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dict
1
dict
2
dict
3
dict
{ "from": "user", "value": "역법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역법**은 천체의 운행 등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시기를 밝히는 방법이다. **시령**은 흔히 **절기**라고도 부르며, 세시와 요일, 일식, 행사일 등을 아울러 이른다. 이러한 역법을 표기한 문서가 달력이다. 유의어로 **기년법**이 있으며 이는 천문학적 기년법을 가리키는 역법 외에 사회적 기년법, 종교적 기년법, 정치적 기년법 등으로도 사용된다." }
{ "from": "user", "value": "역법의 원리는?" }
{ "from": "gpt", "value": "달을 기준으로 한 것은 삭망월이라고 하고, 계절이 순환하는 주기를 태양년이라고 한다. 삭망월은 2이다.\n\n## 제안된 달력\n\n### 역법 개혁\n그레고리력의 역법 개혁." }
{ "from": "user", "value": "법학의 분류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일반적으로 법학은 실제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을 전제로 실정법의 의미를 인식하고 체계화하는 실용법학과 법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지향하는 이론법학으로 나뉜다. 법해석학은 실용법학의 대표적인 부분으로, 실제로 제정된 법이나 관습법 등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에 비해 이론법학은 이러한 실정법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철학적인 고찰이나 일반이론의 탐구, 역사적인 흐름의 연구 등을 수행한다.\n\n## 실용법학\n\n### 법해석학\n법해석학"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켈로그-브리앙 조약** 은 1928년 8월 27일 미국의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발기에 의하여 파리에서 15 개국이 체결한 전쟁 규탄 조약으로서, 서문과 전문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위법화를 최초로 실체화한 것으로 **전쟁포기에 관한 조약**으로도 부른다.\n\n전문 1 조에 따르면, 조약에 가담 비준한 국가는 자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이나 국제 외교 정치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포기하는 것을 조약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훌륭한 도덕적 이념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조약 위반의 경우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가입국인 독일과 일본이 1940년대에 세계 대전의 주범으로 등장하였을 때, 이들 국가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다만 서류상 규탄만을 할 뿐이었다.\n\n1939년에 이르기까지 6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현재 이 조약은 국제법상 효력을 상실하였다. 조약의 발기자인 켈로그는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2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적 복합체의 새로운 문명을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주민들은 밀과 보리를 수리 재배하는 정착인들이었다. 북쪽 스텝 지방의 안드로노보 문화의 유목민들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인상적인 거대 건축 기술, 청동기 도구, 도자기, 반보석 장신구 등은 당시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n\n2001년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유적지에서 조그만 석제 도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독특한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이를 문자로 해석해 박트리아 마르기아나는 독특한 문자까지 발달시킨 명실상부한 문명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새겨진 형상이 초기 그림 문자 단계인지 아니면 진짜 문자체계의 발달을 나타내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도장은 시리아-아나톨리아 지역,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만 지역, 인더스 문명의 도장과는 기조와 재료에서조차 구별되기 때문에 이들이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니케아 공의회의 니케아 신조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래와 같은 고백문을 신앙고백문으로 결정했다. 니케아 신조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때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로 개정되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응집물질물리학이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응집물질물리학**은 물질의 응집된 상의 물리적인 특성을 다루는 물리학의 분야다. 응집물질물리학에서는 물리 법칙을 이용하여 이러한 상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양자역학, 전자기학, 통계역학 법칙을 많이 이용한다.\n\n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응집된 상의 예로는 액체나 고체 같은 것을 들 수 있고, 조금 더 특이한 응집된 상으로는 일부 물질을 저온으로 냉각시켰을 때 볼 수 있는 초전도 상이나 원자 격자의 스핀이 이루는 상인 강자성, 반강자성 상, 초저온 원자계에서 볼 수 있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물 등이 있다. 응집물질물리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여러 실험적인 방법으로 물질의 특성을 측정하기도 하고, 이론물리학 기법을 이용하여 물리적인 성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학적인 모형을 개발하기도 한다.\n\n응집물질물리학은 다양한 현상과 대상을 연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활발한 분야 중 하나다. 미국의 물리학자 중 약 3분의 1이 응집물질물리학자로 분류되며, 응집물질물리학 분과는 미국물리학회에서 가장 큰 분과이다. 이 분야는 화학, 재료과학, 나노기술과 겹쳐 있으며, 원자물리학, 생물리학하고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n\n역사적으로 보면 응집물질물리학은 고체 물리학에서 나왔는데, 고체 물리학은 물리학의 주요 하위분야로 간주되고 있다. 응집물질물리학이라는 용어는 필립 앤더슨이 1967년 기존에 \"고체 이론\" 이었던 그의 연구 그룹 이름을 바꿀 때 만들어 낸 것이다. 1978년 미국 물리학회의 고체 물리학 분과는 응집물질물리학 분과로 개명되었다.\n\n이 분야를 응집물질물리학이라고 부르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고체 연구를 위해 개발된 개념과 기술 중 많은 부분이 유체계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기 도체내의 전도 전자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진 유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양자유체를 이룬다. 사실 전자들이 응축하여 흩어짐 없이 흐를 수 있는 새로운 유체가 되는 초전도 현상은 저온에서 He가 초유체로 되는 현상과 매우 비슷하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로마의 전설에 등장하는 쌍둥이 형제인데, 형제 가운데 로물루스는 전설적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이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물로스와 레무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늑대가 길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로마의 황제들이 여기에서 살기를 좋아했으며 그 궁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게 로마의 고역사가 파비우스 픽토르의 설에 의한 것이다." }
{ "from": "user", "value": "로물루스와 레무스 탄생설화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파비우스의 설에 의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n\n## 가계\n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후손은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롱가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다.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 라는 형제는 씨족의 상속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동생인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장자권을 무시하고 무력을 써서 씨족의 우두머리가 된 후, 심지어 형의 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으로 삼아 결혼을 못하게 함으로써 누미토르의 가계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다.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은 성직자라는 종교적 위치덕분에 사회에서는 존경받았지만, 평생 동정과 신전의 불을 지킬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
{ "from": "user", "value": "아이네이스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아이네이스**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의 제목이다." }
{ "from": "user", "value": "개요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아이네이스는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아스의 유랑을 노래한 서사시로서 로 불리게 된다.\n\n서사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로는 아이네아스, 디도, 투르누스, 알렉토, 라티누스 등이다." }
{ "from": "user", "value": "고대 이집트가 뭐야?" }
{ "from": "gpt", "value": "**고대 이집트**는 이집트 나일강 하류와 수에즈운하 일대에서 번성한 문명 및 국가의 총칭이다. 최전성기인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 시기에는 에티오피아와도 교류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년 동안 존재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집트는 원조 수로 제국으로서 관개 산업에 의존하였던 문명이다." }
{ "from": "user", "value": "도시와 유적지는?" }
{ "from": "gpt", "value": "## 기자\n**기자**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카이로 서쪽 연안의 지명인데 보통 서쪽 10km의 유적지를 가리킨다. 즉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카프라·멘카우라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에 신전과 스핑크스와 귀족의 묘지인 마스타바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미국·아랍연합 등이 이를 조사하였다. 기자 묘의 부조는 사카라의 부조보다 떨어지나 카이로에서의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손 에 르미에르를 실시하고 있다.\n\n## 사카라\n**사카라**는 카이로 남방 25 km 지점에 있는 지명이다. 초기 왕조의 왕묘를 비롯하여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 피라미드텍스트가 있는 제5왕조 우니스왕의 피라미드, 부조의 정수라고 하는 티와 메렐카의 마스타바 및 성우의 묘 세라페움 등이 있다. 또 나일강 쪽으로 고왕국시대의 수도 멤피스의 유적이 있고 야자수 사이 사이에 라메스 2세가 세운 프타흐 신전의 옛터와 그의 거상이 있다.\n\n## 아비도스\n**아비도스**는 카이로 남방 약 550 km 지점에 있는 지명. 초기 왕조의 왕묘와 신전이 세워져 있고, 고왕국 시대에는 오시리스 신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신왕국 시대 말기에 걸쳐 이집트 각지로부터 성지 순례자가 모여들어, 오시리스 신에 바치는 신전과 개인의 묘가 구축되어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스테레가 세워졌다. 신전에는 특히 유명한 제19왕조 세티 1세의 아름다운 부조와 채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석비와 우샤브티 등은 방대한 수에 이른다.\n\n## 테베\n**테베**는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로 되었다. 나일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 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서쪽에도 왕궁이 있었던 적이 있다. 아멘 신전은 카르나크가 본전이고 룩소르가 부전인데 역대의 왕이 계속 덧붙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가 되었다.\n\n서쪽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은 신왕국 시대 왕족의 '영원한 집'으로 계획된 것인데 대개의 것은 즉시 도굴당하였다. '귀족의 묘'는 미려한 벽면으로 애호가를 매혹시키고 있다. 데르 엘 바하리와 메디네트 하부의 신전은 각각 개성이 있는 대표적 건축이다.\n\n### 투탕카멘 왕의 보물\n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그의 왕묘에서 부장품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이 짧았으나 그의 묘는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보물은 공예적 가치가 높고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귀금속 공예, 보석류 세공, 목공예, 상아 세공, 석제 용기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금속 공예는 중왕국 시대의 것이 더 우수한 것도 있다. 물론 이것보다 더욱더 많은 유물도 있다\n\n## 누비아\n**누비아**는 아스완부터 제4카타락트 부근까지의 지역이다. 고래로 아프리카 내륙부와 이집트에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이 지방은 금의 다량 산출로 역대 이집트 국왕은 누비아를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며 여러 곳에 신전과 성채를 구축하였다. 아부심벨 신전과 부헨 성이 그 대표적 유적이고 북누비아의 전 유적지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수몰되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세계 40개국의 협력을 받아서 해체 이동 등을 하여 구제되었다.\n\n### 아부심벨 신전\n**아부심벨 신전**은 제19왕조 라메스 2세가 아스완의 남방 300 km 지점에 만든 암굴 신전으로 누비아에서 최고의 유적이다. 대신전은 태양신 라하라크티 등에, 또 소신전은 하트홀 여신에게 바친 것이었다. 특히 대신전 전면에 있는 왕의 거상은 높이가 20m 이상이나 되고 내부의 벽면에는 카데시 전투 등의 부조가 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게 되는 것을 세계 각국의 협력에 의해 약 3천 6백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구제하였다.\n\n이집트 사람들의 원주율 측정법" }
{ "from": "user", "value": "바울로의 개요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바울로는 초기 기독교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 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가운데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교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 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생태학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생태학**이란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환경은 생물의 주변을 구성하는 생물적, 비생물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n\n영어로 ''ecology'', 독일어로 ''Ökologie''라 하는 생태학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로 **\"사는 곳\"**, **\"집안 살림\"**을 뜻하는 ''oikos''와 **\"학문\"**을 의미하는 ''logos''의 합성어이다. **\"집안 살림 관리\"**를 뜻하는 경제학과 어원이 같다." }
{ "from": "user", "value": "유래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생태학의 뿌리는 자연사부터 시작된다. 인류의 조상은 사냥감을 어디서, 언제 구할 수 있는지 알아야 했고, 농업 혁명 이후에는 가축이나 곡물을 어떻게 기를지 등 생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였다.\n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Historia Animalium에서 들쥐와 메뚜기떼에 대해 설명을 시도하였다. 유해 동물을 없애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던 초기 그리스와 로마인의 생각에서 출발해서 수학과 자연사를 이용하여 현대적인 생태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1968년 레벤후크는 수리적인 계산을 통해 딱정벌레의 증식률을 계산했고 한쌍의 파리가 3개월에 약 75만 마리의 파리를 생산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n1798년 초기 인구통계학자 맬더스는 인구론을 출판하였고 이는 다윈의 자연 선택이론에 영향을 미쳐 진화론으로 발달하게 된다. 군집 연구는 식물생태학자 와밍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개체군과 군집의 광범위한 문제들의 인지와 함께 1900년경 생태학은 과학이 되는 길로 들어섰다." }
{ "from": "user", "value": "도도부현의 명칭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도도부현의 명칭은 원칙적으로 청사 소재지의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다만 몇몇 이유로 청사 소재지의 이름과 다른 명칭을 취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청사가 위치한 도시와 군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아 군의 이름을 취했거나 청사를 한 차례 옮겼거나 지금은 사라진 구의 이름을 취했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에히메현, 오키나와현은 도도부현의 명칭을 완전히 새로 만든 경우에 해당한다.\n\n1888년 이래 도도부현의 명칭이 변경된 적은 없다. 지금에 와선 도도부현을 생략한 표현은 도시보단 도도부현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예를 들어 아오모리의 경우 아오모리시보단 아오모리현을 가리키는 경우가 보다 일반적이다.\n\n청사 소재지의 이름을 도도부현의 명칭으로 삼은 것은 「부번현 3체제의 명명 규칙」이 폐번치현 이후에도 유지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에도 시대에는 번의 이름을 짓기 위한 별도의 방침이 없었기에 조카마치의 이름을 따오거나 율령국과 같은 광역 지명을 사용하거나 심지어 번주의 성을 번의 이름으로 칭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부번현 3체제가 성립한 이후부터 청사 소재지의 이름을 도도부현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방법만이 사용되기 시작했다.\n\n폐번치현 직후 단행된 제1차 부현통합과 그 이후에 도도부현의 명칭을 도시명에서 군명으로 바꾼 사례가 다수 있는데 개칭 이유는 불분명하다. 보신 전쟁 당시 정부군에 협조했는지 정부군을 적대했는지를 표시하기 위해 정치적 의사를 가지고 단행했다는 설이 있지만 여러 반론이 있다.\n\n제1차 부현통합 이후 청사 소재지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도도부현의 명칭이 바뀐 사례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통폐합된 도도부현도 청사 소재지에서 유래한 도도부현의 명칭을 그대로 계승했다. 이에 대한 예외 사례로는 이시즈치현와 가미야마현이 합병해 에히메현이 탄생한 것과 시라카와현으로 명명했던 것을 원칙을 좇아 구마모토현으로 개칭한 것 정도다. 또한 폐지되었던 니카와현, 아스와현, 묘도현이 부활할 때 도야마현, 후쿠이현, 도쿠시마현으로 다른 명칭을 취한 사례도 있다.\n\n제2차 부현통합 이후에는 청사 소재지를 이전하거나 청사가 위치한 도시가 합병된 경우를 제외하곤 도도부현의 명칭이 바뀐 사례는 없다.\n\n## 생략 표현\n도도부현을 언급할 때 도부현은 생략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홋카이도는 도를 생략할 수 없다. 이는 도부현은 행정기관의 종별을 나타내는 표현이지만 도는 행정기관의 종별이 아니라 홋카이도 자체가 하나의 지명이고 행정기관명이기 때문이다.\n\n신문처럼 지면에 한계가 있어 문자 수를 줄일 필요가 있을 때에는 아예 한 글자만 남기기도 한다. 구마모토에서 왔다는 표현은 来熊라고 하며 오사카에 돌아갔다는 표현은 帰阪라고 하는 식이다. 보통 도도부현 명칭의 앞글자를 따오지만 뒷글자를 따오기도 하며 완전히 다른 글자로 대체하는 경우도 많다.\n\n## 영문 번역\n도도부현을 영어로 번역할 때 prefecture를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는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지사가 통치하는 관할 범위라는 어감을 주기 때문에 전전과 달리 주민 직선제가 이루어지는 전후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란 지적이 많지만 관례상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홋카이도는 전전엔 prefecture를 사용했지만 현재에는 Hokkaido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도쿄도는 prefecture와 함께 metropolis도 주로 사용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해외 자원군의 각주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refs="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요하네스 케플러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요하네스 케플러**는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이며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핵심 인물이었다." }
{ "from": "user", "value": "초기 생애는?" }
{ "from": "gpt", "value":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바일데어슈타트의 제국자유도시에서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다. 케플러 본인이 어른이 되고 나서 계산한 바에 따르면 부모가 결혼한 다음 날 오전 4시 47분에 자신이 잉태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제발트는 그곳 읍의 장이었지만 케플러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보수가 불확실한 용병 일로 돈을 벌었고 케플러가 다섯 살 때 집을 나가버렸는데 80년 전쟁 당시 네덜란드 전선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관집 딸이었던 어머니 카탈리나 굴덴만은 치료사이자 약재상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나중에 마녀로 몰리게 된다. 이르게 태어난 케플러는 병약하지만 영리한 아이였고 외할아버지의 여관에 묵는 사람들을 굉장한 수학적 재능으로 놀라게 하곤 했다.\n\n케플러는 여섯 살 때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으며 후에 그 일을 여섯 살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에서 \"나는 1577년의 혜성에 대해 많이 들었고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보기 위해 나를 데리고 높은 장소로 올라가셨다\"라고 회고했다..\n\n케플러는 어려서부터 천문학을 알게 되었고 평생에 걸쳐 천문학에 사랑을 쏟았다. 그러나 유년 시절에 천연두를 앓은 바람에 병약한 신체와 불구의 손을 가지게 되었고 시력도 악화되어 관측 능력에 결함이 생겼다.\n\n1589년, 초등 학교, 라틴어 중등 학교, 뷔르템베르크의 국영 개신교 신학교를 거친 뒤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교에 신학 학생으로 들어가 비투스 뮐러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
{ "from": "user", "value": "정치학의 근대 정치학의 성립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그 후 국가의 기반이 확립되고 전제군주정치에 대항하는 민권사상이 대두하게 됨에 따라 정치학은 국가권력의 소재에 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의 정치학은 국가주권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아울러 정치의 실태에 대한 실증주의적 분석을 기초로 하게 된다. 국가주권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자연법 사상에 기초를 갖는 국가계약설에서 비롯된다.\n\n## 국가 계약설\n국가나 사회의 생성을 계약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 말기에 있었다. 애당초 계약설은 국가나 사회가 자연적으로 생겨났다는 사상과 대립되어 생겨났으며, 16세기 후반기에 있어서는 군주와 국민간의 통치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변해 갔다. 이 이론에 의하면 군주의 지배권은 군주와 국민 간의 계약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며 군주가 계약을 어기고 법을 침범할 경우에는 국민의 저항을 받고 국민에 의해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폭군 토벌의 이론으로 등장했던 계약설은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에 국가형성 원리의 성격을 갖게 된다.\n\n그러나 국가계약설이 반드시 근대적 민권사상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17세기 영국의 민주혁명에 항의하고 절대군주제를 옹호한 대표적 이론가로는 홉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 계약론자는 로크나 루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근대적 민권사상을 주장하고 민주주의 이론에 이바지하고 있다.\n\n계약론의 특색은 정치의 세속적 성격과 이성적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세의 교권이론이나 신앙적 자유와 평등이론과는 다르다. 특히 로크로 비롯된 권력분립론은 몽테스키외에 의해서 3권분립론으로 체계화된다. 그리고 루소의 자유주의론은 독일의 관념적 정치이론으로 연결을 보게 된다. 국가계약설은 17세기의 영국 혁명, 18세기의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의 민주혁명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n\n## 국가계약설에 대한 비판\n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과격성이 남긴 후유증은 자연법 사상과 국가계약설에 대한 반발을 야기시키게 된다. 국가계약설은 국가와 사회의 생성을 인간의 역사나 경험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할 도리가 없다. 에드먼드 버크는 역사적 입장에서 자연법과 사회계약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반박하고 민족의 관습과 전통과 그 역사적 발전의 가치를 강조하는 보수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다른 한편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들은 공리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경험주의 이론에 입각한 정치이론을 전개하였다.\n\n## 공리주의적 정치학\n공리주의는 정치적 권위의 근거를 추상적 이성이나 권리에서 찾지 않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찾게 된 것이다. 공리주의의 시조인 벤담 및 그의 후계자 J. S. 밀은 입법·대의정부·선거제도 등의 대의민주정치에 있어서의 실제적 문제를 대상으로 연구했고, 현실정치에 대한 많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밀은 산업사회의 발전이 가져오는 정치적 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시했고 개인주의와 사회주의를 조정하는 자유주의의 수정을 주장하기도 했다.\n\n## 법학적 정치학\n영국과 프랑스에서 발달된 정치학은 독일의 관념적 국가이론 형성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시민사회의 형성이 뒤늦게 이루어진 독일에 있어서는 법학적 정치학의 전통이 확립된다. 본래 군주의 주권성을 옹호하려고 등장했었던 주권 이론이 독일에 있어서는 국가주권 이론으로 변질된다. 독일의 국가론은 군주주권론과 루소의 인민주권론을 절충하여 국가주권론으로 발전하고 국가의 본질을 유기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독일에 있어서의 일반 국가론의 발전은 옐리네크에 의해서 일단 집대성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학을 수립함에 있어 크게 공헌한 학자로는 블룬츨리를 들 수 있다. 그는 국가학을 국가론·국법학·정책학으로 3분한다. 국법학은 국가를 하나의 법규범 질서로 보고 그것을 범이론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며, 국가론은 국가일반의 존재 그 자체를 사회법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며, 정책학은 국가의 목적과 활동을 연구하는 실천과학이다.\n\n## 다원적 국가론\n독일에서 발달한 국가학적 전통은 20세기 전반기에 영국에서 주장된 국가다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국가다원론은 국가학에서 전제로 하는 국가주권론에 반대하여 주권의 소재가 다원적인 사회집단에 있음을 주장하는 이론이나 근본적으로는 주권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치학에서 법학적 요소를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근대적 정치학은 자연법에서 비롯된 사회계약설·역사철학·실증주의 국가학을 기본으로 전개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고생물학이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고생물학**이란 진화 생물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생물학의 특수 분과로서,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화석을 바탕으로 생물체의 발생과 진화과정 그리고 까마득히 먼 옛날의 생물체의 환경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생물학은 지구상에 예전에 살았던 동식물들이 진화해온 역사를 화석기록, 생흔화석 따위를 통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화석에는 신체의 딱딱한 부분이 암석화된 화석과 기어다닌 흔적, 땅을 판 구멍, 신체의 일부가 암석에 찍혀 남은 흔적, 화석화된 피부, 화학적인 잔여물질 등이 포함된다.\n\n현대의 고생물학과 지질학은 중세 후기부터 유럽의 귀족이나 성직자 사회에서 취미 형태로 땅에서 나온 화석등을 모으고 자신의 수집품을 비교대조 하면서 그 기원을 추론하는데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현상이 유독 유럽 문명권에서만 일어났던 까닭은 유럽의 지질이 주로 중생대의 퇴적암 지층이고 서유럽의 대부분이 습곡을 받지 않은 지층이라 그 구조를 이해하기 쉬웠다라는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송나라의 심괄은 이미 화석의 기원과 더불어 지질학적 과정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 적이 있다.\n\n고생물학은 필연적으로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적이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한 연구이나, 이미 멸종된 생물에 대한 연구일 경우 어쩔 수 없이 화석 기록을 통해 연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석으로 남지 않은 생물에 관한 사항은 미지수로 남을 수밖에 없다. 화석으로 남은 종들 중에서도 특별히 대중적 관심을 끄는 대상은 공룡과 고인류이다.\n\n고생물학에서 밝혀낸 생물의 번영과 멸종은 지질학적인 시간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대표적으로 공룡의 멸종을 경계로 하여 백악기와 제3기가 나뉘며, 삼엽충을 비롯한 많은 고생대형 생물의 대량멸종을 기준으로 하여 페름기와 트라이아스기가 구분된다.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정합을 통한 지질시대의 분류는 사실과 맞지 않다. 부정합 자체가 시간적 공백을 의미하기 때문에, 연속적 시간에서 구분'점'을 찍어야하는 지질시대 분류에는 이용될 수 없다. 어느 지질학적 시기의 끝과 시작은 연속된 퇴적물에서 특정한 생물의 화석이 나오기 시작하는 층으로 정해지는데, 이러한 지점을 황금못이라고 한다. 못을 박아서 그 위치를 남기고 싶어 하는 지질학자들의 염원이 표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로제타석의 내용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내용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n\n9년째 되는 해, 즉 아에투스의 아들이자, 알렉산더의 사제이며 구원자 신들과 형제 신들과 이롭게 하는 신들과 부모를 공경하는 신들과 드러내고 영광스러운 신의 사제인 아에투스. 그리고 베르니케 에우어게티스의 아틀로포루스인 필리니우스의 딸 피라. 그리고 디오게네스의 딸이며, 아리스노에 필라델푸스의 처녀사제인 아레이아. 그리고 프톨레마이우스의 딸이며 아리스노에 필로파토르의 사제인 이레네. 크사니쿠스월 넷째 날이며 이집트력으로는 메케이르월 열여덟 번째 날에.\n\n선언문. 대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신전 안으로 들어가 신들을 찬양하고 매의 반지를 끼고 거룩한 문자를 기록하는 자들 및, 이 나라의 곳곳의 사원에서 왕위를 물려받는 제전을 위해 멤피스로 와서 왕 앞에 모이는 사제들과, 영원하시고도 프타에게 사랑받으며 신을 드러내고 영광스러운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를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사제들은 오늘 선언하였다. 영생하시고, 영광스러운 프타에게 사랑받으시는 왕 프롤레마이오스 왕께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과 아리스노에 왕께서 성전과 그곳에서 사는 자들과 그가 다스리시는 자들을 위하여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이시스와 오시리우스 사이에 태어나 나중에 그 아버지인 오시루스를 도왔던 호루스처럼, 처음부터 신과 여신에게서 태어난 신처럼. 자애롭게 신들에게 바치는데 은과 곡식과 같은 수입을 신전에 집중시켜 주셨으므로, 이러한 관대함이 이집트를 부유하게 할 것이며 신전을 확고히 하게 될 것이다. 신들은 그에게 건강과 승리와 힘과 다른 모든 것으로, 그에게 영원히 다스릴 권세와 그를 이을 자녀들에게 영원히 보답하셨다... |로제타석}} 나머지는 구체적인 선언문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사제들과 신전에 대한 여러 가지 혜택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이어지며 여기에서 소개된 분량은 1/5정도이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키리에의 미사곡의 구분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미사곡은 서방교회의 종교 예식을 위한 음악으로 유럽언어에서는 서방교회인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전체의 음악을 통칭한다. 근래에 주의할 부분은 독일어권을 포함하는 유럽 종교음악 중에서 번역된 미사곡들이다. 독일어에서 **미사**는 서방교회의 종교 예식을 의미하여, 개신교의 예배와 천주교의 미사를 통칭하는 용어로 개신교 예배곡도 흔히 **루터교 미사곡** 또는 **복음주의 미사곡**으로 작곡되었다. 이는 유럽어에서는 의미의 혼동이 없지만, 한국어 번역시에 혼동하기 쉬우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구교와 신교 구분없이 이런 예배곡들을 미사곡으로 번역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작곡자의 의도와 달리 개신교 곡이나 천주교 곡이나 모두 미사곡으로 불린다. 물론 현재에 와서는 개신교, 천주교 구분없이 연주되기도 하며, 개신교를 위한 개신교 예배곡인 바흐의 곡들은 개신교회나 천주교회 구분 없이 연주된다.\n\n보통 서방교회 전통의 예전/전례에서 미사곡은 키리에, 대영광송,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 데이의 통상문 노래로 이루어진다. 이 순서는 동방교회의 예배 순서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여전히 서방교회나 동방교회의 전통인 보편표회의 전통으로 존중된다. 이런 순서에 따라서 WCC에서 제정한 예전으로 서방교회의 신구교, 동방교회가 공히 인정한 리마예식서에는 다양한 곡들과 이러한 교회의 공통된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레퀴엠이 뭐야?" }
{ "from": "gpt", "value": "**레퀴엠**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때에 하느님께 죽은 이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 주시기를 청하며 연주하는 전례 음악이다. 이 미사는 입당송의 가사가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로 시작하므로 **레퀴엠 미사** 라 불렀으며, 여기서 사용된 곡은 레퀴엠이라고 하였다. 레퀴엠은 **진혼곡**으로 번역하기도 한다.\n\n15세기 작곡가 아담 폰 풀다는 이러한 종류의 음악을 \"죽음의 명상\"으로 불렀다고 한다." }
{ "from": "user", "value": "레퀴엠 미사는?" }
{ "from": "gpt", "value": "## 입당송\n**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net lux perpetua luceat eis. \nTe decet hymnus, Deus, in Sion, \net tibi reddetur votum in Jerusalem. \nExaudi orationem meam, \nad te omnis caro veniet.\n\n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net lux perpetua luceat eis.\n\n## 자비송\n**Kyrie** eleison,\nKyrie eleison,\nKyrie eleison.\n\nChriste eleison,\nChriste eleison,\nChriste eleison.\n\nKyrie eleison,\nKyrie eleison,\nKyrie eleison.\n\n## 화답송\n**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n**In memoria** aeterna erit iustus\nab auditione mala non timebit.\n\n## 연송\n**Absolve Domine**\nanimas omnium fidelium defunctorum\nab omni vinculo delictorum\net gratia tua illis\nsuccurente mereantur\nevadere iudicium ultionis,\net lucis aeterne beatitudine perfrui.\n\n## 부속가\n**Dies irae**, dies illa\nSolvet saeclum in favilla:\nTeste David cum Sibylla.\nQuantus tremor est futurus,\nQuando judex est venturus,\nCuncta stricte discussurus!\n\n**Tuba, mirum** spargens sonum\nPer sepulcra regionum\nCoget omnes ante thronum.\n\nMors stupebit et natura,\nCum resurget creatura,\nJudicanti responsura.\n\nLiber scriptus proferetur,\nIn quo totum continetur,\nUnde mundus judicetur.\n\nJudex ergo cum sedebit,\nQuidquid latet, apparebit:\nNil inultum remanebit.\n\nQuid sum miser tunc dicturus?\nQuem patronum rogaturus,\nCum vix justus sit securus?\n\n**Rex tremendae** majestatis,\nQui salvandos salvas gratis,\nSalva me, fons pietatis!\n\n**Recordare,** Jesu pie,\nQuod sum causa tuae viae:\nNe me perdas illa die.\n\nQuaerens me, sedisti lassus,\nRedemisti Crucem passus:\nTantus labor non sit cassus.\n\nJuste judex ultionis,\nDonum fac remissionis\nAnte diem rationis.\n\n**Ingemisco**, tamquam reus,\nCulpa rubet vultus meus:\nSupplicanti parce, Deus.\n\nQui Mariam absolvisti,\nEt latronem exaudisti,\nMihi quoque spem dedisti.\n\nPreces meae non sunt dignae,\nSed tu bonus fac benigne,\nNe perenni cremer igne.\n\nInter oves locum praesta,\nEt ab haedis me sequestra,\nStatuens in parte dextra.\n\n**Confutatis** maledictis,\nFlammis acribus addictis,\nVoca me cum benedictis.\n\nOro supplex et acclinis,\nCor contritum quasi cinis:\nGere curam mei finis.\n\n**Lacrimosa** dies illa,\nQua resurget ex favilla\nJudicandus homo reus.\nHuic ergo parce, Deus:\nPie Jesu Domine,\nDona eis requiem. Amen.\n\n## 봉헌송\n**Domine Jesu Christe**, Rex gloriae,\nlibera animas omnium fidelium defunctorum\nde poenis inferni et de profundo lacu.\nLibera eas de ore leonis,\nne absorbeat eas tartarus,\nne cadant in obscurum.\n\nSed signifer sanctus Michael\nrepraesentet eas in lucem sanctam,\nquam olim Abrahae promisisti et semini ejus.\n\n**Hostias** et preces tibi, Domine, laudi offerimus.\nTu suscipe pro animabus illis,\nquarum hodie memoriam facimus:\nfac eas, Domine, de morte transire ad vitam,\nquam olim Abrahae promisisti et semini ejus.\n\n## 거룩하시도다\n**Sanctus, Sanctus, Sanctus**\nDominus, Deus Sabaoth!\nPleni sunt caeli et terra gloria tua.\nOsanna in excelsis.\n**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 \nOsanna in excelsis.\n\n## 하느님의 어린 양\n**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n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n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sempiternam.\n\n## 영성체송\n**Lux aeterna** luceat eis, Domine:\ncum Sanctis tuis in aeternum, quia pius es.\n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net lux perpetua luceat eis:\ncum Sanctis tuis in aeternum, quia pius es.\n\n## 응송\n**Libera me**, Domine, de morte aeterna, in die illa tremenda:\nQuando caeli movendi sunt et terra.\nDum veneris judicare saeculum per ignem.\nTremens factus sum ego, et timeo, dum discussio venerit, atque ventura ira.\nQuando caeli movendi sunt et terra.\nDies illa, dies irae, calamitatis et miseriae, dies magna et amara valde.\nDum veneris judicare saeculum per ignem.\n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n\n## 따름 노래\n**In paradisum** deducant te Angeli:\nin tuo adventu suscipiant te Martyres,\net perducant te in civitatem sanctam Jerusalem.\nChorus Angelorum te suscipiat,\net cum Lazaro quondam paupere aeternam habeas requiem." }
{ "from": "user", "value": "기보법의 한국 음악의 기보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한국에서 쓰여온 악보는 기보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중국계 아악을 기록할 때 쓰던 율자보, 당악에 쓰던 공척보, 세종 때 만든 정간보, 세조 때 쓰던 오음약보, 악기의 소리에 따라 적는 육보, 악기의 연주법에 따라 적는 합자보, 성악곡의 사설에다 간단히 가락을 뜻하는 기호를 덧붙이는 연음표 등이 있다.\n\n고려 때 중국에서 악보와 지결도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율자보와 공척보는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와 쓰인 것이고, 육보는 고려 때에도 있었다고 하며, 정간보·합자보·오음약보는 근세 조선 전기부터 쓰여온 것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마술적 사실주의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마술적 사실주의**는 하나의 문학 기법으로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에는 인과 법칙에 맞지 않는 문학적 서사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20세기 미하일 불가코프, 에른스트 윙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의 많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등장과 함께 유명해졌다.\n\n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독일의 예술 평론가 프랑크 로가 1920년대 종래의 사실 표현을 뒤엎는 화가들을 이르기 위해 처음 만들어냈다. 오늘날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특히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해 쓰이는데 이 뜻으로는 비평가 우슬라르 피에트리가 처음 사용했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자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가 자신의 소설들이 마술적 사실주의 양식을 사용한다고 정의한 후로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다.\n\n전통적인 허구적 사실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별짓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픽션은 플롯이나 인물, 서술자가 완전히 사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마술적 사실주의의 이야기들은 리얼리티를 완전히 고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아내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피의 흐름이 멀리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까지 흘러갔다든지 하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고, 글 속의 인물들은 그러한 상황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들이는 것이다.\n\n주목할 만한 점은 마술적 사실주의가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독재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며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표현이 순화되어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n\n물리 법칙을 따르는 - 적어도 따르는 척이라도 하는 - SF 류의 문학이나, 작품 내에 일관된 규칙을 갖고 있는 판타지 문학과 달리, 마술적 사실주의는 예측 불허의 스토리로 구성되거나, 적어도 묘사하는 사회가 매우 특별하다." }
{ "from": "user", "value": "영화 및 텔레비전은?" }
{ "from": "gpt", "value": "마술적 사실주의 요소를 전달하는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
{ "from": "user", "value": "의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의사**는 현대의학의 전문가로서 인체의 질병, 손상, 각종 신체 혹은 정신의 이상을 연구하고 진단, 치료함으로써 인간의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n\n대한민국의 의료법에 의하면 의료진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간호사로 나누고 있으며, 이 중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에 종사함을 임무로 한다.\n\n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의과대학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여 의학사학위 또는 의무 석사 학위를 받은 자로서 의사면허 취득을 위한 국가시험에 합격한 다음 보건복지부 장관의 면허를 받아야 한다. 다만 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고 영주권을 얻은 자는 소정의 시험을 거쳐 그 면허를 얻을 수 있다.\n\n관련 분야에서 의사의 위상은 군대의 장교와 비슷하며 실제로도 의사가 될 경우 남성은 공무적으로 장교와 비슷한 지위인 공중보건의나 군의관으로 대체복무를 할 수 있다. 또한 일반의로 개업하는 것은 물론 의과학 지식이 필요한 분야와 보건행정 등 공무에 있어서 가산점이나 자격 조건의 이익을 받을 수 있다. 학문적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도 의사들은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사람들처럼 지위가 높거나 지휘하는 쪽이 더 많은 편이며 심지어 수상자들은 의사와 비의사의 숫자가 서로 비슷하다." }
{ "from": "user", "value": "분류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의과대학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의사면허시험을 통과하여 의사면허를 받은 의사직의 대다수는 크게 기초연구의사와 임상의사의 두가지 방향으로 경력을 쌓게 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외에도 보건행정가를 포함한 경력군이 존재한다.\n\n## 기초의사\n기초의사는 기초의학 분야의 전문가로서 이 분야에 대한 교육과 연구에 종사한다. 거의 대부분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에 소속되어 있다.\n\n## 임상의사\n임상의사는 임상의학 분야의 전문가로서 환자 진료와 교육, 연구에 종사한다. 대한민국의 의료법에 따라 의사가 임상의사로서 진료를 하려면 의원, 병원, 종합병원 등의 의료기관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의사는 전반적인 의학 분야에 걸쳐 연구와 진료를 수행할 수 있으나 특정 질환군이나 환자군, 혹은 특정 치료 분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연구와 진료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전자의 경우 일반의사, 후자의 경우 전문의사라 불린다.\n\n### 일반의사\n일반의사는 일차 진료에 필요한 의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여러 환자에 대한 일차 진료를 주로 하게 된다.\n대학병원에서는 CT도 같이 운영한다.\n\n### 전문의사\n특정 분야에 해 추가적인 수련을 받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를 말한다. 현재 대한민국 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 인정 등에 관한 규정에 규정된 임상의학의 전문과목은 다음과 같다.\n\n위의 전문과목에 대한 수련을 받고 전문의를 취득한 후에도 전문과목 내의 특정 분야에서 더 집중적으로 연구와 진료를 위한 수련「임상강사 혹은 펠로우 과정」을 받는 경우가 있으며, 과정을 마치고 각 학회 주관의 인증 시험 등을 마치는 경우, 세부전문의 혹은 분과전문의로 인증을 받으나, 의료법에서 보호받는 인증은 아니다." }
{ "from": "user", "value": "1인 2표제의 도입 사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대한민국에서는 17대 총선부터 도입된 총선 투표 방식이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선출함에 있어 기존에는 단순 지역구 의석수를 기준으로 각 당에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여 왔으나, 17대 총선부터는 지역구 의원에 대한 표와 별도로 지지정당을 선택하는 두 번째 표를 부여하여 그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게 되었다. 방식이 다소 복잡하긴 하나, 다양한 국민의 의견이 반영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윤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윤년**은 역법을 실제 태양년에 맞추기 위해 여분의 하루 또는 월을 끼우는 해이다. 태양년은 정수의 하루로 나누어떨어지지 않고, 달의 공전주기와 지구의 공전주기는 다르기 때문에 태양력에서는 하루, 태음태양력에서는 한 달을 적절한 시기에 끼워서 이를 보정한다.\n\n태양력에서는 보통 **윤일이 들어 있는 해**를 말하는데, 이 경우 1년은 366일이 되며 이것이 바로 윤년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365일 5시간 48분 46초가 걸리므로 365일을 제외한 시간들을 모아 태양력에서는 4년마다 한 번 2월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고, 태음력에서는 평년이 354일이므로 계절과 역월을 조절하기 위하여 19년에 7번의 비율로 윤달을 끼워 1년을 13개월로 한다. 윤년이 아닌 해는 **평년**이라고 한다.\n\n태양력의 윤년은 12지에서 쥐띠, 용띠, 원숭이띠에 해당하며, 육십간지 중 경자, 경진, 경신년의 경우 윤년이 아닌 경우도 있고 임자, 갑자, 병자, 무자, 임진, 갑진, 병진, 무진, 임신, 갑신, 병신, 무신년은 무조건 윤년이다. 또한 2월 29일이 낀 경우에는 윤년인 해의 1월 1일부터 그 다음 해 평년인 12월 31일까지 전년과 2요일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2024년 1월 1일이 월요일이면 2월 29일로 인해 두 요일이 밀려 화요일은 건너뛰고 2025년 1월 1일과 2025년 12월 31일은 수요일이 된다. 1월은 2월 29일에 의해 4월, 7월과 요일이 동일하거나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3월도 마찬가지로 전년 9월과 전년 12월에 동일하거나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
{ "from": "user", "value": "태양력의 윤년은?" }
{ "from": "gpt", "value":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은 4년에 반드시 하루씩 **윤날**을 추가하는 율리우스력을 보완한 것으로, 태양년과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을 뺐다.\n\n그레고리력의 정확한 윤년 규칙은 다음과 같다.\n\n즉, 400년에 97년은 윤년이 되며, 1년은 평균 365.2425일이 된다. 이는 춘분점을 기준으로 한 태양년보다 0.0003일이 길기 때문에,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n\n## 윤년 수정 제안과 그 한계\n그레고리력은 상당히 치밀한 역법으로 1582년에 만들어진 이래 아직까지 수정된 바가 없다. 그러나, 약 3천 년마다 1일의 편차가 발생할 수 있어서 몇 가지 수정안이 제시된 바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4,000년마다 1일씩 윤년을 추가로 빼자는 제안이다. 간혹 이 제안이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n\n이러한 수정안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천 년 이상의 주기로 일어나는 지구의 세차운동이나 조석의 감소로 인한 하루 길이의 증가를 계산에 넣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특히, 조석은 후빙기 반동이나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따라 꽤 변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자료는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역법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그리고 2033년에는 윤년과 삭망월이 겹처져서 2033년 문제가 생긴다." }
{ "from": "user", "value": "프랑스 문학의 프랑스 문학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배경\n원주민 골족의 언어는 켈트어였고, 그들이 개명하기 시작한 것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문화와 혼합되면서부터이다. 로마 제국의 한 속주로 5세기 동안 예속되면서 인종적 혼합인 갈로-로맹인을 형성했고 기독교를 비롯하여 제도·관습·언어 등이 로마화하여 갈로 로맹 문화로 미개한 상태를 벗어났다. 한편 언어는 프랑스 지방의 사투리처럼 된 구어 라틴어를 사용하여 이를 정통 라틴어에 대하여 로망스어라 한다.\n\n당시 프랑스는 크게 북부는 오일어, 남부는 오크어로 분화되어 있었는데, 현대 불어는 오일어, 그중에서도 파리 방언에 기원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가 거의 유일한 문어였지만 차츰 지방의 로망스어, 즉 프랑스어로도 글을 쓰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가장 오래된 불문학의 흔적은 9세기의 스트라스부르 서약과 성녀 에울랄리아 찬가로 거슬러 올러간다.\n\n## 중세 프랑스 문학 \n중세 프랑스 문학은 신앙과 기사도정신을 고취하거나 귀부인과 기사들의 사랑과 무용을 담은 귀족문학과 상류층·승려·지배자를 풍자하는 해학적인 서민문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최초의 서사시인 무훈시들, 장시 로망 등이 전자에 속하고 여우 이야기 등이 후자에 속한다.\n\n## 16세기 프랑스 문학\n프랑스의 르네상스는 16세기에 선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자극을 받고 이를 섭취·소화하는 과정에 두 가지 흐름이 발원한다.\n하나는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로마 고전문예의 큰 장르들을 프랑스어로 소화하여 부흥시키려는 시 운동이다. 마로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형식을 프랑스어로 시도했으며 고전 라틴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의 주제와 양식을 모방하고자 했으며, 이는 피에르 드 롱사르를 필두로 한 플레야드파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에서 신중히 단어를 선별하고 언어구조를 모방해 불어에 받아들여 불어를 고전언어 못지않게 고상한 문학언어로 만드는 것을 꾀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어는 고전 프랑스어로 발전하게 되고 중세 프랑스어와 상당한 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가다듬고 순화된 고전 프랑스어로 희극·비극 장르의 도입을 시도함으로써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터가 닦였다.\n\n다른 하나의 흐름은 고전문예에 담긴 정신·사상을 되살리려는 산문문학의 흐름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금서지정을 받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로 유명한 라블레는 인간성과 현세적 삶의 해방을, 수상록으로 에세라는 1인칭 문학을 창조한 몽테뉴는 회의와 검증·인간탐구의 정신을 일으켜 놓았다.\n\n## 17세기 프랑스 문학\n17세기는 프랑스에 있어서 대세기라 불린다. 종교갈등도 잦아든 전제군주 치하의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문학사에 있어서도 불어에게 '몰리에르의 언어'라는 이칭을 선사한 몰리에르가 활약한 것도 이 때이다. 17세기의 문학사는 바로크와 고전주의라는 양대산맥의 대립·상보라고 요약할 수 있다.\n1610년대 등장한 바로크는 문학적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어 프레시오지테, 뷔를레스크 등의 갈래를 낳았으며, 마들렌 드 스퀴데리를 위시한 살롱이라는 문학공간이 흥성하기도 하였다. 귀부인들이 주재하는 살롱이 속출 유행하면서 사회적 지식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민간의 세력권을 이루고, 사교·대화·시적 교류·관찰을 통해 살롱문학이 발달한다.\n태양왕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1660년이 문학사의 구분점이 되어 고전주의 문학이 전성기를 만든다. 몰리에르를 비롯한 라신, 라퐁텐 등이 궁정의 비호를 받으며 고전주의 극시를 만들어냈다.\n17세기 말 신앙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성이 중요시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8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진다.\n\n## 18세기 프랑스 문학\n18세기는 계몽시대라 불리는데, 이전 세기의 르네상스 및 데카르트적 정신을 통해 이성의 승리를 추구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계몽주의는 전 유럽의 현상이지만, 18세기 사상을 가장 잘 결집해낸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들이었으며, 이로써 프랑스 혁명을 넘어 전 유럽 및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당시 프랑스 및 불어권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들로서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 등이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18세기 말부터 19세기**는 프랑스의 사회 정치사에서 격동기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비롯된 정치 사회적 변화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나아가서 유럽의 새로운 정치적 판도와 사회 문화적 가치 체계의 변모를 가져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7월혁명, 계몽주의 등의 낱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의 격동하는 프랑스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n\n문학이 반드시 정치 사회적 소용돌이의 산물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역사 정치적 배경을 미리 살펴 봄으로써 인간 문화 발전의 동기가 되는 여러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문화, 특히 문학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드니 디드로, 볼테르, 빅토르 위고, 장 자크 루소, 프랑수와 샤토브리앙 등은 바로 18세기 말을 전후로 프랑스의 정치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활동한 작가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정치와 문학세계가 - 넓게는 학문세계 -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경제학의 경제학의 연구방법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경제는 연구하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그 이유는 첫째, 경제라는 시스템은 절대적인 크기가 크며, 둘째, 인간이라는 변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셋째, 상호작용하는 요소가 다양하고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 이유들 때문에 경제는 실험을 통해 연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주류경제학은 독특한 연구 방법을 발전시켜왔다.\n\n대부분의 경제학은 여러 종류의 그래프, 수식 및 통계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경제 현상을 탐구한다.\n\n주류경제학에서 인간의 행동을 수학적으로 형식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가정은 인간의 선호에 대한 합리성 가정이 있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합리성 가정은 인간의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은 수학적으로 형식화된 몇 개의 공리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의 현대 주류경제학 이론은 이 공리에 기초하고 있다.\n\n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그다지 강한 가정은 아니다. 경제학에서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두 개의 대상을 똑같이 좋아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순서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에게 세 명의 친구 영희, 철수, 민희가 있다고 가정하고 영희를 철수보다 좋아하고, 철수를 민희보다 더 좋아하면, 당신은 영희를 민희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이 경우 세 명의 친구에 대한 선호는 영희>철수>민희의 순서가 된다. 영희, 철수, 민희를 똑같이 좋아하는 경우에도 합리성 가정은 만족된다. 다만 합리성 가정이 배제하는 경우는 영희를 철수보다 더 좋아하고, 철수를 민희보다 더 좋아하는데, 민희를 영희보다 더 좋아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영희>철수이면서 철수>민희지만 영희>민희라고 쓸 수 없게 된다.\n\n합리성 가정은 크게 무리있는 가정은 아니지만, 이 합리성 가정에 대해서는 신경경제학, 행동경제학 등 다른 경제학계에서 비판이 있었다. 실증적으로는 합리성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있으며 어린아이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n\n경제학에서는 주로 실험 대신 통계적 방법으로 이론을 검증한다. 경제학 이론을 검증하는데 특화된 통계학을 계량경제학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시뮬레이션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신경경제학 같은 비주류 경제학에서는 fMRI 등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동양 미술사가 뭐야?" }
{ "from": "gpt", "value": "**동양 미술사**는 아시아 지역 미술의 역사이다. 동양 미술은 그림의 표현 양식, 특히 쓰이는 기본재료에 따라 크게 묵화와 채색화로 나뉜다. 채색화는 그림의 대상에 따라 아래과 같이 구분한다. 현대에 이르러 서양화의 회화방법과 사용되는 재료의 부분적인 수용을 통하여 동양화는 그 표현양식 및 기법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서양 미술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서양 미술사**는 서양에서 발생한 시각 예술의 역사를 망라한다." }
{ "from": "user", "value": "서양미술의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서양미술의 근원지는 현재의 유럽과 함께 중동지역, 서부와 남부 러시아를 기준으로 하며 이후에는 북 아메리카 지역까지 확장된다. 미술의 역사는 출토되거나 보존된 미술품을 기준으로 그 작품이 생겨나게 된 시대적 배경과 작가, 작가의 특성 등을 고려하고 있다.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며 따라서 미술의 역사를 말할 때 각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그 파장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n\n서양미술의 발전은 동양미술과 극히 많은 차이를 보인다. 서양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고대의 기원전 4만년까지 올라가며 조각품과 동굴벽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여러 문명과의 교류를 거쳐가며 미술은 서양미술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집트 문명 시절에는 왕과 신을 거대한 조각상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와 같은 유명한 고대 건축물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양미술은 조각과 그림, 직물에서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으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서양미술은 극적인 발전과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이후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위시한 근대미술이 발전하였으며, 인상주의는 모더니즘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20세기 이후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n\n## 선사 시대\n서양 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분명치 않다. 기원전 4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인류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초의 미술 형태를 이루는 돌 조각품을 만들게 된다. 기원전 3만년에서 2만 5천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이라는 작은 조각품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최초의 미술작품 중 하나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고대에 만들어진 미술 작품들은 정확한 제작년도를 추정하기 힘들며 작가는 물론 어떤 민족이 제작했는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즉, 미술의 역사는 사실상 이미 역사가 시작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서야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의 미술 작품은 대다수가 유럽과 남부 러시아를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재료는 대부분 돌이나 짐승의 뼈를 조각한 작품이거나 동굴 벽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고대에 만들어진 미술 작품들은 그 용도가 관상용이 아닌 종교적이거나 교육적인 이유라고 추정되며 사람의 모습이나 들소, 야생말, 다른 야생동물 등 일상적이고 그들이 흔히 보는 모습들을 소재를 다루고 있다.\n\n## 고대\n\n### 미노아 문명\n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3000년의 오랜 옛날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2000년경에는 가치나 정도에 있어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고도의 문화를 전개하였다. 이 문명은 다른 먼 곳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고 크레타섬에서 자생한 것이다. 크레타 문명은 중기 미노스 시대에 제1의 성기에 달했다. 이 시대는 이집트의 중왕국 시대에 해당된다. 크노소스나 파이스토스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대이다. 계속되는 후기 미노스 시대의 제1기 내지 제2기에는 원숙한 황금시대를 맞는다.\n\n크레타인은 대리석이나 청동의 큰 조상은 만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술의 다른 분야에서 예술적 재능을 보여 준다. 벽화를 보면 그들이 특히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자는 허리가 호리호리하고, 대체로 허리에 띠만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꼭 끼는 옷을 입었고, 그 스커트에는 이따금 꼰 끈이나 레이스의 장식이 붙어 있다.\n\n크레타인의 사치는 금·은·상아·보석을 재료로 한 정교한 제품에 반영되어 있다. 바피오에서 발견된 한쌍의 잔은 하나는 황소를 포획하는 것을 표현하고, 다른 하나에는 그 사육의 목가적인 정경이 묘사되어 있다.\n\n### 미케네 문명\n카스피해 북동방의 옛땅에서, 기원전 3000년 후반에는, 이미 동·서 양 방향으로 나뉘었다고 생각되는 인도·유럽어족의 한 파가 발칸반도에 모습을 보인 것은 기원전 2000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발칸반도를 남하하여, 이후 약 800년에 걸쳐, 계속 또는 간헐적으로 그리스 본토로 들어온다. 그 제1차가 그리스인의 한 그룹, 아카이아인이다. 그들은 기원전 1850년경부터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고 얼마 안 가서 미노아 문명의 세계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미노아 왕국의 세력하에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계속 그 수를 더하여 오는 아카이아인에 의하여, 얼마 후에는 미노아 왕국과의 세력 관계가 역전되었고, 지중해 대지진이 미노아 문명의 괴멸에 박차를 가하였다. 기원전 1400년 경, 끝내는 크노소스가 멸망되었다. 이리하여 이번에는, 아카이아인이 에게해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노아 문명의 잔영 밑에, 이 아카이아인이 창조한 문명의 한 시기가 미케네 문명이다.\n\n미케네적 특색은 특히 건축에 나타나 있다. 미케네의 궁전은 크레타의 것과 같은 관이 아니고 언덕 위에 쌓아올린 거대한 성인 것이다. 미케네나 티린스의 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성 입구에서 차례로 통로를 더듬어 궁전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면, 귀중품의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미케네인은 고유의 풍습을 지키고 있다.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앞뜰을 가진 메가론을 채용한 것이다. 메가론이란 것은 그리스어로 '넓은 방'이란 뜻이며, 본디는 원시 그리스의 주거였다. 소위 '남자의 크고 넓은 방'의 평면도는,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장방형으로서 현관 다음에 전실이 있고, 그 뒤에 커다란 주실의 있다. 주실 중앙에는 난로가 비치되어 있다.\n\n미케네 궁전은, 이와 같이 거주 건축의 근본 형식에 있어서는, 그리스적인 특징을 나타내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여기서도 크레타 미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의 세부나 내부의 장비는 크레타 미술을 모방한 점이 많다. 무인다운 강건한 왕후들도 차츰 주거의 쾌적성을 충분히 즐기게끔 되었다. 그들은 기분이 좋은 거실이나 욕탕의 설비를 갖추고, 그들은 넓은 방을 좋아하는 벽화로 장식했다. 따라서 미케네 성의 실내는 크레타의 궁전을 닮은 셈이다. 그런 경우, 회화에 있어서 미케네의 요소와 크레타의 요소가 결합했다고 하겠다.\n\n### 고대 그리스\n크레타·미케네의 미술은 그 후의 시대인 그리스 미술과 비교하여 미적 감각이나 미술상의 양식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것이며, 크레타·미케네의 미술이 반드시 그리스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은 극히 조소적이며, 간소하고 또한 장중한 데 대하여, 에게해 미술은 현저하게 회화적·공예적이어서, 기념비적인 조각은 근소한 예외를 빼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n\n기원전 10세기 말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을 기하학적 모형으로 표현하는 양식이 나타나 기원전 8세기까지 유행하였다. 기원전 10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성립된 그리스의 폴리스는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서 뚜렷한 발전을 하여, 지중해 주변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집트나 오리엔트와의 접촉하면서 대리석 기념물을 제작하는 방식을 습득하여 고대 그리스 조각은 아르카이크기에 진입한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이상미를 추구하는 고전기에 돌입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에는 고전적인 감정은 격정·흥분에까지 높아지고, 운동은 격동·동요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헬레니즘적 특성은 로마에까지 계승되었다.\n\n그리스 건축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신전이며, 또 그리스 건축의 구성의 아름다움과 특색이 특히 신전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처음에는 전체의 비례나 개개의 부분의 형식이 각각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엄격하고 때로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건축 방식이 만들어졌다. 그리스 신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건축의 구조상으로 보아 기둥 및 그 위에 얹히는 수평 부재, 즉 엔태블러처이며, 주범 양식은 각부의 비율이나 형태의 차이에 따라 도리아식·이오니아식 및 코린트식의 세 가지로 구별된다.\n\n### 에트루리아\n로마인보다 앞서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독자적인 문화를 남긴 에트투리아인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북쪽은 토스카나 지방부터 남쪽은 로마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부 이탈리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한 민족이다. 기원전 7세기경부터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를 통하여 그리스 문화와의 접촉이 빈번하게 되고, 기원전 6세기 이래 강한 영향을 받았다. 에트루리아인이 항아리에 그린 그림이나 분묘의 벽화의 주제가 그리스적 요소를 다분히 보인다. 건축·조각·회화·공예 등의 조형 분야에서는 에트루리아인이 독자적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분묘 예술은 그 가장 현저한 증거이다.\n\n에트루리아 건축을 가장 특징짓고 있는 것은 분묘이다. 그 형식은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며, 정자형·장방형·사각형·원형 등 각양각색이다. 가장 오래된 유적은 빌라노바 문화와의 혼성기라고 하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9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다. 그 형식은 우물형인데, 가운데에 뼈항아리를 놓는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그 후 기원전 8세기에 와서 새로운 형식의 장방형 분묘가 만들어지고, 다시 기원전 7세기 말 이후에는 궁륭 천장을 가진 순연한 분묘 건축이 나타났다.\n\n에트루리아인은 여러 가지의 형태를 한 분묘를 만들고 거기에 많은 일용품을 부장함과 함께, 분묘의 벽면을 아름답게 채색한 벽화로 장식했다. 타르퀴니아의 분묘군에는 벽화가 가장 많이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된 벽화는 의 기법은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던 프레스코가 아닌 템페라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인물 사이에 나란히 선 수목이나 작은 새들의 묘사는 사실적이다. 이것들은 분명히 그리스 회화의 영향이지만, 자연과 인물의 환경 묘사는 그리스 회화에서 볼 수 없는 에트루리아 회화의 특징이다.\n\n### 고대 로마\n로마 미술은 북방의 에트루리아 미술과 반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 미술의 영향을 받아서 싹이 트고 발전한 것이다. 로마는 현실적·행동적인 요소를 에트루리아인으로부터 받아 계승하면서 그리스적 형식을 모방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매우 많은 수의 그리스 조각이 로마로 운반되었다. 다수의 그리스 예술가가 로마에 초빙되어 그리스 명작을 모방했다. 청동의 원작은 대리석에 되새겼고, 그것들은 로마인의 취미나 헬레니즘 시대의 자연주의적인 경향으로 약간 변경되어 갔다.\n\n로마 미술의 특성은 건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로마의 건축은 기둥과 들보로 되는 그리스 건축의 구성과, 에트루리아의 성문이나 분묘에 쓰이고 있는 아치형을 채용하였다. 구조면에 있어서는 아치형의 채용에 수반해서, 벽돌이나 돌을 가루로 만든 일종의 시멘트가 건축 공업에 채용되어, 거대한 건축의 건조를 가능하게 했다. 아치형에서는 상부의 중력은 원 둘레의 각 부분에 균등하게 중합하기 때문에, 기둥의 수를 줄이고 내부를 넓힐 수 있다.\n\n조각에 있어서는 그리스의 영향이 특별히 현저하여,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대부분의 그리스 조각이 로마로 운반되고, 또한 파시텔레스를 비롯하여 다수의 그리스의 예술가를 로마로 불러들여서 고전의 명작을 모방시켰다. 초상 조각에는 로마 조각의 훌륭한 독창성이 보이는데, 그것은 단순한 용모의 모방이 아니라 성격 묘사의 교묘한 점인 것이다.\n\n로마의 회화는 헬레니즘 회화의 수용에서부터 시작한다. 헬레니즘 회화의 원작은 헬레니즘의 여러 지역에서는 거의 잔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원후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오산의 분화로 매몰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 남아 있는 벽화를 통하여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회화를 알아낼 수가 있다. 프레스코 및 모자이크에 의한 그들의 화풍은 헬레니즘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감각적이며 신비적이고 산문적인 주제가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n\n## 중세\n\n### 중세 초기\n서방 세계에서는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4세기경부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각지에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정주하게 되었다.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기독교는 이 지방민족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교나 아리우스파를 믿고 있던 그들의 지배자도 5∼7세기에 걸쳐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고, 마침내 프랑크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기독교 미술이 형성되는 길이 열렸다. 고대제국의 붕괴로부터 소위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났던 10세기경까지의 사이를 넓은 의미의 중세초기라고 부르고 있다.\n\n메로빙거 왕조의 미술은 고전고대의 미술과 중세미술을 잇는 꼭 중간점에 있었다. 이 시대에는 갈리아, 게르마니아, 비지고트, 브리타니아 등이 각각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구로마제국의 지배가 강했던 지역에서는 고전 양식을 좇은, 사실성이 강한 기독교 미술이 생겨나려 하고 있었으나, 알프스 이북이나 에스파냐에서는 북 또는 동으로부터 이동하여 온 게르만 민족과 선주민인 켈트족이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형체감각이나 순수한 장식성과 결부된 조형이 행하여지고 있었다.\n\n8세기 말, 샤를마뉴는 스스로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받아 고대 로마의 재래를 기대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고전문화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서쪽의 그리스도 교권의 지도적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수도 아헨에는 프랑크인 아인하르트를 위시하여, 각지의 유명한 학승이 모여 학예의 중심이 되었다. 조형예술도 예외일 수는 없어 이 학예운동에 포함되었다. 이보다 앞서, 대제의 부친 피핀이 랑고바르트로부터 탈취한 라벤나를 교황령으로 기증함으로써 궁정과 교회의 결탁이 성립되었다. 기독교 미술은 종래와 같이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교단 가운데서 만들어지던 것으로부터, 점차 확립되어 가는 봉건제도하의 궁정이나 영주 등의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교회의 건축양식은 바실리카식으로 지어졌다. 공법은 석재를 쌓아올리는 로마 고래의 방법에 따라 주두가 있는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이미 목재 사용에 뛰어났던 북방 민족인 게르만인은 그 기술까지도 병용하여 지붕은 주로 목조로 하였다.\n\n건축이나 그에 부수되는 미술이 대부분 소실된 오늘날, 소미술이라고도 할 장식사본·제기·성기류의 공예품은 카롤링거 왕조 미술의 모습을 잘 전해 주는 것이다. 의전서인 성전은 각 페이지는 물론이요, 표지까지도 금공이나 칠보로 아로새겨졌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성상 파괴 운동이 성행되고 있을 즈음 아헨에는 많은 성제기류가 동방으로부터 수집되어 왔다. 장식사본은 라인강 유역과 북프랑스 일대에 여러 유파가 형성되어 제각기 독특한 표현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들 여러 유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시하여 사도 여러 성자의 풍부한 도상화이며, 그 둘째는 동적, 사실적인 형체 표현 등이 있다.\n\n### 로마네스크\n10세기부터 12세기경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르며, 11세기에서 12세기 초에 걸쳐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광대한 프랑크제국이 분열되고, 노르만인, 사라센인 등의 거듭되는 침입으로 서유럽에 혼란과 공백이 계속되는 사이에 각지의 봉건 제후는 세력을 넓혔고, 중앙집권제는 붕괴되었다. 미술활동도 궁정 중심의 전유럽적인 것을 상실하고,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을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따라서 저마다 지방양식이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징의 하나가 되게 되었다. 로마네스크란 원래 건축사상의 용어였다. 두꺼운 석조의 벽체,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라는 호칭을 붙였으나, 그 후 개념의 변화가 생겨 고대 로마의 전통을 가미하고 에스파냐를 거쳐 전해진 사라센 양식이나, 활발해진 수도원 상호간의 교류, 십자군, 성지 순례 등을 통하여 전래된 동방 여러 지역의 양식 또는 카롤링거 양식, 비잔틴 양식 등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겨난 중세 중기의 양식을 가리키게 되었다.\n\n### 고딕\n12세기 말 북부 프랑스에서 고딕 미술이 발생하여, 고딕 건축이 발달하면서 덩달아 발달했다. 프랑스에서 처음 유행한 이래로 서유럽 전반과 알프스 북부에 두루 퍼졌으며,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 되었다. 지역 차이는 있으나, 고딕 미술 운동은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로 이어졌다.\n\n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두껍고 넓은 벽면이 제거되고 크고 높은 들창의 형성이 가능해지자 스테인드 글라스가 발달하였다. 13세기까지의 기술은 주로 모양에 맞추어 자른 색유리를 H자형 단면을 가진 납 테에 끼워 한 장의 그림을 조립하고 필요에 따라 쇠 테로 보강하여 창으로 시공하였다. 이것은 게르만 켈트의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긴 중세의 역사를 통하여 발달하여 온 소공예의 색면 대비의 아름다움에, 투과광의 영롱함을 결부시켜 대예술로 발전을 본 것이다. 어두운 성당 안은 영롱하게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과 빛 속에 완전히 종교적인 분위기가 넘치게 되었다. 전형적 작품 예로 샤르트르 대성당의 150개에 가까운 크고 작은 창이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n\n이 시기에는 사실적 경향의 발달과 더불어 순수한 공예는 사양화하나 사본류는 13세기의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교회에 귀속하는 것보다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고 랭부르 형제의 작품인 는 그 좋은 예이다.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회화는 후에 플랑드르파의 탄생을 맞게 되는 것이다.\n\n### 비잔틴 미술\n비잔틴의 미술은 고대 로마가 둘로 분열된 후 점차 쇠퇴되고 있던 서로마 중심의 라틴 미술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 용인령을 공포하여 비잔틴의 미술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이미 궁정의 지지를 배후에 업은 기독교 미술로서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의 원천이 된 유대교의 신앙 지역이나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등의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보존하는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 또는 동로마 제국을 자주 위협하는 강적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인접해 있는 이질문명이 동로마제국의 전사를 이룬 로마적 지중해 문명과 융합되어 동방적 요소와 라틴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헬레니즘의 전통 위에 새로운 국면을 더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비잔틴의 예술이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최초의 전성기를 맞아 갖가지 중요한 문화 유산을 남겼으나, 8∼9세기에 걸쳐서 성상 숭배에 관한 논쟁과 사라센인의 침입이 겹쳐 문화적으로는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그 후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한때 재흥기가 있었다.\n\n## 르네상스\n\n### 이탈리아 르네상스\n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의 고지로서 유적·유물에 접하는 기회가 풍부했다. 유럽 중세의 신에 대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이 대치되어 피안적이 아니고 차안적·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의 약동에 찬 문화가 시민계급에 의해 이 곳에서 창조되기에 이르렀다.\n\n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건축에서, 그리고 기베르티,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이룬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회화에 있어서는 마사초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사리의 열전에 기술된 것처럼,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피렌체에 있는 카르멜회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는 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수업의 도장이 되었다. 필리포 리피, 우첼로, 카스타뇨 등 피렌체의 화가들은 북이탈리아에서 한때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조토가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도나텔로가 그곳에 10년간 체재하여 산토의 주제단과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을 제작한 일은 마사초에 이어서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한 화가인 만테냐에게 적잖은 자극이 되었다.\n\n피렌체파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14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미술의 주류를 이룬 건축·조각·회화의 유파로, 특히 회화에서는 주지적 합리주의·조형적 형태주의가 그 특징이다. 주제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공간구성은 화면 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피렌체파의 사실적 성과는 메디치가의 번영에 힘입어 르네상스 회화 발전의 주류가 되었다. 이 자연주의는 1400년대 예술의 주류가 되었으며, 자연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인체묘사·운동묘사·풍경묘사 등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n\n### 매너리즘\n성기 르네상스에 완성된 고전주의 예술의 뒤를 이어받아, 거의 1520년 경부터 17세기 초두에 걸쳐서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매너리즘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양식을 낳게 한 역사적 조건으로서는 라파엘로이나 미켈란젤로의 완성된 힘찬 표현에 대한 경도, 독일, 특히 뒤러의 작품을 통해서 전해진 북방 고딕의 강렬한 표현주의의 전통,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한 '로마의 약탈'이나 종교전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혼란한 시대 특유의 사회적 불안, 퐁텐블로의 프랑수아 1세나 피렌체의 코시모 대공을 비롯해 많은 예술 애호가 군주의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들 수 있다. 표현은 극도로 세련된 기교, 곡선을 많이 쓴 복잡한 구성, 비뚤어진 원근법 등을 이용한 뜻하지 않은 구도, 명암의 콘트라스트나 복잡한 안길이의 표현에 의한 강렬한 효과, 환상적인 세부, 때로는 부자연스러운 프로포션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색채 등을 특색으로 하고, 자주 복잡한 우의적, 추상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n\n## 근세\n\n### 바로크\n16세기의 매너리즘에 있어서 지적인 편중은 복잡한 우의를 즐겨 쓰기도 하여 그의 호기심과 유희성은 환상적이기도 하고 에로틱하기도 한 작품을 만들어 세련된 유미주의에 의해 귀족과 일부 지식계급의 주목을 끌었으나 이에 비해 17세기의 이탈리아 회화는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카라치의 아카데미즘을 두개의 축으로 하여 출발하나 이 양자가 모두 현실성과 감각성의 많고 적음의 여하로 매너리즘 회화와 구분되고 있다. 바로크의 창시자인 카라바조의 영향은 곧 에스파냐와 북유럽으로 퍼져 그 추종자를 '카라바제스키'라 불렀다. 특히 루벤스, 렘브란트를 낳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에스파냐에서는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등이 활동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니콜라 푸생 같은 작가가 있었으나 오히려 르네상스적인 '루이 14세 양식'이 성행하였다.\n\n### 로코코\n화려하고 장중한 베르사유의 예술은 루이 14세가 이전과 같이 현실 생활을 향락할 수 없는 나이가 되자 사교 생활의 중심으로서 재차 파리에 집중되었다. 파리의 세련된 생활 속에서 우아하고 경쾌한 로코코 예술이 육성되었다. 로로코 양식은 계몽주의와 더불어 전 유럽의 궁정 문화를 프랑스화하였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의 계몽 군주 요세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왕, 네덜란드·스웨덴·에스파냐 등 모든 나라의 궁정에 프랑스 예술가가 초청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파리가 과거의 로마와 같이 유럽 미술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n\n앙투안 바토는 이탈리아 희극과 귀족적 환락을 결부시켜 풍요한 색채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페트 갈랑트라고 불리어지는 주제인데, 상류사회의 남녀가 숲과 정원에서 향연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풍속화라고 볼 수도있으나, 귀족들의 덧없는 몽상을 우아하고 요염하게 형상화한 것으로 거기에 덧없는 애수의 정이 서려 있다. 루이 15세의 치하 전반에 가장 환영을 받은 것은 이런 유의 회화로서, 파테르·랑크레 등이 이를 계승하였다.\n\n### 고전주의\n미술에서의 고전주의는 문학과는 달리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나타났다.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그에 이어지는 로마 시대가 문화의 이상으로서 존경을 모으는데, 그 예찬은 상기한 시대에서 엄격한 주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고대로의 관심은, 18세기의 중간 무렵부터 폼페이 및 그 밖의 지역에서 많은 고대의 유적들이 발굴되어서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술에서 그 주의를 철저하게 추진시킨 것은 다비드로서, 다비드는 18세기 세상을 풍미했던 염미적 회화를 배격하여, 프랑스 혁명 전인 1785년에는 이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발표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난에 임하는 고대의 용사를 묘사한, 준엄을 극한 작품이었다. 고전주의에는 정신적인 엄숙감은 있지만 색채는 냉정이 지나쳐 생기가 부족하고, 미와 기쁨에서 멀어져서 그 엄격성은 곧 낭만주의를 유발하였다.\n\n### 낭만주의\n혁명시대에 넘쳐 흘렀던 고대의 애국정신이나 제정시대에 보급된 고대의 영웅정신은 차차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여, 1800년에 이르면 그 반동으로서 낭만주의가 탄생한다. 낭만주의는 문학에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 무렵부터 중세의 이야기나 이국정서 등에 비상한 흥미를 보였다. 미술의 경우는 단지 제재를 문학이나 정서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신적인 사상을 뿌리쳐 감정을 자유롭게 토로하고, 그 내용이나 색채에 훨씬 정열을 의식케 하는 표현을 하였다. 그로는 루벤스의 정열적인 색채에 심취하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스승 다비드의 엄중한 교의를 존중하면서도 그 분방한 천성은 유감없이 작품에 나타나서, 특히 전쟁화에는 초연의 냄새와 더불어 사람을 뒤흔들 것 같은 감동이 움직이고 있다. 그로는 그 색채에서도 약동이야말로 작품의 생명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로에 이어서 제리코가 나오고, 다시 들라크루아가 나타나서 낭만주의는 크게 발전하였다.\n\n## 근대\n\n### 사진술의 발명\n17세기경부터 유럽에 카메라 옵스쿠라가 유행하였는데, 렌즈를 통화한 빛이 반대쪽 면에 선명한 화상으로 맺히게 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풍경의 유람에 제공되고 풍경이나 초상의 포즈를 그리는 수단으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이 화상을 어떠한 방법으로서 정착시켜 기록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으나 1826년에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금속판 위에 화상을 잡음으로써 세계에서 처음으로 화상의 정착에 성공하였다.\n\n1831년에 루이 다게르는 옥화은판을 노출한 뒤 수은 증기에 쬠으로써 사진술의 기초원리를 발명하였다. 1837년에는 촬영, 현상, 정착의 프로세스를 완성하고 화상을 영구적으로 고정시켜 자기 스튜디오의 한 구석을 촬영하여 라 제목을 붙이고, 이 프로세스를 다게레오타이프라고 이름붙였다. 같은 무렵 영국에서는 윌리엄 폭스 탯벗이 니에프스나 다게르와 별개로 자연의 영상을 종이의 섬유 중에서 염화은을 만들어 레이스나 깃뿌리를 밀착 현상했다. 명암이 반대로 음화로 되고, 이것을 원판으로 하여 몇 장이고 양화를 만들 수 있게 됐다. 1839년 8월 19일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프랑수아 아라고가 다게레오타이프를 공식 발표하였다.\n\n사진의 등장은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회화는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게 되어, 인상주의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다.\n\n### 인상주의\n인상파는 1874년 4월에, 파리 카프신가의 전 나다르 사진관을 회장으로 하여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세잔, 르누아르, 모리조, 기요맹 등이 모인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 협회전이라는 것이었는데, 회장에 우연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고 명명한 작품이 있어, 그것을 들어 잡지 ⟪샤리바리⟫의 비평가 르로아가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이라는 데에서, 인상파라고 야유한 연유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그 인상파는 1886년 제8회전까지 계속되는데, 최초에는 압도적인 매도로 시작하였으나, 이윽고 고갱이나 고흐도 참가했다. 19세기 말기에는, 살롱 화가에도 앵그르 시대의 단정함과 위엄이 결여되고, 틀에 박힌 관념에서 차갑고 깨끗이 그릴 뿐 완전히 막다른 곳에 부딪치고 있었다. 인상파는 그 교착 상태에 활로를 열어 참신성을 주입하고, 회화는 그것을 계기로 하여 급속도로 현대로 향했다.\n\n### 표현주의\n20세기 전반 독일을 중심으로 주관 표출을 목표로 하는 전위적 예술 운동인 표현주의가 발생하였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은 나비파와 접촉이 있던 노르웨이 화가인 뭉크처럼 뛰어난 선구자 이외에도 독일의 향토 예술과 정감적인 자연파, 세기말의 미술에서 선구자를 가졌으며, 또한 16세기로 소급하는 독일 미술의 전통 중에서도 풍부한 영양을 섭취한 것이었다.\n\n독일 표현주의의 최초의 그룹은 1905년 드레스덴 고등공업학교 건축과 학생들로 결성된 '브뤼케'였다. 1909년 뮌헨에서 '신예술가동맹'이 탄생하여 인상주의를 신봉하는 분리파인 구세대에 대항할 새로운 세력을 결집하였다. 더욱 1911년 신예술가동맹에서 새로이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이 파생하였다. 이 그룹은 다분히 낭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제예술의 통합'을 이념으로 내건 모임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뒤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선취하는 것이다.\n\n### 20세기 이후\n유럽에 있어서의 19세기까지의 미술전통은 한마디로 사실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사실주의란 다름 아닌, 현실 내지는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래 미술의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되어 오던 이 사실주의 전통에 대한 반기를 들고 20세기 미술은 새로운 조형적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조급한 모색을 거듭하였거니와 한편에서는 순수한 형태의 조형성을, 또 한편에서는 색채의 독자적인 표현력을 제각기 추구하면서 끝내 반사실주의의 절정인 추상 미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사실주의 전통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유럽정신의 기틀, 즉 합리주의 정신에 대한 반항도 또한 20세기를 특징짓는 요인의 하나로서 나타나며, 그러한 움직임의 가장 획기적인 표명으로서 우리는 다다이슴과 쉬르레알리슴을 들 수 있다.\n\n제2차 세계 대전을 고비로 전후 미술은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 한 층 과격한 미학적인 모험과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 가열된 소용돌이는 우선은 앵포르멜 미술과 액션 페인팅의 등장으로 전쟁 이전의 고전적 추상미학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비롯되어, 연이어 상극과 초극의 눈부신 변천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전후의 동향은 전전의 '이즘' 중심의 미술 운동과 달리 '아트'의 명칭을 앞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팝 아트, 옵 아트를 필두로 하여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 또는 정크 아트, 그리고 오늘날의 개념 미술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
{ "from": "user", "value": "세포생물학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세포생물학**은 생물체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세포의 구조를 연구하는 생물학의 전문 연구분야이다. 세포의 관찰과 연구는 분자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세포학은 세포의 구조에서 비롯하여 세포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생물의 생성과 발전에 보다 상세한 지식을 얻음으로써 생물학 관련 분야, 생화학, 유전학, 진화 생물학 등에 유익한 자료를 제공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아이네이아스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아이네이아스**(에서 아이네이아스를 주인공으로 놓고 찬미한다.\n\n아스카니우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기원이 되는 라비니움의 전설적인 건국자이자, 로마 왕국의 시조이다. 라티누스 왕은 아이네이아스에게 자신의 딸 라비니아를 시집보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 라비니아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이라 칭해진 도시를 다스렸다." }
{ "from": "user", "value": "로마 문학과 신화는?" }
{ "from": "gpt", "value": "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난 뒤 카르타고에 닿아 그곳의 여왕 디도와 사랑을 나누는 등 7년 동안의 유랑 끝에 이탈리아의 라티움에 상륙하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의 왕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새로운 도시 라비니움을 건설하였고 이후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로 묘사되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가 로마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조상이라는 로마 건국 신화도 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증손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최초의 영국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
{ "from": "user", "value":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이탈리아의 포강 중류의 만투아 근교의 안데스에서 태어났다 . 그의 고향은 당시 로마의 행정구역인 갈리아 키살피나로서 그의 부모는 서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농부이자 도자기굽는 일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마기아 폴라는 베르길리우스를 낳기 전에 월계수가 울창하게 자라는 해몽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이 꿈과 관련하여 그의 이름 ''Vergilius''는 라틴어의 ''virga'' 에서, 그리고 여기서 기원후 5세기를 전후로 ''Virgilius''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n\n기원전 59년에서 53년까지 베르길리우스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메디올라눔로 가 웅변술과 여러 학문들을 배운다. 기원전 54년에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웅변술을 배운 후, 실지로 소송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활약을 하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과, 워낙 수줍음이 많은 천성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정계 데뷰를 포기하고 젊은 문학자들과 잦은 교류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을 접하게 되고, 이후 문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기원후 52년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가서 시로가 주도하던 에피쿠로스학파에 들어가 약 3-4년간 생활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깊이 배우게 된다.\n\n시를 써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알게 되어, 일생 동안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농경시등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낭송하기도 한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건국을 다룬 작품을 써 보라고 권하자 그에 응하여 아이네이스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기 전의 11년 동안 썼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시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서사시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집필하였다. 또한, 단테의 에서 지옥의 안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n작품집으로 농경시,목가,아이네이스 등이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정치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정치**란 나라와 국민을 다스리는 일을 뜻하며 가장 가치있는 권위적 분배로 정의된다. 정치적 가치란 공익, 사익, 경제적 이익, 자유, 생존권 등 국가의 본질과 그 미래를 의미한다.\n\n막스 베버는 정치를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라고 정의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정치를 국가의 영역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 내재된 권력 관계로 정의하는 경향도 생겼다. 미셸 푸코는 사적인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권력을 미시 권력이라고 정의한다. 이와 같이 정치는 \"배분\",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 \"권력 관계\"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어느 한 측면도 소홀히 여겨질 수는 없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정치의 정의는 아마도 해럴드 라스웰이 말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라는 것일 것이다. 라스웰 또한 정치를 '배분'의 측면에서 정의함을 알 수 있다. 정치학은 정치적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학문이다. 관련된 분야로는 정치철학, 비교정치학, 국제정치학 등이 있다." }
{ "from": "user", "value": "어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정치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상서』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으로 처음 등장한다.\n\n‘정치’에서 ‘정’은 바르다의 ‘正’과 일을 하다 또는 회초리로 치다의 의미인 攵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이다. 즉,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한다. 치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조화로운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로운 것,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정치는 다른 말로는 수기치인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는 먼저 자신의 부조화로운 것, 네거티브한 것, 즉, 천지자연의 이치에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스려 극복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 곤란함, 부조화로운 면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군자 또는 성인을 의미한다.\n\n‘정치’가 politics의 번역어로 쓰인 오래된 예로는 위원의 해국도지 등이 있다." }
{ "from": "user", "value": "공산주의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공공 소유에 기반을 둔 경제·사회·정치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 또는 이러한 사회 형성을 목표로 삼는 형식적·실질적 정치 운동에 관한 사상이다.\n\n플라톤의 『국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본래 공산주의적 사고는 전근대 사회에도 존재했으며, 이후 유럽의 로마 가톨릭 사회에서 등장한 유토피아주의자의 만민 평등 사상 및 지상천국 운동을 뜻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오늘날에 통용되는 공산주의라는 의미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관한 것을 뜻하며, 변증법·역사주의·유물론이 핵심 사고로 자리잡고 있다.\n\n이 사상이 현실 정치에서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시점은 19세기 유럽의 산업화 시기와 겹친다. 이 당시 유럽은 급속한 산업 발전에 따른 갖가지 사회병리현상을 겪고 있었는데, 공산주의는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주창되었다.\n\n이후 수많은 사회주의 이론과 병립하여 공산주의는 거대한 종합 사상으로 성장하였다. 1871년 파리에서 코뮌 봉기의 형태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성립했으나, 존속 기간은 상당히 짧았다. 1917년에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에 의해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발발한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여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성립되었다. 이후 공산주의 운동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대표하는 운동으로 인식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경로를 통하여 동유럽 및 아시아의 공산주의권이 성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이후부터 공산주의 운동은 사실상 쇠퇴의 일로를 맞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사회주의는?" }
{ "from": "gpt", "value": "현대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사회주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여겨진다. 이러한 관점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회주의로 규정한 이후부터 등장한 관점이다. 레닌의 이러한 규정이 있기 전까지 사회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평등과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다양한 사회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며, 공산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사유제의 전면적인 철폐를 위해 문화, 사회, 정치등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에 대한 전방위적 변혁을 주장하는 사상으로 여겨졌다.\n\n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까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의미가 확립되어 가는 와중에 사회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전제한 협동 경제 형성과 당시 사회에서 나타나는 부조리를 사회 공동체의 집단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하자는 이념으로 그 의미가 굳어졌다. 반면, 공산주의는 기존 사회 체제를 모조리 뒤엎어야 함을 전제했으며, 이후 사회 변혁은 혁명 세력에 의한 강제력에 호소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그 실행 과정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였다.\n\n정치철학적 견지에서 놓고 볼 때, 사회주의는 초기 자유주의 사상의 정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조명하여 정치철학 논리를 구사한 것에 반해, 공산주의는 자유주의 사상이 성립되기 전부터 존재하던 여러 형이상학 담론을 인용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철학 구조를 형성했다.\n\n이러한 성격 차이로 인해 사회주의는 기존의 질서 내에서 종교 명망가 및 선진적인 활동가의 분배 정의를 위한 실천 운동으로 여겨졌지만, 공산주의는 전통의 파괴를 동반하며 기존 사회 체제를 모조리 변혁하는 반국가 및 반그리스도교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즉,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보다 훨씬 급진적인 운동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 문화가 강렬하게 남아 있던 유럽 사회에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n\n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시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갖고 있던 성격을 조명하였고, 스스로의 사상이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공산주의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원리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갖고 있던 기회주의적 처신, 온건적인 성격을 폭로했고, 이러한 특징의 소멸로 하여 비로소 사회주의자와 구별되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n\n이후 긴 시간이 지나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입장과 더불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범주 안에 포함된 사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인식으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이탈리아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이탈리아 공화국**, 약칭 **이탈리아**(, 약자: IT, 문화어:이탈리아, 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60,200,000여 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로마를 비롯하여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등이 있다.\n\n오늘날 '이탈리아'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옛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같은 게르만족과 몽골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타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n\n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과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리소르지멘토\"라는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19세기 말부터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는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어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로도스섬, 도데카니사 제도, 중국 톈진까지 지배하였다. 원래 군주제 국가였으나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1946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 공동체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 연합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99년에 유로화를 채택하였다.\n\n오늘날의 이탈리아는 민주 공화국이며,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서 삶의 질 세계 8위를 기록했다. G7과 G20 소속이며, 2011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 8위이다. 이탈리아는 오늘날 유럽 연합의 창립 회원국으로, 1957년 로마 조약이 체결된 나라이기도 하며, 북대서양 조약기구 원년 회원국이다. 그 밖에도 경제 협력 개발 기구와 세계 무역 기구, 유럽 평의회, 서유럽 연합의 일원이다. 이탈리아의 군비 지출은 세계 8위이며,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핵 공유에 참여하고 있다.\n\n이탈리아는 정치와 문화 면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데, 식량 농업 기구, 이 나라는 높은 교육 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한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인사법은 Chio로 알려잔다." }
{ "from": "user", "value": "지리는?" }
{ "from": "gpt", "value": "이탈리아 반도의 등뼈에 해당하는 아펜니노산맥은 북서쪽에서 알프스산맥과 맞닿는다. 알프스 산맥은 곡선을 그리며 이탈리아의 북쪽 경계를 형성한다. 이 지역에는 충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포-베네치아 평원이 있어 물은 포강과 알프스산맥, 아펜니노산맥, 돌로미티산맥 등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지류로 흘러든다. 포 강 외에 잘 알려진 강에는 테베레강, 아디제강, 아르노강 등이 있다.\n\n해발 4,810m의 몬테비안코산이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산은 나폴리 근처의 휴화산 베수비오산과 시칠리아의 활화산 에트나산 이 두 화산이다." }
{ "from": "user", "value":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약칭 **소비에트 연방** 또는 줄여서 **소련**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다.\n\n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n\n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였고,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하여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 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인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소련은 1945년 5월 9일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45년 8월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소련은 대일전에서도 승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과 중앙 유럽 위성 국가들은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1986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의 경제를 중흥시키려 하였다.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8월 쿠데타가 소련 국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뒤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면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
{ "from": "user", "value": "경제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소련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는 약 9,300$에 달했다. 소련은 생산 노동자에 한하여 주 35시간 근로제를 채택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한하여 주 41시간 근로까지 허용했다. 경제력에 관련해서 소련은 군수산업, 산업정비기기산업 부문에서 그 규모가 세계 1위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가 혼합 경제를 받아들였다. 1965년 이전까지는 소련의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하였으나, 1965년 이후부터는 고스플란의 역할이 축소되고, 각 생산 수단을 맡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을 했다.\n\n192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내전은 소련 경제를 피폐화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이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제가 안정된 후 소련은 다시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용하였으며, 1930년대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여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5년부터 지속된 계획 경제는 소련의 농민들을 수탈하여 인명을 대거 희생시켰고, 노동자들에게는 과도한 중노동 부담를 안겼다. 이러한 중노동으로 인해 중앙 계획경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생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5년에는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혼합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n\n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소련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소련은 1950년대에도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n\n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혼합 경제를 받아들였다.\n\n## 소비재\n군사에 투자되는 자금에 비해 국민 생활에 필요한 전자제품이나 소비재의 개발과 생산, 물류의 정비는 소홀히 다루어졌다.\n\n서방의 전자제품이나 화장품, 의류 등의 소비재의 수입, 유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만 설치된 굼 등의 외화 전용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이나 공산당 간부와 그 가족뿐이었다.\n\n## 무역\n소련의 서방 수출은, 농산물이나 어패류 등의 제1차 상품, 원유나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 자원이 대부분이었다. 통화인 루블 자체도 국외에서 통화로서의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서방과의 무역수지는 대개 적자였거나 매우 적었다.\n\n그에 비해 동유럽에 위치한 소비에트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과의 무역은 1차 상품이나 에너지 자원은 물론, 전자제품이나 소비재, 공작기계로부터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군사 물자까지도 수출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물자가 사실상의 원조품으로서 무상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되었다.\n\n## 공업\n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만들었다. 유명한 콤비나트로는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있다.\n\n소련은 중공업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공업 생필품의 질은 서방 세계에 비해 떨어졌다.\n\n소련은 천연가스와 석유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였다.\n\n## 농업\n소련의 농업은 거의 대부분 솝호스와 콜호스를 통해 이루어졌다. 솝호스는 Sovetskoe khozyaistvo의 약칭으로, 거대한 국영농장이었다. 솝호스의 농작물 생산은 국가의 계획에 따라 결정되었다. 생산하는 농작물은 수매 가격까지도 국가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n\n콜호스는 집단농장으로, 1928년에 시작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경작을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가 일소되었다. 농기구나 가축 등은 공유되었으며 생산물은 국가에 매각되었다.\n\n각 개인의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 채소의 재배,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해도 되었다.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 증가에 직접 연결되는 이 자류지 재배는 국영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나타내서 취약한 소련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
{ "from": "user", "value":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의 동기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 민주화 혁명\nYH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을 선포하는 기자 회견에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씨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한다.\"라 발표한다.\n\n### 김재규 본인의 변론\n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n\n김재규는 ‘내가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자유당때는 최인규와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사형집행 했는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대통령을 사형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어’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n\n하지만,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풀어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의 거사 전 행동과 미국의 기록을 볼 때 민주주의에 생각이 많은 자라 볼 수 있어 김재규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n\n\n\n암살 당시에 안가의 '가'동에는 육군 참모총장이 만날 약속이 잡혀서 정보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강신옥 변호사에게 정승화 총장도 자신에게 속아서 궁정동으로 왔다고 답한다.\n\n## NPT 가입 후에도 핵개발 추진\n박정희 정부는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에 서명하였지만 북한이 NPT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NPT 비준을 미뤄왔다.\n\n## 전 정보기관장의 개인 재산 동결\n1978년 10월말 한미관계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씨티은행이 미국과 해외계좌에 있는 그의 재산 총액이 1500~2000만 달러로 추정된다는 자료를 제출했다.\n\n박정희는 미국으로 망명한 최측근 김형욱에 격노하며 상소금지, 재산몰수, 궐석재판에다 외국 도피자·거주자 처벌 등 초법적 내용을 담은 ‘특별조치법’ 제정을 지시한다.\n\n## 최태민 박근혜 문제\n\n### 부동산 1천억원, 동산 2천억원이던 구국여성봉사단 총재의 개인 재산\n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통과 시기에 김재규 일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최태민의 비리가 시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고 밝혔다.\n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사이비목사 최태민이 자칭 태자마마라 칭하며 사기횡령 등은 물론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어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정보부에서 그런 것도 조사하나'며 반문해서 김 전부장이 놀랬다고 한다.\n\n## 우발적 범죄설\n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한다.\n김재규의 1·2·3심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에게 김재규는 10·26 이전에도 서너 차례 대통령 시해 준비를 했지만 결행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n전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던 \"혁명을 했다\"는 메시지 조차 김재규는 옥바라지했던 동생에게 다급하게 전해야 했다.\n\n## 미국의 박정희 제거 지령설\n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n\n비교적 최근인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북대서양 조약 기구** 또는 **북대서양 동맹**은 세계 주요 국제기구 중 하나로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 32개의 회원국들 간의 정치 및 군사 동맹이다. 회원국들은 안보 및 방위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토는 유럽과 북미 양 대륙 간의 정치 및 안보 협력을 위한 독특한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n\n정치적으로 민주적 가치를 촉진하고 회원국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신뢰를 쌓으며 장기적으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방위 및 안보 관련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한다.\n\n나토는 북대서양 조약 제5조에 명시된 \"회원국 일방에 대한 무력공격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집단 방위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n\n나토의 '전략 개념'은 이 군사 동맹의 핵심 문서다. 나토의 가치와 목적, 임무를 재확인한다. 나토는 전략 개념에 대해 \"동맹이 직면한 안보 문제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나토의 정치 및 군사적 과제를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
{ "from": "user", "value": "확장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다. 나토는 또한 회원국 실행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데, 이는 가입 희망국들에게 실질적인 조언과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회원 가입을 준비하고 주요 요구 사항을 충족하도록 돕는다.\n나토는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1개 후보국을 보유하고 있다. 동맹 가입 과정에서 후보국들은 서로를 지원하기 위해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2003년에 아드리아 헌장에 서명을 했다.\n\n우크라이나와 나토 및 유럽 간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으며, 이러한 관계 개선은 2014년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된 '유로마이단' 시위의 목표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는 나토 내 동유럽의 8개국 중 하나로 개별 파트너십 실행 프로그램에 포함된다.\n\n러시아는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유럽 및 미국 협상가들 사이의 평화적 독일 통일을 허용한 비공식적인 이해와 모순된다고 보고 정치적으로 계속 반대했다. 나토의 확장 노력은 종종 러시아를 포위하고 고립시키려는 냉전 시도의 연장으로 모스크바 지도자들에게 보여지지만,\n\n또한 나토의 확장에 대해 중국도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김정일의 비판과 평가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 비판\n자신의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정치범 수용소와 자유와 끔찍한 인권을 탄압을 자행했다. 현대판 봉건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이 대리청정체계로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테러리즘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아웅산 폭파 사건과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이런 테러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우방국들마저 외교관계를 기피하기 시작해 외교무대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정해져 적선국 제재를 받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완전히 소외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사회주회 경제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생상성 향상을 이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보장에 해가 될까 두려워 오히려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를 통해 수 많은 아사자가 나왔지만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50만톤 이상이기 때문에 아사자는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됐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n\n또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등이 있다.\n\n## 천안함, 연평도 사건\n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명백한 배후이다. 북한은 군의 일반 지휘통제에 더해서 중앙에서 정치장교까지 따로 보내 2중으로 관리 통제하는 군지휘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통제력이 약한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사격 훈련 중 탄피분실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비상이 걸리 것을 대비해 본다면 최고지휘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저런 대규모의 도발을 실행할리 만무하다. 북한은 2009년부터 후계자에게 정권이양하는 과도기 과정이었고 2000년 이후부터 생겨난 장마당경제로 인해서 중앙권력의 약화를 우려해 화폐개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화하려 했지만 오히려 화폐개혁의 부작용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내부혼란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대남도발을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시켜 내부단속을 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n\n2010년 대한민국에서는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한데 대해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28살 애송이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이상한 나라가 북한\"이라며 \"정부는 북한 권력층과 군부의 동향은 물론 관련 첩보 입수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북한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급변 사태에 대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n\n## 남포갑문, 순천비날론 공장\n1980년대의 남포갑문 개발의 성공이 그의 치적이라는 견해도 있다지만 이건 북한당국의 일반적인 주장을 이해하는 수준의 논리이다. 남포갑문은 북한 남포특별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갑문으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1개 군단의 군 병력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으나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 겨우 완성하였다.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물이 새어들어오고 틈이 벌어지고 갑문이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 유지보수를 위해 1개 건설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다. 문제는 갑문공사로 생긴 간척지가 생겨났지만 오해려 갑문때문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 고위층 탈북자인 김덕홍 증언에 따르면 남포갑문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홍수피해를 막는 효과가 없으며 갑문으로 인한 간척지가 주는 편익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홍수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면 지천과 하천정비를 했어야 하지만 이 사업은 소규모 사업이 복수형이여서 정치적 선전에 불리하고 대규모 갑문사업은 정치적 선전에 유리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경제적 편익보다는 정치적인 선전을 우선에 둔 사업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1평안남도 순천에 연간 10만 t 규모로 추가건설되던 비날론 공장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팝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제논리를 배제하고 정치적 선전이나 사상무장으로 계획된 사업은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하고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가동이 중지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에 들어갔지만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n\n남포갑문과 순천비날론 공장에 투여한 자본은 150억 달러에 가까운데 북한이 가지고 있던 자본여력 대부분을 산업시설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정치 선전물 건설에 쓴 것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노태우의 자택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노태우의 자택은 서울특별시 연희동에 위치해있다.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15안길 69이다.\n\n노태우는 군인 시절부터 연희동에 거주하였으며, 하나회에서 함께 활동한 전두환 역시 연희동에 거주하여 두 사람의 자택간 거리는 고작 300m였다. 199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은 이후 다시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고, 이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전두환의 경우 추징금 납부가 미뤄지며 연희동 자택의 별채 일부가 공매로 붙혀진 적이 있으나, 노태우는 추징금 납부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자택은 추징 대상으로 오르지 않았다. 2013년 9월, 노태우는 추징금 2625억원을 완납하였다.\n\n과도한 경찰인력이 투입되어 논란이 있었던 전두환의 자택과 달리 노태우 자택 인근 경호는 여유로운 편인 것으로 알려졌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물질대사의 주요 생화학 분자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동물과 식물, 미생물의 구조는 대부분 아미노산, 탄수화물, 지질 이렇게 세 가지 기본적인 분자로 이루어진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며, 대사는 이 분자들을 만들어 세포와 조직의 구성 성분으로 쓰거나, 분해하여 에너지로 쓰는 화학 반응이다. 주요 생화학 분자는 결합하여 DNA나 단백질 같은 고분자가 된다.\n\n## 아미노산과 단백질\n단백질은 아미노산이 펩타이드 결합을 통해 결합한 선형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단백질 중 다수는 효소로 대사의 화학 반응을 촉매한다. 기타 단백질은 세포 형태를 유지하는 세포골격과 같이 구조나 기계적 기능을 담당한다.\n\n## 지질\n지질은 생화학 분자들 중 가장 다양한 유형으로 나뉜다. 주요 역할로는 생체막 안팎을 구성하는 것과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이 있다. 지질은 소수성이나 양친매성 물질로 정의되지만 벤젠이나 클로로폼과 같은 유기 용매에 녹는다.\n\n## 탄수화물\n탄수화물은 하이드록시기가 많은 알데하이드나 케톤으로 사슬이나 고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탄수화물은 생물계에서 가장 풍부한 분자이다. 기능도 다양해서 에너지를 저장하고 수송하는 역할, 구조적 역할을 한다. 기본적인 탄수화물 단위를 단당류라고 하며, 갈락토스, 과당,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포도당이 있다. 단당류는 무한정에 가까운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하여 다당류를 형성할 수 있다.\n\n## 뉴클레오타이드\n핵산인 DNA와 RNA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이다. 각 뉴클레오타이드는 인산기와 리보스 당, 질소 염기로 이루어진다. 핵산은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데 사용되며, 전사와 번역 과정을 통해서 유전 정보를 발현시키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유전 정보는 DNA 수선 기작이 있어 보호되고, DNA 복제를 통해 분자 수를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HIV처럼 RNA 유전체를 가지면서 역전사를 통하여 바이러스 RNA 유전체로부터 DNA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n\n## 조효소\n대사는 거대한 화학 반응이지만 작용기의 전이와 관련된 몇 가지 기본적인 반응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n\n주요 조효소 중 하나가 세포 공동의 에너지 통화라 할 수 있는 아데노신 삼인산이다. ATP는 서로 다른 화학 반응 간에 화학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사용된다. 세포에는 소량의 ATP만 존재하고, 에너지 요구량에 부합하기 위해 세포는 계속해서 ATP를 빠르게 재생성한다. ATP는 동화작용과 이화작용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 이화작용은 분자를 분해하는 과정이고, 동화작용은 분자를 합성하는 과정이다. 이화작용을 통하여 ATP가 생산되고, 동화작용은 ATP를 소모한다. 그 밖에도 ATP는 인산화 반응에서 인산기를 운반하기도 한다.\n\n비타민은 소량이 필요하지만 세포가 생산할 수 없는 유기 화합물이다. 사람의 영양 측면에서, 비타민은 체내에서 변화한 후 대개 조효소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수용성 비타민은 세포에서 이용될 때 인산화되거나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한다. NAD/NADPH는 동화작용에서 각각 더 중요하게 사용된다.\n\n## 무기질과 보조 인자\n무기 원소는 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트륨과 칼륨은 풍부한 반면, 다른 원소들은 소량 존재하면서 기능한다. 포유류 무게의 99%는 탄소, 질소, 칼슘, 나트륨, 염소, 칼륨, 수소, 인, 산소, 그리고 황이 차지한다.\n\n풍부한 무기 원소는 이온성 전해질 역할을 한다. 가장 중요한 이온은 나트륨과 칼륨, 칼슘, 마그네슘, 염화 이온, 인산염과 유기 이온인 탄산수소염이다. 막 안팎의 이온 기울기는 정확하게 조절되어 삼투압과 수소 이온 농도를 유지시킨다.\n\n전이 금속은 미량 원소로 존재하며, 아연이나 철은 미량 원소 중에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그레고어 요한 멘델의 생애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 탄생\n멘델은 1822년 7월 20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렌 지방의 작은 읍인 하인젠도르프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농사와 원예 일을 도왔던, 멘델은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834년부터 1840년까지는 트로파우의 김나지움과정을 다녔고, 1840년에서 1843년까지는 올뮈츠의 철학연구소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보충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커다란 애착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지주가 시키는 강제노동으로 허리를 다쳐 병이 나는 바람에 멘델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843년 고향 근처에 있는 소도시인 모라바의 브륀에 있는, 14세기에 건립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했으며, 그레고리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수사로서의 생활은 멘델을 물질적 결핍에서 해방시켰으며,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847년에 로마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수도원에서 수련 생활을 하는 동안에 과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그 뒤 대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빈 대학교에 겨울학기 청강생으로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물리학·화학·수학·동물학·식물학 등의 자연과학 기초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1853년에는 견문과 학계와의 접촉을 넓히기 위해 빈의 **동식물학회**에 가입하게 되고, 1854년 완두콩의 해충에 관한 연구를 학회에서 발표한다. 1854년 그는 브륀으로 다시 돌아와 1868년까지 브륀 국립 실과 학교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으나 교원 자격증은 끝내 얻지 못했다.\n\n## 완두콩 실험 및 유전 법칙 연구\n그는 1856년부터는 수도원에 있는 조그마한 뜰에서 완두를 재료로 하여 유전에 대한 실험을 시작, 7년 후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을 1865년 브륀의 자연 과학 협회의 정례회에서 발표하고, 그 논문은 따로 인쇄하여 발표하였다. 그동안 식물에 대한 225회에 이르는 인공 교배를 하여 1만 2,000종의 잡종을 얻었으며, 계속 실험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인정받지 못하고 1900년대에 들어서야 재조명을 받게 된다.\n\n## 완두콩 실험 이후\n식물학·양봉·기상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1868년 수도원장이 되면서 과학은 그의 생활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으며, 1872년 공포된 교회 과세법에 반대, 정부와 대립하여 전 재산을 몰수하는 등 지루한 싸움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만성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등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선종한 뒤 **멘델의 법칙**이 학계에 받아들여졌다. 1910년 브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 곳은 '멘델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프랑스어의 지리적 분포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프랑스어는 29개 나라에서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고, 그 중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커뮤니티인 프랑코포니를 구성한다. 또한 국제 연합을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의 공식 언어이다. 프랑스어는 유럽에서 네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는 모국어이며, 두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이다.\n\n다음은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인 나라의 목록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의 영향 및 유산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헤밍웨이는 미국 문학의 전반적인 문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헤밍웨이 사후, 작가들은 그의 문체를 따라 가거나 또는 오히려 피하려고 하였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출간 이후 명성을 쌓은 헤밍웨이는 전후 세대의 대변인이 되어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갔다. 1933년 나치는 헤밍웨이의 책을 ‘현대 타락의 상징’이 되었다는 이유로 불태웠으며, 헤밍웨이의 부모 역시 내용이 저속하다며 부정할 정도로 그의 작품은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다. 레이놀즈는 평탄치 않은 삶과 여러 번의 재혼, 부정적인 일부 평론가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헤밍웨이가 우리 문화유산의 일부가 된 소설과 이야기를 남겼음에는 틀림이 없다고 평가하였다.\n\n벤슨은 헤밍웨이 일생의 발자취가 ‘착취의 주요 수단’이 되었으며, 일종의 헤밍웨이 산업을 만들어냈다고 표현하였다. 할레그렌은 ‘하드보일드 문체’와 남성성을 인간 헤밍웨이 또는 작가 헤밍웨이와 연결지어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벤슨은 이에 동의하며 헤밍웨이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와 같이 내향적이고 고독하다고 평하였는데, 헤밍웨이는 자신의 성향을 허풍을 통해 숨겼다는 차이점이 있다고 말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샐린저는 헤밍웨이를 직접 만나 서신을 주고 받은 적이 있었다. 샐린저는 헤밍웨이와 나눈 대화가 전쟁통에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을 주는 시간이었으며, 스스로를 ‘헤밍웨이 팬 클럽의 전국 회장’으로 지명하였다고 농담삼아 말하기도 하였다.\n\n문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헤밍웨이의 유산을 찾아볼 수 있다. 1978년 소련 천문학자 니콜라이 체르니크가 발견한 소행성체에는 3656 헤밍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2009년에는 수성의 분화구 중 하나가 헤밍웨이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1965년 소설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헤밍웨이가 킬리만자로 산 정상으로 이동한다는 내용의 킬리만자로 장치라는 단편을 라이프지에 게재하였다. 로버트 듀발, 리처드 해리스 주연의 1993년 영화 월터와 프랭크는 플로리다의 해안 마을에서 은퇴한 두 친구의 우정을 다루었다. 또한 헤밍웨이의 이름이나 강 건너 숲속으로에 등장하는 해리스의 이름을 가져다 쓴 식당들이 여럿 존재하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아들 잭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는 가구 제품을 홍보하기도 하였으며, 몽블랑 사는 헤밍웨이 만년필 시리즈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세계 헤밍웨이 모방 대회’라는 이름의 장난 대회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는데, 참가자들은 헤밍웨이의 특유의 문체를 최대한 모방한 작품을 제출하여야 했으며 우승자에게는 포상으로 이탈리아의 해리스 바에 방문할 수 있는 티켓이 주어졌다.\n\n1965년 메리 웰시는 헤밍웨이 재단을 설립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존 F. 케네디 도서관에 헤밍웨이의 작품 일부를 기증하였다. 1980년에는 기증된 작품을 연구하려던 학자들이 모여 헤밍웨이 학회를 형성하였으며, 저널 헤밍웨이 리뷰를 출간하기 시작하였다. 헤밍웨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여러 상들도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으로 펜/헤밍웨이 문학상와 프레미오 헤밍웨이가 있다. 2012년에 헤밍웨이는 시카고 문학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하였다.\n\n1968년 미시간 월룬호에 위치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별장과 키웨스트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박물관, 2015년 어니스트와 메리 헤밍웨이 가옥 총 3개의 집이 미국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었다. 키웨스트의 위치한 집 뿐만 아니라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 위치한 헤밍웨이의 생가 역시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있다. 바하마 비미니의 컴플리트 앵글러 호텔에는 그가 머무른 객실을 개조하여 개장한 일종의 비공식 박물관이 있었으나, 200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리누스 베네딕트 토르발스의 리눅스 개발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리누스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코모도어 VIC-20와 함께 시작했다. 이후 싱클레어 QL를 구입하고 그 운영체제를 변형시키며 OS를 변형시키고 어셈블리어 프로그램과 텍스트 에디터를 만들거나 몇 가지 게임을 프로그램 하기도 하였다. 1990년 헬싱키대 재학중에 읽은 앤드루 타넨바움의 책 가 '인생을 바꾼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자택의 개인 컴퓨터에서도 동작하는 UNIX 운영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취미시간에 자택의 설비를 이용해서 리눅스 커널의 초기 개발을 했다.\n1991년 2월 2일, 그는 인텔 80386 기반의 IBM PC를 구입하였다. 한 달 정도 페르시아의 왕자 등의 게임을 하면서 MINIX의 사본을 기다렸는데, MINIX가 도착한 직후 그는 리눅스 커널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시스템으로 MINIX 운영체제를 사용했고, 이걸 스스로 만든 운영체제로 바꾼 뒤 여기에 리눅스라는 작업명을 붙였다. 친구가 이걸 네트워크에 올리라고 권유하며 자신의 FTP 서버를 제공했다. 이 친구는 리누스에게 리눅스라는 디렉토리를 부여했다.\n1991년 8월 리누스는 자신의 성과물을 Usenet 뉴스그룹에 공개했다. 리누스는 리눅스라는 상표명을 등록하는 걸 싫어했지만, 다른 이의 상표 등록을 막기 위해서 1995년 상표를 등록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장자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장자**, 기원전 369년?-기원전 286년)는 중국 전국 시대 송나라 몽 출신의 저명한 중국 철학자로 제자백가 중 도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명은 주이다.\n\n후세에 노자와 함께 부를 때 **노장**이라 부른다. 도교에서는 **남화진인**, 또는 **남화노선**이라 부르기도 하며, 장자는 남화진경이라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 황건적의 지도자 장각에게 도를 전수하는 선인이 바로 남화노선이다.\n\n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어느 날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을 깨니 내가 꿈을 꾸고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고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장자는 이처럼 상식적인 사고 방식에 의문을 품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
{ "from": "user", "value": "장자의 노장사상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노자와 장자를 묶어 흔히 노장사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노자가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 대해, 장자는 개인의 안심입명에만 몰두했다. 노자가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무위자연에 처할 것을 가르쳤던 반면, 장자는 속세를 초탈하여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즉 노자는 어느정도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 반면 장자는 오직 개인에 대한 것을 강조하였다." }
{ "from": "user", "value":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뭐야?" }
{ "from": "gpt", "value":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이 전쟁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아티케의 침략을 되풀이하였고,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전쟁의 첫 단계는 기원전 421년에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막을 내렸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에서 다시 교전이 일어나 이내 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켈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여 군대 전체가 궤멸되었다. 이 패배로 전쟁은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는데, 보통 ‘데켈레이아 전쟁’ 혹은 ‘이오니아 전쟁’으로 불린다. 이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을 잠식하였으며, 결국 아테네의 제해권을 빼앗았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궤멸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아테네는 이듬해에 항복하였다.\n\n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미 잘 지적하였듯,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정치, 역사 그리고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세를 뒤바꾸었다. 국제 관계 면에서 전쟁 전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는 종속국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하였으며, 반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주도국이 되었다. 전쟁에 따른 경제적 영향은 그리스 전역에 미쳐,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빈곤이 만연하였고,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또 이 전쟁으로 그리스 사회에는 앞서 말한 영향보다 포착하기 어려운 변화가 생겼는데, 민주주의 국가인 아테네와 과두정 국가인 스파르타의 전쟁으로 서로의 나라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세계에서 내전이 잦아지는 원인이 되었다.\n\n또, 그리스의 전쟁은 원래 제한되고 정형적인 형태였으나, 나라 사이의 전면전으로 변화하였으며, 대규모 잔학 행위도 등장하였다. 전쟁은 종교적, 문화적 금기를 훼손했으며, 농촌과 도시를 파괴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황금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
{ "from": "user", "value": "결과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면서 그리스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갔는데,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변질되었고 오랜 전쟁으로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파르타가 테바이에 패하면서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그리스의 주도권이 테바이로 넘어갔고 테바이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패하면서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n\n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는 유럽 역사의 주 무대에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다시 누리지 못하고 퇴장하였으며,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단지 그들의 신화와 철학만이 남아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
{ "from": "user", "value": "오노레 드 발자크가 누구인가요?" }
{ "from": "gpt", "value": "**오노레 드 발자크**는 1799년 5월 20일 , 투르에서 **오노레 발자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1850년 8월 18일,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한 작가이다. 그는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언론인, 인쇄업자로서 활동했다. 발자크는 1829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90편이 넘는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은 작품인 **인간 희극**을 남겼다. 그는 100편의 해학 이야기를 비롯하여 청년 시절에 필명으로 쓴 소설들과 25편의 완성되지 못한 작품들 역시 창작한 바 있다.\n\n발자크는 프랑스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지의 걸작과 같은 철학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 나귀 가죽과 같은 판타지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 그는 특히 고리오 영감이나 외제니 그랑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문체에 두각을 보였다.\n\n발자크는 자신이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뷔퐁이 동물의 종을 식별했던 것처럼 당대 사회의 부류들을 식별하고자 했다. 소설이 '철학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월터 스콧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잊혀진 역사와 그 사회에 관하여 서술하고 민중의 실제 모습과 소설을 겨루며 상이한 사회 계층과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을 탐구하고자 했다.\n\n작가는 자본주의의 대두와 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귀족을 흡수한 부르주아지들을 묘사하고 있다. 숙명을 띤 존재에게서 인상을 받은 그는 자연이 창조한 것보다 더 많은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발자크가의 모든 것은 문까지도 천재적이다.”\n\n정치에 관한 발자크의 견해는 일관되지 않은 애매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당파로서 그는 7월 왕정에 대하여 강한 지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이전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칭한 적이 있다. 발자크가 쓴 소설에서 노동자들은 주요 등장 인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발자크는 1840~1848년도 당시 이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보수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정한, 반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정부주의자와 반란자들이 관심을 보인 작품을 썼다.\n\n문예 활동 이외에 그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고 훗날 파산하게 되는 두 개의 정기간행물을 성공적으로 편집했다. 작가의 고상한 사명을 확신하던, 사유에 의해 지배당하듯이 살았던 그는 저작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문인협회 설립에 이바지했다.\n\n과로로 몸이 약해져 건강이 위태롭던 광적인 작업가였지만, 위험한 투자와 과소비로 인해 여러 거주지에서 가명을 쓰며 채권자들을 피해 살던 발자크. 그는 1850년, 그가 마음에 들어보이고자 17년간 노력한 한스카 공녀와의 결혼 전까지 많은 여성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가 글을 써가며 번 돈은 부채를 갚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항상 인쇄업 같은 사업을 마음에 두었다. 포르튀네 로에 위치한 궁전에서 그는 엄청난 사치 속에서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사망했다.\n\n전 유럽에서 인정받고 읽힌 발자크의 소설은 당대와 후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소설 감정교육을 쓸 때 골짜기의 백합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바리 부인을 쓴 이는 쓸 때 서른 살의 여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광대한 양의 소설 속에서 변모하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인간 희극 내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는 점은 에밀 졸라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발자크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 계모는 1906년 영화화되었다. 이후에도 발자크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며 전 세계에서 새로이 만들어졌다." }
{ "from": "user", "value": "작품 연보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인간 희극\n인간 희극을 구성하는 소설과 단편들은 크게 세 개로 묶을 수 있는데 풍속 연구, 철학 연구, 분석 연구로 묶을 수 있다. 풍속 연구는 다시 사생활 풍경, 지방 생활 풍경, 파리 생활 풍경, 정치 생활 풍경, 군대 생활 풍경과 전원 생활 풍경으로 나뉜다." }
{ "from": "user", "value": "알바 롱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알바 롱가**는 고대 로마의 로물루스 신화에서 언급되는 지방의 명칭이다. 이 지방 이름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는가 라는 물음은 고고학계에서 한동안 토론되었으며, 오늘날 알바 롱가는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했던 지방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n\n리비우스의 건국사에 따르면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아스는 트로이가 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의해 함락된 후 , 그를 따르는 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로 피신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트로이 부족이 정착한 곳에는 이미 이탈리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얼마안가 두 부족은 정복 전쟁을 하였다. 라티누스를 족장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원주민은 트로이 부족에게 패배한 후 이들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아이네아스는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를 처로 맞아들였으며, 트로이 부족의 새로운 도시 이름을 처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이라 불렀다.\n\n아이네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 1세는 라비니움을 떠나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산기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알바 롱가**라 불렀다. 로마의 초기 건국사는 분분적으로 전설적 색체를 띠고 있다. 특히 트로이의 후손과 이탈리아 원주민의 융화와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되는 로마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잘 그려져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호메로스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호메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기초가 되는 두 편의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n\n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의 마지막 해에 아가멤논 왕과 전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다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아 함락 이후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10년에 걸쳐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다룬다. 이 시들은 호메로스 그리스어로 쓰였는데, 이는 문어로서 여러 세기에 걸친 이오니아 방언과 아이올리스 방언의 특징이 혼합된 형태를 보이며, 주로 동부 이오니아 방언의 영향을 받았다.\n\n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영웅주의, 영광, 명예의 이상을 고취하며 고대 그리스 문화와 교육의 여러 측면을 형성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를 \"시인의 군주\", 즉 모든 시인의 왕이라고 칭했으며,Alexander Pope's Preface to his translation of the Iliad:\n\n\"Homer is universally allowed to have had the greatest invention of any writer whatever. The praise of judgment Virgil has justly contested with him, and others may have their pretensions as to particular excellencies; but his invention remains yet unrivalled. Nor is it a wonder if he has ever been acknowledged the greatest of poets, who most excelled in that which is the very foundation of poetry.\"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많은 유명한 문학, 음악, 예술, 영화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n\n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누구에 의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해서 논의되고 있다. 학자들은 이 두 작품이 단일 저자의 산물인지에 대해 여전히 의견이 나뉜다." }
{ "from": "user", "value": "호메로스 연구의 역사는?" }
{ "from": "gpt", "value": "## 고대\n호메로스 연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학문 분야 중 하나이다.\n\n이 시들이 고전기 그리스 교육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으로 인해,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어려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한 광범위한 주석들이 발전했다.\n\n## 근대\n1488년, 그리스 학자 디미트리오스 할코콘딜리스가 호메로스 시의 초판 인쇄본을 출판했다. 르네상스 시대 서유럽에서는 호메로스보다 베르길리우스가 더 널리 읽혔으며, 호메로스는 종종 베르길리우스의 시선을 통해 해석되었다.\n\n1664년, 프랑수아 에델랭 도비냑 신부는 호메로스를 지혜의 정수로 칭송하는 널리 퍼진 견해에 반대하며 호메로스의 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시들이 일관성이 없고, 비도덕적이며, 품위가 없고 문체가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호메로스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 시들은 무능한 편집자들이 서로 관련 없는 구전 노래들을 급하게 짜깁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n\n1795년에 출판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의 프롤레고메나 아트 호메룸은 후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통합된 많은 자료가 원래 기원전 10세기에 짧고 독립적인 구전 노래 형태로 작곡되었다고 주장했다.\n\n분석학파 내에는 두 진영이 있었다. \"노래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다수의 짧고 독립적인 노래들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보았고,\n\n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분석학파는 호메로스 학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n\n한편, \"신분석학파\"는 \"분석학파\"와 \"통일론자\"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고 했다.\n\n## 현대\n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시의 기원에 관한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같은 저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는 \"서술 방식, 신학, 윤리, 어휘, 지리적 관점의 많은 차이점들, 그리고 오디세이아의 특정 구절들이 일리아스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특성\"에 근거한다.\n\n일부 고대 학자들은 호메로스가 트로이아 전쟁의 목격자였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은 그가 500년 후까지 살았다고 생각했다.\n\n마틴 리치필드 웨스트는 일리아스가 헤시오도스의 시를 반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가장 이른 시기로 기원전 660 ~ 650년경에 작곡되었을 것이며, 오디세이아는 그로부터 한 세대 후에 작곡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n\n\"호메로스\"는 어원이 알려지지 않은 이름으로, 고대에 이에 대해 많은 이론들이 세워졌다. 한 가지 연관성은 그리스어 \"ὅμηρος\"와의 관계였다. 현대 학자들이 제시하는 설명들은 대체로 그들의 전반적인 호메로스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나지는 이를 \"노래를 함께 맞추는 사람\"으로 해석한다. 웨스트는 가능한 그리스어와 페니키아어 어원 둘 다를 제시했다." }
{ "from": "user", "value": "일리아스가 뭐야?" }
{ "from": "gpt", "value": "**일리아스** 또는 일리아드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이름은 트로이인들의 왕성인 ‘일리온’에서 유래하였다. '일리아스'란 이름은 '일리온의 노래' 란 뜻이다. 오디세이아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와 후대 서양의 문학예술과 문화의 전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는 호메로스라고 알려져 있다.\n\n일리아드는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메로스가 지었다고 하는 그리스 최고ㆍ최대의 영웅 서사시이다. 10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의 50일 동안 일어났던 사건을 노래한 것으로, 모두 1만 5693행으로 되어 있다.\n\n주제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전쟁인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51일간의 사건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의 장군인 아킬레우스가 중심이 되어 원한과 복수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비극을 다뤘다. 9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상황과 전쟁에 관여하는 올림포스의 신들, 장수들의 이야기 등을 위주로 한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서 시는 24편으로 나뉘며, 그리스의 대표적 시운중의 하나인 6각운으로 작곡되었다. 각 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 순서로 이름이 붙어있다. 그리스 문학의 대부분이 운명론에 따른 체념이나 절망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정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영광된 죽음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줄거리는?" }
{ "from": "gpt", "value":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가멤논이 아폴론 사제의 딸, 크뤼세이스를 모욕한 죄과로 아카이 진영에 전염병이 번진다. 총지휘관 아가멤논은 공개 회의에서 아킬레우스와 격한 말다툼 끝에 그의 애첩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음로써 또한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게 된다. 분노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는 앞으로 트로이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에 따라 제우스를 은밀히 찾아가 아카이아군이 패배하도록 요청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낸다.\n\n아가멤논은 제우스가 보낸 꿈에서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것을 본다.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가멤논은 장군들과 토론 끝에, 전체 군사회의를 소집한다. 네스토르와 오디세우스는 열띤 논쟁을 벌이며, 아카이아군은 트로이 정복을 포기하고 귀향하자는 의견에 마음이 솔깃해지지만, 신들의 영향하에 있는 오뒷세우스의 강한 반대와 건의에 따라 트로이군과 빨리 결전을 치르자는 데에 합의를 본다.\n시의 후반은 전쟁에 참가한 아카이아군과 트로이아군의 지방, 도시 그리고 지휘관들을 노래하고 있다.\n\n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은 들판으로 나가 전투를 위해 진을 친다. 그러나 트로이아의 장군 파리스는 홀로 양 진영 사이에 나서서 자신과 단판을 할 아카이아 용사는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친다. 아카이아군 진영에서 마땅한 도전자를 찾고 있을 때를 같이하여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는 헬레나를 망루에 불러내어 아카이아의 장군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내 파리스는 헬레나의 남편 메넬라오스와 일대일 결투를 벌인 끝에 패배하며, 아프로디테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헬레나는 여신의 강요로 파리스가 쉬고 있는 침소로 가 그를 약간은 핀잔을 주면서 위로한다.\n\n제우스를 중심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트로이전쟁의 앞날에 관한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한다. 아카이아군의 편을 드는 헤라의 요구로 아테나는 판다로스를 꾀어 메넬라오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힘으로서 이 전에 맺은 협약을 깨친다. 트로이아군의 간계에 분격한 아가멤논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아카이아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장군들이 이끄는 부대의 열병식을 끝마친 후 아카이아군은 드디어 트로이아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간다.\n\n디오메데스의 무공과 아테나의 도움으로 아카이아군은 트로이아군을 궁지에 몰아 넣는다. 디오메데스는 선두에 서서 만나는 졸개들을 모조리 물리친 후 메넬라오스를 부상시킨 판다로스와 그를 지원하는 아이네아스와 대결한다. 먼저 창을 던져 판다로스를 단숨에 꺼꾸러뜨린 다음 아이네아스에게는 바윗돌을 집어던져 기절을 시킨다. 죽을 지경에 놓인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끼어들지만 성난 황소 같은 디오메데스에게 손에 부상을 입고 도망친다. 아이네아스는 결국 아폴론에 의해 구출되며, 아폴론은 아테나가 잠시 전장을 비운 틈을 타 트로이아군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또한 아레스가 트로이군의 편을 듦으로써 아카이아군이 궁지에 몰린다. 이를 지켜본 헤라는 다시 아테나를 시켜 아카이아군을 돕도록 한다. 다시 디오메데스는 아테나의 힘을 등에 업고 아레스와 맞붙어 싸운다\n\n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틈에 헥토르는 동생 헬레노스의 간청에 따라 성으로 돌아가 아낙네들로 하여금 아테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도록 권유한다. 이 사이에 전장에서는 트로이아 장군 글라우코스와 아카이아 장군 디오메데스는 서로 족보를 묻고는 서로의 조상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뻐하며 싸움을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우정의 표시로 교환한다. 헥토르는 트로이아 성에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동생 파리스를 만나 핀잔을 준 뒤, 남편을 찾아 어린 아들 아스튀르낙스를 품에 안고 이리저리 헤메는 아내 안드로마케를 성문 근처에서 만나 눈물어린 이별의 대화를 나눈다. 이는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이다.\n\n아테나와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아카이아의 가장 용맹한 장수와 일대 일로 싸우게 부추긴다. 텔라몬의 아들, 큰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일대 일로 결투를 벌인다. 밤이 되어 양쪽 군대가 갈라지고 네스토르가 전사자들을 화장할 수 있도록 휴전을 맺고 아카이아 인들의 선단 주위에 방벽을 쌓도록 권유한다.\n\n제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아가멤논에게 복수해 주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들에게 이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에 다른 신들도 아카이아 군이나 트로이군을 도와주지 못한다. 제우스는 이데산으로 가서 아카이아인들에게 패배를 트로이아 인들에게는 승리의 영광을 내린다.트로이군은 승리하고 밤이 되자 승리에 도취된 헥토르는 아카이아군의 진영앞에서 야영을 한다.\n\n전세가 많이 불리해지자 아카이아 군은 전쟁을 접고 귀국하려고 한다. 아가멤논은 귀국을 하려고 하지만 디오메데스와 네스토르는 이에 반대한다. 아가멤논은 네스토르의 조언에 따라 아킬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킬레우스와 화해하려고 하였으나 아킬레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n\n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장군들을 깨워 파수병들을 돌아보게 한다.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는 트로이군의 정탐군인 돌론을 죽이고 트로이군의 진영에 몰래들어가 트로이군을 정탐한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우스는 정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라키아인들의 진영을 급습하고 말들을 빼앗아 돌아온다.\n\n새로운 날이 밝자, 아가멤논은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로 군사들을 이끌고 나온다. 그는 용감히 싸웠지만 부상을 입고 디오메데스도 역시 부상을 입고 선단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오디세우스가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아이아스가 그를 구해준다. 역시 오디세우스도 부상을 당하고 아카온과 에우리필로스도 부상을 당해 선단으로 물러난다.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싣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보내 네스토르가 싣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다.\n\n아카이아군은 트로이군에 쫓겨 방벽안으로 밀려들어가고 헥토르는 방벽을 공격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이에 맞서서 항전을 독려한다. 리키아의 두 장군 글라우코스와 사르페돈이 방벽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글라우코스는 부상을 당해 물러가고 사르페돈이 격국 방벽을 허물고 만다. 헥토르가 돌로 쳐서 방벽의 문을 부수자 트로이군은 방벽을 넘어 문을 지나 물밀듯이 아카이아 진영으로 쳐들어 간다.\n\n아카이아 군의 선단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포세이돈은 제우스 몰래 아카이아인들을 도와주며 격려한다. 맹렬하게 공격하는 헥토르를 맞아 두 아이아스가 무너진 방벽 근처에서 선전하고 전선의 왼쪽에서는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가 아이네이아스와 파리스 등을 맞아서 분투한다.헥토르는 풀리다마스의 조언에 따라 군사들을 한쪽으로 집결시켜서 맹렬히 공격을 퍼붓는다.\n\n네스토르가 마카온을 대접한 다음 다시 싸움터로 돌아가다가 부상당한 아가멤논,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와 마주친다. 아가멤논은 철군을 주장하는데 오디세우스가 반대한다.\n\n한편, 헤라는 잠의 신의 도움으로 제우스를 이데산에서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이틈을 타서 포세이돈은 아카이아 인들을 도와주는데 큰 아이아스가 던진 돌에 헥토르가 맞고 부상당하여 물러나게 되고 이를 기회로 아카이아인들이 공세를 시작하여 트로이군이 후퇴한다. 작은 아이아스는 큰 공을 세운다.\n\n제우스는 잠에서 깨어나자 헤라에게 크게 화를 낸다. 이리스를 포세이돈에게 보내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아폴론을 헥토르에게 보내어 그를 회복시키게 한다. 헥토르가 회복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아카이아 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자 아카이안인들은 결국 맨 앞쪽의 선단으로부터 후퇴하기 시작한다. 큰 아이아스는 해전에 쓰는 긴 창을 들고 홀로 분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트로이 군은 맨 앞쪽에 있던 프로테실라오스의 배애 불을 지른다.\n\n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고 출전하여 트로이 군을 선단에서 몰아낸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트로이군을 선단에서 몰아내기만 하고 돌아오라고 일렀으나 파트로클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도망하는 트로이군을 쫓아진격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추격전에서 사르페돈을 죽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결국 헥토르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n\n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 군과 트로이군과의 일전일퇴의 격전이 벌어진다.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에게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벗겨 자신이 입고는 더욱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메넬라오스가 안틸로코스를 보내 파트로클로스의 전사소식을 아킬레우스에게 알리게 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분전하는 동안 메넬라오스와 메리오네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시체와 귀환한다.\n\n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분노한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새로운 갑옷과 방패를 만들어주도록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하겠다고 약속한다. 헥토르가 다시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다시 탈취하려고 공격하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무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크게 고함을 지르자 트로이 군이 놀라서 도망친다. 밤이 되자 풀리다마스는 헥토르에게 아킬레우스가 출전하기 전에 트로이아 군을 성 안으로 철수 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헥토르는 이에 따르지 않는다. 아카이아 군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헤파이스토스는 테티스가 부탁한 아킬레우스의 새 무장을 만들어준다.\n\n날이 밝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새로운 무장을 가져다 주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모든 아카이아 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해한다. 오디세우스의 권고에 따라 모든 아카이아 인들은 아침을 먹고 아킬레우스를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출정하기 전에 아킬레우스의 준마 크산토스가 헤라의 힘을 입어 인간의 음성으로 아킬레우스가 오늘은 승리하지만 결국 전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무시하고 전쟁터로 나간다.\n\n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당장 트로이 성을 함락하지 못하도록 여러 신들이 전쟁에 관여하는 것을 허락한다. 아폴론이 아이네이스를 부추겨 아킬레우스에게 맞서게 한다. 여러 신들은 각자 자신들이 응원하는 측으로 갈라선다. 아이네이스가 위험해지자 포세이돈은 그를 구해준다.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싸움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헥토르는 이를 무시하고 동생 폴리도로스의 죽음에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에게 맞선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는데 아폴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다. 아킬레우스는 도망치는 트로이군을 크게 무찌른다.\n\n트로이 군의 일부가 스카만드로스 강에 빠져 헤어나오니 못하는데 아킬레우스가 칼을 빼들고 뒤쫓아가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제물로 삼기위해 12명의 젊은 군인을 생포해 온다. 강의 신이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를 들판으로 추격하나 헤파이스토스가 불로 강의 신을 물리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군을 성안으로 모두 몰아넣는다.\n\n헥토르는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문앞으로 나가 아킬레우스와 일전을 기다린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쫓고 쫓기다가 트로이 성을 세바퀴나 돈다. 제우스는 헥토르의 파멸을 결정하고 아폴론은 헥토르를 도와주지 못한다. 아테나가 데이포보스로 변하여 헥토르로 하여금 아킬레우스에게 대항하도록 유도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전차에 매달고 돌아간다. 헥토르의 부모와 아내는 성벽 위에서 통곡한다.\n\n파트로클로스의 혼령이 밤에 아킬레우스에게 나타나 자신의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청한다. 아침이 되자 아카이아 군은 나무를 해와서 파트로클로스를 화장한다. 그 다음날 화장터 위에 봉분을 만들고 아킬레우스 주최아래 장례 경기가 벌어진다.\n\n아킬레우스가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 나서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돈다. 제우스는 테티스를 보내어 헥토르의 시체를 욕보이지 말고 돌려주라고 명령하면서 이리스를 프리아모스에게 보내어 몸값을 내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프리아모스는 제우스가 보내준 메시지를 믿고 길을 떠나 헤르메스의 안내를 받으면서 무사히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도착한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인도하고 헥토르의 장례기간 동안에는 휴전하겠다고 약속한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거둬가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
{ "from": "user", "value": "적도 좌표계의 시간각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시간각은 남중 자오선에서 천체가 속한 시간권까지 천구의 적도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잰 각을 말한다. 항성시를 구할 때 주로 사용하며 남중한 별의 시간각은 0시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르네상스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르네상스** 또는 **문예 부흥**, **학예 부흥**은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말한다. 이것은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n\n역사적인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동시에 르네상스를 거쳐서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 혹은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안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국가, 즉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나라들은 이 운동에 거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초 이 운동의 인문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교회 개혁과 학문적 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
{ "from": "user", "value": "잉글랜드 르네상스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르네상스가 영국에 들어왔을 때는 엘리자베스 1세 때이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토머스 모어 같은 작가들을 배출해냈다." }
{ "from": "user", "value": "국제보조어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국제보조어** 또는 **보조어**는 모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언어로 주로 외국어이며 때로는 인공어이기도 하다. 링구아 프랑카와 비교되기도 한다. 에스페란토나 인테르링구아, 이도,신베이링구아와 같은 국제 의사소통을 쉽게 하고자 제안된 계획 혹은 개발된 언어를 가리키는 데 쓰인다.\n\n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등은 지중해의 링구아 프랑카로 쓰였다. 이러한 링구아 프랑카는 전통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 지배와 연관이 있어 때로는 저항에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이와는 다른 이유로 에스페란토와 같은 인공어를 보조어라는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갈리아 전기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갈리아 전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9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n\n전체는 총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권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의 각 1년 동안 일어난 일을 기술하고 있다. 다만 제3권은 57년과 56년을 모두 다루고 있다. 제1권부터 제7권은 카이사르가 직접 서술했고, 제8권은 카이사르의 비서였던 발부스의 요청으로 카이사르의 부장이었고 카이사르가 죽은 뒤 집정관까지 된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기록했다.\n\n카이사르는 특유의 간결하고 우아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체로 기술하였으며 \"나는... 이러했다\"라고 쓰지 않고 \"카이사르는....했다\"라고 제3인칭 시점으로 기술했다. 히르티우스가 쓴 제8권은 사실적인 필체로 전쟁기를 기록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각권의 구성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각 권의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 "from": "user", "value": "스레드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스레드**는 어떠한 프로그램 내에서, 특히 프로세스 내에서 실행되는 흐름의 단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 프로그램은 하나의 스레드를 가지고 있지만, 프로그램 환경에 따라 둘 이상의 스레드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이러한 실행 방식을 멀티스레드라고 한다." }
{ "from": "user", "value": "프로세스와 스레드의 비교는?" }
{ "from": "gpt", "value": "멀티프로세스와 멀티스레드는 양쪽 모두 여러 흐름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멀티프로세스에서 각 프로세스는 독립적으로 실행되며 각각 별개의 메모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멀티스레드는 프로세스 내의 메모리를 공유해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프로세스 간의 전환 속도보다 스레드 간의 전환 속도가 빠르다.\n\n멀티스레드의 다른 장점은 CPU가 여러 개일 경우에 각각의 CPU가 스레드 하나씩을 담당하는 방법으로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여러 스레드가 실제 시간상으로 동시에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n\n멀티스레드의 단점에는 각각의 스레드 중 어떤 것이 먼저 실행될지 그 순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두 스레드가 특정 공유 변수 i의 값을 1 증가시키는 명령을 실행할 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n\n이때 두 스레드가 실행될 때 어떤 스레드가 먼저 실행될지는 보장되지 않으며, 만약 다음과 같은 순서로 실행된다면:\n최종 결과로 i는 2가 증가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실행된다면:\n최종 결과로 i는 1이 증가되고, 이것은 원래 프로그램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스레드의 실행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므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 이러한 문제를 경쟁 조건이라고 하며, 문제를 막기 위해 세마포어와 같은 방법을 통해 공유 데이터에 접근하는 스레드의 개수를 한개 이하로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
{ "from": "user", "value": "갈리아가 뭐야?" }
{ "from": "gpt", "value": "**갈리아** 또는 **골**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전까지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국 이탈리아에 포함시키기 전까지의 갈리아 키살피나 도 포함되었다. 이 지방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1세기에 이르러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아퀴타니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벨기카, 고지 게르마니아의 다섯 로마 속주로 나뉘었다.\n\n갈리아의 원 거주민은 켈트족으로, 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켈타이'를 라틴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갈리아의 켈트족은 수십여 개의 부족국가로 갈라져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n\n갈리아인들은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에게 사로잡힌 이후 로마 제국에서 독립해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한 갈리아 제국을 건설했으나 273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다시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n\n로마인들은 갈리아를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였는데, 알프스 산맥 이 쪽 지역의 갈리아 즉 포강 유역을 갈리아 키살피나라고 부르고, 알프스 산맥 너머의 갈리아 즉 유럽의 먼 나머지 지역을 갈리아 트란살피나라고 불렀다.\n\n갈리아 지방은 포도주가 크게 발달하였으므로 로마산 포도주가 갈리아산 포도주에 밀릴 것을 우려한 로마 황제가\n한때 포도 생산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벨가이가 뭐야?" }
{ "from": "gpt", "value": "**벨가이**는 갈리아의 북부, 곧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의 일부를 합친 지역에 살던 켈트족 원주민들을 로마 제국이 일컫던 말이다. 당시 벨가이는 로마로부터 멀리 북쪽에 떨어져 있어 상인의 왕래조차 뜸한 지역이었으며 갈리아 전쟁을 계기로 역사에 등장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갈리아 전체를 갈리아, 아퀴타니아, 벨가이의 셋으로 나누며 언어, 관습, 제도가 서로 다르며 벨가이가 게르만족과 인접해 있는 까닭에 가장 호전적이라 기록했다.\n\n갈리아 전쟁 이후 벨가이는 다른 중북부 갈리아와 합쳐 갈리아 코마타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후에 벨기카로 나뉘었다. 갈리아 전쟁기에는 아트레바테족, 벨로바키족, 칼레티족, 모리니족, 네르비족, 아투아투키족, 메나피족, 레미족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 중 레미족은 기원전 58년 다른 벨가이 부족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반로마 연합을 빠져나와 카이사르와 동맹, 후에 갈리아 전체의 유력 부족 중 하나로 떠올랐다.\n\n\"벨기움\"은 이후로도 이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간간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 이곳에 수립된 벨기에 왕국의 어원이 되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아시아의 역사의 현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유엔은 소련과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그 계획은 미소공위에서 입장차이로 결렬되어 곧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분단 이후 양 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1950년에 북한이 남한을 선제공격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의 경제력을 능가하였으나,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추월하고, 2018년 대한민국은 세계 GDP 순위 10위에 오르는 등 세계적인 대국이 되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0년대부터 이어진 경제난으로 인하여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n\n이때 미국 국가안보국에서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인류 전체에 피해를 주는 국가들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아시아를 \"악의 대륙\"이라고 지칭하게 되고 이것이 아시아의 또 다른 별명이 되었다. 이는 악의 축에서 파생된 단어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러시아를 비롯한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들의 득세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존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재와 대한민국의 세계 최초 인터넷 검열로 인한 최초의 인터넷의 적,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201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득세와 인권 탄압, 유엔 인권보장제도가 부재중인 유일한 대륙이라는 점과,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손꼽히고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일본의 역사의 고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구석기 시대\n일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40만년 전이다.\n\n## 조몬 시대\n이어서 일본에서는 조몬 문화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신석기문화로 이행했다. 그 뒤에도 해진 현상이 계속되어, 일본 열도는 현재의 혼슈, 시코쿠, 규슈, 홋카이도의 네 개의 큰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분리되었다.\n\n## 야요이 시대\n기원전 10세기경부터 기원후 3세기경까지는 야요이시대라고 불린다.시대 구분 명칭은 이 시기에 특징적으로 볼 수 있었던 야요이 토기에서 유래하였다.야요이 시대의 시작기에 대륙으로부터 하플로그룹 O1b2 에 속하는 야요이인이 도달했다. 벼 경작이 보급되면서 청동기와 철기 등도 가져왔다. 일본어도 야요이인에 의해 한반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n\n도래인들은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일본 열도 각지,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규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중국을 비롯한 대륙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n\n농경 사회의 성립에 따라 지역 집단이 형성되었다. 농경 사회의 발전과 함께 지역 집단은 대형화되어 갔고, 그 중심부에는 환호취락이 형성되었다. 당시 많이 축조된 분구묘는 대형 지역 집단의 수장묘로 여겨져 신분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일본 열도는 중국으로부터 왜 또는 왜국으로 불렸다. 대형 지역 집단 중에는 중국 왕조와 통교하는 것도 있어 중국으로부터 '나라'로 칭해졌다. 기원전후에는 100개 안팎의 나라가 중국과 통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왜노국왕은 후한에 사절을 보내 인장을 받았다. 대형 지역 집단은 점차 정치적 결합을 강화하여 왜국 연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연합체를 2세기 초경 형성하였다. 그 맹주는 왜국왕이라 칭하는데, 초기 왜국왕으로 스이쇼가 있다. 한동안 왜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으나 2세기 후반에 왜국대란이라 불리는 내란이 생겼고, 이후 야마타이국의 히미코가 왜국왕이 되었다. 히미코는 위나라와의 통교를 통해 왜국연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 왜의 상황은 중국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n\n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일본서기의 역대 천황 재위 연수를 바탕으로 역산하여 기원전 660년에 일본이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보았지만 전후 역사학에서는 일반적이지 않다.\n\n## 고훈 시대\n3세기 중후반부터 7세기경까지는 고훈 시대라고 한다. 과거에는 이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묶어 야마토 시대라 칭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고훈 시대라고 부른다.\n\n3세기 이후 도래인의 유입은 극히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3세기 중엽 긴키 지방에 출현한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묘제가 급격한 속도로 확산된다. 이는 기나이·북부규슈·기타칸토·산요·산인에 병립하고 있던 지역정치집단이 규합하여 야마토 정권을 형성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백제를 거쳐 중국에서 한자도 수입하였다. 당시의 체제를 묘제의 이름을 따 전방후원분 체제라고도 한다. 다만 이는 단일국가보다도 소국의 연합으로 간주된다. 이 왕권이 후에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다시 야마토 정권이라 칭해질 정도로 발전하는데, '조정'이라고 할만한 것이 등장하는 시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계속된다.\n\n다시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기까지 도래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n\n5세기에 들어서자 야마토 정권은 중국 남조에게 작위를 받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중국 사서에 이름이 등장하는 이 시기 야마토 왕권의 수장을 왜5왕이라고 한다. 왜5왕 중 마지막 왜왕인 '무'에 비정되는 인물에 대한 일본 학계의 정설은 유랴쿠 천황이다. 이때부터 대왕 혹은 치천하대왕으로 칭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전방후원분은 규모가 거대해지고 있어 강력한 왕권의 증거로 여겨진다.\n\n왜5왕 이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야마토 정권은 왜국대란이라고 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그러나 호쿠리쿠·오미에 근거지를 둔 방계 왕족에서 즉위한 게이타이 천황의 등장과 통치로 야마토 정권이 강화되었고, 이후에는 현 천황으로 이어지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덧붙여 게이타이 천황기에는 기타큐슈에서 이와이의 난 등이 일어났지만, 야마토 왕권과 기타큐슈 호족 이와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같은 시기에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에서는 오호츠크 문화가 성립되어 약 13세기까지 지속되었다.\n\n## 아스카 시대\n6세기 말에는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어 7세기 전반의 아스카 시대에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가 생겨났다. 특히 7세기에 이르러 도래인 계열 씨족 중 대표적인 씨족이었던 소가씨는 불교를 앞세워 모노노베씨 등의 경쟁 씨족을 제압하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어 5대에 걸쳐 일본 왕실의 외척이 되어 정치적으로 실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n\n이처럼 소가 씨를 비롯한 도래인 씨족이 일본 황실을 위협하자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645년 정변으로 소가 씨를 멸문하였으며,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로 천도하고 이듬해 다이카 개신에 관한 조칙을 공포하였다. 이후 임신의 난을 거쳐, 681년 덴무 천황이 최초로 율령 반포를 준비한 이래 8세기에 접어들어서 당나라의 율령을 기반으로 한 일본식 율령의 본격적인 편찬이 시작되고\n\n## 나라 시대\n이리하여 천황을 정치적·종교적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율령국가가 형성되었다. 다이호 율령은 이후에 후지와라노 후히토 등에 의해 누차 손질되어오며 10세기까지 일본에서 최고 법전의 지위를 유지한다.\n\n## 헤이안 시대\n8~9세기의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의 문화는 대륙 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으나 헤이안 초기에는 여러 가지 가나가 만들어졌고 정치적으로도 율령국가가 변질하여 섭관정치, 이어 인세이가 장원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한편 이전부터 율령 반포에 참여하는 등 일본 왕실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후지와라씨는 9세기 초에 이르러 소가 씨처럼 황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하기 시작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MPEG의 MPEG의 작동원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영상 압축\nMPEG 영상 코덱은 변환 코덱을 이용하는 손실 압축 방식을 사용한다. 손실 변환 코덱에서, 그림과 소리의 샘플은 작은 조각으로 나뉘고, 주파수 공간으로 변환되어 양자화된다. 이렇게 조작된 값들은 다시 엔트로피 부호화된다.\n\nMPEG-1, MPEG-2, MPEG-4 등의 동영상 코딩 시스템에는 움직임 보상 등의 과정을 이용하여, 연속되는 두 그림 또는 근처의 그림들 사이의 차이를 경제적으로 전송함으로써 압축이 이루어진다.\n설명영상들은 부호화되기 전에 과거의 영상만으로 재구성되고, 재구성된 영상과 부호화 하려는 영상의 차이만이 위와 같이 부호화되고, 이 정보와 재구성을 위한 정보가 더해진다.-->\n\nMPEG은 스트림 포맷과 디코더 표준만을 정한다. 인코더는 표준화되어 있지 않으며, 유효한 비트 스트림을 만들기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예가 제공된다. 다시 말하면, MPEG-4 디코더는 어떤 인코더로 만들어졌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MPEG-4 스트림을 디코딩할 수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MPEG-2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MPEG-2**는 MPEG이 정한 오디오와 비디오 인코딩에 관한 일련의 표준을 말하며, ISO 표준 13818로 공표되었다. MPEG-2는 일반적으로 디지털 위성방송, 디지털 유선방송 등의 디지털 방송을 위한 오디오와 비디오 정보 전송을 위해 쓰이고 있다. 또, MPEG-2의 표준을 약간 변형한 인코딩 포맷은 상업 DVD의 표준으로 돌비 디지털, DTS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n\nMPEG-2 13818-2 비디오 표준은 MPEG-1과 비슷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에서 사용하는 비월주사 방식의 영상을 지원한다. MPEG-2 비디오는 저속 비트율 환경에는 부적합하지만, 초당 3 메가비트 이상을 요구하는 MPEG-1보다는 향상된 압축률을 보이고 있다. MPEG-2의 MPEG-1과 구별되는 특징으로는 데이터 유실이 많은 전송 환경에도 적합한 트랜스포트 스트림이 정의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이는 현재 디지털 방송에 사용되고 있다. MPEG-2는 원래 MPEG-3로 개발하려던 HDTV 전송의 표준 또한 포함한다. 또한 MPEG-1과도 호환성도 보장되어 표준을 따르는 MPEG-2 디코더는 MPEG-1 스트림도 재생할 수 있다.\n이 부분의 표준은 ITU-T의 비디오 코딩 전문가 그룹과 ISO/IEC의 동화상 전문가 그룹이 공동으로 표준화를 진행하였으며, 따라서 ITU-T의 H.262와 MPEG의 13818-2는 동일하다.\n\nMPEG-2 13818-3 오디오 표준은 MPEG-1 오디오 표준에서 발전되어 채널의 확장을 하는 MC 과 낮은 표본화 주파수를 제공하는 LSF 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두가지 모두 MPEG-1 오디오를 복호화할 수 있는 하위 호환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알고리즘 측면에서는 추가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MPEG-1과 동일한 압축율을 가진다고 봐도 무방하다.\n\n하지만 MPEG-2에서는 압축율을 높이는 대신, 하위 호환성을 지원하지 않는 AAC 를 13818-3이 표준화 된 후 13818-7로 표준화하고 있다. AAC에는 기존 MPEG 오디오에서 사용되지 않던, LTP, TNS, 예측 도구가 추가되었으며 레이어로 구분하던 MPEG-1,2와는 달리 도구의 집합인 프로파일로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기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 MPEG-2 표준\nDVD / DVB에서 사용되는 변경된 표준을 제외한 MPEG-2 비디오와 MPEG-2 오디오에 대한 일반 정보.\n.\n\n## 간략한 MPEG-2 비디오 인코딩 절차\nMPEG-2는 ''오디오 신호를 비롯한 동영상의 일반적인 인코딩''을 위한 규약이다. 부호화된 비디오 스트림은 화면 내 예측, 전방 예측, 양방향 예측의 세가지 프레임들의 배치를 규정한 GOP 구조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부호화할 원본은 소리가 포함된 일정한 해상도의 영상이 초당 25 프레임 또는 초당 29.97 프레임의 속도로 바뀌는 동영상이다.\n\nMPEG-2는 비월주사와 순차주사 두 가지 방식의 비디오 스트림을 모두 지원한다. 순차주사 방식에선 부호화의 기본 유닛이 프레임이 되고, 비월주사 방식에선 필드이다. 아래 설명에서 \"픽처\" 혹은 \"정지 영상\"이라고 말한 것은 각각의 기본 유닛을 가리킨다.\n\nMPEG-2 스트림은 단일 영상을 부호화한 데이터 프레임의 연속이다. 각 정지영상을 부호화하는 방법엔 화면 내 예측, 전방 예측, 양방향 예측 세 가지가 있다.\n\n각 비디오 이미지는 루미넌스 성분 Y 와 두 개의 크로미넌스 U, V 채널로 우선 나뉜다. 각각에 대해 공간적으로 \"매크로 블록\"이라 불리는 16x16 크기의 격자로 나뉘며, 이 매크로 블록이 부호화의 기본적인 조각이 된다. 매크로 블록은 8x8 크기의 \"블록\" 4개가 합쳐진 것이다. 원본 이미지의 색상 샘플링 포맷에 따라 한 매크로 블록이 8x8 크기의 색차 정보 블록을 가질지, 아니면 16x16을 가질지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쓰이는 4:2:0 포맷에서는, 한 색상이 매크로 블록 하나당 한 개의 크로미넌스 블록만을 갖게 되어, 하나의 매크로 블록은 4개의 명도 정보 블록, 1개의 U블록, 1개의 V블록으로 총 6개의 블록을 갖게 된다.\n\nI 픽처의 경우 이미지 데이터는 다음 문단에서 설명하는 인코딩 절차를 바로 거치게 되며, P 픽처의 경우엔 우선 \"움직임 보상\"이라 불리는 과정을 거쳐 이전 영상과의 관련성을 검색하여 이용한 후 다음 인코딩을 진행하게 된다. 움직임 보상에선 P 픽처로 만들어질 영상의 각 매크로 블록이 이전 영상의 어느 부분과 가장 관련성이 높은가를 알아내어 그 부분과의 공간상의 변위인 \"움직임 벡터\"와 두 영상간의 차이가 다음과 같이 부호화되어 전송되게 된다.\n\n각 블록은 8x8 이산 코사인 변환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변환으로 얻어진 각 계수들은 미리 정해진 값들로 나누어 양자화 되고, 지그재그로 재배열 된 후 영에 대한 RLC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허프만 코딩으로 부호화를 마친다.\n\nI 픽처 인코딩은 공간적인 반복성에 대한 것이고, P 와 B 픽처는 시간적인 반복성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동영상을 이루는 이어지는 두개의 정지영상은 서로 상당히 비슷하며, 그래서 P 픽처는 보통 I 픽처의 10%, B 픽처는 2%의 크기로 부호화된다.\n\n이 세 가지 프레임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프레임들은 GOP라 불리는 구조를 이룬다. 다양한 구조의 GOP가 가능하지만 많이 쓰이는 것은 I_BB_P_BB_P_BB_P_BB_P_BB_의 순서로 15개의 프레임이 하나의 GOP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12개의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GOP구조도 자주 쓰인다. GOP 구조의 I, P, B 프레임의 구성 비율은 비디오 스트림의 성격, 출력 스트림이 가져야 하는 대역폭등에 따라 정해진다. 인코딩에 걸리는 시간도 비율을 결정하는 한 요소이다. 이를테면 실시간으로 전송해야 하는 생방송의 경우에 인코딩에 동원되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B 픽처가 많이 들어간 스트림은 I 픽처만으로 이루어진 스트림에 비해 인코딩에 3배 정도의 시간이 들 수 있다.\n\nMPEG-2 인코더의 출력 비트율은 일정해야 하거나, 정해진 최대 비트율을 갖고 변할 수 있다. 가변 비트율의 예로 10.4 Mbps를 최대 비트율로 갖는 DVD 영화를 들 수 있다. 일정한 비트율을 얻기 위해서 양자화의 수준을 변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양자화가 심하게 될 경우엔 전송된 스트림이 디코딩 된 화면에 격자모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현상은 비트율이 내려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n\n## MPEG-2 오디오 부호화\nMPEG-2는 또한 새로운 오디오 인코딩 방식을 도입한다. 이는\n\n## DVD의 MPEG-2\nDVD 표준에는 다음과 같은 제한 사항이 더해진다.\n\n## DVB에서의 MPEG-2\nDVB-MPEG에 더해진 제한 사항." }
{ "from": "user", "value": "갈리아 전쟁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58년에 시작해 기원전 51년에 끝난 로마 공화정과 갈리아 부족간의 전쟁이다.\n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프로빈키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로마는 당시 갈리아의 독립 켈트족 부족국가들과 교역 및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n\n하이두이족은 당시 세콰니족, 헬베티족, 게르만족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 헬베티족은 대서양에 면한 산토니족의 영토로 이주하기 위해 프로빈키아 속주를 지날 것을 카이사르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의 영토를 지나려 했다. 이에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전쟁이 시작되었다.\n\n카이사르는 이후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전쟁 자체는 8년째, 기원전 5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알레시아 공방전의 결과로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났으며, 기원전 51년은 전후처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갈리아 전쟁에 대한 1차 사료로는 카이사르의 저작 갈리아 전쟁기가 남아 있다." }
{ "from": "user", "value": "전쟁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전쟁 1년째: 기원전 58년\n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갈리아 키살피나, 프로빈키아, 일리리아의 3개 로마 속주의 총독으로 임지에 도착했다. 게르만족에게 밀려난 헬베티족은 스위스 레만호 동쪽연안에서 아르모리카 지방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하이두이족에게 길을 내달라고 하고 카이사르에게 통과를 요청했으나 카이사르는 허가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의 12만 명정도가 라인강을 건너오자 하이두이족과 공동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손강 유역에서 헬베티족을 기습하고, 달아나는 헬베티족을 쫓아 비브락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강화를 맺었다.\n\n헬베티족과 전투 이후 갈리아인들은 게르만 부족 중 하나인 수에비족을 물리쳐 달라고 카이사르에게 부탁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작했으나 브장송에서 협상을 결렬되고 수에비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브장송에 겨울 숙영지를 짓고 라인강을 로마의 방위선으로 결정했다.\n\n## 전쟁 2년째: 기원전 57년\n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갈리아인들 사이의 내부부족의 투쟁에 개입했다. 로마군은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까지 진출하여 레미족과 동맹을 맺고 벨가이의 여러부족과 전투를 벌였다. 벨가이인은 약 30만 명으로 수에시오네스족의 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로마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센강을 건너 벨가이인들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카이사르는 수에시오네스족을 물리치고 벨로바키족, 암비아니족과 차례로 강화를 맺은 다음 지금의 벨기에 영토인 갈리아 북동부를 평정하였고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게 대서양 연안의 부족을 평정하게 하였다.\n\n이리하여 갈리아 전체가 평화로워 졌고 카이사르는 겨울 숙영지를 갈리아 중서부 에 잡았다.\n\n## 전쟁 3년째: 기원전 56년\n카이사르는 제1차 삼두정치의 주인공들인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차례로 만난 이른바 \"루카회담\"에서 다시한번 삼두정치의 방향을 정하였다.\n\n그 사이 베네티족을 비롯한 갈리아 서부의 부족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카이사르는 브르타뉴 지방으로 이동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로마 해군 선단이 베네티족의 함대 220척을 격파하여 베네티족을 완전히 괴멸시켰다.\n\n한편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들도 곳곳에서 카이사르대신 전과를 올렸다. 라인강에서는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노르망디는 사비누스, 아키텐에서는 청년 크라수스가 각각 승리하였다. 카이사르는 노르망디에서 겨울 숙영지를 설치했다.\n\n## 전쟁 4년째: 기원전 55년\n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라인강으로 진격하여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쳐부수었다. 오늘날의 독일 본과 쾰른사이의 중간지점에서 다리를 놓아 처음으로 라인강을 넘어 수감부리족을 공격하고 우비족과 화평을 맺었다.\n\n이후 서부로 방향을 돌려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 그때까지 브리타니아는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로마에게 미지의 땅이었다. 카이사르는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는데 해안가에서 브리타니아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격전을 치렀지만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다시 갈리아로 돌아왔다.\n\n한편 카이사르는 아버지 크라수스를 따라 시리아로 원정을 떠나는 크라수스에게 기병 1,000을 주어 보내고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n\n## 전쟁 5년째: 기원전 54년\n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하였다. 그전에 트리베리족을 복속시키고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게릴라 전술로 공격했고 카이사르는 템즈강을 건너 쳐들어가서 브리타니아의 카시벨라우누스와 강화를 맺고 가을에 갈리아로 돌아왔다.\n\n한편 그 해, 갈리아에서는 밀의 수확이 예년에 훨씬 못미쳤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여덞개로 분산하여 겨울을 보내기로 하고 각각 부하장군들에게 나누어 월동했는데 그중의 한군데에서 15개 대대 9,000명의 병사가 에부로네스족의 족장, 암비오릭스의 계략에 말려들어 몰살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네르비족과 아투아투키족도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6만 명의 벨가이족 군대가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겨울 숙영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즉각 군단을 모아 키케로를 구하러 달려갔고 반란부족을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다시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n\n## 전쟁 6년째: 기원전 53년\n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킨 네르비족을 제압한 후 파리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참석하지 않은 부족을 반란부족으로 간주하여 압박했고 결국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의 복종을 받았다. 이로써 배후를 강화한 카이사르는 역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트레베리족을 라비에누스에게 격파하게 하고 합류하였다.\n\n카이사르는 다리를 만들어 두 번째로 라인강을 넘어갔으나 깊숙이 추격하지는 않았다. 게르만족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다시 돌아와 진지를 짓고 6,000명을 라인강 서쪽에 에 주둔시켰다. 암비오릭스를 쫓아 북쪽으로 추격했으나 결국 붙잡지는 못하고 돌아와 랭스에서 부족장 회의를 다시 주재하고 반란군 주동자를 처형하였다.\n\n##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n기원전 52년 카르누테스족이 오를레앙의 로마인을 살해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이된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부족의 총궐기를 호소하여 갈리아 부족 대부분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카이사르는 프로빈키아에서 갈리아 중부로 달려가 모든 군단을 모아 반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보르주에서 농성하는 갈리아군을 격파하지만 게르고비아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틈을 타서 갈리아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전투를 걸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요새에서 6만 명의 병력으로 농성하였다.\n\n카이사르는 알레시아에 포위망을 구축하지만 갈리아 부족 연합의 20만이 넘는 대군이 포위망을 다시 포위하여 안팎의 적을 상대해야했다. 9월에 벌어진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격전을 치르고 갈리아부족 포위군을 격파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무기를 버리고 카이사르에 투항하였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다시 여덟 군데로 나누어 겨울을 나게하고 자신은 하이투이족의 영토에서 숙영했다. 이로써 사실상의 갈리아 전쟁은 막을 내렸다.\n\n## 전쟁 8년째: 기원전 51년\n그 겨울 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 7권을 간행했다. 전쟁 8년째에는 알레시아 공방전이후 전후처리를 하여 모든 부족을 로마에 복속시켰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로마화하고 속주세를 정액제로 바꾸었다." }
{ "from": "user", "value": "로마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라치오주의 주도이며, 테베레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31 km이고, 대도시의 인구는 400만이 넘지만 밀라노나 나폴리 대도시에 비해 면적이 3~4배 넓은 편이고 되려 로마시의 면적과 밀라노와 나폴리의 대도시의 면적이 비슷하므로 세 도시 모두 300만 정도로 비슷한 규모의 도시라 볼 수 있다.\n\n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3000여년 전에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 ‘영원한 도시’라고 부른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n\n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스포츠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축구는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로마는 1934년과 1990년 FIFA 월드컵의 결승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이 두 결승전이 열렸던 스타디오 올림피코는 로마의 스포츠 문화를 대변하는 경기장이자 세리에 A에 속한 AS 로마와 SS 라치오의 홈 경기장이다. AS 로마에서 프란세스코 토티 선수와 다니엘레 데 로시 선수는 모두 로마 태생이며 특별히 인기가 많다. 아틀레티코 로마는 레가 프로 프리마 디비시오네에서 마이너 팀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홈 경기장은 스타디오 플라미니오이다.\n\n로마는 1960년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빌라 보르게세나 카라칼라 욕장 등의 고대 유적을 경기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올림픽 경기를 위해서 올림픽 스타디움, 빌라지오 올림피코 등을 새로 만들었다.\n\n럭비 유니온은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스타디오 플라미니오 경기장은 2000년부터 식스 네이션스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럭비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로마는 유니오네 럭비 카피톨리나, 럭비 로마, S.S. 라치오 같은 지방 럭비 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n\n매년 5월이 되면 로마는 포로 이탈리코 클레이 코트에서 ATP 월드 투어 마스터스 1000의 테니스 토너먼트 대회를 개최한다. 사이클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까지만 해도 인기가 있었으나, 요즘에는 그 인기가 식은 상태이다. 로마는 1989년과 2000년에 지로 디탈리아 결승전을 두 번 개최한 적이 있다. 로마는 그 외의 스포츠 팀들, 예로 들어 농구 , 배구 , 핸드볼, 워터 폴로 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
{ "from": "user", "value": "토머스 핀천의 비밀스러운 사생활과 대중의 관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핀천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얼굴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성향으로 유명하다. 수십년에 걸친 활동기간동안 공식적으로 사진 촬영을 한 적이 한번도 없으며, 공개된 몇 안되는 사진들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사진이 대부분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V.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V.**는 토머스 핀천의 첫 장편 소설이다. 유럽 역사를 거쳐 등장하는 '브이.'라는 존재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허버트 스텐실의 노력을 그린 작품이다.\n\nV.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테마의 축을 이루는 것은 20세기 초반의 '역사의 비인간화'를 상징하는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이들 사건 속에 관찰자로서 계속 등장하는 '브이.'라는 여인의 관계를 밝히려는 스텐실의 노력이다. 꽤 취약한 인과관계 속에서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스텐실의 노력은 소설의 또 하나의 테마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역사 혹은 인간의 존재에 패턴 혹은 계획이 존재하는가 혹은 모든 사건이 서로 무관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n\n이러한 스텐실의 노력에 대비되는 것이 기계치인 베니 프로페인의 폐인과 같은 삶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의 비인간화를 경계하면서도, 그 치명적 영향을 두려워하여 인간적 접촉과 그에 수반한 감정을 거부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특수 상대성이론이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특수 상대성이론**, 또는 **특수상대론**은 빛의 속도에 견줄 만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들을 다루는 역학 이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고속의 물체에 대하여 기존의 뉴턴 역학의 갈릴레이 변환을 대체하고, 갈릴레이 변환과 달리 고전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에서처럼 모든 관성계에서 관찰자의 속도와 무관하게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n\n특수 상대성 이론은 갈릴레이 변환 대신 로런츠 변환을 채용한다. 이 이론에서는, 갈릴레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관성계가 동등하지만,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의 이론과 같이 광속이 모든 관성계에서 동등하다. 즉, 빛 의 속도는 이를 방출하는 물체와 관찰자 사이의 상대운동에 무관하다.\n\n특수 상대성 이론은 여러 가지 놀라운 예측을 하는데, 이 예측들은 전부 실험에 의해 검증되었다. 로런츠 변환을 도입함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운동학적으로 더 이상 구별하여 생각할 수 없다.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이 둘을 더하여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고 기하학적으로 다루는 민코프스키 공간을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시간과 공간 중 하나에만 의존하는 측정량 은 서로 다른 관성계에서 서로 다른 값을 가진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에 해당하는 값들을 합쳐서 4차원 벡터로 나타내면 다루기 쉽다.\n\n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어떤 일반적 속도 상수가 존재하므로, 이를 이용하여 질량과 에너지를 관계지을 수 있다. 이론에 따르면, 어떤 계의 질량은 그 계의 운동량 중심의 관성계에서의 에너지와 같다 . 이를 질량-에너지 등가성이라 한다.\n\n특수 상대성 이론은 상대성 원리를 오로지 관성계에 대해서만 적용한다. 즉, 가속계는 관성계와 실험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에 발견된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고려하면 가속계가 관성계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한 중력장이 없는 경우, 특수 상대성 이론은 물리적 현상을 정확히 기술한다. 다루어지는 속도가 빛의 속도에 비해 훨씬 작은 일상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예측은 뉴턴 역학의 예측과 일치한다고 한다." }
{ "from": "user", "value": "상대론적 운동량과 에너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고전 역학에서의 운동량인 는 더 이상 상대론적 속도에서 보존되지 않는다. 그 대신 **상대론적 운동량**이 보존되는데 그 크기는 다음과 같다.\n\n이 식에서 이 된다.\n\n또한 고전적인 운동에너지인 역시 상대론적 속도에서는 성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정의된다.\n\n이 식 역시 이 된다.\n\n## 질량-에너지 등가성\n그러나 실제로 보존되는 에너지는 운동에너지가 아닌 총에너지 이다. 이 중 운동에너지가 아닌\n을 정지 에너지라 부른다.\n\n그러나 이는 질량과 에너지가 자유롭게 변환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질량과 에너지는 완전히 동등하다는 의미로 다시 말해 질량 을 정지 질량이라 한다. 보다 엄밀한 정지 질량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n\n정지 질량은 어느 관성계에서도 일정하다. 따라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이라 하면 정지 질량을 일컫는다." }
{ "from": "user", "value": "굴의 생산과 유통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한국에서 통영은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마른굴, 훈제굴의 형태로 미국과 일본 등으로 매년 수출된다. 중국에서 인기를 끌어 통영굴의 중국수출이 증가하고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아이스킬로스의 업적을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그는 비극 배우의 수를 1명에서 2명으로 늘렸으며, 장식 회화와 도구를 무대장치로 사용하였다. 또한 가면·가발·신 등을 창안하였고, 비극의 3부작 제도를 완성하였다.\n\n그의 주요 공헌을 보면, 비극에서의 합창시의 형식이나 배열을 정비하여 극의 악곡적 구성과 극적 리듬의 통합에 성공했다는 점과, 운율적인 극대화의 기본적 격조를 낳았다는 점, 그리고 비극의 테마로서 제신이나 기괴한 신령에 얽힌 얘기를 즐겨 다루어, 테마에 어울리는 장대하고 화려한 연출방법을 만들어냈다는 점 등일 것이다.\n\n아이스킬로스 비극의 합창대는 어떤 작품에서나, 중대한 위기나 불안에 떠는 군중으로서 극적으로 위치가 주어지고 있으며 합창가는 신을 부르거나 혹은 신을 칭송하는 종래의 제사적인 형태와 기능을 지니면서 동시에 극의 참가자로서의 합창대의 집단적 표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배우는 그러한 집단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그와 반대로 그 적대자가 되는 수도 있다.\n\n현존하는 가장 오랜 비극 은 배우의 대화에서 운율형식이 일정하지 않아, 장면에 따라서는 이암보스 형식이거나 토로카이오스 형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이 작가의 실험단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n\n또한, 극 구성의 그 자체에도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면이 은연 중에 병존한다. 은 말하자면 보고극, 즉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조건이 갖춰진 페르시아 왕궁이란 곳에 중대사건이 보고되고, 그 보고의 서사성에 극적 긴박감이 주어진다는 구성과 망령극, 즉 망령 출현이라는 형태로 사실성을 버리고 초시간적인 수준으로 상상력을 비약시키는 구성이 1편 가운데에서 동시에 사용되고, 또한 마지막으로는 극이란 사건의 당사자가 패배의 슬픔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는 취향으로 끝나고 있다. 하나의 극적 사건을 몇 개의 다른 시점의 수준에서 다뤄 입체적인 깊이를 주고 각각의 시점 사이에 긴장감을 자아내는 그리스 비극 특유의 드라마투르기는 아이스킬로스의 이와 같은 대담한 몇몇 실험이 모태가 되어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n\n또한, 그가 비극예술에 대해 품었던 원대한 포부는 3부작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드라마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시인의 의미 부여이며 또한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이상의 탐구이기도 하여, 이 시야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연속 테마에 바탕을 둔 3편의 극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구상을 훌륭히 구현시킨 )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아가멤논의 어원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그리스어로 그의 이름은 Ἀγαμέμνων인데 이 이름은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라는 의미이다. 이 이름은 ἄγαν, \"매우\"와 μέδομαι, \"숙고하는\"이라는 뜻으로 구성된 Ἀγαμέδμων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네티켓이 뭐야?" }
{ "from": "gpt", "value": "**네티켓** 또는 **인터넷 예절** 혹은 **인터넷 예의**는 인터넷 공간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다. 영어 네티켓은 네트워크와 에티켓의 합성어이다.\n\n네티켓은 법적 제재에 의존하는 타율적 해결보다는 네티즌 스스로 자율적으로 사이버공간의 문제를 미리 방지하고 이성적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
{ "from": "user", "value": "네티켓을 지키지 않게 되면 생길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
{ "from": "user", "value": "일식이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일식**은 달이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가리는 천문현상을 말한다. 지구 표면에서 볼 때의 태양과 달의 시직경이 비슷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궤도면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면이 거의 일치하여 달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태양의 앞쪽으로 지나 태양을 가리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때를 일식이라고 한다. 태양이 달에 완전히 가리면 **개기일식**, 일부만을 가리면 **부분일식**, 해와 달이 겹쳐졌으나 달이 해를 전부 가리지 못해서 반지 모양으로 가려지면 **금환식** 또는 **금환일식**이라 한다.\n\n일식은 태양과 달이 합을 이루는 초하룻날에 볼 수 있지만, 매달 일어나지는 않는다. 달의 궤도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천구상의 궤도인 황도와 달이 지구를 도는 궤도인 백도는 5도 이상 기울어져 있어서, 달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종종 지구를 빗겨 간다. 또한, 달은 타원의 궤도를 돎으로 지구에서 멀어졌을 때 달의 시직경이 태양을 전부 가리지 못할 정도로 작아질 수 있다. 일식은 매년 최소 2회에서 5회까지 발생하며, 그중 개기일식은 2회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상의 한 지역에서의 개기일식은 드문데, 이는 일식이 지표면 위로 달의 그림자 또는 본그림자가 지나는 좁은 길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n\n일식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일부 고대나 근대 문화에서는 초자연적 원인에 의해 일어나거나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기도 했다. 천문학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는 대낮에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기에 두려워할 수 있다.\n\n일식 때 태양을 직접 바라보는 것은 눈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 있으므로, 일식 관측에는 특별한 보호 장비나 간접적으로 관측하는 기술이 사용된다. 개기일식에서 완전히 가려진 태양만을 보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안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식의 상태를 식별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에 위험이 있다. 고정된 장소에서 그러한 상태는 2시간여의 총 시간 동안 최고 7.5분 동안만 지속된다. 먼 곳까지 예상된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에는 '일식 추적자' 또는 '반그림자 애호가'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
{ "from": "user", "value": "점성술은?" }
{ "from": "gpt", "value": "1999년 8월 11일, 20세기 마지막 개기일식과 관련, 유명 스페인 디자이너이자 점성술사로도 알려진 파코 라반은 일식이 시작되면 우주정거장 미르가 파리로 추락할 것이라고 했다. 예언이 빗나가자 사과했다.\n\n2009년 7월 22일, 중국과 인도의 개기일식과 관련, 뭄바이의 한 점성술사는 인도에서 카슈미르 지방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이슬람교 원리주의 무장세력이나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에 의한 공격이 발생해 명망있는 정치지도자가 암살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일식을 불길하게 여기는 힌두신화의 영향으로 인도에서는 제왕절개 수술을 예정했던 임산부들의 수술날짜 변경 의뢰가 잇따랐다.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역사에 비춰보면 일식이 빈번하게 출현했던 시기에 폭동이나 전쟁, 그리고 자연재해가 발생할 확률은 95%\"라는 주장을 담은 게시물이 급속도로 퍼졌다.\n\n2017년 8월 21일, 미국의 개기일식과 관련, 크로포드 퍼스펙티브의 편집자 아치 크로포드의 뉴스레터에 따르면 2008년 1월 러시아에서 일식이 있었고, 6일이 지나 러시아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조지아와 전쟁을 치렀다. 크래포드는 오는 21일 예정된 개기일식을 두고 \"호전적인 반응이 즉각 나타날 것\"이라며 \"좋든 싫든 간에 역사적인 사건이 미국과 관련해서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크로포드는 기술적 분석과 행성 주기 등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투자자문업자다." }
{ "from": "user", "value": "월식의 붉은 달을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개기월식이 일어날 때 달이 붉은색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지구 대기에 의한 산란 때문인데, 태양에서 나온 빛 중 파장이 짧은 푸른 빛이 산란되고 결과적으로 파장이 긴 붉은 빛이 달에 반사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월식이 일어날 때 달의 위상이 이지러지는 방법은 보통 초승달이나 상현달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이산 코사인 변환의 엄밀한 정의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이산 코사인 변환은 역함수가 존재하는 선형함수 ''F'' : **R**로 변형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탈레스의 탈레스의 정리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탈레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기하학의 정리 5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저술가들의 글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이광수가 누구야?" }
{ "from": "gpt", "value": "**이광수**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다. 애국계몽운동가로서의 공로가 있으나, 최남선 등과 함께 변절한 친일파로 평가된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차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자는 보경, 호는 춘원·고주·외배·올보리·장백산인, 필명은 춘원생·경서학인·노아자닷뫼당백·Y생·장백·장백산인 등.\n\n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에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아울러 순한글체 소설을 쓰며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n\n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망명, 1919년 도쿄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 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서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의 쇠퇴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동시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n\n그러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된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 친일어용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전선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와 나〉에서는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힘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으로 바꾼 이유를 밝혔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을 집필하고 연설을 한 것이 눈에 띄며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징병제도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 제하에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 한국인 유학생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 재선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 위원이 되었다.\n\n해방 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 있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
{ "from": "user", "value": "대표작은?" }
{ "from": "gpt", "value": "소설, 전기, 시집, 평전, 수필 외에도 서예에 능하여 많은 서예작품을 남기기도 했다.\n\n## 소설\n기타 불교 소설로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마의태자 등도 썼다." }
{ "from": "user", "value": "바로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바로크**는 서양 예술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의 프랑스 전사인 ''''에서 유래했다. barocco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는데, 뜻은 왜곡된 삼단법, 혹은 불협화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소리를 의미한다. 바로크의 예술적 표현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서양의 미술, 음악, 건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양식의 변천에 따라 바로크의 시대는 전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뉜다. 예술적 경향에서 보면 후기 바로크 시대는 곧 로코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n유명한 음악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미뉴에트 같은 음악이 있다. 파격적 효과, 감각적 풍요, 생동감 있는 동적 표현, 화려하고 풍부한 장식 등이 주요 특징이다. 르네상스 양식의 균형과 조화에 반하여, 최소한의 질서 안에서 **우연**과 **자유분방함**이 강조된다.\n\n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
{ "from": "user", "value": "문학은?" }
{ "from": "gpt", "value":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플레야드 말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의 시대를 ‘전고전주의 시대’라 불러온 데에 대하여 이 시대에 고전주의로 향하는 경향을 이탈한 문학을 오히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바로크 문학’이라 하여 고전주의에 대치시키는 움직임이 근년 문학사가들 사이에 일어났다.\n\n문학에 있어서 바로크의 특징은 ⑴ 안정보다 움직임의 중시, ⑵ 단념보다도 격한 감각의 존중, ⑶ 장식성의 우월, ⑷ 기발한 비유·대조·과장과 파격적 구문의 사용 등이다. 시에서는 도비네, 장 드 스퐁드, 초기의 말레르브, 극에서는 로베르 가르네와 로트루, 초기의 코르네유 등에 이 경향이 있다고 한다." }
{ "from": "user", "value": "지리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지리산**은 경상남도의 하동군, 함양군, 산청군, 전라남도의 구례군, 전북특별자치도의 남원시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있는 산이며 백두대간의 종점이다. 1967년 최초의 대한민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둘레가 320여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1967년 12월 29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이에 따른 고찰이 많고 근·현대 문화재도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산이다." }
{ "from": "user", "value": "생태계는?" }
{ "from": "gpt", "value": "## 식물\n지리산에는 대략 1500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도 있다. 환경부가 멸종위기야생식물로 지정해 보호되고 있는 가시오갈피나무, 깽깽이풀, 기생꽃, 세뿔투구꽃, 자주솜대, 천마, 히어리 등이 있다.\n\n이처럼 풍부한 지리산 식물들 가운데는 북방계 식물 또는 고산식물로 분류할 수 있는 구름병아리난초, 금강애기나리, 기생꽃, 너도바람꽃, 땃두릅나무, 만병초, 산오이풀, 자주솜대, 참바위취, 회목나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n\n이들은 지리산을 대표할 만한 식물들로 다른 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곳이 이들의 분포의 남방한계선에 해당하므로 의미가 있다. 북방계 식물들이 지리산 높은 곳에 자라고 있는 것은 빙하기 때 남쪽으로 내려왔던 북쪽 식물들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고산지역에만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이다.\n\n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지리'또는 '지리산'이 붙은 식물들도 있다. 하지만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도 '지리'또는 '지리산'이 붙지 않은 식물도 있다.\n\n지리산에 다양한 식물이 살 수 있는 것은 독특한 조건을 갖춘 식물생육지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생육지는 고산능선으로서 해발 1500m 이상의 지역에 길게 형성된 능선에 특별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주릉 곳곳에 발달한 바위봉우리나 초원에는 귀한 식물이 많다.\n\n왕등재 부근의 해발 1000m 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슾지 왕능재늪은 감자개발나물, 닭의난초, 동의나물, 방울새난, 세모부추, 숫잔대, 애기부들등 습지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n\n### 해충방제\n소나무 재선충에 감염된 나무가 1그루 발견된 이후 실시된 특별예찰 결과 추가 감염목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n\n## 동물\n지리산은 여러 동식물의 낙원으로서 지리산 국립공원의 야생동물의 종류는 89종으로 이중 텃새가 37종, 여름새가 33종, 겨울새가 12종, 통과새가 7종이다. 우점종은 어치이고 붉은머리오목눈이, 박새, 노랑턱멧새, 동고비, 쇠박새, 직박구리 순으로 우점도가 높다. 천연기념물로는 큰소쩍새, 소쩍새, 붉은배새매, 올빼미, 새매, 재두루미 등 7종이 관찰된 적이 있다. 희귀조류 중 나무발발이는 관찰 기록만 있고 바위종다리는 저지대에서 관찰된 적이 있다. 평지에서 번식하는 종으로 알려져 있는 검은딱새, 붉은뺨멧새가 노고단 1,500m 고지에서 번식하고 있다.\n\n지리산은 야생동물 서식에 알맞은 울창한 수림과 먹이가 충분하기 때문에 야생동물에게는 낙원이다. 지금까지 학계에 조사, 보고된 지리산 서식동물은 포유류가 15과 41종, 조류가 39과 165종, 곤충류가 215종 등 총 421종이다. 포유류의 경우에는 멧돼지나 고라니, 너구리, 청설모등 포유동물이 많이 서식한다. 대한민국의 여러 멸종위기 동물이 서식하는 장소이다. 하늘다람쥐, 삵, 담비, 수달, 반달가슴곰이나 아무르표범등이 서식한다. 이들은 대부분 촬영된 지리산북부사무소 야생동식물보호단이 서식지 인근에 10여대의 무인센서카메라를 설치, 2004년부터 2년여간 활동 장면을 찍은 것들이다. 이 가운데 하늘다람쥐는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서식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이 발견되는 것은 원시림, 계곡의 수질이 복구되고 있다는 증거라는 분석이 있다.\n\n또한 지리산은 국립공원관리단이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지금까지 방사된 곰의 숫자는 28마리이며, 6마리는 폐사하고 4마리는 적응을 하지 못해 회수되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겨울나기를 성공적으로 하고 번식을 하는 등 야생화 하고 있다는 조짐이 있다. 50마리 이상이 야생화에 성공했을 때 전국 각지에도 복원사업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n\n옛날에는 지리산에 아무르표범이나 시베리아호랑이가 살았다고 하나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목격담과 발자국 흔적으로 인해 적은 수나마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
{ "from": "user", "value":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서 맞바꿈 관측가능량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을 동시에 측정할 때, 둘 사이의 정확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고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으로부터 얻어진 근본적인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퍼짐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n\n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양자상태에서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편차 는\n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는\n두 표준편차의 곱은 다음과 같다.\n즉, 위치와 운동량의 표준편차의 곱은 디랙 상수의 절반보다 같거나 크다.\n\n또한, 수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푸리에 해석학에서, 푸리에 변환의 두 변수 사이에는 특정한 관계가 성립한다. 한편, 우리가 양자역학의 파동역학적 관점을 채택한다면, 파동함수의 변수를 여러 관측가능량들 중 하나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런데, 비 가환인 두 관측가능량들 사이에는 푸리에 변환 관계가 성립하며, 그러면 자명하게 두 관측가능량은 앞서 언급한 푸리에 변환의 두 변수 사이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 관계를 양자역학적으로 해석하면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가 된다. 이는 결국 이 원리는 푸리에 변환의 성질에 기인하므로,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같은 성질은 양자역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푸리에 변환으로 설명되는 모든 현상에 다 있다는 뜻이다." }
{ "from": "user", "value":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1924년부터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소에서 원자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25년 5월, 문제를 단순화시켜 복잡한 수소원자가 아닌 가상적인 조화 진동자를 설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그는 조화 진동자에서 고전적인 다주기 체계에 상응하는 위치 좌표를 푸리에 급수로 전개하여 이에 대한 수학적인 형식화를 추구한 결과, 그가 시도한 새로운 방법이 에너지 보존법칙을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5년 6월, 휴양지인 헬골란트 섬에서 최초로 양자 현상에 대한 새로운 역학을 정립해냈다. 이후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현상 내에서는 물리량들과 연관시킨 수학적 대상 두 개를 함께 곱함으로써 얻어지는 답이 곱이 수행되는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독특한 특성을 발견했다. 이 수학적 특징은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것이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고 하이젠베르크 자신 역시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때 막스 보른은 1925년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에 담긴 비교환적 양들이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행렬임을 인식할 수 있었고, 하이젠베르크의 연구 내용을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행렬로 표현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새로운 역학은 행렬역학이라 명명되었다. 1926년 3월,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의 비교환적 성질이 불확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시적인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노력한 결과, 1927년 3월에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였다.\n\n후에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아인슈타인은 \"관찰이란 현상과 그것에 관련된 자연법칙을 알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이 이론이다.\"라고 말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관점하에 새로운 현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결과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착상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수학적인 논증을 완성한 하이젠베르크는 이후 사고 실험을 통하여 빛과 물질의 파동, 입자의 이중성이 불확정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n\n하이젠베르크의 1927년 논문은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형태였다.\n같은 해 7월에 미국의 얼 케너드가 오늘날과 같이 를 관측가능량의 표준편차로 정의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부등식\n을 증명하였다.\n\n## 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n현미경으로 입자를 관측하는 사고 실험인 **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사용했던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현미경에 사용하는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상을 형성하는 해상도가 높다는 사실을 토대로 원자 속 전자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관측에 사용되는 빛은 감마선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자 속의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감마선과 같이 짧은 파장의 광자를 쏠 경우 감마선 광자가 가진 운동량은 매우 커서 원자가 전자를 잡아두는 에너지를 초과한다. 따라서 이 경우 전자의 위치는 정확히 관측되지만, 광자는 전자에 큰 임의의 운동량을 전달하므로 컴프턴 효과에 의해 전자의 운동량은 부정확하게 측정된다. 반대로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긴 파장의 광자를 쏠 경우 광자의 충돌이 전자의 운동량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전자에 의해 크게 산란된 광자는 관측자에게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전달해 줄 수 없다. 위의 두 상황에 의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
{ "from": "user", "value": "질량의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유도된 관성질량을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 전자기적 질량\n1881년 조지프 존 톰슨은 관성을 전자기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발표하였다. 톰슨은 전하를 가진 도체구가 무한한 크기의 유전체를 통과할 때를 생각하였다. 맥스웰의 전자기학 이론에 의하면 변위 전류에 의해 자기장이 만들어지므로, 도체구가 운동하면 도체구의 주위에 전자기장이 생긴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전자기장의 에너지는 움직이는 도체구에 의해 공급된 것이다. 따라서 도체구는 유전체를 통과하며 저항을 받았을 것이다. 유전체는 전도성이 없으므로 도체구는 마치 질량이 증가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n\n톰슨은 유체역학과의 비교를 통해 도체구의 질량 변화를 표현하였다. 구의 질량이 m이라고 할 때 ½mv로 나타난다. 따라서 구의 질량이 m+μ처럼 보이며, 톰슨은 유체역학에서와 같이 μ을 유도질량이라고 하였다. 톰슨은 구가 움직일 때 도체구의 전하 분포가 변하지 않는 전기장이 구에 영향을 주지 않은 채 진행한다고 가정하였다. 톰슨이 계산한 구의 관성질량은 구의 속도와는 상관 없는 값이었다. 톰슨은 결과를 일반화하여 모든 관성질량을 유도질량으로 설명하려 하지는 않았다.\n\n1889년 올리버 헤비사이드는 톰슨의 가정에서의 오류를 개선해 구의 운동에 의해 증가한 구 바깥의 전자기장의 에너지와 질량의 증가는 각각\n임을 보였다. 반지름이 a이고 표면 전하가 q인 정지된 도체구 바깥의 전자기장 U으로 나눈 것과 같다. 헤비사이드는 톰슨과 달리 질량의 증가분을 관성질량의 일부로 인식하였다.\n\n헤비사이드의 논문에 이어서 전자기적 현상을 역학으로 설명하려는 연구가 여러 있었다. 예를 들어 윌리엄 톰슨과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에테르를 역학적 모형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반면 루트비히 볼츠만 등은 역학을 전자기학으로 설명할 것을 주장하였다. 빈은 헤비사이드의 오류를 개선해 타원체가 정지했을 때의 에너지가 U이고 타원체의 속도가 v일 때 β=v/c이면 타원체가 움직일 때 주어지는 에너지는\n임을 구하였다. 타원체의 속도가 작을 경우 두 번째 항까지 근사해서\n으로 헤비사이드의 결과와 일치한다. 또한 큰 속도에서는 더 많은 항을 가지고 근사해야 하므로 빈의 결과에서 전자기적 질량은 속도에 의존한다.\n\n막스 아브라함은 전자의 질량을 순수하게 전자기적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아브라함은 맥스웰 방정식과 힘의 밀도에 대한 로런츠 공식에서 시작해 역학적 선운동량과 전자기장의 선운동량의 합이 보존됨을 보였다. 비오-사바르 법칙을 적용해 아브라함은 전자가 속도 **v**로 움직일 때 전자기장의 전체 운동량\n임을 유도하였다. 전자의 속도가 시간에 대해 일정하다면 전자기장의 운동량 또한 일정하며, 역학적 운동량과 장의 운동량의 합이 보존되므로 역학적 운동량 또한 일정하다. 아브라함은 이를 관성의 법칙의 전자기적 해석으로 보았다. **w**가 가속도이고 μ가 전자기적 질량일 때\n\n전자기적 질량의 성공을 통해 일부 물리학자들은 전하와 자기장으로만 모든 물리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질량은 물질이 통과하는 매질에서의 작용에 의해 나타나며, 이로써 질량과 물질의 양 사이의 관계가 사라졌다. 그러나 전자 이외의 다른 물질에 대해서 전자기적 질량을 일반화하는 데 실패하였고, 상대론적 질량과의 괴리로 인해 전자기적 질량에 대한 반론이 증가하였다.\n\n## 상대론적 운동량\n갈릴레이 변환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이며, 운동량 보존 법칙이 유지된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모든 관성계에서 맥스웰 방정식에 의한 빛의 속력이 동등하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로런츠 변환을 채택한다. 그러면 운동량에 추가적으로 감마 인자가 곱해져야한다.\n\n190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논문에서는 전하 e를 가진 질량 m)=e**E**이다. 여기에 로런츠 변환을 적용하고 운동량이\n로 정리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운동량의 유도는 전자기 이론에서 유도된 것이므로 전하를 띠지 않는 물체의 상대론적 운동량을 이야기하지 않는다.\n\n1909년 길버트 루이스와 리처드 톨만은 질량이 같은 두 물체의 비탄성 충돌을 생각해 운동량 보존 법칙과 로런츠 변환에 근거해서만 상대론적 운동량을 유도한다. 이 연구들은 모두 운동량 보존 법칙이 로런츠 변환 후에도 성립한다고 가정하였다. 일반적으로 로런츠 변환이 일어날 때 운동량 보존 법칙이 여전히 성립하면 운동량은 속도에 의존하는 감마인자를 가진다.\n\n운동량 보존 법칙이 로런츠 변환 후에도 성립한다고 가정하고 상대론적 식을 간단히 유도해 보자.\n\n헤르만 민코프스키는 3차원 운동량 벡터에 에너지와 관련된 성분을 추가한 4차원 에너지-운동량 벡터 P에 항상 평행해야 하고, 외력을 받지 않는 물체의 운동량-에너지 벡터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3차원 공간과 관련된 성분은\n로 표현된다. 물리학과 학부 교재들이 m에 감마인자를 곱한 것을 물체의 **상대 질량**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교육적 목적으로 도입한것에 가깝고 혼란을 야기한다.\n\n## 질량-에너지 등가성\n존 헨리 포인팅은 1884년 포인팅 벡터를 사용해 전자기장을 통해 전달되는 에너지를 계산하였다. 1900년에 푸앙카레는 빛의 운동량을 포인팅 벡터로 표현해 전자기파의 관성질량을 E/c으로 유도한다.\n\n일반적으로 질량-에너지 등가성은 1905년 아인슈타인이 유도한 것으로 인정된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물체가 전자기 복사의 형태로 질량 E를 방출하면 물체의 질량이 E/c만큼 감소함을 보였다. 이로부터 아인슈타인은 물체의 질량은 물체가 가지는 에너지의 척도라고 결론을 내렸다.\n\n물체의 운동에너지에 대해서는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운동에너지는\n로 정리된다. mc을 물체의 정지에너지라 한다. 섬네일|오른쪽|200px|]만일 물체의 모든 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으면 정지에너지는 0이고,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한 물리적 존재의 다른 표현이 된다. 질량이 남김없이 에너지를 전환될 수 있음은 물질의 쌍생성과 쌍소멸에 대한 실험에 의해 확인되었다.\n\n질량과 에너지가 남김없이 상호 전환될수 있지만 항상 모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 관점에서 물체를 질량과 에너지로 구분하는 기준은 반응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화학 반응에서는 최외곽 전자의 에너지만이 변화하며 물질의 핵력, 내부 전자껍질의 에너지 등의 나머지 부분은 질량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기본 입자의 반응에서는 입자의 모든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전환되기 때문에 입자의 변화하지 않는 질량은 존재하지 않는다.\n\n질량-에너지 동등성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운동량 보존, 질량 보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각각 따로 존재하였다. 3차원 공간에서 운동량 보존 법칙은 세 성분이 존재하므로 모든 물리적 현상은 총 다섯 개의 등식을 만족해야 했다. 질량-에너지 동등성 이후에는 4차원 운동량-에너지 벡터의 보존 하나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질량 보존과 에너지 보존이 통합되어 물리적 현상 네 개의 등식만을 만족하면 된다.\n\n## 상대론적 관성과 전자기적 관성의 비교\n먼저, 상대론을 고려하면 질량은 관성의 척도가 아님을 언급한다. 관성을 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상대론에서는 관성이 감마인자를 포함하여 속력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추가적으로 속도와 힘이 이루는 각도에도 영향을 받는다. 힘과 속도가 수직하면,\n평행하면\n으로 각각 관성이 이다. 즉 뉴턴 역학 때처럼 일관된 관성이 정해지지 않는다.\n\n이제 윗 항목에 나온 특수한 상황들을 보자. β=v/c일 때 아브라함의 전자기적 관성을 급수로 전개하면\n이고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관성을 전개하면\n로 다르다. 전자기적 관성과 상대론적 관성 중 옳은 식을 실험을 통해 가려내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1902년 카우프만은 전자의 비전하를 측정하여 전자기적 질량이 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막스 플랑크는 카우프만의 실험 결과를 통해 두 이론 중 참인 것을 가려낼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전자의 비전하를 측정한 이후의 실험들의 결과는 상대론적 관성 식을 지지하였다.\n에너지의 관점에서 전자기적 관성과 상대론적 관성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전자기적 관성의 경우 으로 두 개념의 질량-에너지 동등성 식에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기적 관성에 계수 4/3이 붙은 것은 아브라함의 전자기적 관성의 정의가 움직이는 입자의 부피 바깥에서만 전자기장의 에너지를 적분하였기 때문이다. 상대론적으로 올바른 전자기적 질량의 정의에서는 입자의 텐서를 포함하는 전체 에너지-운동량 텐서에 기반해야 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 또는 **골뱅이표**는 아스키의 64번째 부호로, 현대에는 전자 우편 주소를 표기할 때 주로 쓰인다. 영어로는 **at sign**이라고 부르며 흔히 **at**이라고 읽는다. 한국에서는 흔히 **골뱅이표**또는 **골뱅이**라고 부른다.\n\n전자우편 주소 표기에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영어 단어 at과 뜻인 일반적인 상업부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사과 15개가 2달러인 경우 장부에 간략하게 \"apple 15 @ 2$\"로 기입하였다.\n\n2004년에 모스 부호에 포함되었고, 콤마트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모스 부호로는 A와 C의 연타로 표시한다.\n\n트위터 등에서는 누군가에게 답장을 쓸 때 \"OO에게\"라는 의미로 사용자이름 앞에 @를 쓴다.\n\n모두(에서는 홈페이지를 찾을 때 홈페이지명 뒤에 @을 붙여서 검색한다.\n\n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의미는 같지만 성별을 나타내기 위해 a와 o로 끝나는 단어를 동시에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한다." }
{ "from": "user", "value": "언어별 명칭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언어권마다 @을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
{ "from": "user", "value": "로스앤젤레스의 교통을 알려줘." }
{ "from": "gpt", "value": "## 도로\n도시와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은 광범위한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망으로 연결되어있다. 텍사스교통국은 연간 도시 교통량 조사에서 로스앤젤레스가 2005년 인구 1인 당 연간 교통 정체량이 최고라고 발표했는데, 미국에서 가장 혼잡한 도로 교통량을 보유하고있다.\n\n로스앤젤레스의 주요 고속도로는 남쪽으로 샌디에이고에서 멕시코 티후아나를 이어주고, 북쪽으로는 새크라멘토, 포틀랜드, 시애틀,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주는 주간고속도로 제5호선, 동쪽으로는 잭슨빌까지 이어지는 주간고속도로 제10호선 등이 있다. 또 캘리포니아 해안지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북해안지역, 오리건주, 워싱턴주를 이어주는 국도 제101호선이 있다.\n\n## 대중교통\n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도심 교통당국과 교통 기업은 광범위한 버스노선 뿐만 아니라 전철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를 가로지르는 모노레일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9월 버스와 전철, 모노레일을 합친 월간 대중교통 이용자는 3,880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이중 3,050만 명이 버스 이용자들이였는데, 2005년 로스앤젤레스의 통근자 10.2%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조사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통을 담당하고 있는 공사는 로스앤젤레스 교통국 다.\n\n로스앤젤레스 메트로 레일은 미국에서 아홉 번째로 이용자가 많고, 모노레일은 두 번째로 많다. 노선으로는 전철 노선인 파란선, 빨간선, 보라선, 초록선, 금선, 엑스포선이 있다. 오렌지 라인과 실버 라인은 간선급행버스체계 형식으로 지어졌다. 메트로링크의 통근철도는 로스앤젤레스와 주변 지역, 교외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n\n메트로링크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도심 교통당국에서 운영하는 철도교통 이외에 도시간을 이어주는 암트랙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는 역은 다운타운 북쪽에 있는 유니온역이다.\n\n## 항공\n주요 공항으로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은 2006년 6,100만 명의 이용객과 200만 톤 이상의 화물 처리를 했는데, 세계에서 6번째로 혼잡하다. 미국에서 3번째로 혼잡한 공항이지만, 공항 확장이 어렵고 대중교통이 다소 불편한 편이다. 또 유나이티드 항공의 허브 공항이다.\n\n이 외에 주요 공항으로 다음과 같이 있다.\n\n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밴 나이스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범용 공항 중 한 곳이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로널드 윌슨 레이건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로널드 윌슨 레이건**은 미국의 제40대 대통령과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이다.\n\n레이건은 일리노이주 화이트사이드 카운티에 있는 탬피코에서 태어났고, 일리노이주 리 컨트리에 있는 딕손에서 자랐으며, 일리노이주 유레카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으로 문학사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 레이건은 처음으로 일리노이 주를 떠나 아이오와로 가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으며, 1937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자리를 옮겼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고 배우로서 활동하며 여러 작품에 출연하였다. 레이건은 1947년 부터 1952년까지 미국 배우 조합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역임한 동안 그 안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기 위해 일했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배우 조합의 회장을 재역임하였다. 1964년 레이건의 연설 \"선택의 시간\"은 로널드 레이건을 새로운 보수파 인물로 전국적 관심을 받게 했다. 지지자를 얻은 레이건은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선출되었다.\n\n1968년, 1976년 대선에서 낙마하였으나, 레이건은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었고, 현직 민주당 대통령인 지미 카터를 꺾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당시 레이건은 69세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최고령자였다. 레이건은 선거인단에서 압승을 거뒀는데, 선거인단 투표수가 525표로 선거인단 538표 중 98%를 얻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편파적인 대통령 선거 중 하나였다." }
{ "from": "user", "value": "기타는?" }
{ "from": "gpt", "value": "레이건은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고령의 나이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도널드 트럼프가 만 70세의 나이로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깨졌으며, 2020년 11월 9일 조 바이든이 78세의 나이로 46대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서 역대 3위로 밀려났다. 또한 레이건은 대통령 최초로 영화배우 출신이었다." }
{ "from": "user", "value": "Every Little Thing의 구성원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사이드 기타. 탈퇴 후 ELT에서는 사이드 기타를 배치하지 않고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보아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 1986–1998: 어린 시절 및 데뷔 준비\n보아는 어머니 성영자와 아버지 권재철 사이에서 1986년 11월 5일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서 태어났다. 보아의 아버지는 TBC 방송국의 사운드 엔지니어였고, 방송국 퇴사 후에는 음향 장비와 관련된 일을 했다.\n\n그러던 중 1998년, SM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약 2년 반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다. 이는 30억 정도를 들인 프로젝트였으며, SM 엔터테인먼트에서 H.O.T. 등의 가수들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모두 동원한 중대한 프로젝트였다. 친구:동방신기의 유노윤호, 최강창민, 마츠우라 아야, 크리스털 케이\n\n## 2000–02: 한일 양국에서의 데뷔\n보아는 2000년 8월 25일 \"15세의 춤추는 소녀\"라고 불리며 데뷔 앨범 ''ID; Peace B''를 발매했다. 당시 차트 10위대를 유지하는 등 신인으로서 어느 정도 성공은 했지만, 30억이라는 준비 과정과 비교하면 첫 앨범 활동은 그에 걸맞은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n\n한국에서 데뷔 이후 2001년 3월 7일, 보아는 에이벡스와 레이블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 진출을 선언했고 그동안의 수록곡들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바꿔 부른 스폐셜 앨범 ''Don't start now - Jumping into the world''을 발매했다.\n\n2002년 4월 12일에는 한국에서 두 번째 한국 정규 앨범 ''No.1''을 발매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 있던 상황이었고, 이와 동시에 타이틀 곡 〈NO.1〉은 2002년 월드컵과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음악산업협회의 음반 판매량 집계에 따르면 No.1·늘..은 2002년 한 해 동안 54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 기록은 2002년 발매된 전체 음반들 중 4위를 차지하는 기록이다. 보아는 이 앨범에서 후속곡 〈My Sweetie〉와 발라드 곡 〈늘..〉 등으로 활동하다가 8월에 2집 활동을 마감했다.\n\n2002년 8월 28일에는 일본에서 6번째 싱글 \"VALENTI\"를 발매했다. \"VALENTI\"는 라틴 리듬의 경쾌한 댄스 곡으로, 보아의 일본 싱글들 중 년 현재까지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싱글이다. 음반 순위 면에서도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이어 3주 뒤에는 7번째 싱글 〈奇蹟/NO.1〉을 발매했다. 특히 싱글 〈/NO.1〉을 발매한 주에는 〈VALENTI〉와 〈/NO.1〉이 모두 주간 차트 5위권 내에 진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n\n## 2003–05: 대중적인 성공\n2003년 1월 29일, 보아는 일본에서 2번째 정규 앨범 ''VALENTI''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발매 일주일 만에 6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n\n5월 30일에 보아는 대한민국에서 3번째 정규 앨범 Atlantis Princess를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타이틀 곡은 〈아틀란티스 소녀〉로,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를 묘사한 동화 같은 가사를 담고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보아는 이 곡으로 6월 1일부터 TV 활동을 시작했고, 후속곡 〈Milky way〉와 발라드 곡 〈나무〉로 활동을 계속하며 3집 활동은 9월까지 이어졌다. 이때 보아는 교통사고로 인한 매니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타이틀 곡 〈아틀란티스 소녀〉대신 〈나무〉를 불러 매니저를 추모하며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3집 발매에 앞선 2003년 2월 보아는 서울특별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이에 맞춰 보아는 서울을 홍보하는 노래 〈서울의 빛〉을 녹음했으며, 10월 22일에는 싱글 〈DOUBLE〉이 발매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동시 발매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첫 싱글, 일본에서는 통산 10번째 정규 싱글이었다. 이러한 싱글 동시 발매는 이어 발매된 〈Rock With You〉도 똑같이 이루어졌다. 12월 3일에는 대한민국에서 MIRACLE과 같은 방식의 스페셜 앨범 SHINE WE ARE가 발매되었다.\n\n2004년 1월 15일, 일본에서 3번째 정규 앨범 LOVE & HONESTY가 발매되었다.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보아의 통산 3번째 1위였다. 이 앨범으로 미국의 빌보드 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 영국의 UK 차트 등 공신력있는 음악 차트를 토대로 세계 각국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여 순위를 매기는 유나이티드 월드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n이후에도 보아는 BEST OF SOUL로 1위에 오른다. 앨범 발매 후 일본에서의 2번째 콘서트 투어도 진행되었는데, 'BoA LIVE TOUR 2004 LOVE & HONESTY'는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총 9회의 공연을 선보인 콘서트 투어였다. 3월 19일에는 보아가 참여한 m-flo의 싱글 〈the Love Bug〉가 발매되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후 m-flo의 VERBAL이 보아의 콘서트 무대를 찾았을 때나, 2004년 연말 m-flo가 내한하여 MKMF에 참가했을 때 함께 〈the Love Bug〉를 부르기도 했다. 2월 14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MTV 아시아 어워즈'에 한국과 일본의 공동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 최고 인기 아티스트상'과 특별상인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때 축하무대에서 보아는 록 밴드와 함께 〈Rock With You〉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불렀다.\n\n6월 11일에는 대한민국 4번째 정규 앨범 My name을 발매하고 타이틀 곡 〈My Name〉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음악 스타일은 이전의 보아와는 아주 다른 파격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까지 〈NO.1〉·〈아틀란티스 소녀〉 등의 귀여운 10대 소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타이틀 곡 〈My Name〉은 어반 댄스 스타일의 곡으로, 골반 댄스 등 노래의 안무도 화제를 낳았다. 보아는 이 앨범의 수록곡 〈Spark〉와 〈My Prayer〉로 9월까지 활동했고, 연말에 MKMF에서 대상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9월 1일에는 일본에서 13번째 싱글 〈QUINCY/コノヨノシルシ〉를 발매했다. 이어 3개월 뒤인 12월 1일에는 14번째 싱글 〈メリクリ〉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잘 맞는 발라드 곡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보아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판매량도 싱글 〈Shine We Are!/Earthsong〉 이후 넘지 못했던 10만 장 선을 넘었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롱 히트했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위저가 리메이크한 곡이기도 하다.\n\n2005년 2월 2일, 보아는 일본에서 첫 번째 베스트 앨범 BEST OF SOUL을 발매했다. BEST OF SOUL은 2001년 〈ID; Peace B〉로 일본에서 데뷔한 이후, 〈メリクリ〉까지 총 14장의 싱글을 발매하는 동안 발표했던 싱글 곡들을 모은 앨범으로, 첫 주 48만장으로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최종적으로는 110만 장 가까이 팔렸다.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고 2개월 뒤 일본에서의 3번째 라이브 투어 콘서트 'BoA ARENA TOUR 2005 BEST OF SOUL'를 열었다. 투어 기간 직전에 발매된 15번째 싱글 〈DO THE MOTION〉은 보아의 싱글들 중 최초로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도 최초의 기록이다. 2005년 보아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국에서 출간한 영어교재 의 〈〉라는 글에 국제적인 스타의 성공 사례로 실려 화제를 모았다. 6월 24일부터는 대한민국에서 5번째 정규 앨범 Girls On Top을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타이틀 곡 〈Girls On Top〉은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남성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댄스 곡으로, 이 곡에서는 곡 후반에서 남자 댄서의 등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안무가 화제가 되었다. 이 곡으로 보아는 MBC 음악캠프에서 1위를 수상했고,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는 7월 17일부터 7월 31일까지 3주 연속으로 1위에 해당하는 '뮤티즌 송'을 수상했다. 이어 후속곡 〈MOTO〉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에서의 5집 활동이 마감되어 갈 때쯤, 8월 31일에 16번째 싱글 〈make a secret〉이 발매되었다. 〈DO THE MOTION〉의 노선을 이어 나가듯 절제되고 세련된 분위기의 곡이다. 11월 23일에는 빠른 댄스 곡을 앞세운 17번째 싱글 〈抱きしめる〉를 발매했다. 한편, 이때부터 보아는 본격적으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n\n## 2006–08: 일본 활동\n보아는 2006년 2월 15일 네 번째 일본 정규 앨범 ''OUTGROW''를 발매했다. ''OUTGROW''는 발매 첫 주 222,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라 네 장의 앨범이 연속으로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전 앨범들에 비해 발매 첫 주 가장 낮은 판매량을 보였다. 2006년 4월 5일에는 일본 19번째 싱글 \"七色の明日~brand new beat~/Your Color\"를 발매했다. 이어 8월 9일에는 20번째 싱글 \"KEY OF HEART/DOTCH\"를 발매했다. 〈KEY OF HEART〉도 〈~brand new beat~〉의 연장선 상에 서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21번째 싱글 \"Winter Love\"는 11월 1일에 발매되었다. 처음으로 '실연'을 주제로 한 애절한 발라드 곡이다.\n\n여름에는 일본에서 여러 행사에 참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ap bank 페스티벌'과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였다. 'ap bank 페스티벌'은 Mr.Children의 보컬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고바야시 다케시, 사카모토 류이치 등이 모여 만든 환경 단체인 ap bank에서 주최하는 축제로, 대형 가수들이 초대되며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대에서 보아는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함께 앨범 OUTGROW의 수록곡 〈cosmic eyes〉를 불렀다.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는 매년 도쿄 메이지 신궁에서 개최되는 불꽃놀이로, 보아는 불꽃놀이 축하무대에 올라 6곡을 공연했다. 이 때 오른쪽 발목 부상을 입은 채 댄스 곡 공연을 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n\n1월 17일에 일본에서 5번째 정규 앨범 MADE IN TWENTY 가 발매되었다. 이어 3월부터는 일본 내 통산 5번째 콘서트 투어인 'BoA ARENA TOUR 2007 MADE IN TWENTY '를 개최하였다. 4월 25일에는 화장품 광고 음악으로 쓰인 싱글 〈Sweet Impact〉를, 9월 26일에는 도시바 휴대전화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된 발라드 싱글 〈LOVE LETTER〉를 발매했다. 12월 12일에는 일본의 록 밴드 DOPING PANDA의 Yutaka Furukawa와 함께한 격렬한 댄스 곡 〈LOSE YOUR MIND〉를 싱글로 내놓아 미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으로부터 흑인도 무색할 정도로 펑키의 느낌이 잘 살아있고 전성기 때의 마이클 잭슨이 떠오른다는 극찬을 받았다. 2005년 영국에 이어 보아의 입지적인 스토리가 일본 영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연말 보아는 연말 프로인 SBS 가요대전에 엔딩으로 참가하였으며 시간을 내어 연초까지 대한민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n\n## 2008–11: 미국 진출 및 한국에서의 컴백\n보아는 2009년 3월 17일 미국 데뷔 음반 ''BoA''를 발매하며 미국 진출을 했는데, 음반에는 블러드샤이& 아방트, 션 가렛, 브라이언 케네디와 같은 프로듀서들이 참여했다.\n\n비슷한 시기, 보아는 2009년 4월 18일 일본에서 두 번째 베스트 음반 ''Best & USA''를 발매했다. ''Best & USA''는 발매 첫 날 29,433만 장을 팔아 오리콘 데일리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나, 위클리 차트에서는 145,000만 장을 팔아 2위를 차지했다.\n\n보아는 Live Tour 2010: Identity를 마치고 난 뒤, 2010년 8월 5일 여섯 번째 한국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를 발매하며 5년만에 컴백했다. 보아는 발매에 앞서 \"GAME\", 〈옆 사람〉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고, 2011년 8월 2일 타이틀곡 \"Hurricane Venus\"의 티저도 공개했다. \"Hurricane Venus\"는 공개되자마자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휩쓸었고, 가온 디지털 종합 차트 3위에 올랐다. 보아는 2011년 12월 4일부터 SBS K팝 스타에 출연했는데, YG를 대표하는 양현석, JYP를 대표하는 박진영과 함께 SM을 대표하는 심사위원으로 2012년 4월까지 방송되었다. 보아가 광고를 했었던 브랜드로는 올림푸스, 나이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Mr.Children가 뭐야?" }
{ "from": "gpt", "value": "**Mr.Children**은 사쿠라이 가즈토시, 다하라 겐이치, 나카가와 게이스케, 스즈키 히데야로 구성된 일본의 록 밴드이다. 흔히 줄여서 미스치루라고 불리기도 한다.\n\n1989년에 결성된 Mr.Children은 5천4백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n\nMr.Children은 싱글 29장 연속 1위 기록을 갖고 있으며, 1994년엔 〈Innocent World〉, 2004년엔 〈Sign〉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n\n2012년 11월까지 Mr.Children은 정규 음반 14장과 싱글 33장, 컴필레이션 음반 5장, 라이브 음반 1장, 영상 음반 15장을 발매했다. 스즈키가 작곡한 〈Asia〉 와 〈#2601〉 를 제외한 밴드의 노래 대부분은 리드 싱어인 사쿠라이가 작곡하는데, 때로는 프로듀서인 고바야시 다케시와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
{ "from": "user", "value": "내력은?" }
{ "from": "gpt", "value": "## 2008년\n2008년 봄에는 그들의 노래 〈쇼넨〉이 NHK 야구 드라마 배터리의 주제가로 사용됐다.\n\n여름, 그들은 3개월간 3작품 연속 발매를 발표했다. 첫 번째는 2008년 하계 올림픽 NHK 방송 테마송인 싱글 GIFT, 두 번째는 작년에 개최한 전국 투어에서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을 담은 DVD Mr.Childre \"HOME\" TOUR 2007 ~in the field, 세 번째는 드라마 코드블루 주제가인 싱글 HANABI이다.\n\n〈Habani〉는 야마시타 도모히사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코드 블루의 주제가로 사용됐다.\n\n11월에는 첫 디지털 싱글인 〈하나노 니오이〉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11월 22일 개봉한 나카이 마사히로가 주연한 영화 나는 조개가 되고싶다 주제가로 쓰였다.\n\n12월 10일엔 정규 음반 Supermarket Fantasy를 발매했는데, 발매 첫 주에 약 70만 장이 팔리며 오리콘 주간 음반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n\n## 2009년 ~ 2011년\n2010년 12월 1일, Mr.Children은 음반의 유일한 싱글이자 디지털 싱글로 발매한 〈fanfare〉가 수록된 그들의 16번째 음반 SENSE를 발매했다. 발매 직전인 11월 29일까지 발매일을 제외한 수록곡, 곡수, 음반 제목, 커버 등 상세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었다.\n\n2011년 4월 4일, Mr.Children은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기부금을 모으기 위한 디지털 싱글 〈카조에 우타〉를 발매했다.\n\n## 2012년\n2012년 4월 18일, Mr.Children은 3년 7개월만에 3A 싱글 〈이노리: 나미다노 기도/End of the Day/Pieces〉를 발매했다. 수록곡 가운데 두 곡 은 영화 우리들이 있었다 주제가로 사용됐다.\n\n2012년 5월 10일에는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베스트 음반 Mr.Children 2001-2005<micro>와 Mr.Children 2005-2010<macro> 두 장을 함께 발매했다." }
{ "from": "user", "value": "중앙 처리 장치의 연산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모든 CPU에서 메모리에 저장된 명령어들을 순서대로 불러와서 실행한다는 사실은 물리적형태와는 관계없이 동일하다. 그리고 CPU가 이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꺼내고, 해독하고, 실행하는 5단계가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에서 명령어를 실행하고난 이후에는 다시 이 다섯 단계의 명령 주기가 반복되며, 프로그램 카운터의 변화된 위치에서 실행될 명령어를 불러오게 된다.\n\n## 인출\n첫 번째 단계인 인출은 프로그램의 메모리에서 명령어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프로그램 내부의 명령어의 위치\n\n## 해독\n두 번째 단계인 해독은 인출 단계에서 가져온 명령어를 해독하여 명령어 내의 데이터 정보와 연산 정보를 추출한 뒤, 중앙처리 장치 내의 각 장치에 적절한 제어신호를 보내 연산, 처리에 대한 준비를 하는 단계이다.\n\n## 실행\n실행은 명령어에서 추출한 두 데이터와 연산 정보를 이용해 실제로 연산을 하는 단계를 말한다. 연산이 끝난 결과는 곧바로 다음 명령어에서 사용될지, 그렇지 않을지에 따라 메모리 단계로 갈지, 라이트백 단계로 갈지 결정된다.\n\n## 메모리\n네 번째 단계인 메모리는 연산결과가 다음 명령어에 바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결과를 메모리에 저장하는 것을 말한다.\n\n## 라이트백\n연산의 마지막 단계인 라이트백은 이전 명령어의 연산 결과가 다음 명령어의 입력 데이터로 사용될 경우, 계산 결과를 레지스터에 다시 쓰는 것을 말한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정당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정당** 또는 **당**은 공공 이익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을 일컫는다. 정당은 정치의 기구·조직 가운데서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편에 속한다. 사회가 근대화됨에 따라 정치가 다원화하는 것을 반영하는 데 있어서 의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게 되어 여기서 생기는 투입과정의 차질을 보완하기 위하여 점차 정당이 형성되기 시작되었다.\n\n서구의 정치사에서는 근대정당의 성립과 발전을 대체로 19세기 초부터 잡고 있으며 의회정치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에는 나라에 따라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정당정치의 전통이 확립되는 경우도 있다. 근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정당이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치에 참여하는 인구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귀족이나 지식을 가진 계층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질 때 정치를 좌우하는 것은 합리성이며 또한 그 바탕은 동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단일의 정치적 주체에 대하여 처음에는 부르주아지가, 그리고 뒤이어서 프로레타리아가 도전하면서 정치는 복잡한 투쟁관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투쟁의 첫단계에서는 주로 폭력이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름했으나 어느 쪽의 종국적인 승리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는 타협과 선의의 경쟁이 룰이 되었고 이에 정당이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당의 기본적인 개념을 정치사회적으로 보아 다원적 경쟁사회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여길 때 현대의 전체주의적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단일정당은 정당이라고 하기보다는 특수 기능을 장악한 정부의 한 조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정당이란 어휘 자체가 원래 '부분적인 모임'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현대의 신생 제국에서 대개의 경우 정당" }
{ "from": "user", "value": "정당의 법적 규제는?" }
{ "from": "gpt", "value": "정당은 본래 근대적 의회정치하에서 등장하고 발전한 것이지만, 의회정치의 원리와 정당제도간에는 조화되지 않는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의회정치의 입각점이 되는 국민대표권의 개념은 의원의 독립성을 요구하지만, 정당조직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의원을 당 의사의 구속하에 둔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국가가 정당을 오히려 적대시했다. 그러나 정당이 의회정치의 현실의 운영에 불가결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선거법이나 의회법으로 이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또 나아가서는 국민의 정치적 통합이라는 정당의 중요 기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동시에 정당운영에 따르는 각종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당관계의 입법 노력도 추진되고 있다.\n\n정당을 대상으로 하는 입법은 예전에는 원내위원회의 구성, 선거운동,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확보, 정치자금의 공개 등 개개의 사항에 관해 필요한 범위내에서 규제하는 내용에 그쳤으나, 근래에는 서독·이탈리아 및 한국처럼 헌법 중 정당에 관한 원칙규정을 두고, 또 정당에 관한 독립입법을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n\n독립적인 정당입법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n\n반체제 정당의 목적은 파시즘 정당이 헌법상의 자유를 십분 이용하여 헌법체제 자체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쓰라린 경험에서 온 것이나, 서독에서는 1956년에 공산당이 반체제정당의 낙인을 찍혀 해산되었다. 정당을 대상으로 하는 독일의 법적 규제를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n\n## 독일의 법적 규제\n독일연방공화국헌법 21조는\n\n이러한 위임법률의 하나로서 1967년에 정당법이 제정·시행되었다." }
{ "from": "user", "value":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성과를 알려주세요." }
{ "from": "gpt", "value": "다음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의 일부이다.\n\n민주노동당은 우리의 정신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함께 하는 진보대연합의 길을 걷는다.\n\n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에 늘 함께 하고, 투쟁의 성과를 정치 권력의 장에 확장시킨다.\n\n민주노동당은 노동의 현장, 문화의 현장 등 민중의 삶이 이루어지는 일상의 곳곳에서 지배 구조와 지배 이념에 대항하는 민중 권력을 구축한다.\n\n민주노동당은 세계화된 자본에 맞서는 전 세계 노동자계급, 착취당하는 민중, 억압당하는 민족과의 국제 연대에 앞장서 정의와 평화가 넘쳐흐르는 인류 공동체를 건설해 간다.\n\n민주노동당의 길은 민주와 평등과 해방의 길이다.}}\n\n그 외에도 민주노동당은 부유세의 신설을 통한 빈부의 격차 해소와 국가보안법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2002년 대선과 2007년 대선에서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정책이 큰 관심을 모았으며 이중 무상 급식은 민주노동당이 가장 먼저 내놓은 정책으로 2010년 ~ 2011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정국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외에도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이자제한법,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같은 서민 정책도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내놓은 정책들이었다. 처음 민주노동당이 주장한 부유세도 참여정부에서 종합부동산세로 빛을 봤다.\n\n일반적으로 다른 정당이나 언론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남북통일 문제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북한과 관련된 정책만을 주되게 추진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민주노동당이 대한민국 제17대 국회 기간 동안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대통령의 헌법상 지위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 권한\n대통령의 헌법상의 지위는 나라마다의 권력구조에 따라 다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와 함께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가지며, 의회와 별개 선거로 선출되어 별도의 정당성 기반을 가진다.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의 지위는 입법부와 사법부와 함께 동령에 위치한다. 그러나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은 삼부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 지위에 의하여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등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행정부의 수반을 의미하는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지위에 있기도 하다.\n\n의원내각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만을 가지며, 정치적 실권은 행정부 수반인 총리에게 있다. 대통령은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의전 등의 형식적 권한만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n\n이원집정부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와 함께 행정적 실권 역시 가진다. 그러나 대통령제에서와 달리 대통령이 임명한 내각이 의회의 신임에 구속되므로, 의회의 선거 결과에 따라 대통령의 정치적 실권의 크기도 변하게 된다. 동거 정부 출현시 행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은 총리가 행사하게 된다.\n\n역사적으로 매우 황당한 신분이었던 적도 있었다. 1860년대의 멕시코가 그랬는데 당시 멕시코는 베니토 후아레스가 정상적으로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 개입해서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즉위시켜서 멕시코에 **대통령과 황제가 공존하는 초유의 사태**를 유발시켰다. 하지만 베니토 후아레스가 막시밀리아노 1세를 체포 후 총살시킴으로써 일단락 되었다.\n\n## 의무\n각 국가의 헌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의무는 헌법 준수의 의무, 영업 활동의 금지, 겸직 금지의 의무, 청렴의 의무 등을 들 수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아넬리스 마리 \"안네\" 프랑크의 생애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 키티와의 만남\n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디트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여서-현대 유대교는 토라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는 정통주의 유대교, 토라의 느슨한 준수를 주장하는 개혁파 유대교로 구분된다. 큰 딸 마르고트와 작은 딸 안네도 어려서부터 시나고그에서의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여 유대교 신앙을 배웠다.\n\n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교육, 교통, 거주지 등에서의 인종차별이 실시되고, 1938년 17세 소년 헤르셸 그린슈판이 거주의 자유 박탈에 항의하다 파리주재 독일대사관 3등서기관 에른스트 에두아르트 폼라트를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테러를 가한 범죄인 수정의 밤 사건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자,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정책을 강제 추방에서 강제수용소 수용 및 학살로 바꿀만큼 유대인들의 망명을 좋아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재정후원이 있는 경우에만 어린이의 망명을 허락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홀로코스트를 묵인한 공범이라는 비평을 받았다.\n\n몬테소리 학교에서 개별 자유 수업을 받았으며, 중학교는 유대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유는 1938년 이후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에서 소외시키려는 나치의 인종차별 실시로, 학교 진학에서도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살 생일에 붉은 체크 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게 '키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n\n## 미국으로의 망명실패와 은신처 생활 시작\n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은 서부 유럽으로 확대되어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중립국가임에도 점령하였고, 곧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에 대해 그리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7년 1월 26일자 타임에서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오토 프랑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사건이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만큼 위험한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n\n하지만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되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에 있는 펙틴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고 1942년 7월 5일에 자신의 가족을 그곳으로 피신시킬 준비를 하였다.\n\n은신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안네가 일기장에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적었을 정도였으며,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이웃들도 안네 자매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끌려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만큼 보안도 완벽했다.\n\n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안네 일가는 새벽에 일어나 옷가지같은 생필품만 챙긴 채 은신처에 갔다. 도망가는 것을들킬까 봐 트렁크는 쓸수 없었다.차별 때문에 안네는 자동 전차를 타지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고 적었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n\n은신처에서 산 이들은 안네의 가족과 그의 이웃 유대인들과 그의 가족, 치과 의사 뒤셀) 들을 포함한 총 8명이며, 약 2년 동안 생존을 위해 투쟁하였다. 식료품와 생활용품)은 당시 오토의 공장에 종사했던 3명의 사무직원이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프 기스라는 처녀가 심부름을 해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안네의 표현을 빌면 쉴 틈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은신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 주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수과정으로부터 안네의 일기와 그가 습작한 글들을 몰래 빼돌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n\n은신처에서 안네 일가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부친의 먹거리 장사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리던 은신생활 이전의 삶과는 달리 먹을 것, 속옷 등의 생활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부족했고, 같이 살기 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결점이 눈에 띄면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불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일기에는 자그마한 행복들도 보인다. 지하경제로 산 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만들어서 자우어크라우트와 같이 먹은 이야기, 불어, 영어,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한 이야기, 독후감, 딸기를 사서 먹은 이야기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행복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n\n## 은신처 발각과 안네의 죽음\n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제복 경찰은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유대인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 화요일로 끝나 있다.\n\n범우사에서 번역한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요제프 질버바우어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n\n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2월 또는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벨젠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해방되기 한 달 전이었다.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죽었다. 언니 마르고트도 티푸스로 죽었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안네가 상심이 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n\n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외 은신처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영양실조 또는 티푸스로 죽거나 가스실에서의 학살로 죽었는데, 판단 씨 가족의 경우 부인은 안네와 마르고트와 같은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독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죽었고, 판단 씨는 가스실에서 학살되었으며, 안네의 남자친구였던 페터는 독일군의 수용자 강제이주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도 하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n\n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편집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n\n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안네의 일기란 무엇인가요?" }
{ "from": "gpt", "value": "**안네의 일기**는 네덜란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국외 탈출에 실패한 아버지의 결단으로 2년간 은신 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이며, 일기장에서 '키티'라고 부르며 친구에게 말하듯이 써내려간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
{ "from": "user", "value": "내용은?" }
{ "from": "gpt", "value": "일부 내용은 은신 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대다수 내용은 은신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썼고, 네덜란드어 판은 1947년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일부 원고 편집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1995년 한국어판으로 무삭제 원고가 완역되어, 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되었다. 1944년 8월 4일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안네의 가족이 살던 곳을 급습하여 일행이 모두 붙잡혔고 그 뒤 안네는 다음해 3월 수용소에서 16살의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
{ "from": "user", "value": "음높이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음높이** 또는 **피치**는 음의 높낮이를 가리키는 음악용어다. 보통 A4, B3과 같은 표기법을 사용하거나 Hz로 표기한다. 악보에서는 음높이를 줄과 칸으로 표현한다. 음의 진동수가 클수록 음높이는 높아지며, 진동수가 2배가 되면 한 옥타브 높은 음이 된다." }
{ "from": "user", "value": "개요는?" }
{ "from": "gpt", "value": "같은 세기로 피아노의 왼쪽 건반과 오른쪽 건반을 두드렸을 경우, 둘의 소리 감각은 다르다. 이 차이를 소리의 높이로 나타낸다. 소리의 높이는 음파의 진동수의 차이에 의한 감각으로, 진동수가 많으면 높은 음으로, 적으면 낮은 음으로 느낀다. 회전하는 톱니바퀴에 두꺼운 종이를 대면 소리가 들린다. 회전이 빨라질수록 그 소리는 높아진다. 레코드의 회전판에 손을 대서 회전을 느리게 하면 소리가 갑자기 낮아진다. 이것도 회전의 변화로 진동수가 변하기 때문이다. 소리의 높이는 음파의 진동수에 관계가 있지만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진동수가 2배가 되어도 소리의 높이는 2배가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고 원래의 소리의 높이보다 1옥타브 높은음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귀에 소리로서 들리는 진동수는 약 20-20000Hz의 범위인데, 이 범위의 소리를 가청음이라고 한다. 음악에서는 대강 30-8000Hz의 범위의 소리가 사용되며, 여성이나 아이들의 발소리는 약 250-550Hz, 남자는 약 90-300Hz 범위라고 한다. 진동수가 각기 다른 두 개의 음파를 동시에 들을 때의 소리의 높이는 어떻게 될까. 진동수의 차이가 작을 때에는 울림이 생기지만, 이때 소리의 높이는 두 진동수의 평균 높이로 느낀다. 진동수의 차가 커지면, 두 소리의 높이를 나누어서 들을 수도 있지만, 소리의 크기가 다르면 커다란 소리의 진동수 높이로 들린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흔히 듣는 악기 소리와 같이 진동수의 차가 작은 진동수를 기준으로 해서 정수배가 되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작은 진동수·소리의 높이로 들린다." }
{ "from": "user", "value": "리히텐슈타인 후국의 문화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음악분야에서는 프란츠 리스트의 친구이자 저명한 작곡가 험퍼딩크의 스승이기도 한 작곡가 조세프 가브리엘 라인베르거가 유명하다. 리히텐슈타인에는 유명한 음악가뿐 아니라 많은 음악협회나 합창단들이 있는데 그 수가 400개 이상에 이른다. 또한 리히텐슈타인 음악학교는 국립재단으로 열성적으로 음악사업을 육성하며 '국제적 마스터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n\n미술분야에서는 플라스틱 아트로 유명한 게오르크 말린이나 브루노 카우프만등이 유명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도 활발하여 정부에서는 'Art on Buildings' 법률로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은행이나 기업들도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부활절 전에 푼켄존탁이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일종의 마녀 화형식에서 유래하였으며 공공축제이면서 마을 간 대항전이기도 하다. 리히텐슈타인인의 90%가 천주교회 신자이기 때문에 많은 전통이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8월 15일 등 천주교에 따른 기념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칼 폰 린네의 주요 저서를 알려줘." }
{ "from": "gpt", "value": "## 자연의 체계\n자연의 체계 초판은 1735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758에 10판이 되었는데, 4400여종의 동물과 7700여종의 식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Physalis annua ramosissima, ramis angulosis glabris, foliis dentato-serratis''와 같은 굉장히 길고 어려운 학명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학명들이 간결한 이명법을 따른 학명으로 대체되었다. 이명법을 따른 학명은 속명과 종명의 병렬식으로 나열한 것이다. 이 이명법들은 종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n\n## 식물의 종\n식물의 종 은 총 2권으로 1753년에 초판 인쇄가 되었다. 이 책은 국제적으로 현대 식물학 명명법의 시발점으로 받아들여진다. 1권은 5월 24일에 나왔고, 같은 해 8월 16일에 2권이 나왔다. 이 책은 총 2권 1200페이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7300여 가지가 넘는 종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에는 왕이 그에게 북극성 훈장을 수여했다. 1754년에 린네는 식물계를 25개의 강으로 분류하였다.\n\n## 식물의 속\n식물의 속은 1737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책은 식물의 분류법 중 속에 해당하는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10 판의 출판은 린네 혼자 모든 것을 한 것이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1754년의 5판이다.\n\n## 식물 철학\n식물 철학은 식물 분류와 명명법에 대한 린네의 생각의 요약이었고 그가 이전에 출판했던 책들을 더 잘 갖추어 낸 책이었다. 이 책은 그가 이전에 사용하던 분류 시스템의 전체 개론을 담고 있었다. 또, 이 책에는 식물 정원을 관리하는 법과 여행에서 저널을 쓰는 것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었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후천면역결핍증후군이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후천면역결핍증후군**는 HIV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병하면 나타나는 전염병이다. HIV는 바이러스의 이름이며, 에이즈는 HIV에 감염된 환자가 발병하면 나타나는 증상들을 일컫는다.\n\n질병관리본부의 '문답으로 알아보는 에이즈 상식' 자료에 따르면 HIV와 에이즈는 다른 말이다. HIV는 바이러스를 말하며 에이즈는 면역이 결핍돼 나타나는 상태를 뜻한다. HIV에 걸린 사람을 에이즈 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HIV 감염인이란 HIV에 걸린 모든 사람을 말하며 이 중에서 질병이 나타난 사람을 에이즈 환자라고 부른다.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아도 면역결핍으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10~12년 정도 걸린다. 올바른 관리를 한다면 30년 이상 살 수 있다. 현재 에이즈는 만성질환으로 분류되고 있다.\n\n에이즈는 신체의 면역, 저항력이 저하되는 질병으로 보통 에이즈 질환으로 인한 사망과 그외에도 면역력이 약화되어 기타 다른 질병에 함께 감염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에이즈가 많은 국가들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아시아에서 중국은 에이즈 발병율이 독보적 1위이다. 125만명의 에이즈 감염 중국인들이 존재하지만 이 수치는 주요 몇몇 도시에서 나타난 수치로 지방에서의 수치를 합하면 300만명에서 2천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홍콩 조사에서는 3억명으로 나오고 있다. 미국 국무부 조사에 따르면 중국 여성 매춘부들의 숫자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이들은 아프리카 유럽등지에 퍼져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 남성들의 에이즈 발병률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에이즈 발병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90년대에 중국 마을을 대상으로 수혈로 생계 유지를 하는 것을 장려한 캠페인 때문에 에이즈 비율이 늘어났다는 지적도 존재한다.\n\n또한 베이징 Zhou bao 신문에 의하면 중국인 여성 연예인이 기업 스폰서 남성을 에이즈 전염을 이유로 고소한 일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사실상 성매매 합법 국가나 마찬가지인 일본과 싱가폴에서도 에이즈 발병률은 높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미국에서, 유럽에서 성매매 합법 국가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그리고 북유럽에선 에스토니아, 아이슬란드에서 에이즈 인구가 늘고 있으며 남미에서는 매춘 합법 국가인 멕시코,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에서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 등에서 에이즈율이 증가하고 있다." }
{ "from": "user", "value": "심장이란 무엇인가?" }
{ "from": "gpt", "value": "**심장** 또는 **염통**은 대부분의 동물에서 순환계의 혈관을 통해 혈액을 순환시키는 근육 기관이다.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심장은 관상 동맥이라는 두 개의 작은 동맥들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내막, 중막, 외막으로 이루어져 있다.\n\n인간과 다른 포유류, 조류에서 심장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이는 좌심방과 우심방, 그리고 좌심실과 우심실이다.\n\n심장은 굴심방결절의 심박조율기 세포에 의해 형성되는 리듬에 맞춰 혈액을 펌프질한다. 심박조율기 세포는 심장이 수축하게 만드는 전류를 만들며, 전류는 방실결절을 통과하며 심장 전기 전도계를 따라 움직인다. 사람에서 산소가 부족한 혈액은 위대정맥과 아래대정맥을 통해 우심방으로 들어가 우심실로 이동한다. 이후 폐를 거치며 폐순환으로 들어가 이산화탄소는 내보내고 산소를 얻는다. 산소가 풍부한 혈액은 좌심방으로 돌아오고, 좌심실에서 대동맥을 통해 체순환으로 들어간다. 체순환은 동맥, 세동맥, 모세혈관, 세정맥, 정맥을 거친다. 휴식 중 심박수는 분당 72회 정도이다. 운동은 일시적으로 심박수를 상승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휴식기의 심박수를 감소시켜 심장 건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n\n심혈관계질환은 2008년 전 세계 사망자의 30%를 차지한,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이었다." }
{ "from": "user", "value": "심장 전기 전도계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심장 전기 전도계는 특수화된 심근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심근층에 존재한다. 심장 전기 전도계는 섬유성의 심장골격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기 전도계의 신호는 심전도로 관찰할 수 있다. 전기 전도계의 기능 이상은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심장 리듬을 만들어 부정맥의 원인이 될 수 있다.\n\n심근은 신경 세포나 골격근과 비슷한 점도 일부 있고 중요한 특수 기능도 가진다. 신경 세포처럼 심근세포는 휴지기에 음의 막 전위를 가진다. 역칫값보다 큰 자극이 주어지면 전압 개폐 이온 통로를 열리도록 유도해 세포 안으로 양이온이 들어온다. 양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어오면 활동전위의 탈분극을 일으킨다. 골격근에서처럼 탈분극은 전압 개폐 칼슘 통로가 열려 가로세관에서 Ca" }
{ "from": "user", "value": "파두츠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
{ "from": "gpt", "value": "**파두츠**는 리히텐슈타인의 수도로 인구는 2005년 기준으로 5019명이다. 리히텐슈타인 공작가는 본래 오스트리아에 거소가 있었는데, 1938년부터 이곳에 거소를 두었다.\n\n스위스 국경 부근의 라인강 동쪽 비탈면에 위치하며 16세기에 건축된 군주 요제프 2세의 고성이 시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파두츠는 행정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소를 방목하고 곡물이나 포도가 재배되는 농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섬유·식품·정밀 기계 등의 경공업도 활발하며, 아름다운 환경에 힘입어 관광지로서도 알려져 있다. 시 중앙에 있는 우체국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아름다운 우표를 사려고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 }
null
null
{ "from": "user", "value":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뭐야?" }
{ "from": "gpt", "value": "**룩셈부르크 대공국**, 약칭 **룩셈부르크**는 서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며 대공이 통치하는 대공국이다.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세계 최대의 철강 업체 아르셀로미탈의 본사가 룩셈부르크에 있다.\n\n유럽 연합, 경제협력개발기구, 유엔, 북대서양 조약 기구, 베네룩스 경제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며, 수도 룩셈부르크에는 유럽 연합의 여러 기관이 위치하고 있다. 2013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2014년에 임기를 마쳤다." }
{ "from": "user", "value": "언어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헌법상의 명시적 조항은 없고, 룩셈부르크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사실상의 공용어이다.\n\n입법 활동은 프랑스어가 독점하고, 행정 및 사법분야는 3개 언어를 사용한다. 전 국민의 97%가 익숙한 프랑스어이기에, 프랑스어사용국기구의 정회원국이다. 영어도 관광 장소에서 사용한다." }
{ "from": "user", "value": "장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의 생애에 대해 설명해 줘." }
{ "from": "gpt", "value":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의 왕립 고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n그리고 58살에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
null
null