혁이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즉 20세기 초 현대 물리학 분야에서 나타난 혁명적 변화는 정작 창시자였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원하지 않았던 혁명이었다. 플랑크는 아주 보수적인 인물로서 본래 고전물리학을 거부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자신의 업적과 관련이 있었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던 인물이었다. 또한 고전 양자론의 시작을 알렸던 그는 고전양자론의 발전 과정에서 나온 마지막 산물인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비결정론에 대해서도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n한편 지난 세기말에 이룩한 플랑크의 혁명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플랑크의 이 혁명은 물리학이 너무 완벽하게 완성되어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상태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만약 플랑크가 뮌헨 대학시절 교수에게 설득되었다면 그는 새로운 혁명적 이론을 제기한 이론 물리학자로 역사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새롭게 할 일이 없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바로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플랑크는 혁명적 이론을 제안한 다른 많은 과학자들과는 달리 그리 천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20세기 초 물리학내의 혁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대기만성형의 평범한 과학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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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망원경의 망원경의 종류를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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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망원경의 파장, 위치, 이용 목적 등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관측하는 파장에 따라 전자기파를 모으는 방식과 기술이 크게 달라지므로 망원경은 아래의 표와 같이 주로 관측하는 파장에 따라 분류한다. 망원경은 위치에 따라서 지상 망원경, 우주 망원경, 항공 망원경 으로 나뉜다. 또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문학자들의 연구용 망원경, 그리고 아마추어 천문가의 망원경으로 나눌 수도 있다. 하나 이상의 망원경, 관측기기들로 구성된 운송수단이나 캠퍼스를 천문대라고 한다.\n\n## 광학 망원경\n광학 망원경은 가시광선 대역의 빛을 초점으로 모아 확대된 상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망원경을 말한다. 광학망원경은 일반적으로 근적외선까지도 쓰인다. 이 확대된 영상을 눈으로 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또는 컴퓨터로 신호를 보내는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다. 광학 망원경은 주로 천문학에서 많이 쓰이며, 천문학 이외의 용도로는 측량기, 조준경, 쌍안경, 카메라 렌즈 등이 있다. 광학 망원경은 보통 유리로 만들어진 렌즈나 거울을 조합하여 빛을 모으는데, 어떠한 도구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n\n## 전파 망원경\n전파 망원경은 지향성 안테나를 이용한 망원경이다. 광학 망원경과는 달리 긴 파장의 전파를 이용하므로, 같은 크기의 광학 망원경에 비해 분해능이 떨어지는 단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전파 망원경은 광학 망원경보다 훨씬 큰 구경의 포물면 형태를 갖는 파라볼라 안테나를 사용한다. 현재 가장 큰 전파 망원경은 중국의 FAST 라는 지름 500m의 전파 망원경이다. 하지만, 건축 구조상 망원경 크기를 늘리는 데에 한계가 있으므로, 더 좋은 분해능을 얻기 위해서 다수의 작은 전파 망원경을 일정한 거리로 배열해서 그 배열 전체의 넓이와 같은 구경의 단일 망원경과 같은 분해능을 얻을 수 있는 간섭계가 만들어졌다. 가장 유명한 망원경 배열은 미국에 있는 Very Large Array 이다.\n\n## X-선 망원경\nX-선은 지구 대기에서 흡수되기 때문에 X-선 망원경은 로켓이나 위성을 이용해서 대기 밖에서 관측해야 한다. 또한 X-선은 거의 수직으로 입사할 경우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울조차도 쉽게 통과해버리므로 X-선을 초점에 모으기 위해 볼터 망원경이라는 특별한 디자인이 고안되었다. 이 볼터식 망원경은 거울을 X-선의 입사 방향에 거의 평행하게 배치하여, X-선이 거울에서 반사할 때마다 단지 몇 도씩만 방향을 바꾸는 방법을 이용하는데, 이러한 거울을 겹겹이 고리 모양으로 배치하여 빛을 초점에 모아 X-선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2012년 기준으로 작동 중인 X-선 망원경으로는 찬드라 X-선 망원경, XMM-뉴턴 망원경 등이 있다.\n\n## 감마선 망원경\n감마선은 파장이 너무 짧고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가시광이나 X-선처럼 유리 또는 금속 거울을 이용해서 초점으로 빛을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감마선 망원경은 감마선이 특별히 선택된 물질들과 반응하면서 내는 전하를 띈 입자나 광학 섬광을 검출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지구 대기가 감마선에 대해서도 불투명하므로 감마선 망원경은 기구, 로켓, 위성 등에 의해 실려서 대기 밖에 위치해야 한다. 이러한 감마선 망원경으로는 콤프턴 감마선 천문대, 페르미 감마선 망원경등이 있다. 반면 아주 높은 에너지를 가진 감마선들은 지상에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검출한다. 이 감마선은 대기에 들어오면서 공기의 원자/분자들과 연쇄 반응하면서 수많은 우주선들을 만들어내고,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이 상대론적 입자들은 체렌코프 복사를 방출하게 되는데 이를 지상에서 검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종류의 망원경으로는 미국 아리조나 주에 위치한 VERITA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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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의 수학적 설명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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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행성의 궤도를 태양이 중심에 있는 극좌표계 를 이용하면 아래와 같이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간단하게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여러 물리학 법칙을 이용하여 증명할 수 있다.\n\n이다.\n\n## 제1법칙 타원 궤도의 법칙\n케플러의 제1법칙은 **궤도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n\n## 제2법칙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n케플러의 제2법칙은 **케플러 넓이 법칙**이라고도 불린다.\n면적속도는 수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n\n케플러의 제2법칙이 행성 운동의 운동 상수임을 의미한다. 혹은, 행성의 공전 속도를 사용하여\n가 일정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위 값은 행성의 각운동량에 비례하므로, 이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관계없이 각운동량 보존 법칙으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n\n## 제3법칙 조화의 법칙\n케플러의 제3법칙은 **주기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n이를 수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n여기서\n이다. 좀 더 비례 관계를 명확히 하면,\n이다. 여기서\n이다. 태양계에서 행성은 태양에 비해 훨씬 더 가벼우므로 , 다음과 같이 근사할 수 있다.\n따라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 안의 모든 행성에 대해선 의 값이 모두 같다.\n\n케플러의 제3법칙은 비리얼 정리의 특수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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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튀코 브라헤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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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튀코 브라헤**는 덴마크의 천문학자이다. 로스토크 대학에서 공부했다.\n\n1572년,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신성을 발견하여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을 때까지 14개월간 관측을 계속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재능이 인정되어 덴마크왕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의 지원을 받아 벤섬에 우라니보르 천문대, 스티에르네보르 천문대를 건설하고 방대하고 정밀한 관측기록을 남긴다. 프레데리크 2세가 죽은 후, 159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 황실부 제국수학관에 초청되어 프라하로 이주한다.\n\n천문학자로서 그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기하학적 장점과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철학적 장점을 결합하여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동시에 다른 행성들이 태양 둘레를 돈다는 독특한 '튀코 체계'를 주장하였고, 이 학설의 선취권 문제로 라이마루스 우르소와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브라헤가 천동설을 옹호하기 위해 남긴 관측기록은 그가 병으로 죽은 후 제자이며 공동연구자였던 요하네스 케플러가 그의 기록을 분석하여 케플러 법칙을 발견해 내면서 지동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n\n튀코 브라헤는 1577년 나타난 혜성에 대해서도 많은 관측결과를 남겼으며, 혜성 현상이 달보다 먼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그 혜성관측결과와 신성의 발견은 달보다 먼 곳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당시의 천동설을 반증하는 한 증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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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튀코의 업적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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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비록 튀코 브라헤의 새로운 모델인 절충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것은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구 중심설을 제안한 동시에 천동설을 부정한 최후의 천문학자이다. 그를 통해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관이 바뀔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관측은 과학혁명에 큰 기여를 했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가 관측한 자료들을 토대로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기술하는 법칙을 세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체의 운동에 관한 운동을 자세히 기술할 수 있었다. 그가 관측한 천체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튀코 신성, 튀코 분화구 등이 만들어졌고 그의 이름을 딴 Tycho Brahe Planetarium의 천문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n뿐만 아니라 그는 천문학에 엄청난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1900년대까지도 사용되는 약초학을 발전시켜 의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n또한 튀코 브라헤가 Uraniborg에서 만든 연구회는 연구센터의 역할과 교육기관으로의 역할 모두 수행해 내었다. 덴마크의 학생들과 이외의 외국학생들에게 약초학과 천문학에 대해 알려주는 대학원이었다.\n이렇듯 튀코 브라헤는 분명 천문학자로써 정확하고 객관적인 관측을 하는 명사로 지칭된다. 그리고 천문학 이외에도 의학, 교육학 등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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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한사군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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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한사군** 또는 **한군현**은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낙랑군·임둔군·현도군·진번군의 4군과 그 속현을 말한다. 근대 이전에는 전통적으로 사군이라 불렀고, 현대 한국사학계에서는 한군현, 동방변군 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한사군의 위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의 학계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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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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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설치 및 변천\n전한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의 3군을 위만조선 영내에 설치하였으며, 기원전 107년에 다시 예맥 지방에 현도군을 설치하였으나, 그 위치는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주장보다 유물과 사료로 볼 때, 요서와 요동일부 지역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낙랑국과 낙랑군의 혼용도 혼란을 부채질한 것이 사실이다.\n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진번·임둔 양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켰으며 기원전 75년에는 토착민의 반발로 현도군이 요동 방면 상류의 흥경 노성 지방)으로 옮겨졌다. 이때 현도군에 통합되었던 임둔군의 현들은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와 동부도위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n\n신나라의 왕망 시기에는 태수의 관직을 태윤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낙랑태윤장’이라 찍힌 봉니가 발굴되었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는 반란이 일어나 낙랑사람 왕조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라고 칭하였다. 후한 광무제는 서기 30년에 왕준을 보내서 낙랑군을 다시 정복하고 패수 이남을 영토로 확정하였다. 한편 현도군은 후한 초기에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다시 무순 지방으로 이치되었다.\n2세기 후반,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요동군을 중심으로 공손탁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 및 현도까지 지배하였다. 이 시기 낙랑군은 고구려 및 한이 강성하여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수의 민호가 삼한으로 유망하기도 하였다. 공손강은 3세기 초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며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을 막았다.\n\n위가 건국된 후 명제는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유흔과 선우사를 파견하여 낙랑·대방을 평정하였다. 서진이 건국된 이후 백제 및 고구려의 공격이 가속화되어 낙랑 및 대방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276년에는 유주를 분할하여 평주를 신설하고 낙랑·대방을 속하게 하였다. 300년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서진의 수도 낙양이 전조에 함락되자 낙랑군과 대방군은 더 버틸 힘을 상실하였다. 313년 미천왕은 낙랑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낙랑·대방의 군벌 장통이 모용씨에게 투항한 뒤, 314년에 대방군까지 축출되면서 소멸되었다.\n\n이후에도 모용씨 및 북위 시기에 낙랑 및 대방군은 요동 및 요서 지역에서 계속 존속되거나 이름만 존재하는 군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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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1989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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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1989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89년은 폴란드와 헝가리를 시작으로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12월 루마니아의 공산독재 타도 등 동구권의 공산주의를 종식시킨 '1989년 혁명'으로 정치사의 전환점이 되었고, 1991년 12월 소련의 해체로 냉전은 종결되었다. 동유럽의 공산정부에 대한 혁명은 주로 성공했지만, 19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 시위의 중국 정부에 의한 진압도 그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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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자원 기술 프레임워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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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자원 기술 프레임워크**는 웹상의 자원의 정보를 표현하기 위한 규격이다. 상이한 메타데이터 간의 어의, 구문 및 구조에 대한 공통적인 규칙을 지원한다. 웹상에 존재하는 기계 해독형정보를 교환하기 위하여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에서 제안한 것으로, 메타데이터간의 효율적인 교환 및 상호호환을 목적으로 한다. 메타 데이터 교환을 위해서 명확하고 구조화된 의미표현을 제공해 주는 공통의 기술언어로 XML을 사용하기도 한다. RDF는 데이터 모형, 데이터의 상호교환을 위한 구문, 스키마 모형, 기계 해독형 스키마를 위한 구문, 질문과 프로파일 프로토콜과 같은 요소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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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RDF 스키마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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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RDF 스키마는 특정 메타데이터에서 정의하고 있는 어휘들을 선언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어휘란 속성집합으로 자원을 기술하기 위해 각 메타데이터 형식들에서 정의하고 있는 메타데이터 요소집합을 말한다. 인간이 읽을 수 있고 기계처리가 가능한 어휘들을 정형화하는 것은 상이한 메타데이터 형식들간의 어휘 확장과 재사용, 상호교환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정형화를 위한 것이 바로 RDF 스키마이다. RDF 스키마는 RDF의 데이터 모형과 구문 명세에 의해서 표현된다. 현재 RDF 스키마 명세는 개발단계에 있으며, 더 많은 연구가 필요된다. 기본적인 RDF스키마 유형으로는 property, propertyType, instanceOf, subclassof, allowedPropertyType, Range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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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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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장 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인 1945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정치계에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n\n철학서는 물론 소설, 연극, 영화시나리오, 문학비평, 정치평론 등등 다양한 글을 쓴 작가이며, 연간잡지 '' 의 창간자이자 편집장이기도 한 사르트르는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과 매우 가까이 지냈다. 그 이후로는 레닌주의 사상을 가진 당대 좌파와}}\n\n사르트르의 작품은 을 저술했다.\n\n사르트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열한 살 때까지의 자신의 삶을 그려낸 자서전 창간에도 기여했는데, 신문 발행을 광고하고자 본인이 직접 길가에서 그 신문을 팔기까지 했다.\n\n사르트르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식인들로는 고등사범학교 시절의 동문이었던 폴 니장과 레몽 아롱, 전후 시절의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알베르 카뮈, 말년의 베니 레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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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생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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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개괄\n장폴 사르트르는 소설, 수필, 연극, 철학 저서나 전기의 형태로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철학은 전후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참여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서 사르트르는 알베르 카뮈와 함께 남아있다. 1941년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이후로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사르트르는 계속하여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n\n사르트르는 동시대의 투쟁에 전적으로 완전히 참여하며, 자신에게 정의로 보이는 모든 입장들을 열렬히 신봉했다. 20세기의 볼테르였던 사르트르는 삶이 끝날 때까지 지치지 않고 활동했다. 많은 주석가들과 사르트르 자신에 따르면 그의 삶은 2차 세계 대전에 의해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고로 사르트르의 작품은 두 중요 시기로 구별된다. 에 제시된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하고자 한 하는 보다 실천적인 시기로 구별된다. 사르트르 작품의 두 번째 시기는 어빙 고프먼과 같은 질적 연구를 중점으로 하던 사회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n\n## 성장기와 참여\n\n### 유년기\n장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 파리 16구에 있는 외조부 집인 미냐르로 1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르주아 가문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n\n어머니는 알자스의 지식인, 교수 가문인 슈바이처 가문 출신이며, 삼촌 조르주는 파리 이공과 대학 을 나온 조선 공학자이며 아버지 장바티스트 사르트르는 마찬가지로 파리 이공과 대학 을 나온 프랑스 해군 장교이다.\n\n어린 사르트르는 사르트르가 태어난 지 15개월이던 1906년 9월에 황열로 사망한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리세 장송 드 세이의 독일어 선생이자 위엄있는 사람이었으며 사르트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10살까지 그를 가르친, 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했다.\n\n그가 태어난 지 15개월만에 아버지는 인도차이나 전쟁후유증인 열병으로 사망하고, 10살이 될 때까지 외가에서 엄격한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후일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와 사시 그리고 외가집의 낯설음 등으로 이 시절에 겪은 심리적 부담에 대해 밝히고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의 깊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다.\n\n### 학생 시절\n13살에 사르트르는 리세 몽테뉴를 어느정도 다니다가 16살에 이르러 리세 앙리 4세로 전학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5학년, 6학년 시절을 보낸다. 거기서 그는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을 만나게 되며 니장과의 우정은 1940년 니장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n\n이 우정의 도움으로 사르트르는 자신의 개성을 만들기 시작한다. “엘리트 학급”-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과목을 선택한- 전체에서 사르트르는 SO, 즉 “satyre officiel ”이 된다. 그는 농담과 장난에 뛰어났다.\n\n1922년부터 2년 동안 사르트르는 폴 니장과 항상 같이 다니며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고등사범학교 입학 준비를 했다. 그곳에서 사르트르는 관습에 묻힌 삶을 경멸하고 풍자한, 지방 교사의 울적한 이야기를 다룬 짧은 꽁트 두 편을 쓰며 첫 문학 작품을 창작했다. 동시에 사르트르는 니장과 함께 학급에서 유명한 장난꾸러기 분위기 메이커가 된다. 루이르그랑에 들어온 지 2년만인 1924년, 사르트르와 니장 둘 모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했다.\n\n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레몽 아롱과 메를로 퐁티 등과 교제하였으며, 1927년에는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했다. 1928년에 아그레가시온 철학시험에 낙제하였는데, 사르트르의 지인들은 모두 이에 놀랐지만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1929년 수석으로 합격했다. 같은 시험의 차석은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의 집을 방문한 그녀에게 사르트르는 1929년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된다.\n\n### 고등학교 교사\n사범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 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간 복무한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도 있었으나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제대 후인 1931년 그는 파리와 파리 근교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이때 그는 20페이지 분량의 「진리의 전설」을 집필하는데, 순전히 사르트르 자신의 지식만으로 저술된 이 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출판은 거부되었다. 1932년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로 있던 레몽 아롱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설의 현상학에 관해 듣고 , 다음 해에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생으로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현상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한다. 1935년에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친구였던 의사 라갓슈로부터 메스칼린 주사를 받았는데, 이때 온몸을 게와 낙지가 감싸고 도는 환각을 겪었고 때문에 반년 동안 우울증 증세로 괴로워했다.\n\n### 철학자\n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에 대해서 논하면서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n\n## 영광의 시기\n\n### 실존주의 조류와 첫 철학 참여\n1945년 장폴 사르트르는 보나파르트가 42번지에 자리를 잡아 1962년까지 거기서 거주했다. 해방 이후, 사르트르는 현저한 명성과 성공을 거뒀다. 그는 10년 이상 프랑스 문학에 군림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은 그가 1945년 창간한, 국제적 차원에서 가장 권위있는 프랑스 잡지으로 여겨지는 라는 잡지를 통해 확산되었다.\n\n사르트르는 1945년 미국에서 만난 기자 돌로레스 바네티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회상록를 통해 밝혀진 수년간의 관계를 유지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절, 두 번의 긴 여행 동안 미국을 이해하게 한 모든 열쇠를 사르트르에게 쥐어주어 다른 대륙으로의 문을 열게 한, 뉴욕의 프랑스 기자에게 품은 5년 간의 열정에 대한 유일한 암시로 의 창간호의 발표를 헌정한다.\n\n### 프랑스 공산당 동조, 평화운동\n1948년 3월에는 제3의 정치 세력을 위해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으나 친미화, 우익화로 내부 분열이 생겨 1949년 11월 해산되고 말았다.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해 지에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나 이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실천하였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올랐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알베르 카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n\n### 구조주의, 플로베르와 노벨상 거절\n1960년대에 실존주의는 침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프랑스 문학과 지적 이념에서 사르트르의 영향은 점점 줄어들었고, 특히 민족학자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푸코나 정신분석학자 라캉같은 구조주의자들과 대립했다.\n\n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대립했다. 구조주의에서 인간의 자유는 좁은 자리를 차지했고,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구조 속에 배열되었다.\n사회 구조의 필연성에 대한 자유의, 의식에 대한 의식의 우위의 옹호자이던 사르트르는 구조주의라는 새 흐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문학 창작과 19세기 연구에, 특히 그를 항상 사로잡은 플로베르의 연구에 헌신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더욱이, 1960년대에 사르트르의 건강은 심하게 악화되었다. 그는 정치와 문학에 있어서 과잉 활동을 한 덕택에, 또한 담배와 술로 인하여 너무 일찍 쇠약해졌다.\n\n1964년 10월 22일, 노벨 아카데미는 장폴 사르트르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하지만 철학자 사르트르는, 같은 날 AFP의 기자 프랑수아 드 클로세에게 \"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당신은 그것에 관하여 쓸 수 있다\"고 말하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틀 뒤 1964년 10월 24일, 그는 스웨덴 아카데미에 보낸 공개 서한에서 그것에 관련하여 더 길게 설명했으며, 그 본문은 나중에 프랑스 일간지 에 각각 게재되었다. 이 사실은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다. 거절의 이유로 사르트르는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n\n사르트르는 1945년 레종 도뇌르를, 또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교수직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이 영광들은 작가를 제도화 시키며 그의 자유를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널리 알려져있는데 왜냐하면 이런 거절이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한 지식인의 정신 상태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n1964년 사르트르는 아를레트 엘카임을 입양한다.\n\n## 앙가주망 시기\n\n### 68년 5월\n1960년에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 1부를 이미 출판했고 사후에 미완결로 나올 제 2부를 준비하던 사르트르는 1968년 5월 사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67년에 벌써 전쟁, 그 가운데 특히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난하고 재판하던 증인과 운동가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지식인의 법정을 자처한 러셀 법정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의장으로서 나타났었다.\n\n만약 그가 1968년 5월 사태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거리에서, 강단에서, 신문에서, 파업 공장의 입구에서 저항의 반향이 되었을 것이다. “세계의 학생 운동과 함께 우리가 여기서 표명한 연대는 모든 정치 체제와 조직의 기만에 대한 첫 응답이다. 모든 언론기관은 몇 달간 이 운동을 왜곡하고 그 의미를 변질시키고자, 혹은 조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라며 1968년 5월 1일 의 논단에서 사르트르는 언명했다.\n\n학생들의 저항을 더 이해하기 위해, 그는 낭테르 지방 사람에게 그들과 대화하기를 요청했다. 총회는 두 명의 대표를 보내고자 투표를 하여 알랭 제스마르와 18살의 여고생으로 스페인 무정부주의자의 딸이자 손녀이자 훗날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는 에르타 알바레즈를 보냈다. 시몬 드 보부아르네 집으로 가서 5월 12일 2시 경에 돌아온 그들은 사르트르의 겸양함을 기억하며, 그가 잘 이해했음을 확인한다.\n\n1968년 5월의 프랑스 5월 혁명에서 사르트르는 청년들을 향해 정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하였고, 그를 체포할 것을 권하는 참모들에게, 당시 드골 대통령이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며 사르트르의 체포를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n\n### 민청학련 관련자 석방 연대\n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을 때, 김지하의 시 「오적」의 번역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n\n### 실명\n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1971년 플로베르 평전 1,2권을 출판하였으나 1973년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다.\n\n### 죽음\n요독증에 걸린 사르트르는 1980년 4월 15일 만 75세에 임박한 나이로 파리 브루세 병원에서 폐수종으로 사망했다.\n\n전 세계는 사르트르의 사망 발표로 큰 충격에 빠졌다. 1980년 4월 19일에 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5만 명의 사람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파리의 도로를 메우며 장례 행렬을 따라갔는데, 치안 당국 없이 진행된 엄청난 인파 가운데는 르 아브르나 파리에서 사르트르가 가르쳤던 옛 제자들, 1950년대의 공산당원과 동지들, 알제리에서의 평화를 외친 사회 운동가들, 마지막으로 젊은 마오이스트들이 있었다.\n\n그는 파리 14구 몽파르나스 묘지 20 구— 에드가키네 대로 주 입구 바로 우측에 안장되었다. 1986년 4월 14일에 죽은 시몬 보부아르는 그의 옆에 묻혔다. 묘비에는 \"Jean-Paul Sartre, 1905-1980\"이라는 간결한 비명이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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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핀란드 공화국의 국민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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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핀란드는 인구 대다수는 핀란드인이고, 공용어는 핀란드어와 스웨덴어이다.\n\n## 인구 통계\n민족 비율은 핀란드인이 93%, 스웨덴인이 6% 등으로 핀란드인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사미인, 러시아인과 기타 민족은 1%를 차지한다.\n\n## 언어\n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스웨덴어는 과거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으로 인해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비율상으로 핀란드어는 93.4%, 스웨덴어가 5.9%로 핀란드어 사용자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2개 모두 공용어로, 1919년에 제정되었다. 모든 도로 표지판, 거리의 이름, 경고문 등이 양쪽 언어로 표기되지만 거의 대부분, 일상생활에서는 핀란드어가 주로 쓰인다. 스웨덴어는 거의 대부분 남서부의 있는 섬인 올란드 제도에서 쓰이고 있지만, 이미 핀란드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소수파라고 불리고 있으며, 기업, 산업계에서 영향력을 가지며, 정부에도 주요정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용어 문제는 역사적인 문제였다. 스웨덴어는 일부에서도 고귀한 언어로 인식되어 받아들여졌다.\n\n북부의 사미인은 사미어를 쓰고, 1970년대에 지위가 올라갔다. 1999년의 헌법개정에 의해서 준공용어로 명기되었다. 동시에 집시, 그 외의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도 더해져 있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에 능통하고 일부는 독일어나 러시아어 역시 구사한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러시아 출신의 귀환자는 최근 계속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어는 1세기에 걸쳐서 지배사회의 상층부에서만 영향력을 준 것 뿐이었고, 국민사이에서는 침투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것은 러시아어를 야만 민족의 언어로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수는 에스토니아어, 노르웨이어를 쓰는 경우도 있다.\n\n## 종교\n종교는 개신교가 89%, 동방 정교회가 1%, 무종교 9%, 기타는 1%로 개신교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핀란드는 세속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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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올림픽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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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올림픽**은 전 세계 각 대륙 각국에서 모인 수천 명의 선수가 참가해 여름과 겨울에 스포츠 경기를 하는 국제적인 대회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있는 국제 행사이다. 올림픽은 2년마다 하계 올림픽과 동계 올림픽이 번갈아 열리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감독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올림픽은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5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올림피아 제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영감을 얻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이를 위해 쿠베르탱 남작은 1894년에 IOC를 창설했으며, 2년 뒤인 1896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 1회 올림픽이 열렸다. 이때부터 IOC는 올림픽 운동의 감독 기구가 되었으며, 조직과 활동은 올림픽 헌장을 따른다.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올림픽 메달은 매우 큰 영예이며, 특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국가 영웅급의 대우를 받으며 스포츠 스타가 된다. 국가별로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게 지급하는 포상금도 크다. 대부분의 인기있는 종목들이나 일상에서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생활스포츠 종목들이 올림픽이라는 한 대회에서 동시에 열리고,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 출신의 선수들이 참여하는 만큼 전 세계 스포츠 팬들이 가장 많이 시청하는 이벤트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모든 종목 누적 시청자 수만 47억 명에 달하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인구가 시청한 이벤트였다.\n\n또한 20세기에 올림픽 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IOC는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변화의 예로는 얼음과 눈을 이용한 경기 종목을 다루는 동계 올림픽, 장애인이 참여하는 패럴림픽, 스페셜 올림픽, 데플림픽, 10대 선수들이 참여하는 유스 올림픽 등을 들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IOC는 20세기의 변화하는 경제, 정치, 기술 환경에도 적응해야 했다. 그리하여 올림픽은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기대했던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에서 벗어나서, 프로 선수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올림픽은 점차 대중 매체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올림픽의 상업화와 기업 후원을 놓고도 논란이 생겨났다. 또한 올림픽을 치르며 발생한 보이콧, 도핑, 심판 매수, 테러와 같은 수많은 일들은 올림픽이 더욱 굳건히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n\n올림픽은 국제경기연맹, 국가 올림픽 위원회, 각 올림픽의 위원회로 구성된다. 의사 결정 기구인 IOC는 올림픽 개최 도시를 선정하며, 각 올림픽 대회마다 열리는 올림픽 종목도 IOC에서 결정한다. 올림픽 경기 개최 도시는 경기 축하 의식이 올림픽 헌장에 부합하도록 조직하고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올림픽 축하 행사로는 여러 의식과 상징을 들 수 있는데 올림픽기나 성화가 그 예이다.\n\n올림픽은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하계 올림픽은 33개의 종목과 약 400개의 세부종목에서 13,000 명이 넘는 선수들이 겨루고 그중 각 종목별 1, 2, 3위는 각각 금/은/동을 수여받는다. 전 세계 언론에서 각각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를 중계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선수가 개인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와 더불어 올림픽 경기는 개최지와 개최국에게도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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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고대 올림픽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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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고대의 올림픽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의 대표선수들이 모여 벌인 일련의 시합이었으며, 육상 경기가 주 종목이지만 격투기와 전차 경기도 열렸다.\n\n고대 올림피아 경기가 처음 열린 시점은 보통 기원전 776년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이 연대는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비문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비문의 내용은 달리기 경주 승자 목록이며 기원전 776년부터 4년 이후 올림피아 경기 마다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n\n고대 올림피아 경기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중요성을 띄고 있었는데, 스포츠 경기를 할 때는 제우스와 펠롭스를 기리기 위하여 제물 봉헌 의식을 치렀다. 펠롭스는 올림피아의 전설상의 임금이었던 피사티스의 오이노마오스 왕과 전차 경주를 겨룬 영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n\n올림피아 경기는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이르렀으나, 그 후 로마가 패권을 잡은 뒤 그리스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고대 올림픽이 공식적으로 끝난 해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부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모든 이단 숭배 및 예배를 금지했던 393년을 고대 올림픽의 마지막이라고 추정한다. 이렇게 올림픽이 사라진 이후로 이보다 한참 뒤인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올림픽 경기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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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리눅스 문서화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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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리눅스 문서화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로 리눅스 관련 문서를 만드는 데 목표가 있다.\n\n이 프로젝트는 처음엔 리눅스 해커들끼리 각자가 만들어 놓은 문서를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문서의 수준은 직업 시스템 어드민 등 숙달된 사용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초보자들이 따라할 수 있는 강좌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n\nLDP는 최초 1992년 FTP 사이트로 시작되었고, 1993년에 MetaLab의 웹사이트로 옮겨졌다. 이 사이트는 리눅스에 관한 최초의 웹사이트로 여겨지고 있다.\n\n현재 LDP는 475개 이상의 문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중 십여개는 일반 책의 분량이고, 이들 대부분은 오라일리 등의 컴퓨터 전문 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어 책으로 구입할 수 있다. LDP는 또한 사용자가 단계적으로 따라해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다수의 HowTo 문서 또한 제공한다. 문서의 목적은 매우 다양해서 특정 모뎀의 설정 같은 매우 구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네트워크 관리와 같은 광대하고 추상적인 것일 수 있다.\n\n보안이나 네트워킹과 같은 넓고 추상적인 주제는 보통 책의 분량이 되는 안내서에서 다루어진다.\n\nLDP는 잦은 질문 목록 , 메인 페이지 등의 문서들과 두 개의 웹진을 발행하고 있다.\n\nLDP에서 제공하는 문서들은 거의가 GNU 자유문서 라이선스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무료로 배포할 수 있는 기타 라이선스를 따르는 문서도 있다. 현재의 라이선스 정책은 GFDL 이나 Open Publication License을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n\nKLDP에선 LDP 문서를 한국어로 옮기고, 자체 리눅스 관련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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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레비치비타 기호의 정의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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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레비치비타 기호 \n\n정의에서 보다시피 레비치비타 기호는 완전 반대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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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인상주의의 발생과 특징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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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1874년 4월 25일 미술 비평가 르로이가 파리의 전시회에서 비판적인 뜻으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하며, 오늘날 서양 미술사에서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조로 쓰이고 있다. 인상주의는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하며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없는 사물의 인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포착해내기 위해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색채 표현에 있어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이용한 색채분할법을 사용하였다. 이와같은 인상주의는 회화에서의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상주의는 서양 미술사에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애호되는 화풍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상주의가 대중에게 커다란 호감을 주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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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디오니소스의 계보와 유래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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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시오도스 역시 신통기 940-942에서 세멜레를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로 전하고 있다.\n이름의 어원은 디오스 + 뉘소스 (νυσος - 학자에 따라\n서는 σνυσος를 뒷뿌리로 잡기도 한다). 그러나 뉘소스가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치가 않다.\n\n디오니소스의 유래 장소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일치된 의견은 없다. 미케네 문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테베에서 숭배된 신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는 에게해 연안의 고대 그리스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새로운 계절의 활력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숭배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8세기를 전후로 고대 그리스 신화가 틀이 잡히면서 널리 알려지고, 디오니소스를 둘러싼 여러 가지 신화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디오니소스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오늘날 주로 에우뤼피데스의 비극 박카이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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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타르수스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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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타르수스**는 소아시아 지방 도시 이름으로서 오늘날 튀르키예 중남부에 있으며, 지중해에서 16km 내륙으로 들어와 있다. 한글성서에서는 **타르소**, **다소**, **타르수스**로 음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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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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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타르수스는 고대 아나톨리아 지역 문명인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 하에 건설된 도시로서 고고학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0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는 천연적 항구 도시로서 지중해의 물물 교환과 교통 왕래를 통하여 빨리 발전하였으며, 기원전 7세기를 전후로 고대 그리스인이 소아시아 지역에 활발히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할 무렵 이들의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했으며,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점점 더 그리스화 되었다 .\n\n로마 제국 시대에는 킬리키아 속주의 행정 수도 역할을 하였으며, 도시의 문화적 수준이 심지어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 갔다고 전해진다. 이 도시는 스토아 학파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디오게네스의 후계자인 아르케데무스, 기원전 3세기 초 스토아 학파의 수장이던 제논, 기원전 2세기경 스토아 철학의 수장 이전 안티파테르를 비롯하여 Nestor, Athenodorus 등을 배출하였다. 한때는 역시 스토아 철학자인 키케로가 총독으로 있기도 하였다.\n\n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배로 지중해를 건너 키드누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n\n타르수스는 또한 사도 바울로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실례로 사도행전의 바울로 전승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 자신도 타르수스 출신임을 밝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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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나르세스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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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나르세스**는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의 2명의 명장 중 하나이다.\n\n나르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한 환관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527년 황제가 됨과 함께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52년 벨리사리우스를 동고트 왕국 전선에서 해임하고 당시 74세였던 나르세스를 후임자로 임명했고, 나르세스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타기나이의 전투에서 토틸라를 괴멸시켰다. 이듬해인 553년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에서 테이아 왕의 나머지 동고트 군대를 상대로 싸워 승리했고, 554년 프랑크족과 알라마니족을 알프스산맥 너머로 몰아냈다. 이후 남은 동고트족은 나르세스에게 항복했고 이탈리아는 제국령으로 돌아왔다.\n\n나르세스는 그대로 이탈리아에 총독으로 눌러 앉았으나, 주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진 못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아올 것을 명령받았으나, 이탈리아를 떠나길 거부하고 나폴리 근처의 작은 마을로 은퇴했다.\n\n말년의 나르세스의 삶에 대해서는 몇 가지 확실치 않은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나르세스가 비밀리에 568년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도록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때 90세의 나르세스는 다시 황제에게 군권을 위탁받아 롬바르드족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겠다고 청원을 내지만 거부당했다. 나르세스가 죽은 573년에 이르러 이탈리아는 절반 이상이 롬바르드족의 손에 이미 넘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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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동고트족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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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동고트족**은 동게르만족 중 하나인 고트족-다른 일파는 서고트족이다.-의 일파로서, 로마 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민족이다. 이들은 타키투스 시대에 비스와강 하류지방에 단일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3세기까지 동남방으로 이동한 고트족 가운데 흑해 서북안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일파이다. 4세기 후반 헤르만리크 밑에서 전성기를 이루고 370년경 동방으로부터 이동한 훈족의 지배 하에 들어가지만, 아틸라의 죽음에 의하여 훈 제국이 와해되자 독립하여 457년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어서 483년 테오도리쿠스 대왕 아래서 다키아, 모에시아로 옮기고, 488년 이탈리아에 들어가 전반도를 정복, 동고트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동고트 왕국은 552년 동로마에 의해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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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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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어린 시절\n이에야스는 1543년 1월 31일 미카와국 오카자키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는 히로타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살해당한 모리야마의 변 사건이 발생한 후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n\n이에야스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1544년 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가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은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가 친오다 정책을 유지하면서 노부히데는 이에야스를 인질로 삼아 히로타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히로타다는 강경하게 거절하였다.\n\n강경한 태도를 들은 이마가와 씨는 마쓰다이라씨에 지원을 약속하였고, 셋사이를 스승으로 섬기며 6년 간 학문과 병법을 배웠다.\n\n## 센고쿠 시대\n1556년, 15세가 된 이에야스는 관례를 올림과 동시에 관례의 후견인이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은 **마쓰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라 불리게 되었다.\n\n이에야스의 생애 첫 출전은 결혼한 이듬해였던 1558년 2월 5일에 있었다.\n\n그 후 몇년 간 이에야스는 독립을 선언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며, 이마가와 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와리 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다 씨의 관심이 소홀했던 미카와 국 서부의 오다 씨 성채들을 자주 공격하였다.\n\n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내정을 어느 정도 정비한 후 마침내 이마가와 씨의 본거지를 치기로 했다.\n\n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국일대를 점령하자, 1582년 호조 씨를 포섭하여 오다, 도쿠가와, 호조가 동시에 가이 국을 공격하여 4월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n\n6월, 오다 노부나가와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할복하는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수를 쳐 오사카 부근의 야마자키에서 아케치를 죽이자 단념하고 철수하였다.\n\n한편 히데요시는 아케치를 죽인 후 기요스에서 두살의 오다 가문의 적손인 산포시를 앞세우며 사실상 오다의 세력을 계승하였다. 시바타 세력이 괴멸되자, 이에야스는 남은 반 히데요시 세력인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와 손잡았다.\n\n## 히데요시와의 대립\n시즈가타케 전투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회유할 목적으로 조정을 통해 그에게 정4품 하계 좌근위권중장 벼슬을 제수했는데, 이는 종5품 하계였던 히데요시보다 더 높은 직위였고, 노부카쓰와는 같은 직위였다. 그리고 강화 이후의 냉전 과정에서 전부터 히데요시와의 우호 관계를 건의해 오던 중신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의 설득을 받아 히데요시 측으로 출분하면서\n\n신종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시코쿠와 규슈를 정벌하는 동안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를 하마마쓰에서 슨푸로 옮겼다.\n\n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최대한 떨어뜨리기 위해 오다와라성에서 이에야스에게 선약했던 대로 도카이도의 5개 국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간핫슈 지역과 이즈를 내렸다.\n\n### 임진왜란\n1592년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인도 정복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완수하기 앞서 이에야스가 일본에 계속 머무르는 동안 두 차례 출병했던 일본군은 후반으로 갈 수록 고전을 면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섰던 다이묘들은 엄청난 비용과 군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n\n## 권력 쟁탈전\n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다섯 다이로들에게 늦게 얻은 유일한 혈육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와야마 성에 도착하는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공파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직을 일시적으로 파직시켰다.\n\n한편, 아이즈로 돌아간 우에스기 가케카쓰가 새로운 성을 쌓고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또한 동군의 본대가 도카이도를 거치는 동안 이에야스는 자신의 3남인 히데타다에게 3만 8천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카센도를 거쳐 오도록 하였으나 히데타다의 군대는 중간에 시나노국 우에다의 사나다 마사유키와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여 정작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n\n한편 동군이 9월 14일에 진을 구축하자, 서군은 오가키 성을 빠져나와 서쪽의 세키가하라로 이동하였다. 이는 동군을 세키가하라의 비좁은 분지로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다음 날인 9월 15일 동군은 배신을 약속한 서군 다이묘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서군을 궤멸시켰으며, 미쓰나리는 이부키야마로 도주하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던 시마즈 군은 동군의 중앙을 정면 돌파해 이세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 열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툰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와 동군이 압승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n\n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서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이에야스에게 저항했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등은 모두 체포되어 10월 1일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참수되었다.\n\n## 쇼군 재임\n1603년 3월 24일,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으며, 후시미성에서 고요제이 천황의 선지\n\n## 양위 이후\n1605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도요토미 씨의 위협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형식적인 지위를 안정적으로 굳히고자 쇼군 직위를 3남 히데타다에게 계승하게 한다.\n\n한편 이에야스는 비록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탄압 정책을 전개하였다.\n이에야스는 슨푸에 머무르면서 무장 이외에도 여러 가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며,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들을 외교 및 무역의 고문으로서 적극 활용하였다.\n\n한편으로 주변국과의 외교 정책도 중시하여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이래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1607년까지 조선과 포로를 교환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 통신사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n\n## 오사카 전투와 도요토미씨 멸문\n오고쇼로 있던 이에야스는 여전히 도쿠가와씨에 위협적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측의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전에 오사카성에 남겨둔 막대한 도요토미 씨의 재산을 최대한 소모시키려는 계략을 세웠다. 법종 명문의 일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n\n이에야스는 하야시 라잔과 곤치인 스덴의 말을 바탕으로 이 명문의 내용이 도요토미씨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며, 이에야스 의 이름 사이에 안이라는 글자를 넣어 갈라놓은 것이 이에야스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n\n1614년 10월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출진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자신은 총지휘관이 되어 오사카 성 부근의 덴노지에 진을 치고 히데요리를 포위하였다. 병력과 물자 면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 비해 월등히 유리하였으나, 초반에 사나다 유키무라의 분전으로 고전하였다.사나다 유키무라가 죽기를 각오 하고 이에야스 본진까지 오자 이에야스는\n나는 죽었다 할복하겠다 라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잠재적인 위협 요소였던 도요토미 씨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n\n## 최후\n1616년 정월, 슨푸 근교로 매 사냥을 나갔던 이에야스는 측근으로부터 돈카쓰, 덴푸라를 먹은 후 그날 밤 복통을 일으키며 중태에 빠졌는데\n\n그의 유훈은 동조궁신군어유훈에 쓰여져 닛코 동조궁에 모셔져 있다.\n\n이외에 이에야스는 죽음을 앞두고 혼다 마사즈미, 곤치인 스덴, 덴카이 쇼닌을 불러, 사체를 스루가 국 구노잔에서 장사지낸 후 장례는 에도의 조조 사에서 지내고, 위패는 미카와 국의 다이주지에 봉안하고 시모쓰케 국의 닛코에 작은 사당을 지어 죽은 지 1주일 후 옮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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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롤러코스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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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롤러코스터**는 조원선, 이상순, 최진우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모던 록 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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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결성 및 활동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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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롤러코스터는 솔로로 활동하던 최진우, 객원보컬과 코러스 활동을 하던 조원선 그리고 기타리스트였던 이상순이 모여 결성하였다., 처음 롤러코스터의 음악이 소개되었을 때 음악 전문가들은 이들의 음악장르를 대개 애시드 재즈나 혹은 애시드 팝 이라고 분류해 놓았으나, 일렉트로니카나 펑크스타일의 곡도 발표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다. 1999년 9월 9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컬트홀에서 첫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다.\n\n2000년 8월 정규 2집 앨범인 일상다반사를 발매하였다.\n\n2002년 4월 정규 3집 앨범인 Absolute를 발매하였다.\n\n1999년 결성해 멤버의 변화없이, 2006년까지 5장의 정규 앨범과 한장의 라이브 앨범을 내놓았다. 멤버 중 보컬인 조원선은 2009년에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다. 이후에 별다른 그룹활동이 없다가, 조원선과 이상순은 각자의 길에 충실할 것을 원함으로써 2015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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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닛코시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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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닛코시**는 일본 혼슈 도치기현에 있는 시이다. 도쿄에서 북쪽으로 약 140km, 우쓰노미야시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능이 있는 닛코 동조궁과 767년에 세워진 후타라산 신사가 있는 일본과 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목적지이다. 이 지역에는 또한 많은 유명한 온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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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개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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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도시 중앙에 닛코 국립공원이 있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닛코를 보기 전에 훌륭하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미 8세기부터 불교사원이 세워졌다.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나자 동조궁을 건립하고 1617년 그의 유골을 이곳에 안장했다. 이에야스의 손자 쇼군 이에미쓰가 안장된 대유원도 유명하다. 동조궁, 대유원 등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동조대권현에 대한 존경 의식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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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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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 고대\n한반도에 최초로 나타난 국가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를 다스렸던 국가로 파악되고 있다.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에는 진국이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후에 고조선의 왕이었던 준왕과 다수의 유이민들이 진국에 가서 한을 세웠고, 후에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되었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였고, 한나라는 옛 고조선의 땅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만주에 위치했던 부여와 더불어 옥저, 동예, 삼한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원삼국 시대라고 한다.\n\n차츰 압록강 유역에서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들이 마한 부족국 연맹체로 유입되어 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다. 서라벌 지역에서는 신라가 건국되었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변한이 가야가 되어 연맹체제를 이루었는데 후에 대부분의 지역이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n\n삼국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발전해갔다. 그러다 신라가 당나라와 나당군사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백제 유민들,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물리쳐서 676년에 부분적인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고구려의 멸망으로부터 약 30여년이 지났을 때, 고구려 출신 장수였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 말갈 세력과 함께 한반도 북부-만주-연해주 일대에 발해를 건국했다. 이렇게 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기간을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n\n## 중세\n발해는 지배층의 분열과 거란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멸망했고, 신라는 지배층의 타락과 각 지역의 반란으로 인해 점차 수도를 제외한 지역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견훤은 백제 유민들과 더불어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는 고구려 유민들과 더불어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후 후고구려의 장수였던 왕건이 다른 호족 세력들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였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발해가 멸망한 뒤, 많은 발해 유민들을 수용하였다.\n\n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다스렸던 고려는 요나라, 금나라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몽골과 대립하다 결국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공민왕은 지속적인 반원 운동을 실시하였고,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n\n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정권을 잡아 조선을 건국하였다. 후에 세종 때에는 한반도 북부의 여진족들을 물리치고 4군 6진을 개척하였다.\n\n## 근현대\n조선 후기에는 여러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였다.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n\n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독립된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련과 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 후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남쪽은 미국의 군사통치, 북쪽은 소련의 군사통치로 인해 분단되었다. 이후에 남쪽에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쪽에는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n\n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기습적으로 침공하여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약 3년 동안 진행되었고,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휴전선 이남은 대한민국, 휴전선 이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치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휴전 및 분단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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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동로마 제국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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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동로마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395년부터 1453년까지 동방 황제의 치하에서 계속 존속한 로마 제국의 연속체이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제국의 공식 국호는 이전과 같은 **로마 제국**이었다. 제국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자국을 로마 제국 또는 **로마니아**라고 불렀으며, 주민들은 자신들을 **로마인**라고 불렀다.\n\n\"팍스 로마나\n\n그러나 페르시아, 이슬람 그리고 슬라브 세계에서는 제국을 여전히 로마 그 자체로 간주하였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제국을 주로 **룸**라고 불렀다.\n\n중국에서는 고대 로마를 불러 온 말인 대진을 문맥에 따라 제국이나 근동 지방의 여러 나라 또는 시리아 정교회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을 보면, 북송 신종 때인 원풍 4년에 대진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이 사신을 보내 왔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대진이 로마 제국으로 추정되며, 또는 **불림**으로도 불렸다. 송사 권490 열전 제249 외국6의〈불림〉에서는 위 원풍 4년의 일을 두고서 속자치통감장편과 달리 불림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이 사신을 보냈다고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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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문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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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로마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한 토대에 기독교다운 요소를 결합하여 천년 간에 걸쳐 중세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중세를 이용해 유지한 로마 문화는 근세 서유럽에는 그리스 정신을 전해주었고 발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의 문화상 수준을 한 단계 제고했다. 특히 6세기와 9세기~10세기, 14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n\n로마 문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며, 로마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외면적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n\n## 학문\n고대의 저작들은 로마 시대에도 계속 장려되어 로마의 학문은 고대 철학과 형이상학과 긴밀하게 이어졌다.\n\n제국의 마지막 세기에 로마의 문법학자들은 개인으로서나 저술로서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대 그리스어 문법과 문학 연구에 주되게 기여하였다.\n\n법 분야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개혁은 법리학의 발전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으며, 레온 3세의 ''에클로가''는 슬라브 세계의 법 체제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n\n## 언어\n원래 로마의 언어는 고대 로마에 기원을 두는 라틴어였으나 기원후 7세기경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삼았다.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간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았고로 로마 문화에서 의례 부분으로 때때로 나타나는 정도였다. 더불어 민중 라틴어는 제국의 소수 언어고 여러 학자들은 이것이 남부 블라크 언어의 시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부 지중해 속주를 일시로 회복하면서 라틴어는 학술 언어 뿐만 아니라 일상 구어로 제국에서 계속 쓰였다.\n\n궁정, 행정부, 군대를 떠나 동부 로마 속주에서는 그리스어가 서방 제국이 멸망하기 훨씬 전, 라틴어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수백년간 쓰인 주요 언어였다.\n\n다민족으로 이루어졌던 로마 제국에서는 다른 언어도 널리 쓰였고 시대마다 이들 중 일부 언어는 각지에서 일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공용어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유명한 예로, 중세 시대 초입에 시리아어와 아람어는 동부 접경 속주에서 교양 있는 계층 간에서 더욱 범용되는 언어였다. 비슷한 사례로 콥트어, 아르메니아어, 조지아어도 해당 지역에서 식자 계층에게 중요한 언어였으며,\n\n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지중해 지역과 배후지를 통틀어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으므로, 중세 시대에 알려진 언어 거의 대부분이 제국에서 씌었는데 심지어 중국어도 씐 때가 있다.\n\n## 예술\n로마 제국과 거기서 영향받은 여러 지역에서는 독특한 건축, 회화를 비롯한 여러 예술을 남겼다. 로마 예술은 거의 전체에 걸쳐 종교상 표현과 유관하며, 더욱 구체로 보면, 면밀하게 정해진 교회 신학의 비인격다운 특성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로마의 예술 양식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무역으로써 교류하면서 퍼졌고 이곳에서 그 양식은 12세기경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 형성에 영향을 준다. 동방 정교가 확산하면서, 로마 양식은 동유럽의 중심지, 특히 러시아로 확산되었다. 종교 건축을 위시해 로마 건축의 영향은 이집트에서 아랍, 러시아, 루마니아를 위시해 다양한 지역에서 노정한다.\n\n## 문학\n로마의 문학에서는 네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는데 그리스어, 기독교, 로마, 동방이 바로 그것이다. 로마 문학은 역사, 연대기, 백과사전, 수필, 세속 시문으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며 기타 교회와 신학 문학과 민중 시가가 있다. 현존하는 로마의 두루마리 서적 2천에서 3천여 권 중에 세속 시가, 역사, 과학, 의사과학을 다룬 책은 330권에 불과하다.\n\n## 유산\n중세 시대에까지 존재했던 로마 제국은 **천년 제국** 또는 **중세 로마**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후에 그리스나 로마를 정복한 오스만 투르크 조차도 자신들을 로마의 후계자, 로마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역시 로마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 것을 근거로 자신들을 제3의 로마, 근대 로마라 칭하기도 했다.\n\n중세 시대에 유일하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 나라인 로마 제국은 서유럽과 동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이민족에게 공격받은 로마 제국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서유럽은 페르시아, 아랍,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한동안 오스만 제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가령 로마와 아랍의 전쟁 덕분에 샤를마뉴가 부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Pirenne, Henri\n\n수백년간 서방 사가들은 '비잔티움다운', '비잔티움주의'라는 말을 '쇠퇴, 믿을 수 없는 정치, 복잡한 관료제'를 뜻하는 말로 썼으며, 이 말 속에는 로마 문명과 남동부 유럽의 로마가 남긴 유산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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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ser",
"value":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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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pt",
"value": "## 고대 말기의 번영\n콘스탄티노폴리스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에 기원을 둔다. 그리스의 메가라 출신이었던 비자스가 창건했다고 하며, 초기 비잔티움이란 이름도 비자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최소한 기원전 600년경에는 작은 촌락들이 발달했으며, 이미 고대로부터 아시아와 유럽 사이를 잇는 동서교역의 요충지로서, 또한 천연의 항구인 금각만을 끼고 있었다.\n\n비잔티움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 폴리라 불렀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존속했던 기간 대부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럽 최대 도시였고 제국인들이 세계 중심이었기 때문이었다.\n\n196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 황제가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로마 제국을 놓고 내전을 벌였을 때, 비잔티움은 니게르 편에 서서 세베루스군에 저항했다. 당시 비잔티움은 천험의 지형, 다수의 함대, 프리스쿠스라는 이름의 기술자가 고안한 각종 기계 장치, 군사들과 백성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려 3년간이나 농성했다. 도시가 함락된 후 비잔티움은 황제군 손에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몇 년 후 배로 확장되었다. 세베루스 황제의 보복 조치로 비잔티움은 페린투스시의 일부로 격하된 후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메세 가도가 놓였다.\n\n비잔티움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퇴임 이후 내전에서 처음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만나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는 사이에 리키니우스의 영역으로 쳐들어갔으나, 도리어 신속하게 돌아온 리키니우스에게 반격당해 죽었다. 이때 리키니우스는 11일간 포위 공격해 비잔티움을 점령했다.\n\n##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시\n내전이 종결되어 가는 가운데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았다. 324년 로마 제국을 완벽히 통일하려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가 점령한 비잔티움을 공략했다.\n\n처음에 리키니우스군이 잘 버텼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수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돌진하여 이틀간의 전투 끝에 배 130척과 병사 5,000명을 수장시킨 탓에 전세가 급격히 반전됐다. 바다를 장악해 보급을 원활히 받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결국 장악할 수 있었다.\n\n황제는 비잔티움 공략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몹시 가치 있는 군사상 요충지라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고,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 제국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은 거점이었다. 당시 제국은 동방에서 위협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했다.\n\n324년에서 330년까지 6년 동안 비잔티움에 성벽을 세우고, 웅장한 궁전, 황제석으로 지어지고 청동 장식을 더한 원형 극장, 중앙에 티베리스강의 붉은 반암으로 만들어진 높은 원주 기둥이 있는 포룸, 아우구스테온 성당, 제욱시페라는 공중 목욕탕 등 여러 화려한 건축물들을 지어 옛 성곽과 연결하는 막대한 규모의 공사가 끝나고, 330년 5월 11일 월요일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는 천도식을 거행했다.\n\n도시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지정한 공식 명칭은 **노바 로마**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별칭 내지 애칭이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미 이전 황제들부터 외면하던 로마시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n\n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 존재만으로도 지중해의 교역 상황을 바꿔 놓았고, 고대 그리스 시대에 교역으로 융성했던 발트해-흑해 무역로의 명성을 되찾아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보급되는 밀의 수송로를 바꾸었다. 5세기 동지중해에서는 남쪽에서 들어오는 식료품, 북쪽에서 들어오는 목재와 광물, 동지중해의 주요 도시로부터 들어오는 공산품이 상호 거래됐다. 여기에 극동 지방의 비단과 향료가 추가로 거래됐다. 사산 제국이 징수하는 통행세 때문에, 주요 교역로로 북쪽에서는 흑해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르는 항로와 남쪽에서는 홍해를 통해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는 항로가 이용됐다. 이집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정기 수송을 제외하면 해상 교역은 관례에 의거해 자유롭게 발전했다. 이러한 관례는 나중에 동로마 제국의 법 체계 내에서 '로도스법'으로 수정됐다. 해상 교역은 노미스마라는 금화를 통해 쉽게 이뤄졌다.\n\n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수도의 건설이라는 요구에 맞추어 주요 건축물은 로마 시의 일곱 언덕을 본뜬 일곱 언덕에 배치되었다. 도심 중앙의 콘스탄티누스 광장을 기점으로 도로망도 정비됐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바다로 둘러싸여 담수를 얻기 힘들었기에 식수 확보를 위해 광장 지하에 거대한 저수조를 만들었다.\n\n375년 도심과 서북쪽 베오그라드 숲에 있는 수원을 잇는 발렌스 수도교\n\n치세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최초의 로마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테오도시우스는 본격적으로 이 도시를 정비했다. 성벽과 항만을 건설하고, 성벽에 황금 문을 만들었다. 380년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삼위일체설’을 정통으로 인정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나누어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n\n410년 로마가 서고트인 손에 약탈당할 때, 동쪽 국경에는 훈족이 도나우강 북쪽에 다다라 있었다. 413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건설하여 완성했다. “병영 도시를 건설하는 데 천재적 능력을 발휘했던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 1000년 동안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이후 로마가 급속히 쇠퇴한 것과 달리,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계속 불어났다. 4세기에 약 20만 명이던 인구는 5세기에 50만 명에 달했다. 시내에는 황제의 궁전, 아야 소피아 등의 교회, 공중 목욕탕이나 극장 같은 공공시설이 많이 건설되었다.\n\n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서로마 황제가 공석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네포스가 사망한 480년 이후 동로마 제국 사람들 사이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2의 로마” 또는 “제2의 수도”라는 의식이 싹터 있었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이 망했다고 로마 제국 전체가 망한 것은 아니다.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제국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 생겨나고 11세기에 서방 교회와 동방 정교가 나뉘는 대분열 때까지 이탈리아 반도 내부는 물론이고 로마 지역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지배자들도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자신들의 우두머리임을 의심치 않았다.\n\n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에서는 매년 5월 11일 수도 탄생 기념 축제가 제국의 주요 기념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다.”라는 의식이 정착했다. 이 시기에 동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융성을 맞이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크리스트교 최대의 도시이자 전 세계적 대도시로 번영을 누렸다.\n\n53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발렌스 수도교를 통해 끌어온 물을 담을 거대한 지하 수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8m의 기둥을 4m 간격으로 배치해서 가로 143m, 세로 65m, 넓이 9,800m²에 달하는 이 수조를 건설하는 데 노예 7,000명이 동원됐다. 이곳에 물 8만 톤을 저장할 수 있었다. 수압에 견딜 만큼 두꺼운 외벽을 세우고, 석회를 이용해 방수층을 만드는 기술도 적용됐다. 대리석 기둥에는 아름다운 주두 장식을 두고, 천정은 4면으로 나누어 리브 볼트로 구성했다. 터키인들은 이곳을 ‘예레바탄 사라이’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저장된 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식수와 생활 용수로 쓰이고, 목욕탕과 정원에 공급되었다.\n\n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시민들에게 빵을 무료로 지급했고, 경마장에서는 전차 경주가 연일 열렸으며, 시민들은 경기에 열광했다. 고대 로마의 ‘빵과 서커스’라는 단어가 이 시대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n\n## 암흑시대로부터 재흥까지\n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쇠퇴했고 영토도 줄었다. 7세기에는 지배 계급과 주민 양쪽 모두 로마인보다 그리스인이 많아지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사산 제국과 이슬람 제국에 시리아, 이집트 등의 곡창 지대를 빼앗긴 후,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에게 지급하던 빵을 폐지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지방 총독의 아들로 태어나 무적 함대를 이용해 황위에 오른 그는 반격에 나섰고, 626년에는 페르시아-아바르족 연합군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시키고 전쟁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끈 후 지중해 지역의 제해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n\n674년부터 678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슬람 해군에 의해 해마다 포위되었는데, 이 무렵에 비밀 병기인 그리스의 불을 이용하여 이슬람 해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잇따른 전란으로 시민 수가 줄어들고, 수도나 공중 목욕탕 같은 공공시설도 버려져 시내는 텅 비다시피 하고 말았다.\n\n8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각국에 영향력이 있는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가 교리 해석을 둘러싸고 충돌했고, 결국 11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가 완전히 갈라설 때까지 두 교회는 대립과 화해를 거듭했다.\n\n717년부터 718년 사이에 다시 이슬람 제국의 대규모 원정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황제 레오 3세가 이슬람군을 무찌르고, 차츰 동로마 제국도 국력을 회복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766년에는 인구 증가에 수반해 수도가 다시 복구됐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전차 경주에 열광하던 고대의 시민 대신 견직물, 귀금속 공예 등의 기술자나 동서 교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사는 상공업 도시로서 소생했다.\n\n## 황금시대\n동로마 제국이 지중해 동부의 대제국으로 부활한 9세기의 일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궁전, 교회, 수도원 등이 여럿 세워지고, 고아원이나 병원 같은 자선 시설도 세워졌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과 이에 수반한 비잔틴 문화의 진흥도 이어졌다.\n\n콘스탄티노폴리스는 지중해 동부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거점으로, 또한 러시아・불가리아・이슬람 제국・이탈리아・이집트 등 각지로부터 상인들이 방문하는 교역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 제국의 전성기에는 인구 30만~40만에 달하는 대도시가 되었고, 전성기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 도시로, 교외까지 포함하면 인구가 100만 명 이상 인구가 거주했다. 11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프랑스의 순례자는, 유럽에서 최대 도시 10개를 합쳐도 이 도시만큼 인구가 많지 않다고 찬사를 보냈다.\n\n11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 약체화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번영도 잠시 쇠퇴했다. 그러나 11세기 말부터 12세기까지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 제국은 다시 강국의 지위를 회복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도 국제 교역 도시로서 번영을 되찾았다. 정교회 문화 역시 절정에 올라서 아야 소피아 등에는 화려한 성화 등 그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n\n## 제국의 함락과 황폐화\n11세기 이후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 갔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상인들이 지중해의 운항과 통상을 주도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로마 제국의 제해권과 무역 이권을 위협했다.\n\n1204년 4월 13일 제4차 십자군 침공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비롯한 서유럽 라틴인에게 함락됐다. 과거 이슬람과 불가르족 등 여러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어도 천혜의 자연 조건 덕분에 한 번도 정복된 적이 없던 도시였다. 그러나 라틴인은 상대적으로 성벽이 낮았던 바다 방면에서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n\n십자군 병사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갖 폭행과 학살과 약탈을 저질렀다. 이들은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다스리던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6세 드 에노를 황제로 내세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하는 라틴 제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존립 기반이 약한 데다 베네치아의 해군력과 경제력에 의존했다. 57년 만인 1261년 7월,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권인 니케아 제국을 이끌던 미카엘 8세는 수비병이 부재 중인 틈을 노려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했다.\n\n그사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미술품과 보물은 식량비 등으로 거의 베네치아로 옮겨졌고, 장려했던 궁전과 교회 등은 폐허로 변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는 50년 만에 47,000명으로 줄었고, 교역권도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에 장악되어 예전 같은 부를 누릴 수 없었다. 다만, 문화적 번영은 계속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비잔틴 문화의 중심이라는 지위는 유지했다. 비잔틴 문화의 번영은 당시 황실의 성이었던 팔라올로고스를 따서 ‘팔라올로고스 르네상스’로 불렸으며, 이는 서구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n\n## 종언\n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육해군 13만 이상과 우르반의 거포라는 신무기를 동원해 이 도시를 압박했다. 동로마군은 외국 용병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일반 시민 모두를 합쳐도 고작 7,000여 명밖에 안 됐다. 그러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지휘 아래 있는 안간힘을 다해 약 50여 일간 항전했다.\n\n메메트 2세가 쳐들어오자, 동로마 제국은 폭이 약 800m에 이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금각만에 굵은 쇠사슬을 쳐서 적함이 침입할 수 있도록 봉쇄했다. 그러자 메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함정 72척을 육로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대규모 함대를 끌고 해발 60m 갈라타 언덕을 넘어서 해협으로 들어가서 바다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시민들은 너무나 열심히 싸웠으나 끝내 압도적 병력과 무기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n\n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고, 1457년부터 코스탄티니예로 개칭했다. 오스만 제국은 많은 교회를 모스크로 고쳤다. 그 와중에 아야 소피아에 있던 그리스도상 모자이크화는 회반죽으로 덧칠했다. 다만 정교회 총대주교 자리는 계속해서 시내에 두었고, 17세기 이후에야 구시가지 북부의 성요르고스성당으로 옮기도록 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튀르키예어 이름인 이스탄불이 모두 사용되었고, 서구에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터키인들 역시 이스탄불이라는 명칭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터키식 이름인 콘스탄티니예를 선호했다. 이스탄불은 1930년에 와서야 도시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가 이 도시의 연고권을 주장하면서 강제 접수하려 했으나 무스타파 케말이 막아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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